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7/2016 | 성령강림절 후 열번째 주일

나의 영적 수준은? What Is My Spiritual Level?

사도행전 13:14-23


7/10/2016 | 성령강림절 후 아홉번째 주일

순례의 자락에서 At the Foot of the Pilgrimage

욥기 42:1-6


7/3/2016 | 성령강림절 후 여덟번째 주일

확장되는 교회 The Expanding Church

사도행전 6:1-7

오늘 성경 말씀은 “날이 갈수록 제자들의 수는 늘어만 갔습니다 (1절)” 이런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3,000명에서 5,000명으로, 5,000명으로 신자의 수가 늘었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But many of the people who heard their message believed it, so the number of believers now totaled about 5,000 men, not counting women and children①. / ①Greek 5,000 adult males (사도행전 4:4)” “베드로와 요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그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신자의 수는 이제 5,000명이 되었습니다. 아이들이나 여자들은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it’라는 것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제자들은 어디서든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설교했고, 사람들은 그것을 믿었습니다. 이제 신자의 수는 5,000명이 아니라 그 이상이 되었습니다. 여자들과 아이들을 모두 합하면 20,000명 정도 되었겠죠? 이젠 신자의 수가 20,000명 이상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단순히 “많은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아무 의미 없는 ‘무리 (multitude)’가 아닙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주되심 (Jesus’ Lordship)’을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주되심’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내 삶의 주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삶의 주인인 것을 인정하는 것은 예수님을 내 삶의 ‘example (본)’로 삼고, 예수님처럼 사는 것입니다. 내 주변 환경이 어떻게 변하든지, 내가 예수님을 믿어서 어떤 불이익이 오든지 상관 없이,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충실하게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이 세상의 소금이다.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다시 짠맛을 가질 수 있겠느냐?....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있는 도시는 숨겨질 수 없다 (마태복음 5:13-16)”고 말씀하셨는데, 이 사람들이야말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세상의 소금으로 살 사람들이었고, 이 사람들이야말로 세상의 빛으로 살 사람들이었습니다. 혹시 한국 영화 ‘곡성(哭聲, wailing)’을 보셨나요? 전라남도 곡성(谷城)에서 일어난 끔찍한 살인 사건을 다룬 공포영화입니다. 관객수가 600만명을 돌파했다고 합니다. 제가 본 이 영화는 단순한 공포영화가 아니었습니다.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쓴 사람이나, 이 영화를 만든 제작자들이 무슨 생각을 하면서 이 영화를 만들었는지 알 수 없지만, 제가 본 이 영화는 기독교에 대한 강력한 메시지를 던져주는 영화였습니다. 이 영화에 일본 무당 (쿠니무라 준)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전국을 떠돌아 다니면서 큰 굿을 해 주고 돈을 버는 전국구 무당 일광 (황정민)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영계(靈界)를 움직이는 대단한 힘을 가진 무당들입니다. 그리고, 주인공 종구 (곽도원)가 등장합니다. 시골 경찰서의 겁 많고 무능한 경찰입니다. 하지만, 자기 딸이 이상한 증세를 보이고 미쳐가는 것을 보면서 이 사건에 끼어들기 시작합니다.

종구는 자기 딸이 미쳐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그 마을의 신부를 찾아갑니다. 그러나, 이 신부는 영적인 세계에서 일어난 일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기 딸을 살려 보겠다고 절박한 심정으로 찾아간 사람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설교자인 제 눈에 비친 이 무능한 신부의 모습이야말로 오늘날 우리교회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미치고, 죽어가고, 끔찍한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처절한 삶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말을 지껄이고 있는 이 신부의 모습에 화가 치밉니다. 궂을 해서 영계를 주무르고, 죽은 사람을 좀비로 만들어서 부리는 무당들 앞에서, 그리고 그 마을 사람들을 지키려고 하는 로컬 귀신 무명 (천우희) 앞에서, 형식적이고 관료적인 이 신부의 한심한 모습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울화가 치밀게 합니다.

