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6/2020 | In Times Of Trouble 3

주여, 나의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 O Lord, Listen Closely To My Prayer

시편 86:1-12

오늘 시편 말씀은 다윗이 쓴 시편입니다. 성경에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데요. 그 중에서 다윗처럼 매력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사도행전 13:22에 다윗에 대한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는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다. 그가 내 뜻을 다 이룰 것이다 (I have found David son of Jesse, a man after my own heart. He will do everything I want him to do).” 이 말씀은 사무엘상 13:14에 나오는 말씀을 인용한 것인데요. 이 말씀의 배경을 모르고 읽으면 괜찮은데요. 알고 읽으면 소름이 끼치는 말씀입니다. 그 당시 제사장직을 감당하던 사무엘이라는 사람이 사울 왕을 찾아갔습니다. 사울은 왕이 된 처음에는 겸손하고 괜찮은 사람으로 나오는데요. 점점 그는 교만한 사람으로 변해가고, 왜 그런지 그의 마음은 초초해 지기 시작합니다. 어느 날 사울은 블레렛 사람들과 전쟁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전쟁에 특화된 사람들입니다. 그 때 벌써 철기 문화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쇠로 만든 칼과 창을 사용했습니다. 숫자도 많고요. 이에 반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합지졸들이었습니다. 쇠로 만든 칼을 사용하는 사람은 사울왕과 그 아들 요나단 정도였습니다 (사무엘상 13:22). 

이런 블레셋 사람들과 전쟁을 하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큰 두려움이었습니다. 멀리 블레셋 군인들이 보이는데, 한 눈에 봐도 수가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습니다. 그걸 본 이스라엘 군대는 겁을 먹고 있었습니다. 탈영병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상황인데 사무엘이 오지 않습니다. 사무엘이 와서 이 전쟁을 이기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하는데, 사무엘이 오지 않습니다. 초초한 사울은 제물을 가지고 오라고 명령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제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사무엘이 도착합니다. 사울이 이미 제사를 드린 것을 안 사무엘은 자기가 늦게 온 것을 미안하다고 말하기는커녕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어리석은 일을 하셨습니다. 당신의 나라는 이제 끝이 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이미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을 찾아 내셨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그 사람을 자기 백성의 통치자로 임명하셨습니다. 당신이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상 13:13-14) 

“For the LORD has sought out a man after his own heart (하나님께서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을 찾아내셨기 때문입니다).” 지금 왕이 살아 있는데, 하나님께서 마음에 드는 사람을 찾아내신 것이 다윗입니다. 하나님은 사울을 버리고 자기 마음에 드는 다윗을 통해서 그의 뜻을 이루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큰 교훈이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 쓰임 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예외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사랑 (unfailing love), 성실, 자비, 긍휼, 정의, 인내, 용서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사용하시고 그를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다윗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신학자들은 다윗을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라고 합니다. ‘모형(模型)’이라는 말은 히브리서에 많이 나옵니다. 땅에 있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성전 같은 것도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다윗의 후손’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가계 (genealogy)를 보면 그 말이 맞습니다. 하지만 이 말의 진정한 의미는 다윗은 그 후손으로 오실 분의 ‘모형’이라는 것입니다. ‘그림자 (shadow)’ ‘replica’ ‘prototype’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윗은 완전한 사람은 아닙니다. 저는 다윗에 대한 성경 말씀을 읽을 때 가장 충격적인 말씀이 이 말씀입니다. “For David had done what was pleasing in the LORD's sight and had obeyed the LORD's commands throughout his life, except in the affair concerning Uriah the Hittite.” (열왕기상 15: 5)

완전하신 분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서 다윗은 예수님과 닮은 점이 참 많습니다. 다윗도 그렇고, 예수님도 그렇고 그 주변에 ‘마음에 상처 받은 사람들 (the brokenhearted)’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다윗에게 몰려왔습니다.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과 빚을 진 사람, 그리고 마음에 억울함을 가진 사람들이 다윗에게 몰려들었습니다. 다윗은 그들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에게 몰려온 사람들은 사백 명가량 되었습니다.” (사무엘상 22:2) 예수님 주변에도 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 죄인들이 모였습니다. 예수님의 별명이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a glutton (먹보)’ ‘a drunkard (술꾼)’ ‘a friend of tax collectors and sinners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 마태복음 11:19)’였습니다. 늘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는 것을 좋아하셨거든요. 예수님께서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거든요.

예수님께서 고난의 삶을 살았던 것처럼, 그의 ‘모형’인 다윗에게도 많은 고난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고난은 주로 그 당시 유대사회의 지도자들로부터 받은 고난이었습니다. 다윗이 받은 고난도 그가 모시고 있던 왕 사울로부터 받은 고난이었습니다. 두 사람이 받은 고난의 특징은 두 사람 모두 고난을 받을 이유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역사의 무대에 오르게 기회는 된 것은 정말 우연히 찾아왔습니다. 어린 다윗은, 형들에게 집에서 만든 도시락을 전해 주려고 전쟁터에 갔다가 블레렛의 적장 골리앗을 무찌르게 됩니다. 말도 안되는 싸움에서 골리앗을 물리친 것입니다. 이 사건 하나로 다윗은 단번에 유대나라에서 유명하게 됩니다. “사울이 죽인 적은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적은 만만이라네.” (사무엘상 18:7) 사람들은 이렇게 다윗을 찬양했습니다. 이것이 사울 왕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때부터 다윗에게 고난의 삶이 시작됩니다. 그는 사울 왕의 미움을 받게 되고 언제 생명을 잃을지 모르는 불안한 마음, 죽음의 공포를 안고 살아야 했습니다.

우리의 삶에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미스터리가 많습니다. 이유라도 알면 속이 시원하겠는데, 이유를 알 수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런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다. 다윗도 그런 고난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그런 고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이런 고난을 마주 대하고 있습니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바이러스로 죽은 사람이 202,213명입니다. 미국은 53,397명이고요. 우리나라는 240명입니다. 제 질문은 “이렇게 죽은 사람들은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잘 견디고 있고요. 죽은 사람들은 우리보다 부주의한, 조심성이 없는 사람들인가요? 이 사람들은 우리보다 건전하지 못하게 살던 사람들인가요? 이 사람들은 우리보다 교육 수준이 낮은 사람들인가요? 우리는 왜 괜찮은 것이지요? 그 사람들보다 뭔가 더 살아야 이유가 있는 사람들인가요? 왜 그 사람들은 죽고, 우리는 살아 있는지 어디서도 정답이 찾을 수 없습니다. 미스터리입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우리가 살아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합니다. 아마 그 대답이 최선의 대답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입니까? 그럴 만한 이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호의 (favor)’를 베풀어 주신 것 아닙니까?

