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2021 | 성탄절 메시지1

한 아기 때문에 For A CHILD Is BORN To Us

이사야 9:1-7

제이슨 듀크스(Jason C. Dukes)라는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The kind of love that was so intently demonstrated at Christmas is truly amazing and life changing(크리스마스를 통해 보여준 사랑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정말 놀라운 사랑입니다).” 여러분도 이 말에 동의하십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드러났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였던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요한일서 4:10)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우리를 위해 화목제물로 보내 주심으로,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사랑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오늘 이사야서 본문 말씀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BC 700년경의 유대 나라 역사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 때 이사야라는 예언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변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는 웃시야와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그 아들 므낫세까지 무려 다섯명의 왕들이 왕 위에 있었던 혼란한 시기였습니다. 남왕국 유다가 BC 586년에 바빌로니아에게 멸망한 것을 감안한다면 이사야가 예언자로 활동하던 때는 나라의 국운(國運)이 기울어 가던 때였습니다. 시리아와 북 이스라엘이 동맹을 맺고 유다를 침공한 일이 있었고, 히스기야 왕 때에는 아시리아의 산헤립(King Sennacherib)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공격함으로써 유다 왕국의 존폐의 기로에 섰던 때도 있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이사야서에 기록된 내용들은 대체로 암울하고 절망적인 내용들이 많고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경고의 말씀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런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미래에 있을 새로운 세상, 곧 ‘공평과 정의’의 기초 위에 세워질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비전과 희망의 말씀들이 선포됩니다.

오늘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은 6절, “왜냐하면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For a child is born to us)” 이 말씀입니다. Jason C. Dukes라는 분은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나타났다고 했는데요. 정말 ‘한 아기’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세상이 변화하게 됩니다. 보세요. 고통받는 땅에 어둠이 걷히고, 어둠 속에 살던 사람들이 큰 빛을 보게 됩니다. 그 땅에 더 이상 고통이 없고, 더 이상 전쟁이 없는 날이 옵니다. 군인들이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신고 다니던 군화와 피로 얼룩진 군복이 모두 땔감이 되어 불에 사라질 날이 옵니다(5절). 오늘 읽지는 않았습니다만, 이사야 2:4에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나라마다 칼을 부러뜨려서 쟁기로 만들고 창을 낫으로 만들 것이다. 다시는 나라들이 서로 칼을 들지 않으며, 다시는 군사 훈련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사야 2:4) 

하지만,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습니다. 강대한 군사력을 가진 나라는 약한 나라를 침략합니다. 얼마 전에 아시리아 제국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았습니다. 아시리아는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근처에 있는 약소 국가들을 침략하여 영토를 확장했던 고대 제국입니다. 한번 화면을 보십시오. 아시리아의 고대 도시들을 발굴한 현장에서 이런 끔찍한 전쟁 장면의 점토판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지금도 이런 일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고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했습니다. 또 러시아는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는 틈을 노려서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려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습니다. 이렇게 문명이 발달하고, 인간의 지식이 확장된 지금도 강대국들의 야만적인 침략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인간의 야망과 욕망을 멈추게 하고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는 일이 가능할까요?

이사야는 이런 일이 ‘한 아기(a child)’가 탄생하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찬송가 550장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 이 찬송가 가사를 생각했습니다.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 어둡던 이 땅이 밝아오네. 슬픔과 애통이 기쁨이 되니 시온의 영광이 비쳐오네.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 매였던 종들이 돌아오네. 오래 전 선지가 꿈꾸던 복을 만민이 다같이 누리겠네.” 이 찬송가 가사처럼 선지자들이 오랫동안 꿈꾸었던 평화의 시대가, 이사야가 꿈꾸었고, 미가 선지자가 꿈꾸었던(미가 4:3) 평화의 시대가 ‘한 아기’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막강한 힘을 가진 전사(戰士, warrior)가 나타나서 전쟁을 그치게 하는 것이 아니고, 탁월한 책략을 가진 사람이 나타나서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사야 당시에 메시야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전사의 모습으로 올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사야가 백성들에게 선포한 것은 ‘한 아기’의 탄생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여러분,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이 그 사람의 이름과 관계가 있을까요? 저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부모가 아이의 이름을 지어주면서 그런 아이가 되기를 희망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크리스천 부모라면 그 아이가 이름처럼 되기를 바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새벽기도에서 ‘오늘의 양식’을 읽고 있는데요. 12월 7일 오늘의 양식에는 ‘완벽한 이름(The Perfect Name)’이라는 글이 실렸습니다. 어떤 부부가 아이를 낳고 병원에서 퇴원을 해야 하는데, 아이 이름을 어떻게 져야 할지 몰라 고민했다는 것입니다. 처음 며칠 동안은 ‘Baby Williams(베이비 윌리엄스)’라고 부르다가 마지막에는 ‘Micah(마이카)’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는 것입니다. 참고로 ‘Micah’라는 이름에는 “Who is like God(하나님과 같은 사람이 누구냐)?”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 날 말씀을 쓰신 Marvin Williams라는 분은 하나님께서 지어 주신 완벽한 이름이 있다고 하면서 이사야 7:10에 나오는 말씀을 소개했습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인데,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The virgin will conceive a child! She will give birth to a son and will call him Immanuel).” 여러분, 아시지요? 예수님의 제자 마태는 마리아와 요셉 사이에서 난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말씀을 기록하면서 이사야서에 나오는 말씀을 인용합니다(마태복음 1:23). 즉 마태는 이사야가 예언했던 그 ‘한 아기’가 바로 예수님이라고 기록한 것입니다. 마태는 ‘임마누엘’이란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라고 친절한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정말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은 예수님께 딱 맞는 완벽한 이름 아닙니까? 바울은 예수님에 대하여 이렇게 썼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똑같이 높은 분이셨지만, 결코 높은 자리에 있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높은 자리를 버리시고, 낮은 곳으로 임하셨습니다.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시고 종과 같이 겸손한 모습을 취하셨습니다. 이 땅에 계신 동안 스스로 낮은 자가 되시며, 하나님께 순종하셨습니다.” (빌립보서 2:6-8)

정말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랑받지 못한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비난했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가리켜 ‘죄인들의 친구(a friend of sinners, 마태복음 11:19)’라고 했습니다. 비록 예수님을 비난하는 말이었지만 틀린 말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 주시면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마태복음 28:20). 

