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2/2020 | 사순절 넷째 주일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We Are God's People

시편 100편

사순절을 잘 보내고 있는 중에 이런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사순절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께 집중하는 때인데, ‘COVID 19’ 때문에 온통 우리 마음과 생각을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에 빼앗기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주님을 생각하는 시간이 부족한데, 사순절을 맞이해서 새벽기도를 드리면서 우리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했는데,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런 때에 우리 크리스천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해야 할까 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성경을 찾는 중에 ‘시편 100편’ 말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 ‘시편 100편’은 저자가 표시되어 있지 않은 것을 보니, 다윗이 쓴 시편은 아닌 것 같습니다. 보통은 저자가 나와 있거든요. 익명의 ‘사미스트 (psalmist)’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이 시편의 용도는 무엇인지 쉽게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 이 ‘시편 100편’이 사용되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시편 100편’은 예배들 드리러 가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가져야 할 마음을 노래로 만들어 하나님께 올려 드린 것이라고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사미스트’는 제일 먼저 즐거움으로 여호와를 섬기라고 합니다. ‘여호와’는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원래는 하나님의 이름은 יהוה (출애굽기 3:14)입니다. 모두 자음으로 되어 있고 모음이 없거든요. 그래서 발음을 할 수 없습니다.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부르지 못하도록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부르고 싶으면 ‘아도나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 말로 ‘주님’이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어 יהוה를 영어 알파벳으로 표시하면 YHWH인데 모음이 없어 발음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발음을 하기 위해서, ‘엘로힘 (Elohim, 전능하신 하나님)’과 ‘아도나이 (Adonai, 주님)’에 사용된 모음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정확한 발음은 ‘야훼 (Yahweh)’가 되겠습니다만, 영어로 ‘Jehovah’로 표시한 것을 우리 말로 ‘여호와’라고 발음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이렇게라도 이름을 부를 수 있다는 것이 참 감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미스트’는 여호와께 즐겁게 외치고, 즐거움으로 여호와를 섬기라고 합니다. “Worship the Lord with gladness. Come before him, singing with joy”라고 합니다. 여호와를 기쁨을 섬기라, 기쁨으로 예배하라는 말은 자기가 원해서 하라는 말입니다. ‘voluntarily (자원해서)’라는 뜻입니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은, 또 의무적으로 하는 일에는 기쁨이 없습니다. “야, 너 지금 몇 시야? 어서 일어나. 예배 시간 늦겠다” 하면서 엄마가 성화를 부립니다. 그래서 투덜대면서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더 자야 되는데, 억지로 일어났습니다. 그러니 몸 상태도 좋지 않고 짜증이 납니다. 이런 식으로 예배하지 말하는 말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자기가 원해서 하는 일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지금 대학교에 다니는 사람들, 대학원, 박사과정에 있는 사람들, 억지로 공부하고 있다면 그만 두는 것이 낫습니다. 하지만, 이 길은 누가 하라고 시킨 일이 아니라 내가 선택한 일입니다. 좀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이 길은 내가 선택한 일입니다. 이런 간단한 생각만 해도 마음이 훨씬 자유로워집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원해서’ ‘즐거움으로’ 예배 드려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집에서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난 지금의 상황이 그런 의미에서 꼭 나쁘다고 보지 않습니다. 집에 혼자 있습니다. 11시에 컴퓨터를 켜고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아니면 “에이! 졸린 데 더 자자!” 하면서 자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해도 아무도 나를 비난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임원단이라고, 팀장이라고 해서 억지로 교회에 갈 필요도 없습니다. 어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차피 아무도 보지 않는 온라인 예배인데, 내가 어떻게 하든 아무도 비난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남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 지금의 상황이 얼마나 잘 되었습니까? 자기 스스로 일어나서 스스로 예배를 드리는 훈련을 지금 우리는 받고 있는 것입니다. 욥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But he knows where I am going. And when he tests me, I will come out as pure as gold).” (욥기 23:10) 저는 이번 ‘코로나바이러스’ 사태가 끝나면 우리 FKCC에 속한 여러분들이 모두 정금같이 귀한 예배자들로 하나님 앞에 나오리라고 믿습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을 보십시오. 왜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우리의 하나님이심을 아십시오. 그분이 우리를 지으셨으니, 우리는 그분의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백성이며 그분이 돌보는 양 떼들입니다 (Acknowledge that the Lord is God! He made us, and we are his. We are his people, the sheep of his pasture).” (3절) 우리가 주님이라고 부르는 그분은 야훼, 스스로 있는 분인 것을 아십시오. 그분은 우리의 생명을 지으신 분입니다. 우리 생명은 우리가 만든 것 아닙니다. 우리의 생명을 창조하신 분이 계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분의 백성입니다. 그분의 초장에서 보호 받고, 인도 받고, 필요한 것을 공급 받고 있는 그분의 양떼들입니다. 다윗은 이 사실을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The LORD is my shepherd, I shall not be in want, 시편 23:1)”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이 “감사의 노래를 부르면서 그분의 성문으로 들어가십시오. 찬양을 드리면서 그분의 뜰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그분에게 감사하고 그분의 이름을 찬양하십시오 (4절)”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배하는 하나님이 누구인지 ‘acknowledge’하고 나면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는 이유가 분명해집니다. 의무적으로, 억지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과 즐거움으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는 이유가 분명해 집니다. 요한복음 4:23-24에 보면,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in spirit and in truth)’ 예배하라고 했고, 이렇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이 ‘진정한 예배자 (the true worshipers)’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 ‘the true worshipers’는 하나님을 기쁨으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예배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기쁨’과 ‘자원하는 마음’ 그리고 ‘감사하는 마음’이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의 핵심입니다.

