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1/2016 | 마가복음 강해설교 50

즐겁게 말씀을 듣는 사람들 Those Who Are Listening to Him with Great Delight

마가복음 12:35-40

예수님의 생애는 사생활 (the private life)과 공생애 (the public life)로 나눌 수 있습니다. 태어나서부터 서른 살이 될 때까지 예수님의 생애를 사생활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시절에 예수님께서 어떤 삶을 사셨는지 별로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서른 살 이후부터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까지 삼 년간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에 대해서는 네 복음서에 비교적 상세하게 잘 나와 있습니다.

신학자들은 마태복음 4:23, “Jesus went throughout Galilee, teaching in their synagogues, preaching the good news of the kingdom, and healing every disease and sickness among the people” 이 말씀을 근거로 해서 예수님의 사역을 가르치는 사역 (teaching ministry), 설교 (혹은 선포) 사역 (preaching ministry), 치유 사역 (healing ministry), 이 세 가지로 말합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알기 쉽게 잘 정리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말씀은 그 중에서도 예수님의 가르치는 사역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어떤 점에서 다른 사람들의 가르침과 달랐는지 단적으로 보여 주는 말씀이 오늘 읽은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사람들에게 이렇게 질문하셨습니다. “어째서 율법학자들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 (35절) 여러분,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마태복음 2장에 동방박사 이야기가 나옵니다. 동방의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탄생한 아기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동방에서 그 아기의 별을 보고 경배하러 왔다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의 시민들은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이 소문이 헤롯 왕에게 들어갔습니다. 헤롯은 모든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을 불러 모으고, 그리스도가 어디에서 태어나실 것인지 물었습니다. 그들은 “유대의 베들레헴이란 마을입니다. 예언자들의 기록에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마태복음 2:5)”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베들레헴은 다윗의 고향입니다. 미가 선지자 (미가 5:2), 이사야 선지자가 모두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 (이사야 11:1)으로 온다고 예언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유대인들의 메시아에 대한 희망이 가장 강렬했던 때였습니다. 율법학자들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메시아에 대하여 가르쳤습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모두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마가복음 10장에 여리고 (Jericho)에 살고 있던 바디매오 (Bartimaeus)라는 사람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사람은 “A blind beggar named Bartimaeus, the son of Timaeus (디매오의 아들 소경 거지 바디매오)”였습니다. 이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향하여 "Jesus, Son of David, have mercy on me!" 하고 소리 지르지요? 제가 말하고자 하는 포인트는 예수님 당시에 율법학자들과 같은 지도자들이나, 그들의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이나, 바디매오와 같은 사회 계층의 사람들이나 모두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어째서 율법학자들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문제를 질문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질문은 율법학자들의 가르침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습니다. “당신들 아무 생각 없이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가르치는데, 이런 성경 말씀을 읽어 보았습니까?”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시편 110:1 말씀을 한번 보시죠. “For David himself, speaking under the inspiration of the Holy Spirit, said, `The LORD said to my Lord, Sit in the place of honor at my right hand until I humble your enemies beneath your feet.' Since David himself called the Messiah `my Lord,' how can the Messiah be his son?" (다윗 자신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께서 나의 주님께 내가 너의 발 아래 너의 원수를 굴복 시킬 때까지 이리 와서 나의 오른편의 영광스러운 자리에 앉아라.’ 그러면 다윗 자신이 메시아를 가리켜 나의 주님이라고 불렀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그의 아들이 될 수 있겠습니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닙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베들레헴 다윗의 고향에서 요셉의 아들로 태어나셨는데, 요셉은 다윗의 자손이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도 당연히 다윗의 자손으로 태어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순전히 인간적인 관점 (a human point of view)에서 본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사도 바울이 분명하게 정리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 분은 인간의 족보로는 다윗의 자손으로 태어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써 능력 있는 하나님의 아들로 선언되셨습니다. 이분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로마서 1:3-4)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이 맞지 않습니다.

한번 정리를 해 볼까요? 예수님의 teaching은 전통이나 관습,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율법학자들은 율법을 연구하는 전문가들임에도 불구하고 시편 말씀을 제대로 읽지 못했고, 제대로 해석하지 못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말씀을 전체적으로 보시면서 하나님의 진리를 드러내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teaching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똑 같은 맥락에서, 예수님은 당시의 사람들이 얽매여 있던 안식일 법에 대해서도 새로운 해석을 하셨습니다. 이 새로운 해석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부분적으로 보지 않고 전체적으로 보는 데서 나온 것입니다. 당시의 율법학자들이 안식일에 일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율법 조항에 매여 있을 때에, 예수님은 비록 안식일이라도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일은 결코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어 보시죠.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나쁜 일을 하는 것이 옳은 것이냐?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마가복음 3:4)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Does the law permit good deeds on the Sab-bath, or is it a day for doing evil? Is this a day to save life or to destroy it (율법은 안식일에 선한 행위를 하도록 허용하고 있느냐? 아니면 악한 일을 하도록 하고 있느냐? 안식일은 생명을 구원하기 위한 날이냐? 아니면 생명을 파괴하기 위한 날이냐)?" 예수님의 말씀에 사람들의 반응이 어땠는지 아세요? 사람들은 이 예수님의 명쾌한 말씀에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But they remained silent).

저는 성경을 읽으면서 예수님의 teaching에 대한 그 당시 사람들의 반응이 어땠는지 주의 깊게 읽어 보았습니다. 마가복음에 이렇게 말씀이 나옵니다. “거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놀랐습니다. 그것은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예수님께서는 권위 있는 분처럼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22)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The people were amazed at his teaching, for he taught with real authority-- quite unlike the teachers of religious law.”

이 말씀에서 주의 깊게 읽어야 할 것은 예수님의 교훈은 율법학자들의 교훈과 달랐다는 것입니다. 율법학자들의 교훈에서 볼 수 없었던 권위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율법학자들은 입는 옷도 보통 사람들과 달랐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에 나오지 않습니까? “이들은 긴 옷을 입고 걸어 다니기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 받기를 좋아한다. 이들은 회당에서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잔치에서도 윗자리를 좋아한다. 이들은 과부의 집을 삼키며,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길게 기도한다.” (38-40절) 간단히 말하면, 율법학자들의 권위는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권위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에서 오는 권위는 ‘real authority (진정한 권위)’였다는 것입니다.

저희 아버님이 지금은 연세가 많으셔서 글씨 쓰는 일을 그만 두셨지만, 한동안 붓글씨에 심취 하셨습니다. 예전에 서당 교육을 받으셨으니까 붓글씨 기본이 되어 있긴 하셨는데, 은퇴하신 후에 뉘늦게 붓글씨에 심취하셨습니다. 붓글씨 대회에 나가셔서 입상하신 경력도 있으십니다. 저에게도 친히 쓰신 글을 몇 점 주셨습니다. 그 중에 ‘진광불휘(眞光不輝)’라는 글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풀이하면, ‘진짜 빛은 찬란하지 않다’ 이런 뜻입니다. 공자의 말입니다. 가짜는 진짜처럼 보이기 위해서 화려하게 치장을 합니다. 그러나, 진짜는 화려하게 치장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빛은 나지 않지만 진짜입니다. 율법학자들의 권위는 사람들이 만든 인위적인 권위였습니다. 진짜 권위처럼 보이기 위해서 긴 옷을 입습니다. 어디 가면 윗자리에 앉습니다. 기도 할 때는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하여 길게 기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권위는 참된 권위였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애쓸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예수님의 교훈 속에 들어 있는 참 권위를 발견했습니다.

