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5:9-12

9 내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셨듯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 사랑 안에서 살아가도록 하여라.

10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그것이 바로 너희가 내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내가 내 아버지의 말씀을 지킴으로써 그분의 사랑 안에 살고 있는 것과 같다.

11 ○ 내가 너희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게 하여,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12 내 계명은 이것이다.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쉬운말 성경)

9 “I have loved you even as the Father has loved me. Remain in my love. 10 When you obey my commandments, you remain in my love, just as I obey my Father’s commandments and remain in his love. 11 I have told you these things so that you will be filled with my joy. Yes, your joy will overflow! 12 This is my commandment: Love each other in the same way I have loved you.(New Living Translation)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 (Bertrand Russell 1872-1970)1901년 어느날 밖에서 자전거를 타다가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아내에게 상황을 말한 뒤 이혼하고 싶다고 전하고, 이후 그의 인생에서 평생 네번이나 결혼을 하게 됩니다. 철학자 러셀은 충분한 사유를 통해서 사랑의 본질은 감정이라고 말했습니다. 좋은 느낌이 사라지면 사랑도 떠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러셀의 사랑은 여전히 현대인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나 내가 갖고 싶은 것, 우리는 소유하고 싶은 것에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또한 사랑은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힘이 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사랑이 변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좋은 감정이 영원히 지속될 수 없습니다. 사랑의 감정이 사라지게 되면 위선이 되기도 합니다. 이것이 감정적 사랑의 한계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감정적 사랑과는 다릅니다. 오래 참고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사랑입니다.

첫째,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인식하시기 바랍니다.

9 내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셨듯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 사랑 안에서 살아가도록 하여라.

9절은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셨듯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와 아들과 제자들의 관계를 통하여 서로 사랑해야 하는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사랑을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사랑을 깊이 인식만 하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랑을 깊이 인식했으면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사랑 안에서 살아가라는 것은 예수께서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듯이 예수의 계명을 지키라는 뜻입니다.

기독교인들에게 잘 알려진 요한복음 316절 말씀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처럼 사랑하사 외아들을 주셨으니'라는 구절속에는 우리가 이해 할 수 없는 크신 사랑이 담겨져 있습니다. 바로 영원한 생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은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니라 모든 세상 모든 민족이 대상이 된 것입니다. 이 사랑 안에 거하고 믿음으로 따르는 것은 우리에게 영생에 이르게 하는 길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누리는 만큼 행동해 나가면 됩니다. 서로를 따뜻한 시선으로 대해 주고 합리적인 판단과 생각을 넘어서서 말씀을 통해 주어진 생명을 경험하며 상대방의 마음을 먼저 살피고, 서로를 인정해 주는 믿음의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랑으로 성취가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법과 질서는 사랑으로 유지됩니다. 성경에 따르면 사랑이 하나님에게서 나온다고 표현됩니다(요한 1 4:7). 이 사랑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주도권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내 사랑 안에서 살아가라'고 하시는 말씀에 하나님의 변함없는 포용성이 느껴집니다.

오늘 본문은 제자들에게 하는 주님의 고별설교입니다. 주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을 종이라 부르지 않고 친구라고 불러 주시고, 내가 너희를 선택해서 세웠다고 말씀하시는데 이 구절에서 제자들을 향한 주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13절로 15절을 한번 보시겠습니다.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14 내가 너희에게 명한 내 계명을 너희가 지키면, 너희는 내 친구다. 15 이제부터 나는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겠다. 주인이 종들에게는 비밀을 털어놓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내가 너희를 ‘친구’라고 부르는 것은,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모든 것을 너희에게 다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친구는 오래 사귀어 정을 나누는 사람을  뜻합니다. 주님이 제자들을 친구로 부르시는 것은 서로가 깊이 교제하며 마음을 온전히 열어주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다 드러내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정의하는 친구의 개념을 보면

첫째로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생명까지 아낌없이 줄수 있는 친구가 한명만 있어도 행복한 사람일텐데 자기 생명을 내어주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친구가 되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너희가 내가 명하는 대로 하면 곧 나의 친구라' 예수님의 친구는 예수님을 닮아가는 사람입니다. 순종이 사귐에 있어서 필수적입니다. 예수의 이름을 부르지만 그의 계명을 소홀이 여기면 예수의 친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번째로 친구는 세상에서 경험할 수 없는 특권을 얻는 것입니다. 종은 명령을 받는 관계이지만 친구는 비밀을 나누는 관계입니다. 종은 주인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고 시키는 일만 하는 반면에 친구는 주님의 뜻과 계획을 알게 됩니다.

사랑의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친구가 되어 한 몸을 이뤄가게 됩니다.

둘째, 하나님 사랑의 절정은 기쁨입니다.

