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0/2016 | 추수감사절 메시지

아삽의 감사 Asaph’s Thanksgiving

시편 50:22-23

시편 50편은 아삽이 쓴 것입니다. 아삽은 다윗과 동시대 사람입니다. 다윗이 기원전 약 1,000년 경 사람이니까 아삽도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입니다. 아삽은 다윗이 아꼈던 세 사람의 음악인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자신이 뛰어난 음악가였던 다윗은 레위 지파 사람들에게 노래 잘 하는 사람과 악기를 잘 연주하는 사람들을 추천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 때 추천 받은 세 사람이 헤만 (Heman)과 아삽 (Asaph)과 에단 (Ethan)입니다 (역대상 15:16-17). 이 사람들은 비파 (lyres)와 수금 (harp)과 제금 (cymbals)을 연주했던 연주자들이었습니다. 이 중 아삽은 악장 (the chief musician)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이들은 아삽이 연주하는 제금에 맞춰서 비파와 수금을 연주하면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역대상 16:5).

시간은 흘러 유다 왕 히스기야 시대로 내려 갑니다. 히스기야는 유다의 역사 중에 몇 명 안 되는 하나님께 인정 받는 왕이었습니다. 25살에 왕 위에 오른 히스기야는 다윗을 자기의 모델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제일 먼저 형식화된 제사 (예배) 의식을 개혁했습니다. 그리고 제사 의식에 음악을 도입했습니다. 흥미 있는 것은 히스기야가 성가대의 찬양이 끝난 후에 레위 사람들로 하여금 다윗과 아삽의 시편을 낭독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역대하 29:30). 

아삽은 단순한 음악인이 아니라 뛰어난 영적 통찰력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이런 아삽을 가까이 곁에 두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아삽이 쓴 시편들은 그저 그렇고 그런 시편들이 아니라 히스기야가 예배 의식을 개혁 하면서 아삽의 시편에서 영감 (靈感)을 얻을 정도로 뛰어난 것들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히스기야가 아삽을 가리켜 ‘선견자 아삽 (Asaph the seer)’이라고 한 것으로 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역대하 29:30) 

시편 50편을 읽어 보면 곳곳에 참된 제사 (예배)는 어떤 것인지 잘 나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참된 제사 (예배)는 제물 중심의 제사가 아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아삽의 입을 통하여 “나는 너희들이 드리는 제물을 탓하지 않는다(8절)”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 무슨 제물을 드리든지 그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 모든 것들이 원래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삽은 제물 중심의 믿음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하나님을 잊어버린 사람들 (those who forget God, 22절)'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관계 보다는 좋은 제물, 값비싼 제물만 드리면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다 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정말 그렇다면, 오늘 우리도 ‘하나님을 잊어버린 사람’ 중의 한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예배에 집중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사역 중심의 믿음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무슨 일을 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가대원들이나 오케스트라 대원들은 참 조심해야 합니다. 찬양을 하고, 연주를 함으로써 나의 책임을 다 했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학교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습니다만, 제가 BU 박사과정에 있을 때 외국어 시험이 있었습니다. 저는 신약성서 해석학을 전공했습니다. 보통 박사과정에 있는 사람들에게 외국어를 두 개를 요구 합니다. 저는 영어와 독일어를 선택했습니다. 다행히 영어를 외국어로 간주해 주었습니다. 물론 영어 시험을 봤습니다. 한국어 텍스트를 주고 영어로 번역하는 시험이었습니다. 저는 신약학을 전공했으니까 헬라어 (Greek)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헬라어를 선택할 수 없습니다. 왜냐 하면, 신약학을 전공하는 사람에게 헬라어는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외국어로 인정해 주지 않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구약학을 전공하는 사람에게 히브리어는 외국어로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성가대에 성악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케스트라에는 거의 악기를 전공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잘 할 수 있는 것은 노래와 연주입니다. 이것을 하면서 내가 충분히 봉사하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당연히 내가 해야 할 일입니다. 나는 성가대에서 봉사하니까, 나는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하니까 이만하면 됐다는 생각이 잘못하면 사역 중심의 생각이 되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는 주일 학교 교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사역을 보고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heart)’을 기뻐하십니다. 사무엘상 16:7에 이런 말씀이 나오잖아요? “내가 보는 것은 사람이 보는 것과 같지 않다. 사람은 겉모양을 보지만, 나 여호와는 마음을 본다 (For the Lord does not see as man sees; for man looks at the outward appear-ance, but the LORD looks at the heart).” ‘마음을 보신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겉모습이나 형식, 우리가 하는 사역보다 관계를 중요하게 보신다는 뜻입니다. 

아삽이 살고 있던 시대에는 모든 사람들이 제물 중심의 제사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제물 중심의 제사가 가지고 있는 위험성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오직 한 사람, 아삽은 제물 중심의 제사는 반드시 형식화 되고 타락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형식화된 예배를 통해서는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만들 수 없습니다. 이런 아삽을 다윗은 그의 곁에 '선견자 (the seer)'로 두고 있었고, 다윗을 모델로 삼아 제사 (예배) 의식을 개혁하려고 했던 히스기야 왕은 아삽이 쓴 시편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면, 참된 제사 (예배)는 어떤 제사입니까? 아삽은 감사로 드리는 제사가 참된 제사라고 합니다 (14, 22절). 제물이 중심이 아니라,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제사를 드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예배를 예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 (worship in spirit and truth)’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역시 예배자의 마음을 중요하게 보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예배자의 마음이 신령과 진정으로 준비되어야 그 예배가 영이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4:23-24). 예수님의 이 말씀이 우리 가슴에 와 닿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이런 참된 예배자들을 찾고 계신다 (The Father now seeks the true wor-shipers).” 어쩌면 이 말씀을 하신 예수님께서 아삽의 시를 생각하고 계시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탁월한 정신분석학자인 에리히 프롬 (Erich Fromm, 1900-1980)을 아시지요? 그가 대중들이 읽을 수 있는 많은 책들을 썼습니다. 제가 보기엔 그 중에서 1976년에 나온 "To Have or To Be (존재냐 소유냐)?" 이 책이 가장 중요한 책이 아닌가 합니다. 프롬은 이 책에서 삶의 두 가지 양식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하나는 ‘존재양식 (Being Mode)’이고, 다른 하나는 ‘소유양식 (Having Mode)’이라고 했습니다. ‘소유양식의 삶’은 무엇을 소유함으로써 기쁨과 행복과 보람을 느끼는 삶의 방식입니다. 반대로, ‘존재양식의 삶’은 무엇을 소유해서가 아니라 나의 것을 나누어 주고 베풀면서 삶의 의미를 느끼는 삶의 방식입니다. 프롬은 이렇게 말합니다. “존재양식의 삶은 자기를 새롭게 하는것, 자기를 성장시키고 흐르게 하며 사랑하는 것, 관심을 가지고 귀 기울이며 베푸는 것, 모든 관계를 살아 있는 것으로 파악하는 삶의 양식을 의미한다.” 

지금은 크리스천의 삶에 대하여 생각을 많이 해야 하는 때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유와 목적에 대하여 진지하게 성찰해야 하는 때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대한 크리스천의 책임에 대하여 고민해야 하는 때입니다. 소유양식의 삶을 사는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내가 무엇을 얼마나 많이 소유하느냐 하는 것으로 성공과 실패를 말하고, 행복과 불행을 말하는 사람에게는 감사가 없습니다. 자기가 이미 가진 것보다 가지지 못한 것들에 대한 불평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아삽의 말을 빌린다면, 소유양식의 삶을 사는 사람은 제물 중심의 제사를 드리는 사람과 같습니다. 제물 중심의 제사가 결국은 형식화 되듯이, 소유양식의 삶을 사는 사람은 하나님과도 형식적인 관계에 머물고 맙니다.

