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1/2016 | 크리스마스 메시지 I

큰 기쁨의 소식 The Good News of Great Joy

누가복음 2:1-14

우리 옆에 계신 분들, 또 주변에 계신 분들과 “메리 크리스마스” 하면서 서로 성탄절 인사를 나누실 까요?

오늘 크리스마스 예배인데, 무슨 말씀을 서로 나눌까 하다가 누가복음 2장에 나오는 가장 오래된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선택했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 때에 아구스도 황제가 내린 칙령에 따라서 온 나라가 호적 등록을 하게 되었습니다 (1절)” 이렇게 시작됩니다. 영어 성경에는 이 말씀이 “At that time the Roman emperor, Augustus, decreed that a census should be taken throughout the Roman Empire. This was the first census taken when Quirinius was governor of Syria.” 로마의 황제 어거스터스가 황제로 있을 때, 로마제국에 속한 모든 나라에 인구 조사를 하라는 칙령이 내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칙령은 퀴리니우스 (Quirinius, BC 51-AD 21)가 시리아의 총독으로 있을 때 행해 진 것이라고 합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한 말씀을 덧붙인다면, 이 때는 헤롯이 유대의 왕으로 있을 때였다고 합니다 (마태복음 2:1). 여기 나오는 헤롯은 ‘King Herod the Great’ ‘위대한 헤롯’이라고 불리는 사람입니다. 로마가 팔레스타인 지방을 지배하면서 세운 왕입니다. 유명한 ‘헤롯 성전’을 진 사람이기도 합니다. 헤롯 성전은 BC 20년에 건축을 시작해서 AD 63년에 완성이 되었습니다. 헤롯이 BC 73-BC 4년까지 살았으니까요. 그는 그의 성전이 완성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이 엄청난 성전 공사가 무려 83년만에 완성이 되지만, 그 성전은 AD 70년에 로마에 의해서 완전히 파괴되고 맙니다. 이스라엘에 ‘통곡의 벽 (The Wall of Wailing)’이라는 것이 있는데, 헤롯이 지은 성전의 서쪽 벽의 일부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벽에 와서 벽을 붙들고 웁니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통곡의 벽’입니다.

복음서를 쓴 누가나 마태는 왜 예수님께서 탄생하시던 때의 시대적인, 정치적인 배경을 굳이 밝혔을 까요? 저는 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누가나 마태가 쓰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는 누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확실한 역사적인 사실 (fact)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들이 일반 역사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들이 ‘역사적 사실’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지금 누가와 마태는 그들이 알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하면서 제일 먼저 이 이야기는 ‘역사적인 사실’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는, 시저 (Julius Ceasar, BC 100-BC 44)의 양아들로 있던 아우구스투스  (Augustus, BC 63-AD 14)가 시저가 죽은 후 혼란한 정국을 재빨리 수습하고, 로마제국의 황제로 있던 때였습니다. 세계사에서는 옥타비아누스 (Octavianus)라고 알려진 인물입니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제국의 속한 모든 지역에 인구 조사를 실시하라는 칙령을 내렸습니다. 유대 나라가 속한 팔레스타인 지역은 시리아의 총독 퀴리니우스가 인구 조사를 주관했습니다. 그리고, 그 때는, 헤롯이 유대나라의 왕으로 있던 때이기도 합니다. 이런 역사적인 배경과 상황을 알고 나면, 그 당시 팔레스타인의 작은 유대 나라의 사정이 어떠했을까 짐작이 갑니다. 로마에 세금을 내야 했고, 그 외에도 성전세라는 것도 있었습니다. 대규모의 성전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으니까 일반 백성들의 삶은 피곤하고 지칠 대로 지쳐 있었을 것입니다.

결혼을 약속한 요셉과 마리아라는 사람이 오늘 이야기에 등장합니다. 그 때는 지금하고 달라서 약혼한 관계라고 하면 부부처럼 여기던 때였습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 호적을 등록 하라는 황제의 칙령이 내렸기 때문에, 요셉은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가서 호적 등록을 해야 했습니다. 그 때 두 사람은 나사렛에 살고 있었습니다. 베들레헴은 예루살렘 남쪽에 있는 작은 마을입니다.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의 거리는 약 120km입니다. 그 때 마리아는 만삭의 몸이었고, 길은 지금 처럼 좋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베들레헴으로 갈 때 사마리아 땅을 지나가지 않고 우회 (迂回)를 했다면, 약 두 주 정도 족히 걸렸을 것입니다.

만삭의 몸에 먼 길을 가야 했던 두 사람은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왜 또 하필이면 그 때 호적 등록을 하라는 황제의 칙령이 내렸을까요? 성질이 급한 사람은 “아 놔, 나 호적 등록 안 할거야!”  하면서 호적 등록을 거부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과 마리아 두 사람은 베들레헴으로 갔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지나 놓고 생각해 보면 신기하고 놀랍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증명하기 위하여, 그 시대의 지도자들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의 황제로서 나라의 수입을 올리기 위해서 호적 등록을 하라고 칙령을 내렸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제의 명령이니까 사람들은 그 명령을 거절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베들레헴이 어떤 마을인가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베들레헴은 다윗의 고향입니다. 요셉도 고향이 베들레헴이었는데, 이 사실은 요셉이 다윗의 가문(家門)에 속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메시아의 탄생에 대한 예언자의 말씀을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구약성경 미가 5:2에 있는 말씀입니다. “But you, O Bethlehem Ephrathah, are only a small village among all the people of Judah. Yet a ruler of Israel will come from you, one whose origins are from the distant past.” 베들레헴은 작은 마을이지만, 베들레헴에서 한 위대한 지도자가 나온다는 예언의 말씀 아닙니까? 이 지도자의 오리진 (출신)은 먼 과거에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성경에는 “whose origins are everlasting (NKJV)”이라고 했습니다. 그의 출신은 따지고 올라가면 영원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그의 출신은 하나님께 까지 이른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그 지도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암시(implication)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그 때 아우구스투스가 인구조사를 명령하지 않았더라면 요셉이 베들레헴에 갔겠습니까? 아니, 그 이전에 마리아가 한 청년을 교제를 하다가 약혼을 했는데, 그 청년의 고향이 베들레헴이 아니라 나사렛이었으면 어떻게 될 뻔 했습니까? 그랬더라면 베들레헴으로 갈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요셉과 마리아를 베들레헴으로 가게 했고, 거기서 아들을 낳게 하심으로, 미가의 예언이 이루어졌습니다. 나중에 이런 사실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가 나사렛 사람이라면서? 나사렛에서 무슨 큰 인물이 나오겠어?” 하면서 예수님을 평가절하했습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도 그렇게 주관하고 계신다고 믿는 것입니다. 시편 139:17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How precious are your thoughts about me, O God. They cannot be numbered (나에 대한 주님의 생각은 얼마나 보배로운 지요. 그것들은 일일이 다 셀 수가 없습니다)!” 다윗의 고백입니다.

