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2021 |

계절이 주는 축복(IV) Season’s Blessing Of God

요한계시록 22:1-7

오늘은 ‘계절이 주는 축복’ 시리즈 설교 네 번째 마지막 시간입니다. 지금 찰스 강변이 한창 아름다운 때입니다. 한번 시간을 내서 강변을 걸어보면서 계절이 주는 하나님의 축복을 느껴 보시지요. 찰스 강에 놓인 다리가 여러 개 있습니다. 이 다리들은 케임브리지와 보스턴을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합니다. Longfellow Bridge가 있고요. Harvard Bridge가 있고요. Boston University Bridge가 있고요. River Street Bridge가 있고요. John W. Weeks Footbridge가 있고요. Anderson Memorial Bridge가 있습니다. 이 사진을 한번 보십시오. 무슨 다리인 것 같습니까? 케임브리지에서 올스턴으로 넘어가는 Anderson Memorial Bridge입니다. 

얼마 전에 이 다리를 걷다가 이 다리 끝에 붙어 있는 동판(plaque)에 성경 말씀이 새겨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요한계시록 22:2에 나오는 말씀이었습니다. “On either side of the river, was there the tree of life, which bare twelve manner of fruits, and yielded her fruit every month: and the leaves of the tree were for the healing of the nations(강 양쪽에는 열 두 종류의 열매를 맺는 생명나무가 있었다. 이 나무들은 매달 열매를 맺었다. 그 나무의 잎은 모든 민족들을 치유하는 데 사용되었다).” 누가, 왜 이런 성경 말씀을 붙여 놓았는지 미스터리입니다. 다리를 건너는 사람들이 찰스강의 아름다움을 보면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말씀을 생각하라고 그 동판을 붙여 놓았을까요? 아니면, 이 다리가 이 강을 건너는 사람들을 유익하게 하고, 치유하는 강이 되기를 소망하는 마음으로 그런 동판을 붙여 놓았을까요? 저는 그 동판을 보면서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전통적으로 요한계시록은 서기 91-96년경에 예수님의 제자 요한이 기록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 때는 로마의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신격화(神格化) 작업이 진행되고 있던 때였습니다. 그 때 예수님의 제자 요한이 밧모섬(The Island of Patmos)으로 유배되었다고 합니다. 초대교회 교부들이 이런 증언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는 교회의 지도자 요한을 내버려 두면 신격화 작업에 지장이 있을 것으로 보고 밧모섬에 유배를 시킨 것입니다. 밧모섬에 채석장이 있었는데, 그곳에 유배온 죄수들에게 돌을 캐는 작업을 시켰다고 합니다. 그리고 밧모섬은 한번 유배 온 사람은 절대로 나갈 수 없는 곳으로 유명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이 없으신 하나님께 이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서기 96년에 도미티아누스가 암살되면서 로마의 정치적인 환경이 급변(急變)하게 됩니다. 그리고 요한은 사면(赦免)을 받아 밧모섬을 나오게 됩니다. 그 때 요한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기록한 두루마리를 가지고 나와 아시아에 있는 7교회에게 돌려가며 읽게 합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약성경의 마지막 책 요한계시록(Revelation)입니다.

요한은 이렇게 그가 계시록을 기록하게 된 이유를 말합니다. “나는 고난과 왕국과 부르심에 대한 참음과 인내 속에 있는 여러분의 동역자요, 형제인 요한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했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간증을 했다는 이유로 밧모섬에 유배되었습니다. 유배 중에 주께서 네가 본 것을 기록하여,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돌려 읽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1:9, 11)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일하다가 내일을 알 수 없는 섬에 유배되었지만, 그의 글 어디에서도 억울한 마음이나 원망하는 마음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대신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당당함과 여전히 사명감에 불타고 있는 그의 음성을 생생하게 들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크리스천의 삶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세상을 이렇게 당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가 쓴 요한계시록은 모두 22장까지 있는데요. 이 속에 그 시대를 살았던 크리스천들의 고난과 핍박받는 삶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모든 악한 세력을 물리치는 말씀이 나오고, 하나님께서 친히 통치하시는 ‘새 하늘(a new heaven)과 새 땅(a new earth)’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며,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주실 것이다. 이제는 죽음도, 슬픔도, 울음도, 아픔도 없으며, 모든 옛것들이 다 사라질 것이다.” (요한계시록 21:3-4) 그리고, 22장 마지막 장에는 끝까지 믿음을 지킨 사람들을 위해 예비되어 있는 ‘거룩한 성(the holy city)’ ‘새 예루살렘(the new Jerusalem)’의 모습이 아름답게 그려져 있습니다. “그 천사는 또 내게 생명수가 흐르는 강을 보여주었습니다. 수정같이 맑은 그 강은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와 그 성의 넓은 거리 한가운데로 흐르고 있었습니다. 강 양쪽에는 생명나무가 있어서 일 년에 열 두 번, 달마다 새로운 열매를 맺고 있었습니다. 또 그 잎은 모든 사람들을 치료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요한계시록 22:1-2)

요한계시록에는 한번 읽어서는 알 수 없는 많은 상징과 암호, 숫자, 그리고 메타포들이 등장합니다. 요한계시록을 해석하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고난과 핍박 속에 살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쓴 편지이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불온문서(不穩文書)로 낙인이 찍혀 압수될 수도 있기 때문에, 교회를 핍박하는 세력들을 상징적으로 기록했습니다. 

여러분, ‘생명수 강’과 ‘생명나무 열매’ 그리고 ‘생명나무 잎’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강력한 메타포들입니다. 이 메타포들이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메시지가 무엇일까요? 첫째로, 이 메타포들은 에덴 동산 동쪽에 있는 ‘생명나무(창세기 3:22-24)’를 생각하게 합니다. 아시지요? 하나님은 뱀의 유혹을 받아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 먹고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가 생명나무 열매를 따먹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천사들을 시켜 지키고, 번쩍이는 ‘화염검(a flaming sword)’으로 길을 지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하나님을 피해 숨은 아담과 하와가 생명나무 열매를 따먹고 영원히 사는 길을 막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생명수 강가에 자라고 있는 생명나무는 어떻습니까? 강가에 지천(地天)으로 무성하게 자라고 있습니다. 이 생명나무들은 매달 다른 풍성한 열매들을 맺습니다. 누구나 따 먹을 수 있습니다. 지키는 천사들도 없고, 번쩍이는 ‘화염검’도 없습니다. 왜 이런 놀라운 광경이 펼쳐지고 있을까요?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에 더 이상 생명나무 열매를 따 먹지 못하도록 길을 막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16 말씀을 아시지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대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히브리서에는 이 말씀이 “By his death, Jesus opened a new and life-giving way through the curtain into the Most Holy Place(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은 커튼을 지나 지성소에 이르는 새로운 생명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히브리서 10:20)”라고 나와 있습니다. 비유적인 의미에서 예수님은 번쩍이는 화염검을 그의 죽으심으로 통과하여 생명나무 열매를 따먹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포세이돈 어드벤처(The Poseidon Adventure, 1972)’라는 감동적인 영화가 있습니다. 12월 31일, 뉴욕을 출발해서 아테네로 가던 ‘포세이돈’은 항해 도중에 해일을 만나 전복됩니다. 전날 밤에 시작되어 새해 새벽까지 계속되던 파티 중에 사고를 당한 승객들은 두 그룹으로 나뉘어집니다. 구조대가 올 때까지 기다리자는 그룹과, 가만히 있지 말고 배 위쪽으로 올라가자는 그룹으로 나뉘어집니다. 구조대를 기다리지만 말고 배 위쪽으로 올라가자는 그룹의 리더는 스캇(Scott)이라는 목사였습니다. 진 핵크만(Gene Hackman)이 목사 역을 합니다.

