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2021 |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2)

새로운 사람으로 To Live As A New Person

고린도후서 5: 14-20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서쪽에서부터 구름이 이는 것을 볼 때, 비가 곧 오겠다고 말하면 그대로 된다. 너희가 남풍이 부는 것을 보고 날이 덥겠다고 말하면, 그대로 된다. 위선자들아! 너희가 땅과 하늘의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왜 이 시대는 분별할 줄 모르느냐?” 누가복음 12:54-56에 있는 말씀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왜 예수님께서 자기 시대 사람들에게 ‘위선자’라고 말씀하셨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본래 ‘위선자’라는 말은 가면을 쓰고 연기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무대에 올라간 연극 배우들이 자기가 맡은 역할대로 연기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너희가 날씨를 분별하는 것처럼 너희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이 시대를 분별할 수 있을 텐데, 마치 시대를 분별할 줄 모르는 사람들처럼 연기를 하면서 살아간다는 뜻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2000년 전 예수님이 사시던 시대는 위기(危機)의 시대였습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살아도 괜찮은 때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그 아들을 보내주셨습니다. 그 아들을 영접하는 사람은 구원을 얻고 영접하지 않는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하는 위기의 때였습니다. 그리고 멀지 않아 조국이 멸망하는, 조국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에 놓여 있는 때였습니다. 이런 위기의 시대를 몸으로 느끼신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왜 날씨는 잘 분별하면서 위기 속에 빠져 있는 이 시대는 보지 못하느냐고 책망하신 것입니다.

그로부터 2,0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다시 이 시대를 올바로 분별해야 한다는 요청을 받고있습니다. 유발 하라리가 그의 책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팬데믹 이후의 교육은 지식을 전달하는 교육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시대를 올바로 이해하고 그 속에서 사는 나는 누구인지 올바로 파악하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교육을 받은 사람은 아무리 AI와 테크놀로지가 발달해도 그것들의 지배를 받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은 AI와 테크놀로지가 시키는 대로 따라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정말 AI와 테크놀로지가 사람을 지배하는 세상이 되는 것이다.”

교육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이런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새로운 시대를 살아갈 사람들이 이 말을 들어야 합니다. 시대가 이렇게 바뀌고 있습니다.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왜 이 시대는 분별할 줄 모르느냐?” 하고 책망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유발 하라리 같은 무신론자의 말에 일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크리스천으로서 이 변화의 시대에 일하시는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코로나 이후의 시대는 결코 간단하지 않습니다. 우리 각자가, 그리고 교회들이 구습(舊習)을 좇아서는 안 됩니다. 새 시대에 일하시는 하나님의 일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 시대를 책임질 수 없는 낙오자들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제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고린도후서 5장 본문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말씀에서 중요한 키워드는 ‘새로운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새로운 인간’ ‘새로운 창조’ 혹은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말로 다양하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바울이 왜 여기서 ‘새로운 사람’의 필요성을 말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어쩌면 바울이 살던 시대나,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나 마주하고 있는 상황이 똑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이후의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통하여 그 시대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엄청난 계획을 수행하셨습니다. 이제 역사는 예수님 이전의 역사와 예수님 이후의 역사로 구분될 것입니다. 예수님 이후의 시대는 새로운 시대입니다. 이 시대를 책임 있게 살아갈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하는 중대한 질문 앞에서 바울은 ‘새로운 사람’이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지금 우리는 똑 같은 상황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팬데믹 이후의 시대는 문명사적(文明史的)인 전환(轉換)을 가져오는 시대가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의 흐름을 깨닫지 못하고 대비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시대의 낙오자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의 흐름을 잘 파악하고, 이 변화의 시대를 잘 이해한 사람은 이 시대를 책임 있게, 능동적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어른들도 그렇지만, 청년들은 시대를 진단하는 전문가들의 책들을 사서 읽고, 그들이 분석하는 말들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시대적인 변화에 적극적으로 준비하고 대처해야 합니다. 특히 우리는 크리스천으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시대적인 책임과 사명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저는 오늘 고린도후서 5장 본문 말씀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 말씀은 바울이 2,000년 전에 그 시대를 생각하면서 쓴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도 많은 영감(inspiration)을 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다른 말씀과 다른 이유입니다. 여러분, 히브리서 말씀에 이런 말씀이 있는 것을 아시지요?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Jesus Christ is the same yesterday and today and forever).” (히브리서 13:8) 세상은 바뀌어도 하나님(예수님)은 과거나 현재나 앞으로 올 미래에도 똑 같은 분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놓치지 않아야 하는 것은 동일하신 하나님이 하신 말씀도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변화된 세상에 어떻게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적용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설교를 들을 때나 성경공부를 할 때나 말씀을 묵상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현재의 상황에 적용하는 훈련을 꾸준하게 해 나가야 합니다.

그러면, 바울이 제시하고 있는 ‘새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말씀의 순서와 관계없이 몇 가지 중요한 점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로, ‘새로운 사람’은 새로운 관점(point of view)을 가진 사람입니다(16절). 지금까지 우리가 가지고 살아온 관점이 있습니다. 이 관점을 가지고 우리는 사물을 보고 해석하고 나름대로 거기에 대처해 왔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관점을 갖는다는 것은 예전에 가지고 있던 관점을 버리고 다른 관점을 갖는 것을 말합니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관점을 가지고는 새로운 시대를 해석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좀 더 전문적인 말로 하면 새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paradigm shift(패러다임 전환)’가 필요합니다.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해석의 틀(a frame of reference)’을 가지고는 새로운 시대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담는 사람은 없다. 그렇지 않고 새 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담으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가 쏟아지고, 가죽 부대도 못 쓰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가죽 부대에 넣어야 한다.” (마태복음 9:17) 예수님께서 사시던 시대를 새 포도주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 시대에 살던 사람들은 엄청난 변화와 팽창력을 가진 시대를 마주 대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시대를 어떻게 낡은 주머니에 담을 수가 있겠습니까? 당연히 새 주머니에 담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도 새 부대를 준비해야 하는 시대적인 요구를 받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냥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있고, 변화의 시대를 준비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앞에 놓인 새로운 시대를 생각하면서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전문가들의 책을 읽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새 시대를 준비하는 사람이 있고,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시대를 방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둘의 차이가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약간의 차이가 큰 결과의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둘째로, ‘새로운 사람’은 이전의 것들을 완전히 버리는 사람입니다(17절). 우리는 ‘새로운 사람’이라는 말은 알지만 실제로 ‘새로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잘 모릅니다. ‘새로운 사람’은 그 사람 속에서 이전의 것들이 지나가고 새로운 것이 시작된 사람입니다. ‘A new person is in him the old life has gone and a new life has begun(새로운 사람은 그의 안에서 예전의 것이 지나가고 새로운 것이 시작된 사람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Easy-to-Read Version은 이 말씀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When anyone is in Christ, it is a whole new world. The old things are gone; suddenly, everything is new(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그것은 완전히 새로운 세상입니다. 갑자기 이전의 것들이 지나가고 모든 것이 새로워집니다)!” 아주 멋진 번역입니다.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우리는 ‘새로운 사람’이 되려고 많은 시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새로워진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얼마 안 가서 우리의 노력은 실패로 끝나고 예전에 살던 방식대로 살아갑니다. 옛날 중국 은(殷)나라의 탕이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그는 세수 대야에 ‘일일신우일신(日日新又日新)’이라고 새겨 놓고 아침에 세수할 때마다 새로워져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다행히 탕 임금은 그렇게 해서 30년 재위 기간 동안 나라를 잘 다스렸다고 합니다. 사서오경(四書五經)의 대학(大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우리에게 감동을 줍니다만, 그렇게 해서 정말 얼마나 인간이 새로워질 수 있는지 의문이 듭니다. 목욕을 하고 세수를 하면 몸은 깨끗해집니다. 하지만, 마음이 새로워지는 것은 몸이 깨끗해지는 것과 전혀 다른 문제이거든요.

