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모음
3/13/2016 | 사순절
예수님께 시선을 고정하자. Let Us Fix Our Eyes on Jesus
히브리서 12:1-6
이제 사순절이 막바지로 접어 들고 있습니다. 사순절은 한마디로 예수님에게 우리의 시선을 고정하고, 몸과 마음을 예수님께 고정하는 기간입니다. 이번 사순절 새벽기도에서 히브리서 강해를 선택했는데, 말씀이 어렵다는 평도 있고, 재미 없다는 평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제 자신은 어려운 말씀에 한번 도전해 보고 싶었기 때문에 스스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는 예수님께 우리 시선을 고정하고 사순절을 보내는데 가장 적합한 말씀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말씀 중에 “예수님만을 바라 봅시다 (2절)” 이런 말씀이 나오고, “예수님을 생각하십시오 (3절)” 이런 말씀도 나옵니다. 언제 우리가 우리의 시선을 예수님께 고정한 적이 있었습니까? 언제 우리가 예수님을 심각하게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까? 놀랍게도 그런 시간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예배도 드리고, 기도도 하니까 당연히 예수님을 생각한 적이 많았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 충격적입니다. 그만큼 오늘 우리에게는 생각할 것이 많습니다. “You are worried and bothered about so many things (넌 걱정하고 염려하는 것들이 너무 많구나)!” (누가복음 10:41)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마르다 (Martha)라는 여자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꼭 오늘 우리들의 삶을 지적해서 하신 말씀 같이 들립니다. 크리스천이라면 당연히 예수님을 바라보고, 생각하는 시간이 많을 것 같은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 충격적입니다.
예수님을 생각하자는 말이 대부분의 영어 성경에 “Consider him”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consider’라는 말은 우리가 잘 알고 많이 사용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왜 히브리서 저자의 말을 ‘consider’라는 말로 번역했을까 하고, 이 말을 사전에 찾아 봤습니다. 의외로 이 단어에 중요한 뜻이 많이 있었습니다. ‘to think carefully about, especially in order to make a decision (결단을 하기 위해 이것저것 깊이 생각하다)’ 이런 뜻입니다. 또 ‘to pay attention to (생각을 집중하다)’라는 뜻도 있고, ‘to think deliber-ately (의도적으로 생각하다)’ 이런 뜻도 있습니다.
또 비슷한 말입니다만, “예수님만 바라보자”라는 말은 “예수님에게 우리의 희망을 두자” 혹은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자” 이런 뜻이 있습니다. 저는 히브리서를 읽으면서 정말 이 히브리서 저자만큼 예수님을 생각했던 사람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정말 그에게는 예수님이 전부였습니다. 예수님에게 모든 문제의 해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탁월성을 증명하는 것을, 특별히 자기의 동족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의 탁월성을 증명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았습니다. 히브리서 말씀을 강해하면서 한 절 한 절 꼼꼼하게 설명을 한다고 했지만, 뒤에 다시 그 말씀을 읽어보면 “아, 이 말씀을 더 강조 했어야 했는데....... 이런 말씀들이 참 많았습니다. 히브리서 8:6이 그런 말씀입니다. “But now Jesus, our High Priest, has been given a ministry that is far superior to the old priesthood, for he is the one who mediates for us a far better covenant with God, based on better promises (하지만, 지금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예전 유대교의 제사장들보다 훨씬 더 위대한 사역을 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보다 좋은 약속에 기초한 훨씬 더 좋은 새언약을 위한 우리의 중보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히브리서 저자가 그렇게 예수님께 대한 열정을 가지고 쓴 편지 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왜 그가 그렇게 목소리를 높여서 예수님께 우리의 시선을 고정하자고 했는지, 왜 그가 그렇게 예수님을 심각하게 생각하자고 했는지, 우리는 마음을 열고 진심으로 그의 말을 들어봐야 합니다.
예수님께 우리 생각을 집중하면 예수님이 보입니다.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님이 보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모든 부끄러움을 참으신 예수님이 보인다고 했습니다 (2절).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He endured the cross, disregarding its shame (그는 십자가의 수치를 상관하지 않고 참으셨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옆에 두 강도가 같이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도 두 강도와 같은 부류로 취급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강도가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우리 말 성경에는 강도라고 나와 있으니까 사회적으로 용서 받을 수 없는 나쁜 짓을 한 것 같습니다. ‘robbers’이면 남의 것을 훔친 사람들이고, ‘revolutionaries’이면 혁명가들입니다. 로마로부터 독립을 해야 한다는 명분을 앞세우고 폭력과 살인을 일삼았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도 그 사람들과 동급으로 취급되어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한번도 남의 것을 훔친 적이 없고, 한번도 폭력을 사용한 적이 없는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달려야 했습니까? 그것도 ‘Via Dolorosa’라는 골고다로 올라가는 언덕을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야 했습니까?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에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지만,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이것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2-23)”라고 했습니다. 왜 예수님의 십자가가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었을까요? 유대인들에게 십자가는 수치스러운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것처럼 수치스러운 것이 없습니다. 이 말이 희랍어 원문에는 ‘a stumbling block’라고 나와 있습니다. 우리 말로 ‘걸림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라고? 그 사람이 누군데? 뭐,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고? 더 이상 나에게 그 사람 이야기 하지 마!” 이런 말입니다. 십자가는 유대인들에게 그만큼 수치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시선을 고정하고, 예수님을 생각하면 제일 먼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보입니다. 그는 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까? 왜 그런 수치와 모욕을 당하셨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이 부분이 우리에게는 mystery입니다. 쉽게 풀리지 않는 문제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God’s mystery (하나님의 비밀)”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2:1, 2:7, 에베소서 1:9, 골로새서 1:27). 이 하나님의 비밀이 구약 시대에는 감추어져 있었다가 신약시대에 와서 풀렸다고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비밀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God has now revealed to us his mysterious plan regarding Christ, a plan to fulfill his own good pleasure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의 그리스도와 관련된 비밀스러운 계획을 알려주셨습니다. 이 계획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이루시기 위한 계획입니다).” (에베소서 1:9) 하나님은 오래 전부터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하는 계획을 가지고 계셨는데, 그 계획은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십자가에 달리시는 수치와 모욕을 당하신 것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이루시는 일이었습니다.