오늘 온라인 예배를 드리고 있는 FKCC 여러분들, 비록 집에서 이런 식으로 예배를 드리지만, 감사로, 기쁨으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저는 생각해 봤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감사로 예배 드려야 하나?” “이런 상황에서도 감사로 예배 드리는 것이 가능할까?”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저에게 몇 가지 감사의 이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이번 일로 예배의 귀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배는 항상 원하면 나에게 주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막상 이렇게 되고 나니까 “예배가 이렇게 귀한 것이었구나!” “내가 그동안 예배에 대한 감사를 잊고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막 드는 것입니다. 지난 주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린 마지막 날이었잖아요? 저는 그날 아침 평소보다 좀 일찍 교회에 왔습니다. 예배당으로 올라갔습니다. 예배당 안은 아침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아름다웠습니다. 울컥한 마음으로 사진을 찍었습니다. 아름답지만, 텅 빈 예배당을 찍었습니다. 지금 한 주일 지났습니다. 벌써 우리 마음에 교회에 대한 고마움과 예배에 대한 그리움이 생겼습니다. 겨우 한 주일 지났는데요.

둘째로, 우리는 서로에 대한 감사를 알게 되었습니다. 늘 우리가 만나고 부대끼면서 지낼 때는 잘 몰랐던 것입니다. 지금은 서로 만나는 것이 어렵게 되었습니다. 만나서 차를 마시면서 나누던 교제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우리 생활을 이렇게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우리 속에 공동체에 대한 고마움과 감사의 마음이 더 커지고 있습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했잖아요? “No, in all these things we are more than conquerors through him who loved us.” (로마서 8:37, NIV)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우리에게 예배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커지고, 공동체에 대한 고마움이 더 커지는 이상, 우리는 이번 사태도 넉넉히 이길 것입니다.

셋째로, 이번 ‘pandemic’ (전세계전염병)’ 현상을 보면서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는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왜 이런 일이 일어라는 거지?” 라고 묻습니다. 저는 이것이 감사합니다. 평소에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잘 묻지 않았습니다. 그런데요. 이렇게 문명이 발달하고, 인간의 지식이 확장된 세계에서 그까짓 바이러스 하나 때문에 온 세상이 패닉 상태에 들어갔습니다. 프랑스에서는 무조건 모든 사람들은 집에서 나오지 않도록 했다고 합니다. 집 밖으로 나오려면 특별 허가증을 받아야 한답니다. 하찮은 바이러스 하나 때문에요. 하지만 덕분에 우리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의 뜻을 자연스럽게 묻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감사합니다. 이 “세계가 하나님의 통제 속에 있었구나 (God is in control)!” 이 사실을 크리스천들이 스스로 질문하면서 답을 찾고 있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준 선물입니다.

그러나, 섣불리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단정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신중해야 합니다. 지금 한국에서 섣불리 설교 시간에 이러쿵저러쿵 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말하는 목사들이 있다고 합니다. 제가 보니 모두 하나님의 뜻을 논할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동안 그 사람들이 해 온 일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섣불리 하나님의 심판을 논하다니요? 자기는 그 심판에서 빠지고요? 애매한 사람들만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었다고요? 그런 몰상식한 말을 함부로 설교 시간에, 감히 하나님의 말씀을 빙자해서 그런 말을 하다니요?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technology’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과 ‘technology’를 반대되는 것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technology’ 역시 하나님이 주신 축복입니다. 이렇게 되고 보니, 교회에서 드리던 예배는 당분간 드릴 수 없게 되었지만, 집에서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예배도 드릴 수 있고, 새벽기도도 드릴 수 있고, 찬양도, 성경공부도 온라인으로 드릴 수 있습니다. 물론 직접 교회에 나와서 함께 찬양하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 보다는 못하지만, 이렇게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저에게는 이것이 감사의 이유입니다.

지난 금요일에는 찬양과 성경공부를 온라인으로 드렸는데, 100명이 훨씬 넘게 들어와서 찬양하고 성경공부 하고, 성경공부 후에는 팀 모임도 온라인으로 했다고 들었습니다. 좋은 일입니다. 앞으로 모든 모임들이 그렇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지난 번 성경공부에서 예레미야애가를 공부했습니다. 청년부뿐만 아니라 코아부, 장년부까지 온라인 성경공부에 초대합니다. 이런 말씀이 있었습니다. “The Lord is my portion. Therefore, I have hope in Him!” (예레미야애가 3:24) 이 말씀을 새번역성경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주님은 내가 가진 모든 것, 주님은 나의 희망!” 멸망하는 조국을 바라보면서 예레미야가 혼잣말로 했던 말입니다. 오늘 시편 100편을 쓴 ‘사미스트’도 똑 같은 말을 합니다. “여호와는 선하시며, 그분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그분의 성실하심은 대대로 이어질 것입니다.” (5절) 그의 자녀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다 계획이 있습니다.

FKCC 여러분,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마십시오. 바이러스를 주의하는 것은 좋으나, 두려워하거나 패닉 상태에 빠지지는 마십시오. 혼자 있다는 생각을 하지 말고 교회 친구들과 서로 연락도 하고 지내세요. 요즘에는 ‘Zoom’을 통해서 비디오 통화를 많이 하잖아요? 그리고 지금처럼 시간이 많을 때 한번 하나님의 말씀에 빠져 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3/21/2020 | 사순절 새벽기도 22

