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모음
12/4/2016 | 대강절 둘째 주일 메시지
오래 전 선지자 꿈꾸던 복을 The Blest Vision By the Prophets Foretold
이사야 9:1-7
우리가 불렀던 찬송가 550장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 2절 가사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 매였던 종들이 돌아오네. 오래 전 선지자 꿈꾸던 복을 만민이 다 같이 누리겠네.” 이 찬송가 가사를 쓴 사람은 T. Hastings (1784-1872)라는 사람입니다. 아마도 Hastings 는 시편 60편에 나오는 “예루살렘아, 일어나 빛을 비추어라. 네 빛이 이르렀다.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떠올랐다. 밤처럼 짙은 어둠이 온 땅의 백성들을 덮을 것이나,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떠오르시며, 주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날 것이다. 민족들이 네 빛을 향해 나아오고, 왕들이 떠오르는 밝은 해와 같은 너를 보고 찾아올 것이다. 네 눈을 들어 주위를 둘러보아라. 사람들이 모여 너에게로 오고 있다. 멀리서부터 네 아들과 딸들이 함께 올 것이다 (1-4절)” 이 말씀에서 영감(靈感)을 받아서 가사를 썼을 것입니다.
제가 이 찬송을 부를 때마다 특히 마음에 와 닿는 가사가 있습니다. “오래 전 선지자 꿈꾸던 복을 만민이 다 같이 누리겠네.” 이 구절입니다. 많은 선지자들이 메시아 시대에 대한 꿈을 꾸었습니다. 가난과 고난과 전쟁, 포로 생활 속에서도 “메시아 시대가 곧 온다!”는 희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마치 초대교회 크리스천들 이 박해를 받을 때 “주 예수여, 어서 오십시오 (요한계시록 22:20)”라고 고백하면서 예수님께서 어서 오셔서 자기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를 바랐던 것과 같습니다. 또 이것은 우리나라가 주권을 빼앗기고 36년 동안 일본의 지배 있을 때 주님이 어서 오기를 소원했던 성도들의 기도와도 같습니다.
36년 동안 일본이 저지른 만행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3.1 운동이 일어나고 한 달 반 정도가 지났을 때, 경기도 화성시 향남면 제암리에 일본군 장교가 군인들을 끌고 왔습니다. 3.1 운동 때 화성시 주민들을 너무 과격하게 진압한 것을 사과하러 왔다고 하면서, 15살 이상 남자들은 모두 제암리교회로 모이라고 했습니다. 그 때 모인 사람들 대부분이 기독교와 천도교를 믿는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일본군 장교가 인사를 하고 교회 문을 나가자 마자 밖에 있던 일본군들이 창문을 열고 사격을 했습니다. 교회에 모였던 29명 전원이 사망했습니다. 일본군들은 자기들의 만행을 감추려고 교회에 불을 질렀습니다. 하지만, 이런 만행이 언제까지 감춰져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세브란스 의학 전문학교에 교수로 와 있던 캐나다 선교사 스코필드 (Frank W. Schofield, 석호필) 교수가 우연히 이 소식을 듣고 이 끔찍한 현장을 사진으로 찍어 본국으로 보냄으로써 세상 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지금 제암리교회에 가면 손에 사진기를 든 스코필드의 동상이 서 있다고 합니다. 스코필드는 3.1 운동을 주도한 33인과 함께 34번 째 민족대표로 인정 되어, 국립 현충원에 안장 되었다고 합니다.
일본의 만행으로 신음하던 한국교회에서 가장 많이 읽었던 성경이 요한계시록이었습니다. 평양 장대현 교회 길선주 목사님 같은 분은 일생을 통해 구약을 30회, 창세기와 에스더와 이사야서는 540회, 신약 전권은 100회, 요한서신은 500회, 요한계시록은 10,000 번을 읽었다고 합니다. 교회가 박해를 받고, 크리스천들이 핍박을 받던 때에, 다시 오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악을 이기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신다는 요한계시록의 말씀은 많은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이 “주 예수님, 어서 오시옵소서 (요한계시록 22:20)” 이런 말씀으로 끝이 나지요?
오늘 읽은 이사야 9장 말씀으로 돌아가 볼까요? 이사야는 유다의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활약했던 예언자입니다. 그 때가 약 기원전 700년경 입니다. 그는 므낫세 왕 때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웃시야 왕은 16살에 왕이 되어 52년 간 왕으로 있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잘했습니다. 하지만, 군사적으로, 경제적으로 나라의 힘이 커지자 그는 교만해 졌습니다. 그가 왕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이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웃시야는 스가랴가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께 복종했습니다. 스가랴는 웃시야에게 하나님 을 두려워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웃시야가 하나님을 섬기는 동안 하나님께서 웃시야의 하는 일을 잘 되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웃시야는 강해지면서 교만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망하게 되었습니다.” (역대하 26:5, 역대하 26:16) 그는 결국 하나님께 버림 받아 몹쓸 병에 걸려서 왕 위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는 성전에도 들어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격리된 삶을 살다가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그의 아들 요담이 왕이 되었습니다. 요담은 아버지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신기 하게도 그는 선한 사람이었지만, 그가 다스리는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서 악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역대하 27:2).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Jotham did what was pleasing in the LORD's sight, but the people continued in their corrupt ways.” 요담은 하나님 보시기에 기뻐하는 일을 했지만, 그의 백성들은 타락한 생활을 계속했다는 것입니다. 그의 아들 아하스는 어떨까요? 그는 아버지와는 달리 악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성경은 그가 ‘다윗의 길’을 따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가 통치할 동안 온 나라가 우상숭배에 빠졌습니다. 나라의 힘이 약해 지니까 근처에 있는 나라들이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그런 중에도 아하스는 계속해서 하나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역대하 28:19).
아하스가 죽고 그의 아들 히스기야가 왕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히스기야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 했습니다. “히스기야는 그의 조상 다윗처럼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옳은 일을 했습니다.” (역대하 29:2) 그는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일을 했고, 하나님께 복종했습니다. 하나님의 가르침과 명령을 지켰고,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위해 일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하는 일들을 축복했습니다. 그가 왕으로 있을 때에 앗시리아가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지만, 그 때도 히스기야는 현명하게 잘 대처했습니다. 말년에, 히스기야는 죽을 병을 앓게 됩니다. 그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이사야를 통하여 15년을 더 살게 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그 약속을 믿지 못하고 해시계를 15도 뒤로 물려 주면 믿겠다고 합니다 (열왕기하 20:10).
