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엘 2:12-14

12 <너희 마음을 바꾸어라> 여호와의 말씀이다. “지금이라도 너희의 온 마음을 다하여 내게 돌아오너라. 금식하고 울며 슬퍼하여라."
13 옷을 찢지 말고 너희 마음을 찢어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너라. 그분은 은혜롭고 자비로우시다. 그분은 쉽게 노하지 않으시고 사랑이 많으시며 벌을 내리지 아니하신다.
14 주께서 그 마음을 바꾸시며 너희에게 복을 주실지 누가 알겠느냐? 그래서 너희가 여호와께 곡식 제물과 부어 드리는 전제물을 바칠 수 있게 될지 누가 알겠느냐?" (쉬운성경)

요엘 (Joel)은 남왕국 유다의 8대 왕 요아스 (Joash)가 왕으로 즉위하던 초기에 활약했던 예언자입니다. 그 때가 대략 B.C. 830년경쯤 됩니다. 요아스는 7살의 어린 나이에 왕이 된 사람입니다. 하지만, 제사장이었던 여호야다 (Jehoiada)가 옆에서 도와 주었기 때문에 별 문제 없이 나라를 통치했습니다.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던 성전을 대대적으로 보수하는 등 나라를 잘 다스렸습니다. 그러다가 여호야다가 죽습니다. 정신적으로 의지할 곳이 없어진 요아스는 그 때부터 타락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숭배에 빠지게 됩니다. 보다 못한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 (Zechariah)가 충고를 했지만 그 때문에 스가랴는 죽임을 당합니다. 그 때 요아스가 저질렀던 일이 얼마나 악했던지 예수님께서 요아스 때의 일을 말씀하실 정도였습니다. “따라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살해당한 바라갸 (Barachiah)의 아들 스가랴의 피에 이르기까지, 너희는 세상에서 피를 흘린 의인에 대한 죄값을 치를 것이다.” (마태복음 23:35)

하나님은 위기의 때에 거의 예외 없이 예언자들을 등장 시킵니다. 예언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십니다. 이 방법은 오늘날에도 똑 같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올바른 길을 가지 않을 때 경고를 하십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시려는 계획을 가지고 계셨던 하나님은 그 계획을 아브라함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내가 지금 하려고 하는 일을 어떻게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Should I hide my plan from Abraham., 창세기 18:17)?” 생각해 보면, 참 엄청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는 자녀들과 소통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소통의 채널 가운데 기도입니다. 그러니까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이 소통의 채널을 막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소통하시는 또 다른 채널이 있는게 그것이 성경입니다. 하나님은 시대를 초월해서 여전히 그 말씀을 읽는 사람들과 소통을 하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은 지금도 살아 있는 하나님의 강력한 말씀입니다 (The word of God is alive and powerful., 히브리서 4:12). 성경을 읽지 않는 사람은 또 다시 하나님께서 소통하시는 채널을 막는 사람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요즘 사람들이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하나님께 생각을 집중하고, 나 자신을 돌아보고, 조용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내적 음성 (God’s inner voice)을 들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없습니다. 성경을 읽는 것도 그렇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책을 읽지 않습니다. 서점에서도 소설이나 교양서적들이 잘 팔리지 않습니다. 베스트셀러라는 말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아주 가벼운 읽을 거리 외에는 읽지 않습니다. 청년들은 그나마 종이 책들은 읽지 않습니다. 스마트 폰이나 online을 통해서, 혹은 SNS (Social Networking Service)를 통해서 몇 줄 안 되는 짧은 글들을 읽습니다. 그러니까 생각이 깊어지지 않습니다. 이런 시대적인 흐름이 성경을 읽는 데도 방해가 됩니다. 생각을 하지 않으니까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일이 시대 흐름과 맞지 않은 ‘out-of-date’ 된 일들이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무리 시대 흐름이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기도하는 일과 성경 읽는 일을 게을리 하면 안 됩니다. 이 일을 게을리 하면 그 때부터 우리의 영적인 호흡이 정지됩니다. 하나님과 소통의 채널이 막히기 때문입니다. 힘들어도 기도하고 성경 읽어야 합니다. 단 몇 줄이라도 성경 읽고 그 말씀을 생각하는 일을 중단하면 안 됩니다. 지금 우리교회는 사순절 새벽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내일이 23일째입니다. 이제 17일 밖에 안 남았습니다. 지난 주에는 저의 마음이 상당히 힘들었습니다. 마음이 약해지니까 사탄의 음성이 들립니다. “야, 내년부터는 사순절 새벽기도 하지마. 내년부터 안 한다고 하면 다들 좋아할 걸? 교회 임원회에 내 놓고 무기명으로 표결해 봐. 다들 하지 말자고 할거야.” 또 다른 음성이 들려 옵니다. “내년부터는 20일만 해. 추운 날씨에 40일은 너무 길어.” 지금은 제 마음이 어떨 것 같습니까? 우리교회가 이만큼이라도 서 있는 것은 사순절 새벽기도를 통해서 받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기원전 9세기 유다 왕국의 이야기로 돌아가 볼까요? 요아스 왕 한 사람이 우상숭배에 빠진 것 같은데, 결과적으로 그 한 사람 때문에 그가 통치하던 한 시대가 우상숭배에 빠지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시대를 쉽게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예언자를 통해 그의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사람이 요엘입니다. “지금이라도 너희의 온 마음을 다하여 내게 돌아오너라. 금식하고 울며 슬퍼하여라 (Turn to me now, while there is time. Give me your hearts. Come with fast-ing, weeping, and mourning).” (12절) “내게로 돌아오라”는 말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말입니다. 회개를 희랍어로 ‘메타노이아 (μετάνοια)’라고 합니다. 이 말을 성경에서는 ‘turning away from sin and turning to God’ 이런 뜻으로 사용합니다.