지난 주 설교에서 말씀드렸던 요한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는 정말 성경을 사랑했고 사람의 영혼을 귀하게 여긴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50년 동안 말을 타고 다니면서 전도했던 총 길이가 290,000 마일이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지구를 열 바퀴 도는 거리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가 저술한 책은 모두 200권이 넘는다고 합니다. 화면을 한번 보시지요. 요한 웨슬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마지막 남긴 말은 “The best of it is, God is with us(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만 있다면 무엇이 두렵고,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정말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만 있으면 자신 있게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또 하나, 예수님에게 주어진 이름 중에 ‘평화의 왕’이라는 이름도 예수님께 정말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태복음 14:27, 요한복음 6:20) “내가 너희에게 평화를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마라(I am leaving you with a gift-peace of mind and heart. And the peace I give is a gift the world cannot give. So don't be troubled or afraid).” (요한복음 14:27)  

‘평화의 왕’을 영어로 ‘Prince of peace’라고 합니다. 히브리 말로 ‘Sar-shalom(살 살롬)’라고 합니다. ‘살롬’은 평화라는 뜻이고요. ‘살(sar)’은 다른 사람들과 질적으로 다른 리더(leader)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살-살롬’이라고 말할 때는 예수님께서 진정으로 하나님의 평화를 줄 수 있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살롬을 위협하고, 살롬을 방해하는 모든 요소들을 제거해 주시고 하나님의 살롬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살롬을 원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Sar-shalom’이신 예수님께 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던 1914년 12월 24일, 독일 서부 전선 플뢰르베(Fleurbaix) 벌판에서 영국군과 프랑스 연합군은 독일군과 맞서 서로 참호를 파고 교전(交戰) 하고 있었습니다.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에 영국군 병사들은 적진에서 들려오는 전혀 예상치 않았던 노래 소리를 들었습니다. 100m 전방에 마주 대하고 있는 독일군 참호에서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찬송가가 들려온 것입니다. 노래가 끝나자 독일군 병사들이 영국군에게 이렇게 답했습니다. “Merry Christmas, Englishmen! We not shoot, you not shoot(메리 크리스마스, 영국인들! 우리는 쏘지 않겠다. 너희도 쏘지 마라).” 

그 동안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눴던 영국군과 프랑스 연합군, 독일군은 다음 날인 크리스마스에 총을 내려놓고 휴전하기로 결정합니다. 이들은 마치 동네 친구들처럼 서로 담소를 즐기고, 술잔을 돌리고, 생활 필수품들을 나누었습니다. 크리스마스에 시작된 이 플뢰르베 벌판의 휴전 소식은 서부전선 곳곳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심지어 어느 전선에서는 서로 축구경기를 했다는 소문까지 났습니다. 비록 이 이야기는 우리가 기대하는 것처럼 해피 엔딩으로 끝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이 벌이는 가장 잔혹한 전쟁까지도 멈추게 할 수 있다는 위대한 메시지를 들을 수 있습니다.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는 크리스마스 휴전 이야기는 후에 ‘크리스마스 휴전, 큰 전쟁을 멈춘 작은 평화(2005)’라는 책으로 발간되었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에 이 책의 내용을 바탕으로 ‘메리 크리스마스(Joyeux Noel)’라는 영화가 나왔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처한 현실은 절망적이고, 암담하기만 합니다. 벌써 2년째 팬데믹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여전히 인류에게는 전쟁의 위협이 있고, 질병의 위협이 있고, 경제적인 위협, 헐벗음과 굶주림의 위협이 남아 있습니다. 여전히 인류에게는 경제적인 불평등의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절망 속에서도 ‘한 아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 날’이 온다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아야 합니다. 어쩌면 이사야도 오늘 우리와 똑 같은 심정이었는지 이렇게 말합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리라(The passionate commitment of the Lord of Heaven’s Armies will make this happen)” (7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땅에 새 날이 오게 하는 일을 하나님께서 열심히 추진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 일은 하나님께서 추진하시는 일임으로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12/5/2021 | 시편 119편(III)

가치 있는 삶의 비결 The Secret To A Worthwhile Life

시편 119:33-48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 영국)라는 목사님이 있습니다. 이 분은 정말 성경을 사랑했던 분입니다. 옥스포드 대학에 다닐 때부터 ‘홀리 클럽(Holy Club)’을 만들어서 친구들과 함께 경건생활에 힘썼습니다. 새벽 네 시가 되면 어김없이 일어나 성경을 읽었다고 합니다. 그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My ground is the Bible, Yea, I am a Bible-bigot. I follow it in all things, both great and small(나의 근거는 성경입니다. 예, 나는 성경만 고집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큰 일이나 작은 일이나 모든 일에 성경을 따릅니다).” Wesley는 ‘Bible-bigot’이라는 말 대신 ‘Bible-moth(성경 벌레)’라는 말도 썼습니다. 옥스포드 시절 Wesley의 별명이 ‘성경 벌레’였다고 합니다.

그가 또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한번 화면을 보시지요. “I want to know one thing, the way to heaven-- how to land safe on that happy shore. God himself has condescended to teach the way: for this very end he came from heaven. He hath written it down in a book. O give me that book! At any price give me the Book of God! I have it! Here is knowledge enough for me. Let me be homo unius libri(나는 천국에 이르는 길을, 천국의 해안에 안전하게 도착하는 법을 알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친히 이 길을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 천국에서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길을 한 책에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오, 나에게 그 책을 주십시오. 어떤 대가를 치러도 좋으니 그 하나님의 책을 주십시오! 나는 그 책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책 속에 충분한 지식이 있습니다. 나로 하여금 한 책의 사람이 되게 하소서).” ‘homo unius libri’는 라틴어로 ‘한 책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모두 ‘한 책의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성경이 여러분의 근거(ground)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 사람이 왜 저런 말을 하지?” “아하,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었구나!” “저 사람이 왜 저런 행동을 하지?” “아하,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었구나!” 큰 일이나 작은 일이나, 중요한 일이나 사소한 일이나, 모든 일에 성경이 판단의 근거(根據)가 되고, 성경이 결정의 이유(理由)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제발 이런 말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성경에 그런 말씀이 있지만, 어떻게 우리가 그 말 대로 할 수 있겠어요?” 

오늘 시편 119편 본문 말씀에서 세 가지 여러분과 함께 나눌 말씀이 있습니다. 첫째로, 34-35절 말씀입니다. “나에게 깨달음을 주소서. 내가 주의 법을 지킬 것입니다. 내가 마음을 다하여 주의 법에 순종할 것입니다. 내가 주께서 명령하신 길로 가기를 원합니다. 이는 내가 그 길에서 기쁨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깨달음’이라는 말은 ‘understanding’ 혹은 ‘perception’이라는 뜻입니다. 이 시편의 저자는 왜 하나님께 ‘깨달음’을 달라고 간구하고 있을까요? 전 주에도 똑 같은 말씀이 나왔습니다. “나의 눈을 열어 주셔서 내가 볼 수 있게 하소서. 주의 법 안에 있는 놀라운 진리를 깨닫게 해 주소서.” (18절) 이 시편 저자는 왜 깨달음을 달라고 할까요? 왜 눈을 열어 달라고 할까요? 진리를 말씀을 깨닫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공부를 열심히 합니다. 웬만한 크리스천들에게는 적어도 한 두 권씩 과거에 했던 성경공부 교재가 있습니다. 그 성경공부를 하면서 많이 배웠고, 모르는 것들을 많이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이 지식으로 끝나버린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것을 ‘지적유희(知的遊戱)’라고 합니다. 아는 것으로, 지식을 갖는 것으로 만족(滿足)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시편 119편의 저자는 ‘지적유희’를 목적으로 깨달음을 달라고 간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Give me understand¬ing and I will obey your instructions; I will put them into practice with all my heart. Make me walk along the path of your commands”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눈을 열어 주시고 진리의 말씀을 깨닫게 해 주시면 그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 말씀을 실천으로 옮겨 그 말씀을 따라 살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여자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을 낳은 어머니는 참 복이 많으신 분입니다.” 이 말을 들은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신 줄 압니까? “But even more blessed are all who hear the word of God and put it into practice(그러나 더 복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이다).” (누가복음 11:28) 성경에는 이렇게 행복한 삶의 비결(秘訣)이 나와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행복의 비결과 다릅니다. 어느 말이 맞을까요? 성경에서 말하는 행복의 비결이 맞을까요? 아니면,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맞을까요?