성경은 새로워지려는 사람의 노력에 대하여 말하지 않고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진다(17절)”고 합니다. 우리 속에는 새롭게 할 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새로워지는 힘은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밖에 있다는 것입니다. 보세요. “내가 진실을 말한다. 네가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I tell you the truth, unless you are born again①, you cannot see the Kingdom of God/①Or born from above).” (요한복음 3:3) 누가 누구에게 한 말입니까? 새로운 인간이 되고 싶어서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라는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born again’이라는 말에 ‘born from above’라는 주(footnote)가 붙어 있습니다. ‘다시 태어난다’는 말은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 사람’이 되는 것은 ‘위로부터’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입어야 되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새로워지는 일에 인간의 노력이 전혀 필요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안 되고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사람이 변화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그리스도를 믿는 것(believe in Jesus)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하는 것(belong to Jesus)입니다.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는 것(under the reign of Jesus)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배우고, 그리스도의 교훈과 그리스도의 인격을 배우고, 실천하고, 닮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알면서도 이렇게 살지 않는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얼마나 행복한지, 얼마나 안전한지, 얼마나 만족한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사는 것이 옳은 줄 알면서도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지난 주 설교에서 말씀드렸던 본회퍼의 말을 한번 들어볼까요? “나를 따르라는 말은 부름을 받았으니 지금까지의 삶에서 떠나라는 말이다. 이 말은 낡은 것과 관계를 끊으라는 말이다. 상대적으로 안정된 생활에서 떠나 불안정한 생활로(사실은 절대적으로 안정된 삶으로) 들어오라는 말이다. 전망할 수 있고 예측 가능한 생활(실제로는 전혀 예측할 수 없는)에서 떠나 전혀 예측할 수 없는(사실은 유일하게 예측이 가능한) 생활로 들어오라는 말이다.” 성경 말씀이 사실인지 아닌지, 또 본회퍼의 이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우리가 그 말씀을 따라 살아봐야 증명할 수 있습니다. 영어 표현에 ‘take a risk’라는 말이 있습니다. ‘위험을 감수한다’는 뜻이지요? 믿음생활은 위험을 감수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믿음생활에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마지막으로, ‘새로운 사람’은 삶의 메시지가 있는 사람입니다(18-20절). 누구를 만나든지 그 사람에게 할 말이 있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새 사람’이 된 사람에게 ‘wonderful message’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 메시지는 “하나님께 돌아오라(Come back to God)(20절)”는 화목의 메시지입니다. ‘화목(和睦))’이라는 말은 ‘reconciliation’이란 말입니다. ‘conciliation’이라는 말에 이미 ‘화목’이라는 뜻이거든요? 앞에 ‘re-‘가 붙으면 ‘다시 화목하라(to make friendly again)’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원래 관계로 돌아가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 화목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 먼저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과 화목한 삶이 어떤 것인지 우리의 말과 행동으로 보여줘야 합니다. 하나님과 화목한다는 것은 외형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한 삶의 변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새 포도주를 담는 새 부대가 되는 것입니다. 과학과 테크놀로지의 발달로 ‘호모 데우스(Homo Deus)’의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화목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새 시대를 살아가는 크리스천의 사명(使命)입니다.


1/10/2021 |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1)

고백이 있는 크리스천 Christians Confessing The Lord Before Others

로마서 10:8-10

성경에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습니다”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로마서 13:11에 있는 말씀입니다. 또 하나 생각나는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에베소서 4:22-24 말씀입니다.

제가 ‘In Times Of Trouble’이란 주제를 가지고 설교를 시작한 것인 지난 해 3월 29일 주일이었습니다. 그 이후 매 주일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힘들어하는 교우들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 말씀을 설교했습니다. 지난 주일까지 40번을 설교했네요.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중에 코로나바이러스를 통해서 이 세상을 바꾸어 나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한 해 마지막 주일 송년예배와 송구영신예배, 그리고 새해 첫 주일 예배에서 코로나바이러스를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설교했습니다.

이렇게 설교를 하는 동안 연일 쏟아지는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한 뉴스와 말씀 묵상, 그리고 이스라엘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 같은 사람의 책과 강연을 통해서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유발 하라리는 예루살렘 히브리대학교의 역사학과 교수로 있는데요. 1978년생으로 불과 43살인데, 세계적인 석학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그가 쓴 책들이 베스트 셀러가 되고 있고요. 뉴욕 타임지에서 선정한 베스트 셀러 1위를 차지했습니다. 한국의 대학들과 방송국에서 이미 여러 차례 강연을 했더라고요. 역사학자이기 때문에 탁월한 분석 능력이 있는 데다가 달변(達辯)입니다. 그의 대표작 ‘사피엔스 (Sapience, 2014)’와 ‘호모 데우스(Homo Deus, 2016)’는 인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쓴 책입니다. 그리고 한 책이 더 있습니다.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2018)’이라는 책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유발 하라리의 말에 모두 찬성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유대인이지만 특이하게도 무신론자이기 때문에 그가 내 놓는 대안 중에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인류의 역사에 대한 분석 능력이 탁월한 것은 인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제 저의 관심은 “그러면, 팬데믹 이후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모아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잠에서 깨어나서 이 시대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주의 깊게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역사학자나 인류학자, 미래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코로나 이후의 세계는 문명사적인 전환(轉換)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삶의 모든 분야에서 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대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이제 우리는 과거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과학과 테크놀로지의 발달은 그 변화의 속도를 더욱 가속시킬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인류가 당면하고 있는 많은 이슈들이 수면(水面) 위로 올라오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전환기를 앞두고 인류가 당면한 문제들에 대해 어떤 결정을 하느냐가 인류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저는 이 변화의 과정 속에 하나님께서 분명히 개입하고 계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세상이 자기의 지혜를 통해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전하는 어리석어 보이는 말씀 선포로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기를 기뻐하셨습니다 (Since God in his wisdom saw to it that the world would never know him through human wisdom, he has used our foolish preaching to save those who believe).” (고린도전서 1:21) 그렇다면, 우리 시대에도 세상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깨닫도록 해야 할 책임이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있습입니다. 과학과 테크놀로지는 눈부시게 발전하는데 사람들이 그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 과학과 기술을 얼마든지 나쁜 쪽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인류가 ‘demonic power(악마적인 힘)’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유발 하라리가 ‘Homo Deus(호모 데우스)’에서 전달하고 있는 메시지입니다. ‘호모(homo)’라는 말은 ‘인간’이란 말이고, ‘데우스(deus)’라는 말은 ‘신’이라는 말입니다. ‘호모 데우스’는 ‘신이 된 인간’이란 말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런 전문가들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습니다. 나라의 정책을 결정하는 사람들은 5년 후에, 10년 후에 인류가 멸망한다고 해도 그 말에 관심이 없습니다. 지금 당장 기후의 변화에 대처하지 않으면 10년 후, 20년 후 인류에게 재앙이 올 수 있다고 경고해도 트럼프 같은 사람을 보세요. 2015년에 각국 정상들이 합의한 ‘파리 기후 변화 협정’에서 우리 미국은 탈퇴한다고 선언하면서 미국의 이익이 먼저라고 했습니다. 이런 정책이 트럼프 지지자들을 열광시켰습니다. 전문가들은 오래 전부터 ‘인공지능(AI)’의 발달은 수많은 사람들의 일자리를 빼앗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국가의 정책을 결정하는 사람들은 이 문제에 대하여 입을 열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 급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팬데믹 이후의 세계에서 인간의 힘은 더욱 강하게 될 것입니다. 인공지능(AI)의 발달과 빅데이터, 그리고 ‘알고리즘(algorithm)’은 인류를 ‘Homo Deus’의 자리에 앉게 할 것입니다. 만일 인류가 이 힘을 ‘demonic power(악마적인 힘)’로 사용한다면 인류에게 돌이길 수 없는 재앙이 될 것입니다. 역사는 인간 중심의 역사로 재편되고, 하나님을 완전히 떠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크리스천의 시대적인 책임은 역사를 움직이는 주체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깨닫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로마서 본문 말씀을 보십시오. “여러분이 만일 여러분의 입으로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라고 고백하고, 또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을 믿으면, 여러분은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마음으로 믿어 의롭다 함을 얻으며,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 (9-10절)

