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모음
4/9/2023 | 부활주일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Peace Be With You
요한복음 20장 19-31절
오늘은 주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을 기념하여 지키는 부활주일입니다. ‘예수 다시 사셨습니다.’ 세계교회는 매년마다 부활주일부터 시작하여 40일을 거꾸로 올라가 재의 수요일부터 고난주간을 보내게 되지요. 고난의 엄숙함과 고통속에서도 "작은 부활절”인 주일은 우리에게 빛을 비춰 주었습니다. 주님은 깊은 어둠속에 있는 이들에게도 빛을 비추고 계시고, 고통속에서 잠 못 이루며 뒤척이는 이들에게도 ‘너희에게 평강이 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인생의 벼랑 끝에 서 있는 이들에게 ‘평강이 있으라’ 하시는 주님의 위로가 더 깊게 다가오지 않겠습니까? 깊은 상실감에 싸여 있는 제자들도 ‘평강이 있으라’ 하시는 주님의 말씀이 각별하게 느껴졌을 겁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반복되는 구절에서 제자들을 향한 주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이 없다면 부활도 없습니다. 인생의 애통함과 슬픔을 느껴 본적이 없는 분들은 주님의 위로와 평강의 깊은 의미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이 바로 ‘평강’입니다. 세상에서 당하는 환란 가운데서도 '담대하라 내가 이기었노라.' 하셨습니다. 평강은 성도들에게 새로운 옷을 입혀 주시는 부활의 확증인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주는 장소가 아니라 서로 용납하고 서로의 품을 내어주는 것이지요. 이것이 부활을 사는 이들의 모습입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에 Inside out 라는 영화를 함께 본 적이 있습니다. 여운이 많이 남는 영화였습니다. 인간 안에 내재된 기쁨과 슬픔, 분노와 냉소 등 여러 마음 속 감정들이 영화 속에 캐릭터로 등장을 합니다. 8년 전 제 손을 잡고 영화를 보던 두 아이가 이제는 제법 성장해 주었는데요. 영화 속 이야기는 상반되는 두 감정이 서로를 배제한 채 삶을 살아 갈 수 없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슬픔과 기쁨이 혼재되어 있는 감정속에서 서로를 성숙하게 보듬어 줄 때 인생이 행복해 진다는 내용입니다. 사순절기의 감정은 ‘너무 슬퍼’라고 하는 것이 주된 정서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다 잘될꺼야’라는 소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19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심> 같은 날 저녁에, 제자들이 함께 모여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두려워 문을 꼭 잠갔습니다. 그 곳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들 가운데 서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오늘 본문은 밤이라는 시간적 배경에서 시작이 됩니다. 개역개정으로 보면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은 토요일이니까 안식 후 첫날 저녁때라는 것은 주일 저녁입니다.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무덤에 갔는데 동굴로 된 무덤의 출입구를 막아 놓은 돌이 치워 진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빈 무덤 앞에서 울었습니다. 마리아에게 천사들은 왜 우는지 묻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고,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빈무덤을 바라보며 울고 있는 마리아를 예수님이 부르십니다. 직감적으로 예수님의 음성을 알아차린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마리아가 그 사실을 제자들에게 전했지만 제자들은 그녀의 말을 알아 듣지 못했습니다. 그날 밤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두려워 문을 꼭 잠그고 함께 모여 있었습니다. 성경은 제자들의 그 심정을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니 가야 할 길을 잃어 버리고, 혼란에 빠진 것입니다. 믿음의 길에서 내가 의지한 것이 사라지게 되면 우리도 상실감에 빠지고, 갈 길을 잃어 버릴 때가 있습니다. 밤은 감정지수가 더 높아지는 시간입니다. 밤이라는 시간적 배경에서 제자들이 얼마나 두려워 하고 있는지를 느끼게 해줍니다.
첫째로 교회는 세상속의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는 제자들에게 손과 옆구리를 보이셨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보자 무척 기뻐했습니다. 21 다시, 예수님께서는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보내신 이의 뜻을 ‘내가 다 이뤘다’라고 말씀하시고 십자가 위해서 숨을 거두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전에 공생애 가운데 믿는 자들에게 성령을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은 각 사람에게 성령님을 보내 주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셔야 했습니다. 육신의 몸으로는 온 인류의 주가 될 수 없으니 메시아의 사명을 다 이루시고 육신의 장막을 헐고, 영원한 성전이 되어 주셨습니다.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16:7)
성부와 성자의 관계에서는 성부가 ‘보낸 자’가 되고, 성자가 ‘보냄을 받는 자’입니다. 성자와 제자의 관계에 있어서는 성자가 ‘보낸 자’가 되고 제자들이 ‘아포스톨로스’ (ἀπόστολος) 보냄을 받은 ‘사도’가 되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 ‘보냄을 받는 자: 아포스톨로스(ἀπόστολος)라는 단어는 79번이나 나오는데, 교회는 보냄 받는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부름 받은 소명에 응답하는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을 찾아 오셨고, 제자들에게 아버지께서 나를 보낸 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고 하신 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교회가 방향을 교회 내부로 정하면 교회 안에서 우리는 모든 에너지를 다 소진하게 됩니다. 그러나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세상을 향해서 보냄을 받게 될 때에 교회는 살아 있는 교회가 됩니다. 세상의 방식을 교회 안으로 들여 오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세상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 시대적 사명이 되어야 합니다. 기독론적 성령론의 도식은 이렇습니다. Father —> Son —> Spirit그 순서를 보면 아버지가 아들을 보냈고 아들은 약속하신 성령을 세상에 보내 주셨습니다. 교회는 성령을 받아 들이고 충만함으로 세상속으로 침투하는 것입니다. 세상속에 들어가기 위해서 약속된 성령을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요.
사도행전 2:32-33절을 보면 “32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33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문제는 제자들이 지금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입니다. 두려움이 임하면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스스로 갇혀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닫혀진 문을 뚫고 들어 오셨습니다. 그리고 하신 말씀이 ‘평강이 있을지어다’입니다. 고통 받는 이들에게 친구가 되기 위해 먼저는 평강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이 충만한 교회는 두려움이 아니라 평안을 빌어 주는 공동체가 됩니다. 케임브리지 공동체 안에 평안함이 흘러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신 첫번째 선교사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에 자신의 삶을 드렸습니다. 그러기에 주님께 부름 받게 된 소명자들은 보냄 받는 사명자가 되는 것입니다. 복음이 없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복음이 있는 자에게는 사명을 주는 것입니다. 교회의 관심은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통치가 성령을 통해 실현되도록 해야 합니다.
둘째로 교회는 성령의 호흡을 지속적으로 해야 합니다.
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해 숨을 내쉬며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아라
두려움에 직면할 수 있고 깊은 고뇌와 절망감에 빠질 수 있지만 너무 오랫동안 그 감정에 갇혀 있지는 마십시요. 신앙생활에 있어서 경건한 삶도 필요하지만 두려움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는 경건 보다 성령의 충만함이 필요합니다. 교회의 성패를 좌우하는 것은 성령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생기이고 호흡이지 않습니까?
주님은 그들을 향해 숨을 내쉬며 말씀하십니다. ‘숨을 내쉰다’는 표현은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에게 생기를 주시는 것을 연상시킵니다. 창조의 숨결은 예수님을 통해 죄로부터 온 아담의 형상에서 예수님의 형상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례입니다. 세례식은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삶의 중심으로, 왕으로 고백하는 의식입니다. 이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지요. 뱃속에 있던 아이가 세상에 자력으로 나오지 못하는 것처럼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도 성령의 역사입니다. 문제는 세상에 나와서 숨을 쉬지 않으면 뱃속 세상과 다르기에 생명이 멈추게 되는 것이지요.
두려움은 염려라는 감정의 뿌리에서 시작되기에 성령은 좋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염려와 불안의 감정에 뿌리를 내리게 되니 두려운 것입니다. 구원과 미래는 성령을 통해 믿는 자들에게 계시가 됩니다. 교회 공동체는 성령 안에서 서로가 그리스도의 몸 된 성전을 지어 가기 위해 성령안에서 하나가 되어집니다.(엡2:22) 호흡이 불안정한 사람들에게 긴장을 풀고, 심호흡을 하며 호흡을 깊게 마시고 내뱉으라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생기가 지속적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인간은 깨진 질그릇과 같아서 물이 쏟아지는 수돗물 아래 그릇을 갖다 놓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충만함에 이르는 것입니다.
성령 받은 첫번째 증거는 주님과의 연합니다.
주님은 포도나무이시고 우리는 가지입니다. 가지는 나무에 붙어 있을 때에 열매를 맺게 되지요.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주님과의 연합이 중요합니다. 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는 서로 사랑하는 열매를 맺게 됩니다. 예배를 마치고 한주간 살면서 가지에 핀 꽃들을 볼때마다 ‘서로 사랑하라’는 성령의 증거가 확증되시기를 바랍니다. 나무를 유심히 보니까 큰 나무의 가지들이 약한 가지들을 아래에서 받쳐 줍니다. 먼저 나온 가지가 밑부분에 있게 됩니다. 험한 세월 동안 강한 바람에 꺾여 지지 않고 큰 나무가 된 것도 크고 강한 가지가 받쳐 주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이 원리를 통해 열매를 맺고 성장해 가는 것입니다.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하면, 그 죄는 사함을 받을 것이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하지 않으면, 그 죄는 사함을 받지 못할 것이다.”
