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1서 2:7-17

7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8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췸이니라9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10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11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 12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13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 14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쉬운성경)

7 Dear friends, I am not writing a new commandment for you; rather it is an old one you have had from the very beginning. This old commandment—to love one another—is the same message you heard before. 8 Yet it is also new. Jesus lived the truth of this commandment, and you also are living it. For the darkness is disappearing, and the true light is already shining. 9 If anyone claims, “I am living in the light,” but hates a fellow believer,[a] that person is still living in darkness. 10 Anyone who loves a fellow believer[b] is living in the light and does not cause others to stumble. 11 But anyone who hates a fellow believer is still living and walking in darkness. Such a person does not know the way to go, having been blinded by the darkness.

 

12 I am writing to you who are God’s children because your sins have been forgiven through Jesus.
13 I am writing to you who are mature in the faith because you know Christ, who existed from the beginning.
I am writing to you who are young in the faith because you have won your battle with the evil one. 14 I have written to you who are God’s children because you know the Father. I have written to you who are mature in the faith because you know Christ, who existed from the beginning. I have written to you who are young in the faith because you are strong. God’s word lives in your hearts, and you have won your battle with the evil one.15 Do not love this world nor the things it offers you, for when you love the world, you do not have the love of the Father in you. 16 For the world offers only a craving for physical pleasure, a craving for everything we see, and pride in our achievements and possessions. These are not from the Father, but are from this world. 17 And this world is fading away, along with everything that people crave. But anyone who does what pleases God will live forever.(New Living Translation)

오늘은 어버이 주일과 졸업 예배로 드리는 날입니다. 졸업은 또 다른 시작을 의미합니다. 배움이라는 목표를 위해 달려온 시간들을 인정 받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이 시간 졸업생들에게 전해지는 말씀이 하나님 안에서 인생의 목표를 바로 세우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지난주에 만나게 된 어떤 분의 눈물이 한주간 잊혀 지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딸을 위해 기도 부탁을 하시는 친정 엄마의 눈물이었습니다. 그 눈물은 진심이었고 사랑이었습니다. 누군가를 위해 노력없이 흘려지는 눈물이 있다면 그것은 부모와 자녀의 관계속에 담긴 눈물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우리교회는 보스턴을 찾는 이민자들과 청년들에게 부모의 품을 느끼게 해주는 교회, 즐거워 하는 자들과 즐거워 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시시때때로 감정에 의해 변하는 사랑이 아니라 고향집 같은 든든한 품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말씀합니다. 결혼식은 두사람이 언약을 맺고 한몸이 되어 삶의 여정을 함께 걸어가겠다고 하는 출발선이지요. 이후에 결혼생활을 지속할 수 있는 것은 그 믿음이 실제적이어야 합니다. 오늘 맞이한 ‘6351일과 282이라는 숫자는 저에게 큰 의미가 있습니다. 매일 달라지는 숫자이긴 한데요. 첫번째 숫자는 아내와 결혼식 이후 지금까지 사귐을 갖고 있는 날이며, 두번째 숫자는 케임브리지교회 교우들과 사귐을 갖으며 걸어온 날짜입니다. 사랑으로 동행하는 한날 한날은 너무도 귀합니다. 아이를 키울때 아이가 뒤집기를 하고 기어다니게 되고 걸음마를 하다가 걷게 되는 성장의 모든 과정에서 생명의 소중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내 아이는 특별히 더 잘 키우고 싶어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자녀를 낳은 기쁨. 키우는 보람. 장성하여 떠나 보내는 그 허전함까지도 모든 과정이 켜켜이 쌓여서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의 토대가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랑의 토대는 하나님의 마음을 공감하는 것입니다. 친밀한 사귐속에서 마주하게 되는 다양한 감정의 무거움에 묶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더 깊은 사랑의 뿌리를 내리며 열매 맺는 것입니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 나오는 한 장면입니다. 그는 오스트리아 출신 유대인입니다. 2차 대전 당시 아우슈비츠로 끌려 갔다가 기적적으로 살아 온 인물입니다. 그는 수용소에서 부모, 아내, 두 자식 그리고 그의 친구들을 모두 잃었습니다. 그는 형언할 수 없는 고통속에서도 주어진 삶에 무엇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삶이 무엇을 기대하는 지 삶 너머의 하나님께 희망에 두었습니다.석방이 된 며칠 후의 어느 날 나는 꽃이 만발한 꽃밭을 지나 시골의 들판을 가로지르며 걷고 있었다. 수용소에서 가까운 장이 서는 읍을 향해 몇 마일을 걷고 또 걸었다. 나는 기뻐서 부르는 종달새의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땅과 드높게 보이는 푸른 하늘, 그리고 종달새가 즐겁게 부르는 노랫소리를 제외하면 자유로운 공간만이 있을 뿐이었다. 하늘을 우러러 보다가 나는 무릎을 털썩 꿇었다. 그 순간 나는 내 자신이나 이 세상에 관하여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내 마음속에 울려 나오는 한마디 뿐이었다. 저는 저의 비좁은 감방에서 주님을 불렀나이다. 그리고 주님은 자유로운 공간속에서 저에게 응답하셨나이다. 나는 그날 그 시간부터 나의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다시 인간이 될 때까지 한걸음 또 한걸음 앞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도저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극한 상황속에서 새롭게 피어나는 작은 기쁨과 자유는 세상의 전부이며 존재의 변화일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인간은 죄의 자녀인데, 십자가의 보혈로 하나님의 자녀를 삼아 주신 것은 너무도 중요한 것입니다.

