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7:55-60

55 그러나 스데반은 성령으로 충만해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서 계신 것을 보고 56 이렇게 외쳤습니다. “보십시오.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의 오른편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57 그러자 그들은 귀를 막고 목이 찢어져라 소리를 지르며 그를 향해 일제히 달려들어58 그를 성 밖으로 끌어낸 후 돌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목격자들은 자기들의 옷을 벗어 사울이라는 청년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59 그들이 돌로 칠 때 스데반은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아 주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60 그러고 나서 스데반은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주여,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소서”라고 외쳤습니다. 이 말을 끝낸 후 그는 잠들었습니다. (우리말 성경)

 

55 But Stephen, full of the Holy Spirit, gazed steadily into heaven and saw the glory of God, and he saw Jesus standing in the place of honor at God’s right hand. 56 And he told them, “Look, I see the heavens opened and the Son of Man standing in the place of honor at God’s right hand!” 57 Then they put their hands over their ears and began shouting. They rushed at him 58 and dragged him out of the city and began to stone him. His accusers took off their coats and laid them at the feet of a young man named Saul. 59 As they stoned him, Stephen prayed, “Lord Jesus, receive my spirit.” 60 He fell to his knees, shouting, “Lord, don’t charge them with this sin!” And with that, he died. (New Living Translation)

 

 

오늘은 성령강림후 두번째 주일이며 환경선교주일입니다. 26주 동안 성령강림절기를 보내게 될텐데, 스톨의 녹색은 믿음의 성장을 표시하는 색깔입니다. 이 스톨을 보실 때 마다 믿음을 성장시키시는 성령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감싸주심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 7장은 스데반의 설교가 담긴 매우 긴 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기독교 역사에서 최초로 발생한 순교 사건이 소개되지요. 스데반의 순교는 구원사에 있어서 ‘적색순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환경선교주일을 맞이하여 지구의 온난화 현상으로 인한 수많은 북극곰들의 죽음과 발생하는 화재들, 폐수로 인해 죽어가는 바다 물고기, 환경오염으로 인한 수많은 자연재해 등은 ‘녹색순교’가 아닐까요? 우리는 녹색이 은총인 시대를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는 피조세계를 지으시고 난 뒤에, 사람을 초대해 주셨습니다. 피조세계를 잘 관리하라는 청지기의 사명을 주신 것이지요. 그러니 창조신앙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인간이 창조된 자연 안에서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며, 삶의 일터와 땅을 밟고 살아가는 현장에서 성령께서 일하고 계심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아침에 일터로 나가서 저녁에 집에 돌아오는 것은 매일 지켜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오늘날은 믿음을 지키기 위한 ‘적색순교’의 박해가 사라진 시대를 살아갑니다. 한편으로 보면 욕망을 부추기는 자본주의 사회속에서 탐욕에 물든 마음을 내려 놓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일은 매일 순교의 삶을 연습하는 것이지요.

태초에 하나님은 혼돈, 공허, 흑암이 있던 곳에 에덴동산을 창조하셨습니다. 지상의 파라다이스입니다. 에덴을 만드시고 인간을 초대했을때에는 그 안에 하나님의 마음이 담긴 것입니다. 예컨대, 여기 그림 한장이 있습니다. 후안 후아네스(Juan de Juanes, 1510-1579)가 그린 스데반 집사의 그림인데요. 그는 예술가 가문에서 태어났고 16세기 후반에 ‘스페인의 라파엘로’로 불렸을 정도로 유명한 발렌시아 화가로 성장합니다. 500백년 전 그가 그린 스데반 집사의 그림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림 안에는 그의 생각과 시대적 배경이 담겨져 있는 것이지요. 미술에 조회가 깊어 질수록 더 많이 발견될 것입니다. 신앙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대리자로 창조된 인간 안에는 ‘신적갈망’이 있고 분명히 보여져 있다고 말씀합니다. 문제는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져 가는데 있습니다. 창조세계 안에 하나님을 알 만한 것들이 있음에도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죄로 인해 창조자의 숨결을 모른다고 핑계되고 변명하는 것이지요. 죄로 인해 에덴으로부터 쫓겨난 후, 사람들은 하나님처럼 되려는 바벨탑을 쌓으며 엄청난 발전을 이뤘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신의 영역이라고 생각해 왔던 인간 생명의 신비에도 도전합니다. 유전공학의 발달은 마음만 먹으면 복제인간도 만들어 낼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문제는 문명과 과학의 발전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1장 20, 21절에서 창세로 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 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지구의 파괴는 하나님을 떠나 인간중심의 발전을 이룬 어두운 그림자라고 볼수도 있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한 사람의 신앙 안에는 성령의 일하심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스데반입니다. 스데반(Στέφανος)은 ‘면류관’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데요. 그의 짧은 삶은 우리가 무엇을 바라 보아야 하는지 분명하게 말씀해 줍니다.