마리아는 베들레헴에서 해산을 합니다. 그런데, 빈 방이 없어서 마구간에서 아기를 낳아야 했습니다. 베들레헴은 작은 마을인데, 한꺼번에 사람들이 모여드는 바람에 빈 방이 없었습니다. 아들을 낳았는데, 포대기에 싸서 구유 (manger)에 눕혀 두었습니다. 퀴즈 문제 하나 낼까요? 이 말씀을 읽고, 답을 골라 보세요. ①불쌍하다. ②낭만적이다. ③아기 날 준비를 해 가지고 갔어야 했다. 두 사람은 준비성이 없었다. ④요셉이 마리아에게 얼마나 미안했을까?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우리의 시각(視角)을 가지고 읽으면 안 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시각으로 읽어야 그 뜻이 드러납니다. 바로 그 시간에 베들레헴 들판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에게 하늘로부터 강렬한 빛이 비취었습니다. 성경에는 “주님의 영광의 빛이 그들을 둘러 비췄다 (The radiance of the Lord's glory sur-rounded them)”고 했습니다.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두려워 마라. 보아라. 모든 백성을 위한 큰 기쁨의 소식을 가지고 왔다. 오늘 다윗의 마을에 너희를 위하여 구세주께서 태어나셨다. 그는 곧 그리스도 주님이시다.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볼 것인데,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증거이다.” (누가복음 2:10-12)

이 말씀을 읽는 우리의 눈은 ‘포대기와 구유’라는 말에 꽂혀야 합니다. 이 목자들은 자기들이 들은 말씀이 사실인가 확인하기 위하여 달려 갑니다. 다윗의 마을이라고 했으니까 목자들은 곧장 베들레헴으로 달려갑니다. 그런데, 베들레헴에서 어떻게 그 아기를 찾겠습니까? 마을 여관에 빈 방이 없을 정도로 외지에서 온 사람들이 많고, 또 마을 사람들도 있는데, 어떻게 이 아이를 찾겠습니까? 이 목자들이 여기 저기 다니면서 “오늘 저녁에 아기를 난 사람 있습니까?” 하고 찾고 다녔을 것입니다. 다행히도 아기를 난 사람이 한 집 밖에 없으면 별 문제가 없었을지 모르지만, 두 집이 있었다면, 어떻게 그 아기를 알아 볼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목자들은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찾으면 되니까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는 이렇게 한치의 오차도 없습니다. 빈 방도 없고, 아기를 누일 baby crib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참 안 됐고, 불쌍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포대기와 구유’는 그 아기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유일한 증거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그 아기가 온 세상을 구원할 큰 기쁨의 소식을 가지고 온 구세주라는 것을 ‘포대기와 구유’를 통해서 증명하셨습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포대기와 구유’가 있습니까? 인간의 눈으로 보면 ‘포대기와 구유’는 가난과 수치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포대기와 구유’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들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시각이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뀐다면, 우리 중에 불행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또 자신을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내가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지 않았다고 절망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제 마지막으로 드릴 말씀은, 13-14절 말씀입니다. “갑자기 그 천사와 함께 많은 하늘 군대가 나타나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 땅에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 예수님의 탄생의 의미를 선포하는 말씀 아닙니까? 예수님의 탄생이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게 되고,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평화를 선물하는 일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실 것이니까 예수님의 탄생이 하나님에 영광을 돌리는 일이라는 말씀은 쉽게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평화를 선물해 주신다는 말씀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 말씀을 잘 보니까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평화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가 주어진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들이 과연 누구입니까?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Peace on earth to those with whom God is pleased.” 그 사람과 함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야고보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을 물리치시고,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주신다.” (야고보서 4:6) 성경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까지 모든 말씀을 읽고 난 후의 결론은,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을 기뻐하시고, 겸손한 사람을 가까이 하시고,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겸손은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I am humble and gentle at heart., 마태복음 11:29).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가리켜 “He took the humble position of a slave and was born as a human being (빌립보서 2:7)”이라고 했습니다. 더 설명할 것 없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은 예수님처럼 ‘humble position’을 취하는 사람입니다.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은 목자(牧者, shepherd)들에게 제일 먼저 전해졌습니다.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이 아니라,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목자들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먼저 전해졌습니다. 그 이유는, 목자들이 겸손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목자는 양을 치는 사람입니다. ‘친다’는 말은 ‘돌본다’는 뜻입니다. 겸손은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마태복음 11:29, 빌립보서 2:5-6). 예수님의 마음을 갖지 않은 사람은 양을 칠 수 없고, 다른 사람을 섬길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먼저 양을 치는 훈련을 시키신 이유입니다. 모세의 몸에서 양의 냄새가 났을 때, 하나님은 그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도 양을 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몸에서 양의 냄새가 났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목사, 장로, 권사, 집사, 임원, 팀장, 간사, 그 밖의 세워진 사람들의 몸에서 양의 냄새가 나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기뻐하시고, 그런 사람을 세상에 하나님의 샬롬을 전파하는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12/4/2016 | 대강절 둘째 주일 메시지

오래 전 선지자 꿈꾸던 복을 The Blest Vision By the Prophets Foretold

이사야 9:1-7

우리가 불렀던 찬송가 550장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 2절 가사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 매였던 종들이 돌아오네. 오래 전 선지자 꿈꾸던 복을 만민이 다 같이 누리겠네.” 이 찬송가 가사를 쓴 사람은 T. Hastings (1784-1872)라는 사람입니다. 아마도 Hastings 는 시편 60편에 나오는 “예루살렘아, 일어나 빛을 비추어라. 네 빛이 이르렀다.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떠올랐다. 밤처럼 짙은 어둠이 온 땅의 백성들을 덮을 것이나,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떠오르시며, 주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날 것이다. 민족들이 네 빛을 향해 나아오고, 왕들이 떠오르는 밝은 해와 같은 너를 보고 찾아올 것이다. 네 눈을 들어 주위를 둘러보아라. 사람들이 모여 너에게로 오고 있다. 멀리서부터 네 아들과 딸들이 함께 올 것이다 (1-4절)” 이 말씀에서 영감(靈感)을 받아서 가사를 썼을 것입니다.