지금 교회의 모습이 이렇다는 말입니다. 지금의 한국교회의 모습이, 한국교회뿐만 아니라 2,000년의 역사를 가진 교회의 모습이 이렇게 한심하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교회에 대한 반성의 눈을 가지고 오늘 사도행전 말씀을 읽어 보십시오. 신자의 수가 5,000명이 넘었습니다. 아니, 성인 신자 수만 센다면 10,000명이 넘었을 지도 모릅니다. 오늘날 전체 기독교 신자의 수와 비교한다면, 비교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는 한 교회 신자의 수만 100,000명이 넘는 교회가 있지 않습니까?

“날이 갈수록 제자들의 수는 늘어만 갔습니다.” (1절)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이 사람들은 단순한 ‘무리’가 아니었습니다. 부활의 진리를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자신들이 왜 예수를 믿는지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세상을 책임질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오늘 말씀을 읽어보면 이 사람들 사이에 불평이 생겼습니다. 교회가 하는 구제 사업에서 왜 우리 측 사람들이 소외를 당하느냐 하는 불평이 생겼습니다. 유대인이라고 해서 모두 같은 유대인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오늘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이 있고,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은 아마도 오순절을 지키려고 예루살렘에 왔다가, 어찌어찌 하다가 예수를 믿게 되고, 신자들의 공동체에 머물게 된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이들이 자기들이 살던 곳으로 돌아가지 않고 예루살렘에 그대로 머물렀다고 가정한다면, 여기에 딸린 문제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을 텐데, 우리가 그런 걱정까지 하기에는 시간이 없습니다. 지금 중요한 문제는 교회가 하는 구제사업에서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과부들이 차별을 받고 있다는 불평이 생긴 것입니다.

신자들의 수는 늘어만 가고, 내부적으로 불평이 생겼습니다. 열 두 사도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지혜를 모았습니다. 그 말씀이 본문 2-4절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음식을 나누어 주는 일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을 소홀히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니, 형제 여러분, 여러분들 중에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다고 인정 받은 사람 일곱 명을 뽑으십시오. 그 사람들에게 이 일을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일과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온 힘을 기울이겠습니다.”

여기서 잠깐 더 앞으로 나가기 전에 몇 가지 문제를 정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첫째는, 계속해서 신자의 수가 늘어갔다는 말씀입니다. 불과 15-20여년 전만해도 ‘부흥’이라는 단어가 한국교회의 화두(話頭)였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는 한국교회가 계속해서 성장할 것이라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어떤 목사들은 공개적으로 몇 년 안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큰 부흥’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들이 말했던 ‘부흥’과는 정 반대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의 ‘부흥’을 말하는 사람들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 때 ‘부흥’을 말했던 사람들이 모두 똑 같은 생각으로 ‘부흥’을 말한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양적인 부흥을 말했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저는 사도행전에서 “계속해서 신자의 수가 늘어갔다”는 말씀을 읽으면서 이것은 하나님께서 개입하신 사건이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교회 성장에 대한 특별한 철학 없이, 많은 교인들이 모이는 대형 교회를 만들려고 했던 것이 그동안 우리가 보았던 ‘교회성장’이었다면, 사도행전에 나와 있는 교회 성장은 하나님께서 개입하신 사건이었습니다. 이것은 그 뒤에 이어지는 사도행전 말씀을 읽으면 알 수 있습니다. 곧 이어서 예루살렘 교회에 큰 박해가 일어납니다. 이 박해 때문에 교회는 풍비박산(風飛雹散)이 납니다.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서 피난을 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던 신자들은 어디를 가든지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버리지 않습니다. 바로 이것이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 (Diaspora Christians)’을 온 세상으로 보내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이었습니다.

