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2/2018 | 부활절 넷째 주일

평안의 인사 Greetings of Peace

요한복음 20:19-23

오늘은 부활절 넷째 주일입니다. ‘Fourth Sunday of Easter’입니다. 지금도 부활절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나누신 인사는 “너희에게 평강이 있기를 바란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두려워 문을 꼭 걸어 잠그고 숨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에 오신 것입니다. 극도의 불안과 공포심으로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바란다!”고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인사를 건넸습니다.

며칠 전 새벽기도에서 읽은 말씀입니다. “평화의 주님께서 언제 어디서나 여러분에게 평안을 내려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실 것입니다. 나 바울이 친필로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 이 글씨로 내가 친히 보내는 편지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16-18)

제가 벌써 오래 되었습니다만, 터키 성지 순례를 갔다가 거기서 거대한 ‘카타콤 (Catacomb)’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원래 ‘카타콤’은 ‘cata (가운데)’라는 말과 ‘tumbas (무덤들)’이라는 말이 합성된 말입니다. ‘공동묘지 가운데’라는 뜻입니다. 소아시아 (지금의 터키) 지역에 박해를 피해 피난 가 있던 크리스천들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몰래 공동묘지에 모여 예배를 드리고, 서로 안부를 물었습니다.

터키에 ‘데린구유 (Derinkuyu)’라는 세계 최대의 ‘카타콤’이 있습니다. 지하 55m, 모두 8층으로 되어 있고요. 마구간, 포도주 만드는 틀, 식당, 교실이 있고, 무기고와 묘지도 있습니다. 관광객에게 공개 되는 것은 전체 규모의 10% 정도라고 합니다. 3층과 4층에 교회가 있고,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광장이 있습니다. 안내하는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마도 이 자리에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을 격려차 방문했던 베드로가 서서 설교를 했을 지 모릅니다.” ‘데린구유’ 카타콤이 1세기에 만들어졌다면 가능한 얘기일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주장하고 있는대로 300년 경에 로마의 박해를 피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면, 베드로가 방문했을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 하겠지요. 1세기에 베드로가 ‘데린구유’에 피신해 있던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을 방문했다면, 베드로가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요? 베드로전서 1장에 보면 베드로가 이렇게 편지를 시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고향을 떠나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 비두니아에 흩어져 살고 있는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래 전에 여러분을 선택하셨고, 그분의 거룩한 백성으로 삼기로 계획해 놓으셨습니다...... 은혜와 평안이 여러분 가운데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베드로전서 1:1-2) 베드로가 이렇게 인사하고 있지 않습니까? “May God give you more and more grace and peace (하나님께서 은혜와 평화를 넘치게 주시기를 빕니다).” 조국을 떠나서, 하루 하루를 어떻게 살아 남았는지 모를 극도의 불안과 공포 속에 살고 있는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평화를 전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평화’에 대한 말씀들이 많이 나옵니다. 대표적인 말씀 중의 하나가 누가복음 10:5-6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이 집에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라고 말하여라. 만일 평화의 사람이 있으면, 네 평화가 그에게 머무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네게로 돌아올 것이다.” 이 말씀을 좀 더 넓게 해석하면,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또 누구를 만나든지 우리가 전해야 할 메시지는 평화의 메시지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평화가 임하기를 소원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뒤집어서 생각하면,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평화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폴 틸리히 (Paul Tillich, 1886-1965)라는 영향력 있는 개신교 신학자가 있습니다. 틸리히는 인간에게 세 가지의 불안이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운명과 죽음에 대한 불안 (the anxiety of death)이고, .둘째는, 공허함과 의미를 상실하는 데서 오는 불안 (the anxiety of meaninglessness)이고, 셋째는 정죄함에서 오는 불안 (the anxiety of condemnation)이라고 했습니다. 운명과 죽음에 대한 불안은 가장 기초적이고 보편적인 불안 (basic and universal anxiety)이라고 했습니다. 의미를 상실한 데서 오는 불안은 좀 어려운 말입니다만, 이 불안은 ‘non-being (비존재)’로부터 오는 위협 (threat)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불안은 ‘실존론적인 불안 (existential anxiety)’이라고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정죄함에서 오는 불안은 우리가 완전하지 않음으로부터 오는 불안이라고 했습니다. 틸리히는 이 세 가지 불안 가운데, 우리가 가장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불안은 의미를 상실함으로부터 오는 불안이라고 했습니다.