제가 이 찬송을 부를 때마다 특히 마음에 와 닿는 가사가 있습니다. “오래 전 선지자 꿈꾸던 복을 만민이 다 같이 누리겠네.” 이 구절입니다. 많은 선지자들이 메시아 시대에 대한 꿈을 꾸었습니다. 가난과 고난과 전쟁, 포로 생활 속에서도 “메시아 시대가 곧 온다!”는 희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마치 초대교회 크리스천들 이 박해를 받을 때 “주 예수여, 어서 오십시오 (요한계시록 22:20)”라고 고백하면서 예수님께서 어서 오셔서 자기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를 바랐던 것과 같습니다. 또 이것은 우리나라가 주권을 빼앗기고 36년 동안 일본의 지배 있을 때 주님이 어서 오기를 소원했던 성도들의 기도와도 같습니다.

36년 동안 일본이 저지른 만행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3.1 운동이 일어나고 한 달 반 정도가 지났을 때, 경기도 화성시 향남면 제암리에 일본군 장교가 군인들을 끌고 왔습니다. 3.1 운동 때 화성시 주민들을 너무 과격하게 진압한 것을 사과하러 왔다고 하면서, 15살 이상 남자들은 모두 제암리교회로 모이라고 했습니다. 그 때 모인 사람들 대부분이 기독교와 천도교를 믿는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일본군 장교가 인사를 하고 교회 문을 나가자 마자 밖에 있던 일본군들이 창문을 열고 사격을 했습니다. 교회에 모였던 29명 전원이 사망했습니다. 일본군들은 자기들의 만행을 감추려고 교회에 불을 질렀습니다. 하지만, 이런 만행이 언제까지 감춰져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세브란스 의학 전문학교에 교수로 와 있던 캐나다 선교사 스코필드 (Frank W. Schofield, 석호필) 교수가 우연히 이 소식을 듣고 이 끔찍한 현장을 사진으로 찍어 본국으로 보냄으로써 세상 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지금 제암리교회에 가면 손에 사진기를 든 스코필드의 동상이 서 있다고 합니다. 스코필드는 3.1 운동을 주도한 33인과 함께 34번 째 민족대표로 인정 되어, 국립 현충원에 안장 되었다고 합니다.

일본의 만행으로 신음하던 한국교회에서 가장 많이 읽었던 성경이 요한계시록이었습니다. 평양 장대현 교회 길선주 목사님 같은 분은 일생을 통해 구약을 30회, 창세기와 에스더와 이사야서는 540회, 신약 전권은 100회, 요한서신은 500회, 요한계시록은 10,000 번을 읽었다고 합니다. 교회가 박해를 받고, 크리스천들이 핍박을 받던 때에, 다시 오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악을 이기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신다는 요한계시록의 말씀은 많은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이 “주 예수님, 어서 오시옵소서 (요한계시록 22:20)” 이런 말씀으로 끝이 나지요?

오늘 읽은 이사야 9장 말씀으로 돌아가 볼까요? 이사야는 유다의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활약했던 예언자입니다. 그 때가 약 기원전 700년경 입니다. 그는 므낫세 왕 때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웃시야 왕은 16살에 왕이 되어 52년 간 왕으로 있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잘했습니다. 하지만, 군사적으로, 경제적으로 나라의 힘이 커지자 그는 교만해 졌습니다. 그가 왕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이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웃시야는 스가랴가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께 복종했습니다. 스가랴는 웃시야에게 하나님 을 두려워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웃시야가 하나님을 섬기는 동안 하나님께서 웃시야의 하는 일을 잘 되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웃시야는 강해지면서 교만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망하게 되었습니다.” (역대하 26:5, 역대하 26:16) 그는 결국 하나님께 버림 받아 몹쓸 병에 걸려서 왕 위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는 성전에도 들어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격리된 삶을 살다가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그의 아들 요담이 왕이 되었습니다. 요담은 아버지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신기 하게도 그는 선한 사람이었지만, 그가 다스리는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서 악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역대하 27:2).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Jotham did what was pleasing in the LORD's sight, but the people continued in their corrupt ways.” 요담은 하나님 보시기에 기뻐하는 일을 했지만, 그의 백성들은 타락한 생활을 계속했다는 것입니다. 그의 아들 아하스는 어떨까요? 그는 아버지와는 달리 악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성경은 그가 ‘다윗의 길’을 따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가 통치할 동안 온 나라가 우상숭배에 빠졌습니다. 나라의 힘이 약해 지니까 근처에 있는 나라들이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그런 중에도 아하스는 계속해서 하나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역대하 28:19).

아하스가 죽고 그의 아들 히스기야가 왕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히스기야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 했습니다. “히스기야는 그의 조상 다윗처럼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옳은 일을 했습니다.” (역대하 29:2) 그는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일을 했고, 하나님께 복종했습니다. 하나님의 가르침과 명령을 지켰고,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위해 일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하는 일들을 축복했습니다. 그가 왕으로 있을 때에 앗시리아가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지만, 그 때도 히스기야는 현명하게 잘 대처했습니다. 말년에, 히스기야는 죽을 병을 앓게 됩니다. 그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이사야를 통하여 15년을 더 살게 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그 약속을 믿지 못하고 해시계를 15도 뒤로 물려 주면 믿겠다고 합니다 (열왕기하 20:10).

이 일이 근처에 있는 나라들에게 소문이 났는지 바빌로니아에서 사신들이 와서 이 일에 대하여 묻습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히스기야가 마음 속에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를 모두 알고 싶어하셨습니다.” (역대하 32:31) “God withdrew from Hezekiah in order to test him and to see what was really in his heart.”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마음 속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싶어서 히스기야를 그냥 내버려 두셨습니다. 바빌로니아의 사신들이 자기를 찾아 온 것에 우쭐한 히스기야는 바빌로니아 사신들에게 나라의 보물 창고를 열어서 모두 보여 줍니다. 그리고, 결국 이 일이 바빌로니아가 유다를 탐내는 계기가 되었고, 유다는 바빌로니아에게 멸망합니다.

