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0:19-23

19 같은 날 저녁에, 제자들이 함께 모여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두려워 문을 꼭 잠갔습니다. 그 곳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들 가운데 서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는 제자들에게 손과 옆구리를 보이셨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보자 무척 기뻐했습니다.
21 다시, 예수님께서는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해 숨을 내쉬며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아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하면, 그 죄는 사함을 받을 것이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하지 않으면, 그 죄는 사함을 받지 못할 것이다.” (쉬운성경)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궁금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은 지금 어디서 무슨 일을 하고 있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매우 궁금합니다. 성경 곳곳에 흩어져 있는 말씀들을 하나씩 읽어 보면서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재구성을 해 보려고 합니다.

마태복음 28장에 그 당시 상황을 엿볼 수 있는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지키던 경비병들은 대제사장들에게 무덤에서 일어난 일들을 그대로 보고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긴급하게 회의를 합니다. 그리고 경비병들에게 돈을 주면서 소문을 퍼뜨리라고 합니다. “밤에 예수의 제자들이 와서, 우리가 잠든 사이에 그 시체를 훔쳐 갔다”는 소문을 내라고 합니다. 순전히 조작된 소문입니다. 경비병들은 돈을 받고 시키는 대로 소문을 냅니다. 마태는 이 사실을 그의 복음서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래서 이런 소문이 유대인들 사이에 널리 퍼지게 되었고, 오늘날까지 많은 유대인들은 그렇게들 알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8:15)

그러면, 그 시각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오늘 읽은 요한복음 20장에 그 시각에 있었던 제자들의 행방을 엿볼 수 있는 말씀이 나와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같은 날 저녁에'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NKJV에는 이 말씀이 ‘The same day at evening, being the first day of the week (한 주의 첫 날인 그날 저녁)’라고 나와 있습니다. NLT 성경에는 ‘That Sunday evening’이라고 나와 있고, ‘In the evening of that day, the first day of the week (한 주일의 첫 날 저녁)’라는 footnote가 달려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같은 날 저녁을 말합니다. 시간이 제법 지났을 것 같은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지 삼일 째 되는 날 저녁입니다. 그날 저녁 제자들은 예루살렘의 한 집에 함께 모여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유대인 지도자들이 두려워서 문을 꼭 걸어 잠그고 있었습니다. 지금 밖에서는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의 시체를 훔쳐갔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언제 유대인 지도자들이 보낸 군인들이 들이닥칠지 알 수 없는 긴박한 때였습니다. 제자들은 극도의 두려움과 공포에 떨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요한은 그 때의 상황을 생생하게 그의 복음서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한 곳에 모여 있습니다. 제자들은 문을 꼭 잠그고 숨어 있습니다. 그런데, 정황상,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에 갔던 여자들이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다는 것, 그리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천사의 말을 들었다는 것, 그리고, 여자들의 말이 자기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소식을 이미 들은 후였습니다 (요한복음 20:2). 제자들은 그 여자들의 말을 가볍게 여겼습니다.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 말을 허튼 소리로 듣고 여자들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But the story sounded like nonsense to the men, so they didn't believe it).” (누가복음 24:11) 그리고, 베드로 같은 제자는 여자들이 말한 대로 무덤이 비어있다는 것을 확인한 후였습니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 “그러나 그는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요한복음 20:9)”라고 기록했습니다.