나의 교훈은 참된 교훈이다

요한복음 7:14-36

어저께는 그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초막절을 지키기 위하여 결국 예루살렘으로 가셨다고요. 동생들에게는 안 가겠다고 했는데, 결국 혼자 은밀하게 가셨습니다. 그 때는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찾기 위해서 여기 저기 다니면서 예수님을 봤느냐고 묻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감안할 때 예수님의 결정은 매우 지혜로운 결정이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정말 필요한 것이 지혜입니다. 지식은 학교에서 배울 수 있지만, 지혜는 학교에서 배울 수 없습니다. 이런 말씀 아시지요? “All who heard him were amazed at his understanding and his answers.” (누가복음 2:47) 예수님께 하나님이 주신 지혜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에 빠진 사람,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소유한 사람은 하나님의 지혜를 배우게 된다고요.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잖아요?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한 분을 아는 것이 명철의 시작이다 (Fear of the Lord is the foundation of wisdom. Knowledge of the Holy One results in good judgment).” (잠언 9:10)

명절이 절반 정도 지나갔을 때, 예수님은 성전 뜰에 올라가서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사람은 배운 것도 없는데 어떻게 저런 지식을 갖고 있을까?” 하며 놀라워했습니다. 궁금한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예수이 배우지 않은 사람인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아마도 예수님께서 갈릴리 말투를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갈릴리 말투를 가진 사람이라면 율법 교육을 제대로 받았을 리가 없다고 사람들은 판단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는 말은 아주 지혜로운 말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어떤 율법교사들에게서도 들어보지 못한 그런 교훈들이었습니다. 갈릴리에 있을 때도 사람들은 예수님의 교훈을 ‘new traching (마가복음 1:27)’이라고 놀라워했습니다. 판에 박은 듯한 교훈이 아니라 ‘’새로운 교훈’이었고, 예수님의 말씀 속에는 항상 발상의 전환이 있었습니다. 어떤 말씀들은 기존의 전통을 뒤엎는 것들도 있었습니다. 안식일에 대한 말씀이 좋은 예입니다. 사람들은 안식일에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안식일을 잘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안식일이라도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일은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안식일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에는 거부할 수 없는 권위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에게서 온 것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나의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또는 내가 내 자신의 교훈을 말하는 것인지 알 것이다. 자기 자신의 교훈을 말하는 사람은 자기의 영광을 추구하기 위해 말하지만, 그를 보내신 분의 영광을 추구하는 사람은 진실하며 그에게는 거짓이 없다.” (16-18절) 굉장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잘 보십시오. 예수님의 교훈에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교훈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다. 자기 생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예수님의 교훈은 실천할 때 진가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실천해 보면 그 교훈이 사람에게서 온 것인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알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교훈은 자기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그를 보내신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그러자 그 사람이 일어나 집으로 갔습니다.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두려워하며, 사람에게 이런 권세를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And the man jumped up and went home! Fear swept through the crowd as they saw this happen. And they praised God for sending a man with such great authority).” (마태복음 9:7-8) 아니, 이 말씀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네 죄가 용서를 받았다”고 말씀을 하신 분도 예수님이시고, “일어나 걸어가라”고 말씀하신 분도 예수님인데, 왜 사람들은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이런 권세를 가진 사람을 보내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을까요? 누가 그렇게 시킨 것이 아닙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사람들은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이 말은 말에나 행동에서 예수님은 철저하게 자기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구했다는 말입니다. “야, 예수님은 정말 굉장하신 분이구나!”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을 읽는 우리도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이 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 중에 이런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지도자들이 죽이려고 하는 바로 그 사람이 아니냐? 그가 여러 사람 앞에서 이렇게 드러내 놓고 말하여도 지도자들은 보이지도 않는다. 혹시 지도자들도 이 사람을 정말로 그리스도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알고 있다. 그리스도가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25-27절) 저도 궁금합니다. 그렇게 사람들을 풀어서 혹시 예수님을 보았느냐고 찾고 다니는 지도자들은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성전에서 버젓이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는데도 지도자들은 보이지 않습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성경의 답은 한가지입니다. 아직 그의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30절). 아직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져야 할 시간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직 하나님의 ‘right time’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뒤늦게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께서 지금 성전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계시다는 소식을듣고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성전 경비대 (Temple guards)를 보냈습니다. 이 사람들은 유대인 군인들로서 성전을 지키는 임무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 수비대가 들이닥쳐서 예수님을 체포했을까요? 아닙니다. 이 수비대 사람들이 빈손으로 돌아왔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이 “아니, 너희들 왜 빈 손으로 왔느냐? 그 사람을 체포해 오라고 하지 않았느냐?” 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화을 냈습니다. 이 수비대 사람들이 뭐라고 말했는지 아세요? “우리가 그 사람을 체포하려고 갔습니다. 그 사람이 아직도 성전에 있었습니다. 그런데요. 그 사람이 하는 말을 들어 보니 저희들은 여태껏 그 분처럼 말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분에게 손을 댈 수 없어서 그냥 왔습니다.” (요한복음 7:45-46)

이 말씀을 읽으면서 소름이 돋지 않습니까? 십자가를 져야 하는 ‘God’s right  time (하나님의 때)’이 되기 전에는 아무도 예수님께 손을 댈 수 없습니다. 지금의 상황을 통제하는 것은 유대 지도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God is in control”입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시겠습니까? “We may throw the dice①, but the Lord determines how they fall.” (잠언 16:33) / ①Hebrew We may cast lots “We can make our plans, but the Lord determines our steps.” (잠언 16:9) “We can make our own plans, but the Lord gives the right answer. People may be pure in their own eyes, but the Lord examines their motives. Commit your actions to the Lord, and your plans will succeed.” (잠언 16:1-3) 잠언이라는 것이 일종의 격언과 같은 것이잖아요? 그래서 잠언을 영어로 ‘Proverbs’라고 합니다. 일종의 ‘격언 모음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격언이라는 것이 금방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을 두고 사람들의 경험 속에서 얻는 지혜들이 격언으로 만들어지는 것 아닙니까? “시간은 금이다.” 이런 말들은 오랜 시간을 두고 사람들의 경험 속에서 증명된 말입니다. 위의 말씀들은 우리의 삶에 유익한 말씀들입니다. 이 말씀들 속에 삶의 지혜가 녹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 뜰에서 사람들을 가르치다 말고 큰 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알며, 또 내가 어디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 곳에 내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시다.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하지만, 나는 그분을 아는 것이,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은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7:28 -29)

