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8/2017 | 야외예배

하나님의 케어 속에 있는 삶 The Life Under God’s Care

시편 95:1-7

오늘 모처럼 이렇게 야외로 나오니까 참 상쾌하고 기분이 좋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도 가끔 일상생활을 떠나서 제자들과 한적한 곳을 찾으셨습니다. 대표적인 말씀이 마가복음 6:31 말씀이지요. “한적한 곳으로 가서 잠시 쉬도록 하자.”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 말씀이 “Let's go off by ourselves to a quiet place and rest awhile”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마태복음 14:13에는 예수님께서 혼자 있기 위해서 사람들을 떠나 ‘멀리 떨어진 곳으로 (a remote area)’ 가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세례 요한이 죽고 나서 사람들의 관심이 모두 예수님에게 쏠렸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사람들을 떠나서 혼자 있을 장소를 찾으셨습니다. 자신의 사역의 목적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시간을 갖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우리에게는 오늘이 바로 그런 날입니다. 공부하고, 페이퍼 쓰는 일, 회사에서 일하던 일, 비지니스에 대한 생각, 자녀들에 대한 생각, 이런 생각들을 잠시 내려 놓고, 하루를 즐겁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불고기에 삼겹살을 준비했다고 하는데요. 서로 서로 둘러 앉아서 맛있게 드세요. 그리고 짬짬이 아름다운 숲길을 걸어 보세요. 저 쪽 뚝 위로 올라가면 호수가 있습니다. 호수 가로도 한번 걸어 보세요.

오늘 제가 잠시 여러분과 함께 나눌 말씀은 시편 95편 말씀입니다. 이 시편은 누가 썼는지 저자를 알 수 없습니다. 꼭 다윗이 썼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만, 학자들은 다윗이 쓴 것으로 보지 않고 다른 익명(匿名, anonymous)의 저자가 쓴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시편 95편을 한 절 한 절 읽어 보면 그 안에 많은 내용들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뚜렷한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잘 보세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하나님의 목장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목장 안에서 하나님께서 돌보시는 양 떼들입니다. 가장 위대한 시인이라고 할 수 있는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니 내게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십니다. 그가 나에게 새 힘을 주십니다...... 주님께서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내게 식탁을 차려 주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내 머리 위에 향기로운 기름을 바르시며 내 잔이 넘치도록 가득 채워 주십니다. 여호와의 선하심과 사랑하심이 내가 죽는 날까지 나와 함께하실 것이 틀림없습니다 (시편 23:1-6)”라고 고백했습니다. “My cup overflows with blessing!” “내 잔이 넘치나이다!” 하나님을 목자로 삼고 사는 자기의 삶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차고 넘친다는 고백입니다.

시편 95편을 쓴 저자 역시 같은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He is our God. We are the people he watches over, the flock under his care.” (7절)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 (the people of God)’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지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돌보심 (care)’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 안심 시키려고 이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그렇게 나와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지키시고 돌보신다고요. 요즘에 ‘오바마 케어 (Obamacare)’라는 말도 하고, ‘프럼프 케어 (Trumpcare)’라는 말도 하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케어 (God’s care)’를 받고 있습니다. ‘오바마케어’가 우리를 완전히 케어해 주지 않습니다. ‘트럼프케어’가 우리를 완전히 케어해 주지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케어’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케어’는 당장에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케어’가 구체적으로 느껴지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케어’에 대하여 무관심하고, 그렇게 좋은 것을 모릅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케어’ ‘하나님의 돌보심’을 어떻게 recognize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돌보고 계시구나! 나는 하나님의 케어를 받고 있구나!” 어떻게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에 있는 새를 보아라. 새는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쌓아 두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새들을 먹이신다. 너희는 새보다 훨씬 더 귀하지 않느냐? 들에 피는 백합꽃이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해 보아라. 하나님께서 오늘 있다가 내일이면 불 속에 던져질 들풀도 이렇게 입히시는데, 너희를 더 소중하게 입히시지 않겠느냐?” (마태복음 6:26-30)