또 마가복음 1:27에는 사람들의 이런 반응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게 어찌된 일이냐? 이것은 권위가 있는 새로운 교훈이다. 더러운 귀신들도 저 분의 명령에 복종하는구나!” (마가복음 1:27)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What sort of new teaching is this? It has such authority! Even evil spirits obey his orders!” 그동안 율법학자들이 가르치는 판에 박은 듯한 교훈만 들어왔는데, 예수님의 교훈은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교훈을 ‘new teaching with authority (권위 있는 새로운 교훈)’라고 불렀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마가복음 말씀에도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나와 있습니다. “The large crowd listened to him with great delight (많은 군중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즐겁게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이 사람들이 누군지 알 수 없지만,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즐거워했습니다. 이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한 entertainment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즐거워했던 이유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감추어진 진리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아하, 그리스도,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이긴 하지만, 메시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구나. 다윗도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아를 ‘주님 (Lord)’ 이라고 불렀구나!” 이런 진리에 대한 목마름이 사람들을 즐겁게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작은 나라입니다. 우리나라도 작은 나라이지만, 이스라엘은 더 작습니다. 세계에서 제일 면적이 큰 나라는 러시아이고요. 캐나다, 중국, 미국 브라질 순입니다. 우리나라는 100,210km2로 107위입니다. 북한은 우리나라보다 조금 큽니다. 이스라엘은 20,770km2로 149위입니다. 우리나라 면적의 1/5 밖에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입에서 입으로 삽시간에 온 나라에 퍼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계실 때는 이른 새벽부터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 들었습니다. 그 말씀이 요한복음 8:2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이튿날 이른 아침에 예수님께서는 다시 성전 뜰로 가셨습니다. 온 백성이 그분 주변에 모여들자, 예수님께서는 자리를 잡고 앉으셔서 그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But early the next morning Jesus was back again at the Temple. A crowd soon gathered, and he sat down and taught them.” (NLT) “At dawn Jesus appeared again in the temple courts, where all the people gathered around him, and he sat down to teach them. (NIV)

1세기에, 예수님과 동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에 열광했습니다. 이른 아침도 마다하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예수님이 계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빈 들, 광야도 마다하지 않고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모였습니다. 어떤 때는 사람들이 사흘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성경의 기록도 있습니다 (마태복음 15:32).

그 때, 그 사람들은 그랬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오늘 우리들은 여러가지 일로 분주합니다. 사람들의 관심은 다양해졌습니다. 우리들의 마음을 빼앗는 것들이 많아졌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즐거움을 잃어버렸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진리를 발견하고 기뻐하는 즐거움을 잃어 버렸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너무 많은 일 때문에 걱정하며 안절부절하는 구나. 그러나 필요한 일은 오직 한 가지뿐이다.” (누가복음 10:41-42) 우리의 삶에 절대적으로 ‘오직 필요한 한가지 일 (only one thing worth)’ 이것이 무엇일까요? 이 말씀 뒤에 마리아의 이름이 나오는 것으로 봐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한가지 일’은 말씀을 가까이 하는 삶인 것이 분명합니다.

성경을 대하는 여러분의 마음을 바꾸어 보십시오. 이 책 속에 온갖 지루한 이야기가 들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책 속에 내가 다 아는 이야기가 들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책 속에 나와 아무 상관 없는 것들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저에게 성경은 무슨 책이냐고 묻는다면 저는 간단하게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성경은 사람을 사람답게, 아름답게 만들어 주는 책이다!” 성경 속에 여러분의 삶을 가치 있고 아름답게 만들어 주는 길이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즐거움이 여러분의 삶 속에서 회복 되기를 원합니다.


8/14/2016 | 마가복음 강해설교 49

너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다. You Are Not Far From The Kingdom Of God.

마가복음 12:28-34

성령강림절 후에 제자들의 삶에 어떤 일이 있었는가 하는 것을 지난 몇 주간을 걸쳐 사도행전 말씀을 읽으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주님은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이렇게 말씀하셨고,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요한복음 15:7-8, 개역성경)”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는 비결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살고, 또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살면 됩니다. “But if you remain in me and my words remain in you, you may ask for anything you want, and it will be granted!” (New Living Translation) 다른 번역 성경에는 ‘remain’이라는 말 대신 ‘abide’라는 말로 나와 있습니다. ‘remain’이라는 말은 ‘산다’ ‘머문다’는 뜻이고, ‘abide’라는 말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모두 감수하고 그것을 떠나지 않고 충실하게 붙어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모든 것을 감수하고 주님의 말씀을 떠나지 않고 주님의 말씀에 맞게 충실하게 사는 일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성령이, 주님의 영이, 주님의 마음이 우리 속에 들어오는 일이 없이는 이런 일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주님의 영이 자기들에게 임한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제자들은 전과 다른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의 기록입니다.

사도행전은 모두 28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28장 마지막 절이 이렇게 끝납니다. “바울은 자기 셋집에서 꼬박 이 년을 지내면서 자기를 찾아오는 사람들을 다 맞이하였습니다. 그는 담대하게, 그리고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가르쳤습니다.” (30-31) 뭔가 여기가 끝이 아닌 것 같은 여운을 남기는 ‘open-ended story’ 형식으로 끝이 납니다. 사도행전이 이렇게 끝이 나는 것은 이제 저와 여러분과 이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계속 사도행전의 기록을 쓰신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과 저와 이 교회는 이 시대의 사도행전 저자 (author)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기 위해서는 우리의 결단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주님의 영이 우리 속에 들어오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이제, 오늘부터 그동안 잠깐 중단했던 마가복음 말씀을 읽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어떤 율법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주님, 모든 계명 중에 어떤 계명이 가장 중요합니까?” 하고 물었다는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이 말씀이 마태복음 22장에도 나와 있습니다. 두 복음서의 말씀이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결정적으로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우선 이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와서 이렇게 질문했던 의도에 대하여 마태는 “One of them, an expert in religious law, tried to trap him with this question (그들 중에 율법 전문가 한 사람이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이 질문을 했다)”고 기록했습니다. “모든 계명 중에 어떤 계명이 가장 중요합니까?” 이 질문이 평범한 질문이 아니라, 이 질문에 잘못대답하면 그들이 파 놓은 덫 (trap)에 걸리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않은가요? 그 많은 율법의 계명 중 어느 하나를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당연히 논쟁을 불러 일으킬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마가가 기록한 복음서에 나오는 이 율법학자는 전혀 그런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이 율법학자는 율법을 연구하는 ‘전문가 (an expert)’입니다. 개역성경에는 ‘서기관 (a scribe)’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본직은 성경 두루마리를 카피 (copy)하는 것입니다. 꼼꼼하고 정교하게 카피하는 일을 하다 보니까 이들은 율법에 대한 많은 지식과 식견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께서 사두개파 사람들의 질문에 잘 대답하시는 것을 보고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모든 계명 중에 어떤 계명이 가장 중요합니까?”