둘째로, 36-37절 말씀입니다. “나의 마음이 주의 법규들로 향하게 하시고, 이기적인 이익들로 향하지 않게 해 주소서. 내가 무가치한 것들에게서 눈을 떼게 해 주시고, 주의 말씀으로 나를 보호해 주소서.” ‘이기적인 이익’이라는 말을 NLT 성경에는 ‘a love for money’라고 번역했습니다. NIV 성경에는 ‘selfish gain’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나오는 ‘무가치한 것들’은 ‘worthless things’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참 불행한 것은 우리 마음이 끊임없이 ‘이기적인 이익’을 향하고 있고, 우리 눈이 끊임없이 ‘무가치한 일들’을 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무 가치 없는 일이라는 것을 모르고, 이것이 나의 이기적인 이익을 구하는 일인지 모르고 그것을 얻기 위해 모든 힘과 정력을 쏟습니다. 한참 지나고 나서야 이것이 아무 소용없는 일이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 일들이 아무 가치 없는 일이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전도서를 쓴 솔로몬이 그랬습니다.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Meaningless! Meaningless! Utterly meaningless! Eve-rything is meaningless!)” (전도서 1:2) 지금 우리가 가치 있는 삶에 눈을 돌리지 않으면 틀림없이 우리 입에서도 이런 후회의 말들이 나올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보세요.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가복음 10:45) 이 말씀에서 여러분의 마음에 와 닿는 말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제가 이렇게 질문하는 이유는 ‘많은 사람’이라는 말을 주목해서 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가치 있는 삶을 살았던 사람들을 보면 모두 자기 자신에게 눈을 돌리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돌렸습니다. 공부 많이 해서 학위 받고, 결혼하고, 좋은 집 장만하고, 이것이 많은 사람들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성공적인 삶의 방식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살아서는 절대로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selfish gain(이기적인 이익)’은 얻을 수 있을지 몰라요. 자기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한 삶을 생각하고 살아갈 때 우리는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시편 119편의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마음이 주의 법규들을 향하게 하시고(Turn my heart toward your statutes, NIV)” 내 마음이 하나님의 법규들을 바라보고 살아갈 때 나는 더 이상 ‘이기적인 이익’을 생각하지 않게 되고, 내가 하나님의 법을 열심히 사모하는 이상 나는 ‘쓸데없는 무가치한 일들’을 생각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는 훈련이 된 사람들은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아산사회복지재단’에서 해마다 소외된 이웃을 위해 봉사와 나눔, 효행을 실천하여 사회의 귀감이 된 분들을 표창합니다. 총 다섯 개 부문에서 수상자를 결정합니다. 그런데, 이번 2021년 사회봉사 부문에서 권순영 장로님이 선정되었습니다. 권순영 장로님은 여러 번 ReNEW 세미나 강사로 오셨던 분입니다. 올해도 세미나를 두 번이나 인도하셨습니다. 

권순영 장로님은 유명한 식품회사 네슬리(Nestlé Nutrition)에서 수석 연구원을 지낸 분입니다. 그런데, 이런 분이 무슨 이유로 아프가니스탄의 식량 문제를 해결하려고 뛰어들었을까요? 오랜 내전(內戰)으로 치안이 불안한 그 나라에 말입니다. 2002년에 이 장로님이 우연히 아프가니스탄의 뉴스를 듣게 됩니다. 탈레반 정권이 무너지면서 수많은 부녀자들과 어린 아이들이 영양실조로 죽어간다는 뉴스였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가 어린 아이들의 사망률이 세계에서 최고로 높다는 뉴스를 듣고 충격을 받습니다. 네슬리에서 의료영양식품 개발 디렉터로 일하고 있던 권순영 장로님은 그 뉴스를 듣고 이 사람들을 위해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강한 소명의식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을 방문합니다. 거기서 ‘희망의 콩 프로젝트’를 생각하게 됩니다. 아프가니스탄에 가장 값싼 방법으로 단백질을 공급할 수 있는 콩을 재배해서 이들의 영양실조 문제를 해결해보자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일에 완전히 뛰어들게 됩니다. 지금은 아프가니스탄 34개 주 전체에 콩을 재배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연히 아프가니스탄 뉴스를 듣고 그들을 향한 마음을 품게 되면서, 지금까지 20년 가까이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을 위해 일하고 있습니다. 안전한 직장, 어려움이 없는 삶을 살다가 자기 자신만 바라보는 ‘selfish gain’을 위해 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에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한 삶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전에 알지 못했던 더 큰 보람과 행복을 발견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살았던 삶의 방식이고, 우리 모두가 살아야 하는 삶의 방식입니다. 

셋째로, 45절 말씀입니다. “내가 자유롭게 걸어 다닐 것입니다. 이는 내가 주의 교훈들을 따랐기 때문입니다(I will walk in freedom, for I have devoted myself to your commandments).” 이 말씀에서 자유롭게 걸어 다닌다는 말은 자유함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 시편 저자는 자유함은 하나님의 ‘교훈’을 따른 결과라고 합니다. 우리 생각하고 많이 다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되면 여러가지가 불편하고 자유롭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시편 119편을 쓴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다 보니 내가 자유롭게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여러분,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You are truly my disciples if you remain faithful to my teachings. And you will know the truth, and the truth will set you free).” (요한복음 8:31-32) 이 예수님의 말씀 속에 자유함과 말씀 안에 거하는 삶이 연결되어 있지 않습니까? 왜 그럴까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당연히 그렇게 살아야 하는 삶의 방식입니다. 인간이 마땅히 가야 할 길을 발견하고 그 길을 따라 살아갈 때 기쁨이 있고, 감사가 있고, 자유함이 있습니다.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 독일)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If we answer the call to discipleship, where will it lead us? What decisions and partings will it demand? To answer this question, we shall have to go to him, for only he knows the answer. Only Jesus Christ, who bids us follow him, knows the journey’s end. But we do know that it will be a road of boundless mercy. Discipleship means joy(그리고 우리가 제자가 되라는 부름에 응답한다면, 그 부름은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는 것일까요? 또 그것은 어떤 결정과 이별을 요구할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그에게 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오직 그 분만이 답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그를 따르라고 명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 여정의 끝을 알고 계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무한한 자비의 길이라는 것을 압니다. 제자도는 기쁨을 의미합니다).” 제자도는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크리스천이라면 당연히 누구나 그 길을 걸어야 하는 길입니다. 우리가 마땅히 걸어야 할 길을 걸어갈 때 우리는 그 길에서 기쁨과 자유함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간의 행복과 불행, 성공과 실패가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달려 있습니다. 맞습니까? 그 말씀을 존중하고, 그 말씀을 사랑하고, 그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은 가치 있는 삶을 살게 되고, 자유함을 누리게 됩니다. 이런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고, 이런 사람이 성공한 사람 아닙니까? 부디 하나님의 말씀을 지적유희의 대상으로 삼지 말고, 사랑과 순종과 실천의 대상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모두 함께 36-37절 말씀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나의 마음이 주의 법규들을 향하게 하시고, 이기적인 이익들로 향하지 않게 해 주소서. 내가 무가치한 것들에게서 눈을 떼게 해 주시고, 주의 말씀으로 나를 보호해 주소서.”


