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2019 | 새해엔 이렇게 믿자 4

하나님의 호의를 얻는 삶을 살자 2 Live Our Lives In Favor With God

로마서 12:1-2

하나님은 하나님을 올바로 예배하는 예배자, ‘the true worshiper’에게 호의를 가지고 계십니다. 이 사실은 하나님은 ‘참된 예배자’를 찾고 계신다고 하는 성경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4:23). 이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the true wor-shiper (참된 예배자)’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내가 드리는 예배가 ‘참된 예배 (the true worship)’인지 아니면, 습관적으로, 형식적으로 드리는 예배인지 반성해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읽은 로마서 12장 말씀에 ‘영적예배 (a spiritual worship)’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런데, 로마서에 나오는 이 말은 바울이 독창적으로 만든 말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그대로 인용한 말입니다. 그 말씀이 요한복음 4장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하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올 것인데, 지금이 바로 그 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만 합니다.” (요한복음 4:23-24)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But the time is coming - indeed it's here now - when true worshipers will worship the Father in spirit and in truth. The Father is looking for those who will worship him that way. For God is Spirit, so those who worship him must worship in spirit and in truth (그 때가 오고 있습니다, 아니 벌써 참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로 하나님 아버지를 예배하게 될 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참된 예배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합니다)."

오늘 저는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말씀과 로마서 12장에 나오는 말씀을 가지고 과연 ‘영적 예배’란 어떤 예배인가 하는 것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영적예배 (a spiritual worship)’를 ‘the true worship (참된 예배)’라고도 할 수 있고, ‘a worship in spirit and in truth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 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과연 우리가 드려야 하는 ‘영적 예배’란 어떤 예배일까요? 저는 ‘영적예배’에 없어서는 안 될 4가지 중요한 점들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첫째로, ‘영적예배’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요한복음 4장 말씀이 ‘영적예배’에 대한 중요한 말씀이라고 말하면서도 정작 놓치고 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사마리아 사람인 당신네들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나, 우리 유대인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예배합니다. 그것은 구원이 유대인들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22절) 그러면서 예수님은 참된 예배자들이 ‘아버지 (the Father)’께 예배드릴 때가 오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the Father)’는 참된 예배자들을 찾고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배의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예수님 전에는 아무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처음입니다. 하나님과 얼굴을 대면하고 이야기를 했다는 모세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심지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 (Abba, Father, 마가복음 14:36)’라고 부르셨습니다. ‘아바 (Abba)’는 아람어로 ‘아빠 (dad)’라는 뜻입니다. 

참된 예배자는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 (a personal relationship)’을 맺고 있는 사람입니다. 참된 예배자들은 하나님을 단순히 지식적으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버지를 아빠라고 부를 때 가지는 감정과 같은 감정을 갖고 하나님을 부른다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사랑과 신뢰의 감정, 그리고 의존(依存)의 감정을 가지고 하나님을 부르는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에 놓여있지 않은 사람은 ‘영적인 예배’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제부터 예배를 잘 드려야지” 하고 마음을 먹어도 하나님이 누구인지 모르면 ‘영적인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듯이 나도 아버지를 안다 (요한복음 10:15)”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이렇게 인격적으로 알아야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참된 예배자들이 될 수 있습니다. 찰스 스펄전 (Charles H. Spurgeon, 1834-1892, 영국)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True Christian worship addresses God, not merely as Creator and Preserver, or as the great Lord of the Universe, but as one who is very near of kin to us, our Father, beloved of our souls (참된 크리스천의 예배에서는 하나님이라는 말을 단순히 창조주, 보호자 혹은 우주의 주재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매우 가까운 분, 우리의 영혼의 사랑을 받는 아버지라고 부를 때 사용합니다).”

둘째로, ‘영적인 예배’는 예배 드리는 독특한 방식이 있습니다. 곧 ‘영과 진리로 (in spirit and in truth)’ 예배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이유를 하나님은 ‘영 (Spirit)’이시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 대한 엄청난 지식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방식은 ‘in spirit and in truth’ 외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을 모아서 금 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금 송아지를 경배하면서 이것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모세는 들고 있던 십계명 돌 판을 던져서 금송아지를 깨뜨려버립니다. 이 사건으로 3,000이 광야에서 죽습니다. 성경에는 “여호와께서 백성들에게 이런 끔찍한 일이 일어나게 하신 것은 그들이 아론이 만든 송아지로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32:35)”라고 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3,000명이 죽은 것도 큰 일이지만, 이보다 더 큰 일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더 이상 동행(同行)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는 너희들과 같이 가지 않을 테니, 너희끼리 가라는 것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잘못 알고 금송아지를 만들었던 일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린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영적인 예배’의 핵심은 영이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이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방식이 정해져 있습니다. ‘영과 진리 (in spirit and in truth)’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쉬운 말로 ‘진정으로’이렇게 해석해 보았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진정으로’ 혹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말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Charles Spurgeon은 ‘영으로’라는 말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To worship God spiritually, a man must give up his sins, must overcome his pride and lust, and his evil concupiscence must be cast out of him (하나님을 영적으로 예배하기 위해서 우리는 죄를 포기해야 하고 교만과 욕망을 이겨야만 하고, 성에 대한 욕망을 내쫓아야만 합니다).” “True worship lies in your heart paying reverence to him, your soul obeying him, and your inner nature coming into conformity to his own nature, by the work of his Spirit in your soul (참된 예배란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존경을 드리고, 당신의 영혼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당신의 내면의 본성이 하나님의 본성을 닮아가는 당신의 마음 속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예배자는 성령의 도움을 받아서 자신을 성찰해야 합니다. 자신을 돌아보고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이신 하나님을 기뻐하고 찬양하는 진실된 예배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제물을 드리려고 하다가, 네 형제나 자매가 네게 어떤 원한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나거든, 너는 그 제물을 제단 앞에 놓아두고, 먼저 가서 네 형제나 자매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제물을 드려라 (마태복음 5:23-24)”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셋째로, ‘영적인 예배’란 우리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입니다. 여기서 ‘몸’을 드린다고 하는 것은 네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산 제물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Expanded Bible에서는 이 말씀을 “I beg you to offer your lives as a living sacrifice to him (내가 권합니다. 당신의 삶을 산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십시오)”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유대교의 제사 방식은 짐승을 나의 죄를 용서받기 위한 ‘대속물(代贖物, ransom)’로 드리는 것입니다. 엄밀하게 생각해 보면, 그 짐승의 목숨이 어떻게 나의 죄를 대신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오래 전부터 예배가 형식적으로 되었을 때 예언자들을 통하여 경고하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천 마리 양을 기뻐하실까? 강줄기 만 개를 채울 만한 기름을 기뻐하실까?” (미가 6:7) “이 사람아, 하나님께서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 (미가 6:8)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바울은, 이제는 짐승이 아니라 예배자 자신이 제물이 되라고 한 것입니다. 나의 생명, 나의 의지, 나의 생각까지 모두 하나님께 드리라는 (굴복시키자)는 것입니다. 그래야 예배자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living sacrifice (산 제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예배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가 된다는 것입니다.