그러나, 존재양식의 삶을 사는 사람은 소유가 아니라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프롬은 이 관계를 ‘aliveness and authentic relatedness to the world (세계와의 살아 있고 진실한 관계성)’이라고 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없고,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고, 올리브 나무에 거둘 것이 없고, 밭에 거둘 곡식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 때문에 기뻐하겠습니다.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즐거워하겠습니다.” (하박국 3:17-18) 하박국 선지자의 글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이유는 그의 글이 존재양식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분명하게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모두 잃는다고 해도, 마지막 남는 것 한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를 부인할 수 없듯이, 나는 구원의 하나님 때문에 기뻐합니다.”  이것이 존재양식의 삶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아삽에게 고마워해야 할 것은, 그를 통해서 존재양식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23절)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But giving thanks is a sacrifice that truly honors me. If you keep to my path, I will reveal to you the salvation of God." 직역하면, "감사를 드리는 것이 진정으로 나를 높이는 제물이다. 너희가 나의 길을 떠나지 않고 지킨다면 하나님의 구원을 보여 줄 것이다"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나의 길 (my way)’은 감사로 하나님게 나가는 것입니다. 감사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상황에 구애받지 않고 범사에 감사하는 삶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하나님의 길'입니다. 개역성경에는 이 '길'이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라고 나와 있습니다. 감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드려야 하는 올바른 행위입니다. 감사는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나의 삶 속에서 행하신 일들을 모두 인정하고, 감사하며,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감사야말로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최고의 제물입니다. 꼭 형식이 갖춰지지 않았어도, 열악한 환경 속에서 드리는 예배라고 할지라도, 예배자들의 마음 속에 감사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것은 최고의 예배입니다. 

우리가 사는 보스턴은 감사의 본고장입니다. 우리가 사는 보스턴에서 감사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392년 전, 1620년에 102명의 청교도들이 May Flower를 타고 도착했던 플리머쓰 (Plym-outh)가 불과 보스턴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습니다. 12월에 도착한 이들은 혹독한 겨울을 보내고 가까스로 살아 남았습니다. 이렇게 살아 남은 사람들이 그 이듬 해에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드렸던 것이 감사절의 유래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남긴 말 중에 "Think and Thank God (생각하고 하나님께 감사하자)"이란 말이 있습니다. 사전에 보면 thank라는 말은 “akin to think (think와 유사한 어족)”라고 나와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감사의 이유들입니다. 기쁘고 즐거웠던 일들도, 힘들었던 시간들도, 절망의 순간들도, 생각해 보면 모두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언젠가 이런 기도문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어느 환자의 기도 (The Creed for the Disabled)”라고도 알려져 있고, “어느 무명 용사의 기도”라고도 알려져 있습니다. 제가 그 기도의 원본을 찾았습니다. “A Soldier's Prayer (written by an unknown confederate soldier, US civil war)” 

I asked God for strength, that I might achieve (출세를 위해서 힘을 구했지만),

I was made weak, that I might learn humbly to obey (겸손하게 순종을 배우라고 나를 약하게 하셨습니다).

I asked for health, that I might do greater things (큰 일을 하기 위해 건강을 구했지만),

I was given infirmity, that I might do better things (하나님은 더 좋은 일을 하라고 나에게 병을 주셨습니다). 

I asked for riches, that I might be happy (행복하게 살려고 돈을 구했지만),

I was given poverty, that I might be wise (지혜로운 사람이 되라고 가난을 주셨습니다).

I asked for power, that I might have the praise of men (사람들의 칭찬을 받기 위해 권력을 원했지만),

I was given weakness, that I might feel the need of God (하나님만 필요로 하라고 나에게 약함을 주셨습니다).

I asked for all things, that I might enjoy life (나의 삶을 즐기기 위해 모든 것을 원했지만),

I was given life, that I might enjoy all things (모든 것을 즐길 수 있는 삶을 주셨습니다).

I got nothing that I asked for (내가 구한 것은 하나도 받지 못했지만)-

but everything that I had hoped for (내가 소망해야 했던 모든 것을 받았고),

Almost despite myself, my unspoken prayers were answered (내가 원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내가 말하지 않은 기도들이 응답되었습니다).

I am among all men most richly blessed (나는 그 누구보다도 축복 받은 사람입니다).

 


11/13/2016 | 미국 대통령 선거를 지켜 보면서

다시 읽는 나사로 이야기 Reinterpreting the Story of Lazarus

누가복음 16:19-31

지난 주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엄청난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무도 예상하지 않았던 일이 벌어졌습니다. 도날드 트럼프가 선거인단 306표를 얻어 232표를 얻은 힐라리 클린턴을 크게 이기고, 미국의 4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습니다. 선거 유세 초반에는 프럼프가 돌풍을 일으키더니, 중반과 종반으로 접어들수록 각종 악재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입에 담기도 어려운 성추문들이 여과 없이 미디어에 공개가 되면서 지지자들이 모두 돌아섰다는 분석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초반부터 트럼프가 우세하다는 기류가 감지되었습니다. 개표 시작부터 트럼프가 우세하다는 관측이 나왔고, 이러다가는 트럼프가 당선되는 것이 아니냐 하는 예측들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마지막 플로리다가 트럼프로 넘어가면서 선거판은 급격하게 트럼프 쪽으로 기울었고, 마지막 격전지였던 ‘Rust Belt (미국 동북부의 쇠락한 공업지역)’에서 트럼프가 완승하면서 승부는 끝이났습니다.

사람들은 “그래도 힐러리 클린턴이 이기겠지! 설마 지기야 하겠어?” 모두 이런 생각들을 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모든 미디어들이 트럼프를 외면했습니다. 힐러리 쪽에는 그 남편과 현직 대통령인 오바마 대통령과 부인 미쉘 등, 민주당이 합심해서 클린턴 지지에 발벗고 나섰습니다. 아마 역대 대통령 선거 중에 이렇게 확실한 지지를 받았던 후보가 없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막강한 자금을 동원해서 TV 광고에 돈을 쏟아 부었습니다. 반면에 트럼프는 선거 자금도 부족했습니다. 가장 돈을 적게 쓴 유세를 펼쳤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공화당 후보로 나왔으면서도 공화당의 지지를 전혀 얻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선거 유세단을 꾸려서 가족을 데리고 다니면서 유세를 펼쳤습니다.

하지만, 선거 결과는 누구도 예상하지 않았던 트럼프의 승리로 끝이났습니다. 선거가 끝나고 이런 말이 나왔습니다. 트럼프가 전 세계 사람들에게 “불가능은 없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He proved that impossible was nothing)!” 앞으로는 불가능을 말하는 사람들에게는 두고두고 트럼프가 좋은 예 (example)가 되게 생겼습니다.

선거가 끝나고 선거에 대한 분석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번 선거의 승패를 결정 지은 곳이 ‘Rust Belt’였는데, 이 지역에 사는 저소득 층의 백인들의 분노가 폭발해서 트럼프에게 투표했다는 것입니다. ‘Rust Belt’는 뉴욕부터 시작해서 서쪽으로 펜실베니아, 오하이오, 인디애나 일리노이, 미시간, 위스콘신으로 이어지는 공업지대입니다. ‘rust’란 말이 쇠에 스는 녹이라는 뜻이잖아요? 문자적인 의미는 ‘녹슨 지대’라는 뜻입니다. 예전에 경기가 좋았을 때는 인구가 많았던 지역입니다. 그러나, 경기가 침체되면서 사람들이 떠나기 시작하고, 공장들은 해외나 타 지역으로 옮겨가면서 이 지역이 낙후되기 시작했습니다. 공장들은 문을 닫고 기계들은 녹이 슬었습니다. 이 지역은 민주당을 지지하는 지역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번에 뉴욕과 일리노이를 제외하고는 모두 트럼프에게 넘어 간 것입니다. 사실 트럼프와 ‘Reust Belt’는 서로 매치가 안 됩니다. 부동산 재벌과 ‘Rust Belt’가 어떻게 연관이 됩니까? 바로 그 점이 힐라리 클린턴 선거 캠프가 놓쳤던 점입니다. 힐라리가 이 지역을 자기 표라고 오판하는 동안 트럼프는 매일 이 지역을 돌면서 백인들의 분노를 자극했습니다.

