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8/2018 | 열매 맺는 계절 3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 것이다! You Can Identify People By Their Fruit!

마태복음 7:15-20

영어에 ‘Sunday Christian (선데이 크리스천)’이라는 말이 있고, ‘churchgoer (교회 다니는 사람들)’라는 말이 있습니다. 비슷한 말로 요한 웨슬리는 ‘반쪽 크리스천 (Half Christian)’이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선교학에서는 ‘Nominal Christian (명목상의 크리스천)’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 사람이 참된 크리스천인지 그저 크리스천이라는 이름만 가진 사람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 사람이 참된 예언자인지, 거짓 예언자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 사람이 참된 목사인지, 거짓 목사인지 어떻게 구별할 수 있겠습니까?

그 사람의 말만 들어봐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양의 옷을 입고 천사처럼 사람들에게 다가옵니다. 다들 그 사람이 천사일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는 굶주린 늑대가 들어 있습니다. 전에 늑대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습니다. 늑대처럼 탐욕스럽게 먹어 치우는 짐승이 없습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잡아 먹습니다. 집에서 기르는 소도 잡아 먹고, 양도 잡아 먹고, 닭도 잡아 먹고, 닥치는 대로 잡아 먹습니다. 마을에 늑대가 나타나면 온 마을 사람들이 긴장합니다. 늑대는 혼자 행동하지 않고 꼭 3-4마리, 혹은 5-6마리가 같이 행동합니다. 그리고 얼마나 영리한지 잘 잡히지 않습니다.

그 속에 늑대가 들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양처럼 겉모습을 위장하기 때문에 도무지 양인지, 늑대인지 분별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열매를 봐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You can identify people by their fruit (그들의 열매를 보고 그들이 누구인지 알 수 있다., 16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fruit (열매)’라는 말은 그 사람의 ‘행동’ 혹은 그 사람이 살고 있는 ‘삶의 방식’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만일 그 사람이 가시나무라면 반드시 가시나무의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엉겅퀴나무라면 엉겅퀴 열매를 맺게 되어 있지, 그 나무가 어떻게 무화과 열매나, 포도 열매를 맺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좋은 나무는 반드시 좋은 열매를 맺게 되고, 나쁜 나무는 반드시 나쁜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말이나, 그 사람의 겉모습을 보지 말고, 그 사람의 열매를 보고 판단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읽는 우리들은 어떤 생각을 해야 하겠습니까?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하겠다” 이런 생각이 드는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읽은 것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을 제대로 읽은 사람이라면 “좋은 나무가 되어야 하겠구나!” 이런 생각이 들어야 합니다. 좋은 열매를 맺으려고 애를 쓰고 노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나무가 되려고 해야 합니다. 좋은 나무가 되면, 예수님의 말씀처럼 좋은 열매를 맺게 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성경을 읽다가 깜짝 놀란 말씀이 있습니다. 마가복음 7:37에 나오는 말씀인데요. “사람들은 정말로 놀라워하며 ‘예수님께서 하시는 것은 모두 훌륭하다’라고 말했습니다.” “They were completely amazed and said again and again, ‘Everything he does is wonderful.’” 어떻게 보면 평범한 말씀같이 들리기 때문에 그냥 읽고 지나갈 수 있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저에게 감동을 준 이유는 그 말씀을 통해서 2,000년 전에 사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에게는 흠도 없고, 티도 없고, 죄가 없으신 어린양이기 때문에 우리를 위한 속죄 제물로 부족함이 없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분이니까 그가 맺는 열매도 모두 훌륭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맺으신 열매는 단 하나도 나쁜 열매가 없었습니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은 좋은 나무였던 것입니다. 이 평범한 말이 오늘 우리들에게 다소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동안 좋은 나무인 줄 알았던 사람들이 속속 나쁜 열매를 맺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동안 양으로 알고 있었던 사람들 속에 탐욕스러운 늑대가 들어 있었다는 것을 뉴스나 신문 지상에서 보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좋은 나무가 되는데 모든 것을 걸어야 합니다. 순서가 바뀌면 안 됩니다. 절대로 좋은 열매를 맺으려는 노력을 먼저 하지 않아야 합니다. 좋은 나무가 되는 일은 집의 기초 (foundation)를 닦는 일과 같습니다. 귀찮고, 뻔한 일처럼 보이고, 시간이 걸리고, 시간 낭비인 것처럼 보여도 좋은 집을 짓기 위해서는 기초를 견고하게 잘 닦아야 합니다. 이 과정을 거치지 않고 집을 짓기 시작하면 언젠가는 꼭 탈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좋은 나무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좋은 나무가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좋은 나무가 되는 길을 그렇게 정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성경 말씀을 보세요. “영접하는 사람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12) 여기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말은 ‘좋은 나무’가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16) 이 말씀에서도 ‘영생을 얻는 일’을 ‘좋은 나무가 되는 일’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신 것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자신들을 위해 죽었다가 다시 사신 분을 위해 살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 그 어떤 사람도 세상의 관점으로 알지 않겠습니다. 전에는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세상의 관점으로 알았으나,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창조입니다.” (고린도후서 5:15-17)

저는 바울서신에 나오는 말씀을 읽을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합니다. 바울은 신학적인 천재입니다. 단순히 머리가 좋다는 뜻이 아니라, 어려운 신학적인 개념을 쉬운 일상의 용어로 해석하고 적용하는 일에 탁월하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한번 New Living Translation으로 읽어 보십시오. “He died for everyone so that those who receive his new life will no longer live for themselves. Instead, they will live for Christ, who died and was raised for them. So we have stopped evaluating others from a human point of view. At one time we thought of Christ merely from a human point of view. How differently we know him now! This means that anyone who belongs to Christ has become a new person. The old life is gone; a new life has begun!”

“He died for everyone so that they will live for Christ.” 이 말씀을 생각하다 보니 언젠가 한번 여러분에게 소개했던 일본의 우치무라 간조 (Uchimura Kanzō, 1861-1930) 목사님의 말이 생각납니다. “I for Japan; Japan for the World; The World for Christ; And All for God (나는 일본을 위해, 일본은 세계를 위해, 세계는 그리스도를 위해,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을 위해)!” 우찌무라 간조가 1884년 23살의 나이에 매사추세츠 서쪽에 있는 앰허스트 대학 (Amherst College)에서 유학생활을 하면서 그는 이렇게 자신의 뜻을 세웠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왜 지금 우리 세대에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자기 인생을 드리겠다고 뜻을 세우는 사람들이 나오지 않느냐 하는 것입이다. 왜 지금은 우리 중에서 자신의 뜻을 세우는 사람들을 찾아볼 수 없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큰 뜻을 품고, 이를 실천해 나가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도와주십니다. 일본이 2차 세계 대전에서 패한 후, 새롭게 나라를 재건하는 일에 쓰임을 받은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아십니까? 그들 중 상당 수가 우찌무라 간조 목사님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우찌무라 간조 목사님은 우리나라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함석헌, 김교신 등 걸출한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모두 우찌무라 간조 목사님에게서 배운 사람들입니다.

