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모음
9/23/2018 | 삶이 힘들고 버거울 때 4
그러면 너는 성공할 것이다. Then, You Will Succeed.
잠언 3:1-10
“그렇게 되면, 너는 오래 살고 성공하게 될 것이다.” (2절) “If you do this, you will live many years, and your life will be satisfying.” (New Living Translation) “for they will prolong your life many years and bring you prosperity.” (NIV) 성경을 많이 읽으신 분들은 이와 비슷한 말씀이 성경 어딘가 있다는 생각을 할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주신 말씀 중에 이와 똑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율법책에 씌어 있는 것을 입에서 떠나지 않게 밤낮으로 소리 내어 읽어라. 그리하여 거기에 씌어 있는 모든 것을 잘 지킬 수 있도록 하여라. 그러면 네가 하는 일이 다 잘 되고 또 성공할 것이다.” (여호수아 1:8)
두 말씀은 모두 성공적인 삶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두 말씀을 잘 보면,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공적인 삶을 사는 비결을 다른 데서 찾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데서 찾고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라도 너무나 다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공적인 삶의 조건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성공할 수밖에 없는 조건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모를 잘 만나야 하고, 남보다 좋은 교육을 받아야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성공의 조건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하는 질문을 했는데, 제일 많이 나온 대답이 ‘부모의 재력’이었다고 합니다. ‘부모의 재력’이라고 대답한 사람이 40%였고, ‘인맥’이라고 대답한 사람이 17.5%였고, 학벌이라고 대답한 사람이 13.6%였고, ‘자기 역량’이라고 대답한 사람이 11.5%였다고 합니다. 또 다른 리서치 연구소에서도 조사를 했는데, 성공의 조건으로 제일 많이 나온 대답이 ‘경제적인 능력’이었는데, 33.9%을 차지했다고 합니다. ‘노력’이나 ‘성실성’ 등은 별로 얘기한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성공의 조건’은 이런 것들과 관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그 말씀을 실천하고, 그 말씀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성경을 많이 읽는 사람들도 이 간단한 사실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오늘 읽은 성경 말씀을 보십시오. “내 아들아, 내 가르침을 잊지 말고, 네 마음에 소중하게 간직하여라. 그러면 너는 오래 살고 성공하게 될 것이다.” (1-2절) 이 말씀은 누가 누구에게 한 말씀입니까? 이스라엘의 3대 왕인 솔로몬이라는 사람이 한 말입니다. 그 사람이 ‘잠언’의 형식을 빌려서 다름 세대 사람들에게 남긴 말입니다. ‘잠언(箴言)’의 箴자(字)는 ‘바늘 잠’ 혹은 ‘경계 잠’ 자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에는 바늘이나 침으로 사람의 병을 고쳤습니다. ‘잠언’은 사람을 고치고 바로잡아 주는 말씀이라는 뜻도 있고, 또 바늘에 찔리는 것처럼 아프고 따끔한 경고의 말씀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히브리 말로 잠언을 뜻하는 ‘마샬’이라는 말은 ‘비교, 비유’라는 뜻입니다. 잠언은 ‘진리를 드러내는 짧은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잠언을 영어로 ‘proverbs’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속담이나 격언을 뜻하는 말입니다. p자를 대문자로 쓰면 성경의 ‘잠언’을 뜻하는 말이 됩니다. 속담이나 격언이 하루 아침에 생기지 않잖아요? 오랜 시간을 두고 사람들의 지혜가 쌓이고 쌓여서 속담이 되고 격언이 됩니다.
솔로몬은 아주 지혜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게다가 모든 부귀와 영화를 누린 사람입니다. 방탕한 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 사람이 말년에 남긴 책이 ‘전도서’와 ‘잠언’ 두 책입니다. 모두 자기 경험을 바탕으로 다음 세대 사람들에게 교훈으로 남긴 책입니다. 솔로몬은 “Store my teachings and commands in your heart”라고 합니다. ‘store’는 요즘에 사용하는 컴퓨터 용어이기도 합니다. 언젠가 필요하겠다 싶은 자료들이 있으면 버리지 않고 컴퓨터에 저장해 둡니다. 저는 신문이나 잡지를 보다가 좋은 글이다 싶으면 컴퓨터에 저장해 둡니다. 제 컴퓨터 속에 많은 자료들이 저장되어 있습니다. 이 자료들은 언젠가는 필요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 때 찾아서 사용하면 됩니다. 이것이 ‘store’입니다. ‘마음 속에 간직하라’ 뜻으로 ‘store’라는 말을 쓸 때는 그냥 막연하게 묵혀 두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저장된 것들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to remain fresh and usable for considerable time on being stored (저장되어 있는 동안 필요할 때 사용할 수 있도록 신선함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네 마음 속에 간직하라고 부탁하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성실이고, 다른 하나는 사랑입니다. “너는 성실과 사랑을 절대 버리지 말고, 그것을 네 목에 걸고, 네 마음판에 잘 새겨라.” (3절) 그런데, 이 성실과 사랑을 우리 말로 번역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쉬운성경에는 ‘성실과 사랑’이라고 나와 있지만, 개역성경과 새번역성경에는 ‘인자와 진리 (mercy and truth)’라고 나와 있습니다. 현대어성경에는 ‘남을 아끼는 마음과 진실한 마음’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공동번역성경에는 “성실하게 신의(信義)를 지켜라”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뜻으로 번역된 이유는 히브리어 ‘헤세드’라는 단어가 여러가지 다양한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헤세드’는 인간을 대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뜻하는 아주 중요한 단어입니다. 구약성경을 이해하는 키워드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한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셨다고 할 때 사랑이라는 단어는 ‘헤세드’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불쌍히 여기셨다, 혹은 긍휼하게 여기셨다고 할 때 긍휼이라는 히브리어는 ‘헤세드’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대하실 때 늘 한결 같으시다고 할 때, 성경에는 “하나님은 성실하시다” 라고 나와 있습니다. 성실이라는 말의 히브리어는 ‘헤세드’입니다. “하나님은 자비하시다”라고 말할 때 자비라는 히브리어는 ‘헤세드’입니다.
