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모음
5/14/2023 | (어버이 주일, 졸업예배)
사랑의 하모니 Harmony of Love
요한 1서 2:7-17
오늘은 어버이 주일과 졸업 예배로 드리는 날입니다. 졸업은 또 다른 시작을 의미합니다. 배움이라는 목표를 위해 달려온 시간들을 인정 받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이 시간 졸업생들에게 전해지는 말씀이 하나님 안에서 인생의 목표를 바로 세우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지난주에 만나게 된 어떤 분의 눈물이 한주간 잊혀 지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딸을 위해 기도 부탁을 하시는 친정 엄마의 눈물이었습니다. 그 눈물은 진심이었고 사랑이었습니다. 누군가를 위해 노력없이 흘려지는 눈물이 있다면 그것은 부모와 자녀의 관계속에 담긴 눈물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우리교회는 보스턴을 찾는 이민자들과 청년들에게 부모의 품을 느끼게 해주는 교회, 즐거워 하는 자들과 즐거워 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시시때때로 감정에 의해 변하는 사랑이 아니라 고향집 같은 든든한 품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말씀합니다. 결혼식은 두사람이 언약을 맺고 한몸이 되어 삶의 여정을 함께 걸어가겠다고 하는 출발선이지요. 이후에 결혼생활을 지속할 수 있는 것은 그 믿음이 실제적이어야 합니다. 오늘 맞이한 ‘6351일과 282일’이라는 숫자는 저에게 큰 의미가 있습니다. 매일 달라지는 숫자이긴 한데요. 첫번째 숫자는 아내와 결혼식 이후 지금까지 사귐을 갖고 있는 날이며, 두번째 숫자는 케임브리지교회 교우들과 사귐을 갖으며 걸어온 날짜입니다. 사랑으로 동행하는 한날 한날은 너무도 귀합니다. 아이를 키울때 아이가 뒤집기를 하고 기어다니게 되고 걸음마를 하다가 걷게 되는 성장의 모든 과정에서 생명의 소중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내 아이는 특별히 더 잘 키우고 싶어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자녀를 낳은 기쁨. 키우는 보람. 장성하여 떠나 보내는 그 허전함까지도 모든 과정이 켜켜이 쌓여서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의 토대가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랑의 토대는 하나님의 마음을 공감하는 것입니다. 친밀한 사귐속에서 마주하게 되는 다양한 감정의 무거움에 묶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더 깊은 사랑의 뿌리를 내리며 열매 맺는 것입니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 나오는 한 장면입니다. 그는 오스트리아 출신 유대인입니다. 2차 대전 당시 아우슈비츠로 끌려 갔다가 기적적으로 살아 온 인물입니다. 그는 수용소에서 부모, 아내, 두 자식 그리고 그의 친구들을 모두 잃었습니다. 그는 형언할 수 없는 고통속에서도 주어진 삶에 무엇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삶이 무엇을 기대하는 지 삶 너머의 하나님께 희망에 두었습니다. “석방이 된 며칠 후의 어느 날 나는 꽃이 만발한 꽃밭을 지나 시골의 들판을 가로지르며 걷고 있었다. 수용소에서 가까운 장이 서는 읍을 향해 몇 마일을 걷고 또 걸었다. 나는 기뻐서 부르는 종달새의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땅과 드높게 보이는 푸른 하늘, 그리고 종달새가 즐겁게 부르는 노랫소리를 제외하면 자유로운 공간만이 있을 뿐이었다. 하늘을 우러러 보다가 나는 무릎을 털썩 꿇었다. 그 순간 나는 내 자신이나 이 세상에 관하여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내 마음속에 울려 나오는 한마디 뿐이었다. 저는 저의 비좁은 감방에서 주님을 불렀나이다. 그리고 주님은 자유로운 공간속에서 저에게 응답하셨나이다. 나는 그날 그 시간부터 나의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다시 인간이 될 때까지 한걸음 또 한걸음 앞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도저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극한 상황속에서 새롭게 피어나는 작은 기쁨과 자유는 세상의 전부이며 존재의 변화일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인간은 죄의 자녀인데, 십자가의 보혈로 하나님의 자녀를 삼아 주신 것은 너무도 중요한 것입니다.
첫째, 새삶은 사랑의 근원으로 부터 시작됩니다.
7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8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췸이니라
하나님이 주신 사랑의 새계명은 새롭게 주시는 것이 아니라 태초부터 있던 계명입니다. 레위기 19장 18절을 보면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고 말씀합니다. 즉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은 전혀 새로운 계명이 아니라 이미 구약의 백성들에게 주어진 계명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새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요 13:34) 이 뜻은 예수님이 우리의 본성을 잘 알고 계시기에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살아가다 보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반응하는 것이 더 당연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교회에 오면 ‘서로 사랑하라’ 할때에 마음에 부담이 되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미움의 감정이 아예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실제로 믿음으로 살려고 하면 의심이 속삭이고, 사랑하라는 말씀을 실천하려고 하면 시험이 찾아옵니다. 사랑의 관계를 유지하려고 해도 안될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노력이 헛될때가 있고, 뜻대로 되지 않을때도 있습니다. 사랑하며 산다고 늘 꽃길만 걷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사랑의 근거는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해 주신 사랑입니다. 거듭난 자녀들의 몸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겠다고 자신의 탓으로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믿음의 길에서 자책하지 말고 뿌리를 더 깊이 내리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내가 경험한 상처를 통해서 더 많은 이들의 아픔과 슬픔을 어루만질 수 있게 됩니다. 고되고 힘든 과정을 거치며 아름다운 예술이 탄생되고 훌륭한 논문이 세상에 나오는 것입니다.
주님이 걸어가신 길도 외롭고 고독한 길이었습니다. 삶의 아픔과 고통속에서 십자가에서 흘러 나오는 영원한 생수를 마시는 것은 십자가 은혜 안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기반으로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이루신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하십시요. 너그러운 마음으로 서로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하더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는 긍휼의 눈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 힘도 발휘하지 못합니다. 요즘 사랑이라는 말이 얼마나 흔합니까? 그러나 믿는 우리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말이 되어야 합니다. 교육은 성과를 눈으로 볼 수 있지만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기에 그만큼 더 어려운 것입니다.
9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10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11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
요한은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갈 곳을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이 어두운 밤을 통과하는 중에도 일하십니다. 문제는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입니다. 우리의 미움이 우리의 눈을 멀게 합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이 들어 올때마다 영혼에 심각한 해를 가져다 준다고 생각하면, 미워하는 마음은 정말로 무서운 것입니다. 만일 형제를 미워하게 되는 마음이 주님을 보는 시력을 잃게 만들고, 손과 팔을 못쓰는 장애를 얻게 되는 것이라면 이는 정말 끔찍한 일입니다. 영혼이 사망을 향해 가는데도 알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고통을 이기시며 ‘새계명’을 주셨습니다. ‘새계명’은 위로부터 임하는 선물입니다. 창조적인 힘이며, 영적인 힘입니다.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께 마음을 드릴 때 생각지 못하게 임하는 ‘새힘’입니다. 형제를 사랑하게 되는 구원의 표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는 죄를 고백하고 십자가를 지신 주님께 우리의 마음을 드리는 시간이지요. 예배는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해서 삶을 다시 출발하는 것입니다. 소금의 맛을 내는 성도로 살아가십시오, 그리스도의 빛이 어둔 우리의 마음을 비추실 것입니다.
둘째, 참된 자녀는 삶과 믿음이 분리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자녀들아’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두 아이 이름으로 넣어서 읽으니 말씀의 해석이 더 깊어집니다. 여러분도 자녀들의 이름을 넣어서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요한은 ‘자녀들아’ ‘아비들아’ ‘청년들아’ 부르고 난 뒤에 하나님의 자녀의 정체성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입었고,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고 있으며, 악한 자를 이기었다는 것입니다. 죄를 씻겨 주시고 태초부터 계시고, 악한 자를 이기신 분이 누구십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녀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교회 된 우리의 공통분모는 한몸 되게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참된 하나님 자녀의 세가지 기준는 신학적으로는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윤리적으로는 ‘불의를 행치 않고 빛 가운데서 의를 행하는 것’이며, 사회적으로는 ‘형제에 대한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것이지요. 이 세가지 기준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요한이 기록한 시대 만큼이나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교회는 생명체인데 사랑을 잃어버린 교회는 분쟁으로 치닫고, 낮아짐을 상실한 교회는 이생의 자랑거리들로만 넘쳐납니다.