둘째로, 교회 내부에서 생긴 불평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아니, 회개하고,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모든 물건을 공동을 사용했고, 날마다 모여서 찬송하고 기도했던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인데, 무슨 불평이 생깁니까? 불평이 생길 수 있습니다. 보세요. 바울과 바나바는 모두 하나님께서 쓰신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 사이에 불평이 있고, 싸움이 있을 수 있습니까? 있습니다. 사도행전 15:39에 “바울과 바나바는 이 일 때문에 심하게 다투었습니다”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 “Their disagreement was so sharp that they separated”라고 나와 있습니다. 두 사람이 갈라설 정도로 서로 생각이 달랐다는 것입니다. 문제가 없는 교회가 좋은 교회가 아니라, 문제를 잘 해결해 나가는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사도들은 이 문제를 가지고 지혜를 모았습니다. 사도들의 결론은 사람들을 뽑아서 일을 분담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문제를 뒤집어서 말하면, 교회 안에서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사람들과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사이에 문제가 터지지 않았더라면, 교회는 언제까지 원시적인 상태로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모든 일들을 사도들이 리더십을 가지고 해결해 나가는 시스템을 고수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터지는 바람에, 사도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사람을 뽑아 세우고, 이 사람들에게 양식을 나누어 주는 일을 맡긴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주의해서 봐야 하는 문제는 사도들이 세웠던 사람을 뽑아 세우는 기준입니다. 그 기준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다고 인정 받는 사람들’을 선발하는 것이었습니다. ‘those who are well respected and are full of the Spirit and wisdom (NLT)’입니다. NIV 성경에는 ‘those who are known to be full of the Spirit and wisdom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다고 알려진 사람들)’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겪고 있는 진통 가운데, 사람을 바르게 세우지 못해서 겪는 진통이 있습니다. 저도 이런 면에서 실수를 많이 했습니다. 또 지금도 실수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도들에게 알려 주신 기준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다고 알려진 사람들을 세우라”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중에 하나님께 자기 인생을 헌신하고 싶은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은 나의 재능을,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을 하나님께 드린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재능을 필요로 하신다고요? 하나님께서 나의 학문을 필요로 하신다고요? 하나님께서 나의 돈을 필요로 하신다고요? 하나님께서 나의 시간을 필요로 하신다고요? 어디 가서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이런 말은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도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는 그런 사람들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필요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한 번도 유능한 사람을 찾으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한 번도 돈 많은 사람을 찾으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입니다.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한 곳도 있습니다. ‘영 (spirit)’이라는 말이 잘 마음에 와 닿지 않습니다. 영은 볼 수도 없고, 어떻게 설명하기도 어렵기 때문입니다. ‘영’이라는 말과 가장 가까운 말은 ‘마음 (mind)’이라는 말입니다. 성경 말씀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We have the mind of Christ., 고린도전서 2:16)”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 경우 ‘마음’이라는 말은 ‘성령’이라는 말과 같은 뜻으로 사용되는 말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여러분이 알고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눈빛도 좀 이상하고, 하는 말도 좀 이상하고, 가까이 하기는 겁나는 사람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충만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시는 지 이해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교회가 사람이 필요할 때는 그런 사람을 찾아 세웠습니다. 그래서 세운 사람이 일곱 명인데, 그 일곱 명의 명단이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저는 그 명단을 보면서 궁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일곱 명 중에 왜 스데반에게만 ‘믿음이 좋고 성령이 충만한’이란 말이 붙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New Living Translation에는 ‘Stephen (a man full of faith and the Holy Spirit)’라고 나와 있습니다. 성경이 이렇게 기록한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교회가 필요로 하는 사람은 이런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필요로 하시는 사람이 이런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교회가 이런 사람을 길러야 합니다. 일할 사람이 없다고 아무나 세우지 말고, 이런 사람을 길러야 합니다. 교회가 이 기준을 지키지 않고 세상 기준에 맞는 사람들을 세운 열매들을 지금 거두어 들이고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 하나님께 쓰임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자기 자신이 이런 사람이 되기를 힘쓰세요.

주님의 교회가 확장되었습니다. 신자들의 수가 계속해서 늘어갔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사람이 많아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교회의 확장 속에 이들을 거룩한 목적에 사용하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가 들어 있었습니다. 교회가 사람들을 뽑아 세워서 일을 분담했습니다. 아무나 세우지 않았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사람들을 세웠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말씀은 계속 퍼져 나갔고, 제자의 수는 계속 늘었습니다 (7절). 이제, 하나님께서 이 교회를 통해서 하실 다음 일들이 기대가 됩니다.


