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0:42-45

42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아는 것처럼 이방 사람들의 통치자라는 사람들은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한다. 고관들도 사람들에게 세도를 부린다.
43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누구든지 너희 중에서 높아지려거든 종이 되어야 한다.
44 누구든지 너희 중에서 첫째가 되려거든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45 인자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인자는 자기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왔다.”

42 Jesus called them together and said, "You know that those who are regarded as rulers of the Gentiles lord it over them, and their high officials exercise authority over them.
43 Not so with you. Instead, whoever wants to become great among you must be your servant,
44 and whoever wants to be first must be slave of all.
45 For even the Son of Man did not come to be served, but to serve, and to give his life as a ransom for many."

오늘은 세계 성만찬 주일입니다. 전 세계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들이 성만찬을 나누는 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 주시면서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고 하신 것이 성만찬의 시작입니다. 우리가 3.1절이나, 광복절 등 해마다 기념일을 지키듯이,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성만찬 예식을 자주 행하여 나를 기억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서신에 보면 바울은 자기 나름대로 예수님의 성만찬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했습니다. 우리가 성만찬에서 마시는 잔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나누는 것 (to share in the blood of Christ)’ 혹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하는 것 (to participate in the blood of Christ)’이라고 해석했고, 우리가 성만찬에서 예수님의 몸을 상징하는 한 덩어리의 빵을 떼서 나누어 먹는 사람들은 모두 한 형제요 자매라고, 우리는 한 운명의 공동체라고 해석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0:16-17).

예전에 중국에 단기 선교 가서 성만찬을 나누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미리 그곳에 있는 조선족 전도사님과 연락이 되어 세례식을 하고 성만찬 예식을 하도록 계획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 때 한 10명 정도가 세례를 받았고, 우리대원들까지 30명 정도가 성만찬을 했던 것 같습니다. 중국에 종교의 자유가 있다고 하지만, 외부 사람이 들어가서 세례를 주거나 성만찬을 하지 못하도록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약간은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먼저 세례를 베풀고 성만찬을 나누었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나를 위해서 흘리신 피이고, 이것은 주님의 몸입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포도주와 빵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그것을 받아 들고 훌짝훌쩍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여기 저기서 포도주와 빵을 받아들고 훌쩍훌쩍 울었습니다. 마침내 그 자리가 울음 바다가 되고 말았습니다. 성만찬 예식을 진행하던 저도 가슴이 뭉클해져서 진행을 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품에 안아주면서 “주님, 이 사람들이 이제 세례를 받았으니, 이제 어떤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는 진실한 예수님의 제자로 살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했는데, 그 때의 감동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님의 성만찬을 나눌 때 그런 감격이 없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예수님을 처음 믿었던 우리의 선조들에게 성만찬 예식은 너무나 귀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성만찬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없었습니다. 목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기독교는, 처음에 ‘서학(西學)’이라는 이름으로 들어왔습니다. 여기서 기독교는 천주교를 말합니다. 이론적인 학문보다 실용적인 학문을 고대했던 이벽, 정약전, 권철신, 정약용 등이 적극적으로 서학을 받아들였습니다. 이들은 이승훈이라는 사람을 중국 북경으로 보냈습니다. 그 때가 1784년이었습니다. 이승훈은 북경에서 프랑스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돌아왔습니다. 그 때부터 은밀하게 신자들의 공동체가 생겼습니다. 나중에 선교사들이 들어와서 깜짝 놀랐습니다. 이미 신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 신자들이 가장 갈망했던 것이 세례 받고 성만찬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조선의 신자들은 선교사들을 초청해서 세례를 받고, 성만찬을 받았습니다. 한 밤 중에, 어디서 신자들이 기다린다는 소식을 듣고 선교사들은 갓을 쓰고, 두루마기를 입고, 조선인처럼 변장을 하고 신자들에게 가서 세례를 주고, 성만찬을 베풀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고 하셨습니다. 성만찬의 핵심은 예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예수님을 ‘remember (기억하다)’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가 내 몸 속에 흐르게 하고, 예수님의 몸을 상징하는 빵으로 먹음으로써 예수님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만찬 예식을 하는 목적은,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서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맺어진 ‘새로운 계약 (the New Covenant)’ 속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삼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합당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처럼 산다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을 의미할까요?” 누가 저에게 질문한다면 저는 주저하지 않고 마가복음 10:45에 나오는 말씀처럼 사는 것이라고 대답하겠습니다. “인자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인자는 자기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왔다 (For even the Son of Man came not to be served but to serve others and to give his life as a ransom for many."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제자들은 장차 누가 더 높은 사람이 될 것인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자주 논쟁을 벌였습니다. 어떤 제자는 예수님께 와서 저를 높은 자리에 앉게 해 달라고 노골적으로 부탁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권력을 가지고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한다. 그러나, 너희는 그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누구든지 높아지기를 원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종이 되어야 한다 (Whoever wants to be a leader among you must be your servant). 인자도 (나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내 생명을 몸값으로 주려고 왔다.”