바울이 이 말씀을 쓴 것은 1세기 중간 때입니다. 3차 전도 여행 때 고린도에서 쓴 것으로 보고 있으니까 서기 55-56년쯤 되겠네요. 예수님이 돌아가신 지 불과 20년이 지난 때에 이 말씀을 썼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읽고 충격을 받은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인 것을 마음으로 인정하고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 처음부터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 속에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울의 개인적인 의견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인정하는 사람은, 나도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 앞에서 그를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마태복음 10:32-33) 우리가 어떤 것을 사람들 앞에서 인정한다는 것은 그 일에 책임을 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인정한다는 말은 단순히 그렇게 말을 한다는 의미 외에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나의 삶으로, 나의 행동으로 드러내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 세상을 바꾸고, 교회를 바꾸고 계십니다. 팬데믹을 통해서요. 그렇다면, 이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크리스천들은 어떤 사람들이 되어야 할까요? ‘Confessing Christians (고백하는 크리스천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인이시며 세상을 주관하고 계신다는 것을 입으로, 삶으로, 행동으로 드러내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여러분, 독일의 ‘고백교회(The Confessing Church)’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보셨습니까? 세계 제1차 대전에서 패전하고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야 했던 독일은 땅에 떨어진 국민들의 사기와 자존심을 살려줄 영웅의 출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틈을 타고 등장한 사람이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입니다. 독일 국민들은 히틀러를 총통으로 선출하고 히틀러에게 모든 권한을 부여했습니다. 정권을 장악한 히틀러는 권력을 강화하고 국민들의 권리를 제약하는 조치들을 쏟아냈습니다. ‘반유대주의 법(anti-semitism)’을 만들어서 유대인들을 차별하고 추방하기 시작했습니다. 히틀러는 독일의 교회를 하나의 교회(unified church)로 만들어 통치에 이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히틀러의 정책을 지지하고 찬양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동조하지 않은 교회들이 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만이 복종의 대상이요, 하나님의 계시라는 내용의 ‘바르멘 선언(Barmen Declaration of Faith, 1934)’을 발표합니다. 이 선언을 칼 바르트(Karl Barth)가 초안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 ‘바르멘 선언’을 따라 히틀러에 대한 불복종을 선언한 교회가 ‘고백교회’입니다. 제가 자주 인용하는 본회퍼가 바로 고백교회 목사입니다. 

본회퍼 목사에 대한 이야기를 좀더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본회퍼는 ‘Confessing Christian’의좋은 예를 보여주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1936년에 본회퍼는 교수직을 박탈당하고 나치의 감시를 받기 시작합니다. 신학원은 폐쇄 당했고요. 세계 2차 대전이 시작된 1939년에 본회퍼는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 1892-1971) 교수의 초빙을 받아 뉴욕에 있는 유니온 신학교로 갔지만 고국의 형제들이 겪는 어려움을 외면할 수 없어 다시 독일로 돌아가기로 결심합니다. 그 때 본회퍼는 라인홀드 니버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습니다. “저는 독일의 크리스천들과 함께 우리 조국의 어려운 시기를 보내기로 결심했습니다. 제가 형제들과 함께 이 시대의 고난을 나누지 않는다면 전쟁 후 독일 교회를 재건하는 일에 참여할 권리가 없을 것입니다.” 지금 유니온 신학교에는 ‘Bonhoeffer Room(본회퍼의 방)’이 따로 있다고 합니다.

1943년 4월에 본회퍼는 체포됩니다. 무슨 일로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히틀러 암살계획에 연루되어 있다는 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그리고, 2년 후, 1945년 4월 9일에 39살의 나이로 옥중에서 교수형에 처해집니다. 그의 묘비에는 그가 남긴 유언대로 “여기 그리스도의 제자 디트리히 본회퍼 잠들다” 이렇게 새겨 있다고 합니다. 그는 평생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기를 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것을 그대로 배우고 따르고 실천하는 제자로서 살기를 소원했습니다. 그는 히틀러 암살 계획에 가담하면서 이런 결심을 했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한 사람이 죽어야 한다면 내가 그 일을 하겠다. 그리고 내가 선택한 일에 대한 판단은 하나님께 맡기겠다.” 

지난 주일에 ‘선한 능력으로’라는 찬양을 불렀습니다. 이 찬양 가사를 쓴 사람이 본회퍼입니다. 이 노래의 가사는 1944년 12월 19에 자기 약혼자였던 마리아에게 준 성탄 시였습니다. 이 시의 단어 하나하나에 표현하기 힘든 무게감이 느껴집니다. 그런데 한국 말로 번역된 가사에서는 그 긴장감과 무게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서 아쉬웠습니다. 특히 “믿음으로 일어날 일 기대하네” 이 가사는 정말 잘못된 번역입니다. “우리 앞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인내로 견디며 두려움 없이 맞이할 것입니다” 이렇게 번역해야 합니다.

히틀러의 광기(狂氣)를 바로잡기 위해서 독일의 ‘고백교회’가 등장했듯이, 이 시대가 요구하는 크리스천은 자신이 믿는 것을 확실하게 고백하는 ‘고백하는 크리스천들’입니다. 팬데믹 이후에 있을 엄청난 문명사적인 변화를 예상하듯이, 우리 크리스천의 삶에도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크리스천들이 잠에서 깨어나 이 시대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미니스트리에 적극적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마음으로 인정하고, 입으로, 행동으로, 삶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가 ‘Confessing Christian’으로 산다는 것은 곧 우리의 삶을 예수님의 삶과 일치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Confessing Jesus’로 사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이 시대 속에서 ‘Confessing Christian’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 말씀을 한번 같이 보실까요? “만물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 앞에서 선한 고백을 하신 그리스도 앞에서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흠 없이 그대에게 주신 계명(명령)을 실천할 것을 부탁합니다).” (디모데전서 6:13-14) 자신에게 주어진 막강한 힘을 과시하면서 “나에게는 당신을 놓아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박을 권한도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오?” 이렇게 말하는 빌라도 앞에서 예수님은 무슨 고백을 하셨습니까? “네가 가진 권세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라면, 네게는 나를 해할 어떤 권한도 없다.” (요한복음 19:11) 요셉은 파라오 앞에서 무슨 말을 했습니까? “It is beyond my power to do this, but God can tell you what it means and set you at ease (왕의 꿈을 해석하는 일은 저의 능력 밖의 일입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시고 왕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창세기 41:6) 파라오 앞에서 이런 말을 고백을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이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당신 파라오가 아닙니다. 당신보다 더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세상을 통치하시는 것입니다. 당신은 한 인간에 불과하지만, 하나님은 만유의 주가 되시는 분입니다.” 이런 의미 아닙니까?