세상에 이런 수치와 모욕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당하는 수치와 모욕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수치가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성경의 메시지를 들을 때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유명한 찬송가 작가인 영국의 아이작 와츠 (Isaac Watts, 1674-1748) 평생 수많은 찬송시를 썼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찬송가 149장 “주 달려 죽은 십자가”도 아이작 와츠가 가사를 쓴 찬송입니다. 그는 “십자가의 주님을 생각할 때 세상에 속한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리네”라고 썼습니다. 십자가의 주님을 묵상하면 세상에 대한 욕심, 명예, 돈, 권력, 이런 것이 다 쓸 데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주님을 묵상하면 나에게는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영감 (inspiration)이 아니면 어떻게 이런 가사를 쓸 수 있겠습니까?
맞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면 우리가 추구하는 자랑도, 우리가 추구하는 명예도, 우리가 추구하는 모든 욕심들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정말 십자가의 주님을 제대로 발견한 사람이라면 십자가에서 들려오는 또 다른 메시지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수치를 모두 감당하신 것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된 일이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십자가의 수치를 당하신 것입니다. 그 십자가에서 이런 메시지가 들리지 않습니까? “그러면, 너는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살겠느냐?”
잘 살아야 합니다. 의미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만을 위한 selfish한 삶이 아니라 나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더 행복해 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잘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십자가에서 들려 오는 메시지입니다.
이 말씀을 한 번 들어 보세요. “To leave the world a bit better, whether by a healthy child, a garden patch, or a redeemed social condition; to know that even one life has breathed easier because you have lived - that is to have succeeded.” Ralph Waldo Emerson (1803-1882) 에머슨은 보스턴 콩코드 (Con-cord) 출신입니다. 미국이 낳은 최고의 철학자입니다. 미국의 지성사에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친 사람입니다. 모든 철학자들이 그렇듯이 에머슨도 “무엇이 행복이냐? 무엇이 성공이냐? 무엇이 잘 사는 것이냐?” 하는 질문에 답했습니다. “성공적인 삶이란 (that is to have succeeded), 세상을 조금이라고 더 좋은 세상으로 남겨 주는 것입니다. 아기를 건강하게 잘 키운다든지, 정원을 아름답게 가꾼다든지, 사회 환경을 좀 더 좋은 환경으로 만든다든지, 당신이 세상을 살았기 때문에 단 한 사람이라도 좀 더 자유롭게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아는 것이 곧 성공적인 삶이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좀 나이가 드신 교우들은 그 나름대로 지금의 삶을, 그리고 앞으로의 삶을 더 좋은 삶을 살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길을 찾는 사람에게는 그 길이 보입니다. 그러나, 찾지 않는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냥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처럼 사는 것이지요. 젊은 청년들은 지금 앞으로의 삶을 계획하십시오. 삶의 목적을 먼저 정하고, 그렇게 살기 위한 계획을 세우십시오. 지난 주에 한국 뉴스를 보다가 김종필씨가 뉴스에 나왔습니다. 나이가 많이 들어 거동이 불편해 보였습니다. 이번에 ‘증언록’을 내면서 자기 소감을 말하는 자리였습니다. “이제 저는 모두 용서하려고 합니다. 그동안 저의 부덕의 소치로 본의 아니게 상처를 드린 일이 있다면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그의 소감을 들은 한 컬럼니스트가 “변혁에서 시작해서 혁명을 거쳐, 모호함으로 끝을 맺다”라는 글을 기고했습니다. 그렇게 정보부장을 지내고, 큰 권력을 손에 쥐었던 사람이 결국 모호함으로 인생을 마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게 뭐냐 하는 얘깁니다. 그 컬럼니스트는 자기 글에 이렇게 썼습니다. “그의 야망과 처신을 위해 희생된 많은 사람들에 대한 사죄의 표현으로는 좀 미흡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인생이 그렇게 되면 안 되잖아요? 많은 사람이 그의 야망 때문에 희생을 당하고, 이에 대한 사죄도 뭔가 미흡하고, 이 사람이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살았는지 분명하지 않고 모호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면 안 되잖아요?
둘째로, 예수님께 시선을 고정하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위대한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아이작 와츠는 이렇게 찬송시를 썼습니다. “못 박힌 손발 보니 큰 자비 나타내셨네. 가시로 만든 면류관 우리를 위해 쓰셨네.” 우리의 죄는 그 어떤 것으로도 용서 받을 수 없는 죄입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말했습니다. “우리의 죄가 어떻게 양과 염소의 희생제물로 용서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흠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이 아니면 우리의 죄는 용서 받을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 9:14) 우리의 죄가 그렇게 대단한 것입니다. 아무 것으로도 용서 받을 수 없는,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희생제물이 되어 대속물 (ransom)이 되지 않으면 용서 받을 수 없는, 우리가 그런 죄인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 부어졌다고 했습니다 (God has poured out his love into our hearts., 로마서 5:5). 예수님의 제자 요한은 “하나님께서 이처럼 우리를 사랑해 주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요한일서 4:11)”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서로 서로에게 하나님의 사랑의 통로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십자가에서 흘러나와 우리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흘러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메시지를 들어야 비로소 십자가의 메시지를 제대로 들은 것입니다.
잘 살아야 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자기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많은 것을 성취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나에게 아무 의미 없는 것들이 될 수 있습니다. 겉에서 보기에 아무리 화려하다고 성공적으로 보일지라도 나에게 아무 의미 없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어떤 삶을 어떻게 살았는지 애매모호해서는 안 됩니다. 나의 삶의 목적이 선해야 하고, 나의 삶의 방식이 정당해야 합니다. 나 때문에 상처 받고, 나 때문에 피해를 보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가는 통로입니다. 먼저 그리스도의 보혈에 흠뻑 우리 자신을 적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 보혈의 공로를 가슴으로 느껴야 합니다. 나머지 사순절 기간 동안 여러분의 시선을 예수님께 고정하십시오. 예수님을 심각하게 생각하십시오. 생각이 잘 안 되면 ‘의도적으로 (intentionally)’ ‘일부러 (deliberately)’라도 예수님을 생각하십시오.