다윗은 이유 없는 고난을 받으면서 사울 왕을 원망했습니다. “이스라엘 왕께서 누구를 잡으려 하십니까? 왕이 뒤쫓고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왕께서 왜 죽은 개나 벼룩 같은 사람을 뒤쫓고 계십니까?” (사무엘상 24:14) “Who is the king of Israel trying to catch anyway? Should he spend his time chasing one who is as worthless as a dead dog or a single flea?” 다윗은 억울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대면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다윗에게서 배워야 할 점입니다. 억울한 마음을 가지고 복수를 하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의 억울한 심정을 풀어 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 때마다 시를 썼습니다. 그가 쓴 시 속에 그의 억울한 심정이 그대로 나와 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하고요. 원수에 대한 미운 마음을 숨기지 않습니다. 이 점이 다윗이 훌륭한 점이고요. 우리가 배워야 할 점입니다. 

오늘 읽은 시편 86편이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 시편 속에 그의 초조하고 다급한 심정이 그대로 나와 있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큰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나에게 귀를 기울이시고 응답해 주십시오.” (1절) “내 생명을 지켜 주십시오.” (2절) “나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3절)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가 간절히 부르짖는 소리를 들어 주십시오.” (6절) “내가 환난 날에 주께 부르짖습니다.” (7절) 

여기까지만 보면 별로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자기 형편이 어렵고 다급하니까 도와 달라고 하나님께 매달리는 기도 외에 다른 특별한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이 시편을 읽고 묵상하는 중에 “아, 이래서 다윗의 시편이구나!” “다윗이 이런 사람이니까 그리스도의 ‘prototype (모형)’이라고 하는 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질문 합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강철 같은 절대로 부러지지 않는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까?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입니까? 그런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어려운 상황 속에서 많이 힘들어 하시면서 불안한 마음을 제자들에게 숨지 않으시고 “지금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마태복음 26:38)”라고 말씀하셨잖아요? 믿음이 좋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가장 인간다운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맞습니까? 우리가 되 먹지 않은 사람을 보면 “그게 인간이냐?” 라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 ‘참 인간’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인간이라면 그럴 수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은 ‘참 인간’이 됩니다. 사랑할 줄 알고, 올바른 말을 할 줄 알고, 정의로운 행동을 하며, 이기적인 생각을 버리고, 자기의 것을 나누어 줄줄 알고, 때로는 분노하기도 하고, 좌절하기도 하고, 불안해 하기도 하면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 ‘참 인간’의 모습입니다.

다윗이 훌륭한 것은 그런 상황 속에서도 자신을 돌아 봅니다. 반성과 회개는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유지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면서 ‘하나님의 길’을 묻습니다. “주는 선하시고, 기꺼이 용서해 주시며, 주께 부르짖는 자에게 한없이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5절) “여호와여, 주의 길을 나에게 가르쳐 주십시오. 내가 주의 진리 가운데 걸어가겠습니다. 나에게 한결같은 마음을 주셔서 내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게 해 주십시오.” (11절) 다윗은 ‘자기의 길 (his ways)’을 묻지 않고 ‘주의 길 (His ways)’을 묻고 있습니다. 이래서 다윗의 시편이 위대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가 ‘주의 길’을 묻지 않고 ‘자기의 길’만 주장했더라면, 그의 시편은 이기적인 평범한 시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의 ‘prototype (모형)’입니다. 다윗의 기도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기도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아바,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없애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마가복음 14:36) 제 귀에는 이 예수님의 기도 소리가 쟁쟁하게 들립니다. 

매주 온라인 예배를 드리고 계시는 FKCC 교우 여러분, 지금의 이 상황이 얼마나 더 오래 갈 지 알 수 없습니다. 지금 ‘The Second Wave of Covid 19’이란 말이 전문가들 입에서 나오고 있는 것이 우리를 더욱 불안하게 합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한가지 확실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로마서 8:28)”는 말씀입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께 대한 신뢰의 마음을 포기하지 않는 FKCC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4/19/2020 | In Times Of Trouble 2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Where Does My Help Come From?