여러분, 이 예수님의 말씀에 동의하십니까? 나무, 풀, 새, 이런 것들은 자신의 의지나 노력으로 살 수 없습니다. 이것들은 철저하게 하나님께 의존하는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야외예배는 일종의 현장학습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자연 속에서 아름다운 나무들과 핀 꽃들, 그리고 지저귀는 새 소리를 들으면서,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을 기르시는 ‘하나님의 케어’를 현장에서 느껴보는 것입니다. 저 혼자만 그런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이렇게 자연 속에 들어 오면 모든 걱정과 근심이 거짓말처럼 사라집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케어’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 95편 저자는 ‘하나님의 케어’를 recognize할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을 제시합니다. (1) 하나님께 기쁜 노래를 부르자 (1절). (2) 하나님께 감사의 노래를 부르자 (2절). (3)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 앞에 경배를 드리자 (6절). (4)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무릎을 꿇자 (Let us kneel before the Lord our maker., 6절). (5)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자 (Listen to his voice today., 7절). 그래서 우리의 삶 속에 찬양과 감사와 예배와 말씀이 중요합니다. 이것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케어’를 확인할 수 있는 채널들입니다.

오늘 야외예배를 마치고 집에 돌아갈 때는 단순히 “아, 다시 지겨운 집으로 가는구나! 지겨운 학교로 돌아가는구나!” 이렇게 생각하지 말고요. 내가 ‘하나님의 케어’ 속에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다윗의 고백처럼 “주님, 제가 ‘하나님의 케어’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제 잔이 넘칩니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몸과 마음이 주 안에서 새롭게 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에너지로 충만한 은혜가 있으시기 바랍니다. 


5/21/2017 |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계획 God’s Plan for Achieving Goodness

로마서 8:26-28


5/14/2017 |

새로 지음 받은 자의 삶 A Life of The Newly Created Person

고린도후서 5:1-5


5/7/2017 | (어버이주일/졸업예배 메시지)

하나님의 은혜로 By His Grace on Me

고린도전서 15:10

오늘은 어버이주일과 졸업예배를 같이 드리는 주일입니다. 이번에 우리교회 졸업생들이 모두 52명입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에 가는 친구들이 4명이고요. 대학을 졸업하고 학사학위를 받는 친구들이 20명이고요 대학원을 마치고 석사학위 받는 친구들이 21명이고요. 박사학위를 받는 친구들이 7명입니다.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박사학위를 받는 사람들은 대학교 4년, 대학원 2년, 박사학위 4-5년, 대학교부터만 계산해도 모두 10년이 넘습니다. 그동안 어려운 일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아직 부모님의 보살핌 속에 있을 나이인데 부모를 떠나고, 집을 떠나 오늘 이 자리에 오게 되었습니다.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오늘이 있게 해 주신 분들 중에 가장 감사해야 할 분은 하나님이시고요. 그 다음에 감사해야 할 분은 여러분의 부모님이십니다. 다 동의하시죠?

부모가 없이 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은 모든 부모는 자기 자식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객관적으로 볼 때 자기 자식보다 남의 자식이 더 예쁘고 똑똑한 데도 불구하고 부모들은 자기 자식이 제일 예쁘고 똑똑한 줄 압니다. 부모는 자식을 볼 때 객관적(客觀的)으로 볼 수 있는 눈이 없어요. 주관적(主觀的)으로 보는 눈만 있습니다. 제가 아는 선배 목사님이 있는데, 늘 만나면 손자 자랑을 합니다. 자기 손자를 찍은 동영상을 보여 주면서 “김목사, 우리 손잔데, 이것 봐. 내가 보기엔 천재 같아!” 그래요. 그러면 제가 놀려 주려고 “목사님, 천재는 무슨? 그만한 때 애들 다 그래요!” 그러면 “우리 손자는 정말 천재라니까!” 하면서 기분 나빠 합니다. 부모도 그렇습니다. 자기 자식이, 자기 딸이 못났는데도 그것도 모르고 세상에서 제일 예쁜 줄 알고 금이야 옥이야 하면서 기릅니다. 자식을 위해서 돈을 써도 아깝지 않습니다. 온갖 사랑을 다 쏟아 붇고도 더 쏟아 부을 것이 없어서 안타까워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런 부모의 사랑을 받으면서 성장해 왔습니다. 이번에 졸업한다는 소식을 들은 부모님들이 얼마나 기뻐하실 지 안 봐도 눈에 선합니다.