어떻습니까? 이 말씀 속에 예수님의 삶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저는 예수님처럼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 말씀 속에 모두 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무엇보다도 섬기는 삶을 사셨습니다. 섬김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 사람의 본능(本能)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신 분이지만 섬김을 받고 싶다는 생각을 내려 놓았습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시몬아, 내가 네 집에 들어왔을 때, 너는 나에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인은 자신의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자신의 머리털로 닦아 주었다. 너는 내게 입맞추지도 않았지만, 이 여인은 내가 들어왔을 때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쉬지 않았다. 너는 내 머리에 기름도 붓지 않았지만, 이 여인은 향유를 내 발에 부었다.” (누가복음 7:44-46)

이 말씀에 나오는 시몬은 베드로가 아니라 바리새인 시몬입니다. 이 말씀 속에 ‘발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 ‘내게 입맞추지 않았다’ ‘내 머리에 기름도 붓지 않았다’ 이런 표현들은 우리의 문화적인 관습에서는 매우 낯설고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 유대나라의 관습에 의하면 이런 행위는 종이 주인울 섬기는 표시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자신의 섬김의 삶을 선언하셨습니다. “식사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과 그를 시중드는 사람 가운데 누가 더 큰 사람이냐? 식사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 있다 (Who is more important, the one who sits at the table or the one who serves? The one who sits at the table, of course. But not here! For I am among you as one who serves).” (누가복음 22:27) 저에겐 “But not here (하지만, 여기서는 아니다)!” 이 말씀이 무척 감동적으로 다가옵니다. 세상에서는 앉아서 먹는 사람이 높은 사람이고 서서 서브하는 사람이 낮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섬기는 자로 서 계시는 이 자리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이 선포된 이 자리에서는 먹는 사람이 결코 높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서 서브하는 사람이 결코 낮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이렇게 세상의 가치관이 뒤집혀 새로운 가치관이 탄생합니다.

초대교회 목사 중 한 사람인 이자익 목사에 대한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그는 1882년 경남 남해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친척집을 떠돌며 살다가, 전북 김제시의 부자였던 조덕삼을 만나 그 집에 머슴으로 들어갑니다. 조덕삼은 자신의 집에서 머슴으로 있으면서 틈틈이 어깨너머로 한글과 한자공부를 하는 이자익의 성실함을 눈여겨 봤습니다. 이러다가 이 마을에 최의덕 (Lewis Boyd Tate) 선교사 오게 되어, 두 사람은 1905년 10월 11일 함께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두 사람이 합심하여 1908년에 세운 27평짜리 금산ㄱ자 예배당은 전북 문화재 자료 136호로 지정되어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있다고 합니다. 소학교도 변변히 다니지 못한 머슴 이자익과 주인 조덕삼이 한 날한 시에 세례 받고, 같이 성만찬에 참여하고, 같이 교회 창립 멤버가 되고, 같이 교회를 세웁니다. 그리고, 1907년, 두 사람은 함께 교회의 집사로 임명됩니다. 그러던 어느날, 교회에서 장로를 선출하는 투표를 실시하게 되었습니다. 교인들은 당연히 조덕삼이 먼저 장로가 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정반대로 나왔습니다. 이자익이 조덕삼을 이기고 장로로 추천된 것입니다.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나왔습니다. 이 때, 조덕삼은 그 자리에서 발언권을 얻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 결정은 하나님이 내리신 결정입니다. 우리 금산교회 교인들은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냈습니다. 저희 집에서 일하고 있는 이자익 집사는 저보다 신앙이 더 깊은 사람입니다. 나는 교회의 결정에 순종하고, 이자익 장로를 받들어 열심히 교회를 섬기겠습니다.”

