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0:7-18

7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진리를 말한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 8 나보다 앞에 온 사람들은 다 도둑이며, 강도들이다. 양들은 그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 9 나는 문이다. 나를 통해 들어가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 사람은 들어가기도 하고 나가기도 하며, 또 좋은 목초를 발견하기도 할 것이다.10 도둑은 훔치고, 죽이고, 파괴하기 위한 목적으로 온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더욱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해 왔다.11 “나는 선한 목자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12 품삯을 받고 양을 돌보는 사람은 사실 목자가 아니며, 양도 자기 양이 아니다. 그 사람은 늑대가 오는 것을 보면, 양만 남겨 두고 멀리 도망가 버린다. 그러면 늑대는 양을 공격하여 양들을 흩트린다. 13 그 사람은 단지 품삯을 받고 양을 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양을 돌보지 않는다.14 “나는 선한 목자다. 나도 내 양을 알고, 내 양도 나를 알아본다.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듯이 나도 아버지를 안다. 그리고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 16 내게는 이 우리 안에 있지 않은 다른 양들도 있다. 나는 그 양들도 인도해야 한다. 그 양들도 내 음성을 들을 것이다. 그래서 한 목자 아래서 한 무리가 될 것이다. 17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나의 목숨을 스스로 버리기 때문이다. 나는 목숨을 다시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 18 아무도 내게서 목숨을 빼앗을 사람이 없고, 다만 내 스스로 생명을 내놓는 것이다. 나는 목숨을 내놓을 권세도 있고, 그것을 다시 찾을 권세도 있다. 나는 이 계명을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다.(쉬운 성경)

 

7 so he explained it to them: “I tell you the truth, I am the gate for the sheep. 8 All who came before me[a] were thieves and robbers. But the true sheep did not listen to them. 9 Yes, I am the gate. Those who come in through me will be saved.[b] They will come and go freely and will find good pastures. 10 The thief’s purpose is to steal and kill and destroy. My purpose is to give them a rich and satisfying life.

11 “I am the good shepherd. The good shepherd sacrifices his life for the sheep. 12 A hired hand will run when he sees a wolf coming. He will abandon the sheep because they don’t belong to him and he isn’t their shepherd. And so the wolf attacks them and scatters the flock. 13 The hired hand runs away because he’s working only for the money and doesn’t really care about the sheep.14 “I am the good shepherd; I know my own sheep, and they know me, 15 just as my Father knows me and I know the Father. So I sacrifice my life for the sheep. 16 I have other sheep, too, that are not in this sheepfold. I must bring them also. They will listen to my voice, and there will be one flock with one shepherd.17 “The Father loves me because I sacrifice my life so I may take it back again. 18 No one can take my life from me. I sacrifice it voluntarily. For I have the authority to lay it down when I want to and also to take it up again. For this is what my Father has commanded.”(New Living Translation)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기도를 마칠 때 똑같은 말로 기도를 마칩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인데요. 예수 이름으로 기도를 마치는 것은 유일한 중보자가 되시고,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갈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신다고 하셨습니다.(16: 24)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가 되었고, 새로운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다양성으로 인해 화합과 포용이 강조되는 시대입니다. 그래서인지 교회 안에서도 예수의 이름을 빼고 기도를 마치는 교회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지난 20211월 조 바이든 대통령 취임식때 기도를 맡은 흑인 목사는 기도를 마칠 때에 “In the strong name of our collective faith, Amen”으로 기도를 마쳤습니다. 의역하자면, 다양한 종교의 이름으로 기도를 드렸다는 의미입니다. 미국사회 안에 여러 종교와 민족이 모여 살고 있습니다. 물론 정치적 행사이며 공적인 자리였기에 다양한 종교를 지닌 사람들을 위한 배려였을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알라나 브라만 등 여러 종교의 신에게 드린 기도일 수도 있겠지요. 사실 이미 오랜전부터 북미 캐나다 연합교단에서도 종교적인 차이를 만들어 내는 분쟁을 줄이기 위해서 기도를 마칠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빼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교단안에서 보수주의 목회자들은 기독교의 정체성이 와해되는 두려움과 위험성을 이야기 하고 있지요. 진보주의적 목회자들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배려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여러분, 공공선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나요? 사전적 의미로는 개인을 포함하는 사회 전체를 위한 선을 의미합니다. 공공선을 이루기 위한 새하늘과 새땅의 회복은 예수의 구속을 흐릿하게 해놓아야 화합이 이뤄질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세계의 회복도 선교의 관점에서 유일한 중보자를 드러내지 않아야 종교간의 화합이 이뤄진다는 것이죠. 유일한 중보자는 내적으로 인식만하고 겉으로는 고백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이름이 사라져 가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에스겔서 34장은 양과 목자에 대한 말씀입니다. 1112절을 보면 곧 내가 내 양을 찾고 찾되 목자가 양 가운데에 있는 날에 양이 흩어졌으면 그 떼를 찾는 것 같이 내가 내 양을 찾아서 흐리고 캄캄한 날에 그 흩어진 모든 곳에서 그것들을 건져 낼지라당시 이스라엘의 백성들은 죽거나 포로로 끌려갔으며, 이스라엘의 땅은 바벨론 제국의 손에 들어갔습니다. 목자가 없으니 흩어져서 스스로의 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양들이 처한 어쩔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러나 에스겔 선지자는 이스라엘 민족이 흩어지게 된 중심에는 죄가 있음을 지적합니다. 죄로 인해 내양들이 흩어졌지만 목자는 내 양을 버리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포기하지 않는 사랑으로 찾아오시겠다는 것이죠. 대략 600년 후에 하나님은 모든 인류의 목자가 되시는 예수를 세상에 보내셔서 하나님 나라를 성취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통해서 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탐욕과 이기심으로 물들어 있지만 새로운 생명을 얻고 회개하는 사람들을 찾고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구속을 지워 버리면 그리스도 밖에 있는 영혼들은 돌아올 수가 없습니다. 죄를 법으로 제정하지 않으면 인간은 깨닫지 못합니다. 그리스도는율법을 폐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이루기 위해오신 것입니다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주님의 구속이 없으면 화합하고 수용하는 것은 답이 아니란 생각이 듭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얻는 자로 살아가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복음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인 것이지요. 예수님은 본문의 말씀을 하실 때에 에스겔 34장을 염두에 두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목자로 부르는 것에 익숙했지요. 다윗도 시편 23편에서 하나님을 목자로 고백합니다. 예수님은 자기 선언을 하시는데 나는 양들의 문이다. 그리고 나는 선한 목자이다.’라는 것입니다. 기도는 양의 문이 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머물겠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첫째로, 주님은 양의 문입니다.