하나님께서 우상숭배에 빠진 그 시대에게 회개하라는 메시지를 주신 것은 아직도 기회가 있다는 뜻입니다. 아직도 회개하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시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아무리 잘못해도 쉽게 포기하지 않고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이 말씀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라도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앞에는 그 길이 항상 열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데, 우리도 하나님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 (The Parable of the Prodigal Son)’는 우리에게 영원한 소망을 주는 말씀입니다. 자기 비지니스를 해 보겠다고 아버지 유산을 받아서 아버지를 떠났던 작은 아들을 다시 받아 주시는 아버지는, 회개하고 돌아오는 죄인을 받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깊고, 넓고, 높은 것인지를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세계 각국에 조금씩 다른 버전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제가 읽은 이야기는 태국에 있는 이야기인데, 집을 나간 아들을 어머니는 오늘도 기다립니다. 집으로 돌아 온 아들이 멀리서 어머니 집을 훔쳐 봅니다. 그런데, 어머니 방 방문이 열려 있습니다. 방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본 아들은 용기를 내서 어머니에게 돌아갑니다 아들이 어머니에게 말합니다. "어머니, 이렇게 어머니 방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보고 돌아올 용기를 냈습니다." 그랬더니, 어머니가 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들아, 난 네가 떠난 후에 한번도 이 방문을 닫은 적이 없다!"

오늘 말씀 14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은혜롭고 자비로우시며, 쉽게 노하지 않으시며, 사랑이 많으시며, 벌을 내리지 아니하신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He is merciful and compassionate, slow to get angry and filled with unfailing love. He is eager to relent and not punish.” 이 말씀 중에 ‘compassionate’라는 말이 눈에 들어옵니다. 상대방의 처지에 deep sympathy를 가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sympathy를 가지신 분입니다. 우리의 고통 (pas-sion)과 우리의 아픔, 우리의 약함을 잘 아십니다. 히브리서 말씀 읽을 때도 이런 말씀이 나왔습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한 부분을 잘 알고 계십니다 (For we have a high priest who is able to sympathize with our weaknesses).” (히브리서 4:15)

바로 이 말씀이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언제나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있고,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 앞에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문이 항상 열려 있습니다.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작은 아들은 바로 우리 자신들입니다. 작은 아들처럼, 우리에게는 항상 하나님을 떠나 살고 싶은 유혹이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도 얼마든지 살 수 있을 것 같은 유혹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간섭 없이 살고 싶은 유혹이 있습니다. 이런 유혹에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 때 여러분이 오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나에게는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문이 열려 있다!” 성경에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Your God is gracious and compassionate. He will not turn his face from you if you return to him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우리의 처지를 잘 이해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그는 우리에게서 얼굴을 돌리지 않으십니다)." (역대하 30:9)

그러나, 하나님께 돌아갈 때는 조건이 있습니다. 완전히 하나님께 마음을 드려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 “너희의 온 마음을 다하여 내게 돌아오너라 (12절)”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New Living Translation에서는 “Turn to me now, while there is time. Give me your hearts” 라고 번역했습니다. 같은 말씀이 NIV 성경에는 “Return to me with all your heart”라고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 돌아가는 사람은 그의 온 마음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입니다. 온 마음으로 예배하고, 온 마음으로 찬양하고, 온 마음으로 순종하고, 온 마음으로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우리의 온 마음이 드리지 않는 형식적인 것을 싫어하십니다. 이사야 42:8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여호와다. 이것이 내 이름이다. 나는 내 영광을 다른 것에게 주지 않겠고, 내가 받을 찬양을 우상들이 받게 하지 않겠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오해합니다. “아, 하나님은 우상을 찬양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구나!” 이 말씀을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온전한 찬양을 기쁘게 받으신다는 뜻입니다. 마음의 절반은 우상에게 빼앗기고 있으면서, 그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런 찬양은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또 열왕기상 18:21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러분은 언제까지 바알과 여호와 둘 사이에서 머뭇거릴 것입니까? 여호와와 바알을 함께 섬기려고 하십니까? 여호와가 참 하나님이시면 여호와를 따르고 바알이 참 하나님이면 바알을 따르시오.”

