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2018 | 야고보서 강해설교 2

유혹을 받을 때는 When You Are Being Tempted

야고보서 1:9-18

오늘은 야고보서 강해설교 두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은 ‘유혹’의 문제를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서 ‘유혹(誘惑)”은 ‘temptation’입니다. 우리 성경에는 ‘시험’으로 나와 있습니다만, 새로 번역된 성경에는 ‘유혹’으로 나와 있습니다.

유혹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성경 말씀은 마태복음 4장에 나와 있는 세 가지 유혹입니다. 예수님께서 사탄으로부터 세 가지 유혹을 받으신 말씀입니다. “돌로 떡을 만들어라!”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 천사가 너를 안전하게 받쳐 줄 것이다!” “나에게 경배하면 천하만국을 너에게 주겠다!” 돌로 떡을 만들라는 유혹은 먹고 사는 경제 문제를 해결하라는 유혹입니다. 네가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너는 당장에 민족의 영웅으로 부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높은 성전 꼭대기에서 안전하게 뛰어내리라는 유혹은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대중의 스타가 될 수 있다는 유혹입니다. 나에게 경배하라는 유혹은 하나님의 자리에 사탄을 올려 놓으라는 가치의 문제입니다. 내가 누구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지, 나의 힘이 누구로부터 나오는지, 이것을 보이라는 유혹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믿음이 성장하고 자라서 성숙한 믿음을 갖게 되면, 이런 유혹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니잖아요?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도 사탄으로부터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내가 유혹을 받을 때, 놀랄 필요 없습니다. 당황할 필요 없습니다. 큰일 났다고 호들갑을 떨 필요도 없습니다. 문제는 내가 어떻게 이 유혹을 이기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의 주’입니다. 히브리서 12:2에 나오는 말입니다. 이 말을 어떤 성경에는 ‘the author of faith (믿음의 창시자, NIV)’했습니다. 어떤 번역 성경에는 ‘the champion of faith (믿음의 챔피언, NLT)’라고 했고, 또 어떤 성경에는 ‘the finisher of faith (믿음의 종결자, NKJV)’라고 했습니다.

모두 예수님을 믿음의 본을 보여주신 분으로, 믿음이 무엇인지 최고의 경지를 보여주시는 분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어떻게 유혹을 이기셨는지 성경을 잘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사탄의 유혹을 이기신 그 방법대로 하면 우리도 사탄의 유혹을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탄의 유혹에 대처하셨습니다. 나에게는 사탄의 유혹을 이길 힘이 없으니, 내 생각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처하라는 것입니다. 지난 주에 영화 ‘막달라 마리아: 부활의 증인’을 보았습니다. 한번 볼만한 영화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영화에서 가룟 유다가 등장합니다. 가룟 유다는 그가 처음 예수님의 제자가 될 때부터 유혹을 받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뭔가 큰 일이 벌어지고, 예수님을 통해서 새로운 세상이 오고, 기적이 일어나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면, 먼저 간 여동생을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었습니다.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궁지로 몰아넣으면 예수님께서 뭔가 큰 힘을 보여 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배반합니다. 군인들이 와서 예수님을 체포합니다. 그래도 기대했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 때서야 가룟 유다는 자기가 한 일이 잘못되었다는 죄책감에 목을 매고 자살을 합니다. 모든 제자들이 자기들이 기대했던 일이 일어나지 않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 때 막달라 마리아가 했던 말이 압권입니다.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요구하신 일이야. 우리는 그분의 결정에 따라야 해. 우리가 지금의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면 그것은 우리의 이해를 뛰어넘는 일이기 때문이야!”

사탄의 유혹에 나의 생각대로 대처하려고 하는 사람은 예외 없이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고 맙니다. 나의 생각대로 해서 사탄의 유혹을 절대로 이길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탄의 유혹에 대처하셨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 이 말씀은 신명기 8:3에 나오는 말씀이지요?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마라.” 이 말씀은 신명기 6:16에 나오는 말씀이지요? “주 너의 하나님만 경배하고 그를 섬기라!” 이 말씀은 신명기 6:13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시편 107편은 누가 썼는지 저자가 밝혀지지 않은 시편입니다. 쉬운성경에는 ‘많은 위험으로부터 구원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이 시편의 내용은 “여호와께 감사하십시오. 그분은 선하시며, 그분의 사랑은 영원하십니다 (1절)” 이 한 말씀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죽 읽어가면 20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는 그의 말씀을 보내어 우리를 치유하시고, 우리를 파멸에서 구원하셨습니다 (He sent His word and healed them. And delivered [them] from their destructions).” 이 파멸이 사탄의 유혹일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발 한번 잘못 디뎌서 삐끗하면 내 인생이 그대로 파멸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때 하나님의 말씀을 보내 주신다고 합니다. 정말 이 말씀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어린 아이의 마음은 그 위에 아무 것도 기록되지 않은 ‘백지’와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머니가 그 백지에 최초로 기록을 남긴다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여러분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찍혔으면 좋겠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를 파멸에서 구원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기도로 사탄의 유혹에 대처하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한적한 곳’을 찾아서 기도하셨다는 말씀이 여러 번 나옵니다. 도대체 예수님은 무슨 문제를 가지고 기도하셨을까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신기하게도 예수님께서 기도하셨다는 말씀 앞과 뒤를 읽어보면, 모두 예수님께서 심각한 문제들 직면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있은 후에 예수님의 대중적인 인기는 하늘을 찌를 정도였습니다. 흥분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추대하자고 했습니다. 정치인들에게 대중의 인기는 마약과 같아서 끊을 수 없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한번 정치 발을 들여 놓은 사람은 발을 뺄 수 없다고 합니다. 제가 아는 어떤 사람도 그랬습니다. 여기서 안식년을 보낼 때 아주 겸손한 사람이었고 같이 기도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으로 귀국해서 어쩌다가 정치에 발을 들여 놓았고, 국회의원에 당선이 되었습니다. 그가 보스턴을 방문했습니다. 아주 딴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제가 몇 년 전에 알던 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눈빛부터 달랐고,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내가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알리는 말들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선거자금 위반으로 걸려서 국회의원직을 상실했습니다. 지금은 어떻게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인기가 치솟았습니다. 어떻게 이것을 뿌리칠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마음 속에 “넌 그냥 가만히 있기만 하면 돼! 너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다 알아서 할거야! 이런 기회가 다시 찾아오지 않을 거야!” 이런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것은 사탄의 유혹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잃어버리도록 사탄의 달콤한 유혹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유혹을 어떻게 물리쳤습니까? 예수님은 사람들을 떠나 조용한 산으로 가서 홀로 하나님을 대면하셨습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기도하면서 자신의 사명을 다시 한번 점검했을 것입니다. 내가 지금 하나님의 뜻에 충실하고 있는지 자신의 사역을 점검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만일 예수님께서 그 유혹의 시간에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으셨다면, 만일 그 때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대면하지 않으셨다면, 만일 그 때 예수님께서 자신의 사역을 점검하지 않으셨다면,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셨을 것입니다. 만일 그랬더라면,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일 그 때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요구대로 왕이 되셨더라면, 만일 그 때 예수님께서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셨더라면, 저와 여러분은 여전히 죄인으로 살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주’이십니다.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사탄의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성경을 읽을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이 내 생각이 되고, 그 말씀이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남긴 말씀이 바로 기도로 사탄의 유혹을 이기라는 말씀입니다. “Watch and pray so that you will not fall into temptation. The spirit is willing, but the body is weak (사탄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서 기도하라. 너희 마음은 원하지만 몸은 약하구나)!" (마태복음 26:41) 예수님께서 대적자들에게 잡히시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사탄이 우리를 유혹하는 경로는 다양합니다. 리차드 포스터 (Richard Foster, 1942- )가 ‘돈, 섹스, 권력 (Money, Sex & Power)’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이 1985년에 나왔습니다. 이 책에 ‘The Challenge of the Disciplined Life’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듯이, 이 책은 크리스천이 어떻게 돈과 섹스와 권력에 빠지지 않고 긍정적으로 잘 사용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다룬 책입니다. 이 책에서 리차드 포스터가 말하듯이, 자칫하면 크리스천들이 돈과 섹스와 권력의 유혹에 빠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그 중에서도 돈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성경 여러 곳에서 돈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 것처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 (돈)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 (마태복음 6:24)”고 하셨습니다. 씨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실 때도 세상 염려와 재물의 유혹이 말씀을 가로막아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런 사람은 말씀의 씨앗이 가시덤불에 떨어진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3:22). 돈의 유혹에 빠진 사람은 절대로 믿음이 자랄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 돈에 대한 경고의 말씀 중에 ‘돈을 사랑하는 것은 모든 악의 뿌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6:10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For the love of money is the root of all kinds of evil. And some people, craving money, have wandered from the true faith and pierced themselves with many sorrows (왜냐하면,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종류의 악의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어떤 사람들은 참된 믿음의 진리에서 떠나 방황하기도 하고, 많은 걱정으로 자기 자신들을 찌르기도 합니다).”