솔로몬은 다음 세대 사람들에게 이 ‘헤세드’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너를 대하실 때 가지고 계시는 마음을 너도 배우고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마음을 마음 속에 간직해 두었다가 필요할 때 꺼내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에 대한 긍휼의 마음이 필요할 때, 사람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필요할 때, 사람에 대한 따뜻한 친절과 배려가 필요할 때, 네 마음 속에 간직한 하나님의 ‘헤세드’를 기억하고 너도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절대 버리지 말고, 그것을 네 목에 걸고, 네 마음판에 잘 새기라”고 합니다. 마음판에 새기고 목에 걸라는 말은 내가 말하는 ‘성실과 사랑’을 하나님의 ‘헤세드’를 생각하는 ‘as a reminder(기억하게 하는 것으로)’로 삼으라는 뜻입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헤세드’를 실천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칭찬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4절). “Then you will find favor with both God and people, and you will earn a good reputation”이라고 합니다.
우리교회는 젊은 교회이기 때문에 아기를 낳는 부부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병원 심방을 자주 가게 됩니다. 제가 심방을 가서 읽어 주는 성경 말씀이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디모데후서 3:14-17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을 읽어 주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아이를 잘 기르라고 권면합니다. 또 하나는, 누가복음 2:52절 말씀인데요.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이 말씀을 읽어 주고, 이 아이가 예수님의 어렸을 때 모습처럼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받는 아이로 자라나라고 축복해 줍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포인트는,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아이로,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아이로 성장했다는 이 말씀이, 오늘 읽은 잠언 3:4절 말씀,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칭찬을 받을 것이다” 이 말씀을 생각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려서 성장하면서 하나님의 ‘헤세드’를 잘 배우고 실천하는 교육을 받고 자란 것이 틀림없습니다. 예수님의 부모가 돈이 많은 집이 아니었으니까 랍비들에게 율법 교육을 제대로 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과 마리아에게서 하나님의 ‘헤세드’를 잘 배웠습니다. 사람에 대한 사랑과 자비와 긍휼, 친절한 마음 (kindness), 성실한 마음을 잘 배웠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의 favor를 받았습니다. 어디를 가나 사람들이 칭찬합니다. ‘야, 이 아이, 부모가 누군지 반듯하게 잘 자랐구나!” 그리고, 하나님의 favor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favor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이 아이 위에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시대가 필요로 하는 사람이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똑똑하고 머리 좋은 사람, 자기 전공분야의지식 (knowledge)이 많은 사람, 그 분야에서 탁월한 사람으로 인정받는 사람, 누구나 그런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여러분,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학교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들,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들 아닙니까? 자기가 받은 교육을 성공의 도구로 삼는 사람들 아닙니까? 인간에 대한 애정은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 아닙니까? 자기의 전문 분야에서는 알아주는 뛰어난 사람이지만, 이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마음을 찾아볼 수 없지 않습니까? 이런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헤세드’를 찾아볼 수 있습니까?