히틀러 앞에서 목숨을 걸고 저항했던 고백교회의 목사들, 본회퍼, 그리고 예수님, 사도 바울, 구약에서는 요셉, 모세, 다니엘, 에스라, 느헤미야, 모두 그 시대에 하나님을 고백하고,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팬데믹 이후 문명사적으로 대 전환이 이루어지는 시대에, 과연 우리는 크리스천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시대에 묻혀 시대의 흐름에 떠내려가는 삶을 살지 않아야 합니다. 이제는 잠에서 깨야 합니다. 구습(舊習)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우리가 믿는 것을 더욱 확실하게 고백하는 크리스천으로 살아야 합니다. 입으로만 아니라 삶으로, 행동으로 책임 있게 살아야 합니다.

 


1/3/2021 | 새해예배/In Times Of Trouble 40

여기에도 계시는 하나님 Surely The LORD Is In This Place

창세기 28:10-19

성경에서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만큼 재미있는 이야기도 없습니다. 이 둘은 쌍둥이로 태어났습니다. 에서와 야곱은 태어날 때부터 경쟁적으로 야곱이 형 에서의 발뒤꿈치를 잡고 나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에서과 야곱은 성장하면서도 많은 일화들을 남깁니다. 사냥에서 돌아온 에서는 너무 배가 고팠습니다. 마침 야곱은 부엌에서 팥죽을 끓이고 있었습니다. 사냥으로 배가 고팠던 에서는 야곱에게 팥죽을 좀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야곱이 이상한 말을 합니다. “형이 가지고 있는 장자권(the birthright)을 나에게 주면 팥죽을 줄께요.” 보통 가정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이상한 두 형제 사이의 대화입니다. 그 때부터 두 사람에게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에서보다 야곱을 더 사랑했던 어머니 리브가는 야곱을 에서로 위장을 시켜 아버지 이삭의 축복을 받게 합니다. 이삭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장자 에서에게 줄 축복을 모두 야곱에게 줘 버립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에서는 아버지에게 말씀드리지만 아버지 이삭은 너에게 줄 축복이 없다고 합니다. 화가 날 대로 난 에서는 야곱을 죽이려고 합니다. 하지만 야곱은 이 사실을 알고 하란에 있는 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을 갑니다. 

이런 일이 형제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인가요? 그것도 이삭과 리브가 같은 경건한 믿음의 집에서 말입니다. 이왕 말이 나왔으니까 말씀을 드립니다만, 야곱이 형의 분노를 피해서 삼촌의 집으로 도망가던 때부터 에서는 하나님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하나님의 시선은 야곱에게 맞춰집니다. 하나님께서 리브가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두 나라가 네 몸 안에 있다. 두 백성이 네 몸에서 나누어질 것이다. 한 백성이 다른 백성보다 강하고, 형이 동생을 섬길 것이다 (Your older son will serve your younger son).” (창세기 25:23) 또 말라기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에서는 야곱의 형제가 아니냐? 나는 야곱을 사랑했으나, 에서는 미워했다. 내가 에서의 산악지방을 폐허로 만들고, 그의 땅을 광야의 여우들에게 넘겨주었다.” (말라기 1:2-3) 왜 하나님은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를 미워했을까요?

이런 말씀을 바울이 그냥 지나갈 리가 없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선택의 주권에 대해 말하면서 에서와 야곱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에서에게 무슨 잘못이 있어서 야곱을 선택하고 에서를 버린 것이 아니라 에서와 야곱 두 사람이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하나님은 에서를 버리고 야곱을 선택하기로 결정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을 선택하시는 주권이 완전히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 자신을 성찰하는데 얼마나 중요한 말씀입니까? 악마는 우리에게 이렇게 속삭입니다. “네 삶의 주인은 너 자신이야. 누구도 너에 대하여 이래라 저래라 할 권리가 없어. 네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면 되는 거야. 네 인생은 너의 것이니까!” 하지만 성경은 정반대로 말하고 있습니다. “네 인생의 주인은 네가 아니야. 너의 삶에 대한 주권이 하나님께 있어. 너의 삶에 대하여 결정권을 가지고 계시는 그분의 뜻에 맞춰 살아야 해!”

오늘 읽은 창세기 28:10-19 말씀은 야곱이 하란으로 도망 가던 중 ‘루스(Luz)’라는 곳에서 잠을 자다가 꿈을 꾼 이야기입니다. 아마도 ‘루스’는 인가(人家)가 없는 황량한 광야였을 것입니다. 길을 가다가 밤이 되었습니다. 지친 야곱은 돌 하나를 주워 그 돌을 베고 잠을 청했습니다. 야곱은 지금 자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자초지종을 몰랐을 것입니다. “왜 그날 나는 형 에서에게 그런 말을 했을까?” “왜 나는 형이 받을 축복을 가로챘을까?” “왜 나는 지금 형을 피해서 도망을 가고 있을까?”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야곱은 집에서 아버지, 어머니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면서 행복하게 지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하루 아침에 도망자 되고 말았습니다.

2020년이 시작되었을 때만 해도 지금의 상황을 예측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주일에는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리고, 친구들을 만나 서로 반갑게 껴안고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그렇게 주일을 보내는 것이 일상(日常)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가는 대신 온라인으로 컴퓨터 화면 앞에 앉아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여러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이렇게 예배 드려도 괜찮은 것인가?” 왠지 시간이 흐를수록 집중도 잘 안 되는 것 같고 예배 드리는 것 같지 않습니다. 저희 가정이 속해 있는 가족모임에서도 예배에 대한 말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어서 교회에 가서 예배 드렸으면 좋겠어요.” “예배 드리는 것 같지 않고요. 집중도 안 돼요.” “예배에서 은혜를 못 받으니까 한 주일 내내 힘들어요.” 지금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루스’ 광야에서 돌 베개를 베고 잠을 자던 야곱은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서 사다리 하나를 보았는데, 그 사다리는 꼭대기가 하늘에 닿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다리로 하나님의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고 있었습니다. 사다리 위에 계시는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네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다.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네가 지금 자고 있는 땅을 줄 것이다. 네 자손은 땅의 티끌처럼 많아져서 동서남북 사방으로 퍼지며, 땅 위의 모든 민족들이 너와 네 자손을 통해 복을 받을 것이다. 나는 너와 함께하고 네가 어디로 가든 너를 지켜 줄 것이다. 그리고 너를 다시 이 땅으로 데려올 것이다.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어 주기 전까지 너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13-15절)

야곱은 잠에서 깼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습니다. 똑 같은 황량한 들판, 돌과 모래,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꿈 속에서 들은 말씀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합니다. 지금 야곱은 형 에서를 피해 하란으로 도망가는 중입니다. 손에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습니다. 아무 것도 보장된 것이 없습니다. 이런 야곱에게 꿈 속에서 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터무니없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꿈 속에서 느꼈던 하나님의 숨결이 자기를 감싸고 있다고 느낀 야곱은 이렇게 외칩니다. “난 잘 몰랐지만 하나님께서 이곳에도 계셨구나. 이곳이 천국으로 가는 길이로구나(What an awesome place this is! It is none other than the house of God, the very gateway to heaven)!” 야곱은 베개로 베고 잤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처럼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 꼭대기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의 이름을 ‘하나님의 집(The House Of God)’이라는 뜻으로 ‘벧엘’이라고 불렀습니다. 