승객들은 살기 위한 모험을 시작합니다. 배가 뒤집혀 위 아래가 바뀌다 보니 올라가는 길을 찾는 일이 보통 어렵지 않습니다. 겨우 겨우 가다 보니 터진 파이프에서 뜨거운 수증기가 새어 나오는 바람에 더 이상 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누군가가 수증기가 나오는 밸브를 잠가야 하는데, 그것은 목숨을 희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스캇 목사가 그 일을 자처합니다. 그는 뜨거운 수증기를 온 몸에 맞으면서 가까스로 밸브를 잠그는데 성공하지만, 자신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밑으로 추락하여 죽고 맙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일행에게는 계속 올라갈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결국 끝까지 배 위로 올라갔던 사람들은 구조대원들과 교신(交信)하게 되고, 목숨을 건지게 됩니다. 제가 신학교 2학년 때 이 영화를 보았는데요. 스캇 목사의 희생적인 모습에서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저는 그 영화를 보면서 그 영화가 종교적인 메시지가 강한 영화라고 생각했습니다. 스캇 목사의 희생에서 예수님의 희생이 오버랩 되어 저에게는 매우 감동적인 이야기로 다가왔습니다. 

둘째로, 생명수 강 양쪽에 자라는 생명나무와 그 열매, 그리고 모든 민족을 치유하는 생명나무 잎을 보면서 우리는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우리의 삶을 반성하게 됩니다. 우리가 눈을 감고 사니까 그렇지 우리 주변에는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로 넘쳐납니다. 올해 리뉴 주제가 ‘팬데믹 시대를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이 주제를 결정한 제 마음 속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힘든 시간을 잘 이겨 나가야 하겠다는 생각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주변 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그들의 힘든 삶을 치유하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실제적인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내 가정이, 내 가족들이 안전한 것으로 감사하는 것으로 그친다면 굳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들먹일 필요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믿은 덕분에 영원한 생명을 약속 받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들을 때 영원한 생명을 미래에 받는 것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지금 여기서도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사는 기쁨을 조금씩 누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이 어떤 것인지 조금씩 배우고, 알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약속 받은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그럴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실을 바울은 로마서 말씀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은혜의 자리로 우리를 데리고 왔습니다(Because of our faith, Christ has brought us into this place of undeserved privilege where we now stand).” (로마서 5:2) 주님은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마태복음 10:8)”고 하셨습니다. 부지런히 기회 있을 때마다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길을 알려야 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미션입니다. 

생명나무의 잎이 모든 민족들을 치유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나의 삶을 반성해 보십시오. 나의 삶을 반성하는 일이 결코 흔한 일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의 거울에다가 나의 삶을 비쳐볼 때 나의 삶을 반성해 볼 수 있습니다. 지금 내가 다른 사람의 아픔을 치유하기는커녕 다른 사람에게 아픔을 주는 일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생명수 강가에 자라고 있는 생명나무 열매처럼, 그리고 많은 사람을 치유하는 생명나무의 잎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의 생명을 살리고 치유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영국의 사상가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1561-1626)은 그의 책 ‘학문의 진보(The Advancement of Learning, 1605)’에서 “이 세상에는 거미와 같은 사람이 있고, 개미와 같은 사람이 있고, 꿀벌과 같은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거미는 다른 곤충들이 잘 다니는 길목에 거미줄을 쳐 놓고 숨어있다가 먹이가 걸려들면 잽싸게 나가서 거미줄로 칭칭 감아 생명을 빼앗아 먹이로 삼습니다. 베이컨은 이런 형의 사람을 ‘이기적인 인간’이라고 하면서 이런 사람은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개미는 어떻습니까? 부지런히 열심히 일합니다. 개미들이 파 놓은 땅굴을 보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먹을 양식을 차곡차곡 쌓아 놓습니다. 그러나 개미들은 양식을 쌓아 놓기만 하고 그것을 나누지는 않습니다. 베이컨은 이런 형의 사람을 ‘개인주의 인간’이라고 하면서 이런 사람은 세상에 있으나마나 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꿀벌은 어떻습니까? 꿀벌도 개미처럼 부지런히, 쉬지 않고 꽃을 찾아다니면서 꿀을 땁니다. 그런데 꿀만 따는 것이 아니라 그 꽃으로 하여금 열매를 맺게 합니다. 그리고, 꿀을 모아 사람들과 나눕니다. 베이컨은 이런 형의 인간을 ‘이타적인 인간’이라고 하면서 세상에 꼭 필요한 인간이라고 했습니다.

가을이 깊어 가고 있습니다. 더 늦기 전에 아름답게 물든 단풍들을 보면서 계절이 주는 축복을 즐겨보십시오. 한번 시간을 내서 찰스 강변을 걸어보고, 제가 말씀드린 앤더슨 다리를 건너보시지요. 다리를 건너서 동판에 새겨 놓은 성경 말씀을 읽어 보세요. 다시 다리 위에서 아름다운 찰스 강을 즐겨보십시오. 그리고, 우리에게 약속되어 있는 ‘새 예루살렘성’ 중앙을 가로 지르는 ‘생명수 강’을 머리에 그려 보십시오. 그리고 달마다 열매를 맺어 사람의 생명을 살리고, 그 잎으로 모든 사람을 치유하는 ‘생명나무’ 열매와 잎을 머리에 그려 보십시오. 한 번뿐인 우리의 삶, 잘 살아야 합니다. 선하게 살아야 합니다. 착하게 살아야 합니다. 가치 있게 살아야 합니다. 열심히 일해서 아낌없이 나누어 주는, 세상에 꼭 필요한 꿀벌 같은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에 있으나마나 한, 세상에 피해를 안 주는 삶으로 만족하면 안 됩니다. 세상에 유익을 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10/31/2021 |

계절이 주는 축복(III) Season’s Blessing Of God

마태복음 7:15-20

오늘은 ‘계절이 주는 축복’ 시리즈 설교 세 번째 시간입니다. 케임브리지에서 차를 타고 약 30분 정도 가면 ‘콩코드(Concord)’라는 동네를 만나게 됩니다. 조용하고 자연이 아름다운 동네입니다. Ralph Waldo Emerson(1803-1882, 사상가), Henry David Tho-reau(1817-1862, 사상가), Margaret Fuller(1810-1850, 저널리스트, 여성 운동가), Amos Bronson Alcott(1799-1888, 교육자), 그리고 그의 딸 Louisa May Alcott(1832-1888, 소설가)등이 ‘초월주의(Transcendentalism)’라는 19세기 미국 철학을 만들어낸 동네입니다. 그 때 초월주의 사상가들이 만들었던 잡지 이름이 ‘다이얼(The Dial)’이었습니다. 자연에 우리의 삶의 주파수를 맞춘다는 의미에서 그런 이름을 붙인 것 같습니다.

