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4/2018 | 창립 40주년 기념예배

신앙고백이 있는 교회 A Church Confessing Jesus As Lord

마태복음 16:13-20

찬송 301장 ‘지금까지 지내 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이 찬송을 부르면서 저의 마음에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한이 없는 주의 사랑 어찌 이루 말하랴/물 붓듯이 부으시는 주의 은혜 족하다.” 우리교회 40년의 역사 중에 32년을 제가 섬겼습니다. 제가 목사로서 부족한 것이 얼마나 많은 지 누구보다도 제가 잘 압니다. 그리고, 그동안 저와 함께 교회를 섬겼던 분들이 잘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 자리에 서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 밖에, 더 이상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Because of our faith, Christ has brought us into this place of undeserved privilege where we now stand (로마서 5:2).” “다른 것은 하나도 보시지 않고, 오직 믿음 하나만 보신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지금 이 감당할 수 없는 자리에 서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믿음 말고 다른 것들을 보셨더라면 (나는 너무나 부족한 것이 많은 사람이어서) 도저히 이 자리에 설 수 없었다는 고백입니다. 바로 이 바울의 고백이 지금 여러분 앞에 서 있는 저의 고백입니다.

저는 1986년에 이 교회에 교육목사로 부임해서, 1988년에 담임 목사가 되었습니다. 저는 그 때 보스턴 신학교 박사 과정에 있었기 때문에 교회를 담임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지난 일을 돌이켜 보면 그 때 하나님은 저에게 담임 목사직을 수락하도록 urge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 때 교회 형편을 모르시는 분들은 “아니, 이렇게 좋은 교회에서 담임 목사로 부르는데 주저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 교회는 결코 좋은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때 하나님께서 저를 urge하시는 것을 느끼고 담임 목사 직을 수락했습니다.

제가 담임 목사로 취임하는 날, (거창한 취임예배를 드린 것은 아니라 그냥 담임 목사가 되어 첫 설교를 한 것입니다.) 그 때 제 설교 제목은 ‘산 위에 있는 교회’였습니다. 본문 말씀은 마태복음 5:14-16 말씀이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제가 이런 설교를 하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제가 한국에서 신학교에 들어간 것이 1971년이었습니다. 그 때 기독교서회라는 곳에서 출판한 ‘현대신서’라는 시리즈가 있었습니다. 1970년에 ‘현대신서 22 번’이 나왔는데, 책 제목이 ‘산 위의 마을’이었습니다. 오토 브루더 (Otto Bruder)라는 사람이 독일어 로 쓴 책인데, 누가 번역을 한 덕분에 한국의 독자들이 읽을 수 있었습니다. 독일의 한 시골 마을에 한 젊은 목사가 부임해 왔습니다. 그 때 독일은 히틀러의 나치 정권 밑에 있었습니다. 독일 교회들은 할 말도 못하고 전전긍긍하고 있었습니다. 말 한번 잘못했다가는 비밀 경찰들에게 끌려 가는 때였습니다. 그 때, 한 젊은 목사가 부임해 온 것입니다. 교인들은 모두 그 젊은 목사를 주목했습니다. 과연 그가 예배 시간에 무슨 말을 할 것인가 하고 젊은 목사의 입을 주목했습니다. 그런데, 교인들의 기대와는 달리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가고, 반 년이 지나도 이 젊은 목사는 묵묵히 자기 할 일만 할 뿐, 그의 입에서 교인들이 기대했던 말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교회 안에 변화가 있었다면 이 젊은 목사가 주 중에 성경 공부반을 만들어 열심히 가르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성경공부 시간에 별다른 말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한 주 한 주 지나가던 어느 주일 아침, 예배가 막 시작되려고 하는 시간에, 검은 색 지프차가 교회에 들어왔고, 비밀경찰들이 다짜고짜로 젊은 목사를 데려가려고 했습니다. 교인들은 영문을 몰라 당황하고 있던 때에, 그 마을 입구에서 구두 수선 가게 (Shoe Repair Shop)을 운영하고 사람이 비밀경찰 앞을 막아서는 것이었습니다. 교인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저 사람이? 어쩌려고?” 하면서 수군거렸습니다. 이 사람은 그 동네에서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새 목사님 이 부임하면서 이 사람이 성경공부에 빠지지 않고 나오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특별한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지금 “우리 목사님을 데려갈 수 없다”고 비밀 경찰 앞을 막아 선 것입니다. 바로 이 장면이 그 책의 하이라이트 장면입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교회를 담임한다면 이런 목회를 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한국에서는 부목사로 있었으니까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미국에 유학 와서 교회를 담임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입니다. 제가 그 책을 읽으면서 받았던 감동은 “복음이 사람을 변화시키고, 복음이 사람을 행동하도록 만든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믿음을 가지고 30년 전에 이 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했고, 그 때 이후 저는 이 믿음을 버린 적이 없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저는 이 믿음을 가지고 설교하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그렇게 설교했는데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정말 복음이 사람을 변화시켰습니까? 복음이 사람을 움직이는 것을 경험했습니까?” 제 대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지난 30년을 설교했지만, 사람들은 쉽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죄된 본성은 쉽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사악한 인간의 본성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고, 이기적인 인간의 본성은 결코 변하지 않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믿음을 결코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제 생각대로 교회가 변화되지 않는다고 해도 저는 실망하지 않고, 계속 이 믿음을 가지고 설교할 것입니다.

요즘에는 우리교회의 미래에 대하여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이 문제는 단순히 우리교회의 미래일 뿐만 아니라, 전체 주님의 교회의 미래이기도 합니다. 우리 앞에 많은 과제가 쌓여 있습니다. 인구는 감소하고 있고, 젊은 세대들은 교회를 외면하고 있고, 교회는 현대인들에게 매력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과학의 발전은 눈이 부실 정도입니다. 과거에 수 백 년에 걸쳐 일어날 변화들이 하루 아침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AI (Artificial Intelligence)가 지금의 속도로 발전한다면, 멀지 않아 인간관계에 큰 위기가 닥칠 것입니다. 그야말로 교회의 위기, 목회의 위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위기가 바로 눈 앞에 다가와 있습니다. 이런 때에 우리는 어떻게 미래를 준비해야 하겠습니까?

제가 교회의 미래를 놓고 기도할 때마다 주님이 저에게 주신 말씀은 ‘신앙고백이 있는 교회’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신앙고백이 있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우리교회는 더욱 복음에 충실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한 발짝만 삐끗하면 5년 후, 10년 후, 우리 교회의 미래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창립 40 주년이라는 과거의 영광에 취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앞으로가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이 위기의 때에 우리에게 교회를 맡기셨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보지 않습니까? 한번 가슴에 손을 대고 심장의 고동소리를 느껴 보십시오. 그리고, 이렇게 여러분의 결심을 주님께 말씀드리십시오. “주님, 나의 생명을 주님께 드립니다. 나의 생명도 나의 젊음도, 나의 열정도, 나의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립니다. 주님의 교회를 위해 나를 도구로 사용하십시오. 나로하여금 교회에 대한 시대적인 책임과 사명을 회피하지 않게 도와 주십시오.”


