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5/2021 |

부활절이 지나고(3) After Jesus’ Resurrection

요한복음 20:24-29

여러분, 지난 주 설교에서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가 적어도 약 20년 간 ‘구전(口傳)’으로 전해졌다는 말씀을 드린 바가 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가 하나의 구전이 아니라 여러 개의 구전으로 전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해가 되시나요? 제가 ‘아리랑’에 대한 역사를 찾아봤습니다. “우리 민족의 노래라고 할 수 있는 ‘아리랑’은 처음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한 산악지대에서 출발하여 산길과 강줄기를 따라 메나리조의 노래로 형성, 확산되어 오는 과정에서 각 시대마다 기능과 성격을 달리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지역을 중심으로 ‘경기 아리랑’ ‘밀양 아리랑’ ‘진도 아리랑’ ‘정선 아리랑’ 등 전국적으로 다양하며, 중국이나 일본, 카자흐스탄 등 해외에서 만들어진 아리랑도 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성경도 이와 비슷한 과정을 거쳐 기록되었습니다. “우리 가운데서 일어난 일에 대하여 차례대로 쓰려고 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처음부터 이 일을 목격한 사람들, 즉 말씀의 종들이 우리에게 전하여 준 대로 기록하였습니다. 존귀하신 데오빌로 각하, 저도 이 모든 일을 처음부터 자세히 조사하였으므로, 이 일을 각하께 차례대로 기록하여 드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이미 배우신 것들이 모두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1-4)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Many people have set out to write accounts about the events that have been fulfilled among us. They used the eyewitness reports circulating among us from the early disciples. Having carefully investigated everything from the beginning, I also have decided to write a careful account for you, most honorable Theophilus, so you can be certain of the truth of everything you were taught.”

누가가 그의 복음서를 쓴 것은 서기 60년대 초입니다. 그는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이었습니다. 직업은 의사였고(골로새서 4:14), 바울의 동역자로서(빌레몬 1:24) 바울의 주치의 역할을 합니다. 누가가 예수님을 만났을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누가는 시리아 안디옥 출신이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누가는 1년 동안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 교회에서 사역했던 바울을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었을 것입니다. 바울을 만난 누가는 예수님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구전으로 전승되고 있는 이야기들을 모아 자신의 관점에 따라 편집한 것이 ‘누가복음’입니다.

오늘 읽은 요한복음 본문 말씀은 ‘같은 날 저녁에(That Sunday evening, 요한복음 20:19)’ 있었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새벽에 부활하신 ‘바로 그날’입니다. ‘그날’ 예수님의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무서워서 문을 꼭 잠그고 한 곳에 모여 있었습니다. 이미 막달라 마리아로부터 “내가 주님을 보았어요!”라는 말을 들었지만, 제자들은 말도 안 되는 소리(nonsense)라고 무시해 버리고(누가복음 24:11), 한 곳에 모여 문을 잠그고 숨어있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어찌하여 살아 있는 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찾느냐? 예수님은 여기 계시지 않고 다시 살아나셨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하신 말씀을 기억하여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어 십자가에 못박히고 삼 일 만에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 때서야 여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 냈습니다” (누가복음 24:5-8) 여자들이 그랬듯이 우리도 꼭 그렇거든요? 슬픔과 두려움과 절망적인 상황들이 예수님을 잊어버리게 합니다. 고향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예수님이 죽었다는 절망감 때문에 자기들과 함께 동행하시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What consumes your mind controls your life(당신의 마음을 삼키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이 당신의 삶을 지배합니다).” “We have to pray with our eyes on God, not on the problems(우리의 눈을 하나님께 두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당하고 있는 문제들을 봐서는 안 됩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으리라고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삼일만에 부활할 것이라고 여러 번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그 말씀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다는 여자들의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문을 잠그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상관없이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평안의 인사를 하셨습니다. “샬롬(Peace be with you)!” 

우리 모두에게 평안의 인사가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가 불안을 안고 살고 있거든요? 1년 후, 2년 후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지금 같은 시대에는 더욱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불안해합니다. 청년들은 청년들 대로, 나이든 사람들은 또 나이든 사람들 대로, 불확실한 미래가 우리를 불안하게 합니다. 자신의 삶에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 때도 사람들은 불안해합니다. 그리고, 뭔가 이유를 알 수 없는 것이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때도 있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샬롬’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평화가 아닌 다른 평화를 준다고 하시면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한복음 14:27)”고 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은 내가 주는 평화를 소유한 사람들은 충분히 근심과 두려움을 이길 수 있다는 말씀 아닙니까? 예수님은 충분히 그런 ‘평안’을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이름이 ‘평화의 왕(the Prince of Peace)’이거든요. 이 말씀이 이사야 9:6에 나오는데요. ‘평화의 왕’이라는 이름은 메시아의 이름입니다. 우리는 그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이라고 믿습니다.

찰스 스펄전(Charles Haddon Spurgeon,1834-1892, 영국)이라는 목사님이 계셨는데요. 이 목사님의 별명이 ‘설교의 왕자(the prince of preachers)’였습니다. 청교도 신학에 뿌리를 둔 스펄전 목사님은 전통적인 교리를 생동감 있고 호소력 있게 전달하는 뛰어난 감각을 가지고 있어서 설교 시간마다 감동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 스펄전 목사님의 별명이 ‘설교의 왕자’였습니다. 설교를 제일 잘하시는 목사님, 설교하면 찰스 스펄전, 이런 뜻 아닙니까? 

예수님의 이름이 ‘평화의 왕자(the Prince of Peace)’입니다. 예수님은 충분히 평화에 대하여 말씀하실 수 있는 평화의 권위자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하나님의 ‘샬롬’을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Doug Hershey라는 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According to Jesus, what the Lord is freely giving His followers is different than what you can find on our own in the world. This is a true peace that empowers us to be all that we were designed to be – fully and completely. It is a gift from the Creator Himself to those who follow Him(예수님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주실 수 있는 평화는 이 세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애초에 창조된 모습대로 우리를 온전하게 세워주는 진정한 의미의 평화(샬롬)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샬롬’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팔복’ 중에 이런 축복이 있는 것을 아시지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Blessed are the peacemakers, for they will be called sons of God)” (마태복음 5:9)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평화를 창조하는 ‘peacemakers’가 되어야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평화를 파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당연히 하나님의 자녀가 될 자격이 없습니다. 평화가 위협받는 상황을 보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방관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평화를 창조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고, 평화를 지키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선택 사항이 아니라 필수 사항입니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시자 제자들은 무척 기뻐했다고 썼습니다(요한복음 20:20). 그런데, 그 자리에 제자 도마가 없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우리는 주님을 보았다고 말했을 때, 도마는 “내가 직접 예수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분의 못박힌 곳에 찔러 보고, 내 손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 보기 전에는 믿을 수 없다(요한복음 20:25)”고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도마의 말이 이해가 되시나요? 사람들은 쉽게 도마를 가리켜 ‘의심장이 도마’라고 말합니다. 여러분도 도마가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사람들은 자기가 눈으로 보고 경험을 해야 믿습니다. 자기가 직접 경험하지 않은 것은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경험주의 철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 영국)으로부터 시작해서 존 로크(John Locke, 1632-1704, 영국)와 데이비스 흄(David Hume, 1711-1776, 스코틀랜드)을 통해서 발전되었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백지(Tabula rasa)’와 같은데, 경험을 통하여 백지에 그림이 그려지듯이 지식이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경험주의 철학을 교육이론으로 발전시킨 사람이 유명한 존 듀이(John Dewey, 1859-1952, 미국)입니다. ‘민주주의와 교육(Democracy and Education, 1916)’ ‘경험과 교육(Experience and Education, 1938)’ ‘경험으로서의 예술(Art as Experience, 1934)’ 등 많은 명 저서를 남겼습니다.

