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모음
1/1/2017 | 새해는 이렇게 산다 1
보는 대로 살지 않고, 믿음으로 산다 We Live By Faith, Not By Sight.
고린도후서 5:1-10
2017년 새해가 되었습니다. 새해를 맞아 교우 여러분은 어떤 생각으로 한 해를 시작하기를 원하십니까? 중국의 어떤 왕은 세수 대야에 ‘일신일신우일신(日新日新又日新)’이라는 글을 새겨 놓고, 세수할 때마다 오늘도 새로워 지자고 마음을 다잡았다고 합니다.
담임 목사로서 새해를 맞는 교우 여러분들에게 권면하고 싶은 것은, 새해에는 늘 하던 대로가 아니라, 믿음생활의 핵심을 붙잡는 믿음생활을 했으면 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려도 형식적으로 드리지 말고 진심으로 예배를 드리고, 찬송 하나를 불러도 습관적으로 부르지 말고 가사의 뜻을 생각하면서 찬송을 부르고, 성경 말씀을 읽어도 생각 없이 읽지 말고, 말씀의 의미를 생각하고, 그 말씀을 실천에 옮기는 삶을 살아가고, 기도를 해도 형식적인 말을 늘어 놓지 말고, 기도의 말 하나 하나에 우리의 진심을 담아서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그런 믿음생활을 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존 번연 (John Buyan, 1628-1688)이 쓴 ‘천로역정(天路歷程, The Pilgrim’s Progress)’ 이라는 소설을 읽어 보셨습니까? 지금으로부터 300여전 전에 나온 책이니까 지금 우리 시대와는 전혀 다른 청교도 혁명이라는 시대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는 책입니다. 이 책이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힌 책이라고 하니까 그만큼 크리스천의 삶에 끼친 영향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영국에서 청교도 혁명의 주체 세력이었던 올리버 크롬웰 (Oliver Cromwell, 1599-1658)이 밀려나면서 청교도들에게 설교가 금지되었습니다. 하지만, 열렬한 청교도 신자였던 존 번연은, 계속해서 설교하다가 체포되어 12년을 감옥에서 보내게 됩니다. 존 번연은 감옥생활 중에도 성경 말씀을 깊이 연구하던 중에 ‘천로 역정’이라는 불후의 명작을 남기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책의 내용을 조금 소개 드린다면,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한 책을 읽고 있다가 “아, 난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하면서 크게 절망합니다. 자기가 살고 있는 도시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크리스천’은 가족에게 이 사실을 알립니다. 하지만, 가족들은 아무도 그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가족들에게 실망한 ‘크리스천’은 등에 무거운 짐을 진 채 홀로 벌판을 거닐면서, 어제 읽고 있던 책을 계속 읽습니다. 그의 얼굴은 어제보다 더 큰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고, 어찌할 바를 몰라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었습니다. 그 때 맞은 편에서 어떤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전도자’였습니다. ‘전도자’가 말을 겁니다. “제가 보기에 당신은 매우 슬픈 얼굴을 하고 있는데,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크리스천’이 대답합니다. "저는 장차 무서운 심판이 있게 되리라는 사실을 이 책을 읽고 알았습니다. 이 책에 씌어 있는 대로 어서 피해야 합니다. 그런데 제 등에 매달려 있는 이 무거운 짐때문에 걱정입니다. 전 이 짐을 없애 버렸으면 좋겠습니다.” 이 말에 '전도자'가 이렇게 묻습니다. "그러면 왜 이곳에서 이렇게 머뭇거리고 있습니까?" "그건 어느 방향으로 가야 멸망을 피할 수 있는지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전도자'가 멀리 보이는 넓은 벌판을 가리키며 말합니다. "저 쪽에 있는 좁은 문이 보입니까?" "어디요? 아니, 보이지 않는데요?" "그럼 저 찬란한 빛은 보이십니까?" '크리스천’이 대답합니다. "예, 보입니다. 아주 밝은 빛이 보입니다." '전도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 빛이 보이는 쪽으로 계속 걸어가세요. 그 빛에 가까이 가면 작은 문이 보일 것입니다. 그 문을 두드리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알려 줄 것입니다."
저는 ‘천로역정’ 이야기를 생각하면서, 어쩌면 그 책에 나오는 방황하는 ‘크리스천’의 모습이 오늘날 자기 정체성을 상실한 크리스천들의 모습과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찬란한 빛이 있는 쪽으로 계속 걸어가라!”는 ‘전도자’의 말은, 적어도 저에게는 이렇게 들립니다. “어디에 길이 있는지 혼란스런 때일수록 우리는 성경을 읽고, 성경이 가리키는 쪽으로 나가야 한다!” 적어도 저에게는 이런 말씀으로 들립니다. 성경은 어두운 시대를 밝혀 주는 등불입니다. 성경을 읽지 않으면 우리는 깜깜한 인생을 살 수 밖에 없고, 방황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읽은 말씀을 보십시오. “사실 우리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지, 보는 것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7절) NIV 성경에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We live by faith, not by sight.” 저는 이 말씀이 우리 크리스천들의 삶의 방식을 결정하는 중요한 말씀이며, 동시에 이 말씀은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 속에 들어 있는 특별함이 어떤 것인지 보여 준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 크리스천들이 세상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우리 스스로 크리스천의 삶에 대한 가치들을 포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크리스천은 눈에 보이는 대로 살지 않고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시대의 크리스천들이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 살고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크리스천의 삶의 가치를 포기하고 있다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저는 새해 첫 주일을 맞아 눈에 보는 대로 살지 않고 믿음으로 산다는 이 성경 말씀의 의미를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첫째로, 이 말씀이 의미하는 것은, 크리스천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의 중요성을 알고 그것들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그것들을 얻으려고 애썼던 물질적인 것들을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것들을 추구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소유하는 것을 성공적인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한국에서는 아직도 국정을 농단한 사람들에 대한 국정조사가 진행되고 있고, 특검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국정을 농단한 사람들이 왜 그런 일을 했는지, 이유를 알고 보면 결국 돈 때문이었습니다. 돈에 가치를 두고 있는 사람은 돈이 많이 소유할수록 행복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행복해지기 위하여 더 많은 돈을 소유하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사랑, 진실, 섬김, 헌신, 희생, 천국, 하나님, 이런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추구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믿음입니다. 눈으로 볼 수 없으니까, 또 귀로 들을 수 없고, 손으로 만져 볼 수 없으니까 이런 것들을 확신하기 위해서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의 존재를 확신하는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實像)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證據)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1:1). 이 말씀이 NIV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Now faith is being sure of what we hope for and certain of what we do not see.” 믿음은 우리가 희망하는 것들을 확신하는 것이고, 눈으로 볼 수 없지만 그것들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라는 뜻이지요?