 

7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진리를 말한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 8 나보다 앞에 온 사람들은 다 도둑이며, 강도들이다. 양들은 그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 9 나는 문이다. 나를 통해 들어가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 사람은 들어가기도 하고 나가기도 하며, 또 좋은 목초를 발견하기도 할 것이다.

 

양들에게는 위험이 닥치는 순간이 있습니다. 지진만 해도 양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재해입니다. 생각지 못했던 삶의 위기, 말없이 찾아오는 질병들, 인간 관계의 상처로 인한 고통 등 생명을 앗아가는 위험이 있는데, 주님은 양의 문 앞에서 지키시는 목자가 되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지키시는 양의 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은혜로 주시는 새로운 생명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이기신 생명의 근원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입니다.

 

출애굽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으로 부터 해방되는 사건을 넘어서 구속사적 의미가 있습니다. 유월절의 피가 없었으면 출애굽도 일어날수 없었습니다. 유월절은 어린양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죽음의 천사가 애굽 전역을 휩쓸고 갈때에 애굽 사람의 집과 이스라엘 백성의 집을 구분하기 위함이라면 굳이 어린양을 죽이지 않아도 문 앞에 양 한마리 묶어두면 되었겠지요. 그러나 유월절 어린양은 죽임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그 피가 문 앞에 뿌려져야 했습니다

 