6/26/2016 | 성령강림절 후 일곱번째 주일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 The Case of Ananias and Sapphira

사도행전 5:1-11

지금 우리는 A.D. 1세기 초에, 이 땅에 교회가 처음 생겼을 때, 어떤 모습이었는지, 그 모습을 생생하게 보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은 두 가지 일과 관계 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제자 베드로에게 “너는 베드로다. 내가 이 돌 위에 내 교회를 지을 것이니, 지옥의 문이 이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마태복음 16:18)”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읽을 때는 일종의 wordplay같은 느낌이 듭니다. 베드로의 원래 이름은 ‘시몬 (Simon)’이었습니다. “그가 들었다 (He has heared)”라는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이름을 ‘베드로’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영어로는 ‘피터 (Peter)’라고 하지만, 원래는 그릭 (Greek) 이름입니다. ‘Πετρος (페트로스)’입니다. ‘stone (돌, 바위, 반석)’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아람어로는 게바 (Cephas)입니다. 역시 ‘돌’이라는 뜻입니다. 주님은 약속하신 대로 이 땅에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반석이라고 이름을 바꾸어 주신 베드로는 교회의 큰 지도자가 됩니다.

둘째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낸다. 그러므로 너희는 위로부터 오는 능력을 입을 때까지 이 성에 머물러 있어라 (누가복음 24:49)”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대로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고, 제자들은 모두 약속하신 성령을 충만하게 받았습니다.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모두 밖으로 나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베드로가 밖에 나가서 사람들에게 했던 설교가 나와 있습니다. 그 설교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유대 사람들, 그리고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시민 여러분, 우리에게 일어난 일을 여러분께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제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사도행전 2:14) 베드로의 이 설교를 듣고 3,000명이 세례를 받고 예수님을 믿기로 결심했다고 합니다.

이 사람들은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같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날마다 같이 모여서 찬송하고, 기도하고, 같이 식사를 하고,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 사람들이 물건을 필요한대로 나누어 썼습니다. 자기들의 property, possessions, money, 이런 것들을 서로 나누어 썼습니다. 이 사람들 중에는 부자도 없고, 가난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There were no needy people among them, because those who owned land or houses would sell them and bring the money to the apostles to give to those in need.” (사도행전 4:34-35) “그들 중에는 가난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이 그것을 팔아서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사도들에게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이런 중에, 주목할만한 두 가지 사건이 터집니다. 하나는, 나면서부터 한 번도 걸어 본 적이 없는 사람 하나가 일어난 걷게 된 기적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 사람은 날마다 ‘아름다운 문 (The Beautiful Gate)’ 앞에 앉아서 성전에 기도하러 가는 사람들에게 구걸을 했기 때문에, 이 사람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나은 것입니다. 사람들이 보는 데서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에, 이 소문이 삽시간에 온 예루살렘에 퍼졌습니다. 베드로는 왜 이 사람에게 이런 기적이 일어났는지 설명을 해야 했습니다. 그 말씀이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여러분, 왜 이 일로 놀라십니까? 왜 그런 눈으로 우리를 보고 계십니까? 우리의 능력이나 우리의 경건함 때문에 이 사람이 걸을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믿음 때문에, 여러분이 보고 아는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3:12, 16) 꼭 이 사람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겠지만, 누가는 “베드로와 요한의 설교를 들은 사람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갖게 되었는데, 그 수가 5,000 명 정도나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4:4)