첫째로, 스데반의 삶속에는 성령의 영이 가득했습니다.

55 그러나 스데반은 성령으로 충만해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서 계신 것을 보고

스데반은 사도행전 6장 5절에 집사로 선택된 일곱 사람들 중의 한명으로 처음 등장합니다. 당시에 교회들이 세워지면서 헬라파 유대 과부들이 돌봄을 받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그러자 사도들은 7명의 집사를 택하기로 결정했고, 그 선택 조건이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뽑힌 스데반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러 오신 분이라고 공회 앞에서 설교를 합니다. 스데반은 성경에 능통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설교에 언급된 인물들을 보면 아브라함으로 부터 이삭, 야곱, 그의 열두 아들들, 모세, 여호수아, 다윗과 솔로몬까지 구속사를 꿰뚫고 열거합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큰 민족으로 이루었다고 말씀합니다. 결국 그렇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않는 너희들이 죽였다고 책망합니다. 제 눈에 띄인 것은 스데반 설교의 마지막 부분입니다.너희가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7:51)

유대인들은 직면하기 싫은 죄가 드러나자 죽일듯이 달려듭니다. 감정의 노예된 것처럼 분노하며 스데반을 향해 돌을 던집니다. 그러나 그는 맞으면서도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말라고 기도합니다.

성경을 보면 스데반 집사는 예수님과 닮은 점이 참 많습니다. 요한 복음 1장 14절에 보면 ‘예수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언급하는데, 사도행전 6장 8절은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라고 소개합니다. 새벽에 대제사장들이 장로들과 서기관들을 곧 온 공회와 더불어 의논하고 예수를 결박합니다. (막 15:1) 스데반도 백성, 장로, 서기관에게 잡혔습니다(행 6:12) 대제사장들과 공회는 예수를 죽일 거짓 증거를 찾았고(마26:59) 스데반이 설교할때에도 그들은 처벌하기 위해 거짓 증인을 세웠습니다.(행 6:13) 성경은 ‘예수의 얼굴이 해같이 빛났다’라고 하면서, 스데반 집사의 얼굴도 ‘천사와 같았다’고 기록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저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않도록 기도했고’, 스데반도 이와 같은 기도를 드립니다. 스데반의 마지막 기도의 내용을 보니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이 기도는 예수의 마지막 기도와 많이 닮아 있습니다. 이 일은 사람의 능력이 아닙니다. 전적인 ‘성령의 역사’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일은 하루 아침에 형성되지 않습니다. 스데반의 삶을 보면 성령이 충만했고,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스데반의 삶속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함께 일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의 성품이 보여진다면 그건 믿음으로 인내한 시간들이 빚어 낸 결과일 것입니다.

둘째로, 스데반은 재창조된 세계를 보았습니다.

56 이렇게 외쳤습니다. “보십시오.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의 오른편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모든 자녀들은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난 순간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어머니의 사랑을 받으며 지속적인 관계 안에서 신뢰가 쌓이고 믿음이 형성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속적으로 생각하고, 말씀 안에서 관계적으로 응답하는 법을 매일 배워 나가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밖으로 나가라는 명령을 받는 아이가 태어나기 위해서는 ‘오직 순종’만 있을 뿐입니다. 밖의 세계가 두렵다고 해서 뱃속 밖으로 나가기 싫다고 버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생명을 얻으려면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것이지 보여 주십니다. 세상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모형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직 순종’을 통해서만 생명이 자라간다면 순종하는 일에 어떻게 머뭇거릴 수 있겠습니까? 스데반은 성령의 임재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 채워지고, 예수께서 함께 하는 하늘이 열리는 경험을 한 것입니다. 세상에서 경험할 수 없는 내적 친밀감을 통해 ‘재창조된 세계’을 본 것입니다.