꼭 이런 철학적인 이론이 아니더라도, 부활이라는 이 엄청난 일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도마를 ‘의심장이’라고 부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도마 한 사람을 위해서 일주일 뒤에 예수님께서 다시 제자들이 모여 있는 집에 오셨습니다. 이 때도 문은 잠겨 있었습니다. “도마, “네 손가락을 여기에 찔러 보아라.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믿지 않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어라.” (27절) 

도마는 정말 예수님의 말 대로 예수님의 손에 난 못자국을 찔러보고, 예수님의 옆구리에 나 있는 창자국을 만져보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그 옆에서 이 광경을 목격했던 것 같습니다. 요한이 후에 이런 글을 남깁니다. “이 글은 생명의 말씀에 관한 것입니다. 그 말씀은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계셨습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듣고 눈으로 보고 실제로 목격하고 손으로 만져보았습니다. 그 생명이 나타났을 때에 우리는 그 생명을 보았기 때문에 그것을 증언합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선포하는 이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있다가 우리에게 분명히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그것을 여러분에게 선포하는 목적은 우리가 아버지와 그리고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사귀는 친교를 여러분도 함께 나눌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1:1-3) 

요한은 이 말씀에서 예수님을 생명의 말씀이라고 고백하면서, 우리 제자들은 그 생명의 말씀을 듣고, 보고, 만져보았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해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되었는데, 여러분들도 우리와 같이 그분을 알고 그분과 교제를 나누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실을 인식하는 데는 경험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경험이 전부가 아닙니다. 어떤 것은 경험이 아니라 이성을 통해서 인식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또 어떤 것은 경험이나 이성을 통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믿고 받아들임으로써 깨닫게 되는 진리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도마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 믿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You believe because you have seen me. Blessed are those who believe without seeing me).” (29절) 우리 믿음생활에서 경험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도마처럼 보고, 만져보고 믿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부활을 믿어야 합니다. 부활에 대한 성경 말씀들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저자가 말한 것처럼 우리에게는 ‘구름처럼 많은 부활의 증인들(a great cloud of witnesses, 히브리서 12:1)’이 있습니다. 우리보다 먼저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또 다음 세대를 위해 부활의 증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4/18/2021 |

부활절이 지나고(2) After Jesus’ Resurrection

요한복음 20:11-18

오늘은 ‘부활절이 지나고’ 시리즈 설교 두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 설교 내용은 지난 주일 설교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무덤 안을 살펴본 베드로와 요한은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때까지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던 막달라는 무덤 안을 들여 다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놓여 있던 자리에 흰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앉아 있었습니다. 두 천사가 마리아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왜 울고 있느냐?” 막달라가 대답했습니다. “사람들이 우리 주님을 어디론가 가져갔는데, 주님을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 (13절)

많은 사람들이 복음서 말씀을 읽다가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같은 이야기 같은데, 복음서마다 조금씩 다르게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어떤 것은 서로 비슷비슷하게 기록된 것도 있지만, 어떤 말씀은 서로 많이 다르게 기록된 것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 다른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는 기록하지 않고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이야기만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던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다른 여인들이었다고 이름까지 일일이 기록했습니다(누가복음 24:10). 요한이 기록한 말씀과 누가가 기록한 말씀이 서로 다른데 누구의 말이 맞을까요?

학자들의 주장에 약간의 차이는 있습니다만, 대체로 누가복음이 기록된 것은 서기 60년대 초라고 합니다. 요한복음은 서기 90년경이고요. 두 복음서의 기록 연대가 30년 정도 차이가 납니다. 그런데요. 이렇게 기록 연대가 30년이나 차이가 나는 두 복음서의 기록에 차이가 있다는 사실에 더 믿음이 가지 않습니까? 두 복음서의 기록이 서로 정확하게 일치한다면 이것이 더 이상하지 않습니까? 복음서가 기록되기 전에 예수님께 대한 이야기는 구전(oral tradition)으로 전해졌습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것입니다. 

저의 어릴 때 기억입니다만, 저희 집은 전라북도 남원에서 조금 더 들어간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그런데, 저희 마을에 교회가 처음으로 생겼습니다. 저희 아버님이 마을에서 처음으로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자연스럽게 교회 전도사님과 저희 집이 가깝게 지냈습니다. 큰 도시 전주에서 부흥회가 열리면 전도사님과 저희 아버님이 참석을 하셨습니다. 부흥회에 갔다 오실 때 찬송가를 많이 배워 와서 교인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악보가 없을 때니까 순전히 부흥회에서 불렀던 것을 기억해서 교인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음악에 좀 조예(造詣)가 있으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부흥회에서 어떻게 불렀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찬송가를 배운 교인들은 엉터리로 찬송을 부를 수밖에 없습니다. 나중에 찬송가 악보를 보았더니 전혀 틀리게 부른 찬송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구전으로 전해진 예수님께 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30년의 시간 차이를 두고 기록된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은 같을 수가 없습니다. 똑 같으면 그것이 더 이상합니다. 누가복음에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여자들의 이름까지 나와 있지만, 요한복음에는 다른 여자들의 이름은 모두 빠지고 막달라 혼자 부활의 주님을 만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서가 기록된 역사를 알고 보면 그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요. 우리가 복음서 말씀을 읽을 때는 다른 복음서 말씀도 같이 읽어서 예수님 이야기를 총체적(總體的)으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막달라가 무덤에서 만난 두 천사는 “막달라, 왜 울고 있느냐?” 이렇게 말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누가복음에 보면 “어찌하여 살아 있는 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찾느냐? 예수님은 여기 계시지 않고 다시 살아나셨다(Why are you looking among the dead for someone who is alive? He isn't here! He is risen from the dead).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하신 말씀을 기억하여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박히고 삼 일 만에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누가복음 24:5-7)” 이렇게 말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살아 계시는데, 마치 예수님이 죽은 것처럼 슬퍼하느냐고 물은 것입니다.