나는 지금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 좋은 나무가 되어야 하는데, 좋은 나무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을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좋은 나무가 된다는 것은 수사적인 표현 (rhetoric expression)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알기 전에 자기 자신만 알던 사람의 삶의 가치와 삶의 방향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이런 과정을 거쳐서 좋은 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좋은 나무가 된다는 것은 바울의 표현대로 하면 ‘새로운 창조 (New Creation)’ 혹은 ‘새로운 사람 (New Person)”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만 알던 사람의 관점(觀點)이 ‘a human point of view (인간적인 관점 혹은 세상적인 관점)’에서 ‘하나님의 관점 (God’s point of view)’로 가치에 대한 관점이 바뀌는 것입니다. 이것이 ‘좋은 나무’가 되라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 들어 있는 뜻입니다.

‘좋은 나무’를 만드는 일, ‘좋은 나무’를 만드는 사역이 바로 교회가 해야 할 일입니다. ‘좋은 나무’가 되는 일은 공부를 많이 하거나, 교양을 많이 쌓아서 되는 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교회가 이 일을 해야 합니다. 지금 교회가 이 일을 하지 않으면 세상에는 겉모습은 양인데, 속에는 늑대가 들어 있는 크리스천들로 차고 넘치게 될 것입니다.

스코트랜드의 한 교회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주일 예배를 마친 후에 장로들이 목사님께 드릴 얘기가 있다고 해서 같이 모였습니다. 장로 대표가 하는 말이 우리 장로들은 목사님에게 사임을 권유하기로 의견을 모았다고 했습니다. 목사님이 연세가 많고 또 교회를 위해서 하는 일이 없다는 것이 사임을 권하는 이유였습니다. 장로들은 자기들의 의견이 타당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데이터를 제시했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 목사님이 하신 일은 한 명에게 세례를 주신 일 밖에 없는데, 그 한 명도 어린 소년이라는 것입니다. 장로들이 돌아 간 후에 풀이 죽은 목사님은 교회 뜰을 이리저리 걷고 있었습니다. 그 때 누가 “목사님!” 하면서 목사님의 팔꿈치를 툭 쳤습니다. 그래서 뒤를 돌아보았더니 바로 그 목사님이 세례를 준 로버트라는 아이였습니다. “로버트야, 목사님이 뭘 도와줄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 아이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 목사님, 저는 예수님을 영접한 후에 앞으로 선교사가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제가 선교사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그래? 참 훌륭한 생각을 했구나. 목사님이 로버트를 위해서 기도하마!”

세월이 흘러 이 로버트라는 아이는 자기의 소원대로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아프리카 선교의 문을 연 로버트 모팻 (Robert Moffat, 1795-1883, 남아프리카 선교사)입니다. 유명한 데이빗 리빙스톤 (David Livingston, 1813-1873)의 장인입니다. 데이빗 리빙스톤은 장인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이 목사님이 하신 일이 결코 작은 일이 아니었습니다. 한 해 동안 한 일이 겨우 어린아이 한명에게 세례 준 일이 전부였느냐고 따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어린아이 하나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세례 받고, 크리스천이 되었기 때문에 아프리카 전체가 이 아이에게 복음의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우리교회가 해야 할 일이 바로 이런 일입니다. 사람들에게 복음을 가르쳐서 좋은 나무가 되도록 하는 일, 이 일이 바로 우리교회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All church leaders must be prepared for a good tree making ministry (모든 교회 리더들은 좋은 나무를 만드는 사역을 위해 준비되어야 합니다). 장로님들도, 권사님들도, 집사님들도, 가족장들도, 간사들도, 목사도, 전도사도 이 일을 위해 준비되어야 합니다.

이번 창립 40주년 기념 사업의 일환으로 교회 사진첩을 만들었습니다. 사진으로 지난 역사들을 정리하면서 2018년 사진들은 따로 섹션을 분리해서 실었습니다. 사진첩을 보고 있으면 지나간 과거가 한 눈에 보입니다. 이제 5년 후, 10년 후에는 우리교회의 어떤 사진들이 실릴지 궁금합니다. 교인들이 모여 기도하는 사진들, 찬양하는 사진들, 식사하는 사진들도 좋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진은 따로 있습니다. 좋은 나무를 만드는 사역에 동원된 사람들의 사진입니다. 이 자리에 앉은 여러분들이 이 사진의 주인공들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혜는 그것을 따르는 자들에 의해서 옳다는 것이 증명된다 (But wisdom is shown to be right by the lives of those who follow it①." / ①Or But wisdom is justified by all her children).” (누가복음 7:35) 우리가 좋은 나무가 되어서 좋은 열매를 맺으면,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가 좋은 열매를 맺지 않으면, 그것은 곧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틀렸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 증명하는 셈이 됩니다.

그러므로,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은 이렇게 중요합니다. 좋은 나무가 되면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는 좋은 열매를 맺으려고 노력할 것이 아니라, 좋은 나무가 되려고 애써야 합니다. 교회는 좋은 나무 만드는 사역을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이 교회를 통해서 좋은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 계속 나와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교회가 좋은 교회라는 것이 증명됩니다.

가을은 열매 맺는 계절입니다. 여름철에 푸르렀던 잎들이 아름다운 단풍잎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모두 창조주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것 같습니다. 우리도 이 계절에 좋은 열매를 많이 맺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매년 이 때가 되면 뭔가 허전한 마음이 듭니다. 가을이어서 감상적인 (sentimental) 생각이 들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열매가 없기 때문입니다. 좋은 열매를 맺지 못했다는 그것이 우리 마음을 허전하게 합니다. 좋은 나무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를 쓴 저자는 “우리가 언제까지 신앙의 기초를 닦는 일을 할 것입니까? 이제는 좀 성숙한 단계로 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히브리서 5:12)?” 이렇게 말했습니다. 충분히 그렇게 말한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다시 우리에게 신앙의 기초로 돌아가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는 일입니다. 복음의 핵심입니다. 복음은 쉽다고 생각하고 이 일을 심각하지 다루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심각하게 배우지 않고 대충 지나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를 주님으로 영접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배웠다면, 우리는 이미 좋은 나무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좋은 나무가 되어 있지 않거든요? 어쩔 수 없이 우리는 다시 기초로 돌아가야 합니다. 기초로 돌아가서 복음을 다시 배워야 합니다. 비록 시간이 걸리고 답답할지라도 어쩔 수 없이 우리는 복음을 다시 배워야 합니다. 그것이 좋은 나무가 되는 유일한 길입니다.


10/21/2018 | 열매 맺는 계절 2

내 안에 거하라! Abide in Me!

요한복음 15:1-8

가을이 되면 생각나는 시가 있습니다. 릴케 (Rilke, Reiner Maria, 1875-1926)의 ‘가을날’이라는 시입니다. 한번 들어 보시겠습니까?
 
주여, 때가 되었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 위에 드리우시고,
들판에는 바람을 풀어 놓아 주소서.
마지막 열매들을 영글게 하시고,
이틀만 더 남국(南國)의 따뜻한 날을 베푸시어,
열매들이 온전히 무르익게 하시고
진한 포도주에 마지막 단맛이 스미게 해 주소서.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홀로 있는 사람은 오래도록 그럴 것이며,
깨어서,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이고
낙엽이 떨어져 뒹굴면, 불안스레
가로수 길을 이리저리 헤맬 것입니다.
 