3/6/2016 | 사순절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Return to the Lord Your God
요엘 2:12-14
요엘 (Joel)은 남왕국 유다의 8대 왕 요아스 (Joash)가 왕으로 즉위하던 초기에 활약했던 예언자입니다. 그 때가 대략 B.C. 830년경쯤 됩니다. 요아스는 7살의 어린 나이에 왕이 된 사람입니다. 하지만, 제사장이었던 여호야다 (Jehoiada)가 옆에서 도와 주었기 때문에 별 문제 없이 나라를 통치했습니다.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던 성전을 대대적으로 보수하는 등 나라를 잘 다스렸습니다. 그러다가 여호야다가 죽습니다. 정신적으로 의지할 곳이 없어진 요아스는 그 때부터 타락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숭배에 빠지게 됩니다. 보다 못한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 (Zechariah)가 충고를 했지만 그 때문에 스가랴는 죽임을 당합니다. 그 때 요아스가 저질렀던 일이 얼마나 악했던지 예수님께서 요아스 때의 일을 말씀하실 정도였습니다. “따라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살해당한 바라갸 (Barachiah)의 아들 스가랴의 피에 이르기까지, 너희는 세상에서 피를 흘린 의인에 대한 죄값을 치를 것이다.” (마태복음 23:35)
하나님은 위기의 때에 거의 예외 없이 예언자들을 등장 시킵니다. 예언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십니다. 이 방법은 오늘날에도 똑 같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올바른 길을 가지 않을 때 경고를 하십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시려는 계획을 가지고 계셨던 하나님은 그 계획을 아브라함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내가 지금 하려고 하는 일을 어떻게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Should I hide my plan from Abraham., 창세기 18:17)?” 생각해 보면, 참 엄청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는 자녀들과 소통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소통의 채널 가운데 기도입니다. 그러니까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이 소통의 채널을 막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소통하시는 또 다른 채널이 있는게 그것이 성경입니다. 하나님은 시대를 초월해서 여전히 그 말씀을 읽는 사람들과 소통을 하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은 지금도 살아 있는 하나님의 강력한 말씀입니다 (The word of God is alive and powerful., 히브리서 4:12). 성경을 읽지 않는 사람은 또 다시 하나님께서 소통하시는 채널을 막는 사람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요즘 사람들이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하나님께 생각을 집중하고, 나 자신을 돌아보고, 조용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내적 음성 (God’s inner voice)을 들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없습니다. 성경을 읽는 것도 그렇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책을 읽지 않습니다. 서점에서도 소설이나 교양서적들이 잘 팔리지 않습니다. 베스트셀러라는 말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아주 가벼운 읽을 거리 외에는 읽지 않습니다. 청년들은 그나마 종이 책들은 읽지 않습니다. 스마트 폰이나 online을 통해서, 혹은 SNS (Social Networking Service)를 통해서 몇 줄 안 되는 짧은 글들을 읽습니다. 그러니까 생각이 깊어지지 않습니다. 이런 시대적인 흐름이 성경을 읽는 데도 방해가 됩니다. 생각을 하지 않으니까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일이 시대 흐름과 맞지 않은 ‘out-of-date’ 된 일들이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무리 시대 흐름이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기도하는 일과 성경 읽는 일을 게을리 하면 안 됩니다. 이 일을 게을리 하면 그 때부터 우리의 영적인 호흡이 정지됩니다. 하나님과 소통의 채널이 막히기 때문입니다. 힘들어도 기도하고 성경 읽어야 합니다. 단 몇 줄이라도 성경 읽고 그 말씀을 생각하는 일을 중단하면 안 됩니다. 지금 우리교회는 사순절 새벽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내일이 23일째입니다. 이제 17일 밖에 안 남았습니다. 지난 주에는 저의 마음이 상당히 힘들었습니다. 마음이 약해지니까 사탄의 음성이 들립니다. “야, 내년부터는 사순절 새벽기도 하지마. 내년부터 안 한다고 하면 다들 좋아할 걸? 교회 임원회에 내 놓고 무기명으로 표결해 봐. 다들 하지 말자고 할거야.” 또 다른 음성이 들려 옵니다. “내년부터는 20일만 해. 추운 날씨에 40일은 너무 길어.” 지금은 제 마음이 어떨 것 같습니까? 우리교회가 이만큼이라도 서 있는 것은 사순절 새벽기도를 통해서 받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기원전 9세기 유다 왕국의 이야기로 돌아가 볼까요? 요아스 왕 한 사람이 우상숭배에 빠진 것 같은데, 결과적으로 그 한 사람 때문에 그가 통치하던 한 시대가 우상숭배에 빠지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시대를 쉽게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예언자를 통해 그의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사람이 요엘입니다. “지금이라도 너희의 온 마음을 다하여 내게 돌아오너라. 금식하고 울며 슬퍼하여라 (Turn to me now, while there is time. Give me your hearts. Come with fast-ing, weeping, and mourning).” (12절) “내게로 돌아오라”는 말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말입니다. 회개를 희랍어로 ‘메타노이아 (μετάνοια)’라고 합니다. 이 말을 성경에서는 ‘turning away from sin and turning to God’ 이런 뜻으로 사용합니다.
하나님께서 우상숭배에 빠진 그 시대에게 회개하라는 메시지를 주신 것은 아직도 기회가 있다는 뜻입니다. 아직도 회개하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시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아무리 잘못해도 쉽게 포기하지 않고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이 말씀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라도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앞에는 그 길이 항상 열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데, 우리도 하나님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 (The Parable of the Prodigal Son)’는 우리에게 영원한 소망을 주는 말씀입니다. 자기 비지니스를 해 보겠다고 아버지 유산을 받아서 아버지를 떠났던 작은 아들을 다시 받아 주시는 아버지는, 회개하고 돌아오는 죄인을 받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깊고, 넓고, 높은 것인지를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세계 각국에 조금씩 다른 버전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제가 읽은 이야기는 태국에 있는 이야기인데, 집을 나간 아들을 어머니는 오늘도 기다립니다. 집으로 돌아 온 아들이 멀리서 어머니 집을 훔쳐 봅니다. 그런데, 어머니 방 방문이 열려 있습니다. 방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본 아들은 용기를 내서 어머니에게 돌아갑니다 아들이 어머니에게 말합니다. "어머니, 이렇게 어머니 방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보고 돌아올 용기를 냈습니다." 그랬더니, 어머니가 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들아, 난 네가 떠난 후에 한번도 이 방문을 닫은 적이 없다!"