시편 103편은 다윗이 쓴 시편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Let all that I am praise the Lord; with my whole heart, I will praise his holy name (나의 모든 것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전심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찬양합니다).” (1절) 이 말씀이 NIV 성경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Praise the LORD, O my soul; all my inmost being, praise his holy name (오, 나의 영혼아, 하나님을 찬양하라. 나의 모든 속에 있는 것들아, 그의 거룩하신 이름을 찬양하라).” 이 말씀을 읽을 때 “네 모든 마음과 (with all your heart) 모든 목숨과 모든 정성을 다해서, 네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마태복음 22:37)”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사랑하고, 하나님은 이렇게 예배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영적 예배’는 예배와 삶이 일치(一致)되는 예배입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로마서 12:2) 저는 이 말씀을 예배자의 삶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 전심으로, 진실된 마음으로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은 이 세상에 들어가서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기시는 것은 어떤 것인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온전하게 여기시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을 알아서 자신의 삶의 영역에서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 예배자의 삶입니다.

끝으로, 예배에 대하여 말씀드릴 때마다 늘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성 크리소스톰 (St. John Chrysostom, 349-407)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한번은 크리소스톰이 자기 교구 내에 있는 동 떨어진 곳을 방문했습니다, 그곳은 워낙 외진 곳인 데다가 오랫동안 예배를 인도할 사제가 없어 여러가지로 어려움이 많은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곳에 살고 있는 한 농부를 최선을 다해 교육시킨 다음 사제로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는 콘스탄티노플에 돌아온 뒤로 마음이 불안했습니다. “내가 자격도 없는 사람을 잘못 사제의 자리에 앉힌 것이 아닌가?” 그래서 그는 다시 그곳에 가서 몰래 예배 시간에 참석해 보기로 했습니다. 그는 기둥 뒤에 숨어 이 농부 사제가 어떻게 자기 책임을 다하는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는 동안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습니다. 그는 그토록 간절한 기도를 드리는 사제를 이제껏 본 적이 없었습니다. 짧은 설교를 하는 동안 그의 얼굴은 열광적으로 빛났고, 그의 한마디 한마디가 신도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예배가 끝나자 성 크리소스톰은 제단 앞으로 나아가 농부 사제에게 축복을 해 달라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농부 사제는 무릎 꿇고 있는 사람이 바로 주교인 것을 알아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주교님께서 저를 축복해 주셔야 할 텐데, 어찌 저에게 축복해 달라고 하십니까?” 주교가 말했습니다. “나를 축복해 주시오. 나는 당신처럼 그렇게 뜨거운 불과 사랑을 가슴에 안고 예배 드리는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자 그 무식한 농부 사제는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주교님, 다른 식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도 있다는 말씀인가요?”


1/20/2019 | 새해에는 이렇게 믿자 3

하나님의 호의를 얻는 삶을 살자 1 Live Our Lives In Favor With God

마가복음 7:31-37

오늘 설교 제목은 “하나님의 호의를 얻는 삶을 살자!”입니다. ‘호의(好意)’라는 말은 성경에서 ‘은혜’라는 말고 같은 뜻으로 사용됩니다. 우리에게 두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누가 하나님의 호의를 얻는 살았는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호의를 얻는 삶을 살 수 있는가?”
 
성경을 찾아보니, 노아 (Noah)라는 사람이 제일 먼저 하나님의 호의를 얻은 사람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창세기 6:8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But Noah found favor with the LORD).” ‘그러나 (but)’이라는 말은 앞에 나오는 말을 뒤 엎을 때 사용하는 접속사 아닙니까? 노아가 살던 시대는 죄가 관영(貫盈)한 시대였습니다. “The LORD observed the extent of human wickedness on the earth, and he saw that everything they thought or imagined was consistently and totally evil (하나님께서 인간의 악의 범위를 보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생각하고 상상하는 모든 것이 지속적으로, 완전히 악한 것뿐이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노아라는 한 사람을 주목하셨습니다. 노아는 그 시대에 보기 드문 사람이었습니다. “노아는 의인이었고, 당대에 완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Noah was a righteous man, the only blameless person living on earth at the time, and he walked in close fellowship with God).” (창세기 6:9)
 
노아가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favor를 얻을 수 있었는지, 우리는 이 말씀에서 중요한 인사이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세상의 풍조가 어떻든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든든한 반석 (foundation) 위에 자기 믿음을 세우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노아가 의인이었다는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의인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속에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노아는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보고 살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인간의 삶을 유년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로 나누어 본다면, 청년기는 ‘foundational period’입니다. ‘formational period (형성기)’라고도 합니다. 이 때가 인생의 기초를 세우는 시기입니다. 한 사람의 인생의 기초가 잘 닦여 있는지 잘못 닦여 있는지는 보통 때는 잘 알 수가 없습니다. 어렵고 힘든 일을 만났을 때 그 사람이 어떻게 견디고 이겨내는 지를 보고 알 수 있습니다. 뉴욕 맨해튼 (Manhattan)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Empire State Building)’은 1930년 3월 17일에 공사를 시작해서 1931년 4월에 마쳤습니다. 1929년에 미국에 대공황이 시작되었잖아요? 경제적으로 가장 힘들었을 때 세계에서 제일 높은 빌딩을 지어서 실의에 빠진 미국인들의 자존심을 살려준 미국의 상징과도 같은 건물입니다. 이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지어진 지 88년이 되었지만, 지금 봐도 반듯하고 참 아름답습니다. 맨해튼의 든든한 반석 위에 세워진 이 건물은 앞으로 백 년이 지나도 끄덕 없을 것입니다.
 