“마지막 열매들을 영글게 하시고, 이틀만 더 남국의 따뜻한 날을 베푸시어 열매들이 온전히 무르익게 하시고, 진한 포도주에 마지막 단 맛이 스미게 하소서” 마지막 뜨거운 햇볕 속에서 익어가는 열매들을 묘사한, 가을의 깊은 맛을 느끼게 하는 시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 속에 이런 말씀이 있었습니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어 내 제자인 것을 나타내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신다.” (8절)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When you produce much fruit, you are my true disciples. This brings great glory to my Father.” 또 이 말씀이 ESV (English Standard Version)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By this my Father is glorified, that you bear much fruit and so prove to be my disciples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어서 내 제자인 것을 증명하는 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신다).” 이 말을 거꾸로 말하면, 이런 말씀이 됩니다. “너희가 열매를 맺지 못해서 내 제자인들을 증명하지 못한다면, 내 아버지께서는 영광을 받지 못할 것이다.”
 
문제는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여기서 ‘열매’라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증명하는 일들을 말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라는 열매들을 세상에 보여주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이번 2018 ReNEW 주제가 선교입니다. 복음과 교회와 선교라는 세 가지 토픽을 3년 사이클로 돌려가면서 열립니다. 지난 해에는 ‘교회’라는 토픽을 다루는 해였기 때문에 ‘에클레시아’라는 주제로 ReNEW가 열렸습니다. 내년에는 처음으로 돌아가서 복음을 토픽으로 열리게 될 것입니다.
이번 ReNEW는 선교사 지원생을 선발해서 선교사를 파송하는 집회가 아닙니다. 이번 ReNEW 주제가 ‘프로클레이머스 (Proclaimers)’입니다. ‘복음을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동시에 ‘프로클레이머스’라는 말은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여주는 사람들’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열매가 열리면 사람들이 모두 그 열매를 바라보듯이, 저 멀리 아프리카로 선교사로 나가지 않아도, 우리 크리스천들이 각자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통해서 “야, 저 사람들이 믿는 하나님을 대단하신 분이구나!” 이렇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이게 될 것입니다. 2018 ReNEW는 각자의 삶의 영역에서 크리스천으로서 어떻게 열매 맺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지 한국과 미국에 계시는 훌륭한 강사님들을 통해서 말씀을 듣게 되고, 또 다양한 세미나를 통하여 열매 맺는 삶에 대한 실제적인 강의를 듣게 될 것입니다.
 
예전에는 교회들마다 자기들이 얼마나 굉장한 선교사업을 하고 있는지 자랑했습니다. 그래서 대형교회 주보 밑에는 자기들이 돕고 있는 선교사들의 명단을 깨알같이 글씨로 올렸습니다. 어떤 교회는 50명의 선교사를 후원하고, 어떤 교회에서는 100명의 선교사를 후원하고, 어떤 교회에서는 150명, 200명의 선교사를 후원한다고 자랑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많은 선교사들을 후원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막상 선교사를 후원하는 자신들이 올바른 크리스천의 삶을 살지 않는데, 그런 자랑들이 모두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우리교회 선교 많이 하고 있다”고 자랑하면서 막상 자기 자신은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줄 열매가 하나도 없는데, 그 자랑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지금 한국의 대형교회들마다 세상에 보여줄 열매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 속속 드러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현지에서 사역하고 있는 선교사들의 헌신이 의미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과거의 선교에 대한 반성과 함께 선교지와 우리의 삶의 현장을 분리시키지 말고 둘을 하나로 통합하자는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 자신들이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세상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Go into all the world and preach the good news to all creation (마가복음 16:15)”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우리 각자의 삶의 현장으로 침투해 들어가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굳이 예수를 믿으라고 선포하지 않아도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아름다운 열매를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해야 합니다.
 
며칠 전에 신문 기사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주윤발이라는 홍콩 배우가 있습니다. 이 사람이 출연한 대표작이 1967년에 상영된 ‘영웅본색 ((英雄本色)’이라는 영화입니다. 영어 제목은 ‘A Better Tomorrow (더 나은 내일)’입니다. 원래 영어 제목은 ‘Story of a Discharged Prisoner (출감한 한 죄수 이야기)’였는데, 이 영화가 세 차례 리메이크가 되면서 영어 제목이 ‘A Better Tomorrow’로 바뀌었습니다. 주윤발은 이 영화로 스타가 된 홍콩 배우입니다.
 
주윤발이 최근에 자신의 전 재산을 기부한다고 선언했습니다. 기부금 액수가 홍콩 돈으로 56억입니다. 한국 돈으로는 8,100억입니다. 그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돈은 내 것이 아니라 내가 잠시 보관하는 것이다.” 그는 지금도 자가용을 타지 않고 대중교통을 이용한다고 합니다. 대중 교통을 이용하면서 팬들과 인증 사진을 찍는 것이 그의 평범한 일상생활이라고 합니다. 취미생활도 돈이 들지 않는 걷기와 낚시라고 합니다. 그는 노키아 전화기를 17년째 사용하다가 고장이 났는데 더 이상 서비스를 받을 수 없어서 최근에 바꿨다고 합니다. 옷도 아주 검소하게 입는다고 합니다. “옷은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려고 입는 게 아니라 내가 편하면 그만이다”라는 소신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용돈은 한 달에 12만원을 쓴다고 합니다. 저는 이 기사를 보면서 확인할 길은 없지만 주윤발이 크리스천이 맞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돈에 대한 그의 철학은 크리스천의 스튜워드십 (stewardship)에서 나온 것이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확인해 보았더니 아쉽지만 불교 신자였습니다. 한국 연예계에서도 연일 주윤발이 화제라고 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열매를 맺는 삶을 살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열매 맺는 비결을 포도나무의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우선 열매를 잘 맺으려면 불필요한 가지를 잘라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절). 포도나무를 기르는 사람들에게는 불필요한 가지를 잘라주는 전지 작업 (pruning)이 필수적입니다. 그래야 크고 탐스러운 포도 열매를 맺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도 불필요한 가지를 잘라줘야 열매를 잘 맺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해 준 말 때문에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는 3절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무엇이 참이고 거짓인지 배울 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실천할 때 정원사이신 하나님은 내 안에서 불필요한 것들을 잘라 내시는 작업을 하십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크리스천으로 살고 있으면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유는 열매를 맺는 데 불필요한 것들을 잘라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전지작업을 해 주지도 않고 내년에 좋은 열매가 열리기를 기대하는 어리석은 농부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둘째로,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잘 붙어 있어야 합니다. 포도 열매는 포도나무에 열리는 것이 아니라 가지에 열립니다. 그 가지가 포도나무에 잘 붙어 있어야 포도나무로부터 수액(水液, sap)을 받을 수 있습니다. 잘 붙어 있지 않아서 수액을 받지 못하면 금방 말라 죽고 말 것입니다.
 
크리스천의 삶에서 열매를 맺는 비결이 똑 같습니다. 주님은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정원사이시다 (1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포도나무 가지인 우리가 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잘 붙어 있어야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주님과 우리 사이에 ‘교제 (fellowship)’가 생겨야 합니다. ‘fellowship’이라는 단어를 보면 교제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fellow’라는 말은 친구라는 뜻입니다. ‘fellowship’ 그러면 ‘친구 관계’ ‘친구 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fellowship’을 갖는다는 것은 예수님과 친구 사이가 된다는 뜻입니다. 재미 있지 않습니까? 성경에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 중에서 하나님과 가장 ‘fellowship’을 잘 나누었던 사람이 누구였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1위는 모세였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과 모세 사이는 친구 사이였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마치 사람이 자기 친구에게 말하듯이 모세와 얼굴을 맞대고 말씀하셨습니다 (The LORD would speak to Moses face to face, as one speaks to a friend).” (출애굽기 33:11) 2위는 아브라함입니다. 성경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친구라고 불렀다 (이사야 41:8, 야고보서 2:23)”는 말씀이 나옵니다.