문제는 우리가 이런 것들을 추구해서 정말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성경 말씀 9절을 보세요. “그러므로 우리가 몸을 입고 있든지, 몸을 벗어 버리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9절) 이 말씀이 NIV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So we make it our goal to please him, whether we are at home in the body or away from it.” 살든지, 죽든지, 우리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뜻 아닙니까? 오늘 말씀을 전체적으로 읽어 보면,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 사는 삶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추구하는 믿음으로 사는 삶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신앙의 사람들은 모두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이는 것처럼 살았습니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모두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 살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따라 살았습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 때는 이 모든 것이 내게 너무나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그 모든 것이 아무 쓸모 없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것들 뿐만 아니라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빌립보서 3:7-8)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 그가 추구했던 것들은 모두 눈에 보이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난 후에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소중한 것들이 발견했습니다.
둘째로,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 살지 않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식하는 삶을 산다는 뜻입니다. 오늘 말씀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합니다. 각 사람은 몸을 입고 사는 동안, 행한 선한 일이나 악한 일이나 자기가 행한 행위대로 거기에 알맞는 보응을 받게 될 것입니다.” (10절)
우리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면서 산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고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위선적(僞善的)인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위선자를 영어로 ‘hypocrites’라고 합니다. 이 말의 어원은 ‘stage actor (무대 위의 배우)’라는 뜻입니다. 자기는 각본에 나와 있는 대로 그렇게 착한 사람이 아니지만, 착한 사람처럼 연기를 해야 합니다. 자기는 슬프지 않지만 슬픈 사람처럼 눈물을 흘리는 연기를 해야 합니다.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는 사람은 이렇게 위선적인 사람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사람들의 의견을 구하기 보다는 성경에 나와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릅니다. 죄의 길을 따르지 않고 의의 길을 따릅니다. 다윗 같은 사람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끝까지 진실한 길을 걸을 수 있었고,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것처럼 두려워하며 그 앞에서 행동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그 어떤 대가도 기꺼이 지불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라고 확신하면 결코 멈추지 않습니다. 비록 그 길이 아무도 가지 않는 좁고 외로운 길이라고 할지라도 그 길을 기꺼이 선택합니다.
문제는, 저와 여러분이 눈으로 보는 대로 살지 않고 믿음으로 사는 삶의 방식을 선택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설교를 하는 제 마음 속에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9장에 나오는 ‘부자 청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청년의 나이에 어떻게 이렇게 돈을 많이 모를 수 있었는지 그 이유는 성경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다른 성경에 의하면, 이 청년은 그 나이에 이미 사회의 지도자였다고 합니다 (누가복음 18:18). 예수님은 이 청년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만일 네가 완전해지길 원한다면,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물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런 후에 와서 나를 따르라!” (마태복음 19:21) 하지만, 이 청년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청년이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의 방식은 눈에 보이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청년에게 제시했던 “나를 따르라!”는 삶의 방식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추구하는 새로운 방식이었습니다. 이 부자 청년은 예수님의 제안을 거부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 왔던 삶의 방식을 바꾸는 용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이야기는, 갈릴리 어부들의 이야기입니다. 이 어부들 역시 고기를 잡아서 생계를 이어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어부들 역시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느 날, 이 어부들에게 자신들의 삶의 방식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나를 따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마태복음 4:19) 이 말씀을 들은 어부들은 배와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선택하는 용기와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들의 이야기를 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결단을 미루어왔습니다. 여러 번 우리에게 삶의 방식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결단을 미룬 채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이젠 대답을 해야 합니다. 크리스천의 수는 많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동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없는 이 때에, 우리는 더 이상 대답을 미룰 수 없습니다. 결단을 하지 못하는 이유 중의 가장 큰 이유는 믿음으로 사는 삶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의 방식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정말 나는 이렇게 살아서 행복할까? 만족할까?” 하는 질문이 계속 생깁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제가 주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12:1에 있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구름 떼와 같이 수많은 증인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We are surrounded by such a great cloud of witnesses).” 이 ‘구름 떼’와 같은 사람들은 모두 눈에 보는 대로 살기를 거부하고 믿음으로 살기로 결단했던 사람들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나 혼자가 아닙니다. 구름같이 많은 증인들이 우리를 에워싸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12/31/2016 | 송구영신예배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 God's Plan For Us.
예레미야 29:10-14
구약 성경에 나오는 두 가지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하는 연대가 있습니다. 하나는, BC 722년이고요. 또 하나는 BC 586년입니다. 앞의 연도는 북왕국 이스라엘이 아시리아에게 멸망한 연대입니다. 뒤의 연대는, 남왕국 유다가 바빌로니아에게 멸망한 연대입니다. 유다 민족은 바빌로니아로 잡혀가서 70년 간 포로 생활을 합니다. 오늘 읽은 성경 말씀은 유다 민족이 멸망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그의 신실한 종 예레미야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잘 읽어보면, 비록 나라는 멸망하지만 앞으로 이런 일들이 있을 것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나와 있는 하나님의 약속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로, 70년이 지난 후에 유다 민족을 다시 고국으로 데리고 오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유다 민족의 역사에도 그렇지만, 우리의 삶에도 하나님이 정하신 때와 기간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70년의 포로 생활을 한 후에’라고 나와 있습니다. 성경에 그런 말씀들이 많이 있습니다. 야곱의 후손들은 이집트에서 430년 간 지내야 했습니다. 430년이 지나자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출애굽 시키셨습니다. 이렇게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민족은 광야에서 40년을 보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기간에는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가 들어 있습니다. 야곱의 후손들은 430년을 이집트에서 지내면서 기하급수적으로 수가 불어났습니다. 또 이스라엘 민족은 40년 간 광야생활을 하면서 “사람이 사는 것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교훈을 배웠습니다. 유다 민족은 70년 간 바빌로니아에서 지내면서 하나님의 율법의 소중함을 발견했습니다. 유다 민족에게 70년의 시간은 하나님의 법을 소홀하게 여겼다는 반성과 회개의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 속에 고난이 있습니다. 어렵고 힘든 시간들이 있습니다. 혼자 견디어 내기 어려운 시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면 이 고난의 시간들이 아름다운 것들로 변화하게 된다는 사실을 압니다. 이 사실을 솔로몬이 전도서 3:11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He has made everything beautiful in HIS time.)......”