 

첫째, 새삶은 사랑의 근원으로 부터 시작됩니다.

 

7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8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췸이니라

 

하나님이 주신 사랑의 새계명은 새롭게 주시는 것이 아니라 태초부터 있던 계명입니다. 레위기 1918절을 보면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고 말씀합니다. 즉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은 전혀 새로운 계명이 아니라 이미 구약의 백성들에게 주어진 계명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새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13:34) 이 뜻은 예수님이 우리의 본성을 잘 알고 계시기에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살아가다 보면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반응하는 것이 더 당연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교회에 오면 서로 사랑하라할때에 마음에 부담이 되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미움의 감정이 아예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실제로 믿음으로 살려고 하면 의심이 속삭이고, 사랑하라는 말씀을 실천하려고 하면 시험이 찾아옵니다. 사랑의 관계를 유지하려고 해도 안될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노력이 헛될때가 있고, 뜻대로 되지 않을때도 있습니다. 사랑하며 산다고 늘 꽃길만 걷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사랑의 근거는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해 주신 사랑입니다. 거듭난 자녀들의 몸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겠다고 자신의 탓으로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믿음의 길에서 자책하지 말고 뿌리를 더 깊이 내리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내가 경험한 상처를 통해서 더 많은 이들의 아픔과 슬픔을 어루만질 수 있게 됩니다. 고되고 힘든 과정을 거치며 아름다운 예술이 탄생되고 훌륭한 논문이 세상에 나오는 것입니다.

 

주님이 걸어가신 길도 외롭고 고독한 길이었습니다. 삶의 아픔과 고통속에서 십자가에서 흘러 나오는 영원한 생수를 마시는 것은 십자가 은혜 안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기반으로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이루신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하십시요. 너그러운 마음으로 서로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하더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는 긍휼의 눈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 힘도 발휘하지 못합니다. 요즘 사랑이라는 말이 얼마나 흔합니까? 그러나 믿는 우리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말이 되어야 합니다. 교육은 성과를 눈으로 볼 수 있지만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기에 그만큼 더 어려운 것입니다.

 

9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10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11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

 

요한은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갈 곳을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이 어두운 밤을 통과하는 중에도 일하십니다. 문제는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입니다. 우리의 미움이 우리의 눈을 멀게 합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이 들어 올때마다 영혼에 심각한 해를 가져다 준다고 생각하면, 미워하는 마음은 정말로 무서운 것입니다. 만일 형제를 미워하게 되는 마음이 주님을 보는 시력을 잃게 만들고, 손과 팔을 못쓰는 장애를 얻게 되는 것이라면 이는 정말 끔찍한 일입니다. 영혼이 사망을 향해 가는데도 알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고통을 이기시며 새계명을 주셨습니다. ‘새계명은 위로부터 임하는 선물입니다. 창조적인 힘이며, 영적인 힘입니다.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께 마음을 드릴 때 생각지 못하게 임하는 새힘입니다. 형제를 사랑하게 되는 구원의 표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는 죄를 고백하고 십자가를 지신 주님께 우리의 마음을 드리는 시간이지요. 예배는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해서 삶을 다시 출발하는 것입니다. 소금의 맛을 내는 성도로 살아가십시오, 그리스도의 빛이 어둔 우리의 마음을 비추실 것입니다.