문제는 우리도 예수님과 그렇게 친한 친구 사이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것을 행하면, 너희는 내 친구다 (You are my friends if you do what I command).” (요한복음 15:14) 예수님과 우리가 진한 fellowship를 나누는 사이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고 실천해야 합니다. 아주 쉬운 말씀인데, 많은 사람들이 이 쉬운 말씀을 따르지 않습니다. 예수님 말씀을 실천하지 않으면서 QT나 말씀 묵상을 통해서 예수님과 fellowship을 나누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착각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fellowship을 나누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친한 친구 사이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와 서먹서먹하거나 낯을 가리는 그런 사이가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나와 함께 fellowship을 나누자고 우리를 먼저 초대하십니다. “내 안에 있어라. 그러면 나도 너희 안에 있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가지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않으면, 스스로는 열매를 맺을 수 없다.” (4절)
 
이 말씀 속에 열매 맺는 믿음생활의 비밀이 들어 있습니다. 먼저 “내 안에 거하라”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영어 성경에 보면 이 말씀이 “Remain in me”라고 나와 있습니다. “내 안에 머물러 있어라, 내 안에 있어라” 이런 뜻입니다. 그런데, KJV이나 NASB, ESV에 보면 “Abide in me”라고 했습니다. ‘abide’라는 말은 ‘remain’이라는 뜻도 있고, ‘to have one’s abode (주소를 가지다, 거주지를 가지다)’ 이런 뜻입니다. 말 그대로 해석하면, 우리의 거주지, 우리의 주소가 예수님이 되는 것입니다. “내 안에 거하라”는 말은 “나와 함께 살자. 내 집으로 주소를 정해라” 이런 뜻입니다.
 
주님은 억지로 내 마음의 문을 열게 하고 내 안으로 들어오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먼저 예수님 안으로 들어오기를 바라십니다. 앤드류 머레이 (Andrew Murray, 1828-1917, South Africa)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It is the wholehearted surrender in everything to do His will, that gives access to a life in the abiding enjoyment of His love (무슨 일을 하든지 그의 뜻을 따르겠다고 온 마음을 그분께 드리는 것은 곧 그의 사랑의 기쁨 속에 거하는 삶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는 또 이런 말도 했습니다. “Let me learn the lesson. Abiding is to be an act of the will and the whole heart (거한다는 것은 곧 의지와 온 마음의 행위이다).”
 
주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영혼 없는 말 장난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주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온 마음으로 우리의 의지를 주님께 드리는 행위입니다. 이런 의지의 결단이 주님께 드려질 때 주님과 나 사이에 진정한 ‘fellowship’이 생기고, 그 때 우리의 삶에 열매가 열립니다. 지금까지 오랫동안 믿음생활 했는데도, 오랫동안 교회생활 했는데도 열매 맺는 은혜와 기쁨과 감사를 몰랐던 사람들은 과연 주님과 나 사이에 ‘fellowship’이 있었는지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가지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않으면, 스스로는 열매를 맺을 수 없다 (For a branch cannot produce fruit if it is severed from the vine, and you cannot be fruitful unless you remain in me).” (4절)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열매 맺는 원리를 무시하고, 자기 힘으로 열매를 맺으려고 애쓰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 중에도 이런 오류를 범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열매 맺는 일이 먼저가 아니라, 주님과의 ‘fellowship’이 먼저입니다. 주님과 ‘fellowship’이 있는 사람에게 열매는 저절로 열리는 것입니다. 열매는 ‘fellowship’의 결과로 얻는 생산물(product)이지 우리가 애써서,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결과가 아닙니다. 오늘 주님이 주신 말씀입니다.

10/14/2018 | 창립 40주년 기념예배

신앙고백이 있는 교회 A Church Confessing Jesus As Lord

마태복음 16:13-20

찬송 301장 ‘지금까지 지내 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이 찬송을 부르면서 저의 마음에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한이 없는 주의 사랑 어찌 이루 말하랴/물 붓듯이 부으시는 주의 은혜 족하다.” 우리교회 40년의 역사 중에 32년을 제가 섬겼습니다. 제가 목사로서 부족한 것이 얼마나 많은 지 누구보다도 제가 잘 압니다. 그리고, 그동안 저와 함께 교회를 섬겼던 분들이 잘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 자리에 서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 밖에, 더 이상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Because of our faith, Christ has brought us into this place of undeserved privilege where we now stand (로마서 5:2).” “다른 것은 하나도 보시지 않고, 오직 믿음 하나만 보신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지금 이 감당할 수 없는 자리에 서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믿음 말고 다른 것들을 보셨더라면 (나는 너무나 부족한 것이 많은 사람이어서) 도저히 이 자리에 설 수 없었다는 고백입니다. 바로 이 바울의 고백이 지금 여러분 앞에 서 있는 저의 고백입니다.

저는 1986년에 이 교회에 교육목사로 부임해서, 1988년에 담임 목사가 되었습니다. 저는 그 때 보스턴 신학교 박사 과정에 있었기 때문에 교회를 담임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지난 일을 돌이켜 보면 그 때 하나님은 저에게 담임 목사직을 수락하도록 urge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 때 교회 형편을 모르시는 분들은 “아니, 이렇게 좋은 교회에서 담임 목사로 부르는데 주저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 교회는 결코 좋은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때 하나님께서 저를 urge하시는 것을 느끼고 담임 목사 직을 수락했습니다.

제가 담임 목사로 취임하는 날, (거창한 취임예배를 드린 것은 아니라 그냥 담임 목사가 되어 첫 설교를 한 것입니다.) 그 때 제 설교 제목은 ‘산 위에 있는 교회’였습니다. 본문 말씀은 마태복음 5:14-16 말씀이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제가 이런 설교를 하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제가 한국에서 신학교에 들어간 것이 1971년이었습니다. 그 때 기독교서회라는 곳에서 출판한 ‘현대신서’라는 시리즈가 있었습니다. 1970년에 ‘현대신서 22 번’이 나왔는데, 책 제목이 ‘산 위의 마을’이었습니다. 오토 브루더 (Otto Bruder)라는 사람이 독일어 로 쓴 책인데, 누가 번역을 한 덕분에 한국의 독자들이 읽을 수 있었습니다. 독일의 한 시골 마을에 한 젊은 목사가 부임해 왔습니다. 그 때 독일은 히틀러의 나치 정권 밑에 있었습니다. 독일 교회들은 할 말도 못하고 전전긍긍하고 있었습니다. 말 한번 잘못했다가는 비밀 경찰들에게 끌려 가는 때였습니다. 그 때, 한 젊은 목사가 부임해 온 것입니다. 교인들은 모두 그 젊은 목사를 주목했습니다. 과연 그가 예배 시간에 무슨 말을 할 것인가 하고 젊은 목사의 입을 주목했습니다. 그런데, 교인들의 기대와는 달리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가고, 반 년이 지나도 이 젊은 목사는 묵묵히 자기 할 일만 할 뿐, 그의 입에서 교인들이 기대했던 말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교회 안에 변화가 있었다면 이 젊은 목사가 주 중에 성경 공부반을 만들어 열심히 가르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성경공부 시간에 별다른 말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한 주 한 주 지나가던 어느 주일 아침, 예배가 막 시작되려고 하는 시간에, 검은 색 지프차가 교회에 들어왔고, 비밀경찰들이 다짜고짜로 젊은 목사를 데려가려고 했습니다. 교인들은 영문을 몰라 당황하고 있던 때에, 그 마을 입구에서 구두 수선 가게 (Shoe Repair Shop)을 운영하고 사람이 비밀경찰 앞을 막아서는 것이었습니다. 교인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저 사람이? 어쩌려고?” 하면서 수군거렸습니다. 이 사람은 그 동네에서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새 목사님 이 부임하면서 이 사람이 성경공부에 빠지지 않고 나오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특별한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지금 “우리 목사님을 데려갈 수 없다”고 비밀 경찰 앞을 막아 선 것입니다. 바로 이 장면이 그 책의 하이라이트 장면입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교회를 담임한다면 이런 목회를 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한국에서는 부목사로 있었으니까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미국에 유학 와서 교회를 담임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입니다. 제가 그 책을 읽으면서 받았던 감동은 “복음이 사람을 변화시키고, 복음이 사람을 행동하도록 만든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믿음을 가지고 30년 전에 이 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했고, 그 때 이후 저는 이 믿음을 버린 적이 없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저는 이 믿음을 가지고 설교하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그렇게 설교했는데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정말 복음이 사람을 변화시켰습니까? 복음이 사람을 움직이는 것을 경험했습니까?” 제 대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지난 30년을 설교했지만, 사람들은 쉽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죄된 본성은 쉽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사악한 인간의 본성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고, 이기적인 인간의 본성은 결코 변하지 않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믿음을 결코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제 생각대로 교회가 변화되지 않는다고 해도 저는 실망하지 않고, 계속 이 믿음을 가지고 설교할 것입니다.