Tillich의 말을 들어 보면 누구도 예외가 아닌 것 같습니다. 아침 일찍부터 나가서 저녁 7시가 넘어야 집으로 돌아 옵니다. 씻고 식사하고 나면 9시가 넘습니다. 그러면, 또 자고 아침에 일어나 출근해야 합니다. 왜 무엇을 위해서 우리는 그렇게 일을 해야 합니까? 먹고 살기 위해서라는 대답이 우리에게 아무 의미를 주지 못합니다. 공부하는 학생들은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 부모를 떠나고 집을 떠나서 이곳 보스턴까지 와서 맘 고생하면서 공부합니까? 나중에 학위를 받아서 잘 살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는 대답이 우리에게 큰 의미를 주지 못합니다. Tillich의 말은 이렇게 의미를 상실함에서 오는 공허함과 불안이 제일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무서워서 불안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이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누구의 집에 들어가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먼저 “당신에게 평화가 있기를!” 이렇게 평화를 빌어 주라는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잠깐 보류해 두고, 요한복음 14:27에 있는 말씀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남긴다.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 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마라.”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I am leaving you with a gift- peace of mind and heart. And the peace I give is a gift the world cannot give. So don't be troubled or afraid.”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시는 선물은 ‘peace of mind and heart’입니다. 우리들의 생각과 마음에 평화, 평안을 주시는 것입니다. ‘mind’는 우리의 ‘머리 (head)’에 있습니다. 우리의 지식 (intellect)과 판단을 총괄하는 곳이 ‘mind’ ‘head’입니다. ‘heart’는 우리의 마음이 있는 곳입니다. heart는 우리의 감정과 느낌, intelligence (지성)를 총괄하는 곳입니다. 하지만, 이론상 그렇다는 것이지, mind와 heart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튼 주님은 우리가 생각하고 판단하고, 감정을 느끼는 모든 과정 속에 평화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문제는 예수님께서 ‘평화’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평화’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 말로 ‘평화’ ‘평강’ 혹은 ‘평안’이라고 번역된 이 말은, ‘샬롬 (Shalom)’이라는 히브리어에서 온 말입니다. 제가 이스라엘에 가 봤더니, 지금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서로 만나면 ‘샬롬’이라고 인사합니다. 헤어질 때도 ‘샬롬’이라고 인사합니다. 모르는 사람과 스쳐 지나가면서 ‘샬롬’이라고 인사합니다. ‘샬롬’이라는 말의 의미를 조사해 봤더니, complete¬ness, wholeness, health, peace, welfare, safety, soundness, tranquility, prosperity, perfectness, fullness, rest, harmony 이런 뜻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온갖 좋은 의미가 다 들어 있습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라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지금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은이 정상 회담을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정상회담의 의제(議題) 속에 북한과 ‘평화협정’을 맺는 것이 들어 있다고 합니다. 이 때 우리가 생각하는 ‘평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서로 공격하지 않고, 도발하지 않는 것입니다. 서로 싸우지 않는 것입니다. 비록 북한과 정상회담이 잘 되어서 ‘평화협정’을 맺는다고 해도 상대방의 마음이 바뀌어서 어선을 나포하거나, 무장 공비를 보내서 주요 시설을 파괴하거나 하면 그 ‘평화협정’은 한낱 종이조각이 되고 맙니다. 이것이 세상이 주는 ‘평화’입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는 temporary 평화입니다. permanent한 평화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신다고 약속하신 ‘평화’는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I am leaving you with a gift”라고 하셨습니다. 또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화 (the peace I give)’라고 했습니다. NIV 성경에 보면 “My peace I give you”라고 했습니다. 여기 ‘peace’라고 번역된 말들은 모두 히브리어 ‘shalom’을 번역한 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셨던 ‘샬롬’을 우리에게 주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복음서를 읽어 보세요. 예수님은 어떤 경우에도 ‘샬롬’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 위기 상황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얼마다 다급한 일들이 많았습니까? 그 어떤 때에도 예수님은 ‘샬롬’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 ‘샬롬’을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 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마라 (So don't be troubled or afraid).” 요한복음 16장에도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말한 것은 너희가 내 안에서 평안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는 너희가 고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담대하여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33절) 무슨 뜻입니까? 세상이 주는 ‘평화’는 우리 마음에 생기는 근심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는 우리가 느끼는 두려움을 해결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시는 ‘하나님의 샬롬’을 받은 사람은 근심을 이기고, 두려움을 넉넉하게 이긴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주시는 ‘샬롬’으로 고난을 이기고, 환난을 이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주님이 주시는 ‘샬롬’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오늘 말씀의 결론으로, 세 개의 성경 말씀을 소개하겠습니다. 하나는, 골로새서 3:15에 있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 받은 평화로 여러분 마음을 다스리십시오. 항상 감사하는 생활을 하십시오 (And let the peace that comes from Christ rule in your hearts. For as members of one body you are called to live in peace. And always be thankful).” (New Living Translation) 이 말씀을 직역하면, 이런 뜻입니다. “그리스도께로부터 오는 평화가 여러분들의 마음을 다스리게 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몸에 속한 지체로서 평화롭게 살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말씀을 잘 보십시오. 내가 무엇을 소유함으로 평화를 얻으려고 하지 말고,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평화가 네 속에 흘러 들어오도록, 그렇게 해서 그 평화가 나의 삶을 지배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로 말미암아 불안해 하고, 두려움과 공포 속에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환경 속에서도 함께 부름을 받은 지체들과 함께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부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속해 있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바울은 또 ‘평안의 끈 (the bond of peace)’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했습니다 (에베소서 4:3). 교회의 지체들은 모두 서로 ‘평안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말씀은 빌립보서 4:6-7에 말씀입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Then you will experience God's peace, which exceeds anything we can understand. His peace will guard your hearts and minds as you live in Christ Jesus).” 저는 이 말씀을 참 좋아합니다. 하나님의 ‘평화’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을 누릴 수 있는 비결은 염려가 되고 근심이 될 때 무릎 꿇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음으로 잃어버리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하나님의 ‘평화’가 우리 마음과 생각을 채우고,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시는 은혜를 놓치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말씀은 빌립보서 4:9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나에게서 배운 것과 받은 것들을 행동으로 옮기십시오. 그러면 평화의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Keep putting into practice all you learned and received from me-everything you heard from me and saw me doing. Then the God of peace will be with you).” 하나님의 말씀을 배운대로, 깨달은대로 행동으로 옮기고, 실천으로 옮기는 것이, 하나님의 ‘평화’를 경험하는 기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당장에 이 말씀대로 실천해 보십시오. 정말 하나님의 ‘평화’를 경험할 수 있을까요? 저의 경험으로 보면 틀림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천한다는 말은 내 생각을 내려 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실천하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정말인지, 아닌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행동으로 옮겨 보십시오.

누군가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불안의 시대 (the age of anxiety)’라고 했습니다. Leonard Bernstein (1918-1990)이 1949년에 작곡한 Symphony No. 2 제목이 ‘The Age of Anxiety’입니다. Bernstein이 보스턴 북쪽에 있는 Lawrence에서 태어났더라고요. 보스턴에서 화장품 가게를 하던 부모가 여름에 로렌스로 휴가를 갔다가 갑자기 낳은 아들이라고 합니다. 그 아이가 미국이 낳은 최고의 지휘자이자 작곡가, 음악 강연자, 피아니스트가 되었습니다. 번스타인은 오랫동안 뉴욕 필하모닉의 음악 감독으로 있었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입니다. 이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습니다. 근심과 걱정과 두려움에서 우리를 지켜 주고 그것들을 이기게 하는 ‘평화’입니다. 먼저 우리가 이 ‘평화’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평화’의 메신저들이 될 수 있습니다. 가는 곳마다 만나는 사람마다 하나님의 ‘평화’를 전하십시오. “이 집에, 이 사람에게 하나님의 평화가 임하기를 빕니다!”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4/15/2018 | 부활절 셋째 주일