여러분 주변에 돈 때문에 불행해진 사람들이 있습니까? 차라리 그 사람에게 돈이 없었더라면 행복했을 사람들이 있습니까? 돈 때문에 가정이 불행하게 된 사람들이 여러분 주변에 있습니까? 이런 이야기들은 모두 사탄의 유혹이 돈을 통해서 쉽게 우리에게 접근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돈이 많은 사람은 많은 대로 돈의 유혹이 있습니다. 돈이 없는 사람은 없는 대로 돈에 대한 사탄의 유혹이 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아니, 야고보서는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에게 쓴 편지인데,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이 해외에 흩어져 살면서 모두 경제적으로 어려웠을 텐데, 웬 돈에 대한 유혹을 경계하라는 편지를 썼을까?”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렵다고 돈에 대한 유혹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쉽게 돈을 벌려고 하는 유혹이 따라옵니다. 그래서 거짓말을 하기도 하고, 문서를 위조하기도 하고, 사기를 치기도 합니다. 돈에 대한 유혹은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이 유혹을 이겨야 합니다. 저도 지난 주간에 누구와 얘기를 하다가 하마터면 돈에 대한 유혹에 빠질 뻔했습니다. 아니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까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길이 보이는 것입니다. 다행하게도 하나님의 은혜로 돈에 대한 유혹에서 벗어났습니다. 절대로 우리는 돈 때문에 행복해지고, 돈 때문에 불행해지는 돈이 나를 지배하는 그런 인생을 살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내가 돈을 지배해야지, 돈이 나를 지배하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야고보가 이에 대하여 쓴 편지를 읽어 볼까요? “만일 가난하거든 하나님께서 자기를 영적인 부자로 만드신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십시오. 만일 부하거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영적인 부족함을 보여 주신 것을 자랑하십시오. 그것은 부자도 들에 핀 꽃과 같이 결국 죽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9-10절) 이 말씀이 이해가 되시나요? 경제적으로 힘들고 어려울 때,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사모하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3). 야고보서에는 이 말씀이 ‘영적인 부자’라는 말로 나와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자기가 가진 것을 의지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것들은 들에 핀 꽃과 같이 언젠가는 없어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없어질 것을 의지하지 말고, 자신이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인 것을 알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 하라고 합니다. 자신이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라는 말입니다. 말씀이 재미있지 않습니까? 가난한 사람은 자기가 영적으로 부유한 사람인 것을 자랑하고, 경제적으로 부유한 사람은 자기가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인 것을 자랑하라고 합니다.

제가 대학교에 다닐 때 읽었던 루엘 하우 (Reuel Lanphier Howe, 1905-1985, 미국)의 말을 들려 드리겠습니다. “God made people to be loved and things to be used, and our sin is that we love things and use people (하나님은 사람은 사랑하고 물건은 사용하도록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죄는 우리가 물건은 사랑하고 사람을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 Reuel Howe “Man’s Need and God’s Action” ‘물건 (things)’이라는 말에 ‘돈’도 포함됩니다. Reuel Howe처럼 Richard Foster도 ‘Money, Sex & Money’라는 책에서 똑 같은 말을 합니다. 사람은 사용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입니다. 반대로, 돈은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사용의 대상입니다.


7/29/2018 | 야고보서 강해설교 1

믿고 구하라. Ask in Faith Without Any Doubting.

야고보서 1:1-8

오늘부터 야고보서 강해설교를 시작합니다. 많은 성경 중에 야고보서를 선택한 이유는, 야고보서의 주제가 ‘행동하는 믿음 (faith active in deeds)’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믿음이 이론적인 믿음이 되어서는 안 되고 우리의 삶에 적용되고, 우리의 삶을 바꾸는 살아 있는 믿음이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는 우리가 베드로전서 강해설교에서도 계속 나누었던 말씀이기도 하기 때문에 연속성의 의미도 있습니다. 야고보서에 나오는 한 구절을 말씀드려 볼까요?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믿음도 행함이 없으면 죽은 것입니다 (Just as the body is dead without breath, so also faith is dead without good works).” (야고보서 2:26)

그러면, 이 편지를 쓴 것으로 알고 있는 야고보는 누구일까요? 가장 유력한 대상으로 거론되는 사람이 요한의 형 야고보입니다. 성경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세 사람이 베드로, 요한, 그 형 야고보입니다. 이 세 사람은 초대교회에서 유력한 지도자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고, 교회에 대대적인 핍박이 시작됩니다. 이 핍박은 유대인들로부터 오는 핍박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12:12에 “헤롯이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였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으로 볼 때 요한의 형 야고보는 일찍 순교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 야고보는 일단 야고보서의 저자는 아닌 것으로 봐야 합니다.

그 다음으로 거론되는 사람이 있는데,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에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son of Alphaeus, 마태복음 20:3)’가 있습니다. 요한의 동생 야고보는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구별해서 ‘세베대의 아들 (son of Zebedee)’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큰 야고보 (James the Greater)’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작은 야고보 (James the Less, 마가복음 15:40)’라고 불렀습니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가 야고보서의 저자로 거론되지 않는 이유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남에게 잘 드러나지 않는 성격 때문이었을까요? 비록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가 잘 드러나지는 않는 사람이었지만, 그는 기도의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보통 우리가 ‘낙타 무릎’이라는 말을 하는데요. 낙타의 무릎이 까져 있잖아요? 무릎 꿇고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을 ‘낙타 무릎’이라고 합니다. ‘알패오의 아들’ ‘작은 야고보’의 무릎이 ‘낙타 무릎’이었다고 합니다.

마지막 남은 ‘야고보’가 한 사람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입니다. 이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는 성령강림절 이후 갑자기 교회 지도자로 부상합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야고보가 보낸 유대인들 (갈라디아서 2:12)’ 또 ‘교회의 지도자로 인정받는 야고보 (갈라디아서 2:9)’ 이런 성경 말씀들이 나오고, 사도행전 15:13에 나오는 유명한 ‘예루살렘 회의’의 의장이 바로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였습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정황상 그렇게 보입니다.

