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모음
4/3/2016 | 부활절 둘째 주일
성령을 받아라. Receive the Holy Spirit.
요한복음 20:19-23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궁금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은 지금 어디서 무슨 일을 하고 있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매우 궁금합니다. 성경 곳곳에 흩어져 있는 말씀들을 하나씩 읽어 보면서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재구성을 해 보려고 합니다.
마태복음 28장에 그 당시 상황을 엿볼 수 있는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지키던 경비병들은 대제사장들에게 무덤에서 일어난 일들을 그대로 보고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긴급하게 회의를 합니다. 그리고 경비병들에게 돈을 주면서 소문을 퍼뜨리라고 합니다. “밤에 예수의 제자들이 와서, 우리가 잠든 사이에 그 시체를 훔쳐 갔다”는 소문을 내라고 합니다. 순전히 조작된 소문입니다. 경비병들은 돈을 받고 시키는 대로 소문을 냅니다. 마태는 이 사실을 그의 복음서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래서 이런 소문이 유대인들 사이에 널리 퍼지게 되었고, 오늘날까지 많은 유대인들은 그렇게들 알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8:15)
그러면, 그 시각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오늘 읽은 요한복음 20장에 그 시각에 있었던 제자들의 행방을 엿볼 수 있는 말씀이 나와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같은 날 저녁에'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NKJV에는 이 말씀이 ‘The same day at evening, being the first day of the week (한 주의 첫 날인 그날 저녁)’라고 나와 있습니다. NLT 성경에는 ‘That Sunday evening’이라고 나와 있고, ‘In the evening of that day, the first day of the week (한 주일의 첫 날 저녁)’라는 footnote가 달려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같은 날 저녁을 말합니다. 시간이 제법 지났을 것 같은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지 삼일 째 되는 날 저녁입니다. 그날 저녁 제자들은 예루살렘의 한 집에 함께 모여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유대인 지도자들이 두려워서 문을 꼭 걸어 잠그고 있었습니다. 지금 밖에서는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의 시체를 훔쳐갔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언제 유대인 지도자들이 보낸 군인들이 들이닥칠지 알 수 없는 긴박한 때였습니다. 제자들은 극도의 두려움과 공포에 떨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요한은 그 때의 상황을 생생하게 그의 복음서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한 곳에 모여 있습니다. 제자들은 문을 꼭 잠그고 숨어 있습니다. 그런데, 정황상,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에 갔던 여자들이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다는 것, 그리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천사의 말을 들었다는 것, 그리고, 여자들의 말이 자기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소식을 이미 들은 후였습니다 (요한복음 20:2). 제자들은 그 여자들의 말을 가볍게 여겼습니다.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 말을 허튼 소리로 듣고 여자들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But the story sounded like nonsense to the men, so they didn't believe it).” (누가복음 24:11) 그리고, 베드로 같은 제자는 여자들이 말한 대로 무덤이 비어있다는 것을 확인한 후였습니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 “그러나 그는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요한복음 20:9)”라고 기록했습니다.
제자들은 여전히 불안했습니다. 극도의 공포가 그들을 엄습했습니다. 문을 꼭꼭 걸어 잠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누가 문을 열어 준 것도 아니고, 누가 들어온 인기척도 없었는데, 갑자기 예수님께서 두려움으로 떨고 있는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Peace be with you!” 하고 먼저 인사를 하셨습니다. 히브리 말로 ‘Shalom’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전도하러 내 보내시면서 부탁하셨던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이 집에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라고 말하여라.” (누가복음 10:5) 이 말씀 그대로, 예수님은 제자들을 찾아 오셔서 같은 메시지를 전하셨습니다. 생각해 보면, 바로 이것이 오늘날 교회가 세상에게 선포해야 할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참 안타깝습니다. 교회가 이 메시지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세상에게 줄 메시가 없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평안, 하나님의 ‘shalom’을 잃어 버렸기 때문에, 세상에게 줄 메시지를 상실하고 만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shalom’을 원합니다. 예전에 우리교회 한 벽에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준다.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라는 말씀이 쓰여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4:27 말씀이지요?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제게 말했습니다. 교회에 처음 나왔을 때 그 말씀이 퍽 인상 깊었다고요. 물론 그 때는 영어로 “Peace I leave with you, My peace I give to you; not as the world gives do I give to you”라고 KJV으로 적혀 있었습니다. 그만큼 사람들이 벽에 쓰여진 글자를 통해서도 마음에 위안을 받는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죠슈아 리브만 (Joshua Liebman)이라는 유대 랍비가 쓴 ‘마음의 평화(The Peace of Mind, 1946)’ 라는 책을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보스턴에 있는 Temple Israel에서 랍비로 있었습니다. 그가 쓴 이 책은 뉴욕 타임즈 베스트셀러 리스트에 무려 일년 동안이나 #1자리를 지켰던 책으로도 유명합니다. 이 책에 한 청년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청년은 바로 리브만 자신이었습니다. 그 청년의 이야기를 통해서 왜 자기가 이 책을 쓰게 되었는지 그 배경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청년은 자신의 미래에 대해 야심이 많았습니다. 이루고 싶은 것도 많았고 추구하고 싶은 것도 많았습니다. 건강, 사랑, 재물, 아름다움, 재능, 권력, 명예 이 모든 것을 얻는 것이 이 청년의 야심이었습니다. 한 현자가 이 청년에게 충고합니다. “여보게, 젊은이, 이 모든 것을 가진다고 해도 마음의 평화가 없이는 그대는 행복하지 않을 것이네.” 이 말에 충격을 받은 리브만은 “맞다. 우리 모두가 정말 원하는 것은 다른 어떤 것도 아닌, 마음의 평화이다. 내가 이것을 책으로 쓰리라” 이렇게 해서 1946년에 나온 책이 ‘마음의 평화 (The Peace of Mind)’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얻는 평안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잘 자라고, 공부도 잘하고, 사업도 문제 없이 순탄하게 잘 됩니다. 이렇게 아무 걱정이 없는 데서 오는 평안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평안은 그리 오래 가지 않습니다. 잠깐 동안의 평안입니다. ‘temporary peace’라고 할까요? 한 동안 별 일 없이 평안했는데 얼마 가지 않아서 걱정거리가 생깁니다. 이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평안은 이런 평안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 같지 않다”고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이 예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감동과 은혜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별 특별한 일은 아닙니다.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준다 (My peace I give to you)" 이 말씀을 읽는 순간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입니다. “아, 예수님께서 ‘나의 평안, my peace’라고 하셨으면 예수님은 자기가 가지고 있었던 그 평안을 지금 제자들에게 주시려고 하는구나!” 이런 생각을 할 때,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도 이런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마음 속에 평안을 주실 때, “아, 예수님도 지금 내가 느끼는 것과 똑 같은 평안을 느끼고 계셨구나!” 이런 생각을 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배가 됩니다.
오늘 성경을 꼼꼼하게 잘 읽어 보세요. 그렇게 두려움과 공포로 문을 걸어 잠그고 숨어 있던 제자들에게 어느 새 그 두려움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 나타나셨기 때문에요?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셨기 때문에 그랬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샬롬, 샬롬의 메시지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새 제자들의 두려움은 기쁨으로 변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전해 주신 하나님의 샬롬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As the Father has sent me, so I am sending you.”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I am sending you to the world”라고 말해야 합니다. 지금 예수님은 불안과 두려움과 걱정과 근심 속에 살고 있는 세상 사람들에게, 자기 제자들을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평화의 메시지를 듣고 지금 막 두려움을 물리친 제자들을 세상 사람들 속으로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인간에 대하여 잘 아십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연약함 (weakness)을 잘 아십니다. 우리가 얼마나 잘 넘어지는 사람들인지, 우리가 얼마나 실수투성이 사람들인지, 심지어 우리는 자기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할지도 모르는 연약한 사람들인 것을 잘 아십니다. 다시 제자들이 작은 일에도 실망하고, 절망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인 것을 잘 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을 밑바닥부터 변화된 새 사람이 되게 해서, 세상으로 내 보내려고 하십니다.