10/7/2018 | 세계 성만찬 주일

기억과 축하, 그리고 실천 Remembrance, Celebration And Action

고린도전서 11:23-26

복음서 중에 제일 먼저 기록된 책은 마가복음입니다. A.D. 70년경에 기록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고린도전서는 A.D. 56-57년경에 기록된 바울의 편지입니다. 신학자들은 오늘 읽은 고린도전서 말씀이 성만찬에 대한 말씀 중에서 가장 원형 (Original)에 가까운 말씀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제일 주목해서 봐야 할 말씀은 “나를 기억하면서 이것을 행하라 (24절)”고 하신 말씀입니다. 개역성경에는 ‘기억’이라는 말 대신 ‘기념’이라는 말로 나와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매년 5월 마지막 월요일을 ‘Memorial Day’로 지킵니다. ‘죽은 사람들을 기억하는 날’이라는 뜻인데, 원래는 남북전쟁에서 죽은 장병들을 기억하는 날로 지키다가 나중에는 미국을 위해 전쟁에 나가 전사한 모든 장병들을 기억하는 날로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매년 6월 6일에 지키는 ‘현충일’이라는 기념일이 있는데,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분들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미국의 ‘Memorial Day’에 해당하는 기념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면서 빵을 나누어 주시고, 포도주를 나누어 주셨습니다. “너희를 위한 나의 몸이다. 이것을 행하면서 나를 기억하라”고 하시면서 빵을 떼서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고, “이 잔은 내 피를 통해서 너희들과 맺는 새언약이다.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라”고 하시면서 포도주 잔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무슨 일을 기억을 하려면 지난 일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크리스천들은 자주 성만찬 예식을 행하면서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과거가 없는 오늘은 있을 수 없고, 오늘이 없는 미래는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오늘의 내가 있는 것은 과거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과거는 모두 예수님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설교 제목을 ‘기억, 축하, 그리고 실천’이라고 정했습니다. ‘기억’은 과거를 말하고, ‘축하’는 현재를 말하고, ‘실천’은 현재와 미래를 의미합니다.

미국 듀크 (Duke)대학에서 총장을 역임했던 제임스 클리브랜드(James Cleveland)는 13살 때 처음으로 자기 어머니와 함께 성만찬 예식에 참가했다고 합니다. 그 때 어머니로부터 들었던 성만찬에 대한 이야기를 잊을 수가 없어 졸업식 때마다 그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그의 어머니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제임스야,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떡과 포도주를 주시면서, 이것을 먹고 나를 잊지 말라고 부탁하셨다. 제임스야, 엄마는 지금까지 주님의 제자로 살아왔다. 엄마는 결코 주님을 잊을 수가 없어. 그래서 지금까지 엄마는 한 번도 주님의 부탁을 잊지 않았고, 성만찬 예식에서 빵과 포도주를 받을 때마다 주님을 기억했다. 엄마는 너에게 부탁한다. 너도 부디 이 성만찬의 의미를 잊지 말고 어디를 가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어떤 환경 속에 있든지 늘 주님을 기억해야 한다. 성만찬은 주님이 너와 함께 하신다는 증거야. 이 성만찬을 통해 너는 주님을 만나게 되고, 주님의 마음을 깨닫게 될 거야." 클리블랜드 총장은 어머니에게 들었던 이 이야기를 졸업생들에게 들려주면서, “여러분들이 졸업했다고 학교를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에 있든지 늘 학교를 기억해 주기를 바랍니다. 학교 또한 여러분들과 늘 같이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졸업생들에게 당부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어떤 것들을 기억해야 하겠습니까? 주님은 제자들에게 많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들은 크게 약속과 부탁의 말씀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그를 믿는 사람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다 (요한복음 3:1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약속의 말씀입니다. 이 약속의 말씀이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습니다.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everyone who believes in him)’ 영생을 얻는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을 복음 중의 복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주신 영원한 생명에 대한 기쁜 소식 (the Good News)이기 때문입니다.

또 주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누구든지 나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올 수 없다 (요한복음 14:6)”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구원의 길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No one can come to the Father except through me”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구원의 길이지만, 주님이 말씀하신 이 길은 단 하나 밖에 없는 구원의 길입니다. 인간의 지식이 아무리 축적되고,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주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의 길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님의 이 말씀의 의미를 자꾸 축소(縮小, reduction)하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우리는 ‘reductionists’라고 합니다. “아니, 그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구원에 대하여 강조하다 보니까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사랑의 언어로 이해해야 한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넌 나만 사랑해야 해. 다른 사람을 사랑하면 난 죽고 말 거야.” 이렇게 말한 것과 같다고 합니다. 아닙니다. 주님은 단 하나의 구원의 길을 말씀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자꾸 다른 해석을 하려고 하지 말고, 주님의 말씀하신 것을 축소하려고 시도하는 ‘reductionists’가 되지 마십시오.

또한 우리는 주님이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말씀들을 기억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내가 너희와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 있겠다.” (마태복음 28:19-20) 이 말씀에서 강조해야 할 것은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나의 말을 가르쳐 지키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민족’이라는 말을 정확하게 말한다면 ‘species’입니다. ‘species’라는 말은 원래 생물학에서 특성이 같은 것들끼리 분류하는 기본 단위입니다. 사람도 같은 언어나, 문화, 역사에 따라 비슷한 특성을 가진 사람들끼리 분류할 수 있는데, 개역성경에는 ‘족속’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선교 단체 ‘위클리프’에서 번역한 Wycliffe Bible에 ‘folks’로 나와 있습니다. ‘folks’는 민족이라는 말보다 훨씬 더 세분화된 개념입니다. 현재 전 세계에 195 민족 (nations)이 있다고 합니다. ‘folks’로 하면 이보다 훨씬 더 많을 것입니다. 주님은 이 ‘folks’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고 이 사람들을 제자로 삼으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The Great Commission’이라고 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대사명(大使命)’이라고 이름을 붙이면서도 이 말씀을 지키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이 ‘Commission’을 기억할 뿐만 아니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어떤 식이든 이 주님의 ‘대사명’을 실천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공부를 해도, 사업을 해도, 정치를 해도, 무엇을 하든지 주님께서 부탁하신 이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과거에는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이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서 선교사로 나갔습니다. 지금 우리 시대에는 선교의 개념이 과거보다 훨씬 더 넓어졌습니다. 내 삶의 영역이 바로 선교지라는 ‘통합적인 선교 개념 (the integrated concept of mission)’이 새롭게 논의되고 있습니다. 아주 바람직한 선교 개념으로 발전해 가고 있다고 보겠습니다. 이번 2018년 ReNEW에서는 이 ‘통합적인 선교개념’에 대하여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한가지 더 주님을 기억해야 할 것은 주님이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신학적인 용어로 이것을 ‘대속물 (ransom)’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대속물’이 되신 것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8) 이 말씀이 Amplified Bible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But God clearly shows and proves His own love for us, by the fact that while we were still sinners, Christ died for us.”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그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의 말씀처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었고,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습니다.” (이사야 53:5)

우리는 성만찬에 초대되어 빵과 포도주를 받을 때마다 주님의 이 약속과 부탁의 말씀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나의 구원을 축하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크리스천의 삶은 ‘celebration (축하)’입니다. 바울은 이 축하의 삶을 이렇게 요약해서 그의 편지에 썼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내게 베푸신 그분의 은혜가 헛되지 않았습니다 (But by the grace of God I am what I am, and his grace to me was not in vain).” (고린도전서 15:10)