“While Jesus was teaching in the Temple, he called out, ‘Yes, you know me, and you know where I come from. But I'm not here on my own. The one who sent me is true, and you don't know him. But I know him because I come from him, and he sent me to you.’”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심으로 자기의 교훈의 정당성을 주장하신 것입니다. “나를 보내신 분운 참되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나는 그분에게서 왔으며, 그분이 나를 보내셨다. 그러므로, 냐의 교훈은 참되다. 너희가 내 말을 거절하는 것은 나를 보내신 분을 모르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내 말을 실천하는 사람은 그 말이 참되다는 것을 알 것이다.”


3/20/2020 | 사순절 새벽기도 21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신 예수님

요한복음 7:1-13

유대인들이 지키는 명절들이 있습니다. 가장 유명한 명절은 ‘유월절’입니다. 그리고, 초막절이라는 명절도 있습니다. 유월절은 가장 큰 유대인의 명절입니다. 유월절 식사로 유명합니다. 집집마다 양을 잡아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바르고, 그날 저녁 식탁에 쓴나물과 양고기를 올립니다. 집집마다 같은 시간에 유월절 식사를 하는데, 그 집의 아버지가 식사를 인도합니다. 식사이지만 일종의 ritual (식사 예식)입니다. 그리고, 초막절은 ‘Festival of Shelters’라고 했는데, 더 좋은 명칭은 ‘the Jewish Feast of Tabernacles’입니다. 히브리 말로는 ‘Sukkot’입니다. 발음은 ‘쑥커스’ 혹은 ‘쑥캇’이라고 합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서 간단한 ‘booth’를 만들고 거기서 지내는 것입니다. 주로 10월에 한 주간을 거기서 지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그렇게 booth를 만들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 지냈던 때를 잊지 않고 기억하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유대인들의 ‘초막절’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주로 갈릴리 지방을 다니시면서 천국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유대 지방에는 가시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이라고 했지만,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은 유대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 율법학자들, 제사장들, 사두개파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영어 성경에는 “He wanted to stay out of Judea, where the Jewish leaders were plotting his death”라고 나와 있습니다. ‘Jewish leaders’이 예수님을 죽일 계획을 짜고 있었습니다. ‘plot’이란 말이 원래 연극이나 영화, 소설의 줄거리를 말합니다. 줄거리가 치밀하게 잘 짜져야 좋은 작품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만큼 예수님을 죽이려는 계획이 치밀하게 진행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이미 그 때부터 예수님에 대한 유대 지도자들의 반감이 극심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얼마나 미웠으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계획을 짤 수가 있겠습니까? 사람이 미워도 그 사람을 죽인다는 생각은 않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동생들은 예수님을 이번 초막절에 유대, 예루살렘으로 가라고 등을 떠밀고 있습니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 이렇게 동생들이 말한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5절). 아니, 갈릴리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 때문에 난리인데, 왜 예수님의 동생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을까요? 글쎄요. 이런 저런 이유를 생각할 수 있지만, 예수님께서 가족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그 집의 장남이잖아요? 아버지가 죽으면 그 집의 생계는 장남이 책임져야 합니다. 그래서 장남은 유산의 2/3을 받았습니다, 나머지 1/3을 가지고 나머지 동생들이 나누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는 아버지 유산의 1/3을 받았가지고 집을 떠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 요셉이 일찍 죽은 것 같습니다. 요셉이 유산을 얼마나 남겼는지 모르지만 재산이 많지 않으니 유산을 남길 것도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장남은 그 집의 생계를 책임져야 합닌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가족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집에도 잘 들어오지 않았을 것 같고요. 전에 한번 그 말씀을 읽지 않았나요? 예수님의 가족들이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예수님을 찾아 왔다고요. 그 말씀이 마가복음 3:21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And when his family heard it, they went out to seize him, for they were saying, ‘He is out of his mind.’” (English Standard Version) “When His own people heard of this, they went out to take custody of Him; for they were saying, ‘He has lost His senses.’” (New American Standard Bible)