15:11 내가 너희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게 하여,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부버 (Martin Buber, 1878 ~ 1965)'나와 너'라는 책에서 말의 위기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세가지 인간관계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그것과 그것의 관계를 말합니다. 마치 물건처럼 이용하다가 가치가 없으면 버리는 관계입니다. 일시적이고 기계적인 만남입니다둘째는 나와 그것의 관계입니다. 상대방이 나를 물건처럼 이용해도 나는 상대방을 끝까지 인격적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이런 관계는 시간이 흐르면 지쳐 버립니다. 신앙생활도 이러한 방법으로는 지속되지 않게 됩니다. 셋째는 나와 너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가 인격적 관계인데 주님과의 연합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요한은 요한복음을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한 1:4)고 밝히고 있습니다. 주님과의 깊은 사귐을 통해 얻는 기쁨은 무엇을 가졌느냐 안가졌느냐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관계속에서 얻게 되는 기쁨입니다. 기쁨은 하나님 나라의 특성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를 믿는 자에게 하나님 나라의 기쁨이 샘솟는 것입니다. 세상은 많이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뭔가 허전하고 부족해 합니다. 욕망으로 채울수 없는 영혼이 사람에게는 있습니다. 참된 만남속에는 만족함이 있고 기쁨이 생겨납니다.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큰 기쁨을 누리는 것이 먼저입니다. 내면에 기쁨이 채워져야 인간 관계에서도 기쁨을 나눌 수 있게 됩니다.

성경에 항상 기뻐하라는 구절이 있는데 '항상'이란 말은 어렵게 느껴집니다. 우리는 살면서 기쁘지 않는 상황도 만나게 되기도 하고 기쁨이 사라지기도 합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것은 고난중에도 주를 바라보며 기뻐하고, 슬픔 가운데서도 찬송하며 기뻐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충만함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우러나는 기쁨입니다. 예수님과 연결된 삶의 목적이 이 기쁨을 가리킵니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 사랑으로 우리는 나를 둘러싼 일들과 환경을 온전히 대할수 있게 됩니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co-worker)입니다.

15:12 내 계명은 이것이다.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서로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동역자는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에 동참하며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개념은 행동으로 실제가 되어야 합니다.

공동체 안의 분쟁과 시기는 인간의 연약함을 드러냅니다. 우리가 완전한 사랑을 말할 수도 없고 실천할 수도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쉬지 않고 일하시는 분이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이 새 계명을 허락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확실한 테두리가 있어 보입니다. 서로 사랑하지 않고는 같은 길을 걸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해도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서로가 함께하는 것이 어려워 집니다. 아무리 좋은 뜻이라도 같은 방향을 바라보지 않고, 다른 일을 계획하며 나아가면 과정속에서 문제는 계속 발생하게 됩니다.

성경은 '서로간의 사랑''모든이에 대한 사랑'을 둘 다 언급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31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또 우리가 여러분을 사랑하듯, 주님께서 여러분 서로 간에 나누는 사랑과 더 나아가 모든 사람들에게 베푸는 여러분의 사랑을 넘치도록 풍성하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쉬운말 성경)

하나님의 동역자는 그릇을 넓혀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끊임없는 사랑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이웃을 보게 되고, 이웃의 범위가 확대되어 갑니다. 믿음을 통해서 믿음의 일을 하게 되고, 믿음의 눈이 뜨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율법 선생에게 받은 질문 중에 한가지는 "율법 중에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두 가지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라는 책에서 '한계없이 넘쳐 흐르는 사랑의 삶'이란 표현을 사용합니다. 성도는 이웃의 개념을 확장해야합니다. 교회 안 뿐만이 아니라 세상과 일터에도 우리의 이웃이 있습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기 원하고 선을 행하려고 애를 쓰기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로마서 12장에서 할수만 있으면, '여러분의 힘이 되는 일이라면 모든 사람들과 화목하게 지내십시오.'라고 권면합니다

요한복음 151617절을 하나님의 동역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16 명심하여라.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 그 이유는, 너희로 하여금 세상에 나가 열매를 맺게 하고, 그 열매가 항상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너희가 내 이름으로 내 아버지께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다 주실 것이다.
17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계명은 이것이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여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인식하며 사랑의 삶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우리힘으로 사랑하는 것이 가능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위대하게 느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내 가족만 사랑하여도 충분할 것 같은데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신 계명이 우리의 삶에 어떻게 이해 되어지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이해되어지지 않는 한없는 사랑을 우리가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인으로 살아가며 많이 사랑하는 것 처럼 많이 헌신하는것 처럼 보여질뿐 어쩌면 가장 가까운 이웃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는 연약함 안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켜 행하는 것이 믿는 성도들의 정체성이 되어야 합니다. 지쳐있을 때에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쉬어 버리면 안됩니다. 지쳐있는 몸과 마음일지라도 하나님을 떠나 있으면 안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서는 작은 일도 감당 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사랑하는 일은 비판과 정죄의 마음에서부터 돌아서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이해해야 합니다. 배를 타고 가다가 폭풍을 만났던 제자들은 위험한 순간에서 자신들의 믿음의 상태가 보였습니다.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으면 불안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 안에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바라 보아야 합니다. 세상에 속해 있으나 세상과 동화되지 않고 예수의 가르침을 전하는 이들이 예수의 공동체입니다. 형제 사랑은 먼저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밑바탕인 동시에 세상을 향해서 믿음의 친구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이웃이라는 개념의 한계선을 넘어서 주님은 친구가 되어 주시지만, 자신은 항상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백성을 만들어 가셨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끊임없이 경계선들을 뛰어 넘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이렇게 해서 점점 많은 사람들이 공동체의 형제 관계속으로 이끌려 졌고, 끊임없이 새로운 이웃관계들이 형성되었습니다. 한주도 하나님의 동역자들로 살아가시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