우리는 예수께 속한 인생입니다. 당시 요한 시대의 교회 안에는 영지주의자들로 인해 영이 육신에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는 논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삶과 분리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믿음대로 살아갈 실력은 없지만 십자가의 길을 바라보며 하나됨의 은혜를 깨달아야 합니다. 주어진 그대로의 삶을 예수께 속하여 자연스럽게 사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마음과 성품으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특권입니다. 헌신의 자리에서 지칠 때가 있다면 헌신의 자리에 세워 주신 은혜를 바라보십시요. 우리가 서 있는 것이 은혜 아니면 그 어떤 말로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믿음은 ‘그때 거기서’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동행하시는 예수로 사는 인생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마음은 커가는데 교회로 들어오는 것은 내 것을 많이 포기하게 될까봐 염려됩니다. 은혜는 채우고 싶은데 우리 안에 사랑이 없습니다.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의 분주한 모습입니다.
코비드 바이러스가 유행하던 때에 한국 방역 모델로 3T 로드맵을 제시했었습니다. 검사(Test), 추적(Trace) 치료(Treat) 입니다. 시험(試驗)이란 말은 헬라어로 ‘페이라스모스’(πειρασμόϛ) Test입니다. 우리는 시험(Test)을 치러야 비로서 실력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잘 모르지만 시험을 통해 믿음의 진위가 드러나게 됩니다. 마더 테레사는 시험을 통과하면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제 영혼이 얼마나 고통스러우며 공포에 떨고 있는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을 거부하는 듯하면서도 제가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은 하느님을 열망한다는 사실입니다” 냉혹한 삶속에서 나의 자녀가 간교한 꾀에 빠져서 친아버지가 아닌 다른 사람의 손을 잡고 따라가는 일이 있다면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믿음의 눈을 분명히 뜨고 하나님을 갈망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추적하고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시편 23편에서 다윗은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른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심이 여러분의 삶도 함께 하십니다. 다윗은 인생의 모든 날들을 하나님이 추적하며 그 삶을 지켜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우리도 마음안에 이 확신과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이때 영혼의 회복이 일어납니다. 사랑하는 법을 터득하게 되고, 인생의 아픔을 내가 사랑하는 예수님도 이땅에서 겪으셔야 했던 삶의 일부분임을 깨닫게 됩니다.
요한은 입술로는 그리스도인이라 말하지만 하나님을 기뻐하시는 일을 거부하거나 부인하는 사람은 예수께 속한 성도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믿음생활은 현재의 삶에서 예수님께서 가신 방향을 향해 지속적으로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길을 걷다 보면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삶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생의 아름다운 그림이 완성 되어지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우리 교회 성가대의 찬양으로 은혜 받고 있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실력도 좋지만 저는 그 안에 있는 조화의 아름다움을 느낍니다. 나의 소리를 드러내는것이 아니라 ‘나와 너’ 그리고 우리가 함께 서로의 소리를 듣고 맞추어 주는 ‘ 하모니’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여정도 이러한 ‘사랑의 하모니’가 필요합니다.
셋째, 우리는 세상속에 있으나 세상을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2: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2: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고 하십니다. 세상의 것은 잠시뿐이며 그림자입니다. 참된 빛이 되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세상의 아름다움은 하루와 같은 것입니다. 천년이 하루 같다는 하나님의 시간표로 보면 세상의 것은 너무도 짧은 것입니다. 물질주의 가치에 비유하면 세상의 것들은 1불 정도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예수께 속한 자들은 얼마나 많이 가졌느냐가 아니라 존재하고 있음의 풍요로움과 하늘의 평안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않게 되니, 세상살이가 아무리 분주해도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셔야 합니다. 성경 66권, 1,189장속에 담긴 그리스도의 사랑의 편지가 매일 우리를 초대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의 편지를 쓰고 계십니다. 주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 13:1)
밤이나 낮이나 낙망하고 넘어질 때에도 성경의 초대로 들어가면 죽어 있던 영혼의 심장이 다시 뛰며 마음과 뜻과 생명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아이들이 세상에 태어나서 첫 언어를 배우고 ‘아빠 엄마’를 부르는 순간 모든 부모들은 행복을 누립니다. 하나님도 입술에서 사랑의 언어가 믿음으로 고백되어 지고 삶을 통해 실천하게 될 때에 기뻐하십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의 힘 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가다 보면 ‘새힘’을 주십니다. 이곳에 계신 분들 중에 예배 드리고 교회를 떠나기 싫어서 아쉽고 눈물 나시는 분이 계신가요? 언젠가 아이들이 주일학교 시간을 마치고 집으로 가려고 할 때 아이는 교회에 남아 있고 싶어 하는데 부모는 빨리 가자고 합니다. 교회에 머물고 싶다고 아이들이 울기까지 합니다. 아이들처럼 우리도 교회가 즐거워야 합니다. 아이들에게 교회가 머물 곳이 되어 줄 수 있다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서둘러 밖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조금만 멈추어 보시면서 교회의 구석 구석을 돌며 기도도 해보시고 머물러 보십시오. 주시는 은혜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어버이 주일을 맞이하여 믿음의 어른들이 계시다는 것은 공동체에 힘이며 위로입니다. 인생의 순리가 있는데, 우리도 걷다보면 만나게 되는 길입니다. 프랑스어 ‘encore’ 는 연주에서 출연자의 훌륭한 솜씨를 박수로 재연을 청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후반전입니다. 경기에서도 후반전이 더 중요합니다. 믿음의 여정을 걸으며 하나님앞에서 ‘encore’ 를 외쳐보시기 바랍니다. 서로 그렇게 격려해 주십시오. 늙는 것이 아니라 다시 하나님께 쓰임 받는 때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아이들부터 장년에 이르기까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름다운 교회를 만들어 나가는 것입니다.
요한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세상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사랑과 구속함을 입은 세상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세상입니다. 마음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없으면 대부분의 사람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위해 살아갑니다. 인간의 육체 안에 정욕이라는 DNA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생의 자랑은 이생에서만 통하는 것일 뿐입니다. 물속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 구명조끼와 보화 중에 한가지를 선택하라고 할 때에 무엇을 선택하겠습니까? 이생의 자랑은 잠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유람선을 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구조선을 타고 가는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즐기며 유람할지 몰라도 그리스도께 속한 백성들은 한 영혼이라도 더 건져내는 일에 삶을 드리는 것입니다. 믿음 생활 하시면서 누군가가 기도하고 있다는 말을 많이 들어보셨을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하나님이 날 기억하고 계신다는 것이고 하나님이 사랑하고 계시다는것입니다. 진정으로 기도하다보면 안아주게 됩니다. 우리는 수백 가지의 소리를 가지고 있고 생각을 담고 있지만 그 안에서 이루실 하나님의 하모니를 기대해야합니다.
좋은 교회는 생명이 넘치고 화목한 교회입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주의 자녀들을 무균상태에 두시는 것이 아니라 이길 수 있는 면역인 진리의 믿음과 하나님의 사랑으로 보호해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을 얻은 우리는 주어진 생명의 열매로서 사랑을 행하게 됩니다.
보스턴에 와서 공부할 수 있었던 것도 은혜입니다. 어버이 주일을 맞아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부모님들을 기억하며 기도하시고, 우리 교회에 있는 어른들을 위해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어떻게 혼자 걷겠습니까? 혼자 가면 외로운 길이지만 함께 가면 즐거운 길이 됩니다. 세상에서 누리고자 하는 마음도 하나님 안에서 다루어지면 진정한 사랑의 하모니를 통해 삶의 의미와 참된 행복을 찾게 됩니다. 이렇게 귀한 믿음의 여정을 걸을 수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차게 든든한 주일입니다.
5/7/2023 | (부활메시지 5)
요한이 전하는 복음 The Gospel of John
요한복음 1:1, 14:1-14
1:1 <말씀이신 그리스도가 오심> 태초에 말씀이 계셨습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는데, 그 말씀은 곧 하나님이셨습니다
요한복음 1:1절 안에는 3개의 문장이 있는데, (1) 태초에 말씀이 존재했다. (2) 그 말씀이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3)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다. 요한은 말씀이신 예수가 인류 역사 속으로 들어온 사건을 밝히며 요한복음을 시작합니다. 성경을 묵상하다 보면 성경속으로 시간 여행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요한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기에 ‘우레(Thunder)의 아들’이라 불리우던 요한이 사랑의 사도가 되었는가?입니다. 인간은 ‘그 말씀’ 앞에 설때에 자기를 부인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는 온전한 사람이 됩니다. ‘그 말씀’은 이기심을 깨트리고 완악한 심령을 찢어 우리를 거듭나게 합니다. ‘그 말씀’은 우리가 듣는 말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내면에는 태초의 ‘그 말씀’을 향한 근원적인 갈망이 있습니다. 요한도 ‘그 말씀’을 향한 갈망이 사랑으로 채워진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말씀(logos)’이신 예수가 누구인지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예수의 족보를 소개하며 하나님 나라의 구속사적 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기록했다면, 요한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합니다. 즉 구속사에 있어서 성육신(成肉身,Incarnation) 사건은 절정인 것입니다. 예수가 행한 수많은 표적들도 이를 위한 표지판인 것입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믿음을 종종 오해하는데, 신을 의지하려는 열심 정도로만 생각합니다. 그런데 믿음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맹목적인 열심이 아니라 인생의 길과 진리를 깨닫고, 다시 오실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구원의 길은 오직 인류 역사속에서 예수님만이 홀로 가셨던 길입니다. 예수님은 하늘로 가는 길을 직접 내려 오셔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요한은 이것을 전하고자 합니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영생 즉 ‘영원한 생명’은 동물의 언어가 아니라 태초의 ‘그 말씀’과 연결되어 지는 것입니다. 화려한 미사어구나 논리로 무장한다고 해도 태초의 말씀과 연결되지 않으면 말은 소음의 차원으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감동이 없이 읽게 되는 성경은 이해 할 수 없는 글자일 뿐입니다.