예언자 이사야가 살던 시대적인 배경이 이렇습니다. 그가 예언자로 있을 때 비교적 선한 왕도 있었고, 악한 왕도 있었습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순교했던 때는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가 왕으로 있을 때 였습니다. 므낫세는 과거 어느 왕보다도 악한 왕이었습니다.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므낫세는 이스라엘을 잘못된 길로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멸망시키신 다른 나라들보다 더 악한 일을 하게 했습니다.” (열왕기하 21:9, 역대하 33:2)

이사야가 예언자로 있을 동안에 국제 정세는 요동을 쳤습니다. 앗시리아는 여전히 강국으로서의 면모를 가지고 있었고, 신흥 제국 바빌로니아는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습니다. 작은 나라였던 유다는 이런 국제 정세를 알지 못하고, 우상 숭배에 빠져 있었습니다.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의 위기 속에 있었지만, 이스라엘과 유다는 민족의 불행이 자기들 눈 앞에 다가 오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결국 동족 이스라엘이 722 BC에 앗시리아에게 멸망하고, 유다마저 586 BC에 바빌로니아에게 멸망하고 맙니다.

이 때에 하나님의 예언자 이사야는 메시아 시대에 대한 희망을 선포합니다. 나라가 멸망하는 고난과 절망 속에서도 이 희망을 붙들고 살아 남도록 메시야 시대에 대한 희망을 선포합니다. 메시아 시대가 되면, 지금까지 어둠 속에 갇혀 살던 사람들이 큰 빛을 보게 되고, 그늘진 땅에 살던 사람들에게 빛이 비췰 것이라고 합니다 (이사야 9:2). 여러분, 이 사실을 아시나요? 이 이사야의 예언이 예수님의 사역과 연결이 된다는 사실을요. 예수님은 갈릴리 나사렛 출신으로, 갈릴리에 있는 가버나움을 사역의 본부로 정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고, 병든 사람들을 낫게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마태는 예수님의 사역을 목격하면서 그의 복음서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역의 갈릴리 호숫가에 있는 가버나움으로 옮기시고, 거기서 사셨습니다. 이렇게 하여, 이곳 어둠에 사는 백성들이 큰 빛을 보았고, 죽음의 그늘과 같은 땅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취었다는 예언자 이사야의 말이 이루어졌습니다.” (마태복음 4:13-16)

그리고, 메시아가 통치하는 시대에는 더 이상 전쟁이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전쟁이 없는 나라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샬롬 (평화)를 누리게 된다고 합니다. 성경 말씀을 보세요. “사람들은 무거운 멍에를 벗게 되고, 강대한 민족이 약한 민족들을 학대하는 일도 없게 되고, 군인들이 신고 다니던 군화와 피로 얼룩진 군복은 모두 땔감이 되어 불에 사라질 것이다.” (이사야 9:4-5) 우리 민족도 전쟁을 겪었습니다만, 전쟁처럼 야만적인 일이 없습니다. 우리는 다른 민족과 전쟁을 한 것도 아니었고 같은 동족끼리 총을 쏘는 야만적인 전쟁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문화와 문명이 발달한 시대에도 여전히 사람들은 전쟁의 위협을 느끼면서 살고 있습니다.
 
이사야가 선포한 메시아 시대에 대한 꿈은 단순히 유대 민족들의 꿈이 아니라, 지금까지 인류가 꿈꾸어 왔던 것입니다. 이 꿈을 실현하기 위하여 지금까지 수많은 지도자들이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이 꿈을 실현하기 위한 국가 운영 시스템이 등장했습니다. 공산 주의가 등장하고, 자본주의가 등장했습니다. 전제주의 (despotism, 專制主義)가 등장하고, 민주주의 가 등장했습니다. 인류는 지금도 어떻게 해야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지 실험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제 한가지 남은 궁금증은 과연 이사야가 말하는 메시아가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날 것입니다. 그 아기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의 어깨 위에 왕권이 주어질 것이다. 그는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원히 살아 계신 아버지, 평화의 왕이라고 불릴 것입니다. 그의 왕권은 점점 커지겠고, 평화가 그의 나라에서 영원히 이어질 것입니다. 그는 정의와 공평으로, 이제부터 영원토록 그 나라를 견고하게 세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이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주께서 자기 백성을 뜨겁게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9:6-7) 또 이사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 이름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인 임마누엘이라고 부를 것입니다.” (이사야 7:14)

우리의 눈은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날 것입니다 (For a child is born to us, a son is given to us)” 이 한 말씀에 집중해야 합니다. ‘한 아기 (a child)’라는 말과 메시아라는 말은 잘 연결이 안 됩니다. ‘힘 센 용사(warrior, 勇士)라면 모를까 ‘한 아기’가 어떻게 메시아 시대를 열 수 있겠습니까? ‘한 아기’가 어떻게 어둠 의 그늘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한 아기’가 어떻게 하나님의 샬롬을 가져 올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궁금증은 풀리지 않습니다.

이사야는 메시야 시대를 예언하고 자기 생을 마칩니다. 므낫세 왕 때 체포되어 순교합니다. 그리고, 700년이 지납니다. 그동안 유다 나라는 멸망하고, 바빌로니아에 70년 간 포로로 잡혀갔다가 극적으로 조국으로 돌아 옵니다. 무너진 나라를 다시 세우기 위한 노력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다 민족은 다시 400년이라는 긴 암흑의 시간을 경험합니다. 신학적으로는 이 때를 ‘신구약 중간시대 (the inter-testamental period)’라고 합니다. 이 시대를 암흑의 시대라고 하는 이유는, 이 기간 동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소통하지 않으시고 침묵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두려워 마라. 보아라. 모든 백성을 위한 큰 기쁨의 소식을 가지고 왔다. 오늘 다윗의 마을에 너희를 위하여 구세주께서 태어나셨다. 그는 곧 그리스도 (메시아) 주님이시다.” (누가복음 2:11)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메시아 시대는 예수님께서 탄생하심으로 열리게 되었습니다. 무려 700년 동안 꿈꾸어 왔던 선지자 이사야의 꿈이 실현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그가 꾸었던 꿈은 단순히 유대인들을 위한 꿈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온 인류를 위한 꿈이 되었습니다.