두번째로 성령받은 증거는 ‘죄가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성령의 세례는 죄를 사하여 주심으로 ‘서로 용서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새계명과 ‘서로 용서하라’라는 것은 같은 의미입니다. 육체로 부터 썩어지는 욕망을 내려놓고, 성령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좇아가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성령 받는 증거입니다.
사도행전 2장 38절은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아픔과 약함을 아시는 주님은 우리를 홀로 버려 두지 않으시려고 ‘성령을 받으라’ 하신 것입니다. 주일 예배를 마치고 나가시면서 스치는 봄바람에도 성령님의 기운을 느껴 보십시요. 부활하신 주님은 이제 공간과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이제 공간 밖에도 계시고 공간 안에도 계십니다. 시간을 초월하여 성취된 언약안에 있는 성도들과 지금도 함께 계십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교회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리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나타나심> 열두 제자 중에서 디두모라는 별명을 가진 도마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다른 제자들이 있던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25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도마에게 “우리가 주님을 보았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도마는 “내가 직접 예수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분의 못박힌 곳에 찔러 보고, 내 손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 보기 전에는 못믿겠다”고 말했습니다. 26 일 주일 뒤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다시 그 집에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도마도 그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이 때도 문은 잠겨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으로 들어오셔서 그들 가운데 서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7 그리고는 도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가락을 여기에 찔러 보아라.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믿지 않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어라.”
손으로 만져서 확인하고 믿겠다는 도마에게 주님은 정죄하지 않으십니다. 도마의 손을 잡으시며 못 자국 난 부위를 찔러 보라고 하십니다. 초신자들의 경우 믿음을 깊이 생각해 보고 고뇌하는 시간들을 인내하며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의심하는 도마에게 자신의 상처 난 손과 옆구리를 확인시켜 주듯 믿음의 공동체는 믿음이 없는 이들을 정죄하는 장소가 아니라 믿을 수 있도록 격려해 주는 곳이어야 합니다. 사실 도마의 주장은 이상한 게 아닙니다. 누구라도 죽었던 사람이 살아났다는 것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흔들림 속에서 믿음을 깨닫게 되고 고뇌 가운데 믿음이 더 깊어지는 것입니다.
폴 투르니에(Paul Tournier, 1898~ 1986)는 인간의 만남을 3가지로 정의합니다. 첫째는 육체와 육체와의 만남입니다. 둘째는 마음과 마음의 만남입니다. 셋째는 영과 영의 만남입니다. 그는 일찌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홀어머니 밑에서 외롭게 자라며 다른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어린시절을 보냈습니다. 한번은 친구들과 선생님의 집에 초대를 받아 갑니다. 같이 이야기하며 놀다가 돌아왔는데 특별한 의미가 없는 육체적 만남이었습니다. 이후에 혼자서 선생님의 초대를 받아 갔는데 식사를 하며 선생님은 자기의 과거에 실수했던 일들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는 존경하던 선생님께도 인생의 약점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자기도 모르게 마음의 문이 열리며 자기의 아픔도 이야기 하게 됩니다. 그는 집으로 돌아오면서 난생 처음 위안을 받은 자신을 발견합니다. 이것이 마음과 마음의 만남입니다. 얼마후 그는 대학에서 선생님을 다시 만나게 됩니다. 그때 선생님은 그리스어를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날 선생님은 그를 집에 초대해서 식사 후에 진지한 표정으로 말씀합니다. ‘폴 나는 오늘 밤 예수를 믿기로 작정했네’라고 말했습니다. ‘선생님은 이미 예수를 믿고 계신 줄로 알았는데요?” 했더니 “그렇기는 하지. 하지만 오늘밤 예수를 내 구주로 영접하려고 하네” 하면서 그의 손을 꼭 잡으며 “폴 자네도 나와 함께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지 않겠는가?” 이 물음에 그는 “예”라고 하게 됩니다. 그 밤에 함께 손을 잡고 고백하는데, 그때 갑자기 눈물이 쏟아지면서 예수가 믿어지기 시작하였답니다. 이 만남이 바로 영과 영의 만남이었다고 폴 투르니에는 자신의 고백을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경험하며 살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고뇌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을 만나는 통로가 되어 주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부족한 이들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채워주십시요.
말씀을 유심히 묵상하다 보니까 도마가 예수님을 만나는 그 현장에 없었습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그 현장에 없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40일 동안 새벽기도의 습관이 생겼을 것입니다. 이 습관을 지속해 보시기 바랍니다. 부활절기와 성령강림 절기를 지나면 한해를 마치게 됩니다. 그렇게 부활의 주님과 동행하는 일상을 살아가는 일은 은혜의 시간들이 될 것입니다. 도마의 별명은 디두모입니다. 그 뜻은 ‘이중성’’입니다. 도마의 이런 마음이 우리 안에도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모두가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도마가 부활의 주님을 경험한 순간 도마는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외쳤습니다.” 도마 안에 고뇌, 의심은 사라지고 믿음의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의심과 고뇌 두려움과 절망이 찾아 올때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 계심을 고백하십시요. 이것이 요한 복음의 결론입니다.
30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있는 곳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습니다. 31 그런데도 이 책에 있는 표적들을 기록한 것은 여러분들로 하여금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고, 그분의 이름을 믿음으로써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배를 마치면서 부를 파송의 찬송가 4절 가사를 함께 고백하며 말씀을 맺겠습니다.
이 땅 위의 험한 길 가는 동안 참된 평화가 어디 있나 우리 모두 다 예수를 친구삼아
참 평화를 누리겠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4/2/2023 | 종려주일
마지막만찬 The Last Supper
마가복음 14:22-26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40일 순례길도 이제 한주 남았습니다. 이제껏 함께 동행해 주신 교우들께 감사드리고, 참여하다가 멈추신 분들, 아직 참여하지 못하신 분들도 고난주간 순례길은 지체들과 함께 동행해 주시길 권면 드립니다. 사랑하는 이의 격려가 평생 마음에 남는 것처럼, 어려울 때의 함께함이 든든함이 되는 것처럼, 우리 지체들에게 기도의 자리를 지키는 이 시간이 서로의 삶에 감사의 기억이 되리라 믿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대교 절기는 그들의 ‘삶의 일부’였습니다.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구출해 주신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가장 큰 축제’ 였지요. 그들은 유월절을 지키며 하나님이 애굽에서 해방시킨 이야기를 나눌 뿐 아니라 ‘이스라엘은 해방 된 민족이다’라는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신앙을 격려하는 축제였습니다. 이러한 배경속에서 유월절 ‘마지막 만찬’을 하시는 예수님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번 유월절이 예수님에게 마지막 만찬의 자리인 것을 제자들은 알아 차리지 못했습니다. 그저 매년 치뤄지는 이스라엘의 축제이고, 성대한 절기라고 생각했겠지요.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제자들에게 죽음의 의미를 설명해 주어야 했습니다. 십자가 사건을 알아 차리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유월절 만찬에 어린양의 고기 없이 떡과 포도주를 먹을때 성만찬의 의미를 말씀해 주셔야 했습니다. 그 다음날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는 주님을 보며, 최후의 만찬에서 보이지 않던 어린양의 실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마지막 만찬은 환호성을 부르는 경기장이기 보다 모두가 떠난 뒤에 텅빈 경기장이 주는 고요함이 더 맞으리라 싶습니다. 주님은 사랑하는 제자가 자신을 팔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18절에 보면 “다 앉아 먹을 때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꼭 제자 중에 한 사람이 아니었어도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을 텐데 가롯유다는 스스로 뉘우칠 기회를 저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떠난 마음에 선과 악을 구분할 분별력은 사라져 버렸고, 하나님의 계셔야 할 자리에 은30냥만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세상이 움직이지만 신앙에 있어서 책임적인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됩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이 전 생애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말을 남겨놓은 글을 유언이라고 합니다. 유언은 사람이 죽어야만 말씀이 효력이 있게 됩니다. 현대인들은 잘 살아가기 위한 웰빙(wellbeing)의 삶에 주목하지요. 그러나 성도들은 믿음이 성숙해져 가는 성화(聖化, 거룩하여짐)의 삶, 웰에이징(wellaging)이 더 중요합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마지막 날 밤에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손수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며 섬김의 본이 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후에 식탁의 자리에서 복음이 무엇인지 보여 주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성찬을 통해 가장 해주고 싶은 말을 전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성찬은 실제적 삶으로의 초대입니다.
22-24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감사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그리고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받아라. 이것은 나의 몸이다. 23 또 잔을 들고 감사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잔을 주어, 제자들이 마셨습니다. 24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을 위해 쏟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다.”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다락방 식탁에서 하신 말씀을 열거한 이야기들을 제정사(Institutuon narrative)라고 합니다. 성찬(Eucharist)이라는 유카리스트 단어는 ‘감사를 드린다’의 그리스어에서 유래했는데, 성찬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시고, 역사하시고, 사랑으로 우리를 붙드심을 보여주는 은혜의 수단입니다.
