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2:13-17

13 이 세상의 권위를 가진 사람들에게 복종하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이 주님을 위한 것입니다. 최고의 권위를 가진 왕께 복종하십시오.
14 또한 왕이 보낸 관리에게도 복종하십시오. 그들은 잘못된 사람을 벌하고 옳은 일을 하는 사람에게 상을 주라고 보냄을 받은 자들입니다.
15 여러분이 선하게 행동할 때, 어리석은 사람들은 여러분에 관해 더 이상 험담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16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그러나 자유를 잘못 사용하여 악을 행하는 구실로 삼지는 말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 생활하십시오.
17 모든 사람을 존중하고, 하나님 안에서 형제 자매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왕을 존경하십시오.

13 For the Lord's sake, respect all human authority - whether the king as head of state,
14 or the officials he has appointed. For the king has sent them to punish those who do wrong and to honor those who do right.
15 It is God's will that your honorable lives should silence those ignorant people who make foolish accusations against you.
16 For you are free, yet you are God's slaves, so don't use your freedom as an excuse to do evil.
17 Respect everyone, and love your Christian brothers and sisters. Fear God, and respect the king.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예배를 드리고 난 후에, 계속해서 저의 마음에 남아 있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이 세상에 나가서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하는 삶의 방식에 대한 것입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크리스천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은 착하게 사는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 크리스천들이 세상에서 영향력을 상실한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이 사람들이 교회에서 비난 받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교회에서는 믿음 좋다고 칭찬을 받는데, 세상에 나가서는 비난을 받습니다. 우리 주변이 그런 사람들로 넘치고 있습니다. 교회 돈을 잘못 사용하고, 비윤리적이고 부도덕한 문제에 연루되어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서도 교회에 돌아와서는 사탄이 자신을 공격하고 있다고 하고, 자신에게 아무 잘못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고난을 받고 있다고 설교하는 목사들이 있습니다.

잘못을 저지르고 나서도 회개하지 않습니다. 공부를 한 사람들은 ‘표절 (plagiarism)’이 얼마나 중대한 범죄인지 잘 압니다. 자신의 학위 논문을 자신이 쓰지 않고 다른 사람을 시켜서 썼다면 그것이 얼마나 중대한 범죄이고, 수치스러운 일인지 잘 압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럴 수도 있다는 듯이 당당한 태도를 보입니다. 문제는 그런 사람들이 교회에서 지도자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사람들의 비행이 일간 신문에 게재될 때마다 얼마나 교회가 비난을 받겠습니까? 저는 목사들이 모이는 한 모임에 갔다가 정말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지 못한 적이 있습니다. 그 목사들이 모여서 한다는 말이 지금 한국에서 정부와 언론이 작심하고 개신교를 핍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한다는 말이 천주교나 불교가 잘못한 기사는 신문에 싣지 않고 교회가 잘못한 일만 집중적으로 보도를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교회가 잘못했으면 철저하게 회개하고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목사들이 더욱 조심을 해야 하는데, 교회가 핍박을 받고 있다니, 이게 말이 되는 것입니까?

베드로가 크리스천 디아스포라들에게 편지를 썼을 때, 그들은 낯선 나라, 낯선 문화권 속에 들어가 살고 있었습니다. 소아시아 지방에 살고 있던 주민들은 크리스천들이 무엇을 믿고, 어떤 삶을 사는지 그들의 행동을 주시했을 것입니다. 이상한 사람들이 들어 왔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자기들 하고 다른 습관과 행동들을 비난했을 수도 있습니다. 지난 주에 읽었던 베드로전서 2:12 말씀이 바로 그런 상황을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주위에는 믿지 않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여러분이 잘못 살고 있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착하게 사십시오. 그들이 여러분의 선한 행동을 보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릴 것입니다.”

