마태복음 6:31-33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그런 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개역개정)

31 “Do not be anxious then, saying, ‘What shall we eat?’ or ‘What shall we drink?’ or ‘With what shall we clothe ourselves?’ 32 For all these things the Gentiles eagerly seek; for your heavenly Father knows that you need all these things. 33 But seek first the kingdom of God and His righteousness; and all these things shall be added to you.” (New American Standard Bible)

존스(Jones)라는 사람이 죽어서 천국을 가게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천국의 여기저기를 안내해 주면서 한 거대한 창고(warehouse)를 보여주었습니다. 그 창고 안에는 수많은 상자들이 있었는데, 상자마다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존스는 자기 이름이 쓰여 있는 상자가 있는지 찾아보았습니다. 다행하기도 자기 이름이 적혀 있는 상자를 발견했습니다. 그 상자를 열어보는 순간, 그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 번도 구해보지 않았던 수많은 복들이 가득 차 있는 것들 보게 되었습니다. 그 복들은 자기가 하나님께 구하기만 했더라면 모두 받을 수 있는 복들이었는데, 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상자 속에 보관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브루스 윌킨슨(Bruce Wilkinson)이라는 사람이 쓴 ‘야베스의 기도(The Prayer of Jabez, 2,000)’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 책에 ‘Breaking Through to the Blessed Life(축복받은 삶으로 나가기)’라는 부제(副題)가 붙어 있습니다. 이 책은 출판된 지 3개월만에 410만부가 팔릴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USA Today, New York Times 등에서 베스트셀러 1위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브루스 윌킨슨은 Dallas Theological Seminary와 Western Conservative Baptist Seminary를 졸업했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한 우리는 당연히 하나님께 축복을 구할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야베스의 기도’는 역대상 4:10에 나오는 ‘야베스’라는 사람의 짧은 기도입니다. “하나님 내게 복에 복을 더하시고 지경에 지경을 넓히시사 모든 환난 걱정 근심 염려에서 벗어나 내가 하는 모든 일을 주의 손으로 도우시사 구하는 것마다 응답 받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 이 야베스의 기도를 들어주셨다고 합니다. 조금 더 부연 설명을 하자면, ‘야베스의 기도’ 앞에 유다의 아들들의 이름이 나오고 그 아들들의 족보가 나옵니다. 그런데 그 족보가 엉망입니다. 아버지 이름이 나오고 아들들 이름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뒤죽박죽입니다. 그러다가 뜬금없이 ‘야베스’라는 사람이 등장하는데, 그 부모의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야베스’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신학자들은 역대상 4장에 나오는 유다의 아들들의 족보는 이방인으로서 유다 지파에 들어온 사람들의 족보가 틀림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야베스’는 이방인으로 유다 지파에 편입된 사람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문제는 ‘야베스’의 기도의 내용입니다. 기도가 짧기 때문에 내용이 복잡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를 축복하셔서 내가 사는 땅을 넓혀 주시고, 모든 환난이나 걱정 근심, 염려에 벗어나게 해 주시고 제가 구하는 것마다 응답 받게 해 주십시오.” 이것이 전부입니다. 우리가 이런 기도를 해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윌킨슨은 이런 기도를 해도 된다고 합니다. 윌킨슨은 독자들에게 더 많은 꿈을 꾸라고 합니다. 심지어 사업을 확장하는 일에 주저하지 말라고 합니다. 만일 야베스가 월 스트리트에서 일을 했더라면 그는 아마도 “하나님 제가 투자한 주식의 가치를 올려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지경을 넓혀 달라”는 야베스의 기도를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고 해석하면서 이 말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향력’을 의미한다고 해석합니다. 문제는 윌킨슨이 뭐라고 하든 상관없이 독자들은 ‘지경을 넓혀 달라’는 야베스의 기도를 물질적인 축복으로 받아들인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더 많은 부동산을 소유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을 사업의 확장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이 ‘야베스의 기도’가 사람들의 ‘욕망’과 딱 맞아떨어진 것입니다. 