과연 예수님의 입에서 어떤 말씀이 나올지 궁금합니다. 질문하는 사람이 어떤 의도로 질문했든지 상관 없이 예수님께서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시느냐 하는 것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대답을 요약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말씀하시면서 신명기 6:4-5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Listen, O Israel! The LORD our God is the one and only LORD. And you must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all your soul, all your mind, and all your strength.” 직역하면, “오,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우리 하나님은 하나이시며, 유일하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주 너의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라” 이런 뜻입니다. 간단히 이 말씀을 ‘쉐마 (shema)’라고도 합니다. ‘쉐마’는 “들으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가르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phylacteries’라고 해서 작은 상자에 넣어서 손목에 맵니다. 이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일종의 ‘reminder (생각나게 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릴 때도 항상 이 말씀을 낭송합니다. 유대인들의 집 대문에는 ‘메주자 (mezuzah)’라는 것이 붙어 있습니다. 메주자 속에도 이 말씀이 들어 있습니다. 집을 나가고 들어오면서 이 말씀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The second is equally important (이와 똑 같이 중요한 두 번째 것은)”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레위기 19:18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의 믿음생활에 얼마나 중요한 말씀인지 아십니까?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과 이웃을 사랑하는 계명을 하나로 통합 시키신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영국의 윌리엄 버클레이 (William Barclay, 1907-1978)라는 목사님이 있습니다. 이 분은 대단한 저술가이고 탁월한 설교자입니다. 그의 저서 중에 제일 유명한 것은 ‘Series of Daily Bible Studies’라는 것이 있는데, 모두 17권으로 된 것입니다. 신약성서 전체를 일반인들이 읽기 쉽게 해설해 놓은 책입니다. Barclay는 라디오 방송국에서 매일 성경을 해설하는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해설했던 것을 모아서 출판한 것이 17권의 책으로 나온 것입니다. 1955년에 이 책이 나왔는데, 그 당시엔 엄청난 베스트 셀러였습니다. 버클레이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두 계명을 하나의 계명으로 말씀할 때까지 그 누구도 그렇게 말한 사람은 없었다 (No one until Jesus came took and put the two commandments together and made them one).”

오늘 이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들으시고,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문제와 인간을 사랑하는 문제가 같은 문제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사랑 따로 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일을 따로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의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고, 사람을 사랑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믿음생활을 병들게 하고, 건강하게 하지 못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가 바로 이 문제입니다. 저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들 많이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동시에 사람을 그렇게 사랑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사람들에 대해서는 아주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사람들과 가까이 하면 믿음생활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교회 내에서도 사람들과의 교제를 하지 않고, 예배만 드리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이와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사람들과 교제는 열심히 하는데, 하나님을 그만큼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humanist들이 그렇습니다. 이웃에 대해서 selfish한 사람들이 많은 것만큼, 이웃에 대하여 humanist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웃에게 좋은 일도 많이 하고, 인정도 많이 베풀지만, 그러나, 이 사람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더 깊이 알고자 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이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예배가 아니고, 성경공부가 아니고, 기도가 아닙니다. 이웃에게 인정을 베푸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냥 humanist들입니다. 크리스천 휴머니즘은, 이웃에 대한 사랑과 관심과 인정이 자기들 속에 있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흘러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자기들은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가는 통로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크리스천 휴머니즘’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이 율법학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옳습니다, 선생님. 하나님께서는 한 분이시고,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습니다. 모든 마음과 모든 지식과 모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다른 모든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보다 더 중요합니다.” (32-33절) 쉬운성경에는 그냥 “선생님, 옳습니다.”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만, NKJV이나, NLT 성경에 보면 이 말씀이 “Well said, Teacher. You have spoken the truth (정말 잘 말씀하셨습니다. 선생님께서 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이 번역이 참 좋습니다. 이렇게 번역이 되어야 그 다음에 나오는 이 사람의 말과 잘 연결이 됩니다.

유대인들의 제사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제물입니다. ‘희생 제물 (sacrifices)’과 ‘번제물 (burnt offerings)은 유대인들의 제사의 핵심입니다. 이 사람은 직업이 율법을 연구하는 학자입니다. 이 사람은 제물에 대한 세밀한 율법의 규정들을 다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큰 깨달음을 얻은 것입니다. 평생 율법을 연구하면서도 한번도 이렇게는 생각하지 못했던, 큰 깨달음을 얻은 것입니다. “희생 제물과 번제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구나! 그것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일이다!”

여러분, 자기가 평생 알아왔고, 평생 믿어왔던 지식과 신념을 바꾼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가 사울의 회심을 중요하게 보는 것은 그가 예수님을 만난 후에 율법에 대한 자기 신념을 바꾸었기 때문이잖아요? 이게 책상 앞에서 입으로만 했던 말이 아니라, 정말 그의 생애가 변화 되었잖아요? 지금 이 율법학자에게 사울의 회심과 비교할 수 있을 만큼 의미 있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율법학자의 말을 한번 New Living Translation으로 읽어 보세요. “Well said, Teacher. You have spoken the truth by saying that there is only one God and no other. And I know it is important to love him with all my heart and all my understanding and all my strength, and to love my neighbor as myself. This is more important than to offer all of the burnt offerings and sacrifices required in the law (선생님, 참 잘 말씀하셨습니다. 선생님.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다른 신은 없다고 하시니 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나의 온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고 또 내 이웃을 내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압니다. 이것은 율법에서 요구하는 모든 번제물과 희생제물보다 더 중요합니다)." (32-33절)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없이 드렸던 번제물과 희생 제물,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 드렸던 그 많은 번제물들과 희생 제물들, 이것이 하나님께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이것이 이 율법학자의 고백이었습니다.

주님은 이 율법학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다 (You are not far from the kingdom of God).”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너는 이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든지, “하나님의 나라가 너의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고, “너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다” 이렇게 말씀하셨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설교 말씀 듣고 은혜 받을 수 있습니다. “아, 내가 그동안 잘못 생각했고, 잘못 살았구나” 이런 깨달음도 얻을 수 있습니다. 성경공부를 통해서 새롭게 배운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생각하고, 깨달은 것이 전부가 아니잖아요? 문제는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나무가 무화과 나무인지, 그 나무가 찔레나무인지, 그 열매를 보면 알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7:16). 우리가 정말 진리를 들었고, 우리가 정말 깨달음을 얻었다면, 이제부터 우리의 열매가 그 사실을 증명해야 합니다.