이런 말씀을 읽으면 마음이 아픕니다. 예수님이라고 왜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 없다고 하겠습니까? 예수님도 다른 집들처럼 자기 어머니, 동생들을 돌보면서 알콩달콩 살고 싶은 생각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어떻게 합니까? 예수님께서 자기 가족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넘어서는 큰 비전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가족에 대한 개념도 새롭게 제시하셨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은 모두 내 어머니요, 내 형제이다 (마가복음 3:35)”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천국의 비전 (new wine)’을 품고 실천하는데 참가하는 사람은 ‘새 부대 (new wineskin)’가 되어야 한다고 보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동생들이 예수님께 마음에 품고 있던 불만들을 털어 놓습니다. “형님의 제자들도 형님이 행하는 일들을 볼 수 있도록, 이 곳을 떠나 유대로 가십시오. 누구나 자기가 하는 일이 은밀하게 행해지지 않고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를 바라는 법입니다. 형님이 이런 일들을 행하고 계시다면, 자신을 온 세상에 알리십시오.” (3-4절) Eugene Peterson이 번역한 The Message에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Why don’t you leave here and go up to the Feast so your disciples can get a good look at the works you do? No one who intends to be publicly known does everything behind the scenes. If you’re serious about what you are doing, come out in the open and show the world (아니, 왜 이런 시골에서 이러고 있어요? 이번 명절에 예루살렘으로 가세요. 가서 형님의 제자들도 볼 수 있도록 큰 일을 한번 보여 주세요. 아니면 그만 두시든지요. 정말 이런 일을 계속할 생각이면 왜 아무도 안보는데서 이런 일을 하시는거예요? 세상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밖으로 나오세요).” 예수님의 제일 가까운 형제들, 가족들마저 예수님께서 하고 있는 일에 대하여 불만이 많았습니다. 그만큼 예수님께서 하신 일의 방식이나 내용이 사람들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말씀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늘 ‘human point of view (인간적인 관점)’에서 생각하고 문제에 접근합니다. 예수님은 늘 ‘God’s point of view (하나님의 관점)’에서 문제를 생각하고 접근했습니다. ‘human point of view’를 가진 사람은 ‘God’s point of view’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수제자라고 할 수 있는 베드로도 예수님 옆을 지키고,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도 여전히 ‘human point of view’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길을 막으려고 했던 사실이서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6:23). 우리의 믿음이 자라고, 성숙해 지면서 차차 ‘하나님의 관점이 이렇구나!” 하고 깨닫게 됩니다. 이것을 우리는 “은혜 받았다”고 하기도 하고, ‘변화되었다’라고 말하기도 하고, 일반적인 말로 하면 ‘paradigm shift’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 하지만 너희 때는 항상 준비되어 있다. 세상이 너희는 미워할 수 없겠지만, 나는 미워하고 있다. 이는 내가 세상에 대하여, 또 세상이 행하는 일들에 대하여 악하다고 증언하기 때문이다. 너희는 명절을 지키러 올라가거라. 나는 이번 명절에는 올라가지 않겠다.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 (6-8절)  New Living Translation에 8절 말씀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I'm not going① to this festival, because my time has not yet come." / ①Some manuscripts read not yet going 이 말씀을 “내가 아직은 (지금은) 올라가지 않겠다” 이렇게 번역한 성경 사본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성경 말씀을 보니까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그냥 갈릴리에 머물러 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동생들이 명절을 지키러 올라간 후,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은밀히 올라가셨습니다 (9-10절)”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결국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것인데, 조금 일찍 가고 늦게 가는 것이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큰 차이가 있습니다. 제자들과 또 예수님의 동생들과 같이 올라가면 사람들에게 노출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혼자 올라가면 불필요한 노출을 피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노출을 피하시는 이유는 유대 지도자들과 불필요한 충돌을 일으키면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아주 망칠 수도 있습니다. 11절 말씀 보세요. “The Jewish leaders tried to find him at the festival and kept asking if anyone had seen him (유대 지도자들은 명절에 예수님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만나는 사람들마다 예수님을 보았느냐고 물었습니다).” 지금 상황이 이런 상황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때를 민감하게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실 때도 정확한 ‘하나님의 때 God’s timing)’에 오셨습니다. 좀 이르지도 않고, 좀 늦지도 않고, 모든 사람들에게 구세주에 대한 기대와 소망이 최고로 고조되었을 때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But when the right time came, God sent his Son (갈라디아서 4:4)”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이제 십자가를 지는 일에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있다고 본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정하신 때’를 민감하게 기다리고 계신 사실을 그의 복음서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유월절 바로 전에,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갈 때가 왔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있는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3:1) “Before the Passover celebration, Jesus knew that his hour had come to leave this world and return to his Father. He had loved his disciples during his ministry on earth, and now he loved them to the very end①.” / ①Or he showed them the full extent of his love.

이 말씀에 예수님께서 ‘자기의 때’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계셨다는 사실이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랬것 처럼 우리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생명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삽니다.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다가 죽으면 인생이 끝이 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죽으면 내 삶이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간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누구입니까? 우리의 생명을 창조하신, 우리의 생명의 주인입니다. 그분께로 돌아간다고 믿었습니다. 이 말씀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의 삶이 어디까지 연결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죽으면 내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만일 우리가 이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대답도 분명해 집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면 지금의 삶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위한 준비의 과정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시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시간을 인내하면서 기다리셨습니다. 초막절에 같이 예루살렘으로 가자고 하는 동생들의 요청도 거절하면서 정확한 하나님의 시간을 지혜롭게 기다리셨습니다.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도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있습니다. 인내로 그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조급한 마음을 갖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기도하면서 그 때를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때가 있다고 배웠습니다. 저의 인생의 때는 언제입니까?” 이렇게 물으면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좀 우스운 말이지만, 공이 누구에게로 넘어갔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나의 때를 물으면 공은 누구에게 넘어간 것입니까? 하나님께 넘어간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대답하실 차례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의 기도에 꼭 응답하신다고 믿습니다. 누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물레방아는 천천히 돈다 (The mills of God grind slowly)!” 맞습니다. 서두르지 마십시오. 조급한 마음을 버리세요. 천천히 돌아가는 하나님의 물레방아의 속에 맞춰서 인내하면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십시오. 예수님께서 그랬던 것처럼이요.


3/19/2020 | 사순절 새벽기도 20

영생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요한복음 6:60-71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를 물어 봤더니 이런 대답들이 나왔다고 합니다.


