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9/2016 | 성령강림절 후 여섯째 주일

바나바처럼 섬기자 Serve the Lord like Barnabas

사도행전 4:36-37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 바나바는,

1. 별명이 위로자입니다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사도행전 4:36)

별명(別名, nickname)에 대하여
신앙인으로 좋은 별명을 갖는 것은 참으로 복된 일입니다. 열심히 그렇게 살았기에 얻은 별명도 있고, 그렇게 살라고 지어준 별명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시몬은 성질이 급하고 과격하여 변덕을 부릴까 봐서 예수님은 그에게 베드로 (바위)라는 별명을 지어 주십니다. 천년 억겁에 흔들리지 않는 바위처럼 교회의 초석이 되라고 말입니다. 야곱은 얍복강 가에서 천사와 씨름하다가 하나님께로부터 이스라엘이라는 별명을 얻습니다. 사람 발목 잡던 사람이 이젠 하나님께 붙잡혀 살라고, 하나님과 씨름하라고, 사람에서 하나님으로 삶의 방향을 전환하라고, 그런 별명을 주신 것입니다.

바나바의 원래 이름은 요셉인데, 레위 족속이니까 제사장 가문입니다. 성전에서 제사장으로 혹은 찬양대로 섬기던 족속이죠. 그의 출생지는 키프러스 (Cyprus) 섬입니다. 현재는 터키가 섬의 북쪽 절반을 점령하여 분단된 국가가 되었습니다.

사도들이 그에게 바나바 (Barnabas)라는 별명을 지어 주었습니다. (Barnabas, which means "one who encourages others") 영어 성경에는 남을 격려하는 사람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위로자도 좋지만 격려자가 더 좋은 번역입니다. 참으로 아름답고 복된 별명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이런 복된 별명을 얻으시길 축원합니다.

 

2. 헌신적인 사람입니다.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사도행전 4: 37)

바나바는 하나님을 위해서, 교회공동체를 위해서 재물이 아깝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초대교회의 신앙의 기초를 세우는데 헌신의 모범을 보인 인물입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주님의 말씀에 비추어보면, 우리는 모두 재물을 헌납하는데 많이 망설이게 됩니다. (마태복음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오늘날 가장 큰 우상 하나님을 섬기는데 가장 큰 장애물은 재물입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과 교회를 위하여 자기의 전 재산인 밭을 아깝게 여기지 않고 팔아서 교회 사도들의 앞에 가져왔습니다.

 

3. 사람을 아끼고 일군을 세우는 사람입니다.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 (사도행전 9:26-27)

회심하기 전 청년 사울은 교회에게 공포와 기피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아주 무서운 박해자요 폭력자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회심하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하니까 모두 마음 속으로 접근 금지라는 방어벽을 치고 두려워하고 믿지를 못하고 꺼려했습니다. 그때 바나바는 예루살렘교회의 제자들에게 그를 대변하여 소개하고 있습니다.

남의 대변자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도 아주 악한 과거가 있는 사람을 “변화되었으니 이제 그 사람을 믿으십시오. 함께 합시다” 라고 사귐을 권면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그런데 바나바는 사울의 회심을 진심으로 믿었고, 그의 진심을 제자들에게 소개함으로 사도 바울을 교회의 일원이 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초대교회의 가장 위대한 사역을 감당한 사도로 쓰임 받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고 일군을 길러 내야 합니다. 특별히 조만식 장로님 같은 분은 자기의 제자에게 꾸중을 듣고도 오히려 담임목사의 말에 순종하여 예배가 끝날 때까지 서서 예배를 드림으로 겸손한 섬김의 귀감이 되셨습니다. 오산학교 제자인 젊은 담임목사가 예배시간에 좀 늦었기로서니 연로하신 장로님에게 “그 자리에 서서 예배 드리시오” 라고 했다면, 그 목사는 교회에서 쫓겨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젊은 목사가 건방지게, 그것도 제자가 스승에게 함부로 말을 했다고 말입니다.

 

4. 화해자입니다.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사도행전 15:37-38)

마가라는 요한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가 서로 심히 다투었다고 39절에 기록되었습니다. 마가라는 요한은 밤빌리아에서 힘들다고 사역을 팽개치고 돌아갔습니다. 그런 사람은 일꾼으로 소용이 없다고 생각한 바울과, 다시 한번 기회를 주자는 바나바가 다투다가 결국 바울은 실라를 택하여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가고, 바나바는 마가라는 요한을 데리고 키프로스로 갑니다. 칼같은 성격의 소유자인 바울의 눈에 마가라는 요한은 복음 사역의 동역자로서 낙제였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젊은 나이의 마가에게 실수를 감싸주고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결국 바울은 디모데후서 4:11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바울도 종당에는 마가가 자기 일에 유익한 동역자임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것은 바나바의 관용의 마음과 넓은 마음이 일군을 세우고 악화된 관계를 회복시키는 화해자의 삶을 살게 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들이 가시는 곳마다 분열과 갈등이 잠잠해지고, 화해하고, 화목하고, 평화로운 교회가 되시기를 간절하게 소망합니다.

