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1/2019 | 사순절 강해설교 14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

마가복음 4: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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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0/2019 | 사순절 새벽기도 13

비유로 말씀하신 예수님

마가복음 4: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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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9/2019 | 사순절 새벽기도 13

용서 받을 수 없는 죄가 있다

마가복음 3: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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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8/2019 | 사순절 새벽기도 11

예수님께 몰려 오는 사람들

마가복음 3: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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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7/2019 | 새해에는 이렇게 믿자 11

경건생활에 힘쓰자 4 Train Ourselves To Be Godly

시편 30:4-12

사순절 새벽 기도회가 시작되어 은혜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작년보다 늦게 시작되긴 했지만, 날도 밝아지고, 날씨도 좋아서 한결 좋은 것 같습니다. 새벽 기도회에 참석하신 분들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요, 또 새벽기도를 위해서 수고하시는 많은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오늘은 “경건생활에 힘쓰자”라는 제목으로 네 번째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읽은 시편 30편 말씀은 다윗이 쓴 시편입니다. 돌이켜보면, 다윗처럼 파란만장한 인생을 산 사람이 없습니다. 신기한 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모범이 되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예수님의 삶’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다윗은 언제나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동했습니다. 헷 사람 우리아의 일 외에는 평생 동안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적이 없었습니다 (For David had done what was right in the eyes of the LORD and had obeyed the LORD's commands throughout his life, except in the affair concerning Uriah the Hittite).” (열왕기상 15:5)

가끔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 사람은 법 없이도 살 사람이야!” “난 누가 뭐래도 떳떳해!” 후에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양심에 걸리는 것이 조금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흠이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나를 판단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고린도전서 4:4) 내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판단하려면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그 기준이 자기 자신이 기준이 되어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윗은 ‘in the eyes of the LORD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부끄럽지 않은 인생을 살았습니다. 바울 역시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My conscience is clear, but that doesn't prove I'm right. It is the Lord himself who will examine me and decide (내 양심은 깨끗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나를 자세히 살피시고 판단하실 분은 주님이십니다).”

‘in the eyes of the Lord (주님의 눈으로 볼 때)’ 이것이 우리의 판단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아무리 양심에 거리낄 것이 없고 깨끗하게 산다고 하더라도 내가 올바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눈으로 볼 때’ 깨끗해야 올바로 사는 것입니다. 다윗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우리아의 아내와 affair (정사, 情事)가 있었지만, 그 외에는 ‘주님의 눈으로 볼 때’ 흠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도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죄가 없으셨습니다 (히브리서 4:15) 또 베드로전서에도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 (Christ, the sinless, spotless Lamb of God, 베드로전서 1:19)’

또 하나, 다윗의 생애를 들여다볼 때 우리 주님의 모습이 보이는 것은, 다윗에게는 사람에 대한 미움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이유 없이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사울을 어떻게 대하는지 보면 마음이 숙연해집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군대를 풀어서 추격하다가 볼 일을 보려고 동굴 속으로 들어왔습니다. 바로 그 굴 속에 다윗이 숨어 있었습니다. 자기 바로 앞에서 볼 일을 보고 있는데, 얼마나 기회가 좋습니까? 웬만큼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도 “이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기회이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칼을 뺏지만 사울의 옷자락만 벱니다. “사울은 하나님이 세운 이스라엘의 왕이다. 이런 사람을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사무엘상 24:6)”는 것이 그 때 다윗의 생각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의 마음에도 사람에 대한 미움이 없었습니다. 이런 주님이 제자들에게 용서에 대한 말씀을 하셨을 때 그 말씀의 권위 (authority)가 얼마나 대단했겠습니까? 심지어 주님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을 향해서도 용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하고 있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누가복음 23:34) 이런 용서의 마음이 다윗에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에게서 예수님의 모습이 보이는 것입니다.

다윗과 우리 주님의 삶이 그렇게 많이 닮았습니다. 시간이 없지만,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린다면, 두 사람 모두 이유 없이 고난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위에서도 말씀드렸지만, 다윗은 자기가 왜 도망을 해야 하는지 그 이유도 모르고 도망을 다녔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면 다윗이 받았던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목적하셨던 것들이 하나 둘 이루어 나가는 것을 볼 때 소름이 돋습니다. 다윗 옆에는 다윗에게 충성을 바치는 용사들이 있었습니다. 훗날 이 사람들은 다윗과 함께 다윗 왕국을 이루는 공신들이 됩니다. 그런데, 다윗이 이런 사람들을 언제, 어디서 만났는지 성경을 읽어 보면 깜짝 놀랄 말씀이 나옵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해 도망 다니다가 아둘람 (Adullam)에 있는 한 굴로 피신해서 지낸 적이 있었습니다.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과 빚을 진 사람, 그리고 마음에 억울함을 가진 사람들이 다윗에게 몰려들었습니다. 다윗은 그들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에게 몰려온 사람들은 사백 명 정도 되었습니다.” (사무엘상 22:2)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왕국을 같이 건설할 용사들을 붙여 주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도 이유 없는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을 시기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신성모독 죄 (blasphemy)’를 범했다고 하고, ‘성전 모독 죄’를 범했다고 하고, ‘안식일 법’을 어겼다고 주장했지만, 그것은 모두 사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아들이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불렀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에게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을 주셨자만,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셨는데도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다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다윗과 예수님은 많이 닮았습니다. 두 사람의 생애가 ‘닮은 꼴 (resemblance)’입니다. 닮아도 너무 닮았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그럴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배우고 닮아가면. 우리도 주님을 닮아갈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리마인더들 (reminders)’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의 희망이고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We will be mature in the Lord up to the full and complete standard of Christ (우리는 주님의 완전한 기준에 이르기까지 성숙한 사람들로 성장할 것입니다).” (에베소서 4:13)