이제 오늘 저의 설교의 결론입니다. 메시야 시대를 받치는 두 기둥이 있습니다. ‘fairness (공평)’ 와 ‘justice (정의)’입니다. 메시아가 오시면 정의와 공평으로 그 나라를 견고하게 세울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사야 9:7). 이 말씀 속에 한 가지 확실한 메시지가 들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unfairness (불공평)’와 ‘injustice (불의)’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메시아, 그리스도의 통치하심을 인정하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에게 질문하겠습니다. 여러분의 삶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이런 말을 들어 보셨나요? “Service, not Success!”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란 뜻입니다. Elisabeth J. Shepping (서서평, 1880-1934)의 좌우명입니다. 서서평은 독일에서 이민 온 미국의 간호 선교사로, 흰 저고리와 검정 치마를 입고, 흰 고무신을 신고, 가장 한국인처럼 살았던 선교사였습니다. 그는 조선의 여성들을 계몽하는 일에 일생을 바쳤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라는 말이 주는 감동에 가슴이 떨리지 않습니까? 서서평의 인생 좌우명은 사실은 예수님의 말씀에서 힌트를 얻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의 목적이 섬김이었습니다 (마가복음 10:45) 여러분이 세상에 나가서 ‘공평’과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의 크리스천들의 섬김의 방식이 되어야 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11/27/2016 |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You Feed Them

마가복음 6:30-44


11/20/2016 | 추수감사절 메시지

아삽의 감사 Asaph’s Thanksgiving

시편 50:22-23

시편 50편은 아삽이 쓴 것입니다. 아삽은 다윗과 동시대 사람입니다. 다윗이 기원전 약 1,000년 경 사람이니까 아삽도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입니다. 아삽은 다윗이 아꼈던 세 사람의 음악인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자신이 뛰어난 음악가였던 다윗은 레위 지파 사람들에게 노래 잘 하는 사람과 악기를 잘 연주하는 사람들을 추천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 때 추천 받은 세 사람이 헤만 (Heman)과 아삽 (Asaph)과 에단 (Ethan)입니다 (역대상 15:16-17). 이 사람들은 비파 (lyres)와 수금 (harp)과 제금 (cymbals)을 연주했던 연주자들이었습니다. 이 중 아삽은 악장 (the chief musician)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이들은 아삽이 연주하는 제금에 맞춰서 비파와 수금을 연주하면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역대상 16:5).

시간은 흘러 유다 왕 히스기야 시대로 내려 갑니다. 히스기야는 유다의 역사 중에 몇 명 안 되는 하나님께 인정 받는 왕이었습니다. 25살에 왕 위에 오른 히스기야는 다윗을 자기의 모델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제일 먼저 형식화된 제사 (예배) 의식을 개혁했습니다. 그리고 제사 의식에 음악을 도입했습니다. 흥미 있는 것은 히스기야가 성가대의 찬양이 끝난 후에 레위 사람들로 하여금 다윗과 아삽의 시편을 낭독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역대하 29:30). 

아삽은 단순한 음악인이 아니라 뛰어난 영적 통찰력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이런 아삽을 가까이 곁에 두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아삽이 쓴 시편들은 그저 그렇고 그런 시편들이 아니라 히스기야가 예배 의식을 개혁 하면서 아삽의 시편에서 영감 (靈感)을 얻을 정도로 뛰어난 것들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히스기야가 아삽을 가리켜 ‘선견자 아삽 (Asaph the seer)’이라고 한 것으로 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역대하 29:30) 

시편 50편을 읽어 보면 곳곳에 참된 제사 (예배)는 어떤 것인지 잘 나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참된 제사 (예배)는 제물 중심의 제사가 아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아삽의 입을 통하여 “나는 너희들이 드리는 제물을 탓하지 않는다(8절)”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 무슨 제물을 드리든지 그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 모든 것들이 원래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삽은 제물 중심의 믿음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하나님을 잊어버린 사람들 (those who forget God, 22절)'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관계 보다는 좋은 제물, 값비싼 제물만 드리면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다 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정말 그렇다면, 오늘 우리도 ‘하나님을 잊어버린 사람’ 중의 한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예배에 집중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사역 중심의 믿음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무슨 일을 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가대원들이나 오케스트라 대원들은 참 조심해야 합니다. 찬양을 하고, 연주를 함으로써 나의 책임을 다 했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학교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습니다만, 제가 BU 박사과정에 있을 때 외국어 시험이 있었습니다. 저는 신약성서 해석학을 전공했습니다. 보통 박사과정에 있는 사람들에게 외국어를 두 개를 요구 합니다. 저는 영어와 독일어를 선택했습니다. 다행히 영어를 외국어로 간주해 주었습니다. 물론 영어 시험을 봤습니다. 한국어 텍스트를 주고 영어로 번역하는 시험이었습니다. 저는 신약학을 전공했으니까 헬라어 (Greek)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헬라어를 선택할 수 없습니다. 왜냐 하면, 신약학을 전공하는 사람에게 헬라어는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외국어로 인정해 주지 않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구약학을 전공하는 사람에게 히브리어는 외국어로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성가대에 성악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케스트라에는 거의 악기를 전공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잘 할 수 있는 것은 노래와 연주입니다. 이것을 하면서 내가 충분히 봉사하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당연히 내가 해야 할 일입니다. 나는 성가대에서 봉사하니까, 나는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하니까 이만하면 됐다는 생각이 잘못하면 사역 중심의 생각이 되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는 주일 학교 교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사역을 보고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heart)’을 기뻐하십니다. 사무엘상 16:7에 이런 말씀이 나오잖아요? “내가 보는 것은 사람이 보는 것과 같지 않다. 사람은 겉모양을 보지만, 나 여호와는 마음을 본다 (For the Lord does not see as man sees; for man looks at the outward appear-ance, but the LORD looks at the heart).” ‘마음을 보신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겉모습이나 형식, 우리가 하는 사역보다 관계를 중요하게 보신다는 뜻입니다. 