노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려고 믿음의 기초를 잘 닦았습니다. 그랬더니, 세상에 죄가 관영하여 모든 사람들이 죄를 짓고 하나님을 멀리 할 때도 노아는 그 시대의 풍조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노아가 하나님의 호의를 얻을 수 있는 비결이었습니다.
 
또 하나, 노아가 하나님의 호의를 얻을 수 있었던 비결은 그가 하나님과 소통(疏通)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소통은 두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통로(通路)와 같아서 소통이 끊어지면 두 사람 사이가 막힌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소통이 잘 되면, 하나님의 뜻을 분별(分別, discernment)할 수 있습니다. 노아는 그 시대에 하나님과의 소통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그 말씀이 성경에 나오는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했으며 (창세기 6:9)’라는 말씀의 뜻입니다.
 
또 한 사람 소개할 사람이 있습니다. 다윗이라는 사람입니다. 다윗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13:22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I have found David son of Jesse, a man after my own heart. He will do everything I want him to do).”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다윗을 마음에 꼭 드는 사람이라고 했는지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경에 보면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이런 말을 합니다. “주께서 저의 아버지 다윗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주님 앞에서 진실되고 공의로우며 정직한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You showed faithful love to your servant my father, David, because he was honest and true and faithful to you. And you have continued your faithful love to him today).” (열왕기상 3:6) 이 말씀에서 눈에 확 들어오는 말씀이 있습니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의 삶을 정직과 진실과 성실, 세가지로 요약했다는 사실입니다.
 
이 ‘진실과 공의와 정직’이라는 말을 신학적인 용어로 ‘헤세드’라고 합니다. ‘헤세드’는 한 마디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보면 됩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지를 알고 하나님께도 그렇게 대했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다윗을 향해 “이 사람은 나의 마음을 꼭 빼닮았다”고 말씀하시며 그에게 호의를 베푸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알고 그 마음을 닮아 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하나님과의 ‘소통’입니다. 하나님과의 소통의 채널이 열려 있지 않으면 그 누구도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시편 19편은 다윗이 쓴 시편인데요. 그 시편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생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는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내게는 순금보다 더 귀하고 송이 꿀보다 더 답니다..... 나의 반석이시며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May the words of my mouth and the meditation of my heart be pleasing to you, O LORD).”(시편 19:7-10, 14)
 
이 말씀이 눈 앞에 확 펼쳐지지 않습니까? 날마다 이른 새벽에 주님 앞에 무릎 꿇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합니다.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어떤 때는 그 말씀이 율법으로, 어떤 때는 확실한 증거로, 어떤 때는 교훈으로, 어떤 때는 계명으로, 어떤 때는 도(道)로, 어떤 때는 법도로 마음에 다가옵니다. 그 말씀 한 말씀 한 말씀이 그렇게 귀하고, 입에 달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의 마음에 생각하는 것들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들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니, 그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가지 않겠습니까?
 
이제 오늘 읽은 마가복음 본문 말씀을 보실까요? “다시 예수님께서는 두로 지방을 떠나, 시돈을 거쳐, 데가볼리 지방에 있는 갈릴리 호수로 가셨습니다 (31절)”라고 했습니다. ‘다시 (again)’이라는 말은 그런 일들이 반복해서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두로와 시돈은 지중해 연안에 있는 페니시안들 (Phoenicians)이 살고 있는 지역입니다. 이스라엘의 갈릴리 호수에서 북서쪽에 있는 해안 지역입니다. 성경에는 ‘베니게 (사도행전 11:19)’라고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이곳에서 자주 복음을 전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페니시안들이 살고 있는 두로 (Tyre)와 시돈 (Sidon)을 떠나 ‘데가볼리(Decapolis)’ 로 가셨습니다. ‘데가볼리’는 ‘열개의 도시’라는 뜻으로 갈릴리 호수 남쪽에 붙어 있는 지역이니까 예수님께서 북쪽에서 남쪽으로 상당히 먼 거리를 걸으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데가볼리에 예수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듣지 못하고, 말도 못하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그 사람을 고쳐 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32절). 예수님은 손가락을 그 사람의 귀에 넣으신 뒤에, 손에 침을 뱉어 그의 혀를 만지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에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의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에바다 (Ephphatha)”는 열리라는 뜻을 가진 아람어 (Aramaic)입니다. 다른 말들은 모두 헬라어로 번역해서 기록했지만, 몇 몇 말들, 예를 들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마태복음 27:46)” 같은 말들은 아람어입니다. 아람어는 예수님 시대에 시리아,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사용했던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목해서 봐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듣지 못하고, 말도 못하는 사람을 고치신 것을 목격한 사람들의 보인 반응입니다. 그 말씀이 37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들은 정말로 놀라워하며” “They were completely amazed.” (NLT) “People were overwhelmed with amazement.” (NIV) “And they were astonished beyond measure.” (NKJV) 그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예수님께서 하시는 것은 모두 훌륭하다!” “Everything he does is wonderful!” 듣지 못하고, 말을 못하는 이 사람을 고쳐 주신 일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들이 훌륭하다는 반응을 보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 중에 비난받을 일들, 흠 잡힐 일들, 남들의 구설수에 오를 일들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니까” 이렇게 말하면 그만입니까? 저는 예수님께 이런 일이 가능했던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끊임없이 하나님과 소통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소통했기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유혹을 받습니다. 유혹을 받는 것은 누구에게나 있는 일인데, 유혹에 넘어가는 사람이 있고, 유혹을 이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유혹을 이기신 분입니다. 한번은 흥분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에워싸고 우리의 왕이 되어 달라고 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사람들의 요구가 점점 더 거세집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그렇다고 하잖아요? 지지자들의 요구를 뿌리지지 못하는 사람들이 정치인들입니다. 한번 정치에 발을 들여 놓은 사람은 지지자들의 환호소리를 외면하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와서 자기를 강제로 데려다가 그들의 왕으로 세우려 한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다시 그 곳을 떠나 혼자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요한복음 6:15) “혼자 산으로 가셨다”는 성경의 표현은 “한적한 곳으로 가셨다 (마가복음 1:35, 누가복음 4:42, 5:16)”는 표현과 같은 표현으로 “예수님께서 그곳에 가서 기도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으로 하여금 끝까지 한 길을 하게 한 것은 하나님과의 소통의 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소통하심으로 자신의 생각과 사역의 방향을 바로잡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소통함으로 시대의 풍조를 따르지 않고 믿음을 지켰던 노아가 하나님의 호의를 받은 것처럼, 다윗이 하나님과 소통함으로써 하나님의 마음을 닮을 수 있었고, 하나님의 호의를 얻을 수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도 하나님과 소통함으로써 하나님의 호의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기뻐하는 자이다.” (마태복음 3:17, 마태복음 17:5)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의 호의가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삶이 힘들고 버겁습니다. 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호의 (favor)를 얻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누구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이 참 어려운 일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인간의 도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길이 나와 있습니다. 시편 118:8-9에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나으며,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고관들을 신뢰하는 것보다 낫도다”라고 했습니다. 문제는 지금 나와 하나님과의 소통의 채널이 열려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꾸준하게 기도로 하나님과 소통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여러분 중에 꾸준하게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과 소통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호의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와 소통의 채널이 열려 있는 사람에게 호의를 베푸십니다.