그리고, 또 하나의 사건이 터집니다. 그 사건이 오늘 읽은 사도행전 말씀입니다. 이 사건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땅이나, 집이나, 소유물, 돈을 자발적으로 사도들에게 가져 오는 중에 일어난 불미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이 사건의 의미를 말씀 드리기 전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정말 그런 일이 가능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불가능하지요? 정상적인 우리의 판단이나, 이성이나 판단으로 볼 때, 불가능합니다. 지금도 그런 일이 있기는 합니다. 이단들이 사람들을 속이고 manipulate합니다. 교묘하게 사람들을 속아 넘어가도록 작업을 해서 재산을 바치고, 돈을 바치도록 합니다. 그러나, 정상적인 판단으로 과연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우리는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을 쓴 누가는 분명히 그런 일들이 있었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세례를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을 믿는 사람들에게서 이런 일들이 일어났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과정 속에 함께 하셨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 말씀이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늘어나게 하셨습니다 (And each day the Lord added to their fellowship those who were being saved).” (사도행전 2:47)

여러분,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십니까? “사람은 할 수 없으나, 하나님께서는 할 수 있다.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Humanly speaking, it is impossible. But not with God. Everything is possible with God)." (마가복음 10:27) 우리들의 생각과 우리들의 경험과 우리들의 판단으로서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 속에 개입하시면, 이런 일이 가능합니다.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 나오고, 성경을 보면서 늘 자신의 이성적인 판단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성경 말씀보다 자기 생각이 맞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으면서도 이런 일은 맞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오해하지 말고 들으세요. 여러분 중에도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아무 이유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자기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아니잖아요? 성경은 하나님께 불가능한 일이 없다고 말씀 하잖아요? 베드로와 요한도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까? “이 사람을 낫게 한 능력은 우리들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믿음에서 나왔다”고 하지 않습니까?

자기 property를 팔아서, 자기 possessions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자기 돈을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던 이 일을 맨 처음으로 했던 사람은 바나바 (Barnabas)라는 사람이었습니다. 마침 지난 주 설교 때 장석재 목사님께서 바나바에 대한 설교 말씀을 하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그나마 바나바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많은 정보가 있습니다. 본래 이름은 요셉이었고요. 키프러스 (Cyprus)라는 지중해 연안의 섬 출신입니다. 그리고, 레위 사람이었고요. 바나바에 대한 가장 결정적인 말씀은 사도행전 11:24 말씀입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 (Barnabas was a good man, full of the Holy Spirit and strong in faith. And many people were brought to the Lord).” 바나바가 ‘good man’이었다는 말도 인상 깊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He was full of the Holy Spirit’이 말씀이 바나바라는 사람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합니다. 그는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자신의 판단이나 자기 자신의 욕심이나, 자기 자신의 이기심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일에 최고의 가치를 둡니다. 그래서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은 자신의 기쁨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바나바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처음 기초를 놓는 과정에서 바나바 같은 사람을 크게 사용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지금의 교회가 교회의 본래 모습이 아니라는 것, 교회는 끊임없이 회개하고, 새로워지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을 새로워져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 바나바 같이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바나바는 키프러스에 있는 자기 밭을 팔아서 사도들에게 가져왔습니다. 바나바가 그렇게 하니까 너도 나도 자기 재산을 팔아서 사도들에게 가져왔습니다. 그 중에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있었습니다. 아나니아는 자기가 가진 땅 중에 얼마를 팔았습니다. 그리고 땅을 판 돈 중에 또 얼마를 떼어 숨겨 놓고, 나머지 돈을 사도들에게 가져왔습니다. 그의 아내 삽비라도 이 모든 일을 알고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5:2)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With his wife's consent, he kept the rest.” “자기 아내의 동의 하에 그는 나머지 돈을 따로 보관했다.”

이 부부의 불행한 말로(末路)는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아나니아에게 말했습니다. “어찌하여 그대는 성령을 속입니까? 그대가 땅을 판 돈을 떼어 놓고 일부를 가져 온 것은 사람을 속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속인 것입니다.” (사도행전 5:3-4) 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나니아는 그 자리에 쓰러져 죽었습니다. 자기 남편이 죽은 줄도 모르고 삽비라가 그 자리에 왔습니다. 베드로가 물었습니다. “그대와 그대의 남편 아나니아가 땅을 팔아서 받은 돈이 이것뿐이오?” 삽비라는 “예, 그것뿐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말에 베드로가 삽비라를 책망합니다. “어찌하여 그대들은 서로 짜고 주님의 성령을 시험할 수 있단 말이오?” 이 책망을 듣고 삽비라도 그 자리에 쓰러져 죽었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네요. “How could the two of you even think of conspiring to test the Spirit of the Lord like this?” “어떻게 당신들 두 사람은 성령을 시험하기 위해서 이렇게 음모를 꾸밀 수가 있습니까?”