22절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성령을 받아라!” 제가 이미 여러 번 말씀 드렸습니다. 왜 성령을 받아야 하는지, 왜 우리가 성령에 대한 지식을 가져야 하는지, 그리고 성령을 받고 체험하는 일에 집중해야 하는지 이미 몇 차례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런 말씀을 알고 계십니까? “나는 물로 회개의 세례를 준다. 내 뒤에 오실 분은 나보다 능력이 더 많으신 분이다. 그 분은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I baptize with water those who repent of their sins and turn to God. But someone is coming soon who is greater than I am. He wi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and with fire).” (마태복음 3:11) 이 말씀 속에 물 세례란 말이 나오고, 성령 세례란 말이 나옵니다.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께 돌아가야 하겠다고 마음 먹은 사람들이 받는 세례가 물 세례입니다. 문제는 이렇게 마음을 고쳐 먹고, 물 세례를 받는다고 해서 이 사람이 새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잖아요? 새사람이 되는 일은 그렇게 간단하게 마음 먹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내 인생 속에 하나님의 개입이 없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이것이 성령 세례입니다. 똑 같은 뜻으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다시 태어나야 한다’라고 말한 것에 너무 놀라지 마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모든 사람도 이와 같다 (So it is with everyone born of the Spirit).”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일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가 크리스천이 아니라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면, 우리가 자기 일에 집중하고, 자기 일을 하면서 살아갈 사람들이라면 성령을 받지 않아도 됩니다. 아니, 성령을 받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살지 않겠습니다. 보다 가치 있고, 보람 있는 일을 하면서 살 것입니다. 나는 지금 나의 삶에 결코 만족하지 않습니다. 다 나은 삶을 찾고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보세요. “내가 너에게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말한 것에 놀라지 마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니고데모 (Nicodemus)라는 사람에게 한 말씀입니다. 이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아십니까? “There was a man of the Pharisees named Nicodemus, a member of the Jewish ruling council.” (요한복음 3:1) 또 니고데모에 대하여 이런 말도 나옵니다. “He was a respected Jewish teacher.” (요한복음 3:10) 바리새파 사람입니다. 유대 사회를 움직이는 70인 중 한 사람입니다. 존경 받는 랍비입니다. 그러니, 성경을 얼마나 잘 알겠습니까? 그러니, 얼마나 철저하게 경건생활을 잘 했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것들이 다 소용 없습니다. 그의 인간성이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니고데모는 그냥 그렇게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사는 삶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 온 것 아닙니까?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이대로 살고 싶으면 괜찮아요. 우리 청년들은 무난히 공부해서 학위 받고, 회사에 취직하든지, 학교에서 가르치든지 하면서 사는 것으로 만족하려면, 성령에 대하여 몰라도 상관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삶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라면, “아니, 그보다 더 가치 있는 삶이 분명히 있을 것 아닙니까?” 하고 질문을 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성령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거듭나야 합니다. 새로 태어나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사람이 하나님의 일에 눈을 뜨게 됩니다. 그래야 그 사람이 하나님의 일에 헌신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그 사람이 하나님께 쓰임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아라!” 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Nominal Christian이 있고, devout Christian이 있습니다. 전자는 이름만 가지고 있는 크리스천을 말합니다. 후자는 헌신적인 크리스천을 말합니다. 평생 nominal Christian으로 살아가려면 성령에 대하여 몰라도 됩니다. 그러나, devout Christian으로 살아가려면 반드시 성령에 대하여 알아야 합니다. 단순히 성령에 대한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을 받아야 하고, 성령을 체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인생 속에 개입해 들어오셔서 나를 새사람으로 바꾸어 놓으셔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숨을 내 쉬시면서 “성령을 받아라”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예전 크리스천들에게는 죄, 회개, 거듭남, 성령 세례, 성령 충만, 성령 체험, 이런 말들이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이런 말들이 크리스천들 사이에서, 교회에서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말 대신 세련된 다른 이슈들이 교인들의 관심을 끌었고, 목사들의 설교를 채웠습니다. “바로 이것이 크리스천의 삶의 능력을 약화 시킨 이유가 아닌가? 바로 이것이 교회의 정체성을 상실하게 만든 이유가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3/27/2016 | 부활 주일
주 안에서 굳게 서라. Stand Firm in The Lord.
고린도전서 15:55-58
여러분은 오늘 말씀 들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아가 8:6)”라는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죽음이 얼마나 강합니까? 죽음 앞에서 쓰러지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아무리 힘센 사람이라도 결국 죽음 앞에서 쓰러지고 맙니다. 그런데, 아가서를 쓴 솔로몬은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다 (For love is as strong as death)”라고 했습니다. 죽음이 강하긴 하지만, 사랑 역시 죽음처럼 강하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얼마나 강한지, 사랑의 불길은 바닷물로도 끌 수 없고, 강물로도 끌 수 없고, 남자가 자기 재산을 다 바쳐도 한 여자의 사랑을 얻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솔로몬의 사랑은 여기까지 였습니다. 바닷물로도 끌 수 없는 사랑의 열기(熱氣), 자기 재산을 다 바쳐도 얻을 수 없는 사랑, 그것이 솔로몬이 알고 있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고린도전서 말씀을 읽으면서, 죽음보다 강한 사랑이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바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 지, 그 사랑이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죽음을 이겼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세요.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죽음아! 너의 찌르는 것이 어디 있느냐?” (55절) 이게 무슨 말씀인가요? 죽음을 조롱하는 것입니다. “어디, 죽음아, 네가 그렇게 강하다지? 네 앞에 쓰러지 않는 사람이 없다지? 그래 네 무기가 있으면 한번 사용해 봐!” 이런 말씀 아닙니까? 세상에! 죽음을 놀리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을 조롱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이 말씀이 정말 무슨 말씀인지, 조금 더 자세하게 읽어 볼까요? “죽음이 찌르는 것은 죄이며, 죄의 힘은 율법입니다.” (56절) 정말 알쏭달쏭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For sin is the sting that results in death, and the law gives sin its power.” “죄란 죽음을 가져 오는 독침입니다. 죄라는 독침을 맞으면 다 죽습니다. 그런데, 죄가 그렇게 강한 힘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율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율법이 존재하는 한 죄는 계속해서 막강한 힘을 가질 것입니다. 독침을 가지고 사람을 쏠 것입니다. 그 독침을 맞으면 그 누구도 살 수가 없습니다.
계속해서 다음 말씀을 읽어 보십시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이건 또 무슨 말씀인가요? 여기에 두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율법]→[죄]→ [죽음]의 공식이 깨졌다는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여기까지만 해도 [율법]→[죄]→[죽음]의 공식이 성립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문제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부활하심으로 지금까지 누구도 피할 수 없었던 공식이 깨지고, 새로운 공식이 생겼습니다. [율법]→[죄]→[죽음]→[부활], 이런 공식입니다.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이라는 사실입니다 (로마서 10:4). 예수님을 율법의 ‘끝판 왕’ 혹은 ‘종결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고, 그 율법을 잘 지킴으로써 우리에게 주시려고 했던 모든 benefits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모두 주어지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된 마음으로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하게 지킨 것과 같은 의미를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처음부터 [율법]→[죄]→[죽음]의 공식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바로 이것이 바울이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로마서 8:1)”라고 말한 이유입니다.
다시 오늘 말씀으로 돌아가 생각해 보십시오.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죽음아! 너의 찌르는 것이 어디 있느냐?” (55절) 이렇게 죽음을 조롱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부활의 첫 열매 (The Firstfruits of Resurrection)’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고린도전서 15:23). 또 누가 죽음을 그렇게 조롱할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은 사람들 중에 처음으로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분이기 때문에 ‘부활의 첫 열매’입니다. 첫 열매가 열리면 계속해서 다음 열매가 열립니다. 씨앗을 심고, 물을 주고, 거름을 주고 해서 드디어 첫 열매가 어렵게 열렸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부터는 쉽게 계속해서 열매가 열립니다. 이 열매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입니다.