여러분, 그 당시에는 아직 성전이 없었습니다. 성전은 없었지만, 사람들은 온 세상이 하나님을 섬기는 제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이유에서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제단을 세웠습니다. 꿈에서 깬 야곱에게 들었던 생각이 무엇이었습니까? “여기에도 하나님이 계셨는데, 난 그걸 모르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저는 이 말씀 묵상하다가 왜 하나님은 야곱을 도망자로 만들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바로 야곱에게 이런 깨우침을 주시려고, 그리고 오늘 저와 여러분이 그 말씀을 읽게 하시려고 야곱을 도망자로 만들지 않았을까요? 야곱이 꾼 꿈은 누가 만들어낼 수 있는 꿈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꿈이었습니다. 야곱이 ‘루스’ 광야에서 돌 베개를 베고 잠이 들었을 때만 해도 야곱은 그곳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더 힘들고 더 외로웠습니다. 야곱은 아버지 야곱의 집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은 그런 곳에 계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나와 같은 사람과 하나님은 함께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런 황량한 광야에 하나님께서 계실 리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던 것이 솔로몬 때에 성전을 짓습니다. 그 때부터 사람들은 성전에 대하여 특별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성전을 하나님이 계시는 특별한 장소라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지금도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걸어 나오면서부터 뭔가 하나님과 멀어지는 느낌이 들기 시작합니다. 집으로 돌아오면 마음이 허전합니다. 비즈니스 현장으로 돌아가면 더 그런 생각이 듭니다. 내가 공부하는 학교, 도서관, 강의실에 하나님께 계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일주일 내내 나 혼자 치열하게 살다가 주일이 되면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들으면서 영적인 굶주림을 채우고, 다시 삶의 현장으로 돌아갑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삶의 현장이란 하나님이 없는 곳이고, 외롭고 힘든 곳이고, 치열한 생존경쟁의 장소일 뿐입니다. 

여러분, 왜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삼 일 만에 다시 세우겠다(Destroy this temple, and in three days I will raise it up).” (요한복음 2:19) 사람들은 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어이없어 했습니다. 이 성전을 짓는데 46년이 걸렸는데, 당신이 무슨 재주로 삼 일만에 짓겠느냐고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하게도 요한이 그의 복음서를 쓰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 해석해 놓았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성전은 그분 자신의 몸을 가리킨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요한복음 2:21-22)

예수님께서 그 때 하신 말씀은 눈에 보이는 성전이 아니라, 예수님의 몸이 성전이 되는 그런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시간과 장소의 제한을 받지 않고 제자들이 있는 곳에 나타나셨습니다. “예배하는 사람들이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이 아닌 곳에서 신령과 진정의 마음으로 예배하는 때가 오고 있다. 바로 지금이 그 때이다.” (요한복음 4:21, 23) 예수님의 부활이 예배에 대한 인식을 바꾸게 될 것이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지금 이 시간까지도 예배의 장소를 교회로 제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불과 한 10개월 전까지만 해도 생각하지도 못했던 일들이 지금 현실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가정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가 되고 있습니다. 오피스가, 일터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가 되고 있습니다. 학교가, 강의실이, 연구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가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코로나바이러스를 통해 예배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생각을 바꾸고 계십니다.

어떤 사람은 “예배를 어디서 드리느냐 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문제입니까?” 하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요. 이 문제가 정말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예배하는 장소에 하나님께서 계신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 여자는 예배하는 장소가 어디가 맞느냐고 물었지만, 예수님은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예배 장소가 문제가 되지 않는 때가 오고 있다 (The time is coming when it will no longer matter whether you worship the Father on this mountain or in Jerusalem) (요한복음 4:21)”고 말씀하셨습니다. 영(The Spirit)은 장소의 제약을 받지 않기 때문에 이제는 온 세상이 영이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이 되는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깨달은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루스’의 황량한 광야, 그리고 나와 같은 도망자가 누워 잠을 청하고 있는 이곳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꿈을 통해서 “난 몰랐는데 여기에도 하나님이 계시는구나!” 하고 깨달은 것입니다. 그랬더니, ‘루스’가 ‘벧엘’이 되고, ‘루스’가 천국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제가 성경 구절 하나 인용할 텐데요.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언제 누구에게 하신 말씀인지 맞춰보십시오. “In all my traveling with the people of Israel I never asked any of the leaders that I appointed why they had not built me a temple made of cedar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과 동행하면서 난 한번도 왜 나를 위해서 백향목으로 만든 집을 짓지 않느냐고 말한 적이 없다).” (사무엘하 7:7) 이 말씀의 요점은 하나님은 어느 한 곳에 계시는 것을 기뻐하지 않고 그의 백성들과 함께 있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내 백성이 광야에 있으면 나도 그 자리에 함께 있는 것이 기쁘고, 내 백성이 힘든 고난의 현장에 있으면 나도 그 자리에 있는 것이 기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예배에 대한 우리들의 생각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우리가 적극적으로 협력해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현장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가 되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곳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지금 온라인 예배 방식이 예배에 대한 생각을 바꾸는 기폭제가 되고 있습니다. 코로나시대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 자신과 교회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변화되도록 협력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2021년 새해는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것들과 과감하게 결별(訣別)하고,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실천하지 못했던 것들을 과감하게 실행하는 한 해가 되게 하십시오. 이것이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우리들의 삶의 방식이 되어야 합니다. 


12/31/2020 | 송구영신예배/In Times Of Trouble 39

내가 새 일을 행하리라 I Am About To Do Something New

이사야 43:18-21

지난 주일 예배 때도 말씀드렸습니다만, 2020년은 코로나바이러스로 시작해서 코로나바이러스로 마치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해결되기는 커녕 많은 나라들이 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하루나 이틀, 혹은 한 달이나 두 달이 아니라 무려 11개월째 인간의 활동에 제약을 받는 이런 일이 과거에 있었던가 싶을 만큼 우리 모두는 특이한 상황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혹시 이런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는가요? “이 또한 지나가리라!” 유명한 말입니다. 라틴어로는 “hoc quoque transibit (혹 쿠오퀘 트란시비트)”라고 하고, 영어로는 “This, too, shall pass away!” 혹은 “This too shall pass!” “This also pass away!” 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의 경전인 미드라쉬에 ‘다윗왕의 반지’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다윗왕이 궁중 세공인(細工人)에게 이런 명령을 내립니다. “내가 낄 반지를 만들어라. 그리고 그 반지에 내가 큰 전쟁에서 이겨 환호할 때도 교만하지 않고, 내가 큰 절망에 빠져 낙심할 때도 좌절하지 않고 새로운 용기와 희망을 얻을 수 있는 글귀를 새겨 넣어라!” 이 명령을 들은 세공사는 아름다운 반지를 만들었지만, 반지에 무슨 글을 새겨 넣어야 할 지 몰라서 몇 날 며칠을 고민하다가 현명하기로 소문난 왕자 솔로몬에게 도움을 청하게 됩니다. 그때 솔로몬 왕자가 알려준 글귀가 바로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였다고 합니다. 세공인은 이 글귀를 반지에 새겨 왕에게 바쳤는데 다윗 왕은 매우 흡족해하면서 세공인에게 큰 상을 내렸다고 합니다. 

