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1/2022 | 신약성경의 핵심 말씀 시리즈9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쳐라 Make A Good Influence On The World

마태복음 5:13-16

요즘에 ‘선한 영향력’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크리스천들이 세상에 나가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 중에도 ‘선한 영향력’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들에게 비춰라. 그래서 사람들이 너희의 선한 행동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17절).” 그리고 이 말씀 앞에는 ‘소금과 빛’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You are the salt of the earth).”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 

예전에 최일도 목사님이 리뉴에 강사로 오셔서 이런 일화를 말씀하셨습니다. 최 목사님이 하용조 목사님의 말씀을 듣던 중에 하용조 목사님이 자꾸 ‘빛과 소금’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귀에 거슬려서 손을 들고 “목사님 빛과 소금이 아니라 소금과 빛입니다!”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빛과 소금’이라는 크리스천 잡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최일도 목사님의 지적 때문인지 잡지 이름이 1999년 4월 호부터 ‘소금과 빛’으로 바뀌었습니다. 왜 이름을 바꿨는지, ‘빛과 소금’이든지 ‘소금과 빛’이든지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소금’과 ‘빛’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Travis Scott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You will never influence the world by trying to be like it(세상을 좋아하고 따라가면서 결코 세상에 영향력을 끼칠 수 없을 것이다).” 크리스천의 삶에 인사이트를 주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크리스천이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한다는 말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이 말을 한번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세상의 유행과 트렌드를 좋아하고 따라가면서 세상에 영향력을 끼친다는 것은 앞 뒤가 맞지 않습니다. 그런데, 많은 크리스천들이 이런 실수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고 세상에서 선한 영향력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전에 먼저 우리 자신들이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반성해야 합니다. 여러분, 로마서 12:2에 나오는 유명한 말씀을 아시지요? “Don't copy the behavior and customs of this world, but let God transform you into a new person by changing the way you think. Then you will learn to know God's will for you, which is good and pleasing and perfect (더 이상 세상의 유행을 본받지 말고 생각하는 방식을 바꿈으로써 하나님이 여러분을 변화시키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당신을 위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사람이 되라고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라 세상에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 되라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맞습니까?

여러분, 연어가 알을 낳기 위하여 강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는 사진들을 보십시오.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도처에 많은 위험들이 있습니다. 거센 물살을 거스르면서 힘들게 뛰어오르는데, 곰들이 입을 벌리고 길목을 지키고 있습니다. 연어들이 자기들이 태어난 강 상류로 가서 알을 낳는 것은 타고난 본능(本能, instinct)이라고 합니다. “연어는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평균 1,000마일(1600km)을 여행한다. 온갖 상처를 입으며 강물을 역류해 올라가는 고난을 감수한다. 연어는 알을 낳기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 그리고, 알을 낳으면 그 생을 마감한다.” 연어의 이런 본능이 마치 이 시대의 사상과 유행을 본받지 않고 거슬러 살면서 세상을 변화시켜야 하는 크리스천들의 운명과 같아 보이지 않습니까?  

둘째로,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지는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좋은 ‘교제(fellowship)’를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오는 두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혼자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의 같이 드리는 예배가 필요해서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내 옆에 앉은 형제와 자매와 같은 찬송을 부르고, 같은 마음으로 기도하고,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 받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교회에서 나누는 교제의 필요성 때문에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교제를 통하여 격려를 받습니다. 그리고 이 교제를 통하여 우리는 ‘연대의식(連帶意識, solidarity)’을 갖습니다. 크리스천으로서 이 세상에 대한 공동의 책임의식을 배우고 공유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교회에 나오는 목적입니다. 교회를 다른 목적을 위해 이용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여러가지 다른 이유를 가지고 교회에 나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얼마 정도 시간이 지나면 크리스천으로 가져야 할 바른 생각을 가지고 교회에 나와야 합니다. 

디모데후서 2:22 말씀을 한번 보실까요? “깨끗한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들과 함께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며, 믿음과 사랑과 평안을 추구하기 바랍니다(Instead, pursue righteous living, faithfulness, love, and peace. Enjoy the companionship of those who call on the Lord with pure hearts).” 좋은 믿음의 친구들과 교제를 나누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린도전서 15:33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쁜 친구를 사귀면 좋은 습관도 나쁘게 됩니다.” 두 말씀 모두 교제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너희는 이 세상의 소금이다” 라고 말씀하셨을 때, 예수님은 어떤 생각으로 그 말씀을 하셨을까요? 우선 우리가 주목해서 봐야 할 말씀은 ‘세상의 소금(salt of the earth)’이라는 말씀입니다. 빛에 대해서도 똑 같이 ‘세상의 빛(the light of the world)’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of’라는 전치사에 ‘~에 속한’이라는 뜻이 있지만 이 경우는 ‘~에 속한’이라는 뜻보다는 ‘specific identity within a category’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세상에서 소금이라는 정체성(正體性, identity)을 갖는다는 뜻입니다.

소금은 ‘짠 맛’을 유지하고 있을 때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더 이상 소금의 구실을 할 수 없습니다. 소금이 ‘짠 맛’을 유지할 때 맛을 낼 수도 있고, 썩는 것을 막을 수도 있습니다. 또 소금의 ‘짠 맛’을 섭취해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생명을 유지하는데 소금이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요즘같이 더운 날 땀을 많이 흘리면 우리 몸이 짠 음료수나 짠 음식을 원합니다. 동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사진을 한번 보세요. 이 산양들이 왜 이렇게 위험한 절벽에 붙어 있을까요? 놀라지 마세요. 바위에 붙어 있는 소금기를 빨아먹기 위해서 이 산양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절벽에 붙어 있는 것입니다.

소금의 ‘짠 맛’이 소금의 정체성이듯이, 그리스도의 제자들도 세상에서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는 것들이 무엇일까요? Danie & Jessi 두 사람이 공동으로 “How to Be a Christian Influencer(크리스천으로 영향력을 갖는 비결)”이라는 글을 썼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것 중에 눈에 띄는 것이 있는데 선한 영향력을 갖기 위해서 먼저 “건전한 신학을 가져야 한다(Make sure you have good theology)”고 했습니다. 저는 이 말에 완전히 공감했습니다. 크리스천으로서 아무리 유능하고 인정받는 사람이라도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신학이 건전하지 않으면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없습니다. ‘건전한 신학(good theology)’은 마치 인정받는 회사에서 나온 제품과 같습니다. 저는 신학서적이나 신앙 서적을 살 때 제일 먼저 이 책이 어느 출판사에서 나왔는지 출판사를 봅니다. 이 출판사에서 나온 책이라면 믿을 수 있는 그런 출판사들이 있습니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출판사에서 나온 책은 그럴듯해 보여도 사지 않습니다. 

얼마 전에 온라인에서 아주 좋은 글을 읽었습니다. “와, 이런 좋은 글이 있다니!” 하면서 저자가 누구인지 봤는데 누군지 이름만 봐서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 사람의 이력을 봤더니 굉장한 이력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나가는 교회를 봤더니 ‘The Church of Jesus Christ of Latter-day Saints(말일성도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일명 몰몬교)’라고 나와 있었습니다. 그 교단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리 내용이 좋아도 이단 종교에 깊이 관계하고 있는 사람의 글을 설교 시간에 인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믿음이 건전한 신학의 기초 위에 서 있어야 합니다.