크리스천의 가장 큰 특징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누구에게 배웠습니까? 우리 주님, ‘부활의 첫 열매’이신 우리 주님께 배웠습니다. 우리 주님이 가르쳐 주셨습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원한 삶의 시작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죽음을 우습게 봅니다. 죽음을 조롱합니다.
제가 1979년에 결혼을 했습니다. 제 결혼식 주례를 서 주신 분이 제 모교인 감리교 신학대학의 학장이셨던 윤성범 목사님이십니다. 정확하게 결혼식 1주년이 되었을 때 그분이 돌아가셨습니다. 그 때 허전했던 마음은 무엇이라고 표현할 길이 없었습니다. 장례식이 학교 강당에서 있었습니다. 저도 물론 장례식에 참석했었습니다. 장례식이 진행되는데, 설교 전에, 다음 학장이 되신 변선환 목사님이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 말씀이 바로 오늘 읽은 고린도전서 15:51-58 말씀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보다 조금 더 긴 말씀입니다. 변선환 목사님이 특유의 목소리로 이 말씀을 또박또박 읽어가시는데, 전 그 때 그 말씀을 들으면서 숨이 막혀 죽는 줄 알았습니다. 전 성경 말씀이 그렇게 파워풀 (powerful)하다는 것을 그 때 경험을 했습니다. 물론 머리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powerful 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말씀의 강력한 능력을 체험한 것은 그 때 그 시간이었습니다.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죽음아! 너의 찌르는 것이 어디 있느냐?......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님의 일을 위해 자신을 드리십시오. 주님을 위해 일한 여러분의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는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성경 말씀이 끝이 나는데, ‘정말 죽음을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을 그 때 느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는 참으로 풍성합니다. 그러나, 그 은혜 중의 은혜는 죽음을 이기게 하시는 능력입니다. 저는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 3장에서 “이제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그 능력을 체험하며,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고, 그분과 같이 죽는 것입니다. 그분을 따를 수만 있다면, 나도 마지막 날 부활의 기쁨에 참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빌립보서 3:10-11)” 이렇게 말했을 때, 그가 그토록 체험하기를 원했던 ‘부활의 능력 (the mighty power that raised Jesus from the dead)’ 그리고 ‘부활의 기쁨’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볼까요?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죽음을 조롱할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설교 처음 시작하면서 죽음을 이기는 사람이 없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가, ‘부활의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를 따라 부활의 소망을 붙잡고 사는 우리가, 죽음을 이긴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것은 비유적으로 말하면, 그동안 누구도 풀 수 없었던 난제 (難題)를 푼 것과 같습니다. 수학이나 물리학에서 인류가 풀지 못한 난제가 많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1998년에 보스턴의 부호 랜던 클레이 (Landon D. Clay)가 기금을 내고, 하바드 대학교의 수학자 아더 재피 (Arthur Machael Jaffe)가 ‘Clay Mathematics Institute’를 열었습니다. 지금까지 인류가 풀지 못했던 7가지 난제가 있는데, 이 중 하나를 푸는 사람에게 100불 현상금을 걸었습니다. 그 연구소 본부가 피터보로 (Peterborough, NH 03458)에 있다고 하는데, 수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한번 방문해 보시지요. 한국에도 KAIST 안에 ‘수학난제연구센터’가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제가 7가지 난제들 제목들만 훝어 봤는데, 제가 감히 풀 수 있는 그런 문제들이 아니었습니다. 한번 이런 생각을 해 보세요. 누가 이 중 한 문제를 풀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이 사람은 틀림없이 굉장한 실력자일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고등학교 일반 수학 문제를 줘 보세요. 아마 쉽게 풀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에게 아주 어렵다는 문제도 그런 사람에게 주면 아마 쉽게 풀 것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그런 사람과 같습니다. 죽음을 조롱할 수 있는 사람은 그의 삶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도 별 것 아닙니다. 작은 문제에 불과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정말 심각한 문제라고 할지라도, 죽음을 이기는 사람에게는 아무 문제도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멋모르고 ‘부활신앙’을 말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진정한 의미에서 ‘부활신앙’을 알고 있다면, 정말 겁날 것 없을 것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이보다 더 큰 자산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 이유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일으킨 ‘부활의 능력’을 알고 싶다고 했던 것입니다.
크리스천의 삶에 대하여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본 회퍼 (Dietrich Bonhoeffer, 1906-1945, 독일)라는 이름을 들어 봤을 것입니다. 본회퍼는 그 시대가 낳은 대단한 신학자였습니다. 나치에 저항하다가 1943년에 체포되어 수감 생활을 하다가, 2차 대전이 끝나기 바로 직전에 사형을 당했습니다. 신학계로 보면 대단한 손실이었습니다. 그에 대한 구명 운동이 전개되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는 사형을 당하기 전 이런 유언을 남겼습니다. “This is the end–for me, the beginning of life (이것으로 끝입니다. 하지만 나에게는 새로운 삶의 시작입니다).” 그의 말 속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까? 예수님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었던 것처럼, 본회퍼에게도 죽음은 끝이 새로운 시작이었습니다. 누가 이런 사람을 감당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면 이 ‘부활신앙’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의외로, 성경에는 ‘부활신앙’에 대하여 아주 쉽게 나옵니다. 이런 면에서도 성경은 누구나 들을 수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복된 말씀입니다. 고린도전서 15:23 에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 ‘그리스도의 사람 (those who are Christ's)’,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 (all who belong to Christ)’,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는 사람 (all who cling to Christ)’이라고 합니다. 의외로 답은 간단합니다. 부활신앙은 그리스도에게 신실하게 속해 있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내 안에 있어라. 그러면 나도 너희 안에 있겠다 (요한복음 15:5)”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NIV 성경에 “If a man remains in me and I in him”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remain’이라는 말이 ‘머물러 있다’ ‘.......안에 거하다’ 이런 뜻 아닙니까? 무슨 굉장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꾸준하게, 성실하게 예수님 안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꾸준하게 예수님께 붙어 있는 것입니다. 꾸준하고 성실하게 예수님께 속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내 안에 들어오시는 삶의 비결입니다. 꾸준하고 성실하게 예수님께 붙어 있는 것, 이 이상 축복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한 개인의 얘기를 해서요. 그래도 이런 때에 한번이라도 칭찬을 해 주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벌써 10년 이상 되었을 것입니다. 꾸준하게 교회 꽃꽂이를 하시는 권사님이 있습니다. 그분이 누군지 모르는 분들이 많은 것입니다. 처음에 배수찬 권사님 내외가 우리교회에 나왔습니다. 어느 날, 부인 고은경 집사님이 교회 꽃꽂이를 자기가 해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이게 쉬운 것 같지만 힘든 일이거든요. 그래 제가 그랬어요. 한번 더 생각해 보라고요. 주님의 일은 한번 시작하면 끝까지 해야 하는데, 중간에 힘들다고 그만 둘 것이면 아예 시작 안 하는 것이 낫다고 말해줬습니다. 며칠 후에 고 집사님이 자기가 한번 해 보겠다고 했습니다. 그 때 이후에 지금까지 교회 꽃꽂이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지금 그 얘기를 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님의 일을 위해 자신을 드리십시오.” (57절) 이 말씀이 왜 나오게 되었는지 앞 뒤를 잘 살펴 보세요.
그리스도에게 속한 우리는 죽음을 이기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조롱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들입니다. 비유적인 의미에서, 우리는 인류의 난제를 풀어낸 탁월한 수학자와 같습니다. 죽음을 해결한 우리가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우리에게는 승리가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보다 먼저 승리를 쟁취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라서 우리도 승리를 쟁취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믿음 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Let nothing move you”라고 했네요. 오늘 우리에게 이 말씀이 새롭게 들립니다. 우리를 흔드는 것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너 교회에 나가니?” 우리는 이렇게 사람들이 우리를 바라보면서 신기한 듯이 묻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점점 우리의 기독교 신앙은 시대에 뒤떨어진 유물처럼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구원의 유일성과 절대성이 거센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크리스천의 입에서 조차 다원주의를 옹호하는 발언들이 나오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성경이 말합니다. “흔들리지 말고 지금 네가 믿고 있는 믿음 위에 굳게 서 있으라!”