예수께서는 빵과 잔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감사 기도를 하신 후에 떡을 떼고 잔을 부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 빵과 잔에 담긴 포도주는 예수님의 몸과 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평소에 밥을 먹고 물을 마셔야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듯이 주의 만찬에 참여함으로 죄를 용서받고 새 힘을 얻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매일을 살아있는 것도 생명을 주시는 분을 통해 생명을 얻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게 주님께서 유월절 만찬에서 행해진 이 의식은 그리스도교 예배의 중심에 자리 잡았습니다.
설교는 듣는 것이고, 성만찬은 복음을 보여주는 의식입니다. 우리 교회의 상황상 매주 할 수는 없지만 우리교회는 종려주일과 세계성만찬주일날 성만찬을 통해 주님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교우들이 성찬에 초대됨을 통해서 하나님의 생명이 무엇이지 더 분명하게 경험되어지기를 바랍니다. 이번 성찬에 참여 하실때에는 ‘생명을 얻는다’는 말을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연결시켜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하실 것임을 보여 주셨고, 이것을 ‘기념하고 기억하라’하셨습니다. ‘살아내라’는 의미입니다. 라틴어로 ‘이테 미사 에스트’(Ite, missa est)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 이제 예배는 끝났으니 세상으로 나가십시요’라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양식이 되어 주셨으니 우리도 누군가의 양식 되어 주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Liturgy after liturgy” 즉, “예배 후의 예배”입니다. 주일예배 때 말씀을 듣고 난 뒤에 교회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부터 보여지는 예배가 시작됩니다. 진정한 예배는 교회 예배로 끝나지 않고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나고 연장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케임브리지 교우들이 매일을 살면서 ‘생명의 예배’가 더 분명하게 느껴지시기를 바랍니다. 실제로 성찬에 참여하며 주님과 함께 걷고, 사는 경험을 보다 가깝게 느껴 보시면 좋겠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빵, 잔 그리고 포도주의 의미를 기억해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이 가지고 있지 않는 다섯 가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Word, Water, Bread, Cup, Light 말씀, 물, 빵, 잔, 빛>입니다.” 오늘은 다섯가지 중에 빵과 잔 그리고 잔에 담긴 포도주에 대한 의미를 나누고자 합니다. 세상도 이것을 가지고 있지만, 거룩한 백성들은 이것이 은혜의 수단으로 현재의 삶을 거룩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매일 성찬을 하지 않더라도 ‘떡과 잔’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 장소가 거룩한 장소라는 것을 느끼는 것이지요. 이것은 마음 깊숙한 곳에서 느끼는 감각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먼 여행이 머리에서 가슴까지라고 하지 않습니까? 성찬의 기쁨을 맛볼 수 있는 것은 ‘머리가 아니라 마음’입니다.
우리는 성찬식 가운데 ‘빵’을 먹습니다. 주님께서는 축복하시고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떼어’라는 헬라어는 ‘에클라센’입니다. ‘조각으로 부수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지요. 이 빵은 채찍질 당하실 때 떨어져 나가는 ‘주님의 몸’을 가르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며 창에 찔리실 때의 주님의 찢겨진 몸을 가르킵니다. 우리는 빵을 뗄 때에 주님의 찢긴 몸을 생각해야 합니다. 막14:3을 보면 “…주께서 앉아 식사하실 때, 한 여인이 매우 값진 감송 향유가 든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병을 깨뜨려 주의 머리에 붓더라”(KJV) 옥합을 깨뜨려 그리스도의 발 앞에 부었던 여인은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이 여인을 신실하다고 칭찬 하셨지요. '깨뜨려'로 표현하는 원어의 뜻도 ‘부수다, 산산히 깨뜨리다,’ 등으로 표현됩니다. 완전히 부수는 것입니다. 완전히 깨어져야 향유가 나오고 완전히 깨어져야 회개의 눈물이 쏟아집니다. 여러분과 제가 사랑하는 주님의 몸이 형용할 수 없이 깨어졌을 때 그의 보혈이 쏟아져 온 인류의 죄를 씻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불순종이 깨어져야 순종이 나오고, 불신이 깨어져야 믿음이 나옵니다. 불평이 깨어져야 감사가 나오지 않겠습니까? 교만이 깨어져야 겸손이 나옵니다. 깨어지는 것은 일회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깨어지는 것입니다. 완전히 깨어지는 것은 완전히 죽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지 않으셨다면 부활은 없었습니다.
두번째는 ‘잔’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은 ‘잔’을 내게서 옮겨달라 하셨습니다. 주님께 ‘잔’은 육체적 고통을 넘어 영혼의 고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에게 "내가 기도하는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어라." 그리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지요. "지금 나는 괴로워 죽을 것 같다. 여기서 나와 함께 깨어 있어라." 그리고 더 나아가 땅에 엎드려, 피할 길을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내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내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행하십시오.” 주님의 고통이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겟세마네'라는 뜻은 올리브를 눌러 짜서 기름을 짜는 틀인데 ‘겟세마네’의 주님의 기도는 육체적 고통을 이기기 위한 기도였습니다. 그 ‘잔’은 육신의 몸으로 달린 십자가 형벌의 고통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잔에 담긴 ‘포도주’입니다.
포도주는 숙성이 되면서 포도의 성분이 변화가 됩니다. 포도 알갱이를 으깨어 짠 포도는 오랜 시간 숙성되어 성분이 변화가 되지요. 그리스도를 따르는 성도들은 희생과 헌신을 통해서 주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미움이 변하여 사랑이 되고, 이기심이 변해 헌신과 희생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이 넘치는 곳에 믿고 뛰어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는 이를 ‘새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곳은 생명과 행복이 넘치는 장소입니다. 그곳은 빛과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는 것들을 내려 놓고, 마음에 섞여 있던 죄들을 말끔히 씻겨 버리십시요. 죄가 씻겨 질수록 부활의 생명은 더 선명해 집니다. 예수이 흘린 보혈은 죄 가운데 있는 사람도 다시 시작하게 하십니다. 새하늘과 새땅을 미리 맛보게 하시는 능력입니다.
셋째로, 겨울이 지나고 나면 봄은 옵니다.
25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가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실 그 날이 올 때까지는 결코 다시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마시지 않을 것이다.” 26 예수님과 제자들은 찬송을 부른 뒤, 올리브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새것으로 번역된 헬라어 ‘카이논’는 ‘이전 것 보다 더 나은’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장차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것 보다 더 좋고 새로운 것입니다. 이 땅에서 경험하는 성찬과는 비교할 수 없는 새로운 혼인 잔치가 베풀어 질 것임을 암시합니다. 성찬은 종말의 축제를 앞당겨 즐기는 종교의식입니다. 종말이 축제인 이유는 생명이 완성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찬식을 통해서 축제의 잔치를 미리 앞당겨 경험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성만찬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누구로 부르심을 받았는지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느껴질 때에 세리와 죄인들을 식사의 자리에 초대한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십시요. 제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버거울 때에 하나님의 그 사랑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명자의 길을 걷는 이들에게 주님은 성령의 능력을 덧입혀 주시고 지속 할 수 있는 영양분을 공급해 주십니다. 두렵고 떨리지만 새힘이 필요한 우리에게 주님은 가장 좋은 길로 완전한 길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인생의 추운 겨울 십자가 붙들고 다시 예배하고 믿음으로 나아갈때 인생의 봄날은 옵니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기념하며 세상으로 나아가 그리스도의 제자의 삶을 살아가기로 다시 결단합시다. 성찬의 식탁에 참여하는 교우들에게 은혜가 있을 것입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은혜가 우리의 무뎌진 믿음 생활을 깨우고 삶의 거룩함을 회복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진실한 마음은 결국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
요한일서4:7~11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사랑하는 친구들이여, 우리는 서로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며, 또한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심으로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을 보여 주셨으며, 그를 통해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진실한 사랑이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위해 화목 제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친구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처럼 우리를 사랑해 주셨으니 우리 역시 서로를 사랑해야만 합니다.
오늘 우리는 그 거룩한 성찬의 자리에 초대되었습니다. 십자가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그리고 우리의 교회에 가득 채워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3/26/2023 | (사순절 메시지 5)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 Conquer Evil By Doing Good
로마서 12:16-21
오늘은 사순절 다섯번째 주일입니다. 많은 교우들이 새벽기도회에 참여하며 순례길을 걷고 있습니다. 순례길을 걷고 있음을 잊고 계시진 않으시죠?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를 계속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조각 난 마음, 상처 난 마음에 찾아가셔서, 깨진 마음의 틈으로도 생명의 빛을 비추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에게 ‘마음의 회복’과 “마음의 평안”을 주십니다.