이 일이 근처에 있는 나라들에게 소문이 났는지 바빌로니아에서 사신들이 와서 이 일에 대하여 묻습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히스기야가 마음 속에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를 모두 알고 싶어하셨습니다.” (역대하 32:31) “God withdrew from Hezekiah in order to test him and to see what was really in his heart.”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마음 속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싶어서 히스기야를 그냥 내버려 두셨습니다. 바빌로니아의 사신들이 자기를 찾아 온 것에 우쭐한 히스기야는 바빌로니아 사신들에게 나라의 보물 창고를 열어서 모두 보여 줍니다. 그리고, 결국 이 일이 바빌로니아가 유다를 탐내는 계기가 되었고, 유다는 바빌로니아에게 멸망합니다.
예언자 이사야가 살던 시대적인 배경이 이렇습니다. 그가 예언자로 있을 때 비교적 선한 왕도 있었고, 악한 왕도 있었습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순교했던 때는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가 왕으로 있을 때 였습니다. 므낫세는 과거 어느 왕보다도 악한 왕이었습니다.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므낫세는 이스라엘을 잘못된 길로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멸망시키신 다른 나라들보다 더 악한 일을 하게 했습니다.” (열왕기하 21:9, 역대하 33:2)
이사야가 예언자로 있을 동안에 국제 정세는 요동을 쳤습니다. 앗시리아는 여전히 강국으로서의 면모를 가지고 있었고, 신흥 제국 바빌로니아는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습니다. 작은 나라였던 유다는 이런 국제 정세를 알지 못하고, 우상 숭배에 빠져 있었습니다.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의 위기 속에 있었지만, 이스라엘과 유다는 민족의 불행이 자기들 눈 앞에 다가 오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결국 동족 이스라엘이 722 BC에 앗시리아에게 멸망하고, 유다마저 586 BC에 바빌로니아에게 멸망하고 맙니다.
이 때에 하나님의 예언자 이사야는 메시아 시대에 대한 희망을 선포합니다. 나라가 멸망하는 고난과 절망 속에서도 이 희망을 붙들고 살아 남도록 메시야 시대에 대한 희망을 선포합니다. 메시아 시대가 되면, 지금까지 어둠 속에 갇혀 살던 사람들이 큰 빛을 보게 되고, 그늘진 땅에 살던 사람들에게 빛이 비췰 것이라고 합니다 (이사야 9:2). 여러분, 이 사실을 아시나요? 이 이사야의 예언이 예수님의 사역과 연결이 된다는 사실을요. 예수님은 갈릴리 나사렛 출신으로, 갈릴리에 있는 가버나움을 사역의 본부로 정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고, 병든 사람들을 낫게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마태는 예수님의 사역을 목격하면서 그의 복음서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역의 갈릴리 호숫가에 있는 가버나움으로 옮기시고, 거기서 사셨습니다. 이렇게 하여, 이곳 어둠에 사는 백성들이 큰 빛을 보았고, 죽음의 그늘과 같은 땅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취었다는 예언자 이사야의 말이 이루어졌습니다.” (마태복음 4:13-16)
그리고, 메시아가 통치하는 시대에는 더 이상 전쟁이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전쟁이 없는 나라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샬롬 (평화)를 누리게 된다고 합니다. 성경 말씀을 보세요. “사람들은 무거운 멍에를 벗게 되고, 강대한 민족이 약한 민족들을 학대하는 일도 없게 되고, 군인들이 신고 다니던 군화와 피로 얼룩진 군복은 모두 땔감이 되어 불에 사라질 것이다.” (이사야 9:4-5) 우리 민족도 전쟁을 겪었습니다만, 전쟁처럼 야만적인 일이 없습니다. 우리는 다른 민족과 전쟁을 한 것도 아니었고 같은 동족끼리 총을 쏘는 야만적인 전쟁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문화와 문명이 발달한 시대에도 여전히 사람들은 전쟁의 위협을 느끼면서 살고 있습니다.
이사야가 선포한 메시아 시대에 대한 꿈은 단순히 유대 민족들의 꿈이 아니라, 지금까지 인류가 꿈꾸어 왔던 것입니다. 이 꿈을 실현하기 위하여 지금까지 수많은 지도자들이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이 꿈을 실현하기 위한 국가 운영 시스템이 등장했습니다. 공산 주의가 등장하고, 자본주의가 등장했습니다. 전제주의 (despotism, 專制主義)가 등장하고, 민주주의 가 등장했습니다. 인류는 지금도 어떻게 해야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지 실험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제 한가지 남은 궁금증은 과연 이사야가 말하는 메시아가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날 것입니다. 그 아기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의 어깨 위에 왕권이 주어질 것이다. 그는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원히 살아 계신 아버지, 평화의 왕이라고 불릴 것입니다. 그의 왕권은 점점 커지겠고, 평화가 그의 나라에서 영원히 이어질 것입니다. 그는 정의와 공평으로, 이제부터 영원토록 그 나라를 견고하게 세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이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주께서 자기 백성을 뜨겁게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9:6-7) 또 이사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 이름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인 임마누엘이라고 부를 것입니다.” (이사야 7:14)
우리의 눈은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날 것입니다 (For a child is born to us, a son is given to us)” 이 한 말씀에 집중해야 합니다. ‘한 아기 (a child)’라는 말과 메시아라는 말은 잘 연결이 안 됩니다. ‘힘 센 용사(warrior, 勇士)라면 모를까 ‘한 아기’가 어떻게 메시아 시대를 열 수 있겠습니까? ‘한 아기’가 어떻게 어둠 의 그늘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한 아기’가 어떻게 하나님의 샬롬을 가져 올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궁금증은 풀리지 않습니다.
이사야는 메시야 시대를 예언하고 자기 생을 마칩니다. 므낫세 왕 때 체포되어 순교합니다. 그리고, 700년이 지납니다. 그동안 유다 나라는 멸망하고, 바빌로니아에 70년 간 포로로 잡혀갔다가 극적으로 조국으로 돌아 옵니다. 무너진 나라를 다시 세우기 위한 노력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다 민족은 다시 400년이라는 긴 암흑의 시간을 경험합니다. 신학적으로는 이 때를 ‘신구약 중간시대 (the inter-testamental period)’라고 합니다. 이 시대를 암흑의 시대라고 하는 이유는, 이 기간 동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소통하지 않으시고 침묵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두려워 마라. 보아라. 모든 백성을 위한 큰 기쁨의 소식을 가지고 왔다. 오늘 다윗의 마을에 너희를 위하여 구세주께서 태어나셨다. 그는 곧 그리스도 (메시아) 주님이시다.” (누가복음 2:11)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메시아 시대는 예수님께서 탄생하심으로 열리게 되었습니다. 무려 700년 동안 꿈꾸어 왔던 선지자 이사야의 꿈이 실현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그가 꾸었던 꿈은 단순히 유대인들을 위한 꿈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온 인류를 위한 꿈이 되었습니다.