이 율법학자는 하나님의 나라에게 멀지 않은 곳에 있었습니다. 그 사람처럼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나라에게 멀지 않은 곳에 있을 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은혜 받은 대로, 깨달은 대로, 배운 대로 사는 사람들이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은 자신들이 깨달은 것을 열매로 증명하는 사람들입니다.


8/7/2016 | 성령강림절 후 열 세 번째 주일

안디옥 교회 The Church Of Antioch

사도행전 11:19-26

구약성경 이사야 55장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다르다.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다.” (8-9절) “My thoughts are nothing like your thoughts, and my ways are far beyond anything you could imagine. For just as the heavens are higher than the earth, so my ways are higher than your ways and my thoughts higher than your thoughts.” (New Living Translation)

또 바울은 하나님의 지혜에 대하여 이렇게 썼습니다.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멸망할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에 불과하지만, 구원 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로우며,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의 강함 보다 더 강합니다.” (고린도전서 1:18, 25)

또, 빌립보서 4:6-7에는 “아무 것도 걱정하지 말고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구하고 아뢰십시오.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말씀드리십시오. 그러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어느 누구도 측량할 수 없는 평안이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 가운데 풍성히 임할 것입니다”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 어느 누구도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평안’ 이란 말은 ‘the peace of God, which transcends all understanding’이란 말입니다. ‘transcend’라는 말이 ‘뛰어 넘는다’ ‘초월(超越)하다’라는 뜻이잖아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우리의 생각을 훨씬 뛰어넘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힘들고, 불안하고, 초조할 때는 그 하나님의 평안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며, 그 하나님의 평안이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켜 준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도행전’을 ‘성령행전’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사도들이 세상에 나가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기록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그 과정 속에 함께 하시는 것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행전을 ‘성령행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급성장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3,000명쯤 되더니 (사도행전 2:41), 곧 그 수가 5,000명으로 불어났습니다 (사도행전 4:4). 그러더니 나중에는 더 이상 숫자가 나오지 않고, “날이 갈수록 제자들의 수는 늘어만 갔습니다 (사도행전 6:1)”라고 나옵니다. 한번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이렇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늘어갑니다. 그러면, 어떤 결과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던 유대교 지도자들이 불안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에 순교자가 나오고, 박해가 시작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스데반의 일로 발생한 박해 때문에 많은 신자들이 흩어졌습니다. 그들은 베니게와 키프로스와 안디옥까지 피해 가서는......” (사도행전 11:19)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옵니다. “Meanwhile, the believers who had been scattered during the persecu-tion after Stephen's death traveled as far as Phoenicia, Cyprus, and Antioch of Syria.” ‘Phoenicia’는 유대나라의 서쪽 지중해 연안을 말합니다. ‘Cyprus’는 좀 더 북쪽으로 올라가서 터키 밑에 있는 지중해의 섬입니다. ‘Antioch of Syria’는 시리아에 있는 지중해 연안의 도시입니다. 제가 안디옥에는 가 봤습니다. 무척 더웠습니다. 지금은 무슬림들 천지(天地)고요. 지금 시리아 난민들이 문제가 되고 있는 그 나라입니다. 1세기에 시리아의 안디옥은 이방인 선교의 중심지였습니다. 특히 바울은 1차, 2차, 3차 선교여행을 모두 안디옥에서 출발하여 안디옥으로 돌아왔습니다. 물론 마지막 선교여행이었던 3차 선교여행은 안디옥을 출발하여 안디옥으로 돌아가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 과정 속에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믿는 사람들의 수가 불어난 것이 아니라, 이 사람들을 흩으시려고 했던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습니다. 겉에서 보기에는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서 지중해 연안으로 도망쳐 숨은 것 같았지만, 하나님은 이 사람들을 도구로 사용하셔서 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하게 했습니다. 어떻습니까? 우리는 이런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한 영감(靈感)을 얻어야 합니다. 바울이 그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로마서 8:28) “God causes everything to work together for the good of those who love God and are called ac-cording to his purpose for them.”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하나님의 목적대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모든 것이 ‘work together (합력해서)’ 좋은 일이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솔로몬도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보세요.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때에 따라 아름답게 이루어 놓으시고 모든 일에 기한도 정해 놓으셨으나 인간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알지 못하도록 하셨다.” (전도서 3:11) 당장에는 왜 우리가 박해를 받아야 하느냐고 불평하고 원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잖아요? 하나님은 그렇게 해서 그 사람들을 유대 나라를 떠나게 하고, 그들을 하나님의 일에 사용하시려고 계획 하신 것입니다.

시리아 안디옥에 몇 사람의 신자들이 모였습니다. 키프로스와 구레네 출신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 사람들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기는 어렵습니다. 이들이 누구인지, 이들은 왜 안디옥으로 왔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습니다. 정황으로 봐서 이 사람들도 박해를 피해서 키프로스와 구레네로 갔던 사람들인 것 같은데, 왜 다시 안디옥으로 왔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Some of the believers who went to Antioch from Cyprus and Cyrene began preaching to the Gentiles① about the Lord Jesus.” /①Greek the Hellenists (i.e., those who speak Greek); other manuscripts read the Greeks 중요한 것은 이 사람들이 그리스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즉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저는 안디옥에 세워진 교회에 대하여 말씀 드리고 있습니다. 1세기에 시리아 안디옥에 세워진 교회에 대하여 몇가지 꼭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첫째로, 안디옥 교회는 최초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열린 교회였습니다. 이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처음에 박해를 피해서 지중해 연안으로 숨은 신자들은 현지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말씀이 오늘 읽은 19절에 나오잖아요? “They preached the word of God, but only to Jews.” 그런데, 키프로스와 구레네에서 안디옥으로 온 신자 몇 사람이 그리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유대인들은 본능적으로 이방 사람들을 싫어합니다. 이방인에게 가까이 접근하고, 대화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이 키프로스와 구레네에서 온 신자들은 열린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는 미국에 이민 와서 사시는 분들이나, 유학생들에게 주어진 최고의 축복은 이곳에서 열린 사고를 배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의 다양한 인종, 다양한 문화와 전통을 통해서 우리도 모르게 열린 사고를 하게 됩니다. 나와 다른 것들의 가치를 존중하게 되고, 인정하게 됩니다. 제가 이번에 한국에 나가서 한 2주 있었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많이 답답하고 했을 텐데, 이젠 한국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전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린 사회’로 발전해 가고 있습니다.

이 키프로스와 구레네에서 온 신자들은 열린 생각을 가지고 그리스 사람들에게 다가갔고,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시리아 안디옥 교회는 이 사람들 덕분에 이방선교의 센터가 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여러분들에게도 이 ‘열린 사고’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여러분 속에 여러분도 알지 못했던 보물이 들어 있습니다. 키프로스와 구레네에서 온 신자들은 이 선물을 이용하여 이방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선물을 어떻게 하나님의 일에 사용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들에게, 그리고 우리 교회에게 주어진 과제입니다.