지금 여러분의 삶을 한번 돌아 보십시오. 고난이 있습니까? 아픔이 있습니까? 힘든 일들이 있습니까?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고난의 시간을 주시는 목적과 의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이렇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자녀들에게 이렇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고난의 시간에도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습니다. 야고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고난 당하는 사람이 있다면 기도하십시오. 즐거운 사람이 있다면 찬송하십시오.” (야고보서 5:13) 또, 시편 119편에는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71절)”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My suffering was good for me, for it taught me to pay attention to your decrees.” (New Living Translation)
그러므로, 우리 크리스천들은 고난의 시간에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나에게 이 고난을 주신 목적과 의도가 무엇인지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고난의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에 더욱 집중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도록 해야 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어떤 것인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절대로 우리를 해치거나 망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가 잘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의 자녀들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은 희망을 주고, 빛나는 미래를 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 말씀이 오늘 읽은 11절 말씀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너희를 위한 나의 계획이 무엇인지 나는 알고 있다. 나의 계획은 너희를 해치는 것이 아니라, 번영과 희망과 미래를 주는 것이다.” 이 말씀은 요한복음 10:9-11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과도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나는 문이다. 나를 통해 들어가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 사람은 들어가기도 하고 나가기도 하며, 또 좋은 목초를 발견하기도 할 것이다. 도둑은 훔치고, 죽이고, 파괴하기 위한 목적으로 온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더욱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해 왔다. 나는 선한 목자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문제는, 우리가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지 않는다는 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과의 언약의 관계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는 어떤 경우에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자식이 미울 때고 있고, 싫을 때도 있지만, 그런 때에도 부모와 자식이라는 관계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그의 자녀들과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부정하지 않고,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해 나간다면, 우리는 하나님과의 언약의 관계 속에 있는 것입니다. 여전히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가 잘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빛나는 미래를 주는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에게 “너희가 내 이름을 부르고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의 기도를 들어 주겠다. 너희가 온전한 마음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날 것이다 (12-13절)”라고 약속하십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In those days when you pray, I will listen. If you look for me wholeheartedly, you will find me.” ‘in those days’라는 말은 너희가 나라를 잃어 버리고 바빌로니아에서 힘들게 살아갈 때라는 뜻입니다. ‘고난의 시간에’ ‘힘들고 외로운 시간에’ 이런 뜻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시간에 마음을 다해서 나를 찾으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만나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시지요? 우리 크리스천에게 고난의 시간은 단순히 힘든 시간이 아닙니다. 크리스천에게 고난의 시간은 하나님께 기도 응답을 듣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발견할 수 있는 축복의 시간입니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은 사랑하는 그의 자녀들에게 일부러라도 고난의 시간을 주십니다. 그래서 기도하게 하시고,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게 하십니다. 히브리서 12:5-7에 이런 말씀이 있는 것을 아시나요? “내 아들아, 주의 훈계를 가볍게 여기지 말고, 주님께서 너를 꾸짖으실 때, 낙심하지 마라.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자에게 벌을 주시고, 그의 아들로 받아들인 자들을 채찍질하신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받는 고난을 아버지의 훈계로 알고 견디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아버지가 자기 아들에게 벌 주듯이 여러분을 대하시는 것입니다. 아들을 훈계하지 않는 아버지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제 2016년이 지나고 2017년 새해가 밝아 왔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한 해가 주어졌습니다. 여러분은 새해를 어떻게 살고 싶습니까? 특별히 여러분은 크리스천으로서 하나님께서 주신 한 해를 어떤 마음으로, 어떤 자세로 살고 싶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인하는 한 해가 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까? 항상 내가 크리스천 맞는지 의심하는 믿음생활이 아니라, 나의 삶의 환경이 어떻게 변해도 흔들리지 않는 그런 믿음생활을 살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기세요. “너희를 위한 나의 계획이 무엇인지 나는 알고 있다. 나의 계획은 너희를 해치는 것이 아니라, 번영과 희망과 미래를 주는 것이다.”
다시 말씀 드립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아무에게나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자기 백성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나를 통해서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성경 말씀 읽어야 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의 삶을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내가 내 삶의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 삶의 주인인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산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14절 말씀에 “나 여호와의 말이다” 이런 말이 두 번이나 나옵니다. “Declares the Lord.” (NLT) “Says the Lord.” (NIV)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입으로 말씀하신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니까 아무도 이 말씀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차이나 음식점에 가서 음식을 다 먹고 나면 포춘 쿠키를 줍니다. 포츤 쿠키를 반으로 쪼개면 하얀 종이가 나옵니다. 그 종이에 온갖 좋은 말이 다 들어 있습니다. 포츤 쿠키에서 기분 나쁜 말이 나오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적힌 말은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말들입니다. 그렇게 되면 좋고, 안 돼도 누구 한 사람 시비 거는 사람이 없습니다.
오늘 여러분에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습니까? 이 말씀에 대하여 책임 지시는 분이 계십니다. “De-clares the Lord”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에 대하여 책임을 지신다는 것입니다. 2017년 한 해 동안,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게, 더욱 성숙하게 만들어 나가십시오. 하나님께서 내 삶의 주인이신 것을 믿으십시오.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말씀을 믿고 기도하십시오.
오늘 읽은 예레미야 29:11 말씀 같이 한번 읽어 볼까요? “너희를 위한 나의 계획이 무엇인지 나는 알고 있다. 나의 계획은 너희를 해치는 것이 아니라, 번영과 희망과 미래를 주는 것이다.”
12/25/2016 | 크리스마스 메시지 II
하나님의 때가 차매 When God's Proper Time Had Fully Come
갈라디아서 4:4-7
우리 찬송가에 성탄 찬송이 모두 25개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탁월한 성탄 찬송을 하나만 선택하라고 하면 무슨 찬송을 선택하시겠습니까? “그 어린 주 예수 (108, 114장), “그 맑고 환한 밤중에 (112장)” “기쁘다 구주 오셨네 (115장) “오 베들레헴 작은 골 (120장)” “참 반가운 성도여 (122장)” “저 들 밖에 한밤중에 (123장)” “천사들의 노래가 (125장)” “고요한 밤 거룩한 밤 (109장)” “오 거룩한 밤 (622장)” 이 중에서 하나만 선택한다는 것이 쉽지 않지요? 누가 저에게 묻는다면 저는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라고 말하겠습니다. 다른 찬송도 좋지만,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이 찬송은 가사도 그렇고, 곡조도 그렇고, 부르 때마다 뭔가 마음을 설레게 하는 특별한 것이 있습니다. 이 찬송은 세계 곳곳에서 300개 언어로 번역되어 불리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찬송가는 정말 우연하게 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화면을 한번 보실까요? 오스트리아의 작은 마을 오벤도르프 (Oberndorf)에 있는 성 니콜라스 (St. Nicholas) 교회입니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 최초로 불려진 교회입니다. 지금도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수많은 사람들이 이 교회를 찾는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이 교회를 “The Silent Night Chapel (고요한 밤 교회)”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조셉 모르 (Josef Mohr, 1792-1848)라는 이 교회를 섬기던 신부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이 교회의 성가대 반주자였던 그루버 (Franz Gruber, 1787-1863) 입니다. 모르 신부가 가사를 썼고, 그루버가 곡을 붙였습니다.