이 글을 한번 보시겠습니까? "I went to the woods because I wished to live deliberately, to front only the essential facts of life, and see if I could not learn what it had to teach, and not, when I came to die, discover that I had not lived. I did not wish to live what was not life(내가 숲속으로 들어간 것은 인생을 의도적으로 살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인생의 본질적인 것들을 직면해 보고, 숲이 가르치는 것을 내가 배울 수 없는지 알아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내가 죽음을 맞이했을 때 내가 헛된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고 싶지 않았다. 나는 진정한 삶이 아닌 것을 살고 싶지 않았다)." 이 글은 헨리 소로우가 친구 에머슨의 권유로 콩코드에 있는 ‘월든 폰드(Walden Pond)’에서 2년 2개월 동안 자연 속에서 살면서 그가 왜 숲에서 살기로 작정했는지 그 동기를 쓴 글입니다. 그는 숲의 단순한(simple) 삶에서 느끼고, 체험하고 발견한 것들을 ‘월든(Walden)’이라는 그의 일기책에 기록했습니다. 

소로우는 ‘월든의 숲(woods)’에서 인생의 에센스를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숲으로 들어갔습니다. 우리는 소로우처럼 숲으로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지금 계절이 주는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보스턴은 한국처럼 사계절이 있어서 참 좋습니다. 보스턴에서는 사계절이 주는 축복을 모두 느낄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이 사계절의 의미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봄은 생명과 희망(hope)의 계절이고, 여름은 모든 것이 성장하는 기쁨(joy)의 계절이고, 가을은 열매를 맺는 아름다움(beauty)의 계절이고, 겨울은 내일을 위한 안식과 반성(reflection)의 계절이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열매’는 우리 삶에 메시지를 전달하는 강력한 ‘메타포(은유, metaphor)’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속에 열매에 대한 말씀이 많은 것도 이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 것이다. 좋은 나무는 모두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16-17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저희 아버님은 생전에 한자(漢字)를 많이 쓰셨습니다. 글씨 대회에 나가서 입상도 많이 하셨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글씨를 쓰시더니 연세가 들어가시면서 언제부터 글씨를 쓰시지 않았습니다. 제가 서울에 갔을 때 왜 글씨를 쓰시지 않느냐고 여쭸더니 글씨를 쓰려면 여러가지 준비할 것이 많은데 그런 일들이 힘이 들고 귀찮아진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아버님이 쓰신 글씨들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중에 ‘진광불휘(眞光不輝)’라는 글이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 글이 좋아 보인다고 말씀드렸더니, 그 말의 뜻을 잘 설명해 주셨습니다. ‘진광불휘’라는 말은 “참된 빛은 번쩍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 빛이 참된 빛이라면 구태여 사람들의 눈에 띄려고 번쩍일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참된 빛이 아닌 가짜 빛은 사람들의 띄어야 하고 사람들의 눈을 속여야 하니까 요란하게 번쩍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거짓 예언자들이 많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거짓 예언자들의 특징은 좋은 말, 듣기 좋은 말로 자기들의 말을 그럴듯하게 포장을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말이 진실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의 눈을 속이려면 포장을 해야 합니다. “그들은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다가온다. 그러나 그 속은 굶주린 늑대이다.” (15절) 거짓 예언자들 속에는 굶주린 늑대가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숨겨야 하니까 양의 옷을 입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감쪽같이 속아넘어갑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떻게 하면 거짓 예언자를 분별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이렇게 알려주셨습니다. “그들의 열매를 보면 그들을 알 수 있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You can identify them by their fruit, that is, by the way they act. A good tree produces good fruit, and a bad tree produces bad fruit).” (16-17절) 이 얼마나 지혜로운 말씀입니까?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가시나무는 가시나무의 열매를 맺습니다. 포도나무는 포도나무의 열매를 맺습니다. 열매는 그 나무가 만들어내는 프로덕트(생산물, product)입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말만 들어서는 분별할 수 없습니다. ‘감언이설(甘言利說)’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귀에 솔깃한 달콤한 말이나 이로운 조건을 내세워 다른 사람을 꾀는 말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면 말만 듣지 말고 그 사람의 행동을 보라는 것입니다. 행동은 그 사람이 맺는 열매입니다. 열매가 좋으면 그 사람은 좋은 사람입니다. 열매가 나쁘면 그 사람은 나쁜 사람입니다. 열매는 나쁘지만 그 사람은 좋은 사람일 경우가 없다는 것입니다. 열매는 그 사람이 만드는 프로덕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여러분의 삶에 적용을 해보십시오. 열매가 그 사람이 생산하는 프로덕트라면, 좋은 프로덕트를 생산하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좋은 프로덕트를 만들기 위해서 많은 노력해야 하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이 문제에 접근합니다. 그런데, 이런 식의 접근으로는 절대로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너무나 쉽고 간단합니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습니다.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좋은 나무가 되어야 합니다. 좋은 나무만 되면 우리는 자연히 좋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맞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은 나무가 될 수 있겠습니까? “나는 참 포도나무이다(요한복음 15:1)”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을 배워야 합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Take my yoke upon you. Let me teach you, because I am humble and gentle at heart, 마태복음 11:29)”고 말씀하신 예수님을 배워야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나의 마음은 온유하고 겸손하니까 나에게 와서 배우라고 하면 될 것 같은데, 예수님은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멍에(yoke)’가 무엇인지 아시지요? 사진을 한번 보세요. 이것이 ‘멍에’입니다. 소 같은 동물의 목에 걸어 고정시키고 끈을 달아서 마차를 끌고, 밭을 갈게 합니다. 멍에에 대한 사전의 정의를 보면 ‘a wooden crosspiece that is fastened over the necks of two animals and attached to the plow or cart that they are to pull(두 마리의 동물의 목에 걸고 잡아당길 쟁기나 수레에 부착된 나무 가로대)’라고 나와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보았던 멍에는 모두 소 한 마리의 목에 건 멍에였습니다. 그런데, 원래 멍에는 두 마리의 목에 건다고 합니다.

멍에가 무엇인지 잘 이해를 하면 왜 예수님께서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는지, 예수님의 말씀을 잘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머리로, 지식으로 배우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공부하듯이 하면서 예수님을 배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배운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맞습니까? 정말 예수님을 공부하듯이 배울 수 있다면 머리가 좋은 사람들이 제일 예수님을 잘 배울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거든요?

그러면 예수님을 배운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예수님을 배운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메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멍에를 메고 나를 배우라(Let me teach you. Take my yoke upon you”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멍에를 예수님과 같이 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멍에를 내가 같이 지는 것입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일까요? 저는 이 말씀이 예수님의 삶과 인격을 배우라는 말씀이라고 이해했습니다. 내가 가고 싶은 대로 예수님을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가시는 곳으로 내가 함께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걸으시는 방향으로 나도 함께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과 생각에 나의 삶의 다이얼을 맞추는 것입니다.

예전에 많이 불렀던 ‘마라나타(Maranatha)’의 ‘I Love You Lord(주님 사랑합니다, https://youtu.be/8hyBJwTKmQ8)’ 가사가 생각납니다. “I Love You, Lord / And I lift my voice / To worship You/ Oh, my soul, rejoice! / Take joy my King / In what You hear / May it be a sweet, sweet sound / In Your ear(주님 사랑해요. 주님을 경배하기 위해 제 목소리를 높입니다. 오, 내 영혼아, 기뻐하라. 나의 왕이신 주님, 주님이 들으시는 소리를 기뻐하세요. 그 소리가 주님의 귀에 달콤한 소리가 되기를 바래요).” 참 가사가 좋지요? 전 혼자 있는 조용한 시간에 이 노래를 부르곤 합니다. 그 때마다 마음이 깨끗하게 정화(淨化)되는 것을 느낍니다. 이 노래의 가사가 전달하는 메시지가 무엇인가요? 주님과 보조(步調)를 맞추는 삶을 살아서 주님의 기쁨이 되는 삶을 살라는 메시지 아닙니까?