1/13/2019 | 새해에는 이렇게 믿자 2

하나님의 관점을 이해하자 Kowing God's Point Of View

마가복음 8:31-33

오늘 말씀의 요절(要節)은 33절입니다. “사탄아, 내 뒤로 썩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들의 일을 생각하는구나.” 이 말씀을 New Living Translation 성경이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Get away from me, Satan! You are seeing things merely from a human point of view, not from God's (사탄아 썩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지 않고 단순히 사람의 관점에서만 보는구나).”

‘인간적인 관점 (a human point of view)’이란 보통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관점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 베드로가 ‘인간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지금 자기 앞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관점’을 이해했더라면 그 같은 행동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관점 (God’s Point of View)’은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갖게 되는 관점으로, '성경의 관점 (a point of the Bible)이라고도 합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예수님을 삼 년 동안 따라다니면서 배웠습니다. 말씀도 들었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들을 옆에서 지켜보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도 제자들은 딴 생각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매우 긴장된 얼굴로 아무 말씀도 없이 제자들보다 앞서서 가셨습니다 (누가복음 9:51) 마가는 그의 복음서에 그 때 뒤따라 가던 제자들은 놀랍고 두려울 정도였다고 그의 복음서에 기록했습니다 (마가복음 10:32). 이런 상황에서도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가면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앉게 되느냐 하는 문제를 가지고 논쟁을 벌였습니다.

이런 제자들의 기대와 달리 예수님은 내가 예루살렘에 가면 장로들과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의 손에 죽을 것이라고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예수님을 꾸짖듯이 이렇게 말합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As he talked about this openly with his disciples, Peter took him aside and began to reprimand him for saying such things①.” / ①Or began to correct him  ‘reprimand’라는 말은 우리 말로 ‘견책하다’ ‘꾸짖다’라는 뜻입니다. 영어 사전에는 이 말에 ‘to reprove or rebuke severely, especially in a formal way (공식적으로 심하게 꾸짖다)’라는 뜻이 있다고 나와 있습니다.

사람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누구나 자기 목숨 아까운 줄 압니다. 이럴 때 사랑하는 제자가 앞을 가로 막습니다. 만일 그 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관점을 이해하지 못했더라면 “야, 베드로, 역시 너만은 나의 마음을 알아주는구나! 고맙다, 네가 그런 말을 해 줘서..... 그렇지? 꼭 십자가를 지지 않아도 다른 방법이 있겠지?”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본다면 십자가는 피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반드시 져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았던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지 말라는 제자의 만류를 사탄의 유혹으로 간주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 그 어떤 사람도 세상의 관점으로 알지 않겠습니다. 전에는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세상의 관점’으로 알았으나,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 (So we have stopped evaluating others from a human point of view. At one time we thought of Christ merely from a human point of view. How differently we know him now)!” (고린도후서 5:16)

그리스도를 ‘세상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사울 (바울)의 행동에 틀린 것이 없었습니다. ‘세상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예수님께 그럴듯한 스펙 (specification)이 하나도 없습니다. 제일 먼저 예수님이 어느 학교를 나왔습니까? 또 그 집안 (부모)은 어떤 집안입니까? 그가 남긴 업적이 무엇입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책 한 권도 제대로 쓰신 것이 없습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쓰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죽은 지 30-40년이 흐른 후에 그의 제자들이 쓴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향은 어디입니까? 변두리 갈릴리 나사렛입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사람이 갈릴리 부랑배들을 끌고 다니면서 율법의 규정에 어긋난 말과 행동을 하고 사람들을 선동하고 다닙니다. 사울 (바울)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체포하고, 교회를 핍박하는 일에 총대를 메기를 자청합니다. “사울은 교회를 없애 버리려고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남자든 여자든 닥치는 대로 끌어 내어 감옥에 넣었습니다.” (사도행전 8:3)

이런 사람이, 관점이 바뀌니까 어떻게 달라지는지 보십시오. “사실 육체적으로 보면 나 스스로를 믿을 수도 있습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인간적인 조건을 더욱 많이 갖춘 사람이 바로 나입니다...... 모세의 율법은 내 인생의 안내자 역할을 하여, 나는 율법을 가장 엄격히 지키는 바리새인이 되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에 너무나 열심이었으므로 교회를 핍박하기까지 하였습니다.....그 때는 이 모든 것이 내게 너무나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그 모든 것이 아무 쓸모 없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빌립보서 3:4-8) “I was so zealous that I harshly persecuted the church. And as for righteousness, I obeyed the law without fault. I once thought these things were valuable, but now I consider them worthless because of what Christ has done. Yes, everything else is worthless when compared with the infinite value of knowing Christ Jesus my Lord.”