이제 오늘 저의 설교의 결론입니다. 메시야 시대를 받치는 두 기둥이 있습니다. ‘fairness (공평)’ 와 ‘justice (정의)’입니다. 메시아가 오시면 정의와 공평으로 그 나라를 견고하게 세울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사야 9:7). 이 말씀 속에 한 가지 확실한 메시지가 들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unfairness (불공평)’와 ‘injustice (불의)’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메시아, 그리스도의 통치하심을 인정하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에게 질문하겠습니다. 여러분의 삶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이런 말을 들어 보셨나요? “Service, not Success!”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란 뜻입니다. Elisabeth J. Shepping (서서평, 1880-1934)의 좌우명입니다. 서서평은 독일에서 이민 온 미국의 간호 선교사로, 흰 저고리와 검정 치마를 입고, 흰 고무신을 신고, 가장 한국인처럼 살았던 선교사였습니다. 그는 조선의 여성들을 계몽하는 일에 일생을 바쳤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라는 말이 주는 감동에 가슴이 떨리지 않습니까? 서서평의 인생 좌우명은 사실은 예수님의 말씀에서 힌트를 얻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의 목적이 섬김이었습니다 (마가복음 10:45) 여러분이 세상에 나가서 ‘공평’과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의 크리스천들의 섬김의 방식이 되어야 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11/20/2016 | 추수감사절 메시지
아삽의 감사 Asaph’s Thanksgiving
시편 50:22-23
시편 50편은 아삽이 쓴 것입니다. 아삽은 다윗과 동시대 사람입니다. 다윗이 기원전 약 1,000년 경 사람이니까 아삽도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입니다. 아삽은 다윗이 아꼈던 세 사람의 음악인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자신이 뛰어난 음악가였던 다윗은 레위 지파 사람들에게 노래 잘 하는 사람과 악기를 잘 연주하는 사람들을 추천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 때 추천 받은 세 사람이 헤만 (Heman)과 아삽 (Asaph)과 에단 (Ethan)입니다 (역대상 15:16-17). 이 사람들은 비파 (lyres)와 수금 (harp)과 제금 (cymbals)을 연주했던 연주자들이었습니다. 이 중 아삽은 악장 (the chief musician)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이들은 아삽이 연주하는 제금에 맞춰서 비파와 수금을 연주하면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역대상 16:5).
시간은 흘러 유다 왕 히스기야 시대로 내려 갑니다. 히스기야는 유다의 역사 중에 몇 명 안 되는 하나님께 인정 받는 왕이었습니다. 25살에 왕 위에 오른 히스기야는 다윗을 자기의 모델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제일 먼저 형식화된 제사 (예배) 의식을 개혁했습니다. 그리고 제사 의식에 음악을 도입했습니다. 흥미 있는 것은 히스기야가 성가대의 찬양이 끝난 후에 레위 사람들로 하여금 다윗과 아삽의 시편을 낭독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역대하 29:30).
아삽은 단순한 음악인이 아니라 뛰어난 영적 통찰력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이런 아삽을 가까이 곁에 두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아삽이 쓴 시편들은 그저 그렇고 그런 시편들이 아니라 히스기야가 예배 의식을 개혁 하면서 아삽의 시편에서 영감 (靈感)을 얻을 정도로 뛰어난 것들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히스기야가 아삽을 가리켜 ‘선견자 아삽 (Asaph the seer)’이라고 한 것으로 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역대하 29:30)
시편 50편을 읽어 보면 곳곳에 참된 제사 (예배)는 어떤 것인지 잘 나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참된 제사 (예배)는 제물 중심의 제사가 아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아삽의 입을 통하여 “나는 너희들이 드리는 제물을 탓하지 않는다(8절)”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 무슨 제물을 드리든지 그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 모든 것들이 원래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삽은 제물 중심의 믿음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하나님을 잊어버린 사람들 (those who forget God, 22절)'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관계 보다는 좋은 제물, 값비싼 제물만 드리면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다 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정말 그렇다면, 오늘 우리도 ‘하나님을 잊어버린 사람’ 중의 한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예배에 집중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사역 중심의 믿음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무슨 일을 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가대원들이나 오케스트라 대원들은 참 조심해야 합니다. 찬양을 하고, 연주를 함으로써 나의 책임을 다 했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학교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습니다만, 제가 BU 박사과정에 있을 때 외국어 시험이 있었습니다. 저는 신약성서 해석학을 전공했습니다. 보통 박사과정에 있는 사람들에게 외국어를 두 개를 요구 합니다. 저는 영어와 독일어를 선택했습니다. 다행히 영어를 외국어로 간주해 주었습니다. 물론 영어 시험을 봤습니다. 한국어 텍스트를 주고 영어로 번역하는 시험이었습니다. 저는 신약학을 전공했으니까 헬라어 (Greek)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헬라어를 선택할 수 없습니다. 왜냐 하면, 신약학을 전공하는 사람에게 헬라어는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외국어로 인정해 주지 않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구약학을 전공하는 사람에게 히브리어는 외국어로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성가대에 성악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케스트라에는 거의 악기를 전공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잘 할 수 있는 것은 노래와 연주입니다. 이것을 하면서 내가 충분히 봉사하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당연히 내가 해야 할 일입니다. 나는 성가대에서 봉사하니까, 나는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하니까 이만하면 됐다는 생각이 잘못하면 사역 중심의 생각이 되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는 주일 학교 교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사역을 보고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heart)’을 기뻐하십니다. 사무엘상 16:7에 이런 말씀이 나오잖아요? “내가 보는 것은 사람이 보는 것과 같지 않다. 사람은 겉모양을 보지만, 나 여호와는 마음을 본다 (For the Lord does not see as man sees; for man looks at the outward appear-ance, but the LORD looks at the heart).” ‘마음을 보신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겉모습이나 형식, 우리가 하는 사역보다 관계를 중요하게 보신다는 뜻입니다.