이 말씀에 나오는 ‘선한 행동’이라는 말은 ‘good deeds (착한 행동, NIV, NASB, NKJV)’ 혹은 ‘honorable behavior (칭찬 받을만한 행동, NLT)’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이 어떤 상황과 어떤 환경 속에서도 ‘good deeds’를 계속하고, ‘honorable behavior’를 계속하면 결국 비난하던 사람들도 더 이상 비난을 하지 않게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New Living Trnanslation으로 성경을 읽다가 에베소서 2:10 말씀을 새롭게 발견했습니다. ‘아, 이 말씀이 그런 뜻이었구나!” 하면서 많은 은혜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For we are God's masterpiece. He has created us anew in Christ Jesus, so we can do the good things he planned for us long ago.”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 ‘masterpiece’라고 합니다. ‘masterpiece’는 한 작가의 대표작을 말합니다. 헨델의 masterpiece는 오라토리오 ‘메시야 (Messiah)’입니다. 르네상스 작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masterpiece는 ‘최후의 만찬’ ‘모나리자’ 등입니다. 미켈란젤로의 masterpiece는 시스티나 성당 (Aedicula Sixtina)의 천정에 그린 ‘최후의 심판’입니다. 1508-1512년까지 4년에 걸쳐 완성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조각가로서 명성을 얻게 한 ‘다윗 상’ 등입니다. ‘다윗 상’는 3년에 걸쳐 완성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에베소서 말씀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masterpiece’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공들여 창조하셨으니까 ‘masterpiece’라는 말을 썼겠구나 하고 생각할 수 있지만, 에베소서 말씀을 잘 보면 “He has created us anew in Christ Jesus”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신 것입니다.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화목제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는 엄청난 희생을 치르시고,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masterpiece’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말씀이 중요합니다. “so we can do the good things he planned for us long ago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오래 전부터 계획하신 선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가장 안타까운 일 중의 하나는, 자기가 구원 받은 것을 감사하는 사람들은 많은데, 하나님께서 자기를 구원하신 목적이 선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베드로가 쓴 두 번째 편지에 왜 우리가 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그 이유가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 믿음만 있으면 그만이라고 여기고 더 이상 아무 것도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장님이든지 심한 근시안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께서 선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죄에 물든 옛 생활에서 구원해 주셨다는 것을 까맣게 잊어버린 사람입니다 (But those who fail to develop in this way are shortsighted or blind, forgetting that they have been cleansed from their old sins).” (베드로후서 1:5-9)

저는 오늘 베드로전서 본문 말씀을 묵상하면서, 크리스천의 선한 삶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삶을 말하는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로, 크리스천의 삶은 모든 사람들과 평화롭게 사는 삶입니다. 17절 말씀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을 존중하고, 하나님 안에서 형제 자매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왕을 존경하십시오 (Respect everyone, and love your Christian brothers and sisters. Fear God, and respect the king).” 또 13-14절 말씀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의 권위를 가진 사람들에게 복종하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이 주님을 위한 것입니다. 최고의 권위를 가진 왕께 복종하십시오. 또한 왕이 보낸 관리에게도 복종하십시오. 그들은 잘못된 사람을 벌하고 옳은 일을 하는 사람에게 상을 주라고 보냄을 받은 자들입니다.”

아마도 여러분 중에 이 말씀을 들으면서 “이게 크리스천의 삶 맞나?”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크리스천은 불의에 항거하고, 복종하지 않아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오늘 말씀에 그런 구절이 한 절도 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세상의 권위를 가진 사람들에게 복종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의 행간(行間)을 잘 읽어 보면 아무 조건 없이 권위를 가진 사람들에게 복종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자기에게 주어진 권위를 잘 사용할 때 그들에게 복종하라고 합니다 (14절).

성경 어디에도 폭력을 정당화 한 곳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시몬’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특이 하게도 이 사람은 ‘열심당 (the zealot)’ 출신입니다 (누가복음 6:15). 우리 개념으로 하면 과격한 애국 주의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길은 폭력 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살인도 정당화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이런 열심당 출신의 시몬이 무엇을 어떻게 했다는 행적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는 열 두 제자의 명단에 이름만 나올 뿐, 별 다른 활동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시몬이 예수님의 제자로 3년을 동행하면서 예수님에게서 발견한 것은, 지금까지 가져왔던 자신의 신념이 옳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몬은 자신이 살아왔던 삶의 방식을 버리고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삶의 가치를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는 그 누구도 성경에서 폭력을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인도의 위대한 영혼 ‘마하트마 (Mahatma)’로 칭송을 받는 간디 (Manilal Gandhi, 1869-1948)가 성경에서 배운 것은 ‘비폭력 무저항’이었습니다. 간디는 ‘비폭력 무저항운동’으로 결국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얻어냈습니다. 미국의 뉴욕타임즈 (1999년 4월 18일 자)는 지난 1천 년 간의 최고의 혁명으로 영국의 식민통치에 저항한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운동을 선정하였습니다. 간디에게서 영향을 받은 마틴 루터 킹 목사님 (Martin Luther King Jr., 1929-1968)은 결국 흑인들이 차별 받고 있는 사회를 개선하고, 흑인들의 지위를 향상 시키는데 공헌했습니다.

