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50:22-23

22 “하나님을 잊어 버린 사람들아, 회개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 몸을 찢을 것이니, 아무도 너희를 도와줄 사람이 없을 것이다.
23 하지만,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사람은 나를 높이는 사람들이다. 너희가 나의 길을 계속 지킨다면, 너희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보여 줄 것이다.” (쉬운성경)

22 Repent, all of you who forget me, or I will tear you apart, and no one will help you.
23 But giving thanks is a sacrifice that truly honors me. If you keep to my path, I will reveal to you the salva-tion of God." (New Living Translation)

시편 50편은 아삽이 쓴 것입니다. 아삽은 다윗과 동시대 사람입니다. 다윗이 기원전 약 1,000년 경 사람이니까 아삽도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입니다. 아삽은 다윗이 아꼈던 세 사람의 음악인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자신이 뛰어난 음악가였던 다윗은 레위 지파 사람들에게 노래 잘 하는 사람과 악기를 잘 연주하는 사람들을 추천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 때 추천 받은 세 사람이 헤만 (Heman)과 아삽 (Asaph)과 에단 (Ethan)입니다 (역대상 15:16-17). 이 사람들은 비파 (lyres)와 수금 (harp)과 제금 (cymbals)을 연주했던 연주자들이었습니다. 이 중 아삽은 악장 (the chief musician)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이들은 아삽이 연주하는 제금에 맞춰서 비파와 수금을 연주하면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역대상 16:5).

시간은 흘러 유다 왕 히스기야 시대로 내려 갑니다. 히스기야는 유다의 역사 중에 몇 명 안 되는 하나님께 인정 받는 왕이었습니다. 25살에 왕 위에 오른 히스기야는 다윗을 자기의 모델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제일 먼저 형식화된 제사 (예배) 의식을 개혁했습니다. 그리고 제사 의식에 음악을 도입했습니다. 흥미 있는 것은 히스기야가 성가대의 찬양이 끝난 후에 레위 사람들로 하여금 다윗과 아삽의 시편을 낭독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역대하 29:30). 

아삽은 단순한 음악인이 아니라 뛰어난 영적 통찰력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이런 아삽을 가까이 곁에 두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아삽이 쓴 시편들은 그저 그렇고 그런 시편들이 아니라 히스기야가 예배 의식을 개혁 하면서 아삽의 시편에서 영감 (靈感)을 얻을 정도로 뛰어난 것들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히스기야가 아삽을 가리켜 ‘선견자 아삽 (Asaph the seer)’이라고 한 것으로 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역대하 29:30) 

시편 50편을 읽어 보면 곳곳에 참된 제사 (예배)는 어떤 것인지 잘 나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참된 제사 (예배)는 제물 중심의 제사가 아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아삽의 입을 통하여 “나는 너희들이 드리는 제물을 탓하지 않는다(8절)”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 무슨 제물을 드리든지 그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 모든 것들이 원래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삽은 제물 중심의 믿음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하나님을 잊어버린 사람들 (those who forget God, 22절)'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관계 보다는 좋은 제물, 값비싼 제물만 드리면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다 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정말 그렇다면, 오늘 우리도 ‘하나님을 잊어버린 사람’ 중의 한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예배에 집중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사역 중심의 믿음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무슨 일을 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가대원들이나 오케스트라 대원들은 참 조심해야 합니다. 찬양을 하고, 연주를 함으로써 나의 책임을 다 했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학교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습니다만, 제가 BU 박사과정에 있을 때 외국어 시험이 있었습니다. 저는 신약성서 해석학을 전공했습니다. 보통 박사과정에 있는 사람들에게 외국어를 두 개를 요구 합니다. 저는 영어와 독일어를 선택했습니다. 다행히 영어를 외국어로 간주해 주었습니다. 물론 영어 시험을 봤습니다. 한국어 텍스트를 주고 영어로 번역하는 시험이었습니다. 저는 신약학을 전공했으니까 헬라어 (Greek)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헬라어를 선택할 수 없습니다. 왜냐 하면, 신약학을 전공하는 사람에게 헬라어는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외국어로 인정해 주지 않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구약학을 전공하는 사람에게 히브리어는 외국어로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성가대에 성악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케스트라에는 거의 악기를 전공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잘 할 수 있는 것은 노래와 연주입니다. 이것을 하면서 내가 충분히 봉사하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당연히 내가 해야 할 일입니다. 나는 성가대에서 봉사하니까, 나는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하니까 이만하면 됐다는 생각이 잘못하면 사역 중심의 생각이 되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는 주일 학교 교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사역을 보고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heart)’을 기뻐하십니다. 사무엘상 16:7에 이런 말씀이 나오잖아요? “내가 보는 것은 사람이 보는 것과 같지 않다. 사람은 겉모양을 보지만, 나 여호와는 마음을 본다 (For the Lord does not see as man sees; for man looks at the outward appear-ance, but the LORD looks at the heart).” ‘마음을 보신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겉모습이나 형식, 우리가 하는 사역보다 관계를 중요하게 보신다는 뜻입니다. 