저에게는 이 말씀이 정말 감동적인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우리가 슬플 때가 있습니다. 절망할 때가 있습니다. 의욕이 떨어지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때가 있습니다. 이런 때 우리는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소망이 되시고, 우리의 기쁨의 근원이 되시거든요? 우리는 마치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처럼 살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셨잖아요?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너희가 고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다(Here on earth you will have many trials and sorrows. But take heart, because I have overcome the world)!” (요한복음 16:33)

예수님께서 울고 있는 막달라 뒤에 서 계셨습니다. 하지만 막달라는 뒤를 돌아보면서도 그 분이 예수님이신 줄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다시 물으셨습니다. “막달라, 왜 울고 있느냐? 너는 누구를 찾고 있느냐?” 막달라는 이 사람이 동산을 관리하는 사람인 줄 알고 “저, 당신이 그분을 다른 곳으로 옮겨 놓았다면, 어디로 옮겨 놓았는지 말씀해 주세요. 그러면 제가 모셔 갈게요”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막달라에게 “마리아야!” 하고 이름을 불렀습니다. 막달라는 몸을 돌려 “랍오니!” 하면서 예수님을 붙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계속 붙잡고 있지 마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않았다. 다만 너는 나의 형제들에게 가서 이렇게 말하여라.” (17절)

많은 사람들이 궁금하게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왜 막달라에게 나를 붙들지 말라고 하셨을까 하고 궁금하게 생각합니다. 이런 말씀이 공관복음서에는 나오지 않고 요한복음에만 나옵니다. 매우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어디를 찾아봐도 만족할 만한 대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저는 두 가지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첫째로, 지금 막달라는 죽은 줄로 알았던 예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것이 너무 반갑고 기뻐서 예수님을 붙들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실 ‘예수님의 최종적인 존재 양식(the final form of Jesus’ existence)’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곧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시고 그 다음에는 ‘보혜사 성령’으로 오셔서 영원히 믿는 사람들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둘째로, 나를 붙들지 말라는 말씀은 지금 네가 해야 할 시급한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곧 아버지께로 가야 하는데, 지금 나를 그렇게 붙들고 있을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이 말을 내 제자들에게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이다.” (17절) 그러나, 마태복음에 보면 여자들이 제자들에게 전한 메시지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말하여라. 거기서 그들이 나를 볼 것이다.” (마태복음 28:10) 마가는 그의 복음서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마리아로부터 예수님께서 살아 계시며, 예수님을 뵈었다는 소리를 듣고도, 제자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마가복음 16:11)

여기서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첫 목격자들이 여자들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것은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대반전(大反轉)입니다. 예수님 이야기에 여자들이 많이 등장하긴 하지만, 부활의 첫 목격자가 여자들이었다는 것은 충격적입니다. 유대사회는 가부장적이고 남성 중심의 사고가 지배하던 사회였습니다. 출애굽 때 나온 사람들이 60만이라고 합니다. 이 숫자에 아이들과 여자들은 포함되지도 않았습니다(출애굽기 12:37).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빵과 생선을 먹은 사람들이 5,000명이 넘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아이들과 여자들은 포함되지도 않았습니다(요한복음 6:10). 누가복음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누가복음 10:42) 이 말씀에 나오는 ‘좋은 편’이라는 것은 마리아가 주님의 말씀을 들은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요즘 말하는 ‘젠더 이슈(Gender issues)’로 이해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누구든지 참여할 수 있고, 아무도 소외되는 사람이 없다는 메시지를 들어야 합니다.

영화 ‘막달라 마리아’에 보면 예수님을 부름을 받은 막달라는 여자의 몸으로 제자들과 행동을 같이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의도를 오해합니다. 유월절에 무슨 큰 일을 벌어지게 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때에 막달라는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상당한 분별력을 가지고 예수님을 이해하는 사람으로 나옵니다. 막달라는 제자들 앞에서 우리가 예수님에게 무엇을, 어떻게 하도록 강요해서는 안 되고 그분이 어떻게 하시든지 우리는 그분의 결정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예수님께서 막달라를 따로 만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리아, 너는 나의 증인이다(Maria, you are my witness)!” 그 영화에서 제일 감동적인 장면입니다.

그러다가 부활하신 주님이 막달라에게 먼저 메시지를 주셨다는 말에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이 막달라를 시기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막달라는 제자들과 갈라서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자막이 나오면서 영화가 끝이 납니다. “성경에 의하면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죽음과 매장의 순간을 지켰다. 그녀는 부활한 예수의 첫 번째 증인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서기 591년 그레고리 교황은 막달라 마리아를 창녀로 선포했고, 오늘날까지 잘못 알려져 있다. 2016년 교황청은 막달라 마리아를 사도들과 동등한 지위로 인정했고, 부활한 예수의 첫 목격자라고 선언했다.”

설교를 마치면서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왜 제자들을 갈릴리에서 보자고 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사람들 눈에 모두 ‘갈릴리 사람들(Gal¬ileans)’로 보였습니다(마태복음 26:69, 마가복음 14:70, 누가복음 23:6, 사도행전 2:7). 갈릴리는 제자들의 고향이고, 삶의 터전이고, 갈릴리는 제자들이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부름을 받았던 곳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는 것을 아세요? “예수님은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시고, 자기 피로 그의 백성들을 거룩하게 하려고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성문 밖에 계신 주님께 나아가서 그분이 당하신 수치를 함께 겪읍시다(So also Jesus suffered and died outside the city gates to make his people holy by means of his own blood. So let us go out to him, outside the camp, and bear the disgrace he bore).” (히브리서 13:12-13) 예수님께서 죽으신 곳이 ‘골고다’입니다. 이 ‘골고다’가 원래는 ‘성문 밖’에 있었는데, 후에 예루살렘 성문 경계를 새로 정하면서 성 안에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성문 안에’ 있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저자는 독자들에게 ‘성문 밖으로’ 나가자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성문 밖’에서 고난과 수치를 당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있어야 할 곳도 ‘성 문 밖’이라는 것입니다. 의미상으로 볼 때, ‘갈릴리’는 ‘성문 안’이 아니라 ‘성문 밖’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문 밖’에서 죽으셨듯이, 우리 크리스천들의 삶의 현장은 ‘성문 밖’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을 가리켜 ‘갈릴리 사람들(Galileans)’이라고 말한 것은 그들을 멸시와 천대의 대상으로 보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크리스천의 삶은 영광을 받는 삶이 아니라 고난을 받는 삶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생활 열심히 하면 고생하지 않고 편한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하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정말 그것이 사실이라면 예수님의 삶에 고난이 없고, 십자가도 없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얼마나 잘 믿었습니까? 그런데, 그렇지 않거든요? 교회도 그렇습니다.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섬김을 받는 곳이라는 잘못된 생각에 사로잡혀 있던 때가 있었습니다. 중세기 때 교회들이 모두 그랬습니다. 교황은 엄청난 힘을 소유했고, 교회들은 엄청난 부를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잘못된 생각이었거든요? 근래에 와서 교회에 대한 이해가 달라졌습니다. 교회는 섬김을 받는 곳이 아니라 세상을 섬기는 곳이라고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신 것은 영광의 자리에서가 아니라 고난과 섬김의 자리에서 만나자고 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있어야 할 곳이 바로 ‘갈릴리’라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있어야 할 곳은 ‘성문 밖 갈릴리’입니다.