그리고, 많은 학자들과 그렇게 주장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를 야고보서의 저자로 인정한 이유는 야고보서에 결정적인 단서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1:1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 (James, a slave of God and of the Lord Jesus Christ)’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물론 이 구절을 가지고 야고보서의 저자가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초대교회의 교부들의 증언 등을 고려하면,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를 저자로 보는 것에 크게 무리는 없을 것 같습니다. 물론 여기에 대한 반론도 있습니다.

둘째로 중요한 것은 야고보가 편지를 쓴 대상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1에 ‘세계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열 두 지파 (twelve tribes- Jewish believers scattered abroad)’라고 나와 있습니다. 베드로전서의 대상이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이라고 했는데, 야고보서 역시 신앙의 박해를 피해 세계 각처에 흩어져 살고 있던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이었습니다. 다만 기록 연대가 조금 다릅니다. 베드로전서는 네로가 로마에서 일어났던 화재의 책임을 크리스천들에게 돌리고 있던 A. D. 64년경에 기록된 것으로 봅니다만, 야고보서는 이보다 조금 이른 A.D. 45-50년 경으로 보는 견해와 A.D. 60년 경으로 보는 두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 (Josephus, A.D. 37-100)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의 동생 의인 야고보는 율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대제사장 아나노스 (Ananos)에 의해 A.D. 62년에 처형되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야고보서의 기록 연대는 A.D. 62년 이전이 되겠지요. 어느 경우이든, 베드로전서보다는 조금 이른 시기에 기록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학자들 중에는 야고보서의 기록 연대를 이보다 훨씬 이후로, 2세기 중반이나 3세기 초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이런 학자들은 야고보서에 나오는 문장의 표현이 아주 세련된 문장이라는 이유를 근거로 제시합니다. 예를 들면, 야고보서 3:6에 나오는 ‘삶의 수레 바퀴’ 이런 표현들은 1세기나 2세기 중반까지는 사용하지 않았던 표현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야고보서에 대한 이런 역사적인 배경을 살펴보면서, 야고보가 그 편지에 썼을 내용들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신앙의 박해를 받고 전 세계로 흩어져 살던 크리스천들에게 무엇보다 필요했던 것은 시험 중에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잘 지킬 수 있는 위로와 격려의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루하루 어떻게 살아야 할지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는 지혜가 필요했고, 같은 디아스포라끼리 서로 돕고 살아야 하는 문제들이 야고보서에서 다루고 있는 중요한 이슈들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를 열면 제일 먼저 나오는 말씀이 “형제 여러분, 여러 가지 시험을 겪을 때 기쁘게 여기십시오 (2절)”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시험’이라는 말은 ‘troubles (NLT)’ ‘trials (NIV, NKJV)’ ‘temptations (BRG)’ 또 ‘test (CEB)’ ‘trials and temptation (PHILLIPS)’ ‘difficulties and temptation (TLB)’ ‘tests and challenges’라고 번역된 곳도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살면서 여러가지 어려움과 문제들을 만나게 되는데, 이것을 쉽게 거부하거나, 낙심하거나 실망하거나 쉽게 결론짓지 말고 고난이 주는 유익을 생각하면서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성경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삶의 문제들을 해석하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합니다. 세상이 누가 자기 삶에 어려운 문제들이 생기는 것을 기뻐하는 사람들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기뻐하라고 하면서 우리의 생각과 경험을 뛰어 넘은 새로운 관점을 제시합니다.
저는 구약성경을 읽으면서도 이 같은 말씀을 발견했습니다. 한번 보세요. 시편 119:71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고난 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말씀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My suffering was good for me, for it taught me to pay attention to your decrees (나의 고난이 나에게 좋았습니다. 왜냐하면 고난이 나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도록 가르쳐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바꾸어서 말하면, 만약 나에게 고난이 없었더라면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소중하게 알고 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고난이 주어진 덕분에 하나님의 말씀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맞습니까? 어려움을 겪으면서 사람은 기도하게 됩니다. 어려움이 없었더라면 그 사람이 기도했을 리가 없습니다. 아무 걱정이 없는데 왜 기도합니까? 비록 그렇다고 해도 매일 새벽기도 나오면서 기도하는 사람을 “저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문제가 많았구만!” 이렇게 평가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사람은 어려움을 겪을 때 비로소 성경을 펴서 읽기 시작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이 있을 때 성경 욥기를 읽습니다. 욥이 아무 잘못도 없는데 고난을 받았다는, 어디서 들은 얘기가 생각났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욥기를 읽기는 읽어도 무슨 뜻인지 잘 모를 말씀이 너무 많아서 읽기가 힘이 듭니다.

시편의 저자는, “내가 고난 당한 덕분에 기도하게 되었고, 고난 당한 덕분에 성경을 펴서 읽게 되었으니, 이것이야 말로 고난이 주는 유익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서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여러분은 믿음의 시련을 통하여 인내심이 성장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는 모든 일을 참고 견디어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완전하고 성숙한 사람이 되십시오.” (3-4절) 이 말씀 속에 우리가 왜 어려움을 겪으면서 기뻐해야 하는지 그 이유가 두가지로 나와 있습니다. 첫째는, 시련을 겪으면서 우리의 인내심이 성장한다고 합니다 (When your faith is tested, your endurance has a chance to grow). ‘endurance’라는 말이 ‘endure (견딘다)’는 동사에서 나왔잖아요? 우리가 어려움을 겪으면서 참고 견디는 힘이 강해집니다. ‘endurance’가 생긴 사람은 다음에는 웬만한 어려움이 와도 잘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인생의 큰 자산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큰 자산입니다. 둘째로, 우리는 어려움을 겪으면서 점점 더 완전하고 성숙한 크리스천으로 성장하게 된다고 합니다. “When your endurance is fully developed, you will be perfect and complete, needing nothing (당신의 인내심이 완전히 개발되면, 당신은 아무 것도 부족함이 없는 완전하고 온전한 사람이 됩니다).”

유진 피터슨 (Eugene Peterson)은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You know that under pressure, your faith-life is forced into the open and shows its true colors. So don’t try to get out of anything prematurely. Let it do its work so you become mature and well-developed, not deficient in any way (당신이 어려움을 겪을 때 당신의 믿음생활은 진정한 색깔을 드러내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어떤 어려움이든 섣불리 빠져나오려고 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당신이 겪고 있는 문제들이 성숙하도록, 잘 개발되도록 해서 아무 것도 모자라는 것이 없도록 하십시오.)

어려움을 당할 때 제일 당황스러운 것은, 무엇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이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타문화권에 들어가서, 낯선 언어를 배워야 하고, 직업을 구해야 합니다. 게다가 언제 무슨 일이 닥칠지 알 수 없는 신변에 대한 불안감이 있습니다. 야고보는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라고 합니다. “지혜가 부족한 사람이 있으면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자비로우셔서 모든 사람에게 나눠 주시는 것을 즐거워하십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필요로 하는 지혜를 주실 것입니다.” (5절)

왜 지혜가 부족한 사람이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하는지, 생각나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사야 40: 28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분의 지혜는 끝없이 깊고 넓어서 우리 인간이 헤아려 알 수가 없습니다” (현대어성경)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No one can measure the depths of his understanding”입니다. 도무지 그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의 지혜는 무궁무진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한 사람은 이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라고 하라고 합니다. 지혜가 부족해서 하나님께 구해야 할 사람이 누구입니까? 2,000년 전에 살았던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입니까? 물론 그들도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 우리들이야 말로 지혜가 부족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하나님께 구할 때 믿고 구하라고 합니다 (6절). 의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의심은 하나님을 ‘불신 (unbelief)’하는 데서 옵니다. 성경에 ‘맛사 (Massah)’ 혹은 ‘므리바 (Meribah)라는 지명이 있는데요. 하나님을 시험한다는 뜻입니다 (출애굽기 17:7). “하나님께서 들어 주실까?”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듣고 계시나?” “하나님께서 계시나?” 기도하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생길 수 있는 질문들입니다. 야고보는 의심하는 사람을 ‘두 마음을 품는 사람 (a double-minded person, 8절)’이라고 했고, 이런 사람은 바다 물결같이 바람에 이리 저리 밀려다니는 사람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은 주님께 무엇을 받을까 하고 기대하지 마라고 합니다 (7절).