미국은 건국 역사가 길지 않습니다. 1776년 7월 4일이 독립 기념일이니까 미국의 역사가 기껏해야 242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역사가 짧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유럽처럼 철학자들이 많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 짧은 역사 속에서 미국이 자랑하는 철학자가 있는데, 그 사람이 에머슨 (Ralph Waldo Emerson, 1803-1882, Concord, Massachusetts)입니다. 이 사람이 보스턴에서 났지만, 보스턴에서 가까운 Concord에서 살았고, 거기서 활동했습니다. 에머슨은 하버드 신학교를 나왔습니다. 미국 사람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철학자입니다. 그가 한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To laugh often and much, to win respect of intelligent people and the affection of children; to earn the appreciation of honest critics and endure the betrayal of false friends; to appreciate beauty; to find the best in others; to leave the world a bit better whether by a healthy child, a garden patch, or a redeemed social condition; to know even one life has breathed easier because you have lived. This is to have succeeded.” “자주 많이 웃고, 지적인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아이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정직한 비평가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거짓 친구들의 배신을 견딜 수 있고, 아름다움을 칭찬하고, 다른 사람에게서 좋은 것을 발견하고, 건강한 아이를 낳거나, 정원을 가꾸거나, 사회적인 조건을 보완해서 세상을 조금이라고 좋게 만들고, 당신이 이 세상이 살았음으로 인해 한 사람이라도 숨을 좀 쉴 수 있게 된다면 성공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감동입니다. 성공적인 삶이란 대단한 업적을 세상에 남기거나 많은 부를 축적하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이 세상에 살았기 때문에 세상이 조금이라도 좋아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이 말이 어떻게 들리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이 말에서 많은 감동과 삶에 대한 영감 (inspiration)을 얻고 있습니다. 에머슨의 이 말 속에 뭔가 가슴을 울리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큰 일 아니라 일상의 작은 일을 통해서도 세상을 조금이라고 좋게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대단한 사람만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도 얼마든지 세상을 좋게 하는 일에 참여할 수 있고,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신기하게도 하나님의 마음인 ‘헤세드’를 가지고 사는 삶과 에머슨이 말한 세상을 조금이라고 더 좋게만드는 일이 서로 다른 일이 아니라 같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문제는 간단합니다. 먼저 하나님이 누구인지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아야 하나님의 마음 ‘헤세드’를 품고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인지 배우기 위해서는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성경은 혼자 읽어도 좋지만, 같이 읽고, 자기가 받은 은혜를 서로 나눌 때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공부하는 청년들은 절대로 학교 공부 소홀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 일 때문에 학교 공부를 소홀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학교 공부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교회 일에 헌신했다면 그 헌신은 잘못된 헌신입니다.
열심히 공부하세요. 그리고, 교회에 와서는 성경을 배우세요. 성경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선하심,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배우세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배우세요. 이것은 학교 공부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 지식이 아니라, 오직 교회에서만 여러분에게 줄 수 있는 지식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favor (칭찬)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성공적인 삶이라고 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절대로 네 슬기를 의지하지 마라. 너는 네 모든 길에서 그분을 인정하여라. 그러면 그분이 너의 길을 형통하게 만들어 주실 것이다.” (5-6절) “Trust in the Lord with all your heart. Do not depend on your own understanding. Seek his will in all you do.” 이 말씀은 앞에 나오는 말씀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헤세드’를 찾고 배우는 사람은 전심(全心)으로 하나님을 믿고 신뢰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의지하지 않아야 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먼저 하나님의 뜻을 겸손하게 물어야 합니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배우겠다는 사람이 자신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닙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배우겠다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닙니까? 우리가 성경에서 배운 대로 이런 방식으로 인생을 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favor를 주십니다. “and he will show you which path to take (그러면 하나님께서 네가 어느 길을 가야할 지 보여 주실 것이다).” (6절) 우리 앞에 두 갈래 길이 놓여 있습니다.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 이 길로 가라고 보여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우리 앞에 놓인 삶을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오늘 하나님께서는 잠언 말씀을 통하여 우리 앞에 그 가능성을 열어 주셨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favor을 얻을 수 있는 존귀(尊貴)한 인생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9/16/2018 | 삶이 힘들고 버거울 때 3
나를 인도하시는 하나님 Lord, You Are My Shepherd.
시편 23편
9/9/2018 | 삶이 힘들고 버거울 때 2
나의 힘이 되시는 하나님 Lord, You Are My Strength.
시편 59:9-11, 16-17
오늘은 ‘삶이 힘들고 버거울 때’ 시리즈 설교 두 번째입니다. 설교 제목은 ‘나의 힘이 되시는 하나님’입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 대화를 나누다 보면 힘을 얻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오히려 낙심하게 되는 경우도 있는데요. 오늘 설교 말씀이 여러분에게 힘이 되고, 격려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성경 말씀은 어떤 한 부분만 떼어서 읽어도 괜찮은 말씀도 있지만, 대부분의 말씀은 앞 뒤를 살펴서 읽어야 하고, 그 말씀을 쓰여진 배경을 알고 읽어야 합니다. 영국의 성서학자 톰 라이트 (Nicholas Thomas Wright, 1948-present)라는 분이 있는데요. 현재 The University of St. Andrews에서 초대 기독교를 강의하시는 분입니다. 요즘에 Thomas Wright의 책들이 많이 읽히고 있습니다. 이 분은 목사들이 설교할 때 한 구절을 가지고 설교하는 것에 대하여 아주 좋지 않게 생각합니다. 목사들이 설교 본문으로 제시하는 말씀은 앞 뒤를 살펴서 읽을 수 있도록 충분히 길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 분은 짧은 본문은 마치 유리 창으로 비치는 한 장면과 같다고 말합니다. 긴 본문은 그 장면과 함께 배경을 같이 볼 수 있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어떤 한 장면을 잘 보려면 그 장면의 배경도 같이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톰 라이트의 이 주장에 동의합니다.