4/11/2021 |

부활절이 지나고(1) After Jesus’ Resurrection

요한복음 20:1-10

복음서의 기록을 보면 일제히 안식일 다음 날 이른 아침에 여자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다고 합니다. 요한은 ‘막달라 마리아’ 한 사람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 간 것으로 기록했지만, 마태는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던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 (마태복음 28:1)’라고 했고, 마가는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마가복음 16:1)’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다고 했습니다. 누가는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누가복음 23:55)’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다고 했습니다.

이 여자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 간 시간은 ‘새벽(dawn)’ 혹은 ‘매우 일찍이 해가 돋을 때(very early in the morning)’였습니다. 마태는 이 때를 ‘안식일 다음 날, 즉 한 주의 첫 날 동틀 무렵에’라고 기록했습니다. NLT 성경은 이 말씀을 ‘Early on Sunday morning, as the new day was dawning’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저는 이 말씀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그 날을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 부활에 대한 마태의 관점을 보여준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받아들인 사람에게는 마치 새날이 동터 오는 것처럼, 그의 인생에 ‘새로운 날’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이 ‘새 날’은 지금까지 살아왔던 과거와는 단절된, 전혀 다른 삶이 그의 앞에 열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하고, 예수님의 부활을 ‘넌센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말도 안 돼!”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부활을 반대하는 주장들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갔다는 둥, 여자들이 너무 이른 새벽이어서 엉뚱한 무덤을 찾아간 것이라는 둥, 예수님의 환상을 본 것이라는 둥, 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반대라는 설들을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설들을 일축(一蹴)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제자들의 삶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말씀을 한번 보실까요? “‘예수님 외에는, 다른 어떤 이에게서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에 우리가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공의회 의원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교육을 받지 못한 평범한 사람인 줄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담대하게 말하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제서야 비로소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과 함께 있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4:10-12) 전에는 베드로나 요한이나 공의회(산헤드린)와 같은 어마어마한 자리에서 이렇게 자신들의 생각을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제자들은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산헤드린 앞에서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부활의 주님을 증거합니다. 이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이 말씀은 오늘 우리들에게 많은 영감을 줍니다. 아무리 불신자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교회를 조롱한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증명하고 우리가 믿는 성경이 진리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유일한 방법은 우리의 변화된 삶의 모습입니다. 

이 여자들이 이렇게 ‘이른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 간 것을 보면, 이 여자들이 날이 밝기만을 기다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전날은 토요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안식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이 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멀리 나갈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 여자들은 안식일이 지나 가기만을 기다렸다가 날이 밝자마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것입니다. 이 여자들의 손에는 예수님의 몸에 발라드릴 ‘향품(burial spices)’이 들려 있었습니다. 죽은 사람의 몸에 향품을 발라주는 유대인의 관습에 따른 것입니다.

한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그 시간에 제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고, 남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길래 이렇게 여자들이 새벽 일찍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을까요? 요한복음에 보면 막달라 마리아 혼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도대체 막달라 마리아는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을까요? 그 시간에 무덤을 찾아가는 것이 무섭지 않았을까요? 막달라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참 불행했던 여자였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평소에는 사람들이 막달라라고 불렀습습니다. 성경에 보면 막달라는 일곱 귀신이 들렸던 여자라고 합니다(누가복음 8:2). 그만큼 막달라의 증세가 아주 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 때 이후 막달라는 예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4:18) 이른 새벽에 혼자 무덤을 찾아간 막달라가 왜 무섭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막달라에게는 예수님께 대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사랑은 무서움을 이기고도 남았습니다. 막달라는 이 사랑의 힘으로 두려움을 이겨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가는 여자들에게 유일한 걱정거리는 “무덤의 문을 막아 놓은 커다란 돌을 누가 굴려줄까(마가복음 16:3)?”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여자들이 무덤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무덤 입구를 막고 있던 ‘커다란 돌’이 굴려져 있었습니다. 마태는 그의 복음서에 이 장면을 보다 자세하게 기록했습니다. 강한 지진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천사가 내려와서 돌을 굴려 치우고 그 위에 앉아있었다고 했습니다(마태복음 28:2) 그리고 무덤을 지키던 경비병들은 천사를 보고 무서워서 마치 죽은 사람들처럼 꼼짝하지 않고 서 있었다고 했습니다(마태복음 28:4). 

무덤을 막았던 돌이 굴려진 것을 본 막달라는 뭔가 일이 생긴 것을 알고 곧 바로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에게 가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 주님을 다른 곳으로 빼간 것 같아요. 어디로 데려갔는지는 모르겠어요(2-3절)” 하고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이 말을 들은 베드로와 다른 한 제자는 급히 예수님의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이 그림을 한번 보시지요. 유진 버낸드(Eugène Burnand, 1850-1021, 스위스)가 그린 ‘The disciples Peter and John running to the tomb on the morning of the Resurrection, 1898’이라는 제목의 그림입니다. 두 제자의 얼굴을 보십시오. 얼굴에 고통과 안도, 슬픔과 놀람, 절망과 경이의 상반된 감정들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들의 시선은 앞을 향해 곧바로 고정되어 있어서 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무덤으로 향하게 만듭니다.

두 제자가 달려가서 본 무덤은 막달라가 말한대로 비어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무덤 안을 샅샅이 살펴보았습니다. 고운 베(the linen wrappings)가 놓여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몸을 감쌌던 얇은 천입니다. 그리고 한 쪽에 예수님의 머리를 감쌌던 천이, 쉬운 성경에는 “잘 개켜져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이 개역성경 개정판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 (7절) “while the cloth that had covered Jesus' head was folded up and lying apart from the other wrappings.” (NLT) “The [burial] face-cloth which had been on Jesus’ head, not lying with the linen wrappings, but rolled up in a place by itself.” (Amplified Bible) 번역하면 “예수님의 머리를 감쌌던 천은 동그랗게 감아 올린 상태로 한 곳에 놓여 있었다” 이런 뜻입니다. 머리를 감쌌던 천은 신기하게도 동그랗게 머리만 빠져나간 상태로 놓여 있었던 것입니다. 만일 베드로가 무덤 안에 들어가 무덤 안의 상태를 세밀하게 살펴보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이 사실을 영영 모를 뻔했습니다. 

베드로와 함께 무덤 안을 살펴본 제자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라고 했는데요. 우리는 그 제자가 요한복음을 쓴 요한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요한은 그 때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살아나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리고서 두 제자는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9-10절) 만일 이 때 두 제자가 예수님께서 반드시 부활하신다는 성경 말씀을 믿었다면 예사롭지 않은 무덤 안의 광경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증거를 무덤 안에서 찾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때는 두 제자가 무덤 안에서 본 것들을 그리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냥 집으로 돌아갔던 것으로 보입니다. 