요즘에는 우리교회의 미래에 대하여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이 문제는 단순히 우리교회의 미래일 뿐만 아니라, 전체 주님의 교회의 미래이기도 합니다. 우리 앞에 많은 과제가 쌓여 있습니다. 인구는 감소하고 있고, 젊은 세대들은 교회를 외면하고 있고, 교회는 현대인들에게 매력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과학의 발전은 눈이 부실 정도입니다. 과거에 수 백 년에 걸쳐 일어날 변화들이 하루 아침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AI (Artificial Intelligence)가 지금의 속도로 발전한다면, 멀지 않아 인간관계에 큰 위기가 닥칠 것입니다. 그야말로 교회의 위기, 목회의 위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위기가 바로 눈 앞에 다가와 있습니다. 이런 때에 우리는 어떻게 미래를 준비해야 하겠습니까?

제가 교회의 미래를 놓고 기도할 때마다 주님이 저에게 주신 말씀은 ‘신앙고백이 있는 교회’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신앙고백이 있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우리교회는 더욱 복음에 충실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한 발짝만 삐끗하면 5년 후, 10년 후, 우리 교회의 미래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창립 40 주년이라는 과거의 영광에 취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앞으로가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이 위기의 때에 우리에게 교회를 맡기셨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보지 않습니까? 한번 가슴에 손을 대고 심장의 고동소리를 느껴 보십시오. 그리고, 이렇게 여러분의 결심을 주님께 말씀드리십시오. “주님, 나의 생명을 주님께 드립니다. 나의 생명도 나의 젊음도, 나의 열정도, 나의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립니다. 주님의 교회를 위해 나를 도구로 사용하십시오. 나로하여금 교회에 대한 시대적인 책임과 사명을 회피하지 않게 도와 주십시오.”


10/7/2018 | 세계 성만찬 주일

기억과 축하, 그리고 실천 Remembrance, Celebration And Action

고린도전서 11:23-26

복음서 중에 제일 먼저 기록된 책은 마가복음입니다. A.D. 70년경에 기록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고린도전서는 A.D. 56-57년경에 기록된 바울의 편지입니다. 신학자들은 오늘 읽은 고린도전서 말씀이 성만찬에 대한 말씀 중에서 가장 원형 (Original)에 가까운 말씀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제일 주목해서 봐야 할 말씀은 “나를 기억하면서 이것을 행하라 (24절)”고 하신 말씀입니다. 개역성경에는 ‘기억’이라는 말 대신 ‘기념’이라는 말로 나와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매년 5월 마지막 월요일을 ‘Memorial Day’로 지킵니다. ‘죽은 사람들을 기억하는 날’이라는 뜻인데, 원래는 남북전쟁에서 죽은 장병들을 기억하는 날로 지키다가 나중에는 미국을 위해 전쟁에 나가 전사한 모든 장병들을 기억하는 날로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매년 6월 6일에 지키는 ‘현충일’이라는 기념일이 있는데,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분들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미국의 ‘Memorial Day’에 해당하는 기념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면서 빵을 나누어 주시고, 포도주를 나누어 주셨습니다. “너희를 위한 나의 몸이다. 이것을 행하면서 나를 기억하라”고 하시면서 빵을 떼서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고, “이 잔은 내 피를 통해서 너희들과 맺는 새언약이다.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라”고 하시면서 포도주 잔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무슨 일을 기억을 하려면 지난 일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크리스천들은 자주 성만찬 예식을 행하면서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과거가 없는 오늘은 있을 수 없고, 오늘이 없는 미래는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오늘의 내가 있는 것은 과거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과거는 모두 예수님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설교 제목을 ‘기억, 축하, 그리고 실천’이라고 정했습니다. ‘기억’은 과거를 말하고, ‘축하’는 현재를 말하고, ‘실천’은 현재와 미래를 의미합니다.

미국 듀크 (Duke)대학에서 총장을 역임했던 제임스 클리브랜드(James Cleveland)는 13살 때 처음으로 자기 어머니와 함께 성만찬 예식에 참가했다고 합니다. 그 때 어머니로부터 들었던 성만찬에 대한 이야기를 잊을 수가 없어 졸업식 때마다 그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그의 어머니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제임스야,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떡과 포도주를 주시면서, 이것을 먹고 나를 잊지 말라고 부탁하셨다. 제임스야, 엄마는 지금까지 주님의 제자로 살아왔다. 엄마는 결코 주님을 잊을 수가 없어. 그래서 지금까지 엄마는 한 번도 주님의 부탁을 잊지 않았고, 성만찬 예식에서 빵과 포도주를 받을 때마다 주님을 기억했다. 엄마는 너에게 부탁한다. 너도 부디 이 성만찬의 의미를 잊지 말고 어디를 가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어떤 환경 속에 있든지 늘 주님을 기억해야 한다. 성만찬은 주님이 너와 함께 하신다는 증거야. 이 성만찬을 통해 너는 주님을 만나게 되고, 주님의 마음을 깨닫게 될 거야." 클리블랜드 총장은 어머니에게 들었던 이 이야기를 졸업생들에게 들려주면서, “여러분들이 졸업했다고 학교를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에 있든지 늘 학교를 기억해 주기를 바랍니다. 학교 또한 여러분들과 늘 같이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졸업생들에게 당부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어떤 것들을 기억해야 하겠습니까? 주님은 제자들에게 많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들은 크게 약속과 부탁의 말씀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그를 믿는 사람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다 (요한복음 3:1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약속의 말씀입니다. 이 약속의 말씀이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습니다.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everyone who believes in him)’ 영생을 얻는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을 복음 중의 복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주신 영원한 생명에 대한 기쁜 소식 (the Good News)이기 때문입니다.

