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9/2019 |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IV) To Live As A Christian

마태복음 5:13-16

오늘날처럼 크리스천의 의미가 혼동 스러운 때가 과거에 없었습니다. 과거에는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의미가 분명했습니다. 크리스천은 서구의 발전된 문화와 문명을 받아들이는 사람들로 생각되었던 때가 있었고, 나라를 개혁해야 한다는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로 생각되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또 크리스천은 제사를 지내지 않고, 술을 먹지 않고,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사회적 인식이 생겼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크리스천은 어떤 사람들인지 생각하기가 매우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만큼 크리스천의 사회적인 영향력이 축소되었습니다. 사회적인 영향력이 미미해졌습니다. 오히려 교회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뉴스가 실리면 “또 교회에서 골치 아픈 일이 생겼나 보다” 이런 시각으로 교회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최근에 한국교회에서 대표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한 대형교회의 ‘담임 목사 세습’에 대한 뉴스가 실렸습니다. 며칠 전에 그 교회가 속한 교단 (denomination)의 총회가 열렸습니다. 총회에서 그 교회의 ‘담임 목사 세습’이 정당한지 최종 결정을 내렸습니다. 총회 대표들은 사회적인 인식과 동떨어진 세습이 정당하다는 결정을 내림으로써 연일 뉴스에 오르고 사회적인 지탄을 받고 있습니다.

이걸 알아야 합니다. 지금은 사회적인 인식의 수준이 과거와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은 벌써 저만큼 생각하고 있는데, 교회는, (물론 모든 교회가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사회적인 인식의 수준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교회가 사회적인 인식의 수준을 높이는 선구자적 역할을 했습니다. 이제는 정반대로 교회가 구태의연한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한국의 그 대형교회의 그런 결정은 한 교회의 문제로 끝난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의 민낯을 세상에 드러내 보인 것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질문해야 합니다.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계속해서 이 질문을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You are salt of the earth)!” (13절)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 (14절) 이 예수님의 말씀 속에 오늘 우리가 고민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한 대답이 들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예수님의 이 말씀을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저의 눈에는 ‘of the earth’ ‘of the world’라는 말이 들어 옵니다. ‘of’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 보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preposition used to indicate spe-cific identity or a particular item within a category (그 범위 안에 있는 특별한 정체성이나 특정한 물건을 가리키는 전치사로 사용된다)’ 이 말을 예수님의 말씀에 적용해 보면, 크리스천은 세상에서 소금의 정체성을 지켜 나가고, 빛의 정체성을 지켜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잘 이해가 안 되시지요? 크리스천은 주변 환경이 어떻게 변하든지 자기가 있는 곳에서 소금으로서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지켜 나가야 하고, 크리스천은 언제, 어느 곳에서도 빛으로서 자기 정체성을 지켜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소금의 정체성은 ‘짠 맛 (salty flavor)’을 내는 데 있습니다. 크리스천은 ‘짠 맛’을 계속 유지해야 합니다. ‘짠 맛’이 들어가면 썩지 않습니다. 신선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소금에 절여서 오랫동안 먹거리들을 보관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만, 제가 처음 미국에 왔을 때 왜 그렇게 음식들이 짠지 먹기가 힘들었습니다.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을 사서 먹는데, 맛은 있는데, 왜 그렇게 짠지, 엄청 짰던 생각이 납니다. 마켓에서 감자 칩 (potato chips)을 사 오면 왜 그렇게 짠지 먹기가 힘들었습니다. 지금은 건강에 대한 생각들이 높아져서 ‘salty’한 것도 있지만 소금이 들어가지 않은 ‘unsalty’한 것도 있고, 소금이 적게 들어간 ‘less salty’한 것들도 다양하게 나옵니다. 우리가 먹는 고추장, 된장도 얼마나 짭니까? 엄청 짭니다. 그런데, 짠 것이 건강에 나쁘다는 생각들이 많아지니까 고추장, 된장도 소금을 많이 넣지 않은 ‘less salty’한 것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아시지요? 소금은 생명을 유지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것입니다. 소금을 먹지 않으면 생명을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다큐멘터리를 좋아합니다. 예전에 나왔습니다만 ‘차마고도 (茶馬古道, Ancient Tea Route)’라는 다큐멘터리가 있습니다. 중국의 내륙지방 사람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 험하고 험한 산중에 자동차가 지나갈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물론 예전에는 자동차가 없었겠지요. 그 험한 절벽에 겨우 사람 하나 지나갈 수 있고, 말 한 마리가 지나갈 수 있는 길을 만든 것입니다. 그 길로 상인들이 지나다니면서 차 (tea)와 생활 필수품들을 사옵니다. 다큐에 나오는 한 마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 첩첩 산중 마을에 한 우물이 있습니다. 그 우물이 깊은 지하에 있기 때문에 물을 퍼 날라야 합니다. 신기하게도 그 우물에서 소금물이 나옵니다. 마을의 여자들이 하루 종일 쉬지 않고 소금물을 길어 올라와서 염전(鹽田)에 붓는 일을 계속합니다. 소금을 만들어 자기들도 사용하고, 그 소금을 팔아서 필요한 생활용품들을 사는 것을 보았습니다.

