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3:14-18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높이 들었던 것처럼 인자도 들려야 한다.
15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들에게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해서이다.
16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여 독생자를 주셨다. 이는 누구든지 그의 아들을 믿는 사람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다.
17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이 아니라, 자기 아들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아들을 보내신 것이다.
18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사람은 유죄 판결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그를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유죄 판결을 받은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14 And as Moses lifted up the bronze snake on a pole in the wilderness, so the Son of Man must be lifted up,
15 so that everyone who believes in him will have eternal life.
16 "For God loved the world so much that he gave his one and only Son, so that everyone who believes in him will not perish but have eternal life.
17 God sent his Son into the world not to judge the world, but to save the world through him.
18 "There is no judgment against anyone who believes in him. But anyone who does not believe in him has already been judged for not believing in God's one and only Son.

오늘은 대강절 세 번째 주일입니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이 때 사랑을 상징하는 핑크색의 촛불을 켰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이 땅에 들어왔다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 세상은 참된 사랑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바라 보아야 합니다. 시간은 멀리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생활하던 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사랑의 전형적인 (typical) 예를 찾아 보기 위해서 그 때 있었던 한 가지 사건을 되돌아 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광야에서 40년 동안 생활하면서 인간성의 본 모습이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바로 불평과 원망입니다. “왜 우리를 이런 곳으로 데리고 왔느냐?” “먹을 것이 없지 않느냐?” “마실 물이 없지 않느냐?” “우리를 이곳에 매장 시킬 셈이냐?” “이 형편없는 음식은 이제 지긋지긋합니다.” 백성의 지도자였던 모세와 아론을 향한 이런 원망은 곧 하나님께 대한 원망이었습니다. 이것은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자기들을 해방 시켜서 조상들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전면적으로 부정(否定)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지 아시지요? 우리 입에서 불평과 원망이 얼마나 자주 나옵니까? 우리 입에서 불평과 원망이 나올 때 아주 조심해야 합니다. 빌립보서 4:6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이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은 ‘감사함으로’ 이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Don't worry about anything; instead, pray about everything. Tell God what you need, and thank him for all he has done.”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감사의 마음은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나에게 해 주신 일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입니다. 불평과 원망의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여기까지 인도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하고 원망하는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어디서 ‘불뱀들 (poisonous snakes)’이 나타났습니다. 여기저기서 ‘불뱀’에 물린 사람들은 쓰러져 죽어갔습니다. 다급한 사람들은 모세에게 와서 하나님께 기도해서 우리를 살려 달라고 간청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기도를 들어 주셨습니다. “구리뱀을 만들어서 장대에 매달아라. 뱀에 물린 사람은 그것을 쳐다보면 살 것이다.” (민수기 21:9) 모세는 구리뱀을 만들어 장대에 매달았습니다. 그것을 쳐다 보는 사람은 모두 살아났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So Moses made a snake out of bronze and attached it to a pole. Then anyone who was bitten by a snake could look at the bronze snake and be healed!” ‘구리로 만든 뱀’으로부터 무슨 능력이 나왔습니까? 장대에 매달린 ‘구리뱀’을 쳐다 본 사람들은 누구나 다 나았습니다. ‘불뱀’에 물린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은 낫고, 어떤 사람은 낫지 않았습니다. 모세의 말대로 ‘구리뱀’을 쳐다 본 사람들은 나았고, 그러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As Moses lifted up the bronze snake on a pole in the wilderness, so the Son of Man must be lifted up, so that everyone who believes in him will have eternal life.” (14절) ‘The Son of Man (인자)’는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lifted up’이란 말은 ‘lifted up on the Cross’라는 말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볼 수 있도록 십자가 위에 매달리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 때 십자가 위에 달리신 그분을 보고 믿는 사람은 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이 ‘Good News’입니다. 아주 쉬운 ‘구원의 길’이 모든 사람들에게 열렸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어린 주일학교 어린이들도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믿으면 구원을 얻습니다. 연세가 많으신 분들도, 학자들도, 공부를 많이 하지 않은 사람들도,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권력이 있는 사람도 없는 사람도, 누구나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 보면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저 분이 나를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 매달리셨다’ 사실을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 뒤에 이어지는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여 독생자를 주셨다. 이는 누구든지 그의 아들을 믿는 사람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다.” (16절) 이 말씀은 개역성경으로 읽어야 제 맛이 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16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inspite of)’의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랑의 대상으로 삼으신 ‘세상’은 우리가 살고 있는 구체적인 ‘세상’입니다. 지금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 중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실만한 일들이 있습니까? 세상은 날로 발전하고 있지만, 점점 하나님과 멀어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즘은 AI (Artificial Intelligence)가 화제입니다. “도대체 AI가 어디까지 발전할 것인가?” 며칠 전 신문에서 ‘AI가 쓴 해리포터 (Harry Potter)’라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해리 포터’는 영국 작가 조앤 롤링 (Joanne K. Rowling)이 쓴 판타지 소설입니다. 모두 7편으로 끝이 난 소설입니다. 그런데 AI가 후속편을 썼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을 하나님은 사랑의 대상으로 삼으시고, 구원의 대상으로 삼으신다는 것입니다. 설교자인 저의 입장에서 보면, 그만큼 세상에 대한 교회의 책임과 사명은 막중해졌습니다. 지금의 목회 형식과 교회에 대한 고정 관념을 가지고는 변화된 세상을 책임질 수 없습니다. 불과 10년 후만 되어도 세상은 지금과 비교할 수 없는 세상으로 발전되어 있을 것입니다.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세상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입니다. 이런 세상에 대한 교회의 메시지는 과연 무엇인가? 우리는 이 질문에 대답을 준비해야 합니다.