우리의 삶이 꼭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성공했을 때 너무너무 기쁘지만 그 시간도 지나갑니다. 그러니 내 성공했다고 해서 교만할 이유가 없습니다. 또 내가 슬프고 절망적인 상황을 만났다고 해도 그 상황도 지나갑니다. 그러니 내가 언제까지 슬퍼하고 절망할 이유가 없습니다. 성공했을 때 교만하지 말고, 낙심될 때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윗에게도 이런 교훈이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팬데믹 같은 엄청난 재난도 언제인지 알 수 없지만 이 또한 지나 갈 것입니다. 팬데믹 후의 인류의 역사는 한 단계 발전하고 진화(進化)할 것입니다. 물론 인류의 역사는 좋은 쪽으로 발전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우리의 삶에 대한 반성이 필요합니다. 나쁜 것, 좋지 않은 것과는 과감하게 결별해야 합니다. 내가 그동안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실천하지 못했던 것들을 과감하게 실천하는 쪽으로 나의 삶의 방향을 다시 설정해야합니다. 이런 말씀이 성경에 있습니다. “여러분도 알고 있다시피 벌써 잠에서 깨어날 때가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었을 때보다 더 가까워졌습니다. 밤이 다 지나고 낮이 가까웠습니다. 그러므로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낮에 활동하는 사람처럼 단정히 행동합시다. 난잡한 유흥을 즐기지 말고, 술 취하지 마십시오. 성적으로 문란하거나 퇴폐적인 생활을 버리십시오. 다투지 말고 질투하지 마십시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십시오. 죄의 본성이 바라는 정욕을 만족시키는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로마서 13:11-14) 크리스천으로서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런 것들을 뒤로 미루지 말고 실천할 때가 되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 1976-) 같은 사람은 코로나바이러스 이후의 세계는 그동안 이루지 못한 개혁을 이루게 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심란한 상황 속에서 2021년 새해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새해에 대한 기대도 있지만, 한편 우리 마음 속에 ‘불확실성(uncertainty)’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새해를 맞이하는 우리는 먼저 이 두려움과 불안을 떨쳐내야 하겠습니다. 우리 마음에 불안이 있다는 것은 곧 우리 마음에 하나님께서 계실 자리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불안을 떨쳐내는 성경적인 방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을 내 마음에 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차지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고라 자손이 썼다는 시편 42편 말씀을 보세요.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내 속에 있는 불안을 의인화(擬人化, personification)해서 불안과 대화를 합니다.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Put your hope in God. For I will still praise him, my salvation and my God) (5, 11절).” 찬송은 하나님께 소망을 두게 하는 좋은 도구입니다. 우리 마음이 무겁고 힘들고 불안할수록 우리는 더욱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간을 늘려야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오늘 읽은 이사야 43장 말씀을 보면, 우리가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새로운 일을 행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읽은 이사야 본문 말씀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잘못 해석합니다. “아, 지난 나쁜 기억들을 훌훌 털어버리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새 일을 생각하라는 말씀이구나!”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이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서 이 말씀을 한번 읽어 보십시오. “But forget all that-it is nothing compared to what I am going to do. For I am about to do something new. See, I have already begun (이 모든 일들을 잊도록 하라. 이 일들은 내가 앞으로 할 일들과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내가 새로운 일들을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내가 이미 시작한 일들을 보라)!”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성경 속에서만 발견하려고 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지금 나의 삶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몇 천년 전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나오는, 성경 속에 갇혀 있는 하나님께 붙들려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그 일들이 놀랍기는 하지만 지금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을 위해서 하고 계시는 일들과 비교하면 정말 아무 것도 아닐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을 위해서 새 일을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을 위해서 하시는 일들은 ‘some¬thing old’가 아니라 ‘something new’입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을 발견해야 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요한복음 1:16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이더라.”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은혜 위에 은혜’라는 말은 그리스 말을 문자적으로 번역한 것입니다. 영어로 직역하면 ‘grace upon grace’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충만한지 은혜 위에 또 은혜가 있다는 표현입니다. 이런 경우 영어에서는 ‘grace after grace’라는 표현을 많이 씁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이만큼이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그 뒤에 또 하나님의 은혜가 줄줄이 따라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끝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그렇습니다. “아, 하나님께서 이런 일을 하시는구나! 굉장하다!” 하면서 그 일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늘 그의 자녀들을 위해서 새로운 일을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목사님 중에 존 파이퍼(John Piper)라는 목사님이 있습니다. 저는 그 목사님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열정(熱情)을 좋아합니다. 여러분들은 차를 타고 가다가 길이 막히면 무슨 생각을 하시나요? “이런 식으로 길을 만든 사람이 누구인가? 여기에다 한국식으로 고가도로(overpass)를 만들면 트래픽 문제가 단번에 해결될 텐데......” 한번쯤 이런 생각을 해 보지 않았습니까?  존 파이퍼 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성경에는 다리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강을 건너시기를 원하신다.” 생각해 보니 정말 성경에는 다리라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하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다리가 되셨으니까 따로 다리라는 말이 필요 없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 앱이나 성경 프로그램을 가지고 계시면 한번 찾아보세요. 한국말로 ‘다리’를 찾지 말고 영어로 ‘bridge’를 찾아야 합니다. 한국말로 ‘다리’를 찾으면 ‘기다리다’라는 말이 많이 나오고, ‘사다리’라는 말도 나오고요. ‘허벅다리’ ‘넓적다리’ 이런 말들이 옵니다. 성경에는 나에게 다가오는 고난을 다리를 건너서 쉽게 피할 수 있는 방법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대신 고난을 겪으면서 하나님을 더 경험하게 되고, 그 하나님과 함께 고난을 이겨 나가는 법을 배우게 합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시겠습니까? “야곱 백성아, 내가 너희를 창조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아, 내가 너희를 만들었다. 내가 너희를 구원하였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희 이름을 불렀으니 너희는 내 것이다. 너희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희와 함께하겠다. 너희가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희를 덮치지 못할 것이며, 불 사이로 지날 때에도 타지 않을 것이고, 불꽃이 너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나 여호와가 너희의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이며 너희를 구원할 구원자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집트를 속량물로 삼아 너희를 구했고, 에티오피아와 스바를 몸값으로 넘겨주어 너희를 내 것으로 삼았다. 너희가 내게는 소중하므로, 다른 사람들의 목숨과 너희를 바꾸어 그들로 너희 대신 죽게 하겠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므로, 너희가 또한 영화롭게 될 것이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이사야 43:1-5) 