1818년 성탄절 전 날, 오스트리아 티롤 (Tyrol) 지방의 오벤도르프 마을에 폭설이 내렸습니다. 교회에서는 성탄절 이브 미사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폭설이 내린 것입니다. 설상가상으로 그 교회의 오르간이 고장이 나서 연주를 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오르간 연주자였던 그루버는 걱정이 태산이었습니다. 그루버의 걱정을 듣고 있던 모르 신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르간 걱정은 하지 마세요. 내가 크리스마스 노래 가사를 하나 써 놓은 것이 있는데, 당신이 이중창과 합창을 위한 곡으로 만들어 줬으면 좋겠습니다. 오르간을 쓸 수 없으니까 내가 기타 반주를 하겠습니다. 시간이 촉박하니, 단순한 멜로디로 곡을 만들면 좋겠습니다.” 그 때 모르 신부는 26세였고, 그루버는 31세였다고 합니다. 그루버는 모르 신부가 써준 가사를 들고 흰 눈이 덮인 들판을 걸어서 자기 집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하얀 눈으로 덮인 대지를 걷고 있던 그루버의 입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멜로디가 흘러나왔습니다. 그리고, 기다리던 크리스마스 자정 미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모르 신부의 기타 반주에 맞춰서 모르 신부가 테너 목소리로, 그루버가 베이스 목소리로 먼저 이중창으로 노래를 부르고, 이어서 교회 합창단과 함께 불렀다고 합니다. 갑작스럽게 만들어진 노래였지만, 참석한 교인들은 이 찬송을 들으면서 많은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탄 찬송은 이렇게 해서 세상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 이듬 해 봄이 되어서, 칼 마우라허(Carl Mauracher)라는 오르간 수리공이 교회를 찾아 왔습니다. 모르 신부는 오르간이 고장이 나서 어떻게 했느냐고 묻는 수리공에게, 그동안에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줬습니다. 그랬더니, 이 수리공이 그 노래 악보를 좀 보여 달라고 하면서 악보를 그려 가지고 돌아갔습니다. 이 수리공은 이 악보를 음악 가족인 스트라서 (Strasser) 가족에게 전해줬는데, 이 가족 합창단이 유럽을 돌아다니면서 이 노래를 불렀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이 노래가 오스트리아 티롤 지방의 민요로 알려졌었다고 합니다.
“Silent night holy night, All is calm, all is bright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사방은 고요하고, 모든 것은 밝게 빛나네)”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누가복음 2:9)” 이 성경 말씀이 생각나는 가사입니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James S. Steward (1896-1990)라고 하는 영국의 목사님이 “The Life and Teaching of Jesus Christ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교훈)”라는 책을 썼습니다. University of Edinburgh의 New College에서 신약성서 언어학 (New Testament Language)을 가르친 교수이며 목회자였습니다. 스튜어드 목사는 이 책에서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때에 대해서 4가지 중요한 사실을 주장을 했습니다.
첫째로, 그 때는 인류 역사상 가장 밝았던 때라고 합니다. 하늘의 빛이 어두운 세상을 비추었을 때, 동방의 박사들은 그 빛을 따라 먼 길을 떠났으며, 왕들은 깜짝 놀라 “나도 그에게 경배하겠노라” 하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고, 목자들은 천사들에게 들은 말을 확인하려고 목장을 떠났습니다. 하늘의 천군천사는 역사상 가장 밝은 때가 온 것을 알리며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에게 평화"라는찬송을 불렀고, 사람들의 마음은 마치 독수리가 날개를 치며 올라가듯이 하늘로 치솟아 올랐습니다. 이 모든 일들은 유대 땅 작은 마을 베들레헴의 구유에서 구세주가 탄생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들이었습니다.
일찍이 인류 역사에 이렇게 희망 차고 밝았던 때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아의 탄생은 인류에게 큰 희망을 안겨 주었습니다. 마태는 그의 복음서에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마태복음 4:16)”라고 썼습니다. 역사가들은 그의 탄생을 전후해서 B. C. 와 A. D. 로 역사를 나누었습니다. B. C. 는 ‘before Christ (그리스도 이전)’라는 뜻이고, A. D.는 ‘Anno Domini (Year of Our Lord, 우리 주님의 해)’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탄생 이전의 역사가 어둠과 절망과 하나님의 심판의 역사였다면, 예수님 탄생 이후의 역사는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였고, 용서와 화해의 역사였고, 구원의 역사였습니다.
둘째로, 언어의 통일입니다. 세계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주전 330년에 페르시아 제국을 멸망시킨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는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습니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알렉산더는 더 이상 정복할 땅이 없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알렉산더는 그 이전의 어떤 정복자들과 달랐습니다. 알렉산더는 단순히 많은 나라들을 정복하는데 만족하지 않고, 사람들의 마음까지 정복하려고 했습니다. 그리스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넘쳤던 그는 그의 제국의 구석구석까지 그리스 문화를 전파하려고 했습니다. 그 결과, ‘코이네 (koine)’라는 그 당시 그리스 언어는 세계 어디서나 통용되는 언어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아시지요?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그들의 메시지를 모두 그리스어로 기록했습니다. 스페인이든지, 이집트이든지, 그리스어로 선포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성경이 이미 기원전 200년 경에 ‘코이네’ 그리스어로 번역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성경을 ‘70인력’ 혹은 “셉투아진트 (Septuagint)’라고 합니다. 예수님도 구약 성경을 읽을 때 ‘셉투아진트’로 읽었을 것입니다. 초대 기독교 신자들도 구약 성경을 ‘셉투아진트’로 읽었습니다. 신약이든, 구약이든 그리스어로 번역된 성경은 쉽게 그리스 문화권의 사람들에게 쉽게 전파되었습니다.
셋째로, ‘로마의 평화 (Pax Romans)’입니다. 알렉산더가 죽으면서 알렉산더 제국은 점차 힘을 잃게 되고, 그 틈을 타고 로마가 세력을 확장하더니, 마침내 거대한 제국을 건설합니다. 세계는 로마 제국의 영토로 속속 병합되어, 세계는 이제 알렉산더 제국에서 로마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나라와 나라 사이의 국경이 무의미하게 되고, 나라와 나라, 민족과 민족 간의 분열과 적대감이 사라지고, 세계 어디서나 로마의 깃발을 볼 수 있었습니다. 세계는 로마에 의해서 하나의 공동체가 된 것입니다.