크리스천은 이렇게 세상에서 소금의 짠 맛을 유지해서 세상이 부패하지 않도록 지켜 나가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크리스천은 짠 맛을 유지해서 세상에 생명을 공급하는 일을 계속해야 합니다.

그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만, 이 사람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야크 (yak)’라는 동물이 있습니다. 소처럼 생긴, 초원에 무리 지어 사는 야생동물입니다. 그 사람들이 ‘야크’를 길들여서 젖을 짜서 치즈를 만들고, 고기도 먹고, 가축을 이용하고, 물건을 나르기도 합니다. 이 야생동물들이 사람에게 길이 들어 도망가지 않습니다. 이 야생동물들이 사람을 떠나지 않는 이유는 사람들에게 소금이 있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초원에서 풀을 뜯는 ‘야크’가 소금을 섭취하기 어려운데, 사람들이 소금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소금 때문에 길이 들어 사람을 떠나지 못하고 온갖 고생을 합니다. 재미 있기도 하지만, 조금 슬픈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다시 짠맛을 가질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게 되어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힐 뿐이다.” (13절) 지금은 어떻습니까? 크리스천들이 소금의 짠 맛을 잃어버렸습니다. 소금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아무 쓸모가 없게 되어 밖에 버려져 세상 사람들에게 밟히고 있습니다.

빛은 어떻습니까? 크리스천은 어떤 환경에서도 자기가 있는 자리에서 빛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빛으로서의 크리스천의 역할을 ‘산 위에 있는 동네 (도시), a city on a hilltop)’에 비유하셨습니다. ‘산 (언덕) 위에 있는 동네’는 멀리서도 잘 보이지 않겠습니까? 우리 선조들은 이 말씀에서 지혜를 얻어 교회를 지을 때 마을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도록 언덕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고된 일을 하다가 멀리 언덕 위에 세워진 교회를 보면서 마음에 위로와 평안을 얻도록 그렇게 한 것입니다.

또 하나, 예수님은 빛으로서의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등잔 위에 있는 램프 (The lamp on a lamp stand)’에 비유하셨습니다. 램프를 켜서 등잔 위에 올려 놓아야 방 전체를 밝힐 수 있습니다. 바닥에 내려 놓거나 뭘로 덮어 놓으면 사람들이 그 빛을 볼 수가 없습니다. 크리스천은 산 위에 있는 동네와 같이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어야 하고, 등잔 위에 올려 놓은 램프와 같이 주변을 밝히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아니, 너 교회에 나가니?” “응.” “그런데 왜 나에게 말 안 했어?” “네가 안 물어 봤잖아? 물어보면 말하려고 했지.” 두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주고 받습니다. “아니, 교회에 나가세요?” “예. 뭐.....” “그렇군요. 전 전혀 몰랐어요.” “예,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주고 받습니다. 이 대화에 어디가 잘못된 곳이 있습니까? 잘못된 곳이 많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네가 크리스천이라는 사실을 ‘언덕 위에 세워진 마을’처럼 모든 사람들이 알게 하고, 등잔대 위에 올려 놓은 램프처럼 주변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라는 것이지 않습니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In the same way, let your good deeds shine out for all to see, so that everyone will praise your heavenly Fa-ther.” (16절) “이와 같이, 너희의 선한 행동이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비치도록 하여라. 그렇게 해서 모든 사람들이 하늘에 계신 너의 아버지를 찬양하도록 하여라.”