시편 121편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어려운 시간이 당분간 계속될 것 같습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한국의 상황이 상당히 좋아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며칠 전에 총선도 잘 끝났고요. 그래도 다시 재발하는 일 없이 이 상황이 잘 마무리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있는 매사추세츠 주는 미국에서도 확진자 수가 상위 다섯 개 주에 드는 주입니다. 인접한 뉴욕이 가장 상황이 안 좋고요. 인접한 코네티컷 주도 상황이 많이 안 좋습니다. 로칼 뉴스 중에 염두에 둬야 할 소식이 있는데요. 확진자 수가 많은 10개 타운을 발표했는데요. 지금 우리가 외출을 자제하고 있습니다만, 조심해야 할 뉴스라고 생각합니다. 1위가 Chelsea, 2위 Brockton, 3위 Randolph, 4위 Williamstown, 5위 Lawrence, 6위 Everett, 7위 Longmeadow, 8위 Braintree, 9위 Revere, 10위 Norwood입니다. 우리 FKCC 교우 여러분들, 무사하게 이 사태를 잘 이겨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코로나바이러스 사태에 가장 피해를 많이 본 나라들이 미국과 유럽에 있는 나라들입니다. 스페인,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영국 같은 나라들입니다. 각 나라마다 이 사태를 극복하려는 처절한 노력들을 하고 있습니다. 한번은 앙겔라 메르켈 (Angela Merkel) 독일 총리가 아시아 유럽 정상회의 (ASEM, The Asia-Europe Meeting)에서 우리가 서로 연대하여 현재의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고 하면서 한자로 ‘위기’라는 말을 설명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위기’를 한자로 ‘危機’라고 쓰거든요? ‘危’ 자는 위태하다는 뜻이고, ‘機’자는 어떤 일의 ‘실마리’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위기’라는 말에 위험과 기회가 같이 공존하고 있다는 뜻이 있습니다. ‘위’자는 영어로 하면 ‘danger’이고 ‘기’자는 ‘opportunity’입니다. 지금의 상황을 잘 대처해 나간다면, 이것이 우리 모두에게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전문가들의 말에 의하면 이번 코로나바이러스 사태가 진정이 되면 리더십 문제가 크게 대두될 것이라고 합니다. 같은 상황을 맞이했지만 현명하고 지혜롭게 위기를 잘 대처해서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리더십과 사태를 가볍게 보고 방관하다가 나중에 가서 겉잡을 수 없는 사태로 번지는 무책임한 리더십이 구별될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 상황은 분명히 모든 사람들에게 ‘위기’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상황이 우리에게 기회가 될 수 있다는 말이 모든 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줍니다. 저는 우리 FKCC 교우 여러분들에게 이번 사태가 오히려 좋은 기회가 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그냥 막연하게 그렇게 되기를 희망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지금의 상황이 나에게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믿고 뭔가 계획을 세우고 시도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사람에게 위기가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에게 위기는 그냥 위기일 뿐 절대로 기회가 되지 않습니다. ‘위기’라는 말을 길게 설명하지 않았습니다만, ‘위(危)’자는 사람이 높은 낭떠러지 끝에 앉아 있는 모습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기(機)’자는 방아쇠 뭉치를 글자로 형상화한 것이라고 합니다. 방아쇠를 당기면 총알이 발사되고, 화살이 발사됩니다. 화살이 발사되어 어떻게 되었는지 그 마음 단계가 매우 궁금하지 않습니까? 벼랑 끝에 매달린 사람이 화살을 발사했습니다. 이것이 이 사람에게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 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읽은 시편 121편은 우리에게 친숙한 시편입니다. 저자는 누구인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이 시편의 용도는 ‘A song for pilgrims ascending to Jerusalem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순례자들이 부르는 노래)’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루살렘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러 가면서 이 노래를 부르며 갔습니다. 그 광경이 머리에 그려지시나요? 순례자들이 집을 떠난 예루살렘까지 먼 길을 갑니다. 어깨에 제물로 드릴 어린양을 메고 갑니다. 가면서 이 시편 121편을 노래로 부르는 것입니다. “내가 눈을 들어 산들을 바라봅니다. 나의 도움이 어디에서 옵니까? 나의 도움은 여호와로부터 옵니다. 하늘과 땅을 만드신 그분에게서 옵니다.” 길을 가다가 다른 순례자들을 만납니다. 그러면 또 같이 이 노래를 부르면서 예루살렘까지 순례의 길을 갑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예배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배의 본질(本質)은 연약한 인간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고, 그 분의 뜻이 무엇인지 묻고, 그리고 그 분의 도움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배의 본질입니다. 연약한 인간이 그 생명의 주인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성 어거스틴 (St. Augustine, B. C. 354-430)은 그가 쓴 ‘고백록 (Confesssion)’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위해 살도록 창조하셨으므로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서 안식할 때까지 평안하지 않습니다 (You have made us for yourself, O Lord, and our heart is restless until it finds its rest in you).” 어거스틴은 이 고백 속에서 예배란 하나님을 찾는 인간의 본능적인 행위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약한 존재입니다. 강한 것 같지만, 인간은 모두 연약합니다. 지금 코로나바이러스가 이 사실을 우리에게 확인 시켜주고 있습니다. 불안하고 답답합니다. 학교도 그렇고, 취직도 그렇고, 비지니스는 말할 것도 없고요. 정상적인 활동들이 모두 중단되고 평소에 하던 활동이 제한되었습니다. 친한 친구들을 전처럼 만날 수도 없습니다. 여행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되던 일들이 틀리는 경우가 생깁니다. 윌리엄스타운 (Williamstown) 같은 곳은 매사추세츠 서쪽 끝에 있는 작은 시골 마을입니다. 사람도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시골 마을에 감염자가 그렇게 많이 나오는지 처음에는 당황합니다. 기사를 찾아 봤더니 그곳에 양로원들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거기서 집단적으로 감염자들이 많이 나왔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21세기에 이렇게 과학이 발달하고 문명이 발달한 미국에서, 또 유럽의 선진국에서 오히려 사망자가 더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오늘 시편 말씀이 우리에게 새롭게 들리지 않습니까?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Where does my help come from)?” 저는 목사로서 이런 상황을 주시하면서 이번 사태로 말미암아 사람들 마음 속에 하나님을 찾고 의지하는 마음들이 더 많이 생겼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런 사태를 맞이하면서 사람들 마음 속에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회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준 선물입니다.

시편 121편을 쓴 사미스트는 “내가 눈을 들어 산들을 바라봅니다. 나의 도움이 어디에서 옵니까?” 이렇게 질문하고 있습니다. 눈을 들어 산을 본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이상하게도 사람들에게 산을 숭배하는 문화나 전통이 있습니다. 인종을 초월해서요. 한국의 삼각산(三角山)이란 산이 있습니다. 그곳에 수많은 예배처들이 있습니다. 기독교적인 것들도 있고, 불교적인 것도 있고, 온갖 잡신을 섬기는 예배 장소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도 예외가 아닙니다. 요한복음 4장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의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으나, 유대인들은 예배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는 예루살렘에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 말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이여, 나를 믿으시오. 이 산에서도 아니고, 예루살렘에서도 아닌, 당신네들이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올 것이오.” (요한복음 4:21) 이 사마리아 여자가 말하는 산은 사마리아 땅에 있는 ‘그리심산 (Gerizim Mount)’이라고 합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산’에 예배 장소를 만들고 거기서 예배를 드리도록 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도 ‘시온산 (Zion Mount)’이 있고, ‘성전산 (Temple Mount)’이 있고, ‘감람산 (Ol-ive Mount)’이 있습니다. ‘시온산’에 다윗성이 있어서 사람들이 그 산을 신성시합니다. ‘성전산’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쳤던 ‘모리아산 (Moria Mount)’과 같은 산이라고 하는데요. 이 산에 예루살렘 성전이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 시편 121편을 쓴 사미스트는 나의 도움이 산에서 온다는 사실을 단호하게 거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좀 더 폭넓게 해석한다면, 이 사미스트는 심지어 성전이 있는 ‘성전산’에서 나의 도움이 온다는 사실도 부정하고, 나의 도움은 오직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로부터 온다고 선언합니다. 그의 이 선언이 참 경이롭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어느 장소에 계시는 하나님으로 제한하지 않습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 불가능한 것이 없으신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이 하나님을 ‘엘 샤다이 (El Shaddai)’라고 불렀습니다. 시편 121편을 쓴 사미스트는 ‘엘 샤다이’이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어느 한 곳에 계시는 하나님으로 제한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께서 계시는 곳을 예루살렘 성전으로 국한하는 것을 거부하시면서 “이 산에서도 아니고, 예루살렘에서도 아닌, 사람들이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올 것이오 (요한복음 4:21, 2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제가 이제 중요한 질문을 하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배 장소를 부정하셨고, 사미스트도 예배 장소를 부정하면서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로 온다고 선언했습니다. 예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사람들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도움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속에 그 어느 것도 개입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장소, 시간, 또는 환경, 이런 것들이 개입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고,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과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함께 하시고,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도움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어떤 도움을 주시는지 한번 보실까요? 첫째로, 하나님은 우리 발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붙잡아 주십니다 (3절). 하나님은 졸지도 않으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시면서, 우리를 지켜 주신다고 했습니다. 둘째로, 그 하나님은 낮에는 해가, 밤에는 달이 우리를 해치지 못하도록 지켜 주십니다 (6절). ‘낮의 해’라는 말은 한낮의 뜨거운 더위를 말합니다. ‘밤의 달’이라는 말은 밤의 추위를 말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유목민들에게는 더위와 추위가 생명과 관계될 만큼 큰 걱정거리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우리를 모든 재앙으로부터 우리의 생명을 지키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7절). 