이번 선거를 통해서 미국이 안고 있는 문제들이 그대로 드러났다는 분석들이 많습니다. 문제점 중의 하나가 많이 배운 사람과 대학을 못 간 사람들 사이의 갈등입니다. 예전엔 고등학교만 나와도 사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미국도 고학력 사회가 되어 버렸습니다. 고등학교만 나와서는 취직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월급도 많지 않습니다. 아이들을 대학에 보내야 하는데, 대학 학비가 얼마나 비쌉니까? 대부분의 미국 가정들이 비싼 학비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빈부의 갈등, 인종 간의 갈등입니다. 자기들은 이렇게 열심히 일을 해도 가난을 벗어날 수 없는데, 갓 이민 온 사람들은 금방 좋은 직장을 얻고, 경제적으로 자기들보다 부유하게 사는 것을 보고 백인들의 분노가 폭발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안 트럼프가 “내가 대통령이 되면 일자리를 만들어서 여러분에게 먼저 주겠다. 이민자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규제 하겠다, 멕시코 국경에 담벼락을 쌓겠다, 중동 사람들을 추방 시켜 버리겠다” 등, 어떻게 보면 말도 안 되는 그의 공약들이 가난한, 대학을 가지 못한, 백인들에게 먹혀 들었다는 분석입니다.

여러분,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읽은 누가복음 말씀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좋은 옷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호화스러운 파티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 문 앞에 나사로라는 거지가 앉아 있었습니다. 그의 몸에는 부스럼투성이었었습니다. 나사로는 부자의 쓰레기통을 뒤져서 주린 배를 채웠습니다.

성경은 2,000년 전에 기록된 책입니다. 성경에 이렇게 부자로 호위호식하는 사람과 그 집 대문 앞에서 구걸을 하면서 사는 가난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와 있습니다. 신약성경의 역사만 2,000이지, 구약까지 하면 적어도 3,500년에서 4,0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구약성경에도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얼마나 많이 나옵니까? 정치하는 사람들과 경제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격차를 줄여 볼까 하고 연구합니다. 정치인들은 내가 대통령이 되면 이렇게 정책을 바꿔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돈을 벌게 해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경제학자들 역시 그들 나름대로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연구하고 정책을 내 놓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19세기 초에 공산주의라는 경제 체체가 등장했습니다. 물건을 공동으로 생산해서 다 같이 나눈다는 경제 개념입니다. 그래서 공산주의에서는 노동자가 대우를 받습니다. 이런 정치 제도를 내 놓았지만, 결국은 공산주의가 허구였다는 사실을 우리 시대에, 우리 눈으로 목격했습니다. 공산주의 국가들이 모두 몰락하고 말았습니다.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 볼까요? 시간이 흘러서 먼저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나사로는 죽어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습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  22절 말씀이 ‘Finally, the poor man died and was carried by the angels into Abraham's bosom’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bosom’이라는 말은 ‘가슴’이라는 뜻입니다. 나사로는 죽어서 ‘아브라함의 가슴’에 안겼습니다. 세상에서 그렇게 고생을 하더니 죽어서는 ‘아브라함의 가슴’에 안겼습니다. 우리는 이런 말씀을 읽으면서도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유대인들과 문화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동경하는 것은 죽어서 ‘아브라함의 가슴’에 안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지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가슴’에 안겼습니다.

몇 년 후에 부자도 죽었습니다. 부자는 지옥에 떨어져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부자가 눈을 들어 보았더니, 자기 집 대문 앞에 앉아 있던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가슴’에 안겨 있는 것입니다. 부자가 소리를 지릅니다. “아브라함이여, 제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혀를 적실 수 있도록 나사로의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게 보내 주십시오.” (24절) 아브라함이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살아 있을 때에 좋은 것을 마음껏 누렸지만, 나사로는 온갖 나쁜 일을 겪었다. 이제 나사로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통을 받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 (25절)

여러분들은 이 성경 말씀을 어떻게 읽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공평하심 (God’s fairness)’을 생각을 했습니다. 한번 반대로 생각해 보세요. 나사로가 죽어서 지옥에 가고, 부자는 죽어서 ‘아브라함의 가슴’에 안겼다고 생각해 보세요. 이거야말로 말도 안되는 불공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도 불공평 했는데, 죽어서도 그런 불공평이 이어진다면 이건 말도 안되는 일이잖아요?

트럼프가 일자리를 만들어 준다고요? 트럼프가 가난한 사람들을 잘 살게 해 준다고요? 말도 안 됩니다. 당장에 이민자들 못 들어오게 하고, 불법체류자들 추방하면 그 빈자리가 생길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해서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수많은 연구가 있었고, 그 때마다 정책들이 세워졌지만,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보호무역 정책을 강화해서 미국 경제를 일으키 겠다고요? 일시적으로 반짝 효과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것도 근본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성경에도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나사로도 죽고 부자도 죽습니다. 여기까지는 정말 세상이 ‘unfair’합니다. 그런데, 나사로는 죽어서 ‘아브라함의 가슴’에 안기고, 부자는 지옥에 가서 고통을 당합니다. 이 때, 세상이 ‘fair’해 집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역사를 심판하시니까 그때가서 세상이 공평해집니다. 세상에서 온갖 좋은 것을 누리던 부자는 지옥에 가고, 세상에서 고생만 하던 나사로가 위로를 받습니다.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은 공평하신 하나님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보좌에 앉으신 분이 흰옷을 입은 사람들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더 이상 배고프거나 목마르지 않을 것입니다. 뜨거운 햇볕도 그들에게 해를 입히거나 상하게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보좌 가운데 계시는 어린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셔서 생명수가 흐르는 샘으로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실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7:13-17) 이 ‘흰옷 입은 사람들’은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다가 온갖 고난을 당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의 눈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신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에 세상은 공평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개입하시지 않으면 세상은 언제까지 불공평한 채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부탁합니다. “나사로를 제 식구들에게 보내서 제가 있는 지옥에 오지 않도록 전해 주십시오. 그러면 그들이 들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다. 모세와 예언자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죽었다가 살아온 사람이 말을 해도 듣지 않을 것이다.” (31절) ‘모세와 예언자들’이라는 말은 성경이라는 말입니다. 그 당시 성경이 ‘모세의 율법서와 예언서와 시편’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31절 말씀은 이런 뜻입니다. “그들에게는 성경이 있지 않으냐? 성경을 믿으면 되지 무슨 증거가 더 필요하겠느냐?”

저에게는 이 말씀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많은 문제점들이 있습니다. 소득 불균형의 문제,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들과 받지 못한 사람들 간의 갈등, 인종 간의 갈등, 종교 간의 갈등 등의 문제들은 인류가 가지고 있는 난제(難題)들입니다. 좋은 정책들을 만들어서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한계가 있습니다. 인간의 노력에 한계가 있다는 말입니다. 기성 정치인들로부터 실망한 사람들이 이번 선거에서 트럼프가 미국을 변화 시킬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그를 지지했습니다. 당장 미국에 무슨 변화가 어떻게 시작될지 알 수 없지만, 우리는 크게 기대하지 않습니다.

지난 하바드 졸업식에 초청 연사로 선 사람은 스필버그 (Steven Spielberg, 1946-)였습니다. 그의 연설문 중 이런 구절이 있었습니다. “사랑, 지원, 용기, 직관. 이 모든 것들은 영웅인 여러분의 화살 통에 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영웅에게는 한 가지가 더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무찌를 악당이 필요하죠. 여러분은 운이 좋습니다. 이 세계엔 괴물들이 가득합니다. 인종차별, 동성애 혐오, 민족간 의 증오, 계급간의 증오, 정치적 증오, 종교적 증오들이 있지요 (Love, support, courage, intuition. All of these things are in your hero’s quiver, but still, a hero needs one more thing: A hero needs a villain to vanquish. And you’re all in luck. This world is full of monsters. And there’s racism, homophobia, ethnic hatred, class hatred, there’s political hatred, and there’s religious hatred)." 참 대단하지 않습니까? 스필버그가 괜히 스필버그가 아니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스필버그의 말에는 뭔가 그만이 말할 수 있는 특별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시대를 책임 있는 존재로 살 수 있겠습니까? 저에게는 “너희에게는 성경이 있지 않으냐?” 이 말씀이 특별한 말씀으로 들립니다. 우리의 화살통에는 성경의 가치들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씩 하나씩 쉬운 것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내 삶의 현장에서 실천하는 일을 시작해야 합니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을 실천해 나가가야 합니다. 나의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일을 시작해야 합니다. 나의 욕심을 내려 놓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섬기는 삶을 시작해야 합니다.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실천할 것인지 서로 생각을 나누고 공유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이 역사에 개입하시는 그 날까지, 우리는 끝이 없는 이 싸움을 계속해 나가야 합니다.