둘째로,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은 ‘희생(sacrifice) 정신’입니다. ‘희생’에 대하여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속물(ransom)’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자기 생명을 내 준 대가로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값을 치르고 산 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고린도전서 6:20, 7:23) 이 은혜로 우리는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희생’이라는 말이 갖는 거부감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 ‘희생’이라는 말이 거북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에게는 ‘희생’이라는 말이 부담스럽게 들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희생’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희생은 다른 말로 하면, 이기적으로 살지 않는 것입니다.

Kenneth Blanchard라는 사람의 말인데요. “The key to successful leadership today is influ-ence. not authority(오늘날 성공적인 리더십을 위한 핵심 단어는 권위가 아니라 영향력이다).” 참 신기하게도 어느 날 갑자기 한순간에 ‘권위주의’라는 말이 사라졌습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권위주의적인 리더십’을 강력한 리더십으로 꼽았습니다. 그런데, 이젠 어디에서도 ‘권위주의’라는 말을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제는 ‘권위주의 리더십’ 대신 ‘섬기는 리더십(servant leadership)’을 말합니다. 구성원들을 내 몸같이 돌보고, 희생하고, 섬김으로써 공동체에 영향력을 끼치는 리더십이 진정한 리더십이라는 것입니다.

셋째로,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은 ‘선한 행동(good deeds)’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들에게 비춰라. 그래서 사람들이 너희의 선한 행동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 (16절) 어디서부터 잘못된 일인지 모르지만, 우리에게 ‘선한 행동’을 가볍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종교개혁의 전통 때문인 것 같습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믿음만 있으면 그만이라고 여기고 더 이상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장님이든지 심한 근시안입니다.” (베드로후서 1:9, 현대어 성경) ‘근시(近視, shortsighted)’는 가까운 것만 보이는 것입니다. 먼 데 있는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큰 그림으로 볼 수 없는 사람들을 베드로는 ‘근시’를 가진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절대로 ‘선한 행동’을 가볍게 봐서는 안 됩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는지 구원의 큰 그림을 봐야 합니다. “For we are God's masterpiece. He has created us anew in Christ Jesus, so we can do the good things he planned for us long ago(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걸작품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셔서 하나님께서 오래 전부터 계획하신 대로 우리가 선한 일을 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에베소서 2:10) 이 말씀을 잘 보십시오. ‘모나리자’ ‘최후의 심판’ ‘메시야’ ‘천지창조’ 같은 작품들을 ‘걸작품(masterpiece)’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걸작품들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선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우리를 새롭게 창조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건전한 신학과 희생, 그리고 선한 행동, 이런 것들이 우리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형성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너희가 이 세상에서 나의 제자로서 정체성을 계속 유지해 나가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밖에 버려져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밟히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결과가 바로 지금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을 가리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14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교회를 지을 때 예수님 말씀 대로 모든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는 언덕 위에 지었습니다. 교회에서 종을 치면 온 동네에 종소리가 들렸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이 산 위에 있는 동네처럼, 모든 사람들에게 드러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비 콕스(Harvey Cox)라는 신학자가 있습니다. 1965년부터 2009년 은퇴할 때까지 무려 44년 간 하바드 신학교에서 종교학을 가르쳤습니다. 그의 대표작은 ‘세속도시(The Secular City, 1965)’라는 책입니다. 이 책은 세속화되는 사회 속에서의 교회의 역할을 논의한 책입니다. 그가 예언자적인 안목으로 그 책에서 다루었던 교권 세습 문제, 성장제일주의, 교회의 대형화 경쟁 등의 문제들이 고스란히 오늘날 교회들에게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Harvey Cox는 세속화된 사회의 특징 중의 하나로 ‘익명성(anonymity)’을 들었습니다. Harvey Cox 말이 맞았습니다. 현대인들은 자기가 누구인지 군중 속에, 대중 속에 숨어 정체를 드러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큰 대형 교회에 가려고 하는 이유가 바로 ‘익명성’이 보장되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에게 산 위의 동네처럼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익명성’이라는 시대 정신과 싸워야 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자신이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드러내야 합니다. 지금과 같이 크리스천의 정체성이 흔들리는 위기 상황 속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7/24/2022 | 신약성경의 핵심 말씀 시리즈8

이 비유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If You Can’t Understand This Parable

마가복음 4:1-9

예수님의 비유에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로, 비유에 나오는 이야기가 매우 짧습니다. ‘탕자의 비유’같은 것은 비교적 길지만, 대부분의 비유들은 길이가 매우 짧습니다. 둘째로, 대부분의 비유가 “천국은 마치......와 같다(The kingdom of heaven is like)”는 말로 시작합니다. 셋째로, 비유에 나오는 이야기의 소재는 생활 주변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것들입니다. 넷째로, 예수님의 비유에는 울림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비유들이 “귀 있는 사람은 들으라!”는 말로 끝이 납니다. 듣는 사람들이 스스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아!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나라구나!” 하고 깨닫도록 하는 것입니다. 다섯째로, 비유에 대한 ‘풍유적인 해석(allegorical interpretation)’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클레멘트(Clement, 150-215, 그리스), 오리겐(Origen, 185-253, 이집트), 어거스틴(Augustine, 354-430, 알제리) 등 알렉산드리아 학파에서 비유에 대한 ‘풍유적인(allegorical) 해석을 했던 전통이 있습니다. 최근에 비유를 연구하는 신학자들은 비유에 대한 ‘풍유적인 해석’은 비유의 본래 뜻을 해치기 때문에 삼가해야 한다고 합니다.

여러분, ‘비유풀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이단 ‘신천지(新天地)’에서 사람들에게 접근하여 정체를 숨기고 있다가 어느 정도 경계심이 풀린 것을 알면 적극적으로 성경공부를 하자고 하면서 ‘비유풀이’를 가르칩니다. 이 ‘비유풀이’가 바로 예수님의 비유를 ‘풍유적으로’ 해석해서 가르치는 것입니다. 제멋대로, 자기들 유리한대로 해석해서 가르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비유는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The Parable of The Sower)’입니다. 오늘 제가 예수님의 많은 비유 중에 이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선택한 이유는 이 비유가 다른 비유들을 이해하는 입문(入門)과 같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이해하려면 반드시 이 비유를 거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이 비유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다른 모든 비유를 이해하겠느냐(If you can't understand the meaning of this parable, how will you understand all the other parables)?” (마가복음 4:13) 이 비유를 잘 듣고 잘 깨달으면 예수님의 다른 비유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이 비유를 이해하지 못하면 다른 비유들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그림을 한번 보세요. 빈센트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가 그린 ‘The Sower(씨뿌리는 사람)’라는 그림입니다. 고흐는 같은 이름으로 30개 이상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고흐가 그린 ‘해바라기(Sunflowers, 1889)’ 그림이나, ‘별이 빛나는 밤(The Starry Night, 1889)’이라는 그림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고흐가 왜 성경에 나오는 ‘씨뿌리는 사람’을 그렸는지 의아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고흐는 한 때 목사가 되려는 생각까지 했던 사람입니다. 아버지가 목사였고, 할아버지가 목사였습니다. 고흐는 전도사 시절에 탄광촌을 찾아가서 가난하고 고된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설교를 할 정도로 열정적이었지만 그의 열정과는 달리 크게 환영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고흐의 아버지는 아들이 목사가 되는 것을 한사코 반대하다가 결국 허락했는데, 신학교 입학 시험에 떨어지는 바람에 목사가 되는 것을 포기했다고 합니다. 들리는 말로는 워낙 라틴어 성적이 좋지 않아 떨어졌다는 말이 있습니다.