이 세가지 하나님의 도움에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 세가지는 모두 우리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들입니다. 아무 대책 없이 돌뿌리에 걸려 넘어지는 것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한 낮의 더위와 밤중의 추위를 내가 어떻게 막을 수 있겠습니까? 재앙도 나의 힘으로 막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당하고 있는 코로나바이러스 같은 것이 ‘환난 (tribulation)’이고, ‘재앙 (harm)’이고 ‘재난 (disasters)’이고, ‘위험 (dangers)’입니다. 

여러분, 지금 같은 상황에서 우리가 이렇게 건강하게 지내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우리가 조심한다고 코로나바이러스의 공격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조심한다고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로부터 감염되지 않도록 우리를 보호할 수 있겠습니까? 바울이 하나님을 모르고 우상숭배에 빠져 사는 아테네 시민들에게 설교했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온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주님이십니다. 그는 사람이 만든 신전에 계시지 않습니다. 이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고 계십니다 (God made the world and everything in it. Since he is Lord of heaven and earth, he doesn't live in man-made temples, He himself gives life and breath to everything, and he satisfies every need, 사도행전 17:24-25)

여러분! 지금 ‘하나님의 도움 (help from)’은 우리가 알든지 모르든지, 마치 우리가 자연스럽게 코로 숨을 쉬듯이, 우리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지금 이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우리의 마땅한 반응은 감사입니다. 그동안 잊고 살았던 감사의 마음을 회복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4/12/2020 | 부활주일 메시지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전해 드립니다 I Pass On To You What Is Most Important

고린도전서 15:1-10

참 어려운 시기에 고난주간을 마치고 부활주일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언제쯤 끝이 날지 끝이 보이지 않는 긴 터널을 지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까지 전 세계에서 사망자 수가 110,024명이랍니다. 미국은 20,596명, 스페인은 16,972명, 이탈리아는 19,468명, 프랑스는 13,832명, 독일 2,871명이랍니다. 한국은 214명이고요. 지금까지 선진국이라고 자처하던 미국과 유럽 국가들이 이번에 큰 타격을 입고 있습니다. 바로 역사학자들이나, 미래학자들에게 큰 관심이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 사태가 끝나면 이런 나라들이 국제적인 지위를 잃게 되고, 새로운 세계 질서가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암울한 뉴스를 듣고 있으면 지금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적 때문에, 아무 것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현실 앞에서 인간의 힘의 무력함과 교만을 회개하게 되고, 세계는 죽음을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구나 하는 고백과 함께 하나님의 은혜와 통치에 하심에 큰 기대를 갖게 됩니다.

지금 온라인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만, 저는 FKCC 교우 여러분을 향해서, 또 여러분들은 저를 향해서 부활절 인사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해피 이스터 (Happy Easter)!” 성령을 체험한 베드로가 사람들 앞에 나가서 처음으로 했던 설교 중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여러분, 이 말을 명심해서 들으십시오. 나사렛 사람 예수님은 하나님과 같은 권위를 지니신 분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일으키신 기적과 기이한 일과 표적으로 이 사실을 여러분에게 분명히 보여 주셨습니다. 그 모든 일은 여러분 가운데서 일어났으므로, 여러분 모두가 잘 아실 것입니다. 이 예수님은 여러분에게 넘겨졌고, 여러분은 악한 사람들의 손을 빌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이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는 이전부터 알고 계셨을 뿐만 아니라, 여러분이 행한 일도 하나님께서 오래 전에 세워 놓으신 계획대로 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죽음의 고통에서 그분을 풀어 놓으셨습니다. 그것은 죽음이 예수님을 계속 붙잡아 둘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22-24) 24절이 Good News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But God raised him from death, setting him free from its power, because it was impossible that death should hold him prisoner.”

여러분, 집에 오래 동안 갇혀 있다시피 하니까 많이 힘드시지요? 답답한 마음을 이기는 비결은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이 상황을 잊어버리는 비결은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보다 더 크고 중요한 일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게 제 말이 아니라 성경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보세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아니면 어려움입니까? 핍박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아니면 칼입니까?.....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을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기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하늘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어떤 힘이나, 가장 높은 것이나 깊은 것이나, 그 밖의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로마서 8:35, 37-39) “No, in all these things we are more than conquerors through him who loved us. For I am convinced that neither death nor life, neither angels nor demons, neither the present nor the future, nor any powers, neither height nor depth, nor anything else in all creation, will be able to separate us from the love of God that is in Christ Jesus our Lord.” (로마서 8:37-39, NIV)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나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 이것을 생각하면 지금 내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아무리 기승을 부려도 “It will not be able to separate us from the love of God that is in Christ Jesus our Lord (이것이 나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없다)”고 선언하지 않습니까? 이번에 우리가 당하고 있는 코로나바이러스 뿐만 아니라 앞으로 우리가 당할 이보다 더 크고, 끔찍한 일을 만난다고 해도 우리는 당당하게 이렇게 선언해야 합니다. ‘한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씀이 신명기 28:7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주께서 여러분의 적들을 이기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들은 한 길로 너희를 공격하겠지만 일곱 길로 도망갈 것입니다 (The LORD will conquer your enemies when they attack you. They will attack you from one direction, but they will scatter from you in seven)!”