아삽이 살고 있던 시대에는 모든 사람들이 제물 중심의 제사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제물 중심의 제사가 가지고 있는 위험성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오직 한 사람, 아삽은 제물 중심의 제사는 반드시 형식화 되고 타락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형식화된 예배를 통해서는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만들 수 없습니다. 이런 아삽을 다윗은 그의 곁에 '선견자 (the seer)'로 두고 있었고, 다윗을 모델로 삼아 제사 (예배) 의식을 개혁하려고 했던 히스기야 왕은 아삽이 쓴 시편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면, 참된 제사 (예배)는 어떤 제사입니까? 아삽은 감사로 드리는 제사가 참된 제사라고 합니다 (14, 22절). 제물이 중심이 아니라,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제사를 드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예배를 예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 (worship in spirit and truth)’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역시 예배자의 마음을 중요하게 보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예배자의 마음이 신령과 진정으로 준비되어야 그 예배가 영이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4:23-24). 예수님의 이 말씀이 우리 가슴에 와 닿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이런 참된 예배자들을 찾고 계신다 (The Father now seeks the true wor-shipers).” 어쩌면 이 말씀을 하신 예수님께서 아삽의 시를 생각하고 계시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탁월한 정신분석학자인 에리히 프롬 (Erich Fromm, 1900-1980)을 아시지요? 그가 대중들이 읽을 수 있는 많은 책들을 썼습니다. 제가 보기엔 그 중에서 1976년에 나온 "To Have or To Be (존재냐 소유냐)?" 이 책이 가장 중요한 책이 아닌가 합니다. 프롬은 이 책에서 삶의 두 가지 양식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하나는 ‘존재양식 (Being Mode)’이고, 다른 하나는 ‘소유양식 (Having Mode)’이라고 했습니다. ‘소유양식의 삶’은 무엇을 소유함으로써 기쁨과 행복과 보람을 느끼는 삶의 방식입니다. 반대로, ‘존재양식의 삶’은 무엇을 소유해서가 아니라 나의 것을 나누어 주고 베풀면서 삶의 의미를 느끼는 삶의 방식입니다. 프롬은 이렇게 말합니다. “존재양식의 삶은 자기를 새롭게 하는것, 자기를 성장시키고 흐르게 하며 사랑하는 것, 관심을 가지고 귀 기울이며 베푸는 것, 모든 관계를 살아 있는 것으로 파악하는 삶의 양식을 의미한다.”
지금은 크리스천의 삶에 대하여 생각을 많이 해야 하는 때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유와 목적에 대하여 진지하게 성찰해야 하는 때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대한 크리스천의 책임에 대하여 고민해야 하는 때입니다. 소유양식의 삶을 사는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내가 무엇을 얼마나 많이 소유하느냐 하는 것으로 성공과 실패를 말하고, 행복과 불행을 말하는 사람에게는 감사가 없습니다. 자기가 이미 가진 것보다 가지지 못한 것들에 대한 불평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아삽의 말을 빌린다면, 소유양식의 삶을 사는 사람은 제물 중심의 제사를 드리는 사람과 같습니다. 제물 중심의 제사가 결국은 형식화 되듯이, 소유양식의 삶을 사는 사람은 하나님과도 형식적인 관계에 머물고 맙니다.
그러나, 존재양식의 삶을 사는 사람은 소유가 아니라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프롬은 이 관계를 ‘aliveness and authentic relatedness to the world (세계와의 살아 있고 진실한 관계성)’이라고 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없고,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고, 올리브 나무에 거둘 것이 없고, 밭에 거둘 곡식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 때문에 기뻐하겠습니다.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즐거워하겠습니다.” (하박국 3:17-18) 하박국 선지자의 글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이유는 그의 글이 존재양식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분명하게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모두 잃는다고 해도, 마지막 남는 것 한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를 부인할 수 없듯이, 나는 구원의 하나님 때문에 기뻐합니다.” 이것이 존재양식의 삶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아삽에게 고마워해야 할 것은, 그를 통해서 존재양식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23절)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But giving thanks is a sacrifice that truly honors me. If you keep to my path, I will reveal to you the salvation of God." 직역하면, "감사를 드리는 것이 진정으로 나를 높이는 제물이다. 너희가 나의 길을 떠나지 않고 지킨다면 하나님의 구원을 보여 줄 것이다"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나의 길 (my way)’은 감사로 하나님게 나가는 것입니다. 감사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상황에 구애받지 않고 범사에 감사하는 삶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하나님의 길'입니다. 개역성경에는 이 '길'이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라고 나와 있습니다. 감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드려야 하는 올바른 행위입니다. 감사는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나의 삶 속에서 행하신 일들을 모두 인정하고, 감사하며,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감사야말로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최고의 제물입니다. 꼭 형식이 갖춰지지 않았어도, 열악한 환경 속에서 드리는 예배라고 할지라도, 예배자들의 마음 속에 감사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것은 최고의 예배입니다.
우리가 사는 보스턴은 감사의 본고장입니다. 우리가 사는 보스턴에서 감사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392년 전, 1620년에 102명의 청교도들이 May Flower를 타고 도착했던 플리머쓰 (Plym-outh)가 불과 보스턴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습니다. 12월에 도착한 이들은 혹독한 겨울을 보내고 가까스로 살아 남았습니다. 이렇게 살아 남은 사람들이 그 이듬 해에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드렸던 것이 감사절의 유래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남긴 말 중에 "Think and Thank God (생각하고 하나님께 감사하자)"이란 말이 있습니다. 사전에 보면 thank라는 말은 “akin to think (think와 유사한 어족)”라고 나와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감사의 이유들입니다. 기쁘고 즐거웠던 일들도, 힘들었던 시간들도, 절망의 순간들도, 생각해 보면 모두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언젠가 이런 기도문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어느 환자의 기도 (The Creed for the Disabled)”라고도 알려져 있고, “어느 무명 용사의 기도”라고도 알려져 있습니다. 제가 그 기도의 원본을 찾았습니다. “A Soldier's Prayer (written by an unknown confederate soldier, US civil war)”
I asked God for strength, that I might achieve (출세를 위해서 힘을 구했지만),
I was made weak, that I might learn humbly to obey (겸손하게 순종을 배우라고 나를 약하게 하셨습니다).
I asked for health, that I might do greater things (큰 일을 하기 위해 건강을 구했지만),
I was given infirmity, that I might do better things (하나님은 더 좋은 일을 하라고 나에게 병을 주셨습니다).
