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5:24-32

24 , 보아라. 죽었던 내 아들이 이렇게 다시 살아왔다. 내가 아들을 잃었는데, 이제는 다시 찾았다.’ 그래서 그들은 큰 잔치를 벌였소. 25 ○ 한편, 그때 밭에서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던 큰아들은, 집 가까이 이르렀을 때 자기 집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을 들었소. 26 그는 종 하나를 불러, 자기 집에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어 보았소. 27 종이 대답하기를 ‘동생이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어르신께서 동생이 무사히 돌아온 것을 축하하시고자, 송아지를 잡아 큰 잔치를 벌였습니다.’ 하였소. 28 그 말을 듣고, 큰아들은 화가 나서 집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소. 아버지가 나와서 달랬지만, 29 큰아들은 아버지에게 투덜거렸소. ‘아버지, 저는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위해 뼈 빠지게 일했고, 아버지의 말씀을 한 번도 거역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지금까지 친구들과 함께 즐기라고 저를 위해 염소 새끼 한 마리조차 잡은 일이 없습니다. 30 그런데 이게 뭡니까? 창녀들에게 아버지의 돈을 다 써 버린 아들이 왔다고, 그를 위해 송아지를 잡고 큰 잔치를 벌이시다니요!31 아버지가 큰아들에게 말하기를 ‘아들아,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었고, 내가 가진 것들은 모두 네 것이 아니더냐? 32 그러나 생각해 보아라.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 왔고, 잃었다가 다시 찾았다. 그러니, 내가 잔치를 벌여 즐기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냐?’하였소.(쉬운말 성경)

24 for this son of mine was dead and has now returned to life. He was lost, but now he is found.’ So the party began. 25 “Meanwhile, the older son was in the fields working. When he returned home, he heard music and dancing in the house, 26 and he asked one of the servants what was going on. 27 ‘Your brother is back,’ he was told, ‘and your father has killed the fattened calf. We are celebrating because of his safe return.’ 28 “The older brother was angry and wouldn’t go in. His father came out and begged him, 29 but he replied, ‘All these years I’ve slaved for you and never once refused to do a single thing you told me to. And in all that time you never gave me even one young goat for a feast with my friends. 30 Yet when this son of yours comes back after squandering your money on prostitutes, you celebrate by killing the fattened calf!’ 31 “His father said to him, ‘Look, dear son, you have always stayed by me, and everything I have is yours. 32 We had to celebrate this happy day. For your brother was dead and has come back to life! He was lost, but now he is found!’”(New Living Translation)

사순절 다섯번째 주일입니다. 부활의 아침이 더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특별 새벽기도를 결심하고 지키는 분들은 이쯤되시면 생체 리듬이 바뀌었을 겁니다. 이제 열흘 정도 남았는데 피곤하고 힘들어도 주의 생명이 마음 깊은 곳에서 부터 솟아나시길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집으로 다시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입니다. 한 아들은 아버지를 떠나 자유를 갈망한 아들이고, 다른 한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얻기 위해서 아버지 곁에 머물러 있던 아들입니다. 자녀를 키우다보면 아이마다 성향이 다르고 기질이 다름을 느낍니다. 이 두 아들의 선택은 우리의 삶과도 닮아 있을것입니다. 누가가 기록한 본문에도 방황했던 아들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고 끝까지 기다리던 아버지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느끼게 됩니다.

 

십가가의 정신 가운데 한가지는 포용성입니다. 포용과 환대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꼭 필요한 가치입니다. 포용의 마음을 잃어 버린 공동체는 내 기준만을 높이기 때문에 파벌이 형성되고, 환대를 잃어버린 공동체는 새로운 이들을 환영하지 않고, 서로를 이해하거나 받아들이지 않는 경향이 생깁니다. 이는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파하는 사명을 수행하는 데에 큰 장애물이 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아담의 죄로 인해 사랑과 협력 보다는 분열과 배척을 반복해 왔습니다. 편견과 분열은 성경 안의 가정에서도 발견이 됩니다. 가인과 아벨, 이삭과 이스마엘, 야곱과 에서, 요셉의 형제들의 이야기는 인간의 불안전함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은 구속적 섭리로 믿음의 가정을 이끌어 가십니다. 