지금의 나의 삶을 축하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게 베풀어 주신 은혜에 대한 기쁨과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있는 사람은 지금 자신의 삶을 축하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지금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를 모르거나, 감사가 없는 사람은 축하가 없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감사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가 무엇인지 한번 성경 말씀에서 보시겠습니까? 여러분이 잘 아는 빌립보서 4:6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읽으면서도 이 말씀의 뜻을 잘 모릅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의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말씀드리십시오.” 사람들은 이 말씀을 읽으면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만 읽습니다. 염려하지 말라고 한다고 해서 염려가 안 됩니까? 그게 아니잖아요? 이 말씀을 이해하는 열쇠는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구하라는 말입니다. 한번 보세요.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Don't worry about anything; instead, pray about everything. Tell God what you need, and thank him for all he has done.” 하나님께 우리가 필요한 것들을 말씀드릴 때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해 주신 일들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해 주신 일들이 어떤 일들입니까? 가장 큰 일은 예수님을 믿게 하시고 나를 구원하여 주시고,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신 일입니다. 이 일보다 더 큰 일이 없고, 이 일보다 더 감사해야 할 일이 없습니다. 이렇게 감사가 있는 사람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않고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보다 더 큰 일도 해결해 주셨는데, 이만한 일이야 또 해결해 주시겠지 하는 믿음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만찬에 초대되어 빵과 포도주를 받을 때, 예수님을 기억해야 하고, 지금의 내 삶을 축하해야 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들을 실천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들을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바울은 성만찬에 초대된 사람들이 실천해야 하는 일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시는 사람들은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으심을 전하십시오 (For every time you eat this bread and drink this cup, you are announcing the Lord's death until he comes again).” (26절)

저는 이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정말 큰 일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누가 십자가를 좋아합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도 십자가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니, 예수 믿는 사람들도 십자가를 좋아하지 않는데,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이야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 시대는 십자가를 싫어하고 십자가를 거부합니다. 지금 우리가 그렇게 살고 있지 않습니까? 주님은 그 자신이 몸소 십자가를 지셨고, 그의 제자들에게는 “나를 따라 오려거든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누가복음 9:23)”고 말씀하셨는데, 누구도 십자가를 지려고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은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selfish way (이기적인 길)’에서 돌아서라는 말씀입니다.

이게 정말 가능할까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방식이 모두 ‘selfish’한 일들인데, 이 길에서 돌아서는 것이 과연 가능하겠습니까? 우리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이 로마서 12:2에서 “Don't copy the behavior and customs of this world (이 세상을 본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이 지금 보이고 있는 ‘행동 (behavior)’, 이 세상이 가지고 있는 ‘관습들 (customs)’은 어떤 것입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selfish way (이기적인 길)’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대해서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되든 나만 잘 되면 됩니다. 나만 잘 되면 되고, 우리 집만 괜찮으면 되고, 우리 교회만 잘 되면 상관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데, 우리가 어떻게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겠습니까? 정말 큰 일입니다. 왜 주님은 가장 어려운 때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에게 이 십자가의 메시지를 맡기시는 지 정말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오늘 세계 성만찬 주일에 교회에 나와서 성만찬에 초대된 여러분들, 우리는 지금 매우 중요하고 심각한 시점에 서 있습니다. 청년 1부, 청년 2부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매우 중요한 자리에 나와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잠에서 깰 때가 벌써 되었다 (로마서 13:11)”고 했는데, 맞습니다. 지금 우리는 대충대충 교회에 다녀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하게 구합시다. 성만찬 빵을 받고, 포도주 잔을 받으면서 예수님을 기억합시다. 그리고 예수님 때문에 오늘의 내가 있음을 고백하고, 기뻐하고, 감사하고, 지금의 나의 삶을 축하합시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을 이 세상에 전파하는 도구로 나를 사용해 주시기를 위해 기도합시다. 주님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길거리에 나뒹굴고 있는 돌멩이들을 가지고도 아브라함의 자손들로 만드실 수 있고 (마태복음 3:9), 하나님을 찬양하는 도구로 사용하실 수 있다 (누가복음 19:40)고 하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가 얼마나 중요한 자리인 지 잘 압니다. 주님은 이 시대를 우리에게, 우리 교회에게 맡기셨습니다. 세상에 십자가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먼저 저희로 하여금 우리들의 이기적인 길에서 돌아서는 결단을 하게 하옵소서.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모든 일을 하실 수 있음을 믿습니다. 손에 빵을 들고, 손에 포도주 잔을 들고, 주님을 기억하게 하시고,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게 하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손에 들린 도구로 고백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9/30/2018 | 열매 맺는 계절 1

껍데기 크리스천은 가라. The Unnecessary Christians

요엘 2:12-14

제가 좋아하는 영성 신학자 중에 유진 피터슨 (Eugene Peterson)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유진 피터슨이 ‘Unnecessary Pastor’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이 1,999년에 나왔으니까 지금으로부터 19년 전에 나온 책입니다. 우리 말로 ‘불필요한 목회자’라고 번역할 수 있을 텐데, 딱 맞는 번역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이 책에 나오는 내용을 조금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요즈음 목회자가 되기 위해 준비하며 청빙을 기다리는 몇몇 사역자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또한 나는 여러 교회들이 그들의 목회자들에게 바라는 요구 사항들을 들으면서 매우 침울한 기분이 들었다. 거의 예외 없이 요즈음 교회들은 목회자를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유능한 관리자를 원한다. 그들의 교회를 주도적으로 이끌어 줄 관리자를 찾고 있는 것이다. 요즈음 교회들이 이런 목회자를 찾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야 하는 귀찮은 일을 회피하고 싶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피터슨이 이 책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요즈음 교회들이 원하고 있는 목회자가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목회자들은 목회자로서 갖추어야 할 본질을 추구하지 않고, 교회들이 요구하는 스펙을 채우려고 하는 목사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Unnecessary Pastor (불필요한 목회자”는 요즈음 교회들이 찾는 스펙에서 한 참 모자라는 목회자들을 말합니다. 피터슨의 이 책이 한국말로 번역이 되었는데, 책 제목이 ‘껍데기 목회자는 가라!’입니다. 저는 그 책 제목을 보면서 “언젠가는 ‘껍데기 크리스천은 가라!’ 이런 제목으로 설교해야 하겠다”고 생각했는데, 바로 오늘 그 제목으로 설교하게 되었습니다.
 
요엘 (Joel)은 남왕국 유다의 왕 요아스 (Joash)가 왕으로 즉위하던 B.C. 830년경쯤에 살았던 예언자입니다. 요아스는 7살의 어린 나이에 왕이 된 사람입니다. 하지만, 제사장 여호야다 (Jehoiada)라는 사람이 옆에서 도와주었기 때문에 별 문제없이 나라를 통치했습니다. 그러다가 여호야다가 죽습니다. 정신적으로 의지할 곳이 없어진 요아스는 그 때부터 타락하기 시작합니다. 의인들을 핍박하고 죽입니다. 왕이 타락하니까 나라 전체가 타락하여 우상숭배에 빠집니다.
 
하나님은 위기의 때에 예언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선택하여 그 사람과 소통(疏通)하시면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시대에도 우리와 소통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기도를 통해서 그의 자녀들과 소통하기를 원하시고, 성경 말씀을 통해서 그의 자녀들과 소통하기를 원하십니다. 기도하지 않고, 성경을 읽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소통의 채널을 막고 사는 사람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요즘 사람들이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생각을 집중하고, 나 자신을 돌아보고, 조용히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는 마음의 여유들이 없습니다. 성경을 읽는 것도 싫어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성경뿐만 아니라, 책을 읽지 않습니다. 몇 줄 안 되는 가벼운 읽을 거리 외에는 읽지 않습니다. 책을 읽지 않고, 글을 쓰지 않으니까 생각에 깊이가 없고, 철학이 없습니다. 요즘에 젊은 사람들은 페이스북에서 인스타그램으로 옮겨갔다고 합니다. 인스타그램에는 글을 쓰지 않아도 되고, 글을 읽지 않아도 되고, 사진만 올리고 사진만 보면 되니까 그렇다고들 합니다.
 