이왕에 주님을 섬길 것이면, 이왕에 주님께 충성할 것이면, 바나바처럼 섬깁시다.


6/12/2016 | 성령강림절 후 다섯째 주일

예수님의 이름으로 In the Name of Jesus

사도행전 3:1-10

“예외 없는 규칙은 없다 (There is no rule without exceptions)”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해 봤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예외가 있을까? 없을까?” 알고 보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어떤 원칙이라고 할까요? 어떤 규칙 같은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사람을 사용하실 때는 유능한 사람을 쓰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유능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구약 시대에도 보면 유능한 사람이 하나님의 일에 쓰임을 받은 예가 별로 없습니다. 한결같이 하나님의 일에 동원된 사람들은 평범하거나, 아니면 치명적인 단점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모세 같은 사람이 그렇습니다. 그의 단점은 대중 앞에서 말을 잘 못하는 것입니다. 지도자로서 가장 필요한 것이 있다면 대중을 사로잡는 웅변술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대중 앞에 서면 우물쭈물하고, 버벅거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인간적인 면에서 볼 때, 좀 유능하다 싶은 사람은 구약 시대에는 바벨로니아 포로 시대의 에스라, 느헤미야 정도입니다. 신약시대에는 사도 바울 정도입니다. 복음이 막 이방 세계로 퍼져 나갈 즈음에 하나님의 마음도 급하셨는지 바울 같은 사람을 픽업하셨습니다. 그는 유대교를 절대적으로 신봉하던 열심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출신 성분도 좋습니다. 순수한 히브리 사람의 혈통을 가지고 있었고, 바리새파 사람이었습니다 (빌립보서 3:5). 그리고 그는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그는 당시의 가장 존경 받는 학자였던 가말리엘 (Gamaliel) 밑에서 공부한 사람입니다 (사도행전 22:3). 당연히 바울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반대했습니다.

이런 바울에게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극적인 일이 발생합니다. 결과적으로, 유대교에 대한 그의 열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열심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는 복음을 전파하는 일 외에는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최종 선교지는 스페인이었습니다. 로마를 경유하여 스페인으로 가려고 하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저는 로마서 말씀을 읽으면서 이 말씀을 읽고 할 말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 지역에서 더 이상 내가 일할 만한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여러분에게 가기를 원했으므로, 스페인으로 가는 길에 (로마에 있는) 여러분을 방문하여 잠시, 여러분과 함께 지내면서 기쁨을 나누다가, 여러분의 도움을 받아 스페인으로 가기를 소원합니다.” (로마서 15:23-24)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But now I have finished my work in these regions, and after all these long years of waiting, I am eager to visit you. I am planning to go to Spain, and when I do, I will stop off in Rome. And after I have enjoyed your fellowship for a little while, you can provide for my journey.”

그는 복음을 전파하는 일 밖에 다른 일은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모든 삶의 초점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하나의 일에 맞춰 있었습니다. 1세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방 세계에 전파되어야 하는 중요한 시기에, 하나님은 바울 같은 사람을 그의 일에 픽업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픽업하시는 규칙을 깨뜨리면서 예외적으로 바울을 픽업하셨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길게 말씀 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저는 오늘 읽은 사도행전 말씀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하, 복음의 능력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 일을 사용하시는구나!” 그렇지 않습니까? 예루살렘에 살고 있던 한 사람, 그것도 날 때부터 걷지 못했던 한 사람, 이 사람을 일으켜 걷게 하신 것입니다. 이 사건 때문에 베드로는 사람들 앞에서 복음을 변증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이 사건 때문에 유대의 공회 (Sanhedrin)가 열렸습니다. 그 공회에서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다리가 나은 이 사람이 함께 출석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베드로와 요한은 다시 한번 복음을 변증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심문을 하려고 했던 공회원들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소문이 퍼지면서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치고 이 사건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이 사건은 유명한 사건이 되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신문의 Headline 뉴스가 된 것입니다 (사도행전 4:16). 그리고, 이 사건을 계기로 믿는 사람들의 수가 더욱 많아졌습니다 (사도행전 5:14).