요즘에 ‘선한 영향력 (good influence)’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크리스천으로서 세상에,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 주변에, 내가 있는 삶의 현장에서 좋은 영향력을 끼쳐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말처럼 우리가 세상에서 이렇게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런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소년이 학교에서 편지 한 장을 가져왔습니다. 그 때는 아무도 이 편지 한 장이 우리의 삶을 바꾸어 놓을 줄 몰랐습니다. 이 아이는 집에 와서 선생님이 줬다고 하면서 이 편지를 엄마에게 읽어 달라고 했습니다. 엄마는 편지를 한번 훑어 본 후에 큰 소리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의 아들은 천재입니다. 우리 학교는 이 아이를 가르치기에 너무 작은 학교입니다. 이 아이를 가르칠 좋은 선생님이 없습니다. 당신이 아이를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엄마는 선생님의 말을 따랐습니다. 병에 걸려 죽는 순간까지, 엄마는 천재인 자기 아들을 가르쳤습니다. 엄마가 떠난 지 수년이 지나 아들은 유능한 발명가로 성장했습니다. 어느 날, 아들은 엄마가 남긴 유품을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그 유품 중에 오래 전에 학교 선생님이 엄마에게 보냈던 편지가 들어 있었습니다. 아들은 그 편지를 읽어 보았습니다. “당신의 아들은 저능아입니다. 우리 학교는 더 이상 이 아이를 받아줄 수 없습니다. 이 아이에게 퇴학 처분을 내립니다.” 아들은 그 편지를 읽고 눈물을 쏟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토마스 에디슨은 저능아였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그를 이 시대의 천재로 만들었다.”

우리는 ‘선한 영향력’을 말하기 전에 먼저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말만 가지고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부패했습니다. 썩었습니다. 어둡습니다. 그 어머니의 저능아 아들처럼 절망적입니다.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어머니가 저능아인 아들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처럼, 우리도 이 세상을 포기하면 안 됩니다. 아시지요? 이사야 (Isaish)가 보았고, 하박국 (Habakkuk)이 보았던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비전을 말입니다. “물이 바다를 덮듯이, 그 땅에는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가득 찰 것이다 (As the waters fill the sea, so the earth will be filled with people who know the Lord).” (이사야 11:9, 하박국 2:14) 두 선지자가 살았던 기원전 700-600년은 온 나라가 우상숭배에 빠지고, 외세의 침략으로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았던 시대였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비전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입에서 “세상이 다 그렇지 뭐” 이런 말이 나오지 않아야 합니다. 세상이 변화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공부해야 합니다. 이 희망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 희망을 가지고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만일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하겠느냐? 서로가 소금을 지니고 화목하게 지내라.” (마가복음 9:50) 마태복음에 나오지 않는 말씀이 첨가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Salt is good for seasoning. But if it loses its flavor, how do you make it salty again? You must have the qualities of salt among yourselves and live in peace with each other.”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우리가 계속해서 소금으로서 ‘qualities (질)’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으니, 우리가 계속해서 세상에서 빛의 ‘quali-ties’를 계속 유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지는 삶입니다. 말로만 하지 말고, 내가 소금의 qualities, 내가 빛의 qualities를 유지하고 있는지 먼저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9/22/2019 |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III) To Live As A Christian

요한복음 13:12-17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오늘 여러분과 세 번째 말씀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냥 주일날 교회 나간다고 크리스천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 활동을 한다고 크리스천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Christian’이라는 말을 사전에 찾아 봤더니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1) ‘a person who exhibits a spirit proper to a follower of Jesus Christ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합당한 정신을 보여 주는 사람)’ (2) ‘a person who professes belief in the teachings of Jesus Christ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한 믿음 (신념)을 고백하는 사람)’ (3) ‘a person who exemplifies in his or her life the teachings of Christ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 (말씀)을 그의 삶에서 증명할 수 있는 사람) 비록 사전에 나오는 간단한 정의 (definition)이지만, ‘크리스천’이 어떤 사람들인지 핵심적인 내용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 속에 우리가 따라야 하는 신념이나 가치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믿음, 희망, 사랑, 기쁨, 평화, 선 (goodness), 자비 (mercy), 동정 (compassion), 이타심 (利他心, unselfishness), 겸손 (謙遜) (humility), 섬김 (service), 용서 (forgiveness), 화해 (reconciliation), 십자가, 고난 (suffering), 회개 (repentance), 거듭남 (born again), 구원 (salvation), 천국 (the Kingdom of God), 이런 것들이 크리스천들이 믿음을 가지고 따라야 할 가치들 (values)입니다.