하나님과 소통의 채널이 막히면 ‘껍데기 크리스천’이 됩니다. 누구도 예외가 아닙니다. 목사도 기도하고 성경 읽으면서 하나님과 소통하지 않으면 ‘껍데기 목사’가 됩니다. 아무리 그 목사가 유능한 사람일지라도, 아무리 그 목사가 교회를 잘 관리하는 목사일지라도 유진 피터슨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과 소통이 막힌 사람은 ‘껍데기 목회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껍데기 크리스천’ ‘껍데기 목사’는 주님께서도 원하시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3:12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분은 손에 키를 들고 타작 마당을 깨끗이 하여 알곡은 곳간에 두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다.” 세례 요한이 사람들에게 자기 뒤에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알곡’이란 말과 ‘쭉정이’이라는 말이 대조되어 있습니다. ‘쭉정이 (chaff)’는 ‘알곡 (grains)’을 벗긴 껍데기입니다. ‘알곡’은 모아서 창고에 쌓아 두고, ‘껍데기’는 쓸모가 없기 때문에 불에 태워버립니다. 추수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알곡’이지 ‘쭉정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중에 아무도 ‘쭉정이’같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도 ‘쭉정이’ 같은 크리스천으로 살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도 ‘쭉정이’ 같은 목사로 일하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알곡’과 같은 필요한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Evan Minton이라는 사람이 ‘Five Signs A Person Is A Nominal Christian (껍데기 크리스천이 되어 가는 다섯가지 사인)’라는 글을 썼습니다. ‘Nominal Christian’이란 말은 ‘이름만 가지고 있는 형식적인 크리스천’이라는 말인데, ‘껍데기 크리스천’이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그 다섯가지 사인이 무엇인지 내용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첫째 사인은, 하나님과 대화하지 않는 것입니다 (They Don’t Talk to God). 정상적인 크리스천이라면 하나님께 대한 목마름 (thirst)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껍데기 크리스천들’은 하나님께 대한 목마름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고, 하나님과 소통하지 않아도 아무렇지 않습니다.
 
둘째 사인은, 성경을 읽지 않는 것입니다 (They Never Read Their Bible and Are Biblically Illiterate). 성경을 읽지 않고 일주일, 아니 한 달이 지나도 아무렇지 않는 사람들은 ‘껍데기 크리스천’이 되어가고 있다는 징조입니다. Evan Minton은 이런 사람들을 성경적인 문맹인이라고 했습니다. 문맹인은 글자를 읽을 줄 모르고 쓸 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마치 문맹인처럼 성경을 읽으려고 시도조차도 하지 않는 크리스천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셋째 사인은, 죄 가운데 살면서도 상관하지 않는 것입니다 (They Live in Sin and Don’t Care). 죄를 짓고 하나님의 뜻을 어기면서도 “나만 그런가? 다들 그렇게 살아!” 하면서 자신의 잘못을 정당화 시킵니다. “목사님은 비즈니스를 안 해 봐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아니, 어떻게 성경 말씀대로 살아요?” 이렇게 말합니다.
 
넷째 사인은, 교회에 가는 것에 흥미가 없는 것입니다 (They Have No Interest In Attending Church). 교회에 대한 흥미가 점점 떨어집니다. 교회 가 봐도 뭐 재미있는 것이 없습니다. 목사의 설교도 그 설교가 그 설교이고, 교인들도 그 사람이 그 사람이고, 뭐 하나 재미 있는 것이 없습니다. 혹시 여러분들에게 이런 생각이 들면, 지금 ‘껍데기 크리스천’이 되어 가고 있다는 징조입니다.
 
마지막 사인은, 마음 속에 다른 사람에 대한 미움이 있는 것입니다 (They Have Hatred In Their Hearts). 다섯 번째 사인을 말하면서 Evan Minton은 요한일서 4:2 말씀을 인용합니다. “어떤 사람이 ‘나는 하나님을 사랑해요’라고 말하면서 그의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이는 눈에 보이는 자기의 형제도 사랑하지 못하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이 맞습니다. 정상적인 크리스천이라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다른 사람을 미워할 수가 없는 것이 맞습니다. 이 말씀대로라면 지금 많은 사람들이 ‘껍데기 크리스천’이 되어가고 있는 것인데, 두려운 마음이 듭니다.
 
지금으로부터 2,800년 전에 유대나라 사람들이 ‘껍데기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소통은 끊어지고,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떠나 세상의 우상들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요엘 (Joel)이라는 사람을 불러 자기 메시지를 전달하셨습니다. “지금이라도 너희의 온 마음을 다하여 내게 돌아오너라. 금식하고 울며 슬퍼하여라.” (12절)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Turn to me now, while there is time. Give me your hearts. Come with fasting, weeping, and mourning.” “지금 아직 시간이 있을 때 나에게 돌아오라. 나에게 너희 마음을 달라. 금식하며, 울며, 슬퍼하며 나에게 오라!” “나에게 돌아오라”는 말은 회개하라는 말입니다. 회개를 희랍어로 ‘메타노이아 (μετάνοια)’라고 합니다. 이 말을 성경에서는 ‘turning away from sin and turning to God (죄로부터 돌아서서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이라는 뜻으로 사용합니다.
 
하나님께서 회개하라는 메시지를 주신 것은 아직 기회가 있다는 뜻입니다. 아직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시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아무리 잘못해도 쉽게 포기하지 않고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이 말씀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라도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앞에는 그 길이 항상 열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하나님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게 이어집니다. “옷을 찢지 말고 너희 마음을 찢어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너라. 그분은 은혜롭고 자비로우시다. 그분은 쉽게 노하지 않으시고 사랑이 많으시며 벌을 내리지 아니하신다.” (13절) “옷을 찢지 말고 너의 마음을 찢어라”는 말은 우리의 회개가 진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2절에 나오는 “Give me your hearts”라는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너희의 마음 전부를, 저희의 진심(眞心)을 달라고 하십니다. 옷을 찢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옷을 찢지 말고, 너희 마음을 찢어서 속에 있는 진심을 보여 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사람들의 형식적인 회개에 식상을 하셨으면 그렇게까지 말씀하셨겠습니까? 옷을 찢고 야단을 하길래 정말 회개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옷을 찢고 나서 언제 그랬느냐는듯이 예전의 삶으로 돌아갑니다.
 
몇 주 전에 이 지역에 있는 후배 목사가 목회하는 곳에 갔었습니다. 교회 창립 4주년을 맞이해서 꼭 와서 축하와 격려의 말씀을 해 달라고 해서 갔었습니다. 그 교회가 Amherst (앰허스트)에 있기 때문에 같은 차로 꼬박 2시간을 운전해서 가야 하는 곳입니다. 올해 목사 안수를 받은, 운동도 잘하고, 노래도 잘하고, 작은 교회였지만 미디어도 잘 다루는 탤런트가 많은 후배 목사였습니다. 순서지도 아주 깔끔하게 잘 만들었습니다. 순서지에 2018년 표어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호세아 6:3) 이렇게 써 놓았습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이 말씀을 이렇게 한 해의 표어로 설정하는 데는 좀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또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께 형식적으로 회개했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 때는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남쪽은 유다라고 불렀고, 북쪽은 이스라엘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스라엘은 에브라임 (Ephraim)이라고도 불렀습니다. 하나님은 호세아 (Hosea)라는 예언자를 통하여 “왜 너희가 그렇게 말해 놓고 그 말을 지키지 않느냐? 너희들의 충성심 (인애)이 아침 같고, 아침 이슬 같구나 (호세아 6:4)” 하시면서 책망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껍데기 크리스천들’이 되어가고 있는 사인들이 보입니다. 기도하기 싫어합니다. 성경 읽기 싫어합니다. 하나님과의 소통의 채널이 꽉 막혀 있습니다. 마치 혈관이 막혀서 피가 잘 통하지 않고 혈압이 높아져서 건강에 적신호가 켜진 것처럼, 오늘 우리들의 믿음생활에 위험 신호가 켜지고 있습니다.
 