“사랑하면 천 개의 눈이 생긴다”는 영국 속담처럼 ‘그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듣고, 보고, 만진바가 되는 것입니다.
14:1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마라.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조선시대 아이들에게 글자를 가르치는 사자소학(四字小學)이라는 기초 한문 교과서가 있습니다. 생활규범과 행실과 마음가짐에 대해서 일러주는 책입니다. 사람은 모두가 관계속에서 살아갑니다. 부모와의 관계, 친구와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입니다. 그러나 한가지가 더 있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세상은 끝없는 경쟁으로 관계 안에서 지치게 하고 우리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믿음의 반대는 불신이 아니라 근심에 깊이 빠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길을 잃을 때에도 주님과 함께 머물러 있으면 되고 길이 되시는 주님을 믿으면 됩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살아 있는 ‘영원한 생명’으로 경험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생명이 곧 하나님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되니까 하늘의 이야기를 땅에서 써 나갔던 것입니다.
첫째로, 우리는 길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5 도마가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주님,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 못하는데, 저희가 그 길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6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바로 그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없다. 7 너희가 진정 나를 안다면, 내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 이제 너희는 그분을 알았고 또 그분을 보았다.” 8 빌립이 말했습니다. “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9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있었는데, 아직도 너는 나를 모른단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본 것이나 다름이 없는데, 어떻게 네가 ‘저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라고 말하느냐? 10 너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을 믿지 못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내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이 말은 내 안에 계시면서 그분의 일을 하시는 아버지의 말씀이다.
본문에는 제자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도마와 빌립입니다. 3년 동안 함께 했던 제자들인데 예수님이 가는 길을 알지 못했습니다. 도마는 그곳이 어딘지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단지 도마만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에 빌립이 또 질문을 합니다. 저희에게 아버지를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본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5절부터 10절 안에 있는 동사를 보면 ‘안다’와 ‘본다’라는 동사가 나옵니다. 우리는 성경을 보고 읽고 묵상하며 관찰합니다. 요한복음에는 ‘안다’는 동사가 참 많이 나오는데 ‘사랑하다. 믿다.’로 바꿔 볼 수 있습니다.’ 알다’라는 헬라어 "기노스코γινώσκω"나 히브리어 '야다'(ידע)는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체험으로 깨닫는 것’을 뜻합니다. 경험을 통해 친밀하게 사귀는 것입니다. 끊임 없은 관계속에서 생겨나는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예수님을 알아 가시기 바랍니다. 성경의 시대마다 구석구석 살피다 보면 성경 안에서 살아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을 깊이 알아 가고자 할 때에 성령님께서는 깨닫게 해주십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영접하면 생명의 싹을 틔워 주십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말씀하지요. 지혜의 기초가 되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될 때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됩니다. 태양을 중심으로 자전(rotation)과 공전(revolution)을 하는 지구는 우주의 질서과 법칙안에서 하루, 한해를 일정한 사이클로 돌아갑니다. 우리는 크신 하나님의 손을 깨닫게 될때에 매일 땅을 밟고 살아가는 것 자체가 기적임을 느끼는 것입니다. 아무리 남들보다 앞서 가려고 살아도 우리는 2023년 5월의 첫주일 맞이했습니디. 주어지는 시간은 누구에게나 동일합니다. 하지만 주어지는 시간이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깨닫게 될때 하나님이 허락하신 선물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이 말씀을 기록하던 당시에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사람들이 형제를 무시하고, 미워하면서 자신들은 특별한 영지를 가지고 있어서 영생하는 자처럼 처신했습니다. 당시 영지주의자들은 세상의 것은 다 하찮은 것이고 그림자일 뿐이며, 하나님께 이르는 깨달음은 오직 영적 지식을 통해서만 이를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했습니다. 높이 계신 신이 타락한 물질세계로 가까이 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특정 소수에게만 알려져 있는 "더 높은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성육신(成肉身,Incarnation)하신 하나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목적은 주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고, 이웃과 더불어 친밀한 사귐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이르는 진리의 힘이 실천적 삶으로 입증되지 않는 믿음은 공허한 메아리가 될 뿐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이 가신 길은 ‘아버지의 집’을 예비하기 위함입니다.
2 내 아버지 집에는 너희들이 있을 곳이 많이 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내가 너희에게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한 장소를 마련하러 간다. 3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해 한 장소를 마련한 뒤에,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겠다.
2009년에 방영된 ‘아버지의 집’이라는 드라마에서 10살 된 아들의 미래를 위해 아버지는 아들을 미국으로 유학을 보냅니다. 극중에 나오는 아버지가 생각하는 세상에서는 아들을 위한 가장 좋은 길이 미국이라고 생각을 했고 그렇게 이별을 하지만 10년이 지나 돌아온 아들은 갱이 되어 한국으로 도망 오게 됩니다. 그런 아들을 위해 사고를 해결하려다 아버지는 죽음에 이르게 되는데, 마지막으로 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들아, 이 머리카락이 생길 때부터 이 손가락이 생길 때까지 넌 내 아들이다. 나이가 들면 아빠는 자식을 통해 꿈을 꾸는 거다. 살다가 포기하고 싶어도 너를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가슴 속에서 잊지 말아야 한다.” 라고 마지막 순간에도 아들을 향한 사랑의 마음을 남깁니다.
성경의 탕자 이야기를 보면,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받고 다른 도시로 가서 자기 멋대로 생활하다가 완전히 망합니다. 나라에 흉년이 들자 그나마 돼지치는 일로도 먹고 살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그때 아들은 아버지를 생각합니다. 내 아버지 집의 품꾼으로 가겠다고 작정합니다. 방황하면서도 다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집을 떠난 탕자가 아버지의 곁으로 돌아올 때 아버지는 애끓는 사랑의 마음으로, 저 멀리서 오는 아들을 향해 달려 갑니다. 아들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춥니다. 더러워진 그의 몸은 아버지의 사랑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내 아버지의 집’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 아버지의 집’을 예비하러 가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너희를 위해 한 장소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씀하십니다. 집을 마련하러 간다는 것은 자신의 죽음을 가리키며 하신 말씀입니다. 선택하신 모든 사람들을 위해 감당하신 십자가 구속 사역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 2장에서 예수님은 유월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며 성전 뜰에서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 하셨습니다. 이때 ‘아버지의 집’과 오늘 본문의 ‘내 아버지의 집’이 같은 단어인 오이코스(οἶκος)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가르키며 '내 아버지의 집'이라 지칭하신 후 계속하여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성전 된 자신의 몸’을 가리키신 것이지요. 당시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했지만, 오순절날이 되어서 비로소 깨닫습니다.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했던 문을 열어 준 열쇠가 ‘성령’이었습니다. 이것을 성경은 “하나님의 의“라고 표현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7:17)
구원받은 백성들의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는 성전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육체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이 있듯, 주님께 속하게 될 때에 우리는 참된 쉼을 얻는 것입니다. 여행을 마치고 난 후에 집에 돌아 오면 집이 주는 안정감이 있는 것처럼, 에덴동산에서 쫒겨 난 후 인간의 삶은 하나님께 돌아 올 때에 비로소 참된 안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한주 동안 “하나님,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한 순간이 있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전부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단지 우리의 마음입니다. 세상은 우리의 마음을 흔들지만 ‘내 아버지의 집’을 향해 올 곧게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그 길 위에사 상실된 마음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내 아버지의 집’이 되어 주시기 바랍니다.
셋째, 성도들에게는 기도가 있습니다.
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내 말을 믿어라. 나를 믿지 못하겠으면, 내가 행한 표적 그것만이라도 믿어라.12 내가 너희에게 진리를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지금까지 해온 일들을 그 사람도 행할 것이다. 심지어 이보다 더 큰 일들도 행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이다. 13 그리고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내가 너희에게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될 것이다.14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주님은 기도의 자리에 매일 찾아 오십니다. 예배 드리는 시간만 찾아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한주의 7일 168시간 중에 기도하는 우리의 마음에 찾아 오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하지만 하나님의 얼굴을 매일 구하지는 않습니다. 기도는 새로운 삶의 문이며, 절망의 현장을 빠져 나오는 출구입니다.