 

둘째, 참된 자녀는 삶과 믿음이 분리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자녀들아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두 아이 이름으로 넣어서 읽으니 말씀의 해석이 더 깊어집니다. 여러분도 자녀들의 이름을 넣어서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요한은 자녀들아’ ‘아비들아’ ‘청년들아부르고 난 뒤에 하나님의 자녀의 정체성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입었고,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고 있으며, 악한 자를 이기었다는 것입니다. 죄를 씻겨 주시고 태초부터 계시고, 악한 자를 이기신 분이 누구십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녀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교회 된 우리의 공통분모는 한몸 되게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참된 하나님 자녀의 세가지 기준는 신학적으로는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윤리적으로는 불의를 행치 않고 빛 가운데서 의를 행하는 것이며, 사회적으로는 형제에 대한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것이지요. 이 세가지 기준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요한이 기록한 시대 만큼이나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교회는 생명체인데 사랑을 잃어버린 교회는 분쟁으로 치닫고, 낮아짐을 상실한 교회는 이생의 자랑거리들로만 넘쳐납니다.

 

우리는 예수께 속한 인생입니다. 당시 요한 시대의 교회 안에는 영지주의자들로 인해 영이 육신에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는 논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삶과 분리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믿음대로 살아갈 실력은 없지만 십자가의 길을 바라보며 하나됨의 은혜를 깨달아야 합니다. 주어진 그대로의 삶을 예수께 속하여 자연스럽게 사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마음과 성품으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특권입니다. 헌신의 자리에서 지칠 때가 있다면 헌신의 자리에 세워 주신 은혜를 바라보십시요. 우리가 서 있는 것이 은혜 아니면 그 어떤 말로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믿음은 그때 거기서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동행하시는 예수로 사는 인생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마음은 커가는데 교회로 들어오는 것은 내 것을 많이 포기하게 될까봐 염려됩니다. 은혜는 채우고 싶은데 우리 안에 사랑이 없습니다.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의 분주한 모습입니다.

 

코비드 바이러스가 유행하던 때에 한국 방역 모델로 3T 로드맵을 제시했었습니다. 검사(Test), 추적(Trace) 치료(Treat) 입니다. 시험(試驗)이란 말은 헬라어로 ‘페이라스모스’(πειρασμόϛ) Test입니다. 우리는 시험(Test)을 치러야 비로서 실력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잘 모르지만 시험을 통해 믿음의 진위가 드러나게 됩니다. 마더 테레사는 시험을 통과하면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제 영혼이 얼마나 고통스러우며 공포에 떨고 있는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을 거부하는 듯하면서도 제가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은 하느님을 열망한다는 사실입니다냉혹한 삶속에서 나의 자녀가 간교한 꾀에 빠져서 친아버지가 아닌 다른 사람의 손을 잡고 따라가는 일이 있다면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믿음의 눈을 분명히 뜨고 하나님을 갈망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추적하고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시편 23편에서 다윗은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른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심이 여러분의 삶도 함께 하십니다다윗은 인생의 모든 날들을 하나님이 추적하며 그 삶을 지켜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우리도 마음안에 이 확신과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이때 영혼의 회복이 일어납니다. 사랑하는 법을 터득하게 되고, 인생의 아픔을 내가 사랑하는 예수님도 이땅에서 겪으셔야 했던 삶의 일부분임을 깨닫게 됩니다.

 

요한은 입술로는 그리스도인이라 말하지만 하나님을 기뻐하시는 일을 거부하거나 부인하는 사람은 예수께 속한 성도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믿음생활은 현재의 삶에서 예수님께서 가신 방향을 향해 지속적으로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길을 걷다 보면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삶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생의 아름다운 그림이 완성 되어지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우리 교회 성가대의 찬양으로 은혜 받고 있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실력도 좋지만 저는 그 안에 있는 조화의 아름다움을 느낍니다. 나의 소리를 드러내는것이 아니라 나와 너그리고 우리가 함께 서로의 소리를 듣고 맞추어 주는 하모니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여정도 이러한 사랑의 하모니가 필요합니다.