하나님께서는 결정적인 타이밍에 이 사건을 복음 전파의 기폭제로 사용하셨습니다. 이 사건은 걷지 못하던 한 사람이 걷게 되었다는 단순한 사건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이 사건의 여파가 어마어마 했습니다. 마치 예수님 당시에 죽은 나사로를 살려 내신 사건과 견줄만한 사건이라고 보면 됩니다. 이미 죽은 지 나흘 (4일)이나 되는 사람을 예수님께서 살려 내셨다는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나사로를 보기 위해서 왔고 (요한복음 12:9), 나사로 사건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요한복음 11:45, 12:1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도로 변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흔들면서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무덤 밖으로 불러 내시고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때, 예수님과 함께 있던 많은 군중들은 계속해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증언하였습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 표적에 대한 소문을 들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맞으러 나왔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12:17-18)

이제 좀 더 오늘 말씀으로 들어가서 나면서부터 한번도 걸어보지 못했던 한 사람이 걷게 된 말씀이 주는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보통 유대인들은 하루에 세번 기도합니다. 아침 9시와 오후 3시, 그리고 해 질 무렵, 이렇게 세 번 기도합니다. 오늘 성경 말씀이 이렇게 시작됩니다. “어느 날 오후 3시, 기도하는 시간이 되어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 돌아가시고 나서 불과 얼마 되지 않은 때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서기 33년에 돌아가셨다면, 이 사건도 같은 해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날, 태어날 때부터 한번도 걸어보지 못한 이 사람은 그날 ‘아름다운 문 (the beautiful gate)’ 앞에서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성전으로 들어가는 문이 모두 9개가 있었습니다. 북쪽에 4개, 남쪽에 4개, 동쪽에 1개, 이 동쪽에 난 문이 바로 ‘beautiful gate (아름다운 문)’입니다. 사람들이 이 문을 제일 많이 사용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은 막 성전으로 들어가려는 베드로와 요한에게도 구걸을 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이 사람을 눈 여겨 보았습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 말씀이 “Peter and John looked at him intently (베드로와 요한은 집중해서, 열심히 그를 바라 보았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NKJV에는 ‘fixing his eyes on him (시선을 그에게 고정하고)’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보세요!” 이 말에 이 사람은 돈을 줄려고 하나보다 하고 두 사람을 쳐다 보았습니다.

바로 이 장면이 오늘 말씀에서 제일 중요합니다. 물론 그 밑에 나오는 “은과 금은 내게 없지만, 내게 있는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세요” 이 말씀이 제일 눈에 확 들어오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전에 베드로와 요한은 그를 똑 바로 바라 보았고, 이 사람은 뭔가 이 사람들이 나에게 주려나 보다 하고 두 사람을 쳐다 보았다는 이 말씀이 더 중요합니다.

저는 설교 준비를 하면서 이 말씀을 다시 한번 집중해서 읽어 보았습니다. 전에 보이지 않던 말씀이 보였습니다. 일어나 걷게 된 이 사람은 베드로와 요한을 꽉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특이한 말씀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병이 나은 사람이 자기를 낫게 해 준 사람을 꽉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이 사건은 순식간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이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꽉 붙들지 않았더라면 옆에 있던 몇몇 사람들이 이 광경을 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사람이 두 사람을 꽉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바람에 사람들이 “뭐야? 무슨 일이야?” 하면서 순식간에 사람들이 몰려 들었습니다. 베드로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왜 이 일로 놀라십니까? 왜 그런 눈으로 우리를 보고 계십니까? 우리의 능력이나 우리의 경건함 때문에 이 사람이 걸을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여러분, 이 사람을 알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믿음 때문에, 이 사람이 걷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과 그분을 믿는 믿음으로 이 사람이 완전한 치료를 받은 것입니다.” (사도행전 3:12, 16)

우리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사람의 믿음이 이 사람을 낫게 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이 언제 예수님을 믿었습니까? 그런 말이 한번도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말씀의 행간(行間)을 읽어야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 문 앞에 앉아 구걸하는 이 사람을 열심히 (intently) 뚫어지게 바라 보았습니다. 두 사람이 “우리를 보시오!” 하고 말했을 때, 이 사람은 돈을 주려나 하고 두 사람을 바라 보았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이 사람에게서 믿음을 보았습니다. 평생 한번도 걸어보지 못한 불쌍한 이 사람, 날마다 성전 문 앞에서 구걸을 하는 이 사람의 눈에서 두 사람은 낫고자 하는 간절한 믿음을 보았습니다.