아삽이 살고 있던 시대에는 모든 사람들이 제물 중심의 제사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제물 중심의 제사가 가지고 있는 위험성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오직 한 사람, 아삽은 제물 중심의 제사는 반드시 형식화 되고 타락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형식화된 예배를 통해서는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만들 수 없습니다. 이런 아삽을 다윗은 그의 곁에 '선견자 (the seer)'로 두고 있었고, 다윗을 모델로 삼아 제사 (예배) 의식을 개혁하려고 했던 히스기야 왕은 아삽이 쓴 시편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면, 참된 제사 (예배)는 어떤 제사입니까? 아삽은 감사로 드리는 제사가 참된 제사라고 합니다 (14, 22절). 제물이 중심이 아니라,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제사를 드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예배를 예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 (worship in spirit and truth)’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역시 예배자의 마음을 중요하게 보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예배자의 마음이 신령과 진정으로 준비되어야 그 예배가 영이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4:23-24). 예수님의 이 말씀이 우리 가슴에 와 닿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이런 참된 예배자들을 찾고 계신다 (The Father now seeks the true wor-shipers).” 어쩌면 이 말씀을 하신 예수님께서 아삽의 시를 생각하고 계시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탁월한 정신분석학자인 에리히 프롬 (Erich Fromm, 1900-1980)을 아시지요? 그가 대중들이 읽을 수 있는 많은 책들을 썼습니다. 제가 보기엔 그 중에서 1976년에 나온 "To Have or To Be (존재냐 소유냐)?" 이 책이 가장 중요한 책이 아닌가 합니다. 프롬은 이 책에서 삶의 두 가지 양식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하나는 ‘존재양식 (Being Mode)’이고, 다른 하나는 ‘소유양식 (Having Mode)’이라고 했습니다. ‘소유양식의 삶’은 무엇을 소유함으로써 기쁨과 행복과 보람을 느끼는 삶의 방식입니다. 반대로, ‘존재양식의 삶’은 무엇을 소유해서가 아니라 나의 것을 나누어 주고 베풀면서 삶의 의미를 느끼는 삶의 방식입니다. 프롬은 이렇게 말합니다. “존재양식의 삶은 자기를 새롭게 하는것, 자기를 성장시키고 흐르게 하며 사랑하는 것, 관심을 가지고 귀 기울이며 베푸는 것, 모든 관계를 살아 있는 것으로 파악하는 삶의 양식을 의미한다.” 

지금은 크리스천의 삶에 대하여 생각을 많이 해야 하는 때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유와 목적에 대하여 진지하게 성찰해야 하는 때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대한 크리스천의 책임에 대하여 고민해야 하는 때입니다. 소유양식의 삶을 사는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내가 무엇을 얼마나 많이 소유하느냐 하는 것으로 성공과 실패를 말하고, 행복과 불행을 말하는 사람에게는 감사가 없습니다. 자기가 이미 가진 것보다 가지지 못한 것들에 대한 불평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아삽의 말을 빌린다면, 소유양식의 삶을 사는 사람은 제물 중심의 제사를 드리는 사람과 같습니다. 제물 중심의 제사가 결국은 형식화 되듯이, 소유양식의 삶을 사는 사람은 하나님과도 형식적인 관계에 머물고 맙니다.

그러나, 존재양식의 삶을 사는 사람은 소유가 아니라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프롬은 이 관계를 ‘aliveness and authentic relatedness to the world (세계와의 살아 있고 진실한 관계성)’이라고 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없고,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고, 올리브 나무에 거둘 것이 없고, 밭에 거둘 곡식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 때문에 기뻐하겠습니다.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즐거워하겠습니다.” (하박국 3:17-18) 하박국 선지자의 글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이유는 그의 글이 존재양식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분명하게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모두 잃는다고 해도, 마지막 남는 것 한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를 부인할 수 없듯이, 나는 구원의 하나님 때문에 기뻐합니다.”  이것이 존재양식의 삶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아삽에게 고마워해야 할 것은, 그를 통해서 존재양식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23절)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But giving thanks is a sacrifice that truly honors me. If you keep to my path, I will reveal to you the salvation of God." 직역하면, "감사를 드리는 것이 진정으로 나를 높이는 제물이다. 너희가 나의 길을 떠나지 않고 지킨다면 하나님의 구원을 보여 줄 것이다"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나의 길 (my way)’은 감사로 하나님게 나가는 것입니다. 감사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상황에 구애받지 않고 범사에 감사하는 삶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하나님의 길'입니다. 개역성경에는 이 '길'이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라고 나와 있습니다. 감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드려야 하는 올바른 행위입니다. 감사는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나의 삶 속에서 행하신 일들을 모두 인정하고, 감사하며,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감사야말로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최고의 제물입니다. 꼭 형식이 갖춰지지 않았어도, 열악한 환경 속에서 드리는 예배라고 할지라도, 예배자들의 마음 속에 감사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것은 최고의 예배입니다. 

우리가 사는 보스턴은 감사의 본고장입니다. 우리가 사는 보스턴에서 감사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392년 전, 1620년에 102명의 청교도들이 May Flower를 타고 도착했던 플리머쓰 (Plym-outh)가 불과 보스턴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습니다. 12월에 도착한 이들은 혹독한 겨울을 보내고 가까스로 살아 남았습니다. 이렇게 살아 남은 사람들이 그 이듬 해에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드렸던 것이 감사절의 유래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남긴 말 중에 "Think and Thank God (생각하고 하나님께 감사하자)"이란 말이 있습니다. 사전에 보면 thank라는 말은 “akin to think (think와 유사한 어족)”라고 나와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감사의 이유들입니다. 기쁘고 즐거웠던 일들도, 힘들었던 시간들도, 절망의 순간들도, 생각해 보면 모두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언젠가 이런 기도문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어느 환자의 기도 (The Creed for the Disabled)”라고도 알려져 있고, “어느 무명 용사의 기도”라고도 알려져 있습니다. 제가 그 기도의 원본을 찾았습니다. “A Soldier's Prayer (written by an unknown confederate soldier, US civil war)” 

I asked God for strength, that I might achieve (출세를 위해서 힘을 구했지만),

I was made weak, that I might learn humbly to obey (겸손하게 순종을 배우라고 나를 약하게 하셨습니다).

I asked for health, that I might do greater things (큰 일을 하기 위해 건강을 구했지만),

I was given infirmity, that I might do better things (하나님은 더 좋은 일을 하라고 나에게 병을 주셨습니다). 

I asked for riches, that I might be happy (행복하게 살려고 돈을 구했지만),

I was given poverty, that I might be wise (지혜로운 사람이 되라고 가난을 주셨습니다).

I asked for power, that I might have the praise of men (사람들의 칭찬을 받기 위해 권력을 원했지만),

I was given weakness, that I might feel the need of God (하나님만 필요로 하라고 나에게 약함을 주셨습니다).

I asked for all things, that I might enjoy life (나의 삶을 즐기기 위해 모든 것을 원했지만),

I was given life, that I might enjoy all things (모든 것을 즐길 수 있는 삶을 주셨습니다).

I got nothing that I asked for (내가 구한 것은 하나도 받지 못했지만)-

but everything that I had hoped for (내가 소망해야 했던 모든 것을 받았고),

Almost despite myself, my unspoken prayers were answered (내가 원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내가 말하지 않은 기도들이 응답되었습니다).

I am among all men most richly blessed (나는 그 누구보다도 축복 받은 사람입니다).