오늘 말씀은 이런 말씀으로 끝이 납니다. “항상 주님의 일을 위해 자신을 드리십시오. 주님을 위해 일한 여러분의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는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58절) 이 말씀이 NIV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Always give yourselves fully to the work of the Lord, because you know that your labor in the Lord is not in vain.” (NIV) 저는 이 말씀이 ‘예수님께 속해 있다’, ‘예수님을 믿는다’, ‘예수님께 붙어 있다’는 말씀의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 속해 있고, 예수님께 붙어 있는 우리의 영성(靈性)은 그 뒤에 나오는 ‘the work of the Lord (주님의 일)’로 나타나야 합니다. 이렇게 나타나지 않는 영성은 증명되지 않은 영성입니다. 그런 영성은 얼마나 진실한 것인지 의문을 제기할 수 밖에 없는 영성입니다.
이제 저는 오늘 설교를 마치면서, 감히 이렇게 말씀 드립니다. “부활신앙이란 다른 것 아니다. 주님의 일에 우리 자신들을 온전히 헌신하는 믿음이다.” 누가 주님의 일에 온전히 (fully) 자신을 드릴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다고 믿는 사람 아닙니까?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약속되어 있다고 믿는 사람 아닙니까? 주 안에서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주의 일에 온전히 자신을 드리십시오. 여러분의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3/20/2016 | 종려 주일
우리 때문에 We Are The Reason
베드로전서 1:17-23
CCM 찬양 중에 ‘We Are The Reason’이라는 제목의 찬양이 있습니다. 우리 말로 번역한다면 “우리가 이유였습니다” 이렇게 번역할 수 있겠습니다. 어떤 분이 “우리 때문에”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그 가사 중에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We were the reason that He gave His life. We were the reason that He suffered and died. To a world that was lost, He gave all He could give. To show us the reason to live.” “우리 때문에 그는 그의 생명을 주셨고, 우리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죽으셨네. 잃어버린 세상에게 그는 모든 것을 주셨네, 우리에게 삶의 이유를 주시기 위해서” 이렇게 번역할 수 있겠네요. 아주 탁월한 가사입니다. 복음의 핵심을 잘 표현했습니다.
가장 가슴에 와 닿는 말은 ‘우리가 이유였다’ ‘우리 때문에’ 이런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 아침에 제 눈에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유난히 귀하게 보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바로 여러분을 위해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좀 모자라고, 부족하고, 실수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참 귀한 사람들입니다. 우리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신세대 용어로 개념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이런 질문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도대체 왜?” 이런 질문입니다. “도대체 왜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을까?”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그것도 하필이면 가장 수치스럽다는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을까?”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이 벌써 오래 전에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때가 되면, 내 아들을 세상에 보내서 십자가에서 죽게 하겠다는 생각이 하나님의 마음 속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화목 제물로 내어 주셨으며, 누구든지 예수님의 피를 믿음으로 죄를 용서받게 하셨습니다. 구원의 새로운 길이 열렸습니다. 이것은 율법과 예언자들도 증언한 것입니다.” (로마서 3:21, 25)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 as was promised in the writings of Moses① and the prophets long ago.” /①Greek in the law “오래 전에 모세의 글들과 (율법 안에) 예언자들의 글 속에 약속되어 있는 것처럼” 이런 말입니다. 이미 하나님은 모세와 예언자들을 통해서 이 사실을 알렸다는 것입니다.
다시, 개념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 확인을 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모세의 글 어디에 그런 말이 있는지, 예언자의 글 어디에 그런 말이 나오는지 확인을 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좀 생각을 가지고 성경을 읽는 사람이라면 말이지요. 가장 대표적인 예언자의 글은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는 여호와 앞에서 부드러운 새싹처럼, 메마른 땅에서 자라는 나무 줄기처럼 자라났다. 그에게는 아름다움도 없었고, 우리의 눈길을 끌 만한 위엄도 없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미움과 멸시를 받았으며, 아픔과 고통을 많이 겪었다. 사람들은 그를 바라보려 하지도 않았다. 그는 미움을 받았고, 우리 가운데 아무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정말로 그는 우리의 질병을 짊어지고, 우리의 아픔을 대신 겪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하나님께 벌을 받아서 고통을 당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상처 입은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짓밟힌 것은 우리의 죄 때문이다. 그가 맞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얻었고, 그가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다. 우리는 모두 양처럼 흩어져 제 갈 길로 갔으나, 여호와께서 우리의 모든 죄짐을 그에게 지게 하셨다.” (이사야 53:2-6)
이 말씀 속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보입니다. 한 동안 어느 집이나 가면 유행처럼 걸려 있던 그림이 있습니다. 세계 제 2차 대전이 한창이던 어느 날, 의심에 찬 한 사진 작가가 눈이 녹아 질퍽질퍽한 중국의 어느 시골 길을 말을 타고 걷고 있었습니다. 이 사진 작가는 평소에 입버릇처럼 예수님의 얼굴을 보여 주면 믿겠다고 했답니다. 길을 걷고 있던 이 사람에게 갑자기 “사진을 찍어라” 이런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무작정 사진을 찍었는데, 집에 와서 사진을 빼 보았더니, 그 사진 중에 예수님의 얼굴이 보이는 사진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진이 한참 유행 했었습니다. 이 사진을 액자에 넣어서 리빙룸에들 걸어 놓았습니다. 그 액자에 이런 글이 써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이집의 주인이시요, 식사 때마다 보이지 않는 손님이시요, 모든 대화에 말없이 듣는 이시라 (God is the head of this house, the unseen guest at every meal and the silent listener at every conversation).”
우리는 지금으로부터 2,600년 전에 기록된 예언자 이사야 글을 읽으면서 예수님의 얼굴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죄짐을 지시고, 우리를 위하여 수치와 모욕을 당하시고, 고난 받으신 예수님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 말씀을 쓰면서 틀림 없이 예언자 이사야의 글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읽은 말씀을 보십시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가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정말 이 말씀을 베드로가 썼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 가장 많이 복음서에 등장하는 사람입니다. 그만큼 비중이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올바른 신앙고백도 베드로의 입을 통해서 주어졌습니다 (마태복음 16:16). 베드로는 예수님께 대한 충성심이 유별났던 사람이었습니다. 많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떠났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 때도 베드로는 “주님, 주님께 영생의 말씀이 있는데 우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하면서 예수님께 충실하게 머물러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 역시 베드로에게 특별한 애정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믿음으로 잘 서 있는 사람이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2:32). 개인적으로 예수님의 특별한 관심과 기도를 받고 있었다는 사실이 참 놀랍습니다.
이런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반합니다. 사람들은 한번 배반한 사람은 영원히 배반한다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한번 예수님을 배반했던 베드로는 그 후 그가 순교할 때까지 예수님께 머물러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죽고 나서 예루살렘 교회에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때 많은 크리스천들이 소아시아 (지금의 터키 지방)로 피난을 갔습니다. 이 사람들을 ‘디아스포라 크리스천’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도, 예루살렘 교회는 그 박해를 견뎌냈습니다. 그 중심에 베드로가 있었습니다. 베드로 한 사람 때문에 예루살렘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들도 마음대로 못했습니다. 베드로가 예루살렘 교회를 지켰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다 (For love is as strong as death., 아가 8:6)”는 말이 있습니다. 정말 베드로를 보면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강한지, 그 사랑이 베드로를 어떻게, 얼마나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 시킬 수 있는지 한 example를 보는 것 같습니다.