베드로와 요한 두 사람이 이 사람에게 준 것은 돈이 아니었습니다. 돈보다 더 귀한 것을 주었습니다. “은과 금은 우리에게 없지만, 우리게 있는 것을 드리겠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세요.” (6절) 무슨 말입니까? “우리는 돈을 드리는 대신, 당신을 일어나 걷게 해 드리겠습니다” 이런 말 아닙니까? 지금 우리는 나면서부터 한번도 일어나 걸어 본 적이 없는 한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 걷게 된 생생한 현장의 말씀을 읽고 있습니다. “우리가 당신에게 주려고 하는 것은 돈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당신을 낫게 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마가복음 9장에도 앞을 보지 못하는 바디매오 (Bartimaeus)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람에게 물으셨습니다. “무엇을 해 주길 원하느냐?” “예, 주님 다시 보기를 원합니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 이 대화가 뭡니까? 예수님께서 이 사람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 사람은 거지였습니다. 앞을 볼 수 없으니까 정상적으로 살 수 없고, 사람들에게 구걸을 해야 했습니다. 이 사람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요? 당장에 한 끼 먹을 것을 살 수 있는 돈이 필요합니다. 따뜻하게 지낼 옷이 필요합니다. 잠 잘 곳이 필요합니다. 이미 시간이 오래 지났습니다. 온갖 노력을 다 해 보았습니다. 다시 시력을 회복하는 일은 이젠 불가능한 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다시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께 어떤 것을 구하고 있는지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정말 구해야 할 것을 구하지 않고 부수적인 것들을 구하고 있지 않습니까? 정말 구해야 할 것은 다시 보는 것이고, 정말 구해야 할 것은 일어나 걷는 것인데, 몇 푼 돈을 구하고, 입을 옷을 구하고, 당장에 눈에 보이는 것들을 구하고 있지 않습니까? 바울은 로마서 말씀에서 우리에게 연약함 (weakness)가 있다고 했습니다. 이 연약함은 우리가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8:26). 정말 우리의 문제가 무엇인지, 우리의 연약함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지적했습니다. 우리의 이 연약함을 성령께서 도와 주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우리의 기도가 허공을 치기 쉽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이 사람에게서 낫고자 하는 믿음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이 이 두 사도가 이 사람 집중해서, 열심히 바라 본 이유입니다. 이 사람과 눈이 마주쳤을 때, 비록 이 사람은 돈을 주려나 하면서 두 사도를 보았다고 했지만, 두 사람은 이 사람 속에 감추어진 내면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 사람의 나이가 40살이 넘었다고 합니다 (사도행전 4:22). 나면서부터 지금까지 40년이 넘게 걸어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이쯤 되었으면 이제 걷는다는 희망은 포기할 때가 되었건만, 이 사람은 걷는다는 희망을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이시라면 “일어나라.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두 사도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했을 때 이 사람은 그 이름이 자기를 낫게 해 줄 것을 믿었습니다. 이 믿음이 그를 일으켰습니다.

이 사람의 이야기는 예루살렘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 때문에 공회가 열렸습니다. 사도들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증했습니다. 이 사람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 때문에 신자들의 공동체는 더욱 견고해 졌습니다. 문제는 오늘 저와 여러분의 이야기입니다. 나의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무엇이 덜 중요한지 알아서, 어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그것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붙드는 믿음, 이 믿음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믿음을 통해서 우리 앞에 현실이 됩니다. 이 믿음 때문에 우리가 보게 되고, 이름 때문에 우리가 일어나 걷게 된 이야기를 써야 합니다. 여러분들의 이야기가 기대가 됩니다.


6/5/2016 | 성령강림절 후 넷째 주일

교회: 신앙 공동체 The Church: Community of Faith

사도행전 2:37-47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What should we do?” 이것이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의 반응이었습니다. 너희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를 죽였다는 말을 들은 예루살렘 시민들의 반응이었습니다. 베드로는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십시오. 그리하면, 여러분의 죄는 용서 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베드로의 설교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 수가 3,000명이나 되었습니다.

여기서부터가 우리가 정말 주목해서 봐야 할 말씀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사람들은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오늘날 많은 크리스천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회개하고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잘 모르고 있습니다.

회개를 뜻하는 희랍어는 ‘메타노이아 (metanoia)’입니다. 이 말의 본 뜻은 ‘돌아선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삶이 나를 향하던 삶으로부터 하나님을 향하는 삶으로 돌아선다는 뜻입니다. 자기 중심적인 이기적인 삶에서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는 삶으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그 사람의 가치관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세계관이 바뀌고, 그 사람의 인생관이 바뀌는 사건이 회개입니다. 2,000년 전에 여리고에 살던 삭개오라는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 제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남의 것을 속여 얻은 것이 있으면, 네 배로 갚겠습니다.” (누가복음 19:8) 우리는 삭개오의 고백 속에 나오는 말들을 주의 깊게 보아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재산의 절반을 나누어 주겠다고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삭개오의 안중에 없던 사람들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 준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의 것을 나누어준다? 삭개오는 지금까지 이런 생각은 한번도 해보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삭개오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삭개오는 자기가 남의 것을 속여 빼앗은 것이 있으면 4배로 갚아 주겠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삭개오는 남을 속이고, 부정을 저지르고, 장부를 위조하고, 사기를 치고 하는 일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해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일을 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혹시라도 내가 다른 사람의 것을 100불을 빼앗은 것이 있으면 400불로 갚아주겠다고 합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성경에 보면, 두 차례 “직고(直告)한다”는 말이 나옵니다. 누구 앞에서 직접 말한다는 뜻입니다. 로마서 14:12과 베드로전서 4:5에 이 말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자 자신이 한 일에 대해 하나님께 사실대로 말씀드리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Yes, each of us will give a personal account to God”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여기서 account라는 말은 report라는 말입니다. “우리 각 사람들은 하나님께 개인적인 보고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이런 뜻입니다. 그 때 우리가 하나님께 어떤 보고를 하게 될까요? “우리가 기도생활은 어떻게 하고, 성경은 얼마나 읽었고, 교회에서는 어떤 일을 했고, 교회에서 받은 직책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이런 보고를 하게 될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런 일들은 하나님께서 아무 관심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가 회개하고 나서 어떤 변화의 삶을 살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성경 지식이 많은지, 얼마나 기도를 많이 하는지, 이런 일에 관심이 없으십니다. 이것이 성경에 ‘착한 일 (good work)’에 대한 말씀이 많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성경 말씀 두 개만 보겠습니다. 하나는, 에베소서 2:10입니다. “For we are God's masterpiece. He has created us anew in Christ Jesus, so we can do the good things he planned for us long ago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래 전에 우리를 위해서 계획해 놓으신 선한 일들을 할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셨습니다).” 하나 더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3:17입니다. “God uses it to prepare and equip his people to do every good work (하나님은 그것을 사용하셔서 그의 사람들을 준비 시켜서 모든 선한 일을 할 수 있게 하십니다).” 여기서 ‘it’는 성경을 말합니다.