영화 ‘Amazing Grace’로 유명한 윌리엄 윌버포스 (William Wilberforce, 1759-1833)는 영국에서 노예무역법을 폐지하기 위해 자기 인생을 드린 사람입니다. 그는 이 법을 폐지하기 위해서는 자기가 정치인이 되는 길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21살의 나이에 하원 의원이 됩니다. 그리고, 1787년에 처음으로 의회에 노예무역폐지법을 제출합니다. 그 때는 18세기 영국은 수입의 1/3을 노예 무역으로 벌어 들였다고 합니다. 의회는 그가 제출한 법안을 보기 좋게 부결시킵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사람들을 만나 설득해 갑니다. 그리고 지지자들을 만듭니다. 그리고 마침내 1807년에 영국에서 노예무역법이 폐지 됩니다. 무려 20년만에 그가 의회에 제출한 법안이 통과 됩니다.

이것이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 중에 가장 두드러진 것입니다. 크리스천은 어디를 가든지 모든 사람들과 평화롭게 살아갑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어도 폭력으로 세상을 바꾼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성격이 급한 사람은 성경에 나와 있는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상 한번도 폭력으로 세상을 바꾼 역사는 없습니다. 크리스천은 할 수만 있으면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냅니다. 이것이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입니다.

둘째로, 크리스천은 사랑으로 악을 이긴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것이 두 번째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입니다. 여러분, 고린도전서 16:14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Do everything in love.” (NIV) “Let all that you do be done in love.” (NASB) “Do everything with love.” (NLT) 크리스천은 무슨 일을 하든지 그 동기가 사랑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랑이 동기가 되어서 시작하고, 사랑으로 그 일을 진행해야 하고, 사랑으로 그 일을 마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로마서 12:20-21에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원수가 먹을 것이 없어 굶고 있으면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 하면 마실 것을 주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은 그의 머리 위에 숯불을 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

이것이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인데, 여러분들은 이런 방식으로 상대방의 머리에 숯불을 쌓은 경험이 있습니까? 아니면, 악으로 악을 이긴 경험이 더 많습니까? 악으로 악을 이기는 것은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이 아닙니다. 오히려 선으로 악을 이기고, 사랑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입니다. 로마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당시 극심한 핍박을 받고 있던 기독교가 서기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 국교로 공인을 받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게 되었을까요? 아니, 그 이전까지 그렇게 기독교를 핍박했던 로마가 어떻게 하루 아침에 로마가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종교가 되었을까요?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안 됩니다. 콘스탄틴 황제 바로 직전의 황제가 디오클레티안 (Diocletianus, 284-305) 황제였습니다. 이 때가 가장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심했을 때입니다. 디오클레티안 황제는 아예 기독교를 박멸하려는 계획을 세웠었다고 합니다. 이 때는 로마가 내부에서부터 분열되어 통치 기반이 제일 허약했을 때이기도 했습니다. 그 뒤를 이어 황제의 자리에 오른 콘스탄티누스 (Flavius Valerius Constantinus, 306-337) 황제는 분열된 로마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것은 기독교 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기독교를 공인했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그 때는 로마의 궁중에까지 기독교인들이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기독교에 대한 로마의 박해는 극심했지만, 기독교인들은 결국 사랑으로 로마를 정복했습니다.

선한 행동으로 험담하는 사람들의 입을 막고 (15절), 선으로 악을 이기며, 모든 사람을 존중하고,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사는 것이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16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그러나 자유를 잘못 사용하여 악을 행하는 구실로 삼지는 말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 생활하십시오 (For you are free, yet you are God's slaves, so don't use your freedom as an excuse to do evil).” 크리스천은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인으로 살지만, 하나님께 얽매인 ‘God’s slaves’입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악을 정당화 할 수 없습니다. 성경이 이렇게 말하고 있는 그 배경에는 오직 하나님만이 모든 것을 판단하시고, 심판하실 수 있다는 믿음이 깔려 있습니다 (로마서 12:19).

오늘 말씀에 비추어 지금의 우리의 삶을 반성해 봐야 하겠습니다. “나는 크리스천으로서 올바로 살고 있는가?” 이 질문을 우리 스스로에게 던져야 합니다. 내가 있는 곳에서, 어떤 상황이나 환경 속에서도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을 포기하지 말고 꾸준하게 살아야 합니다. 오늘 베드로전서에 나오는 이 말씀은 무슨 말씀입니까? 2,000년 전에, 베드로가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에게 제시했던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 아닙니까? 여러분들이 그곳에 살아가면서 이 삶의 방식대로 살라는 것 아니었습니까?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결국 이 삶의 방식이 옳고, 결국 이 삶의 방식이 세상을 바꾼다라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인간관계 속에서 부딪치는 사람도 만나게 되고, 때로는 나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도 만나게 됩니다. 이 때 명심해야 할 것은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은 악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을 사랑으로 이기고, 선으로 이기는 것입니다. 그들의 머리 위에 숯불을 쌓는 것이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