오늘날 세상이 바라보고 싶은 교회의 이미지는 ‘교회다움’을 회복하는 것이지요.영국 런던에 웨스트민스터 사원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리빙스턴을 비롯하여 엘리자베스 여왕, 음악가. 건축가, 시인, 정치가, 귀족 등 영국의 유명 인사들의 무덤이나 비석들이 그 사원 안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그래서 관광객들은 영국에서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제일 먼저 방문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웨스트민스터 사원이 본래는 그런 목적으로 세워진 곳이 아닙니다. 그곳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당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안에 들어가서 자기가 알고 있는 유명한 사람들을 확인하고 싶어하지만, 정작 그 예배당이 세워지게 역사하신 하나님께는 무관심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다움’을 잃어버린 모습이 아닐까요? 로마서를 기록하던 시기에는 기독교의 교리나 신학의 체계가 아직 형성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러 세기를 거쳐 오면서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바르게 이해 할 수 있는 신학적 체계가 형성 되었습니다. 감리교회는 성서와 이성과 전통과 경험이라는 4가지 표준을 삼고 신앙의 깊은 뿌리를 내렸습니다. 즉 ‘영적인 예배’라는 것은 ‘성서적 예배, 전통적 예배, 경험적 예배, 이성적 예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영적인 예배’ 외에 다른 수식어를 붙이면 아직 낯설어 합니다. 사실 이 표현들은 대립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경험’을 통해 회심 체험을 하게 하시고, ‘이성’을 통해 진리를 탐구하게 하시지요. 존 웨슬리는 기독교 관련 책들을 많이 읽었고, 200여권의 ‘고전’을 출판하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성경’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표준이 됨은 더 말할 필요 조차 없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12장을 시작하며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예배니라.”(롬 12:1) 여기서 영적(靈的)으로 번역된 헬라어 ‘로기켄:λογικην’은 ‘로기코스 :λογικοσ’에서 나온 말로 그 뿌리가 '로고스:λογοσ’입니다. 이 단어의 뜻은 reasonable인데, 즉 '합리적, 이성적'이란 뜻을 지녔습니다. 영적인 것은 곧 합리적, 이성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지성과 이성은 구분해야 합니다. 오늘날의 시대는 지성이 차고 넘칩니다. 우리는 지성으로 ‘성서적 지식’을 채울 수는 있으나 ‘진리의 경험’까지 나아가지는 못합니다. 영적 경험은 이성적으로 성경을 탐구 하는 이들이 ‘성령을 통해 구원의 진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몸을 값진 제물을 드리는 것에는 ‘삶의 전인격’을 드리라는 것입니다. 마음과 의지, 소유와 능력, 감정과 재능까지 모두를 드리는 것입니다. 헬라어 몸을 뜻하는 ‘소마(σώμα)’는 ‘전인격’이라는 뜻입니다.
주일날 교회에 나와서 예배 드리고 봉사하는 일은 삶 전체를 하나님과 연결해서 섬기는 삶을 확인하는 자리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몸 안에 성령께서 내주(內住)하시고(고전6:19) 우리의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이기에(고전6:15) 전 인격적인 몸에 대한 자기 통제가 바로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려지는 것입니다(롬12:1) 약한자가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그럴 의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 헤세드: חֶ֫סֶד 인’ 것이지요. 어떤 점에서,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것은 쉽습니다. 때로는 교회에서 자존심도 살리고 명예심도 얻을 수 있고, 종교적인 위안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삶 자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어렵습니다. 교회를 섬기는 일은 형식적으로 할 수 있지만 자기의 삶 전체를 드리는 일은 온전히 드려지지 않는 한 가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바울은 기독교 신앙을 철저하게 삶속에서 규정하고 있는 셈입니다.
바울은 본문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삶’에 대해서 말씀을 합니다.
첫째로, 한마음이 되기 위해 스스로 지혜로운 척 하지 않는 것입니다.
16 서로 한 마음이 되십시오.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마십시오. 하찮아 보이는 사람들과도 기꺼이 사귀십시오. 스스로 지혜 있는 척하지 마십시오.
‘지혜’는 무엇입니까?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며, 악을 미워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사랑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한마음이 되고, 교만한 마음을 품지 않고, 하찮아 보이는 사람들에게 기꺼이 마음의 품을 내어주고, 스스로 지혜로운 척 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성도들은 스스로 지혜 있는 척 하지 않습니다. ‘Philosophy’라는 단어는 헬라어 원어에서 사랑이라는 ‘Phileo’와 지혜라는 ‘Sophia’가 결합하여 구성된 합성어입니다. 인간이 누구인지를 다루는 가장 심도 깊은 학문으로 인식되는 ‘철학’은 본질적으로 ‘지혜를 사랑함으로 비롯된 학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스스로 지혜롭다고 믿는 자들에게 역설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눅10:21)
‘지혜로운 사람’은 악을 멀리합니다. 인류의 시작을 보면 뱀이 첫 사람인 아담과 하와에게 지혜를 약속합니다.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기면 선과 악을 알게 될 것이라고 유혹했습니다. 너가 하나님처럼 지혜롭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죄로 부터 나온 가인은 동생 아벨을 살해하고 말았습니다. 가인은 도시 문명의 개척자가 아닙니까? 인류의 첫번째 영웅이었습니다. 가인으로 부터 도시문화가 세워지고, 인류의 정복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선에는 ‘영웅이 아니라 실패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처럼 되려고 했던 지혜의 열매였습니다. 하나님은 부족한자라고 고백하는 의인을 통해 세상을 바꿔가십니다. ‘여러분은 영웅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마음 안에 머무르는 의인이 되기를 갈망하십니까’
우리는 ‘스스로 지혜 있는 척 하면 안됩니다’’ 스스로 지혜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면 서로에게 화를 내게 될 것이고, 선과 악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고 교만한 마음을 품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한다고 말씀합니다.’(요한 1서 3:5) 우리가 바라 보아야 할 길은 예수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쏟으신 십자가의 물과 피입니다. 십자가에서 입증해 주신 사랑의 길 뿐입니다. 이것은 세상을 구원하신 ‘최고의 지혜’입니다.
성경은 뱀이 인간을 타락시켰다고 기록합니다. 요즘 보면 파충류과의 뱀이나 도마뱀을 반려동물처럼 기르는 사람들이 많아졌는데요. 고대 근동에서 뱀은 신처럼 떠 받드는 우상이었습니다. 애굽의 바로 왕을 보면 뱀의 왕관을 썼지요. 성경에서 뱀은 사단을 상징합니다. 뱀이 상징하는 것은 인간의 욕망입니다. 욕망을 절제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죄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실존 상태입니다. 머리를 치켜든 뱀이 이집트 왕 파라오의 왕관 정면을 장식하고 있는데, 뱀은 절대 왕권을 상징하는 신성한 동물이었습니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섬겼던 태양신은 뱀의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민족의 지도자로 세우시기 위해 “네 손을 내밀어 뱀의 꼬리를 잡으라”(출4:4)고 말씀하셨습니다. 뱀이 상징하는 이집트 왕 파라오를 두려워 했던 모세였지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서 뱀의 꼬리를 잡았더니, 그 뱀은 이집트의 왕권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왕권를 상징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평범한 지팡이지만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끄는 지도력을 얻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언약의 지팡이’를 들고 계신가요? 성도들은 평생 ‘누가 왕인지의 싸움’을 하며 살아갑니다. ‘스스로 주인이 되어 살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을 주로 삼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며 살 것인지’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신 에덴동산에도 사단은 들어와 유혹을 했습니다. 사단은 의인 욥도 공격했고 광야에서 기도하시던 예수님도 시험했습니다. 사단은 믿음의 성도들의 삶에도 유혹 할 것입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나라를 무너뜨리고 싶어하며 하나님의 자녀들이 선과 악의 선택 앞에서 형제를 미워하기를 원합니다. 믿음의 부부는 허락하신 배우자 외에 다른 이성들을 볼때에 선악과로 보시기 바랍니다. 성도들도 죄가 들어올때마다 선악과를 떠올리며 은혜의 통치를 따르기를 바랍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다만 악에서 구해 달라고 말씀하셨지요.(마 6:13) 이것이 악에서 지지 않는 길입니다.
둘째로, 십자가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17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마십시오. 모든 사람이 보기에 선한 일을 하십시오.
18 여러분 쪽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십시오.
하나님은 죄로 인해 원수 된 이들을 사랑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열심은 어떠한 공로나 자격이 없음에도 선행적 은총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십자가가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인생의 여정에서 나에게 끊임없이 부당한 일을 저지르고, 비방하고, 악담하고, 괴롭히는 누군가가 있다고 합시다. 격한 악이 치밀어 오를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반응을 일으키는 자가 바로 악이고, 악의 존재이며, 악한 구조입니다.
이 세상의 구조는 사람들의 일생이 칠흑 같이 어둠이 가득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어둠은 ‘절망’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이런 절망을 운명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단지 빛을 잃어버리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죄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거짓, 돈의 유혹, 쾌락, 비방, 미움 등 수많은 죄의 요소들이 가득합니다. 이러한 악에 마음이 유혹되어 질 때에 우리는 주의해야 합니다. 만일 세상의 방법데로 대응하거나 세상의 모습으로 대응하는 것은 악에게 지는 것입니다. 세상은 조직적으로 악의 구조를 만들어 희생량을 만들고 악의 뜻을 이루려 합니다. 그러나 거듭난 성도라면 나를 위해 죽으신 십자가가 생각이 나야 합니다. 누군가를 비방하고 싶을 때 하나님이 거하시는 마음이 불편해 져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는 것은 입을 열어 화를 내지 말고 침묵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악을 행한 이들이 우리에게 해가 되지 않고, 그에게 해가 되는 것입니다. 사단은 믿음의 자녀들도 악인으로 만들려고 호시탐탐 우는 사자처럼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근신하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벧전 5:8) 오직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2천년 동안 믿음의 선배들이 기독교 역사 가운데 입증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고, 선한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내어 주시지 않았습니까? 세상은 악이 더 강해 보입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의 힘이 더 강하다는 것을 보여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선한 마음을 품고 더불어 모든 사람과 화평하게 지내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평화를 뜻하는 샬롬은 ‘완전하다, 온전하다’라는 뜻을 지닌 ‘실람’이라는 동사의 명사형입니다. ‘실람’이라는 동사의 의미는 "지불하다, 빚을 갚다"는 뜻인데, 성경에서 샬롬의 의미를 보면 평화의 뜻 외에도 ‘구원’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죄를 짓는 사람은 빚을 지고 있는 상태이니까 평안이 없고, 구원이 없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죄를 용서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보내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 회복이 있게 됩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사람과 화목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상대방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의 노력에도 화목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성도들이 따라야 하는 명령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끝까지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라는 말씀을 믿으며 ‘다리를 놓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과 화평하라는 것이 악에 대해서도 가볍게 여기고 그냥 넘겨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악은 우리에게 심각한 피해를 주고 돌이킬 수 없는 아픔을 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선한 것을 망가뜨리기 때문입니다.