하나님을 믿으려면 온전한 마음으로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것에 절반은 마음을 빼앗기고, 절반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에 빠졌다고 하니까 하나님을 완전히 버리고 우상을 섬기는 것 같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요아스 왕이 처음에는 하나님을 잘 섬기다가 제사장 여호야다가 죽자 우상숭배에 빠졌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버린 것 같지요? 아닙니다. 하나님을 버린 것이 아니라, 우상에게 절반은 빼앗긴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겼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성 크리소스톰 (St. John Chrysostom, 347-407, Archbishop of Constantinople)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자기 교구를 순방하던 중에 있었던 일입니다. 교구는 넓은데, 가는 곳마다 사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한 시골에 있는 교회를 순방하게 되었습니다. 이곳에도 역시 사제가 없었습니다. 이 교회를 떠나면서 그는 한 농부에게 교회에 대한 책임을 맡기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자꾸 마음에 쓰였습니다. “내가 괜한 일을 했구나! 그 자격 없는 농부가 어떻게 교회를 책임질 수 있겠어?” 불안 마음을 가지고 크리소스톰은 그 교회를 다시 가 보았습니다. 간다는 말도 하지 않고 몰래 그 교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가 보고 싶었습니다. 크리소스톰은 기둥 뒤에서 몰래 예배 광경을 지켜 보았습니다. 지켜 보는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습니다. 예배가 끝난 뒤에 크리소스톰은 그 농부 사제 앞에 무릎을 꿇고 자기를 위해서 기도를 해 달라고 했습니다. 농부 사제는 그 사람이 크리소스톰인 것을 알고 깜짝 놀라면서 무슨 소리냐고, 제가 기도를 받아야 할 터인데, 왜 이러시느냐고 만류를 했습니다. 그 때, 크리스스톰이 “나를 용서해 주시오. 나는 지금까지 당신처럼 가슴에 불을 안고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소.” 이 말을 들은 그 농부 사제가 당황하면서 “아니, 그러면, 그렇게 하지 않고 달리 하나님을 예배하는 방법이 있습니까?”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사순절을 맞이해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회개해야 할 것들이 참 많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우리가 온전한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고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음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일인데,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님 그런 식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차라리 하나님을 떠난 것보다 더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절반은 우상에게 마음을 빼앗긴 채 절반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예배했고, 절반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송했고, 절반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온 마음 (a whole heart)’ 드려야 합니다. ‘whole food’에서 파는 식품이 organic 식품이라고 해서 값이 비싼 것처럼, 우리의 ‘whole heart’를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요엘은 자기 시대 사람들에게 “옷을 찢지 말고 너희 마음을 찢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13절)”고 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 우리의 진심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형식적이고,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마음을 찢어서 그 속을 다 하나님께 보여 드리라는 것입니다.

지난 월요일에 우리교회에서 KMC 뉴잉글랜드 지역 목사님들이 모여서 회의를 했습니다. 회의를 마치고 세미나가 하나 있었습니다. 세미나 주제는 “욥기를 어떻게 설교할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세미나를 마치고 모두들 유익한 시간이었다고 좋아했습니다. 지금 목사들의 생각이 “어떻게 하면 설교를 잘할 수 있을까?” 이 문제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생각이 좀 달랐습니다. 지금 설교를 잘 하는 목사들은 많습니다. 차고 넘칩니다. 얼마든지 설교 잘하는 목사들의 설교를 들을 수 있고, 설교집을 사서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좋은 목사가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별로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설교는 잘 하는데, 인격은 갖추지 못한 목사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입을 열면 그렇게 좋은 설교를 쏟아내는데, 왜 돈과, 명예와, 권력에 대한 욕심을 내려 놓지 못한 목사들이 그렇게 많습니까? 지금은 목사들이 설교를 잘하려고 노력하는 대신, ‘온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훈련을 해야 하는 때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목사가 없어서 교회가 시끄럽고, 이런 평신도가 없어서 교회가 세상에서 존재감을 상실해 가고 있는 것 아닙니까? 물론 이렇게 설교하는 제 자신도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이런 마음들을 서로 공유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이번 사순절이 우리의 ‘온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지 못했던 믿음생활을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