(1) They feel disconnected.
(2) They feel unwanted or not needed.
(3) They feel stagnant or not growing.
(4) The church didn't offer what I wanted
(5) The church didn’t offer good ministry for kids and student
(6) 그 외에 pastor에 대한 불만도 상당수 있고, 교회 재정에 대한 문제, 그리고 교회가 성경적으로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해서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오늘 예수님을 떠난 사람들은 표면적으로는 “이 말씀은 어렵다.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60절)?” 이런 이유를 댔지만, 정말 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떠난 이유가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아까 위에서 말했던 (4)번입니다. 예수님에게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자기들의 꿈을 이루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이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반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꿈과 희망을 나의 것으로 받아 들이고, 예수님의 꿈을 이루는 일에 참여하고 헌신해야 합니다. 교회가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전혀 제공해 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다가 결국 교회를 떠난 사람들이 상당수 있습니다. 제가 경험한 어떤 사람도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가 목사인 나에게 이건 이렇게 해야 하고, 저건 저렇게 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전혀 들어주지 않았다는 이유를 대고 교회를 떠난 사람이 있습니다. 안타깝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 좀 답답하긴 합니다. 원칙을 강조하고 타협을 모르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사람이 내게 오는 것을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도 내게로 올 수 없다’고 너희에게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65절) 이 말씀은 어저께 이미 나왔던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 또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저께 예수님의 이 말씀은 아주 도발적인 말씀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사람들의 자존심을 짓밟고 화가 나게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또 그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저 같으면 그렇게 안 하겠습니다. 어제 그 말 했다가 분위기가 안 좋은 것을 알았으면, 오늘 그 사람을 불러서 차 한잔 마시면서 오해를 풀라고, 내 진심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고 잘 말해 주면 이 사람들이 안 떠났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식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한국에서는 교회가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교회 밖의다른 모임들은 그래도 코로나 바이러스 대책에 잘 호응해 주고 있는데, 몇 몇 교회들은 여전히 예배를 강행하다가 어느 한 교회에서만 50명의 감염자가 나왔습니다. 그렇게 한 교회에서 이렇게 감염자가 많이 나온 것은 좀 무지한 일을 했습니다.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서 교회에 들어 오는 사람들에게 입을 벌리라고 하고 분무기로 소금물을 집어 넣었습니다. 상식 밖의 일입니다. 그렇게 하면 소독이 되어서 바이러스를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분무기를 사용하다가 거기서 감염자가 많이 나왔습니다.

TV에 왜 그럼 그런 작은 교회들이 정부에서 하는 방역 정책을 따르지 않는지 그 이유가 궁금하다고 교회 전문가들에게 묻습니다. 전문가들은 두 가지 이유를 들었습니다. 작은 교회들은 생계형 재정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예배를 몇 주라도 드리지 않으면 헌금이 들어 오지 않아 교회를 운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작은 교회들은 교인들끼리 결속력이 떨어지고, 교회에 대한 헌신도가 떨어지기 때문에 몇 주, 혹은 몇 달 쉬고나면 교인들이 모두 흩어져 교회를 떠날 위험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이해가 됩니다. 개인적으로도 옆에 있던 사람들이 떠나는 것이 가슴 아픈 일이지만, 교회도 그렇습니다. 교인들이 이전 저런 이유로 교회를 떠나면 교회에 큰 상처로 남습니다. 유튜브로 이 새벽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멀리 타주로 이사 가거나 한국으로 귀국하거나 하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누구하고 관계가 불편해서, 누가 나에게 상처를 주었기 때문에, 아까 교회를 떠나는 이유들 말했잖습니까? 제가 보기에 모두 교회를 떠날만한 이유들 아닙니다. 교회를 떠날 생각을 하는 분들이 있다면 다시 한번 신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생명을 주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그러므로 사람의 힘은 전혀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성령의 말씀이고 생명의 말씀이다. 그러나 너희 중에는 믿지 않는 사람이 있다.” (63-64절) 이 말씀이 개역성경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그리고,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The Spirit alone gives eternal life. Human effort accomplishes nothing. And the very words I have spoken to you are spirit and life. But some of you do not believe me.” 이 말씀은 이렇게 번역해야 합니다.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은 오직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내가 너희에게 한 그 말들은 모두 영적인 생명에 대한 말들이었다. 그런데, 너희 중에는 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예수님은 열 두 제자들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너희들도 떠나려고 하느냐?” 예수님의 이 말씀이 아주 측은하게 들립니다. 사도 바울은 동역자의 복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정말 좋은 동역자들이 그의 옆에 있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디모데, 아볼로, 바나바와 같은 사람들이 바울의 좋은 동역자들이었습니다. 의사 누가 같은 사람도 바울의 좋은 동역자였습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데마는 이 세상을 너무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습니다.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떠나고, 디도도 달마디아로 가 버렸습니다. 누가만이 내 곁에 남아 있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그대가 올 때, 마가도 같이 데려왔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그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두기고는 내가 에베소로 보냈습니다.” (디모데후서 4:10-12)

이 사람들이 바울을 떠난 이유는, 바울의 재판 결과가 희망적으로 나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모두 떠나고 누가만 바울 옆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 때, 바울에게 보고싶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디모데입니다. 얼마나 바울이 디모데를 사랑했는지, 심지어 디모데를 아들이라고 한 성경 말씀도 있습니다 (빌립보서 2:22). 또 감옥에서 디모데를 보고 싶어하는 이런 성경구절도 있습니다. “나는 밤낮으로 기도할 때마다 그대를 기억하면서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은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시며, 또한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을 섬기는 것은 진정 나의 기쁨입니다. 나는 그대가 떠날 때에 흘렸던 눈물을 기억하고 있으며, 어서 빨리 그대를 만나고 싶습니다. 다시 만난다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나는 그대의 진실한 믿음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I long to see you again, for I remember your tears as we parted. And I will be filled with joy when we are together again. I remember your genuine faith).” (디모데후서 1:3-5)

예수님은 이미 사람들이 떠나는 아픔을 모두 겪었습니다. 사랑하는 제자에게 배반도 당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일 힘들고 외로울 때 제자들은 예수님을 혼자 두고 모두 떠났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힐 때도 예수님의 옆을 지킨 것은 단 한사람 요한밖에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이미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예수님을 떠난 상태였습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이 자기 곁을 떠나는 아픔을 이미 겪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들입니까? 서로 마음에 상처를 주고, 배반하고, 돌아서는 일이 우리가 원하지 않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그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겪는 아픔과 상처를 이미 다 맛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도울 수 있습니다. 친구의 배신으로 상처 받은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난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께 털어 놓고 기도하십시오.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참 위로와 평안을 주실 수 있습니다.