여러분들의 부모님은 살아 계신가요? 건강하신가요? 전 다음 주간에 한국에 잠깐 다녀 오려고 합니다. 아버님 연세도, 어머님 연세도 90이 넘으셨습니다. 연로하신다 보니 건강이 아주 않 좋으십니다. 제가 한국에 가면서도 두려운 것은 저를 혹시라도 못 알아 보시지 않을까 하는 것이 제일 두렵습니다. 건강할 때 잘 해 드려야 하고, 건강할 때 기쁘게 해 드려야 하는데, 이제 연로하셔서 저를 못 알아 보신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저는 한국을 떠나 온 지가 34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몇 번이나 부모님을 뵈었겠습니까? 늘 목회한답시고, 교회 일 한답시고, 제대로 뵌 적이 없습니다. 뵈어도 잠간 밖에 뵙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한자로 ‘효’ 자를 어떻게 쓰는지 아시지요? 위에는 ‘노인 노(老)’자가 있습니다. '노(老)' 자는 사람이 지팡이를 짚고 있는 형태인데요. ‘효(孝)’자는 지팡이 대신 ‘아들 자(子)’ 자가 있습니다. 글씨 형태로 보면  연로하신 부모님을 지팡이 대신 아들이 받치고 있는 것을 형태입니다. 제가 한자를 배울 때는 ‘효’자는 연로하신 부모님을 아들이 엎고 가는 모양이라고 배웠습니다. 제가 다른 곳에서 찾아 보았더니 아들이 연로하신 부모님의 손을 잡고 가는 모양이라고 설명한 데도 있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부모님에 최선을 다해 드리세요. 그렇게 할 수 있는 여건만 된다면 자주 부모님 곁에 있어 드리세요. 연로하신 부모님을 생각하면 “수욕정이풍부지(樹欲靜而風不止) 자욕양이 친부대(子欲養而親不)”라는 말이 자꾸 생각납니다. '한시외전(韓詩外傳)'에 나오는 말인데요. “나무는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이 부모를 공양하고자 하나 부모는 기다려 주지 않는다” 라는 말씀이 자꾸 마음에 떠 오릅니다. 공자가 유랑을 하다가 하루는 몹시 울며 슬퍼하는 사람을 만났답니다. 그래서 무슨 사연이 있길래 이렇게 슬피 우느냐고 물었더니, 그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저는 세 가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 첫째는 젊었을 때 천하를 두루 돌아다니다가 집에 와보니 부모님이 이미 세상을 떠나신 것이고, 둘째는 섬기고 있던 군주가 사치를 좋아하고 충언을 듣지 않아 그에게서 도망쳐 온 것이고, 셋째는 부득이한 사정으로 교제를 하던 친구와 교제를 끊은 것입니다. 무릇 나무는 조용히 있고자 하나 바람 잘 날이 없고, 자식이 부모를 모시고자 하나 부모는 이미 안 계신 것입니다.” 이 말을 마치고 그는 마른 나무에 기대어 죽고 말았다고 합니다. 참 안타깝고 슬픈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이 좋아하는 노래 중에 ‘하나님의 은혜’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조은아 작사, 신상우 작곡인데요. 오늘 읽은 말씀 고린도전서 15:10 말씀에서 영감을 얻어 작사했고, 곡을 붙였습니다. 가사도 곡도 아주 훌륭합니다. 신상우 씨가 캐나다 밴쿠버에 살 때 너무 경제적으로 어려웠을 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회의가 들었다고 합니다. 갈 곳에 없어서 밴쿠버에 있는 고형원 씨 집에 얹혀 살았는데, 고형원 씨도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겼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때 들었던 생각이 내가 하나님님께 헌신하겠다고 하는데, 왜 이렇게 나에게 어려움을 주시는지 정말 이건 아니다 싶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성경 말씀은 꾸준하게 묵상하고 있었는데, 마침 고린도전서 15:10 말씀에서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사도 바울의 고백을 묵상하다가 나도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밴쿠버에 살고 있던 조은아 씨에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가사를 하나 써 달라고 요청을 했다고 합니다. 조은아 씨는 그 다음 날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가사를 써 왔다고 합니다. 종이에 만년필로 쓴 가사였는데, 이 가사 첫 줄,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을 읽으면서 그 자리에서 눈물을 펑펑 쏟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면서 태어난 곡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곡이라고 합니다.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
나를 보내신 이도 하나님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나의 달려갈 길 다 가도록 나의 마지막 호흡 다하도록
나로 그 십자가 품게 하시니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한량 없는 은혜 갚을 길 없는 은혜 내 삶을 에워싸는 하나님의 은혜
나 주저함 없이 그 땅을 밟음도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

한량없는 은혜 갚을 길 없는 은혜 내 삶을 에워싸는 하나님의 은혜
나 주저함없이 그 땅을 밟음도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
한량없는 은혜 갚을 길 없는 은혜 내 삶을 에워싸는 하나님의 은혜
나 주저함 없이 그 땅을 밟음도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
나를 보내신 이도 하나님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지금의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므로 내게 베푸신 그분의 은혜가 헛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다른 사도들보다 더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일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한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But whatever I am now, it is all because God poured out his special favor on me—and not without results. For I have worked harder than any of the other apostles; yet it was not I but God who was working through me by his grace.”