그 베드로가 지금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에게 편지 쓴 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입니다. 한 번 들어 보시지요. “이전에는 우리가 아무 가치도 없는 방식에 매여 살았습니다. 하지만 이제 여러분은 그러한 무가치한 삶에서 구원 받았습니다. 금이나 은같이 없어지고 말 어떠한 것으로 대가를 지불한 것이 아니라, 한 점의 죄도 흠도 없으신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여러분은 구원 받은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18-19) 이 말씀도 놀랍지만, 그 뒤에 나오는 말씀은 더 놀랍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세상이 시작되기 전부터 그리스도를 택하시고, 이 마지막 때에 여러분을 구원하시고자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믿게 되었으니, 여러분의 믿음과 소망은 이제 하나님께만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20-21)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할 말을 잊었습니다. 정말 무슨 말을 못하겠습니다. “아,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구나!” 이 말 밖에는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말들이 있잖아요? ‘패러다임 쉬프트 (paradigm shift)’라는 말이요. 한 동안 이 말들을 많이 했습니다. 2,000년 들어서면서 새로운 밀레니엄이 시작되었다고 해서 떠들썩 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도 이 말들을 많이 했습니다. 사실 이 ‘패러다임 쉬프트’라는 말은 훨씬 더 이전부터 있었지만, 새로운 밀레니엄의 시작과 함께 정말 인간의 삶에 큰 변화가 오는구나 하는 생각들을 많이 했습니다. 최근에는 구글에서 만든 인공지능 ‘알파고 (Alphago)’가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하필 이 ‘알파고’가 한국의 이세돌과 바둑 시합을 하는 바람에 더 화제가 되었습니다. 바둑 전문 기사들은 ‘알파고’의 등장으로 바둑의 정석에 대한 ‘패러다임’이 바뀌게 되었다고 합니다. ‘알파고’가 그동안 수천년 동안 인류가 만들었고, 알아냈던 바둑의 정석의 틀 (frame)을 깨버린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어린 애들 사이에 바둑 붐이 일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 베드로가 편지에 쓰고 있는 말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고의 틀, 가치관, 인생관을 한꺼번에 바꿔버립니다. ‘무가치한 삶에서 가치 있는 삶으로 (from the empty life to the valuable life)’,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삶에서 하나님께로 (from the selfish life to the life of faith and hope in God)’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시선과 우리의 사고의 틀이 바뀌고 있지 않습니까? 이 놀라운 사실이 베드로의 편지글 속에 들어 있습니다. 저는 단언(斷言)합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패러다임’을 포기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쉬프트 되는 것,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이고, 예수님을 믿는 이유입니다. 요즘에는 거의 모든 차들이 자동으로 기어를 변속하지만, 예전에는 기어 (gear)를 통해서 속도를 변속했습니다. 이것을 ‘기어 변속 (gear-shift)’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내 삶에 ‘gear-shift’가 일어나야 합니다. ‘무가치한 삶에서 가치 있는 삶으로’ ‘나만 생각하던 삶에서 하나님을 생각하는 삶으로’ 기어 변속이 일어나야 합니다.
오늘 설교를 마무리 지면서 한가지 질문을 더 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왜 꼭 이런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까?” “그런 변화의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는 질문입니다. 그 대답을 베드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 말 성경에 분명하게 드러나 있지 않기 때문에 New Living Translation으로 읽어 보겠습니다. “For you know that God paid a ransom to save you from the empty life you inherited from your ancestors. And the ransom he paid was not mere gold or silver. It was the precious blood of Christ, the sinless, spotless Lamb of God. God chose him as your ransom long before the world began, but he has now revealed him to you.” (베드로전서 1:18-20a)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ransom’이라는 단어의 뜻을 이해해야 합니다. 성경에 이 ‘ramsom’이라는 말이 여러 차례 나옵니다. 가장 대표적인 말씀이 마가복음 10:45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인자는 자기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왔다.” 이 말씀에 나오는 ‘대속물’이 바로 ‘ransom’입니다. 유대인들은 설명하지 않아도 ‘대속물’이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압니다. 그들은 그런 문화 속에서 수년을 살아왔습니다. ‘대속물’은 죄를 용서 받기 위하여 대신 드리는 제물을 말합니다. 내가 죄를 범했기 때문에 그 죄값을 치르자면 죽어야 하겠지만, 차마 죽지는 못하고 대신 ‘몸값’으로 양이나 염소 같은 동물을 제물로 드렸습니다. 이왕이면 흠이 없고, 깨끗한 것을 골라서 드렸습니다.
우리가 히브리서 말씀을 공부하면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계속 들었던 말씀이 무엇입니까? “어떻게 그런 동물을 제물로 드려서 내 죄를 용서 받을 수 있느냐?” 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제물이 된다면 그 제물은 우리의 죄를 용서 받을 수 있는 충분한 제물이 될 수 있다는 것 아니었습니까? ‘the precious blood of Christ, the sinless, spotless Lamb of God (죄 없고, 점도 없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그리스도의 보혈)’이신 예수님은 우리의 대속물이 되시기에 충분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를 용서 받은 것입니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여기까지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아까 소개했던 “We Are The Reason” 그 찬양 가사가 참 탁월하다고 말씀드렸는데, 좀 아쉬운 부분이 있습니다. 보세요. “I've finally found the reason for living. It's in giving every part of my heart to Him. In all that I do, every word that I say I'll be giving my all just for Him, for Him.” 이제 내가 살 이유를 발견했는데, 그것은 주님만을 위해서 살겠다는 것 아닙니까? 참 훌륭한 가사 같지만,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난 이제 주님만을 위해서 살 거야!”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에게서 예전의 이기적인 삶의 모습이 다시 보입니다. 주님만을 위해서 산다고 하면서 다시 이기적인 사람이 되고 맙니다. 만일 여러분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 여러분의 영성(靈性, spirituality)은 빵점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그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보세요. “여러분은 진리에 순종하여 자신을 깨끗하게 하였고, 진심으로 형제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갖게 되었으니, 이제는 온 맘으로 서로 깊이 사랑하십시오.” (22절) 베드로의 말입니다. 이제 패러다임이 쉬프트된 사람은 나를 사랑하신 그 하나님의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로 흘려 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여기까지 가야 우리 크리스천의 삶이 완성됩니다. “착한 일을 하며 궁핍한 사람들과 나누는 일을 잊지 마십시오. 이러한 제물이야말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3:16) 이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착한 일로, 내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일로 나타나야 합니다.
3/13/2016 | 사순절
예수님께 시선을 고정하자. Let Us Fix Our Eyes on Jesus
히브리서 12:1-6
이제 사순절이 막바지로 접어 들고 있습니다. 사순절은 한마디로 예수님에게 우리의 시선을 고정하고, 몸과 마음을 예수님께 고정하는 기간입니다. 이번 사순절 새벽기도에서 히브리서 강해를 선택했는데, 말씀이 어렵다는 평도 있고, 재미 없다는 평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제 자신은 어려운 말씀에 한번 도전해 보고 싶었기 때문에 스스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는 예수님께 우리 시선을 고정하고 사순절을 보내는데 가장 적합한 말씀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말씀 중에 “예수님만을 바라 봅시다 (2절)” 이런 말씀이 나오고, “예수님을 생각하십시오 (3절)” 이런 말씀도 나옵니다. 언제 우리가 우리의 시선을 예수님께 고정한 적이 있었습니까? 언제 우리가 예수님을 심각하게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까? 놀랍게도 그런 시간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예배도 드리고, 기도도 하니까 당연히 예수님을 생각한 적이 많았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 충격적입니다. 그만큼 오늘 우리에게는 생각할 것이 많습니다. “You are worried and bothered about so many things (넌 걱정하고 염려하는 것들이 너무 많구나)!” (누가복음 10:41)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마르다 (Martha)라는 여자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꼭 오늘 우리들의 삶을 지적해서 하신 말씀 같이 들립니다. 크리스천이라면 당연히 예수님을 바라보고, 생각하는 시간이 많을 것 같은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 충격적입니다.