오해하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배운다는 것은 예수님에 대하여 공부하고, 예수님에 대한 교양과 지식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많은 교회들이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교회마다 성경공부를 그렇게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교회마다 제자 훈련이 유행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제자 훈련이 예수님의 제자를 만드는 훈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성경공부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제자 훈련이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에 대한 지식만 가지고는 삶이 변화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배운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삶과 예수님의 인격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하는 것과 생각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말하는 것을 보면 예수님이 생각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생각하는 것을 보면 예수님이 생각나고, 그 사람이 행동하는 것을 보면 예수님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헨리 나우엔(Henri Nouwen, 1932-1996)이 1977년에 출판한 ‘The Living Reminder(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라는 책의 내용이 바로 그런 내용입니다. 사도 바울도 그의 편지에 똑 같은 말을 기록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편지(a letter from Christ, 고린도후서 3:3)’라고 했습니다. 또, 우리는 ‘예수님의 대사(Christ’s ambassadors, 고린도후서 5:20)’라고 했습니다.

뉴햄프셔에 가면 청교도 작가 나다니엘 호돈(Nathaniel Hawthorne, 1804-1864)의 생가(生家)가 있습니다. ‘주홍 글씨’가 호돈의 대표작이지만, 그가 쓴 ‘큰 바위 얼굴(The Great Stone Face, 1850)’이라는 단편 소설이 있습니다. 주인공은 어니스트라는 소년입니다. 이 소년이 살고 있는 작은 마을에 ‘큰 바위’에 얽인 전설이 있었습니다. 그 바위는 멀리서 보면 인자한 사람의 얼굴로 보입니다. 이 소년은 어머니로부터 언젠가는 큰 바위 얼굴과 같은 인물이 이 마을에서 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랍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이 소년은 어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이 마을에서 큰 바위 얼굴과 같은 인물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 마을 출신 중에 정계에 진출한 사람도 있었고, 돈을 많이 모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두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실망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마을 출신인 한 시인이 마을을 찾아옵니다. 그 때 어니스트는 마을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어니스트의 얼굴은 석양 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습니다. 이런 어니스트를 본 시인이 이렇게 외칩니다. “여러분, 보세요. 이 분이야 말로 큰 바위 얼굴과 닮은 분 아닙니까?”

초등학교 때 읽었던 이 이야기의 감동이 어른이 된 지금도 생생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 이야기 속에 뭔가 우리 마음을 울리는 메시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니스트가 이렇게 훌륭한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날마다 큰 바위 얼굴을 바라보면서 이 마을에서 훌륭한 인물이 나오기를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흘러 어니스트는 자기도 모른 사이에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사람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날마다 성경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읽고, 그 말씀 속에 나타난 예수님의 인격과 만나고, 예수님의 삶을 본받는다면, 우리가 어떤 사람으로 변화되겠습니까?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와서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좋은 열매를 맺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예수님께 가서 배우면 좋은 나무가 됩니다. 그러면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열매는 우리가 생산해 내는 프로덕트입니다. 프로덕트에 마음을 쓰지 말고 먼저 좋은 나무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10/24/2021 |

계절이 주는 축복(II) Season’s Blessing Of God

예레미야 17:5-10

지난 주일에 ‘계절이 주는 축복’ 설교에서 가을은 결실의 계절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탐스러운 과일들을 보면서 “나는 한 해 동안 어떤 열매를 맺었는가?” 하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반성(反省)하는 것이 계절이 주는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구약성경 예레미야 17:5-10 말씀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사람을 의지하며 육체를 자기 힘으로 삼고 여호와께 마음을 돌린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다” 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체계적으로 읽지 않기 때문에 왜 이런 말씀이 나오는지, 또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성경을 단편적으로 읽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16대 요시야 왕 때부터 유다 왕국이 멸망할 때까지 예언자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가 예언자로 살았던 시기는 기원전 627년부터 586년까지 41년 간입니다. 조국 유다 왕국이 기울어가던 때였습니다. 그 때의 국제 정세는 강대국이었던 앗시리아 제국의 힘이 약화되고, 신흥 제국 바빌로니아의 힘이 날로 강해지던 때였습니다. 바빌로니아는 계속 유다 왕국을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유다 왕국은 앗시리아에게 도움을 청하면서 나라를 지키려고 외교전을 펴고 있었습니다. 

유다 왕국의 이런 모습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유다 왕국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예언자들의 소리를 들으면서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로 하여금 이렇게 자기 백성들의 죄악을 기록하게 했습니다. “유다 백성의 죄는 쇠로 만든 연필로 적혀 있다. 그들의 죄가 그들의 마음 판에 뾰족한 쇠 끝으로 새겨져 있고, 그들의 제단 모퉁이에도 새겨져 있다.” (예레미야 17:1) 이 말씀을 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은 예레미야 1:10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내가 너를 세워 네가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려고 한다(I appoint you over nations to uproot and tear down, to destroy and overthrow, to build and to plant).” 하나님은 자기 백성 유다 왕국을 무너뜨리고 다시 세우려는 계획을 가지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 때 하나님의 마음은 마치 죄로 물든 온 세상을 홍수로 심판하고 의인 노아의 후손들을 데리고 새로운 자기 백성들을 만드시려고 했던 때와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런 배경 속에서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 두 종류의 인간들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사람을 의지하는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입니다. 지금도 이 세상에는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소수의 사람들과 자신의 힘을 믿고 사람을 의지하는 다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둘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별로 큰 차이점이 없는 것 같지요? 하지만, 결과는 아주 다르거든요? 마치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들과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의 차이점과 같습니다. 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결과는 엄청나게 다르거든요? 넓은 문으로 들어간 다수의 사람들은 모두 멸망합니다. 하지만,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소수의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지난 주 설교에서도 열매라는 메타포(metaphor, 은유)가 등장했습니다. 오늘 말씀에도 메타포가 등장합니다. 하나는, 사막에서 자라고 있는 볼품없는 떨기나무가 보여주는 메타포입니다. 저는 예루살렘과 터키 성지 순례를 하면서 광야에서 자라는 떨기나무들을 많이 봤습니다. 화면을 보십시오, 이런 나무들이 히브리 말로 ‘세네(seneh)’라는 ‘떨기나무’입니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봤던 불타는 떨기나무가 바로 이런 나무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 떨기나무는 히브리 말로 ‘아르아르(ar‘ar)’라는 나무인데 ‘소돔의 사과(Apple of Sodom)’라고 불리는 나무입니다. 소돔이 멸망할 때 함께 저주를 받은 나무라는 의미에서 이런 이름이 붙은 것 같습니다. 화면을 한번 보세요. 이 나무가 예레미야 17장에 나오는 ‘소돔의 사과’입니다. 

‘소돔의 사과’는 제법 크고 먹음직스러운 열매를 맺습니다. 그런데, 이 열매는 안이 텅 비어 있고 솜처럼 하얀 실 같은 것들이 엉켜 있어 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가지를 자르면 우유처럼 희고 끈적끈적한 액체가 흘러나오는데, 독(毒)이 들어 있습니다. 전쟁할 때 화살촉에 이 액체를 바르거나 적(敵)의 우물에 이 액체를 탄다고 합니다. 마치 옻나무처럼, 예민한 사람은 이 나무 옆에만 가도 이 나무의 독성(毒性)에 영향을 받는다고 합니다.