매우 중요한 말씀이기 때문에 New Living Translation으로 이 말씀을 읽어 보려고 합니다. “Do not be afraid, for I have ransomed you. I have called you by name; you are mine. When you go through deep waters, I will be with you. When you go through rivers of difficulty, you will not drown. When you walk through the fire of oppression, you will not be burned up; the flames will not consume you. For I am the Lord, your God, the Holy One of Israel, your Savior. I gave Egypt as a ransom for your freedom; I gave Ethiopia and Seba in your place. Others were given in exchange for you. I traded their lives for yours because you are precious to me. You are honored, and I love you. Do not be afraid, for I am with you(내가 너희를 구원하였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희 이름을 불렀다. 너희는 내 것이다. (여기서 구원의 뜻으로 사용된 ‘ransom’이란 단어는 몸값을 치르고 너희를 샀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너희는 나의 것이라고 합니다). 너희가 깊은 물을 지날 때 내가 너희와 함께 할 것이다. 너희가 고난의 강을 건널 때 너희는 빠지지 않을 것이다. 너희가 고난의 불 속을 통과할 때 너희는 불에 타지 않을 것이다. 불꽃이 너희를 삼키지 않을 것이다. 나는 너희가 하나님,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 구세주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가 자유를 얻도록 하기 위해서 이집트를 대가로 지불했다. 나는 너희 대신 이디오피아와 스바를 내주었다. 너희 대신 다른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너희의 생명을 다른 사람들의 생명과 바꾸었다. 너희는 나에게 소중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영광을 받을 것이다. 나는 너희를 사랑한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니 두려워마라).”

이 말씀이 이해가 되시나요? 저는 이 말씀이 2021년에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말씀 중에 ‘ransom’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일반적인 의미는 보석금, 혹은 몸값입니다. 성경에서는 ‘대속물’ 혹은 ‘속죄 제물’이라는 뜻으로 사용합니다. 마가복음 10:45에 예수님은 우리의 대속물이 되시기 위해서 오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속죄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서 이집트, 이디오피아, 스바 이런 나라들이 ‘대속물’이 되었습니다. 우리 머리로 모두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말씀이지만, 요점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서 다른 나라들이 희생되었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 설교에서도 이 문제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이렇게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못하실 일이 없습니다. 자기 아들까지 희생시켜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Others were given in exchange for you. I traded their lives for yours because you are precious to me. You are honored, and I love you (너희를 대신하여 다른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나는 그들의 생명과 너희를 바꾸었다. 너희는 나에게 소중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4절) 이런 성경의 말씀을 머리로만 읽지 말고 마음으로 읽고 가슴으로 읽어 보세요. 이 말씀이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여러분 모두에게 은혜로운 말씀으로, 이 말씀 앞에서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나의 정체성을 발견하는 말씀으로 들렸으면 좋겠습니다.

2021년 새해는 이 하나님과 함께 시작합니다. 우리를 위해서 새 일을 준비하고 계시는 하나님, 다리를 만드는 대신 우리와 함께 어려운 시간들을 헤쳐나가시는 하나님, 우리가 어렵고 힘든 시간을 보낼 때 함께하시는 하나님, 이 하나님과 함께 2021년 새해를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Do not be afraid, for I am with you (두려워할 필요 없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니까)” 그러니 겁낼 필요 없습니다.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불안해할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우리를 위해서 새 일을 계획하고 계시는 하나님과 함께 힘차게 한 해를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12/27/2020 | 송년예배/In Times Of Trouble 38

팬데믹에 들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 God’ Word In The Midst Of A Pandemic

마태복음 10:29-31, 누가복음 13:1-5, 로마서 8:28

오늘은 일년을 마지막으로 보내는 주일입니다. 올해는 코로나바이러스로 시작해서 코로나바이러스로 마치는 해가 되었습니다. 몇 몇 회사에서 백신이 나왔고 접종을 시작했다는 뉴스가 들리는 가운데 미국도 그렇고, 유럽도 그렇고, 한국도 감염자들이 폭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국과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코로나바이러스 변이(變異)가 나왔다고 해서 걱정을 더해주고 있습니다. 변이된 코로나바이러스는 원래 코로나바이러스보다 전파력이 훨씬 강하다고 합니다.

지금 현재 세계적으로 코로나바이러스로 사망한 사람이 1,800,000명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1918년 스페인 독감 때도 전세계적으로 감염자가 나왔습니다. 감기에 걸린 듯한 증상을 보이다가 폐렴으로 발전하는가 싶더니 환자의 피부에서 산소가 빠져나가면서 검은 빛으로 변해 죽어가는 병이었다고 합니다. 그 때 사망자 수가 50,000,000명이었습니다. 사망자 수를 단순히 비교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1918년과 2020년은 전혀 다른 세상이니까요. 지금은 의학적인 지식의 수준이 그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도 발달했습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코로나바이러스로 1,800,000명이 죽었습니다. 이 숫자는 병원에서 확인된 사망자만 카운트한 것입니다. 가난한 나라에서 검사도 받지 못하고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을 것을 감안하면 이번 코로나바이러스로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봐야 합니다. 

팬데믹 초기에는 조심스럽게 성찰의 말들이 나오는 것 같더니만, 지금은 팬데믹 기간이 길어져서 그런지 더 이상 성찰의 말들이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 저는 이런 상황에서 우리 크리스천들이 꼭 들어야 세 개의 성경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첫째로 나눌 말씀은 마태복음 10:29-31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셨을 때 제자들은 상당한 박해를 받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참새 한 마리가 죽고 사는 일에도 하나님께서 관계하신다. 그런데, 너희들은 참새보다 훨씬 더 귀한 존재들인데, 너희들이 받고 있는 박해를 하나님께서 모르시겠느냐?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여기서 참새는 아무 것도 아닌 하찮은 생명을 말합니다.

“God is in control”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하나님께서 통제(統制)하고 계시며, 하나님의 통제를 벗어나서 일어나는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빛도 만들고 어둠도 만든다. 나는 평화를 가져오기도 하고 재앙을 일으키기도 한다. 나 여호와가 이 모든 것을 한다(I form the light and create darkness, I bring prosperity and create disaster; I, the LORD, do all these things).”(이사야 45:7) 우리가 고난 속에 하나님의 뜻이 들어있다고 믿고 고난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를 찾는 이유는 내가 지금 받고 있는 고난이 하나님의 통제 속에서 일어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세계가 고통을 받고 있는 팬데믹은 어떻게 봐야 합니까? 이 팬데믹을 보는 크리스천의 시각은 어떤 것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팬데믹에 하나님께서 관계하고 계실까?” 이렇게 질문하면서 서로 의견들이 분분합니다. 팬데믹에 하나님께서 관계하고 계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렇다면 왜 이렇게 많은 사망자들이 나오는지 이유를 설명해야 합니다. 팬데믹으로 사망한 사람이 몇 명이라고 객관적으로 말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그 사망자 속에 사랑하는 나의 가족이 있고, 나의 친구가 있을 때는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요. 이미 사망자 수가 1,800,000명에 육박하는 이 엄청난 일에 하나님께서 관계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관계하시는 하나님께서 수많은 사망자가 나오는 엄청난 일에 당연히 하나님께서 관계하고 계십니다. 다만 우리가 그 하나님의 뜻을 속 시원하게 말할 수 없어서 답답할 뿐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깊은 뜻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유함은 참으로 깊습니다! 하나님의 판단은 헤아릴 수 없으며, 그분의 길은 아무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로마서 11:33)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이 마치 깊고 깊은 심해(深海)와 같아서 얼마나 깊은지 바닥을 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생각할 말씀은 누가복음 13:1-5입니다. 실로암에 있는 탑이 무너지는 바람에 18명이 깔려 죽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이 일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충격적인 사건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때 죽은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마치 이번 팬데믹으로 죽은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냐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그 사람들이 우리보다 선하게 살지 않았던 사람들일까요? 아니면 그 사람들이 우리보다 조심성이 없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불행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그렇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죽음을 도구로 사용해서 우리에게 교훈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묻습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들의 죽음을 이용하실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그런데, 이게 말이 되거든요? 여러분은 누구의 장례식에 참석해서 내 삶을 반성해 본 적이 없습니까? 그 사람의 죽음을 계기로 해서 좀더 가치 있는 삶을 살아야 되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습니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죽음을 사용하셔서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계시는 것 아닙니까?