아삽이 살고 있던 시대에는 모든 사람들이 제물 중심의 제사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제물 중심의 제사가 가지고 있는 위험성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오직 한 사람, 아삽은 제물 중심의 제사는 반드시 형식화 되고 타락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형식화된 예배를 통해서는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만들 수 없습니다. 이런 아삽을 다윗은 그의 곁에 '선견자 (the seer)'로 두고 있었고, 다윗을 모델로 삼아 제사 (예배) 의식을 개혁하려고 했던 히스기야 왕은 아삽이 쓴 시편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면, 참된 제사 (예배)는 어떤 제사입니까? 아삽은 감사로 드리는 제사가 참된 제사라고 합니다 (14, 22절). 제물이 중심이 아니라,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제사를 드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예배를 예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 (worship in spirit and truth)’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역시 예배자의 마음을 중요하게 보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예배자의 마음이 신령과 진정으로 준비되어야 그 예배가 영이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4:23-24). 예수님의 이 말씀이 우리 가슴에 와 닿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이런 참된 예배자들을 찾고 계신다 (The Father now seeks the true wor-shipers).” 어쩌면 이 말씀을 하신 예수님께서 아삽의 시를 생각하고 계시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탁월한 정신분석학자인 에리히 프롬 (Erich Fromm, 1900-1980)을 아시지요? 그가 대중들이 읽을 수 있는 많은 책들을 썼습니다. 제가 보기엔 그 중에서 1976년에 나온 "To Have or To Be (존재냐 소유냐)?" 이 책이 가장 중요한 책이 아닌가 합니다. 프롬은 이 책에서 삶의 두 가지 양식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하나는 ‘존재양식 (Being Mode)’이고, 다른 하나는 ‘소유양식 (Having Mode)’이라고 했습니다. ‘소유양식의 삶’은 무엇을 소유함으로써 기쁨과 행복과 보람을 느끼는 삶의 방식입니다. 반대로, ‘존재양식의 삶’은 무엇을 소유해서가 아니라 나의 것을 나누어 주고 베풀면서 삶의 의미를 느끼는 삶의 방식입니다. 프롬은 이렇게 말합니다. “존재양식의 삶은 자기를 새롭게 하는것, 자기를 성장시키고 흐르게 하며 사랑하는 것, 관심을 가지고 귀 기울이며 베푸는 것, 모든 관계를 살아 있는 것으로 파악하는 삶의 양식을 의미한다.” 

지금은 크리스천의 삶에 대하여 생각을 많이 해야 하는 때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유와 목적에 대하여 진지하게 성찰해야 하는 때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대한 크리스천의 책임에 대하여 고민해야 하는 때입니다. 소유양식의 삶을 사는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내가 무엇을 얼마나 많이 소유하느냐 하는 것으로 성공과 실패를 말하고, 행복과 불행을 말하는 사람에게는 감사가 없습니다. 자기가 이미 가진 것보다 가지지 못한 것들에 대한 불평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아삽의 말을 빌린다면, 소유양식의 삶을 사는 사람은 제물 중심의 제사를 드리는 사람과 같습니다. 제물 중심의 제사가 결국은 형식화 되듯이, 소유양식의 삶을 사는 사람은 하나님과도 형식적인 관계에 머물고 맙니다.