요한 웨슬리는 ‘신생의 표적들’(The Mark of the New Birth)이란 설교에서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자녀 된 표적이 나타나는데, 첫번째 표적은 그리스도를 확신할 때 부어지는 ‘살아있는 믿음’과 두번째 표적은 ‘산 소망’입니다. 죽은 소망은 모든 악한 말과 나쁜 행실의 근원이며, ‘산 소망’을 가진 사람들은 누구나 거룩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산 소망’은 세상에서 막연히 잘 될거라는 기대가 아닙니다. 진실하게 살아간다는 ‘양심의 증거’이고, 어떤 상황에도 절망 가운데 보호하시는 소망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셋째로, 스데반은 죽었으나 그의 믿음은 지금도 말하고 있습니다.

58 그를 성 밖으로 끌어낸 후 돌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목격자들은 자기들의 옷을 벗어 사울이라는 청년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

58절에서 사울이라는 청년이 처음 등장합니다. 사울은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앞장을 섰던 청년이었습니다. 민주화를 이루기 위한 많은 이들의 숭고한 피가 새시대의 문을 열기 위한 희생이었듯 ‘적색은총’은 생명의 강이 됩니다. 만일 우리가 매일의 십자가를 지며 우리의 생각과 뜻을 내려놓고 걸어 간다면, 주의 영광이 드러날 것입니다. 스데반의 피값이 바울의 생애에 이어짐을 보게 되는데요.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은 그를 부르셨습니다. 빛을 본 후에 바울의 삶의 가치와 방향, 삶의 이유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바울에게 일어난 ‘신생의 표적’입니다. 이후 바울은 스데반과 같은 삶을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환상을 보고 마게도냐로 가서 전도를 하지요. 또한 동족 유대인들 설득하다가 핍박과 박해 속에서 고소를 당하고 결박을 당하게 됩니다. 이때 바울은 스데반의 일을 기억하지 않았을까요? 행 22:20절을 보면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의 피를 흘릴 적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줄 저희도 아나이다” 바울의 사역을 보면 성령이 충만했던 스데반의 삶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스데반에게 바울의 선구자(先驅者)가 되어 복음을 증거하게 하셨고,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었던 바울은 그 복음을 경험하고 이방인들에게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건이 있던 AD 30년경 스데반의 순교 이후에 기독교는 엄청난 박해로 믿는 자들이 유대와 사마리아와 온 세상으로 흩어지게 됩니다. 예루살렘에 있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믿다가 비참한 죽음을 당할수도 있구나 겁도 났을 것입니다. 죽음이 현실 앞에 다가오니까 결국 마음이 흔들리고 뿔뿔히 흩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흩어진 자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고 기록합니다.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8:4)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놀랍습니다. 예루살렘 성도들의 흩어짐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보면은 세계 선교로 퍼져가게 되는 도화선이 된 것입니다. 이것의 성령의 역사하심입니다. 우리가 사는 3차원의 공간을 X,Y,Z라고 했을때, Z라고 하는 부분이 없으면 우리는 그 사물을 인지할 수가 없습니다. Z라는 높이가 없다는 것은 사물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Z를 성령에 비유하고 싶습니다. 아이가 어머니를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어머니가 다가오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뿐입니다. 때때로 이해하기 힘들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도 성령의 힘은 우리가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게 해줍니다. 성령은 지금도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신앙의 깊은 세계로 초대합니다. 여러분은 이 세계와 멀어지고 계신가요? 아니면 가까이 들어가고 계신가요?

우리는 성령의 일하심을 모두 다 가늠할 수 없습니다. 제한없이 일하시는 성령님의 능력을 믿을 뿐입니다. 누가는 스데반이 이 말을 하고 ‘잠들었다’고 말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는 새 하늘 새 땅에서 다시 깨어날 테니까요. 스데반은 죽었으나 그의 믿음은 지금도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살아있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얼 얻으려고 열심히 달려가십니까? 성령의 능력으로 어두운 세상에 새벽을 깨우며 빛을 밝히는 교우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