목사가 되려는 생각을 포기한 이후부터 고흐는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고흐가 ‘씨 뿌리는 사람’을 그린 것은 1888년이라고 하는데요. 그 때 고흐는 폴 고갱(Paul Gauguin, 1848-1903)과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고갱의 말에 의하면, 고흐는 ‘씨 뿌리는 사람’을 사실적으로 그리기 보다는 상상력(imagination)을 사용해서 그렸습니다. 그리고 감정과 열정을 표현하기 위해 고흐만의 독특한 색깔을 사용했습니다. 하늘을 녹황색으로, 들판을 자주색으로, 태양을 밝은 노란 색으로 그려서 마치 ‘씨 뿌리는 사람’ 뒤에서 빛나는 후광처럼 보이게 함으로써 씨 뿌리는 사람을 성자(聖者)처럼 보이도록 처리했습니다. 고흐는 생명의 씨앗을 밭에 뿌리고 거두는 농부의 삶을 거룩한 성직(聖職)으로 본 것입니다. 화가로서 고흐는 밀레(1814-1875)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하는데요. 고흐의 ‘씨 뿌리는 사람’ 역시 밀레의 ‘씨 뿌리는 사람’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아주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한 농부가 밭에 씨앗을 뿌리는데 어떤 씨앗은 길가에 떨어지고, 어떤 씨앗은 흙이 없는 돌짝 밭에 떨어지고, 어떤 씨앗은 가시 덤불 속에 떨어지고, 어떤 씨앗은 좋은 밭에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밟고 다니는 길 가에 떨어진 씨앗은 새들이 날아와서 금방 먹어버렸고, 흙이 얕은 돌짝 밭에 떨어진 씨앗은 겨우 싹이 났지만 흙이 없어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햇볕에 말라 죽었습니다. 가시 덤불 속에 떨어진 씨앗은 가시 때문에 자라지 못해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좋은 밭에 떨어진 씨앗은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를 많이 맺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마치면서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으라(He who has ears to hear, let him hear, 9절)” 라고 하시면서 말씀을 마쳤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실 예수님의 이야기는 전혀 새로울 것이 없어 보입니다. 예수님은 평범한 일상적인 이야기 끝에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이야기는 평범한 이야기같이 들리겠지만, 잘 생각해 보라. 이 이야기 속에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진리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중에 제자들과 예수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이 비유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이 질문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너희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 수 있게 하였지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비유로 주어진다. 그 이유는 그들이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용서받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11-12절, 이사야 6:9-10에서 인용함)

이 말씀은 성경 말씀 중에서 제일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 중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사용하신 두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는 비유를 통해서 듣는 사람들이 쉽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비밀을 깨닫도록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알아듣지 못하도록 감추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구에게는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깨닫게 해 주시고, 누구에게는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감추는지 궁금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깨닫도록 해 주는 사람들은 ‘열 두 제자들과 예수님 주변에 있는 사람들(the twelve disciples and the others, 11, 12절)’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감추게 하신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이 사람들은 ‘밖에 있는 사람들(outsiders, 11절)’입니다. 

문제는 과연 이 ‘밖에 있는 사람들’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이 날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이날 예수님께서 호숫가에서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모여서 예수님은 호수에 배를 띄우고 배에 앉아서 해변에 앉은 사람들을 가르쳐야 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 중에 누구에게는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알게 하고, 누구에게는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깨닫지 못하도록 감추셨을까요?

예수님께서 ‘outsiders(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감추셨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outsiders’가 누구인지 알아봐야 합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마가복음 3:22에 있는 말씀인데요. “예루살렘에서 온 율법학자들은(the teachers of religious law who had arrived from Jerusalem)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가 바알세불이 들렸다. 예수는 귀신들의 우두머리의 힘을 빌어서 귀신을 내쫓는다.’” 예수님은 이 때 갈릴리 가버나움에서 병든 사람들을 치유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이 소문이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 지도자들에게 알려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귀신에 들렸다는 이 소문에 얼마나 강력했든지 예수님의 가족들 조차도 예수님이 정신이 나갔다고 믿을 정도였습니다. 지도자들은 여론에 민감하고, 사람들의 인기에 민감합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교 지도자들은 갈릴리 지방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모두 듣고 있었습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손이 마비가 되어 못쓰는 사람을 고쳐 주신 일이 있었습니다. 성경에 뭐라고 기록되어 있는지 아십니까?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습니다......예수님께서 분노하시며 주위를 둘러보시고 사람들의 마음이 굳은 것을 아시고, 슬퍼하셨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거기를 떠나 헤롯 당 사람들과 함께 예수님을 죽일 계획을 세웠습니다.” (마가복음 3:2, 5, 6) 이렇게 예수님의 사역 초기부터 예수님을 시기하던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일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갈릴리 가버나움까지 와서 예수님이 귀신이 들렸다고 소문을 낸 사람들은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이 파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에는 항상 이 예루살렘에서 온 사람들이 사람들 틈에 섞여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실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까? 예루살렘에서 파견한 사람들은 그 때도 예수님을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좋은 일도 나쁜 일이라고 보고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귀신들린 사람을 고친 일도 예수님에게 귀신이 들어가서 그런 일을 한 것이라고 예루살렘 지도자들에게 보고했습니다. 어차피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제거하기 위하여 증거를 수집할 목적으로 파견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분, 이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outsiders’입니다. ‘deliberately(일부러, 고의적으로)’ 예수님을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에 대하여 근거 없는 나쁜 소문을 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그림을 한번 보십시오. 씨앗은 좋은 땅에만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길가에도, 돌짝 밭에도, 가시덤불에도 떨어집니다. 우리의 마음 밭의 상태가 어떻든지 간에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이 떨어집니다. 당장에 우리가 기대한 대로 열매를 거둘 수 없는 마음 밭들이 있습니다. 인내를 가지고 기다려야 하는 마음 밭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outsiders’가 아니라면, 언젠가 하나님의 때가 되면 거기서 싹이 나고 뿌리가 나서 열매를 거두게 되는 때가 올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의 사역에 대하여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나 아볼로나 주님께서 할 일을 맡기셔서 일하는 일꾼에 불과합니다. 나는 씨앗을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나,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심는 사람이나 물을 주는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자라게 하시는 분인 하나님은 중요합니다(I planted the seed in your hearts, and Apollos watered it, but it was God who made it grow. It's not important who does the planting, or who does the watering. What's important is that God makes the seed grow.” (고린도전서 3:5-7) 자신의 사명을 ‘씨 뿌리는 사람(the sower)’으로 인식한 바울은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씨 뿌리는 자의 비유’ 말씀을 읽으면서 나는 좋은 땅이 되어서 많은 열매를 거두겠다는 생각만 했습니다. 그 자체로 하나님이 기뻐하실 생각인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땅에 대한 비유 말씀이 아니라 말씀을 땅에 뿌리는 ‘The Sower(씨 뿌리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말씀을 읽는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씨를 뿌리는 사람들’이 세우는 나라입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중단하지 않고 사람들의 마음 밭에 씨를 뿌리는 사람들에게 의해 성장하고 발전하는 나라입니다. 씨를 뿌리는 일은 고흐의 그림에서 보았듯이 ‘성직(聖職)’입니다.