기도할 때 가장 명심해야 할 것이 하나님께 대한 모든 의심을 거두어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고 구하는 것입니다. 지혜가 부족한 사람은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십시오. 하나님은 자비로우시고, 너그러운 분이십니다. 공부하는 청년들에게 얼마나 절실한 말씀입니까? 스티븐 코비 (Stephen Covey)가 1989년에 펴낸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 (The Seven Habits of Highly Effective People)'이란 책을 아십니까? 맨 마지막 습관이 무엇이었습니까? "Sharpen your saw (너의 톱을 날카롭게 갈라)"입니다. 열심히 일을 하다 보면 톱날이 무디어집니다. 무디어진 톱 날을 가지고는 효과적으로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열심히 일을 해도 성과가 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가진 톱의 톱 날을 날카롭게 갈아야 합니다. 스티븐 코비는 톱 날을 날카롭게 가는 일을 영성과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주일에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리고, 찬양을 하고 기도를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일은 나의 톱 날을 날카롭게 만드는 일입니다.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는 일도 나의 톱 날을 날카롭게 가는 일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 역시 나의 톱 날을 날카롭게 준비하는 일입니다.

기도할 때 모세가 드렸던 기도를 하십시오.  모세는 늘 이런 식으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 말씀대로 해 주십시오.” 이 모세의 기도 방식을 여러분의 기도에 적용해 보십시오. “하나님, 지혜가 부족한 사람은 하나님께 구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 구하면 우리가 필요한 지혜를 주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제가 지혜가 부족합니다. 저에게 지혜를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사람이 어려움을 겪으면 그 사람의 믿음생활의 색깔이 드러난다고 했습니다. 지금 내가 어느 수준의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지금 그 색깔이 무슨 색깔이든, 여러분의 믿음이 어느 수준이든지,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참고 견디면서 기도하고, 성경을 펴십시오. 결코 고난이 주는 유익을 잃지 않도록 하십시오.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십시오. “When your endurance is fully developed, you will be perfect and complete, needing nothing.”


7/22/2018 | 베드로전서 강해설교 13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 IX To Believe God’s Care For His Children

베드로전서 5:7-11

오늘은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 아홉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로서 베드로전서 강해 설교를 마칩니다. 저 자신은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고난의 삶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는 모습에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교우 여러분들에게 많은 은혜가 있기를 기대하고 설교 준비를 했습니다만, 제가 기대했던 대로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걱정과 근심에 대한 문제입니다. 세상에 걱정과 근심이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누구에게나 걱정과 근심이 있습니다. 겉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는 것 같고, 아무 걱정이 없는 것 같은데, 그런 사람들에게도 걱정과 근심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건강의 문제로, 어떤 사람은 경제적인 문제로, 어떤 사람은 자녀들의 문제로, 어떤 사람들은 부부 간의 문제로, 어떤 사람은 인간관계에서 생기는 문제로, 어떤 사람은 생의 의욕을 잃어버려서, 어떤 사람은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을 만나서, 어떤 사람은 학업의 문제로, 어떤 사람은 직장의 문제로, 어떤 사람은 하고 있는 연구가 잘 진행되지 않아서 걱정을 합니다.

이렇게 누구에게나 있는 걱정이고 근심인데, 성경은 걱정과 근심의 문제를 매우 심각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있다가 내일이면 불 속에 던져질 들풀도 이렇게 입히시는데, 너희를 더 소중하게 입히시지 않겠느냐?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 (마태복음 6:30) 예수님은 염려와 근심이 하나님 아버지께 대한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들에 핀 들꽃이나 들풀들, 하늘에 날아 다니는 새들은 내일을 위해서 염려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이것들은 인간의 눈에 하찮아 보이는 존재들이지만, 자기들을 지으신 창조주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면서 살아간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이것들보다 훨씬 더 귀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신다는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염려와 근심이 떠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이 말씀에 얼마나 동의하시나요?

다시, 2,000년 전으로 돌아가서,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전 주일 설교에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은 특별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웬만한 일에도 믿음이 흔들리지 않는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작은 일에도 믿음이 흔들리고, 불안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들과 다름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에게 염려가 없겠습니까? 이 사람들에게 근심이 없겠습니까? 아닙니다. 하루하루 생계를 걱정해야 하고, 언제 붙잡혀 갈지 모르는 불안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베드로는 “모든 걱정과 근심을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돌보시고 계십니다 (6절)”라고 말합니다.

지금 베드로가 하는 말을 잘 들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돌보고 계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멀리 계시지 않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염려하고 걱정하는 그 현장에 하나님께서 계신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불안해하는 그 현장에 하나님께 계신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아십니까? 지금 우리는 베드로가 그 편지 속에서 말하고 있는 그 하나님과 동일한 믿고 있습니다. 2,000년이 지났으니까 그 때 하나님과 지금의 하나님이 다르다고 생각합니까? 성경 속에 나오는 하나님과 지금 여러분이 믿고 있는 하나님이 다르다고 생각합니까? 이 말씀이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똑같으십니다 (Jesus Christ is the same yesterday, today, and forever., 히브리서 13:8).”

아브라함이 믿었던 하나님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이 하나님을 믿었던 아브라함은 100살에 아들을 낳았습니다. 모세가 믿었던 하나님은 삶의 매순간마다 구체적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그의 손에 들고 있던 지팡이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증거였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광야에서도 하나님은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자기 백성들을 인도하셨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단순히 방향만 알려 주는 오늘날의 내비게이션과 달랐습니다. 낮에 나타났던 구름기둥은 광야의 뜨거운 태양빛으로부터 자기 백성들을 보호했고, 밤에 나타났던 불기둥은 자기 백성들을 추위로부터 보호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믿었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셨나요? 약속한 것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용기를 내어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를 증거한 것과 같이 너는 로마에서도 나를 나를 증거하게 될 것이다 (사도행전 23:11)” 이렇게 말씀하신 하나님은 그 때까지 바울을 모든 환난에서 지켜 주셨습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 (Martin Luther, 1483-1546, 독일)가 믿었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었습니까? 루터가 믿었던 하나님은 루터의 모든 근심과 걱정을 맡아 주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이 하나님을 믿었던 루터는 그의 주장을 철회하라는 압박 속에서도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밤에 잠을 잘 수가 있었습니다.

문제는,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에 대한 책임을 부모에게 있습니다. 적어도 자녀들이 자랄 때까지는 부모가 보살펴 주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을 돌보십니다. 베드로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걱정과 근심을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돌보시고 계십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성경을 읽다가 감동적인 구절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최근에도 감동적인 성경 말씀을 읽었습니다. 시편 33:12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Blessed is the nation whose God is the LORD, The people He has chosen as His own inheritance., NKJV).” 다윗이 쓴 시편 144:15에도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이 말씀이 얼마나 엄청난 말씀인지 아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은 것을 가지고 자랑하잖아요? 그런데, 다윗은 아예 하나님을 자기의 소유로 삼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자기 소유로 삼았으면 더 이상 이러쿵저러쿵 말할 것이 없습니다.