 


11/6/2016 | 조국의 위기적인 상황을 보면서

너희는 나의 고난의 잔을 마실 수 있느냐? Are You Able to Drink My Cup of Suffering?

마가복음 10:35-45

지난 주일 설교에서 국정을 농단(壟斷)하는 사람들 중에 크리스천들은 없을까 하는 부끄럽고 불안한 마음이 든다고 했는데, 최순실, 최순득 자매가 2012-2013,년 2년 동안 한국의 어느 교회의 서리 집사였다는 언론의 보도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름만 올려 놓은 집사였지, 교회 일에 적극적로 참여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그 교회는 작은 개척교회였는데, 그 교회 담임 목사의 말에 의하면, 그 때는 한 사람이 귀했기 때문에 서리 집사 직책을 주면 좀 더 열심히 나오지 않을까 해서 서리 집사로 임명했다고 합니다. 두 자매는 평범한 중년 여성으로 보여 그 자신도 이 두 사람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두 자매는 예배 시간에 늦는 경우가 많았고, 예배가 끝나기 전에 자리를 뜨는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교인들 간에 알고 지내는 사람들도 없었고, 그저 안내위원들과 인사를 하는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 교회 담임 목사의 말은 “그 두 사람이 우리 교회를 찾아오고 설교를 들어준 것은 고마운데, 이런 일이 있고 보니 미리 알았더라면 신앙적으로 지도를 잘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고 했습니다.

저도 한국에서 개척교회를 했었기 때문에 그 교회 담임 목사에게 돌을 던질 생각은 없습니다. 그 목사의 말처럼 개척교회는 한 사람이 귀합니다. 그래서 말도 안 되는 유혹을 받게 됩니다. 저는 서울의 신월동이라는 가난한 동네에서 처음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결혼하자마자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정말 그 목사의 말처럼 한 사람이 새로 나오면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이런 개척교회의 목회자들의 마음을 잘 알고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제가 목회하던 동네는 버스 종점이었는데, 한번은 한 사람이 찾아와서 자기는 버스 운전 기사라고 했습니다. 충청도 어디에서 살다가 아이들 교육 때문에 서울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나가던 교회 목사로부터 받아 온 추천서를 보여줬습니다. 자기가 이곳에 와 보니 크리스천 안내양들 20여명이 나갈 교회를 결정하지 못하고, 나름대로 십일조 헌금을 모아 놓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다음 주에는 이 안내양들을 데리고 저의 교회로 나오겠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저는 순간적으로 “야, 이런 날이 오는구나. 안내양들 20명이 한꺼번에 교회에 나오면 성가대로 만들 수 있고, 주일학교에서 가르칠 수도 있겠구나. 이 안내양들이 십일조 헌금도 모아가지고 있다는데, 교회 재정도 잘 돌아가겠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의 어리석었던 과거 이야기를 다 드릴 수는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 사람은 개척교회 목회자들의 약점을 알고 교회를 돌아다니면서 돈을 뜯는 전문 사기꾼이었습니다. 저도 많은 돈은 아니지만, 돈을 좀 뜯겼습니다.

저는 최순실 씨가 교회의 집사였다는 언론의 보도를 보면서 크리스천은 과연 누구인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에 대한 크리스천의 책임은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에는 “너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고 자기 욕심을 채우려는 생각을 하지 말라 (로마서 13:12, 14)”고 했는데, “왜 우리는 성경 말씀대로, 왜 우리는 성경에서 배운대로 살지 않는가?” 하는 질문을 이 시점에서 다시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국에서 아파트 건축 붐이 일어난 것은 1970년대부터 입니다. 서울이 강남으로 확장되면서 논밭이던 곳이 속속 아파트 단지로 조성되었습니다. 재래식 집에 살던 사람들은 강남에 들어서는 고급 아파트들을 보면서 우리도 저런 집에서 잘 살 수 있다는 환상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서울로 인구가 집중되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그 때 교회 목사들을 유혹한 것이 소위 ‘번영신학 (Prosperity Gospel)’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교회에 나오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 번영신학의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성공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번영신학’을 가지고 설교하는 목사들의 메시지는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습니다. 그런 교회로 사람들이 몰렸습니다. 그래서 강남에 대형교회들이 우후죽순 격으로 생겨났습니다. 교회마다 목사들은 로버트 슐러 (Robert Schuller, 1926-2015) 목사의 ‘적극적인 사고 방식 (positive thingking)’을 흉내내기에 바빴습니다.

사람들에게 예수 믿고 교회에 나오면 성공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는 ‘번영신학’은 정통신학이 아닙니다. 정통신학에서 변질된 신학입니다. 성경의 내용과도 배치(排置)되고, 무엇보다도 번역신학을 가지고는 예수님의 말씀을 설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번영신학을 설교하는 설교자들의 설교를 들어보면 성경 이야기가 별로 없고, 모두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번영신학’이 그렇게 오랫동안 한국교회를 지배했던 것은 인간의 마음 속에 성공에 대한 야망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로버트 슐러의 설교나, 그런 설교를 흉내내는 설교들을 들어 보면 모두 인간의 마음에 들어 있는 성공에 대한 야망을 교묘하게 부추깁니다. 그 설교를 들을 때는 마치 나도 대기업의 회장이 된 것 같은 생각에 사로잡힙니다.

이제 이런 생각을 가지고 오늘 마가복음 본문 말씀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두 제자 야고보와 요한 두 사람이 예수님께 “주님, 저희들에게 소원이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 드리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두 사람에게 “그래? 너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고 묻습니다. 두 사람은 “주님이 다스리실 나라에서 우리 두 사람이 주님의 오른쪽과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 하고 주님께 부탁합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이 두 사람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그런 부탁을 한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마태복음 20:21).

여러분, 이 말씀을 잘 보십시오. 두 사람은 예수님을 3년 동안 따라다녔습니다. 따라다니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배웠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주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사역의 현장을 목격했습니다. 3년 동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價値)에 대하여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는 이 세상의 가치와 다르다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 백년을 믿어도 이런 가치관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모두 허사가 되고 맙니다. 교회는 꼬박꼬박 나오고, 성경을 배우고, 설교를 들으면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을 내려 놓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 없는 일이 되고 맙니다.

보세요.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이전 것들은 지나갔고, 보십시오, 새 것들이 와 있습니다 (Anyone who belongs to Christ has become a new person. The old life is gone; a new life has begun).” (고린도후서 5:17) ‘이전 것들’ ‘the old life’는 예수 믿기 전에 내가 가지고 있던 세상의 가치관을 말합니다. ‘새 것들’ ‘a new life’는 예수를 믿고 난 후에 나에게 생긴 새로운 가치관을 말합니다. 이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나는 ‘새로운 피조물 (a new person)’이 아닙니다. 좀 심하게 말한다면, 이 변화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고, 크리스천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 때는 이 모든 것이 내게 너무나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그 모든 것이 아무 쓸모 없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빌립보서 3:7) 누구의 말입니까? 바울의 말입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에 고백한 말입니다.