I asked for riches, that I might be happy (행복하게 살려고 돈을 구했지만),
I was given poverty, that I might be wise (지혜로운 사람이 되라고 가난을 주셨습니다).
I asked for power, that I might have the praise of men (사람들의 칭찬을 받기 위해 권력을 원했지만),
I was given weakness, that I might feel the need of God (하나님만 필요로 하라고 나에게 약함을 주셨습니다).
I asked for all things, that I might enjoy life (나의 삶을 즐기기 위해 모든 것을 원했지만),
I was given life, that I might enjoy all things (모든 것을 즐길 수 있는 삶을 주셨습니다).
I got nothing that I asked for (내가 구한 것은 하나도 받지 못했지만)-
but everything that I had hoped for (내가 소망해야 했던 모든 것을 받았고),
Almost despite myself, my unspoken prayers were answered (내가 원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내가 말하지 않은 기도들이 응답되었습니다).
I am among all men most richly blessed (나는 그 누구보다도 축복 받은 사람입니다).
11/13/2016 | 미국 대통령 선거를 지켜 보면서
다시 읽는 나사로 이야기 Reinterpreting the Story of Lazarus
누가복음 16:19-31
지난 주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엄청난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무도 예상하지 않았던 일이 벌어졌습니다. 도날드 트럼프가 선거인단 306표를 얻어 232표를 얻은 힐라리 클린턴을 크게 이기고, 미국의 4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습니다. 선거 유세 초반에는 프럼프가 돌풍을 일으키더니, 중반과 종반으로 접어들수록 각종 악재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입에 담기도 어려운 성추문들이 여과 없이 미디어에 공개가 되면서 지지자들이 모두 돌아섰다는 분석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초반부터 트럼프가 우세하다는 기류가 감지되었습니다. 개표 시작부터 트럼프가 우세하다는 관측이 나왔고, 이러다가는 트럼프가 당선되는 것이 아니냐 하는 예측들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마지막 플로리다가 트럼프로 넘어가면서 선거판은 급격하게 트럼프 쪽으로 기울었고, 마지막 격전지였던 ‘Rust Belt (미국 동북부의 쇠락한 공업지역)’에서 트럼프가 완승하면서 승부는 끝이났습니다.
사람들은 “그래도 힐러리 클린턴이 이기겠지! 설마 지기야 하겠어?” 모두 이런 생각들을 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모든 미디어들이 트럼프를 외면했습니다. 힐러리 쪽에는 그 남편과 현직 대통령인 오바마 대통령과 부인 미쉘 등, 민주당이 합심해서 클린턴 지지에 발벗고 나섰습니다. 아마 역대 대통령 선거 중에 이렇게 확실한 지지를 받았던 후보가 없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막강한 자금을 동원해서 TV 광고에 돈을 쏟아 부었습니다. 반면에 트럼프는 선거 자금도 부족했습니다. 가장 돈을 적게 쓴 유세를 펼쳤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공화당 후보로 나왔으면서도 공화당의 지지를 전혀 얻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선거 유세단을 꾸려서 가족을 데리고 다니면서 유세를 펼쳤습니다.
하지만, 선거 결과는 누구도 예상하지 않았던 트럼프의 승리로 끝이났습니다. 선거가 끝나고 이런 말이 나왔습니다. 트럼프가 전 세계 사람들에게 “불가능은 없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He proved that impossible was nothing)!” 앞으로는 불가능을 말하는 사람들에게는 두고두고 트럼프가 좋은 예 (example)가 되게 생겼습니다.
선거가 끝나고 선거에 대한 분석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번 선거의 승패를 결정 지은 곳이 ‘Rust Belt’였는데, 이 지역에 사는 저소득 층의 백인들의 분노가 폭발해서 트럼프에게 투표했다는 것입니다. ‘Rust Belt’는 뉴욕부터 시작해서 서쪽으로 펜실베니아, 오하이오, 인디애나 일리노이, 미시간, 위스콘신으로 이어지는 공업지대입니다. ‘rust’란 말이 쇠에 스는 녹이라는 뜻이잖아요? 문자적인 의미는 ‘녹슨 지대’라는 뜻입니다. 예전에 경기가 좋았을 때는 인구가 많았던 지역입니다. 그러나, 경기가 침체되면서 사람들이 떠나기 시작하고, 공장들은 해외나 타 지역으로 옮겨가면서 이 지역이 낙후되기 시작했습니다. 공장들은 문을 닫고 기계들은 녹이 슬었습니다. 이 지역은 민주당을 지지하는 지역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번에 뉴욕과 일리노이를 제외하고는 모두 트럼프에게 넘어 간 것입니다. 사실 트럼프와 ‘Reust Belt’는 서로 매치가 안 됩니다. 부동산 재벌과 ‘Rust Belt’가 어떻게 연관이 됩니까? 바로 그 점이 힐라리 클린턴 선거 캠프가 놓쳤던 점입니다. 힐라리가 이 지역을 자기 표라고 오판하는 동안 트럼프는 매일 이 지역을 돌면서 백인들의 분노를 자극했습니다.
이번 선거를 통해서 미국이 안고 있는 문제들이 그대로 드러났다는 분석들이 많습니다. 문제점 중의 하나가 많이 배운 사람과 대학을 못 간 사람들 사이의 갈등입니다. 예전엔 고등학교만 나와도 사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미국도 고학력 사회가 되어 버렸습니다. 고등학교만 나와서는 취직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월급도 많지 않습니다. 아이들을 대학에 보내야 하는데, 대학 학비가 얼마나 비쌉니까? 대부분의 미국 가정들이 비싼 학비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빈부의 갈등, 인종 간의 갈등입니다. 자기들은 이렇게 열심히 일을 해도 가난을 벗어날 수 없는데, 갓 이민 온 사람들은 금방 좋은 직장을 얻고, 경제적으로 자기들보다 부유하게 사는 것을 보고 백인들의 분노가 폭발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안 트럼프가 “내가 대통령이 되면 일자리를 만들어서 여러분에게 먼저 주겠다. 이민자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규제 하겠다, 멕시코 국경에 담벼락을 쌓겠다, 중동 사람들을 추방 시켜 버리겠다” 등, 어떻게 보면 말도 안 되는 그의 공약들이 가난한, 대학을 가지 못한, 백인들에게 먹혀 들었다는 분석입니다.
여러분,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읽은 누가복음 말씀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좋은 옷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호화스러운 파티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 문 앞에 나사로라는 거지가 앉아 있었습니다. 그의 몸에는 부스럼투성이었었습니다. 나사로는 부자의 쓰레기통을 뒤져서 주린 배를 채웠습니다.