예수님을 생각하자는 말이 대부분의 영어 성경에 “Consider him”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consider’라는 말은 우리가 잘 알고 많이 사용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왜 히브리서 저자의 말을 ‘consider’라는 말로 번역했을까 하고, 이 말을 사전에 찾아 봤습니다. 의외로 이 단어에 중요한 뜻이 많이 있었습니다. ‘to think carefully about, especially in order to make a decision (결단을 하기 위해 이것저것 깊이 생각하다)’ 이런 뜻입니다. 또 ‘to pay attention to (생각을 집중하다)’라는 뜻도 있고, ‘to think deliber-ately (의도적으로 생각하다)’ 이런 뜻도 있습니다.
또 비슷한 말입니다만, “예수님만 바라보자”라는 말은 “예수님에게 우리의 희망을 두자” 혹은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자” 이런 뜻이 있습니다. 저는 히브리서를 읽으면서 정말 이 히브리서 저자만큼 예수님을 생각했던 사람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정말 그에게는 예수님이 전부였습니다. 예수님에게 모든 문제의 해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탁월성을 증명하는 것을, 특별히 자기의 동족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의 탁월성을 증명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았습니다. 히브리서 말씀을 강해하면서 한 절 한 절 꼼꼼하게 설명을 한다고 했지만, 뒤에 다시 그 말씀을 읽어보면 “아, 이 말씀을 더 강조 했어야 했는데....... 이런 말씀들이 참 많았습니다. 히브리서 8:6이 그런 말씀입니다. “But now Jesus, our High Priest, has been given a ministry that is far superior to the old priesthood, for he is the one who mediates for us a far better covenant with God, based on better promises (하지만, 지금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예전 유대교의 제사장들보다 훨씬 더 위대한 사역을 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보다 좋은 약속에 기초한 훨씬 더 좋은 새언약을 위한 우리의 중보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히브리서 저자가 그렇게 예수님께 대한 열정을 가지고 쓴 편지 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왜 그가 그렇게 목소리를 높여서 예수님께 우리의 시선을 고정하자고 했는지, 왜 그가 그렇게 예수님을 심각하게 생각하자고 했는지, 우리는 마음을 열고 진심으로 그의 말을 들어봐야 합니다.
예수님께 우리 생각을 집중하면 예수님이 보입니다.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님이 보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모든 부끄러움을 참으신 예수님이 보인다고 했습니다 (2절).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He endured the cross, disregarding its shame (그는 십자가의 수치를 상관하지 않고 참으셨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옆에 두 강도가 같이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도 두 강도와 같은 부류로 취급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강도가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우리 말 성경에는 강도라고 나와 있으니까 사회적으로 용서 받을 수 없는 나쁜 짓을 한 것 같습니다. ‘robbers’이면 남의 것을 훔친 사람들이고, ‘revolutionaries’이면 혁명가들입니다. 로마로부터 독립을 해야 한다는 명분을 앞세우고 폭력과 살인을 일삼았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도 그 사람들과 동급으로 취급되어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한번도 남의 것을 훔친 적이 없고, 한번도 폭력을 사용한 적이 없는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달려야 했습니까? 그것도 ‘Via Dolorosa’라는 골고다로 올라가는 언덕을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야 했습니까?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에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지만,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이것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2-23)”라고 했습니다. 왜 예수님의 십자가가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었을까요? 유대인들에게 십자가는 수치스러운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것처럼 수치스러운 것이 없습니다. 이 말이 희랍어 원문에는 ‘a stumbling block’라고 나와 있습니다. 우리 말로 ‘걸림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라고? 그 사람이 누군데? 뭐,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고? 더 이상 나에게 그 사람 이야기 하지 마!” 이런 말입니다. 십자가는 유대인들에게 그만큼 수치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시선을 고정하고, 예수님을 생각하면 제일 먼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보입니다. 그는 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까? 왜 그런 수치와 모욕을 당하셨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이 부분이 우리에게는 mystery입니다. 쉽게 풀리지 않는 문제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God’s mystery (하나님의 비밀)”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2:1, 2:7, 에베소서 1:9, 골로새서 1:27). 이 하나님의 비밀이 구약 시대에는 감추어져 있었다가 신약시대에 와서 풀렸다고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비밀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God has now revealed to us his mysterious plan regarding Christ, a plan to fulfill his own good pleasure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의 그리스도와 관련된 비밀스러운 계획을 알려주셨습니다. 이 계획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이루시기 위한 계획입니다).” (에베소서 1:9) 하나님은 오래 전부터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하는 계획을 가지고 계셨는데, 그 계획은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십자가에 달리시는 수치와 모욕을 당하신 것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이루시는 일이었습니다.
세상에 이런 수치와 모욕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당하는 수치와 모욕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수치가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성경의 메시지를 들을 때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유명한 찬송가 작가인 영국의 아이작 와츠 (Isaac Watts, 1674-1748) 평생 수많은 찬송시를 썼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찬송가 149장 “주 달려 죽은 십자가”도 아이작 와츠가 가사를 쓴 찬송입니다. 그는 “십자가의 주님을 생각할 때 세상에 속한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리네”라고 썼습니다. 십자가의 주님을 묵상하면 세상에 대한 욕심, 명예, 돈, 권력, 이런 것이 다 쓸 데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주님을 묵상하면 나에게는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영감 (inspiration)이 아니면 어떻게 이런 가사를 쓸 수 있겠습니까?
맞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면 우리가 추구하는 자랑도, 우리가 추구하는 명예도, 우리가 추구하는 모든 욕심들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정말 십자가의 주님을 제대로 발견한 사람이라면 십자가에서 들려오는 또 다른 메시지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수치를 모두 감당하신 것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된 일이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십자가의 수치를 당하신 것입니다. 그 십자가에서 이런 메시지가 들리지 않습니까? “그러면, 너는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살겠느냐?”
잘 살아야 합니다. 의미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만을 위한 selfish한 삶이 아니라 나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더 행복해 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잘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십자가에서 들려 오는 메시지입니다.
이 말씀을 한 번 들어 보세요. “To leave the world a bit better, whether by a healthy child, a garden patch, or a redeemed social condition; to know that even one life has breathed easier because you have lived - that is to have succeeded.” Ralph Waldo Emerson (1803-1882) 에머슨은 보스턴 콩코드 (Con-cord) 출신입니다. 미국이 낳은 최고의 철학자입니다. 미국의 지성사에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친 사람입니다. 모든 철학자들이 그렇듯이 에머슨도 “무엇이 행복이냐? 무엇이 성공이냐? 무엇이 잘 사는 것이냐?” 하는 질문에 답했습니다. “성공적인 삶이란 (that is to have succeeded), 세상을 조금이라고 더 좋은 세상으로 남겨 주는 것입니다. 아기를 건강하게 잘 키운다든지, 정원을 아름답게 가꾼다든지, 사회 환경을 좀 더 좋은 환경으로 만든다든지, 당신이 세상을 살았기 때문에 단 한 사람이라도 좀 더 자유롭게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아는 것이 곧 성공적인 삶이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좀 나이가 드신 교우들은 그 나름대로 지금의 삶을, 그리고 앞으로의 삶을 더 좋은 삶을 살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길을 찾는 사람에게는 그 길이 보입니다. 그러나, 찾지 않는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냥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처럼 사는 것이지요. 젊은 청년들은 지금 앞으로의 삶을 계획하십시오. 삶의 목적을 먼저 정하고, 그렇게 살기 위한 계획을 세우십시오. 지난 주에 한국 뉴스를 보다가 김종필씨가 뉴스에 나왔습니다. 나이가 많이 들어 거동이 불편해 보였습니다. 이번에 ‘증언록’을 내면서 자기 소감을 말하는 자리였습니다. “이제 저는 모두 용서하려고 합니다. 그동안 저의 부덕의 소치로 본의 아니게 상처를 드린 일이 있다면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그의 소감을 들은 한 컬럼니스트가 “변혁에서 시작해서 혁명을 거쳐, 모호함으로 끝을 맺다”라는 글을 기고했습니다. 그렇게 정보부장을 지내고, 큰 권력을 손에 쥐었던 사람이 결국 모호함으로 인생을 마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게 뭐냐 하는 얘깁니다. 그 컬럼니스트는 자기 글에 이렇게 썼습니다. “그의 야망과 처신을 위해 희생된 많은 사람들에 대한 사죄의 표현으로는 좀 미흡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인생이 그렇게 되면 안 되잖아요? 많은 사람이 그의 야망 때문에 희생을 당하고, 이에 대한 사죄도 뭔가 미흡하고, 이 사람이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살았는지 분명하지 않고 모호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면 안 되잖아요?