토마스 브룩스 (Thomas Brooks, 1608-1680)라는 청교도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이 목사님이 시편 33:12 말씀을 가지고 설교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을 자기 소유로 삼는 사람을 비참하게 만들 수 없다. 세상은 하나님을 자기 소유로 소망하는 사람에게 행복을 줄 수 없다. 이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참된 행복의 근원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모든 참된 행복의 기증자이시고, 모든 참된 행복의 지지자이시며, 그것의 중심이 되신다.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소유한 사람, 그리고 그분을 자신의 기업으로 소유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다.”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삼았다는 말씀은 곧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이 믿음이 없으니까 문제이지, 이 믿음만 가지고 산다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일본에 기므라 간조라는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이 목사님이 청년 시절에 미국의 나이아가라 폭포를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웅장한 폭포를 보면서 감격하여 입을 다물 줄 몰랐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있던 어느 미국인이 깔보는 태도로 “당신 나라에도 이런 폭포가 있소?” 하고 으스대면서 물었습니다. 이 말에 기므라 간조 목사님이 순간적으로 기지를 발휘해서 “그러면 당신은 이 폭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소?” 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 사람이 “그야 절반은 캐나다 것이고, 절반은 미국 것이 아니겠소?” 하고 시큰둥하게 대답했습니다. 이 말에 기므라 간조 목사님이 “당신 틀렸소. 이 폭포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나는 이 폭포 주인의 아들이오” 하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이 사람이 정색을 하면서 “당신 크리스천이오?” 하고 묻더랍니다. 기므라 간조 목사님은 자기는 목사라고 하면서 신분을 밝혔습니다. 이 미국인은 자기도 크리스천이라고 하면서 정중하게 사과를 했다고 합니다. 이 미국인이 숙소의 전화 번화를 가지고 갔는데, 저녁에 그 미국인이 나가는 교회 목사님이 전화를 걸어서 “당신이 나이아가라 폭포 주인의 아들이냐?” 고 묻더니, 이번 주일에 자기 교회에 와서 설교를 해 줄 수 있느냐고 정중하게 요청하더랍니다. 기므라 간조 목사님이 주일날 그 교회를 찾아가는데, 길거리에 “나이아가라 폭포 주인의 아들이 와서 설교를 합니다!” 이런 포스터들이 붙었다고 합니다. 그날 나이아가라 폭포 주인의 아들을 보기 위해서 사람들이 예배당을 꽉 채웠다고 합니다.

크리스천의 생활방식은 염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염려하고 근심할 때 똑 같이 염려하고 근심하는 것은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이 아닙니다. 하지만, 크리스천들 중에도 염려와 근심으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주님은 제자들에게 염려하지 말고 근심하지 말라고 하시는데, 왜 우리는 염려와 근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까? 세 가지 근본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이시고,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믿음이 부족한 것이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을 돌보시지 않으면 누가 그의 자녀들을 돌보겠습니까?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신다 (마태복음 6:32)”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염려와 근심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도 주님의 말씀을 받아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걱정과 근심을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 마음을 강하게 하고 늘 주의하십시오. 원수 마귀가 배고파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먹이를 찾아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마귀에게 지지 말고 믿음에 굳게 서 있기 바랍니다.” (베드로전서 5:7-9)

재미있는 것은 배고픈 마귀가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먹이를 찾아 돌아다니고 있다고 합니다. 마귀가 찾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마귀의 공격 대상이 되겠습니까? 마귀의 ‘스킴 (scheme)’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염려와 근심을 넣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염려와 근심으로 꽉 찬 사람들은 마귀가 손쉽게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염려와 근심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인하는 일입니다. 이 관계만 분명하게 확인한다면 우리는 염려와 근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의 사정을 아시고,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염려와 근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의를 구하지않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마귀에게 지지 말고 믿음에 굳게 서라 (9절)”고 했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Stand firm against him, and be strong in your faith (그를 대항하여 굳게 서십시오. 그리고 믿음으로 강하게 되십시오).” 도대체 믿음으로 굳게 서서 마귀를 대적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마귀를 대적한다는 것은 바꾸어서 말하면, 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에 보면,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히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시리라.” (마태복음 6:33)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이야 말로 우리가 염려와 근심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열심히 구하지 않으면 우리 마음에 세상의 염려와 걱정거리가 들어옵니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사람에게는 세상의 염려와 근심이 들어올 자리가 없습니다.

셋째로, 우리가 염려와 근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고난을 이해하는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힘든 고난은 잠시 동안입니다.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바르게 세우실 것입니다.” (10절)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So after you have suffered a little while, he will restore, support, and strengthen you, and he will place you on a firm foundation.” 우리가 ‘잠깐 동안” 힘들어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금방 회복시켜 주시고, 후원해 주시고, 힘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다시 넘어지지 않도록 굳게 세워주실 것입니다.

‘a little while’이란 말이 눈에 들어옵니다. 한달이 될 수도 있고, 3년이 될 수도 있고, 5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그 이상의 시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어려움을 겪는 시간이 얼마가 되었든지 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시는 무너지지 않는 튼튼한 기초 위에 세워 주실 영원한 시간에 비하면 그 시간은 ‘잠깐’에 지나지 않는 시간입니다. 성경에는 분명히 이렇게 나와 있지만, 우리는 고난에 대한 이해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잠깐’ 동안의 고난에 힘들어 하고, 낙심하고, 절망합니다.

베드로의 편지를 읽고 있을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지금의 이 고난이 언제나 끝이 날까?” 하면서 절망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졌습니다. 그들이 두루마리를 읽는 그 시간에 베드로가 쓴 위로의 편지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 들렸을 것입니다. 연약한 마음들이 위로를 받았을 것입니다. 상처받은 사람들이 치유를 받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잃어버렸던 희망을 다시 찾았을 것입니다. 똑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 여러분과 저에게 전해졌습니다. 염려과 근심으로부터 벗어나 우리의 심령들이 새로워지는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


7/15/2018 | 베드로전서 강해설교 12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 VIII Three Characteristics of Christian Leadership

베드로전서 5:1-6

오늘은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 중에 ‘크리스천의 리더십’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한번은 예수님의 제자들 사이에 “누가 더 크냐?” 하는 문제를 가지고 심각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와서 자기 아들들을 높은 자리에 앉혀 달라고 부탁을 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제자들이 그 사실을 알았습니다. “When the ten other disciples heard what James and John had asked, they were indignant.” (마태복음 20:24) ‘indignant’라는 단어는 누구로부터 부당한 취급을 받았을 때 화가 나고 짜증이 날 때 쓰는 말입니다. 지금 다같이 고생하는데 어떻게 자기 두 아들만 잘 봐 달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까? 그런데, 어머니는 할 수 있습니다.