“너희도 나를 떠나려고 하느냐?” 예수님께서 12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님, 주님께 영생의 말씀이 있는데 우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우리는 주님이 하나님의 거룩한 분임을 믿고 알고 있습니다.” (68-69절)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Lord, to whom would we go? You have the words that give eternal life. We believe, and we know you are the Holy One of God.” 예수님은 생명의 말씀을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이 대답이 예수님을 만족하게 했을까요? 예, 만족하게 했을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머리에 떠오르는 말씀이 있지요?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이렇게 물었을 때, 그 때도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You are blessed, Simon son of John, because my Father in heaven has revealed this to you. You did not learn this from any human being.” (마태복음 16:17) 무슨 말인가요? 예수님은 베드로를 ‘바요나 시몬 (Simon son of John)’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아버지가 있고 어머니가 있는 보통 인간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You did not learn this from any human being. my Father in heaven has revealed this to you (네가 이것을 어떤 인간에게서 배운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알게 해 주신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베드로가 “주님, 주님께 영생의 말씀이 있는데 우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우리는 주님이 하나님의 거룩한 분임을 믿고 알고 있습니다 (68-69절)” 이렇게 말한 것도 베드로가 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알게 해 주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베드로의 입을 통하여 우리가 들어야 할 예수님께 대한 바른 신앙고백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말씀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는 살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속해야 합니다 (We must cling to Jesus Christ to live). 그래야 ‘풍성한 생명 (abundant life)’을 얻습니다. 내가 왜 사는지, 나의 삶의 목적은 무엇인지, 내가 가진 사명이 무엇인지, 삶의 이유와 의미가 분명해지는 생명을 얻습니다.


3/18/2020 | 사순절 새벽기도 19

참된 양식과 음료이신 예수님

요한복음 6:52-59

예수님께서 물고기 두마리와 보리떡 다섯개를 가지고 5,000명을 실컷 먹이시고, 12광주리가 남은 표적은 유대사회에 큰 파장을 불러 일어켰습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자는 사람들도 있었고, 배를 타고 예수님께서 계신 곳으로 찾아 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들에게 너희가 나를 찾은 것은 표적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먹고 배가 불렀기 때문이라고 하시면서, ‘오병이어’의 표적의 의미를 말씀하신 것이 요한복음 6장 전체에 걸쳐 나옵니다. 6장이 71절까지 있어서 매우 깁니다. 그리고, 내용도 좀 어렵고, 반복되는 말씀도 상당히 많아서 집중해서 읽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 상당수가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러자 유대인들은 ‘이 사람이 어떻게 자기 몸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며 서로 다투기 시작했습니다 (52절)” 이런 말씀으로 사작합니다. 그 전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거든요?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을 주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나의 살이다. 내 살은 세상에 생명을 준다.” (51절)

예수님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인자의 살을 먹지 않고, 또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다. 나의 살을 먹고 나의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생을 얻으며, 나도 그 사람을 마지막 날에 부활시킬 것이다. 나의 살은 참된 음식이며, 나의 피는 참된 음료다. 나의 살을 먹고 나의 피를 마시는 사람은 누구든지 내 안에 있고, 나도 그 사람 안에 있다.” (53-56절) 결과적으로 예수님의 이 말씀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떠난 이유는 예수님의 말씀이 알아듣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이 말씀은 어렵다.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제자들 중에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This is very hard to understand. How can anyone accept it? At this point many of his disciples turned away and deserted him).” (요한복음 6:60, 66)

저는 “나의 살을 먹고 나의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생을 얻으며”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예전에 많이 들었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찌개백반!’ 찌개백반이 얼마나 맛이 있든지 그걸 먹으면 온 몸에 살이 되는 것 같고, 피가 되는 것 같다는 뜻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말씀이 좀 이해하기 어렵긴 합니다. 하지만 말씀을 정리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핵심적인 말씀은 55절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살은 참된 음식이고, 예수님의 피는 참된 음료수이다 (For my flesh is true food, and my blood is true drink).” ‘참된 음식과 참된 음료수’라는 말은 먹어서 우리에게 유익한 음식이라는 말이잖아요? 요즘에 개인 유튜버들이 이런 저런 주제를 가지고 방송을 합니다. 구독자가 많은 방송들은 구독자 수가 20만, 30만 그렇습니다. 구독자 수가 60만, 70만 되는 방송도 있습니다. 그런 유튜버들은 수입도 엄청납니다. 그 중에 ‘맥사라’ 라는 미국인 여자 유튜버가 있는데요, 한국에 온지 2년 되었다는데 한국말 공부한 지는 10년 되었다고 하는데요. 한국말 엄청 잘합니다. 그리고, 지금 서울대학교에서 정치학으로 석사 과정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맥사라가 하는 말이 자기는 한국에만 오면 살이 저절로 빠진 답니다. 그 이유가 미국에 있을 때는 패스트 푸드나 정크 푸드를 많이 먹게 되고, 모두 기름진 음식들 안 먹을 수 없는데, 한국에 와서 한식을 먹으면 밥과 김치, 된장찌가, 김치찌개, 비빔밥을 많이 먹게 되어서 살이 저절로 빠진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우리 한국사람들은 한국 음식이 그렇게 좋은지 잘 모르잖아요? 그런데 외국인들이 보는 한식은 건강식이라고 생각이 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살이 참된 음식이고, 예수님의 피가 참된 음료수라면, 무슨 생각이 드나요? 첫째, 그런 음식은 반드시 먹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true food and true drink’이니까 이런 음식은 필수적으로 먹어야 하는 음식이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듭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이 주시는 ‘true food and true drink’는우리 건강에 최고로 좋은 음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보통 다른 음식들은 맛이 있어도 건강에는 별로 좋지 않은 음식들이 많잖아요? 그런데 이 예수님이 공급하시는 ‘true food and true drink’ 건강에 정말 좋은 것이다. 셋째로, 예수님이 주시는 ‘true food and true drink’는 아무리 많이 먹어도 탈이 없습니다. 부작용이 없는 것입니다. 살이찐다든지, 심장에 나쁘다든지, 체한다든지, 설사를 한다든지, 이런 일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식생활 습관을 보면 특이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식사 후에도 물을 마시지 않는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위액이 희석되기 때문에 소화 잘 되라고 그렇게 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글쎄요. 전 잘 모르겠습니다. 넷째로, 예수님이 주시는 이 ‘true food and true drink’는 최고의 quality를 가진 식재료들인데, 이런 quality를 가진 음식을 매일같이 마음껏 먹어도 돈이 들지 않습니다. 요즘에 natural food가 유행인데요. 가격이 보통 식재료보다 많이 비쌉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주시는 ‘true food and true drink’는 최고의 quality를 가진 식재료이면서도 돈이 전혀 들지 않습니다. 다섯째로는, 우리가 음식을 해 먹으려면 돈도 들지만 시간이 많이 듭니다. 마켓에 가서 재료를 사와야지요. 다듬어야지요. 요리를 해야지요. 요리를 해서 맛이 없으면 다 버리게 되지요. 식사 후에 뒷처리과 설거지하는 데 많은 시간이 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주시는 ‘true food and true drink’는 이보다 훨씬 시간이 절약되고 뒷처리도 깔끔합니다. 여섯 번째로, 우리가 하루 세번 식사를 해야 하는 것처럼, 예수님이 주시는 ‘true food and true drink’로 규칙적으로 먹고 마셔야 합니다. 그래야 영적인 건강을 지킬 수 있습니다.