‘야베스의 기도’가 노래로 만들어지고, 액자로 만들어져 벽에 걸렸습니다. ‘야베스의 기도’가 워십 댄스로 만들어지고, 영화로도 나왔습니다. 심지어 이 ‘야베스의 기도’를 아침 저녁으로 외우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입니다. 실제로, 윌킨슨은 독자들에게 처음 한 달 동안 ‘야베스의 기도’를 반복하도록 권장하면서 이것을 평생 서약으로 삼으라고 권면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마태복음 6:31-33, 본문 말씀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은 어떻습니까? ‘야베스의 기도’와는 아주 다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필요한 것들을 구하지 말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NASB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Seek first the kingdom of God and His righteousness. And all these things shall be added for you(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들이 너희에게 주어질 것이다).”

이 예수님의 말씀 속에 오늘 생각해야 할 중요한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이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들의 정체성(identity)을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궁극적인 관심(the ultimate concern)’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면서 다른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정체성이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필요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이 그렇습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에는 마실 물이 많이 부족했습니다. 한 동네에 공동으로 사용하는 우물이 하나 있을까 말까 할 정도였습니다. 우물을 서로 차지하려고 옆 마을과 전쟁을 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이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닙니다. 제자들도 먹을 것이 필요하고, 입을 옷이 필요하고, 마실 물이 필요합니다. 

삶에 필요한 것들이 공급되지 않는 환경 속에서 자연히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들이 관심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뜻밖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 것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gentiles)’이 구하는 것이고,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제각기 자기들의 방식대로 성경을 읽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면, 삶에 필요한 것들이 그냥 주어지는 것으로 이 말씀을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크리스천들이 세상에서 직업을 가져야 합니까? 그렇다면 왜 크리스천들이 세상에 나가 일을 해야 합니까? 그냥 하루 종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이 글을 한번 보세요. “저도 승리의 간증을 하고 싶어요. 귀하의 책을 11월에 구입한 이후 지금 네 번째 읽고 있습니다. 나는 야베스의 기도를 부지런히 했고, 온 종일 그 기도만 한 적도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내게 복 주시기를 원하신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나는 여전히 실직 상태입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축복의 흐름을 차단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정말로 알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내게 임하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정말 부탁드립니다.” 윌킨슨의 책을 읽고 어느 독자가 윌킨슨에게 질문한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은 “나도 그런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제이시 페니(JC Penney, 1875-1971)라는 사람을 아시지요? 이 사람의 원래 이름은 James Cash Penney였습니다. 이 사람은 가난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젊어서 정육점을 운영하다가 호텔 주방장들에게 뇌물을 주지 않아 가게 문을 닫게 된 것입니다. 호텔에 고기를 납품하기 위해서 뇌물을 주는 것이 관례였던 때였습니다. 가까스로 사업 실패의 아픔에서 깨어난 페니는 조그만 잡화점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가게 앞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성경 말씀을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크게 써 붙였습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비웃었습니다. 하지만, 이 가게를 와 본 사람들은 페니의 친절함과 정직함에 감동해서 계속 가게를 이용했고, 가게가 잘 되었습니다. 이 가게가 미국 전국에 1,600여개 점포를 가진 ‘JC Penney’ 백화점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사람들은 어디서나 환영을 받습니다. 세상은 그런 사람을 찾고, 그런 사람들에게 감동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삶의 방식에서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의 이익과 필요를 먼저 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대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합니다. 나의 생각과 뜻을 세상에 펼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세상에 펼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켜 나갑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제자들의 삶의 방식입니다.