오늘 말씀 14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은혜롭고 자비로우시며, 쉽게 노하지 않으시며, 사랑이 많으시며, 벌을 내리지 아니하신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He is merciful and compassionate, slow to get angry and filled with unfailing love. He is eager to relent and not punish.” 이 말씀 중에 ‘compassionate’라는 말이 눈에 들어옵니다. 상대방의 처지에 deep sympathy를 가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sympathy를 가지신 분입니다. 우리의 고통 (pas-sion)과 우리의 아픔, 우리의 약함을 잘 아십니다. 히브리서 말씀 읽을 때도 이런 말씀이 나왔습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한 부분을 잘 알고 계십니다 (For we have a high priest who is able to sympathize with our weaknesses).” (히브리서 4:15)
바로 이 말씀이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언제나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있고,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 앞에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문이 항상 열려 있습니다.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작은 아들은 바로 우리 자신들입니다. 작은 아들처럼, 우리에게는 항상 하나님을 떠나 살고 싶은 유혹이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도 얼마든지 살 수 있을 것 같은 유혹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간섭 없이 살고 싶은 유혹이 있습니다. 이런 유혹에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 때 여러분이 오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나에게는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문이 열려 있다!” 성경에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Your God is gracious and compassionate. He will not turn his face from you if you return to him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우리의 처지를 잘 이해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그는 우리에게서 얼굴을 돌리지 않으십니다)." (역대하 30:9)
그러나, 하나님께 돌아갈 때는 조건이 있습니다. 완전히 하나님께 마음을 드려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 “너희의 온 마음을 다하여 내게 돌아오너라 (12절)”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New Living Translation에서는 “Turn to me now, while there is time. Give me your hearts” 라고 번역했습니다. 같은 말씀이 NIV 성경에는 “Return to me with all your heart”라고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 돌아가는 사람은 그의 온 마음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입니다. 온 마음으로 예배하고, 온 마음으로 찬양하고, 온 마음으로 순종하고, 온 마음으로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우리의 온 마음이 드리지 않는 형식적인 것을 싫어하십니다. 이사야 42:8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여호와다. 이것이 내 이름이다. 나는 내 영광을 다른 것에게 주지 않겠고, 내가 받을 찬양을 우상들이 받게 하지 않겠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오해합니다. “아, 하나님은 우상을 찬양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구나!” 이 말씀을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온전한 찬양을 기쁘게 받으신다는 뜻입니다. 마음의 절반은 우상에게 빼앗기고 있으면서, 그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런 찬양은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또 열왕기상 18:21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러분은 언제까지 바알과 여호와 둘 사이에서 머뭇거릴 것입니까? 여호와와 바알을 함께 섬기려고 하십니까? 여호와가 참 하나님이시면 여호와를 따르고 바알이 참 하나님이면 바알을 따르시오.”
하나님을 믿으려면 온전한 마음으로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것에 절반은 마음을 빼앗기고, 절반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에 빠졌다고 하니까 하나님을 완전히 버리고 우상을 섬기는 것 같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요아스 왕이 처음에는 하나님을 잘 섬기다가 제사장 여호야다가 죽자 우상숭배에 빠졌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버린 것 같지요? 아닙니다. 하나님을 버린 것이 아니라, 우상에게 절반은 빼앗긴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겼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성 크리소스톰 (St. John Chrysostom, 347-407, Archbishop of Constantinople)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자기 교구를 순방하던 중에 있었던 일입니다. 교구는 넓은데, 가는 곳마다 사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한 시골에 있는 교회를 순방하게 되었습니다. 이곳에도 역시 사제가 없었습니다. 이 교회를 떠나면서 그는 한 농부에게 교회에 대한 책임을 맡기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자꾸 마음에 쓰였습니다. “내가 괜한 일을 했구나! 그 자격 없는 농부가 어떻게 교회를 책임질 수 있겠어?” 불안 마음을 가지고 크리소스톰은 그 교회를 다시 가 보았습니다. 간다는 말도 하지 않고 몰래 그 교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가 보고 싶었습니다. 크리소스톰은 기둥 뒤에서 몰래 예배 광경을 지켜 보았습니다. 지켜 보는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습니다. 예배가 끝난 뒤에 크리소스톰은 그 농부 사제 앞에 무릎을 꿇고 자기를 위해서 기도를 해 달라고 했습니다. 농부 사제는 그 사람이 크리소스톰인 것을 알고 깜짝 놀라면서 무슨 소리냐고, 제가 기도를 받아야 할 터인데, 왜 이러시느냐고 만류를 했습니다. 그 때, 크리스스톰이 “나를 용서해 주시오. 나는 지금까지 당신처럼 가슴에 불을 안고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소.” 이 말을 들은 그 농부 사제가 당황하면서 “아니, 그러면, 그렇게 하지 않고 달리 하나님을 예배하는 방법이 있습니까?”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사순절을 맞이해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회개해야 할 것들이 참 많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우리가 온전한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고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음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일인데,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님 그런 식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차라리 하나님을 떠난 것보다 더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절반은 우상에게 마음을 빼앗긴 채 절반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예배했고, 절반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송했고, 절반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온 마음 (a whole heart)’ 드려야 합니다. ‘whole food’에서 파는 식품이 organic 식품이라고 해서 값이 비싼 것처럼, 우리의 ‘whole heart’를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요엘은 자기 시대 사람들에게 “옷을 찢지 말고 너희 마음을 찢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13절)”고 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 우리의 진심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형식적이고,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마음을 찢어서 그 속을 다 하나님께 보여 드리라는 것입니다.
