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3:1, 6-11

1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가로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날까지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6 바울이 그 중 일부는 사두개인이요 다른 일부는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7 그 말을 한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누어지니8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 9 크게 떠들새 바리새인 편에서 몇 서기관이 일어나 다투어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니 악한 것이 없도다 혹 영이나 혹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으면 어찌 하겠느냐 하여10 큰 분쟁이 생기니 천부장은 바울이 그들에게 찢겨질까 하여 군인을 명하여 내려가 무리 가운데서 빼앗아 가지고 영내로 들어가라 하니라11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쉬운말 성경)

1Gazing intently at the high council,[a] Paul began: “Brothers, I have always lived before God with a clear conscience!” 6 Paul realized that some members of the high council were Sadducees and some were Pharisees, so he shouted, “Brothers, I am a Pharisee, as were my ancestors! And I am on trial because my hope is in the resurrection of the dead!” 7 This divided the council—the Pharisees against the Sadducees 8 for the Sadducees say there is no resurrection or angels or spirits, but the Pharisees believe in all of these.  9 So there was a great uproar. Some of the teachers of religious law who were Pharisees jumped up and began to argue forcefully. “We see nothing wrong with him,” they shouted. “Perhaps a spirit or an angel spoke to him.”  10 As the conflict grew more violent, the commander was afraid they would tear Paul apart. So he ordered his soldiers to go and rescue him by force and take him back to the fortress. 11 That night the Lord appeared to Paul and said, “Be encouraged, Paul. Just as you have been a witness to me here in Jerusalem, you must preach the Good News in Rome as well.” (New Living Translation)

 

 

오늘은 세계성찬 주일로 전 세계 모든 기독교인들이 주안에서 한 형제, 자매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성찬의 빵은 인류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님의 몸을 의미하지요. 포도주는 인류를 위하여 흘리신 예수님의 피를 의미합니다. 오늘 성찬의 식탁에 참여하는 교우들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며 무엇보다 주님의 마음에 연합이 되어지길 바랍니다. 서로가 자기의 의로움만 주장하는 세상속으로 예수께서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상 한복판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성찬식이며 세례식, 주일예배와 성경공부, 기도회 등 고유한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며 우리는 어떤 열매들을 맺어가야 할까요? 믿음은 우리에게 실제적인 변화를 끊임없이 요구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이 로마 시민권자임을 알고 나서 천부장은 다음날 결박을 풀고, 산헤드린 공회로 바울을 데리고 갑니다. 바울은 공회원들 앞에 섰습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유대인들의 최고 의결기관으로 의장인 대제사장을 중심으로 구성원은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 장로 등 의장을 포함하여 총 71명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신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마음에 담을 준비가 안된 사람들입니다.

 

1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가로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날까지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갈릴레이 갈릴레오(Galileo Galilei, 1564~ 1642)는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이 돌고 있다는 천동설이 아니라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돌고 있다는 지동설을 주장했다가 이 일로 당시 종교재판에 회부되었다고 합니다. 갈릴레이는 고문과 화형의 위협 속에서 자신의 주장을 철회 했지만, 재판장을 나오면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속삭였다고 하는 이야기가 알려져 있습니다. 바울은 공회원들 앞에서 창조와 구속의 거대한 이야기 속에서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을 깨닫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이 믿음의 발견은 피조물인 인간 외에 다른 피조물에게서는 경험되지 않습니다. 다른 피조물들은 세상 너머의 창조자가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있어서 양심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구속의 사건을 통해서 믿음이 선물로 주어집니다. 발견하려고 말씀을 해석하고 묵상하다 보면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믿음이 선물처럼 주어집니다.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시니까 믿어지게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은 날마다 우리의 양심을 깨웁니다. 그래서 구원 받은 성도는 언제 어디서나 양심을 따라 살아가게 됩니다. 사람이 보든 안보든, 상황이 좋은 안좋든 하나님을 내 옆에 모시고 정직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양심’이라는 헬라어는 ‘쉬네이데시스’(συνεδησις)입니다. ‘쉰’(συν)이라는 함께라는 뜻과 ‘알다’라는 ‘에이데시스’(εδησις)가 합쳐진 합성어입니다.