사실 우리가 잘 몰라서 그렇지 성경에 그런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 알려주기 위해서 이집트 사람들의 장자들이 죽게도 하셨습니다. 바로의 특수 군대가 모두 홍해 바다에 빠져 죽게도 하셨습니다. 모압, 에돔, 아말렉과의 전쟁에서는 군사력이 절대적으로 열세했던 이스라엘이 승리하게 하심으로써 전쟁은 하나님께 속했다는 교훈을 주셨습니다. 또 하나님의 선택이 인간의 행위에 의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에서의 삶을 이용하시기도 하셨습니다(로마서 9:11-13). 하나님은 첫째 아들 에서를 버리고 둘째 아들 야곱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족보를 이어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지 전부터 그런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고 하지 않습니까?(창세기 25:23, 로마서 9:12).

여러분,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는 걸 아세요? “모압은 나의 목욕통이다. 에돔 땅 위에 내가 신발을 던질 것이며, 블레셋에 대해 내가 큰 소리로 승리를 외친다.” (시편 60:8, 108:9)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But Moab, my washbasin, will become my servant, and I will wipe my feet on Edom and shout in triumph over Philistia.” 여러분, 모압 에돔, 블레셋은 엄연히 주권을 가진 나라들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위해서 이 나라들을 목욕통으로, 신발장으로, 늘 전쟁에서 지는 역을 맡은 나라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이번 팬데믹으로 죽은 1,800,000명에 이르는 사망자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참 아픕니다. 여러분들도 같은 마음일 것입니다. 그 속에 우리의 사랑하는 부모님이 있을 수도 있고, 사랑하는 형제들, 친구들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들의 죽음이 전혀 가치 없는 죽음일까요? 결코 아닙니다. 벌써 하나님께서 그들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엄숙한 교훈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들의 삶을 돌아보게 하셨고, 삶에 대한 겸손한 마음을 갖게 하셨습니다, 

이 설교문을 작성하면서 예수님께서 생애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하셨을 때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면서 우셨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누가복음 13:34에 나오는 말씀인데요. 그 때 예수님께서 우신 이유는 이제 조금 있으면 멸망할 예루살렘이 그것을 모르고 회개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전히 예루살렘은 교만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이 안타까워서 우셨습니다. 저는 그 예수님의 눈물 속에 예루살렘의 멸망과 함께 희생될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안타까워하셨던 마음이 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지금 하나님께서 이번 코로나바이러스로 희생된 사람들을 생각하시면서 2,000년 전에 예수님의 흘리셨던 눈물을 흘리고 계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자기 아들을 내 주신 분입니다. 성경은 그 아들을 ‘begotten Son’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외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자기 아들을 희생해서라도 우리를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자기 외아들을 내 주신 하나님의 아픔과 눈물을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말씀에서 자기 외아들을 우리를 위해 내 주신 하나님에 대하여 이렇게 썼습니다. “자기 아들까지도 아끼지 않고 우리 모두를 위해 내어 주신 분께서 그 아들과 함께 우리에게 모든 것을 은혜로 주지 않으시겠습니까?”(로마서 8:31)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 그만큼 소중한 존재들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를 위해서 자기 아들까지 희생하시신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더 이상 못하실 일이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나눌 말씀은 로마서 8:28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合力)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관계하고 계십니다. 빛도, 어둠도, 재앙도 모두 하나님께서 관계하시는 일들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자녀들에게 교훈을 주시기 위해서 무고한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 분입니다. 저는 이것이 팬데믹을 보는 성경적인 시각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놀라운 것은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모든 일들이 서로 합력해서 선을 이루는 쪽으로 결론이 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에는 이 설교를 하고 있는 저도 알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하지만, 제가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팬데믹이 이 세상을 나쁜 쪽으로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좋은 방향으로 끌고 간다는 것입니다.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서 팬데믹이 끝나서 예전으로 돌아갔으면 하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세계 제1차 대전을 겪고, 2차 대전을 겪으면서 인류의 역사에 커다란 전환점이 생겼습니다. 두 번의 세계 대전을 겪으면서 인류는 엄청난 가치와 의식의 변화를 경험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팬데믹도 우리의 삶을 그렇게 바꾸어 놓을 것입니다. 이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팬데믹과 같은 엄청난 재난이 아니면 일어날 수 없는 변화입니다. 이 변화는 하나님께서 팬데믹을 통해서 하시는 일입니다. 

Fran Bunn이라는 분이 이런 글을 썼습니다. 제목은 “God can bring blessings out of COVID-19 pandemic(하나님은 코비드19 팬데믹을 통해서 우리를 축복하실 수 있다)”입니다. 한번 들어 보세요. “COVID-19 is a bad thing, but there are good gifts that God can bring even from this. As I think about my own life, and maybe this is true for you, through COVID-19, I have been reminded that I do not control my life. COVID-19 has shown me that I am utterly and completely dependent on the living God. If I think I am in control of things, that is merely a pleasant illusion.” 어떻습니까? 나의 삶을 내가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통제하신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결코 쉽게 일어나지 않는 기적과 같은 일입니다. 

팬데믹을 통해서 교회에는 어떤 변화가 있을까요? C. S. Lewis가 많은 책을 썼습니다만, 제일 힘들게 쓴 책은 ‘스크루테이프의 편지(The Screwtape Letters, 1942)’라고 합니다. 그만큼 그 책을 공을 들여 썼다는 말입니다. 그 책은 고참 악마 ‘스크루테이프’가 신참 악마 ‘웜우드(Wormwood)’를 교육한 책입니다. 어떻게 교회를 파멸시키고 크리스천들의 믿음을 파멸시킬 수 있는지 ‘노하우’를 전수해 주는 내용의 책입니다. ‘웜우드’가 관리하던 한 사람이 최근에 교회를 나가게 되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스크루테이프’는 매우 화가 났지만 이렇게 말합니다. “아직 절망할 필요는 없다. 현재 교회는 우리의 가장 큰 협력자 중 하나니까.” 루이스가 보고 있던 교회는 교회 안에 진실한 믿음을 추구하는 사람이 없고, 참된 회개가 없고, 형식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들과 겸손을 가장한 위선자들이 넘쳐나는 교회였습니다. 교회가 본질을 추구하지 않고 큰 건물, 많은 교인 수, 엄청난 교회 예산, 이런 것들에 마음을 쓰고 있는 한 교회는 이미 악마의 협력자가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팬데믹을 겪고 있으서도 팬데믹 이전으로 돌아갈 때를 기다리는 목사나 교인들이 있다면, 그것은 그 사람들에게 ‘a pleasant illusion’이 될 것입니다. 이제 그런 것을 자랑하던 때는 어쩌면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팬데믹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지금 교회를 올바른 길로 이끌어 가고 계십니다. (교회에 대한 설교는 2021년 1월 3일 새해 주일 설교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