요한복음 10:10 John 10:10

요한복음 10:7-15

오늘은 부활절 셋째 주일입니다. ‘Third Sunday of Easter’입니다. 보통은 교회력에서 이런 경우 ‘of’대신에 ‘after’를 씁니다. 그런데, 부활절만큼은 ‘after’를 쓰지 않고 ‘of’를 씁니다. ‘of’라는 전치사가 ‘~에 속해 있다’ 혹은 ‘연관이 있다’는 의미로 사용 하잖아요? 지금은 부활절 지난 후 세 번째 맞는 주일이지만, 지금도 여전히 부활절에 속해 있고, 부활절과 연관되어 있는 주일이라는 것입니다. 부활절은 한번의 행사로 끝나는 이벤트가 아니라 앞으로 계속되는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력을 표시하는 방법에서도 부활절의 의미가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을 보면서 교회력을 만드신 분들이 참 지혜롭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 여러분과 함께 나눌 말씀은 ‘풍성한 생명 (the abundant life)’에 대한 말씀입니다. 결론적인 말씀입니다만, 우리에게 ‘풍성한 생명’이 주어진 것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 (I lay down my life for the sheep).” (11, 15절)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내 놓지 않으셨더라면 우리가 ‘풍성한 생명’을 얻을 가능성이 아주 없을 뻔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더욱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해 왔다.” (10절) 나는 정말 세상 사람들이 왜 성경에 있는 이 말씀을 듣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세상 사람들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내가 너희들에게 충만한 생명을 주려고 왔다”고 말한 사람은 인류 역사상 아무도 없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한 번쯤 이 말에 귀를 기울이고, 이 말을 신중하게 생각해 봐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무도 자기 생활에 만족한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 만족하지 못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불만족스럽지만 “사는 게 다 이렇지”라고 생각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내면에는 ‘충만한 생명’에 대한 목마름 (thirst)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자 사이의 대화(對話)의 주제가 바로 ‘충만한 생명’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 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목마를 것이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계속 솟아나,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 주는 우물이 될 것이오.” 예수님의 이 말을 들은 사마리아 여자가 뭐라고 응답합니까? “선생님, 저에게 그런 물을 주셔서 제가 다시는 목이 마르지 않을 뿐더러 물을 길으러 여기에 오지 않게 해 주십시오.” (요한복음 4:15) 이렇게 대답하잖아요? 이 여자의 내면에 ‘충만한 생명’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똑 같은 목마름이 오늘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있고, 저에게도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풍성한 생명’이란 어떤 생명을 말할까요? 이 말씀이 NIV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The thief comes only to steal and kill and destroy; I have come that they may have life, and have it to the full.” (NIV) 우리 말 성경의 ‘풍성한’이란 말이 ‘to the full’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I have come (so) that they may have it to the full’이라고 하면 “나는 그들이 생명을 충분히, 충만하게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왔다”라는 뜻입니다. ‘충만한 (to the full or abundant)’이라는 말에 해당하는 희랍어는 ‘페리숀 (περισσών)’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exceedingly, very highly, beyond measure, more, superfluous’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든지 그 이상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고 넘쳐서 측량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넘치는 생명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요즘 새벽기도에서 골로새서 말씀을 읽고 있는데요. 지난 목요일 새벽에 골로새서 2:9-10 말씀을 읽었습니다. 이런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 (deity)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느니라 (For in Christ all the fullness of the Deity lives in bodily form, and you have been given fullness in Christ, who is the head over every power and authority).” 전에 골로새서를 많이 읽었지만, 그 날 아침에 이 말씀이 전혀 새로운 말씀으로 들렸습니다. 예수님 안에 ‘하나님의 충만하심’이 있다는 말씀은 알았는데,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충만하심’이 주어진다는 말씀 아닙니까?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충만하심’ 즉 ‘하나님의 신성 (deity)’이 하나도 빠짐 없이 있는데, 그 ‘하나님의 충만하심’이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에게도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예수님 믿는 사람들 아닙니까? 예수님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충만하심’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읽으면서 놀란 것은 이 ‘하나님의 충만하심 (The fullness of God)’ 속에 ‘풍성한 생명’의 의미가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믿음생활 속에 이런 엄청난 하나님의 약속이 들어 있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생활을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귀하게 여기세요. 기분나는 대로, 감정에 따라 치우치는 믿음생활 하지 마세요. 진실한 마음으로 믿음생활 하세요. 우리의 구원은 값진 것입니다. 베드로가 말한 것처럼 우리의 구원은 금이나 은으로 산 것이 아닙니다. ‘the precious blood of Christ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산 구원입니다 (베드로전서 1:18-19). 주일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하나님께 드리는 찬송,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 귀하여 여기고 최선을 다하십시오. ‘풍성한 생명’은 예수님 안에 감춰져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를 힘쓰는 사람이 예수님 안에 감춰진 ‘풍성한 생명’을 발견합니다.

둘째로, 그러면 예수님 안에서 ‘풍성한 생명’을 발견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풍성한 생명’이라는 말은 삶의 의미와 삶의 목적과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늘 피곤하고, 지쳐 있는 이유는 삶의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나에게 삶의 의미를 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지역의 목사님들이 한 달에 한 번씩 모임입니다. 같이 예배도 드리고, 식사도 하고, 소식도 주고 받으면서 교제를 합니다. 한번은 어느 목사님이 설교를 하는데, 목회의 고달픔을 호소하셨습니다. 주일이 다가 오면 가슴이 뛴다고 합니다. 그리고, 멀리서 교회 건물이 보이면 가슴이 내려 앉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여기 저기서 자기도 동감(同感)한다는 말이 나왔습니다. 그 자리에서 제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다가 하지 않았습니다. 주일이 다가 오면 저도 가슴이 뜁니다. 교회 건물이 멀리서 보이면 저도 가슴이 뜁니다. 그러나, 제가 가슴이 뛰는 이유는 가슴이 내려 앉기 때문이 아니라, 기대가 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설교하는 것이 좋고 기대가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여러분과 함께 은혜를 나누는 이 시간이 저에게는 가장 행복한 시간입니다. 그래서 주일이 다가 오면 저의 가슴이 뜁니다. 저에게는 목회(牧會)가 매우 의미 있는 일입니다. 저에게는 목회의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에 의미가 있고 이유가 있을 때 우리는 피곤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발견하는 ‘풍성한 생명’은 분명히 삶의 의미와 그리고 삶의 이유, 삶의 목적과 관계가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하고 있는 일이 무거운 짐이 아니라 즐거움이 되고, 행복한 일이 될 때 우리는 비로소 ‘풍성한 생명’을 누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다 달리고, 믿음을 지켰으니, 나를 위해 의의 면류관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4:7-8)” 이렇게 자기의 삶을 고백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이렇게 지치지 않고, 열정적인 삶을 살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의 삶의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의 삶의 의미가 있었고,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까? 이런 사람이 예수님 안에서 ‘풍성한 생명’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문제는 지금 여러분의 삶에서 목적을 발견하고 의미를 발견하는 일입니다. 학생들은 공부하는 일에서 삶의 목적을 발견하고, 삶의 의미와 이유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 여러분의 삶의 목적과 의미가 숨겨 있습니다. 성경을 보세요. 단순히 “so that we may have life” 라고 말하지 않고, “so that we may have life to the full” 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에게 ‘풍성한 생명’를 살게 해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예수님 안에 ‘풍성한 삶’의 비결이 숨겨져 있습니다. 이 비밀을 발견하는 것은 여러분에게 주어진 몫입니다.

셋째로, ‘풍성한 생명’은 ‘하나님과의 관계 (a relationship with God)’ 속에서 발견됩니다. ‘풍성한 생명’은 물질적인 넉넉함이나 조건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에 따라 주어지는 것입니다. 가끔 성경에 ‘동행한다’는 말이 나옵니다. 영어 표현으로 하면 ‘to walk with God’입니다. 하나님과 같이 길을 걷는 것입니다. 창세기 6:9에 보면 노아에 대한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노아는 그 당대에 의롭고 흠이 없는 사람이었다.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Noah was a righteous man, the only blameless person living on earth at the time, and he walked in close fellowship with God.”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말이 “He walked in close fellowship with God”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과 이런 관계를 맺고, 이런 교제를 나누는 사람이 ‘풍성한 생명’을 누립니다.

여러분,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는 것을 아십니까?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 하니라.” (누가복음 12:15) 주님의 말씀입니다. “Life is not measured by how much you own.” 이 말씀 끝에 들려 오는 울림이 있습니다. “but life is measured by a relationship with God (사람의 생명은 그 사람이 맺고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달려 있다).”