롬 12:19을 보면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악에 대해 심판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악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겨야 합니다. 내가 그 일을 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하나님의 권한을 침범하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명령은 “맡기라”입니다.
캐나다의 한 커피숍 Faraday Café는 휴대폰 신호를 차단하고 교란시키기 위해 지어졌으며 무선 "블랙홀"을 의도적으로 생성하려고 시도한 세계 최초의 카페였습니다. 소유자는 엔지니어와 협력하여 상점 주변에 외부 신호를 차단하기 위해 패러데이 케이지로 알려진 것을 만들었습니다. 소유자인 줄리안 토마스(Julien Thomas)는 디지털 기술이 너무 빨리 발전하여 사람들이 사용에 대한 에티켓이나 윤리에 대해 생각할 기회가 실제로 없다고 느꼈다고 합니다. 토마스는 고객이 지속적인 인터넷 연결 없이도 일상생활이 어떤 것인지 느낄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생각마져 너무 빨라졌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살아가는 이들로 부터 나쁜 말이 끊어져야하고, 흘러다니는 죄가 끊어져야 합니다. 마치 바이러스를 막기 위해 마스크를 착용했던 것처럼 우리의 텅빈 마음안에 들어오는 우울과 불안, 근심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채우는 것입니다.
세번째, 하나님은 이해 할수 없는 방법으로 일하십니다.
20 여러분은 이렇게 하십시오. “원수가 먹을 것이 없어 굶고 있으면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 하면 마실 것을 주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은 그의 머리 위에 숯불을 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
원수의 머리에 숯불을 쌓으라 말씀합니다. “원수가 먹을 것이 없어 굶고 있으면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 하면 마실 것을 주는 것”입니다. 즉, ‘숯불을 머리에 쌓는다’ 라는 말은 성도의 친절한 행위가 원수로 하여금 심적 고통을 느끼게 하여 회개케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에는 교만이 있고, 피속에 욕망과 복수심을 향한 끌림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복수해서는 안됩니다. 주님은 성도들에게 ‘네 손에 피를 묻히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일하신다"는 믿음이 있다면 우리는 이해할수 없는 하나님의 방법을 끝까지 신뢰하는 것 뿐입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공식들이 있습니다. ‘성공의 법칙’ ‘공부의 비결을 통해 명문대 들어가기’ ‘세상의 모든 공식’ ‘수학자를 알면 공식이 보인다’ 이뿐만이 아니라 요즘에는 음식을 만드는 레시피 공식도 다양한 채널을 통해서 소개되고 있지요. 수많은 인생의 비법을 알려주는 공식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만큼 세상이 빠르게 변화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일하시는 공식이 있습니다. 이미 증명된 공식이며, 수천년 동안 변하지 않고 실패하지 않았던 공식입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위해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벌하셨습니다. 자신의 아들을 깊은 웅덩이 속으로 떠밀어 넣으셨습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신 것입니다. 바로 ‘십자가 공식’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교회는 문제를 세상의 공식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성령의 시대는 계속되고 있는데 더 이상 성령님의 지혜를 구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세상의 전문성과 방법을 의지할 때에 그 순간 교회의 기능이 끝이 나지 않겠습니까? 교회는 적어도 세상의 가치와 상식을 뛰어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굴하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기셨습니다.
여러분, 초대교회의 역사를 아십니까? 얼마전 한 교우가 ‘1세기 교회 예배 이야기’를 선물해 주었습니다. 그들은 기도제목이 생각나면 함께 기도하고 찬양합니다. 1세기 교회로 시간 여행을 해보니 오늘날 교회가 얼마나 멀리 와 있는지 느끼게 되었습니다. 삶에 녹아 든 복음, 일상과 일치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잊지 않은 것입니다. 예배는 예배 후에 교회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삶의 예배는 시작이 됩니다. 하루를 시작하며 문을 열고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 가족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입니다.
세상에서 지혜가 부족하다고 느끼십니까? 십자가는 스스로 지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가운데 능력이 없습니다. 여러분 주위를 둘러 보세요.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복음이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십자가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서로의 삶을 나누며 돕고 베푸는 사람들이 케임브리지 교회를 통해서 많이 배출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미련하고 약한 자들을 택하사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이 찬양의 가사를 함께 읽으며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작은 나를 부르신 뜻을 나는 알 수 없지만 오직 감사와 순종으로 주의 길을 가리라
때론 내가 연약해져도 주님 날 도우시니 주의 놀라운 그 계획을 나는 믿으며 살리
날 부르신 뜻 내 생각보다 크고 날 향한 계획 나의 지혜로 측량 못하나
가장 좋은 길로 가장 완전한 길로 오늘도 날 이끄심 믿네
3/19/2023 | 사순절 메시지 4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My Family And I Will Serve The LORD
여호수아 24:15-19, 24-27
신앙생활에는 전환점이 필요합니다. 애벌레가 어느 순간이 되어 껍질을 탈피하고, 날개를 펴서 하늘을 날게되는 시점이 전환점입니다. 과거를 매듭 짓고, 새로운 미래를 향해 발돋음 하는 것도 전환점입니다. 성도들에게 구원의 경험도 전환점입니다. 마음의 할례는 관성적으로 돌아가려는 마음을 돌려, 하나님의 영으로 호흡하며 날마다 은혜의 삶의 문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연약한 피조물임을 자각하는 순간, 내가 얼마나 죄인인지, 내가 얼마나 더러운 사람인지, 하나님의 거룩함 앞에서 용서 받아야만 살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큰 은혜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감리교 창시자 존 웨슬리 목사님은 ‘마음의 할례’라는 것은 성결해진 영혼의 습관적 성격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는 성도들은 새롭게 태어난 증표들로 마음의 재형성이 이뤄집니다. 이전에는 마음 안에 거룩함이 없었는데, 내면에 거룩한 감정들이 차오르니까 그 떨림으로 구원을 이뤄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 이후에 거룩한 습관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걷고 살아내며 예수를 닮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단강을 건넜고, 가나안 지역의 길갈에 들어 갔습니다. 그리고 가장 먼저 한 사건은 ‘할례의식’이었습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죽음에서 건져 주신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백성이 되었음을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뒤를 이어 출애굽의 여정을 완수했지요. 가나안 땅을 정복했고, 각 지파들에게는 땅을 분배해 주었습니다. 출애굽 이후 60년의 세월이 지나며 1세대들은 가나안을 앞두고 모세를 비롯해 다 죽게 되었고, 2세대는 여호수아처럼 나이가 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출애굽 이후 3세대는 출애굽의 구원과 광야의 고난을 경험하지 않는 젊은 세대들이었습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을 세겜 지역에 불러 모으고, 고별설교를 한 것은 모든 백성들의 믿음을 다시 한번 점검하기 위함입니다. 여호수아는 이 언약식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애굽으로 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이적을 행하셨고, 광야길을 걷는 동안 인도해 주시고 보호해 주셨음을 설교한 것입니다. 이곳 가나안 땅을 얻게 된 것도 가나안의 아모리 족속들을 쫓아 내신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고난을 겪지 않은 젊은 세대들에게 말씀한 것입니다. 고별설교를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잊지 말아야 한다.’ ‘너희는 애굽의 400년 종살이에서 불러낸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라. 길도 없는 거칠고 황량한 광야에서 인도하신 은혜를 잊지 말아라’ 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고난을 경험하지 않는 세대들은 가나안에 들어와 모든 것이 넉넉한 상황속에서 살아갑니다. 이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과 여호수아가 경험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온도차이는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각 지파별로 땅도 할당 되었으니, 훗날 지역적인 감정적 문제들이 생길테고, 가나안 지역의 신들과 신앙도 혼합되어 질 것이 염려되지 않았겠습니까?