요한과 야고보 이 두 사람에게 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3년이나 따라다니면서 말씀을 배웠는데도 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살면서도 여전히 성공에 대한 야망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안타깝지만, 아직 이런 변화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너무 많습니다. 모두 ‘맛을 잃어버린 소금 (마태복음 5:13)’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맛을 잃어버린 소금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어서 밖에 버려져서 사람들이 밟고 다니는 수치를 당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두 제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너희가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구나.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실 수 있느냐? 그리고 내가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38절)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You don't know what you are asking! Are you able to drink from the bitter cup of suffering I am about to drink? Are you able to be baptized with the bap-tism of suffering I must be baptized with?"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주님의 오른쪽과 왼쪽에 앉게 해 달라는 말은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에 자기들을 앉게 해 달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은 이 두 사람이 그런 요청을 하면서도 어떻게 하면 그렇게 영광스러운 자리에 앉을 수 있는지 그 길을 제대로 모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들어 보세요. “내가 ‘고난의 쓴 잔’을 마시려고 하는데, 너희 두 사람은 나와 함께 이 잔을 마실 수 있겠느냐?” 예수님은 지금 두 제자에게 주님의 오른쪽과 왼쪽에 앉을 수 있는 영광을 얻을 수 있는 길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고난의 쓴 잔 (the bitter cup of suffering)’이 십자가를 말하는 것은 더 말씀드릴 필요가 없는 줄 압니다. 예수님은 ‘고난의 쓴 잔’을 마시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인 줄 알고 이 잔을 마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래서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빌립보서 2:9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예수님을 ‘최고로 높은 자리 (the highest place)’에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 되게 하셨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에게 주어진 ‘최고로 높은 자리’가 곧 하나님의 보좌 ‘오른쪽’이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8:34).

제가 기회 있는대로 본 회퍼 (Dietrich Bonhoeffer, 1906-1945)를 소개해 드렸습니다. 저는 신학교 시절에도 그의 대한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이번에 도서부에서 책을 구입하는데 책을 추천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본 회퍼의 책 3권을 추천했습니다. 요즘에 부쩍 본 회퍼에 대한 관심이 더 생깁니다. 그 이유는 본 회퍼가 이미 70년 전에 살았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를 책임 있게 살아야 하는 오늘의 크리스천의 삶에 대하여 많은 영감(靈感, inspiration)을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의 책을 다시 읽으면서 가슴이 철렁했던 구절이 있습니다. “When Christ calls a man, he bids him come and die (그리스도께서 한 사람을 부르실 때, 그는 그에게 와서 죽자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주님이 나를 부르시는 것은 나와 함께 죽자고, 나와 함께 십자가를 지자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가슴이 철렁 내려 앉지 않습니까? 그는 또 이런 말도 했습니다. “Being a Christian is less about cautiously avoiding sin than about courageously and actively doing God’s will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조심해서 죄를 피하는 것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는 용기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일에 대한 것을 말한다).”

우리 한국교회가 교회의 부흥에 목적을 두고 ‘번영신학’을 설교하면서 사람들의 성공에 대한 야망을 부추기는 대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책임 있는 크리스천의 삶에 대하여 설교하고, 십자가를 통한 영광의 삶을 설교했더라면 오늘의 한국교회가 이 지경이 되었을까요? 크리스천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름을 받은 이유와 목적을 알고, 각자가 삶의 현장에서 책임 있는 사람들로 살았더라면 오늘의 한국교회가 이렇게 되었을까요? 성경을 배운 사람들이 세상의 가치관을 내려 놓고, 성경이 보여 주는 가치들을 따라 살았더라면 오늘의 한국교회가 이렇게 되었을까요?

우리는 조국의 안타까운 현실을 보면서 우리 자신들을 돌아 봐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회개하지 않으면 제 2, 제 3 최순실이 계속 나올 것입니다. 크리스천의 이름을 가지고 국정을 농단하면서도 죄의식이 없는 사람들이 계속 나올 것입니다. 목사들은 정신 차려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제대로 알고 설교하고 있는지 자신을 통렬하게 비판해야 합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 ‘적극적인 사고 방식’이니, ‘삼박자 구원’이니 하면서 ‘번영신학’에 매달렸던 과거를 회개해야 합니다. 복음을 제대로 설교하지 않았던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다는 자기를 내려 놓는 것입니다. 자신의 욕망, 성공에 대한 야망, 권력에 대한 야망을 내려 놓는 것입니다. 이 말씀대로 살면 그 순간부터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 그 순간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보좌 오른쪽에 앉는 영광의 삶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읽어 보십시오. 우리가 이 세상에 나가서 크리스천으로서 어떻게, 어떤 식으로 살아야 하는지, 선명(鮮明)하게 나와 있습니다. “너희가 아는 것처럼 세상의 통치자들은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한다. 정치인들도 사람들에게 권력을 행사하려고 한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누구든지 너희 중에서 높아지려거든 종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너희 중에서 첫째가 되려거든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인자는 자기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왔다.” (42-45절)


10/30/2016 | 조국의 위기적인 상황을 보면서

세상에 대한 크리스천의 책임 Christian's Responsibility To The World

마태복음 5:13-16

예수님의 주옥 같은 말씀의 보고(寶庫)인 산상설교 (The Sermon On The Mountain)는 마태복음 5장에서 시작해서 7장까지 계속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서 하셨던 한 편의 긴 설교입니다. 여기에 다양한 토픽들이 등장합니다. 행복에 대한 문제, 크리스천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 복음과 율법과의 관계, 간음, 이혼, 다른 사람에 대한 보복, 인생의 적, 선한 행위, 기도, 금식, 돈, 염려와 걱정의 문제, 다른 사람에 대한 비판의 문제, 좁은 문과 넓은 문,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문제, 인생의 기초를 세우는 문제 등 중요한 토픽들이 들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팔복에 이어 두 번째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말씀을 들으면서 각자 무슨 생각들을 하셨습니까? 전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왜 하필이면 예수님의 제자들을 소금과 빛에 다가 비유를 했을까?” 세상에 좋은 것들이 많습니다. 값비싼 것들도 많습니다. “너희는 이 세상의 금이다. 세상에서 너희는 금과 같이 빛나야 한다.” 이렇게 말씀하셔도 멋진 말씀이 될 텐데, 왜 하필이면 소금과 빛에 비유를 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이 말씀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이 말씀의 영어 표현을 한번 보십시오. “You are the salt of the earth.” “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소금’도 알고 ‘빛’이 무엇인지 잘 알 것 같습니다. 그 뒤에 나오는 ‘earth’와 ‘world’는 모두 ‘세상’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딱히 달리 번역할 우리 말이 없습니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of’라는 전치사 (preposition)입니다. 우리 말의 ‘.....의’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사전에서 ‘of’라는 말을 찾아 봤더니, 이런 설명이 있었습니다. “It is used to indicate specific identity or a particular item within a category." 'of'라는 전치사는 한 카테고리 안에서의 특별한 정체성이나 특별한 품목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the salt of the earth’라는 말은 “너는 세상에서 소금의 역할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 이런 뜻입니다. ‘the light of the world’는 “너는 이 세상에서 빛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이런 뜻입니다. 만일 우리가 세상에서 소금으로 살지 않고, 빛으로 살지 않으면 우리는 크리스천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요즘엔 소금이 건강에 안 좋다고 해서 음식을 짜지 않게 먹습니다. 포테이토 칩 같은 것도 아주 짠 것도 있지만, 소금을 아예 넣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된장, 고추장도 얼마나 짭니까? 예전에는 보관이 잘 안 되니까 아주 짜게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보관 시설도 잘 되어 있고, 건강에도 짠 것이 안 좋으니까 소금을 적게 넣은 것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소금 적게 넣은 고추장 먹어 보니까 맛이 있습니다. 하지만, 건강에 나쁘다고 해서 소금을 적당량 섭취하지 않으면 우리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제가 어느 다큐멘터리를 봤는데, 중앙아시아에서 많이 기르는 ‘야크 (Yak)’라는 동물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야크’는 소와는 달라요. ‘야크’는 야생 동물입니다. 중앙아시아의 초원에 떼를 지어 사는 야생 동물입니다. 중앙아시아 사람들은 이 ‘야크’를 길을 들여서 기릅니다. 고기도 먹고, 젖도 짜고, 가죽도 이용하고, 무거운 짐도 운반하는 없어서는 안 될 아주 유용하고 고마운 동물입니다. 궁금한 것은 이 야생 동물을 어떻게 길을 들였을까 하는 것인데, 소금으로 길을 들이더라고요. 소금을 먹지 못한 ‘야크들’이 사람이 사는 동네로 들어 옵니다. 아마 본능적으로 사람에게 다가 오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손바닥에 소금을 올려 놓고 손을 내 밉니다. 그러면 ‘야크들’이 다가 와서 핥아 먹습니다. 한번 소금 맛을 본 ‘야크들’은 인간을 떠나지 않는답니다.