관점이 바뀌니까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박해자 (persecutor)였던 사람이 그리스도를 옹호하는 사람 (apologist)이 됩니다. 예루살렘의 사도들도 사울의 변화를 믿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사울 (바울)을 배신자로 낙인을 찍고 그가 가는 곳마다 따라가서 핍박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참 재미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시대에 사울 말고도 다른 사람들도 쓸 만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을 텐데, 하나님은 드라마틱하게도 사울 같은 사람을 이방 세계에 복음을 전파하는 도구 (instrument)로 사용하셨습니다 (사도행전 9:15). 여러분이 좋아하는 시편 중에 42편이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1절) 시편은 시(時)이면서 동시에 노래입니다. 이 노래를 쓴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고라의 자손들 (the descendants of Korah)입니다. 고라는 광야생활 중에 모세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땅이 갈라져 빠져 죽은 사람입니다. 그 때 하나님은 고라의 자손들을 살려 놓으셨습니다 (민수기 26:11). 드라마틱하게도 하나님은 고라의 자손들에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임무를 맡기신 것입니다.

Brooks Atkinson 이란 사람이 관점이 바뀌는 일에 대하여 이런 말을 했습니다. “The most fatal illusion is the settled point of view. Since life is growth and motion, a fixed point of view kills anybody who has one (가장 치명적인 환상은 고정된 관점이다. 우리의 삶은 유동적이며 계속 성장하기 때문에 고정된 관점은 누구든 그것을 가진 사람을 죽일 수 있다).” 또, Toba Beta라는 사람은 “We begin to learn wisely when we're willing to see world from other people's perspective (우리가 기꺼이 다른 사람의 관점으로부터 세상을 보려고 할 때 비로소 지혜롭게 배울 수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런 말도 했습니다. “Understanding is not absolutely final. What's now right could be wrong later (이해는 최종적인 것이 아니다. 지금은 옳은 것이라도 나중에는 틀릴 수도 있다).”

문제는 우리의 관점이 어떻게 바뀔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한 사람의 관점이 바뀌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그 정도로 어렵습니다. 어떤 사람은 관점을 바꾸기 위해서 자기 말을 많이 하는 대신 다른 사람의 말을 많이 들으려고 노력했더니 전보다 다른 사람의 입장을 많이 이해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 노력이 어느 정도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관점은 노력을 통해서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관점이 바뀌는 일을 성경에서는 회심(回心)이라고 합니다. 영어로 ‘conversion’입니다. 사전에는 ‘conversion’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a change of attitude, emotion, or viewpoint from one of indifference, disbelief, or antagonism to one of acceptance, faith, or enthusiastic support, especially such a change in a person's religion (무관심, 불신, 반대로부터 수용, 믿음, 열성적인 후원으로 태도, 감정, 혹은 관점이 바뀌는 것이다. 특별히 이런 변화는 한 사람의 종교에서 일어난다).”

사울이 회심해서 관점이 바뀌는 말씀이 사도행전 9장에 나와 있습니다. 사울의 관점은 자신의 노력으로 바뀐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의 삶에 개입해 들어오심으로 일어났습니다. 2018년 1월 4일 밤에 눈보라가 치고 강풍이 부는 날이었습니다. 그 때 우리 교회 뾰족탑 (steeple, 종탑)이 강풍에 흔들린다는 신고를 받고, 안전상 문제가 있다고 판단한 관계자들이 뾰족탑을 제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Local TV에서는 이 뉴스를 ‘Divine Intervention (하나님의 개입)’이라고 보도했습니다. 그 의미는, 하나님께서 위험한 상황을 아시고 미리 큰 사고를 막아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Divine Intervention’이라는 말은 긍정적인 의미로 도저히 불가능한 일을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하게 해 주신 경우에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관점이 바뀌는 것은 ‘Divine Intervention’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그만큼 한 사람의 관점이 바뀌는 것은 우리의 노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일입니다. 우리의 관점만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베드로 같은 예수님의 제자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사탄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인간적인 관점’만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깨달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관점의 변화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일이 있습니다. 관점의 변화에 대하여 말하는 사람들이 예외 없이 ‘인간적인 관점’을 버리고 ‘하나님의 관점’을 가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는 지금 ‘인간적인 관점’이 모두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제자 빌립에게 묻습니다. “빌립, 이 사람들이 먹을 빵을 어디서 살 수 있겠느냐?” 그 때 빌립이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이 빵을 한 입씩만 먹는다고 해도, 그 빵을 사려면 이백 데나리온은 있어야 할 것입니다.” 200데나리온은 약 20,000불 정도 되는 큰 돈입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빌립의 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빌립의 의견을 따랐다면 5,000명을 먹이지 못했을 것입니다. 2019년 한 해를 ‘인간적인 관점’만 가지고 산다면, 우리는 수도 없이 많이 좌절하고 절망할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6장을 계속 읽어가면 금방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물으신 것은 빌립을 떠보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미 어떻게 하시겠다는 것을 작정하고 계셨습니다.” (요한복음 6:6) 예수님께서 제자 빌립에게 그렇게 물으신 것은 ‘인간적인 관점’의 한계가 어떤 것인지 깨닫게 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인간적인 관점’만 가지고 모든 일을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은 ‘인간적인 관점’을 무시하거나 비웃는 사람들이 아니라 ‘인간적인 관점’의 한계를 극복하는 (overcome) 사람들입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불가능한 일이라고 좌절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을 믿는 사람들은 “Humanly speaking, it is impossible. But with God everything is possible (인간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마태복음 19:26)” 이 말씀을 믿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도움을 구하고 은혜를 구하는 사람들입니다.

한 때 케임브리지에 있는 Museum of Science의 마케팅 슬로건 “Museum of Science, where your horizons broaden (뮤지엄 오브 사이언스, 당신의 시야(視野)가 넓어집니다)”였습니다. ‘인간적인 관점’을 가지고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던 것들을 하나님의 관점을 갖게 되면  보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게 되고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관점’을 이해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큰 선물이요, 축복입니다.