지난 월요일에 우리교회에서 KMC 뉴잉글랜드 지역 목사님들이 모여서 회의를 했습니다. 회의를 마치고 세미나가 하나 있었습니다. 세미나 주제는 “욥기를 어떻게 설교할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세미나를 마치고 모두들 유익한 시간이었다고 좋아했습니다. 지금 목사들의 생각이 “어떻게 하면 설교를 잘할 수 있을까?” 이 문제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생각이 좀 달랐습니다. 지금 설교를 잘 하는 목사들은 많습니다. 차고 넘칩니다. 얼마든지 설교 잘하는 목사들의 설교를 들을 수 있고, 설교집을 사서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좋은 목사가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별로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설교는 잘 하는데, 인격은 갖추지 못한 목사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입을 열면 그렇게 좋은 설교를 쏟아내는데, 왜 돈과, 명예와, 권력에 대한 욕심을 내려 놓지 못한 목사들이 그렇게 많습니까? 지금은 목사들이 설교를 잘하려고 노력하는 대신, ‘온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훈련을 해야 하는 때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목사가 없어서 교회가 시끄럽고, 이런 평신도가 없어서 교회가 세상에서 존재감을 상실해 가고 있는 것 아닙니까? 물론 이렇게 설교하는 제 자신도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이런 마음들을 서로 공유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이번 사순절이 우리의 ‘온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지 못했던 믿음생활을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2/28/2016 | 사순절
하나님을 만나라. Experiencing God
시편 63:1-8
지금 우리는 사순절 기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순절은 헨리 나우엔 (Henri Nouwen)이 말한 것처럼 ‘특별한 방식’으로 주님과 함께 있는 시간입니다. 기도하는 시간이요, 성경을 읽는 시간이요, 나 자신을 반성하는 시간이요, 회개하는 시간입니다. 사순절에 무슨 말씀을 나누면 좋을까 하다가 시편 63편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이 시편은 다윗이 쓴 시편입니다. NLT 성경 처음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A psalm of David, regarding a time when David was in the wilderness of Judah.] 다윗이 유대 광야에 있을 때 경험했던 일들을 시로 쓴 것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성경의 인물 중에 훌륭한 사람들이 정말 많이 있습니다. 다윗도 그 중 한 사람입니다. 성경을 조금이라고 읽은 사람들은 다윗이란 사람에 대해서 대충 압니다. “아, 다윗? 골리앗과 싸워서 이긴 사람!” 이 정도는 다 압니다. 그리고, 성경을 좀 많이 읽은 사람들은 다윗이란 사람을 알아가면 갈수록 다윗이란 사람에게 빠지게 됩니다. 그만큼 다윗은 매력 있는 사람입니다. 우선 성경에서 다윗에 대해 평가하는 것을 보면 굉장합니다. 열왕기상 15:5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다윗은 언제나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옳은 일을 했습니다. 다윗은 헷 사람 우리아의 일 외에는 그의 평생에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다. 그가 내 뜻을 다 이룰 것이다 (I have found David son of Jesse, a man after my own heart. He will do everything I want him to do).” (사도행전 13:22) 하나님께서 다윗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구약성경 사무엘상 13:14에 나오는 말씀이죠? 사무엘이라는 선지자가 사울을 찾아가서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이렇게 전달합니다. “Now your kingdom must end, for the LORD has sought out a man after his own heart. The LORD has already appointed him to be the leader of his people, because you have not kept the LORD's command (당신의 나라는 이제 망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마음에 든 사람을 찾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그를 이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무 것도 아닌 다윗을 하나님께서 백성의 지도자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여러분, 여기서부터 말씀을 잘 들어 보세요. 이렇게 하나님께서 기뻐 했던 사람이라면 그의 삶이 순탄하고, 행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의 인생은 파란만장했습니다. 그의 인생 길은 결코 순탄하지 않습니다. 그의 삶에 많은 고난이 있었던 이유는 대부분 사울이라는 사람과의 악연에서부터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없이는 다윗도 없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다윗의 생애에서 사울은 뗄래야 뗄 수 없는 사람입니다. 사울이 있었기에 다윗은 더 빛이 났습니다.
오늘 시편 63편이 그렇습니다. 그를 죽이려고 하는 사울을 피해서 다윗은 유대 광야로 도망갔습니다. 유대 광야는 요단강 계곡을 따라서 길이 100km, 폭 20km의 남북으로 형성된 거대한 황무지입니다. 이 황무지를 ‘엔게디 황무지 (the wilderness of En-gedi, 사무엘상 24:1)’라고 합니다.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는 사울을 피해서 유대 광야에 숨습니다. 여기서 다윗이 얼마 동안이나 숨어 지냈는지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어떤 학자들은 5-6년 정도라고 하고, 어떤 학자는 12년 정도라고 말합니다. 다윗에게는 정말 악몽과 같은 도피 생활이었습니다. 이곳은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풀도 자라지 않고, 나무도 없는, 모래와 높고 낮은 석회암 언덕이 끝없이 펼쳐지는 곳입니다. 여기서 다윗은 오랜 세월을 혼자 지내야 했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전혀 그렇게 의도하지 않았고,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일들이 생깁니다. 그 때, 무엇이 여러분을 지켜 줍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을 지켜 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And we know that God causes everything to work together① for the good of those who love God and are called according to his purpose for them).”/①Some manuscripts read And we know that everything works together 로마서 8:28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읽을 때도 우리의 시선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이 말씀에 가 있어야 합니다. ‘선을 이루느니라’ 이 말씀에 가 있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합력해서 선을 이루는 일’은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런 그가 왜 그가 그런 혹독한 광야에서 도피생활을 해야 했습니까? 정말 다윗이 하나님을 사랑했다면, 로마서 말씀대로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었습니까? 예, 그랬습니다. 다윗의 생애 중에 광야생활은 하나님의 선물이었고, 하나님의 축복이었습니다. 만일 그가 광야생활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하나님의 선물을 받지 못할 뻔 했습니다.
다윗이 유대 광야에서 5-6년, 혹은 12년 이렇게 오랜 기간 동안 도피생활을 한 것은 악몽과도 같은 기간이었습니다. 그러나, 비록 악몽 같은 기간이었지만, 하나님의 시각에서 이 기간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 이 기간은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축복의 시간들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다윗은 광야생활을 통해서 주옥 같은 시편들을 썼습니다. 누가 분석해 보았더니 광야생활을 주제로 한 시편이 무려 30편 정도 된다고 합니다. 이 시편들은 모두 다윗이 가장 어렵고 힘들었던 시기에 쏟아져 나온 것들입니다. 반대로, 만약 다윗에게 이런 고난의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더라면, 이런 시편들이 세상에 나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유대 광야 엔게디 황무지에서 다윗이 의지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밖에 없었습니다. 이 하나님을 향해 다윗은 부르짖다가 울기를 반복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다가 그 원망이 어느 새 기도로 바뀌기를 반복했습니다. 이 광야에서 힘들었던 경험들이 다윗의 입에서 회개와 기도와 시와 찬양과 기도가 되었습니다.