자,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 말씀 시편 59편은 다윗이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께 자기를 지켜 달라고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했던 시편입니다. 사울이라는 이스라엘의 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다윗의 집을 지키고 있습니다. 군인들이 다윗의 집을 에워싸고 있습니다. 다윗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절대절명(絶對絶命)의 순간입니다.
사람은 참 이상합니다. 자기 일이 계획대로 잘 진행되고, 모든 일이 순조로울 때는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습니다. 꼭 다급한 상황을 맞이하고, 절망의 순간을 맞이해야 하나님을 찾습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고난을 당한 사람이 있다면 기도하십시오. 즐거운 사람이 있다면 찬송하십시오 (Are any of you suffering hardships? You should pray. Are any of you happy? You should sing praises).” (야고보서 5:13)
좀 이상한 말 같지만,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삶에 고난이 있는 환경이 좋겠습니까? 아니면, 아무 걱정 없는 환경이 더 좋겠습니까? 바보 같은 질문이지요? 당연히 아무 걱정 없는 환경이 더 좋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보면 아무 걱정 없는 환경 보다는 고난의 환경이 더 좋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고난을 당해야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새학기를 맞이하여 보스턴에 오신 신입생 여러분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고 성숙하게 가져 갈 수 있는 최적(最適)의 환경 속에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이런 환경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예전의 어떤 예언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께서 고난을 주셨으나 오히려 이것이 나에게는 약이 되었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명령을 배울 기회가 되었습니다 (My suffering was good for me, for it taught me to pay attention to your words).” (시편 119:71, 현대어성경) 지금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내가 지금 당하고 있는 이 고난이 오히려 잘 되었다는 것 아닙니까? 이 고난 때문에 내가 성경을 펴서 읽게 되었다는 것 아닙니까? 이 고난 때문에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게 되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게 되고, 하나님께 기도하게 되었다는 것 아닙니까? 이 말을 바꾸어서 말하면, 만일 이 고난이 없었더라면, 나는 성경을 멀리하고 읽지 않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 고난이 없었더라면, 내가 잘나서 모든 것이 순탄한 줄 알았을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지 않았을 것이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지 않았을 것이고,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신약성경에 ‘바울’이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신약성경은 예수님의 말씀과 그 말씀 (복음)이 세상으로 전파되는 과정을 기록한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스라엘에만 머물러 있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신다는 하나님의 복음은 신약시대에 와서 온 세상으로 전파됩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사람이 ‘바울’이라는 사람입니다. ‘바울’이라는 이름 앞에 항상 ‘사도(使徒)’라는 말이 붙어 다닙니다. ‘사도’라는 말은 ‘복음을 전파하는 심부름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영어로 ‘apostle’이라고 하는데, 이 말 역시 ‘to send (~로 보내다)’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쓰임을 받은 사람이었지만, 그에게는 말못할 고통이 있었습니다. 원인 모를 통증이 온 몸을 찌르는 것입니다. 이 통증 때문에 바울은 하나님께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발 이 통증을 없애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응답은 “나의 은혜가 너에게 충분하다.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진다 (My grace is sufficient for you, for my power is made perfect in weakness) (고린도후서 12:9)”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바울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나에게 통증을 제거해 달라고 기도하지 마라는 것 아닙니까? 넌 그 아픔 (통증) 때문에 겸손하여 지고, 가 아픔 때문에 나에게 기도하고 있으니, 그 아픔을 통해서 나의 은혜가 너에게 차고 넘치고 있다는 말씀 아닙니까? 바울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항상 어렵고 힘든 일을 당할 때, 이것을 없애 달라고 기도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 성경은 항상 우리에게 새로운 관점을 제시합니다. 우리가 믿음생활을 하는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 성경의 관점을 배우는 데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본문 말씀을 읽어 보십시오.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있습니다. 그것은 다윗이라는 사람이 위기와 절망의 순간에 하나님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제발 나를 이 위험에서 구해 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특별한 것이 없는, 아주 평범한 말 같지만, 이 말은 결코 평범한 말이 아닙니다. 여러분, 다윗이 누구입니까? 또 지금 다윗을 죽이려고 다윗의 집을 군인들을 시켜 포위하고 있는 사울은 누구입니까? 사울은 왕이 없던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에서 첫 왕이 된 사람입니다. 사울은 주변 국가들과 전쟁하면서 연전연승(連戰連勝)했습니다. 그것이 사울을 교만하게 했습니다. 전쟁에서 이길 때마다 사울은 승전비를 세우고 자기 이름을 기록했습니다 (사무엘상 15:12). 하나님은 이런 사울을 왕의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려고 합니다. 이미 하나님은 사무엘이라는 하나님의 사람을 시켜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습니다. 기름을 부었다는 말은 왕으로 세웠다는 뜻입니다. 사울은 아직 왕의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하나님은 이미 다윗을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이 사실은 아무도 모르는 극비 사항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때부터 사울은 다윗을 미워하고 시기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죽이려고 군인들을 시켜 다윗을 감시하고, 다윗의 집을 에워싼 것입니다.