둘째로, 안디옥 교회는 인재를 기르는 교회였습니다. 오늘 말씀에 바나바 (Barnabas)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나바는 예루살렘 교회가 안디옥 교회에 파견한 조사관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안디옥 교회에 이방 사람들이 들어온다는 소문을 듣고 어떻게 된 일인지 조사하기 위하여 바나바를 파견한 것입니다. 바나바의 눈에 안디옥 교회가 어떻게 보였을까요? 유대인과 이방인이 같은 자리에서 예배를 드리는 이 모습이 어떻게 보였을까요? 오늘 읽은 말씀을 보시지요. “그는 안디옥에 도착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내린 것을 보고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마음을 굳게 하여 주님을 의지하십시오”라고 격려했습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 (23-24절) 바나바의 눈에 안디옥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가 내린 충만한 교회였습니다. 유대교를 믿던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같이 믿음 생활하는 것을 보고,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나바는 그가 보고 느낀 대로 예루살렘교회에 그대로 보고했습니다.

바나바는 한동안 안디옥 교회에 머물러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바나바는 다소에 가서 사울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 때 사울은 유대인들의 핍박을 피해 자기 고향 다소 (Tarsus)에 은둔하고 있었습니다. 마음에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열정은 있었지만, 고향에 은둔하고 있는 사울을 불러낸 것이 바나바였습니다. 둘이서 함께 일년 동안 안디옥 교회에서 가르쳤습니다. 이렇게 안디옥 교회는 인재를 알아 보고 기르는 교회였습니다. 저는 우리교회도 그런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을 기르는 교회요. 아무 경험도 없는 사람들이 등용되어서 리더십을 기르고, 간사로 부름을 받아서 쓰임을 받고, 자기가 가진 재능을 하나님의 사역에 사용할 수 있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맡고 있는 작은 일이라고 하찮게 여기지 마십시오. 작은 일에 최선을 다하십시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알지 않습니까? “참 잘했구나. 너는 착하고 신실한 종이다. 네가 적은 것에 최선을 다했으니 내가 훨씬 더 많은 것을 너에게 맡기겠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누려라.” (마태복음 25:21, 23) 우리교회가 이 말씀을 실험하고 실천하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셋째로, 인디옥 교회는 베푸는 교회였습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에 참여하는 교회였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가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곧 헌금을 하기로 결정합니다. 그 말씀이 오늘 읽은 말씀 다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자기들만 아는 이기적인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알고 그 아픔을 함께 나누는 교회였습니다. 지금 영국의 브렉시트 (Brexit)를 결정하고 유럽 연합 (EU)에서 탈퇴한 배경에 그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우리도 살기 어려운데 유럽 연합에 계속 남아 있으면 우리가 더 힘들어진다는 생각에서, 그렇게 결정한 것 아닙니까? 그렇게 결정하면 좋을 줄 알았는데, 지금은 후회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잖아요? 안디옥 교회는 나만 살자는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우리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지구촌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받아 들이는 교회, 그들의 아픔을 품고 기도하고, 필요하다면 헌금을 보낼 수 있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안디옥 교회에서 처음으로 ‘Christian’이라는 말이 사용되었습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이 안디옥 교회 교인들을 보면서 “이 사람들은 ‘크리스천들 (Christians)’이다” 이렇게 부른 것입니다. ‘크리스천’이란 말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이 처음에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조롱하는 뜻으로 사용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중에 로마 시대에 크리스천들이 대대적으로 핍박을 받았을 때는 혹시 그럴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안디옥 교회에서 처음으로 이 말이 사용되었을 때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조롱하는 말로 사용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 사람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었습니다. 칭찬을 들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자기들이 믿는 예수를 따라 사는 사람들인데,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야. 우리가 배울 점이 많은 사람들이야!” 이런 칭찬을 들었습니다.

제가 이 ‘Christian’이란 말을 보면서 느낀 점은, 처음에 이 말이 사용되었을 때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과 동일시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 이름이 붙어 다닙니다. 여러분은 이 이름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이름인지 알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이 이름을 자랑스럽게 여깁니까? 혹시 여러분은 이 이름에 부끄러운 삶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Christian’이란 말과 반대되는 말은 ‘Non-Christian’이란 말이 있습니다. 뜻으로 보면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우리가 ‘크리스천’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사실은 ‘Non-Christian’처럼 살고 있다면, 정말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을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진실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7/31/2016 | 성령강림절 후 열두번째 주일

사울의 회심 The Conversion Of Saul

사도행전 9:4-16

지금까지 우리는 성령강림 후에 제자들의 삶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사도행전을 보면서 추적(追跡)해 보았습니다. 이런 일, 저런 일, 주목할만한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여러분에게 소개해 드리는 사울이라는 사람의 회심이야말로 그 많은 일들 중의 백미(白眉)가 아닌가 합니다.

우리 말의 ‘백미’라는 말을 아시지요? 이 말의 문자적인 의미는 ‘흰 눈썹’이라는 뜻인데, 이 말의 유래를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삼국지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적벽대전 후 형주, 양양, 남군 등 많은 땅을 얻은 유비(劉備)가 신하들을 모아 놓고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 대책을 물었다고 했답니다.  이때 유비를 두 번이나 구해 준 이적(伊籍)이라는 사람이 "새로 얻은 땅들을 오래 지키려면, 먼저 어진 선비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 라고 자기 생각을 말했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들은 유비는 이적에게 "그러면, 그 어진 선비가 누구요?" 라고 묻자, 이적이 "형양 땅에 뛰어난 다섯 형제가 있는데, 그 중에 가장 어진 사람은 양 눈썹 사이에 흰 털이 난 마량(馬良)이라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속히 그를 청하여 오심이 옳은 줄 압니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유비는 그 말을 듣고 즉시 양 눈썹 사이에 흰 털이 난 마량(馬良)을 청하여 오게 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백미(白眉)’라는 나왔다고 합니다.

저는 사울의 회심 사건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드라마틱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재미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고, 우리의 예상을 뒤엎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지루하지 않고, 어떤 일이 벌어질지 흥미진진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뜻을 이루는 일에 사람을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사사(士師)나 예언자들이 모두 그런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사람들을 보면 모두 평범하지 않습니다. 굳이 안 하겠다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억지로 그 일을 시킵니다. 모세 같은 사람은 자기는 그 일에 적합하지 않다고 몇 번이나 고사를 했지만,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게 출애굽이라는 큰 일을 맡겼습니다. 그 일에 전혀 적합하지 않을 것 같은 소시민적인 사람을 사사로 임명합니다. 기드온이 그렇습니다. 남쪽 왕국에서 농사짓고, 양을 치던 사람을 북왕국으로 가서 예언활동을 하라고 합니다. 정의의 예언자라는 별명이 붙은 아모스가 그렇습니다. 