성경은 2,000년 전에 기록된 책입니다. 성경에 이렇게 부자로 호위호식하는 사람과 그 집 대문 앞에서 구걸을 하면서 사는 가난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와 있습니다. 신약성경의 역사만 2,000이지, 구약까지 하면 적어도 3,500년에서 4,0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구약성경에도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얼마나 많이 나옵니까? 정치하는 사람들과 경제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격차를 줄여 볼까 하고 연구합니다. 정치인들은 내가 대통령이 되면 이렇게 정책을 바꿔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돈을 벌게 해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경제학자들 역시 그들 나름대로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연구하고 정책을 내 놓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19세기 초에 공산주의라는 경제 체체가 등장했습니다. 물건을 공동으로 생산해서 다 같이 나눈다는 경제 개념입니다. 그래서 공산주의에서는 노동자가 대우를 받습니다. 이런 정치 제도를 내 놓았지만, 결국은 공산주의가 허구였다는 사실을 우리 시대에, 우리 눈으로 목격했습니다. 공산주의 국가들이 모두 몰락하고 말았습니다.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 볼까요? 시간이 흘러서 먼저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나사로는 죽어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습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 22절 말씀이 ‘Finally, the poor man died and was carried by the angels into Abraham's bosom’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bosom’이라는 말은 ‘가슴’이라는 뜻입니다. 나사로는 죽어서 ‘아브라함의 가슴’에 안겼습니다. 세상에서 그렇게 고생을 하더니 죽어서는 ‘아브라함의 가슴’에 안겼습니다. 우리는 이런 말씀을 읽으면서도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유대인들과 문화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동경하는 것은 죽어서 ‘아브라함의 가슴’에 안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지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가슴’에 안겼습니다.
몇 년 후에 부자도 죽었습니다. 부자는 지옥에 떨어져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부자가 눈을 들어 보았더니, 자기 집 대문 앞에 앉아 있던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가슴’에 안겨 있는 것입니다. 부자가 소리를 지릅니다. “아브라함이여, 제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 혀를 적실 수 있도록 나사로의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게 보내 주십시오.” (24절) 아브라함이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살아 있을 때에 좋은 것을 마음껏 누렸지만, 나사로는 온갖 나쁜 일을 겪었다. 이제 나사로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통을 받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 (25절)
여러분들은 이 성경 말씀을 어떻게 읽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공평하심 (God’s fairness)’을 생각을 했습니다. 한번 반대로 생각해 보세요. 나사로가 죽어서 지옥에 가고, 부자는 죽어서 ‘아브라함의 가슴’에 안겼다고 생각해 보세요. 이거야말로 말도 안되는 불공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도 불공평 했는데, 죽어서도 그런 불공평이 이어진다면 이건 말도 안되는 일이잖아요?
트럼프가 일자리를 만들어 준다고요? 트럼프가 가난한 사람들을 잘 살게 해 준다고요? 말도 안 됩니다. 당장에 이민자들 못 들어오게 하고, 불법체류자들 추방하면 그 빈자리가 생길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해서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수많은 연구가 있었고, 그 때마다 정책들이 세워졌지만,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보호무역 정책을 강화해서 미국 경제를 일으키 겠다고요? 일시적으로 반짝 효과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것도 근본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성경에도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나사로도 죽고 부자도 죽습니다. 여기까지는 정말 세상이 ‘unfair’합니다. 그런데, 나사로는 죽어서 ‘아브라함의 가슴’에 안기고, 부자는 지옥에 가서 고통을 당합니다. 이 때, 세상이 ‘fair’해 집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역사를 심판하시니까 그때가서 세상이 공평해집니다. 세상에서 온갖 좋은 것을 누리던 부자는 지옥에 가고, 세상에서 고생만 하던 나사로가 위로를 받습니다.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은 공평하신 하나님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보좌에 앉으신 분이 흰옷을 입은 사람들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더 이상 배고프거나 목마르지 않을 것입니다. 뜨거운 햇볕도 그들에게 해를 입히거나 상하게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보좌 가운데 계시는 어린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셔서 생명수가 흐르는 샘으로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실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7:13-17) 이 ‘흰옷 입은 사람들’은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다가 온갖 고난을 당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의 눈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신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에 세상은 공평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개입하시지 않으면 세상은 언제까지 불공평한 채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부탁합니다. “나사로를 제 식구들에게 보내서 제가 있는 지옥에 오지 않도록 전해 주십시오. 그러면 그들이 들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다. 모세와 예언자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죽었다가 살아온 사람이 말을 해도 듣지 않을 것이다.” (31절) ‘모세와 예언자들’이라는 말은 성경이라는 말입니다. 그 당시 성경이 ‘모세의 율법서와 예언서와 시편’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31절 말씀은 이런 뜻입니다. “그들에게는 성경이 있지 않으냐? 성경을 믿으면 되지 무슨 증거가 더 필요하겠느냐?”
저에게는 이 말씀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많은 문제점들이 있습니다. 소득 불균형의 문제,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들과 받지 못한 사람들 간의 갈등, 인종 간의 갈등, 종교 간의 갈등 등의 문제들은 인류가 가지고 있는 난제(難題)들입니다. 좋은 정책들을 만들어서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한계가 있습니다. 인간의 노력에 한계가 있다는 말입니다. 기성 정치인들로부터 실망한 사람들이 이번 선거에서 트럼프가 미국을 변화 시킬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그를 지지했습니다. 당장 미국에 무슨 변화가 어떻게 시작될지 알 수 없지만, 우리는 크게 기대하지 않습니다.