 

누가복음  15:1, 2절에 따르면 예수께서 두 아들을 잃어 버린 비유를 하게 된 배경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을 전하는 자리에 두 부류의 사람들이 앉아 있었습니다. 한 부류는 세리와 죄인들이고다른 부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오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께서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고 수군거렸습니다. 이때 예수께서 이 비유의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의 비유속에서 우리는 죄와 대속, 희망에 대해서 볼수 있습니다.

 

첫째, 둘째 아들은 자유를 향한 갈망으로 아버지를 떠납니다.

 

12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했소. ‘아버지, 제 몫의 유산을 미리 나누어 주십시오.’ 그래서 아버지는 자기 재산을 두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소. 13 얼마 후, 작은아들은 자기 몫을 다 챙겨 가지고 먼 나라로 떠났소.

 

둘째 아들은 자신에게 남겨질 유산을 미리 분배해 달라고 아버지에게 요구합니다아버지의 굴레를 떠나 자유롭게 살고 싶었습니다. 아버지로 부터 멀리 떠나서 마음껏 자유를 누리고, 인생에 도전도 하고, 꿈도 펼치고 싶었습니다. 부모의 입장에서 아들의 이 행동이 아주 잘못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멋진 꿈을 꾸며 인생을 멋지게 개척해 나가기를 바라는 것이 모든 부모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달라고 하는 것은 오늘날의 이해와 달리 아버지가 죽기를 바라는 것이기에 당시에 이런 요구는 아버지가 원로들에게 데려가 아들을 돌에 맞아 죽게 할 수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이 아버지는 당시 시대적 문화를 넘어서 자유를 열망하는 아들의 요구를 순순히 허락합니다.

 

유대사회 풍습으로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장자에게는 재산의 2/3, 둘째에게는 아버지 유산의 1/3 할당이 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작은 아들은 아버지의 1/3 유산에 해당하는 꽤 많은 돈을 들고 먼 나라로 떠났습니다. 그런데 끝없는 자유를 향해 떠난 이 아들은 그 땅에서 오래 가지 않아 술과 여자로 재산을 다 탕진합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것이 하나님의 품을 떠나기로 선택하면 하나님의 주권의 바다를 벗어나 물밖에서 살고 싶은 죄된 욕망만 될 뿐입니다.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영역을 인정하지 않으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죄로 인해 타락으로 가게 됨을 보게 됩니다. 죄가 하나님으로 부터 벗어 나려는 힘이라면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합니다. 진정한 자유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고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삶입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 재산을 다 탕진했을 때 그 나라에 흉년이 들었고, 그는 돼지 농장에서 돼지 먹이로 허기를 채우면서 지내야 했습니다.

 

13절로 16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13 얼마 후, 작은아들은 자기 몫을 다 챙겨 가지고 먼 나라로 떠났소. 거기서 그는 술과 여자로 세월을 보내는 동안, 그 많은 돈을 다 허비해 버렸소. 14 돈은 이미 다 떨어진 데다, 그 나라 전역에 심한 흉년까지 들어, 그는 끼니조차 제대로 이을 길이 없게 되었소. 15 그래서 그는 하는 수 없이 그 나라 사람의 어떤 집에 더부살이로 들어가 돼지를 치게 되었소. 16 그는 너무나 배가 고파, 돼지가 먹는 쥐엄나무 열매라도 실컷 먹고 배를 채우고 싶었지만, 그것마저도 넉넉히 주는 사람이 없었소.

 