둘째로,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는 무엇이고 ‘하나님의 의(His righteousness)’는 무엇입니까? 그것이 무엇이길래 다른 어떤 것보다 먼저 구해야 합니까? ‘구한다’라는 말은 그리스어 ‘ζητέω(zéteó)’라는 말인데, 대부분의 영어 성경들은 이 말을 ‘seek’라는 말로 번역했습니다. 열심히 찾는다는 뜻입니다. 진주 장사가 이 마을 저 마을을 다니면서 값진 진주를 찾습니다. 그러다가 값진 진주를 찾으면 자기 재산을 다 팔아 그 진주를 삽니다(마태복음 13:45-46). 여기에 사용된 단어가 ‘ζητέω(zéteó)’입니다. 영어로 ‘seek’입니다. 단순히 찾는다는 뜻이 아니라 ‘to search out by any method(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찾아내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한다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께서 옳게 여기시는 일들을 최고의 목적으로 삼고, 그것들을 열심히, 끝까지, 모든 힘을 기울여서, 비록 불가능하게 보일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추구하라(aim at or strive after)’는 말입니다. 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그렇게 열심히 찾고 구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주권을 세상에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왜 ‘하나님의 의’를 그렇게 열심히 찾고 구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들을 실천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에게 다른 어떤 일보다 이 일을 먼저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톰 라이트(N.T. Wright)라는 영국의 성서학자가 있습니다. 요즘 그의 책들이 독자들에게 많이 읽히고 있습니다. 그의 신학적인 경향은 보수적인 복음주의입니다. 하지만, 그의 신학은 앞뒤가 막힌 폐쇄적인 신학이 아닙니다. “No Compromise(타협은 없다)!”를 외치면서 자기들끼리만 안으로 움츠러드는 폐쇄적인 신학은 우리 앞에 놓은 새 시대를 책임질 수 없습니다. 타협을 해도 괜찮다는 말이 아닙니다. 적어도 이 시대의 변화와 이슈들에 대하여 책임 있게 응답(應答)하는 열린 신학이 아니면 이 시대를 책임질 수 없습니다. 톰 라이트의 신학은 보수적인 신학이긴 하지만 그의 신학은 열린 신학입니다. 그가 쓴 책 중에 ‘Paul and the faithfulness of God(바울과 하나님의 신실하심)' (한국어로는 “톰 라이트, 칭의를 말하다”로 번역됨)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오늘날 크리스천의 문제는 성경을 구속사적으로만 보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하나님 나라가 없다. 그래서 자신이 구원받은 것을 반복적으로 외칠 뿐이다. 크리스천들은 자신의 구원에만 머물러 있지 말아야 한다. 이제는 자신의 삶에 임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세상에서 이루어야 할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말해야 한다. 당신에게는 하나님 나라가 있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제한시키지 말아야 한다. 구원을 주신 ‘목적’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것이 바로 선교적 삶이다.”

톰 라이트의 말이 맞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우리가 구원받은 사실에만 초점을 맞췄지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말하는 사람도 없었고, 듣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주권이 성취되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옳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옳게 여기시는 것을 찾아서 나의 삶의 현장에서 실천함으로써 하나님의 주권을 성취해야 합니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이, 그리고 우리 교회가 가지고 있는 시대적인 사명입니다.

셋째로, 우리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가지고 대화하고, 각자가 발견한 것을 서로 공유(共有)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 우리의 화두(話頭)가 되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어떻게 구하고 있는지,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가지고 밤샘 토론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시대적인 사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 시대의 크리스천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왜 ‘야베스의 기도’에 사람들은 열광할까요? 왜 윌킨슨은 ‘야베스의 기도’를 자신의 욕망을 성취할 도구로 삼고 사람들의 성공에 대한 야망에 불을 붙였을까요? 왜 윌킨슨과 그의 책을 가지고 설교하는 목사들은 ‘야베스의 기도’를 무리하게 해석해서 성숙한 기도로 포장하고 있을까요? ‘야베스의 기도’는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소원 성취를 위한 기도입니다. ‘야베스의 기도’에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내용이 없습니다. 우리가 ‘야베스의 기도’를 날마다 외울 필요가 없고, ‘야베스의 기도’를 평생 서약으로 삼을 이유가 없습니다.

‘야베스의 기도’는 매우 서툴고, 투박하고, 성숙하지 못한 기도입니다. 신학자들은 ‘야베스’가 ‘겐 족속(the Kenites)’일 가능성이 많다고 합니다. ‘겐 족속’은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 족속인데 ‘미디안’에 속한 작은 부족입니다.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겐 족속’이었습니다(사사기 1:16). 사사 시대에 겐 족속은 유다 남방에 살고 있었습니다. ‘야베스’는 어쩌다가 ‘유다 지파’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밝혀진 그의 족보도 없습니다. 그의 배경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올바른 기도를 하기 위해서는 기도의 대상인 하나님을 아는 올바른 지식이 필수적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질문합니다. “그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시지 않았습니까? 그의 기도가 이기적이고 잘못된 기도였다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리가 있겠습니까?”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과 긍휼하심을 제한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상한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주십니다. 그들의 기도가 올바르기 때문이 아니라 마음이 상한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나의 성공을 위해서 기도했고, 나의 평안함을 위해 기도했고, 나의 건강을 위해 기도했고, 경제적인 문제를 놓고 기도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의 기도의 수준은 ‘야베스의 기도’의 수준을 넘지 못했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고 ‘이방인의 기도’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성숙한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기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열심히 ‘하나님의 의’를 실천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에게, 또 우리 교회에게 주어진 시대적인 사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