 ‘소돔의 사과’같은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하여 이런 사람은 사람을 의지하는 사람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크게 깨달았습니다. 사람을 의지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게 됩니다. 오늘 말씀 그대로입니다. “Cursed is the one who trusts in man, who depends on flesh for his strength and whose heart turns away from the LORD(사람을 의지하고 사람을 자기 힘으로 삼고 사는 사람들, 그리고 그의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선 사람들은 저주를 받을 것이다).” (5절) “그들은 사막의 키 작은 나무 같아서 좋은 일이 찾아와도 보지 못한다. 그들은 아무도 살지 않는 소금 땅, 황무지에서 살게 될 것이다.” (6절)

끔찍하지 않습니까? “좋은 일이 찾아와도 보지 못한다”는 말은 그런 사람들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 사람들은 아무도 살지 않는 소금 땅에서 황폐한 살기 때문에, 주변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열매를 맺지 못하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 베푸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독성이 있어서 오히려 주변 사람들의 생명을 위협하고 빼앗는 삶을 살게 됩니다.

오늘 말씀에는 또 하나의 메타포가 나옵니다. 6절에 나오는 ‘물가에 심은 나무(a tree planted by the water)’라는 메타포입니다. 이 나무는 뿌리를 물(stream)에 대고 있습니다. 그러니, 비가 오지 않아 가물어도 걱정이 없습니다. 뜨거운 햇빛 속에서도 아무 걱정이 없습니다. 잎이 마르는 일이 없고 늘 잎이 푸르고 무성합니다. 뿌리가 물에 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나무는 항상 열매를 맺습니다(It never fails to bear fruit). 

이런 사람은 ‘여호와를 믿고 여호와만을 의지하는 사람(the man who trusts in the LORD, whose confidence is in him, 7절)’이라고 했습니다. ‘trust’ ‘confidence’라는 말이 눈에 들어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 안에서 확신을 갖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시편118:8-9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나으며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고관들을 신뢰하는 것보다 낫도다.” 하나님께 피한다는 말은 하나님 안에 ‘피난처(refuge)’를 둔다는 뜻입니다. 내 삶이 위기에 빠졌을 때, 내 삶이 위험에 빠졌을 때, 내 삶이 불안할 때, 내 삶이 흔들릴 때 하나님께 달려가 도움을 요청합니다. 예레미야는 이런 사람은 ‘물가에 심은 나무’와 같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요즘 가끔 제 아내와 함께 찰스 강변을 산책합니다. 며칠 전에 하바드 쪽으로 강변을 걷다가 유난히 반듯하고 예쁘게 자란 나무들을 보았습니다. “어떻게 저렇게 나무들이 예쁘게, 균형 있게 자랐을까?” 하면서 얘기를 주고받았습니다. 얘기의 결론은 찰스강이 가까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었습니다. 물이 모자라고, 성장 조건이 좋지 않으면 그렇게 반듯하고 균형 있게 자랄 수가 있겠습니까? 한국에 경기도 양평에 가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은행나무가 한 그루 있다고 하는데요. 이 나무는 높이 50미터, 굵기 14미터나 된다고 합니다. 굉장하지요? 그런데, 매년 이 나무에서 120말(약 2,160리터)의 열매를 거둔다고 합니다. 이 은행나무가 그처럼 많은 열매를 맺는 이유는 나무에서 뻗어 나간 뿌리가 근처 시냇가에서 수분을 충분히 섭취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오늘 말씀이 유다의 죄를 지적하는 말씀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히브리 말로 죄를 ‘하마르티아(hamartia)’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이 ‘하마르타노(hamartano)’라는 말에서 나왔다고 하는데요. 이 말은 본래 활을 쏘는 사람들이 화살이 과녁을 빗나간 것을 말할 때 쓰는 말이라고 합니다. 굉장히 의미 심장한 말입니다. 죄는 과녁을 맞히지 못하고 빗나간 것입니다. 마땅히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 모든 소망을 두어야 하는데, 하나님 대신 사람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왜 국가적인 위기를 맞이해서 하나님을 찾지 않고 앗시리아를 찾습니까? 왜 앗시리아가 우리를 도와서 위기를 벗어나게 해 줄 것이라고 믿습니까? 이것이 과녁이 빗나간 삶이고,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죄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떨기나무 같은 삶, ‘소돔의 사과’같은 삶을 살 것이냐? 아니면, 물가에 심은 나무와 같은 삶을 살 것이냐? 얼핏 보기에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안에 하얀 실 같은 것이 얽혀 있어서 먹을 수 없는 열매를 맺는 삶을 살 것이냐? 아니면 풍성한 열매를 맺어서 주변 사람들에게 베풀고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삶을 살 것이냐?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앗시리아를 피난처로 삼을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을 것이냐?” 결정해야 합니다. “앗시리아를 의지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면 좋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는 안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앗시리아(사람의 힘)를 의지하는 사람은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게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든지, 아니면 앗시리아를 의지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돈)을 동시에 섬길 수 없기 때문에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이런 설교를 할 때 늘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기로 결정하면 무슨 일이든지 어려움 없이 잘 되는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물가에 심은 나무’라는 메타포가 주는 메시지를 생각해 보세요. 물가에 심은 나무도 비가 오지 않으면 가뭄을 겪습니다. 물가에 심은 나무도 한 낮의 뜨거운 햇볕 때문에 고통을 당합니다.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 고난을 당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도 많은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하지만, ‘물가에 심은 나무’는 그 뿌리를 물에 대고 있기 때문에 뜨거운 햇볕도 견딜 수 있고, 가물어도 견딜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들이 그렇거든요? 뿌리를 물에 대고 있는 나무처럼,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들은 넘어지지 않습니다. 무너지지 않습니다. 끝까지 견딥니다. 견고합니다. 

누가 사람을 신뢰하고 사람을 자기 힘으로 삼고 사는 사람입니까? 누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누가 하나님 안에서 확신을 가지고 사는 사람입니까? 우리는 누가 그런 사람인지 알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아십니다. “그 어느 것보다도 비뚤어진 것은 사람의 마음이다. 사람의 마음은 심히 악하기 때문에 아무도 그 속을 알 수 없다. 그러나 나 여호와는 사람의 속을 살필 수 있고, 사람의 마음을 시험해 볼 수 있다.” (9-10절) “The heart is deceitful above all things” 라고 합니다. ‘deceitful’이라는 말은 ‘남을 속이는’ ‘사기를 치는’ 이런 뜻입니다. 우리 마음은 남을 잘 속이고, 사기를 잘 친다는 말입니다. 우리 마음이 얼마나 하는 척을 잘합니까?  그래서 잠깐 사람들의 눈을 속일 수 있습니다. 아니면 영원히 사람들의 눈을 속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속을 살필 수 있기 때문입니다. “I the LORD search the heart and examine the mind”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가을이 주는 계절의 축복은 우리 자신들의 삶을 돌아보고 어떻게 살아야 올바로 사는 것인지 자신의 삶을 반성하는 것입니다. 설교의 왕자라고 불리는 찰스 스펄전(Charles Spurgeon, 1834-1892, 영국)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The seasons change and you change, but the Lord abides evermore the same, and the streams of His love are as deep, as broad and as full as ever(계절은 변하고 당신도 변하지만 주님은 영원히 동일하시며 그분의 사랑은 그 어느 때보다 깊고 넓고 풍부합니다).” 기가 막힌 명언 아닙니까? “계절도 변하고 당신도 변하지만.....” 제가 이 교회에 처음 왔을 때가 34살 때였습니다. 저도 많이 변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의 사랑은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이 계절에 변함없는 주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는 것, 이 또한 계절이 주는 축복이 아니겠습니까? 