학자들은 요한복음이 기록된 시기를 대략 서기 90년경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약 60년이 지난 때입니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그 때 무덤 안에서 보았던 기이한 장면들을 기억하고 비교적 상세하게 그의 복음서에 기록했습니다. “아, 맞구나! 그래서 그 때 예수님의 머리를 감쌌던 천들이 동그랗게 그런 모양으로 남아 있었던 것이구나!” 

여러분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제가 이렇게 질문하는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서로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없습니다. 좀 과격하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만,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은 크리스천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주관적인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혹시 여러분들 중에도 그런 생각을 하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주관적인 사건이 아니라 충분히 증명할 수 있는 ‘객관적인 사건’입니다.

‘주님은 나의 최고봉’을 쓴 오스왈드 체임버스 목사님이 부활에 대하여 말한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사순절 새벽 기도 때 소개했던 말씀입니다. “부활은 고대나 현대를 막론하고 역사에 기록된 어떤 사건보다 더 철저하게 증명된 사실입니다(The resurrec-tion is a fact better attested than any event recorded in any history, whether ancient or modern).” 팀 켈러(Timothy Keller, 1950-) 목사님의 말을 한번 들어 볼까요? “만약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면 당신은 그가 하신 모든 말씀들을 다 받아들여야 합니다. 만약 그가 부활하지 않았다면 그가 무슨 말을 했건 걱정할 것 없습니다. 모든 것이 걸려있는 중요한 이슈는 당신이 그의 가르침을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과연 부활하셨느냐 부활하지 않았느냐 하는 것입니다(If Jesus rose from the dead, then you have to accept all that he said; if he didn’t rise from the dead, then why worry about any of what he said? The issue on which everything hangs is not whether or not you like his teaching but whether or not he rose from the dead).” 팀 켈러 목사님은 뉴욕에 있는 ‘리디머 교회(Redeemer Church)’를 설립하신 분입니다. 요즘에 가장 영향력 있는 목사님 중 한 분입니다. 팀 켈러 목사님이 말하고 있는 대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느냐 부활하지 않았느냐에 모든 것이 걸려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지 않았다면 모든 것이 의미가 없어지고 목적이 없어집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면 모든 것에 의미가 생기고 목적이 생깁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그렇게 말했잖아요? 만일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만일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전도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리고, 교회에 나와서 봉사하고, 교회에 나와서 성경공부하고 할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바울이 말한대로 부활이 없고 우리의 삶이 여기서 끝이 난다면 “그냥 먹고 마시면서, 내가 원하는 대로 살자(고린도전서 15:32)” 이런 식의 삶의 태도가 훨씬 더 낫지 않습니까?

그러나, 부활이 있다면, 이 모든 질문들이 거꾸로 되는 것입니다. 부활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올바로 살아야 합니다. 가치 있는 일을 추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부활신앙은 지금 현재의 삶을 의미 있게 살도록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바울은 그의 생의 마지막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웠고, 내가 달려가야 할 길도 끝냈으며, 믿음도 지켰습니다. 이제 내게는 영광의 면류관을 받는 일만 남았습니다. 그 면류관은 하나님과 함께하며 의롭게 살았다는 표시로 주시는 상입니다.” (디모데후서 4:7)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I have fought the good fight, I have finished the race, and I have remained faithful.” ‘선한 싸움’을 싸웠다고 합니다. 가치 있는 일, 옳은 일, 정의로운 일을 위해서 싸웠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위해서 싸우고 있는가요? ‘선한 싸움’이 아니라면 싸울 가치가 없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허락한 삶을 레이스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는 레이스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중간에 곁 길로 가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서 뛰었습니다. 그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면류관을 기대하고 있었다는 말은 그가 부활의 삶, 영원한 삶을 확신하고 있었다는 말 아닙니까? 이제 저는 오늘 설교를 바울의 권면을 함께 읽고 마치려고 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님의 일을 위해 자신을 드리십시오. 주님을 위해 일한 여러분의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는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15:58)


4/4/2021 | 부활주일 메시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If A Grain of Wheat Falls Into The Ground And Dies

요한복음 12:20-26

방역 수칙을 지키면서 띄엄띄엄 앉아 있습니다만, 서로를 보시면서 “해피 이스터(Happy Easter)!” 하면서 인사하시지요? 부활하신 예수님은 한 곳에 모여 문을 잠그고, 불안에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Peace be with you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요한복음 20:19)”하시면서 인사를 하셨습니다. 히브리 말로는 “샬롬(Shalom)”입니다. 이 인사가 이 시간 부활절 예배를 드리는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옵니다. 아직도 상황이 종료되지 않았지만, 지난 일년 동안 참 애 많이 쓰셨습니다. 갈 곳을 마음대로 가지 못하고, 만날 사람들을 마음대로 만나지 못하고, 생활에 제약을 받으면서 참 애들 많이 쓰셨습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담임 목사로서 하나님의 평안을 전합니다. “샬롬!”

예수님의 부활의 의미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성경 말씀이 무엇일까 하고 여러 날 생각하다가 결정한 말씀이 요한복음 12:24절 말씀입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I tell you the truth, unless a kernel of wheat is planted in the soil and dies, it remains alone. But its death will produce many new kernels-a plentiful harvest of new lives.” 이 말씀을 잘 보면 “If a kernel of wheat dies(밀알 하나가 죽으면)”이라는 말과 “If a kernel of wheat doesn’t die(밀알 하나가 그대로 죽지 않으면)”이라는 말이 서로 대조되어 있습니다. 땅에 떨어져 죽는 밀알과 죽지 않은 밀알, 별로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엄청나게 다릅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새로운 생명들을 만들어 내게 되지만,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배경을 아시지요? 그 때는 유월절 명절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키는 제일 큰 명절입니다. 과거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던 조상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남은 것을 기념하는 명절입니다. 하나님이 보낸 죽음의 사자가 연기처럼 모든 사람들의 집으로 스며 들어가서 처음 난 것들을 모두 죽였습니다. 사람도 처음 난 아이는 죽었고, 가축들도 처음 난 것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의 집에는 죽음의 사자가 들어가지 않고 그냥 넘어갔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집에는 아무 피해가 없었습니다. 모세의 지시대로 문설주에 어린 양의 피를 발랐거든요. 그런 집들은 피해가 없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하는 명절이 유월절입니다. 유월절이 되면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 도시는 수많은 순례자들로 차고 넘쳤을 것입니다. 해외에 나가 살고 있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도 유월절을 지키러 왔고, 외국인들도 구경 삼아 왔을 것입니다. 