1982년 미국의 범죄심리학자인 제임스 윌슨과 조지캘링이 발표한 “깨진 유리창 이론“이 있습니다. 건물 주인이 건물의 깨진 유리창을 수리하지 않고 방치해 둔다면, 그로 인해 절도나 건물 파괴 등 강력범죄를 부추기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입니다. 뉴욕의 어느 주택가에 주인이 이사간 집에 한아이가 장난으로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깼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머지않아 그 집의 유리창들이 모두 파손 되었습니다. 그렇게 깨진 유리 조각들이 거리에 흩어졌으나 누구도 치우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으로 인해 마을이 점차 지저분해 지고 음산해 지자 주민들은 이런 곳에서 살수 없다며 이사를 가기 시작하였습니다. 당연히 주인 없는 빈집은 늘어났고 아이들은 빈집마다 돌을 던져 유리창을 부쉈습니다. 이 같은 악순환이 되풀이 되면서 결국 마을은 사람들의 따스함이 사라진 곳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어떻게 작동되는지를 보면 곳곳이 깨진 유리창을 수리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생명 파괴와 훼손이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생명의 주인이신 주님과 분리된 삶을 살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아무리 좋은 조건과 환경으로도 이 생명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만 해결 된다는 것이 요한복음의 결론입니다.
기도의 깊은 골짜기에서 피어나는 백합화가 절망 속에 있는 이들의 희망이 되는 것입니다. 더 깊은 기도의 길은 아버지가 내안에 거하고, 내가 아버지 안에 계심을 통해서 온전한 관계를 누리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내 삶이 바뀌고 내 가정이 바뀌는 것을 넘어 상실된 마음으로 살아가는 이들, 신앙의 뿌리를 내리지 못해 방황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되어 주시기 바랍니다. 홀로 있는 자리에서도 나의 감정이 주님께 올려진다고 생각하시며 살아보십시오. 내 마음이 나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일상의 분노. 거절감. 풀어져 있던 악한 본성을 거스르고 삶의 거룩한 모습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아이들이 같은 시간에 하나님의 성전인 ‘아버지의 집’에서 예배하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 뭉클하면서도 감사합니다. 귀한 아이들에게 믿음의 부모들이 되어 주십시오. 바르게 성장할 수 있도록 말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태초의 ‘그 말씀’ 앞에 서서 믿음의 본이 되어 주시기 바랍니다. 부모의 뒷 모습으로도 아이들이 평안함을 느낄수 있도록 살아가 주십시오. 누구도 마음의 성전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다스림’속에서 삶을 드리는 것입니다. 지켜내는 그 자리에 바람도 불고 비도 오겠지요. 그러나 모든 열매는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주보 앞면에 보시면 그 안에 이런 글귀가 있습니다. ‘사랑한다는 말보다 따뜻한 말은 지금까지 없었다.’ 여러분 우리 삶의 어떤 모습도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변화 없이는 제대로 믿고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면 아무리 필요한 조언과 훈계도 내 방법과 생각에 제한 될 수 밖에 없습니다.
한 주도 그리스도의 삶의 일부분이 되어 살아 내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하나님을 찾고 구하십시오.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루의 첫시간을 기도로 열어가시고 말씀을 읽어보십시오. 오늘 본문 11절 말씀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 이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겨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내가 너희에게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을 돌리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삶에 온전히 받아 들이기만 한다면 애쓰지 않아도 믿음으로 통해 저절로 이뤄지는 예배의 기쁨입니다. 한주도 우리의 삶의 낮은 자리에 임하는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를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4/30/2023 | 부활 주일 메세지4
마태가 전하는 복음 The Gospel of Matthew
마태복음 1장1절, 2장:13절-23절
언젠가 다양한 민족들이 함께 모여 있는 캐나다 현지교회에 방문하여 예배를 드렸던 적이 있습니다. 교회 한쪽 벽에 크게 출력한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도(Genealogy of Jesus Christ) 가 눈에 띄었습니다. 설교를 준비하며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성경에서는 뿌리를 중요시 여기는 기록이 많습니다. 어느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람이 아니라 가정과 배경을 밝힘으로 성서의 신뢰성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배경이 없는 사람을 소외시키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인 믿음, 하나님께 받는 사명, 성실하게 감당하는 그 사람의 삶의 태도도 매우 중요하게 기록해 놓습니다. 마태는 예수의 족보를 통해 창세기로 시작하여 예수님까지 내려오는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예수에게서 완성됨을 전합니다.
1:1 <예수님의 족보>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다윗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입니다.
헬라어 번역본으로 1절은 “비블로스 게네세오스”(βίβλος γενέσεως) 로 시작합니다. “비블로스”(βίβλος) 는 “책”을 가리킵니다. “게네세오스”(γενέσεως) 는 “게네시스”(γένεσις) 의 소유격인데 즉, 창세기라는 뜻입니다.
마태는 마태복음서를 시작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성취된 새로운 시대 즉 신약의 창세기를 열고 있는 것입니다. 죄로 인해 왜곡된 세상을 새롭게 하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의 탄생 족보는 누구는 누구를 ‘낳고’라는 단어가 계속 반복됩니다. 수천년의 역사속에서 사람의 이어짐을 ‘죽고’에 강조점을 두지 않고, ‘낳고’에 둔 것입니다. 아브라함부터 시작된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는 족보가 끊기려는 순간마다 '하나님의 개입하심'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낳고’라는 생명의 탄생에서 끈질기게 일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이 발견됩니다. 예수의 족보는 사망의 족보가 아니라 생명의 족보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구원역사에는 실패가 없습니다.
마태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어떻게 완성되어 가는지를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메시아의 기원 안에 있는 하나님의 신비를 엿볼 수 있게 됩니다. 예수의 계보도를 깊이 들여다 보시기 바랍니다. 그 삶속에는 순탄치 않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낳고’와 ‘낳고’ 사이에는 오래 세월의 기다림이 있습니다. ‘큰 민족’이 되게 하시겠다고 갈대아 우르에 살던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25년이라는 세월을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갈대아 우르는 비옥한 땅이고, 물질적으로 풍요롭던 지역입니다. 이후 가나안으로 향하는 여정은 쉽지 않은 세월이었습니다. 약속을 포기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 땅에서 약속의 땅으로 들어 가게 하신 것입니다. 또한 예수의 족보에 실린 여자들은 대부분이 이방 여인들입니다.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여자를 족보에 언급하는 예도 없지만 하나님은 이방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여인들을 통해서 예수의 오시는 길을 예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의 족보를 보면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라고 기록합니다. 하나님은 룻이라는 이방 여인의 믿음을 도외시 하지 않으십니다. 나오미의 가문에 모든 남자들이 다 죽게 되어 대가 끊어졌을 때, 하나님은 룻과 베들레헴에 살던 보아스를 만나게 하십니다. 보아스와 룻이 낳은 아들에게 사람들이 오벳이라는 이름을 지어주는데, 이 사람이 바로 다윗 왕의 할아버지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입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이지요.
예수의 오심은 다윗 왕가를 통하여 계속 이어집니다. 족보에 나오는 인물들의 삶의 면모를 더듬어 보면 부끄러운 일이 많습니다. 다윗이 범죄함으로 낳은 솔로몬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사실을 숨기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곧 우리의 모습이며, 인간에게 하나님의 복음이 왜 필요한지를 보여줍니다. 예수는 다윗의 가문으로부터 왔지만 예수님의 탄생은 특정한 나라, 이스라엘 민족만을 위해 세상에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 끌려가 나라가 완전히 멸망했던 절망적 상황속에서도 햇살은 비추고 있었고, 하나님 나라는 땅속 깊이 싹을 틔울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바벨론 포로생활로부터3차에 걸쳐 귀환 시키신 것은 다시금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하는 순간들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이 쉬지 않으심을 느낄 수 있는 부분들입니다.
이제 예수의 출생 이야기입니다. 마리아가 엘리사벳 친척집에 갔다가 몇개월 후에 돌아왔을 때에 요셉은 마리아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마리아는 이 아이가 성령으로 임신하게 된 것이라 설명을 하지만 요셉은 사실 이해하기 어려워 조용히 관계를 끊이려 했습니다. 이 사건을 덮고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요셉은 선택해야 했습니다. 요셉의 선택에 의해서 수천년 동안 메시아의 오심이 한순간에 사라질 수도 있었던 사건입니다. 주의 천사는 마리아 데리고 오기를 두려워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예수가 다윗의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실제로는 성령으로 태어난 하나님의 아들임을 암시한 것입니다.
21 그래서 요셉은 아기와 아기 엄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갔습니다.