이스라엘의 선조들은 아브라함부터 이삭, 야곱, 요셉에 이르기까지 가나안 땅에 있는 헤브론 지역과 세겜지역에 다 묻혔습니다. 이들은 나그네 같은 삶을 살면서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바라 보았다는 증거입니다. 야곱도 죽기 전에 자신을 이집트가 아닌 약속이 땅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합니다. 여호수아서 24장 32절에 보면 요셉도 자신의 뼈를 이집트에서 가지고 나와 그의 아버지 야곱의 땅인 세겜에 묻었다고 나옵니다. 요셉은 이집트에서 생을 마감했지만 가나안 땅을 주실 것을 믿음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익숙해 지면 무뎌지게 됩니다. 삶이 평안해지면 고생을 언제 했느냐고 잊게 되는 존재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마음으로 다짐하고 결심해도 무너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에는 전환점이 필요합니다. 마음을 새롭게 해주시는 일들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이 익숙해지지 않도록 여러 통로들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바로 은혜의 도구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에 예배 드리는 자녀, 찬송을 고백하는 자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매일 묵상하는 자녀들을 주목하십니다.
저는 지난주 코아부 팀장들이 준비한 새벽기도 특송영상을 보면서, 한사람 한사람의 얼굴들을 눈에 담으며 몇번을 돌려 보게 되었습니다. 함께하는 지체들의 섬기는 모습을 보면서 제 마음이 뭉클해 지더군요. “주를 섬기는 일에 후회가 없다’는 찬양의 가사의 고백이 제게도 귀한 울림이 되어 주었습니다. 제단 앞에서 기억나는 삶을 살아 가자고 말씀을 전하였던 적이 있습니다. 우리의 작은 말과 행동으로도 누군가에게 믿음의 도전이 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코아부 찬양을 듣고 예배를 사모하는 마음을 느끼고 나니 제 발걸음이 기쁨으로 기도의 자리로 향했습니다. 공동체가 주는 힘이 그런것 아니겠습니까? 아이들을 양육하는 교사들은 일주일에 한번이 아니라 매일 아이들이 하나님 만날 수 있도록 기도하며 설레임으로 준비하고, 각팀의 리더들은 주를 섬기는것에 후회가 없음을 고백하며 말씀과 기도, 사랑과 교제에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 생활을 할때에 현재에 보기에는 나의 선택과 다르고 가시밭길 같고 고난의 길 같아 보이나 지나고 보면 그 길은 우리를 믿음으로 성숙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고 매주일 강단에서 설교를 전해야 하는 일은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일입니다. 보다 편한 삶을 위한 본능적인 끌림을 거부해야 하기도 하고, 사명이 무거움이 아니라 진정한 기쁨임을 깨닫는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변화시켜 주십니다. 말씀속으로 들어가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이게 될 때에 성령께서 주시는 깨달음이 있게 됩니다. 예수님이 보실 때 주어진 삶에 ‘다음에’라는 말은 없습니다. 우리 앞에 놓여진 말씀에 순종하는 일도 ‘지금의 결단’입니다. 누군가에게 생명의 싹을 틔어 주는 섬김도 ‘다음에’라는 말은 없지요.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에 바로 순종해 보십시오. 그 은혜는 여러분의 삶에 깊은 고백이 될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지녀야 할 생각이 무엇일까요?
첫째는,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15 그러나 여러분은 여호와를 섬기고 싶지 않을지도 모르오. 여러분은 오늘 스스로 선택하시오. 누구를 섬길 것인가를 결정하시오. 여러분은 여러분의 조상이 유프라테스 강 저쪽에서 경배하던 신들을 섬길 수도 있고, 이 땅에 살던 아모리 사람들의 신들을 섬길 수도 있소. 그러나 나와 내 후손은 여호와를 섬기겠소.” 16 그러자 백성들이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결코 여호와를 저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다른 신들을 섬기지 않을 것입니다.
‘섬기다’라는 히브리어는 ‘아바드: עָבַד’인데, 이 단어의 뜻은 ‘예배하다, 따르다’ 등의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살아온 환경이 다르고 서로의 생각이 다르고 많은 것이 다른 우리지만 우리를 ‘그리스도의 한 몸’이 되게 하시고 ‘한 뿌리로 거듭난 형제’로 불러 주신 것은 우리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것을 자각해야 합니다. 섬김은 곧 예배입니다. 세상의 차원에서의 섬김이 아니라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을 향한 섬김의 자리와 세상속의 빛과 소금의 자리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섬김과 나눔, 돌봄과 이해’입니다.
성경은 옛자아를 벗어나 성령의 도우심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적당하게 믿고, 교회에 출석하고 헌금 많이 해도 ‘나를 위한 선택’일 수 있습니다. 구원은 어떠한 조건없이 선택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지요.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등지고 산 날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알게 될 때에 부어 주십니다. 섬김의 사람이 되기 위해 예배할수록 그 은혜가 더 깊어 집니다.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되고, 성령의 능력을 힘입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죽으신 그리스도를 또 다시 못박는 존재임을 깨닫고 무너질때에 ‘괜찮다’ 하시는 큰 은혜를 허락해 주십니다. 마음의 할례를 통해서 우리는 십자가가 우리에게 ‘걸림돌인지 아니면 디딤돌인지’ 선명하게 알게 됩니다.
“15 그러나 여러분은 여호와를 섬기고 싶지 않을지도 모르오.” 여호수아는 이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노년의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상태를 보고 이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나안 족속의 진멸을 경험하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옛자아를 철저히 부인하는 구원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2)라고 말씀하지요. 가나안 땅을 소유한 젊은 출애굽 세대들은 가나안 족속을 진멸하는 것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가나안 족속들도 우리가 변화시키면 되지 꼭 다 없앨 필요까지 있을까 생각을 할 수 있었겠지요. 그러나 신앙생활은 유일하신 하나님만 섬기는 것입니다. 단순히 심리적인 안정을 얻는 것에 그쳐서는 안됩니다. 여호수아는 신앙이 대대로 이어져야 하기에 하나님과 이방신 가운데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와 내 후손은 여호와를 섬기겠소” 라는 신앙은 ‘나만을 위한 신앙’이 아니라 ‘철저한 자기부정’을 통해 십자가 앞에 가까이 나아가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의 수준에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19 여호수아가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여호와를 잘 섬긴다고 하나 그렇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오. 왜냐하면 여호와는 거룩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오. 또 질투하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오.
하나님의 ‘질투’는 또 다른 사랑의 방식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 사랑으로 인도함 받기 위해서 ‘가만히 기다릴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다른 곳을 향하던 시선을 멈추고, 하나님의 마음 안에 머무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고민의 끝. 소유의 끝. 불평의 끝. 두려움의 끝에서 선택을 하면 또 다른 염려가 따라옵니다. 우리는 모두가 잘 살고 싶은 ‘욕망과 열심’에서 벗어날 수도 없습니다. 그 욕망이 성경이 말하는 죄입니다. 끊임없이 판단하고 선택하고 싶은 욕망에서 누구도 자유롭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편가르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품고 ‘다리를 놓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복된 삶을 선택을 하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복된 존재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보십니다. 겨울 한복판에서 따뜻한 봄이 새싹을 틔우며 생명을 알리는 것처럼 거친 세상에서 온기를 품고 살아가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미 우리에게 밝히 드러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담아내는 일. 내 것을 포기하고 들어 줄 수 있는 용기, 다투지 않고 화해 할 수 있는 용기입니다.
세상을 바라보면 흉흉한 소식에 믿음 안에 의심이 들어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머무르다 보면 하나님의 마음에 단단히 결속되어지지 않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예배 드리는 이곳에서 우리의 신앙에 안주하지 말고 여호와만을 섬기겠다고 결단하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헬라어 ‘프로네오: φρονέω’는 신약성경에 동사형으로 26번이 나옵니다. 주로 바울서신에서 사용된 단어인데요. ‘생각하다, 질문하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나의 생각을 넘어 말씀이 우리에게 주시는 뜻이 무엇인지 질문하고 생각하는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남들이 그냥 하니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이유를 찾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의 생각을 설득하십시요. 그러나 우리는 복음의 진리를 다 이해 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풀리지 않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신비라고 부릅니다. 알면 알수록 더 깊어지고, 진리의 힘이 믿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험한 이전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생각속에 더 깊어지고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사용한 헬라어 단어 중에 ‘도키마조: δοκιμάζω’라는 단어는 ‘분별하다:discernment’라는 뜻으로 성경(롬 12:2; 빌 1:10; 요일 4:1)에 쓰여집니다. 이제껏 신앙생활을 하며 내가 믿는 말씀들 중에 경험시켜 주신 말씀들을 분별해 보는 것입니다. 복음의 진리를 경험해 보지 않고는 제대로 증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은 부모의 믿음생활을 지켜 봅니다. 주일에 교회 나와서 어떻게 섬기고 있는지, 예배 후에 돌아가며 어떤 대화를 나누는지, 부모의 물질관, 내세관, 세계관을 보고 배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삶의 자리에서 보여지는 믿음의 태도가 우리의 신앙의 상태입니다.
셋째로, 신앙교육은 언약의 증거입니다.
24 그 때에 백성들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복종하겠습니다.”25 그 날 여호수아는 백성들과 약속을 맺었습니다. 여호수아는 그 약속을 백성이 지켜야 할 가르침으로 삼았습니다. 이 일은 세겜에서 이루어졌습니다. 26 여호수아는 이 일들을 하나님의 율법책에 기록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큰 돌을 가져다가 여호와의 성소 근처에 있던 상수리나무 아래에 세웠습니다. 27 그리고 나서 여호수아는 모든 백성에게 말했습니다. “이 돌을 보시오 이 돌은 우리가 오늘 한 일에 대해 증거가 될 것이오. 여호와께서는 오늘 이 곳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셨소. 이 돌은 오늘 일어난 모든 일을 우리와 우리 후손들에게 기억나게 해 줄 것이오. 이 돌은 여러분이 여러분의 하나님을 저버리지 못하게 하는 증거가 될 것이오.”