11/28/2021 | 시편 119편(II)

하나님이 다 하셨습니다! The Lord Did Everything!

시편 119:17-32

시편 119편에는 거의 매절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단어가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도 똑 같은 단어를 쓰지 않고 서로 다른 다양한 단어들을 사용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뜻하는 여러 단어들이 등장합니다. 예를 들면, ‘말씀(word, 17, 25, 28절)’ ‘법(instruction, 18, 29절)’ ‘계명(commands, 19절)’ ‘규례(regulations, 20절)’ ‘명령(commands, 21, 32절)’ ‘법규(laws, 22, 24, 31절)’ ‘법령(decrees, 23, 26절)’ ‘교훈(teachings, 27절)’ ‘법도(regulations, 30절)’ 이런 다양한 말들이 등장합니다.

이렇게 다양한 단어들을 사용하는 저자의 의도(意圖)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자신의 풍부한 어휘력을 자랑하려고 한 것일까요? 저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만큼 우리 실생활 속에 깊이 들어와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 저자의 의도가 들어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율법’이라는 한 단어만 사용했다면 아마도 독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준엄한 것으로 생각하고 친근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시편 119편의 저자는 이런 것까지 감안해서 어떤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교훈으로, 어떤 때는 법으로, 어떤 때는 세밀한 안내서와 같은 instruction으로, 어떤 때는 규칙과 같은 regulations로, 어떤 때는 왕의 조서(詔書)를 뜻하는 decrees로, 적재적소(適材適所)에 조금씩 뉘앙스가 다른 말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시편 119편의 저자는 풍부한 상상력(想像力)과 어휘(語彙) 사용의 달인(達人)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자는 “나의 눈을 열어 주셔서 주의 법 안에 있는 놀라운 진리를 깨닫게 해 주소서(18절)”라고 간구합니다. 이 말을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시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 속에 들어 있는 진리를 깨달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눈(eyes)’은 우리의 이해력(理解力)을 가리킵니다. 좀 더 전문적인 말로 한다면 ‘perception’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이해력은 매우 제한되어 있어서 깨달을 수 있는 것이 한정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명기 8:3) 우리의 지식과 경험은 주로 눈에 보이는 세계에 한정(限定)되어 있습니다. 조금만 생에 대한 통찰력이 있는 사람들은 물질 세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無知) 정도로 잘 모릅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실험할 수도 없고, 증명하기도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이 진리를 깨닫게 하시려고 사십 년 동안 매일 ‘만나(manna)’를 먹게 하셨습니다. ‘만나’는 매일 새벽마다 하늘에서 내렸습니다. 내가 일하고 돈 벌어서 내 노력으로 사는 방식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것들이 있는데, 이것들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마음으로 생각할 수도 없는 것들이다(No eye has seen, no ear has heard, and no mind has imagined what God has prepared for those who love him, 고린도전서 2:9)”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런 것들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깨달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지금 시편 119편의 저자가 하나님께 “나의 눈을 열어 달라”고 간구하는 것은 눈의 시력(視力)을 좋게 해 달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놀라운 은혜의 일들을 깨닫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 들어 있는 진리를 깨닫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글자로 쓰여 있는 문자적인 의미를 넘어서 그 말씀 속에 들어 있는 영적인 진리를 깨닫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저자는 이 말을 다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I will pursue your commands, for you expand my understanding(나는 주님의 계명을 따르겠습니다. 주께서 나의 이해력을 넓혀 주시기 때문입니다).” (32절) 

이 시편 119편의 저자의 간구가 오늘 우리들의 간구가 되어야 합니다. 예전에 어떤 분이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전 예배에 나오긴 하는데 목사님의 말씀이 무슨 말인지 통 모르겠어요.” 그러더니 또 한 참 지나서 또 그분이 “이제 조금씩 목사님의 말씀이 들리는 것 같아요” 이렇게 말씀한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차츰 들리기 시작하는 것, 이것이 바로 눈이 열리는 경험입니다. 여러분, 바울이 에베소 교회 교인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그들의 눈이 열리게 해 달라고 기도한 것을 알고 계신가요? “항상 기도 가운데 여러분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여러분에게 주셔서 하나님을 더 잘 알게 하시며, 여러분의 마음을 밝혀 우리에게 주시려고 예비해 두신 것을 깨닫도록 기도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에게 약속하신 복이 얼마나 풍성하고 놀라운지 깨닫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I pray also that the eyes of your heart may be enlightened in order that you may know the hope to which he has called you, the riches of his glorious inheritance in the saints).” (에베소서 1:16-18, NIV). 이 기도를 배워서 오늘 우리도 이 기도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우리 눈을 열어 달라고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 속에 감춰 있는 진리를 깨닫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로, 나누고 싶은 말씀은 24절 말씀입니다. “주의 법규들은 나의 기쁨입니다. 그것들은 나의 조언자들입니다(Your laws please me; they give me wise advice).” 다른 번역 성경에서는 ‘laws’를 ‘statutes’ 혹은 ‘decrees’로 번역했습니다. ‘법령(法令)’이라는 뜻입니다. 왕이 백성들에게 내리는 조서(詔書)가 ‘법령’입니다. 왕의 명령이니까 백성들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새벽기도에서 ‘오늘의 양식’을 읽고 있습니다. 내일 읽을 ‘오늘의 양식’은 다니엘서에 있는 말씀입니다. 다니엘이 바빌로니아 왕 느부갓네살의 꿈을 멋지게 해석했습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다니엘은 높은 지위를 얻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다니엘의 세 친구까지 지방의 관리로 임명됩니다. 그리고, 느부갓네살은 금으로 자기 신상(神像)을 만들죠. 높이가 27m, 폭이 2.7m의 엄청난 크기의 신상입니다. 전령이 왕의 법령을 선포합니다. “모든 나라와 민족들아, 왕의 명령을 전한다.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온갖 악기 소리가 나면 모두 엎드려 느부갓네살 왕이 세우신 황금 신상에 절해야 한다. 누구든지 엎드려 절하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즉시 불타는 용광로 속에 던져 넣을 것이다.” (다니엘 3:4-6) 악기 소리가 들리면 모두 엎드려 왕의 신상을 향해 절해야 합니다. 그러니, 언제 악기 소리가 들릴지 몰라 백성들은 불안합니다. 그 때 절하지 않는 사람은 뜨거운 용광로 속에 던져집니다. 그러니, 왕의 조서를 들은 백성들이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시편 119편의 저자가 24절에서 사용하고 있는 ‘법규(法規)’라는 말은 정확하게 ‘법령(decrees)’이라는 말입니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법령’이라고 하면서 이 하나님의 ‘법령’이 나를 기쁘게 한다고 합니다. 이 시편 저자에게 하나님의 ‘법령’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기쁨의 대상입니다. 그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They give me wise advise(그 법령들이 나에게 지혜로운 충고를 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법령’ 나에게 지혜를 주고, 나를 바른 길로 인도해 준다고 합니다. 그래서 시편 저자는 나는 하나님의 ‘법령’을 기뻐한다고 합니다.