오늘 읽은 말씀은 바울이라는 예수님의 사도가 고린도에 있는 크리스천 공동체 (교회)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이 편지 속에서 바울은 크리스천의 삶에서 일어날 수 있는 많은 문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 중에 15장 말씀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에 대한 말씀입니다. 고린도는 그 당시 최대의 항구 도시였습니다. 인구는 그 당시에 65만명이었습니다. 그리고, 길이 6.3km, 폭 25m의 운하가 있었고요. 상당한 규모의 ‘아고라 (시장)이 있었고, 수많은 상점들과 극장이 있었고, 거대한 물저장고 (cistern)가 있었고, 공중 목욕탕, 개선문, gym이 있었습니다. 항구 도시이다 보니까 사치와 향락에 빠져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아폴로 신전’이 있었고, ‘아프로디테 (비너스) 신전’이 있었고요. 무려 12개의 신전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고린도에 사는 사람들의 삶이 어떻겠습니까? 도시의 영향을 받아서 교회에 나오면서도 삶이 변화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다면 ‘먹고 마시자. 내일이면 죽을 목숨이라고 하지 않겠습니까(고린도전서 15:32)?’” 이런 말씀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소중한 부활의 진리를 전해 주었는데도,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처럼 사는 사람들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편지를 쓴 것입니다.

바울은 이 편지를 통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받은 가장 중요한 것을 여러분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성경에 기록된 대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것과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에 기록된 대로 삼 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3-4절) “I passed on to you what was most important and what had also been passed on to me. Christ died for our sins, just as the Scriptures said. He was buried, and he was raised from the dead on the third day, just as the Scriptures said.” (New Living Translation)

어떻습니까? 바울에게 그랬던 것처럼, 오늘 여러분들에게도 이 말씀이 중요한 말씀이 되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누구를 붙잡고 이렇게 말해 보세요. “형제님, 자매님, 제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 말씀을 나누고 싶어요.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삼 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 사람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아니, 왜 나에게 이러시는데요?” 이런 반응이 나오지 않을까요?

차이점은 바울은 이 사실을 믿었고, 이 사람은 이 사실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이 사실을 알고 있을지 모르지만, 믿지 않습니다. 지금 많은 크리스천들이 부활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처럼 살고 있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복음을 전파하는 데 열심을 내고 있습니까? 열심히 진실하게 믿음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영원한 생명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까 (고린도전서 15:13-19)? 바울은 이 질문에 “예”라고 대답할 수 없는 사람은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히브리서 13장 말씀이 생각납니다. “For this world is not our permanent home; we are looking forward to a home yet to come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영원한 우리의 집이 아닙니다. 우리는 앞으로 올 (영원한) 집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3:14) 부활을 믿는 사람은 이 고백처럼 세상의 것에 절대적인 가치를 두지 않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 바울의 고백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그가 예수님 때문에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보세요. “나는 사도들 중에서도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입니다. 나는 사도라고 불릴 가치도 없는 사람입니다, 저는 교회를 핍박했던 사람이니까요. 지금의 내가 된 것은 하나님께서 특별한 은혜를 내게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9-10절) “In fact, I'm not even worthy to be called an apostle after the way I persecuted God's church. But what-ever I am now, it is all because God poured out his special favor on me.”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삶의 목적을 갖게 되고 사명을 갖게 되었지 않습니까?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싶었습니다. 여러분은 그의 고백을 들으면서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나도 이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다음 세대들에게 전해야 되겠다는 시대적인 책임감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우리가 이 사람들에게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를 전해야 하는 이유는 이것이 세상을 살리는 생명의 메시지이고, 절망에 빠진 세상에 희망을 주는 메시지이기 때문입니다.

한림대 강남성심병원 감염내과 이재갑 교수가 CBS 방송과 인터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가 계속 유행하는 상황에서 교회들이 예배의 패러다임을 바꾸지 않으면 모든 교회들이 지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는 지금 많은 감염병 전문가들은 교회들이 부활절을 맞이해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면 끝장이라고 보고 있다고 했습니다. 굳이 그 촉매제의 역할을 교회가 할 필요가 있느냐고 반문했습니다.....만약 신천지가 없었더라면 지금 한국은 지금보다 훨씬 더 좋은 결과를 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신천지에서 감염자가 무더기로 발생했을 때 감염자 수 7,000명 중에 신천지 감염자가 5,000명이었다고 합니다. 이번에 한국의 대형 교회들이 예배를 강행 했다가 거기서 감염자가 나오기 시작하면 한국교회는 지탄의 대상이 되고 한국교회가 완전히 몰락할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나중에 코로나바이러스가 잡히고 교회가 문을 열었을 때 누가 교회에 가겠느냐고, 그 때는 청년들은 완전히 교회를 떠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지금 프랑스에서 한 유력한 변호사가 한국의 코로나바이러스 방역이 성공한 것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한 결과로 얻은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글쎄요. 지금 한국이 그 정도로 개인의 자유가 억압되고 있나요? 과거 독재정권 밑에서는 충분히 그런 비판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닌 것 같습니다. 서방 언론들이 한국의 방역 성공의 원인을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투명한 언론을 말하고 있지 않나요? 이번 코로나 사태가 끝나면 지금까지 서방 세계를 떠받치고 있던 시스템에 대한 반성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개인의 자유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그들은 대답을 해야 합니다. 개인의 자유 주장하는 그들 나라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지 않았습니까? 그 결과를 보면서도 그들은 개인의 자유 운운할 수 있을까요?