한가지 더 예를 들어 볼까요? “나는 어떠한 형편에서나 자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나는 가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압니다.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4:11-13) 성경에 참 놀라운 말씀들이 많이 있지만, 이 말씀도 대단한 말씀입니다. 바울이 이런 선언을 하게 된 배경에는 그가 물질적인 문제, 경제적인 문제를 극복했다는 믿음이 깔려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렵든지, 넉넉하든지 그것이 나에게는 전혀 문제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경제적인 문제에 대한 자유함을 선포한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정말 크리스천의 삶의 본질적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바울의 이 선언과 반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경제적인 문제가 모든 것을 좌우한다고 생각합니다. 행복을 좌우하는 것도 경제적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믿음생활을 좌우하는 것도 경제적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세계가 이 논리에 의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좀 더 두고 봐야 알 수 있는 일이지만, 북한의 김정은이 국제 무대로 나오기를 희망하는 이유도 결국 경제적인 논리에 굴복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조심스러운 이야기입니다만, 북한이 그렇게 핵무기를 소유하려고 했던 것도 결국은 국제 무대로 나오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나 하는 것입니다.

경제적인 문제가 모든 일을 결정한다는 것은 세상의 논리입니다. 크리스천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모든 일을 결정한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엇보다 우선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크리스천들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경제적인 문제도 극복하게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크리스천들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에게 ‘풍성한 생명’이 주어진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말씀 드렸잖아요? ‘풍성한 생명’은 죽지 못해서 살아 있는 피곤하고 지친 생명이 아니라, ‘life to the full’이라고요. 삶의 목적이 주어지고, 삶의 의미와 이유가 분명한 삶이라고요. ‘풍성한 생명’을 얻은 사람은 모든 문제를 이깁니다. 경제적인 어려움도 이깁니다. 어떤 삶의 고난도 이깁니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 나를 통해 들어가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 사람은 들어가기도 하고 나가기도 하며, 또 좋은 목초를 발견하기도 할 것이다.” (7-9절) 예수님께서 자신을 ‘양의 문 (the gate for the sheep)’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자신과 양들의 관계를 설정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또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목자는 양들의 이름을 부르며 그들을 밖으로 인도한다. 목자가 자기 양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후, 양들 앞에서 걸어가면,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기 때문에 그의 뒤를 따른다.” (3-4절)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정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성경을 읽음으로써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성경을 읽거나, 기도하는 일 외에 다른 일을 통해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정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이 두가지 채널 외에 다른 채널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순절 지나고, 주난 주간 지나고, 부활절을 보내면서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말씀이 ‘풍성한 생명’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더욱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해 왔다.” (요한복음 10:10) 그래서 오늘 설교 말씀 제목이 ‘요한복음 10:10’입니다. 사방에서 불어 오는 싱그러운 봄바람과 이 바람을 맞고 겨울 동안 죽어 있던 생명들이 살아나듯이, 주님은 우리에게 ‘풍성한 생명’을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풍성한 생명’을 얻게 하시려고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삶의 목적과 의미와 이유가 분명한 삶을 찾아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모든 관계는 발전하고 성장합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도 더 성장하고 발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풍성한 생명’이 이 봄철에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4/8/2018 | 부활절 둘 째 주일

성령의 바람 The Wind of The Holy Spirit

요한복음 3:1-8

지난 금요일 저녁에 ‘Quotes About The Resurrection of Jesus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말들)’이라는 제목으로 여러 각계 각층의 유명 인사들이 부활에 대하여 어떤 말들을 했는지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제가 “나도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하여 많은 말들을 했는데, 내 말은 누가 기억해 주는 사람이 없다”고 했더니, 그 자리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웃고 재미있어 했습니다. 설교를 마치고 내려 오는데, 한 교우가 제게 와서 “목사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저도 기억하고 있는 걸요. 집에 가서 제가 보관하고 있는 것을 보내 드릴께요” 그래서 설마 그럴려고 했는데, 정말 그 교우에게서 이메일이 왔습니다. 그래서 읽어 봤더니, 제가 한 말이라고 믿어지지 않을만큼 정말 멋있더라고요. 제가 무슨 말을 했는지 한번 들어 보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번 부활절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는 부활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성경 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고 받아 들이는,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 모두에게 특별한 부활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여러분을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네, 주님. 제가 주님의 부활을 믿습니다. 저는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제 생애 가운데 일하시는 놀라운 영광을 보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고백하십시오. 눈부신 봄 날입니다. 겨우 내 얼어 붙었던 대지(大地)가 녹고, 새싹이 돋아나고, 꽃들이 피고 있습니다. 부활절 아침에, 부활의 주님을 믿는 여러분의 믿음이 새롭게 움트기를 바랍니다.” (2010년 4월 4일 설교에서)

보스턴의 4월은 바람이 많이 붑니다. 예상치 않게 바람의 방향이 자주 바뀝니다. 쌀쌀한 날씨가 더욱 차게 느껴지지만, 불어 오는 바람을 맞으면 겨우 내 막혔던 가슴이 시원해 집니다. 저는 4월의 바람을 특별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순절을 지나고, 부활절을 지나고 불어오는 바람이기 때문입니다. 저에게 이 바람은 성령의 바람처럼 느껴집니다. 겨우 내 죽었던 것을 살리는 생명의 바람처럼 느껴집니다.