해결 방법은, 2,800년경에 같은 증세를 앓았던 이스라엘의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는 것입니다. 위험 신호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해결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오늘 읽은 성경 말씀을 ‘거울’로 삼고, 해결책을 세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옷을 찢는 것 같은 형식적인 회개는 너무나 많이 보았기 때문에 이젠 질렸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내 앞에 너희 마음을 찢어 진심을 보여 달라고 하십니다.
 
뉴잉글랜드에 가을이 오고 있습니다. 나뭇잎이 빨갛게, 아름답게 물들어 가고, 나무들은 열매를 맺어서 한 해를 마무리합니다. 우리는 지금 뉴잉글랜드의 계절이 주는 축복을 맛보고 있습니다. 멀리 화이트 마운틴 (White Mountains)까지 가지 않아도, 우리에게는 아름다운 챨스강 (Charles River)이 가까이 있어서 오면서 가면서 뉴잉글랜드의 가을을 즐길 수 있습니다. 해 마다 찾아오는 이 계절을 맞이하면서 우리도 한 해 동안의 삶을 돌아보고 마무리 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주님은 알곡은 모아 창고에 쌓아 두고, 쓸모 없는 쭉정이는 불에 던져 때우신다고 하십니다. 불행하게도 지금 우리에게 ‘껍데기 크리스천들’이 되어가고 있는 사인들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아직 시간이 있을 때 하나님께로 우리 마음을 돌이켜야 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회개 마저도 형식적인 회개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옷을 찢으면서 회개의 제스처만 취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이런 행위를 중단하고 하나님께 돌아가지 않으면, 영영 기회가 없을 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평생 한번도 주님께 우리의 진심을 드리지 못하고, 참된 헌신 한번 드리지 못하고, 껍데기 크리스천으로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려면 지금 (now) 우리의 마음을 찢어 하나님께 우리의 진심(眞心)을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온전히 돌아서야 합니다.
 
하나님과 막혔던 소통을 시작하십시오. 기도를 시작하고, 성경을 펴서 읽기 시작하십시오. 하나님과 소통하는 일을 부담스럽게 여기지 마십시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머리를 숙이고, 무릎을 꿇는 그 시간은 하나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세상 어느 것하고 바꿀 수 없는 ‘The Sweet Hour of Prayer (달콤한 기도의 시간)’입니다. 처음에는 기도하는 것이 어색하고 힘들 수도 있습니다. 낯선 사람과 처음 만나서 할 말이 없는 것처럼, 하나님과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꾸준하게 소통의 시간을 가지면서 하나님을 조금씩 알아가고 배워 나가야 합니다. 그러면, 소통의 시간이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 한꺼번에 많이 읽을 수 없습니다. 많이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기 때문에 재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꾸준하게 성경을 읽으면 어느 새 성경의 언어에 익숙해져 가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9/23/2018 | 삶이 힘들고 버거울 때 4

그러면 너는 성공할 것이다. Then, You Will Succeed.

잠언 3:1-10

“그렇게 되면, 너는 오래 살고 성공하게 될 것이다.” (2절) “If you do this, you will live many years, and your life will be satisfying.” (New Living Translation) “for they will prolong your life many years and bring you prosperity.” (NIV) 성경을 많이 읽으신 분들은 이와 비슷한 말씀이 성경 어딘가 있다는 생각을 할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주신 말씀 중에 이와 똑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율법책에 씌어 있는 것을 입에서 떠나지 않게 밤낮으로 소리 내어 읽어라. 그리하여 거기에 씌어 있는 모든 것을 잘 지킬 수 있도록 하여라. 그러면 네가 하는 일이 다 잘 되고 또 성공할 것이다.” (여호수아 1:8)

두 말씀은 모두 성공적인 삶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두 말씀을 잘 보면,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공적인 삶을 사는 비결을 다른 데서 찾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데서 찾고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라도 너무나 다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공적인 삶의 조건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성공할 수밖에 없는 조건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모를 잘 만나야 하고, 남보다 좋은 교육을 받아야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성공의 조건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하는 질문을 했는데, 제일 많이 나온 대답이 ‘부모의 재력’이었다고 합니다. ‘부모의 재력’이라고 대답한 사람이 40%였고, ‘인맥’이라고 대답한 사람이 17.5%였고, 학벌이라고 대답한 사람이 13.6%였고, ‘자기 역량’이라고 대답한 사람이 11.5%였다고 합니다. 또 다른 리서치 연구소에서도 조사를 했는데, 성공의 조건으로 제일 많이 나온 대답이 ‘경제적인 능력’이었는데, 33.9%을 차지했다고 합니다. ‘노력’이나 ‘성실성’ 등은 별로 얘기한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성공의 조건’은 이런 것들과 관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그 말씀을 실천하고, 그 말씀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성경을 많이 읽는 사람들도 이 간단한 사실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오늘 읽은 성경 말씀을 보십시오. “내 아들아, 내 가르침을 잊지 말고, 네 마음에 소중하게 간직하여라. 그러면 너는 오래 살고 성공하게 될 것이다.” (1-2절) 이 말씀은 누가 누구에게 한 말씀입니까? 이스라엘의 3대 왕인 솔로몬이라는 사람이 한 말입니다. 그 사람이 ‘잠언’의 형식을 빌려서 다름 세대 사람들에게 남긴 말입니다. ‘잠언(箴言)’의 箴자(字)는 ‘바늘 잠’ 혹은 ‘경계 잠’ 자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에는 바늘이나 침으로 사람의 병을 고쳤습니다. ‘잠언’은 사람을 고치고 바로잡아 주는 말씀이라는 뜻도 있고, 또 바늘에 찔리는 것처럼 아프고 따끔한 경고의 말씀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히브리 말로 잠언을 뜻하는 ‘마샬’이라는 말은 ‘비교, 비유’라는 뜻입니다. 잠언은 ‘진리를 드러내는 짧은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잠언을 영어로 ‘proverbs’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속담이나 격언을 뜻하는 말입니다. p자를 대문자로 쓰면 성경의 ‘잠언’을 뜻하는 말이 됩니다. 속담이나 격언이 하루 아침에 생기지 않잖아요? 오랜 시간을 두고 사람들의 지혜가 쌓이고 쌓여서 속담이 되고 격언이 됩니다.