또 주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누구든지 나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올 수 없다 (요한복음 14:6)”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구원의 길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No one can come to the Father except through me”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구원의 길이지만, 주님이 말씀하신 이 길은 단 하나 밖에 없는 구원의 길입니다. 인간의 지식이 아무리 축적되고,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주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의 길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님의 이 말씀의 의미를 자꾸 축소(縮小, reduction)하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우리는 ‘reductionists’라고 합니다. “아니, 그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구원에 대하여 강조하다 보니까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라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사랑의 언어로 이해해야 한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넌 나만 사랑해야 해. 다른 사람을 사랑하면 난 죽고 말 거야.” 이렇게 말한 것과 같다고 합니다. 아닙니다. 주님은 단 하나의 구원의 길을 말씀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자꾸 다른 해석을 하려고 하지 말고, 주님의 말씀하신 것을 축소하려고 시도하는 ‘reductionists’가 되지 마십시오.

또한 우리는 주님이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말씀들을 기억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내가 너희와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 있겠다.” (마태복음 28:19-20) 이 말씀에서 강조해야 할 것은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나의 말을 가르쳐 지키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민족’이라는 말을 정확하게 말한다면 ‘species’입니다. ‘species’라는 말은 원래 생물학에서 특성이 같은 것들끼리 분류하는 기본 단위입니다. 사람도 같은 언어나, 문화, 역사에 따라 비슷한 특성을 가진 사람들끼리 분류할 수 있는데, 개역성경에는 ‘족속’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선교 단체 ‘위클리프’에서 번역한 Wycliffe Bible에 ‘folks’로 나와 있습니다. ‘folks’는 민족이라는 말보다 훨씬 더 세분화된 개념입니다. 현재 전 세계에 195 민족 (nations)이 있다고 합니다. ‘folks’로 하면 이보다 훨씬 더 많을 것입니다. 주님은 이 ‘folks’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고 이 사람들을 제자로 삼으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The Great Commission’이라고 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대사명(大使命)’이라고 이름을 붙이면서도 이 말씀을 지키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이 ‘Commission’을 기억할 뿐만 아니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어떤 식이든 이 주님의 ‘대사명’을 실천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공부를 해도, 사업을 해도, 정치를 해도, 무엇을 하든지 주님께서 부탁하신 이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과거에는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이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서 선교사로 나갔습니다. 지금 우리 시대에는 선교의 개념이 과거보다 훨씬 더 넓어졌습니다. 내 삶의 영역이 바로 선교지라는 ‘통합적인 선교 개념 (the integrated concept of mission)’이 새롭게 논의되고 있습니다. 아주 바람직한 선교 개념으로 발전해 가고 있다고 보겠습니다. 이번 2018년 ReNEW에서는 이 ‘통합적인 선교개념’에 대하여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한가지 더 주님을 기억해야 할 것은 주님이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신학적인 용어로 이것을 ‘대속물 (ransom)’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대속물’이 되신 것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8) 이 말씀이 Amplified Bible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But God clearly shows and proves His own love for us, by the fact that while we were still sinners, Christ died for us.”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그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의 말씀처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었고,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습니다.” (이사야 53:5)

우리는 성만찬에 초대되어 빵과 포도주를 받을 때마다 주님의 이 약속과 부탁의 말씀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나의 구원을 축하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크리스천의 삶은 ‘celebration (축하)’입니다. 바울은 이 축하의 삶을 이렇게 요약해서 그의 편지에 썼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내게 베푸신 그분의 은혜가 헛되지 않았습니다 (But by the grace of God I am what I am, and his grace to me was not in vain).” (고린도전서 15:10)

지금의 나의 삶을 축하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게 베풀어 주신 은혜에 대한 기쁨과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있는 사람은 지금 자신의 삶을 축하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지금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를 모르거나, 감사가 없는 사람은 축하가 없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감사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가 무엇인지 한번 성경 말씀에서 보시겠습니까? 여러분이 잘 아는 빌립보서 4:6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읽으면서도 이 말씀의 뜻을 잘 모릅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의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말씀드리십시오.” 사람들은 이 말씀을 읽으면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만 읽습니다. 염려하지 말라고 한다고 해서 염려가 안 됩니까? 그게 아니잖아요? 이 말씀을 이해하는 열쇠는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구하라는 말입니다. 한번 보세요.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Don't worry about anything; instead, pray about everything. Tell God what you need, and thank him for all he has done.” 하나님께 우리가 필요한 것들을 말씀드릴 때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해 주신 일들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해 주신 일들이 어떤 일들입니까? 가장 큰 일은 예수님을 믿게 하시고 나를 구원하여 주시고,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신 일입니다. 이 일보다 더 큰 일이 없고, 이 일보다 더 감사해야 할 일이 없습니다. 이렇게 감사가 있는 사람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않고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보다 더 큰 일도 해결해 주셨는데, 이만한 일이야 또 해결해 주시겠지 하는 믿음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만찬에 초대되어 빵과 포도주를 받을 때, 예수님을 기억해야 하고, 지금의 내 삶을 축하해야 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들을 실천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들을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바울은 성만찬에 초대된 사람들이 실천해야 하는 일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시는 사람들은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으심을 전하십시오 (For every time you eat this bread and drink this cup, you are announcing the Lord's death until he comes again).” (26절)

저는 이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정말 큰 일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누가 십자가를 좋아합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도 십자가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니, 예수 믿는 사람들도 십자가를 좋아하지 않는데,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이야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 시대는 십자가를 싫어하고 십자가를 거부합니다. 지금 우리가 그렇게 살고 있지 않습니까? 주님은 그 자신이 몸소 십자가를 지셨고, 그의 제자들에게는 “나를 따라 오려거든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누가복음 9:23)”고 말씀하셨는데, 누구도 십자가를 지려고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은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selfish way (이기적인 길)’에서 돌아서라는 말씀입니다.

이게 정말 가능할까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방식이 모두 ‘selfish’한 일들인데, 이 길에서 돌아서는 것이 과연 가능하겠습니까? 우리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이 로마서 12:2에서 “Don't copy the behavior and customs of this world (이 세상을 본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이 지금 보이고 있는 ‘행동 (behavior)’, 이 세상이 가지고 있는 ‘관습들 (customs)’은 어떤 것입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selfish way (이기적인 길)’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대해서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되든 나만 잘 되면 됩니다. 나만 잘 되면 되고, 우리 집만 괜찮으면 되고, 우리 교회만 잘 되면 상관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데, 우리가 어떻게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겠습니까? 정말 큰 일입니다. 왜 주님은 가장 어려운 때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에게 이 십자가의 메시지를 맡기시는 지 정말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오늘 세계 성만찬 주일에 교회에 나와서 성만찬에 초대된 여러분들, 우리는 지금 매우 중요하고 심각한 시점에 서 있습니다. 청년 1부, 청년 2부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매우 중요한 자리에 나와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잠에서 깰 때가 벌써 되었다 (로마서 13:11)”고 했는데, 맞습니다. 지금 우리는 대충대충 교회에 다녀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하게 구합시다. 성만찬 빵을 받고, 포도주 잔을 받으면서 예수님을 기억합시다. 그리고 예수님 때문에 오늘의 내가 있음을 고백하고, 기뻐하고, 감사하고, 지금의 나의 삶을 축하합시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을 이 세상에 전파하는 도구로 나를 사용해 주시기를 위해 기도합시다. 주님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길거리에 나뒹굴고 있는 돌멩이들을 가지고도 아브라함의 자손들로 만드실 수 있고 (마태복음 3:9), 하나님을 찬양하는 도구로 사용하실 수 있다 (누가복음 19:40)고 하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가 얼마나 중요한 자리인 지 잘 압니다. 주님은 이 시대를 우리에게, 우리 교회에게 맡기셨습니다. 세상에 십자가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먼저 저희로 하여금 우리들의 이기적인 길에서 돌아서는 결단을 하게 하옵소서.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모든 일을 하실 수 있음을 믿습니다. 손에 빵을 들고, 손에 포도주 잔을 들고, 주님을 기억하게 하시고,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게 하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손에 들린 도구로 고백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9/30/2018 | 열매 맺는 계절 1