2,000년 전에 예루살렘의 시민들은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변화의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설교자인 저에게 오늘 읽은 말씀은 많은 도전과 영감(靈感, inspiration)을 주는 말씀입니다. 그들의 변화의 삶이 교회를 만들었습니다. 이 땅에 그렇게 해서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때는 교회라는 말도 그들은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예수 믿고 변화된 사람들이 모여서 공동체 (a community of faith)를 만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교회라는 말도 본래 뜻은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 (에클레시아, ekklesia)’라는 뜻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제도화된 의미의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 속에 우리가 다시 회복해야 하는 6가지 중요한 것들이 들어 있습니다. 이것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 6가지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했던 사람들에게서 자연스럽게 생겼다는 것입니다. 누구의 생각이나, 누구의 지지에 의해서 생긴 것이 아니라, 회개한 사람들에게서 저절로 생긴 것이었습니다.

첫째로, 그들은 사도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42절). 이 말씀을 잘 보십시오. 사도들이 “아, 이 사람들은 아무 것도 모르니까 가르쳐야 하겠어!” 이런 얘기가 아닙니다. “All the believers de-voted themselves to the apostles' teaching”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NLT, NIV 등 모든 성경이 그런 식으로 이 말씀을 번역했습니다. 사도들이 주체가 된 것이 아니라 신자들이 (all the believers)이 주체가 된 것입니다. 사도들이 teaching class를 만든 것이 아니라 신자들이 만들어 달라고 한 것입니다. 저는 이 사실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공부하라는 부모의 말을 듣고 공부를 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 스스로 공부를 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 것입니다. 누가 성경을 읽으라고 해서 읽은 것이 아니라 “내가 성경을 너무 모르는 것 같아. 성경을 읽어야 하겠어!” 신앙공동체 안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둘째로, 동시에 신자들 간에 교제 (交際, fellowship)가 그런 식으로 시작되었습니다. “All the be-lievers devoted themselves to fellowship” 이렇게 나와 있잖아요? 오늘날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 중에 하나가 이 fellowship입니다. 신자들의 fellowship은 특별한 것입니다. 같이 지내고, 같이 놀고, 같이 먹고, 같이 여행가고, 이 이상의 것입니다.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이 말씀 뒤에 나오는 기도하고, 찬양하고, 필요한 것들을 나누어 쓰고, 같이 식사를 하고, 이 모든 일들이 신자들의 교제에 핵심적인 요소들입니다. 교회에서 상처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상처는 거의 모두 잘못된 교제의 삶에서 온 것입니다. 인위적인 교제의 삶이 아니라, 회개하고 변화된 사람들에게서 자연스럽게 시작된 교제의 삶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남의 눈치를 보거나, 남을 의식하는 교제가 아니라 내가 좋아서, 내 것을 주고 싶어서, 사람들이 너무 귀하게 보여서 시작된 교제의 삶입니다. 이런 교제의 삶이 신앙공동체 안에서 생겨났습니다.