성경은 요셉에게 아기 아빠라는 말을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아기 엄마를 데리고’라고만 말씀합니다. 육신의 아버지로 부터 태어난 것이 아니고 죄에서 구원하실 메시야가 성령으로 잉태된 것임을 알려 주는 것이지요. 당시 헤롯왕은 2살 이하 모든 아이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로 인해 요셉과 마리아는 애굽으로 피신을 하게 됩니다. 또한 성경을 보면 마리아는 가난한 집안이었을 거라 추측이 됩니다. 마리아는 예수를 낳은 후에 정결예식을 하러 예루살렘 올라가서 비둘기로 제사를 드렸습니다.(눅2:24) 출산 후 정해진 정결례 제물은 ‘1년 된 어린양’입니다. 당시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 어린양 대신 비둘기를 제물로 드리게 하는 약자 보호법이 있었습니다. 마리아가 비둘기를 드린 것을 볼 때 당시 마리아의 경제 상황이 넉넉하지 않았음을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별을 따라 온 동방의 지혜자들이 바친 황금은 애굽으로 피신해서 살아가는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게는 손에 잡히듯 생생하게 존재하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실패가 없습니다. 실패로 보이는 것까지 구원을 이루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한세대가 아니라 모든 나라 그리고 오는 세대를 행한 하나님의 사역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이 믿음의 여정에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말씀의 성취는 출세가 아니라 출애굽을 통한 삶입니다.
2:13 <예수님의 가족이 이집트로 피난 감> 박사들이 떠난 뒤에 주의 천사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 말했습니다. “일어나라! 아기와 아기 엄마를 데리고 이집트로 도망가거라. 헤롯이 아기를 죽이려고 하니, 내가 지시할 때까지 이집트에 머물러 있어라.”14 그래서 요셉은 한밤중에 일어나 아기와 아기 엄마를 데리고 이집트로 떠났습니다. 15 요셉은 헤롯이 죽을 때까지 이집트에 있었습니다. 이것은 주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신 것입니다. “내가 나의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 내었다.”
출세는 숨어 살던 사람이 높은 지위에 올라가 세상 밖으로 나오는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면 ‘새로운 인생’이 시작 됩니다. 출애굽으로 부터 시작되는 ‘구원 이후의 삶’입니다. 죄로부터 구원받은 새사람이 세상속으로 다시 들어가는 것입니다. 출애굽은 그 인생이 잘되고 망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지는 것입니다. 출세를 위한 스펙쌓기의 삶에서 ‘순종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순종을 통해서 그의 이야기를 써나가는 것이지요. 목적과 삶의 방향을 고민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야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우리의 이야기로만 삶이 끝이 나는 것이 아니기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아내는 삶의 모습이 하나님을 증거하는 복음이 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선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 가십시오.
헤롯왕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해서 요셉은 아기와 아기 엄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신합니다. 그리고 애굽에서 헤롯왕이 죽을때까지 거기에서 살았습니다. 마태는 이 일이 호세아 선지자의 예언인 “내가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었다”는 말씀이 성취되어진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수의 탄생 과정에서 출애굽으로 피신하게 된 말씀을 완성하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마태는 아기 예수를 데리고 애굽으로 도피했다가 나사렛으로의 귀환하는 사건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사건과 비교함으로 예수가 인류의 구세주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출애굽 이후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전의 자랑은 세상의 성공과 출세였는데 출애굽 이후의 삶은 인간의 욕망보다 하나님을 향한 열망이 깊어지고, 세상의 스펙보다 십자가 복음의 능력이 깊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씨를 통해서 천하 만민이 복을 받을 것 (창 22:18) 이라 약속하셨고,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되었습니다. 지금도 말씀은 간절함으로 믿는 자들을 통해 성취되고 있습니다. 마태는 복음서를 마치면서 열방에 복음을 전하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을 통해 열방이 복을 받게 될 것과 예수를 통한 온 인류의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두번째 예언의 성취는 헤롯왕이 두살 이하 아이를 모조리 죽이라고 명령을 내린 것입니다.
16 <헤롯이 사내아이들을 죽임> 헤롯은 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매우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주변에 있는 두 살 아래의 모든 사내아이들을 죽였습니다. 이것은 그가 박사들로부터 알아 낸 때를 기준으로 한 것입니다. 17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언자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하신 것이 이루어졌습니다. 18 “라마에서 소리가 들려 왔다. 슬피 울며 통곡하는 소리다. 라헬이 자기 아이들을 위해 우는데,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받으려 하지 않는다.”
헤롯의 악함은 많은 사람들을 고통과 슬픔으로 몰아갔습니다. 그러나 그 악함도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악한 권세 너머에는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가득한 슬픔 너머에 뜻을 이뤄 가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마태는 예레미야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라 기록합니다.(렘 31:15) 라헬이 자식이 없으므로 애통합니다. 라헬의 자식들은 이스라엘 민족을 상징하지요. 라헬이 낳은 자녀인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가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 갔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슬픔이 많은 세상에 새 언약의 성취자로 오셨습니다. 라헬이 라마에서 애곡하는 이야기를 유대인들은 너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녀를 낳으면서 그 아이가 죽어 갈때에 라헬에게 어떤 위로가 되겠습니까? 헤롯에 의해서 당시에 살해된 사내아이들의 엄마들에게 어떤 위로를 건낼 수 있겠습니까? 오직 그리스도를 통한 새 언약으로만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부활의 소망입니다.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말씀으로만 듣던 하늘 소망을 삶으로 만날 때에 소중한 이를 떠나 보내는 그 아픔과 상실의 경험도 하나님의 일하심과 소망의 품안에 있음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말씀이 우리 삶에 실제가 되는 은혜의 경험들이 우리 안에 차곡 차곡 쌓이게 되면 두려움안에서도 이겨낼 힘이 채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라는 조각상을 보면 마리아가 죽은 예수를 품에 안고 있는 모습이 있습니다. 마리아가 아들로 인하여 그 마음이 칼로 찌르듯 고통을 받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로 인하여 영원한 위로를 받습니다. 그 아들의 죽음과 부활로 인하여 성령이 임함으로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라마의 통곡과 애통은 성령을 부어 주실때 십자가를 보면서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자가 바로 자신임을 깨닫게 되고,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잃어버린 어머니처럼 애통하고 통곡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애통하는 자에게 참된 위로의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에게 작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22 그러나 아켈라오가 아버지 헤롯의 뒤를 이어 유대의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요셉은 그 곳으로 가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꿈에서 지시를 받고 나서 요셉은 갈릴리 지방으로 갔습니다. 23 그는 나사렛이라는 마을로 가서, 거기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예언자를 통해서 “그는 나사렛 사람이라 불릴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은 세번째로 성취된 말씀입니다. 예수의 시작은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천한 장소였습니다. 나사렛은 전통이 없는 무명의 마을이며, 이방인들이 섞여 살던 작은 동네입니다. 나사렛 출신의 사람은 이방인과 같은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빌립이 나사렛에서 메시아를 보았다고 말했을 때,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수 있느냐고 반문한 것입니다.(요1:46) 마태는 구약의 예언자를 통해서 “그는 나사렛 사람이라 불릴 것이다”라고 한 말씀이 이루어졌다고 기록합니다. 애굽으로 피신한 요셉 가족은 헤롯왕이 죽은 후에 당연히 베들레헴으로 돌아와야 하는데 그 순간에 다시 꿈에 나타난 주의 사자의 지시를 받고 나사렛 동네로 들어가 살게 됩니다. 그렇게 나사렛 지역은 예수의 고향 땅이 되었습니다. 성서학자들은 ‘나사렛’이라는 기원을 ‘네체르’라고 발음되는 ‘가지’, ‘싹’에서 그 기원을 찾기도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호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사 11:1) ‘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 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 53:2)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께서 연한 싹과 같은 모습으로 오실 것이라 예언했습니다. 죽어 보이는 가지에 작은 순이 돋아나는 것은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우리는 우리의 약함을 도와 주시는 하나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어느 세대나 진리를 꺾고 바른 힘에 저항하는 세력들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무너 트릴수 없습니다. 믿는 자들을 이길 세상의 힘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성취되는 약속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믿음 안에 있으면 우리는 두려움이 아닌 평안함으로 살아 갈 수 있습니다. 깨어 기도하며 주님과 더욱 친밀해 지십시오. 하나님은 문제보다 더 크신 분이십니다. 문제안에 하나님을 가두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약속을 성취하시며 승리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삶에 그분과 동행하는 삶은 어려운 순간에 더 큰 열매로 드러나게 됩니다. 내가 서있는 곳에서 하나님을 찾아가십시오. 하나님에게 작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이미 크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과 동행하시며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 가시는 믿음의 지체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4/23/2023 | (부활메시지 3)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삶 Living a new life in Christ
골로새서 3:1-11
지난주 월요일에 보스턴에서 국제적인 큰 행사 마라톤 대회가 열렸습니다. 127년 동안 마라톤에 참가한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달렸을까요? 삶의 아픔을 딛고 일어나기 위한 사람들, 새로운 삶에 도전하기 위한 이들, 완주의 영광을 누리고 싶어서 달린 이들, 무거운 마음의 짐을 내려놓기 위해서 달린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참가자들은 각자의 염원을 담고 목적지를 향해 경주를 했을 것입니다. 가끔 새벽기도가 끝이 나고 저도 가볍게 동네 한바퀴를 뛰고 옵니다. 그때에 함께 뛰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그들의 삶을 응원하며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모두가 다른 마음으로 뛰는 그 자리의 끝에는 하나님이 계셨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품으면서 말입니다. 본문을 묵상하며 우리의 신앙 생활도 마라톤과 같은 믿음의 경주임을 생각하게 됩니다.