그 외국인들 가운데 그리스 사람 몇 명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이 사람들은 아마도 이스라엘에 현자(賢者)가 있다는 말을 듣고 그를 만나러 왔을 것입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고대로부터 철학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소크라테스(Socrates, BC 470년경-399)와 그의 제자 플라톤(Plato)이 있습니다. 플라톤은 아테네 출신인데요. 출생 연도도 알려지지 않았고, 사망 년도도 나와 있지 않습니다. 대충 BC 430년경에 났고, 348년경에 죽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또 한 사람 빼 놓을 수 없는 사람이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BC 384-322)입니다. 이 세 사람은 모두 그리스 철학자로서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와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이들이 살았던 시대를 우리나라 역사에서 찾아보면 고조선 때입니다. 이렇게 우리나라 역사와 서양 역사를 비교해 보면 정말 엄청난 사실에 놀라게 됩니다. 우리나라 역사에 고조선 때 문헌이 제대로 남아 있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 그리스 철학자들의 사상은 고스란히 남아 있어서 서양 사상사의 근간을 이루고 있습니다. 플라톤의 ‘국가론’ ‘소크라테스의 변명’ ‘향연’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형이상학’ ‘니코마코스 윤리학’ ‘정치학’ ‘수사학’ ‘논리학’ 등 실로 엄청납니다. 이들의 책은 한국말로도 번역되어 읽히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2차 전도여행 중에 ‘아테네(Athens)’를 방문했던 때는 서기 50년경이었습니다. 바울이 아테네 도시를 둘러보면서 수많은 신상들이 도시에 널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레오바고(Areopagus)’라는 광장에 수많은 철학자들이 모여 매일 토론을 벌이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바울은 아테네 도시에 대한 인상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아테네 사람과 그 곳에 사는 외국 사람들은 새로운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말하거나 듣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7:21)

이것이 서기 50년경의 아테네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서기 30년경 예수님 당시에도 아테네의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들은 날마다 모여서 토론했고, 새로운 사상에 대해 목이 말라 있었습니다. 이들 중 몇 사람이 유대나라에 현자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이 그리스 사람들은 예수님을 대면했습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이 사람들이 예수님께 무슨 질문을 했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이 사람들을 대면하자마자 예수님은 이들이 의도를 단번에 아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리를 말한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을 때 이 사람들은 이 사람의 입에서 무슨 새로운 말이 나올까 하고 기대했을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 바로 ‘밀알의 비유’입니다.

여러분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당연한 말씀이라는 생각을 하신 분이 계십니까? 농사를 짓는 분들에게는 새로울 것이 없는 말씀입니다. 씨앗을 뿌려서 그보다 몇 십 배, 몇 백 배의 수확을 거두어들이는 것이 농사입니다. 하지만, 이 예수님의 이 말씀은 비유 말씀이거든요? 일상적이고 쉬운 이야기 같지만 이 이야기 속에 예수님께서 전달하고자 하는 진리가 들어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단순히 씨를 뿌리고 거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려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밀알의 비유’가 평범한 이야기로 들립니까?

저는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이 말씀은 예수님 자신의 삶에 대한 비유 말씀이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가 꼭 그렇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는 것처럼, 예수님의 생명은 땅에 떨어져 죽었습니다. 땅에 떨어진 씨가 썩어 죽고, 그 죽은 씨앗의 양분을 먹고 새로운 싹이 돋아나는 것처럼, 땅에 묻힌 예수님의 생명을 통해서 수많은 생명들이 살아났습니다. 

우리가 사도신경에서 우리 믿음을 고백할 때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예수님은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the firstfruits of those who have fallen asleep, 고린도전서 15:20)’가 되셨다고 했습니다. 잠자는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죽은 사람들 가운데 부활하신 ‘첫 열매’입니다. 여러분, ‘첫 열매’라는 말은 제2, 제3, 제4의 열매들을 기대하게 합니다. 바울은 우리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 부활의 열매들이 된다고 했습니다(고린도전서 15:23).

여러분,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하나님께서는 전부터 아셨던 사람들을 그분의 아들과 동일한 형상을 갖도록 미리 정하시고, 하나님의 아들을 많은 형제들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로마서 8:29) 원래 하나님께 아들이 하나였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독생자(獨生子)’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에게 많은 형제들이 생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 많은 아들들이 생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생명을 우리를 위해서 내 주셨더니, 그 결과 수많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생긴 것입니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서 많은 열매들을 거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자기 친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것을 행하면, 너희는 내 친구다(요한복음 15:13-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명한 것을 행하면(if we do what Jesus commands)’ 우리는 예수님의 친구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친구가 되는 길이 멀고도 멀어 보입니까?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 말씀을 이렇게 읽어 보십시오. “너희도 내가 행한 것처럼 너희의 생명을 한 알의 밀알처럼 땅에 심으면 나의 친구가 된다” 이렇게 말입니다. 이렇게 이 말씀을 해석하니까 예수님의 친구가 되는 일이 그리 멀어만 보이지 않습니다.

제가 대학 다닐 때 읽은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콜베 신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분의 본명은 ‘막스밀리언 마리아 콜베’(Maximilian Maria Kolbe, 1894-1941, 폴란드)입니다. 세계 제2차 대전 때,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합니다. 콜베 신부는 동료 수도사들과 함께 유대인 2,000명과 폴란드 난민 3,000명에게 그들의 수도원을 은신처로 제공합니다. 나치는 그 수도원을 폐쇄하고 콜베 신부와 네 명의 동료들을 ‘아우슈비츠’라는 죽음의 수용소로 이송시켰습니다. 그들은 거기서 다른 수감자들과 함께 강제 노역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한 사람의 수감자가 탈옥한 일이 생겼습니다. 그 수용소에는 탈옥 사고가 있을 때는 그 탈옥자와 같은 막사를 쓰는 수감자 중에 본보기로 열 명의 수감자를 무작위로 지명해서 아사형(餓死刑)에 처한다는 룰이 있었습니다. 수용소 지휘관이 죄수들을 모아 놓고 열 명을 지명합니다. “너!” “너!” 이렇게 한 사람 한 사람 지명을 합니다. 그런데, 지명 당한 사람 중에 프란치세크 가조우니체(Franciszek Gajowniczek)라는 사람이 “내 아내, 내 아이들, 나는 죽기 싫습니다!” 하면서 처절하게 울부짖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 콜베 신부가 모자를 벗고 조용히 앞으로 나가 지휘관 앞에 서서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폴란드의 가톨릭 사제입니다. 그 사람 대신 제가 죽게 해주십시오. 저는 늙었습니다. 저 사람은 아내와 자녀들이 있습니다.” 콜베 신부는 아사형을 선고받은 프란치세크 가조우니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저는 폴란드에서 온 가톨릭 사제입니다. 제가 저 사람을 대신해서 죽겠습니다. 저 사람은 아내와 자녀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의 청원이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래서, 콜베 신부가 그 사람을 대신해서 아사형을 받게 되었습니다. 수용소 지휘관은 이들을 즉시 처형하지 않고, 물과 음식을 일체 주지 않고 굶겨 죽도록 했습니다. 수용소 간수들의 말에 의하면, 콜베 신부는 감옥 안에 같이 갇힌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었다고 합니다. 그 후 3주가 지났지만 콜베 신부와 다른 세 사람이 기적처럼 살아있었습니다. 결국 나치는 독극물을 주사하여 그들을 모두 살해했다고 합니다.