중학교 시험 봤을 때 생각이 납니다. 그 때는 정말 경쟁이 치열했습니다. 입학 시험을 치렀는데, 발표가 나기까지 약 한 달 정도 걸렸습니다. 그 때는 모든 작업을 수작업으로 해야 했습니다. 어느 수험생도 다 그렇지만, 그때 저도 발표가 날 때까지 말 한번 크게 못하고 집에서 죄인으로 살았습니다. 날마다 머리 속으로 내가 몇 개나 틀렸나 계산을 해 봅니다. 그 때 제 계산으로는 4개 틀린 것으로 나왔습니다만, 시간이 흐르면서 불안해지기 시작합니다. 4개가 아니라 6개가 틀린 것 같아 불안했습니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말을 못합니다. 드디어 발표날이 되었습니다. 그 때는 라디오 방송으로 합격자 수험 번호를 방송했습니다. 학교 정문에는 크게 합격자 명단을 써 붙였고요. 발표 시간이 다가오면서 불안과 초조한 마음이 최고조에 달합니다. 그 때 “내가 이러고 앉아 있을 것이 아니라, 학교에 가 봐야 되겠다”고 하시면서 어머니가 나섭니다. 학교로 가신 어머니는 같은 수험생 어머니들 사이에서 정보를 수집합니다. “야, 이번에 8개 틀린 아이들까지 합격한다니까 걱정하지 마라. 엄마가 꼭 합격해 가지고 갈께.” 라디오 방송에서 나오는 합격자 발표보다도 어머니의 전화가 먼저 왔습니다. 추운 겨울에 추위를 무릅쓰고 오직 어머니는 자식을 위해 합격자 발표 현장에 가 있습니다. 자식을 위한 일이라면 어머니에게 추위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심순덕 시인의 “엄마는 그대로 되는 줄 알았습니다” 이런 제목의 시가 있습니다. 한번 들어 보시겠습니까?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한여름 뙤약볕을 머리에 인 채 호미 쥐고 온 종일 밭을 매도되는 줄 알았습니다.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 고된 일 끝에 찬 밥 한덩이로 부뚜막에 걸터앉아 끼니를 때워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한 겨울 꽁꽁 언 냇물에 맨손으로 빨래를 해도 그래서 동상이 가실 날이 없어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난 괜찮다 배부르다 너희들이나 많이 먹어라 더운 밥 맛난 찬 그렇게 자식들 다 먹이고 숭늉으로 허기를 달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발뒤꿈치가 추위에 해져 이불이 소리를 내고 손톱이 깎을 수조차 없게 닳아 문드러져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술 좋아하는 아버지가 허구한 날 주정을 하고 철부지 자식들이 속을 썩여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외할머니 보고 싶다 보고 싶다 그것이 그냥 넋두리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어느 날 아무도 없는 집에서 외할머니 사진을 손에 들고 소리 죽여 우는 엄마를 보고도 아! 그 눈물의 의미를 이 속없는 딸은 몰랐습니다. /내가 엄마가 되고 엄마가 낡은 액자 속 사진으로만 우리 곁에 남아 있을 때 비로소.... 엄마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엄마는..... 엄마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때문에 제자들 사이에 다툼이 생겼습니다. 다른 제자들의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하지만, 자식을 위한 일이라면 어머니는 이보다 더한 비난도 받을 수 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아는 것처럼 이방 사람들의 통치자라는 사람들은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한다. 고관들도 사람들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누구든지 너희 중에서 높아지려거든 종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너희 중에서 첫째가 되려거든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인자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인자는 자기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왔다.” (마가복음 10:42-45)

다른 사람들보다 높아지려는 마음, 다른 사람들 위에 있으려고 하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이것을 명예욕, 혹은 권력욕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세속적인 리더십과 크리스천 리더십이 어떻게 다른 지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 ‘섬김’이라는 단어가 제일 눈에 들어옵니다. 누구든지 높아지려고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종이 주인을 섬기듯이 그렇게 섬기면 섬김을 받는 사람이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사람이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리더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을 읽어 보면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에 나오지 않는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누가복음 22:27 말씀입니다. “식사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과 그를 시중드는 사람 가운데 누가 더 큰 사람이냐? 식사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 있다 (Who is more important, the one who sits at the table or the one who serves? The one who sits at the table, of course. But not here! For I am among you as one who serves).”

오늘 베드로전서 본문 말씀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기쁨으로 돌보며, 기쁨으로 섬기며 억지로 하지 마십시오.” (2절) 이 말씀은 베드로가 디아스포라 크리스천 공동체의 장로들에게 한 말입니다. 여기서 장로라는 말은 공동체의 리더십을 가지고 있는 지도자들을 말합니다.

크리스천 리더십이 세속사회에서의 리더십과 판이하게 다른 점이 있다면, 크리스천 리더십의 핵심이 ‘섬김’이라는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세속사회의 리더십에는 ‘섬김 (service)’이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아까 위에서 언급한 예수님의 말씀에 나오는 세속사회의 리더십은 ‘통치자’ ‘권력’ ‘지배’ 이런 개념들입니다. 대단히 죄송합니다만, 지금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갑질’이라는 것이 그런 것 아닙니까? 자기가 상대방보다 지위가 높은 것을 이용해서 상대방을 마구 대하고, 욕질을 하고, 인격적인 모욕을 주는 것 아닙니까? 지금은 사회가 많이 발전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없을 것 같은데, 겉보기에는 어엿한 기업의 오너들이 자기 지위를 이용해서 말도 안 되는 일들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말씀대로 ‘자기 마음대로 하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서도 자기가 지배하는 사람들에게 ‘은인 (Benefactors)’ 행세를 하려고 합니다 (누가복음 22:25).

지금 한국에서는 두 항공사의 오너들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항공사는 어느 기업보다도 ‘service’를 강조하는 기업입니다. 그런데, 그런 기업 이미지와는 달리 오너들의 말도 안 되는 횡포가 계속 보도되고 있습니다. 그만큼 두 기업이 사회의 발전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일반 사회에서도 리더십의 개념이 급속도로 변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리더십이 권위를 이용해서 명령과 복종을 강요했다면, 지금은 그런 리더십이 시대의 흐름에 맞지 않다는 생각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새롭게 나온 리더십 개념이 ‘서번트 리더십 (Servant Leadership)’입니다. ‘서번트 리더십’이 새롭게 각광을 받고 있는 이유는, ‘서번트 리더십’이 과거의 권위적인 리더십보다 훨씬 더 구성원들 간에 소통이 잘되고, 서로를 잘 이해할 수 있고, 공동체의 문제가 무엇인지 잘 파악할 수 있고, 결과적으로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크리스천 리더십의 또 다른 특징은 리더가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서번트 리더십’이 무엇인지 몸소 말씀과 행동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만 제자들을 가르치지 않고 실제로 행동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범을 보여 주신 가장 유명한 말씀은 요한복음 13장에 나오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닦아 주신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너무 많이 들었기 때문에 별 특별한 감정 없이 이 말씀을 읽고 지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 시대의 문화와 관습을 완전히 뛰어 넘는 파격적인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의 관습은 종이 주인의 발을 닦아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관습을 깨고 제자들의 발을 닦아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선생과 주로서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겨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그대로 너희도 행하게 하기 위해 내가 본을 보여준 것이다. 종이 자기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그를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한 법이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그대로 행하면 너희에게 복이 있을 것이다 (If you know these things, you are blessed if you do them).” (요한복음 13:14-17)

오늘 읽은 베드로전서 본문 말씀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러분이 맡은 사람들을 지배하려 들지 말며, 그들에게 좋은 모범이 되십시오.” (3절) 크리스천 리더십은 공동체 안에서 이렇게 하라고 말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하라고 힘으로 윽박지르는 것이 아닙니다. 크리스천 리더십은 공동체 안에서 행동으로 모범을 보이는 것입니다. “Don't lord it over the people assigned to your care, but lead them by your own good example.” (NLT)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만 하시지 않고 몸소 사랑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 것이다.” (요한복음 13:34-35) “Love each other. Just as I have loved you, you should love each other.” (NLT)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베드로가 디아스포라 공동체 리더들에게 공동체 안에서 모범을 보이라고 말했을 때, 예수님께서 몸소 모범을 보여주셨던 일들을 생각하면서 베드로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졌을 것입니다. “맞아, 주님은 모든 면에서 우리에게 ‘good example’을 보여주셨지! 난 평생 그 일들을 잊을 수가 없어!”