여러분, 다윗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머지않아 이스라엘의 왕이 될 사람입니다. 다윗이 왕이 될 충분한 자격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시기하고, 다윗을 죽이려고 위기의 상황을 만들고 있는 것은...... 혹시 여러분, 이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다윗의 믿음을 키우셔서, 성숙한 사람으로 성장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절망의 순간에 다윗은 하나님을 찾습니다. ‘나의 힘 (9, 17절)’ ‘나의 성벽 (9, 16, 17절)’ ‘나의 사랑 (10, 17절)’ ‘나의 인도자 (10절)’ ‘나의 방패 (11절)’ ‘나의 피난처 (16절)’ 이것이 다윗이 하나님을 찾으면서 사용했던 말들입니다. 다윗이 믿었던 하나님은 막연한 하나님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그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나의 힘이시라 (You are my strength)”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선지자였던 이사야도 같은 고백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며, 온 세계를 창조하신 분이다. 하나님은 지치지도 않으시고 피곤해 하지도 않으신다. 아무도 주의 크신 지혜를 알지 못한다. 하나님은 지친 사람에게 힘을 주시며, 약한 사람에게 능력을 넘치도록 주신다. 아이라도 지치고 피곤해 하며, 젊은이라도 넘어지고 쓰러지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새 힘을 얻으며, 독수리가 하늘 높이 솟아오르듯 올라갈 수 있다. 그러한 사람은 뛰어도 지치지 않으며, 걸어도 피곤하지 않을 것이다.” (이사야 40:28-31) “But those who trust in the Lord will find new strength. They will soar high on wings like eagles. They will run and not grow weary. They will walk and not faint.” (New Living Translation)
중요한 것은 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미국 사람들이 사용하는 화폐에 작은 글씨로 “In God we trust”라고 쓰여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돈을 의지하고, 돈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문구가 쓰여진 돈을 사용하면서도 하나님을 모릅니다. 돈이 무엇인지는 잘 알지만, 그 돈에 쓰여진 하나님은 누구인지 잘 모릅니다. 잘 모르는 사람을 신뢰할 수 없습니다. 잘 모르는 사람을 의지할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은 신입생 여러분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이 사람이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는 ‘교제 (fellowship)’가 필요합니다. 자연스럽게 한 팀에 속하고, 자연스럽게 함께 찬양하고, 자연스럽게 성경공부를 하고, 자연스럽게 차를 마시고 대화하면서 서로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크리스천의 교제 (Christian fellowship)’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 (the fellowship with God)’도 하나님과의 소통을 통해서 생깁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고, 생각하고, 기도하면서 하나님과의 교제가 생깁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자산(資産)’입니다. 영어로, ‘assets’라고 하지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늘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 힘 (new strength)’을 얻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피곤하지 않고, 지치지 않고, 쓰러지지 않습니다. “They will soar high on wings like eagles (그들은 독수리처럼 높이 날개 치며 올라갑니다).” 우리 중에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어야, 하나님을 알아야,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어야 ‘새 힘’을 얻습니다.
둘째로, 다윗은 하나님은 “나의 사랑이시라”고 고백합니다. 우리 말 성경에서는 그냥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했지만, 영어 성경에는 “In his unfailing love, my God will stand with me (11절)”이라고 했습니다. 직역하면,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 속에서 하나님은 늘 내 옆에 계십니다” 이런 뜻이지요? 또 17절에는 “for you, the God who shows me unfailing love (왜냐하면 당신은 나에게 변함없는 사람을 보여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없는 사랑 (unfailing love)’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failing love’입니다. 꾸준하지 못합니다. 늘 부족한 사랑입니다. 충분하지 못한 사랑입니다. 결핍이 많은 사랑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unfailing love’입니다. 모자라지 않는 사랑입니다. 늘 차고 넘치는 사랑입니다. 중단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변함이 없는 사랑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unfailing love’라는 말씀이 우리에게 큰 위로와 소망을 줍니다. 좋지 않습니까? 마음이 놓이지 않습니까? 힘이 나지 않습니까? “In his unfailing love, my God will stand with me!” 하나님은 그 변함없는 사랑으로 늘 내 옆에 계실 것입니다.