셋째로, 기도입니다. 오늘 말씀에 나온 것을 보면 기도에 대한 말씀도 좀 특별합니다. “All the be-lievers devoted themselves to prayer”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자원해서 기도에 헌신한 것입니다. 누가 그런 글을 쓴 것을 보았습니다. 제목이 “새벽 기도하는 사람의 7가지 파워”라는 글입니다. 새벽 기도하는 사람은 자기 통제력이 있다 네요. 그리고, 삶의 우선 순위가 분명해 지고요.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고, 자신의 삶에 꿈이 생기고요. 무서운 잠재력을 갖게 되고, 부지런해지고, 삶에 대한 낙관적인 태도를 갖게 된다고 합니다. 신자들은 다 알아요. 기도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기도가 중요하다는 것도 알지만, 기도를 힘들어 합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 기도하라고 해도 힘들어 합니다. 오늘 말씀에 나와 있는 신앙공동체 안에서 기도했던 사람들은 누가 시킨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원해서 자발적으로 기도했습니다.

기도는 자기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원하는 것입니다. 이 공동체 안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원하는 것이 교회를 위한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교회를 허락하신 목적과 계획대로 이 교회가 세워지기를 원하는 것이 교회를 위한 기도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도입니다. 다른 것은 조금 부족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기도가 끊어진 교회는 죽은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회복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먼저 기도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넷째로, generosity입니다. ‘generosity’라는 말은 우리 말로 ‘너그러운 마음’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나오는 말씀은 단순히 너그러운 마음이라고 해석할 수 없는 놀라운 것입니다. 설명이 잘 안 되는 부분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다 함께 모여 모든 물건을 공동으로 사용하며 살아갔습니다” 라는 말씀이 44절에 나오고요. 45절에는 “그들은 재산과 모든 소유를 팔아서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옵니다. “And all the believers met together in one place and shared everything they had. They sold their property and possessions and shared the money with those in need.” 자기가 가진 것을 필요한 사람들과 같이 나누었다는 뜻입니다.

며칠 전에 흥미로운 뉴스가 있었습니다. 인공지능 알파고와 대결로 유명해진 이세돌 프로 기사에 대한 뉴스였습니다. 프로기사들이 소속된 기사협회에서 일률적으로 기사들의 수입의 몇 %를 떼어 간다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하면 이세돌 같이 수입이 많은 기사는 돈을 많이 내게 됩니다. 일년에 3,000만원 정도 내는 것으로 나왔습니다. 이세돌이 이 제도는 부당하다고 문제를 삼은 것입니다. 이렇게 떼어가고 협회가 나에게 해 준 것이 무엇이냐고 문제를 삼았습니다. 전 프로 바둑 기사협회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그 뉴스를 보면서 마음이 착착해지더라고요. 이세돌 같은 사람은 3,000만원 협회비 내고도 엄청난 수입을 올립니다. 이번에 알파고와 대결할 때도 구글에서 엄청난 돈을 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반면에 협회 등록된 수많은 프로 기사들은 대전료가 적어서 생활이 안 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세돌에게 이런 동료들에 대한 generosity가 없는 것 같아서 제 마음이 섭섭했던 것 같습니다.

2,000년 전에 회개하고 신앙공동체를 이루었던 사람들은, 오늘날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어디까지 우리를 변화 시킬 수 있는지 보여 주고 싶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변화의 삶의 목표가 어디까지인지, 그들을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어디까지 우리의 이기심을 이기고 자기의 것을 내 줄 수 있는지 그들을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크리스천의 삶을 그럴듯하게 흉내 내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변화의 삶은 행동과 실천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다섯째로, ‘many miraculous signs and wonders’가 공동체 안에서 일어났습니다. 신자들 간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들이 생겼습니다. 단순히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이런 기적이 나타난 것이 아니라 신자들의 공동체 안에서 이런 기적들이 생겼습니다. 신자들이 사도들에게 가르침을 받고, 신자들 간에 교제가 일어나고, 기도에 힘쓰고, 자기 것을 내 주는 너그러운 마음들이 생겼을 때, 그 공동체 안에서 기적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기적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지금 이 공동체 안에 성령께서 일하고 계신다는 싸인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 공동체를 기뻐하신다는 싸인 아니겠습니까? 그렇잖아요? 사람들이 그 교회의 주인이면 그렇다는 싸인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교회를 통해 일하고 계시면 그렇다는 싸인이 나타날 것입니다.

여섯째로, 2,000년 전의 회개하고 신앙공동체를 세웠던 그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았습니다 (47절). 교회 밖의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은 것입니다. 그들은 교회 밖의 사람들로부터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어글리 크리스천들이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회개는 진실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오늘 우리는 교회의 참 모습을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세상에 처음으로 등장했던 신앙공동체로서의 교회는 성경 속에서나 찾아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의 믿음 생활이 진실하다면, 오늘 우리의 회개가 진실하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그렇게 회복 시키시지 않겠습니까?


5/29/2016 | 야외예배

나의 도움은 어디서 오는가? Where Does My Help Come From?

시편 121편

우리가 가진 성경에 모두 150편의 시편이 있습니다. 오늘 읽은 시편 121편은 시편 23편과 함께 가장 사랑 받는 시편이 아닌가 합니다.