1/6/2019 | 새해엔 이렇게 믿자 1

생각과 태도를 바꾸자 Renewing Your Thoughts And Attitudes

에베소서 4:20-24

오늘은 2019년 새해 첫 주일 예배입니다. 여러분, 고사 성어 중에 ‘일신일신우일신 (日新日新又日新)’이란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직역하면, 날마다 새롭고 또 날마다 새롭다는 뜻입니다. 서경(書經)의 상서(商書)편에 나오는 말이라고 합니다. 중국 은 (殷)나라의 탕 (湯)이라는 덕망이 높은 왕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세숫대야에 이 말을 새겨 놓고 날마다 세수할 때마다 새로워지려고 다짐함으로써 현실에 만족하려고 하는 자신을 경계한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렇게 각오를 새롭게 함으로써 과연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매년 이맘 때가 되면 누구나 새로워지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새해 결심한 것 (resolution)을 만들어 보기도 하고, 목표를 정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며칠 지나면 마음이 해이해져서 결심이 오래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현상 (status quo)에 만족하려고 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 새로워지는 것이 우리의 결심만 가지고 되는 일이 아니구나!” 하고 경험적으로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성경은 사람이 새로워지는 것을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요? 다시 말하면, 우리가 예수를 믿는 일과 새로워지는 일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오늘 읽은 에베소서 4:20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리스도에 관해 그렇게 배우지 않았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But that isn't what you learned about Christ.”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 사람의 삶에 변화가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아무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에베소 (Ephesus)는 지금의 터키 남서쪽, 지중해 연안에 있는 큰 도시입니다. 지금은 ‘셀주크 (Selcuk)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에베소’라는 이름 자체가 ‘욕망’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동양과 서양을 연결해 주는 교통의 요충지일 뿐만 아니라 무역이 활발하게 일어났던 항구 도시입니다. 그리고 에베소에는 유명한 풍요의 여신 ‘아데미 (Artemis) 신전’이 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선교에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이 있다는 생각을 하고, 에베소에 무려 2년을 머물면서 가르쳤습니다. 그 결과 많은 신자들을 얻었습니다. “바울은 회당에 들어가서 세 달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하게 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에 관해 토론도 하고 받아들이도록 설득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져서 믿지 않고 오히려 군중들 앞에서 ‘도’를 욕하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런 사람들을 떠나 신자들을 데리고 두란노 학원으로 가서 날마다 사람들과 토론을 했습니다. 그 일은 2 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아시아 지방의 모든 유대인과 그리스인들이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19:8-10)

바울의 에베소 선교에 대한 애정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바울은 사랑하는 제자이자 동역자인 디모데를 에베소에 머물러 교회를 돌보게 합니다 (디모데전서 1:3). 에베소에 복음의 진리를 왜곡하는 거짓 교사들이 많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진 성경에는 에베소 교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성경 (편지)가 적어도 3권이 있습니다. 디모데전서와 후서, 에베소서는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에베소 교회를 생각하면서 쓴 편지입니다. 사도행전까지 하면 모두 4권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바울은 에베소 교회 교인들의 삶이 쉽게 변화되지 않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진정 그분의 말씀을 들었고, 또 진리 되신 그분 안에 살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런데, 왜 여러분들의 삶이 변화되지 않습니까?” (21절)

오늘 우리도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변화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변화의 삶에 대한 문제를 말씀드리기 전에, 한가지 확인할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정말 변화의 삶을 원하십니까? 여러분은 이 질문에 대답을 해야 합니다. 변화되기를 원하지 않는데도 그 사람의 삶이 변화되는 경우는 매우 드문 경우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은 “생각과 태도를 바꾸자 (Renewing Your Thoughts And Attitudes)”입니다. 우리가 지금 말하는 ‘변화(變化)’는 형식적인 변화가 아니라, 우리의 생각이 바뀌고, 우리의 태도가 바뀌는 ‘근본적인 변화 (a radical transformation)’입니다. 생각하는 법 자체가 바뀌어야 하고 삶에 대한 태도가 바뀌어야 합니다. 가치관이 달라져야 합니다. ‘paradigm shift’가 일어나야 합니다. 이런 변화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변화되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복음서에 기록된 말씀들은 수학에서 말하는 예제(例題, example)와도 같습니다. 예제를 잘 이해해야 예제를 응용해서 더 어려운 문제들을 풀 수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19장에 나오는 ‘삭개오 이야기’가 바로 예제와 같은 말씀입니다. ‘삭개오 이야기’를 잘 이해하면 변화의 삶에 대한 문제를 풀 수 있습니다. ‘삭개오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고 싶어했고 만나고 싶어했다는 것입니다. 삭개오에게 그런 마음이 없었더라면 삭개오의 삶은 변화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삭개오는 세리장 (chief tax collector)이었습니다. 삭개오는 자신의 삶에 만족하지 않고, 현재보다 더 나은 삶을 원했습니다. 이 사실은 그가 많은 사람들 틈에서 키가 작아 예수님을 볼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근처에 있는 뽕나무 위로 올라가서 예수님을 보려고 했다는 말씀으로 증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우리 자신이 변화의 삶을 원해야 합니다. 그 다음, 변화의 삶의 원리를 이해해야 합니다. 오늘 성경 말씀을 보면, 변화되기 전 우리의 ‘자아’를 ‘옛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는 ‘old sinful nature (예전의 죄된 본성)’을 가진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옛 사람’은 ‘한없는 욕망으로 점점 더 눈이 어두워져 더 악하고 더러운 것을 좋아한다 (It is corrupted by lust and deception)’고 했습니다. 우리가 변화되지 않는 중요한 이유는 우리 속에 남아 있는 이 ‘옛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23절 말씀을 보십시오. “Let the Spirit renew your thoughts and attitudes (성령께서 당신의 생각과 태도를 새롭게 하도록 허락하십시오).” 여러분, 잘 들으십시오. 성령께서 여러분 속에서 여러분의 생각과 태도를 바꾸도록 하려면 먼저 성령께서 기뻐하시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성령께서 어떤 일을 원하시는 지, 어떤 일을 좋아하시는 지, 알아서 그 일들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내 속에서 성령께서 활발하게 (actively) 일하기 시작하십니다.

John Piper 목사님이 로마서 12:2을 가지고 설교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당신의 마음이 새로워지려면 다음의 4가지를 소원해야 한다. 첫째로, 세상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을 버려야 하고, 둘째로, 당신의 속에서부터 변화되고자 하는 간절함이 있어야 하고, 셋째로, 의무감 때문이 아니라 그 일을 사랑하기 때문에 해야 하고, 넷째로, 당신의 삶 전부가 영적 예배의 삶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세상의 가치보다 위에 있는 그리스도의 가치를 드러내는 일이다.”