인생은 믿음의 증거들을 삼는 시간입니다. 부모님이 평생을 살아오신 믿음의 발자취가 자녀들에게는 믿음의 돌이며, 공동체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일도 증거의 돌입니다. 목회자가 예수님의 모습을 보이며 목양하는 일도 증거의 돌이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지체를 위해 함께 기도하고 격려해 주는 일도 믿음의 돌을 남기는 일입니다. 그리스도께 받은 사랑의 빚을 갚는 삶 그래서 내 품을 누군가에게 내어주는 삶, 섬김의 발자취는 믿음의 돌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자녀들에게 생명을 담는 예배가 이어져야 합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시대와 세대가 급격히 변화되어 질수록 후손들에게 신앙교육의 필요성을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오늘날 시대는 가치와 문화가 달라지고 있습니다. 자녀들의 사고가 달라지고 세계관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자녀들이 살아가는 세대를 충분히 이해해야 합니다. 세대를 읽지 못해서도 안되고 이 시대의 흐름을 무시해서도 안됩니다. 우상들은 시대마다 우리의 믿음을 유혹하지요. 이러한 빠른 변화속에서 신앙의 이어짐이 끊겨 버리게 되면 신앙의 미래는 없습니다.
영원토록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 십자가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흘러가야 합니다. 이를 통해 다음세대들을 하나님의 사람을 세워가야 합니다. 우리는 홀로 걷는 시간이 필요하지만 서로의 사랑을 나눌수 있는 광장이 필요합니다. 교회 공동체가 이러한 어울림의 장소가 되면 좋겠습니다. 음악 용어 중에 레가토(legato)라는 표시가 있습니다. 두개 이상의 음을 부드럽게 이어서 연주하라는 표시입니다. 신앙 공동체는 혼자만의 믿음이 아니라 자기 수준의 믿음을 뛰어 넘어 그리스도의 사랑과 섬김의 레가토로 연결이 되어야 합니다. 대부분의 충돌은 우월의식에 기초합니다. 말씀을 이해하고 가르치는 것에서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깨닫기 위해 엎드리는 자리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날 이 시대는 말 보다는 기도하고 엎드리며 삶을 살아내야 할 때입니다. 사람들은 배우고 아는 것에 그치지만 믿음의 사람들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에 하나님의 생각에 주목해야 합니다. 새시대의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들이 겸손하게 함께 지어져가는 과정을 배우는 것입니다.
한국의 어느 교회에 믿음으로 살아내기를 결단하는 남자들의 예배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한달에 한번 모여 각자 세상에서 버려야 할 것들을 예배의 자리로 나와 함께 기도하고 찬양하고 고백하는 모임입니다. 처음에는 많이 모여서 시작했는데 갈수록 인원이 줄어드는 겁니다. 이유를 알아 보았더니 믿음으로 결단하고 살아내는 것이 너무 힘들고 버거워서 결단을 못할것 같아서 점점 인원이 줄었던 것입니다. 맞습니다. 살아내려고 하면 할수록 어렵습니다. 그러나 함께이기에 때때로 무너지고 나약해져도 같이 갈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호와를 택할지 우상을 택할지 결정해야 합니다.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섬길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고백하며 예수님의 가치를 붙들고 살아내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나의 평생에 가장 잘한일은 내가 예수님을 주로 섬긴것입니다 우리의 간절한 고백이 되어야합니다. 여호수아의 결단식을 했던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호수아가 살아 있는 동안 여호와를 섬겼고,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도 계속해서 여호와를 섬겼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수아 24장 15절을 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너희가 섬길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습니다. 이 시간 예배를 드리고 나가실 때에 삶의 자리앞에 내가 교회됨을 기억하시며 걸음을 걸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우리가 교회’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교회’입니다.
3/12/2023 | 사순절 메시지 3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Is The Lord Among Us or Not?”
출애굽기 17:1-7
넷플릭스에서 방영한 ‘고요의 바다’라는 8부작 드라마를 본 적이 있습니다. 2075년을 배경으로 한 SF 웹 드라마인데요. 물이 고갈된 지구를 떠나 달에 버려진 연구기지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입니다. 환경오염이 심각해지면서 물은 급속도로 소모되고, 지구의 물은 바닥나기 시작합니다. 과학자들은 달에 있는 월수(月水)에 적응된 인간을 만들기 위해 비윤리적인 실험을 자행하게 되지요. 달의 기지 발해에서 무수히 많은 인간을 죽이며, 실험을 하다가 달의 기지가 폐쇄되고, 정예대원들이 달의 기지에 들어가 숨겨진 비밀들을 펼쳐내는 내용입니다.
미래학자들은 팬데믹을 통해서 인류의 변화를 5년 이상 앞당겼다고 합니다. 인류의 변화가 과연 좋기만 한 것일까요? 과거의 사람들이 오늘을 살아 간다면 우리가 불평하는 요소들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인간의 욕망과 문명의 이기(利器)는 편리함을 추구하는 인간의 이기심(利己心)으로 인해 환경이 갈수록 파괴 되어집니다. 인간의 욕망이 커질수록 사람들은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폭력문화에 쉽게 넘어가지요. 이러한 사회 구조속에서 경제논리로 생명의 문화를 파괴해 버리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세계의 원리를 역행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회속에도 수천년전 애굽의 제국문화의 요소들은 많이 있습니다.
출애굽 사건은 힘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권력을 함부로 대하는 제국 문화속에서 피라미드의 가장 아랫부분에 있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땅에 대한 꿈을 갖게 한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대안으로 가장 약소 민족인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 가셨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의 삶이 무엇인지 우리에게도 알려주십니다.
이스라엘의 긴 역사속에서 출애굽한 백성들은 40년의 광야 시간을 통해 신앙의 토대를 마련하게 됩니다. 애굽의 고센 땅을 벗어나서 더 좋은 삶이 펼쳐진다면 좋았을텐데 광야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광야는 하루 하루 하나님을 의지해야만 살 수 있는 장소였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살 수 밖에 없는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 하나님은 인간의 실존적 모습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 왜 광야의 장소로 인도하셨을까요? 마실 물이 없는 곳인 르비딤으로 인도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이곳 저곳을 옮겨 다니며 하나님을 의심하게 되는 상황들을 만나게 됩니다. 이러한 시간을 지나며 백성들은 긴 시간으로 인해 광야길에서 죽기 않고 살기만 해도 만족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광야에서 있었던 한 사건인데요.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탈출하시고 광야길을 떠돌아 다니게 하셨습니다.
지금 우리도 애굽과 가나안 사이에서 광야의 인생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날 현대인들은 목마름을 느끼며 인생을 살아갑니다. 상실과 두려움, 좌절감과 불안감을 느끼는 것은 본향땅을 향한 광야의 길을 걷기 때문입니다. 광야는 우리의 목적지가 아닙니다. 광야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구원 이후의 삶을 가르쳐 주는 시간입니다. 광야의 길은 우리들에게 다른 삶이 가능하다고 말씀합니다. 제국의 지배아래 종의 습관에 익숙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인생의 참주인을 통해 철저한 다루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은혜의 바람을 통해서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 양식들을 얻었고, 인도하심을 가운데 보호하심을 경험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죽음으로 부터 보호하셨고, 홍해를 건너면서는 온 백성들이 세례를 경험하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살겠다는 결단식을 갖게 하셨습니다. 모세를 통해 주신 십계명은 하나님의 나라의 원칙과 정신을 알게 하셨고, 성막의 제사제도는 예배를 통한 하나님과의 연합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 주셨습니다. 광야 길 곳곳에서 펼쳐지는 일들은 오늘을 살아가는 믿음의 공동체에게 주시는 귀한 메세지가 담겨져 있습니다.
첫째는, 마실 물이 없는 곳에도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1 <바위에서 솟는 물> 이스라엘 모든 무리가 신 광야를 떠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이곳 저곳으로 옮겨 다녔습니다. 그들은 르비딤에 진을 쳤지만, 거기에는 마실 물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엘림을 지나 르비딤이라는 오아시스를 찾아 도착하게 됩니다. 사실 르비딤 지역은 남부 험한 산악지대이며, 시내 광야는 지형이 높아서 이스라엘 대민족이 행군을 하기에는 어려움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림을 보시면 엘림에서 마라까지가 230km인데 시내산이 있는 르비딤까지의 행로는 만만한 거리가 아니었습니다. 군대에서 행군한 경험이 있으신 분들은 그때를 생각해 보시면 됩니다. 군대에서 무거운 군장을 매고 40킬로미터를 행군했던 기억을 떠올려 보면, 행군하며 마셨던 수통의 물맛과 당시 주머니 속에 챙겨서 한입씩 깨물며 먹던 초콜릿바 맛을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오랜 시간을 행군해서 왔는데, 물이 없는 지역을 만나게 되니까 서로 다투며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타는 목마름을 느꼈을 것입니다. 기대했던 것이 철저히 무너졌으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원망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그곳 이름을 ‘맛사’ 하나님을 시험하다 ‘므리바‘ 백성들이 ’ ‘다투다’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물론 3천 3백년전 이스라엘 백성들이 직면하게 된 상황들을 전부 다 알 수는 없습니다.