각 시편 마다 그 시편을 사용하는 용도가 있습니다. 오늘 읽은 시편은 ‘a song for pilgrims as-cending to Jerusalem’이라는 타이틀이 붙어 있습니다. 순례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가면서 불렀던 노래입니다. 여러분 아시지요? 이스라엘에는 모든 유대인들은 적어도 1년에 3번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 가서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율법의 규정이 있었습니다.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명절 때가 되면 직접 기른 양을 어깨에 짊어지고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가면서 이 시편 121편을 노래로 불렀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 율법의 규정을 지키신 것을 보면, 예수님도 성전에 가시면서 이 노래를 불렀을 것입니다. 어떤 때 옆에 순례자들이 없을 때는 혼자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어떤 때는 수많은 순례자들이 함께 걷기도 하면서 이 노래를 불렀을 것입니다. 가면서 노래를 부르면 심심하지도 않고, 피곤 하지도 않고, 즐겁게 순례의 길을 갈 수 있기 때문에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노래를 부름으로써 자기들이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는 목적을 더 분명히 할 수가 있었습니다.

오늘 시편 말씀에서 가장 우리 마음에 들어오는 구절은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1절)?” 하는 구절입니다. 이 구절에 대한 대답으로 즉시 2절에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누구나 도움이 필요합니다. 도움이 필요할 때 누군가로부터 조금만 도움을 받으면 일이 잘 해결될 수 있습니다. 그 절박할 때 누군가로부터 도움이 되는 한마디만 들어도 그 사람의 인생의 길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 때 외롭고 힘들었을 때, 누군가 그 사람과 함께 있어준 사람이 있었더라면, 그 사람이 쉽게 일어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도움이 필요하고, 힘들 때 격려가 필요합니다.

문제는 그 도움을 누구에게, 누구의 도움을 받느냐 하는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 온 것이 1983년입니다.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두고 미국에 왔습니다. 지금은 어떤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 때는 해외로 나가는 사람들은 ‘소양교육’이라는 것을 받아야 했습니다. 저도 ‘소양교육’을 받았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소양교육’이라는 것이 모두 엉터리였습니다. 미국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미국 사람들이 얼마나 시민 교육이 잘 되었는가 하면 실수로 물건을 버스 정류장에 두고 왔더라도 몇 시간 후에 가보면 그대로 그 자리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더 우스운 것은, 미국에 도착해서 한 일주일쯤 지나면 누군가로부터 우편물이 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우편물을 뜯어보면 그 속에 돈이 들어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돈은 북한이 주는 공작금이기 때문에 절대로 손을 대면 큰 일 난다고 했습니다. 그 때 그 교육을 받을 때는 정말 그런 일이 있구나 하면서 가슴이 쾅쾅 뛰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미국에 도착해서 일주일이 지나도 나에게 그런 우편물이 오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았습니다.

누구에게 충고 한마디를 들어도 누구의 충고를 듣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정말 적절한 사람으로부터 적절한 충고 한마디를 들으면 우리의 인생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우리교회에 청년들이 많습니다. 모두 자기 앞에 놓인 일을 자기 혼자 해결해 나가야 합니다. 교수와의 문제가 생기고, 전공을 바꿔야 할 문제도 생기고, 정신적인 문제도 생기고, 경제적인 문제도 생깁니다. 물론 남녀 간의 문제가 생기기도 합니다. 이런 청년들의 문제를 혼자 해결하게 놔두지 말고 좀 옆에서 도와 주자라는 생각이 들어서 우리교회가 가지고 있는 좋은 자원들 (resources)을 활용해서 이 도움이 필요한 청년들을 도와주는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모두 준비가 되었습니다. 9월부터는 이 시스템을 여러분들이 이용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누구의 도움을 받아야 할까요? 지난 주에 재미있는 동영상 하나를 봤습니다. 성경해석에 대한 동영상이었습니다. 재미있어서 제 페이스북에 올려 놓았는데, 좋아요 누른 사람은 10개 밖에 안 됩니다. 물론 읽고 ‘좋아요’ 안 누른 사람들이 많을 테니까 10명이 봤다고는 말할 수 없지요. 여담이지만, 최정모 결혼한다는 소식을 제 페이스북에 올렸습니다. ‘좋아요’ 누른 사람이 몇 명인지 아세요? 300명 가까이 됩니다. 페이스북에서 연락이 왔어요. 올리신 기사에 광고 효과를 톡톡히 보셨다고 축하한다고요.