가장 위대한 창조물은 우리가 편안하고 아무 문제가 없을 때 나오지 않습니다. 어둡고 긴 고난의 터널을 통과하면서 위대한 창조물들이 나옵니다. 진주조개 양식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책에서 읽었습니다. 진주 조개 속에 들어 있는 진주는 처음부터 진주를 만들려고 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이물질이 들어와서 조개의 연한 살에 상처를 냅니다. 조개는 아픔을 잊으려고 끊임 없이 분비물을 뱉어서 이물질을 감쌉니다. 이렇게 하기를 수천 번, 수 만 번을 반복합니다. 그래서 마침내 영롱한 진주가 만들어집니다. 진주 조개를 양식하는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고 억지로 조개의 입을 벌리고 이물질을 넣어준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악성 베토벤 (Ludwig van Beethoven, 1770-1827)은 1801년부터 청각장애로 고생했습니다. 친구들에게 청각에 문제가 생겨 고통스럽다고 자신의 문제를 얘기했다고 합니다. 1814년에는 거의 아무 것도 들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가 쓴 교향곡들이 대부분 이 시기에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리고, 피아노 소나타 14번 ‘월광’과 15번 ‘전원’이 1801년에,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 ‘엘리제를 위하여’는 1810년에 작곡했습니다. 교향곡 5번 ‘운명’은 1808년에, ‘합창’이라고 불리우는 교향곡 9번은 1824년에, 그가 완전히 청각을 잃어버린 후에 쓴 작품입니다. 이 곡은 4악장에 나오는 ‘환희의 송가 (Ode to the Joy)”로 유명합니다. 전문가들은 이 작품이 베토벤의 작품들은 물론 서양음악 전체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 가운데 하나라고 말합니다. 현재 이 곡은 유네스코의 세계 기록 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위대한 창작물들은 이렇게 고난과 고통을 통해서 세상에 나옵니다. 다윗의 시편도 그렇습니다. 그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길고 힘들었던 시기에 불후의 시편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둘째로, 유대광야 엔게디 황무지에서의 악몽 같은 삶은,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만 의지하게 했습니다. 오직 그가 의지하고 희망을 둘 수 있는 분은 하나님 밖에 없었습니다. 다윗에게 하나님은 피난처 (refuge)였고, 산성 (stronghold)이었고, 피할 바위 (rock)였고, 방패 (shield)였고, 위태할 때 찾는 도움 (help)이었습니다 (시편 18:2).
오늘 읽은 시편 63편 말씀에서 우리는 다윗이 얼마나 하나님을 사모하며 갈망했는지,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오 하나님, 주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주를 간절하게 찾습니다. 물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곳, 메마르고 거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목마르게 찾습니다. 온몸으로 주를 애타게 찾아 헤맵니다.” (1절) 여러분, 목마른 사람의 고통을 아십니까? 우리는 그 고통을 모릅니다. 목이 말라 본 적이 없으니까요. 지금 다윗은 유대 광야, 엔게디 황무지에 있습니다. 메마르고 거친 땅입니다. 물 한방울 찾아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장이라도 물을 주시지 않으면 목이 타서 죽습니다. 그의 부르짖음을 들어 보세요. “I earnestly search for you. My soul thirsts for you. My hole body longs for you in this parched and weary land where there is no water.” 지금 사경을 헤매고 있는 다윗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하나님은 다윗을 이런 막다른 곳으로 데리고 온 것입니다. 왜요? 그에게 하나님을 찾고 만나는 경험을 주기 위해서요.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다가가야 합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그 자리에 가만히 있으면서 하나님께서 나를 만나 주시기를 원합니다. 뭐,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에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찾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다가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고 붙잡기를 원하십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오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여러분을 가까이하실 것입니다 (Draw near to God and He will draw near to you., NASB).” (야고보서 4:8) 그런데, 하나님을 가까이 하려고 해도 이게 잘 안 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려고 해도 잘 안 됩니다. 그런데, 고난 중에 있는 사람은 본능적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기가 쉽습니다. 성경을 이런 시각으로 읽어 보세요.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가졌던 사람들은 거의 예외가 없이 고난 중에서 하나님을 만났던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도, 저도, 그렇고 예외가 아닙니다. 고난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축복입니다. 그 고난을 통해서, 고통과 아픔을 통해서, 눈물을 통해서, 절망을 통해서, 좌절을 통해서,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을 보세요. “내가 주를 성전에서 뵈었습니다. 그 곳에서 주의 능력과 영광을 보았습니다 (I have seen you in your sanctuary and gazed upon your power and glory).” (2절) 여러분, 1절 말씀하고, 2절 말씀하고 연결이 됩니까? NLT 성경으로 읽어 봐도 두 말씀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NKJV으로 읽어 보았더니, ‘so’라는 말이 앞에 붙어 있습니다. “So I have looked for You in the sanctuary”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NASB에 보니까 “Thus I have beheld Thee in the sanctuary”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thus’라는 말에는 ‘결과적으로 (accordingly, consequently)’ 이런 뜻이 있습니다. ‘so’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되면, 1절과 2절이 잘 연결이 됩니다. 1절에서 그렇게 목마르게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간절하게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의 영혼이, 그의 온 몸이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랬더니 결과적으로) 다윗은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보았습니다. 정확한 정황은 알 수 없지만, 어쩌면 다윗이 환상을 보았는지 모릅니다. 환상 속에서 성전에 계신 하나님을 만났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경험은 이런 것입니다. “주의 사랑이 내 목숨보다도 좋기에 내가 주를 찬양할 것입니다.” (3절) 개역성경에 이 말씀이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인자’라는 말은 단순히 사랑이라고 번역하기에는 그 뜻이 너무 깊습니다. 그래서 NLT 성경에는 ‘unfailing love’라고, ‘멈추지 않는 사랑’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다윗의 고백은 5절에서도 이렇게 계속됩니다. “가장 좋은 음식을 먹은 것처럼 내가 만족할 것입니다. 크게 기뻐하며 내가 주를 찬송하겠습니다.” 쉽게 말하면,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자를 알고 나니까.......
중요한 것은 다윗이 부르는 노래 가사가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그의 기도의 말이 바뀌었습니다. 예전 같으면, 배고픔, 목마름, 추위, 불안과 공포 이런 것이 주제였는데, 이제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나니까 그렇게 고통스럽고 힘들던 광야, 엔게디 황무지가 그의 입에서 찬송이 되어, 노래가 되어 나옵니다. “주는 나를 도우시는 분이시기에 내가 주의 날개 그늘 아래서 노래합니다 (Because you are my helper, I sing for joy in the shadow of your wings).” (7절) 로마서에 있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시라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이 말씀은 시편 118:6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자기 도움으로 삼는 사람은 이렇게 담대하게 인생을 살아갑니다.