 

바울의 고백속에는 그가 얼마나 하나님과 친밀하고도 개인적인 인격적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소망을 경험하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 율법에 매여 있지 않고 자신과 함께 살아 계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는 공회원들 앞에 죄수의 옷을 입고 서 있었지만 양심에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고 담대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세례를 받고 거룩한 직분을 받았어도 양심이 죽어 있다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산헤드린 공회원들도 사실 모두가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외형만 그럴듯하게 갖추었다고 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기에 긍휼의 눈으로 회원들을 바라 보았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스스로 가난하게 되심으로 인류를 부요케 하셨습니다. 그의 살은 십자가에서 찢겼고, 십자가에서 모든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성찬은 이것을 기억하며 동참하는 예식입니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인들은 매주마다 성만찬에 참여했습니다. 주님과의 연합은 두려운 현실속에서 그들의 믿음을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유대교의 말할 수 없는 핍박과 공격에서도 복음은 예루살렘 반경을 넘어 유대와 사마리아로 확장되는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믿음은 지속적으로 의지하는 과정입니다. 지속적으로 믿을때 우리의 영혼이 살아납니다.

 

우리는 낯선 것을 어려워 하고 두려워합니다. 내가 경험한 것만 안전하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때로는 조용한 기도, 부르짖는 기도, 그저 눈만 감고 있어도 기도하는 자리에 있는 것 만으로도 하나님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기도를 다 듣고 계십니다. 우리의 서로 다른 방식, 서로 다양한 모습을 인정할 때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더 깊은 영성의 세계를 알아가게 됩니다. 어릴 적 모태에서 부터 신앙을 배우고 교회에서 자란 사람들은 모태 신앙인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자란 사람들 중에 뜨겁지 않아서 못해 신앙인이라고 하는 말도 있었습니다. 뜨겁지 않다고 해서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슬비에 옷 젖듯 우리의 믿음을 자라게도 하시고, 뜨거운 경험을 통해 회심 시키기도 하십니다. 혹은 말씀을 연구하다가 만나기도 하고, 지체들의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크신 하나님의 일하심은 우리가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합니다. 개인의 성향과 기질에 따라서 만나는 방법이 다양한 것입니다.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는 분이 있다면 모든 만남 중에 놓쳐서는 안될 만남이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계획하심 안에서 하나님은 믿지 않는 그 자리, 뜨겁지 않은 그 자리를 자라게 하시고 만나게 하실 것입니다.

 

산헤드린은 크게는 바리새파와 사두개파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연합이 얼마나 허약한지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대목이 67절입니다.

 

“6 바울이 그 중 일부는 사두개인이요 다른 일부는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7 그 말을 한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누어지니

 

바울이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소망을 전하니까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사이에 큰 논쟁이 벌어집니다. 바리새인은 분리주의자인데 반해 종교적인 사람들이었고, 사두개인은 세속적인 사람들로 부활도, 천사도, 영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죽은 자의 소망을 전하는 바울의 말로 인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눠집니다. 이는 서로가 신학적 논쟁에 휩싸이게 된 것입니다. 서로가 옳다고 주장하는 일로 인해 매우 심각하게 분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새부대에 담으려면 우리는 변화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을 닮아가는 변화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향한 구원계획을 철회하지 않으시고 예수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밭에 감추인 보물이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절박한 이들은 쟁기를 손에 들고 밭에 감추인 하나님의 나라를 찾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찾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가까이 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믿음을 얻게 되고, 사랑함으로 사랑을 배우게 됩니다. 성경은 역설적인 표현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한가지가 돈에 대한 역설입니다.