성경은 우리의 인생을 단거리가 아니라 장거리 경주에 비유합니다. 경주자에게 필요한 것은 목표이지요. 1984년에 세상을 떠난 프란시스 쉐퍼 박사는(Francis A. Schaeffer, 1912- 1984) 말년에 암으로 투병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는 암과 혹독하게 싸우면서도 아픈 몸을 이끌고 젊은이들에게 말씀을 전하기 위해 캠퍼스 사역에 나섰습니다. 쉐퍼는 ‘이 세상에는 확고한 가치와 기준이 없다. 그러니 젊음의 때에 개인적인 행복을 추구하는 일에만 몰두하게 될때에 향락주의에 빠지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쉐퍼는 몸속에 암이 퍼져가고 있었지만 영원한 나라의 목표가 분명했습니다. 왜 뛰고 있는지, 왜 그곳을 향해 가고 있는지 목표가 흔들리면 길 위에서 방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우리는 부활주일을 지나 부활의 신앙을 마음에 품고 살아 가야 합니다. 십자가 사랑이 나를 살리셨으니 이제는 자기자랑과 세상의 가치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합니다. 십자가가 진심으로 내 삶에 다가올때 옛자아가 십자가 앞에 무릎 꿇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다시 살아내게 되는 것입니다.
예배를 인도하면서 비가 와도 바람이 불어도 한파가 찾아와도 예배의 자리에 나오는 지체들을 보면서 이들의 이 귀한 마음이 주님 앞에 올려 지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각자의 자리에서 눈물 흘리고 있는 지체들을 보면 그들의 삶의 자리에 주님이 친히 찾아가 주셔서 위로하여 주시기를 기도하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의 공동체는 사랑으로 십자가 앞에 서야 합니다.
‘새로운 삶’이라는 것은 하나님께 속하게 되는 경험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케 하시니, 거룩함을 회복하는 것이 ‘새로운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2천년 전에 성령의 감동으로 쓴 바울의 서신을 읽을 때 어떤 마음으로 읽어야 합니까? 성령의 깨달음이 있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그리스도께서 마음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바울은 ‘새로운 삶’을 부여 받는 사람들은 하늘의 가치를 사랑하고(1절) 하늘의 가치를 생각하며(2절)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늘의 영광을 기대하는 것이라고 (4절) 제시합니다. 바울 자신도 오직 내가 그리스도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 간다고 표현했습니다.(빌3:12) 그렇다면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첫째, 믿음의 경주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은 삶의 방향입니다.
거룩함을 잃어가는 삶은 하나님께 속해 있는 삶이 아닙니다. 성도들은 하늘에 목적지를 두기에 하늘에 속한 경주자가 됩니다. ‘믿음을 통한 칭의’는 삶의 방향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목적지가 달라졌기 때문에 ‘옛사람’의 길에서 돌아서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옛사람에 대해서 죽었고, ‘새로운 삶’을 위해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버렸다고 고백하지요. ‘버린다는 것’은 삶의 우선 순위가 ‘달라진 것’입니다. 정글의 맹수들에게는 맹수들의 생활이 있고, 맹수의 위협을 받는 초식동물들도 그들만의 생활 방식이 있습니다. 즉,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다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에도 ‘새로운 삶의 방식’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 사건을 통해 부활에 대해서 직접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하나님의 타이밍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다니에서 죽은 지 나흘이 된 나사로를 살리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 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막 8:36) 라고 말씀하셨지요. 예수님은 온 천하와 생명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천하를 얻기 위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새생명’입니다. ‘새생명’은 현재를 살며 삶을 연장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새롭게 주시는 ‘부활의 생명’이지요. 죽음에 의해서도 파멸되지 않는 생명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나사로는 살아났지만 다시 죽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사로 사건이 주는 중요한 교훈은 나사로가 살아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이 생명은 땅의 것을 끊어내는 능력이며, 우리에게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생의 주인으로 믿을 때에 주시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영광의 상을 위하여 푯대를 향하여 매일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늘에 속한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완전’이지요. 바울은 율법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부활의 주님을 경험하고 난 뒤에 삶의 방향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삶의 목적지가 분명해 진 것입니다.
둘째로 믿음의 경주자는 옛사람을 벗어내야 합니다
3:5 여러분의 생활 가운데 죄악 된 것은 다 버리십시오. 성적인 죄, 악한 행동, 나쁜 생각, 지나친 욕심 등은 하나님 이외의 것들을 더 소중히 여기는 마음가짐입니다.
3:6 하나님은 이런 일을 하는 자들에게 화를 내실 것입니다.
3:7 여러분이 예전에는 이런 일들을 했을지 모릅니다.
3:8 그러나 여러분의 생활 가운데서 이런 것들을 몰아 내려고 힘쓰십시오. 분한 생각, 화를 내는 것,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말이나 행동, 선하지 못한 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3:9 서로에게 거짓말을 하지 마십시오. 이제는 과거의 잘못된 삶에서 진정으로 벗어나야 할 때입니다.
마라톤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최대한 가볍게 하고 경주에 임하게 됩니다. 무거운 옷을 입고 거추장스러운 악세사리를 달고 경주에 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성경은 믿음의 경주자에게 있어서 무거운 옷은 ‘죄이며 땅의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얽매이기 쉬운 죄와 무거운 죄를 벗어 버려야 합니다. 만일 우리 몸 안에 안 좋은 세포가 자라고 있다면 그것을 도려내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냥 두게 되면 생명을 파괴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믿음의 경주를 하는 성도들이 버려할 할 것들 중에 성품적인 것과 행실적인 측면에서 10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성적인 죄, 악한 행동, 나쁜 생각, 지나친 욕심, 하나님 외에 더 소중히 여기는 우상들 그리고 분한 생각, 화를 내는 것,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말과 행동, 선하지 못한 말들과 서로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을 벗어 버리는데 힘쓰라고 말씀합니다. ‘벗어 버리라’는 말은 옛사람을 따라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 안에 있으니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지요.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탄식하는 마음을 주시고, 옛사람의 행위를 벗어버릴 새힘을 주십니다. 바울은 이 모든 과정들이 믿음의 여정의 한 부분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직 완전해 진 것도 아니고 이미 이룬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간다’고 고백한 것 같습니다.(빌3:12) 예수님은 우리가 넘어질 것을 아시면서도 기다려 주시고 다시 걸을 수 있도록 도와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은 면죄부를 이용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고백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라는 것이며, 어제의 나와 모습과 오늘의 모습이 달라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일 자아가 죽는 경험입니다. 인간은 누구나가 마지막의 때를 향해 나아갑니다. 자아가 죽는 경험도 이처럼 실제적인 것입니다. 마지막이 없는 것처럼 오늘의 기쁨만을 추구하며 살아가지 마십시오. 하나님 안에서 경험되어지는 수많은 감정들 역시 하나님께서 다루어 가실 것입니다. 과거에 묶이지 말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살아가십시오. 하나님을 아는 새생명이 되었으니 이미 우리 안의 완악함은 십자가에 함께 못박혔습니다.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땅의 것이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하는 반대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그리스도인들은 종말의 심판이 아니라 영광을 얻는 것입니다. 바로 이곳, 바로 여기에 우리가 바라 볼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이 여러분에게 어떻게 다가오십니까?
정체성이 변화되고, 삶의 존재가 변화 된 것이지요. 하나님은 우리를 절대로 버리지 않으시고 사랑하는 자녀로 받아들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시선이 향하고, 예수님이 걸어 가시는 방향으로 우리의 발걸음이 향하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바로 ‘하나님의 품’ 안에서 누리는 은혜입니다.
3:10 여러분의 삶 속에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새 생활 가운데 더욱 더 새로워져 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을 창조하신 그분의 모습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이 삶 속에서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이 점점 더 자라날 것입니다.