지금은 진실한 크리스천이 요구되는 시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진리를 믿고 부활의 소망을 갖는 사람들이라면 이기적인 행동과 목적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자신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을 생각하고, 공동체를 생각하고, 사회를 생각하고, 세상을 생각해야 합니다. 어떻게 신자의 몸에는 바이러스가 들어 오지 않는다는 우매한 주장을 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세상에 생명의 복음을 전파해야 할 사명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2020년 부활절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는 이 사실을 새롭게 인식해야 합니다. 끝으로, 하나님께서 어려운 시기에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 주시기를, 그리고 우리만 아니라 온 세상 사람들의 생명을 지켜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시편 121:5-8)


4/11/2020 | 사순절 새벽기도 40

갈릴리에서 만나자

마태복음 28:1-10

오늘 말씀은 안식일이 지난 다음 날 새벽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새벽에 두 여자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갑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였습니다. 우리는 이 여자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아야 합니다. “많은 여자들이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이를 지켜 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님을 섬기려고 따라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27:55-56) 이 명단에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그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던 두 마리아가 바로 이 여자들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문이 예루살렘에 돌았을 때 그럴 리가 없다고 하면서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던 사람들은 그 여자들이 무덤을 잘못 찾아갔을 것이라고 합니다. 소위 ‘The Wrong Tomb Theory (잘못 찾아간 무덤설)’입니다. 그러나, 마태는 그런 설을 단호하게 부인합니다. 이 두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부터 무덤에 묻히는 것을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 보았던 사람들입니다. 마태는 그의 복음서에서 이 사실을 몇 번이나 강조합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 맞은편에 앉아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27:61)

‘잘못 찾아간 무덤설’을 주장하는 근거는 무덤을 찾아갔던 사람들이 여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까지도 여자들로부터 예수님의 무덤이 비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It is nonsense!” 이런 반응을 보였습니다 (누가복음 24:11). 하지만, 이런 리스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활의 첫 증인들이 여자들이었다는 사실은 여자들을 하나님의 사역에 전면으로 소환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바울도 그런 말을 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유대인이나 그리스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차별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두 하나입니다 (There is neither Jew nor Greek, slave nor free, male nor female, for you are all one in Christ Jesus).” (갈라디아서 3:28)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에 도착했을 때 강한 지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왔습니다. 천사는 무덤을 막은 돌을 치웠습니다. 천사들의 모습은 번개와 같았고, 옷은 눈처럼 희었습니다. 경비병들이 천사를 보고 두려워 떨었고, 마치 죽은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이런 표현들은 하나님의 개입 (God’s intervention)이 있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God’s intervention이 있으면 모든 것이 설명이 안 됩니다. God’s intervention이 있으면 우리의 이성이나 지식, 경험으로 설명이 안 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God’s intervention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부활은 설명이 안 됩니다. 사람이 개입해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개입해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입니다. 어디 부활뿐이겠습니까? 우리의 삶에도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면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이것을 기적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을 찾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예수님은 여기 계시지 않다. 말씀하신 대로 다시 살아나셨다. 와서 예수님이 누우셨던 곳을 보아라.” (5-6절) 누가복음에는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어찌하여 살아 있는 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찾느냐? 예수님은 여기 계시지 않고 다시 살아나셨다 (Why do you seek the living among the dead? He is not here, but is risen).” (누가복음 24:5-6)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 갔던 두 여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천사에게 들은 메시지는 빨리 제자들에게 가서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으니 갈릴리로 가십시오. 예수님은 먼저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거기서 예수님을 뵐 수 있을 것입니다 (8절)”라고 전하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천사의 메시지는 다시 한번 부활하신 예수님이 확인해 주셨습니다.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말하여라. 거기서 그들이 나를 볼 것이다.” (9-10절) 여러분, 이 말씀을 통해서 질문이 생기지 않습니까? 천사의 말을 듣고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해 주려고 달려가는 두 여자에게, 이번에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자들이 제자들에게 가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전해 주었을 때 제자들도 너무 놀라서 여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무덤에 가서 무덤이 비어 있다는 것을 확인했고, 또 그들이 직접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전도를 통해서, 설교를 통해서 널리 전파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썼습니다. “내가 받은 가장 중요한 것을 여러분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성경에 기록된 대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것과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에 기록된 대로 삼 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과 그리고는 베드로에게 나타나시고, 그후에 열 두 제자에게 나타나시고, 그후에 한번에 오백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도 나타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 사람들 중에는 이미 죽은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그후에 야고보에게, 그 다음에 모든 사도들에게 나타나시고, 맨 마지막으로 조산아와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5:3-8) 3-4절 말씀만 New Living Translation으로 읽어 볼까요? “I passed on to you what was most important and what had also been passed on to me. Christ died for our sins, just as the Scriptures said. He was buried, and he was raised from the dead on the third day, just as the Scriptures said.”

이 말씀에 ‘what had been passed on to me (나에게 전달되어 온 것)’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도 다음 세대에게 부활의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는 역사적인 책임감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최초에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말을 들은 여자들이, 제자들에게 가서 그 말을 전했고, 제자들은 그 말을 듣고 밖에 나가서 예수님은 부활하셨다고 전파했다면, 부활의 역사적 근거 (historicity)는 대단히 희박했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두 여자들을 직접 만나 주셨고, 베드로를 만나 주셨고, 열 두 제자들을 만나 주셨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직접 오 백명이 넘는 사람들을 만나셨고, 야고보에게 나타나셨고, 바울에게 나타나셨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부활의 historicity가 있습니다.

이제 오늘 제 설교의 결론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천사의 말도 그랬고, 예수님께서 직접 여자들에게 하신 말씀도 그랬습니다.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나도 그리로 갈 테니 거기서 나를 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제자들을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셨을까요? 갈릴리는 대부분 예수님의 제자들의 고향입니다. 갈릴리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처음 만났습니다. 갈릴리에 예수님께서 성장하신 나사렛이 있습니다. 그리고, 갈릴리에 예수님의 사역의 중심지였던 가버나움도 있습니다. 갈릴리 호수가 있고, 배고픈 5,000명을 먹인 벳세다 들판도 갈릴리에 있습니다. 그래서 갈릴리로 가라고, 거기서 만나자고 하셨을까요?