다윗이 이 고백을 한 것은 모든 일이 잘 되는 승승장구할 때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인생이 순풍에 돛을 달고 달리던 때가 아니었습니다. 절망의 때였습니다. 언제 집 밖에 있던 칼과 창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대문을 열고 집으로 들이닥칠지 알 수 없는 위기의 때였습니다. 이 때 다윗은 “하나님은 나의 힘이시다!” “하나님은 내 옆에 계신다!” 이렇게 고백한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타주에서 보스턴으로 공부하러 온 학생들, 한국에서 보스턴으로 유학을 온 학생들, “나는 왜 지금 이 자리에 있는가?” “나는 왜 집을 떠나고, 부모를 떠나서 이 낯선 도시에 와 있는가?” 한번 생각해 보세요. 간단하게 생각하면 여러분은 이곳에 공부하러 왔습니다. 맞습니다. 간단하게 생각하면, 여러분은 여기 좋은 학교에서 학문의 길을 가기 위해서 왔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그 이유 뿐이겠습니까? 좀 더 넓게 하나님의 시각으로 왜 내가 이곳에 와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힘든 광야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한 것처럼, 내가 이곳에 온 이유도 하나님께서 나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시키시려고 하는 계획이 있는 것 아닐까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이 외로운 도시에 내가 이렇게 와 있는 이유는, 이제 모든 것을 내 스스로 결정해야 하고, 내 스스로 판단해야 하고, 나보다 훨씬 더 똑똑한 사람들 틈에서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나를 이런 환경 속으로 인도하신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께서 나를 이 외롭고 절망적인 환경 속으로 나를 몰아넣으신 것이 아닐까요? 이 환경 속에서 하나님을 찾고, 이 환경 속에서 하나님을 배우고, 이 환경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게 하시고, 마침내는 나를 성숙한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시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으신 것 아닐까요?
32년 전에 저를 이곳 보스턴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은 다윗의 하나님과 동일한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변함없는 사랑’으로 지난 32년 동안 저와 함께 하셨습니다. 그 세월 속에 어렵고, 힘든 시간들도 있었고, 좌절의 시간도 있었고, 외로운 시간도 있었지만, 하나님은 이 어려운 시간들을 이기게 하시고, 지금 이 자리까지 저를 인도하셨습니다. 캘리포니아의 클레아몬트를 떠나 보스턴으로 나를 인도하신 하나님은, 저의 꿈과 희망을 내려 놓게 하시고, 대신 하나님의 꿈을 붙잡게 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을 저는 분명히 느낄 수 있습니다. 이 동일하신 하나님과 함께 보스턴의 생활을 시작하십시오.
9/2/2018 | 삶이 힘들고 버거울 때 1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The Lord Is Here Among Us.
시편 46:1-11
8/26/2018 | 야고보서 강해설교 5
산 믿음이냐, 죽은 믿음이냐? A Living Faith Versus A Dead Faith
야고보서 2:14-26
오늘 성경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아주 도전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누가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이 그를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14절) “어리석은 여러분, 행함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아무 쓸모 없다는 것을 모르시겠습니까?” (20절)
야고보는 계속해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예로 들면서 행동하는 믿음이 어떤 것인지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친구 (the friend of God)’로 불릴 만큼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가졌던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도대체 어떤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들이 없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네가 아들을 낳게 된다”고 약속하셨고, 아브라함은 그 약속 대로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의 나이가 100세였습니다. 아내 사라는 90세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은 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믿는 그의 믿음을 증명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머리 속에서만 맴도는 이론적인 믿음이 아니라, 행동으로 나타나는 믿음이었다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다시 ‘라합 (Rahab)’을 예로 듭니다. ‘라합’은 여리고 성에 살고 있던 기생 (the prostitute)이었습니다. 이스라엘과 적대관계에 있었던 이방인 여자입니다. 사람들에게 술도 팔고, 여관처럼 숙소도 제공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리고성을 정탐하던 이스라엘의 스파이들이 쫓기다가 ‘라합’의 여관으로 숨습니다. 이 때, ‘라합’은 그 이스라엘의 스파이들을 숨겨 주고 거짓말로 추격하는 군인들을 따돌리고 스파이들을 안전하게 보호해 줍니다. 야고보는 그 때 ‘라합’의 했던 행동을 높이 평가하면서 “라합은 그 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25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이 말씀만 읽는 사람들은 이 말씀이 잘 이해가 되지 않을 지 모르겠습니다. ‘라합’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을 거쳐 여리고 성으로 들어오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소문을 듣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야 말로 참 하나님이시다 (여호수아 2:11)”고 고백합니다. 비록 소문을 듣고 하나님을 믿은 원시적인 믿음이었지만, ‘라합’은 자기의 믿음이 진실하다는 것을 이스라엘의 스파이들을 숨겨주는 행동으로 증명했습니다.