이 말씀이 주는 은혜를 깨달을 수 있습니까? ‘but whatever I am now’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면 무조건 하나님께서 도와 주셔서 내가 성공하게 되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무조건 성공하고, 무조건 잘 되고 이것 만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여러분들 중에 계획대로 안 된 일들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어떤 친구는 학점 문제로 학교와 문제가 있어서 이번에 졸업을 못하는 친구들도 있을 것입니다. 학생들만 그런 것 아닙니다. 비즈니스 하시는 분들, 회사에서 일하시는 분들 중에 또 어려움 겪고 있는 분들 많이 있을 것입니다. 또 취직 문제로 걱정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잘 보세요. 모두 잘 된 사람들만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까 위에서 신상우 씨도 그랬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은혜’ 이 노래를 작곡했을 때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다고 했습니다. 이런 그를 다시 일으켜 준 것이 바로 고린도전서 15:10 말씀이었습니다. 내가 지금 어떤 환경에 있든지, 내가 성공했든지 실패했든지, 좋은 위치에 있는지 낮은 위치에 있는지 상관 없이 나의 나 된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라고 우리는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은 겸손하게 인생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실패와 절망 중에 있는 내가 성공했을 때, 낮은 자리에 있던 내가 높은 자리에 있게 되었을 때, 우리는 그것이 ‘by God’s grace on me’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졸업생 여러분들이 앞으로 인생을 살아가면서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겸손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겸손에 대하여 제가 좋아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앤드류 머레이 (Andrew Murray, 1828-1917, 남아프리카공화국)가 그의 책 ‘겸손 (Humility, 1895)’에서 한 말입니다. “Just as water ever seeks and fills the lowest place, so the moment God finds you abased and empty, His glory and power flow in.” “물이 항상 낮은 곳을 찾아 채우는 것처럼, 당신이 낮아지고 비어 있는 것을 하나님께서 발견하시는 순간,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은 당신 안으로 흘러 들어온다.” 이 말씀에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겸손에 대해서 한가지 말씀을 더 볼까요? 잠언 3:5-6에 있는 말씀입니다. “너의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의뢰하고, 너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아라. 네가 하는 모든 일에서 주님을 인정하여라. 그러면 주님께서 네가 가는 길을 인도하실 것이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Trust in the Lord with all your heart; do not depend on your own understanding. Seek his will in all you do, and he will show you which path to take.” “네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신뢰하고, 네 자신의 생각을 의지하지 마라.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뜻을 찾으라, 그리하면 네가 어느 길을 선택해야 할지 보여 주실 것이다.”

비록 이 말씀 안에 겸손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지만,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말씀 자체가 이미 겸손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겸손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겸손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의 understanding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마음이 교만한 사람에게는 자신이 생각하는 길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겸손한 사람의 눈에는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길이 보입니다. 이것이 겸손한 사람이 받는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당장에는 교만하고 똑똑한 사람이 이기는 것 같지만, 교만한 사람은 겸손한 사람을 절대로 이길 수 없습니다. 아니, 자기가 결정한 길을 걷는 사람과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는 길을 걷는 사람 중에 누가 올바른 길을 걷는 사람이겠습니까? 나의 나 된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성공한 사람만 이 고백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지금 당장에 앞 길이 보이지 않는 사람도 이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What-ever I am now it is all because God poured out his grace on me”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내가 어느 형편에 있든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겪는 성공과 실패와 절망 속에도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이 들어 있다고 말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항상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 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않게 하려고 다른 어떤 사도들 보다도 자기는 열심히 일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일 마저도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한 일이었다고 합니다. 제가 오늘 설교를 마치면서 여러분들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이 그것입니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라고요. 여러분들 다들 아실 겁니다. 미국의 39대 대통령을 지낸 지미 카터 대통령이 자서전을 냈는데, 자서전 제목이 ‘최선을 다 하는 삶 (Why Not The Best)’입니다. “왜 최선을 다하지 않느냐?” 하는 제목입니다. 그는 재임 중에 별로 인기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진실한 크리스천인 카터는 항상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한 사람으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2002년에는 세계 평화를 위해 노력한 점이 인정되어 노벨 평화상을 받았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사람은 항상 겸손하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합니다. 저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이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저의 귓전에 저의 어머니께서 늘 하시던 말씀이 들립니다. “목회 열심히 해라. 교회 일 열심히 해라. 넌 하나님께 드린 사람이니까 다른 것 생각하지 말고 목회 열심히 해라!” 어머니가 정정하실 때는 이 말을 하시면 “알았어요!” 하고 짧게 대답하곤 했는데, 지금 어머니를 찾아 뵈면 그 말씀을 다시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를 못 알아 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저를 떠나 보내실 때 눈물을 훔치시면서 “목회 열심히 해라!” 늘 하시던 이 말씀을 다시 듣고 싶습니다.