로마제국 밑에서 세계는 평화를 누렸습니다. 사람들은 이 평화를 ‘로마의 평화 (Pax Romans)’라고 불렀습니다. 그것은 로마의 강력한 힘에 대항할 어떤 세력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로마의 권위에 도전하지 않는 이상, 로마는 점령 지역의 문화와 종교, 사회적인 관습을 인정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돌 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는 신중한 성격이었던 로마의 황제 어거스터스 (Augustus, B.C. 63-A.D. 14)는, 제국 영토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군사 도로를 뚫었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은 로마가 군사적인 목적으로 건설한 도로망을 말합니다. 제국 어디서든지 반란이 일어날 때는 신속하게 군대를 보내서 진압하기 위한 목적으로 도로를 건설한 것입니다. 하지만, 참 놀랍지 않습니까? ‘로마의 평화’ 시대에, 로마가 군사용으로 닦아 놓은 그 길로, 복음의 전도자들이 세계를 누비면서, 아무 제재도 받지 않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넷째로, 디아스포라 (diaspora) 유대인들입니다. 주전 722년에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게 멸망 했습니다. 그리고, 주전 586년에 남왕국 유다가 바빌로니아에게 멸망했습니다. 이 때부터 유대 민족의 디아스포라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나라를 잃어버리고 흩어져 세계를 떠돌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유대민족의 디아스포라 역사는 하나님께서 개입하신 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세계를 떠돌면서도 메시아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삶이 고단하면 고단할수록 더욱 더 메시아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 (그리스도)라는 기독교의 메시지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호기심과 관심의 대상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은 어디를 가든지 유대인 디아스포라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사도들이 어디를 가든지 먼저 유대교 회당을 찾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 사도행전 16장에 나오는 빌립보 선교 이야기를 아십니까? 유럽 선교의 문을 열었다고 평가 받는 역사적인 바울의 빌립보 선교는, 바울이 안식일에 강 가에 있는 유대교 회당을 찾아가서 말씀을 전하고, 거기서 루디아 (Lydia)라는 한 유대 여자를 만나면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리스의 도시였던 빌립보에 이미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사람들이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을 때, 세상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알렉산더 제국을 사용하시고, 로마 제국을 사용하시고, 유대인들의 슬픈 역사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사용하셔서 복음을 들을 준비를 갖추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이런 시각(視角)으로 오늘 갈라디아서 말씀을 읽어 보십시오. “But when [in God’s plan] the proper time had fully come, God sent His Son, born of a woman, born under the [regulations of the] Law, so that He might redeem and liberate those who were under the Law, that we [who believe in His Son] might be adopted as sons [as God’s children with all rights as fully grown members of a family]. And because you [really] are [His] sons, God has sent the Spirit of His Son into our hearts, crying out, [a] ‘Abba! Father!’ Therefore, you are no longer a slave (bond-servant), but a son; and if a son, then also an heir through [the gracious act of] God [through Christ].” [a] An Aramaic word used by small children when informally addressing their fathers. (Amplified Bible)
오늘 말씀의 요점은 간단하고 분명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위한 ‘proper time (적절한 때)’이 무르 익었을 때, 하나님의 아들이 태어나셨다는 것입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정확한 '타이밍'을 맞춰서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모든 여건을 무르익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에 ‘타이밍’이 있듯이,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에도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는 ‘타이밍’이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타이밍’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우리의 불행도, 때로는 우리의 절망도 사용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떤 환경에서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하나님의 아름다운 뜻을 이루어 나가신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28, 전도서 3:11).
둘째로, 누구든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양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with all rights as fully grown members of a family’라고 했습니다. 가족의 어엿한 멤버로서, 완전한 권리를 가진 양자가 된다는 뜻입니다. 오늘 7절에도 나와 있지만, 바울은 로마서 8:17에서 더욱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If we are children, then we are heirs--heirs of God and co-heirs with Christ.” “만일 우리가 자녀라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공동의 권리를 가진 하나님의 상속자들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우리는 하나님을 ‘Abba! Father’라고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God has sent the Spirit of His Son into our hearts.”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 속에 그의 아들의 영을 보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가 완전히 찼을 때, 그의 아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세계의 언어를 하나로 통일 시키시고, 구약과 신약 성경을 모두 희랍어로 번역하게 하시고, ‘Pax Romana (로마의 평화)’를 복음 전파의 기회로 이용하게 하시고, 전 세계로 뻗어 나가는 도로를 뚫어서 전도자들이 그 길을 가게 하시고, 또 유대인 디아스포라들이 가지고 있던 메시아에 대한 희망을 이용하셨습니다.
동일하신 하나님은 지금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때를 위해서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 눈에는 잘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은 정확하게 ‘타이밍’을 맞춰서 하나님의 심판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이 사실을 아는 우리는 어떻게 이 시대를 살아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이 일을 위해 여러분을 도구로 사용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12/18/2016 | 대강절 메시지 2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Because He First Loved Us
요한일서 4:11-19
“사랑하는 친구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처럼 우리를 사랑해 주셨으니, 우리 역시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심으로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을 보여 주셨으며, 그를 통해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9절). 우리는 아버지께서 그의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보았고, 또 그것을 증언합니다 (14절).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도 사랑해야 합니다 (19절).”
여러분은 이 말씀을 들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저는 이 말씀을 들으면서 사랑의 위대한 서사시(敍事詩, epic)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위대한 인물이나 사건을 기리는 비교적 긴 시를 서사시라고 합니다. 대표적인 사사시 가운데 기원 전 8세기 경에 만들어진 호머 (Homer)의 일리아드 (Iliad), 오딧세이 (Odyssey) 같은 작품들이 있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서사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호머의 서사시는 그 내용이 사실이냐 아니냐 하는 것이 논쟁거리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읽은 요한의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서사시는 ‘역사적인 사실 (historical fact)’에 근거한 것입니다. 요한은 “하나님은 그의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 주심으로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을 보여 주셨다”고 합니다. 요한일서, 이서, 삼서는 그가 남긴 세 통의 편지입니다. 그는 이 편지를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제 우리는 생명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쓰려고 합니다. 그분은 태초부터 계셨으며, 우리는 그분에 대해 듣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본 바 되었습니다. 우리는 생명을 주시는 말씀에 관하여 쓰고 있습니다. 생명을 주시는 그분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을 보았으며, 또한 그분에 관한 증거도 제시할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 1:1-2)
자기가 경험한 것만큼 확실할 것이 없습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져 본 것이라면 그것은 사실 (fact)입니다. 요한은 자기 앞에 나타난 그분을 이렇게 확실한 말로 증언합니다. 그리고, 이 편지를 읽는 사람들을 그분과의 교제 (fellowship)로 초대합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 말하는 이유는, 여러분이 우리와 함께 교제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함께 나누는 이 교제는 하나님 아버지, 그리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가지는 교제입니다.” (요한일서 1:3)
후세 사람들은 예수님의 제자 요한을 가리켜 ‘사랑의 사도’라고 합니다. 그러나, 요한이 처음부터 ‘사랑의 사도’는 아니었습니다. 그 증거가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그의 별명은 ‘보아너게 (Boanerges)’였습니다 (마가복음 3:17). 그 뜻은 ‘Sons of Thunder (천둥의 아들들)’이었습니다. 요한에게 야고보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두 형제가 똑 같았습니다. 그래서 ‘Sons of Thunder’라고 되어 있습니다. 두 형제는 성격이 급하고, 참을성이 없고, 편협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두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면서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새 요한은 ‘사랑의 사도’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경험한 이 변화를 다른 사람들도 함께 경험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세 통의 편지를 써서 사람들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나누는 교제 (fellowship with the Father and with his Son, Jesus Christ)에 초대했습니다.