이 대화를 한번 들어 보세요. 릴리어스 호튼(Lillias Horton, 1883-1921): “마마, 우리 미국은 부강하고 자유로운 나라입니다.” 황후: “우리나라도 그렇게 부강하고 자유로운 나라가 될 수 있지 않겠어요?” 릴리어스 호튼: “마마, 그러 하오나 그 나라보다 더 좋은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황후: “그런 나라가 있다면 상감과 우리 백성들이 모두 가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고종의 부인 명성황후와 그녀의 주치의로 있었던 언더우드 선교사의 부인 릴리어스 호튼이 1894년 크리스마스 때 나누었던 대화입니다. 호튼은 당시 왕실에서 있었던 일들을 ‘Fifteen Years Among The Top-Knots(상투장이들과 함께 한 15년)’이란 책에 고스란히 남겼습니다. 이 책은 2008년에 ‘(언더우드 부인의) 조선 견문록’이라는 책으로 나왔습니다.

황후는 매우 총명해서 선교사들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합니다. 비록 복음을 완전히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선교사들이 가지고 들어오는 의학, 과학, 수학, 철학, 신학 등 서구의 발달된 문명에 대하여 매우 호감을 보였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1년 후, 1895년 10월 8일에 일본 자객들에 의해 무참하게 살해당합니다.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더라면......” 조선의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을까 하는 기대와 아쉬움이 남습니다.


7/17/2022 | 신약성경의 핵심 말씀 시리즈7

그의 말에 틀린 말이 없었다! There Was Nothing Wrong With His Words!

누가복음 15:25-32

신약성경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가 모두 몇 개나 될까요? 정확하지는 않지만 약 40개 정도됩니다. ‘비유’가 무엇인지, ‘비유’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이렇습니다. “a short story that teaches a moral or spiritual lesson, especially one of those told by Jesus as recorded in the Bible(윤리적인 혹은 영적인 교훈을 가르치기 위한 짧은 이야기로 특별히 성경에 기록된 예수의 말씀 중 하나를 비유라고 한다).” (Oxford Learner's Dictionaries)

‘비유’는 그리스어로 ‘παραβολή(파라볼레, parabolē)’라고 합니다. ‘para-’라는 말은 ‘옆에, 나란히(alongside)’라는 뜻이고요. ‘bolē’라는 말은 ‘던지다(to throw, to cast)’라는 뜻이거든요? 두 말을 합치면 “옆에 나란히 놓다” “비교하다”라는 뜻이 됩니다. 어려운 영적인 진리를 설명하기 위하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을 나란히 놓고 그 영적인 진리를 깨닫도록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굉장히 중요한 통찰(insight)이 있습니다. 생활 주변에서 아무렇지 않게 볼 수 있는 것들이 하나님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여자들이 부엌에 두고 빵을 구울 때 쓰는 누룩(yeast)이 있습니다. 누룩을 넣으면 밀가루가 부풀어 오릅니다. 예수님은 이 누룩을 보여 주시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자라는 것이 꼭 이 누룩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누룩처럼 작은 우리의 헌신과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져 나간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 사람은 주변의 사소한 일에도 최선을 다합니다. 그리고 작은 일의 가치를 인정합니다.

헨리 나우웬(Henri Nouwen, 1932-1996, 네델란드)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학자로서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는 더 이상 말하지 않겠습니다. 이 사람은 예일 신학교의 종신 교수였습니다. 그리고, 하바드 신학교의 초빙을 받아 실천신학을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갑자기 교수직을 버리고 캐나다 온타리오에 있는 ‘라르쉬 데이브레이크 공동체(The L'Arche Daybreak Community)’에 채플린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그 공동체에서 지체 부자유자들을 섬기면서 얻은 깨달음을 가지고 많은 책들을 썼습니다.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진 책으로 초기에 나온 책이 ‘예수의 이름으로(In The Name of Jesus, 1989)’라는 책입니다. 가장 나중에 나온 책 중의 하나가 ‘탕자의 귀향(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1992)’이라는 책입니다. 

1983년, 프랑스를 여행하던 나우웬은 ‘라르쉬 공동체’에서 일하고 있는 친구의 사무실에 걸려 있는 렘브란트(Rembrandt, 1606-1668, 네덜란드)의 그림 ‘탕자의 귀향(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이라는 그림을 보고 그 그림에 매료되고 맙니다. 그로부터 3년 후, 그는 러시아의 ‘에르미타주’ 미술관에서 렘브란트의 원작을 보게 됩니다. 그는 그 그림 앞에 몇 시간이고 앉아 햇빛의 각도에 따라 그림이 시시각각으로 바뀌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림에 등장하는 각각의 인물이 담고 있는 의미들을 렘브란트와 자신의 삶에 투영시켜 정밀하게 해석하는 작업을 시작합니다. 이렇게 해서 출판된 책이 ‘탕자의 귀향’이라는 책입니다.

이 그림에서 가장 눈길이 가는 인물은 중앙에 있는 아버지입니다. 고령의 아버지이지만 아버지는 넓은 어깨와 가슴을 가졌습니다. 그 어떤 사람이라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인자한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어깨에 두른 빨강 망또는 아버지의 고귀한 신분과 권위를 나타냅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눈에 초점이 없어 보입니다. 나우웬은 아버지의 눈이 눈물로 짓물러 거의 시력을 잃어버린 것 같아 보인다고 했습니다. 나우웬은 아들의 어깨 위에 놓여 있는 두 손이 서로 다른 크기와 모양으로 그려진 것을 주목했습니다. 마치 아버지의 오른손은 어머니의 손처럼 고운 반면에 아버지의 왼손은 투박하고 굵직한 힘줄이 보입니다. 마치 힘센 아버지의 손과 아들을 사랑과 용서로 감싸는 어머니의 손이 모두 보입니다.