4/30/2017 | (마가복음 강해설교 60)

나는 이 사람을 모릅니다. I Don’t Know This Man You Are Talking About!

마가복음 14:66-72

오늘 말씀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다는 말씀입니다. 마가는 그 때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베드로가 공관의 아래쪽에 있을 때, 한 대제사장의 여자 종이 왔습니다. 그 여종은 베드로가 불을 쬐고 있는 것을 보고, 노려보며 말했습니다. ‘당신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지요?’ 베드로는 부인하며 말했습니다.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66-68절)

베드로는 이렇게 세 번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마지막에는 "A curse on me if I'm lying-I don't know this man you're talking about (71절)!"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쉬운성경에는 베드로가 저주하면서 맹세했다고 했습니다.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 마가가 기록하지 않은 충격적인 장면을 기록했습니다. “약 1시간 후에 다른 사람이 주장했습니다. ‘분명히 이 사람도 예수와 한 패요. 이 사람도 갈릴리 출신이니까.’ 그러자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여보시오, 나는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모르겠소.’ 베드로가 말하고 있을 때, 닭이 울었습니다. 주께서 돌아서서 베드로를 보셨습니다. 베드로는 주께서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할 것이다’라고 하셨던 말씀이 기억났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밖으로 나가서 몹시 울었습니다.” (누가복음 22:59-62)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At that moment the Lord turned and looked at Peter. Suddenly, the Lord's words flashed through Peter's mind: ‘Before the rooster crows tomorrow morning, you will deny three times that you even know me.’ And Peter left the courtyard, weeping bitterly.”

이 장면을 화가들이 놓칠 리가 없지요. 여러 화가들이 ‘베드로의 부인 (The Denial of Peter)’이라는 제목으로 이 장면을 그렸습니다. 가장 유명한 것이 카라바지오 (1573-1610, 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이탈리아)가 그린 ‘성 베드로의 부인 (The Denial of Saint Peter)’이라는 그림입니다. 카라바지오는 베드로에게 세 손이 집중하도록 했습니다. 하녀는 양손으로 베드로를 가리키고, 병사는 한 손가락으로 베드로를 가리킵니다. 베드로는 부정하는 제스처를 보이지만, 그의 얼굴은 그가 무엇을 했는지를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 그림이 카라바지오의 마지막 작품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카라바지오는 이 그림의 제목을 ‘The Denial of Saint Peter’라고 함으로써 베드로같이 훌륭한 사람도 한 때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적이 있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부인(否認)에 대한 말씀을 생각할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베드로의 부인은 예고된 사건이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주님을 위해서 제 목숨을 내 놓겠다고 큰 소리 칠 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정말 나를 위해 네 목숨을 내놓겠느냐? 내가 너에게 진리를 말한다.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요한복음 13:37-38) 이미 이렇게 예고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우리의 인간성의 나약함에 대하여 생각해야 합니다. 쉽게 내 목숨을 내 놓겠다고, 나는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큰 소리 치지만, 한 순간에 예수님을 부인해 버리는 것이 우리의 인간성입니다. “그 사람이 그럴 줄 정말 몰랐어!” “정말이야? 그 사람이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우리가 이런 얘기를 얼마나 많이 듣고 있습니까?