오늘 읽은 요한복음 3장에도 바람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람은 제 맘대로 부는 법이다. 너는 바람 부는 소리는 듣지만, 그 바람이 어디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알지 못한다.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모든 사람도 이와 같다.” (8절) “The wind blows wherever it wants. Just as you can hear the wind but can't tell where it comes from or where it is going, so you can't explain how people are born of the Spirit." 예수님은 제멋대로 부는 바람을 예로 들면서 그 바람 소리를 들을 수는 있지만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것럼,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도 그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는 있지만, 어떻게 그 사람이 거듭났는지 그 과정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사람은 니고데모 (Nicodemus)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었는지 아십니까? “There was a man of the Pharisees named Nicodemus, a member of the Jewish ruling council.” (1절) 또 10절에도 니고데모에 대하여 이런 말도 나옵니다. “He was a respected Jewish teacher.” 니고데모는 바리새파 사람이었습니다. 누구보다도 철저하게 율법의 규정을 지킨다는 자부심으로 뭉친 사람들입니다. 또 그는 유대 사회를 움직이는 70인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존경 받는 선생 (랍비)이었습니다. 그런 니고데모가 왜 예수님을 찾아왔겠습니까?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 온 이유는 그가 살아왔던 배경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렇게 철저하게 율법 교육을 받고, 율법을 지키면서 살아왔지만, 막상 그의 인간성이 변화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이유에서 니고데모는 참 대단한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기 자신을 성찰(省察)할 줄 아는 사람이었으니까요. 성경에 “노하기를 더디 하는 사람은 용사보다 낫고, 자기를 다스릴 줄 아는 자는 성을 정복하는 자보다 낫다 (Better to be patient than powerful; better to have self-control than to conquer a city., 잠언 16:32)”고 합니다. 이 말씀 속에 들어 있는 implication은 자신의 내면을 다스리고 성찰하는 일이 자기 밖의 일들을 다스리는 일보다 훨씬 더 어렵다는 것입니다. 시대에 많은 바리새파 사람들이 어려서부터 율법교육을 받고,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삶을 살았지만, 자신이 율법주의의 오류에 빠져 있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이 니고데모 외에 누가 있습니까? 오늘 우리도 그렇습니다. 자신의 인간성이 변화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받고 있는 교육들이 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자신의 인간성이 변화되지 않고, 믿음생활을 하면서도 마음에 기쁨과 평안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생활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자신의 인간성이 변화되지 않는다면,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위치에 올라간들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우리는 거듭나야 하고, 새로워져야 합니다. 우리의 인간성이 변화 되어야 합니다. 문제는 우리의 인간성이 어떻게 변화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모두 니고데모에게 빚을 지고 있습니다. 니고데모가 그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갔기 때문에 우리는 새로워지는 삶의 비결을 알게 되었습니다. 6절 말씀을 보세요. “사람이 육체적으로는 그의 부모로부터 태어나지만, 영적으로는 성령으로부터 태어난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Humans can reproduce only human life, but the Holy Spirit gives birth to spiritual life.” 무슨 말입니까? 인간은 아무리 애써도 human life를 반복해서 만들어낼 뿐입니다. 첫째를 낳고, 둘째를 낳고, 셋째를 낳아도 우리가 낳는 것은 ‘human life’입니다. 또 우리의 아들들와 딸들이 결혼해서 자식을 낳아도 여전히 ‘human life’를 reproduce할 뿐입니다. 여기서 ‘human life’라는 말은 죄된 인간성을 가진 생명이라는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의 말씀 속에 그 답이 나와 있습니다. “but the Holy Spirit gives birth to spiritual life (하지만, 성령께서는영적인 생명을 낳습니다).” 여기서 ‘spiritual life’라는 말은 ‘human life’라는 말과 대조되는 말입니다. 인간성이 변화된 ‘영적인 생명’을 말합니다. 누구도 예외가 아닙니다. 니고데모도 그렇고, 여러분도 그렇고, 오늘 단 위에서 설교하고 있는 저도 그렇습니다.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누구도 사람을 변화 시킬 수 없습니다. 사람을 변화 시키는 일은 오직 성령님만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사람이 변화되는 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우리가 과정을 모두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령으로 변화된 사람들이 모두 어떤 삶을 사느냐 하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사도들이 성령으로 변화된 삶의 ‘examples’입니다. 무엇보다 사도들은 ‘그리스도 중심의 삶 (Christ-centered life)’을 살았습니다. 사도 바울 같은 사람은 아예 “내 안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신다 (갈라디아 2:20)”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리스도 중심의 삶’이란 다른 게 아닙니다. 자기 생각을 주장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는 삶을 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중심적인 삶 (self-centered life)’을 삽니다. 원래 ‘human life’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 그 때 사람들은 어떠했을까요?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자기 일에만 정신이 팔려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All the others care only for themselves and not for what matters to Jesus Christ).” (빌립보서 2:21) 바울의 눈에 비친 사람들의 모습은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원래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인간의 죄된 모습입니다. 이런 사람을 그리스도 중심의 사람으로 변화 시키는 것이 성령의 사역입니다.

Nominal Christian이 있고, Devout Christian이 있습니다. 전자는 이름만 가지고 있는 크리스천이고, 후자는 헌신적인 크리스천을 말합니다. 평생 Nominal Christian으로 살아가려면 성령에 대하여 몰라도 됩니다. 그러나, Devout Christian으로 살아가려면 내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나를 완전히 지배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나를 새사람으로 바꾸어 놓으셔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성령의 역사를 쉽게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변화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쉽게 들어 볼 수 없습니다. 예전 크리스천들에게는 죄, 회개, 거듭남, 성령 세례, 성령 충만, 성령 체험, 천국, 지옥, 이런 말들이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이런 말들이 교회에서 사라졌습니다. 목사들은 교인들이 듣기 싫어하는 설교를 하지 않고, 듣기 좋아하는 설교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교회 안에서 성령의 능력이 사라지고 다른 것들이 교회를 채웠습니다.

둘째로, 사도들은 복음의 ‘산 증인들 (the living witnesses)’이었습니다. 성령께서 이 사람들은 그렇게 변화 시킨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나중에 법정에서 밝혀진 일이지만, 이 사람들은 모두 교육을 많이 받지 못한 그 시대의 ‘보통 사람들 (ordinary men)’ 이었습니다. 성령께서는 이 평범한 사람들을 비범한 사람들로 변화 시킨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법정에서 증언한 말들을 들어 보시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과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 중에,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어느 것이 더 옳은 것인지 한번 판단해 보십시오. 우리는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We cannot stop telling about everything we have seen and heard).” (사도행전 4:19-20) 

요즘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보면 ‘위증 죄’로 고발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군인 복장을 하고 국회에 나와서 증언한 것들이 거짓말로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진광불휘(眞光不輝)’라는 말처럼 진짜의 빛은 찬란하지 않은 법입니다. 진실의 힘이 있으니까 굳이 진짜처럼 보이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거짓말을 정말처럼 보이려고 하니까 군인 복장을 하고 말도 또박또박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예, 그런 일이 없습니다.” “예, 제가 분명히 보았습니다.” 이렇게 국회에서 증언했던 말이 모두 사전에 다른 사람들과 말을 맞춘 거짓말로 드러난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서 사용하고 있는 ‘증인’이라는 말은 물론 법정 용어입니다만, 희랍어로 증인을 ‘마르투스 (μαρτυς)’라고 합니다. 영어로 ‘martyr’라는 말이 여기서 나온 것입니다. ‘순교자’라는 말입니다. ‘증인’이라는 말 속에 ‘순교’의 의미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We cannot stop telling about everything we have seen and heard!”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모든 일들을 보고 들었으니까 그 일을 말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순교의 각오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 평범한 갈릴리의 어부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순교를 각오한 복음의 증인들이 되었을까요? 사람을 이렇게 변화 시키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아까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잖아요? “Humans can reproduce only human life, but the Holy Spirit gives birth to spiritual life.” Human life를 spiritual life로 변화 시키는 일은 오직 성령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도들은 자신의 삶의 목적을 위해서 모든 일을 희생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맣이 내려 놓고, 많이 포기했다는 뜻입니다. 사도들은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서 기쁨을 찾았고, 행복을 찾았습니다. 성경 말씀 하나 읽어 볼까요? “나의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여,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해 강하고 담대하십시오. 내게서 들은 가르침을 충성된 사람들에게 가르치십시오. 그러면 그들이 또다시 다른 사람에게 말씀을 가르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훌륭한 군사답게 지금 우리가 받는 고난을 함께 겪으십시오. 군사는 자신의 지휘관을 따라 그를 기쁘게 해야 하기 때문에 이 세상의 작은 일에는 신경을 쓸 수가 없습니다. 경기하는 사람이 규칙을 어기면 상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열심히 일한 농부가 첫 번째로 수확되는 곡식을 먼저 얻는 것이 당연합니다.” (디모데후서 2:1-6) 누가 누구에게 한 말입니까? 사도 바울이 그의 제자였던 디모데에게 한 말입니다. 