제자들은 여전히 불안했습니다. 극도의 공포가 그들을 엄습했습니다. 문을 꼭꼭 걸어 잠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누가 문을 열어 준 것도 아니고, 누가 들어온 인기척도 없었는데, 갑자기 예수님께서 두려움으로 떨고 있는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Peace be with you!” 하고 먼저 인사를 하셨습니다. 히브리 말로 ‘Shalom’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전도하러 내 보내시면서 부탁하셨던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이 집에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라고 말하여라.” (누가복음 10:5) 이 말씀 그대로, 예수님은 제자들을 찾아 오셔서 같은 메시지를 전하셨습니다. 생각해 보면, 바로 이것이 오늘날 교회가 세상에게 선포해야 할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참 안타깝습니다. 교회가 이 메시지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세상에게 줄 메시가 없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평안, 하나님의 ‘shalom’을 잃어 버렸기 때문에, 세상에게 줄 메시지를 상실하고 만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shalom’을 원합니다. 예전에 우리교회 한 벽에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준다.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라는 말씀이 쓰여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4:27 말씀이지요?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제게 말했습니다. 교회에 처음 나왔을 때 그 말씀이 퍽 인상 깊었다고요. 물론 그 때는 영어로 “Peace I leave with you, My peace I give to you; not as the world gives do I give to you”라고 KJV으로 적혀 있었습니다. 그만큼 사람들이 벽에 쓰여진 글자를 통해서도 마음에 위안을 받는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죠슈아 리브만 (Joshua Liebman)이라는 유대 랍비가 쓴 ‘마음의 평화(The Peace of Mind, 1946)’ 라는 책을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보스턴에 있는 Temple Israel에서 랍비로 있었습니다. 그가 쓴 이 책은 뉴욕 타임즈 베스트셀러 리스트에 무려 일년 동안이나 #1자리를 지켰던 책으로도 유명합니다. 이 책에 한 청년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청년은 바로 리브만 자신이었습니다. 그 청년의 이야기를 통해서 왜 자기가 이 책을 쓰게 되었는지 그 배경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청년은 자신의 미래에 대해 야심이 많았습니다. 이루고 싶은 것도 많았고 추구하고 싶은 것도 많았습니다. 건강, 사랑, 재물, 아름다움, 재능, 권력, 명예 이 모든 것을 얻는 것이 이 청년의 야심이었습니다. 한 현자가 이 청년에게 충고합니다. “여보게, 젊은이, 이 모든 것을 가진다고 해도 마음의 평화가 없이는 그대는 행복하지 않을 것이네.” 이 말에 충격을 받은 리브만은 “맞다. 우리 모두가 정말 원하는 것은 다른 어떤 것도 아닌, 마음의 평화이다. 내가 이것을 책으로 쓰리라” 이렇게 해서 1946년에 나온 책이 ‘마음의 평화 (The Peace of Mind)’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얻는 평안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잘 자라고, 공부도 잘하고, 사업도 문제 없이 순탄하게 잘 됩니다. 이렇게 아무 걱정이 없는 데서 오는 평안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평안은 그리 오래 가지 않습니다. 잠깐 동안의 평안입니다. ‘temporary peace’라고 할까요? 한 동안 별 일 없이 평안했는데 얼마 가지 않아서 걱정거리가 생깁니다. 이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평안은 이런 평안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 같지 않다”고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이 예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감동과 은혜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별 특별한 일은 아닙니다.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준다 (My peace I give to you)" 이 말씀을 읽는 순간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입니다. “아, 예수님께서 ‘나의 평안, my peace’라고 하셨으면 예수님은 자기가 가지고 있었던 그 평안을 지금 제자들에게 주시려고 하는구나!” 이런 생각을 할 때,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도 이런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마음 속에 평안을 주실 때, “아, 예수님도 지금 내가 느끼는 것과 똑 같은 평안을 느끼고 계셨구나!” 이런 생각을 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배가 됩니다.

오늘 성경을 꼼꼼하게 잘 읽어 보세요. 그렇게 두려움과 공포로 문을 걸어 잠그고 숨어 있던 제자들에게 어느 새 그 두려움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 나타나셨기 때문에요?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셨기 때문에 그랬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샬롬, 샬롬의 메시지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새 제자들의 두려움은 기쁨으로 변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전해 주신 하나님의 샬롬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As the Father has sent me, so I am sending you.”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I am sending you to the world”라고 말해야 합니다. 지금 예수님은 불안과 두려움과 걱정과 근심 속에 살고 있는 세상 사람들에게, 자기 제자들을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평화의 메시지를 듣고 지금 막 두려움을 물리친 제자들을 세상 사람들 속으로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인간에 대하여 잘 아십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연약함 (weakness)을 잘 아십니다. 우리가 얼마나 잘 넘어지는 사람들인지, 우리가 얼마나 실수투성이 사람들인지, 심지어 우리는 자기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할지도 모르는 연약한 사람들인 것을 잘 아십니다. 다시 제자들이 작은 일에도 실망하고, 절망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인 것을 잘 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을 밑바닥부터 변화된 새 사람이 되게 해서, 세상으로 내 보내려고 하십니다.