그 다음으로 눈길을 끄는 사람은 아버지 품에 무릎을 꿇고 안겨 있는 작은 아들입니다. 아들의 머리는 짧게 깎은 것이 마치 어머니의 자궁 속에 들어 있는 태아(fetus)를 연상케 합니다. 타향에서 온갖 고생을 하다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온 아들의 평안한 모습을 렘브란트는 그런 모습으로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이 아들은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받아 가지고 집을 나가 ‘방탕한 생활(prodigal living)’을 하다가 가진 돈을 모두 날렸습니다. 이 아들의 남루한 모습이 그의 방탕했던 생활의 결과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의 신발 한 짝은 벗겨져 맨발이었고, 다른 신발 한 짝도 뒤꿈치가 떨어져 나갔습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제서야 그는 제정신이 들어 말했다. ‘내 아버지의 품꾼들에게는 양식이 풍족하여 먹고도 남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는구나. 일어나 아버지께 돌아가 말해야겠다. 아버지, 저는 하나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꾼 가운데 하나로 여기십시오.’ 그 아들은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누가복음 15:17-20)

아버지에게 받아온 돈이 아직 남아 있었을 때는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돈이 떨어지고, 일자리를 구할 수 없게 되고 먹을 것이 없는 절망적인 상황을 맞이한 것입니다. 이 탕자의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가 될 수 있고, 우리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A Long Way Off(아득히 먼 길, 2014)’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 제목에 이런 부제를 붙였습니다. ‘The Modern Day Story of The Prodigal Son(현대판 탕자의 이야기)’이라고요. 그리고, 포스터에 이런 글이 쓰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We all know one, have been one, or are waiting for one to come home (우리 모두는 그 한 사람을 알고 있거나, 그 한 사람이었거나, 그 한 사람이 집에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탕자의 비유’를 조심해서 읽어보면 좀 이상한 생각이 듭니다. 작은 아들에게 돈이 떨어지자 때마침 그곳에 큰 흉년이 듭니다. 사람들은 이런 경우를 맞을 때 ‘엎친데 덮친 격’이라고 합니다. ‘설상가상(雪上加霜)’이라는 말도 합니다. 하지만, 크리스천의 눈으로 지금 작은 아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작은 아들이 하는 말을 들어 보세요. “내 아버지의 품꾼들에게는 양식이 풍족하여 먹고도 남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는구나.” (17절) 아버지 집을 나간 그 작은 아들을 다시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게 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지금 작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키에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 1813-1855, 덴마크)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탁월한 신학자이고 철학자입니다. 인류 사상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실존주의 철학을 주창하신 분입니다.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 칼 야스퍼스(Karl Jaspers, 1883-1969), 하이데커(Martin Heidegger, 1889-1976), 카뮈(Albert Camus, 1913-1960) 등이 모두 키에르케고르의 영향을 받은 실존주의 철학자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키에르케고르는 현대 신학의 기초를 세운 신학자로 추앙을 받고 있습니다. 그의 저서 중에 ‘이것이냐 저것이냐(Either/Or, 1843)’ ‘공포와 전율(Fear And Trembling, 1843)’ ‘죽음에 이르는 병(The Sickness Unto Death, 1849)’ 등이 유명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The most common form of despair is not being who you are(가장 흔한 절망의 형태는 당신 자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비참해진 자신의 모습이 작은 아들을 절망하게 했습니다. 그가 절망의 자리에 머물러 있었더라면 그는 죽음에 이르는 병을 피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 작은 아들이 절망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게 한 그 용기는 어디서 온 것일까요? 키에르케고르는 이것을 ‘신앙의 도약(leap of faith)’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궁금한 것은 그 무엇이 작은 아들로 하여금 절망의 자리에서 믿음으로 도약하게 했을까요? 

아버지 앞에 초라한 모습으로 돌아와 무릎을 꿇고 있는 작은 아들의 뒷모습에서 뭔가 이상한 것이 보이지 않습니까? 오른쪽 허리춤에 단도(a short sword)를 차고 있는 것이 보입니다. 왜 이 작은 아들은 단도를 차고 있을까요? 객지를 나돌다 보면 위험한 순간들이 많으니까 호신용으로 차고 있었을까요? 헨리 나우웬은 그의 책 ‘탕자의 귀향’에서 이 단도는 작은 아들에게 남은 마지막 자존심, 아들로서의 ‘정체성과 지위’를 상징한다고 해석합니다. 정말 탁월한 해석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작은 아들은 갖은 고생을 하면서도 아버지의 아들로서의 자존심을 끝까지 지키기 위해 아버지의 집에서 가지고 나온 칼을 팔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자존심이 그를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게 했습니다. “아버지, 저는 하나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19, 21절) 역설적으로, 이 말은 나를 아들로 받아 달라는 간청으로 들립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에게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신발을 신기고 아들의 지위를 회복시켜줍니다. 

마지막으로 봐야 할 사람은 그림 오른쪽에 서 있는 큰 아들입니다. 큰 아들은 두 손을 모으고 있습니다. 그의 치켜 올라간 눈썹에서 아버지에 대한 배신감과 질투와 분노, 상실감이 느껴집니다. 큰 아들이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수 년 동안, 아버지를 섬겨 왔습니다. 그리고 한 번도 아버지의 명을 어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는 한 번도 저를 위해서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신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함께 아버지의 재산을 다 써 버린 아들이 집에 돌아오니까 아버지께서는 그를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29-30절)

큰 아들의 말에 하나도 틀린 말이 없습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의 말을 어긴 일이 없이 말 잘 듣는 아들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아버지가 자기에게 해 준 일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아버지 집에서 울려 퍼지는 음악 소리와 춤추는 소리도 짜증이 났습니다. 아버지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동생을 그토록 감격스럽게 맞아주는 아버지의 처사도 못마땅했습니다. 그는 집을 나간 동생이 살아 돌아온 것이 전혀 기쁘지 않았습니다. 그의 감정은 메말라 있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집에서 살면서도 그는 종처럼, 아들로 산 것이 아니라 종처럼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버지가 큰 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 아버지의 말씀 한마디에 대반전(大反轉)이 일어납니다. “아들아, 너는 언제나 나와 함께 있었으니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네 것이 아니냐?” (31절) 그는 아버지의 집에서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으면서도 자기가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잊고 살고 있었고, 한 번도 아버지의 것이 내 것이라는 생각을 못하고 살았습니다. 

문제는 우리 중에 많은 사람들이 큰 아들과 같이 종의 마음을 가지고 믿음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헨리 나우웬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There are many elder sons and elder daughters who are lost while still at home(집에 머물러 살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잃어버린 사람으로 살고 있는 수많은 큰 아들들과 큰 딸들이 있다).” 이 사람들은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축복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울어주고, 함께 기뻐해 주는 삶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교회에 나와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은혜를 모르고 불평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자주 짜증을 냅니다. 스스로가 아들이 아니라 종의 마음과 태도를 가지고 살고 있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렘브란트의 그림 속에 제3의 인물이 있습니다. 아버지와 큰 아들 사이에 있는 모자를 쓴 사람인데, 이 상황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무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다리를 꼬고 앉아 있습니다. 이 사람이 누구일까요? 이 사람은 렘브란트 자신입니다. 렘브란트는 자기가 그 상황 속에 들어가 객관적으로 이 집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관찰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렘브란트의 생애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그가 그린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처럼 기구하고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그는 그의 그림을 통해서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위로와 평안을 맛보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끝으로, 헨리 나우웬이 한 말을 소개함으로써 오늘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But what makes us human is not our mind but our heart, not our ability to think but our ability to love(하지만 우리를 인간이 되게 하는 것은 우리의 생각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다. 우리의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다).” 나우웬은 ‘탕자의 귀향’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품에 안긴 작은 아들이 되려고 해서도 안 되고, 큰 아들이 되려고 해서도 안 된다. 우리 모두는 탕자를 용서해주고 받아주는 아버지들이 되도록 해야 한다.”


7/10/2022 | 신약성경의 핵심 말씀 시리즈6

다른 복음은 없다! There is No Another Gospel!