며칠 전에 전인권 씨의 노래가 표절이라고 하는 기사가 떴습니다. 그만큼 충격적인 뉴스였기 때문에 실 시간 검색어 1위였다고 합니다. 전인권이라고 하면 보컬 그룹 ‘들국화’의 메인 보컬리스트로서 1980년 대에 전성기를 구가했던 전설적인 인물입니다. 얼마 전에는 촛불 집회에서 애국가를 열창하여 감동을 줬던 일도 있었습니다. 그의 대표곡 중의 하나인 ‘걱정 말아요 그대’가 독일 가수의 곡을 표절했다는 말이 나왔습니다. 이 곡은 최근에 ‘응답하라 1988’의 OST로 크게 리바이벌 되었던 노래입니다. 표절 문제가 나왔을 때 그는 말도 안 된다고 부인했습니다. 그런데, 며칠이 안 되어 SNS에 독일에 가서 그 가수를 만나 저작권료를 얼마를 요구하든지 지불하겠다는 글을 올렸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그의 또 다른 대표 곡 중의 하나인 ‘우리’라는 곡은 가스펠 송 ‘I just want to praise you’를 표절했다는 의혹이 일었는데, 제가 들어봤더니, 불행하게도 똑 같습니다. 표절이 아니라 그대로 카피한 것이었습니다.

“들국과의 전인권이 표절을 했다고?” 사람들은 깜짝 놀랍니다. “아니,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다고? 그럴 리가 있나?” 재미 있는 것은 베드로가 이렇게 예수님을 부인했는데도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때 그 현장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베드로 외에는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냥 덮어질 수도 있었던 이 이야기가 덮이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어떻게 알려져서 복음서를 기록한 네 사람에게도 알려졌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했다는 이야기는 네 복음서에 모두 나옵니다. 아마도 베드로가 크리스천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고백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의 인간성은 이렇게 연약하고 부끄러운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마당에 들국화의 전인권이 표절을 했다는 것이 그렇게 대단한 일도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인간성도 그들보다 나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대제사장의 집에서 일하는 여자 종 앞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영어 성경에 보면 이 여자에 대하여 ‘one of the servant-girls of the high priest’라고 나옵니다. 그 여종은 어린 소녀였습니다. 그 소녀 앞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인간성의 연약함을 잘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는 너를 게바라고 부르겠다 (You are Simon son of John. You will be called Cephas., 요한복음 1:4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신앙고백을 했을 때도 예수님은 베드로를 ‘바요나 시몬’이라고 불렀습니다. ‘요나의 아들 시몬 (Simon son of Jonah)’이라는 뜻입니다. 또 나중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만나 주실 때도 ‘요한의 아들 시몬아 (Simon son of John)’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아버지의 연약한 인간성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라는 뜻으로, 모두 베드로의 연약한 인간성을 지적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도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도 배반할 수 있고, 우리도 표절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연약한 인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인간성이 거듭나야 합니다. 성령 안에서 우리의 연약한 인간성이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여러분도 저도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베드로가 그랬습니다. 성령 안에서 거듭나서 새로운 인간성을 입었습니다. 베드로는 초대교회를 환란과 핍박 중에 지키는 큰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한 소녀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연약한 인간성을 가졌던 베드로가 주님의 교회를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리는 위대한 지도자가 된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면서 했던 말, “당신들이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나는 모릅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아까 위에서 누가가 기록한 충격적인 말씀을 읽었습니다. 베드로가 그 말을 하는 순간 “At that moment the Lord turned and looked at Peter (그 순간 주님께서 베드로를 돌아 보셨다., 누가복음 22:59)”라고요. 어쩌면 성경에는 그렇게 나와 있지 않지만, 예수님과 베드로의 눈이 마주쳤을 가능성도 없지 않습니다. 정말 그랬다면, 베드로는 그 예수님의 눈 빛을 평생 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 눈빛을 한번 보시겠습니까? Heinrich Hofmann (1824-1911, Ger-man)이 그린 ‘Christ and the Rich Young Ruler (그리스도와 부유한 젊은 지도자)’입니다. 비록 부자 청년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표정이지만, 자기를 모른다고 부인하는 베드로를 바라 보셨던 표정도 이와 비슷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약간은 슬프면서도, 그러나 상대방을 비난하는 표정은 아닌, 오히려 상대방에 대한 연민 (compassion)의 마음을 가지고 바라 보시는 표정입니다. 베드로를 바라 보신 예수님의 표정이 그렇지 않았을까요?