22절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성령을 받아라!” 제가 이미 여러 번 말씀 드렸습니다. 왜 성령을 받아야 하는지, 왜 우리가 성령에 대한 지식을 가져야 하는지, 그리고 성령을 받고 체험하는 일에 집중해야 하는지 이미 몇 차례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런 말씀을 알고 계십니까? “나는 물로 회개의 세례를 준다. 내 뒤에 오실 분은 나보다 능력이 더 많으신 분이다. 그 분은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I baptize with water those who repent of their sins and turn to God. But someone is coming soon who is greater than I am. He wi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and with fire).” (마태복음 3:11) 이 말씀 속에 물 세례란 말이 나오고, 성령 세례란 말이 나옵니다.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께 돌아가야 하겠다고 마음 먹은 사람들이 받는 세례가 물 세례입니다. 문제는 이렇게 마음을 고쳐 먹고, 물 세례를 받는다고 해서 이 사람이 새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잖아요? 새사람이 되는 일은 그렇게 간단하게 마음 먹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내 인생 속에 하나님의 개입이 없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이것이 성령 세례입니다. 똑 같은 뜻으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다시 태어나야 한다’라고 말한 것에 너무 놀라지 마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모든 사람도 이와 같다 (So it is with everyone born of the Spirit).”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일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가 크리스천이 아니라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면, 우리가 자기 일에 집중하고, 자기 일을 하면서 살아갈 사람들이라면 성령을 받지 않아도 됩니다. 아니, 성령을 받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살지 않겠습니다. 보다 가치 있고, 보람 있는 일을 하면서 살 것입니다. 나는 지금 나의 삶에 결코 만족하지 않습니다. 다 나은 삶을 찾고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보세요. “내가 너에게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말한 것에 놀라지 마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니고데모 (Nicodemus)라는 사람에게 한 말씀입니다. 이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아십니까? “There was a man of the Pharisees named Nicodemus, a member of the Jewish ruling council.” (요한복음 3:1) 또 니고데모에 대하여 이런 말도 나옵니다. “He was a respected Jewish teacher.” (요한복음 3:10) 바리새파 사람입니다. 유대 사회를 움직이는 70인 중 한 사람입니다. 존경 받는 랍비입니다. 그러니, 성경을 얼마나 잘 알겠습니까? 그러니, 얼마나 철저하게 경건생활을 잘 했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것들이 다 소용 없습니다. 그의 인간성이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니고데모는 그냥 그렇게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사는 삶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 온 것 아닙니까?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이대로 살고 싶으면 괜찮아요. 우리 청년들은 무난히 공부해서 학위 받고, 회사에 취직하든지, 학교에서 가르치든지 하면서 사는 것으로 만족하려면, 성령에 대하여 몰라도 상관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삶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라면, “아니, 그보다 더 가치 있는 삶이 분명히 있을 것 아닙니까?” 하고 질문을 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성령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거듭나야 합니다. 새로 태어나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사람이 하나님의 일에 눈을 뜨게 됩니다. 그래야 그 사람이 하나님의 일에 헌신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그 사람이 하나님께 쓰임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아라!” 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Nominal Christian이 있고, devout Christian이 있습니다. 전자는 이름만 가지고 있는 크리스천을 말합니다. 후자는 헌신적인 크리스천을 말합니다. 평생 nominal Christian으로 살아가려면 성령에 대하여 몰라도 됩니다. 그러나, devout Christian으로 살아가려면 반드시 성령에 대하여 알아야 합니다. 단순히 성령에 대한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을 받아야 하고, 성령을 체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인생 속에 개입해 들어오셔서 나를 새사람으로 바꾸어 놓으셔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숨을 내 쉬시면서 “성령을 받아라”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예전 크리스천들에게는 죄, 회개, 거듭남, 성령 세례, 성령 충만, 성령 체험, 이런 말들이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이런 말들이 크리스천들 사이에서, 교회에서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말 대신 세련된 다른 이슈들이 교인들의 관심을 끌었고, 목사들의 설교를 채웠습니다. “바로 이것이 크리스천의 삶의 능력을 약화 시킨 이유가 아닌가? 바로 이것이 교회의 정체성을 상실하게 만든 이유가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