사순절은 특별한 방식으로 주님과 함께 있는 기간입니다. 회개하고, 자신을 돌아 보고, 기도하고, 성경을 읽는 기간입니다. 저는 앞으로 남은 사순절 기간에 여러분이 하나님께 다가가는 기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의 문제를 가지고, 여러분의 절망을 가지고, 여러분의 염려와 걱정과 불안을 가지고,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는 기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을 하는 기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만난 경험을 가지고 엔게디 황무지의 고통을 한번에 날려 버렸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경험이 그의 삶을 단번에 바꾸어 놓았습니다. 다윗의 마지막 고백을 들어 보시겠습니까? “내가 주께 가까이 다가가니, 주께서 오른손으로 나를 붙들어 주십니다 (I draw near to you; your strong right hand holds me securely).” (8절)
2/21/2016 | 사순절
이기적인 삶의 방식을 버리라. Turn From Your Selfish Ways.
누가복음 9:20-26
지금 우리는 사순절 기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순절(四旬節)은 ‘넉 사(四)자’에 ‘열흘 순(旬)’를 써서 ‘사십일 간의 절기’라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Lent’라고 합니다. 부활절까지 40일간의 기간으로 금식과 회개에 힘쓰는 기간을 말합니다. 사순절의 마지막 일주일은 고난주간이라고 합니다. 이 고난주간이 끝나면 부활절이 됩니다. 금식과 회개에 힘쓰면서 모든 생각을 그리스도에게 집중합니다. 그리고 나 자신을 돌아보면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삶을 반성해 보는 기간입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 기독교에서 가장 의미 있는 기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헨리 나우엔 (Henri Nouwen, 1932-1996)이 남긴 사순절에 대한 기도가 유명합니다. 한번 들어 보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주 예수님. 사순절입니다. 특별한 방식으로 주님과 함께 있는 시간입니다. 기도하는 시간이요, 금식하는 시간이요, 그리하여 예루살렘으로, 골고다로, 죽음을 이긴 최후 승리의 자리로 주님을 따라 주님의 길로 가는 시간입니다. Jesus, The Lenten season begins. It is a time to be with you in a special way, a time to pray, to fast, and thus to follow you on your way to Jerusalem, to Golgotha, and to the final victory over death.
저는 아직도 마음이 나뉘어 있습니다. 진심으로 주님을 따르고 싶으면서도 저 자신의 욕망을 따르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명성과 성공과 인간의 존경과 쾌락과 위세와 권력을 속삭이는 음성들에 귀를 내주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이런 음성들에 귀머거리가 되고, 주님의 음성에 더 귀 기울이게 하소서. 생명의 좁은 길을 택하도록 저를 부르시는 그 음성에 말입니다. I am still so divided. I truly want to follow you, but I also want to follow my own desires and lend an ear to the voices that speak about prestige, success, human respect, pleasure, power, and influence. Help me to become deaf to these voices and more attentive to your voice, which calls me to choose the narrow road to life.
사순절이 제게 아주 힘든 시간임을 압니다. 주님의 길을 선택하는 일은 삶의 순간마다 계속되어야 할 일입니다. 생각도 주님의 생각을 선택하고, 말도 주님의 말을 선택하고, 행동도 주님의 행동을 선택해야 합니다. 선택이 필요 없는 시간이나 장소는 없습니다. 주님을 선택할 때면 제 속에 얼마나 힘든 저항이 있는지 잘 압니다. I know that Lent is going to be a very hard time for me. The choice for your way has to be made every moment of my life. I have to choose thoughts that are your thoughts, words that are your words, and actions that are your actions. There are no times or places without choices. And I know how deeply I resist choosing you.
주님, 가는 곳마다 순간마다 저와 함께 하소서. 사순절의 계절을 신실하게 살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소서. 그리하여 부활절이 올 때, 주님이 저를 위해 예비하신 새 생명을 기쁨으로 맛볼 수 있게 하소서. 아멘. Please, Lord, be with me at every moment and in every place. Give me the strength and the courage to live this season faithfully, so that, when Easter comes, I will be able to taste with joy the new life which you have prepared for me. Amen.
특히 기도문 중에서 ‘It is a time to be with you in a special way, a time to pray, to fast, and thus to follow you on your way to Jerusalem, to Golgotha, and to the final victory over death’ 이 구절이 제 마음에 와 닿습니다. 맞습니다. 지금은 주님과 특별한 방법으로 함께 있는 때입니다. 어떤 사람은 금식으로, 어떤 사람은 기도에 집중함으로, 또 어떤 사람은 성경읽기로....... 아무튼 사순절은 평소와는 다른 방법으로 주님에게 우리 마음을 집중하는 특별한 기간입니다. 이 특별한 기간이 여러분들에게 소중한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을 새롭게 만나고, 주님과 마음을 나누고, 사랑을 나누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읽은 누가복음 9:20-26 말씀은 사순절에 꼭 맞는 말씀이 아닌가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가장 눈에 들어오는 말씀은 당연히 23절,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이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자기에게 지워진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 한 구절만 떼서 생각하고 묵상해도 은혜가 되지만, 이 말씀은 앞 뒤에 나오는 말씀과 연관되어 있는 말씀이기 때문에, 이런 말씀의 맥락에서 이 말씀을 해석해야 합니다.
오늘 읽은 말씀에는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이 있을 직후에 자기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하고 물으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이 중요한 질문을 ‘오병이어’의 기적 다음에 배치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고 있지만 그 이유는 예수님을 통해서 기적을 보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진실한 동기라고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왜 예수님을 따르는지, 내가 왜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고 하는지, 진지한 자기 성찰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저는 누가의 이런 의도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 어떤 동기를 가지고 있다면 평생 이 동기를 바꾸기가 어렵습니다. 처음이 이 사람이 가지고 있었던 동기가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교양으로 믿음생활을 시작한 사람은 평생 그런 마음을 바꾸기가 어렵습니다. 사람들과의 교제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사교 목적으로 교회를 나오는 사람은 또 그런 태도를 바꾸기가 쉽지 않습니다. 나는 왜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고 하는지, 나는 왜 교회에 나오는지, 스스로 자신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하고 질문하셨습니다. 이 질문에 제자 베드로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유대 민족이 오랫동안 기다려왔고, 예언자들이 예언했던 바로 ‘그 메시야 (the Messiah)’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메시야’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입니다. 지금 누가는 이 베드로의 대답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지만, 왜 예수님을 찾는지 잘못된 동기를 가지고 찾고 있는 ‘오병이어’의 기적 다음에 배치했습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베드로의 대답을 들으시고 “네가 이런 대답을 한 것은 어떤 사람이 가르쳐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너에게 가르쳐 준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을 누구에게도 해서는 안 된다고 입 단속을 하신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마태복음 16:16, 20).