지난 하바드 졸업식에 초청 연사로 선 사람은 스필버그 (Steven Spielberg, 1946-)였습니다. 그의 연설문 중 이런 구절이 있었습니다. “사랑, 지원, 용기, 직관. 이 모든 것들은 영웅인 여러분의 화살 통에 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영웅에게는 한 가지가 더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무찌를 악당이 필요하죠. 여러분은 운이 좋습니다. 이 세계엔 괴물들이 가득합니다. 인종차별, 동성애 혐오, 민족간 의 증오, 계급간의 증오, 정치적 증오, 종교적 증오들이 있지요 (Love, support, courage, intuition. All of these things are in your hero’s quiver, but still, a hero needs one more thing: A hero needs a villain to vanquish. And you’re all in luck. This world is full of monsters. And there’s racism, homophobia, ethnic hatred, class hatred, there’s political hatred, and there’s religious hatred)." 참 대단하지 않습니까? 스필버그가 괜히 스필버그가 아니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스필버그의 말에는 뭔가 그만이 말할 수 있는 특별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시대를 책임 있는 존재로 살 수 있겠습니까? 저에게는 “너희에게는 성경이 있지 않으냐?” 이 말씀이 특별한 말씀으로 들립니다. 우리의 화살통에는 성경의 가치들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씩 하나씩 쉬운 것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내 삶의 현장에서 실천하는 일을 시작해야 합니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을 실천해 나가가야 합니다. 나의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일을 시작해야 합니다. 나의 욕심을 내려 놓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섬기는 삶을 시작해야 합니다.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실천할 것인지 서로 생각을 나누고 공유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이 역사에 개입하시는 그 날까지, 우리는 끝이 없는 이 싸움을 계속해 나가야 합니다.
11/6/2016 | 조국의 위기적인 상황을 보면서
너희는 나의 고난의 잔을 마실 수 있느냐? Are You Able to Drink My Cup of Suffering?
마가복음 10:35-45
지난 주일 설교에서 국정을 농단(壟斷)하는 사람들 중에 크리스천들은 없을까 하는 부끄럽고 불안한 마음이 든다고 했는데, 최순실, 최순득 자매가 2012-2013,년 2년 동안 한국의 어느 교회의 서리 집사였다는 언론의 보도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름만 올려 놓은 집사였지, 교회 일에 적극적로 참여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그 교회는 작은 개척교회였는데, 그 교회 담임 목사의 말에 의하면, 그 때는 한 사람이 귀했기 때문에 서리 집사 직책을 주면 좀 더 열심히 나오지 않을까 해서 서리 집사로 임명했다고 합니다. 두 자매는 평범한 중년 여성으로 보여 그 자신도 이 두 사람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두 자매는 예배 시간에 늦는 경우가 많았고, 예배가 끝나기 전에 자리를 뜨는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교인들 간에 알고 지내는 사람들도 없었고, 그저 안내위원들과 인사를 하는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 교회 담임 목사의 말은 “그 두 사람이 우리 교회를 찾아오고 설교를 들어준 것은 고마운데, 이런 일이 있고 보니 미리 알았더라면 신앙적으로 지도를 잘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고 했습니다.
저도 한국에서 개척교회를 했었기 때문에 그 교회 담임 목사에게 돌을 던질 생각은 없습니다. 그 목사의 말처럼 개척교회는 한 사람이 귀합니다. 그래서 말도 안 되는 유혹을 받게 됩니다. 저는 서울의 신월동이라는 가난한 동네에서 처음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결혼하자마자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정말 그 목사의 말처럼 한 사람이 새로 나오면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이런 개척교회의 목회자들의 마음을 잘 알고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제가 목회하던 동네는 버스 종점이었는데, 한번은 한 사람이 찾아와서 자기는 버스 운전 기사라고 했습니다. 충청도 어디에서 살다가 아이들 교육 때문에 서울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나가던 교회 목사로부터 받아 온 추천서를 보여줬습니다. 자기가 이곳에 와 보니 크리스천 안내양들 20여명이 나갈 교회를 결정하지 못하고, 나름대로 십일조 헌금을 모아 놓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다음 주에는 이 안내양들을 데리고 저의 교회로 나오겠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저는 순간적으로 “야, 이런 날이 오는구나. 안내양들 20명이 한꺼번에 교회에 나오면 성가대로 만들 수 있고, 주일학교에서 가르칠 수도 있겠구나. 이 안내양들이 십일조 헌금도 모아가지고 있다는데, 교회 재정도 잘 돌아가겠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의 어리석었던 과거 이야기를 다 드릴 수는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 사람은 개척교회 목회자들의 약점을 알고 교회를 돌아다니면서 돈을 뜯는 전문 사기꾼이었습니다. 저도 많은 돈은 아니지만, 돈을 좀 뜯겼습니다.
저는 최순실 씨가 교회의 집사였다는 언론의 보도를 보면서 크리스천은 과연 누구인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에 대한 크리스천의 책임은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에는 “너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고 자기 욕심을 채우려는 생각을 하지 말라 (로마서 13:12, 14)”고 했는데, “왜 우리는 성경 말씀대로, 왜 우리는 성경에서 배운대로 살지 않는가?” 하는 질문을 이 시점에서 다시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국에서 아파트 건축 붐이 일어난 것은 1970년대부터 입니다. 서울이 강남으로 확장되면서 논밭이던 곳이 속속 아파트 단지로 조성되었습니다. 재래식 집에 살던 사람들은 강남에 들어서는 고급 아파트들을 보면서 우리도 저런 집에서 잘 살 수 있다는 환상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서울로 인구가 집중되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그 때 교회 목사들을 유혹한 것이 소위 ‘번영신학 (Prosperity Gospel)’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교회에 나오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 번영신학의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성공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번영신학’을 가지고 설교하는 목사들의 메시지는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습니다. 그런 교회로 사람들이 몰렸습니다. 그래서 강남에 대형교회들이 우후죽순 격으로 생겨났습니다. 교회마다 목사들은 로버트 슐러 (Robert Schuller, 1926-2015) 목사의 ‘적극적인 사고 방식 (positive thingking)’을 흉내내기에 바빴습니다.
사람들에게 예수 믿고 교회에 나오면 성공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는 ‘번영신학’은 정통신학이 아닙니다. 정통신학에서 변질된 신학입니다. 성경의 내용과도 배치(排置)되고, 무엇보다도 번역신학을 가지고는 예수님의 말씀을 설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번영신학을 설교하는 설교자들의 설교를 들어보면 성경 이야기가 별로 없고, 모두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번영신학’이 그렇게 오랫동안 한국교회를 지배했던 것은 인간의 마음 속에 성공에 대한 야망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로버트 슐러의 설교나, 그런 설교를 흉내내는 설교들을 들어 보면 모두 인간의 마음에 들어 있는 성공에 대한 야망을 교묘하게 부추깁니다. 그 설교를 들을 때는 마치 나도 대기업의 회장이 된 것 같은 생각에 사로잡힙니다.
이제 이런 생각을 가지고 오늘 마가복음 본문 말씀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두 제자 야고보와 요한 두 사람이 예수님께 “주님, 저희들에게 소원이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 드리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두 사람에게 “그래? 너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고 묻습니다. 두 사람은 “주님이 다스리실 나라에서 우리 두 사람이 주님의 오른쪽과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 하고 주님께 부탁합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이 두 사람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그런 부탁을 한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마태복음 20:21).