여러분, 지도를 한번 보십시오. 갈릴리가 여기 있고, 유대지방이 여기 있습니다. 가운데 사마리아 지방이 있고요. 유대에 사는 사람들은 갈릴리 사람들을 우습게 봤습니다. 그 이유는 갈릴리가 변방이었고, 가난한 사람들이 살았고, 교육의 혜택을 못 받은 사람들이 사는 지역이었기 때문입니다. 갈릴리 사람들의 말에는 특이한 액센트가 있었습니다. 성경에 예수님 일행을 ‘갈릴리 사람들 (Galileans)’이라고 말한 곳이 있는데 (마태복음 26:73, 마가복음 14:70), 이 말은 예수님과 제자들을 아주 비하한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신 것은, 우리들의 삶의 현장이 예루살렘이 아니라 갈릴리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는 것이 아닐까요? 가난한 사람들, 교육의 혜택을 못 받은 사람들, 사회의 주류가 아닌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사회학적인 용어로 ‘the marginal people (주변 인간)’이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 틈으로 들어 가면 사방에 우리가 섬겨야 할 사람들이 널려 있습니다. 오래 전에 제가 거창고등학교의 ‘직업 선택의 10계’라는 것을 소개한 적이 있는데요. 놀랍게도 10개 모두가 모두 갈릴리로 가라는 말입니다. (1) 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 (2)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 (3) 승진의 기회가 거의 없는 쪽을 택하라. (4) 모든 것이 갖춰진 곳을 피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황무지를 택하라. (5) 앞을 다투어 모여 드는 곳은 절대 가지 마라. 아무도 가지 않는 곳으로 가라. (6) 장래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가라. (7)사회적 존경 같은 것은 바라 볼 수 없는 곳으로 가라. (8) 한 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 (9) 부모나 아내나 약혼자가 결사 반대를 하는 곳이면 틀림 없다. 의심치 말고 가라. (10)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라.

마지막으로, 성경 두 구절 소개하고 제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그 명패를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께서 죽으신 곳이 예루살렘 성에서 가깝고, 그 명패는 아람어, 라틴어, 그리스어로 씌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9:20)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골고다가 예루살렘 성 밖에 있다는 것입니다.

같이 읽고 싶은 말씀이 하나 더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도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피로 그의 백성들을 거룩하게 하려고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성문 밖에 계신 주님께 나아가서 그분이 당하신 수치를 함께 겪읍시다. 이 땅에는 영원한 성이 없으며, 우리는 앞으로 다가올 성을 찾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통하여 항상 하나님께 찬양의 제사를 드립시다. 이는 그분의 이름을 증언하는 우리 입술의 열매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선을 베푸는 일을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가진 것을 서로 나누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행동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제사입니다 (So also Jesus suffered and died outside the city gates to make his people holy by means of his own blood. So let us go out to him, outside the camp, and bear the disgrace he bore. For this world is not our permanent home; we are looking forward to a home yet to come. Therefore, let us offer through Jesus a continual sacrifice of praise to God, proclaiming our allegiance to his name. And don't forget to do good and to share with those in need. These are the sacrifices that please God).” (히브리서 13:12-16)

와우! 히브리서에 이런 말씀이 있었나요? 이 말씀이 주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성문 밖에서 수치를 당하신 예수님이 계시는 곳으로,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시는와우! 히브리서에 이런 말씀이 있었나요? 이렇게 예수님의 삶을 정확하게 가르쳐 주는 말씀이 히브리서에 있었나요? 이 말씀이 주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성문 밖에서 수치를 당하신 예수님이 계시는 곳으로,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시는 예수님께 계시는 곳으로 가자는 것이잖아요? 그곳에 가서 우리가 얼마나 예수님께 충성스러운 삶을 사는 사람들인지 선포하자는 것이 잖아요?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계속되는 제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잖아요? 갈릴리에 있는 사람들과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누자는 것이 잖아요? 저는 여러분이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겠습니다. 이것은 강요해서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결정을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불가능하게 보이는 것도 하나님께서 하시면 됩니다.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저는 계속에서 여러분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여러분 중에 갈릴리로 가는 사람들이 나올 수 있도록이요.


4/10/2020 | 사순절 새벽기도 39

다 이루었다!

요한복음 19:17-30

오늘 말씀은 가장 읽기 힘든, 가슴 아픈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말씀입니다.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의 말씀을 모두 읽고 말씀을 전체적으로 구성해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일곱 말씀을 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저녁 성경공부에서 이 일곱 말씀이 무엇이고, 그 의미가 무엇인지 공부를 하려고 합니다. 8시에 온라인 찬양과 성경공부에 모두 들어 오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성경공부 교재는 교회 홈페이지 자료실 (청년부 성경공부 교재)에 올려 놓았습니다. 미리 보시고 들어 오시면 더 좋겠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골고다’에 세워졌습니다. 다른 두 사람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공관복음서에 보면 이 두 사람은 ‘강도 (마태복음 27:38)’라고 나와 있습니다. 영어 성경에는 ‘criminals’라고 나와 있습니다. 범죄자라고 번역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정확하게 말한다면 일반 강도들이 아니라, ‘revolutionaries’입니다. 우리 말로 ‘혁명가들’이라고 해야 겠네요. 국가를 전복하려고 시도했던 사람들이는 뜻입니다. 정권을 잡은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도저히 용서 받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또 총독 빌라도 입장에서 보더라도 달갑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고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사람들이니까요. 예수님을 이 두사람과 같이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예수님을 이런 범죄자들과 같이 취급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말씀을 읽어 보셨습니까? “그는 악한 일을 한 적이 없으며, 거짓말을 한 적이 없는데도 악한 사람들과 함께 묻혔으며, 그의 무덤이 부자들 사이에 있었다.” (이사야 53:9) 이사야 53장은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들어 있는 말씀인데요. 이 말씀에 나오는 ‘악한 사람들’이 바로 ‘criminals’입니다. 메시아가 범죄자들과 함께 묻혔고, 그의 무덤은 부자들 사이에 있었다고 합니다. 아니, ‘criminal’이라는 죄명으로 죽은 사람이 어떻게 부자들의 무덤이 있는 곳에 묻힐 수 있습니까? 그런데, 정말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공관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은 후에 갑자기 등장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아리마대 요셉 (Joseph from Arimathea)’인데요. 마태는 이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였다고 합니다 (마태복음 27:57). 그런데, 이 사람이 부자였습니다. 평소에 자기가 죽으면 거기에 묻히려고 무덤을 준비해 놓았습니다. 이 ‘아리마대 요셉’이 갑자기 등장해서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체를 자기에게 내 달라고, 자기가 그분을 모시겠다고 합니다. 의외로 빌라도는 백부장을 불러 그가 죽었느냐고 묻고, 죽었다고 하니까 이 사람에게 시신을 내 주라고 명령합니다. 참 신기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해서 예수님이 부자들의 무덤 사이에 묻혔다는 이사야 53:9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또 한가지, 빌라도가 왜 그랬을까 하는 미스터리 같은 일이 일어나는데요. 예수님의 ‘명패’를 빌라도가 직접 씁니다. 뭐라고 쓰는가 하면 ‘유대인의 왕, 나사렛 예수 (Jesus of Nazareth, the King of the Jews)’라고 썼습니다. 아람어로, 그리스어로, 라틴어로 그 말을 씁니다. 이것을 옆에서 지켜보는 유대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깜짝 놀라면서 “‘유대인의 왕’이라 쓰지 말고, ‘나는 유대인의 왕이다’라고 써야 합니다” 하면서 억지를 부렸습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시나요? 예수님의 명패에 “나는 유대인의 왕이다” 이렇게 쓰면 예수님은 정상적인 사람이 아닌, 정신병자나 미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빌라도는 “내가 쓸 것을 썼소!” 하면서 고집을 꺾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명패는 아람어, 라틴어, 그리스어로 ‘유대인의 왕, 나사렛 예수’라고 결정되었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에 “많은 유대인들이 그 명패를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께서 죽으신 곳이 예루살렘 성에서 가깝고, 그 명패는 아람어, 라틴어, 그리스어로 씌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20절)”라고 나와 있습니다.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로마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시리아 사람도 읽을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그 때는 유월절이 끝난 때였지만 아직도 예루살렘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거든요? 십자가 위에 ‘INRI’라고 씌어 있는 것을 보는데요. 이 말은 ‘IESVS NAZARENVS REX IVDAEORVM (예수스 나자레누스 렉스 이오데우룸)’의 라틴어 약자입니다. ‘유대인의 왕 나사렛 예수’라는 뜻입니다.