솔로몬은 아주 지혜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게다가 모든 부귀와 영화를 누린 사람입니다. 방탕한 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 사람이 말년에 남긴 책이 ‘전도서’와 ‘잠언’ 두 책입니다. 모두 자기 경험을 바탕으로 다음 세대 사람들에게 교훈으로 남긴 책입니다. 솔로몬은 “Store my teachings and commands in your heart”라고 합니다. ‘store’는 요즘에 사용하는 컴퓨터 용어이기도 합니다. 언젠가 필요하겠다 싶은 자료들이 있으면 버리지 않고 컴퓨터에 저장해 둡니다. 저는 신문이나 잡지를 보다가 좋은 글이다 싶으면 컴퓨터에 저장해 둡니다. 제 컴퓨터 속에 많은 자료들이 저장되어 있습니다. 이 자료들은 언젠가는 필요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 때 찾아서 사용하면 됩니다. 이것이 ‘store’입니다. ‘마음 속에 간직하라’ 뜻으로 ‘store’라는 말을 쓸 때는 그냥 막연하게 묵혀 두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저장된 것들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to remain fresh and usable for considerable time on being stored (저장되어 있는 동안 필요할 때 사용할 수 있도록 신선함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네 마음 속에 간직하라고 부탁하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성실이고, 다른 하나는 사랑입니다. “너는 성실과 사랑을 절대 버리지 말고, 그것을 네 목에 걸고, 네 마음판에 잘 새겨라.” (3절) 그런데, 이 성실과 사랑을 우리 말로 번역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쉬운성경에는 ‘성실과 사랑’이라고 나와 있지만, 개역성경과 새번역성경에는 ‘인자와 진리 (mercy and truth)’라고 나와 있습니다. 현대어성경에는 ‘남을 아끼는 마음과 진실한 마음’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공동번역성경에는 “성실하게 신의(信義)를 지켜라”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뜻으로 번역된 이유는 히브리어 ‘헤세드’라는 단어가 여러가지 다양한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헤세드’는 인간을 대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뜻하는 아주 중요한 단어입니다. 구약성경을 이해하는 키워드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한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셨다고 할 때 사랑이라는 단어는 ‘헤세드’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불쌍히 여기셨다, 혹은 긍휼하게 여기셨다고 할 때 긍휼이라는 히브리어는 ‘헤세드’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대하실 때 늘 한결 같으시다고 할 때, 성경에는 “하나님은 성실하시다” 라고 나와 있습니다. 성실이라는 말의 히브리어는 ‘헤세드’입니다. “하나님은 자비하시다”라고 말할 때 자비라는 히브리어는 ‘헤세드’입니다.

솔로몬은 다음 세대 사람들에게 이 ‘헤세드’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너를 대하실 때 가지고 계시는 마음을 너도 배우고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마음을 마음 속에 간직해 두었다가 필요할 때 꺼내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에 대한 긍휼의 마음이 필요할 때, 사람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필요할 때, 사람에 대한 따뜻한 친절과 배려가 필요할 때, 네 마음 속에 간직한 하나님의 ‘헤세드’를 기억하고 너도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절대 버리지 말고, 그것을 네 목에 걸고, 네 마음판에 잘 새기라”고 합니다. 마음판에 새기고 목에 걸라는 말은 내가 말하는 ‘성실과 사랑’을 하나님의 ‘헤세드’를 생각하는 ‘as a reminder(기억하게 하는 것으로)’로 삼으라는 뜻입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헤세드’를 실천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칭찬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4절). “Then you will find favor with both God and people, and you will earn a good reputation”이라고 합니다.

우리교회는 젊은 교회이기 때문에 아기를 낳는 부부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병원 심방을 자주 가게 됩니다. 제가 심방을 가서 읽어 주는 성경 말씀이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디모데후서 3:14-17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을 읽어 주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아이를 잘 기르라고 권면합니다. 또 하나는, 누가복음 2:52절 말씀인데요.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이 말씀을 읽어 주고, 이 아이가 예수님의 어렸을 때 모습처럼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받는 아이로 자라나라고 축복해 줍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포인트는,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아이로,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아이로 성장했다는 이 말씀이, 오늘 읽은 잠언 3:4절 말씀,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칭찬을 받을 것이다” 이 말씀을 생각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려서 성장하면서 하나님의 ‘헤세드’를 잘 배우고 실천하는 교육을 받고 자란 것이 틀림없습니다. 예수님의 부모가 돈이 많은 집이 아니었으니까 랍비들에게 율법 교육을 제대로 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과 마리아에게서 하나님의 ‘헤세드’를 잘 배웠습니다. 사람에 대한 사랑과 자비와 긍휼, 친절한 마음 (kindness), 성실한 마음을 잘 배웠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의 favor를 받았습니다. 어디를 가나 사람들이 칭찬합니다. ‘야, 이 아이, 부모가 누군지 반듯하게 잘 자랐구나!” 그리고, 하나님의 favor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favor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이 아이 위에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시대가 필요로 하는 사람이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똑똑하고 머리 좋은 사람, 자기 전공분야의지식 (knowledge)이 많은 사람, 그 분야에서 탁월한 사람으로 인정받는 사람, 누구나 그런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여러분,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학교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들,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들 아닙니까? 자기가 받은 교육을 성공의 도구로 삼는 사람들 아닙니까? 인간에 대한 애정은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 아닙니까? 자기의 전문 분야에서는 알아주는 뛰어난 사람이지만, 이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마음을 찾아볼 수 없지 않습니까? 이런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헤세드’를 찾아볼 수 있습니까?

미국은 건국 역사가 길지 않습니다. 1776년 7월 4일이 독립 기념일이니까 미국의 역사가 기껏해야 242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역사가 짧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유럽처럼 철학자들이 많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 짧은 역사 속에서 미국이 자랑하는 철학자가 있는데, 그 사람이 에머슨 (Ralph Waldo Emerson, 1803-1882, Concord, Massachusetts)입니다. 이 사람이 보스턴에서 났지만, 보스턴에서 가까운 Concord에서 살았고, 거기서 활동했습니다. 에머슨은 하버드 신학교를 나왔습니다. 미국 사람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철학자입니다. 그가 한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To laugh often and much, to win respect of intelligent people and the affection of children; to earn the appreciation of honest critics and endure the betrayal of false friends; to appreciate beauty; to find the best in others; to leave the world a bit better whether by a healthy child, a garden patch, or a redeemed social condition; to know even one life has breathed easier because you have lived. This is to have succeeded.” “자주 많이 웃고, 지적인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아이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정직한 비평가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거짓 친구들의 배신을 견딜 수 있고, 아름다움을 칭찬하고, 다른 사람에게서 좋은 것을 발견하고, 건강한 아이를 낳거나, 정원을 가꾸거나, 사회적인 조건을 보완해서 세상을 조금이라고 좋게 만들고, 당신이 이 세상이 살았음으로 인해 한 사람이라도 숨을 좀 쉴 수 있게 된다면 성공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감동입니다. 성공적인 삶이란 대단한 업적을 세상에 남기거나 많은 부를 축적하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이 세상에 살았기 때문에 세상이 조금이라도 좋아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이 말이 어떻게 들리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이 말에서 많은 감동과 삶에 대한 영감 (inspiration)을 얻고 있습니다. 에머슨의 이 말 속에 뭔가 가슴을 울리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큰 일 아니라 일상의 작은 일을 통해서도 세상을 조금이라고 좋게 만드는 일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대단한 사람만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도 얼마든지 세상을 좋게 하는 일에 참여할 수 있고,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신기하게도 하나님의 마음인 ‘헤세드’를 가지고 사는 삶과 에머슨이 말한 세상을 조금이라고 더 좋게만드는 일이 서로 다른 일이 아니라 같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문제는 간단합니다. 먼저 하나님이 누구인지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아야 하나님의 마음 ‘헤세드’를 품고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인지 배우기 위해서는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성경은 혼자 읽어도 좋지만, 같이 읽고, 자기가 받은 은혜를 서로 나눌 때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공부하는 청년들은 절대로 학교 공부 소홀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 일 때문에 학교 공부를 소홀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학교 공부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교회 일에 헌신했다면 그 헌신은 잘못된 헌신입니다.