조덕삼 집사는 약속대로 이자익 장로를 잘 섬겼다고 합니다. 당시는 교역자들이 부족한 때여서 이자익 장로가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하는 일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때에도 조덕삼 집사는 앞자리에 앉아 겸손하게 이자익 장로의 설교를 들었다고 합니다. 집에 돌아와서는 주인과 종의 관계로 지내고, 교회에 가서는 반대로 장로와 집사의 관계로 자신들의 직분에 충실했다고 합니다. 조덕삼은 자신보다 아홉 살이나 어리고, 자기 집의 머슴인 이자익이 평양 신학교를 졸업하고, 1915년 금산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해 내려왔을 때에도, 그를 담임 목사로 정중히 모셨다고 합니다. 놀라운 것은, 이자익이 신학공부를 마칠 수 있도록 학비를 내 준 사람이 조덕삼 장로였다고 합니다. 이들의 삶이 아름답고 감동적인 이유는 이들의 삶이 예수님의 섬김의 삶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섬긴다는 것은, 이론(理論)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섬김은 매우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일이었습니다. 섬김의 삶은 자기 희생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섬김의 삶은 자기 목숨을 ‘대속물 (ransom)’로 내주심으로서 증명되었습니다. 말로만 섬김의 삶을 주장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우리를 위해서 ‘ransom’으로 내 놓으셨습니다.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 목숨을 우리의 몸값으로 지불하신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죄의 용서를 받고, 하나님과 화목(和睦)한 (reconciled)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reconcile’이란 말은 ‘re (again)’ + ‘conciliate (make friend)’이란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ransom’으로 지불하신 덕분에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하나님과 친구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세계 성만찬 주일을 맞이해서 섬기는 분으로 오신 예수님에 대한 말씀을 읽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John D. Godsey 라는 사람이 본회퍼의 신학에 대하여 이런 글을 썼습니다. “In Bonhoeffer’s theology, there is an intimate relationship between Jesus Christ and the church. In his letters from prison Bonhoeffer spoke of Jesus as “the man for others.” And in parallel fashion he wrote that the church is truly the church only when it exists for others. Just as Jesus lived his life completely for others (even unto death on the cross), so the church is to serve God by serving the world of need.” “본 회퍼의 신학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본 회퍼는 감옥에서 쓴 편지에서 예수님을 ‘다른 사람을 위해 산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같은 의미에서 본회퍼는 교회는 오직 다른 사람을 위해서 존재할 때만 진정한 교회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기까지 다른 사람을 섬기셨던 것처럼, 교회도 세상의 필요를 채워 줌으로써 하나님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교회는 이 간단한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교회마다 멋있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기에 바빴습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의 목사님들은 선진국에서 배워야 한다고 하면서 미국의 큰 교회들, 예를 들면 Rick Warren 목사의 Saddleback Community Church나 Bill Hybels 목사의 Willow Creek Church를 앞다투어 방문하고 그 교회에서 하는 프로그램들을 벤치마킹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그런 노력들이 지금에 와서 모두 부질 없는 것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으로부터 50여년 전에 두 사람의 신학자가 같은 시기에 예언자적인 글을 써냈지만 아무도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요한네스 호켄다이크 (J. C. Hoekendijk, 1912-1975)라는 네델란드의 선교 신학자가 ‘The Church Inside Out (영문판 1966, 한글판 1975)’이라는 책을 냈고, 한스 큉 (Hans Küng, 1928- )이라는 카톨릭 신학자는 일년 뒤인 1967년에 ‘The Church’라는 책을 냈지만, 아무도 그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두 신학자는 모두 교회가 이대로 가면 미래가 없다고 전망했습니다. 교회가 섬김을 받으려고 하지 말고, 섬기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 교회의 구조 (structure)를 섬기는 구조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아무도 듣지 않았습니다.

교회의 미래는 이제 이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 (the people of God)’입니다. 교회의 미래는 여러분들이 예수님의 섬김의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전적으로 달려 있습니다. 누구 다른 사람 말할 것 없습니다. 교회의 미래는 어느 훌륭한 목사에게 달려 있지 않습니다. 한국과 미국의 큰 교회에게 달려 있지도 않습니다. 교회의 미래는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여러분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은 왜 공부를 합니까? 학위 받고 좋은 직장에 가서 남보다 더 많은 샐러리를 받고,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하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공부합니까? 바로 그런 생각이 섬김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의 생각입니다. 대단히 미안하지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올바른 생각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이런 생각을 내려 놓지 않으면 교회의 미래는 없습니다. 오늘 예배 드리는 여러분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행할 때마다 나를 기억하라!” 포도주 잔을 들면서 예수님의 피가 나의 핏줄에 흐르게 하고, 빵을 먹으면서 예수님의 삶이 나의 삶이 되기를 소망하면서, 내가 깨어나지 않으면 교회의 미래는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예수님의 섬김의 정신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교회의 생명은 살아나고, 세상은 다시 교회에게 소망을 둘 것입니다. 오직 이 한 길 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