야고보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행동으로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으며 믿음만으로는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믿음도 행함이 없으면 죽은 것입니다.” (24, 26절)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We are shown to be right with God by what we do, not by faith alone. Just as the body is dead without breath①, so also faith is dead without good works.” / ①Or without spirit 이 말씀을 직역하면 이런 뜻입니다. “오직 우리의 믿음으로만 아니라, 우리가 하는 그 일로 우리가 하나님께 올바르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숨이 끊어지면 그 사람이 죽은 것처럼, 우리의 믿음도 선한 일을 하지 않는다면 죽은 믿음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교회생활을 하면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배웠습니다. 우리의 선한 행동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고 배웠습니다. 이 말씀이 틀린 말씀은 아닙니다만, 이렇게 배우다 보니, 크리스천들이 이 세상에 나가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세상에 대한 크리스천의 책임에 대하여 쉽게 간과하게 됩니다. 그러면 오늘 야고보서의 말씀은 지금까지 우리가 배웠던 말씀과 반대되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까? 그 말씀이 아니지 않나요? 야고보는 우리의 믿음이 필요 없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We are shown to be right with God by what we do, not by faith alone.” “오직 믿음으로만이 아니라 우리가 하는 일로 하나님으로부터 올바르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런 뜻이잖아요? 마태복음 4:4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이 사는 것은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입니다 (People do not live by bread alone, but by every word that comes from the mouth of God)." 이 말씀이 사람이 사는데 하나님의 말씀만 있으면 되고 빵은 필요 없다는 말씀입니까? 아니잖아요? 우리가 살아가는데 빵도 필요하다는 뜻이잖아요? 그렇지만 빵만 있으면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꼭 있어야 한다는 뜻이잖아요?
야고보는 여기서 우리가 흔히 저지르는 오류가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자매 된 사람이 옷이나 먹을 것이 필요할 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기를! 몸을 따뜻하게 하고 먹을 것을 좀 많이 드십시오’라고 말하고,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주지 않는다면, 그런 말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15-16절) 야고보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자매된 사람 (a brother or sister in Christ, 15절)’이라고 했습니다. 야고보는 ‘디아스포라 크리스천 공동체 안에서 헐벗고 굶주린 형제 자매들’을 생각하면서 이 편지를 썼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이 말씀을 읽는 우리는 반드시 크리스천 형제나 자매가 아니더라도, 우리 주변에 있는 헐벗고 굶주린 사람을 생각하면서 이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을 보면서 “왜 이렇게 하고 계십니까? 이러다 감기 드십니다. 몸을 따뜻하게 하시고, 끼니를 거르지 말고 잘 챙겨 드셔야 합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아무 것도 도와주지 않는다면, 이런 사람이 크리스천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2,000년 전에 ‘디아스포라 크리스천 공동체’ 안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오늘 우리가 속한 공동체 안에서, 또 우리 주변에서, 우리가 이런 똑 같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눈에 경제적으로 힘들 사람들, 무슨 문제로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다 잘 살고 아무 문제가 없는 사람들로 보입니다. 이제 곧 우리교회에서 장학헌금을 할 것입니다. 매년 장학헌금을 했습니다. 주변에 경제적으로 힘든 사람들을 위로하는 일을 해 왔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우리 교회에 있는 사람들 다 잘 살아요.” 그런데 그렇지 않거든요? 생활비를 아껴서 아껴서 써야 하고, 그래도 생활비가 모자라고, 학비를 내지 못해서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는 친구들이 많습니다. 우리교회 임원들이나 팀장들, 간사님들은 우리 공동체 안에서 이렇게 힘들 사람들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제가 한국에 갔을 때 어떤 사람이 저에게 봉투를 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제 아내가 꼭 이 자리에 와야 하는데 올 수 없는 사정이었습니다. 제 아내가 목사님께 전해 드리라고 준 것입니다. 제 아내가 보스턴에 있을 때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는데, 교회에서 3회에 걸쳐 장학금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제 받았던 장학금을 다른 사람들에게 줬으면 좋겠습니다.” 그 봉투 안에 3,000불이 들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믿음은 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행동으로 우리 믿음을 증명해야 합니다. 말로만 “난 하나님을 믿어!” 이렇게 말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진실한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보십시오. 제사장도, 레위인도, 강도를 만나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는 사람을 도와주지 않습니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완전히 헌신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의 믿음은 행동으로 증명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과연 그들의 믿음이 얼마나 참된 믿음이고 진실한 믿음인지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반대로,
사마리아인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들이 정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인지, 우상을 믿는 사람들인지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의 믿음을 의심했습니다. 하지만 보십시오. 부상당한 사람 옆을 지나가던 사마리아인은 그의 상처에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붕대로 감싸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그를 정성껏 보살펴 주었습니다. 이 사마리아인은 자기의 믿음을 행동으로 증명해 보였습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Faith produces good works, but good works do not produce faith (믿음은 선한 일을 생산하지만, 선한 일은 믿음을 생산하지는 않는다).” 누가 이 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믿음’과 ‘선한 일’과의 관계를 잘 정리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참된 믿음은 반드시 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행동으로 그 믿음이 참된 믿음이라는 것을 증명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Thus, by their fruit you will recognize them).” (마태복음 7:20) 여기서 ‘fruit (열매)’ 믿음이 생산하는 ‘선한 일’ ‘선한 행동’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열매를 보고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그 사람이 어떤 믿음을 가진 사람인지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산 사람은 움직입니다. 살아 있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열매를 맺지만, 죽은 믿음을 가진 사람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끝으로, 한 사람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저는 이 사람에게서 산 믿음의 예를 발견했습니다. 전영창 (1917-1976) 선생이십니다. 우리는 이 분을 그냥 특별한 정신을 가진 교육가로만 알고 있습니다. 기껏해야 ‘직업선택의 10계’로 유명한 분이라는 것 정도입니다. 제가 이 분에 대하여 조금 더 조사를 해 보았더니, 이 분은 정말 훌륭한 그 시대의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이 분이 1947년에 미국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로 유학을 갔는데, 우리나라 해외 유학생 1호이시더라고요.