열심히 공부하세요. 그리고, 교회에 와서는 성경을 배우세요. 성경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선하심,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배우세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배우세요. 이것은 학교 공부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 지식이 아니라, 오직 교회에서만 여러분에게 줄 수 있는 지식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favor (칭찬)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성공적인 삶이라고 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절대로 네 슬기를 의지하지 마라. 너는 네 모든 길에서 그분을 인정하여라. 그러면 그분이 너의 길을 형통하게 만들어 주실 것이다.” (5-6절) “Trust in the Lord with all your heart. Do not depend on your own understanding. Seek his will in all you do.” 이 말씀은 앞에 나오는 말씀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헤세드’를 찾고 배우는 사람은 전심(全心)으로 하나님을 믿고 신뢰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의지하지 않아야 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먼저 하나님의 뜻을 겸손하게 물어야 합니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배우겠다는 사람이 자신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닙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배우겠다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닙니까? 우리가 성경에서 배운 대로 이런 방식으로 인생을 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favor를 주십니다. “and he will show you which path to take (그러면 하나님께서 네가 어느 길을 가야할 지 보여 주실 것이다).” (6절) 우리 앞에 두 갈래 길이 놓여 있습니다.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 이 길로 가라고 보여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우리 앞에 놓인 삶을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오늘 하나님께서는 잠언 말씀을 통하여 우리 앞에 그 가능성을 열어 주셨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favor을 얻을 수 있는 존귀(尊貴)한 인생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9/16/2018 | 삶이 힘들고 버거울 때 3

나를 인도하시는 하나님 Lord, You Are My Shepherd.

시편 23편

미국의 어느 도시에서 성경 낭독 대회가 열렸습니다. 그 대회는 성경 시편 23편을 감동적으로 잘 읽어서 듣는 사람들에게 공감을 주는 사람을 선정하는 대회였습니다. 당연히 유명한 성우나 아나운서들이 많이 응모를 했고, 그 밖에 사회적으로 이름난 명사(名士)들이 많이 응모했습니다. 대회 날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대회의 결과를 예측했습니다. 이번 대회는 누가 제일 유리할 것이라는 말들이 돌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한 사람 한 사람 차례로 올라가서 시편 23편을 읽는데 끝날 때마다 큰 박수가 나왔습니다. 정말 누가 잘 읽는지 우열을 가리기 어려웠습니다. 대회가 거의 끝날 무렵에 한 사람이 무대에 올라갔습니다. 이 사람은 누구인지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게다가 우승자로 예상했던 사람들이 이미 순서를 마쳤기 때문에 대회장이 약간 어수선한 분위기였습니다. 사회자가 이 사람을 소개했는데도 어수선한 분위기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의 순서가 시작되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시도다.” 이렇게 낭독을 하는데, 처음에 어수선한 분위기가 사라지고 장내가 조용해졌습니다. 이 사람이 낭독을 마치고 내려올 때는 예상 외로 박수가 많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누가 우승할 것이라고 자기들마다 우승자를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심사위원장이 나와 심사평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예상했던 대로 심사위원장은 우승자로 지목되던 사람들을 칭찬했습니다. 목소리가 너무 너무 아름다워서 이 시편을 읽기에 적합한 목소리였다고 칭찬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무명의 사람에 대하여 심사평을 했습니다. “이 분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이 시편에 나오는 목자가 누구인지 알고 읽는 것 같았습니다. 정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다른 분들도 잘했지만, 우리 심사위원들은 이 분에게 1등을 주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렇게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사람이 그 대회에서 우승을 했다고 합니다.
 
오늘 읽은 시편 23편은 그렇게 유명한 시편입니다. 수많은 화가들이 이 시편의 장면들을 상상하면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음악가들이 이 시편을 가사로 해서 작곡을 했습니다. 그 중에 우리 한국 작곡가 나운영 씨가 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이 찬양곡이 유명합니다. 여러분들도 대부분 여러 번 들어 봤을 정도로 유명한 곡입니다.
 
우리는 이 시편을 읽으면서 “참 아름다운 시편이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이 시편을 읽고 있으면 왠지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시편의 말씀을 아름다운 캘리그라피 (calligraphy)로 써서 액자에 넣어 집을 장식합니다. 또 5절에 나오는 “My cup overflows with blessings (내 잔이 넘칩니다)!” 이 말씀은 머그 (mug)에 써 넣으면 참 어울릴 것 같은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그냥 우리에게 위로와 평안을 주는 말씀 이상입니다. 이 시편을 쓴 다윗은 삶과 죽음, 생사(生死)를 넘나들면서 이 시편을 썼습니다. 우리는 다윗이 그 때 느꼈을 생에 대한 극도의 불안감, 그리고 그가 생사를 넘나들면서 느꼈을 ‘the fragility of life (생의 연약함)’ 그리고, 그를 향하여 시시각각 조여 오는 ‘gravity of life (생의 중압감)’를 공감(共感)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이 시편 23편의 진가(眞價)가 드러납니다.
 
다윗은 날마다 위험 속에 노출되어 살았습니다. 사울이 그를 죽이려고 할 때는 군대에 포위되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땅 어디에도 그가 숨을 곳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노년이 되었을 때도 그는 평안한 삶을 살 수 없었습니다. 자기 아들이 자기에게 칼을 겨눕니다. 자기와 함께 평생을 함께 싸워온 부하 장군들이 언제 그를 배신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때마다 그가 의지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밖에 없었습니다. 정말 그에게 하나님은 사람이 살기 위해서 숨을 쉬고, 산소를 공급받아야 하는 것처럼, 평생 위험 속에 노출되어 있었던 다윗에게 하나님은 호흡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그의 고백을 한번 들어 보세요. 그가 쓴 시편 62편에 나오는 고백입니다. “내가 하나님 안에서만 참된 안식을 누립니다. 나를 구원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My soul finds rest in God alone; my salvation comes from him).” (1절) “그분 만이 나의 바위이시며 나를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나의 성벽이시니, 내가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He alone is my rock and my salvation, my fortress where I will not be shaken).” (6절) “사람들이여, 항상 하나님을 굳게 믿으십시오. 그분께 여러분의 마음을 다 털어 놓으십시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이시기 때문입니다 (O my people, trust in him at all times. Pour out your heart to him, for God is our refuge).” (8절)
 
이런 환경 속에서 그는 시편 23편을 썼습니다. 마치 화가가 붓을 들어 그림을 그리듯이, 그는 펜을 들어 시를 썼습니다. 이 시 속에 그는 하나님께서 돌보시고 기르시는 한 마리 양이 되어 등장합니다. 이 시 속에 그가 의지하는 하나님은 양을 인도하는 목자 (shepherd)로 등장합니다. 양은 성격이 온순합니다. 양은 그리 똑똑한 동물이 아닙니다. 시력이 나빠 멀리서 자기를 노리는 사나운 짐승을 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양은 공격 무기가 없습니다. 뿔이 있긴 하지만, 앞을 향하고 있지 않고 뒤쪽으로 말려 있어서 전혀 위협적이지 않습니다.
 