소금은 오늘 성경 말씀에 나오는 것처럼 ‘짠 맛’을 낼 때 소금입니다. 소금의 정체성은 '짠 맛'입니다. ‘짠 맛’을 잃어 버리면 더 이상 소금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짠 맛을 유지해야 썩는 것을 방지할 수 있고, 계속해서 짠 맛을 유지해야 맛을 낼 수 있고, 생명을 유지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빛’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산 위에 있는 마을은 숨겨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산 위에 있는 마을을 볼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드러나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마치 등불을 켜서 높은 곳에 두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높은 곳에 등불을 켜 놓으면 그 주변이 모두 밝아집니다. 크리스천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렇지도 않지만, 예전엔 교회를 질 때 높은 곳에 졌습니다. 언덕진 곳에 교회를 지어서 마을 사람들이 교회를 멀리서도 볼 수 있게 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교회를 볼 수 있게 했다는 것은 시사하는 점이 매우 큽니다. 그만큼 교회는 세상에서 어두운 곳을 밝혀 주는 빛과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빛에 대해 생각나는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청년들이 좋아하는 “일어나 빛을 발하라!”라는 성경 구절입니다. 이사야 60:1에 있는 말씀입니다. 청년들이 수련회 갈 때 많이 선택하는 구절입니다. 하지만,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잘 모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도 그렇습니다. “너희는 이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이 세상의 빛이다!” 이 말씀을 설명도 듣고 해서 알 것 같지만, 이 말씀이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지 잘 모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16절 말씀이 결론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너희의 선한 행동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In the same way, let your good deeds shine out for all to see, so that everyone will praise your heavenly Father (마찬가지로, 너희들의 선한 행동이 모든 사람에게 비쳐서 볼 수 있게 하라.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할 수 있도록 하라).”

우리가 이 세상에서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도, 우리가 이 세상에서 빛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도 모두 ‘good deeds’를 통해서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 뭐 따로 특별한 일이 있는 것이 아니고, 또 빛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 무슨 특별한 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good deeds’를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했다고 자기 의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한 ‘선한 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무슨 심오한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무슨 깨닫기 어려운 말씀을 하신 것도 아닙니다. “너희는 이 세상에 나가서 소금처럼 짠 맛을 내고, 빛처럼 주변 사람들을 밝게 비춰 주는 착한 일을 해야 한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너희가 하는 착한 행동을 보고 너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해야 한다.” 간단하지만 분명하게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조국은 ‘국정농단’ 시건으로 떠들썩 합니다. 아니, 단순히 떠들썩 한 것이 아니라 나라가 위기에 빠졌다고 봐야 합니다. ‘농단(壟斷)’이라는 말은 맹자에 나오는 말인데, ‘높은 언덕’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의 유래가 재미있습니다. 한 상인이 높은 언덕에 올라가서 시장을 내려다 볼 수 있는 ‘높은 언덕’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랬더니, 시장에서 돌아가는 일이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어떤 물건이 많이 나오고 어떤 물건이 적게 나왔는지 환히 볼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농단’에서 시장을 살핀 이 상인은 부족한 물건을 미리 사들였다가 비싸게 팔아 큰 이익을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국정의 ‘농단’에 선 사람들에게 얼마나 유혹이 많았겠습니까? 자기들이 계획한대로 나라가 움직이는 것을 내려다 보고 있으면 그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저 아래 내려다 보이는 사람들은 도저히 알 수 없는 고급정보를 가지고 나라를 움직이는 사람들의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조금만 권력의 입김을 불어 넣으면 대기업으로부터 수십억, 수백억이 한 순간에 들어오는 것을 보면서 유혹을 받지 않겠습니까?

문제는 국정 ‘농단’의 중심에 대통령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통령은 자기 비서관들에게 ‘농단’을 할 수 있도록 빌미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비서관들의 비리가 밖으로 새어 나와도 비호하고 감쌈으로써 문제를 키워왔다는 것입니다. 국민들은 경악했고, 분노했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시국선언문이 각계 각층에서 쏟아지고 있습니다.

저 역시 이런 뉴스를 보면서 마음이 허탈하고, 실망스러운 마음 금할 길이 없었습니다. 날이면 날마다 새로운 비리 사실이 언론에 의해 폭로되고 있는데, 대통령은 일을 축소하기에 급급하고, 검찰은 수사의 의지를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서,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를 정도로 혼란스러웠습니다. 수많은 증거가 나왔는데도, 나는 아니라고 하면서 딱 잡아 떼는 사람들을 보면서, 도대체 이 땅의 크리스천들은 어디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이 사실에 더 분통이 터졌습니다. 이번에 이렇게 연루되고, 국정을 농단했던 사람들 중에 크리스천들은 없을까 하면서 분노했습니다.

설교자인 저는 이런 국정 농단의 책임이 누구보다도 목사들에게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목사들이 성경을 잘못 가르쳤고, 복음을 잘못 가르쳤습니다. “크리스천이 성경만 보면 되지 정치는 알아서 뭐해?” “크리스천이 성경만 알면 됐지, 돈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서 뭘 해?” 정치나 경제, 돈은 세상 일인데, 세상 일에 왜 관심을 갖느냐는 것입니다. 목사들이 이런 식으로 가르쳐 왔고, 설교했습니다. 세상에 나가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것이 신자들에게 ‘농단'의 빌미를 제공했고, 신자들에게 유혹의 길을 열어 준 셈이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성경만 보면 된다고 배웠으니까, 기도만 하면 된다고 배웠으니까 국정을 농단하면서도 죄의식이 없습니다.

놀랍게도 주님은 벌써 2,000년 전에 그 말씀을 하셨습니다.“너희는 소금이다, 너희는 빛이다” 단순히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시고,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은 우리가 등지고 살아야 곳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무대입니다. 우리는 이 속에서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하고, 우리는 이 속에서 빛의 역할을 감당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상에 대한 그들의 책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닷물은 염도가 3.5%라고 합니다. 우리 몸의 생체 염도는 0.9%라고 합니다. 그래서 생리식염수 (Salin solution)은 염도가 0.9%로 맞춰 있습니다. 우리 몸에 들어가도 전혀 부작용이 없습니다. 3.5%면 100명 중의 3.5명입니다. 0.9%면 100명 중의 한 사람입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이 세상에 들어가서 제대로 소금 역할을 감당하면 이 세상은 썩지 않고 잘 보존될 수 있습니다. 적게 잡아서 100명 중의 한 사람만 제대로 크리스천으로 살면, 많이 잡아서 100명 중에 세 사람만 제대로 크리스천으로 살면 이 세상은 썩지 않고 보존됩니다.