사울이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하나님의 일에 적합한 사람이었습니까? 전혀 아닙니다. 잘 찾아 보면 하나님의 일에 어울릴만한 사람들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전혀 예상 밖으로 사울이라는 사람을 지명하십니다. 보세요. 사울은 철저한 율법주의자로, 바리새파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율법의 한 조항도 소홀하게 여기지 않고 철저하게 지키겠다는 생각으로 출발했지만,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다 보니까 겉과 속이 다른 위선에 빠졌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들은 율법을 철저하게 지킨다는 교만에 빠졌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정죄했습니다. 사울이 그렇게 고백합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에 너무나 열심이었으므로..... 율법을 지키고 따르는 데 있어서는 그 어느 누구도 나에게서 헛점을 찾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빌립보서 3:6)

이뿐만이 아닙니다. 사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습니다. 스데반이 순교할 때 사울은 그 현장에 있었습니다. 돌로 스데반을 치는 사람들의 옷을 지키는 사람으로 그 현장에 있었습니다. 사울은 그 현장을 목격하면서 스데반이 그렇게 죽는 것은 마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누가는 사울의 과거의 행적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사울은 교회를 없애 버리려고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남자든 여자든 닥치는 대로 끌어 내어 감옥에 넣었습니다. 사울은 예수의 제자들을 모두 죽이겠다는 생각으로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마스커스의 여러 회당에 보내는 편지를 써 달라고 했습니다. 남자든 여자든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이 있으면, 닥치는 대로 붙잡아서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습니다.” (사도행전 8:3-9:2)

개역성경에는 사울이 교회를 잔멸(殘滅)하려고 했다고 나와 있습니다 (사도행전 8:3) ‘잔멸’이라는 말은 ‘쇠잔하여 기운이 없어짐’이라는 뜻입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는 “Saul was going everywhere to destroy the church”라고 나와 있습니다. 희랍어 원문에 나오는 ‘엘뤼마이네토’라는 말은 멧돼지가 농작물 밭에 들어가서 온통 휘저어서 밭을 못쓰게 만들어 놓는다는 뜻으로 사용하는 말입니다. 사울이 멧돼지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기독교의 뿌리를 뽑아버리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다른 착하고 좋은 사람도 많은데, 하필이면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을 사용하신다는 것이 이해가 되십니까?

사울의 회심은 다마스커스 (Damascus)로 가는 중에 일어났습니다. 다마스커스는 이스라엘 북쪽 시리아 영토에 있습니다. 다마스커스에 예수 믿는 유대인들이 많이 숨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끌고 오기 위하여 대제사장의 편지를 손에 들고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혼자가 아니라 같이 여러 사람을 데리고 가고 있었습니다. 다마스커스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하늘로부터 밝은 빛이 사울을 비췄습니다. 그 빛이 하도 강렬하여 사울은 땅에 엎드렸습니다. 그 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는 소리가 뚜렷이 들렸습니다. 사울은 “그렇게 말씀하시는 주님은 누구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거라. 네가 해야 할 일을 일러 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라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신기한 것은, 사울과 함께 길을 가던 사람들은 무슨 소리가 나는 것 같긴 한데, 아무 것도 보이지 않으므로 깜짝 놀라 말도 못하고 가만히 서 있었다는 것입니다.

한참 만에 땅에서 일어난 사울은 눈을 떴으나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울과 함께 있던 사람들이 그의 손을 잡고 다마스커스로 데려 갔습니다. 사울은 삼 일 동안, 앞을 보지 못했으며,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에 기록된 사울의 회심 장면입니다. 저에게도 이 말씀은 모두 설명되지 않는 말씀으로 남아 있습니다.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영적인 체험에 대한 말씀인데, 어떻게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저에게 궁금한 것 한가지는, 바울이 어디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리고 복음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배웠을까 하는 것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없습니다. 신약성경에 바울이 교회나 개인에게 쓴 편지가 13권이나 들어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편지가 아니라, 교회가 그 편지 속에 든 내용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알고 나면 더욱 궁금증이 커집니다. 초대교회에서도 이 문제가 이슈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제자도 아니고, 제자들과 교제를 나누었던 것도 아닌데, 교회를 핍박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넘겼던 사람이 어디서 예수 그리스도에 지식을 얻었을까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사울의 말을 직접 한번 들어 보시겠습니까? “형제들이여, 내가 여러분에게 전한 복음은 사람들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바랍니다. 그것은 내가 사람에게서 얻은 것도 아니고, 사람에게서 배운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내가 어떻게 살아 왔는가를 들었을 것입니다. 나는 유대교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몹시 박해했을 뿐 아니라, 아예 없애 버리려고 까지 계획했습니다. 나는 나와 나이가 비슷한 다른 유대인들보다 더 열심히 유대교를 믿었습니다. 또한 그 누구보다도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는 데 열심이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께서는 나를 따로 세우셔서 은혜로 나를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복음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내게 보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을 때에 나는 어떤 혈육을 통해서도 가르침이나 도움을 받지 않았습니다.” (갈라디아서 1:11-16) 그의 말 중에 “그리스도께서 내게 보여 주셨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내게 보이셨다”는 말은 다마스커스로 가는 중에 강렬한 빛 속에서 만났던 예수님을 만난 그의 경험을 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사울이라는 사람을 이렇게 회심을 시키셨을까?” “사울이라는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다마스커스에 살고 있던 진실한 주님의 제자 아나니아 (Ananias)라는 사람을 통하여 이렇게 알려지고 있습니다. 아나니아도 처음에는 사울이라는 사람에 대하여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말씀이 오늘 읽은 13-14절에 나와 있습니다. “주님, 제가 많은 사람들에게서 그 사람에 관한 소문을 들었는데, 그가 예루살렘에 있는 주님의 성도들에게 많은 해를 입혔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대제사장들에게서 주님의 이름을 믿는 모든 사람들을 잡아갈 수 있는 권한을 받아 가지고 이 곳에 왔다고 합니다.” 아나니아의 말에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거라. 그는 이방 사람들과 여러 왕들과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나의 이름을 전하도록 선택된 나의 도구이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해 얼마나 많은 고난을 당해야 할지를 내가 그에게 보여 주겠다.” (15-16절)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Saul is my chosen instrument to take my message to the Gentiles and to kings, as well as to the people of Israel. And I will show him how much he must suffer for my name's sake." 이 말씀에서 ‘instrument’라는 말이 눈에 들어옵니다. 이 말은 도구(道具)라는 뜻으로 번역할 수 있지만, 동시에 ‘악기’라는 뜻도 있습니다. ‘도구’라는 것이 무슨 일을 할 때 필요한 연장을 말 하잖아요? 도구는 스스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자의 손에 들려서 일을 합니다. ‘악기’도 그렇습니다. ‘악기’ 스스로 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연주자의 손에 들려야 합니다. 이방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사울이라는 사람을 손에 들고 쓰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울이 자기 의지를 내려 놓고, 완전히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그럴 사람으로 사울이라는 사람을 지명하신 것입니다.