결국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불과 몇 분 간격으로 죽었습니다. 정말 끔찍한 일입니다. 지금까지 교회 안에 늘 좋은 일만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일까요? 재산을 팔아서 모두 헌금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헌금할 때 정직하게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불행한 일이 생긴다는 것입니까? 오늘 이 말씀이 주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그것을 알 수 있는 단서(端緖)가 있습니다. 5절에 있는 “이 소식을 들은 모든 사람들은 몹시 두려워했습니다” 이 말씀과, 11절에 나오는 “온 교회와 이 일을 들은 모든 사람들이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Great fear gripped the entire church and everyone else who heard what had happened)” 이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나오는 ‘fear’라는 단어는 단순히 우리가 알고 있는 ‘무서움’이나 ‘두려움’이 아닙니다. 사전에 보면 ‘reverential awe, especially toward God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이라는 설명이 나옵니다.

초대교회에서 일어났던 불미스러운 일, 부부가 한 자리에서 죽은 이 끔찍한 일을 통해서 사람들은 하나님께 대한 두려운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두려움은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에서 나온 두려움이었습니다. “아, 우리 가운데 하나님께서 계셨구나!” “하나님께서 지금 이 교회, 우리 공동체를 움직이고 계시는구나!” “우리가 복음을 듣고, 회개하고 세례를 받고, 예수님을 믿은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었구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 사건은 끔찍한 일이었지만,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두려운 마음을 심어 주었습니다. 이것은 단순이 잘 나가던 초대교회 공동체에서 일어났던 불미스러운 일이 아니라,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교회가 회복해야 할 것이 있다면, 이런 하나님을 향한 두려운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이 두려운 마음 때문에 우리가 주고 받는 말들이 진실해야 하고, 우리의 행동이 정직해야 하고, 우리가 맡은 일에 대하여 신실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선포하는 말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정직하게 대변(代辨)하는 말씀이 되어야 하고,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그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고 두려운 마음으로 들어야 하지 아니겠습니까?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 (Martin Luther, 1483-1546, 독일)는 하나님께 대한 두려운 마음을 ‘코람 데오 (Coram Deo)’라는 말을 사용해서 자신의 신학을 정립했습니다. 영어로 하면 ‘before God’ ‘in the presence of God’ ‘하나님 앞에서’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교회를 운행하고 계신다는 거룩한 두려움이 우리 가운데 회복 되기를 바랍니다.


6/19/2016 | 성령강림절 후 여섯째 주일

바나바처럼 섬기자 Serve the Lord like Barnabas

사도행전 4:36-37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 바나바는,

1. 별명이 위로자입니다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사도행전 4:36)

별명(別名, nickname)에 대하여
신앙인으로 좋은 별명을 갖는 것은 참으로 복된 일입니다. 열심히 그렇게 살았기에 얻은 별명도 있고, 그렇게 살라고 지어준 별명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시몬은 성질이 급하고 과격하여 변덕을 부릴까 봐서 예수님은 그에게 베드로 (바위)라는 별명을 지어 주십니다. 천년 억겁에 흔들리지 않는 바위처럼 교회의 초석이 되라고 말입니다. 야곱은 얍복강 가에서 천사와 씨름하다가 하나님께로부터 이스라엘이라는 별명을 얻습니다. 사람 발목 잡던 사람이 이젠 하나님께 붙잡혀 살라고, 하나님과 씨름하라고, 사람에서 하나님으로 삶의 방향을 전환하라고, 그런 별명을 주신 것입니다.