껍데기 크리스천은 가라. The Unnecessary Christians

요엘 2:12-14

제가 좋아하는 영성 신학자 중에 유진 피터슨 (Eugene Peterson)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유진 피터슨이 ‘Unnecessary Pastor’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이 1,999년에 나왔으니까 지금으로부터 19년 전에 나온 책입니다. 우리 말로 ‘불필요한 목회자’라고 번역할 수 있을 텐데, 딱 맞는 번역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이 책에 나오는 내용을 조금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요즈음 목회자가 되기 위해 준비하며 청빙을 기다리는 몇몇 사역자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또한 나는 여러 교회들이 그들의 목회자들에게 바라는 요구 사항들을 들으면서 매우 침울한 기분이 들었다. 거의 예외 없이 요즈음 교회들은 목회자를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유능한 관리자를 원한다. 그들의 교회를 주도적으로 이끌어 줄 관리자를 찾고 있는 것이다. 요즈음 교회들이 이런 목회자를 찾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야 하는 귀찮은 일을 회피하고 싶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피터슨이 이 책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요즈음 교회들이 원하고 있는 목회자가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목회자들은 목회자로서 갖추어야 할 본질을 추구하지 않고, 교회들이 요구하는 스펙을 채우려고 하는 목사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Unnecessary Pastor (불필요한 목회자”는 요즈음 교회들이 찾는 스펙에서 한 참 모자라는 목회자들을 말합니다. 피터슨의 이 책이 한국말로 번역이 되었는데, 책 제목이 ‘껍데기 목회자는 가라!’입니다. 저는 그 책 제목을 보면서 “언젠가는 ‘껍데기 크리스천은 가라!’ 이런 제목으로 설교해야 하겠다”고 생각했는데, 바로 오늘 그 제목으로 설교하게 되었습니다.
 
요엘 (Joel)은 남왕국 유다의 왕 요아스 (Joash)가 왕으로 즉위하던 B.C. 830년경쯤에 살았던 예언자입니다. 요아스는 7살의 어린 나이에 왕이 된 사람입니다. 하지만, 제사장 여호야다 (Jehoiada)라는 사람이 옆에서 도와주었기 때문에 별 문제없이 나라를 통치했습니다. 그러다가 여호야다가 죽습니다. 정신적으로 의지할 곳이 없어진 요아스는 그 때부터 타락하기 시작합니다. 의인들을 핍박하고 죽입니다. 왕이 타락하니까 나라 전체가 타락하여 우상숭배에 빠집니다.
 
하나님은 위기의 때에 예언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선택하여 그 사람과 소통(疏通)하시면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시대에도 우리와 소통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기도를 통해서 그의 자녀들과 소통하기를 원하시고, 성경 말씀을 통해서 그의 자녀들과 소통하기를 원하십니다. 기도하지 않고, 성경을 읽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소통의 채널을 막고 사는 사람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요즘 사람들이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생각을 집중하고, 나 자신을 돌아보고, 조용히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는 마음의 여유들이 없습니다. 성경을 읽는 것도 싫어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성경뿐만 아니라, 책을 읽지 않습니다. 몇 줄 안 되는 가벼운 읽을 거리 외에는 읽지 않습니다. 책을 읽지 않고, 글을 쓰지 않으니까 생각에 깊이가 없고, 철학이 없습니다. 요즘에 젊은 사람들은 페이스북에서 인스타그램으로 옮겨갔다고 합니다. 인스타그램에는 글을 쓰지 않아도 되고, 글을 읽지 않아도 되고, 사진만 올리고 사진만 보면 되니까 그렇다고들 합니다.
 
하나님과 소통의 채널이 막히면 ‘껍데기 크리스천’이 됩니다. 누구도 예외가 아닙니다. 목사도 기도하고 성경 읽으면서 하나님과 소통하지 않으면 ‘껍데기 목사’가 됩니다. 아무리 그 목사가 유능한 사람일지라도, 아무리 그 목사가 교회를 잘 관리하는 목사일지라도 유진 피터슨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과 소통이 막힌 사람은 ‘껍데기 목회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껍데기 크리스천’ ‘껍데기 목사’는 주님께서도 원하시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3:12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분은 손에 키를 들고 타작 마당을 깨끗이 하여 알곡은 곳간에 두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다.” 세례 요한이 사람들에게 자기 뒤에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알곡’이란 말과 ‘쭉정이’이라는 말이 대조되어 있습니다. ‘쭉정이 (chaff)’는 ‘알곡 (grains)’을 벗긴 껍데기입니다. ‘알곡’은 모아서 창고에 쌓아 두고, ‘껍데기’는 쓸모가 없기 때문에 불에 태워버립니다. 추수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알곡’이지 ‘쭉정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중에 아무도 ‘쭉정이’같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도 ‘쭉정이’ 같은 크리스천으로 살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도 ‘쭉정이’ 같은 목사로 일하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알곡’과 같은 필요한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Evan Minton이라는 사람이 ‘Five Signs A Person Is A Nominal Christian (껍데기 크리스천이 되어 가는 다섯가지 사인)’라는 글을 썼습니다. ‘Nominal Christian’이란 말은 ‘이름만 가지고 있는 형식적인 크리스천’이라는 말인데, ‘껍데기 크리스천’이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그 다섯가지 사인이 무엇인지 내용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첫째 사인은, 하나님과 대화하지 않는 것입니다 (They Don’t Talk to God). 정상적인 크리스천이라면 하나님께 대한 목마름 (thirst)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껍데기 크리스천들’은 하나님께 대한 목마름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고, 하나님과 소통하지 않아도 아무렇지 않습니다.
 
둘째 사인은, 성경을 읽지 않는 것입니다 (They Never Read Their Bible and Are Biblically Illiterate). 성경을 읽지 않고 일주일, 아니 한 달이 지나도 아무렇지 않는 사람들은 ‘껍데기 크리스천’이 되어가고 있다는 징조입니다. Evan Minton은 이런 사람들을 성경적인 문맹인이라고 했습니다. 문맹인은 글자를 읽을 줄 모르고 쓸 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마치 문맹인처럼 성경을 읽으려고 시도조차도 하지 않는 크리스천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셋째 사인은, 죄 가운데 살면서도 상관하지 않는 것입니다 (They Live in Sin and Don’t Care). 죄를 짓고 하나님의 뜻을 어기면서도 “나만 그런가? 다들 그렇게 살아!” 하면서 자신의 잘못을 정당화 시킵니다. “목사님은 비즈니스를 안 해 봐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아니, 어떻게 성경 말씀대로 살아요?” 이렇게 말합니다.
 
넷째 사인은, 교회에 가는 것에 흥미가 없는 것입니다 (They Have No Interest In Attending Church). 교회에 대한 흥미가 점점 떨어집니다. 교회 가 봐도 뭐 재미있는 것이 없습니다. 목사의 설교도 그 설교가 그 설교이고, 교인들도 그 사람이 그 사람이고, 뭐 하나 재미 있는 것이 없습니다. 혹시 여러분들에게 이런 생각이 들면, 지금 ‘껍데기 크리스천’이 되어 가고 있다는 징조입니다.
 