오늘은 대강절 넷째 주일입니다. 오늘은 촛불 네 개를 켭니다. 오늘 켜는 보라색 촛불은 ‘사랑의 촛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 깜깜하던 세상에 사랑의 빛이 비쳤다는 것입니다. 이 사랑의 빛이 비쳤기에 인류는 비로소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요한이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것입니까? 첫째로, 하나님의 사랑은 사랑의 본질을 알려주는 진실한 사랑이라고 합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보면, 무엇이 참된 사랑이고, 무엇이 거짓된 사랑인지 금방 알 수 있다고 합니다. 보세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야 말로 진실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위해 화목 제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요한일서 4:10)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This is real love - not that we loved God, but that he loved us and sent his Son as a sacrifice to take away our sins.”
요한이 말하는 참 사랑은 희생이 있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립 서비스로 “I love you”를 말할 때가 있습니다. 그 사랑에는 희생이 없습니다. 그러나, 진실한 사랑에는 희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고요? 그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He loved us and sent his Son as a sacrifice to take away our sins”라고 말하잖아요? 하나님은 그의 사랑을 그의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 주심으로 증명하셨습니다. 그것도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 그의 아들을 ‘sacrifice’ 희생제물로 내 놓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거짓된 사랑으로 우리 자신들을 속이는지 모릅니다. 성경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누가 헐벗고 굶주린 사람에게 다가 가서 “하나님께서 형제에게 은혜를 베푸시기를 기도할께요. 여기서 이렇게 있지 말고 어디 가서 몸을 따뜻하게 녹이세요. 아유, 며칠 째 아무 것도 안 드셨는가 봐요? 끼니 거르지 마시고 꼬박꼬박 챙겨 드세요 (야고보 2:16)” 이렇게 말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난 그래도 인정이 많아! 난 불쌍한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이렇게 아픈 걸!” 이렇게 생각하면서 자신이 대단한 휴머니스트나 되는 줄로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건 사랑이 아닙니다. 뭔가 그 사람에게 자기 것을 내 주고, 뭔가 자기 것을 희생할 때, 그 사랑이 진실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이 아들이 어떤 아들입니까? 성경에는 ‘독생자 (only begotten son)’라고 나와 있습니다 (요한복음 3:16). 우리 말로 하면 ‘독자(獨子)’입니다. 이 아들을 우리를 죄를 용서하기 위해 희생 제물로 주신 것입니다.
제주도에 사는 김제박/이선경 부부가 있습니다. 이 부부에게 유나라는 딸이 있었는데, 2014년에 미국애리조나주로 유학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 딸이 그만 교통 사고로 죽고 말았습니다. 올해 1월에 있었던 일입니다. 딸의 사고 소식을 듣고 미국으로 달려 갔는데, 딸은 의식 불명인 채 산소호흡기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병원에서 며칠 밤을 새웠지만, 딸이 깨어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딸의 손을 잡고 있는 어머니에게 불현듯 예전에 어디서 읽었던 기사가 생각났습니다. 병원에서 뇌사 판정을 받은 17세 소녀의 부모가 딸의 장기를 기증해서 여러 사람에게 새생명을 주었다는 기사였습니다. 정말 그렇게 해도 괜찮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며칠 밤을 새웠습니다. 그러던 중, 남편이 먼저 어렵게 말을 꺼냈습니다. “여보, 우리 유나 장기를 기증하면 어떨까?” 남편의 말에 아내는 선뜻 동의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딸 유나의 심장과 각막 등 장기가 27명에게 이식(移植) 되었습니다.
이렇게 딸을 보냈는데, 지난 달 11월 16일에 이 부부는 미국에 사는 어떤 여성으로부터 뜻밖의 편지를 한 통 받습니다. “귀한 따님의 심장 덕분에 9년 동안의 고통스러운 투병 생활이 끝났습니다. 만나 본적도 없는 저의 생명을 구해 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이 여성은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 사는 외과 의사인데, 선천성 심장병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다가 심장 이식 수술을 받고 새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이 여성의 편지는 이렇게 끝이 납니다. “제 동생 역시 저와 같은 병을 앓았지만, 심장 이식을 받지 못해서 3년 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동생은 이 세상에 없지만, 제 기억 속에 살아 있기 때문에 따님 유나는 저와 제 동생 두 생명을 살린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앞으로 저는 외과 의사로서 더 많은 환자를 살리는 삶을 살겠습니다.” 전 이 기사를 읽으면서 “유나의 이야기가 바로 예수님의 이야기구나!”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사랑은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이라고 합니다. “He first loved us”라고 했습니다. ‘먼저 (first)’라는 말이 눈에 확 들어 옵니다. 저는 이 말씀 역시 진실한 사랑이 어떤 것인지 보여 주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먼저’해야 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인사도 먼저 해야 하고, 용서도 먼저 해야 하고, 화해의 손도 먼저 내밀어야 하고, 사랑도 먼저 해야 합니다. 먼저 해야 하는 것이 맞는 줄 알면서도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고 싶어도 자존심(自尊心)이 우리를 가로 막습니다. “내가 왜 먼저 말을 해야 해? 걔가 먼저 나에게 말을 해 야지!” “내가 왜 용서를 해야하지? 그 사람이 먼저 용서를 빌어야지!” 이것이 우리들의 수준입니다. 어떤 때는 기껏 내가 먼저 손을 내 밀어야지 생각은 하면서도 번번히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의 수준입니다.
여러분, 유명한 로마서 5:8 말씀을 아시지요? “But God demonstrates his own love for us in this: While we were still sinners, Christ died for us.” (NIV)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이것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는 열쇠는 ‘still’이라는 단어입니다. 우리 말로 ‘여전히’ 또는 ‘아직’이라고 번역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가만히 내버려두면 우리는 계속해서, 지금도 죄인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이것이 죄인 된 우리의 운명이었고, 이것이 죄인 된 우리의 연약함 이었습니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죄인의 삶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로마서 5:8 말씀은 이렇게 이어져야 합니다. “until God first demonstrates his love for us (하나님께서 먼저 그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전에는).”
여러분, 주변에 감동적인 사랑의 이야기를 들은 것이 있습니까? 어떤 이야기입니까? 자기를 희생함으로써, 먼저 찾아가서 사랑을 보여 준 이야기 아닙니까? 그런 사랑의 이야기가 아니라면, 그 사랑은 진실한 사랑이 아닙니다. 마더 테레사 (Mother Teresa, 1910-1997)의 삶이 왜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줍니까? 그는 유고슬라비아에서 출생한 알바니아 사람입니다. 테레사는 자기와 아무 상관이 없는 인도의 빈민들을 먼저 찾아가서 사랑을 베풀고, 19살의 나이로 인도에 가서 68년 동안 그들을 위해서 자기 인생을 모두 드립니다. 테레사 수녀는 1979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합니다. 그는 수상 소감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우리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청빈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배고프고, 헐벗고, 집이 없으며, 질병에 걸려서, 사회로부터 돌봄을 받지 못하고 거부당하고 외면 받는 사람들의 이름으로 이 상을 기쁘게 받습니다.” 테레사 수녀가 상금을 받아 들고 “이 돈으로 몇 개의 빵을 살 수 있을까?” 하고 혼잣말을 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오늘 설교를 마치면서 이 말씀을 꼭 드리고 싶습니다. 17절 말씀입니다. “And as we live in God, our love grows more perfect. So we will not be afraid on the day of judgment, but we can face him with confi-dence because we live like Jesus here in this world.” “우리가 하나님 안에 살 때, 우리의 사랑은 보다 완전하게 자라납니다. 그렇게 되면 이 세상에서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심판의 날에도 두렵지 않게 주님의 얼굴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잘못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성경 말씀은 현실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에 그렇게 나와 있어도 실제로는 그 말씀대로 살 수 없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이 주님이 주신 마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요한도 그렇게 말하잖아요? “because we live like Jesus here in this world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예수님 같이 살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 같이 살 수 있습니다. 지금보다 훨씬 더 믿음을 가지고 이 세상을 이기며 살 수 있습니다. 살 수 없다는 사탄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서는 안 됩니다.