바빌로니아 왕 느부갓네살이 내린 ‘법령’은 백성들을 두려움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왕의 신상이 만들어지고 그런 무서운 법령이 선포된 것을 보면, 다니엘과 그 세 친구들을 제거하려는 음모가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신상에게 절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왕에게 이런 ‘법령’을 선포하게 한 것입니다. 느부갓네살이 내린 ‘법령’ 속에는 사람의 생명을 빼앗으려는 무서운 음모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법령’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선포됩니다. 하나님의 ‘법령’은 그것을 지키는 사람에게 ‘지혜로운 충고’를 줍니다. 우리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하고, 혼란스러울 때, 우리가 바라는 것이 ‘wise advise(지혜로운 충고)’ 아닙니까?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그대는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는데, 이 성경은 그대를 지혜롭게 하여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을 통해 구원을 얻게 하였습니다. 모든 성경 말씀은 하나님께서 감동을 주셔서 기록되었기 때문에 진리를 가르쳐 주며, 삶 가운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게 해 줍니다. 또한 그 잘못을 바르게 잡아 주고 의롭게 사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자로 준비하게 되고, 모든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게 됩니다.” (디모데후서 3:15-17) 성경이 우리를 지혜롭게 만든다고 하지 않습니까? 성경을 통해서 내 삶 가운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게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준비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성경을 사용하셔서 ‘to prepare and equip his people’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정말 이 말씀이 사실이라면 시편 119편의 저자가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기쁨을 줍니까?

마지막으로, 나눌 말씀은 25절 말씀입니다. “내가 먼지를 뒤집어쓰고 앉아 있습니다. 주의 말씀으로 나의 영혼을 새롭게 하소서(I lie in the dust; revive me by your word).” 또 28절에도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나의 영혼이 슬픔으로 지쳐 있습니다. 주의 말씀으로 나에게 힘을 주소서(I weep with sorrow; encourage me by your word).” 25절 말씀을 Contemporary English Version에서는 이렇게 번역했네요. “I am at the point of death. Let your teachings breathe new life into me(내가 죽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주의 교훈으로 나에게 새 생명을 불어넣어 주십시오).” 

내가 먼지를 뒤집어쓰고 앉아 있다든지, 내가 슬픔에 지쳐 있다든지, 이런 말씀들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주님도 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마태복음 26:3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히브리서에는 “우리 주님도 하나님께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리셨다(히브리서 5:7)”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연약함을 다 아시고 경험하신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고, 우리를 도우실 수 있다고 합니다. (히브리서 5:9, 4:15). 여러분은 어렵고 힘든 상황을 어떻게 이겨내시나요? 술로 밤을 지새우나요? 아니면, 그냥 만신창이가 되도록 자신을 내버려 둡니까? 시편 119편의 저자처럼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에게 힘을 부어 달라고 간구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를 일으켜 달라고 간구하십시오. 지친 내 영혼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새롭게 refresh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시편 30편은 다윗이 쓴 시편인데요. 다윗은 그 시편에 이렇게 썼습니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Weeping may last for the night, But a shout of joy [comes] in the morning, NASB, 5절).” 아무리 깜깜한 절망 속에서도 밤은 지나가고 새벽이 찾아옵니다. 다윗은 아침이 기쁨의 소리를 지르면서 찾아온다고 했습니다. 일찍이 다윗은 아침에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이렇게 찬양한 적이 있습니다. “It is good to proclaim your unfailing love in the morning, your faithfulness at night(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알리고 밤에는 주의 성실하심을 알리는 것보다 더 행복한 일이 있을까요)?” (시편 92:2) 지혜로운 사람은 압니다. 내 마음이 상하고 아플 때 새벽에 하나님께 나와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God’s unfailing love)’으로 치유를 받습니다. 고침을 받고 온전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특권(特權)입니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 독일)는 당시 타락한 교회를 원래의 자리로 돌려 놓은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화면을 한번 보시지요. “Take myself as an example. I opposed indulgences and all the papists, but never with force. I simply taught, preached, and wrote God’s Word; otherwise I did nothing. And while I slept, or drank Wittenberg beer with my friends, the Word so greatly weakened the papacy that no prince or emperor ever inflicted such losses upon it. I did nothing; the Word did everything(나는 면죄부와 모든 교황권에 반대했지만 결코 강력하게 반대하지는 않았습니다. 나는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고, 설교했고, 글을 썼을 뿐입니다. 그 외 나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말씀이 교황권을 약화시켜 어떤 왕자나 황제도 그런 피해를 입힌 적이 없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말씀이 모든 것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들은 어떤 힘든 상황에서도 새벽에 환호성을 지르며 찾아오는 기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도 똑 같은 고백을 하게 됩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말씀이 다 하셨습니다”라고요. 내 눈을 열어 진리를 깨닫게 한 것도, 지혜로운 충고로 나에게 기쁨을 준 것도 준 것도, 또 지친 내 영혼에 새 힘을 부어 준 것도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 하셨습니다. 


11/21/2021 | 추수감사절 메시지

하나님을 잊고 사는 사람들 Those Who Are Forgetting God

시편 50:22-23

세월이 어찌나 빨리 가는지 어느덧 추수감사절을 맞이했습니다. 팬데믹 시대에 맞는 추수감사절, 좀 특별한 의미가 느껴지지 않습니까? 감사의 이유도 더 많을 것 같고요. 그런데, 우리가 살다 보면 감사할 때보다는 불평할 때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멕시코의 어느 마을에 온천과 냉천이 옆에서 가지런히 솟아나는 신기한 곳이 있다고 합니다. 한쪽에서는 부글부글 끊는 온천이 땅에서 솟아오르고, 바로 그 옆에는 얼음 물과 같이 차가운 냉천이 솟아오른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동네 여자들이 빨랫감 가지고 와서 온천에서 빨래를 삶고, 냉천에서 헹군다고 합니다. 그 모습을 본 한 외국 관광객이 안내자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이곳 부인들은 찬물과 더운 물을 마음대로 쓸 수 있으니 참 좋겠습니다. 이곳 사람들에게는 감사하는 마음이 많겠군요?” 그랬더니 멕시코 안내원의 “천만에요. 불평이 더 많답니다. 비누가 나오지 않는다고 불평한답니다.”