둘째로, 요한복음 3:16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먼저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할만한 능력도 없고,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신 것입니다.

셋째로, 요한복음 3:16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구체적인 사랑’입니다. 말로만 하신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구체적으로, 그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 주신 사랑이었습니다. 성경에는 ‘His one and only Son (NLT, NIV)’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번역 성경에 보면 ‘His only begotten Son (NASB)’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우리 말로 ‘독자’ 혹은 ‘외아들’이라는 말이 좋겠네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자’ ‘외아들’이었습니다. 이 ‘외아들’을 우리를 위해서 세상에 보내 주신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은 거부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목수 부부를 통해서 태어나셨습니다. 모든 것이 갖추어진 가정에 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 그가 태어나셨을 때 베들레헴 작은 마을에 방이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2:7). 그래서 포대기에 싸서 말구유 (mager)에 뉘어야 했습니다. 만일 여러분을 낳은 어머니가 그런 형편이었다면 두고 두고 가슴이 아팠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잘 읽어 보면, 우리의 생각이 바뀝니다. 아기를 낳았는데, 어디 마땅히 뉘일 곳이 없어서 포대기에 싸서 말구유에 뉘어 놓은 것이 우리에게는 참 안 됐고, 가슴이 아픈 일이지만, 성경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오늘 다윗의 마을에 너희를 위하여 구세주께서 태어나셨다. 그는 곧 그리스도 주님이시다.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볼 것인데,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증거이다.” (누가복음 2:11-12) 우리에게는 불행하게 보이는 일도 성경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불행한 일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일들이 됩니다.

아무 것도 사랑할만한 것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것도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자기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들은 ‘십자가에 매달려 (lifted up on the cross)’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를 화해 시키는 ‘화목제물 (ransom)’이 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찬송가 304장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은 F. M. Lehman이라는 사람이 가사를 썼습니다. 그는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했습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하네...... 죄 범한 영혼 구하려 그 아들 보내사 화목 제물 삼으시고 죄 용서하셨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 어찌 다 쓸까 저 하늘 높이 쌓아도 채우지 못하리. (후렴)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네.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The love of God is greater far Than tongue or pen can ever tell; It goes beyond the highest star, And reaches to the lowest hell; Oh love of God, how rich and pure! How measureless and strong!” (그 하나님의 사랑은 얼마나 크고 위대한지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고 글로도 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위로는 별 위에까지, 아래로는 지옥에까지 미치는, 오, 측량할 수 없는 강한 하나님의 사랑! 얼마나 풍성하고 순결한지요!) “Nor could the scroll contain the whole, Tho' stretched from sky to sky. Oh love of God, how rich and pure! How measureless and strong!” (비록 두루마리를 하늘에서 하늘까지 펼친다고 해도 다 쓸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은 얼마나 풍성하고 순결한지요!)