이것으로 충분합니까? 계속해서 우리에게 질문이 생깁니다. 다른 사람도 많은데, 왜 하필 교회를 핍박했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체포해서 감옥에 보냈던 사울이라는 사람입니까? 이 문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主權)에 달린 문제입니다. 하지만, 좀 설명을 해 본다면, 이 문제를 우리의 입장에서 보지 말고, 사울의 입장에서 봐 보십시오. 사울은 자기의 과거를 누구보다도 잘 압니다. 자기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그 자신이 잘 압니다. 그는 이 모든 것이 ‘undeserved God’s favor’라는 사실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겸손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일에 부름 받은 것을 감사했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자신의 사명을 귀하게 여겼습니다. 이것이 그가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하지 않습니다 (I do not nullify the grace of God., 갈라디아서 2:21, NASB)”라고 고백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이제 우리 이야기를 좀 해 볼까요? 우선 여러분에게 묻고 싶은 것은, 여러분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고 싶으십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고 싶습니까? 이 질문에 정직하게 대답해 보십시오. 사울의 회심 이야기는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려고 했던 사람을 하나님의 원하시는 삶을 살게 하신 이야기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삶은 필연적으로 이기적인 삶을 살게 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삶은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싸우고, 경쟁하고, 갈등을 일으키는 삶을 살게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은 나의 것을 내려 놓는 희생의 삶을 살게 합니다. 다른 사람과 화평한 삶을 살게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고, 구원 하는 삶을 살게 합니다.

우리는 사울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습니다. 사울 덕분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더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사울 덕분에 우리도 하나님께 필요한 도구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가 그런 삶을 살았기에 삶에 대한 더 넓은 지평 (horizon)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하, 내가 추구하고, 내가 아는 삶이 전부가 아니구나! 이렇게 사는 삶도 있구나! 이렇게 나만 아는 삶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구원에 참여하는 삶도 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아는 것으로 끝나지 말고, 우리도 도구적인 삶을 선택하고 그렇게 살기를 결단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먼저, 지금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진지하게 성찰하는 일부터 시작하십시오.

 


7/24/2016 | 성령강림절 후 열한번째 주일

스데반: 최초의 순교자 Stephen: The First Martyr

사도행전 7:54-60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했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고, (사도행전 16:7 에는 ‘예수님의 영’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 (the mind of Jesus)’ (고린도전서 2:16) 혹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는 ‘하나님의 영’이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고 약속하셨고, 마침내 ‘하나님의 영’이 제자들에게 내렸습니다. 자기들에게 임한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된 제자들은 밖에 나가서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할 때부터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적들이 나타났습니다. 복음을 듣는 사람들에게 그 복음이 자기들이 사용하는 언어 (native language)로 들리는 이상한 일도 있었습니다. 사도들의 설교의 중심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었습니다. 이 설교를 듣고 3,000명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자기들의 소유를 팔아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날마다 함께 모여 같이 식사를 하고,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사도들에게 말씀을 배웠습니다.

이 사람들은 자기들끼리만 모이고,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과는 전혀 소통하지 않는,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주는 이상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 사람들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들었습니다 (사도행전 2:47). 처음 예수를 믿었던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만든 공동체는 이런 아름다운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나면서부터 한번도 걷지 못했던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걷는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이 사건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 때,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 사건이 터집니다. 이 부부는 성령을 속인 죄를 범했고, 이 부부는 같은 날 죽었습니다. 이 부부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존경과 두려운 마음을 심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모임 가운데 함께 하고 계신다는 경각심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믿는 사람들의 모임 (공동체)는 날이 갈수록 수가 불어났습니다. 심지어는 유대인 제사장들 중에도 이 모임에 참석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6:7). 이 사람들은 단순한 ‘무리 (multitude)가 아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주 (the Lord)’로 고백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상황이 어떻게 변하든지 예수를 믿을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세상의 ‘빛과 소금 (마태복음 6:13-14)’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세상을 책임질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공동체 안에 불만이 생겼습니다. 음식을 나누어 주는 일에 소외되는 사람들이 생긴 것입니다. 사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과 기도하는 일에 집중해야 하기 위하여 ‘성령이 충만한 사람’ 일곱 사람을 선발하여, 구제 사업을 전담하게 합니다. 생각해 보면, 공동체 안에 계속해서 사람들이 불어난 것도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이었고, 공동체 안에 불만이 생겨서 ‘성령이 충만한 사람’을 선발한 것도 하나님께서 뜻하신 일이었습니다.

누가는 공동체가 선발한 일곱 사람 중에서도 스데반이라는 사람에게 주목합니다. 스데반은 은혜와 능력이 충만하여 기적과 표적을 많이 행했다고 합니다 (사도행전 6:8).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Stephen, a man full of God's grace and power, performed amazing miracles and signs among the people”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누가가 기록한 스데반은 ‘a man full of God’s grace and power’입니다. 은혜는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호의 (favor)’입니다. 왜 그런지 모릅니다. 설명이 안 됩니다. 왜 이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그런 호의를 베풀어 주시는지,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면 벌써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닙니다. 은혜는 설명할 수 없고, 감당할 수 없는 ‘undeserved God’s favor’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한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 말씀이 에베소서 1:12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첫 소망을 가진 우리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찬양을 받기 원하십니다 (God's purpose was that we Jews who were the first to trust in Christ would bring praise and glory to God).” 사람들이 볼 때,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지?” “아니, 이 사람 내가 잘 아는 사람인데? 학교 때는 공부도 나보다 못하고 그랬던 사람인데? 이 사람이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지?” 이렇게 이유를 찾고 찾다가 마지막에는 “이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야! 그렇지 않고 달리 설명할 수 없어!”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우리를 불러 크리스천이 되게 하신 하나님의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D. L. Moody (1837-1899)는 이곳 매사추세츠 Northfiled에서 태어났습니다. 여기서 났지만, 막상 무디는 영국으로 건너가서 부흥 운동을 했고, 영국에서 성공을 거둔 무디는 귀국해서는 시카고에서 부흥운동을 주도했습니다. 시카고에 가면 무디교회 (Moody Church)가 있습니다. 지금도 그 규모가 어마어마합니다. 시카고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목사들을 위한 모임을 준비했습니다. 당연히 누가 설교를 할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무디가 설교하는 것이 좋겠다고들 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의 한 사람이 반대했습니다. “왜 우리는 꼭 무디에게 설교를 시켜야 합니까? 그의 설교를 들어 보세요. 그가 쓰는 단어는 저속 하기 짝이 없습니다. 문장도 틀리기 일쑤입니다. 그는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설교자로 초청해야 합니까?” 그러자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답니다. “우리도 압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을 쓰시는데 어떻게 합니까?” 제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스데반이 그랬고, 무디가 ‘a man full of God’s grace’였습니다. 하나님은 이 사람들을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 교훈을 주십니다. 크리스천은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누가는 계속해서 스데반에 대하여 이렇게 씁니다. “스데반이 말하는 지혜나 성령을 당해 낼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사도행전 6:10) “스데반의 얼굴은 마치 천사의 얼굴과 같았습니다.” (사도행전 6:15)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At this point everyone in the high council stared at Stephen, because his face became as bright as an angel's.” 여기서 ‘at this point’라는 말은 스데반을 고소하는 사람들이 거짓 증인들을 세워서 말도 안 되는 말로 스데반을 고소했을 때를 말합니다. 그 때 공회원들이 스데반의 얼굴을 쳐다봤더니, 그 얼굴이 천사처럼 빛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이 스데반에게 묻습니다. “너에 대한 이 모든 말이 사실이냐?” (사도행전 7:1) 그 때 스데반이 자기를 이렇게 변호합니다. 그 변호하는 말이 사도행전 7장 전체에 걸쳐 나와 있습니다. 스데반은 이 말이 사실이냐, 아니냐 하고 묻는 대제사장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아브라함부터 시작해서 이스라엘 역사 전체를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 민족의 역사 가운데 어떻게 나타났는지, 왜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지 못하고, 성령을 거스르고, 선지자들을 박해하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는지, 준엄하게 책망합니다 (사도행전 7:52-53).