바나바의 원래 이름은 요셉인데, 레위 족속이니까 제사장 가문입니다. 성전에서 제사장으로 혹은 찬양대로 섬기던 족속이죠. 그의 출생지는 키프러스 (Cyprus) 섬입니다. 현재는 터키가 섬의 북쪽 절반을 점령하여 분단된 국가가 되었습니다.

사도들이 그에게 바나바 (Barnabas)라는 별명을 지어 주었습니다. (Barnabas, which means "one who encourages others") 영어 성경에는 남을 격려하는 사람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위로자도 좋지만 격려자가 더 좋은 번역입니다. 참으로 아름답고 복된 별명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이런 복된 별명을 얻으시길 축원합니다.

 

2. 헌신적인 사람입니다.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사도행전 4: 37)

바나바는 하나님을 위해서, 교회공동체를 위해서 재물이 아깝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초대교회의 신앙의 기초를 세우는데 헌신의 모범을 보인 인물입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주님의 말씀에 비추어보면, 우리는 모두 재물을 헌납하는데 많이 망설이게 됩니다. (마태복음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오늘날 가장 큰 우상 하나님을 섬기는데 가장 큰 장애물은 재물입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과 교회를 위하여 자기의 전 재산인 밭을 아깝게 여기지 않고 팔아서 교회 사도들의 앞에 가져왔습니다.

 

3. 사람을 아끼고 일군을 세우는 사람입니다.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 (사도행전 9:26-27)

회심하기 전 청년 사울은 교회에게 공포와 기피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아주 무서운 박해자요 폭력자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회심하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하니까 모두 마음 속으로 접근 금지라는 방어벽을 치고 두려워하고 믿지를 못하고 꺼려했습니다. 그때 바나바는 예루살렘교회의 제자들에게 그를 대변하여 소개하고 있습니다.

남의 대변자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도 아주 악한 과거가 있는 사람을 “변화되었으니 이제 그 사람을 믿으십시오. 함께 합시다” 라고 사귐을 권면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그런데 바나바는 사울의 회심을 진심으로 믿었고, 그의 진심을 제자들에게 소개함으로 사도 바울을 교회의 일원이 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초대교회의 가장 위대한 사역을 감당한 사도로 쓰임 받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고 일군을 길러 내야 합니다. 특별히 조만식 장로님 같은 분은 자기의 제자에게 꾸중을 듣고도 오히려 담임목사의 말에 순종하여 예배가 끝날 때까지 서서 예배를 드림으로 겸손한 섬김의 귀감이 되셨습니다. 오산학교 제자인 젊은 담임목사가 예배시간에 좀 늦었기로서니 연로하신 장로님에게 “그 자리에 서서 예배 드리시오” 라고 했다면, 그 목사는 교회에서 쫓겨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젊은 목사가 건방지게, 그것도 제자가 스승에게 함부로 말을 했다고 말입니다.

 

4. 화해자입니다.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사도행전 15:37-38)

마가라는 요한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가 서로 심히 다투었다고 39절에 기록되었습니다. 마가라는 요한은 밤빌리아에서 힘들다고 사역을 팽개치고 돌아갔습니다. 그런 사람은 일꾼으로 소용이 없다고 생각한 바울과, 다시 한번 기회를 주자는 바나바가 다투다가 결국 바울은 실라를 택하여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가고, 바나바는 마가라는 요한을 데리고 키프로스로 갑니다. 칼같은 성격의 소유자인 바울의 눈에 마가라는 요한은 복음 사역의 동역자로서 낙제였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젊은 나이의 마가에게 실수를 감싸주고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결국 바울은 디모데후서 4:11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바울도 종당에는 마가가 자기 일에 유익한 동역자임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것은 바나바의 관용의 마음과 넓은 마음이 일군을 세우고 악화된 관계를 회복시키는 화해자의 삶을 살게 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들이 가시는 곳마다 분열과 갈등이 잠잠해지고, 화해하고, 화목하고, 평화로운 교회가 되시기를 간절하게 소망합니다.

이왕에 주님을 섬길 것이면, 이왕에 주님께 충성할 것이면, 바나바처럼 섬깁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