한번 재미 삼아 이런 생각을 해 보았는데, 저도 재미 있네요. 예수님께서 ‘true food and true drink’에 대해 말씀하시고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Anyone who eats my flesh and drinks my blood remains in me, and I in him.” (56절) 이 말씀 읽으면서 어디서 많이 들었던 말씀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예, 맞습니다. 요한복음 15:7-8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But if you remain in me and my words remain in you, you may ask for anything you want, and it will be granted! When you produce much fruit, you are my true disciples. This brings great glory to my Father).”

그럼 모든 말씀이 분명해지지 않나요? “나의 살을 먹고 나의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생을 얻으며, 나도 그 사람을 마지막 날에 부활시킬 것이다. 나의 살은 참된 음식이며, 나의 피는 참된 음료다.” (54-55절)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나와 깊은 교제 (fellowship)을 나누자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참된 양식’이요, ‘생명의 빵’이요, ‘참된 음식’이요, ‘참된 음료’인 나와 깊은 교제를 나누자고 우리를 부르시는 말씀입니다.

“성경을 읽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세가지 이유를 댔답니다. “성경은 너무 어려운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성경을 읽으면 따분할 거 같았죠.” “너무 두꺼워서 읽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졌어요.” 모두 그럴듯한 대답입니다. 대답을 보니 젊은 청년들이 대답한 것 같습니다. 장난으로 그렇게 대답한 것이 아니지요. 본인에게는 이런 이유들이 심각했을 것입니다. 이런 이유들에 대하여 저는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첫째로, 청년들이 자기들이 사용하는 일상적인 언어로 이해할 수 있는 성경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둘째로, 성경이 두꺼우면 낱권으로 얇게 성경을 만들어서 쉽게 가지고 다니도록 해야 합니다. 셋째로, “성경은 이렇게 생겨야 해” 하는 고정 관념을 가지고 책을 만들지 말고, 세련되고 예쁘게 디자인을 해야 합니다. 넷째로, 새로운 세대에 맞도록 미디어 성경을 개발해야 합니다. 지금 나와 있는 형식은 미흡한 점들이 많습니다. 우선 가독력이 많이 떨어지고 불편한 점들이 많습니다. 아마추어들이 뛰어들지 말고 프로그램 전문가들이 뛰어 들어서 젊은 세대의 감성에 맞게 개발해야 합니다. 다섯째로, 성경에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사람이 이런 저런 이유를 댄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성경을 읽도록 계속해서 성경을 읽도록 권장해야 합니다.

“The instructions of the LORD are perfect, reviving the soul. The decrees of the LORD are trustworthy, making wise the simple. The commandments of the LORD are right, bringing joy to the heart. The commands of the LORD are clear, giving insight for living. Reverence for the LORD is pure, lasting forever. The laws of the LORD are true; each one is fair. They are more desirable than gold, even the finest gold. They are sweeter than honey, even honey dripping from the comb. They are a warning to your servant, a great reward for those who obey them.” (시편 19:7-11)

다윗이 쓴 시편인데요. 하나님의 말씀이 이런 때는 이런 말씀으로, 저런 때는 저런 말씀으로, 이렇게 다양한 옷을 갈아 입고 그의 앞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끝으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나의 살을 먹고 나의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생을 얻으며, 나도 그 사람을 마지막 날에 부활시킬 것이다. 나의 살은 참된 음식이며, 나의 피는 참된 음료다.” (54-55절) 이 말씀은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과의 깊은 교제로 초청하는 말씀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교회는 이 예수님과의 교제를 예식 (ritual)으로 만들어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과의 교제를 공동체적으로 경험하게 합니다. 이것이 ‘성만찬’입니다. 성만찬에서 마시는 포도주는 예수님의 피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먹는 빵은 예수님의 살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포도주와 빵을 먹으면서 우리의 삶이 예수님의 삶과 연합되는 것을 경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