뱃속의 아이에게 뱃속 밖의 세상을 아무리 설명해 주어도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바깥 세상에 나오게 된 후, 아이는 세상을 조금씩 인식하기 시작합니다. 영적 세례를 받고 부활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은 이 생명의 경험이 더 깊어 지고 생명이 자라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계발’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주님과 연합하여 살아가게 되니까 세상속에서 살아가지만 죄에 대한 거부감이 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화 (聖化)의 삶입니다. 엄마 품에 안긴 아기처럼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께 완전히 맡기며 살아가는 것이지요.
셋째로 ‘새사람’이 되는 변화는 모두에게 주신 기회입니다
3:11 새로운 생명을 받은 자들에게는 그리스인이든지 유대인이든지, 할례를 받은 사람이든지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지,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또한 야만인이든지 스구디아인 이든지, 종이든지 자유인이든지, 그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모든 믿는 자의 마음속에 계신 그리스도만이 이것들 중에서 가장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이 지식을 모든 인류에게 주셨습니다. 그리스인, 유대인, 할례를 받는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야만인, 스구디아인, 종이든, 자유인이든 새롭게 되는 지식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차별이 존재하지요. 부모에 따른 차별, 신분에 따른 차별, 재물에 따른 차별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 나라의 영광에 참여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불과 100년전 만해도 노예제도나 인종차별이 사회적 합의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대에도 성경적 견해를 갖고 있는 몇몇 사람들이 인종문제를 성경의 기준대로 해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감리교의 설립자 웨슬리와 같은 인물들입니다. 웨슬리는 상위계층으로 부터 내려와 옥외 설교를 하며 당시 부를 부당하게 축적하는 계급층들에게 정당하게 부를 사용하라고 설교했습니다. (1)“할 수 있는 대로 많이 벌라”. (2)“할 수 있는 대로 많이 저축하라” (3)“할 수 있는 대로 많이 주라” 이 설교는 물질의 소유권을 하나님께 두고 청지기 신분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순전히 빚을 지고 살아갑니다. 매일 호흡하게 하시고, 매일 허락하시는 생명을 값없이 받고, 아침마다 허락하시는 태양으로 인해 새날을 맞이합니다. 문제는 이것을 당연하다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통치는 자신이 탕감 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서 시작이 됩니다. 신앙의 년수나 성경적 지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 안에 계심을 아는 것입니다. 부족한 나의 삶에 찾아 오신 그 사랑을 깨닫는다면 지금 잡고 놓지 못하는 손을 펼쳐도 아무 것도 잃어 버리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잃을것 같은 두려운 우리의 마음에 내가 그 동안 쥐고 있었던 것이 별 것이 없었음을 느끼게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사이에 서로를 구분하고 차별하는 모든 장벽들을 다 허무시고, 너와 나 우리의 공동체를 연결하는 삼겹줄이 되어 주십니다. 죄는 끊임없이 담을 세우려 하고, 벽을 쌓으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죄는 아무 효력이 없게 됩니다. 이 위대한 선물을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금요찬양 예배의 결단 찬양이었습니다. 한주동안 이 찬양을 들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면서 내 안에 주님을 찾고 바라 볼 마음의 여유가 없었음을 보게 하셨습니다.
하늘을 볼 겨를도 없이 정신없이 세상을 살다가 마음의 먹먹함이 내 삶을 짓누를때
그제서야 주님을 찾습니다. 행복을 느낄 겨를도 없이 분주하게 세상을 살다가 인생의 허무함이 내 삶을 짓누를때 그제서야 주님을 찾습니다.
오늘도 여전히 주님은 그 자리에서 우리를 끊임없이 돌보시는데
부족한 내 영혼은 아직도 갈 길을 모릅니다.
내게 믿음 주소서 내 연약한 마음 돌보소서 한없는 주님의 사랑 알게 하소서
영원까지 그의 백성 지키시는 우리 하나님 바라보며 살게 하소서
이것이 예수님을 믿고 생명을 얻는 새사람이 얻게 된 새로운 지식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우리의 기준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모든 믿는 자의 마음 속에 계신 그리스도만이 이것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울어도 하나님 앞에 울어 보십시오. 그 눈물이 하나님 앞에서는 믿음의 배를 띄우는 눈물이 되게 하십니다. 답답해도 하나님 앞에 나와 기도로 풀어 내보십시오.
사람 앞에 풀어 낼 때 그 말은 죄의 씨앗이 되고 내 몸과 마음이 죄의 지배를 받지만, 하나님 앞에 풀어내면 거룩한 믿음의 깊이를 갖게 하십니다. 화가 나고 불평할 일이 생길 때에 큰 숨을 쉬시며 주님의 이름을 세번 불러 보십시오. 처음 숨에 ‘나의 교만과 나의 분노’가 사라지고 두번 숨에 ‘주님이 사랑하시는 나’를 깨닫게 하시고, 세번 숨에 ‘내 삶에 주님의 은혜’밖에 없음을 느끼게 하실 것입니다. 믿는 우리들은 신앙생활을 하며 기도의 눈물 찬양의 눈물 감동의 눈물을 흘려본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 눈물의 고백으로 옛자아와 본성이 하나님 앞에 죽어지고, 성령 안에서의 새 삶으로 살아내게 되는 은혜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4/16/2023 | (부활메시지 2)
부활의 증인들 Witnesses Of Resurrection
고린도 전서 15:1-11,20
어느 조류학 저널에 게재된 연구인데요. 연구팀이 까마귓과 새인 멕시코 어치에게 까보지 않고도 땅콩 속이 비워 있는지, 차 있는지 구별하는 실험을 했습니다. 연구진은 무게가 같은 땅콩 안에 진흙을 넣어 무게를 1g정도 늘린 땅콩을 함께 놓아 두었습니다. 그러나 새들은 더 무거운 땅콩을 선택합니다. 새들은 여러 실험을 거친 일련의 과정속에서 적절한 무게와 소리를 통해 판단하고 선택을 한다는 결과였습니다. 겉으로 보이지 않아도 속이 꽉 차 있는 땅콩을 선택 한 것이지요.
기독교 진리에 있어서 부활은 껍데기가 아니라 복음의 진수 (眞髓)입니다. 부활신앙은 기독교인들에게 생명이지요. 생명이 없는 형태만 붙들고 있으면 꽃을 피울 수가 없습니다. 죽은 나무 붙들고 열매가 맺어지기를 바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새가 단단한 껍데기를 깨고 나오는 일은 생명에게 주어진 운명입니다. 부활 신앙은 생각의 틀을 깨는 것이며, 세상의 유혹과 욕망의 껍데기를 벗고 복음의 신비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복음에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의 케리그마는 ‘공허한’(고전 15:14) 것이 되어 버립니다.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고 기록된 말씀 그대로 믿는 것은 죽음을 뛰어넘는 것이지요. 씨앗이 겨울 내내 땅속에 있다가 생명을 통해 꽃으로 변화되는 것과 같습니다. 창조의 신비는 상처 난 부위에 새살이 돋아나는 것이고, 희망이 없던 이들이 갈 길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부활은 오직 창조하신 하나님에게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부활을 사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얼굴을 드러내십니다. 부활을 살아가는 것은 온 생애를 다시 얻는 것이며, ‘현재’의 삶을 리셋하여 ‘새롭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선교 메시지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신앙고백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이 세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고전 15:2-4) 우리의 죄로 인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그의 무덤, 그의 부활입니다. 이것은 베드로와 열두 사도들, 500여명의 사람들에 의해서 증언된 내용입니다.
첫째로 예수의 부활은 실제로 증인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5 그리고는 베드로에게 나타나시고, 그후에 열두 제자에게 나타나시고,
6 그후에 한번에 오백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도 나타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 사람들 중에는 이미 죽은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7 그후에 야고보에게, 그 다음에 모든 사도들에게 나타나시고,8 맨 마지막으로 조산아와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바울은 부활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열거하며 설명합니다. 복음의 핵심을 요약한 다음에 부활의 주님을 본 더 많은 증인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는 ‘오백여명의 형제들’에게 나타나셨으며, 그들 중에 대부분은 바울이 글을 쓸 당시에도 살아 있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또한 야고보와 ‘모든 사도’의 무리들에게 나타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끝으로 바울 자신에게도 나타나셨다고 기록합니다.
예수의 부활을 허위로 증거한 것이라면, 2천년 후인 오늘까지 존재할수 없을 것입니다. 거짓된 증거라면 순교자들의 심리적 동기를 설명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 사람들에게 각각 다른 상황에서 나타나신 예수 부활의 진실성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11절은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내가 전하든지 다른 사도들이 전하든지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전하고 있으며 여러분은 그것을 믿었습니다."