콜베 신부에 대해 더 알고 싶어서 알아보았더니, 콜베 신부는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었습니다. 1912년 로마 대학에 유학을 가서 철학과 신학, 수학, 물리학 등을 공부하였고, 1915년 그레고리오 대학교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1919년에는 성 보나벤투라 대학교에서 신학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콜베 자신은 자기는 나이가 많아 쓸모가 없는 사람이라고, 그러니 내가 저 사람 대신 죽겠다고 했지만, 그 때 그는 겨우 47살이었습니다. 그는 결코 쓸모 없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버지에게 갈 자가 없다(요한복음 14:6).” 콜베 신부의 아사 감방에 지금도 ‘콜베 신부의 십자가’가 있다고 합니다. 그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통과했던 십자가입니다. 콜베 신부 역시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죽음으로써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과했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했습니다. 역사를 보면, 제2, 제3의 콜베 신부가 계속 나왔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기적이고 각박한 것만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라 자신의 생명을 땅에 심는 사람들이 계속 나왔습니다. 독일인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와 자신의 삶을 바친 서서평(Elisabeth Shepping, 1880-1934) 선교사, 나에게 천개의 생명이 있다면 모두 조선에게 주겠다고 했던 캐나다의 루비 켄드릭(Lubye Rachael Kendrick, 1883-1908) 선교사, 소록도에서 나병환자를 위해 43년을 바친 오스트리아의 수녀 마리안느(Marianne Stöeger, 1934-)와 마가렛(Margreth Pissarel, 1935-) 수녀, 아프리카의 남수단에 가서 자신의 생명을 심은 이태석 신부(1962-2010), 이런 분들이 있어서 세상은 여전히 아름답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은 내가 부활의 ‘첫 열매’이고 나를 믿는 너희는 부활의 ‘나중 열매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우리는 단순히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너희도 예수님처럼 너희의 생명을 땅에 심어 많은 열매를 거두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4/4/2021 | 부활주일 메시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If A Grain of Wheat Falls Into The Ground And Dies

요한복음 12:20-26

방역 수칙을 지키면서 띄엄띄엄 앉아 있습니다만, 서로를 보시면서 “해피 이스터(Happy Easter)!” 하면서 인사하시지요? 부활하신 예수님은 한 곳에 모여 문을 잠그고, 불안에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Peace be with you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요한복음 20:19)”하시면서 인사를 하셨습니다. 히브리 말로는 “샬롬(Shalom)”입니다. 이 인사가 이 시간 부활절 예배를 드리는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옵니다. 아직도 상황이 종료되지 않았지만, 지난 일년 동안 참 애 많이 쓰셨습니다. 갈 곳을 마음대로 가지 못하고, 만날 사람들을 마음대로 만나지 못하고, 생활에 제약을 받으면서 참 애들 많이 쓰셨습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담임 목사로서 하나님의 평안을 전합니다. “샬롬!”

예수님의 부활의 의미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성경 말씀이 무엇일까 하고 여러 날 생각하다가 결정한 말씀이 요한복음 12:24절 말씀입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I tell you the truth, unless a kernel of wheat is planted in the soil and dies, it remains alone. But its death will produce many new kernels-a plentiful harvest of new lives.” 이 말씀을 잘 보면 “If a kernel of wheat dies(밀알 하나가 죽으면)”이라는 말과 “If a kernel of wheat doesn’t die(밀알 하나가 그대로 죽지 않으면)”이라는 말이 서로 대조되어 있습니다. 땅에 떨어져 죽는 밀알과 죽지 않은 밀알, 별로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엄청나게 다릅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새로운 생명들을 만들어 내게 되지만,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배경을 아시지요? 그 때는 유월절 명절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키는 제일 큰 명절입니다. 과거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던 조상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남은 것을 기념하는 명절입니다. 하나님이 보낸 죽음의 사자가 연기처럼 모든 사람들의 집으로 스며 들어가서 처음 난 것들을 모두 죽였습니다. 사람도 처음 난 아이는 죽었고, 가축들도 처음 난 것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의 집에는 죽음의 사자가 들어가지 않고 그냥 넘어갔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집에는 아무 피해가 없었습니다. 모세의 지시대로 문설주에 어린 양의 피를 발랐거든요. 그런 집들은 피해가 없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하는 명절이 유월절입니다. 유월절이 되면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 도시는 수많은 순례자들로 차고 넘쳤을 것입니다. 해외에 나가 살고 있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도 유월절을 지키러 왔고, 외국인들도 구경 삼아 왔을 것입니다. 

그 외국인들 가운데 그리스 사람 몇 명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이 사람들은 아마도 이스라엘에 현자(賢者)가 있다는 말을 듣고 그를 만나러 왔을 것입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고대로부터 철학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소크라테스(Socrates, BC 470년경-399)와 그의 제자 플라톤(Plato)이 있습니다. 플라톤은 아테네 출신인데요. 출생 연도도 알려지지 않았고, 사망 년도도 나와 있지 않습니다. 대충 BC 430년경에 났고, 348년경에 죽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또 한 사람 빼 놓을 수 없는 사람이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BC 384-322)입니다. 이 세 사람은 모두 그리스 철학자로서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와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이들이 살았던 시대를 우리나라 역사에서 찾아보면 고조선 때입니다. 이렇게 우리나라 역사와 서양 역사를 비교해 보면 정말 엄청난 사실에 놀라게 됩니다. 우리나라 역사에 고조선 때 문헌이 제대로 남아 있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 그리스 철학자들의 사상은 고스란히 남아 있어서 서양 사상사의 근간을 이루고 있습니다. 플라톤의 ‘국가론’ ‘소크라테스의 변명’ ‘향연’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형이상학’ ‘니코마코스 윤리학’ ‘정치학’ ‘수사학’ ‘논리학’ 등 실로 엄청납니다. 이들의 책은 한국말로도 번역되어 읽히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2차 전도여행 중에 ‘아테네(Athens)’를 방문했던 때는 서기 50년경이었습니다. 바울이 아테네 도시를 둘러보면서 수많은 신상들이 도시에 널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레오바고(Areopagus)’라는 광장에 수많은 철학자들이 모여 매일 토론을 벌이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바울은 아테네 도시에 대한 인상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아테네 사람과 그 곳에 사는 외국 사람들은 새로운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말하거나 듣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7:21)

이것이 서기 50년경의 아테네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서기 30년경 예수님 당시에도 아테네의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들은 날마다 모여서 토론했고, 새로운 사상에 대해 목이 말라 있었습니다. 이들 중 몇 사람이 유대나라에 현자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이 그리스 사람들은 예수님을 대면했습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이 사람들이 예수님께 무슨 질문을 했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이 사람들을 대면하자마자 예수님은 이들이 의도를 단번에 아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리를 말한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을 때 이 사람들은 이 사람의 입에서 무슨 새로운 말이 나올까 하고 기대했을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 바로 ‘밀알의 비유’입니다.