요한은 이렇게 그의 사랑의 이야기를 맺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우리를 사랑해 주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말로만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사랑은 진실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행동으로 이 사랑을 보여야 합니다.” (요한일서 3:18) 여기서 요한이 말하는 진실한 사랑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사랑도 똑 같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특권을 우리를 위해 모두 내려 놓고 ‘humble position (빌립보서 2:7)’을 취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소외된 사람들을 먼저 찾아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한 곳에 오래 머물러 달라는 요청을 거절하셨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을 찾아 가서 섬기기 위함이었습니다. “나는 다른 마을에서도 하나님 나라를 전하여야 한다. 내가 이 목적으로 보내심을 받았다.” (누가복음 4:42)
이제는 우리가 이런 사랑을 해야 할 차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예수님으로부터, 진실한 사랑이 무엇인지 배웠습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진실한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행동으로 우리의 진실한 사랑을 세상으로 흘려 보낼 수 있습니다. 2,000년 전에, 깜깜한 인류의 역사에 사랑의 빛이 비쳤던 것같이, 이제는 우리들의 진실한 사랑으로 이 암담한 세상을 밝혀야 합니다.
12/11/2016 | 크리스마스 메시지 I
큰 기쁨의 소식 The Good News of Great Joy
누가복음 2:1-14
우리 옆에 계신 분들, 또 주변에 계신 분들과 “메리 크리스마스” 하면서 서로 성탄절 인사를 나누실 까요?
오늘 크리스마스 예배인데, 무슨 말씀을 서로 나눌까 하다가 누가복음 2장에 나오는 가장 오래된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선택했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 때에 아구스도 황제가 내린 칙령에 따라서 온 나라가 호적 등록을 하게 되었습니다 (1절)” 이렇게 시작됩니다. 영어 성경에는 이 말씀이 “At that time the Roman emperor, Augustus, decreed that a census should be taken throughout the Roman Empire. This was the first census taken when Quirinius was governor of Syria.” 로마의 황제 어거스터스가 황제로 있을 때, 로마제국에 속한 모든 나라에 인구 조사를 하라는 칙령이 내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칙령은 퀴리니우스 (Quirinius, BC 51-AD 21)가 시리아의 총독으로 있을 때 행해 진 것이라고 합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한 말씀을 덧붙인다면, 이 때는 헤롯이 유대의 왕으로 있을 때였다고 합니다 (마태복음 2:1). 여기 나오는 헤롯은 ‘King Herod the Great’ ‘위대한 헤롯’이라고 불리는 사람입니다. 로마가 팔레스타인 지방을 지배하면서 세운 왕입니다. 유명한 ‘헤롯 성전’을 진 사람이기도 합니다. 헤롯 성전은 BC 20년에 건축을 시작해서 AD 63년에 완성이 되었습니다. 헤롯이 BC 73-BC 4년까지 살았으니까요. 그는 그의 성전이 완성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이 엄청난 성전 공사가 무려 83년만에 완성이 되지만, 그 성전은 AD 70년에 로마에 의해서 완전히 파괴되고 맙니다. 이스라엘에 ‘통곡의 벽 (The Wall of Wailing)’이라는 것이 있는데, 헤롯이 지은 성전의 서쪽 벽의 일부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벽에 와서 벽을 붙들고 웁니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통곡의 벽’입니다.
복음서를 쓴 누가나 마태는 왜 예수님께서 탄생하시던 때의 시대적인, 정치적인 배경을 굳이 밝혔을 까요? 저는 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누가나 마태가 쓰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는 누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확실한 역사적인 사실 (fact)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들이 일반 역사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들이 ‘역사적 사실’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지금 누가와 마태는 그들이 알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하면서 제일 먼저 이 이야기는 ‘역사적인 사실’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는, 시저 (Julius Ceasar, BC 100-BC 44)의 양아들로 있던 아우구스투스 (Augustus, BC 63-AD 14)가 시저가 죽은 후 혼란한 정국을 재빨리 수습하고, 로마제국의 황제로 있던 때였습니다. 세계사에서는 옥타비아누스 (Octavianus)라고 알려진 인물입니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제국의 속한 모든 지역에 인구 조사를 실시하라는 칙령을 내렸습니다. 유대 나라가 속한 팔레스타인 지역은 시리아의 총독 퀴리니우스가 인구 조사를 주관했습니다. 그리고, 그 때는, 헤롯이 유대나라의 왕으로 있던 때이기도 합니다. 이런 역사적인 배경과 상황을 알고 나면, 그 당시 팔레스타인의 작은 유대 나라의 사정이 어떠했을까 짐작이 갑니다. 로마에 세금을 내야 했고, 그 외에도 성전세라는 것도 있었습니다. 대규모의 성전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으니까 일반 백성들의 삶은 피곤하고 지칠 대로 지쳐 있었을 것입니다.
결혼을 약속한 요셉과 마리아라는 사람이 오늘 이야기에 등장합니다. 그 때는 지금하고 달라서 약혼한 관계라고 하면 부부처럼 여기던 때였습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 호적을 등록 하라는 황제의 칙령이 내렸기 때문에, 요셉은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가서 호적 등록을 해야 했습니다. 그 때 두 사람은 나사렛에 살고 있었습니다. 베들레헴은 예루살렘 남쪽에 있는 작은 마을입니다.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의 거리는 약 120km입니다. 그 때 마리아는 만삭의 몸이었고, 길은 지금 처럼 좋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베들레헴으로 갈 때 사마리아 땅을 지나가지 않고 우회 (迂回)를 했다면, 약 두 주 정도 족히 걸렸을 것입니다.