크리스천이라고 하면서 이런 가치들을 따르지 않는다면 죄송하지만 크리스천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예전에 ‘전도폭발 훈련’에 갔다가 들은 이야기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전쟁에 나갔습니다. 가까스로 그 전쟁에 승리했습니다. 비록 전쟁에 이기긴 했지만 자기 군사들에게도 많은 희생이 있었습니다. 알렉산더는 그 전쟁에서 용감하게 싸운 군인들에게 상을 주었습니다. 알렉산더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전쟁 중에 도망치는 것이었습니다. 알렉산더 앞에 전쟁 중에 도망쳤던 앳되게 보이는 한 청년이 붙들려 왔습니다. 이 청년은 두려움으로 떨고 있었습니다. 알렉산더는 “이 어린 아이가 전쟁에 나왔으니, 얼마나 무서웠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얘야,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물었습니다. 이 청년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알렉산더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버럭 소리를 질렀습니다. “뭐라고, 네 이름이 뭐라고?” 놀란 이 청년은 다시 대답했습니다. “제 이름은 알렉산더입니다.” 알렉산더는 이 청년의 멱살을 잡고 “야, 이 놈아, 네 이름을 바꾸든지, 아니면 당장 네 태도를 바꿔라!” 이렇게 화를 냈다고 합니다. 

우리도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을 바꿔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보여 주는 가치들을 소중하게 여기고 그 가치들을 실천하지 않으려면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을 다른 이름으로 바꿔야 합니다. 목회 경험 속에서 많은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만하면 교회생활을 잘한다고 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서 결코 없어지지 않는 이기적인 모습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도 목숨까지는 몰라도 자기 중심적인 이기적인 삶을 버려야 야 할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If any of you wants to be my follower, you must turn from your selfish ways, take up your cross daily, and follow me).” (누가복음 9:23)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내가 살아왔던 ‘selfish ways (이기적인 삶의 방식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기적인 삶의 방식’에서 돌아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계속 예수님을 따라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hypocritical Christians (위선적인 크리스천)’이 됩니다. 결코 진실한 크리스천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잘 아시겠지만, 이기적인 생각을 버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합니다. 또 무슨 일을 보면든지 자기 중심적으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라 (You must turn from your selfish ways daily)”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 중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시다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시더니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더니, 대야에 물을 부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수건으로 닦아 주셨습니다. 누가 말릴 틈도 없이 갑자기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제자 베드로의 발을 씻기려고 하는데, 베드로가 강력하게 예수님을 말렸습니다. “제 발은 절대로 씻기지 못하십니다.” 베드로의 말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네 발을 씻기지 않으면, 너는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 이 말에 베드로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주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된다고요? 그럼 제 발만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십시오!”