 


11/13/2016 | 미국 대통령 선거를 지켜 보면서

다시 읽는 나사로 이야기 Reinterpreting the Story of Lazarus

누가복음 16:19-31

지난 주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엄청난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무도 예상하지 않았던 일이 벌어졌습니다. 도날드 트럼프가 선거인단 306표를 얻어 232표를 얻은 힐라리 클린턴을 크게 이기고, 미국의 4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습니다. 선거 유세 초반에는 프럼프가 돌풍을 일으키더니, 중반과 종반으로 접어들수록 각종 악재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입에 담기도 어려운 성추문들이 여과 없이 미디어에 공개가 되면서 지지자들이 모두 돌아섰다는 분석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초반부터 트럼프가 우세하다는 기류가 감지되었습니다. 개표 시작부터 트럼프가 우세하다는 관측이 나왔고, 이러다가는 트럼프가 당선되는 것이 아니냐 하는 예측들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마지막 플로리다가 트럼프로 넘어가면서 선거판은 급격하게 트럼프 쪽으로 기울었고, 마지막 격전지였던 ‘Rust Belt (미국 동북부의 쇠락한 공업지역)’에서 트럼프가 완승하면서 승부는 끝이났습니다.

사람들은 “그래도 힐러리 클린턴이 이기겠지! 설마 지기야 하겠어?” 모두 이런 생각들을 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모든 미디어들이 트럼프를 외면했습니다. 힐러리 쪽에는 그 남편과 현직 대통령인 오바마 대통령과 부인 미쉘 등, 민주당이 합심해서 클린턴 지지에 발벗고 나섰습니다. 아마 역대 대통령 선거 중에 이렇게 확실한 지지를 받았던 후보가 없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막강한 자금을 동원해서 TV 광고에 돈을 쏟아 부었습니다. 반면에 트럼프는 선거 자금도 부족했습니다. 가장 돈을 적게 쓴 유세를 펼쳤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공화당 후보로 나왔으면서도 공화당의 지지를 전혀 얻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선거 유세단을 꾸려서 가족을 데리고 다니면서 유세를 펼쳤습니다.

하지만, 선거 결과는 누구도 예상하지 않았던 트럼프의 승리로 끝이났습니다. 선거가 끝나고 이런 말이 나왔습니다. 트럼프가 전 세계 사람들에게 “불가능은 없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He proved that impossible was nothing)!” 앞으로는 불가능을 말하는 사람들에게는 두고두고 트럼프가 좋은 예 (example)가 되게 생겼습니다.

선거가 끝나고 선거에 대한 분석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번 선거의 승패를 결정 지은 곳이 ‘Rust Belt’였는데, 이 지역에 사는 저소득 층의 백인들의 분노가 폭발해서 트럼프에게 투표했다는 것입니다. ‘Rust Belt’는 뉴욕부터 시작해서 서쪽으로 펜실베니아, 오하이오, 인디애나 일리노이, 미시간, 위스콘신으로 이어지는 공업지대입니다. ‘rust’란 말이 쇠에 스는 녹이라는 뜻이잖아요? 문자적인 의미는 ‘녹슨 지대’라는 뜻입니다. 예전에 경기가 좋았을 때는 인구가 많았던 지역입니다. 그러나, 경기가 침체되면서 사람들이 떠나기 시작하고, 공장들은 해외나 타 지역으로 옮겨가면서 이 지역이 낙후되기 시작했습니다. 공장들은 문을 닫고 기계들은 녹이 슬었습니다. 이 지역은 민주당을 지지하는 지역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번에 뉴욕과 일리노이를 제외하고는 모두 트럼프에게 넘어 간 것입니다. 사실 트럼프와 ‘Reust Belt’는 서로 매치가 안 됩니다. 부동산 재벌과 ‘Rust Belt’가 어떻게 연관이 됩니까? 바로 그 점이 힐라리 클린턴 선거 캠프가 놓쳤던 점입니다. 힐라리가 이 지역을 자기 표라고 오판하는 동안 트럼프는 매일 이 지역을 돌면서 백인들의 분노를 자극했습니다.

이번 선거를 통해서 미국이 안고 있는 문제들이 그대로 드러났다는 분석들이 많습니다. 문제점 중의 하나가 많이 배운 사람과 대학을 못 간 사람들 사이의 갈등입니다. 예전엔 고등학교만 나와도 사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미국도 고학력 사회가 되어 버렸습니다. 고등학교만 나와서는 취직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월급도 많지 않습니다. 아이들을 대학에 보내야 하는데, 대학 학비가 얼마나 비쌉니까? 대부분의 미국 가정들이 비싼 학비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빈부의 갈등, 인종 간의 갈등입니다. 자기들은 이렇게 열심히 일을 해도 가난을 벗어날 수 없는데, 갓 이민 온 사람들은 금방 좋은 직장을 얻고, 경제적으로 자기들보다 부유하게 사는 것을 보고 백인들의 분노가 폭발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안 트럼프가 “내가 대통령이 되면 일자리를 만들어서 여러분에게 먼저 주겠다. 이민자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규제 하겠다, 멕시코 국경에 담벼락을 쌓겠다, 중동 사람들을 추방 시켜 버리겠다” 등, 어떻게 보면 말도 안 되는 그의 공약들이 가난한, 대학을 가지 못한, 백인들에게 먹혀 들었다는 분석입니다.

여러분,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읽은 누가복음 말씀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좋은 옷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호화스러운 파티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 문 앞에 나사로라는 거지가 앉아 있었습니다. 그의 몸에는 부스럼투성이었었습니다. 나사로는 부자의 쓰레기통을 뒤져서 주린 배를 채웠습니다.