스데반의 변호를 듣고 마음이 찔린 사람들은 스데반을 향하여 이를 갈았습니다. 사람들은 귀를 막고 큰소리를 지르며, 모두가 스데반에게 달려들었습니다. 분노한 사람들은 스데반을 성 밖으로 끌고 나가서 그에게 돌을 던졌습니다. 스데반은 성난 사람들의 손에 돌을 맞아 죽었습니다. 크리스천 중에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으면서 세 마디를 남겼습니다. “보십시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오른편에 ‘인자’가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56절) “주 예수님, 내 영혼을 받아 주십시오.” (59절) “주님, 이 죄를 이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60절) 여러분, 그 때 스데반의 나이가 얼마나 되었을까요? 한 30대 중반쯤이나 40대 초반 정도 되지 않았을까요? 한참 일할 때에 그는 죽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아쉽습니다. 더 살아서 많은 일을 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생명을 내시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아무 것도 아쉬울 것이 없습니다. 스데반은 일찍 죽었지만, 그의 사명을 잘 감당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실 때 “다 이루었다 (요한복음 19:3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보내신 목적을 충실하게 감당했습니다. 스데반도 그렇습니다. 일찍 죽어서 아쉬운 마음이 들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스데반은 자기의 사명을 100% 감당한 것입니다.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 스데반이 했던 세 마디 말을 들으면서 여러분 마음에 무슨 생각이 드시나요? 그의 말 속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까? 어쩌면 그렇게 그의 삶에서, 그의 죽음에서조차 예수님의 모습이 생생하게 보일 수 있습니까? 저는 이것이 진정한 크리스천의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크리스천이라면, 사람들이 그를 통해서 예수님을 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2:16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 (a Christ-like fragrance)’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우리에게서 예수님 같은 향기를 맡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똑 같은 의미로, 바울은 고린도후서 3:3에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편지 (a letter from Christ)’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서 마치 예수님께서 보내신 편지를 읽는 것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하트마 간디 (Mahatma Gandhi, 1869-1948)의 말이 생각납니다. 간디는 영국에서 유학생활을 했고,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 운동은 예수님의 산상설교에서 영감을 얻은 것입니다. 힌두교 교인이었던 간디는 한 때 기독교에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는 힌두교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그 때 간디가 했던 말이 있습니다. “I like your Christ, I do not like your Christians. Your Christians are so unlike your Christ (나는 당신들의 그리스도를 좋아하지만, 당신들 크리스천들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당신들 크리스천들은 당신들이 믿은 그리스도와 너무나 다릅니다).” 또 이런 말도 했습니다. “If all Christians acted like Christ, the whole world would be Christian (만약 크리스천들이 그리스도와 같이 행동했다면, 전 세계가 크리스천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와 교류했던 스탠리 존스 (Stanley Johnes, 1884-1972)라는 영국의 감리교 선교사가 있습니다. 스탠리가 간디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기독교가 일반 대중에게 다가가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그랬더니 간디가 “당신들이 예수님 같은 삶을 살면 됩니다” 이렇게 간단하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 말을 흘려 듣지 마십시오. 사람들이 우리의 말과 행동 속에서 예수님을 발견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우리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보내신 편지를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살아야 합니다. 여기에 교회의 미래가 달려 있습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그들이 믿는 예수님처럼 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을 하나의 교양으로만 알았고, 머리로만 받아들였지 가슴으로 받아 들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처럼 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정신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말과 행동이 예수님과 달랐습니다. 그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오늘 우리는 똑똑하게 보고 있습니다.

오래 전에 본 ‘사막의 라이온 (Lion of The Dessert, 1981)’의 한 장면이 생각납니다. 안소니 퀸(Anthony Quinn)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인데, 리비아를 침공한 이탈리아와 대항해 싸우는 베두인들의 이야기입니다. 신출귀몰하게 이탈리아 군을 괴멸 시킨 주인공 오마르 무크타르(Omar Mukhtar)는 결국 잡혀서 교수형을 당합니다. 죽기 전에 이렇게 말합니다. "그 누구도 우리를 지배할 수 없소. 절대 항복하지 않을 것이오. 승리가 아니면 죽음이요. 다음 세대, 또 그 다음 세대가 투쟁할 것이요." 그의 고개가 푹 떨어지면서 쓰고 있던 안경이 툭하고 떨어집니다. 그걸로 영화는 끝입니다. 그런데 그 광경을 끝까지 지켜 보고 있던 ‘알리’라는 한 꼬마가 땅에 떨어진 오마르의 안경을 손에 집어 듭니다. 그 장면을 보는 사람들의 온 몸에 전율(戰慄)이 일어납니다.

이 영화 줄거리와 똑 같진 않습니다만,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는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 본 사울이라는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기독교의 역사는 이 사울이라는 청년에 의하며 대 반전(反轉)이 일어납니다. 스데반이 죽고, 교회에 대한 핍박이 시작됩니다. 크리스천들은 살기 위하여 뿔뿔이 흩어집니다. 이것으로 교회는 그 생명이 끊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꺼질 것 같았던 교회의 역사는 사울이라는 청년에 의하여 다시 이어집니다. 여러분, 이 장면이 드라마의 한 장면이라고 한다면, 스데반이 죽은 이 장면에 사울이라는 한 청년을 등장 시키는 데는 감독의 복선이 깔려 있습니다. 이 청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다만 돌로 스데반을 치는 사람들이 옷을 벗어 이 청년 앞에 놓아둡니다. 누가 보기에도 이 청년은 돌로 스데반을 치는 성난 사람들과 한 패로 보입니다. 누구도 그를 주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의 역사는 이 청년에 의하여 계속 이어집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이렇게 질문합니다. “당신은 크리스천으로서 올바로 살고 있는가?” 스데반은 크리스천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그의 온 몸을 바쳐 우리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여러분 중에 이 메시지를 듣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아직 우리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교회의 미래에 아직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중에 그런 사람들이 나오지 않는다면, 더 이상 소망이 없습니다. 스데반의 질문을 똑 바로 듣고 대답하십시오. “당신은 크리스천으로서 올바로 살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