요한복음 3:14-17

요한복음 3:16을 가리켜 ‘복음 중의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보다 더 간단하게 복음을 설명할 수 있을까요? 이 말씀보다 더 분명하게 복음을 설명할 수 있을까요? 이 말씀보다 더 알기 쉽게 복음을 제시할 수 있을까요? 이 말씀의 중심에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의 ‘독생자(獨生子, God’s only begotten son)’를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자기의 하나 밖에 없는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이 세상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말문이 막힙니다. 세상이라는 말은 희랍어로 ‘코스모스(κόσμος)’입니다. 우주(universe)라는 의미로 번역할 수도 있지만, ‘코스모스’는 ‘whole creation(모든 피조물)’을 말합니다. 구체적으로는 세상에 사는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니, 이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셨길래 자기 아들을 세상을 보내셨을까? 아니, 사람들을 얼마나 사랑하셨길래 자기 아들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할 정도로 사랑하셨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구약시대에 아브라함은 아들이 없다가 100살이 되어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의 아내는 90세였습니다. 이미 아들을 낳을 수 있는 나이가 훨씬 지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라가 하나님의 은혜로 아들을 낳았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내가 너에게 일러주는 산에서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 (창세기 22:2-3) 이 말씀을 들은 아브라함이 어떻게 했는지 아십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사용할 나무를 가지고 하나님이 지시하신 산으로 갔습니다. 이런 아브라함의 행동이 이해가 되시나요? 다른 것이면 몰라도 어떻게 100살이 되어서 낳은 그의 ‘독생자(his only begotten son)’를 바칠 수가 있습니까? 그것도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아들인데, 다시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라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그런데, 여러분, 아브라함에게 있었던 일과 비교도 할 수 없는 엄청난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를 위해(for us)’ 희생 제물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이 일에 대하여 이렇게 썼습니다. “설령 우리가 선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누군가가 우리 대신 죽는다는 것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Very rarely will anyone die for a righteous man, though for a good man someone might possibly dare to die. But God demonstrates his own love for us in this: While we were still sinners, Christ died for us).” (로마서 5:7-8)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계신가요?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사랑과 너무 다릅니다. 우리는 사랑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을 사랑하고, 나를 좋아하는 사람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죄인들을 사랑하신 사랑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다분히 ‘조건적인 사랑(conditional love)’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God’s love is unconditional). 죄인들을 아무 조건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 주시는 사랑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 덕분에 우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조건을 따져서 사랑하셨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구체적인 사랑입니다(God’s love is concrete). 하나님은 말로만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그 아들을 보내 주심으로써 그 사랑을 친히 증명하셨습니다. 위에서 말한 로마서 5장 말씀에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다(God demonstrates his own love for us, 8절)”고 나와 있습니다. 이 말씀이 Christian Standard Bible에는 “But God proves his own love for us(하나님은 우리에 대한 그의 사랑을 증명하셨습니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개인적인 사랑입니다(God’s love is personal). ‘누구든지 그를 믿는 사람은(whoever believes in Him)’ 구원을 얻는 사랑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 말씀인지 아시나요? 하나님께서 민족 단위로 심판하신 때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우상숭배에 빠져 있던 나라 전체를 심판하셨습니다. BC 720년에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BC 586년에는 남왕국 유다가 멸망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서 ‘새로운 언약(The New Covenant)’을 선포하셨습니다. 예레미야는 예화를 들어 쉽게 ‘새로운 언약’을 설명했습니다. 아버지가 신포도를 먹었는데 옆에서 이를 보고 있던 아들의 입에서도 신물이 나옵니다. 여러분은 그런 경험이 있으신가요? 예레미야는 (예수님 이전의) ‘옛 언약(The Old Covenant)’이 바로 이와 같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이후의) ‘새 언약(The New Covenant)’에서는 신 포도를 먹은 사람의 이만 시게 된다는 것입니다(예레미야 31:29-30).

‘새 언약’은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과 맺은 ‘새로운 언약’입니다. ‘새 언약’의 핵심은 “누구든지 그 아들을 믿는 사람은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과거처럼 아버지가 믿으니까 아들은 믿지 않아도 구원을 얻는 일이 ‘새 언약’에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구원을 얻습니다. 

다음으로 생각해야 할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이 희랍어 원문에는 “파스 호 피스테우온 에이스 아우톤(πᾶς ὁ πιστεύων εἰς αὐτὸν)”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영어로 번역하면 “Everyone who believes in Him”입니다. "I believe in Jesus"라고 하면 예수님의 존재를 믿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삶과 교훈과 예수님의 인격, 예수님께서 우리의 삶에 끼치는 선한 영향력,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나의 삶이 변화된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I believe in Jesus”라는 말 속에 들어 있는 뜻입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시겠습니까? 기독교 변증가였던 C.S. Lewis가 한 말인데요. “I believe in Christianity as I believe that the Sun has risen, not only because I see it but because by it, I see everything else (나는 해가 뜬 것을 믿는다. 꼭 해를 볼 수 있기 때문에 해가 뜬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해의 밝은 빛을 통해 다른 것들 것 볼 수 있기 때문에 해가 뜬 것을 믿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기독교를 믿는다).” —“Is Theology Poetry?” The Weight of Glory 정말 명언 아닙니까? C.S. Lewis는 우리 시대의 가장 탁월한 기독교 변증론자(apologist)였습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보십시오. 꼭 해를 눈으로 보기 때문에 해가 뜬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해를 눈으로 보지 않아도) 해에서 나오는 빛을 통하여 다른 모든 사물들을 볼 수 있기 때문에 해가 뜬 것을 믿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눈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기 때문에 그의 존재를 믿는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해서 우리의 삶이 변화되고, 우리의 가치관이 변화되어서 세상을 올바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위의 글에서 루이스가 말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로 믿는다면 반드시 변화의 삶을 살게 된다는 것 아닐까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반드시 그 믿음이 우리의 삶으로, 우리의 행동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 아닐까요? 우리의 믿음이 행동으로 보여지지 않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볼 수 없습니다. 맞습니까? 삶이 변하지 않는 에베소 교회 교인들을 보면서 바울이 안타까운 마음으로 쓴 글 중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리스도에 관해 그렇게 배우지 않았습니다(But That was not what you learned about Christ).” (에베소서 4:20, Good News Translation) 예수님을 올바로 배우고 믿는다면 그런 식으로 행동하고 그런 식으로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 하나 더 볼까요?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당신에게 보이겠습니다(I will show you my faith by my good deeds).” (야고보서 2:18) 여기서 야고보가 말하는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말합니다. 그는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Faith by itself isn't enough. Unless it produces good deeds, it is dead and useless, so faith without deeds is dead(믿음은 그 자체로서는 의미가 없습니다. 믿음에 선한 행동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 믿음을 죽은 믿음이고 아무 소용없는 믿음입니다).” (야고보서 2:17, 26)

복음은 쉽고 간단합니다. 많이 배운 지식인들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듣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그의 하나 밖에 없는 외아들을 우리를 위해서 보내주셨습니다. 그 아들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아들을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전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세상에 나가서 이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그런데, 2,000년 전의 이스라엘의 상황은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마음 놓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더 이상 전파하지 못하도록 금지시켰습니다. “그들은 제자들을 불러 절대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사도행전 4:18) 사도행전에 나오는 이 말씀이 그 당시의 분위기를 잘 말해줍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공의회(the Sanhedrin)에 출석했던 제자들은 공회원들 앞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예수님 외에는, 다른 어떤 사람에게서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원받을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There is salvation in no one else, for there is no other name by which we must be saved).” (사도행전 4:12, Christian Standard Bible)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다른 복음’을 전파하려는 시도가 있어왔습니다. 번역 성경들을 보면 ‘다른 복음’을 ‘a different gospel’ 혹은 ‘another gospel(KJB)’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복음과 다른 변질된 복음을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11:4, 갈라디아서 1:6에 ‘다른 복음’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a different gospel that pretends to be the Good News(복음인 것처럼 보이는 다른 복음, New Living Translation)’이라고 설명을 붙인 성경도 있습니다. 