여러분, 이 말씀을 잘 보십시오. 두 사람은 예수님을 3년 동안 따라다녔습니다. 따라다니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배웠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주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사역의 현장을 목격했습니다. 3년 동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價値)에 대하여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는 이 세상의 가치와 다르다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 백년을 믿어도 이런 가치관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모두 허사가 되고 맙니다. 교회는 꼬박꼬박 나오고, 성경을 배우고, 설교를 들으면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을 내려 놓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 없는 일이 되고 맙니다.
보세요.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이전 것들은 지나갔고, 보십시오, 새 것들이 와 있습니다 (Anyone who belongs to Christ has become a new person. The old life is gone; a new life has begun).” (고린도후서 5:17) ‘이전 것들’ ‘the old life’는 예수 믿기 전에 내가 가지고 있던 세상의 가치관을 말합니다. ‘새 것들’ ‘a new life’는 예수를 믿고 난 후에 나에게 생긴 새로운 가치관을 말합니다. 이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나는 ‘새로운 피조물 (a new person)’이 아닙니다. 좀 심하게 말한다면, 이 변화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고, 크리스천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 때는 이 모든 것이 내게 너무나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그 모든 것이 아무 쓸모 없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빌립보서 3:7) 누구의 말입니까? 바울의 말입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에 고백한 말입니다.
요한과 야고보 이 두 사람에게 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3년이나 따라다니면서 말씀을 배웠는데도 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살면서도 여전히 성공에 대한 야망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안타깝지만, 아직 이런 변화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너무 많습니다. 모두 ‘맛을 잃어버린 소금 (마태복음 5:13)’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맛을 잃어버린 소금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어서 밖에 버려져서 사람들이 밟고 다니는 수치를 당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두 제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너희가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구나.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실 수 있느냐? 그리고 내가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38절)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You don't know what you are asking! Are you able to drink from the bitter cup of suffering I am about to drink? Are you able to be baptized with the bap-tism of suffering I must be baptized with?"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주님의 오른쪽과 왼쪽에 앉게 해 달라는 말은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에 자기들을 앉게 해 달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은 이 두 사람이 그런 요청을 하면서도 어떻게 하면 그렇게 영광스러운 자리에 앉을 수 있는지 그 길을 제대로 모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들어 보세요. “내가 ‘고난의 쓴 잔’을 마시려고 하는데, 너희 두 사람은 나와 함께 이 잔을 마실 수 있겠느냐?” 예수님은 지금 두 제자에게 주님의 오른쪽과 왼쪽에 앉을 수 있는 영광을 얻을 수 있는 길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고난의 쓴 잔 (the bitter cup of suffering)’이 십자가를 말하는 것은 더 말씀드릴 필요가 없는 줄 압니다. 예수님은 ‘고난의 쓴 잔’을 마시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인 줄 알고 이 잔을 마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래서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빌립보서 2:9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예수님을 ‘최고로 높은 자리 (the highest place)’에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 되게 하셨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에게 주어진 ‘최고로 높은 자리’가 곧 하나님의 보좌 ‘오른쪽’이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8:34).
제가 기회 있는대로 본 회퍼 (Dietrich Bonhoeffer, 1906-1945)를 소개해 드렸습니다. 저는 신학교 시절에도 그의 대한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이번에 도서부에서 책을 구입하는데 책을 추천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본 회퍼의 책 3권을 추천했습니다. 요즘에 부쩍 본 회퍼에 대한 관심이 더 생깁니다. 그 이유는 본 회퍼가 이미 70년 전에 살았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를 책임 있게 살아야 하는 오늘의 크리스천의 삶에 대하여 많은 영감(靈感, inspiration)을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의 책을 다시 읽으면서 가슴이 철렁했던 구절이 있습니다. “When Christ calls a man, he bids him come and die (그리스도께서 한 사람을 부르실 때, 그는 그에게 와서 죽자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주님이 나를 부르시는 것은 나와 함께 죽자고, 나와 함께 십자가를 지자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가슴이 철렁 내려 앉지 않습니까? 그는 또 이런 말도 했습니다. “Being a Christian is less about cautiously avoiding sin than about courageously and actively doing God’s will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조심해서 죄를 피하는 것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는 용기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일에 대한 것을 말한다).”
우리 한국교회가 교회의 부흥에 목적을 두고 ‘번영신학’을 설교하면서 사람들의 성공에 대한 야망을 부추기는 대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책임 있는 크리스천의 삶에 대하여 설교하고, 십자가를 통한 영광의 삶을 설교했더라면 오늘의 한국교회가 이 지경이 되었을까요? 크리스천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름을 받은 이유와 목적을 알고, 각자가 삶의 현장에서 책임 있는 사람들로 살았더라면 오늘의 한국교회가 이렇게 되었을까요? 성경을 배운 사람들이 세상의 가치관을 내려 놓고, 성경이 보여 주는 가치들을 따라 살았더라면 오늘의 한국교회가 이렇게 되었을까요?
우리는 조국의 안타까운 현실을 보면서 우리 자신들을 돌아 봐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회개하지 않으면 제 2, 제 3 최순실이 계속 나올 것입니다. 크리스천의 이름을 가지고 국정을 농단하면서도 죄의식이 없는 사람들이 계속 나올 것입니다. 목사들은 정신 차려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제대로 알고 설교하고 있는지 자신을 통렬하게 비판해야 합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 ‘적극적인 사고 방식’이니, ‘삼박자 구원’이니 하면서 ‘번영신학’에 매달렸던 과거를 회개해야 합니다. 복음을 제대로 설교하지 않았던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다는 자기를 내려 놓는 것입니다. 자신의 욕망, 성공에 대한 야망, 권력에 대한 야망을 내려 놓는 것입니다. 이 말씀대로 살면 그 순간부터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 그 순간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보좌 오른쪽에 앉는 영광의 삶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읽어 보십시오. 우리가 이 세상에 나가서 크리스천으로서 어떻게, 어떤 식으로 살아야 하는지, 선명(鮮明)하게 나와 있습니다. “너희가 아는 것처럼 세상의 통치자들은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한다. 정치인들도 사람들에게 권력을 행사하려고 한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누구든지 너희 중에서 높아지려거든 종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너희 중에서 첫째가 되려거든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인자는 자기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왔다.” (42-45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