단지 험난하고 어려운 길을 행군해서 왔지만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그곳에 물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인생의 문제를 만나게 되면 우리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두려움과 불안함이 엄습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런데 르비딤 지역에도 하나님은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기에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불평을 연구한 학자들에 의하면 사람들의 불평은 첫단계로 무의식적 무능력(Unconscious Incompetence) 상태에서 불평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전혀 의식 할 수 없는 무지한 상태에서의 불평을 의미하지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은 불평의 조절 능력이 없는 자신의 상태를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우리도 모르게 불안이 엄습하고, 불평 할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말씀을 날마다 채워야 하는 것입니다.
폴 트립의 ‘목회, 위험한 소명’이라는 책에는 “오랫동안 성경을 대하다 보면 광대한 지혜가 깃들어 있는 위대한 구원 이야기에 더 이상 감흥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오랫동안 속죄를 설명하다 보면 십자가 밑에 서있어도 기쁨도 없고, 눈물도 나지 않는다. 오랫동안 다른 사람에게 제자훈련을 시키다 보면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선택되었다는 사실이 더 이상 놀랍지 않게 된다. 오랫동안 성경의 신학을 배우다 보면 그 목적이 개인의 거룩함이라는 사실을 잊게 된다. 이 모든 것이 너무 규칙적이고 일상적인 일이 되다 보니 더 이상 마음에 감동을 느낄 수 없다.” 우리는 익숙함의 한계를 자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비록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익숙함의 자리를 뛰어 넘어서 기도하게 될 때에 우리를 성장시켜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생존한계의 3.3.3 법칙이 있습니다. 공기 없이는 3분, 물이 없이는 3일, 식량이 없이는 3주가 건강한 인간이 느끼게 되는 생존한계라는 것입니다. 물론 더 길게 버틸 수 있는 경우들도 있지만 보통의 경우를 생존한계로 정한 것입니다. 영혼에도 골든타임이 있습니다. 삶에 어려움을 찾아오게 될 때에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실해지기 때문입니다. 가장 어려운 순간에 인간은 자신이 따르던 세상의 우상들이 의미가 없어집니다. 생명을 두고 하는 기도에는 다른 어떤 것들이 개입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가 막힌 고통의 세월 40년을 돌아도 우린 여전히 광야에 있을 수 있습니다. 끝없이 일어나는 불평과 원망으로 광야의 자리를 맴돌게 될 수도 있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문화속에서 익숙했던 종의 습관을 완전히 끊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옛사람의 기질을 거부하고 철저한 신뢰와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을 향해 거룩한 갈망이 임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게 되는 장소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광야 인생길에 성경이 주는 답은 십자가이지요. 이해 할 수 없는 세상의 일들, 믿음으로 해석할 수 없는 문제들, 명확히 알 수 없는 고통의 문제의 답은 그리스도가 달린 십자가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라고 외치시며 죽으신 십자가에서 세상의 행복과 가치는 무너져 내립니다. 그리고 새로운 선물인 은혜와 사랑이라는 통치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세상은 행복을 말하지만 교회는 은혜를 말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끊임없이 이기적인 욕망에 속절없이 이끌리지만, 믿음의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주시는 은택의 나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세상의 곳곳에서는 자신의 왕관을 외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세상속에서 하나님을 증명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불평 안에 우리가 원하는 욕구가 담겨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 인간의 욕구가 찢어지는 순간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순간이었습니다.
이것은 로마의 황제가 공포한 것이 아니고, 언덕에서 죄가 없으신 한 사람으로 오신 예수가 소리치며 죽었던 그 자리에서 선포된 것입니다. 죄의 중력에서 벗어나는 길은 하나님의 은혜에 맡기며 누구도 설수 없는 곳에 서보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어진 모든 상황들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 함을 믿을지 아니면 불평하며 원망할지 그 사이에서 믿음을 선택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둘째로, 백성들은 바위로 부터 물을 공급 받았습니다.
” 4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들은 당장이라도 나를 돌로 때릴 듯이 보입니다.” 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앞으로 나아가거라. 이스라엘의 장로들을 몇 사람 데리고 가거라. 그리고 나일 강을 칠 때에 썼던 지팡이도 가지고 가거라. 6 내가 시내 산 바위 위에서 네 앞에 설 것이다. 지팡이로 그 바위를 쳐라. 그러면 거기에서 백성이 먹을 수 있는 물이 나올 것이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보는 앞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했습니다.
바위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는 곳마다 반석에서 물을 내시는 분이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고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댄동산 같고 끊어지지 않는 샘 같을 것이라 말씀했습니다.
바울은 “모두가 같은 영적 음식을 먹으며 모두가 같은 영적 음료를 마셨느니라. 그들이 자기들을 따라가던 영적 반석으로 마셨는데 그 반석은 그리스도였느니라” (고전 10:3,4)
분열과 논쟁에 가득한 고린도 교회가 따라야 할 모범은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모세 시절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하셨던 광야의 교회는 세상속에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찬송가 384장은 ‘나의 갈 길 다 가도록 예수 인도 하시니 내 주 안에 있는 긍휼 어찌 의심하리요. 나는 심히 고단하고 영혼 매우 갈하나 나의 앞에 반석에서 샘물 나게 하시네 나의 앞에 반석에서 샘물 나게 하시네”
주님은 우리 앞에서 물을 내시는 분이십니다. 이 시간 삶이 고달프십니까? 인생에 목이 마르십니까? 가만히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십시요. 그 샘물은 절대로 끊어지지 않습니다. 영원한 샘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의심의 순간에도 기도합니다. 백성들은 불평을 하지만 모세는 부르짖어 하나님을 찾습니다. 교회의 리더들은 불평하는 백성들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불평의 상황을 이길 수 있는 일은 기도 밖에 없습니다. 광야가 펼쳐진다고 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곳이 광야였습니다. 40년이라는 시간동안 하나님께서는 목적을 향해 백성들을 광야로 인도하고 계신 것입니다.
모세가 지팡이로 반석을 쳐서 터져 나오는 물로 2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물을 마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반석을 친 것은 그리스도의 수난을 상징합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은 인류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과 화해하도록 하는 힘이 있습니다. 고난 받으신 십자가는 세상 사람들의 죄의 무게 보다 더 크신 사랑입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우는 꽃은 없습니다. 세상속에서 우리 영혼도 계속 흔들릴 겁니다. 그러나 이 흔들림 속에서도 구원받은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으로 이끌려 가는 것이지요. 일상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커져 갈수록 신앙의 힘에 사로잡히는 시간은 늘어날 것입니다.
셋째로, 표적은 본향 집을 향한 이정표입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며 당신이 메시아라면 표적 보이기를 요청합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느니라.”(마 16:4)입니다. 요나의 표적이 무엇입니까? 요나가 큰고기 뱃속에서 밤낮 삼일동안 지낸 사건입니다. 이것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기대한 대답이 아니었습니다. 요나가 삼일 동안 지낸 것은 3일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 이외에는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어떤 표적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보이지 않는 광야길에서 힘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을때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 계심을 바라 보십시요. 이것이 구원 이후 그리스도인들이 감당해야 할 숙제입니다. 기억하십시요. 바울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 십자가는 거리끼는 것이고, 미련한 것이라고 분명하게 지적했습니다. 구원 이후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부활은 세상 사람들에 경험되지 않는 생명의 사건입니다. 구원 이후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을 향한 간절한 마음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생명을 경험하고 싶습니다. 그 사랑안에 거하고 싶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시간을 늘려가야 합니다.
7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가, 계시지 않는가 하고 여호와를 시험했으므로, 그 곳의 이름을 맛사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백성이 다투었으므로 그 곳의 이름을 므리바 라고도 불렀습니다.
생명의 통치를 우리의 수준으로만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마실 물이 없는 곳에도 하나님은 계십니다. 인생의 기초가 되시는 그리스도 반석 위에 삶을 세워가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성도들의 삶에 보여 주시는 표적은 우리의 종착지를 향한 이정표일 뿐입니다. 때때로 인생에 표적이 없어도 하나님은 성도들의 삶속에서 ‘복’이 아니라 ‘성장하고 성숙’ 되어지는 과정을 인도하시고 동행하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건져 주셨고, ‘하늘 소망’을 바라보는 간절한 기도의 손을 붙들고 계십니다.
무너져 있던 자리에 하나님이 서 계십니다. 우리 안에 십자가의 능력이 믿어질 때에 나 지금은 땅을 벗삼아 살아 갈지라도 주님 계신 하늘의 소망 품으며 살아가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 교회가 말씀으로 사역하게 하시는 은혜의 자리 뒤에는 말씀으로 살아 내기 위하여 애쓰며 살아온 흔적이 남아있고 그 걸음들을 보게 됩니다.
사랑하는 케임브리지 성도 여러분
햇빛처럼 따뜻하게 다가오는 하나님의 은혜가 사순절 우리의 삶의 시간에 가득 채워 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예배를 붙들기 위하여 그 간절함으로 나의 나 됨을 내려놓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나아 오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