 

셋째, 우리는 세상속에 있으나 세상을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2: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2: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고 하십니다. 세상의 것은 잠시뿐이며 그림자입니다. 참된 빛이 되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세상의 아름다움은 하루와 같은 것입니다. 천년이 하루 같다는 하나님의 시간표로 보면 세상의 것은 너무도 짧은 것입니다. 물질주의 가치에 비유하면 세상의 것들은 1불 정도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예수께 속한 자들은 얼마나 많이 가졌느냐가 아니라 존재하고 있음의 풍요로움과 하늘의 평안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않게 되니, 세상살이가 아무리 분주해도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셔야 합니다. 성경 66, 1,189장속에 담긴 그리스도의 사랑의 편지가 매일 우리를 초대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의 편지를 쓰고 계십니다. 주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13:1)

 

밤이나 낮이나 낙망하고 넘어질 때에도 성경의 초대로 들어가면 죽어 있던 영혼의 심장이 다시 뛰며 마음과 뜻과 생명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아이들이 세상에 태어나서 첫 언어를 배우고 아빠 엄마를 부르는 순간 모든 부모들은 행복을 누립니다. 하나님도 입술에서 사랑의 언어가 믿음으로 고백되어 지고 삶을 통해 실천하게 될 때에 기뻐하십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의 힘 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가다 보면 새힘을 주십니다. 이곳에 계신 분들 중에 예배 드리고 교회를 떠나기 싫어서 아쉽고 눈물 나시는 분이 계신가요? 언젠가 아이들이 주일학교 시간을 마치고 집으로 가려고 할 때 아이는 교회에 남아 있고 싶어 하는데 부모는 빨리 가자고 합니다. 교회에 머물고 싶다고 아이들이 울기까지 합니다. 아이들처럼 우리도 교회가 즐거워야 합니다. 아이들에게 교회가 머물 곳이 되어 줄 수 있다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서둘러 밖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조금만 멈추어 보시면서 교회의 구석 구석을 돌며 기도도 해보시고 머물러 보십시오. 주시는 은혜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어버이 주일을 맞이하여 믿음의 어른들이 계시다는 것은 공동체에 힘이며 위로입니다. 인생의 순리가 있는데, 우리도 걷다보면 만나게 되는 길입니다. 프랑스어 ‘encore’ 는 연주에서 출연자의 훌륭한 솜씨를 박수로 재연을 청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후반전입니다. 경기에서도 후반전이 더 중요합니다. 믿음의 여정을 걸으며 하나님앞에서 ‘encore’ 를 외쳐보시기 바랍니다. 서로 그렇게 격려해 주십시오. 늙는 것이 아니라 다시 하나님께 쓰임 받는 때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아이들부터 장년에 이르기까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름다운 교회를 만들어 나가는 것입니다.  

요한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세상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사랑과 구속함을 입은 세상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세상입니다. 마음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없으면 대부분의 사람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위해 살아갑니다. 인간의 육체 안에 정욕이라는 DNA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생의 자랑은 이생에서만 통하는 것일 뿐입니다. 물속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 구명조끼와 보화 중에 한가지를 선택하라고 할 때에 무엇을 선택하겠습니까? 이생의 자랑은 잠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유람선을 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구조선을 타고 가는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즐기며 유람할지 몰라도 그리스도께 속한 백성들은 한 영혼이라도 더 건져내는 일에 삶을 드리는 것입니다. 믿음 생활 하시면서 누군가가 기도하고 있다는 말을 많이 들어보셨을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하나님이 날 기억하고 계신다는 것이고 하나님이 사랑하고 계시다는것입니다. 진정으로 기도하다보면 안아주게 됩니다. 우리는 수백 가지의 소리를 가지고 있고 생각을 담고 있지만 그 안에서 이루실 하나님의 하모니를 기대해야합니다.

 

좋은 교회는 생명이 넘치고 화목한 교회입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주의 자녀들을 무균상태에 두시는 것이 아니라 이길 수 있는 면역인 진리의 믿음과 하나님의 사랑으로 보호해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을 얻은 우리는 주어진 생명의 열매로서 사랑을 행하게 됩니다

 

보스턴에 와서 공부할 수 있었던 것도 은혜입니다. 어버이 주일을 맞아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부모님들을 기억하며 기도하시고, 우리 교회에 있는 어른들을 위해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어떻게 혼자 걷겠습니까? 혼자 가면 외로운 길이지만 함께 가면 즐거운 길이 됩니다. 세상에서 누리고자 하는 마음도 하나님 안에서 다루어지면 진정한 사랑의 하모니를 통해 삶의 의미와 참된 행복을 찾게 됩니다. 이렇게 귀한 믿음의 여정을 걸을 수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차게 든든한 주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