감사에 대한 이야기 하나 더 할까요? 일곱 살 난 아이를 데리고 이웃집에 놀러간 어떤 엄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 집의 아줌마가 이 아이에게 사과를 하나 주었는데 아이는 감사하다는 인사도 없이 얼른 받았습니다. “얘야!” 엄마가 이 아이를 불렀습니다. “어른이 사과를 주면 뭐라고 말해야 되지?” 아이는 잠깐 생각하더니 “아줌마, 사과 깎아 주세요”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감사를 모르는 이 아이처럼, 오늘 우리도 다른 사람의 호의에 대하여 감사를 모르고 살고 있지 않는지, 우리 자신들을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시편 50편은 아삽(Asaph)이라는 사람이 쓴 시편입니다. 아삽이 쓴 시편은 모두 열 두 편입니다. 시편의 많은 부분을 다윗이 썼는데요. 성서학자들은 다윗이 쓴 시편은 모두 일흔 세 편이라고 합니다. 아삽이 쓴 시편들은 모두 상당한 문제 의식을 가지고 쓴 시편들입니다. 예를 들면 시편 73편은 “왜 악한 사람이 떵떵거리며 부자로 사는가?” 이런 문제를 가지고 쓴 시편입니다. 시편 77편은 “아직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가?” 이런 문제를 다룬 시편입니다. 시편 79편은 “어떻게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힐 수 있는가?” 이런 문제를 다룬 시편입니다. 아삽은 레위지파 사람으로, 성가대 대장으로 일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제금(提金) 연주에 일가견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역대상 16:4-5). 제금은 오늘날 심벌즈(cymbals)’입니다. 그리고 아삽은 ‘선견자(the seer, 역대하 29:30)’라고 불릴 만큼 영적인 통찰력과 지식을 가진 사람으로 다윗이 옆에 두고 썼던 그 시대의 인재였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하나님을 잊은 너희여(You who forget God)”라는 말이 나옵니다. 도대체 그 시대가 가지고 있는 문제들이 무엇이길래 아삽은 이런 시편을 쓰게 되었을까요? 아삽은 그 시대의 예배에 대하여 고민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삽의 눈에 비친 예배는 형식화된 예배였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예배자들의 마음에 감사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삽은 예배의 핵심을 하나님께 대한 감사라고 보았습니다. 감사 없이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감사가 없는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아삽은 습관적으로 반복되는 예배, 습관적으로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에 대한 문제점을 가지고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고 했습니다.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신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아삽이 말하는 올바른 행위는 감사입니다.

아삽은 형식적인 예배에 대해 무서운 경고를 합니다. “지금 이 문제를 고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너희를 찢으실 것이다”라고 경고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행위는 감사의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감사의 마음을 잃어버리면 형식적인 예배가 되고 맙니다. 어떤 경우에는 마음 속에 분노를 가지고 교회 일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분노를 가지고 교회 일을 하는 것보다는 교회 일을 잠시 쉬는 것이 좋을지도 모릅니다. 분노를 가지고 직분을 감당하기 보다는 그 직분에서 잠시 물러나 있는 것이 좋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행위는 감사의 마음으로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감사의 마음 없이 하나님을 예배하게 되면 결국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땅으로 여러분을 인도하시고 그 땅을 여러분에게 주실 것이오. 그 땅에는 여러분이 짓지 않은 크고 훌륭한 성들이 있소. 또 여러분이 채워 놓지 않은 훌륭한 물건들로 가득 찬 집들이 있고, 여러분이 파지 않은 우물들이 있으며, 여러분이 심지 않은 포도밭과 올리브 나무들이 있소. 여러분은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먹을 것이오. 그 때에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했던 여러분을 인도해 내신 분이 하나님임을 잊지 않도록 조심하시오. 하나님 존경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시오(When you eat and are full, then take care lest you forget the LORD, who brought you out of the land of Egypt, out of the house of slavery).” (신명기 6:10-13) 

여러분, 성경에 왜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지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왜 하나님은 약속의 땅에 그들이 짓지도 않은 성을 주시고, 온갖 값진 물건들도 가득 찬 집을 주시고, 그들이 파지도 않은 우물들을 준비해주셨을까요? 우리는 이 말씀을 읽을 때 ‘그들이 하나님을 잊지 않게 하려고(lest you forget the Lord)’라는 말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 말씀을 반대로 읽어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갔는데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온갖 고생을 하면서 성을 건축했고, 집을 짓고, 고생고생해서 우물을 파서 물을 얻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들은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 내가 노력해서 얻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기 힘으로 무엇을 성취하고, 자기 힘으로 무엇을 얻었을 때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의 힘과 능력에 도취한 사람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을 잊어버립니다. 바빌로니아의 왕 느부갓네살(Nebukadnessar)의 불행을 기억하시지요? 느부갓네살 왕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와서 유다 왕국을 포위하고 무너뜨린 장본인입니다. 예루살렘 성을 18개월 간 포위했다고 합니다. 느부갓네살은 유다 왕국을 정복했을 뿐만 아니라 이집트를 공격하여 영토를 늘리고, 시리아, 모압, 암몬 등을 공격하여 영토를 늘리고, 포로들을 시켜 대대적으로 토목 공사를 했던, 막강한 힘을 가진 왕이었습니다. 이 느부갓네살이 어느 날, 왕궁의 옥상에 올라가 바빌론 시내를 보면서 자신이 이룬 업적에 감탄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위대한 바빌로니아 제국! 내가 내 힘과 권력으로 이 모든 것을 세우지 않았는가? 내 영광을 위해 세운 것이 아닌가(By my own mighty power, I have built this beautiful city as my royal residence to display my majestic splendor)?” (다니엘 4:30) 이렇게 자만했던 느부갓네살은 어느 날 왕위에서 쫓겨나고, 정신병에 걸려 비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감사는 자신의 힘과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는 사람의 입에서 나옵니다. 이런 말씀들을 그냥 흘려듣지 말고 깊이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성공한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높은 지위에 있거나, 권력을 가진 사람들을 부러워합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그만큼 교만해질 수 있는 가능성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맞습니까? 우리 힘이 약하고, 되는 일이 없는 것도 괜찮아요. 자기 힘이 약할 때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게 되거든요? 

한국으로 귀국한 정은혜 자매가 이런 기도를 페이스북에 올렸더라고요. 이 기도에 이런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A Prayer By An American Confederate Soldier Seriously Disabled In The Civil War(남북 전쟁에서 심하게 부상을 입은 한 남부 군인의 기도)’ “나는 하나님께 나를 강하게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원하는 모든 걸 이룰 수 있도록, 하지만 하나님은 나를 약하게 만들었다. 겸손해지는 법을 배울 수 있도록 / 나는 하나님께 건강을 부탁했다. 더 큰일을 할 수 있도록, 하지만 하나님은 나에게 허약함을 주셨다. 더 의미있는 일을 할 수 있도록 / 나는 부자가 되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행복해질 수 있도록, 하지만 나는 가난을 선물 받았다.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도록 / 나는 재능을 달라고 부탁했다. 사람들의 찬사를 받을 수 있도록, 하지만 나는 열등감을 선물 받았다. 하나님의 필요성을 느낄 수 있도록 / 나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부탁했다.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하지만 하나님은 나에게 생명을 선물해주었다.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 나는 내가 부탁한 것을 하나도 받지 못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나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선물로 주셨다. 나는 그럴 자격이 없는 사람인데도 하나님은 내 무언(無言)의 기도를 다 들어주셨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축복받은 사람이다(I got nothing that I asked for-- but everything I had hoped for. Almost despite myself, my unspoken prayers were answered. I am, among all men, most richly blessed).”