마태복음 27:37, 마가복음 15:26절에 보면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 위에 '그분의 죄명을 적은 글'이 있었습니다. 그 머리 위에 유대인의 왕 예수라쓴 죄패를 붙였습니다. 죄가 없으신 분인데 양의 문이 되기 위해서 온갖 수치와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재판관인 빌라도 역시 그분이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고, 마지막 순간까지 '이 의로운 사람'이라고 증언했습니다. 양의 문이 되시는 예수 외에는 구원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영혼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으셨습니까? 기독교가 말하는 생명의 깊이를 알지도 못한 채 기독교 교리에만 문자적으로 매달리고 계시지는 않나요?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양의 문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죄인를 살릴 방법이 이것 외에는 없습니다. 세상이 설정해 놓은 기준으로 들어갈 수 있는 문도 아닙니다. 인간의 힘으로 그 문 안으로 들어가는 일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주로 믿어 죄와 죽음을 부터 놓여지는 경험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어린양 대신 주님이 대신 죽고 우리를 살리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생명에 대한 깊은 경험은 오직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지금도 내가 다 안다고 생각하게 되면 생명의 진리를 거부하는 것일지 모릅니다. 율법학자나 바리새인들이 다 안다고 생각했기에 주님의 초대를 받지 못했습니다. 스스로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주님을 거부하는 일도 없습니다. 양의 문으로 들어오는 것은 목자가 되시는 예수님에게 우리의 전체 운명을 맡긴다는 의미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양의 문으로 가까이 오지 못하고, 목자에게 운명을 맡기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실존이 양이라는 사실을 외면하기 때문입니다온순하거나 의존적으로 보이는 게 싫은 것입니다. 분명한 주관을 세우며 자기의 뜻대로 살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서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100세에 얻는 아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선물입니다. 그런데 모리야 산에 번제물로 바치라는 말씀은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대를 이를 독자 였는데 아들을 바치라고 요구는 하나님이 주신 언약을 스스로 파기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시험이었다고 기록합니다. 네 자손이 밤하늘에 별들처럼 번성할 것이라 약속에 대한 테스트였습니다. 그럼에도 시험조차 부당한 요구이고, 부조리한 하나님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모리야 산에 올라가는 아브라함의 마음을 직접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헤아리기도 어렵습니다. 자신의 아들을 내놓으라는 말에 순종할 사람이 지구상에 얼마나 있을까요? 그것도 100세에 귀하게 얻는 아들입니다. 아브라함은 산을 오르는 동안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찌 내게 이럴 수 있을까? 너무 가혹한 처사가 아닌가?’ 우리도 인생을 살다 보면 닥쳐온 현실을 이해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이 제단에서 드린 것은 자신의 뜻과 고뇌를 태우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순종은 번제단 앞에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태우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삭을 드리려는 아브라함을 2번이나 부르시며 더 친밀한 경험을 하게 해 주십니다. 그렇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다루심을 경험하며 믿음안에 살아가는 비결을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의 다루심은 인간의 본성이 제단에서 태워지는 것입니다. 현대 기독교인들이 기도를 등한히 여기게 된 이유 중의 하나를 꼽자면 하나님에 대한 경험부족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을 묵상하는 일에 쉽게 생각하고 세상을 살아가며 돈과 권력에 지배를 받다 보니까, 하나님의 경험은 부족해지고, 기도할 힘은 잃어버리는 것이지요. 오늘날 전세계에 인구 숫자가 79억명이라고 추정을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통치 안에 있는 양들은 얼마나 될까요? 코카콜라를 전세계적인 브랜드로 키운 로버트 우드러프(Robert Woodruf)회장은 유명한 말들을 남겼는데요. “나의 꿈은 내 세대에 전 세계 모든 사람에게 코카콜라를 한 잔이라도 맛보게 하는 것이다.” 또한 그는 훗날 사업 성공의 비결을 물어보는 기자에게 “내 혈관 속에는 피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코카콜라가 흐른다.”고 대답했지요. 우드러브가 얼마나 자신의 일에 열정과 마음을 쏟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죄로 오염되어 있어서 그대로 두면 죄를 향한 방향으로 이끌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피속에 흐르게 하는 일은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성장 시키시는 양분을 얻는 것입니다.

 

신생아가 처음에는 엄마와의 관계가 형성되어 있지 않아서 경험적으로 엄마를 알지 못합니다. 엄마의 음성도 익숙치 않습니다. 그런데 엄마의 품에서 모유를 먹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엄마가 부르는 소리와 다른 사람들이 부르는 소리를 구분하게 되지요. 아이가 엄마의 소리에 반응하게 되는 것은 엄마의 음성을 경험적으로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매일 엄마의 모유를 먹으며 아기는 엄마를 더 깊이 알아가는 것입니다.

하루 종일 말씀을 읽고 성전에 있었다고 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전제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를 마쳤다 해서 예수 안에 살고 있다고 생각해서도 안됩니다. 주님이 먼저 십자가에서 오래 참으사 믿는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본이 되어 주셨다는 것을 마음 깊이 담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죄를 저지를수 있고, 문밖에 서 있다가 어느날 흐리고 캄캄한 날을 맞이 할수 있습니다. 기도의 마음에 무엇을 담느냐는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의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주님의 시선이 어디에 머물고 있는지? 양의 문이 되시는 주안에 머무르는 교우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주님은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렸습니다.