이 분에 대해서 좀 더 이야기를 하자면, 신사참배에 대한 강요가 있었을 때, 이를 끝까지 반대한 전영창 청년을 눈여겨 본 사람이 있었습니다. 신흥고등보통학교 교장 윌리엄 린턴 (William Linton, 1891-1960)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린턴은 전영창이 졸업하자 마자 그를 일본의 고베신학교로 유학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전영창은 일본에서도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하다가 잡혀서 후꾸오까 감옥에 수감되고 투옥 1년 만에 5년간 집행유예를 받고 풀려났습니다. 전영창은 일본에서 우찌무라 간조 (內村鑑三, 1861-1930)의 저서들을 탐독하면서 “조국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 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 일에 자신의 삶을 드리기로 결심합니다. 우찌무라 간조의 책을 읽으면서 신학을 제대로 공부하기 위해서는 미국으로 가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그 때부터 영어공부에 전심전력을 기울입니다.
그러다가 1945년 해방을 맞이합니다. 전영창은 미군 통역관 모집에 응시하여 합격한 후, 미 24군단 군목인 브라운 소령의 통역관으로 일하면서 필라델피아에 있는 웨스트민스트 신학교에 유학을 하고 싶다는 소원을 말하자, 마침 웨스트민스트 신학교를 졸업하고 미 군목으로 와 있었던 사람이 이 이야기를 듣고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편지를 써 주었고, 장학금까지 받게 해 주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여, 전영창은 1947년 4월 한국인 최초로 웨스트민스트 신학교로 유학을 갑니다. 그리고, 2년 뒤에는 미시간에 있는 웨스턴 신학교로 옮겨와 공부를 계속 하던 중, 1950년 한국에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전영창은 귀국을 서두릅니다. 그 때 학교 교수들과 학교 친구들은 전영창의 귀국을 극구 만류했다고 합니다. 귀국하더라도 졸업이라도 하고 가라고 만류했지만, 전영창은 듣지 않았다고 합니다. 학교에서는 귀국하는 전영창을 위해 졸업식을 2개월 앞당겨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교수들과 친구들이 5,000불을 헌금해 주었다고 합니다. 이 돈이 후에 부산 복음병원을 짓는데 기초 자금 (seed money)이 됩니다.
1951년 1월 9일 전영창은 미군 수송기를 타고 부산 수영 비행장을 통해서 귀국합니다. 귀국한 전영창은 무슨 일을 어떻게 시작할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부산 부둣가에서 병든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한 피난민 어머니를 목격합니다. 그 때 그 어머니를 향한 긍휼의 마음이 전영창으로 하여금 병원을 지어서 피난민들을 치료해 줘야 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합니다. 이것이 부산 복음병원의 시초입니다. 그 때 전영창의 나이 34살 때였습니다.
그 후 그는 결코 평탄하지 않은 생을 살아가다가 한 유명한 대학교의 부총장으로 오라는 청을 거절하고, 1956년에 거창에 있는 폐교 직전의 한 실업학교를 인수하여 교육가로서의 삶을 살기 시작합니다. 그 때가 전영창의 나이 39살 때였습니다. 지금은 그 학교가 명문 대안학교로 성장했습니다.
전영창 선생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조국에 대한 사랑으로 표현했습니다. 전영창 선생의 믿음은 부산 복음병원을 만들어 수많은 환자들을 치료했고, 거창고등학교를 만들어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세상을 섬기는 한국 교육의 대안으로 떠 올랐습니다. 그는 자신의 믿음을 행동으로 증명했습니다. 전영창 선생의 아들 전성은씨가 한동안 거창고등학교의 교장으로 있었는데, 그 때 대통령에 당선된 노무현 대통령이 전성은씨에게 “당연히 교육부 장관 자리를 드려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해 죄송하다” 하는 말을 전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우리는 야고보서에 많은 빚을 지고 있습니다. 만일 야고보서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참된 믿음이 어떤 것인지 잘 몰랐을 것입니다. 야고보서 말씀이 있기에 우리는 진실한 믿음과 거짓 믿음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산 믿음과 죽은 믿음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의 거울에 우리 자신들의 모습을 비쳐 보고,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합니다. “과연 우리는 산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죽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이 질문에 우리는 어떤 대답을 해야 합니까? 불행하게도 죽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 믿음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