사무엘상 2:30 말씀이 생각납니다. “나는 나를 존중하는 사람들을 존중하고, 나를 경멸하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게 할 것이다 (I will honor those who honor me, and I will despise those who think lightly of me).” 하나님의 사람이 엘리 제사장에게 한 말입니다. 엘리는 늙어갈수록 분별력이 흐려져 자기 아들들의 비행을 막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엘리의 행동을 하나님보다 자기 아들들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 것으로 보셨습니다 (사무엘상 2:29). 하나님의 경고를 듣고도 엘리는 아들들의 방자한 소행을 막는데 소극적이었습니다. 결국 엘리의 아들들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하나님의 언약궤를 지키는 소임을 다하지 못하고 전사합니다. 같은 날 아들들이 전사 소식을 들은 엘리 역시 충격을 받고 의자에서 넘어져 최후를 맞이합니다.

신약성경에도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인정하는 사람은, 나도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 앞에서 그를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마태복음 10:32-33) ‘인정한다’는 말은 ‘acknowledge’라는 말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인정하는 사람은, 예수님도 하나님 앞에서 그 사람을 안다고 인정하겠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오늘 우리 시대에는 결코 따르기 쉽지 않은 말씀입니다. 요즘에는 상대방이 물어보지 않는 이상 구태여 내가 크리스천이라고 말하지 않는 시대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내가 크리스천이라고 먼저 말하는 경우가 흔하지 않습니다. 물어보면 그 때가서 대답을 하는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지금의 트렌드이지만, 결코 성경적인 태도는 아닙니다. 우리는 어디서든지 기회가 있으면 내가 크리스천이라는 사실을 confess해야 합니다. 이것이 올바른 크리스천의 삶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기회를 살리라’는 말씀이 나오잖아요? 에베소서 5:16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Make the most of every opportunity in these evil days.” 우리는 나에게 주어진 기회를 모두 살려야 합니다. 그 기회를 살려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기회로 만들어야 합니다.

성경 말씀대로 한다면,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베드로를 모른다고 해야 합니다. 어차피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한 사람이니까 베드로에게 마음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베드로를 다시 만나 주십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베드로를 다시 만나 주시면서 베드로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십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예수님께서 자신이 했던 말을 무시하고 베드로를 다시 만나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필요하다면 성전도 파괴해 버리는 분입니다. 제가 이스라엘에 갔을 때 갑자기 성전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구약에 성전에 대한 말씀이 얼마나 많이 나옵니까? 그래서 한번 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참 성전은 모두 파괴되고 없지?” 눈에 보이는 성전 예배가 타락하니까 하나님은 그 성전을 파괴해 버리셨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집을 파괴해 버리신 하나님이시라면 충분히 자기의 법도 revise (개정)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나를 부인하는 사람? 그런 사람은 나도 하나님 앞에서 그 사람을 모른다고 부인하겠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자기가 한 말을 번복하시고 베드로를 만나 주십니다.

마가는 그의 복음서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나서 “엎드려서 울었다 (He broke down and wept)”라고 기록했습니다. ‘break down’이라는 말이 완전히 주저 앉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붕괴된 상태를 말하잖아요? 마태복음에는 베드로가 밖으로 나가 몹시 울었다고 나와 있습니다 (마태복음 26:75). 누가복음에도 똑 같이 나와 있습니다. 희망적인 것은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했던 일을 통해서 자신의 연약함을 뼈저리게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연약함을 아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아는 것으로 자신의 인생이 크게 바뀌지 않습니다. 우리가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우리가 거듭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내 삶 속에 개입하셔야 합니다. 전 주일에도 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왔습니다 (고린도후서 5:18)”라고 했습니다. ‘이 모든 것 (all of this)’라는 말은 사람이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는 모든 과정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개입하실 때, 우리는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하게 구해야 합니다. 이 일은 공부 한 시간, 두 시간 더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공부 한 시간, 두 시간은 우리 인생을 크게 바꾸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점수가 나를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어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일은 내 인생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일입니다.

교회 달력을 봤더니 올해는 6월 4일이 ‘성령강림주일 (Pentecost Sunday)’이더라고요? 예수님의 부활 후에 제자들이 성령을 체험한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자기들의 인생 속에 개입해 들어오신 것을 체험한 날입니다. 어떻게 보면 지금 우리는 가장 중요한 때를 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열심히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 속에 개입해 들어 오시도록 마음을 열고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하게 구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