만삭의 몸에 먼 길을 가야 했던 두 사람은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왜 또 하필이면 그 때 호적 등록을 하라는 황제의 칙령이 내렸을까요? 성질이 급한 사람은 “아 놔, 나 호적 등록 안 할거야!” 하면서 호적 등록을 거부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과 마리아 두 사람은 베들레헴으로 갔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지나 놓고 생각해 보면 신기하고 놀랍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증명하기 위하여, 그 시대의 지도자들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의 황제로서 나라의 수입을 올리기 위해서 호적 등록을 하라고 칙령을 내렸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제의 명령이니까 사람들은 그 명령을 거절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베들레헴이 어떤 마을인가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베들레헴은 다윗의 고향입니다. 요셉도 고향이 베들레헴이었는데, 이 사실은 요셉이 다윗의 가문(家門)에 속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메시아의 탄생에 대한 예언자의 말씀을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구약성경 미가 5:2에 있는 말씀입니다. “But you, O Bethlehem Ephrathah, are only a small village among all the people of Judah. Yet a ruler of Israel will come from you, one whose origins are from the distant past.” 베들레헴은 작은 마을이지만, 베들레헴에서 한 위대한 지도자가 나온다는 예언의 말씀 아닙니까? 이 지도자의 오리진 (출신)은 먼 과거에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성경에는 “whose origins are everlasting (NKJV)”이라고 했습니다. 그의 출신은 따지고 올라가면 영원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그의 출신은 하나님께 까지 이른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그 지도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암시(implication)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그 때 아우구스투스가 인구조사를 명령하지 않았더라면 요셉이 베들레헴에 갔겠습니까? 아니, 그 이전에 마리아가 한 청년을 교제를 하다가 약혼을 했는데, 그 청년의 고향이 베들레헴이 아니라 나사렛이었으면 어떻게 될 뻔 했습니까? 그랬더라면 베들레헴으로 갈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요셉과 마리아를 베들레헴으로 가게 했고, 거기서 아들을 낳게 하심으로, 미가의 예언이 이루어졌습니다. 나중에 이런 사실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가 나사렛 사람이라면서? 나사렛에서 무슨 큰 인물이 나오겠어?” 하면서 예수님을 평가절하했습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도 그렇게 주관하고 계신다고 믿는 것입니다. 시편 139:17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How precious are your thoughts about me, O God. They cannot be numbered (나에 대한 주님의 생각은 얼마나 보배로운 지요. 그것들은 일일이 다 셀 수가 없습니다)!” 다윗의 고백입니다.
마리아는 베들레헴에서 해산을 합니다. 그런데, 빈 방이 없어서 마구간에서 아기를 낳아야 했습니다. 베들레헴은 작은 마을인데, 한꺼번에 사람들이 모여드는 바람에 빈 방이 없었습니다. 아들을 낳았는데, 포대기에 싸서 구유 (manger)에 눕혀 두었습니다. 퀴즈 문제 하나 낼까요? 이 말씀을 읽고, 답을 골라 보세요. ①불쌍하다. ②낭만적이다. ③아기 날 준비를 해 가지고 갔어야 했다. 두 사람은 준비성이 없었다. ④요셉이 마리아에게 얼마나 미안했을까?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우리의 시각(視角)을 가지고 읽으면 안 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시각으로 읽어야 그 뜻이 드러납니다. 바로 그 시간에 베들레헴 들판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에게 하늘로부터 강렬한 빛이 비취었습니다. 성경에는 “주님의 영광의 빛이 그들을 둘러 비췄다 (The radiance of the Lord's glory sur-rounded them)”고 했습니다.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두려워 마라. 보아라. 모든 백성을 위한 큰 기쁨의 소식을 가지고 왔다. 오늘 다윗의 마을에 너희를 위하여 구세주께서 태어나셨다. 그는 곧 그리스도 주님이시다.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볼 것인데,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증거이다.” (누가복음 2:10-12)
이 말씀을 읽는 우리의 눈은 ‘포대기와 구유’라는 말에 꽂혀야 합니다. 이 목자들은 자기들이 들은 말씀이 사실인가 확인하기 위하여 달려 갑니다. 다윗의 마을이라고 했으니까 목자들은 곧장 베들레헴으로 달려갑니다. 그런데, 베들레헴에서 어떻게 그 아기를 찾겠습니까? 마을 여관에 빈 방이 없을 정도로 외지에서 온 사람들이 많고, 또 마을 사람들도 있는데, 어떻게 이 아이를 찾겠습니까? 이 목자들이 여기 저기 다니면서 “오늘 저녁에 아기를 난 사람 있습니까?” 하고 찾고 다녔을 것입니다. 다행히도 아기를 난 사람이 한 집 밖에 없으면 별 문제가 없었을지 모르지만, 두 집이 있었다면, 어떻게 그 아기를 알아 볼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목자들은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찾으면 되니까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는 이렇게 한치의 오차도 없습니다. 빈 방도 없고, 아기를 누일 baby crib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참 안 됐고, 불쌍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포대기와 구유’는 그 아기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유일한 증거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그 아기가 온 세상을 구원할 큰 기쁨의 소식을 가지고 온 구세주라는 것을 ‘포대기와 구유’를 통해서 증명하셨습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포대기와 구유’가 있습니까? 인간의 눈으로 보면 ‘포대기와 구유’는 가난과 수치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포대기와 구유’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들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시각이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뀐다면, 우리 중에 불행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또 자신을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내가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지 않았다고 절망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제 마지막으로 드릴 말씀은, 13-14절 말씀입니다. “갑자기 그 천사와 함께 많은 하늘 군대가 나타나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 땅에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 예수님의 탄생의 의미를 선포하는 말씀 아닙니까? 예수님의 탄생이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게 되고,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평화를 선물하는 일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실 것이니까 예수님의 탄생이 하나님에 영광을 돌리는 일이라는 말씀은 쉽게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평화를 선물해 주신다는 말씀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 말씀을 잘 보니까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평화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가 주어진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들이 과연 누구입니까?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Peace on earth to those with whom God is pleased.” 그 사람과 함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야고보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을 물리치시고,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주신다.” (야고보서 4:6) 성경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까지 모든 말씀을 읽고 난 후의 결론은,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을 기뻐하시고, 겸손한 사람을 가까이 하시고,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겸손은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I am humble and gentle at heart., 마태복음 11:29).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가리켜 “He took the humble position of a slave and was born as a human being (빌립보서 2:7)”이라고 했습니다. 더 설명할 것 없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은 예수님처럼 ‘humble position’을 취하는 사람입니다.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은 목자(牧者, shepherd)들에게 제일 먼저 전해졌습니다.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이 아니라,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목자들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먼저 전해졌습니다. 그 이유는, 목자들이 겸손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목자는 양을 치는 사람입니다. ‘친다’는 말은 ‘돌본다’는 뜻입니다. 겸손은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마태복음 11:29, 빌립보서 2:5-6). 예수님의 마음을 갖지 않은 사람은 양을 칠 수 없고, 다른 사람을 섬길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먼저 양을 치는 훈련을 시키신 이유입니다. 모세의 몸에서 양의 냄새가 났을 때, 하나님은 그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도 양을 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몸에서 양의 냄새가 났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목사, 장로, 권사, 집사, 임원, 팀장, 간사, 그 밖의 세워진 사람들의 몸에서 양의 냄새가 나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기뻐하시고, 그런 사람을 세상에 하나님의 샬롬을 전파하는 도구로 사용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