10/17/2021 |

계절이 주는 축복(I) Season’s Blessing Of God

요한복음 15:5-10

요즘 좋은 가을 날씨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늘이 어찌나 맑고 높은 지, 구름 한 점 없는 날이 많습니다. 예로부터 가을을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이라고 했습니다. 하늘은 높고 말이 살찐다는 뜻인데요. 가을은 곡식이 익어가는 풍요로운 계절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가을을 ‘등화가친(燈火可親)'의 계절이라고도 합니다. 가을 밤은 기온이 선선하기 때문에 등불을 가까이하고 책을 읽기에 좋은 계절이라는 뜻입니다. 이 좋은 계절에 좋은 책을 가까이해 보시지요. 인문학적인 소양을 기를 수 있는 책을 읽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읽으면 모든 면에서 유익한 점들이 많습니다. ‘천고마비’ 외에도 가을을 가리키는 말로 ‘만추가경(晩秋佳景)’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늦가을의 경치가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사는 뉴잉글랜드의 가을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한 두주만 지나면 메모리얼 드라이브와 찰스 강변이 아름답게 물들 것 같습니다. 한번 Route 2를 타고 ‘모학 트레일(Mohawk Trail)’을 드라이브해 보시지요. ‘모학(Mohawk)이라는 인디언 부족들의 이동(移動) 루트인데, 단풍이 정말 아름답습니다, 말 그대로 ‘만추가경’입니다.

전도서를 쓴 솔로몬은 “하늘 아래 모든 일에는 정한 때가 있고, 시기가 있는 법이다” 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이 Amplified Bible에 “There is a season (a time appointed) for everything and a time for every delight and event or purpose under heaven” 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모든 일에는 정해진 시기(a time appointed)가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모든 기쁨(delight)과 사건(event)과 목적(purpose)을 위한 시간이 있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깨닫는 사람은 조바심을 내지 않습니다. 모든 일에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때가 있다고 믿으니까요. 

솔로몬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거둘 때가 있으며(A time to be born and a time to die. A time to plant and a time to harvest)......” (전도서 3:2) 이 말씀처럼 우리 인생에는 심을 때가 있고, 거둘 때가 있습니다. 씨앗을 심는 농부의 마음을 한번 헤아려 보십시오. 봄이 지나고, 뜨거운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되면 곡식이 익고 열매가 열립니다. 농부는 심고 거두는 하나님의 법칙을 알기에 수확의 기쁨을 생각하면서 씨앗을 뿌리고 가꾸는 수고를 감내(堪耐)합니다.

몇 주 전에 애플 피킹을 가셨던 분들이 저희 집에 크고 탐스러운 사과를 많이 주셨습니다. 먹어보았더니 안에 주스가 많아서 시원하고 달았습니다. 제가 사진으로 찍었습니다. 한번 보시겠습니까? 원래는 이보다 더 많이 주셨는데, 몇 개를 먹고 남은 것을 찍었습니다. 정말 색깔도 곱고 맛있게 익었지요? 

열매에 대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태복음 7:20)”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New Living Translation에서는 “Yes, just as you can identify a tree by its fruit, so you can identify people by their actions” 라고 해석했습니다. 이 말씀을 잘 보면 ‘열매’라는 말은 우리의 ‘행동’을 나타내는 메타포(metaphor)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열매’가 우리의 삶에 주는 메시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탐스러운 열매들을 보면서 “나는 과연 한 해 동안 어떤 열매를 맺었는가?” 하고 반성(反省)해 보아야 합니다. 저는 이것이 계절이 주는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열매를 맺기 위하여 계획을 세우고, 전략을 세우고, 목표를 세워 그 일을 추진합니다. 열매를 얻기 위해서 그만큼 애를 쓰고, 마음을 들이면 수고한만큼 열매를 거둘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도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시편 127:2)”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먹을 것도 제대로 먹지 못하면서 애를 썼습니다. 그러면, 그만한 대가가 주어지고, 수고에 맞는 결과가 나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때 얼마나 낙심 됩니까?

성경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른 열매 맺는 삶의 비결(秘訣)이 나와 있습니다. 이 비결은, 내가 수고한 만큼, 내가 애쓴 만큼, 내가 투자한 만큼 열매를 거두는 것이 아니라, 내가 수고하지 않았는데도, 내가 애쓰지 않았는데도 하나님의 은혜로 열매를 맺는 삶의 비결입니다. 우리가 이 열매 맺는 비결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실패를 경험해 봐야 합니다. 시편 127편에 나오는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라는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애써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비로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은혜로 열매 맺는 삶에 눈을 뜨게 됩니다.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에게 이 비결을 알기 쉽게 포도나무를 예로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포도나무 가지에 열매가 열리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포도나무 가지에 탐스러운 포도송이가 달리려면 가지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참 말도 안 되는 질문 아닙니까? 가지가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가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냥 포도나무에 건강하게 잘 붙어 있으면 됩니다. 잘 붙어 있기만 하면 때가 되면 열매가 저절로 열립니다. 