마지막 사인은, 마음 속에 다른 사람에 대한 미움이 있는 것입니다 (They Have Hatred In Their Hearts). 다섯 번째 사인을 말하면서 Evan Minton은 요한일서 4:2 말씀을 인용합니다. “어떤 사람이 ‘나는 하나님을 사랑해요’라고 말하면서 그의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이는 눈에 보이는 자기의 형제도 사랑하지 못하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이 맞습니다. 정상적인 크리스천이라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다른 사람을 미워할 수가 없는 것이 맞습니다. 이 말씀대로라면 지금 많은 사람들이 ‘껍데기 크리스천’이 되어가고 있는 것인데, 두려운 마음이 듭니다.
 
지금으로부터 2,800년 전에 유대나라 사람들이 ‘껍데기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소통은 끊어지고,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떠나 세상의 우상들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요엘 (Joel)이라는 사람을 불러 자기 메시지를 전달하셨습니다. “지금이라도 너희의 온 마음을 다하여 내게 돌아오너라. 금식하고 울며 슬퍼하여라.” (12절)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Turn to me now, while there is time. Give me your hearts. Come with fasting, weeping, and mourning.” “지금 아직 시간이 있을 때 나에게 돌아오라. 나에게 너희 마음을 달라. 금식하며, 울며, 슬퍼하며 나에게 오라!” “나에게 돌아오라”는 말은 회개하라는 말입니다. 회개를 희랍어로 ‘메타노이아 (μετάνοια)’라고 합니다. 이 말을 성경에서는 ‘turning away from sin and turning to God (죄로부터 돌아서서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이라는 뜻으로 사용합니다.
 
하나님께서 회개하라는 메시지를 주신 것은 아직 기회가 있다는 뜻입니다. 아직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시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아무리 잘못해도 쉽게 포기하지 않고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이 말씀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라도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앞에는 그 길이 항상 열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하나님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게 이어집니다. “옷을 찢지 말고 너희 마음을 찢어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너라. 그분은 은혜롭고 자비로우시다. 그분은 쉽게 노하지 않으시고 사랑이 많으시며 벌을 내리지 아니하신다.” (13절) “옷을 찢지 말고 너의 마음을 찢어라”는 말은 우리의 회개가 진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2절에 나오는 “Give me your hearts”라는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너희의 마음 전부를, 저희의 진심(眞心)을 달라고 하십니다. 옷을 찢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옷을 찢지 말고, 너희 마음을 찢어서 속에 있는 진심을 보여 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사람들의 형식적인 회개에 식상을 하셨으면 그렇게까지 말씀하셨겠습니까? 옷을 찢고 야단을 하길래 정말 회개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옷을 찢고 나서 언제 그랬느냐는듯이 예전의 삶으로 돌아갑니다.
 
몇 주 전에 이 지역에 있는 후배 목사가 목회하는 곳에 갔었습니다. 교회 창립 4주년을 맞이해서 꼭 와서 축하와 격려의 말씀을 해 달라고 해서 갔었습니다. 그 교회가 Amherst (앰허스트)에 있기 때문에 같은 차로 꼬박 2시간을 운전해서 가야 하는 곳입니다. 올해 목사 안수를 받은, 운동도 잘하고, 노래도 잘하고, 작은 교회였지만 미디어도 잘 다루는 탤런트가 많은 후배 목사였습니다. 순서지도 아주 깔끔하게 잘 만들었습니다. 순서지에 2018년 표어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호세아 6:3) 이렇게 써 놓았습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이 말씀을 이렇게 한 해의 표어로 설정하는 데는 좀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또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께 형식적으로 회개했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 때는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남쪽은 유다라고 불렀고, 북쪽은 이스라엘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스라엘은 에브라임 (Ephraim)이라고도 불렀습니다. 하나님은 호세아 (Hosea)라는 예언자를 통하여 “왜 너희가 그렇게 말해 놓고 그 말을 지키지 않느냐? 너희들의 충성심 (인애)이 아침 같고, 아침 이슬 같구나 (호세아 6:4)” 하시면서 책망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껍데기 크리스천들’이 되어가고 있는 사인들이 보입니다. 기도하기 싫어합니다. 성경 읽기 싫어합니다. 하나님과의 소통의 채널이 꽉 막혀 있습니다. 마치 혈관이 막혀서 피가 잘 통하지 않고 혈압이 높아져서 건강에 적신호가 켜진 것처럼, 오늘 우리들의 믿음생활에 위험 신호가 켜지고 있습니다.
 
해결 방법은, 2,800년경에 같은 증세를 앓았던 이스라엘의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는 것입니다. 위험 신호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해결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오늘 읽은 성경 말씀을 ‘거울’로 삼고, 해결책을 세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옷을 찢는 것 같은 형식적인 회개는 너무나 많이 보았기 때문에 이젠 질렸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내 앞에 너희 마음을 찢어 진심을 보여 달라고 하십니다.
 
뉴잉글랜드에 가을이 오고 있습니다. 나뭇잎이 빨갛게, 아름답게 물들어 가고, 나무들은 열매를 맺어서 한 해를 마무리합니다. 우리는 지금 뉴잉글랜드의 계절이 주는 축복을 맛보고 있습니다. 멀리 화이트 마운틴 (White Mountains)까지 가지 않아도, 우리에게는 아름다운 챨스강 (Charles River)이 가까이 있어서 오면서 가면서 뉴잉글랜드의 가을을 즐길 수 있습니다. 해 마다 찾아오는 이 계절을 맞이하면서 우리도 한 해 동안의 삶을 돌아보고 마무리 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주님은 알곡은 모아 창고에 쌓아 두고, 쓸모 없는 쭉정이는 불에 던져 때우신다고 하십니다. 불행하게도 지금 우리에게 ‘껍데기 크리스천들’이 되어가고 있는 사인들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아직 시간이 있을 때 하나님께로 우리 마음을 돌이켜야 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회개 마저도 형식적인 회개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옷을 찢으면서 회개의 제스처만 취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이런 행위를 중단하고 하나님께 돌아가지 않으면, 영영 기회가 없을 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평생 한번도 주님께 우리의 진심을 드리지 못하고, 참된 헌신 한번 드리지 못하고, 껍데기 크리스천으로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려면 지금 (now) 우리의 마음을 찢어 하나님께 우리의 진심(眞心)을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온전히 돌아서야 합니다.
 
하나님과 막혔던 소통을 시작하십시오. 기도를 시작하고, 성경을 펴서 읽기 시작하십시오. 하나님과 소통하는 일을 부담스럽게 여기지 마십시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머리를 숙이고, 무릎을 꿇는 그 시간은 하나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세상 어느 것하고 바꿀 수 없는 ‘The Sweet Hour of Prayer (달콤한 기도의 시간)’입니다. 처음에는 기도하는 것이 어색하고 힘들 수도 있습니다. 낯선 사람과 처음 만나서 할 말이 없는 것처럼, 하나님과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꾸준하게 소통의 시간을 가지면서 하나님을 조금씩 알아가고 배워 나가야 합니다. 그러면, 소통의 시간이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 한꺼번에 많이 읽을 수 없습니다. 많이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기 때문에 재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꾸준하게 성경을 읽으면 어느 새 성경의 언어에 익숙해져 가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