‘Paul, the Apostle of Christ (바울, 그리스도의 사도)’라는 영화가 AMC 극장에서 상영 중입니다. 보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사도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서 순교하는 장면으로 영화가 끝이 나는데, 그 장면이 인상적입니다. 사도 바울은 감옥에서 순교하지만, 순교하기 직전에 디모데에게 쓴 편지를 읽는 목소리가 오버랩됩니다. 그리고, 로마에 있는 크리스천들은 복음을 가지고 세상으로 퍼져 나갑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역사입니다.

문제는 오늘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리에게서 끝이 나느냐 아니면, 우리를 통해서 다음 세대에게 복음이 전해지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문제를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 들이느냐에 따라 교회의 미래가 결정되고, 기독교의 미래가 결정됩니다. 다행하게도 우리 전 세대 사람들은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다음 세대에 대한 책임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보스턴에 불고 있는 이 바람이 나에게 주시는 ‘성령의 바람’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이 성령의 바람이 우리에게 불어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변화되어야 합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비범한 사람들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겁 많고, 용기 없는 사람들이 ‘복음의 증인들’로 거듭나야 합니다. 이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성령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진실한 ‘Devout Christians’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을 원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우리의 삶에 불필요한 것들을 많이 내려 놓아야 합니다. 보다 단순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삶에 집중력이 생기고 열정이 생깁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이 그렇게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4/1/2018 | 부활주일 설교

갈릴리에서 만나자! You Will See Him in Galilee!

마가복음 16:1-8

역사적인 예수가 언제 출생했느냐 하는데는 약간 다른 이론들이 있습니다만, 브리태니카 사전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Jesus, also called Jesus Christ, Jesus of Galilee, or Jesus of Nazareth was born in c. 6–4 B.C. in Bethlehem and died c. 30 A.D. in Jerusalem (예수, 혹은 예수 그리스도, 갈릴리의 예수, 나사렛 예수라고도 불리는데, 기원전 6-4년 경에 베들레헴에서 출생했고, 서기 30년 경에 예루살렘에서 죽었다).”

이렇게 본다면, 오늘 본문 말씀은 지금으로부터 1988년 전 오늘 새벽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오늘 말씀에 실명(實名)이 나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 이 세 여자들이 예수님께 발라 드리려고 향료를 사서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매우 이른 시간, 해가 뜰 무렵이었습니다. 가면서 이들은 “예수님의 무덤 입구를 막은 커다란 돌을 누가 굴려 줄까?” 하는 걱정을 하면서 갔습니다. 무덤에 가보니, 커다란 돌은 이미 옮겨져 있었습니다. 이 여자들은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무덤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하얀 옷을 입은 한 젊은 사람이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여자들은 매우 무서웠습니다. 그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나사렛 예수님을 찾고 있지요? 그분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여기 계시지 않습니다. 보십시오. 여기가 예수님을 모셨던 곳입니다. 이제 가서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말하십시오.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께서 당신들보다 먼저 갈릴리에 가실 것입니다.”

이 말씀이 소위 가장 많이 얘기되고 있는 ‘빈 무덤 (The Empty Tomb)’에 대한 성경의 오리지널 텍스트입니다. 여러분 중에 아직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참 아이로닉한 것은 부활을 믿지 않으면서도 믿음생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만일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우리의 믿음을 헛된 것이라 (If Christ has not been raised, then all our preaching is useless, and your faith is useless)”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5:14). 부활에 대한 조그만 의심이라고 있으신 분들은 조만간 그 의심이 확신으로 바뀔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제 한국 신문을 읽다가 “예수는 신일까요?” 이런 기사를 발견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기사가 아니라 광고였습니다. 일반적인 광고가 아니라 전문적인 논문 형태의 광고 기사였습니다. pdf file로 다운로드를 받게 되어 있더라고도요. 매우 긴 글이 10개의 제목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제가 출처를 찾아 봤더니 예수님을 변증하는 (apologize) 사이트의 글을 번역해서 올린 것이었습니다. 그 글 속에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사이몬 그린리프 (Simon Greenleaf, 1783-1853)의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하바드 법대를 세운 전설적인 인물인데요. ‘증거의 법칙에 대한 논문 (A Treatise on the Law of Ev¬i¬dence)’으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모두 3권으로 출판된 책입니다. 법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걸작으로 알려진 책이라고 합니다. 현재 미국의 재판제도는 아직도 그린리프가 구성한 증거의 규칙에 의존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사이몬 그린리프에 대하여 과연 이 말이 사실인지 알아 봤더니, 모두 사실이었습니다.

그린리프 교수가 하바드 재직 시절 수업 시간에 어쩌다가 예수의 부활은 믿을 수 없는 신화에 불과하다고 말을 합니다. 무신론자 (atheist)였던 그는 당연히 부활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말을 듣던 학생들 중 세 명이 “교수님의 ‘증거의 규칙’을 예수의 부활에 적용해 보면 어떤 결론이 나올까요?”라는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그린리프 교수는 그럼 자기가 세운 규칙을 따라 부활에 대한 증거를 조사해 보겠다고 약속을 하고, 조사를 시작합니다. 무신론자였던 그는 부활이 거짓이라는 것을 그의 이론을 따라 쉽게 증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의 기록을 깊이 파고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그는 예수가 실제로 무덤에서 살아 나갔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차고 넘친다는 사실에 당황합니다. 그를 가장 당황하게 한 것은 예수가 죽은 후 벌어진 극적인 변화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제자들의 삶과 행동이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변화되었다는 사실이 그를 놀라게 했습니다. 어떻게 한 두 명도 아니고, 제자들 모두가 예수의 부활을 주장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만든 ‘증거의 규칙’을 적용해서 예수의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던 그린리프 교수는, 반대로, 예수의 부활이 사실이라는 결론을 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린리프 교수는 조사의 결과를 ‘전도자들의 증언 (The Testimony of the Evangelists: The Gospels Examined by the Rules of Evidence)’이라는 책으로 출판했습니다. 여기서 ‘전도자들’이란 사 복음서의 저자들을 말합니다. 그는 그 책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부활을 사실이라고 믿게 되었는지, 그가 수집한 증거들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수집한 증거를 부정할 수 없어 결국 크리스천이 되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그 책에 이렇게 썼습니다. “누구든지 편견을 갖지 않고 법정에서처럼 정직하게 증거를 검토한 사람이라면 나와 같은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이렇게 장황하게 말씀드리는 이유는 여러분 중에 단 한 사람이라도 부활의 진리를 믿게 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마다 믿음을 갖게 되는 경로가 같지 않습니다. 여러분 중 어떤 사람에게는 이런 이야기가 도움이 될 것으로 믿습니다.