우리 눈에 보기에는 가지가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가지가 하는 일이 있습니다. 계속해서 포도나무로부터 ‘수액(樹液, tree sap)’을 공급받는 일입니다. 최근에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나무의 수액을 채취해서 먹습니다. 심지어 상품으로 팔기도 합니다. 고로쇠나무나 박달나무의 수액에는 각종 몸에 좋은 미네랄(mineral)이 많이 들어 있어서 건강에 좋다고 합니다. 우리가 많이 먹는 ‘메이플 시럽(maple syrup)’도 단풍나무의 수액으로 만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가지에 포도가 열리기 위해서는 포도나무에서 가지로 ‘수액’이 공급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잘려진 가지나 부러진 가지에는 ‘수액’이 공급되지 않기 때문에 열매가 열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포도나무에 열매가 열리는 원리를 제자들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과 같이(a branch cannot produce fruit if it is severed from the vine, 4절)” 이스라엘 사람들은 포도나무를 많이 재배합니다. 포도 열매를 따서 포도주를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물이 귀한 이스라엘에서는 포도주가 일상적인 음료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과 식사하는 것을 보고 예수님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저 사람을 봐. 저 사람은 술꾼이야. 세리와 죄인의 친구야(마태복음 11:19)” 라고 비난했습니다. 평범한 식탁에 나오는 포도주 잔이지만 예수님을 대적했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술꾼’이라고 비난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포도나무 재배에 익숙한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하나님을 농부에, 예수님 자신을 포도나무에, 그리고 그의 제자들을 가지에 비유하셨습니다(1, 5절). 예수님은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열매를 맺는다는 이 원리를 제자들의 삶에 적용하셨습니다. “내 안에 있어라. 그러면 나도 너희 안에 있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가지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않으면, 스스로는 열매를 맺을 수 없다.” (4절)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한다는 말은 곧 예수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Remain in Jesus). 나는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은 내 안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과 나누는 친밀한 교제(a close fellowship with Jesus)’의 삶을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잘 이해를 못하고 “예수님과 어떻게 친밀한 교제를 할 수 있지?” 하고 질문합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교제하는 방법은 예수님의 말씀을 읽고, 배우고,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으면(if you remain in me and my words remain in you),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이루어질 것이다(you may ask for anything you want, and it will be granted).” (7절)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면 이루어진다는 말씀은 열매를 맺는 풍성한 삶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끝으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어 내 제자인 것을 나타내면 이것으로 내 아버지께서는 영광을 받으신다(My Father is glorified and honored by this, when you bear much fruit, and prove yourselves to be My [true] disciples, Amplified Bible).” (8절) 크리스천의 삶에서 열매 맺는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열매를 맺는 것은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열매를 맺어도 되고, 상황이 좋지 않으면 열매를 안 맺어도 되는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잘 보세요. ‘열매’는 내가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내가 크리스천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특별한 ID를 가지고 다니지 않아도, ‘열매’만 있으면 내가 예수님의 제자인 것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맺는 ‘열매’는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는 ‘증명서(證明書, identification card)’와 같습니다. 여러분이 어디를 가든지 ‘운전 면허증’을 꼭 가지고 다닙니다. 미국에서는 ‘운전 면허증’이 곧 ‘신분증(ID)’이기 때문입니다. 제자의 삶에서 ‘열매’가 꼭 그렇습니다. ‘열매’를 맺는 크리스천은 예수님의 제자라는 신분증을 가지고 다니는 것과 같습니다.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 1832-1905, 영국)’라는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진정한 의미에서 중국 선교의 문을 연 선교사입니다. 그는 중국어로 성경을 번역한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중국의 ‘내지 선교(內地宣敎, Inland Mission)’를 개척한 사람입니다. 허드슨 테일러 이전에 중국에 온 선교사들이 주로 항구 도시를 중심으로 선교했습니다. 그러나, 허드슨 테일러는 교통과 통신 시설이 없는 깊숙한 오지(奧地)로 들어가 선교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그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아니, 해안 지역에도 할 일이 많은데, 왜 굳이 내륙으로 들어가려고 하는가?” 하면서 그를 비난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지함으로써 이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그가 중국에서 선교하는 동안 무릎을 꿇지 않은 채 태양이 떠오르는 날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런 그의 영향력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중국 내지 선교를 위해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테일러가 처음부터 선교사로서 성공했던 것은 아닙니다. 테일러 역시 초기에는 선교의 업적을 남겨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 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불현듯이 요한복음 15장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사람이 내 안에 있고 내가 그 안에 있으면, 그는 열매를 많이 맺는다. 그러나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요한복음 15:5) 허드슨 테일러는 주님의 이 말씀을 읽으면서 크게 깨달았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이렇게 주님께 고백했다고 합니다. “The branch of the vine does not worry, and toil, and rush here to seek for sunshine, and there to find rain. No; it rests in union and communion with the vine...Let us so abide in the Lord Jesus(포도나무 가지는 걱정하지 않고 수고하지 않는다. 그리고 햇볕을 찾거나 비를 맞으려고 달려가지도 않는다. 포도나무 가지는 다만 포도나무와 연합하고 교통하면서 온전하게 붙어 있을 뿐이다. 우리도 주님 안에 온전히 거하자).” 허드슨 테일러는 그 때부터 선교 전략을 수정하고 주님과의 교제에 힘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때부터 그의 선교에 열매가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허드슨 테일러의 이야기를 오늘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요? 크리스천의 삶은 열매 맺는 삶입니다. 하지만, 나의 노력과 열심으로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포도나무 되시는 주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눔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로 열매를 맺는 삶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두가지 삶의 모드(modes)가 있습니다. 자신의 노력으로 성취하는 삶의 모드가 있고, 하나님의 은혜로 성취하는 삶의 모드가 있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두 가지 모드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신명기 8:3)” 이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빵만 가지고는 결코 만족한 삶을 살 수 없다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의 은혜만 있으면 살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무리 애써도 우리의 노력만 가지고는 될 수 없는 한계가 있다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는 최선을 다하면서도 매사에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한다는 것 아닙니까? 

나의 삶에 풍성한 열매가 있는지 반성해 보십시오. 열매가 없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나의 믿음생활을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해 주신 ‘열매 맺는 삶의 비결’에 대한 말씀을 읽고, 주님과의 교제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나의 노력을 통해서가 아닌, 내가 애써 수고하고 대가로 열매를 얻는 삶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열매를 맺는 새로운 크리스천의 삶, 새로운 제자의 삶에 눈을 뜨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10/10/2021 | 창립 43주년 기념 예배

증언 공동체로서의 교회 The Church As A Witnessing Community

마태복음 16:13-20

오늘은 우리 교회 창립 43주년 기념 주일입니다. 1978년에 우리 교회를 창립했던 분들은 상당히 자유로운 사상을 가진 분들이었습니다. 그 분들은 권위주의나 교권주의를 반대하고 자유롭게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교회를 세우고, 다음 세대를 기르자는 목적을 가지고 하바드 스퀘어에 있는 11 Garden Street, Cambridge에서 교회를 시작했습니다.

로마서 12장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으십시오(2절)”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이 NIV 성경에 “Do not conform any longer to the pattern of this world but be transformed by the renewing of your mind)” 라고 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2,000년 전에 말했던 ‘이 세대’는 어떤 세대였을까요? ‘세대(世代, generation)’라는 말은 그 시대의 정신과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2,000년에 살았던 사람들이 가지고 살았던 시대 정신이 어떤 것인지 아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본받지 말라고 한 것을 보면 그 시대 정신이 하나님을 믿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시대 정신이었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정신과 가치관은 어떤 것일까요? 2,000년에 밀레니엄을 시작되면서 많이 나왔던 말이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이라는 말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후기 모더니즘’이라는 뜻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모더니즘’이 끝난 ‘후기 모더니즘 시대’라는 것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무엇인지 한번 들어볼까요? “The postmodern worldview denies that there is such a thing as truth: historical, moral, or otherwise. It denies that truth exists independently of our perspectives and interests(포스트모던적 세계관은 역사적, 도덕적 또는 그 밖의 진리와 같은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인합니다. 그것은 진리가 우리의 관점이나 관심과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합니다).” — Mark Earley(정치인) "Postmodernism was a reaction to modernism. Where modernism was about objectivity, postmodernism was about subjectivity. Where modernism sought a singular truth, postmodernism sought the multiplicity of truths(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에 대한 반작용이었습니다. 모더니즘이 객관성에 관한 것이었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주관성에 관한 것입니다. 모더니즘이 하나의 진리를 추구했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진리의 다양성을 추구했습니다)." — Miguel Syjuco (작가) “We live in the postmodern world, where everything is possible and almost nothing is certain(우리는 모든 것이 가능한 곳에, 하지만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은 포스트모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 Václav Havel (Former President of the Czech Republic)