성경은 2,000년 전에 기록된 책입니다. 성경에 이렇게 부자로 호위호식하는 사람과 그 집 대문 앞에서 구걸을 하면서 사는 가난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와 있습니다. 신약성경의 역사만 2,000이지, 구약까지 하면 적어도 3,500년에서 4,0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구약성경에도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얼마나 많이 나옵니까? 정치하는 사람들과 경제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격차를 줄여 볼까 하고 연구합니다. 정치인들은 내가 대통령이 되면 이렇게 정책을 바꿔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돈을 벌게 해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경제학자들 역시 그들 나름대로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연구하고 정책을 내 놓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19세기 초에 공산주의라는 경제 체체가 등장했습니다. 물건을 공동으로 생산해서 다 같이 나눈다는 경제 개념입니다. 그래서 공산주의에서는 노동자가 대우를 받습니다. 이런 정치 제도를 내 놓았지만, 결국은 공산주의가 허구였다는 사실을 우리 시대에, 우리 눈으로 목격했습니다. 공산주의 국가들이 모두 몰락하고 말았습니다.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 볼까요? 시간이 흘러서 먼저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나사로는 죽어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습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  22절 말씀이 ‘Finally, the poor man died and was carried by the angels into Abraham's bosom’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bosom’이라는 말은 ‘가슴’이라는 뜻입니다. 나사로는 죽어서 ‘아브라함의 가슴’에 안겼습니다. 세상에서 그렇게 고생을 하더니 죽어서는 ‘아브라함의 가슴’에 안겼습니다. 우리는 이런 말씀을 읽으면서도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유대인들과 문화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동경하는 것은 죽어서 ‘아브라함의 가슴’에 안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지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가슴’에 안겼습니다.

몇 년 후에 부자도 죽었습니다. 부자는 지옥에 떨어져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부자가 눈을 들어 보았더니, 자기 집 대문 앞에 앉아 있던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가슴’에 안겨 있는 것입니다. 부자가 소리를 지릅니다. “아브라함이여, 제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혀를 적실 수 있도록 나사로의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게 보내 주십시오.” (24절) 아브라함이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살아 있을 때에 좋은 것을 마음껏 누렸지만, 나사로는 온갖 나쁜 일을 겪었다. 이제 나사로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통을 받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 (25절)

여러분들은 이 성경 말씀을 어떻게 읽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공평하심 (God’s fairness)’을 생각을 했습니다. 한번 반대로 생각해 보세요. 나사로가 죽어서 지옥에 가고, 부자는 죽어서 ‘아브라함의 가슴’에 안겼다고 생각해 보세요. 이거야말로 말도 안되는 불공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도 불공평 했는데, 죽어서도 그런 불공평이 이어진다면 이건 말도 안되는 일이잖아요?

트럼프가 일자리를 만들어 준다고요? 트럼프가 가난한 사람들을 잘 살게 해 준다고요? 말도 안 됩니다. 당장에 이민자들 못 들어오게 하고, 불법체류자들 추방하면 그 빈자리가 생길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해서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수많은 연구가 있었고, 그 때마다 정책들이 세워졌지만,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보호무역 정책을 강화해서 미국 경제를 일으키 겠다고요? 일시적으로 반짝 효과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것도 근본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성경에도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나사로도 죽고 부자도 죽습니다. 여기까지는 정말 세상이 ‘unfair’합니다. 그런데, 나사로는 죽어서 ‘아브라함의 가슴’에 안기고, 부자는 지옥에 가서 고통을 당합니다. 이 때, 세상이 ‘fair’해 집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역사를 심판하시니까 그때가서 세상이 공평해집니다. 세상에서 온갖 좋은 것을 누리던 부자는 지옥에 가고, 세상에서 고생만 하던 나사로가 위로를 받습니다.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은 공평하신 하나님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보좌에 앉으신 분이 흰옷을 입은 사람들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더 이상 배고프거나 목마르지 않을 것입니다. 뜨거운 햇볕도 그들에게 해를 입히거나 상하게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보좌 가운데 계시는 어린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셔서 생명수가 흐르는 샘으로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실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7:13-17) 이 ‘흰옷 입은 사람들’은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다가 온갖 고난을 당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의 눈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신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에 세상은 공평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개입하시지 않으면 세상은 언제까지 불공평한 채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부탁합니다. “나사로를 제 식구들에게 보내서 제가 있는 지옥에 오지 않도록 전해 주십시오. 그러면 그들이 들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다. 모세와 예언자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죽었다가 살아온 사람이 말을 해도 듣지 않을 것이다.” (31절) ‘모세와 예언자들’이라는 말은 성경이라는 말입니다. 그 당시 성경이 ‘모세의 율법서와 예언서와 시편’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31절 말씀은 이런 뜻입니다. “그들에게는 성경이 있지 않으냐? 성경을 믿으면 되지 무슨 증거가 더 필요하겠느냐?”

저에게는 이 말씀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많은 문제점들이 있습니다. 소득 불균형의 문제,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들과 받지 못한 사람들 간의 갈등, 인종 간의 갈등, 종교 간의 갈등 등의 문제들은 인류가 가지고 있는 난제(難題)들입니다. 좋은 정책들을 만들어서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한계가 있습니다. 인간의 노력에 한계가 있다는 말입니다. 기성 정치인들로부터 실망한 사람들이 이번 선거에서 트럼프가 미국을 변화 시킬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그를 지지했습니다. 당장 미국에 무슨 변화가 어떻게 시작될지 알 수 없지만, 우리는 크게 기대하지 않습니다.

지난 하바드 졸업식에 초청 연사로 선 사람은 스필버그 (Steven Spielberg, 1946-)였습니다. 그의 연설문 중 이런 구절이 있었습니다. “사랑, 지원, 용기, 직관. 이 모든 것들은 영웅인 여러분의 화살 통에 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영웅에게는 한 가지가 더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무찌를 악당이 필요하죠. 여러분은 운이 좋습니다. 이 세계엔 괴물들이 가득합니다. 인종차별, 동성애 혐오, 민족간 의 증오, 계급간의 증오, 정치적 증오, 종교적 증오들이 있지요 (Love, support, courage, intuition. All of these things are in your hero’s quiver, but still, a hero needs one more thing: A hero needs a villain to vanquish. And you’re all in luck. This world is full of monsters. And there’s racism, homophobia, ethnic hatred, class hatred, there’s political hatred, and there’s religious hatred)." 참 대단하지 않습니까? 스필버그가 괜히 스필버그가 아니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스필버그의 말에는 뭔가 그만이 말할 수 있는 특별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시대를 책임 있는 존재로 살 수 있겠습니까? 저에게는 “너희에게는 성경이 있지 않으냐?” 이 말씀이 특별한 말씀으로 들립니다. 우리의 화살통에는 성경의 가치들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씩 하나씩 쉬운 것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내 삶의 현장에서 실천하는 일을 시작해야 합니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을 실천해 나가가야 합니다. 나의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일을 시작해야 합니다. 나의 욕심을 내려 놓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섬기는 삶을 시작해야 합니다.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실천할 것인지 서로 생각을 나누고 공유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이 역사에 개입하시는 그 날까지, 우리는 끝이 없는 이 싸움을 계속해 나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