예수님이 보여 주신 사랑에는 한계가 없었습니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 “그는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셨다.”라고 기록했습니다. “He showed them the full extent of his love (그는 제자들에게 그의 사랑의 범위가 어디까지 인지 보여주셨습니다).” 지금 새벽 기도에서 읽고 있는 마가복음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어떤 나병 환자(a man with leprosy)가 예수님께 와서 무릎을 꿇고 간청했습니다. ‘선생님께서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불쌍히 보셨습니다. 그래서 손을 내밀어 그를 만지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원하니, 깨끗해져라!’” (마가복음 1:40-41)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에게 손을 내 밀어 그를 만지신 것은 그 사람에 대한 사랑과 긍휼의 표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모범을 옆에서 모두 지켜본 제자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존경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예수님의 모범을 보면서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에게서는 행동은 따르지 않고 말로만 하시는 그런 리더십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말씀과 행동이 일치되었습니다. ‘언행일치(言行一致)’라고 하지요?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은 일치되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던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크리스천 리더십에 대하여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원하는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양 떼를 잘 돌보십시오. 기쁨으로 그들을 돌보며 억지로 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기쁨으로 섬기며, 돈을 생각하고 그 일을 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2절)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Care for the flock that God has entrusted to you. Watch over it willingly, not grudgingly - not for what you will get out of it, but because you are eager to serve God.” 직역하면,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양떼를 돌보십시오, 그들을 기쁨으로 돌보십시오. 마지 못해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을 섬기는 열심으로 하십시오.”

여러분들은 지금 무슨 리더십을 가지고 있습니까? 직장에서, 회사에서, 리더십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있는 위치에서 크리스천 리더십을 발휘해 보십시오. 여러분에게 주어진 힘을 행사하려고 하지 말고 여러분에게 주어진 사람들을 섬겨 보십시오. 참 이상합니다. 섬김의 리더십을 발휘하면 그 사람이 더 높아집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리더십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절대로 여러분에게 주어진 리더십을 잘못 사용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주님의 보여 주신 모범을 따라서 겸손하게 섬기십시오.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 아래 자신을 낮추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때가 이를 때에 여러분을 높이실 것입니다 (6절)”라고 했습니다. 섬김의 리더십을 실천하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높여 주시는 은혜를 경험하십시오.

D.L. 무디 (1837-1899)가 쓰던 성경 책에 이상한 글자가 써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그 기호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간혹 말씀 옆에 'T'자가 써 있기도 하고 'p'자가 써 있기도 한 것입니다. 나중에 가서야 사람들은 알았습니다. 그것은'tested'와 'proved의 약자였습니다. 무디는 자기의 경험 속에서 그 말씀대로 실천해 본 말씀 옆에 'T'자를 써 놓았고, 그 결과 "진실하다! 맞다!"라고 인정된 말씀 옆에 'P'자를 써 놓았던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의 성경 책에도 오늘 말씀 옆에 'T'자가 써져야 하고, 'P'자가 써져야 합니다. 정말 다른 사람의 종이 되어 섬기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높여 주시는지, 여러분의 삶을 실천해 보고, 증명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 일반 사회에서도 ‘섬김의 리더십’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는 응당 예수님의 리더십을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회 밖에서나, 교회 안에서 모든 일을 ‘기쁨으로 (willingly)’ 예수님의 '섬기는 리더십'을 발휘하십시오. ‘억지로 마지 못해서, 내키 않는 마음으로 (grudgingly)’ 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런 사람은 어디서나 인정받습니다. 어디서나 칭찬받습니다. 어디서나 필요한 사람이 됩니다. “내가 왜 이렇게 다른 사람을 섬겨야 하지?” 이런 사탄의 음성이 들릴 때는 “주님이 나에게 이렇게 하라고 모범을 보여주셨으니까! 이렇게 하는 것이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이니까!” 이런 마음을 가지고 이겨 나가십시오.


7/8/2018 | 베드로전서 강해설교 11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 VII To Suffer For Being A Christian

베드로전서 4:12-19

많은 사람들이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What does it mean to be a Christian)?” 하는 질문을 진지하게 물었습니다. 한스 큉 (Hans Küng, 1928-)이라는 독일의 신학자가 ‘On Being a Christian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에 대하여)’라는 책을 썼습니다. 1966년에 이 책이 나왔습니다. 700페이지가 넘는 꽤 두꺼운 책입니다. 우리 말로는 “왜 그리스도인인가?” 이렇게 번역이 되었습니다. 한스 큉은 이 책에서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사랑과 의(righteousness)’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진정한 인간으로 사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말하는 ‘진정한 인간’이란 죄와 이기심과 교만과 자기 의에 빠진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 속에 있는 인간을 말합니다.

“나에게 있어서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질문이 있어야 비로서 문제 의식을 가진 크리스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문제 의식 없이 믿음생활을 하고, 교회 생활을 하기 때문에 믿음이 자라지 않습니다. 그리고, 유익한 크리스천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지금 소금과 빛과 같은 크리스천들을 볼 수 없는 이유는 “나에게 있어서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고 묻는 문제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Christian’이라는 말이 처음 등장한 것은 사도행전 11:26입니다. “사울을 찾은 바나바는 사울을 안디옥으로 데려왔습니다. 두 사람은 일 년 동안, 교회에 머물면서 많은 사람을 가르쳤습니다. 제자들은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렸습니다.” 안디옥은 시리아에 있는 큰 도시입니다. 이 도시에 바나바와 사울 두 사람이 일 년 동안 머물면서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그 때 가르쳤던 내용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왜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는가?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런 내용을 가르치지 않았겠습니까? 이렇게 가르쳤더니, 안디옥 시민들이 이 사람들을 ‘크리스천’이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Christian’이라는 말은 ‘Christ’에 ‘-ian’이라는 접미사가 붙어서 된 말입니다. ‘-ian’이라는 말은 ‘누구를 따르는 사람들’ ‘제자’ ‘followers (추종자들)’를 말합니다. 보스턴에 사는 사람들을 ‘보스토니언 (Boston + ian)’이라고 합니다. ‘보스턴에 사는 사람들’ ‘보스턴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울과 바나바 두 사람이 일 년을 안디옥에 머물면서 열심히 잘 가르쳤더니, 주변 사람들이 ‘저 사람들은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로구나!” 하면서 ‘Christian’이라는 이름을 붙여 준 것입니다. 그 사람들에게서 예수님의 냄새가 났고, 예수님의 향기가 났던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자기가 왜 크리스천이 되었는지 그 이유를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교회 나간다고 하면서 교회 밖에서는 딴 짓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아마도 이 사람들은 한스 큉에 말한 것처럼, 사랑과 의(義, righteousness)를 추구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 사람들은 착하고 선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야, 저 사람들 비록 자기 조국에 살 수 없어서 이곳에 피난 와서 살고 있지만, 굉장한 사람들이구나! 본받을 것이 많은 사람들이구나!” 주변 사람들은 ‘크리스천들’을 이렇게 평가했을 것입니다.

오늘 읽은 베드로전서 본문 말씀에서 놓쳐서는 안 되는 중요한 메시지는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 보면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14절)’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16절)’ 이런 말씀들이 모두 ‘for being a Christian’이라는 말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크리스천으로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이 결코 별 의미 없는 일이 아닙니다. 그냥 교회 빠지지 않고 나가고, 기회가 주어질 때 봉사 좀 하는 것이 크리스천의 삶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그 이상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베드로는 지금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에게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조국을 떠나 타민족, 다 문화권에 들어가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쓴 것이 베드로전서, 베드로후서, 두 통의 편지입니다. 그 때는 동족 유대인들로부터 받는 핍박뿐만 아니라, 로마로부터 받는 핍박이 거세지고 있는 때였습니다. 서기 64년 7월 13일에 로마에서 일어난 대화재의 누명을 크리스천들에게 씌운 로마는 크리스천들에게 대대적인 박해를 가하고 있는 때였습니다.