제자들에게 입 단속을 하셨다는 말씀은 오늘 읽은 누가복음에도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하도 사람들 사이에 예수님이 누구인지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통하여 정답을 가르쳐 주시고, 아직은 때가 안 되었으니까 입 단속을 하신 것이구나!”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베드로의 대답이 정답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든지 마음대로 생각해도 좋다”가 아니라, 예수님이 누구인지 정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정답을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말은 만약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시지 않았더라면 아무도 정답을 몰랐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저는 우리의 대답이 그 정답에 가까워질 때, 우리가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되는 길은 첫째로, 예수님께 대한 올바른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정답을 하나님께서 직접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든지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그 정답 외에 어떤 대답도 정답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정답을 모르는 사람은 그 누구도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둘째로, 언행일치(言行一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한다, 말과 그 사람의 삶이 일치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께서 드리는 고백은 단순히 입으로 그렇게 고백했다고 해서 진실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고백이 진실된 고백이 되려면 나의 삶으로 증명이 되어야 합니다. “나는 예수님의 제자이기 때문에 이렇게 삽니다” 이렇게 증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증명이 안 되면, 내가 입으로 한 말이 아무 의미가 없게 됩니다.
저는 성경을 읽다가 어떤 사람에 대한 말씀이 나오면 그 말씀을 매우 흥미 있게 읽습니다. 특히 그 사람의 이름 앞에 붙어 있는 수식어나 설명을 눈여겨 봅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 같은 사람은 ‘이 사람들은 자기 목숨을 걸고 나를 살려 준 사람 (They once risked their lives for me)’이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16:4). 디모데 같은 사람에게는 어떤 설명이 붙어 있을까요?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자기 일에만 정신이 팔려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여러분도 디모데의 인품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는 나와 함께 하나님의 복음을 전할 때, 마치 아들이 아버지를 섬기듯이 나를 도와 주었습니다.” (빌립보서 2:21-22)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All the others care only for themselves and not for what matters to Jesus Christ. But you know how Timothy has proved himself. Like a son with his father, he has served with me in preaching the Good News.” 디모데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얼마나 자신이 예수님에게 헌신된 사람인지 그 자신을 증명했다는 것입니다. ‘He has served with me in preaching the Good News,’ 저는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복음을 전파할 때 그의 복음에 대한 헌신의 정도가 바울과 대등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단순히 바울을 옆에서 도와 주었던 ‘helper’가 아니었습니다. ‘assistant’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바울과 함께 복음의 전파자 였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평가할 정도로 디모데는 예수님께 깊이 헌신된 사람이었습니다. 디모데는 그것을 복음 전파에 대한 진실함과 열정으로 증명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대답은 우리의 삶으로 증명이 되어야 합니다. “나는 예수님을 그렇게 고백하기 때문에 이렇게 삽니다’하고 증명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고백이 진실한 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나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고백해야 한다. 나는 많은 고통을 받고 배척을 받았다. 나는 십자가를 졌다. 너희도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그래야 진실한 나의 제자가 될 것이다.”
이 말씀의 핵심은 ‘자기를 부인한다’는 말 속에 들어 있습니다. 이 말을 New Living Translation에서는 'Turn from your selfish ways’라는 말로 번역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본질적으로 selfish합니다. 이기적입니다. 사람의 본능은 이기적입니다. 자기에게 좋은 것, 자기에게 유리한 것만 생각합니다. 자기에게 좋은 것이 있으면 ‘Yes’합니다. 자기에게 불리하고, 손해가 될 것 같은 일에는 ‘No’합니다. 이상할 것 없습니다. 사람은 원래 그런 존재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자기에게 좋은 것이 있으면 ‘No’라고 합니다. 자기에게 유리할 것 같으면 ‘No’라고 합니다.
프랜시스 교황이 취임 이후에 계속해서 눈에 띄는 행보를 하고 있습니다. 가는 곳마다 화제입니다. 교황이 멕시코를 방문 중에 happening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은 환호하면서 교황의 손이라도 잡아보려고 야단들이었습니다. 그 때 어떤 사람이 교황의 옷소매를 잡아 끌었습니다. 그 바람에 교황이 앞에 있던 장애인에게로 넘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때 교황이 버럭 화를 내면서 "Don't be selfish!"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당신이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바람에 앞에 있는 장애인이 다칠 뻔 했다는 것입니다. 앞에 사람이야 어찌되었든지 나만 교황의 손을 잡으면 됩니다. 사소한 것 같지만 그리스도의 제자는 이런 이기적인 행동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말은 예전에 자기가 ‘Yes’했던 일에 ‘No’라고 말한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No’ 라고 말했던 일에 ‘Yes’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를 부인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의 뜻 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자기를 부인하는 일이 곧 예수님께 대한 우리의 신앙고백이 진실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 밑에 나오는 말씀이 모두 그렇습니다. ‘자기 생명을 건지려고 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자기를 긍정하는 사람입니다. 자기 속에 있는 ‘selfishness’에서 돌아서지 않은 사람입니다. ‘나를 위해 자기 생명을 잃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자기를 부인하는 사람입니다. 자기 속에 있는 ‘selfishness’에 대해서 ‘No’하고 돌아 선 사람입니다. 조금 더 말씀을 읽어 볼까요?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예수님께 대한 신앙고백을 삶으로 증명하는 일에 실패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누구입니까? 자기 속에 있는 ‘selfishness’로부터 돌아서지 않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을 부끄러워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순절은 특별한 방식으로 예수님께 우리 마음을 집중하는 절기입니다. 40일 동안 금식하면서, 기도하면서 예수님께 우리 마음을 드리는 특별한 기간입니다. 이 기간에 우리는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나는 얼마나 진실한 그리스도의 제자인가?’하고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나는 과연 나의 이기적인 방의 방식에서 돌아섰는가?’ 하고 나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유진 피터슨(Eugene H. Peterson) 이 [껍데기 목회자는 가라]는 제목의 책을 썼습니다. 이 책의 원래 제목은 [The Unnecessary Pastor]입니다. 목회자들이 읽어야 할 책입니다만, [The Unnecessary Christian]이라는 제목의 책도 나와야 하지 않을까요? 말과 행동이 다른 크리스천, 자신의 고백을 증명할 수 없는 크리스천, 자신의 이기적인 삶의 방식에서 돌아서지 않은 껍데기 크리스천은 이제 사라져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