여러분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당연한 말씀이라는 생각을 하신 분이 계십니까? 농사를 짓는 분들에게는 새로울 것이 없는 말씀입니다. 씨앗을 뿌려서 그보다 몇 십 배, 몇 백 배의 수확을 거두어들이는 것이 농사입니다. 하지만, 이 예수님의 이 말씀은 비유 말씀이거든요? 일상적이고 쉬운 이야기 같지만 이 이야기 속에 예수님께서 전달하고자 하는 진리가 들어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단순히 씨를 뿌리고 거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려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밀알의 비유’가 평범한 이야기로 들립니까?

저는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이 말씀은 예수님 자신의 삶에 대한 비유 말씀이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가 꼭 그렇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는 것처럼, 예수님의 생명은 땅에 떨어져 죽었습니다. 땅에 떨어진 씨가 썩어 죽고, 그 죽은 씨앗의 양분을 먹고 새로운 싹이 돋아나는 것처럼, 땅에 묻힌 예수님의 생명을 통해서 수많은 생명들이 살아났습니다. 

우리가 사도신경에서 우리 믿음을 고백할 때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예수님은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the firstfruits of those who have fallen asleep, 고린도전서 15:20)’가 되셨다고 했습니다. 잠자는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죽은 사람들 가운데 부활하신 ‘첫 열매’입니다. 여러분, ‘첫 열매’라는 말은 제2, 제3, 제4의 열매들을 기대하게 합니다. 바울은 우리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 부활의 열매들이 된다고 했습니다(고린도전서 15:23).

여러분,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하나님께서는 전부터 아셨던 사람들을 그분의 아들과 동일한 형상을 갖도록 미리 정하시고, 하나님의 아들을 많은 형제들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로마서 8:29) 원래 하나님께 아들이 하나였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독생자(獨生子)’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에게 많은 형제들이 생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 많은 아들들이 생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생명을 우리를 위해서 내 주셨더니, 그 결과 수많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생긴 것입니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서 많은 열매들을 거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자기 친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것을 행하면, 너희는 내 친구다(요한복음 15:13-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명한 것을 행하면(if we do what Jesus commands)’ 우리는 예수님의 친구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친구가 되는 길이 멀고도 멀어 보입니까?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 말씀을 이렇게 읽어 보십시오. “너희도 내가 행한 것처럼 너희의 생명을 한 알의 밀알처럼 땅에 심으면 나의 친구가 된다” 이렇게 말입니다. 이렇게 이 말씀을 해석하니까 예수님의 친구가 되는 일이 그리 멀어만 보이지 않습니다.

제가 대학 다닐 때 읽은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콜베 신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분의 본명은 ‘막스밀리언 마리아 콜베’(Maximilian Maria Kolbe, 1894-1941, 폴란드)입니다. 세계 제2차 대전 때,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합니다. 콜베 신부는 동료 수도사들과 함께 유대인 2,000명과 폴란드 난민 3,000명에게 그들의 수도원을 은신처로 제공합니다. 나치는 그 수도원을 폐쇄하고 콜베 신부와 네 명의 동료들을 ‘아우슈비츠’라는 죽음의 수용소로 이송시켰습니다. 그들은 거기서 다른 수감자들과 함께 강제 노역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한 사람의 수감자가 탈옥한 일이 생겼습니다. 그 수용소에는 탈옥 사고가 있을 때는 그 탈옥자와 같은 막사를 쓰는 수감자 중에 본보기로 열 명의 수감자를 무작위로 지명해서 아사형(餓死刑)에 처한다는 룰이 있었습니다. 수용소 지휘관이 죄수들을 모아 놓고 열 명을 지명합니다. “너!” “너!” 이렇게 한 사람 한 사람 지명을 합니다. 그런데, 지명 당한 사람 중에 프란치세크 가조우니체(Franciszek Gajowniczek)라는 사람이 “내 아내, 내 아이들, 나는 죽기 싫습니다!” 하면서 처절하게 울부짖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 콜베 신부가 모자를 벗고 조용히 앞으로 나가 지휘관 앞에 서서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폴란드의 가톨릭 사제입니다. 그 사람 대신 제가 죽게 해주십시오. 저는 늙었습니다. 저 사람은 아내와 자녀들이 있습니다.” 콜베 신부는 아사형을 선고받은 프란치세크 가조우니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저는 폴란드에서 온 가톨릭 사제입니다. 제가 저 사람을 대신해서 죽겠습니다. 저 사람은 아내와 자녀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의 청원이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래서, 콜베 신부가 그 사람을 대신해서 아사형을 받게 되었습니다. 수용소 지휘관은 이들을 즉시 처형하지 않고, 물과 음식을 일체 주지 않고 굶겨 죽도록 했습니다. 수용소 간수들의 말에 의하면, 콜베 신부는 감옥 안에 같이 갇힌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었다고 합니다. 그 후 3주가 지났지만 콜베 신부와 다른 세 사람이 기적처럼 살아있었습니다. 결국 나치는 독극물을 주사하여 그들을 모두 살해했다고 합니다.

콜베 신부에 대해 더 알고 싶어서 알아보았더니, 콜베 신부는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었습니다. 1912년 로마 대학에 유학을 가서 철학과 신학, 수학, 물리학 등을 공부하였고, 1915년 그레고리오 대학교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1919년에는 성 보나벤투라 대학교에서 신학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콜베 자신은 자기는 나이가 많아 쓸모가 없는 사람이라고, 그러니 내가 저 사람 대신 죽겠다고 했지만, 그 때 그는 겨우 47살이었습니다. 그는 결코 쓸모 없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버지에게 갈 자가 없다(요한복음 14:6).” 콜베 신부의 아사 감방에 지금도 ‘콜베 신부의 십자가’가 있다고 합니다. 그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통과했던 십자가입니다. 콜베 신부 역시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죽음으로써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과했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했습니다. 역사를 보면, 제2, 제3의 콜베 신부가 계속 나왔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기적이고 각박한 것만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라 자신의 생명을 땅에 심는 사람들이 계속 나왔습니다. 독일인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와 자신의 삶을 바친 서서평(Elisabeth Shepping, 1880-1934) 선교사, 나에게 천개의 생명이 있다면 모두 조선에게 주겠다고 했던 캐나다의 루비 켄드릭(Lubye Rachael Kendrick, 1883-1908) 선교사, 소록도에서 나병환자를 위해 43년을 바친 오스트리아의 수녀 마리안느(Marianne Stoeger, 1934-)와 마가렛(Margreth Pissarel, 1935-) 수녀, 아프리카의 남수단에 가서 자신의 생명을 심은 이태석 신부(1962-2010), 이런 분들이 있어서 세상은 여전히 아름답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은 내가 부활의 ‘첫 열매’이고 나를 믿는 너희는 부활의 ‘나중 열매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우리는 단순히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너희도 예수님처럼 너희의 생명을 땅에 심어 많은 열매를 거두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