바울은 이 부활의 경험을 논리적으로 합리적으로 이성적으로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말씀을 깨닫는 지혜가 임하면 어린아이의 삶에도 변화는 찾아 옵니다. 그러나 저명한 교수라도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아무리 성경을 통달하고 꿰뜷고 있어도 삶의 변화가 없는 것이지요.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셔서 우리의 몸도 성경대로 부활의 몸이 될 것을 믿으십니까? 하늘의 시민권을 부여 받게 되면 세상의 시작과 끝을 알게 되기에 현재의 삶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에게 뜨거운 믿음이 있어도 이 부활의 십자가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가 가진 힘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DL 무디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 사람들 중에 1명은 성경을 읽지만, 99명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통해서 예수를 믿게 된다는 것이지요.’ 성도의 삶의 선한 모습은 연약한 지체들을 일으켜 세워줍니다. 성도들의 격려의 말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닮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매우 지성적이고 교육을 많이 받는 사람이었고, 유대교에 대한 열심도 대단해서 예수가 그리스도라 고백하는 사람들을 박해했습니다. 그런 그가 갑자기 변화된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의 사건입니다. 이 믿음은 세상을 새롭게 창조하고 보존하는 힘이 됩니다. 개인의 삶도 새롭게 살아가는 전환점이 되는 것입니다. 마치 땅에서 잠자던 씨앗이 때가 되어 싹이 나고 꽃을 피우듯이 말입니다. “씨앗을 손에 들고 새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라는 시구가 있습니다. 씨앗이 심겨지면 싹이 날 것이고 자라서 나무가 되면 새들이 와서 새소리를 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제자들은 마지막 때에 일어날 새로운 창조를 예수의 부활을 통해서 경험했습니다. 이후 제자들은 예수가 그리스도가 되심을 통해 죄를 용서 받게 되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모든 피조물들이 갱신되듯 자신들의 몸도 부활할 것임을 믿게 된 것입니다. 이 믿음은 제자들을 박해 가운데서도 구원하는 힘이 되었습니다.
예수를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예수님처럼 죽는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아무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믿는 이들에게는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무덤에 계시다가 다시 ‘살아있는 자’로 경험되는 것이며, 이 믿음은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매주일 사도신경을 통해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이 이상하고 낯선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종말의 때를 하나님의 시간 안에 감춰 두셨습니다. 그래서 언제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지만 거듭난 사람들은 하나님께로 부터 와서 하나님께로 가는 존재이기에 분명한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 경주자가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가 지신 십자가는 삶의 뿌리이고, 예수의 부활은 새로운 삶의 꽃입니다.
뿌리는 꽃을 피우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에 깊이 뿌리 내리게 되면 우리는 부활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 삶은 슬픔이 변하여 기쁨을 얻는 경험이며, 깊은 수렁에서 끌어내어 올리는 힘입니다. 뿌리가 깊은 나무는 바람이 불어 흔들려도 뽑히지 않습니다. 삶에 뿌리를 깊이 내린 십자가는 실제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어쩌다 한번 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삶에서 반복하며 행하는 새로운 삶의 방식입니다.
17세기 화가 램브란트(Rembrandt, 1606-1669)는 성경속 이야기의 많은 작품을 그리며 자신을 구경꾼으로 그렸습니다. 그가 작품을 통해 전하고 싶었던 것은 ‘내가 그 자리에 있어요’라는 고백입니다. 가장 깊이 뿌리 내린 삶은 바로 ‘십자가 아래’ 바로 그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땅속에 숨겨진 뿌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깊이 뿌리 내리게 됩니다. 육안으로 보기에 큰나무 일수록 땅속 깊은 곳에 뿌리를 내린 것이지요. 뿌리는 지지역할을 하고 양분을 저장하고 흡수하는 역할을 합니다. 십자가 뿌리는 흔들리는 신앙을 지지해 주고, 죄를 정결케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거룩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물과 피를 쏟으신 그 땅에서 부활의 꽃을 피우셨습니다. 크리스천에게 있어서 마주하게 되는 고난은 찬란한 부활의 꽃을 피우는 밭이 됨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발칸 반도의 장미 향수는 반드시 한밤 중에 장미를 딴다고 합니다. 그들은 밤 12시에서 새벽 2시까지 발칸산맥에 가서 그 장미꽃을 따서 향수를 만든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한밤중에 가장 향기로운 향을 발산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태양이 비취는 낮에는 장미향기의 40% 가량이 감소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매일의 삶에 억압 당하고 살아갑니다. 하루 하루 늙어가는 시간도 생명이 억압받는 일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까 염려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나쁜 일이 일어날까 염려도 하지만, 혹시 인생의 봄날이 오지 않으면 어쩌나 마음이 자리를 잡지 못하기도 합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을 우리가 참되게 믿는다고 해서, 삶에서 완전한 해방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봄이 오면 죽은 듯이 보였던 나무에 꽃이 피고 잎이 피듯이 생명의 힘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는 칠흙 같은 어둠속에 정금 같은 믿음의 향기를 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일들을 겸손하게 바라보시며 찬란한 부활의 꽃을 피우는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삶이 현재 땅속 깊이 뿌리 내리는 시간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조급한 마음을 내려 놓고, 부활의 힘을 축적하다 보면, 부활의 주님께서는 생명이 되셔서 인생의 봄날이 올때에 꽃을 피우게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죽은 자로부터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그리스도는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첫열매’라는 헬라어 단어는 ‘아파르케: ἀπαρχή’입니다. ἀπό (아포, ∼부터)와 ἀρχή(아르케, 시작)의 결합어인데, 말 그대로 '시작부터'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아르케’는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영어 성경은 firstfruits라고 표기합니다. 즉 ‘첫 열매’라는 말은 그에게서 새로운 창조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열매는 행실을 의미하는데요. 부활절기를 보내며 선한 행실을 시작해 보시기 바랍니다.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습니다.”(엡5:9)
미국 캘리포니아주 리버사이드 카운티라는 도시가 있습니다. 도시 중심에는 큰 공원이 있는데, 그 공원 안에 세 사람의 동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첫번째 동산은 흑인들의 인권을 위해 평생을 바쳤던 마틴 루터킹(Martin Luther King Jr. 1929-1968)동상입니다. 루터킹은 ‘나에게 꿈 (첫열매)이 있습니다’ 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그의 꿈은 흑인들의 인권을 위한 ‘첫 열매’가 되었습니다.
두번째 동상은 인도 독립의 영웅 간디입니다. 간디는 미국인은 아니지만 그의 생애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습니다.
세번째 동상은 도산 안창호 선생입니다. 루터와 간디와 달리 안창호 선생이 한 일은 그저 리버사이드 카운티의 오렌지 농장에서 일한것뿐입니다. 그러나 안창호 선생이 오고 그곳의 모든 한국인의 말과 행동이 바뀌었답니다. 그 지도력을 인정해 지역의 유지인 오렌지 농장의 주인이 적극적으로 추천하여 안창호 선생의 동상을 세우게 되었다고 합니다. 오렌지 농장의 인부였던 안창호 선생의 삶이 지역 사람들의 삶의 변화에 ‘첫 열매’가 된 것입니다.
이번주 주보 앞면에 소개하려는 그림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 교우님의 작품인데, Way maker 라는 그림입니다. 저는 이 그림을 보면서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곳에 하나님과 연결되는 길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 길이 어느 길이어도 말입니다. 부활의 기쁨과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이 우리의 삶에 새로운 힘이 되어 줄 수 있도록 십자가를 붙들고 걸어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림 속에 사람들의 표정은 나와 있지는 않지만 그림에 담긴 메세지가 따뜻해서인지 모두의 표정이 행복하게 미소짓고 있는 듯 느껴집니다.
여러분은 공동체 안에서 어떤 표정으로 서 계십니까? 세상에서 누려야 할 것도 많고,해야할 말도, 하고 싶은 일도 많습니다. 그러나 믿는 우리들의 현재의 삶에 중요한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이 시간을 살아 내는 것입니다. 때론 더딘것 같아도 서로가 다를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새일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서로가 하나님께로 향하는 길이 되어 주시고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않도록 함께 동행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경을 묵상하다 보면 이름도 없는 모세를 살린 히브리 산파들, 나아만 장군을 살린 작은 소녀와 종들은 이름이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하나님의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500여명의 제자들도 기독교 역사의 축을 세우는 일에 주님의 손과 발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수고하고 섬기는 당신에게 주님의 빛이 비추고 있음을 기억하시고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 하십시오.
부활의 믿음을 가슴에 품고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의 소유가 됨을 잊지 마십시요. 부활의 기쁨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영원토록 함께 해 주십니다.
성경을 묵상하다 보면 이름도 없는 모세를 살린 히브리 산파들, 나아만 장군을 살린 작은 소녀와 종들은 이름이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하나님의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500여명의 제자들도 기독교 역사의 축을 세우는 일에 주님의 손과 발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수고하고 섬기는 당신에게 주님의 빛이 비추고 있음을 기억하시고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삶을 살아가야합니다.
부활의 믿음을 가슴에 품고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의 소유가 됨을 잊지 마시고 부활의 기쁨을 포기하지 마십시요. 주님은 영원토록 함께 해 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