우리 속에 있는 ‘옛 사람’은 우리의 죄된 본성을 자극합니다. 그렇게 되면 누구도 그것을 뿌리칠 수 없습니다. ‘옛 사람’은 우리의 욕망 (lust)을 자극합니다. 다른 사람을 생각하기 보다는 자기 중심적인 이기적인 삶을 살게 합니다. 우리 속에 이런 것을 기뻐하는 ‘옛 사람’이 살아 있는 이상 우리는 새로운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옛 사람’으로부터 벗어나서 새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새 사람이 되는 일은 우리의 힘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 생각과 태도를 바꾸어 주실 때 가능한 일입니다.

동양의 성현 중에 노자 (Lao Tzu)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중국의 춘추전국시대 (Warring States period, 770-221 B.C.) 사람으로 도가(道家)를 완성한 사람입니다. 그가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When I let go of what I am, I become what I might be (내구 누구인지를 놓아 버릴 때 내가 될 수 있는 내가 될 수 있습니다).” 또 Joseph Campbell이라는 사람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We must be willing to get rid of the life we’ve planned, so as to have the life that is waiting for us. The old skin has to be shed before the new one can come (새 피부가 생기려면 늙은 피부가 떨어져 나가야 하는 것과 같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가 계획한 삶을 반드시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어떻게 우리를 버릴 수 있는지는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Let the Spirit renew your thoughts and attitudes. Put on your new nature (성령께서 당신의 생각과 태도를 새롭게 하도록 허락하고, 새로운 본성을 입으라)”라고 말합니다.

끝으로, 디이트리히 본회퍼 (Dietrich Bonhoeffer, 1906-1945, 독일)라는 목사를 소개함으로써 새로운 본성을 입은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본회퍼는 히틀러가 제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세계를 공포 속에 몰아 넣고, 600만명의 유대인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있을 때 살았던 독일 고백교회 (The Confessing Church)의 목사였습니다. 그 때 독일의 교회들은 히틀러의 그런 만행을 보고 침묵하거나 지지했습니다. 그러나, 고백교회의 목사들은 히틀러의 독재와 만행에 항거했습니다. 그 때 본회퍼는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신학자였습니다. 그가 21살에 베를린 대학에서 쓴 박사학위 논문 ‘성도의 교제 (Communion of Saints)’는 당시 신학계의 거장이었던 칼 바르트 (Karl Barth, 1886-1968, 스위스)로부터 신학계의 기적이라는 찬사를 들었습니다. 그의 신학적인 재능을 아깝게 여긴 미국의 신학자들이 그를 미국으로 빼돌렸습니다. 그를 환영하는 만찬이 열린 자리에서 본회퍼는 다시 독일로 돌아가겠다는 선언을 합니다. 나중에 조국이 평화를 되찾았을 때 당신은 그 때 어디 있었느냐는 질문에 부끄러운 사람이 되지 않겠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독일로 돌아온 본회퍼는 히틀러 암살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을 당합니다. 2차 대전이 끝나기 4개월 전입니다. 그가 옥중에서 쓴 글들이 대부분 알려져 책으로 나왔지만, 후에 본회퍼가 자기 애인에게 보냈던 시 한 편이 알려져, 그 시에 곡을 붙인 노래가 사람들에게 불리고 있습니다. 그 시의 제목은 ‘선한 능력으로 (Von Guten Mächten)’입니다.

그는 감옥에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선한 능력이 자기를 감싸고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감옥 밖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있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여전히 하나님께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삶 속에서 행하실 일들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다시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새해를 시작하고 싶다는 생에 대한 기대를 감추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런 사람이 바로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마음과 생각이 완전히 바뀐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죽은 지 74년이 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우리 속에 살아서 우리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선한 능력으로>

선한 능력에 언제나 고요하게 둘러싸여서, 보호받고 위로 받는 이 놀라움 속에, 여러분과 함께 오늘을 살기 원하고, 그리고 여러분과 함께 새해를 맞이하고 싶습니다. 선한 능력에 우리는 너무 잘 보호받고 있으며, 믿음으로 일어날 일들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밤이나 낮이나 아침이나 우리 곁에 계십니다. 또한 매일의 새로운 날에 함께 하십니다.

옛 것이 여전히 우리의 마음을 괴롭게 하고, 어두운 날들의 무거운 짐은 여전히 우리를 누르지만, 아, 주님! 내 몰려 버린 우리의 영혼에게 당신께서 준비해 놓으신 구원을 주십시오. 선한 능력에 우리는 너무 잘 보호받고 있으며, 믿음으로 일어날 일들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밤이나 아침이나 우리 곁에 계십니다. 또한 매일의 새로운 날에 함께 하십니다.


12/31/2018 | 송구영신예배 메시지

우리는 모든 것을 이기고도 남습니다 Overwhelming Victory Is Ours

로마서 8:28-37

오늘 송구영신(送舊迎新) 예배를 드리면서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은 말씀은 로마서 8:28-37에 있는 말씀입니다. 교회생활을 좀 하고, 믿음이 좀 들어간 사람들에게는 오늘 말씀이 매우 익숙한 말씀입니다. 설교 시간이나 성경공부 시간에 자주 들을 수 있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이 얼마나 우리에게 중요한 말씀이고, 의미가 있는 말씀인지 아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이 말씀이 중요한 이유는, 첫째로, 이 말씀이 우리의 삶의 의미를 밝혀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자신의 삶에 대한 의미를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나에 삶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참을 수 있고, 기다릴 수 있고, 견딜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삶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견딜 힘이 없습니다. 계속 살아야 하는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일찍부터 알고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를 선택하신 이유는 그의 아들을 본받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29절). 그 아들을 본받게 한다는 말씀의 의미는 우리를 그의 자녀로 삼아서 그의 아들과 형제가 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 so that his Son would be the firstborn among many brothers and sisters’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정말 엄청난 일입니다. 결코 아무 생각 없이 교회를 왔다 갔다 하면서 세월을 보내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예수님과 형제가 되고,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일입니다. 