그러나, 존재양식의 삶을 사는 사람은 소유가 아니라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프롬은 이 관계를 ‘aliveness and authentic relatedness to the world (세계와의 살아 있고 진실한 관계성)’이라고 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없고,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고, 올리브 나무에 거둘 것이 없고, 밭에 거둘 곡식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 때문에 기뻐하겠습니다.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즐거워하겠습니다.” (하박국 3:17-18) 하박국 선지자의 글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이유는 그의 글이 존재양식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분명하게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모두 잃는다고 해도, 마지막 남는 것 한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를 부인할 수 없듯이, 나는 구원의 하나님 때문에 기뻐합니다.”  이것이 존재양식의 삶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아삽에게 고마워해야 할 것은, 그를 통해서 존재양식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23절)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But giving thanks is a sacrifice that truly honors me. If you keep to my path, I will reveal to you the salvation of God." 직역하면, "감사를 드리는 것이 진정으로 나를 높이는 제물이다. 너희가 나의 길을 떠나지 않고 지킨다면 하나님의 구원을 보여 줄 것이다"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나의 길 (my way)’은 감사로 하나님게 나가는 것입니다. 감사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상황에 구애받지 않고 범사에 감사하는 삶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하나님의 길'입니다. 개역성경에는 이 '길'이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라고 나와 있습니다. 감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드려야 하는 올바른 행위입니다. 감사는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나의 삶 속에서 행하신 일들을 모두 인정하고, 감사하며,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감사야말로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최고의 제물입니다. 꼭 형식이 갖춰지지 않았어도, 열악한 환경 속에서 드리는 예배라고 할지라도, 예배자들의 마음 속에 감사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것은 최고의 예배입니다. 

우리가 사는 보스턴은 감사의 본고장입니다. 우리가 사는 보스턴에서 감사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392년 전, 1620년에 102명의 청교도들이 May Flower를 타고 도착했던 플리머쓰 (Plym-outh)가 불과 보스턴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습니다. 12월에 도착한 이들은 혹독한 겨울을 보내고 가까스로 살아 남았습니다. 이렇게 살아 남은 사람들이 그 이듬 해에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드렸던 것이 감사절의 유래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남긴 말 중에 "Think and Thank God (생각하고 하나님께 감사하자)"이란 말이 있습니다. 사전에 보면 thank라는 말은 “akin to think (think와 유사한 어족)”라고 나와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감사의 이유들입니다. 기쁘고 즐거웠던 일들도, 힘들었던 시간들도, 절망의 순간들도, 생각해 보면 모두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언젠가 이런 기도문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어느 환자의 기도 (The Creed for the Disabled)”라고도 알려져 있고, “어느 무명 용사의 기도”라고도 알려져 있습니다. 제가 그 기도의 원본을 찾았습니다. “A Soldier's Prayer (written by an unknown confederate soldier, US civil war)” 

I asked God for strength, that I might achieve (출세를 위해서 힘을 구했지만),

I was made weak, that I might learn humbly to obey (겸손하게 순종을 배우라고 나를 약하게 하셨습니다).

I asked for health, that I might do greater things (큰 일을 하기 위해 건강을 구했지만),

I was given infirmity, that I might do better things (하나님은 더 좋은 일을 하라고 나에게 병을 주셨습니다). 

I asked for riches, that I might be happy (행복하게 살려고 돈을 구했지만),

I was given poverty, that I might be wise (지혜로운 사람이 되라고 가난을 주셨습니다).

I asked for power, that I might have the praise of men (사람들의 칭찬을 받기 위해 권력을 원했지만),

I was given weakness, that I might feel the need of God (하나님만 필요로 하라고 나에게 약함을 주셨습니다).

I asked for all things, that I might enjoy life (나의 삶을 즐기기 위해 모든 것을 원했지만),

I was given life, that I might enjoy all things (모든 것을 즐길 수 있는 삶을 주셨습니다).

I got nothing that I asked for (내가 구한 것은 하나도 받지 못했지만)-

but everything that I had hoped for (내가 소망해야 했던 모든 것을 받았고),

Almost despite myself, my unspoken prayers were answered (내가 원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내가 말하지 않은 기도들이 응답되었습니다).

I am among all men most richly blessed (나는 그 누구보다도 축복 받은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