다시 오늘 읽은 마가복음 말씀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여자들은 너무 무서워서 무덤에서 나와 도망쳤습니다. 그들은 두려워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NLT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The women fled from the tomb, trembling and bewildered, and they said nothing to anyone because they were too frightened.”

마태복음을 읽어 보면 두려서워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던 여자들이 제자들에게 이 소식을 알려 주려고 달려가다가 도중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때도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말하여라. 거기서 그들이 나를 볼 것이다 (마태복음 28:10)” 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왜 부활하신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을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했을까요? 갈릴리는 이스라엘의 북쪽에 있는 외진 땅입니다. 성경에 갈릴리를 가리켜 “스블론과 납달리 땅, 이방 사람들이 사는 갈릴리, 이 곳 어둠에 사는 백성들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늘과 같은 땅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취었다 (마태복음 4:15-16)” 라고 한 것을 보면, 갈릴리는 이방 사람들이 많이 살았고요. 유대지방과 달리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소외 되었던 지역인 것이 분명합니다. 역사가들이 갈릴리에서 폭동이 많이 일어났었다고 쓴 것을 보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 갈릴리가 대부분의 제자들의 고향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많은 사람들이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이었습니다. 베드로 형제가 그렇고, 요한 형제가 그렇고요. 빌립과 나다나엘도 성경에 ‘벳새다 (Bethsaida, 요한복음 1:45) 사람이라고 한 것을 보면 이 두 사람도 어부였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역시 나사렛에서 성장했는데요. 나사렛은 갈릴리 지방에 속한 마을입니다. 갈릴리에 ‘가버나움 (Capernaum)’이 있습니다.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사역의 본부라고 할 만큼 예수님의 사역의 대부분이 ‘가버나움’에서 일루어졌습니다. 벌써 오래 전 일입니다만, 제가 이스라엘에 성지순례를 갔을 때 ‘가버나움’에 가 봤습니다. 마을 입구에 ‘Gapernaum, The Town Of Jesus’라는 안내판이 붙어 있는 것을 보고 진한 감동을 받았던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갈릴리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처음 만났던 곳이라는 사실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처음 만나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마태복음 4:19)”는 말씀을 들은 곳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는 전과 같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끌려갈 때부터 제자들은 뿔뿔히 흩어졌습니다. 여러분, 이런 이야기까지 모두 미리 성경에 예언되어 있었던 것을 아십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모두 나를 버릴 것이다. 성경에 이렇게 쓰여 있다.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은 흩어질 것이다.’” (마가복음 14:27, 마태복음 26:31) 바로 구약성경 스가랴 13:7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버리실 때 철저하게 버리셨습니다.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도 모두 예수님을 배반하고 흩어지도록 하신 것입니다. 바로 여러분과 저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여러분과 저의 죄를 오직 예수님 홀로 다 짊어지시도록 하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다시 자기 제자들과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시려고 하셨습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고요. NASB에 그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For the gifts and the calling of God are irrevocable.” 로마서 11:29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irrevocable’이란 말은 ‘취소되는’이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한번 우리를 부르셨으면 그 부르심은 영원합니다. 결코 흐지부지 되거나 취소되는 일이 없습니다. 잠깐 그 부르심에 우리가 제대로 응답하지 못하는 일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의 부르심이 취소되는 일은 없습니다. 보세요. 예수님께서 자기 제자들을 다시 부르시잖아요. 깨어진 관계를 다시 회복하기 위한 장소로 예수님께나 제자들에게나 그들이 처음 만났던 갈릴리 보다 더 좋은 장소는 없었습니다.

둘째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신 것은 제자들에게 ‘미션 (mission)’을 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미션’은 ‘사명(使命)’입니다. 일상적인 말로는 ‘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에게 ‘미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다 걱정하는 것이 미래에 대한 그것이잖아요? 자신의 미래에 대해 걱정하는 이유 밑바닥에 자신이 무슨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할까 하는 불안감 이 있습니다. 물론 이 걱정이 ‘직업’하고도 연결되어 있지요. 우리가 해야 할 일이 확실하게 주어진다면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그 일에 집중(集中, concentration)할 수 있습니다. 내 힘을 다른 일에 낭비하지 않고 모두 그 일이 쏟아 부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삶의 열정이 주어집니다.

예수님은 제자 베드로를 불러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세 번을 확인하신 다음에 “내 양을 먹이라 (Feed my lamb, 요한복음 21:15, 16, 17)”라고 하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는 질문은 베드로와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키는 질문이고, “내 양을 먹이라”는 말씀은 베드로에게 다시 주신 ‘미션’입니다. 이 일을 하기에 갈릴리 해변보다 더 좋은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마지막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의 삶의 방향과 내용을 정해 주시려고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셨습니다. 어제 새벽에 사순절 마지막 설교에서 “Go into all the world and preach the good news to all creation (마가복음 16:15) 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접속사 ‘into’에 세 가지 뜻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toward or in the direction of (~을 향하여)’라는 뜻이 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향하여 나가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말은, 우리 크리스천의 삶의 방향성을 가리켜 주는 말씀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을 갈릴리에서 만나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의 제자들의 삶의 방향이 예루살렘이 아니라 갈릴리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예루살렘이 크리스천들의 삶의 방향이 되어야 한다면,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을 예루살렘에서 보자고 하셨을 것입니다.

몇 년 전에 ‘부활 (The Resurrection)’이라는 영화를 봤습니다. 여러분들도 많이 보셨을 것입니다. 이 영화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갈릴리로 간다는 내용입니다. 로마의 호민관 한 사람이 예수님을 체포하기 위해 제자들을 따라 붙습니다. 결국 제자들은 갈릴리 해변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주시는 ‘미션’을 가지고 뿔뿔히 흩어집니다. 이 모든 과정 속에 동행했던 로마의 호민관도 자기의 길을 갑니다. 가다가 어느 주막에 들려 차를 한 잔 마십니다. 차를 다 마시고는 찻 값으로 호민관 반지를 빼서 책상에 ‘탁’ 하고 내 놓습니다. 호민관의 반지를 본 찻 집 주인이 깜짝 놀라면서 “호민관님, 정말 이걸 다 믿으시는 것입니까?” 하고 묻습니다. 이 때 호민관이 이렇게 말합니다. “난 믿어. 예전과 같이 살 수는 없지!” 이렇게 말하고 길을 떠나는 것이 마지막 장면입니다. 이 장면에서 소름이 돋습니다.

히브리서 13:10-13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오직 단 하나의 제단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희생제물이 되신 십자가라는 제단입니다. 그러니 유대인의 율법에 매달려서 구원을 찾으려는 사람은 이 제단에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유대인의 율법제도에 따르면 대제사장은 속죄제물로 죽인 짐승의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 짐승의 몸은 성밖에서 불에 태워 버립니다. 예수께서 성밖에서 고난을 받으신 것은 이러한 희생을 뜻합니다. 이 성밖에서 흘리신 예수의 피가 우리의 죄를 씻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성문 밖으로 나아갑시다. 이 세상 사람들의 관심사가 어디에 있든, 그들이 멸시를 하든, 상관하지 말고 예수께서 겪으신 수치와 고난을 함께 나누기 위해 그분이 계신 곳으로 나아갑시다 (And so Jesus also suffered outside the city gate to make the people holy through his own blood. Let us, then, go to him outside the camp, bearing the disgrace he bore).”