 

“14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 16 내게는 이 우리 안에 있지 않은 다른 양들도 있다. 나는 그 양들도 인도해야 한다. 그 양들도 내 음성을 들을 것이다. 그래서 한 목자 아래서 한 무리가 될 것이다. 17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나의 목숨을 스스로 버리기 때문이다. 나는 목숨을 다시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 18 아무도 내게서 목숨을 빼앗을 사람이 없고, 다만 내 스스로 생명을 내놓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 ‘내놓는다’는 단어가 11, 15, 17, 18절에 반복해서 나옵니다. 선한목자는 목숨을 내어 놓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선한 목자인지 삯군인지를 분간할 수 있는 길은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가 아니면 달아나는가에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죽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 목숨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솔직하게 자신에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누군가를 위해 나의 목숨을 내어 놓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고백은 할수 있으나 누군가를 위해 실제로 목숨까지 내놓은 일은 쉬운일이 아닙니다.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인간은 누구나 삯군이 될수 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믿음생활 오래 하신분들이 지식은 커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리에서 누군가를 판단하고 정죄하고 싶은 유혹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삯군이라는 것은 우리 모두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선한 목자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도 그 길을 피하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스스로 선한 목자의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선한목자가 되어야 양들이 생명을 풍성하게 얻을수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내가 널 위해 죽었어라고 하시는 주의 음성이 들려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가족을 잃고 형제를 잃고 아파하는 이들도 선한목자를 만나면 변화가 됩니다. 가난한 자도 병든 자도 이 주님을 만나면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양들이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죄인임을 깨닫고 선한목자가 되시는 주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세상속에서 목숨까지 내려놓지 못해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은 것에서부터 섬기고 희생하며 청지기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문제는 서둘러 죄를 회개하고 안도의 숨을 쉬는 것입니다. 목자를 따르는 일은 서두르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용서 받는 것입니다. 은혜 받은 사람은 선한 목자가 삶을 지키시며 인도하시며 하나님의 존재를 알리시기 위해 삶속에서 믿음의 기적을 베풀어 주십니다.

 

셋째로, 예수의 이름안에 풍성한 생명이 있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10:10) ‘풍생초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풍성한 생명으로의 초대라는 말을 줄여보았습니다. 주님은 겸손한 마음 위에 풍성한 생명을 부어주십니다. 1978년 시작된 교회의 역사 앞에서 우리 모두가 서 있습니다. 우리는 다시 배운다는 마음으로 주일을 맞이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새 옷을 매일 입어야 합니다. 풍성한 생명의 복은 현재에 누리게 되는 복입니다. 교회 공동체에서 묵묵히 오랜시간 헌신의 자리를 지켜오신 분들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을 봅니다. 기도의 자리를 지키는 성도들, 매일 삶의 자리에서 은혜를 구하는 교우들의 기도가 공동체를 따뜻하게 해줍니다. 말씀데로 살아보자고 삶을 고백하는 모임들 가운데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게 되고,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교우들과 함께 울며 위로하는 성도들을 보며 풍성한 생명이 더 깊이 느껴집니다. 아직 이런 말들이 마음에 와 닿지 않는 분들도 계실겁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기 위해서 주님이 필요해라고 매일 고백해 보십시요. 지체들을 볼때에는 교회야 사랑해라고 고백해 보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 풍성한 생명은 목자와 양의 바른 관계 안으로 초대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잘 알았습니다. 하나님도 아들 예수를 잘 알았습니다. 양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존웨슬리의 그리스도의 완전이라는 설교를 보면 완전이라는 용어는 인간의 무지, 실수, 연약함으로 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란 마음과 뜻과 생명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앞에 한사람이 완전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인간의 능력, 경험, 지식만으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매일 그리스도와 동행하며 완전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전세계 모든 사람이 호흡하기에 충분한 영입니다. 성령으로 부터 흐르는 생기는 계속적으로 불어옵니다. 주님안에서 우리는 그 호흡을 온몸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누구도 예수를 주라 고백할 수는 없습니다. 삶의 주권을 성령님께 드려보고 싶지 않으신가요? 성령님께서 우리 교회, 우리 가정과 삶의 자리 가운데 역사하시도록 온전히 드려 보시지 않겠습니까? 성령님께 삶을 내어드리면 식었던 사랑도 회복이 되고, 형식과 틀에 매여 있던 마음에 알지 못했던 숨겨진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더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삶이 불확실하고 미래가 불투명해서 기도 할 수 밖에 없는 환경이라면 복된 일임을 기억 하십시요. 아브라함도 모리야 산을 오르며 고민과 고통이 가득했습니다. 번제단 앞에 내려 놓을 때 비로소 풍성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생명의 깊은 차원으로 들어가십시요. 무엇보다 주님의 마음이 향하고 있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슬퍼하는 이들에게 마음을 두시기 바랍니다. 당신의 사랑을 통해 잃어버린 양떼들이 선한 목자되시는 주의 문으로 들어오게 될 것입니다. 한주도 무너진 삶의 자리에서 고통받는 이들에게 주님의 손과 발이 되시는 교우들이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