당시 유대 사회에서 돼지는 부정한 짐승입니다. 아버지를 떠난 아들은 자유를 희망했지만 유대인들이 혐호하고 부정한 짐승이라 여기던 돼지를 치며 자신의 실존적 모습을 마주하게 됩니다. 얼마다 그 삶이 절박했을까요?  돼지가 먹는 열매로라도 배고픔을 없애 보려고 했지만, 그것마저 뜻대로 안 됐습니다. 이 아들은 어느 날 아버지가 계신 자기 집을 생각했겠지요진리의 말씀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내 아버지 집에서 일하는 품꾼들은 지금의 자기 신세 보다 나을 텐데, 아버지에게 품꾼의 하나로 걷어 달라고 해야겠다는 결심으로 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아버지께 돌아가서 잘못을 빌고 앞으로는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라 품꾼의 한명으로 살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런데요. 아버지는 집 나간 아들을 매일 매일 기다렸던 것 같습니다. 그날도 아들을 기다리고 있는데, 저 멀리서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보고 아버지는 둘째 아들임을 직감합니다. 아버지는 동네 어귀에 들어서기도 전에 아들을 향해 뛰어 나오십니다. 유대사회의 체면 문화도 아버지에게는 중요치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눈에는 오직 죽었다가 살아 돌아오는 아들만 보였습니다. 아버지는 잃었던 아들을 끌어 안아 목을 껴안도 입을 맞추십니다. 하인들에게는 잔치를 준비하라고 합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겨줍니다. 일꾼이 아니라 다시 아들의 신분을 인정하겠다는 것입니다. 집안의 모든 사람들이 기뻐했습니다. 이 아들은 크게 혼나더라도 일꾼으로라도 아버지 곁에서 섬기려고 했는데, 비로소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내 뜻대로 살고 싶은 자유,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살고 싶은 자유, 아버지의 존재를 부정하며 마음안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마음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의 마음을 알게 될때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어느날 존 웨슬리에게 찾아온 한 사람이 불신을 품고서 묻습니다. 당신은 사람들에게 아침 저녁으로 설교를 하며 어디로 인도하시는 겁니까? 웨슬리는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은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을 닮아가고 만물을 사랑하며 자신의 삶에 자족할 줄 알게 됩니다. 무엇보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깨닫게 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진정한 자유는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값없는 은혜를 우리에게 허락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부족해도 못해도 있는 그대로 우리를 사랑해 주십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영혼의 굶주림 가운데 있을때에 배불리 먹여 주셨고, 자유를 향해 질주하며 공허함과 허무함에 갇힌 우리를 절망에서 건져내 주셨습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아버지입니다아버지에게 있어서 가장 기뻤던 날 아버지 집에 머물던 큰 아들의 실체가 드러 납니다. 큰아들은 아버지의 용서를 받아 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큰아들은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쌓이고 쌓였던 분노가 동생이 돌아온 시점에 드러났습니다. 평소에는 아버지와의 관계가 좋아 보였는데 가장 기뻐해야 할 순간에 아버지에게 불만을 토로합니다.

 

24 , 보아라. 죽었던 내 아들이 이렇게 다시 살아왔다. 내가 아들을 잃었는데, 이제는 다시 찾았다.’ 그래서 그들은 큰 잔치를 벌였소. 25 ○ 한편, 그때 밭에서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던 큰아들은, 집 가까이 이르렀을 때 자기 집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을 들었소. 26 그는 종 하나를 불러, 자기 집에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어 보았소. 27 종이 대답하기를 ‘동생이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어르신께서 동생이 무사히 돌아온 것을 축하하시고자, 송아지를 잡아 큰 잔치를 벌였습니다.’ 하였소. 28 그 말을 듣고, 큰아들은 화가 나서 집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소.

 

둘째, 큰 아들의 관심은 아버지가 지닌 재산일 뿐입니다.

 

형은 동생이 돌아온 것이 왜 불편한 것일까요? 아버지가 둘째를 받아들이는 것이 왜 분노할 일이었을까요? 아버지가 동생을 다시 아들로 받아들이게 된다면 이제 아버지의 모든 재산은 자신의 것이었는데 또 다시 1/3재산을 나눠야 했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은 모두 내것이라 생각했었는데 인생 계획에 차질이 생긴 것입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를 통해 자신이 받게 될 이익을 기대했습니다. 두 아들은 아버지에게 다가가는 방법은 달랐지만 목적은 동일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둘째는 아버지의 뜻에 반항하고 자유를 갈망했던 것이고, 큰 아들은 자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아버지께 순종한 한 것입니다. 결국 두 아들 모두 아버지로 부터 벗어나려고 한 것이지요. 아버지는 두 아들 모두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큰아들에게도 아버지 보다 재산이 먼저 였습니다. 이 아버지는 큰 아들도 동일하게 잔치에 초대하십니다. ‘아들아,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었고, 내가 가진 것들은 모두 네 것이 아니더냐? 아버지는 너도 이 잔치에 참여하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3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31 아버지가 큰아들에게 말하기를 ‘아들아,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었고, 내가 가진 것들은 모두 네 것이 아니더냐?