이런 절박한 위기 상황 속에 있는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에게 지금 베드로는 이 질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 말들을 보십시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다 (13절)’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모욕을 받는다 (14절)’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고난을 받는다 (16절)’ ‘하나님의 뜻에 따라 고난 받는 사람들 (19절)’ 이런 말들이 등장합니다.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이라고 해서 뭐 특별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우리와 크게 다를 것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핍박이 오거나 박해가 오면 겁먹고, 불안해 숨고, 내가 왜 이런 모욕을 받아야 하는지, 내가 왜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몰라서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이라고 해서 특별한 훈련을 받았거나 특별한 무장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우리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학생 시절에 본회퍼 (Dietrich Bonhoeffer, 1906-1945, 독일)의 신학에 매료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제가 학창 시절을 보냈던 때가 그랬습니다. 독재 정권 속에서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와 자유를 빼앗기고 모두가 힘들어 하던 때였습니다. 그 때 본회퍼의 신학은 저에게는 한 줄기 빛과 같았습니다. 본회퍼는 히틀러의 독재 정권에 항거하다가 끝내 감옥에서 죽습니다. 세계 제 2차 대전이 1945년 8월 15일에 끝이 났습니다. 본회퍼는 전쟁이 끝나기 4개월 전에 순교합니다. 본회퍼가 그렇게 죽었지만 그의 신학과 사상은 지금도 제 머리와 가슴에 살아 있습니다. 그 때 본회퍼는 교수형을 당했습니다. 다른 사형수들이 가스실에서 죽어갔는데, 본회퍼는 교수형을 당했습니다. 그 때 그가 남긴 말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This is the end. For me the beginning of life (이것으로 끝입니다. 하지만 나에게는 새로운 삶의 시작입니다).”

본회퍼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그에게서 순교자적인, 영웅적인 면을 찾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영웅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와 똑 같은 연약한 인간이었습니다. 그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쓴 ‘옥중서신 (Letters and Papers From Prison)’이 있습니다. 거기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남들이 말하는 내가 참 나인가? 내가 아는 내가 참 나인가? /새장에 가친 새처럼 불안하고 그립고 약한 나. 목을 졸린 사람처럼 살고 싶어 몸부림치는 나. /색과 꽃과 새소리에 주리고, 좋은 말 따뜻한 말동무에 목말라 하고, 사소한 모욕에도 떨며 참지 못하고, 석방의 날을 안타깝게 기다리다 지친 나. /친구의 신변을 염려하다 지쳤고, 이제는 기도에도, 생각과 일에도, 지쳐 공허하게 된 나. 나는 누구인가?”

본회퍼가 그렇듯이,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도 연약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자기들에게 가해지는 핍박에 하루 하루 지쳐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베드로는 “과연 이 시대에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질문하고 스스로 대답합니다. “이 시대에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의 파트너가 되어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난을 함께 받는 것입니다.” (13절)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베드로가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에게 편지를 쓴 때로부터 약 2,000년이 흘렀습니다. 지금은 그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시대가 발전했습니다.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이 살던 때가 원시 시대라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무슨 시대라고 해야 할까요? 과학은 지난 2,000년 동안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똑 같은 질문을 우리에게 해야 합니다. “과연 우리 시대에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이 질문에 대답해야 합니다.

위에서 본회퍼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To be a Christian does not mean to be religious in a particular way, to make something of oneself (a sinner, a penitent, or a saint) on the basis of some method or other, but to be a man—not a type of man, but the man that Christ creates in us. It is not the religious act that makes the Christian, but participation in the sufferings of God in the secular life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특별한 방법으로 종교적인 사람이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어느 특별한 타입의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새롭게 창조하시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크리스천이 되는 것은 종교적인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고난에 참여함으로써 되는 것이다).”

지금 우리 시대에도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고난 (하나님의 고난)’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성경 골로새서 1:24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나는 여러분을 위해 받는 고난을 기뻐합니다. 자신의 몸인 교회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겪으셔야 할 고난의 남은 부분을 내가 겪을 수 있으니, 그것을 기쁨으로 견뎌 냅니다 (I am glad when I suffer for you in my body, for I am participating in the sufferings of Christ that continue for his body, the church).”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바울은 자기가 복음을 전파하면서 겪는 고난을 새롭게 해석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통하여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 계속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은 그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초대교회와 중세기의 교회, 현대교회의 역사를 살펴 보면, 교회의 역사는 이 말씀과는 정반대로 흘러왔습니다. 교회는 고난 받는 공동체로 남아 있어야 하는데, 교회는 영광을 받고 섬김을 받는 교회로 남으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그 결과 교회는 왕국을 건설할 수 있었습니다. 교회가 섬김의 공동체가 되기를 거절하고 섬김을 받는 공동체가 되는 순간부터, 교회는 생명을 잃기 시작했습니다. 크리스천들은 고난 받기를 거부하고 평안과 안전과 부를 누리는 일에 안주(安住)해 왔습니다. 교회는 서서히 죽어가면서도 무엇이 문제인지 아직도 그 원인을 제대로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엘리자베스 쉐핑 (Elisabeth Shepping, 1880-1934, 독일)이 남긴 말을 기억합니다. “성공이 아니라 섬김입니다 (Not Success, but service).” 모두가 그리스도의 정신을 버리고 살고 있습니다. 섬김을 거절하고 성공을 꿈꾸는 이 시대를 울리는 경종 소리로 들어야 합니다. 섬김의 삶이야 말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삶이 아닙니까? 섬김의 삶이야 말로 교회 공동체가 가장 중요한 가치로 받아들이고, 섬김의 가치를 가르치고, 실천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다시 본회퍼가 남긴 말을 들어 보십시오. “Seek God, not happiness- this is the fundamental rule of all meditation. If you seek God alone, you will gain happiness: that is its promise (행복을 추구하지 말고 하나님을 추구하라. 그대가 하나님만을 추구한다면 행복을 얻을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행복을 얻게 될 것이다). “Being a Christian is less about cautiously avoiding sin than about courageously and actively doing God’s will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죄를 주의하고 피한다는 의미보다는 용기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다).”

본회퍼의 천재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유니온 신학교의 폴 레만 (Paul Lehmann, 1966-1994)이 나치 독일이 패망할 때까지 미국 유니온 신학교에 머물면서 강의를 해 달라는 부탁을 본회퍼에게 했습니다. 이 제안을 받아들인 본회퍼는 미국으로 옵니다. 하지만, 본회퍼는 미국에 도착한 직후, 자기 결정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본회퍼가 이렇게 고백합니다. “유니온 신학교의 학장인 코핀 (Henry Sloane Coffin, 1877-1954) 박사의 집 정원에 앉아 나 자신과 조국 독일을 생각하면서 기도할 기회가 있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은 너무나 분명했다. 미국에 온 것은 잘못된 결정이었다. 우리 민족이 고난을 받고 있는 이 때 나는 독일의 크리스천들과 운명을 함께 해야 했다. 만일 이 때 나의 민족과 함께 고난을 받지 않는다면, 전쟁이 끝난 후 나는 독일을 재건하는 일에 참여할 권리를 갖지 못할 것이다.”

고난을 대하는 크리스천의 태도는 특별합니다. 고난을 받을 때 당황하거나 놀라지 않습니다. 크리스천으로서 고난을 받는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 일상(日常)입니다. 고난 받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다가 고난 받는 사람들은 “Keep on doing what is right, and trust your lives to the God who created you, for he will never fail you (옳은 일을 계속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여러분의 삶을 맡기십시오. 하나님은 결코 여러분을 버리지 않습니다).” (19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