바울이 빌립보서 2장에 쓴 말씀이 생각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예수님을 최고로 높은 자리에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늘과 땅 위, 땅 아래 있는 모든 만물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심을 선포하며,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9-11절) 비록 그 당시에는 예수님의 명패에 ‘유대인의 왕’이라고 씌어있었지만, 장차 복음이 세상에 전파되면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의 왕이 되신다는 강력한 메시지가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빌라도가 명패를 쓰는 그 일에도 개입하신 것입니다.

십자가 아래의 군인들은 서로 제비를 뽑아 예수님의 옷을 나누어 가집니다. 요한은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그렇게 되리라고 말한 성경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 (24절)”라고 썼습니다. 시편 22:18에 이미 이 말씀이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님은 “내가 목마르다!” 하시면서 고통스러워 하셨습니다. 이 고통은 저와 여러분의 구원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통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도 시편 22:15에 나와 있습니다. 십자가 위에 달리신 메시아가 목이 말라 고통스러워 하신 다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어떤 작은 일도 모두 하나님께서 개입하신 일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목이 마르다고 하시니까 군인들이 신포도주를 솜에 적셔서 예수님의 입에 대 주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신포도주를 맛보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30절).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누가복음에 보면 군인들이 이렇게 한 것은 예수님을 조롱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군인들도 예수님께 나아와 조롱하였습니다. 예수님께 신 포도주를 주면서 ‘만일 네가 유대인의 왕이라면 너 자신을 구원하여라’ 하고 말했습니다.” (누가복음 23:36-37) 그러니까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신포도주를 맛보신 것은 조롱을 받으셨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 한번 보시겠습니까? “군인들은 예수님을 ‘해골 지역’이라는 뜻을 가진 골고다로 끌고 갔습니다. 군인들은 예수님께 몰약을 탄 포도주 (wine drugged with myrrh)를 마시게 하려고 했으나, 예수님께서는 마시지 않으셨습니다. 군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마가복음 15:22-24)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의 손과 발에 못을 박기 직전에 군인들이 예수님께 ‘몰약을 탄 포도주 (wine drugged with myrrh)’를 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시기를 거절하신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그것을 거절하셨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으신가요? ‘몰약을 탄 포도주’는 고통과 아픔을 줄여주는 일종의 진통제 (wine drugged with myrrh)입니다. 그걸 마시면 고통을 줄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걸 거절하시고 손과 발에 못이 박히는 고통을 다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그 어느 것의 도움도 받지 않으시고 몸소 그 아픔과 고통을 받으신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한 온전한 제물이 되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의 구원이 쉽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구원을 ‘값싼 은혜 (cheap grace)’로 만들지 마십시오. 값싼 은혜가 아니라 ‘값비싼 은혜 (costly grace)’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시고 숨을 거두셨습니다. “It is finished!”는 그리스 말로 ‘테텔레스타이’입니다. 이 말을 영어로 하면 ‘paid in full’입니다. 마켓에서 물건을 사면 딱지를 붙여 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딱지에 ‘paid in full’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물건 값을 모두 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성경에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졌으니까 죄의 값을 치러야 하는데, 예수님께서 대신 치러 주신 것입니다.

그냥 단순히 우리의 죄가 용서 받은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And so, dear brothers and sisters, we can boldly enter heaven's Most Holy Place because of the blood of Jesus. By his death, Jesus opened a new and life-giving way through the curtain into the Most Holy Place.” (히브리서 10:19-20) 단순히 우리의 죄만 용서 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앞에 ‘a new and life-giving way’가 열렸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 담대하게 나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누구의 도움 없이 말입니다. 유대교에서는 제사장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가야 했습니다. 카톨릭 교회에서는 신부의 도움으로 하나님께 나가야 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목사는 그런 위치가 아닙니다. 교회에서 목사의 위치는 제사장의 위치가 아니고, 신부의 위치도 아닙니다. 여러분을 하나님께 인도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이 하  나님께 나아가는 일에 약간의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중요한 것은 이제 여러분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We can boldly enter heaven's Most Holy Place because of the blood of Jesus”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요. 히브리서 기자는 그 길을 ‘a new and life-giving way’라고 했습니다. 이제 자신 있게, 담대하게, 용감하게 그 길을 걸어가십시오. 그 길을 따라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 하나님 아버지와 친밀한 교제를 나누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