 

하나님을 통해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얻을때 우리는 아버지가 베푼 잔치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에 율법을 통한 구원과 믿음으로 인한 구원의 차이로 분열과 대립이 일어났습니다. 결국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유대 그리스도교를 떠나야 했습니다. 둘째 아들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큰아들은 이미 믿고 있는 교회의 성도들입니다. 예수의 비유에서 나오는 큰아들은 형식주의적 종교를 지적하며, 아버지에게 순종하고 있으나 실제의 믿음이 부족한 것을 지적합니다. 하나님은 의심을 버리고 아버지의 잔치로 들어오라고 말씀합니다. 기독교는 착하게 살라, 성실하게 살라는 종교가 아닙니다.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착하게 살고 죄를 이기려고 해도 더 많은 죄의 물결이 마음에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스스로 착각하는 것도 교만입니다. 좋은 열매는 뿌리 깊은 좋은 나무으로 부터 맺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변화시켜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변화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29 큰아들은 아버지에게 투덜거렸소. ‘아버지, 저는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위해 뼈 빠지게 일했고, 아버지의 말씀을 한 번도 거역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지금까지 친구들과 함께 즐기라고 저를 위해 염소 새끼 한 마리조차 잡은 일이 없습니다. 30 그런데 이게 뭡니까? 창녀들에게 아버지의 돈을 다 써 버린 아들이 왔다고, 그를 위해 송아지를 잡고 큰 잔치를 벌이시다니요!

 

또 다른 아들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셋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요한 복음 316절을 보시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셨소. 그것은, 누구든지 그 아들을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를 위해 온전한 아들을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그 아들은 십자가에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죽음을 통과하시며 죄와 어둠속에서 빛의 자녀로 살아갈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 아들은 우리의 상처를 싸매 주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통하여 우리를 아버지께로 인도해 주시기에 우리는 넘어지고도 일어날 힘을 얻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께 이 잔을 내게서 옮겨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십자가의 잔은 고통의 잔이고 쓴잔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여정 가운데 우리의 고통의 잔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받아드리기 힘든 그 잔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아버지를 신뢰했기에 그 잔을 받아들일수 있었습니다. 내게 일어난 상황을 이해할수 없을때에도 하나님을 신뢰할수 있는 근거는 우리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존 스캇펙 박사는 평화만들기라는 책에서 진정한 공동체에 이르고 싶다면 잘난 제안들이 승리를 거두는 모습을 봐야겠다는 욕구를 먼저 버리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좋아해 주기를 바라는 욕구, 돈에 대한 집착, 신에 대한 분노 등 이러한 것들은 평화의 공동체를 형성하는데 방해가 되는 요소들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는 평화 공동체를 형성하는 과정에 고통이 따른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분쟁의 시대에 진정한 공동체에 이르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한 예수는 우리의 고통도 축제의 일부분을 만드시며 이끄십니다. 지난 2천년 동안 예수가 초대한 잔치에 들어온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예수를 닮아갈 것인가 스스로 질문했습니다. 우리도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우리의 삶의 이야기를 예수님과 함께 써 내려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우리의 지친 호흡에도 계시고, 어두운 세상속에서 홀로 있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며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회개란 잘못했다고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삶의 방향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 안으로 들어오는 삶의 방식입니다. 만일 우리가 더 이상 주안에서 있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다른 길로 들어선 것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탕자처럼 돌고 돌아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인생을 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형식적인 신앙생활에 젖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믿음 생활을 이어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예배하고 있지만 삶의 영역에서는 내가 주인되어 살아가는 삶이 익숙하고 말씀을 읽지만 그안에 깊은 은혜는 깨닫지 못하며 살아가고,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고 찾지만 구원의 길에서는 여전히 방향을 잃은 자 같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잔치는 둘째 아들에게만 베풀어 준 잔치가 아니라 누구든지 오라고 베푸시는 잔치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해주셨습니다. 원망이 찾아 오는 순간마다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되었는지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는 첫째 아들의 모습도 있고 둘째 아들의 모습도 가지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아버지의 사랑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제 우리가 어린 아이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장성한 분량으로 서 있기를 원하십니다. 말씀을 듣기만 하는 사람은 청중일 뿐이고,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큰아들이나 작은아들이나 모두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로서 서로 사랑하고 배려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따라가야 합니다.

 

사순절 마지막 주간을 맞이했습니다. 마음의 방향이 달라져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온 아들의 삶을 통하여 우리의 걸음과 방향이 되어 주시는 주님을 바라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길을 걷습니다. 한번도 변한적 없으시고 포기하지 않으시는 그 사랑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 아버지의 품에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귀한 은혜 누리시고 사순절의 의미를 다시 한번 기억하며 묵상하는 한주간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