무슨 뜻인가요? 예수님께서 성 안이 아니라 성 밖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예수님께서 겪으신 수치과 고난을 나누려면 성 안에 있지 말고 성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크리스천의 삶의 방향이 성 안이 아니라, 성 밖을 향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 안은 예루살렘이고, 성 밖은 갈릴리입니다. 소외된 지역, 소외된 사람들을 사는 곳으로 삶의 방향을 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크리스천의 삶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메시지를 주시려고 자기 제자들을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신 것입니다.


3/31/2018 | 사순절 40

그는 살아나셨다! He Is Alive!

마태복음 28:9-15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여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말하여라. 거기서 그들이 나를 볼 것이다.” 여자들은 제자들에게 가서 외쳤을 것입니다. “주님이 살아나셨습니다!” “He is alive!”

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셨을까요? 여기에 대하여 긴 말씀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이번 주일 설교에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갈릴리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처음 만났던 곳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다시 갈릴리를 제자들과의 만남의 자리로 삼고자 하셨습니다. 처음 그곳에서 제자들을 만나 그들에게 사명을 주셨던 예수님은, 다시 제자들을 거기서 만나 사명을 확인하려고 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그 시간에 예수님의 무덤 문을 지키던 경비병들도 대제사장에게 가서 일어난 일들을 보고하고 있었습니다. 대제사장들은 장로들과 의논한 끝에 경비병들에게 돈을 주면서 “너희들의 책임은 묻지 않은 테니, 나가서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의 시체를 훔쳐갔다고 소문을 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소위 ‘빈 무덤설 (The Theory of the Empty Tomb)’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마태복음을 쓴 마태는 ‘빈 무덤설’의 진상을 알고 있었고, 그 진상을 그의 복음서에 쓴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많은 시간을 할애해서 이번 사순절에 새벽 기도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하여, 또 복음의 핵심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습니다. 성경에는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증거가 있습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잖아요? “우리는 그분을 보았으며, 또한 그분에 관한 증거도 제시할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 1:2)

정치 이야기를 해서 죄송합니다만, 지금 한국에서는 이명박 전 대통령이 구속이 되어 재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본인은 모든 혐의를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검찰에서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범죄 사실을 입증할 자료들이 차고 넘친다고 합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이런 저런 말을 해도, 이미 예수님의 부활을 증명할 자료들은 차고 넘치는 것입니다. 편견을 버리고,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입증할 충분한 자료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저에게 질문한다고 해도 제 나름대로 충분한 자료를 제시할 수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의 부활은 한 두 사람이 경험했던 주관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에 모여 있던 제자들에게는 실 시간으로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보고되고 있었습니다. 대부분 그 이야기 속에 실명이 공개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공동체를 통해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500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부활의 주님이 나타나신 적도 있다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15:6). 그리고, 어제 아침에도 제가 그렇게 설교했습니다만, 사복음서에 나오는 부활에 대한 말씀은 거짓말을 진짜처럼 가장하는 어떤 흔적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복음서의 저자들은 아주 자신 있게 예수님의 부활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진광불휘 (眞光不煇)’라는 말을 설명했습니다. ‘진짜의 빛은 찬란하지 않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사실이니까 부활의 첫 증인들이 여자들이었다는 사실도 숨기지 않고 사실 그대로 기록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말씀에서 우리가 들어야 할 메시지가 무엇일까요? 첫째로,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짓고 그 결과로 죽어야 하는 운명을 바꾸어 놓으신 것입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죽음 후에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에 대한 관점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는 인간의 삶에 대한 관점은 현재에 삶에 초점을 맞추게 합니다. 그러나, 죽음 후에 영원한 삶이 있다는 관점은, 현재가 아니라 미래에 초점을 맞추게 합니다. 현재의 삶의 의미는 미래의 삶을 위해 준비하는 과정이 됩니다. 릭 워렌이 쓴 ‘목적이 이끄는 삶 (The Purpose Driven Life)’는 바로 자신의 삶의 초점을 미래에 맞춰야 한다는 점에 착안해서 쓴 책입니다. 이 책이 히트를 친 것을 보면, 기독교의 메시지가 여전히 현대인들에게 어필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부활의 소망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음으로,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20)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우리도 부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 사람들은 어떤 고난이나 힘든 상황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믿는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고린도후서 5:7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We live by faith, not by sight.”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말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처럼 믿고 산다는 말입니다. 이 진리를 믿는 사람들은 지금 내가 당장에 실패했다고 해서 절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금의 실패가 영원히 실패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할 지 삶의 미션을 주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자기 제자들을 만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Go into all the world, and preach the good news to all creation!” (마가복음 16:15, NIV) 한국어 성경에는 이 말씀이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한번은 제가 보스턴 다운타운에 있는 구세군 교회에 무슨 일로 가게 되었습니다. 아래 층 로비에서 누구를 만나게 되어 있었습니다. 잠깐 기다리는 동안 정말 우연히 벽에 쓰인 이 성경 말씀을 보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 말씀이 NIV 버전으로 써 있었는데, 말씀의 느낌이 정말 새롭게 다가오더라고요. ‘into’라는 접속사에 크게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1) to the inside of (2) toward or in the direction of: (3) to a point of contact with 1번의 의미로 해석한다면, 세상 속으로 들어가라는 말이 되겠지요? 마치 게릴라처럼 세상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2번의 의미로 해석한다면, 세상을 향하여 가라는 의미가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삶의 방향이 항상 세상을 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3번의 의미로 해석한다면, 가서 적극적으로 세상과 접촉을 하라는 말입니다. 거기서 빛과 소금으로 살고, 거기서 세상을 변화 시키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도행전 24:5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이라.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 개역 개정 성경에는 이 말씀이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또 이 말씀이 NIV 성경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We have found this man to be a troublemaker, stirring up riots among the Jews all over the world. He is a ringleader of the Nazarene sect.” 또 KJV 성경에는 “For we have found this man a pestilent fellow, and a mover of sedition among all the Jews throughout the world, and a ringleader of the sect of the Nazarenes” 라고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그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에 들어가서 접촉하는 사람마다 복음을 전염 시켜라!”

그 어떤 의미로 해석을 하든 이 말씀의 의미가 신선하게 다가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을 믿고 경험했던 사람들은 모두 역동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죽은 듯이 살아간 것이 아니라, 가만히 앉아 있지 않았습니다. 살아 움직이는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삶을 보는 관점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우리의 삶에 소망을 주고, 우리의 삶에 미션을 주셨습니다. 2,000년 전에 살았던 예수님의 제자들이 역동적인 삶을 살았듯이, 오늘 우리도 심장이 뛰고, 살아 움직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