둘째로, 예수님께 시선을 고정하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위대한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아이작 와츠는 이렇게 찬송시를 썼습니다. “못 박힌 손발 보니 큰 자비 나타내셨네. 가시로 만든 면류관 우리를 위해 쓰셨네.” 우리의 죄는 그 어떤 것으로도 용서 받을 수 없는 죄입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말했습니다. “우리의 죄가 어떻게 양과 염소의 희생제물로 용서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흠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이 아니면 우리의 죄는 용서 받을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 9:14) 우리의 죄가 그렇게 대단한 것입니다. 아무 것으로도 용서 받을 수 없는,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희생제물이 되어 대속물 (ransom)이 되지 않으면 용서 받을 수 없는, 우리가 그런 죄인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 부어졌다고 했습니다 (God has poured out his love into our hearts., 로마서 5:5). 예수님의 제자 요한은 “하나님께서 이처럼 우리를 사랑해 주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요한일서 4:11)”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서로 서로에게 하나님의 사랑의 통로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십자가에서 흘러나와 우리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흘러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메시지를 들어야 비로소 십자가의 메시지를 제대로 들은 것입니다.
잘 살아야 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자기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많은 것을 성취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나에게 아무 의미 없는 것들이 될 수 있습니다. 겉에서 보기에 아무리 화려하다고 성공적으로 보일지라도 나에게 아무 의미 없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어떤 삶을 어떻게 살았는지 애매모호해서는 안 됩니다. 나의 삶의 목적이 선해야 하고, 나의 삶의 방식이 정당해야 합니다. 나 때문에 상처 받고, 나 때문에 피해를 보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가는 통로입니다. 먼저 그리스도의 보혈에 흠뻑 우리 자신을 적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 보혈의 공로를 가슴으로 느껴야 합니다. 나머지 사순절 기간 동안 여러분의 시선을 예수님께 고정하십시오. 예수님을 심각하게 생각하십시오. 생각이 잘 안 되면 ‘의도적으로 (intentionally)’ ‘일부러 (deliberately)’라도 예수님을 생각하십시오.
3/6/2016 | 사순절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Return to the Lord Your God
요엘 2:12-14
요엘 (Joel)은 남왕국 유다의 8대 왕 요아스 (Joash)가 왕으로 즉위하던 초기에 활약했던 예언자입니다. 그 때가 대략 B.C. 830년경쯤 됩니다. 요아스는 7살의 어린 나이에 왕이 된 사람입니다. 하지만, 제사장이었던 여호야다 (Jehoiada)가 옆에서 도와 주었기 때문에 별 문제 없이 나라를 통치했습니다.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던 성전을 대대적으로 보수하는 등 나라를 잘 다스렸습니다. 그러다가 여호야다가 죽습니다. 정신적으로 의지할 곳이 없어진 요아스는 그 때부터 타락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숭배에 빠지게 됩니다. 보다 못한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 (Zechariah)가 충고를 했지만 그 때문에 스가랴는 죽임을 당합니다. 그 때 요아스가 저질렀던 일이 얼마나 악했던지 예수님께서 요아스 때의 일을 말씀하실 정도였습니다. “따라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살해당한 바라갸 (Barachiah)의 아들 스가랴의 피에 이르기까지, 너희는 세상에서 피를 흘린 의인에 대한 죄값을 치를 것이다.” (마태복음 23:35)
하나님은 위기의 때에 거의 예외 없이 예언자들을 등장 시킵니다. 예언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십니다. 이 방법은 오늘날에도 똑 같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올바른 길을 가지 않을 때 경고를 하십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시려는 계획을 가지고 계셨던 하나님은 그 계획을 아브라함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내가 지금 하려고 하는 일을 어떻게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Should I hide my plan from Abraham., 창세기 18:17)?” 생각해 보면, 참 엄청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는 자녀들과 소통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소통의 채널 가운데 기도입니다. 그러니까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이 소통의 채널을 막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소통하시는 또 다른 채널이 있는게 그것이 성경입니다. 하나님은 시대를 초월해서 여전히 그 말씀을 읽는 사람들과 소통을 하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은 지금도 살아 있는 하나님의 강력한 말씀입니다 (The word of God is alive and powerful., 히브리서 4:12). 성경을 읽지 않는 사람은 또 다시 하나님께서 소통하시는 채널을 막는 사람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요즘 사람들이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하나님께 생각을 집중하고, 나 자신을 돌아보고, 조용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내적 음성 (God’s inner voice)을 들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없습니다. 성경을 읽는 것도 그렇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책을 읽지 않습니다. 서점에서도 소설이나 교양서적들이 잘 팔리지 않습니다. 베스트셀러라는 말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아주 가벼운 읽을 거리 외에는 읽지 않습니다. 청년들은 그나마 종이 책들은 읽지 않습니다. 스마트 폰이나 online을 통해서, 혹은 SNS (Social Networking Service)를 통해서 몇 줄 안 되는 짧은 글들을 읽습니다. 그러니까 생각이 깊어지지 않습니다. 이런 시대적인 흐름이 성경을 읽는 데도 방해가 됩니다. 생각을 하지 않으니까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일이 시대 흐름과 맞지 않은 ‘out-of-date’ 된 일들이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무리 시대 흐름이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기도하는 일과 성경 읽는 일을 게을리 하면 안 됩니다. 이 일을 게을리 하면 그 때부터 우리의 영적인 호흡이 정지됩니다. 하나님과 소통의 채널이 막히기 때문입니다. 힘들어도 기도하고 성경 읽어야 합니다. 단 몇 줄이라도 성경 읽고 그 말씀을 생각하는 일을 중단하면 안 됩니다. 지금 우리교회는 사순절 새벽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내일이 23일째입니다. 이제 17일 밖에 안 남았습니다. 지난 주에는 저의 마음이 상당히 힘들었습니다. 마음이 약해지니까 사탄의 음성이 들립니다. “야, 내년부터는 사순절 새벽기도 하지마. 내년부터 안 한다고 하면 다들 좋아할 걸? 교회 임원회에 내 놓고 무기명으로 표결해 봐. 다들 하지 말자고 할거야.” 또 다른 음성이 들려 옵니다. “내년부터는 20일만 해. 추운 날씨에 40일은 너무 길어.” 지금은 제 마음이 어떨 것 같습니까? 우리교회가 이만큼이라도 서 있는 것은 사순절 새벽기도를 통해서 받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기원전 9세기 유다 왕국의 이야기로 돌아가 볼까요? 요아스 왕 한 사람이 우상숭배에 빠진 것 같은데, 결과적으로 그 한 사람 때문에 그가 통치하던 한 시대가 우상숭배에 빠지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시대를 쉽게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예언자를 통해 그의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사람이 요엘입니다. “지금이라도 너희의 온 마음을 다하여 내게 돌아오너라. 금식하고 울며 슬퍼하여라 (Turn to me now, while there is time. Give me your hearts. Come with fast-ing, weeping, and mourning).” (12절) “내게로 돌아오라”는 말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말입니다. 회개를 희랍어로 ‘메타노이아 (μετάνοια)’라고 합니다. 이 말을 성경에서는 ‘turning away from sin and turning to God’ 이런 뜻으로 사용합니다.