마지막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또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이사야가 너희와 같은 위선자들에 대하여 한 말이 맞다. ‘이 백성들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마음은 내게서 멀구나. 헛되이 내게 예배를 드리고, 사람의 훈계를 교리인 양 가르친다(These people honor me with their lips, but their hearts are far from me. Their worship is a farce, for they teach man-made ideas as commands from God).’ 너희는 하나님의 계명은 무시하고 사람의 전통만 지키는구나.” (마가복음 7:6-8) 인간이 만든 생각(man-made ide-as), 아이디어, 지혜, 교훈 이런 것들을 마치 하나님의 것인 것처럼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아주 조심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이런 일을 합니까? 거짓 예언자들이 그런 일을 합니다. 하나님이 그런 말씀을 주시지 않았는데도 마치 하나님께 받은 말씀인 것처럼 자기들의 말을 가지고 사람들을 속이는 것입니다(에스겔 13:1-8). 율법주의자들이 그런 일을 합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세밀하게 지키려고 매뉴얼을 만듭니다. 세부 규정과 규칙을 만듭니다. 그리고 이 규정을 어기는 것은 곧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이 그런 일을 했습니다. 또 인본주의자들(humanists)이 그런 일을 합니다. 이 사람들은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 없이도 얼마든지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화면을 한번 보세요. “One of satan’s greatest lies is that if we apply enough human effort, wisdom and experience, we can take enough control of our lives to avoid pain, uncertainty, and disappointment(사탄의 가장 큰 거짓말 중의 하나는 만일 인간의 노력과 지혜와 경험을 충분히 적용한다면 고통과 불확실성과 실망 등을 피하기 위하여 우리의 삶을 충분히 조절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아삽은 감사가 없는 예배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감사가 있는 예배를 하나님께서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마다 감사의 마음으로 드리도록 하십시오. 예수님도 감사의 예배를 높이 평가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누가복음 17장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열 사람의 환자에게 “제사장에게 가서 너의 몸을 보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열 사람은 가는 도중에 몸이 깨끗하게 치유된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중의 한 사람은 자기 병이 나은 것을 보고 예수님께 돌아와서 감사를 드렸습니다. 하필이면 그 사람이 이방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하게 되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사람이 없단 말이냐?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 (누가복음 17:17-19)

우리가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합니까? 자기 몸이 나은 것을 보고 감사를 드리기 위해서 예수님께 왔는데, 예수님은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믿음을 구성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감사라는 것입니다. 감사가 없는 믿음은 허울 좋은 믿음입니다. 감사가 없는 믿음은 껍데기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좋다는 말은 그 사람의 믿음생활에 감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크리스천의 삶에 있어서 감사의 대상은 당연히 하나님이십니다. 교회 목사님에게도 감사하고, 간사님들에게도 감사하고, 친구들에게도 감사하고, 또 부모님에게 감사하고, 또 학교에서는 교수님들에게 감사해야 하지만, 우리가 감사해야 할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환경에 어떻게 변해도, 우리가 어떤 고난의 상황에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구약 하박국에 유명한 감사의 말씀이 있잖아요?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하박국 3:17-18) “I will rejoice because of the Lord.” “I will rejoice in the God of my salvation.” 이 고백이 우리 크리스천의 감사입니다. 

바울이 아테네에 가서 아테네의 철학자들에게 하나님을 소개했던 말을 아시지요? “여러분이 하나님을 더듬어 찾기만 하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과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안에서 살고 있고 하나님 안에서 움직이며 존재하고 있습니다(For in him we live and move and exist).” (사도행전 17:28) 맞습니까? 이 말씀이 너무 감사하고 은혜가 되지 않습니까? 우리는 지금 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팬데믹 시대를 지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11/14/2021 | 시편 119편(I)

복 있는 사람이 걷는 길 The Way of A Blessed Person

시편 119:1-16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밤이 길고 기온이 선선하여 책 읽기에 좋다는 뜻일 것입니다. 이런 때에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까이하는 시간들을 가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저는 앞으로 몇 주에 걸쳐 시편의 백미(白眉)라고 하는 시편 119편을 가지고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시편 119편은 여러가지 면에서 독특한 시편입니다. 우선 길이가 매우 깁니다. 무려 176절까지 있습니다. 그리고 거의 매 절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말이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만큼 우리의 일상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시편 119편은 정교하게 의도적으로 쓰여진 시편입니다. 히브리어에는 22개의 자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시편 119편은 모두 22개의 연(聯, stanza)로 되어 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각 연이 히브리어 22개의 자음 순서대로 구성되어 있고, 각 연의 8개 절들이 같은 히브리어 자음으로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설명이 잘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한번 화면을 보세요. 시편 119편은 이런 식으로 매우 정교하게 의도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서론이 너무 길면 오히려 이 시편에 대한 호기심이 떨어질 수가 있으니까요. 바로 말씀으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시편 119편의 저자는 “어떤 사람이 행복한 사람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 답을 하는 식으로 써내려 갑니다. 여러분들은 행복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행복의 조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조건들이 채워지면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행복의 조건은 경제적인 것입니다. 며칠 전에 한 유튜브 채널에서 베트남에서 호화스러운 생활을 하려면 돈이 얼마나 있으면 되느냐고 사람들을 인터뷰했습니다. 이 질문을 받은 한 여성이 “저는 한 번도 그렇게 살아보지 않아서 얼마가 돈이 드는지 모르겠어요” 라고 대답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인터뷰하는 사람이 한 달에 얼마나 버느냐고 물었더니 150만원 정도 번다고 했습니다. 그만한 돈이면 웬만큼 살지 않으냐고 물었더니, 그 돈으로 부모님을 모셔야 하고, 형제들도 돌봐야 하기 때문에 빠듯하다고 대답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 사람들이 행복의 조건으로 가족을 꼽고 있습니다. 가족들이 서로 사랑하고 위해주면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대답이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요. 성경은 행복을 조건으로 보지 않고 관계(relationship)로 봅니다. 이런 말씀을 그냥 흘려듣지 마시고요. 행복에 대한 성경적인 가치관을 여러분의 가치관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 모두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보세요, 오늘 말씀에 “흠잡을 데 없는 올바른 길로 가는 사람이 행복하다(1절)”고 합니다. “여호와의 법을 따라 걷는 사람이 행복하다(1절)”고 합니다. “여호와의 법규를 지키는 사람이 행복하다(2절)”고 합니다. “마음을 다해 여호와를 찾는 사람이 행복하다(2절)”고 합니다. 어떻습니까? 행복할 수 있는 조건을 모두 만족해야 행복하게 된다면, 과연 그 조건을 모두 만족시켜서 행복하게 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하지만, 행복을 조건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관계적인 것으로 보는 성경적인 관점을 받아들이면, 누구나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성경 말씀이 모두 이런 식이거든요?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달란트의 비유’도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가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이 될 수 없고, 우리 모두가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이 될 수 없잖아요?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그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지 않고 투자해서 한 달란트를 남겼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 사람도 틀림없이 착하고 신실한 종이라고 주인에게 칭찬을 들었을 것입니다. 맞습니까? 성경은 내가 어떤 사람이든, 내가 다섯 달란트를 받았건, 두 달란트를 받았건, 한 달란트를 받았건 상관없이 모두가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길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행복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이 보여주는 행복한 삶의 비결은 하나님의 관계, 즉 말씀의 법을 존중하고 그 법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찾는다는 말은 전심(全心)으로, ‘with all your hearts’로 하나님을 찾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하기 싫은 공부를 억지로 할 때는 전심으로 공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때는 공부에 성과도 없습니다. 하지만, 스스로 원해서 공부할 때, 자발적으로 공부할 때는 전심으로 공부하게 됩니다. 그 때 실력이 붙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 원해서,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찾을 때 우리는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이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돈독해지고 성숙해집니다. 이런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시편 119편의 저자가 누구인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 저자는 청년들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이렇게 질문합니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길을 깨끗하게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8절) 청년들이 잘못된 가치관에 물들지 않고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성장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가장 큰 투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오랫동안 청년 목회를 하면서 가졌던 생각도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청년들이 너무 물질적인 가치관에 물들어 가고 있습니다. 물론 청년들만 그런 것은 아니지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풍조가 그렇습니다. 믿음, 사랑, 정의, 의로움, 희생, 헌신, 섬김, 기도, 이런 것들에 대한 가치가 퇴색되고, 오직 물질적인 것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시편 110:3 말씀을 좋아합니다. 청년들도 이 말씀을 좋아합니다.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그런데,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는 잘 모릅니다. Amplified Bible은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Your people will offer themselves willingly [to participate in Your battle] in the day of Your power; In the splendor of holiness, from the womb of the dawn, Your young men are to You as the dew.” 하나님의 전쟁에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God’s people)이 기쁨으로 그 전쟁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그 ‘God’s people’ 중에 ‘하나님의 청년들이(God’s young men)’ 많이 참여합니다. 이 청년들이 누구입니까? 하나님께 새벽 이슬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순결하고 깨끗한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의 가치관에 물들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이 말을 뒤집어서 말하면, 세상의 가치관에 물든 청년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동원될 수 없는, 아무 쓸모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8-9절 말씀을 읽어 보십시오.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길을 깨끗하게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How can a young person stay pure)?” 이 시편의 저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By obeying your word)”라고 대답합니다. 