둘째로, 이 말씀이 중요한 이유는,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길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31절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시라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31절) “If God is for us, who can ever be against us?” 성경에는 이와 같은 뜻의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시편 144:15)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편 146:5)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시편 33:12) 또 시편 118편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내게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여호와가 나와 함께 계십니다. 그분은 나를 돕는 분이십니다......사람을 의지하는 것보다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고관들을 의지하는 것보다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6-9절)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곧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이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 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신다면 아무도 우리를 이길 수 없기 때문에 세상에 겁낼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한자 말에 ‘아전인수(我田引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억지로 끌어붙여 자기에게 유리하게 해석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이 되고, 하나님이 우리 편이라는 말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라고 말할 때는 우리가 진리편에 서 있어야 합니다. 불의한 일에 개입된 사람이 하나님께 피한다고 하고, 하나님이 나의 편이라고 하고,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이 바로 아전인수격으로 성경 말씀을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그런 식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언제나 진리편에 서 있어야 합니다. 불의한 일에 개입해서는 안 됩니다.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 (Martin Luther, 1483-1546)가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만들어 비텐베르크 (Wittenberg) 대학의 교회 게시판에 붙인 것이 종교개혁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 교황의 지위와 권력에 도전한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습니다. 루터가 자기 주장을 철회하지 않자 교황 레오 10세는 루터를 국회에 소환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관습으로 볼 때 루터는 화형(火刑)을 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때 루터가 했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Here I stand. I can do no other. God help me. Amen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는 달리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저를 도와주십시오.” 이런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루터가 진리 편에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루터 편에 서 계셨고, 루터를 도와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나의 도움으로 삼고 인생을 살고 싶으신가요? 그렇다면 언제나 진리 편에 서 계십시오. 불의한 일에 가담하지 말고 늘 옳은 편에 서 계십시오. 당장에 눈에 보이는 이익이 없어도 진리 편에 서 있으면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셋째로, 이 말씀이 중요한 이유는, 이 말씀 속에, 나의 삶을 해석할 수 있는 성경적인 ‘패러다임 (paradigm)’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패러다임’이라는 말은 어떤 일을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시스템, 혹은 틀 (frame)을 말합니다. 누구나 자기 나름의 ‘paradigm’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 안에도 인간의 불행을 해석할 수 있는 ‘패러다임’이 있습니다. 창세기를 읽어 보면, 그 속에 요셉이라는 사람의 일생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지 환하게 들여다 보입니다. 그 이유는 성경이 인간의 고난을 해석하는 해석의 ‘패러다임’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8절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즉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부름을 입은 사람들의 선을 위하여 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And we know that God causes everything to work together for the good of those who love God and are called according to his purpose for them).” 우리에게 많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기쁜 일도 일어나고, 슬픈 일도 일어나고, 불행한 일도 일어납니다. 기쁜 일은 일어나도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불행한 일이 일어날 때 우리는 당황하고 낙심하고, 좌절하고, 절망에 빠집니다. 누구도 예외가 아닙니다. 저에게 불행한 일이 일어난다면 저 역시 절망할 것입니다. 이 때 자신의 불행을 해석할 ‘패러다임’이 없다면, 우리는 불행을 이길 수 없습니다. 특히 청년들이 나에게 왜 이런 불행한 일이 일어나는지 해석하고 받아들일 능력이 없다면, 어쩌면 자기 삶을 포기하게 되고, 자기 삶을 송두리째 망쳐버릴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순간부터 우리의 삶의 의미가 달라집니다. 우리는 그저 어쩌다가 태어난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고,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부터 우리의 삶에 의미가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상관없이, 하나님은 그것들이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사용되도록 하십니다. 다시 28절 말씀을 보십시오. “God causes everything to work together for the good of those who love God and are called according to his purpose for them.” 유명한 예레미야 29:11-13 말씀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너희를 위해 세운 나의 계획은 너희에게 재앙이 아닌 희망이 넘치는 미래를 주는 것이다. 너희가 내 이름을 부르고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의 기도를 들어주겠다. 너희가 온전한 마음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날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지금 내 삶에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불행한 일을 겪는 사람들을 보면 “너무 걱정하지 마. 다 잘 될 거야!” 하고 위로합니다. 오늘 말씀은 결코 그런 값싼 위로의 말이 아닙니다. 

여러분, 수를 놓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여러가지 색실들을 이용하여 수를 놓습니다. 다양한 색실들을 이용하면 더 멋진 수를 놓을 수 있습니다. 광부들이 사는 마을에서 불행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갱이 무너지는 바람에 많은 광부들이 죽은 것입니다. 여기저기서 불행을 당한 가족들을 위로하려고 왔습니다. 그런데,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무슨 말도 불행을 당한 가족들을 위로할 수가 없었습니다. 한 목사님이 그 마을에 왔습니다. 그 목사님은 “여러분, 지금 제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예. 아름답게 수를 놓은 북마크입니다. 여러분 여기를 보십시오” 하면서 북마크 뒷면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러저리 색실들이 얽혀 있었습니다. “여러분, 보다시피 색실들이 얽혀 있어서 뒷면에 무엇이 수놓아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당하고 있는 이 상황이 바로 이렇습니다. 왜 나에게, 우리 가정에 이런 불행한 일이 일어났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뒷면을 보십시오” 하면서 북마크의 뒷면을 보여주었습니다. 거기에 “God is love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수놓아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 목사님의 말에 위로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오래 전에 어느 글에서 읽었는데, 오늘 마침 생각이 나서 여러분과 같이 나누었습니다. 

우리에게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 기쁜 일이나 슬픈 일이나 성공이나 실패나 궂은 일이나 좋은 일이나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한 올의 실이 되어 색색가지의 아름다운 수를 놓습니다. 수를 놓는데 여러 가지 색실이 필요합니다. 빨강, 노랑, 파랑, 이런 색실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검은 색실도 필요하고, 어둡고 칙칙한 색실도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다양한 색깔의 실을 가지고 그분이 원하는 수를 놓습니다. 뒷면을 볼 때는 색실들이 어지럽게 얽혀 있어서 앞면에 무슨 수가 놓였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뒤집어 보면 거기에 아름다운 수가 놓여 있습니다.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이 시간, 제가 여러분들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나의 삶에는 의미가 있다는 것, 우리는 혼자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 나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하는지 성경적인 해석의 ‘패러다임’을 말씀드렸습니다.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하나님은 그 일들을 사용하셔서 선한 일을 이루십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한 해를 살 수 있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 다 함께 31절 말씀을 읽어 볼까요?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기고도 남습니다 (No, despite all these things, overwhelming victory is ours through Christ, who loved us).” (37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