왜 이런 ‘다른 복음’이 나오게 되는 것일까요? 놀랍게도 복음이 너무 간단하고 쉽기 때문에 이런 말들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적어도 갈라디아 교회에서 일어난 ‘다른 복음’은 그런 이유로 생긴 일이었습니다. “아니,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니? 이게 말이 됩니까? 구원이 그렇게 쉽게 얻어지는 줄 아세요?” 갈라디아 교회에 이런 주장을 가르치는 율법주의자들이 있었습니다. 구원의 교리가 쉬우면 우리가 얻는 구원은 우리의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얻는 구원이 됩니다. 그러나, 구원의 교리가 어려우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나의 힘으로 얻는 구원이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본성 속에 구원은 어렵게 얻어야 한다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다른 종교들을 보십시오. 그들이 주장하는 구원의 과정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구원의 문이 좁아 극소수의 사람들만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는 ‘다원주의(多元主義, pluralism)’라는 ‘다른 복음’이 있습니다. ‘다원주의’는 ‘포스트모더니즘(The Postmodernism)’에서 나타나는 경향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절대적인 가치를 모두 부정하고 상대적인 가치만을 인정하는 시대적인 경향입니다. 지금 우리는 이런 시대적인 경향 속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에는 과거와 달리 영웅이 나오지 않습니다. 목사님들도 그렇습니다. 과거와 달리 성인으로 추앙받는 목사님들이 나오지 않습니다. 다원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구원받는다는 성경의 교리를 시대 착오적이라고 비판합니다. 기독교만 절대적이라는 주장은 독선적이라고 비판합니다.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종교 간의 대화가 가능하고, 서로 공존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다원주의자들(pluralists)’의 주장입니다. 

복음의 내용을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다른 복음’의 유혹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폴 니터(Paul Knitter)가 쓴 책 중에 “No Other Name(다른 이름은 없다고)?” 이런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1985년에 출판된 책인데요. 이 책에 ‘A Critical Survey of Christian Attitudes Toward The World Religion(세계 종교에 대한 크리스천의 태도에 대한 비판적인 조사)’ 이런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여러분, 이 책 한 권만 읽으면 쉽게 다원주의자들이 되고 맙니다. 그만큼 설득력 있게 잘 쓴 책입니다.

여러분은 ‘복음’을 올바로 알고 있습니까? 복음은 쉽고 간단합니다. 얼마나 쉽습니까?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높이 들었던 것처럼 인자도 들려야 한다.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들에게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해서이다.” (14-15절) 예수님께서 구태여 이 말씀을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광야시대에 뱀에 물려 죽어가던 사람들이 장대에 매단 구리 뱀을 쳐다본 사람들은 모두 살았습니다(민수기 21:4-9). 예수님께서 이 이야기를 하시면서 자신도 십자가에 매달리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지만 십자가에 매달리신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누구나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쉽고 간단합니까? 복음에는 인간의 노력이 전혀 들어가지 않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다른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인간의 노력으로 대치시키려는 인간적인 시도입니다.


7/3/2022 | 신약성경의 핵심 말씀 시리즈5

값싼 은혜는 이제 그만! No More Cheap Grace!

누가복음 9:23-27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도(discipleship)’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삶의 방식을 제자도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자도’를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기대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값싼 은혜’로 만들고 있습니다. 목사들은 강단에서 ‘값싼 은혜’를 설교하고 있습니다. 죄와 단절하지 못하고 계속 죄를 짓는 삶을 살면서도 자신이 크리스천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고 복음과 아무 상관이 없는, 자기 자신만을 위한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한 여자’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정말 끔찍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처음부터 읽어보면 이 사건이 사전에 기획된 사건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외 없이 이 사건에도 율법학자들이 등장하고, 바리새인들이 등장합니다. ‘율법학자(teacher of religious law)’는 율법을 두루마리에 필사(筆寫, copy)하는 전문가를 말합니다. 개역성경에는 ‘서기관(書記官, scribe)’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고대에는 지금과 같은 인쇄술이 없었기 때문에 일일이 손으로 써서 사본(寫本)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필사할 때 오류가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고도의 훈련을 받은 전문가들이 이 일을 했습니다. 말씀을 필사하다보니 이 사람들은 말씀에 대한 많은 지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충격적인 사실은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을 제거하기 위한 음모를 꾸미는데 늘 앞장을 섰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알고 말씀에 정통해도 인간성이 변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게 쓴 편지 중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세상은 나에 대해서 죽었고, 나는 세상에 대해서 죽었습니다. 할례를 받느냐 받지 않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It doesn't matter if you are circumcised or not. All that matters is that you are a new person).” (갈라디아서 6:15, Contemporary English Version) 바울은 믿음생활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간음(姦淫, adultery)’은 율법에서 금하는 것입니다. 간음한 사람은 돌로 쳐 죽이게 되어 있습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 붙잡힌 여자의 사건이 기획된 사건처럼 보이는 이유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 이 여자를 이용해서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요한복음 8:6). 이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이런 여자는 율법에 돌로 쳐 죽이도록 되어 있습니다. 선생께서는 이 여자를 어떻게 하라고 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은 이들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를 돌로 치라.” 신기하게도 예수님의 이 말씀 한마디에 사람들은 한 사람 두 사람 슬그머니 자리를 떴습니다. 이 여자를 끌고 왔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도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여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I don’t condemn you. Go and sin no more).” (요한복음 8:11) 

이 여자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여자는 예수님으로부터 죽음의 현장에서 구원받았습니다. 그리고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아시잖아요? ‘은혜(grace)’라는 말은 ‘God’s undeserved favor(하나님의 감당할 수 없는 은혜)’라는 뜻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 여자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까? 단순히 그 여자가 불쌍해서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이 여자에게 새 사람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으니 이제 그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아 영적으로 죽은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 생명을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It is only by God's grace that you have been saved).” (5절) 또 이 말씀을 조금 더 읽어가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God saved you by his grace when you believed. It is a gift from God).” (8절)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합니다. 또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 속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이제 전처럼 살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와 선물을 받은 사람 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 아닙니까? 