고난 중에 있던 욥이 이렇게 당당하게 선언하는 장면이 생각납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But he knows where I am going. And when he tests me, I will come out as pure as gold).” (욥기 23:10) 내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또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길을 하나님께서 모두 알고 계시니까 이 고난이 끝나게 되면 나는 틀림없이 하나님 앞에 ‘pure gold(정금)’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선언입니다. 나중에 하나님께서 욥의 이런 자신감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그 때 가서야 욥은 “저는 알지도 못하면서 말하였고, 깨닫지 못하는 일들을 아는 체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지금껏 했던 제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합니다(욥기 42:3, 6)” 하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게 됩니다.

여러분, 욥이 그렇게 자신감에 차 있었던 것을 보면 욥이 올바로 살아왔던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욥의 주장이 어디가 잘못되었습니까?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pure gold’처럼 나타나는 것은 우리가 잘 살아왔기 때문이 아닙니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착하고 선한 사람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욥은 이점을 착각하고 자기의 의로움을 주장했던 것입니다.

다시 시편 119편 말씀으로 돌아가서 저자가 했던 질문을 다시 들어보십시오.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길을 깨끗하게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살면 깨끗하게 유지할 수 있습니다.” 나의 의(義)가 나를 깨끗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고,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선하고, 더 착해서 내가 깨끗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깨끗하게 만들어줍니다. 

그러므로, 깨끗한 삶의 비결은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가치관으로 삼는 것입니다. 11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죄를 짓지 않으려고 주의 말씀을 내 마음 속에 두었습니다(I have hidden your word in my heart, that I might not sin against you).” ‘hidden’이라는 말이 눈에 들어옵니다. ‘감추다’라는 뜻이잖아요?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 속에 감춰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습니다. 내 마음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보물처럼 감춰 있습니다. 이 말은 단순히 수사학적인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가치관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는 뜻입니다. 

‘죄를 짓지 않으려고’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일을 하지 않으려고’라는 뜻입니다. ‘유혹’을 영어로 ‘temptation’이라고 합니다. ‘tempt’라는 동사에서 온 말입니다. 낚시 바늘에 미끼를 꿰어서 물고기를 유혹합니다. 요즘에는 가짜 미끼를 많이 씁니다. 번쩍번쩍 빛이 나기도 하고, 가짜 미끼가 움직이기까지 합니다. 물고기들이 좋은 먹잇감으로 알고 덥석 물어버립니다. 틀림없이 그 일은 도덕적으로 옳지 않은 일입니다. 틀림없이 그렇게 결정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번 한번은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유혹에 넘어갑니다. 유혹은 달콤합니다. 그래서 한번이 두 번이 되고, 두 번에 세 번이 되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일을 계속하게 되고, 결국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게 됩니다.

유혹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가치관으로 삼는 것입니다. 요셉이 유혹을 받았을 때 그 집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오직 요셉과 요셉을 유혹하는 주인의 아내만 있었습니다. 주인의 아내가 계획적으로 벌인 일이었습니다. 정말 청년 요셉이 유혹에 넘어가기 쉬운 상황이었습니다. 그 때 요셉을 지켜 준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How could I do such a wicked thing? It would be a great sin against God(제가 어떻게 그런 악한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 큰 죄를 짓는 일입니다).” (창세기 39:9) 요셉의 이런 믿음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틀림없이 요셉은 아버지 야곱에게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배웠을 것입니다. 요셉은 형들이 질투할 만큼 아버지 야곱의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야곱이 아들들을 차별했다는 식으로 이 말씀을 읽어서는 안 됩니다. 아버지 야곱은 요셉을 옆에 두고 가르쳤을 것입니다. 이것이 아들들에 대한 차별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요셉아, 이것 하나만은 꼭 지켜라. 너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눈 밖에 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요셉에 대한 야곱의 교육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미래를 위한 값진 투자였습니다. 이 사건이 시발점이 되어 요셉은 감옥에 갇히게 되고, 그 때부터 요셉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지 않습니까?  

둘째로, 나의 삶을 깨끗하게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은 하나님의 말씀을 중단하지 않고 계속 배우는 것입니다(12절).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것인지 확인해야 합니다(13절).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해서 배워야하는 이유는 내가 받아들인 가치관을 계속해서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소중함을 확인해야 하는 이유는 그래야 하나님의 말씀을 기뻐하며 따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나는 주의 법규에 따르는 것을 기뻐합니다. 재산을 많이 가지는 것보다 더 좋아합니다(I have rejoiced in your laws as much as in riches).” (14절)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런 고백의 말씀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가치관으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청년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가장 귀한 자산입니다. 자신을 깨끗하게 유지하는 청년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전투에 참가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지금까지 청년들을 양육하는 사명을 감당해 왔습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 사명을 감당해 나가야 합니다. 세상의 가치관에 물들지 않은 깨끗한 청년들을 양육하는 것이 우리 교회가 계속해서 해야 하는 일입니다. 이 일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확장하는 값진 투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