하나님께서 우상숭배에 빠진 그 시대에게 회개하라는 메시지를 주신 것은 아직도 기회가 있다는 뜻입니다. 아직도 회개하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시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아무리 잘못해도 쉽게 포기하지 않고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이 말씀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라도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앞에는 그 길이 항상 열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데, 우리도 하나님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 (The Parable of the Prodigal Son)’는 우리에게 영원한 소망을 주는 말씀입니다. 자기 비지니스를 해 보겠다고 아버지 유산을 받아서 아버지를 떠났던 작은 아들을 다시 받아 주시는 아버지는, 회개하고 돌아오는 죄인을 받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깊고, 넓고, 높은 것인지를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세계 각국에 조금씩 다른 버전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제가 읽은 이야기는 태국에 있는 이야기인데, 집을 나간 아들을 어머니는 오늘도 기다립니다. 집으로 돌아 온 아들이 멀리서 어머니 집을 훔쳐 봅니다. 그런데, 어머니 방 방문이 열려 있습니다. 방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본 아들은 용기를 내서 어머니에게 돌아갑니다 아들이 어머니에게 말합니다. "어머니, 이렇게 어머니 방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보고 돌아올 용기를 냈습니다." 그랬더니, 어머니가 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들아, 난 네가 떠난 후에 한번도 이 방문을 닫은 적이 없다!"
오늘 말씀 14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은혜롭고 자비로우시며, 쉽게 노하지 않으시며, 사랑이 많으시며, 벌을 내리지 아니하신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He is merciful and compassionate, slow to get angry and filled with unfailing love. He is eager to relent and not punish.” 이 말씀 중에 ‘compassionate’라는 말이 눈에 들어옵니다. 상대방의 처지에 deep sympathy를 가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sympathy를 가지신 분입니다. 우리의 고통 (pas-sion)과 우리의 아픔, 우리의 약함을 잘 아십니다. 히브리서 말씀 읽을 때도 이런 말씀이 나왔습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한 부분을 잘 알고 계십니다 (For we have a high priest who is able to sympathize with our weaknesses).” (히브리서 4:15)
바로 이 말씀이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언제나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있고,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 앞에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문이 항상 열려 있습니다.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작은 아들은 바로 우리 자신들입니다. 작은 아들처럼, 우리에게는 항상 하나님을 떠나 살고 싶은 유혹이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도 얼마든지 살 수 있을 것 같은 유혹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간섭 없이 살고 싶은 유혹이 있습니다. 이런 유혹에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 때 여러분이 오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나에게는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문이 열려 있다!” 성경에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Your God is gracious and compassionate. He will not turn his face from you if you return to him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우리의 처지를 잘 이해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그는 우리에게서 얼굴을 돌리지 않으십니다)." (역대하 30:9)
그러나, 하나님께 돌아갈 때는 조건이 있습니다. 완전히 하나님께 마음을 드려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 “너희의 온 마음을 다하여 내게 돌아오너라 (12절)”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New Living Translation에서는 “Turn to me now, while there is time. Give me your hearts” 라고 번역했습니다. 같은 말씀이 NIV 성경에는 “Return to me with all your heart”라고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 돌아가는 사람은 그의 온 마음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입니다. 온 마음으로 예배하고, 온 마음으로 찬양하고, 온 마음으로 순종하고, 온 마음으로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우리의 온 마음이 드리지 않는 형식적인 것을 싫어하십니다. 이사야 42:8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여호와다. 이것이 내 이름이다. 나는 내 영광을 다른 것에게 주지 않겠고, 내가 받을 찬양을 우상들이 받게 하지 않겠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오해합니다. “아, 하나님은 우상을 찬양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구나!” 이 말씀을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온전한 찬양을 기쁘게 받으신다는 뜻입니다. 마음의 절반은 우상에게 빼앗기고 있으면서, 그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런 찬양은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또 열왕기상 18:21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러분은 언제까지 바알과 여호와 둘 사이에서 머뭇거릴 것입니까? 여호와와 바알을 함께 섬기려고 하십니까? 여호와가 참 하나님이시면 여호와를 따르고 바알이 참 하나님이면 바알을 따르시오.”
하나님을 믿으려면 온전한 마음으로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것에 절반은 마음을 빼앗기고, 절반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에 빠졌다고 하니까 하나님을 완전히 버리고 우상을 섬기는 것 같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요아스 왕이 처음에는 하나님을 잘 섬기다가 제사장 여호야다가 죽자 우상숭배에 빠졌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버린 것 같지요? 아닙니다. 하나님을 버린 것이 아니라, 우상에게 절반은 빼앗긴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겼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성 크리소스톰 (St. John Chrysostom, 347-407, Archbishop of Constantinople)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자기 교구를 순방하던 중에 있었던 일입니다. 교구는 넓은데, 가는 곳마다 사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한 시골에 있는 교회를 순방하게 되었습니다. 이곳에도 역시 사제가 없었습니다. 이 교회를 떠나면서 그는 한 농부에게 교회에 대한 책임을 맡기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자꾸 마음에 쓰였습니다. “내가 괜한 일을 했구나! 그 자격 없는 농부가 어떻게 교회를 책임질 수 있겠어?” 불안 마음을 가지고 크리소스톰은 그 교회를 다시 가 보았습니다. 간다는 말도 하지 않고 몰래 그 교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가 보고 싶었습니다. 크리소스톰은 기둥 뒤에서 몰래 예배 광경을 지켜 보았습니다. 지켜 보는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습니다. 예배가 끝난 뒤에 크리소스톰은 그 농부 사제 앞에 무릎을 꿇고 자기를 위해서 기도를 해 달라고 했습니다. 농부 사제는 그 사람이 크리소스톰인 것을 알고 깜짝 놀라면서 무슨 소리냐고, 제가 기도를 받아야 할 터인데, 왜 이러시느냐고 만류를 했습니다. 그 때, 크리스스톰이 “나를 용서해 주시오. 나는 지금까지 당신처럼 가슴에 불을 안고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소.” 이 말을 들은 그 농부 사제가 당황하면서 “아니, 그러면, 그렇게 하지 않고 달리 하나님을 예배하는 방법이 있습니까?”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사순절을 맞이해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회개해야 할 것들이 참 많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우리가 온전한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고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음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일인데,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님 그런 식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차라리 하나님을 떠난 것보다 더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절반은 우상에게 마음을 빼앗긴 채 절반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예배했고, 절반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송했고, 절반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온 마음 (a whole heart)’ 드려야 합니다. ‘whole food’에서 파는 식품이 organic 식품이라고 해서 값이 비싼 것처럼, 우리의 ‘whole heart’를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요엘은 자기 시대 사람들에게 “옷을 찢지 말고 너희 마음을 찢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13절)”고 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 우리의 진심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형식적이고,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마음을 찢어서 그 속을 다 하나님께 보여 드리라는 것입니다.
지난 월요일에 우리교회에서 KMC 뉴잉글랜드 지역 목사님들이 모여서 회의를 했습니다. 회의를 마치고 세미나가 하나 있었습니다. 세미나 주제는 “욥기를 어떻게 설교할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세미나를 마치고 모두들 유익한 시간이었다고 좋아했습니다. 지금 목사들의 생각이 “어떻게 하면 설교를 잘할 수 있을까?” 이 문제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생각이 좀 달랐습니다. 지금 설교를 잘 하는 목사들은 많습니다. 차고 넘칩니다. 얼마든지 설교 잘하는 목사들의 설교를 들을 수 있고, 설교집을 사서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좋은 목사가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별로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설교는 잘 하는데, 인격은 갖추지 못한 목사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입을 열면 그렇게 좋은 설교를 쏟아내는데, 왜 돈과, 명예와, 권력에 대한 욕심을 내려 놓지 못한 목사들이 그렇게 많습니까? 지금은 목사들이 설교를 잘하려고 노력하는 대신, ‘온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훈련을 해야 하는 때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목사가 없어서 교회가 시끄럽고, 이런 평신도가 없어서 교회가 세상에서 존재감을 상실해 가고 있는 것 아닙니까? 물론 이렇게 설교하는 제 자신도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이런 마음들을 서로 공유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이번 사순절이 우리의 ‘온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지 못했던 믿음생활을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