오늘 시편 30편 말씀은, 다윗이 쓴 한 편의 시입니다. 시 (poem, 時)는 산문 (prose, 산문(散文)과 달라서 저자의 생각을 모두 풀어 놓는 것이 아니라, 절제된 말로 표현합니다. 시편 30편도 그렇습니다. ‘나의 원수’ 혹은 ‘나의 적 (enemies, 1절)’이라는 말이 나오고, ‘무덤 (grave, 9절)’라는 말이 나오고, ‘무섭고 두렵다 (7절)’는 말이 나오고, ‘죽음 (9절)’이라는 말이 나오고, ‘불쌍하게 (10절)’라는 말이 나오고, ‘부르짖는다, 간절하게 빈다 (8절)’는 표현들이 나오는 것으로 봐서, 다윗이 어떤 상황에서 이 시를 썼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그 때 그가 썼던 시편 23편에 나오는 것처럼 ‘죽음의 음침한 골짜기 (the valley of the shadow of death)’를 걷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전혀 예측할 수 없습니다. 한 시간 후에, 아니 예배를 드리고 집으로 가는 길에, 아니면 내일 아침에 무슨 일을 만날 지 알 수 없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전도서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제때에 아름답게 지으셨고, 사람의 마음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지만,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다 깨달을 수가 없다.” (전도서 3:11)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Yet God has made everything beautiful for its own time. He has planted eternity in the human heart, but even so, people cannot see the whole scope of God’s work from beginning to end.” 전도서를 솔로몬이 썼다고 하지 않습니까? ‘the whole scope of God’s work’ 이 한 구절만 보더라도 솔로몬이 참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어떻게 인도하실 지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의 ‘the whole scope of God’s work about our lives’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순간 한 순간 겸손하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이렇게 연약합니다. 우리가 모두 이런 연약함 (weaknesses)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시편 30편 말씀을 보십시오. 아까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시를 한 구절 한 구절 해석한다는 것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또 그렇게 할 수도 없고요. 하지만, 시편 30편을 읽어 보면 ‘죽음의 음침한 골짜기’를 걷던 사람이, 어떻게 한 순간에 삶이 역전(逆轉)되었습니다. 보세요. “주님께서 내 슬픔을 바꾸시어 춤이 되게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내 슬픔의 옷을 벗기시고, 기쁨의 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11절) 역전도 이런 역전이 없습니다. “You have turned my mourning into joyful dancing. You have taken away my clothes of mourning and clothed me with joy (주님이 혹은 하나님께서 나의 슬픔을 기쁨의 춤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주님이 나의 슬픔의 옷을 벗기시고 기쁨의 옷으로 갈아 입히셨습니다).”

정말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가능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슬픔의 옷을 입고 있던 사람이 어떻게 금방 기쁨의 옷으로 갈아 입습니까? 한번 슬픔의 옷을 입은 사람은 그냥 계속 슬픔의 옷을 입고 사는 것이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한번 ‘죽음의 음침한 골짜기’를 걷는 사람은 가도가도 끝이 없는 ‘죽음의 음침한 골짜기’를 걸어야 하는 것이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삶이 역전되었다는 이야기를 좀처럼 들을 수 없는 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우리에게는 삶이 역전될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고, ‘죽음의 음침한 골짜기’를 걷던 사람이 그 골짜기를 벗어날 기회가 여전히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습니다. 보세요. 5절 말씀입니다. “For his anger lasts only a moment, but his favor lasts a lifetime! Weeping may last through the night, but joy comes with the morning (왜냐하면, 주님의 진노는 단 한순간이지만, 주님의 은혜는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울음 (슬픔)은 밤새 계속될 수 있겠지만, 아침에는 기쁨이 찾아옵니다.” 이 말씀을 잘 보세요. 하나님의 진노는 ‘lasts only a moment (잠깐)’라고 합니다. 하지만, 주님의 은혜는 ‘lasts a lifetime (평생)’이라고 합니다. 이 하나님의 ‘favor (은혜)’를 입으면 우리의 삶이 역전됩니다. ‘weeping (울음, 슬픔)’이 ‘joy (기쁨)’으로 바뀌고, ‘clothes of mourning (슬픔의 옷)’이 ‘clothes of joy (기쁨의 옷)’으로 바뀝니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우리의 살이 역전되는 ‘하나님의 시간 (God’s timing)’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때가 아침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early in the morning (이른 아침)’ 혹은 ‘at dawn (새벽)’입니다. 성경을 전체적으로 읽어보면 그 때가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여러분이 오늘 읽은 교독문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시편 46:5) 새벽이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며칠 전에 새벽기도에서 ‘죄 짐 맡은 우리 구주’ 찬송 가사를 소개해 드렸습니다. 다시 한번 그 가사를 소개해 드리고 오늘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Have we trials and temptations, Is there trouble anywhere, We could never be discouraged, Take it to the Lord in prayer, Can we find a friend so faithful, Who will all our sorrow share, Jesus knows our every weakness, Take it to the Lord in pray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