제가 올린 동영상 안 보신 분은 꼭 보세요. 그리고 ‘좋아요’를 누르세요. 제가 그 동영상에 제 나름대로 성경해석학에 대한 글도 짧게 올렸습니다. 꼭 한번 읽어 보세요. 그 동영상을 보면, 창세기 말씀이 고대 근동에 흩어져 있는 천지창조에 대한 이야기들과 같은 것 같지만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 시대에 사람들은 해와 달을 중요하게 여겨서 숭배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의 천지창조 이야기를 기록한 사람은 인간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해와 달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할 필요성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해와 달을 만드신 것이 첫째 날이 아니라 넷째 날이라는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해와 달이 인간의 삶에 가장 중요한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성경의 저자는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해와 달을 첫째 날이 아니라 넷째 날로 끌어내렸다는 것입니다.

오늘 시편 121편 말씀을 보세요.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고대 사람들은 우람한 산을 보면 숭배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인간의 자연스러운 마음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 산에 가 보면 예외 없이 신들을 예배하는 제단들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순례의 길을 오면서도 많은 산들을 보았을 것입니다. 이 산을 보면서 이들은 이 시편 121을 노래로 불렀습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하고요. 예루살렘에 오면 시온산이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시온산은 예루살렘 성전의 시온 문 (Zion Gate) 밖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은 시온산 기슭에 있다고 봐야 합니다. 순례자들은 예루살렘에 도착해서도 시온산을 보면서 이 노래를 불렀을 것입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하고요.

시편 121편은 누가 썼는지 저자의 이름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익명의 작가가 이 시편을 썼습니다. 그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없지만, 이 사람은 하나님께 대한 대단한 신앙심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하나님께 대한 바른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 이유는, 이 사람은 도움이 어디서 오는지, 그 도움의 출처를 올바로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산에 유혹을 받았습니다. 산에다 제단을 세웠습니다. 그리고는, 도움은 산에서 온다고 생각했습니다. 심지어 예루살렘에 도착해서도 도움은 시온산에서 온다고 그 산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편 121편을 쓴 익명의 저자는 분명히 고백합니다.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 옵니다.” (2절)

여러분, 이 고백의 중요성을 알 수 있겠습니까?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 온다고요. 여호와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불렀던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인데,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입니다. 저는 이 고백이 참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나님, 이 고백이 중요한 이유는 그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을 창조하신 분입니다. 우리는 그 창조주 하나님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도움이 필요할 때는 다른 것을 볼 필요가 없습니다.

이 사실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아는 것은 생명의 신비라고 해야 할 정도로 경이로운 것입니다. 연어는 자기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기는 연어가 알을 낳을 때는 강물로 올라온다고 알고 있는데, 정확하게 말하면 자기가 태어난 강으로 올라옵니다. 어미가 그 강에 올라가서 알을 낳고, 그 알이 부화해서 새끼가 됩니다. 새끼 연어는 바다로 돌아가서 몸집이 커집니다. 그 연어는 다시 알을 낳기 위해서 자기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 옵니다. 거기서 알을 낳고 일생을 마칩니다. 생명의 신비입니다.

예전에 어떤 기사를 읽었는데, 코끼리로 그런 본능이 있다고 합니다. 어떤 코끼리가 갑자기 호텔로 들어왔답니다. 그 호텔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봤더니, 이 코끼리가 죽을 때가 되어서 자기가 태어난 곳을 가고 있었는데, 그 길에 호텔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이 코끼리가 호텔로 들어간 것이라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어쩐지 그 기사를 읽고 나서 마음이 짠 하더라고요. 코끼리가 죽을 때가 되면 자기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갑니다. 생명의 신비입니다.

제가 오늘 말씀드리고 싶은 요점이 그것입니다. 우리도 도움이 필요할 때는 우리의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고요. 산을 바라 볼 이유가 없습니다. 주변 사람들을 돌아 볼 이유가 없습니다.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나의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2절)

시편 121편을 쓰신 분의 하나님께 대한 고백을 계속해서 들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내가 발을 헛딛지 않도록 잡아 주십니다.” “나를 지키시는 하나님은 졸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오른 편에서 내가 쉴 그늘이 되십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지키심으로 낮의 해도 나를 해치지 못하고, 밤의 달도 나를 해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켜 주십니다.”

여러분, 성경에 나와 있는 이 말씀들을 모두 인정하십니까? 정말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그런 분이 되십니까? 여러분은 정말 그런 하나님을 매일의 삶 속에서 경험하고 있습니까? 제가 단언하건대 아닐 것입니다. 성경에는 그렇게 나와 있지만, 그런 하나님을 느끼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다시 2절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이렇게 고백하는 사람, 도움이 필요할 때 다른 곳을 바라보지 않고, 나의 생명의 창조자이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사람, 이런 사람이라야 하나님을 매일의 삶 속에서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다른 말로 하면, 도움이 필요할 때 하나님이 아닌 다른 곳을 바라보고, 다른 곳에서 도움을 구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매일의 삶 속에서 나를 지켜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우리 다 함께 1절과 2절 말씀을 읽으면서 오늘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5/22/2016 | 성령강림절 후 둘째 주일

진리, 죄로부터 탈출

요한복음 8: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