오늘 우리가 크리스천으로서 정체성이 희미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능력이 없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제자직’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이제 이렇게 살아야 하겠구나 하는 결단이 없는 것입니다. ‘결단(決斷)’이라는 말은 ‘결단할 결’자와 ‘끊을 단’자로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깨달은 후에, 예전의 삶과 단절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하겠다고 마음의 결단을 내린 분이 계십니까? 많은 분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제자도’는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새로운 삶의 방식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제자도는 다른 것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의 말인데요. 대표작 본회퍼는 천재 신학자였습니다. 21살에 베를린 대학에서 ‘신자의 공동생활’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 때 그를 지도한 사람은 신학계의 거장 칼 바르트(Karl Barth)였습니다. 그리고 24살에 ‘존재와 행위’라는 논문으로 교수 자격논문이 통과되어 교수 자격을 얻게 되었습니다. 다음 글은 그의 대표작 ‘The Cost of Discipleship(제자직의 대가)’에 나오는 말입니다. 우리 말로는 ‘나를 따르라’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습니다. “The life of discipleship can only be maintained so long as nothing is allowed to come between Christ and ourselves—neither the law, nor personal piety, nor even the world. The disciple always looks only to his master, never to Christ and the law, Christ and religion, Christ and the world. He avoids all such notions like the plague. Only by following Christ alone can he preserve a single eye (제자도는 율법도, 개인의 경건도, 세상도, 그 밖에 어떤 것도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끼어들도록 허용되지 않아야 유지될 수 있다. 제자는 항상 그의 주인만 바라보지 그리스도와 율법, 그리스도와 종교, 그리스도와 세상을 바라보지 않는다. 그는 마치 전염병을 피하듯이 그런 개념을 피한다. 제자는 오직 그리스도를 따름으로 말미암아 하나의 눈을 지켜 나갈 수 있다).” 

여러분, 본회퍼가 말한 ‘하나의 눈을 보존한다 혹은 지킨다(preserve a single eye)’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우리에게 두 개의 눈이 있는데요. 이 두 개의 눈을 가지고 각각 다른 대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시선이 분산되지 않고 두 개의 눈을 가지고 하나의 대상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회퍼가 말하는 ‘a single eye’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의 눈을 가지고 하나의 대상 즉 주님만 바라보는 것’ 이것이 ‘제자직’의 핵심입니다.

주님은 나를 따르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대부분의 번역 성경들은 이 말을 “You must deny yourselves”라고 번역했습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는 이 말씀이 “You must turn from your selfish ways(너희들의 이기적인 삶의 방식에서 돌아서야 한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자기 자신의 이기적인 욕구에 대하여 “아니요(No)”라고 대답하고, 그리스도께서 요구하시는 것에 대해서는 “예(Yes)”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를 부인한다”는 말씀의 뜻입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시겠습니까? “우리 주님의 뜻 안에서 가까운 시일 안에 디모데를 여러분에게 보내려고 합니다. 여러분에 관한 소식을 듣게 되면, 내 마음이 위로받을 것 같습니다. 디모데만큼 여러분에 대해 걱정하고 마음 쓰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자기 일에만 정신이 팔려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디모데는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디모데의 인품에 대해서는 이미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빌립보서 2:19-22) 이기주의는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인간의 본능(本能, nature)입니다. 원래 우리가 다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고 위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연단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중에 어떤 분은 우리가 이기주의를 이기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을지 모릅니다. 맞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불가능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 대하여 이렇게 썼습니다. “Timothy has proved himself. Like a son with his father, he has served with me in preaching the Good News(디모데는 자기 자신을 증명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처럼 그는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나와 함께 섬겼습니다).” 바울은 이런 디모데를 매우 사랑했습니다. 심지어 디모데를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디모데후서 1:4). 그리고 바울은 그가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을 때 디모데에게 옆에 있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디모데후서 4:9, 21).

디모데가 이기주의를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증명을 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위에서 소개했던 본회퍼는 어떻습니까? 독일의 나치주의가 극성을 부릴 때 본회퍼를 잘 아는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를 비롯한 미국의 신학자들이 본회퍼를 뉴욕에 있는 유니온 신학교(Union Theological Seminary)의 교수로 초빙했습니다. 그들 생각에 본회퍼를 독일에 그냥 두면 결국 불행한 일이 일어날 것을 예감했기 때문입니다. 본회퍼로서는 정말 좋은 기회를 잡은 것입니다. 그 때가 1939년, 그의 나이 33살 때였습니다. 교수 초빙을 수락하고 독일로 돌아가지 않으면 위기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독일로 돌아가기로 결심합니다. 그 때 그가 라인홀드 니버에게 쓴 편지가 읽는 사람들의 마음에 큰 감동을 줍니다. 그가 쓴 글 속에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의 모습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 편지 글을 한번 보세요. “I have come to the conclusion that I made a mistake to coming to America. I have to live through the difficult period of our national history with the Christians in Germany. I will have no right to assist with the restoration of Christian life after the war in Germany if I do not share the trials of this period with my people(내가 미국에 온 것이 실수였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저는 우리 민족사의 어려운 시기를 내 조국의 기독교인들과 함께 겪어야 합니다. 이 시련의 시간을 내 민족과 함께 나누지 않는다면 나는 전후 독일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회복을 도울 권리가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나를 따르기 위해서는 매일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하고, 주님과 주님의 말씀을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23, 26절). 우리가 사는 세상은 고통과 전쟁과 질병과 가난이 끊이지 않는 세상입니다. 우리는 이 고난을 우리와 상관없다고 외면하지 않아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의 고난에 참여한 것처럼, 우리도 세상의 고난에 참여하고 그 고난을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이것이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주님의 말씀의 뜻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제자직’입니다. 제자의 삶 그 어디에도 이기주의는 설 자리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값싼 은혜(cheap grace)’로 만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시 본회퍼의 말을 들어볼까요? “Cheap grace is grace without discipleship, grace without the cross, grace without Jesus Christ, living and incarnate(값싼 은혜는 제자직이 없는 은혜이고, 십자가 없는 은혜이고, 살아 있고 성육신한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은혜이다).” 

제자의 삶을 살기 위해서 자신을 완전히 희생해야 하기 때문에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오해입니다. 사람의 생각에는 불가능하게 보여도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 ‘밭에 묻힌 보물(마태복음 13:44)’에 대한 비유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밭을 갈다가 땅 속에 많은 보물이 묻혀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 사람은 집으로 돌아와 자기 전 재산을 팔아 그 밭을 샀습니다. 그 밭에 엄청난 보물이 묻혀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제자의 삶’이 꼭 그렇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제자직을 선택한 사람들은 어찌보면 그 전 재산을 팔아 밭을 산 사람처럼 어리석게 보입니다. 주님은 제자직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얼핏 보기에 ‘자기 생명을 잃는 사람들(those who lose their lives)’처럼 보인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자기 생명을 건지는 사람들(those who save their lives)’이라고 하셨습니다(24절). 

여러분이 잘 아는 C.S. 루이스(C.S. Lewis, 1998-1963)가 그의 대표작 ‘Mere Christianity(순전한 기독교, 1952)’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Until you have given up yourself to Him, you will not have a real self(그리스도에게 당신 자신을 온전히 드릴 때까지 당신은 진정한 당신 자신이 될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제자직’을 굉장한 것으로 말할지 모르지만, ‘제자직’은 소수의 사람들만 살 수 있는 특별한 삶이 아닙니다. ‘제자직’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누구나 그렇게 살아야 하는 인간 본래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