다윗은 분명히 이런 양의 모습 속에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그는 나라를 통일했지만, 그 힘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위협한 일이 없습니다. 자기 정적을 제거하기 위하여 그 힘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사람에 대한 미움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사울 왕에 대하여도 미움이 없었습니다. 그의 적들은 그의 생명을 위협했지만, 그는 그들을 위협하지 않았고, 그들을 향해 칼을 겨누지 않았습니다. 그의 성품은 온유했고 사람들과 다투지 않았습니다. 성경 열왕기상, 하는 역대 왕들에 대하여 기록한 성경입니다. 이 성경에 다윗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언제나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옳은 일을 했습니다. 다윗은 헷 사람 우리아의 일 외에는 그의 평생에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적이 없었습니다.” (열왕기상 15:5)
 
이런 다윗이 가장 불안했을 때, 자기 자신의 연약함을 가장 뼈저리게 느낄 때, 그리고,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도 적들로부터 중압감을 느끼고 있을 때, 그는 하나님을 향해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습니다.” (1절) 목자이신 하나님은 지금 당장 그에게 필요한 것을 채워 주실 뿐만 아니라, 목자이신 그분 안에서 자기가 필요한 모든 것을 얻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위로가 되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가 처한 상황이 꼭 그렇습니다. ‘like defenseless sheep’ 처럼, 스스로 자신을 지킬 힘이 없는 것이 오늘 우리의 모습입니다. 불안하고, 초초하고, 연약하고, 가진 것 없고, 스스로 나를 지킬 힘이 없는 것이 오늘 우리의 모습입니다. 바로 다윗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과 똑 같았습니다. 다윗은 그가 연약할 때 목자 되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의 힘이 강했을 때가 아니라 가장 약했을 때 하나님을 인격적(人格的)으로 (personally) 만났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목자이십니다” 이 고백은 다른 것 아닙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다는 고백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잘 들으세요. 환자들이 입원해 있는 병원에 왜 채플이 있습니까? 병원에 왜 채플린이 있습니까? 사람이 병이 들면 몸도 약해지고 마음도 약해집니다. 그가 의지했던 것들이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 때 하나님을 찾으라고, 그 때 기도하라고 채플이 있습니다. 그리고 도움이 필요할 때 도움을 요청하라고 채플린이 있습니다. 여러분, 감옥에 왜 채플린이 있습니까? 감옥에 갇힌 사람들은 마음이 약해집니다. 아무리 큰 소리치는 사람도 오랫동안 좁은 감옥에 갇혀 있으면 그 때 비로소 자신이 연약한 존재하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 때 도움을 받으라고 채플린이 있습니다.
 
지금 이곳 보스턴에 와서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은 보스턴에 던져진 한 마리 양과 같습니다. 여러분의 일생 중 지금이 가장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는 시기입니다. 학교에 가 보면 왜 그렇게 나보다 잘 난 사람들이 많습니까? 그들 틈에서 내가 그동안 우물 안의 개구리였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내가 아는 사람 하나는, 자신이 꽤 잘 나간다고 생각했습니다. 악기 연주를 하는 사람이었는데, 제가 정착하는 과정에서 좀 도움을 줬습니다. 오디션 보는 데도 제가 따라갔습니다. 아주 자신 있게 연주를 잘 했습니다. 다른 사람과는 달리 교수가 이 학생에게 또 한번 연주를 해 보라고 하면서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저는 잘 몰랐는데, 그 교수가 아주 유명한 교수였습니다. 이 학생은 한국에서부터 그 교수를 지도 교수로 하고 싶어서 마 왔습니다. 며칠을 기다려서 그 교수에게서 편지가 왔습니다. “난 이미 제자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너를 제자로 받아 줄 수가 없으니 다른 교수를 만나보라”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 때 당장에는 이 학생이 큰 충격을 받았지만, 그게 이 학생에게는 자신을 돌아보는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다윗이 “나에게 부족한 것이 없다”고 고백한 이유는, 그의 목자 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목자 되시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고, 하나님 안에서 그는 필요한 모든 것을 얻었습니다. 목자 되시는 하나님을 따라갔더니, 그곳에 그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있었습니다. 내 마음대로 인생을 살았을 때 필요한 모든 것을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목자로 삼고, 나는 양이 되어 그를 따라 살았더니 내가 필요한 모든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가 연약할 때 하나님은 그의 ‘피난처 (refuge)’가 되시고, 때로는 강력한 ‘요새 (fortress)’가 되었습니다. 그의 마음이 흔들리고 불안할 때, 하나님은 그가 의지할 든든한 바위 (the rock)가 되었습니다. 적들의 공격이 빗발칠 때는 하나님은 적들의 공격을 막아 주는 ‘성벽 (shield)’이 되었습니다. 그의 영혼이 지치고 피곤할 때 그는 하나님 안에서 ‘안식 (rest)’을 얻었습니다. 그가 배고파 굶주릴 때 하나님은 그를 ‘푸른 초장 (green meadows)’으로 인도하시고, 그가 목마를 때는 ‘잔잔한 시냇가 (beside peaceful streams)’로 인도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다윗은 “주님께서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내게 식탁을 차려 주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내 머리 위에 향기로운 기름을 바르시며 내 잔이 넘치도록 가득 채워 주십니다 (5절)”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My cup overflows with blessings.” ‘my cup’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자신의 존재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시적인 표현입니다. ‘내 잔’이 항상 비어 있는 ‘빈 컵’일 수도 있습니다. ‘빈 컵’을 가진 사람은 항상 모자라고, 부족하고, 만족하지 못하는, 결핍된 것이 많은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다윗은 “나의 컵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으로 흘러 넘친다”고 고백합니다. 다윗의 이 고백이 중요한 이유는, 그의 고백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이 어떤 삶을 살게 되는지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컵’이 차고 넘쳐야 다른 사람에게 베풀 수 있습니다. 나의 ‘컵’이 비어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베풀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가진 것이 많아도 ‘빈 컵’을 들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가진 것이 없어도 그 사람의 ‘컵’이 하나님의 축복으로 차고 넘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베풀 수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가진 것이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많이 가진 사람이 부자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많이 베푸는 사람이 부자 아닙니까? 나의 ‘잔’이 흘러 넘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이 문제를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문제가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과 인격적인 관계를 형성하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 사람과 많은 대화가 필요합니다. 대화도 피상적인 대화가 아니라 마음을 터 놓고 대화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도 그런 방식으로 형성됩니다. 아까 인용했던 시편 62:8 말씀을 보십시오. “항상 하나님을 굳게 믿으십시오. 그분께 여러분의 마음을 다 털어 놓으십시오 (Trust in him at all times. Pour out your heart to him).” 이 말씀 속에 두가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원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믿지도 않으면서도 어떻게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원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는 일부터 시작하십시오. 둘째는, 하나님께 마음을 털어 놓는 것입니다. 마음 속에 숨기는 것 없이, 마음 속에 감추는 것 없이 하나님께 모두 ‘pour out’ 하는 것입니다.
 
유학생활과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wilderness)’은 참 많이 닮았습니다. ‘광야’는 특별한 곳입니다. ‘광야’는 모든 것이 부족한 곳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왔던 방식이 통하지 않는 곳입니다. 도무지 방향을 알 수 없는 곳이 ‘광야’입니다. 그리고, 미래를 예측할 수 없어 불안한 곳이 ‘광야’입니다. 유학생활이 꼭 그렇지 않나요? 유학생활에 부족한 것이 많습니다. 유학생활에서는 모든 일을 자기가 혼자 결정해야 합니다. 유학생활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떠나지 않는 생활입니다. 이렇게 광야생활과 유학생활이 많이 닮았지만,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도 유학생활에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여러분을 인도해 오셨는데, 여기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이보다 더 안타까운 일이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다윗의 마지막 고백을 들어 보십시오. “여호와의 선하심과 사랑하심이 내가 죽는 날까지 나와 함께 하실 것이 틀림없습니다 (Surely your goodness and unfailing love will pursue me all the days of my life).”(6절) 하나님의 ‘goodness’ 그리고 하나님의 ‘unfailing love’ 이 두가지가 내 평생 나는 떠나지 않는다고, 나를 ‘pursue’할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 안에 있었기에 다윗은 이 두가지가 평생 나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불확실성의 시대에, 우리의 미래에 대하여 이렇게 확신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