성경을 쓴 저자들은 모두 이 하나님의 사랑 앞에 감격합니다. 그리고, 이 사랑을 받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성경에 기록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8) “But God showed his great love for us by sending Christ to die for us while we were still sinners.” (New Living Translation) 저와 여러분은 지금 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죄인들을 위해 자기 아들을 화목제물로 내 주신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 앞에 우리 자신들을 돌아 보아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10,000 달란트 빚진 사람의 이야기 (마태복음 18:23-34)’를 아십니까? 이 이야기에 나오는 이 사람이 바로 내가 아닌지 나 자신을 돌아 보아야 합니다. 자기는 10,000 달란트 (375 tons or 340 metric tons of silver)의 빚을 갚지 않아도 좋다는 은혜 입었으면서 자기에게 100 데나리온 (약 3개월치 임금에 해당) 빚진 사람을 용서하지 않고 감옥에 집어 넣은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 사람처럼 그렇게 살고 있지 않습니까?

“사랑이 내려 왔습니다 (Love came down)!”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진실한 사랑이 어떤 것인지 보여 주시려고, 사랑이 내려 왔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요한은 그의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This is real love - not that we loved God, but that he loved us and sent his Son as a sacrifice to take away our sins. Dear friends, since God loved us that much, we surely ought to love each other (이것이 진실한 사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그 아들을 화목제물로 주신 그 하나님의 사랑이야말로 진실한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요한일서 4:10-11) “우리는 말로만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사랑은 진실해야 합니다. 우리는 행함으로써 그 사랑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진리에 속하였음을 알 수 있게 되며, 하나님 앞에서도 평안할 수 있게 됩니다.” (요한일서 3:18-19)

요한복음 3:16 말씀은 하나님의 복음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증거할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 실천해야 합니다. 축구 (football) 선수 중에 팀 티보우(Tim Tebow)라는 쿼터백 선수가 있습니다. 그는 플로리다 대학 축구에서 이미 역전승의 기적을 일으키는 선수로 유명했습니다. 그는 아이패치에 John 3:16이라고 쓰고 경기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대학을 졸업하고 프로팀에 입단할 때는 말들이 많았습니다. 티보우는 패싱이 약하고 정확하지 않기 때문에 대학축구에서는 통했지만, 프로팀에서는 통하지 않을 것이라고 혹평을 하는 전문가들이 많았습니다. 그를 데려가는 프로팀이 없을 것이라고들 했지만, 2010년에 그는 덴버 브롱코스 (Denver Broncos)에 입단합니다. 프로팀에서는 아이패치에 아무 것도 쓸 수 없다는 규정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John 3:16이라는 숫자를 쓰는 대신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티보잉 (Tebowing)’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냅니다.

2012년 1월 8일 결승전으로 가는 길목에서 만난 피츠버그 스틸러스 (Pittsburgh Steelers)와의 경기에서 3쿼터까지 점수가 23:23이었습니다. 티보우는 4 쿼터에서 다시 기적을 일으킵니다. 티보우는 전문가들이 약하다고 지적했던 패싱으로 터치다운을 성공 시킵니다. 그 경기에서 기록한 10개의 패싱 총 길이가 316 야드였습니다. 평균 31.6 야드였습니다. 그날 그 경기 시청률이 31.6%였다고 합니다. 덴버가 승리한 후에 구글에서 도대체 요한복음 3:16에 무슨 말씀이 나오는지 무려 1억 2 천 번이나 검색되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모두 티보우처럼 드라마틱하게 요한복음 3:16 말씀을 세상에 알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살고 있는 삶의 현장에서 세상 사람들에게 각자에게 주시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알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티보우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아내에게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사랑합니다' 라고 말하는 것처럼, 저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주님께 사랑을 고백하며 그 분을 자랑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