마가복음 16:15에 주님이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말씀이 나옵니다. “온 세상으로 가거라.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여라.” “Go into all the world and preach the good news to all creation.” (NIV) 여기서 주의해서 봐야 할 것은 ‘into’라는 전치사입니다. 속으로 파고 들어가라는 말 아닙니까? 이 세상이 우리가 파고 들어가서 소금으로, 빛으로 책임을 감당해야 할 영역입니다. 교회는 우리가 한번 모여서 예배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예배를 마치면 우리는 사명감으로 무장하고 세상으로 깊숙하게 파고 들어가야 합니다. 그 자리가 우리가 소금으로, 빛으로 역할을 해야 하는 자리입니다. 대통령이 있는 청와대도 들어가야 합니다. 비서관으로도 들어가야 합니다. 재계에도, 법조계에도 들어가야 합니다. 지금 뉴스에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는 청와대 비서관들 중에, 크리스천들이 상당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소금으로, 빛으로 살기는커녕, 선한 행동을 하기는커녕 ‘농단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해서 결국 이렇게 수치를 당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민족의 역사를 보면 민족이 어려울 때마다 민족을 구원한 것은 해외에 나와 있는 동포들이었습니다. 이렇게 나라가 혼란스러울 때, 우리는 천만다행으로 이렇게 편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올바른 생각이겠습니까? 모르드개 (Mordecai)가 조카 에스더 (Esther)에게 했던 말이 생각납니다. “왕비가 지금 왕비의 자리에 오른 것이, 바로 이 때를 위한 것인지 누가 압니까 (Who knows if perhaps you were made queen for just such a time as this)?” (에스더 4:14) 에스더는 삼촌 모르드개의 말을 듣고, "예. 삼촌이 이르신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그 일을 하다가 죽으면 죽는다는 각오로 그 일을 하겠습니다." 이 말씀이 여러분의 가슴을 치지 않습니까? 앞으로 언제까지가 될지 모르지만, 대 예배 때 대표 기도하시는 분들, 새벽 기도에서 기도 맡으신 분들은 꼭 우리 조국을 위한 기도를 빼놓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개인 기도에도 조국을 위한 기도를 꼭 넣어 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래도 있지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요한복음 12:24)”고 말씀하셨습니다.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은 변하지 않는 영원한 진리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소금이 제 역할을 다 하려면 녹아 없어져야 합니다. 빛이 제 역할을 다하려면, 물체가 타서 없어져야 합니다. 죽고, 녹고, 타서 없어진다는 것이, 세상에서의 크리스천들의 삶의 방식입니다. 나 한 사람 예수 믿고 천국 가면 된다고요? 그런 말 하지 마세요. 크리스천이 성경만 보면 되지 왜 세상 일에 관심을 갖느냐고요? 제발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우리는 세상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칼 바르트 (Karl Barth, 1886-1968, 스위스)의 말처럼 우리는 한 손에 성경을, 다른 한 손에는 신문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 속으로 들어가서 소금으로, 빛으로 살아야 합니다. 세상 속에서 우리는 녹고, 타서 없어져야 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세상을 섬기고, 이런 방식으로 세상을 변화 시켜야 합니다.


10/23/2016 | 마가복음 강해설교 53

항상 깨어 있으라! Be On The Alert!

마가복음 13:32-37

성경에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신다는 말씀이  여러 차례 나옵니다. 기독교 역사 이래 많은 크리스천들이 주님이 언제 오시는지 ‘그 날’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왔습니다. 주님께서 “무화과나무로 부터 교훈을 배워라. 가지가 부드러워지고 새 잎을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안다. 이처럼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인자가 바로 문 앞에 가까이 온 줄 알아라 (마가복음 13:28-29)”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조금만 주의해서 보면 비유의 말씀인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 말씀을 근거로 주님이 오시는 날을 계산했습니다. 특히 우리 한국 사람들 중 어떤 사람들은 무화과나무 가지가 부드러워지고 새 잎이 나는 여름을 8월이라고 생각했습니다. 8월 중에도 15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5일이라고 생각한 근거는 매우 희박합니다. 8월 15일이 광복절이니까 주님이 오실 날을 광복절과 결부 시킨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날짜를 계산하고, 또 년도를 계산했습니다. 우리나라가 해방된 1945년을 하나님의 희년 (the year of Jubilee)으로 보고, 여기에 에다가 50년을 더했습니다. 희년에는 땅은 원래 주인에게 돌아가고, 종들은 자유인이 됩니다. 그러니까 1945년은 틀림없는 희년이라는 것입니다. 희년은 50년마다 오니까 1945에 50을 더했더니, 1995년이 하나님의 희년이라는 계산이 나왔습니다. 이런 식으로 일부 사람들은 1995년 8월 15일에 주님이 오신다고 야단 법석을 떨었습니다.

왜 사람들은 주님이 오시는 날을 그렇게 궁금해 하는지 그 속을 모르겠습니다. 주님은 그 날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른다. 하늘에 있는 천사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 (32절) 주님이 오시는 날을 계산하는 사람들에게 쐐기를 박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목적은, ‘그날’이 언제인지 알 수 없으니까 우리는 늘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러면 “깨어 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고 주님께 물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깨어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종들에게 집을 잘 돌보라고 각자에게 임무를 주고 집을 잘 지키라고 하면서 여행을 떠났습니다. 마가복음에는 그런 말씀이 없지 않지만, 마태복음 24장에 보면 이 종들이 주인이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말씀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 주인은 ‘먼 길’을 간 것 같습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는 ‘a long trip’을 떠났다고 나와 있습니다. 어쩌면 외국 여행을 갔는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주인이 언제, 어느 때 돌아올지 아무도 모릅니다. 저녁이나 혹은 밤중에 올지도 모르고요. 새벽이나 혹은 아침에 올지도 모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단어들을 조심해서 보십시오. ‘저녁’ ‘밤중’ ‘새벽’ ‘아침’ 이런 단어들은 누구도 예상하지 않았던, 방심하고 있던 때라는 것을 말합니다. 아무튼 주인은 오늘 말씀에 나온 것처럼 ‘갑자기 (suddenly)’ 집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는 ‘without warning (아무 경고 없이)’ 주인이 돌아 온다고 했습니다. 그 때 자고 있는 것을 주인이 보지 않게 하는 종이 있다면 그 종이 바로 항상 깨어 있는 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혹시 ‘종말론적 신앙’ 혹은 ‘종말론적인 믿음’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영어로는 ‘eschatological faith’라고 합니다. 이것은 언제 지구의 종말이 오느냐 하는 것에 관심을 가진 믿음이 아닙니다.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오늘을 준비하는 믿음을 말합니다. 주님이 언제 오실지 모르니까 언제 오시더라도 준비가 되어 있는 믿음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깨어 있는 믿음’을 신학적인 용어로 말한다면 ‘종말론적인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주님이 말씀하신 ‘깨어 있는 믿음’을 우리의 삶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제가 몇 가지로 적용할 수 있는 길을 찾아 봤습니다. 첫째로, 영적으로 각성하는 것입니다. 각성(覺醒)이라는 말은 정신을 똑바로 차리는 것입니다. 각성제(覺醒劑)는 정신이 나게 하는 약을 말합니다. 각성제를 먹으면 일시적이나마 잠이 달아나고 정신이 또렷해 집니다. ‘영적 각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영이 잠들지 않고 깨어 있다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Spiritual Awakening’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아시지요? 우리가 살고 있는 뉴잉글랜드 지역에 두 차례의 큰 ‘영적 각성 운동 (The Great Awakening Movement)’가 있었습니다. 편의상 ‘The First Great Awakening Movement (1730–1755)’라고 하고, ‘The Second Awakening Movement (1790–1840)’이라고 합니다. 제 1차 대 각성 운동은 조나단 에드워드 (Jonathan Edwards, 1703-1758)와 조지 휫필드 (George Whitefield, 1714-1770)가 주도합니다. 제 2차 대 각성 운동은 챨스 피니 (Charles Finny, 1792-1875)와 나다니엘 테일러 (Nathaniel Taylor, 1786-1858)가 주도합니다. 이들의 설교 주제는 죄에 대한 심각성을 깨닫고 회개하고 거듭나라는 것이었습니다.

제 1차, 2차 영적 대 각성 운동의 진원지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뉴잉글랜드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했습니다. 술집들이 문을 닫고, 댄스장, 사교장, 오락실이 문을 닫았습니다. 장사가 안 되어서 문을 닫은 것이 아니라 주인들이 자진해서 문을 닫았습니다. 교회마다 사람들이 차고 넘쳤습니다. 그리고, 예배 때마다 눈물 흘리며 회개하는 사람들이 속속 나왔습니다.