 

잠언 1124-25절을 보면 “24.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25.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잠언 11:24-25)

 

구제를 한다는 것은 주머니의 돈을 사용하는 것인데 더욱 부하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복을 흘려 보내면 오히려 복은 들어 오게 되는 것이 성경의 법칙입니다. 이러한 역설이 현실일 수 있는 이유는 주님의 말씀이며, 주님께서 먼저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진정한 복은 나누고 섬기고 베푸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계성만찬 주일에 장학헌금을 통해 실제적으로 주님의 사랑을 나누자고 했습니다. 공부를 한다는 것은 지식을 쌓아가는 일이기는 하지만 신앙과 하나가 되어지지 않으면 안됩니다. 믿음은 지식을 참되게 사용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이 일에 우리가 동참함으로 어려운 가운데 공부하는 이들이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 가난한 자들이 부요케 되기를 원하며,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이 하나님을 경험하는 복을 얻게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 먼저 주신 은혜를 되새기며 베품의 즐거움에 참여 해 보시기 바랍니다. 작은 것이라고 심고 참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11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바울에게 그날 밤은 위기의 밤이고, 고난의 밤이었습니다. 고난 받으신 주님은 그날 밤에 바울을 찾아 오셨습니다. 바울 곁에 늘 가까이 계셨던 주님은 그날 밤에담대하라 네가 나의 일을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고 적극적으로 위로하십니다. 신앙생활을 하며 고난의 밤일수록 주님의 음성은 또렷이 들리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 주님으로 변화된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서로가 주님을 만난 경험들, 서로가 변화된 삶의 모습을 보고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변해야 합니다. 내가 먼저 변화되지 않고는 하나님을 증언하는 일에 도구로  쓰임 받을 수 없습니다. 무딘 쟁기로 밭을 갈아야 하니 힘만 들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누구에게나 말할 수 없는 슬픔의 밤은 찾아 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낙심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여러분을 찾아 오실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걸어가신 길만 보고 따라가면 됩니다.

 

1996년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양심 냉장고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한적이 있었습니다. 1990년대에 한국은 정지선을 아는 사람도 거의 없었고 지키는 사람도 거의 희박했습니다. 그 프로그램은 정말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프로그램을 진행한 개그맨 이경규씨는 지금도 잊지 못했던 촬영 기억을 언급했습니다. 그날은 새벽 4시까지 양심 운전자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결국 포기하려던 순간 한 차량이 나타나 정지선을 지켰는데 이경규씨는 PD가 방송을 위해 사람을 보냈구나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그날 새벽 4시에 정지선을 지킨 운전자는 장애인이었습니다. 옆 자리에 있던 아내도 장애인이었는데 왜 정지선을 지키냐고 하니까 지켜야 하는거 아니에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다음날 신문에도 기사가 크게 났었다고 회상합니다. 실제 해당 방송은 도덕 교과서에도 실렸습니다. 이경규씨는 지금도 정지선을 지키는 사람들을 보면 눈물이 핑 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방송을 통해 사람들의 운전 양심을 높였다고 회상합니다. 그 당시 그 프로그램은 위기 상황이었고 다른 방송사에 시청률이 나오지 않아 변화가 없이는 일어서기가 어려운 때였다고 합니다. 야심한 밤에 도로에 잠복하여 안전선과 속도를 지키는 사람을 찾는 방송 프로가 모두의 우려를 뛰어넘어 우리 사회의 공중도덕과 질서를 깨치는 계기가 되었고 양심을 지키는 사람들의 삶을 느끼는 따뜻한 위로가 되어 주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아무도 보지 않는 곳, 일상의 자리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선한 양심을 지니십시오. 누군가 여러분을 헐뜯고, 고난이 온다고 해도 진리의 편에 서서 흔들리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억압받는 일은 하늘의 상급이 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만, 힘들고 어려울 때는 주님이 우리를 위해 찢기신 살과 피를 묵상하며 주님의 피가 여러분의 삶에서 흘러 나오게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선한 양심을 지니고 그 길을 끝까지 걸어야 합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찐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벧전 3:17) 주님께서 여러분의 굳건한 마음에 믿음의 용기를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