시대 정신이라는 것은 참 무서운 것입니다. 그 시대에 사는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그 시대 정신의 영향을 받습니다. ‘포스트모던’ 시대 정신으로 사람들의 의식구조가 바뀌고, 가치관이 바뀌고, 전통적인 가치들이 무너지고, 형식이 파괴됩니다. 여러분, MIT 건물 중에 ‘스타타 센터(Stata Center)를 보셨습니까? Frank Gehry라는 건축가가 2004년에 완성한 32 Vassar Street, Cambridge에 있는 건물입니다. $283.5 million이 들었다고 합니다. 위키피디아에 보면 이 건물의 형식은 ‘Deconstructivism(해체주의)’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건물의 형식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 같은 사람이 ‘해체주의’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이 건물이 완성되었을 때 보스턴 글러브에서 이런 기사를 실었습니다. “Stata’s appearance is a metaphor for the freedom, daring, and creativity of the research that occurs inside it(스타타의 모습은 그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연구의 자유, 대담함, 그리고 창의성에 대한 은유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건축뿐만 아니라 음악, 그림, 조각 등 전 예술 분야에, 그리고 문학, 철학 등 삶의 전반에 걸쳐 사람들의 의식구조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포스트모더니즘’이 주장하고 있는 대로 객관적인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믿고 있는 성경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절대적인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모든 것이 상대적인 가치만을 갖는다면 우리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지금까지 우리가 옳다고 믿어왔던 것들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나온 ‘다원주의(多元主義, Pluralism)’는 그동안 기독교에서 믿고 있던 모든 가치들을 부정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절대적인 가치는 존재하지 않고 상대적인 가치만 존재한다는 주장은 크리스천들의 존재 기반을 흔들었습니다. 신학자들 중에 이런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나오고, ‘다원주의’를 옹호하는 “No Other Name(다른 이름은 없다, Paul Knitter, 1985)?” 이런 제목의 책들이 출판되었습니다. 설교자들 중에도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나왔습니다. 결과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은 교회의 세속화를 부추겼습니다. 

이런 때에 우리는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팬데믹 시대’를 맞이하여 2년째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교회는 예전처럼 모일 수 없게 되었고, 온라인 예배라는 형식을 만들어냈습니다. 지금 이 지역의 교회들을 비롯해서 많은 교회들이 대면예배를 하고 있지만, 교인들은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예전의 1/3 정도가 대면예배에 나오고 있다고 합니다. 코로나 시대가 끝이 나도 절대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던 전문가들의 말이 맞았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이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몰라 당황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이 시대의 정신(흐름)을 분명하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흐름을 알아야 대책을 마련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알고 있다시피 벌써 잠에서 깨어날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었을 때보다 더 가까워졌습니다. 밤이 거의 다 지나 낮이 가까웠습니다. 그러므로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로마서 13:11-12) 2,000년 전에 바울은 이 말씀으로 잠자고 있는 크리스천들을 깨웠습니다. 이제 이 말씀을 읽는 우리가 잠에서 깨어나 이 시대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올해로 우리 교회는 창립 43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창립 예배이지만 예전과 같은 축하 분위기가 아닙니다. 이 창립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해야 하겠습니까? 이런 때에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하면서 무기력하게 앉아 있어야 하겠습니까?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과 팬데믹 사태까지, 이 시대의 흐름을 우리는 어떤 관점으로 봐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주관하고 계신다고 배웠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대의 흐름의 배후에 하나님께서 계신다는 믿음을 가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사탄이 교회를 말살하기 위하여 이런 일을 벌이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일들은, 비록 교회가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 일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맞이하고 있는 위기 속에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이 들어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과 함께 나눌 말씀은 마태복음 16장에 나오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곳으로 가셨습니다. 이스라엘 땅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그곳에 ‘가이사 (Caesar, 로마 황제를 지칭하는 이름)’를 숭배하는 신전(神殿)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그곳으로 제자들을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Who do you say I am)?” 이 질문에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이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16절) 예수님은 베드로의 이 대답을 기뻐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복이 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 사실을 너에게 알려 준 것이다. 너는 어느 누구에게 이 사실을 배운 것이 아니다(Because my Father in heaven has revealed this to you. You did not learn this from any human being).” (17절) 그리고,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나의 교회를 세우겠다. 지옥의 권세가 (이 교회를) 이기지 못할 것이다(You are Peter (which means `rock'), and upon this rock I will build my church, and all the powers of hell will not conquer it).” (18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위기를 주신 이유는 교회가 신앙고백을 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원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위기를 통하여 우리 교회가 ‘증언 공동체’로 다시 태어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신앙 고백이 있는 교회는 ‘지옥의 권세(all the powers of hell)’가 이기지 못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지금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고난을 이기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대한 신앙고백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교회가 이 땅에 처음 생겼을 때부터 교회는 예수님의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는 공동체였습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공의회는 다시 사도들을 안으로 불러들여서 매질을 한 후에, 다시는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엄하게 명하고 놓아주었습니다. 하지만, 사도들은 예수님 때문에 모욕당하는 것을 영광이라고 생각하여 오히려 기뻐하면서 공의회를 나왔습니다. 그들은 날마다 성전 뜰에서, 그리고 집집마다 다니며 예수님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복음의 내용을 쉬지 않고 가르치고 전했습니다.” (사도행전 5:40-42)

이 말씀이 시대착오적인 말씀으로 들립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의 크리스천들의 입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진실한 신앙고백이 나오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우리의 ‘주님(the Lord)’으로 삼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주님’이라는 말을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말그대로 예수님이 여러분의 삶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마리아의 이야기는 예수님을 ‘주인’으로 삼는 삶이 어떤 것인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Mary sat at the Lord’s feet and listened to his teaching)." (누가복음 10:39, ESV). 우리는 다시 겸손하게 주님을 주님 되게 하는 신앙고백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는 이 세상이 복음 전파의 현장임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세상은 우리의 삶의 현장을 말합니다. 1806년에 Williams College의 다섯 청년들이 기도했습니다. 이 청년들의 기도 제목은 놀랍게도 “The Field Is The World(세계가 우리의 사역지이다)!”였습니다. 우리는 복음 전파에 대한 이 청년들의 뜨거운 열정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삶의 현장이 곧 우리의 사역지입니다. 내가 일하고, 연구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하고, 돈을 버는 우리의 모든 삶의 현장들이 우리의 사역지입니다. 

보세요. 주님은 제자들에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사도행전 1:8)”고 하셨습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내가 사는 곳을 중심으로 점점 더 확장되어 나가는 이 곳이 어디입니까? 우리의 삶의 현장들입니다. 지금은 어디든지 우리의 일터가 되고 삶의 현장들이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들의 삶의 현장에서 나의 증인들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우리는 예수님이 주신 이 사명을 잊고 살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 명령으로 주신 말씀은 “온 세상으로 가거라.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여라(마가복음 16:15)” 이 말씀이라고 합니다. “Go into all the world and preach the Good News to everyone.” 이 말씀에서 ‘go into’라는 말이 의미심장하게 들립니다. 누가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Go into all the world to start working in a particular type of job or business.” 우리의 모든 삶의 현장에서, 일하고, 활동하고, 얘기하고 하는 모든 일들이 복음을 전파하는 일과 관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일들을 감당하기 위해서 우리 자신들이 주 안에서 올바로 서야 합니다. 우리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바울은 “사랑으로 진리만을 말하고,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모든 면에서 성장하도록 하십시오(에베소서 4:15)”라고 성도들을 권면했습니다. 계속해서 성장하지 않는 크리스천들은 이 시대를 책임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어려운 시대를 우리에게 맡기시고, 우리 교회에게 맡기셨습니다.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과 팬데믹 시기에 우리가 세울 수 있는 대안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나마 이 대안들은 모두 우리가 무관심하면 이루어질 수 없는 것들입니다. 이 시대의 흐름에 영향을 받은 탓인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식어 있고, 형식적인 믿음으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님께 대한 신앙고백을 하고, 이 교회가 예수님을 증언하는 공동체가 되고, 우리의 모든 삶의 현장들이 복음을 전파하는 현장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속 성장하는 크리스천이 되기를 결단한다면, 우리는 이 변화하는 시대를 책임질 수 있습니다. 이 위기를 교회가 새로워지는 기회로 삼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