청년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청년들이 회개하고 신학교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청년들 사이에서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영적 각성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제 2차 영적 각성 운동에서 크게 영향을 받은 다섯 명의 청년들이 윌리엄스 타운에 있는 윌리엄스 칼리지 (Williams College)에 입학합니다. 이들은 수업을 마친 후에 강가에 모여 기도하면서 경건생활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기도 중에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집니다. 이 학생들은 근처에 있는 건초더미 속으로 들어가 비를 피합니다. 그런데, 비는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쏟아집니다. 그 때, 사무엘 밀즈 (Samuel J. Mills, 1783-1818)라는 청년이 “우리 비가 그칠 때까지 세계 선교를 위해서 기도하자” 라고 친구들에게 제의합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건초더미 기도회 (Haystack Prayer Meeting or Haystack Movement)’입니다.

그래요. 다섯 청년들이 비를 피하려고 하다가 잠시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뭐 달라진 것이 있습니까? 이 기도 운동이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청년들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캠퍼스 마다 기도가 시작되었습니다. 윌리엄스 칼리지는 말할 것도 없고, 예일대학, 하버드, 프린스턴 대학 등에 기도 운동이 시작됩니다. 마침내 미국을 바꾸고 세계를 바꾸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영적으로 깨어나야 하지 않습니까? 지금 우리의 신앙생활이 어떻습니까? 너무 안일하지 않습니까? 일주일에 한번 교회에 와서 예배 드리는 것으로 의무를 다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식으로 믿어도 괜찮은 것입니까? 우리 속에 있는 죄된 모습들을 제대로 발견하고 있습니까? 죄를 슬퍼하며 회개하고 있습니까? 이대로는 안 되고, 내가 깨어나야 하겠다, 거듭나야 하겠다는 생각들을 하고 있습니까? 바울은 일찍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이 어느 때인지 압니다. 잠에서 깨어나야 할 때가 벌써 되었습니다. 지금은 우리의 구원이 우리가 처음 믿을 때보다 더 가까워졌습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로마서 13:11-12) 맞습니다. 지금은 깊은 잠에서 깨어나야 할 때입니다. 내 삶에 영적 각성 운동이 일어나야 할 때입니다.

둘째로, 기도에 힘쓰는 것입니다. “깨어 있으라”는 말은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골로새서 4:2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기도에 힘을 쓰십시오.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깨어 있으십시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Devote yourselves to prayer with an alert mind and a thankful heart (감사하는 마음과 깨어 있는 마음으로 기도에 헌신하십시오).” 

주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내 마음이 심히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여기서 머무르면서 깨어 있어라.” (마가복음 14:34) 같은 말씀이 마태복음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여기서 머무르며 나와 함께 깨어 있어라.” (마태복음 26:38) 주님께서 이 지상에서 보내신 마지막 밤에 있었던 일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괴로운 마음을 제자들에게 모두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속 마음을 내 보이신 것은 아마 처음이 아닌가 합니다.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는 말씀은 “나와 함께 기도하자”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깨어서 기도하자는 예수님의 마지막 요청을 들어드리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동안 제자들은 모두 잠을 잤습니다. 어떻게 보면 별 것 아닌 일인데, 왜 성경은 제자들이 그 시간에 잠을 잤다는 것을 여러 차례 강조하고 있을까요? 지금은 모든 사람들이 기도하기를 힘들어하는 시대입니다. 차라리 시간을 드려서 봉사를 하라면 했지 기도는 힘들어 합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기도를 힘들어 하는 때가 올 것이라는 것을 미리 내다 보셨는지도 모릅니다.

오늘 우리는 “나와 함께 깨어서 기도하자!” 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기도하면 뭐가 달라집니까? 우리는 이렇게 질문하는데, 성경은 “항상 깨어서 기도하라”고 합니다. 제가 Haystack Prayer Meeting에서 얻은 영감은 기도가 세계를 바꾼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뭐가 달라집니까? 달라집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변화되고요. 그 기도가 세계를 바꿉니다. 이 Haystack Prayer Meeting이 캠퍼스 기도 운동으로 번지게 되고요. 이 기도 운동에서 영향을 받아서 한국에 온 선교사들이 아펜젤러 (Henry G. Appenzeller, 1858-1902)와 언더우드 (Horace G. Underwood, 1859-1916) 선교사입니다. 아펜젤러는 감리교 선교사입니다. 펜실베니아의 작은 마을에서 나서, 뉴저지에 있는 드류 (Drew Theological Seminary)에서 공부했습니다. 언더우드는 장로교 선교사입니다. 영국에서 태어나서 13살 때 미국으로 이민 왔습니다. 언더우드는 뉴저지에 있는 New Brunswick 신학교를 나왔습니다. 이 두 선교사가 한국 근대사의 흐름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마지막으로, 현재 자신이 어떤 위치, 어떤 자리에 있든지 그 일에 성실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일에 불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자신의 처지를 불평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불평과 불만이 새로운 돌파구를 만들어 내는 창의적인 역할을 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경우, “깨어 있으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맡겨진 일에 아무리 작아 보이고, 하찮게 보여도 그 일에 성실하라는 메시지를 던져 줍니다. 갑자기 주인이 돌아 옵니다. 그 때 자지 않고 깨어 있는 종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주인은 종들에게 각각 임무를 맡겨 주었습니다. 종들에게 무슨 중요한 일을 맡겼겠습니까? 자기의 종 (slave)에게 중요한 일을 맡기는 주인이 있습니까? 종들에게는 매우 단순한 일을 맡깁니다. 주인이 종들에게 맡긴 일은 중요한 일이 아니라 대수롭지 않은 일들입니다. 주인이 돌아 올 때, 주인이 맡긴 일을 게을리 하지 않은 종이 깨어 있는 종 아닙니까? 이 일이 작게 보여도 내 주인이 나에게 맡긴 일이라고 생각하고 성실하게 그 일을 하는 종이 깨어 있는 종 아닙니까?

미국 폭스사 (20th Century Fox Film Corporation)가 판매직 사원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무려 1,500 명의 지원자가 자기 소개서를 보내왔습니다. 폭스사는 그 중에서 특이하게 자기 소개서를 쓴 한 사람을 채용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은 이렇게 자기 소개서를 썼다고 합니다. “저는 현재 가구점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어느 때라도 가구점을 한번 방문하시면 세일즈맨으로서의 저의 능력을 금방 판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구를 사는 척하고 한번 방문해 주십시오. 제 머리는 빨간 색이기 때문에 저를 알아보기가 쉽지만 저는 손님을 알아볼 수가 없을 테니, 부디 한번 찾아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당신을 많은 손님 중의 한 사람으로 맞을 것입니다. 저의 판매 실력과 손님에 대한 친절이 어느 정도인지 보시고 마음에 드시면 저를 채용해 주십시오.”

‘깨어 있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단순히 잠을 안 자고 있다는 문자적인 의미를 넘어서, 영적으로 각성하는 것입니다. 내가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안일하게 믿음생활을 계속해서는 안 되겠다, 잠에서 깨어 나야 하겠다, 내 속에 있는 나의 죄성(罪性)을 봐야 하겠다, 회개해야 하겠다, 새로워져야 하겠다고 마음을 다잡는 것입니다.

동시에, ‘깨어 있다’는 것은 “나와 함께 깨어서 기도하자”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다시 기도의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자신이 바뀌고, 세상이 바뀐다고 하는 기독교 영성을 새롭게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깨어 있다’는 것은 현재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 하는 것입니다. 그 일이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중요한 일이든, 하찮은 일이든,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감당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일은 누구나 정신 차리고 잘 합니다. 그러나, 작은 일은 모두가 소홀하게 여깁니다. 깨어 있는 사람은 작은 일에도 성실합니다.

오늘 말씀은 이렇게 끝이 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모두에게 하는 말이다. ‘항상 깨어 있어라!’” (37절)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I say to you what I say to everyone: Be on the alert!" 우리 모두가 “깨어 있으라!”는 주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