우리는 그 당시 유대나라의 풍습을 잘 모르기 때문에 이 말씀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잘 알 수가 없습니다. 유대나라는 기후가 건조합니다. 비가 내리는 우기(雨期)가 잠깐 있긴 합니다만, 그 외에는 비가 오지 않는 건조한 기후입니다. 그래서 밖에 외출하고 들어오면 손과 발이 먼지 투성이가 되기 때문에 손발을 씻어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여기에 종교적인 의미를 부여해서 외출하고 돌아 오면 반드시 발을 씻고,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도록 율법에 규정해 놓았습니다. 이것을 ‘유대인의 정결예식 (the Jewish custom of purification)’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어느 집에나 손과 발을 씻을 수 있는 물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2:6). 주인이 외출하고 돌아오면 그 집 하인들이 주인의 발을 씻어 주는 것이 그 당시의 풍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말씀을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의 발을 씻어준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이 점을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방금 전에 너희에게 행한 일이 무슨 뜻으로 한 것인지 이해하겠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님’ 또는 ‘주님’이라고 부르는데, 너희 말이 맞다. 그런데, 내가 너희 발을 씻겨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겨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그대로 너희도 행하게 하려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너희가 이것을 알고 그대로 행하면 복이 있을 것이다 (Do you understand what I was doing? You call me `Teacher' and `Lord,' and you are right. I, your Lord and Teacher, have washed your feet, you ought to wash each other's feet. I have given you an example to follow. Do as I have done to you. If you know these things, you are blessed if you do them).” (12-15, 17절)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읽으면서 “예수님께서 섬김의 본을 보여 주셨다”고 생각 하면서 가볍게 지나갑니다.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하고, 이 일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깊이 생각해 보지 않습니다. 이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 말씀인지, 또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은 ‘섬김 (service)’이 무엇인지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섬김’은 제자가 선생의 말을 씻어주는 ‘섬김’이 아닙니다. 또 하인 (servant)이 주인 (Master)의 발을 씻어주는 ‘섬김’이 아닙니다. 정반대입니다. 선생이 제자의 발을 씻어주는 ‘섬김’입니다. 주인이 하인의 발을 씻어주는 ‘섬김’입니다. 예수님은 그 당시 행해지고 있던 풍습, 그 당시에 행해지던 관습을 혁신적이라고 할 만큼 완전히 뒤집어 엎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섬김’을 실천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본을 따라 ‘섬김의 삶’을 실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자기가 가진 것을 남김 없이 다 내주고 빈 손으로 간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사용하던 방에 이런 글이 붙어 있었다고 합니다. “성공이 아니라 섬김입니다 (Not success, but service).” 왜 이 사람이 이런 삶을 살았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독일 사람이, 남자도 아닌 여자가, 아무 연고도 없는 조선이라는 미지 (未知)의 나라에 와서 이렇게 남김 없이 자신을 내 줄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 살겠다는 이유 밖에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이 사람의 이름은 ‘엘리자베스 쉐핑 (Elizabeth Shepping, 1880-1934, 독일)’입니다. 32살의 나이에 조선에 들어와 22년 간 조선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주고 54살의 나이에 영양실조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또 한 사람 소개하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데이빗 리빙스턴 (David Livingstone, 1813-1873, 영국)입니다. 그는 평생 아프리카의 탐험가로, 선교사로 살았습니다. 그 당시 유럽은 아프리카를 전혀 몰랐습니다. 그저 미개한 땅으로만 알았습니다. 리빙스턴의 노력으로 아프리카의 지도가 그려질 정도였습니다. 그는 글래스고 (Glasgow) 대학에서 신학과 의학을 공부하여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얼마든지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는데, 아프리카로 건너가 60살의 나이에 아프리카 ‘잠비아 (Zambia)’에서 생을 마쳤습니다. 그가 고국을 방문할 때마다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왜 당신은 자신의 행복을 버리고 그 같은 삶을 선택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하여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I am a missionary, heart and soul. God had an only Son and He was a missionary and a physician, I am a poor, poor imitation of Him, or wish to be. In this service I hope to live; in it I wish to die (나는 마음도 영혼도 선교사입니다. 하나님께 외아들이 있었는데, 그분 역시 선교사이셨고, 의사였습니다. 나는 겨우 겨우 그분을 흉내내는 것에 불과합니다. 난 그분을 닮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이 같은 섬김을 계속하면서 살다가 죽기를 원합니다).” 또 그는 이런 말도 남겼습니다. “People talk of the sacrifice I have made in spending so much of my life in Africa. It is emphatically no sacrifice. Say rather it is a privilege (사람들은 내가 나의 생의 많은 시간을 아프리카에서 보냈다고 나의 희생에 대하여 말합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것은 전혀 희생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내가 누린 특권이었다고 말해 주십시오).”

‘섬김 (service)’의 삶은 주님을 따르는 삶의 방식입니다. ‘섬김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이기적인 삶의 방식을 버리고 예수님이 보여 주신 삶의 방식을 따라야 합니다. 자신을 대단한 존재로 여기는 사람은 ‘섬김의 삶’을 실천할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Though he was God, he did not think of equality with God as something to cling to, but made himself nothing, taking the humble position of a servant (그는 하나님이셨지만, 하나님과 동등하다는 것에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을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고 겸손한 종의 위치를 가지셨습니다).” (빌립보서 2:6-7) 이 말씀이 이해가 되십니까? 자기가 어렵게 소유한 것을 성공의 발판으로, 출세의 기회로 삼으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은 이 말씀을 죽어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잘 이해하고, 주님의 겸손을 닮으려고 하는 사람이 되어야 ‘섬김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의 손길을 통해서 진정한 ‘섬김의 삶’이 무엇인지 배웠습니다. 이것은 결코 잊어버릴 수 없는 살아 있는 경험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섬김을 받고자 하는 유혹이 생길 때마다 자신들의 발을 씻어 주신 주님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주님은 내가 너희에게 보여 준 섬김의 본을 잘 깨닫고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은 복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정말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이 어떤 것인지 보여 주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정말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길이 어떤 길인지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churchgoer (습관적으로 교회 다니는 사람, a person who goes to church habitually)’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보여 주신 ‘섬김의 삶’을 실천하며 사는 것입니다.


9/15/2019 |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If God Is For Me

창세기 39:1-6

여러분, 구약성경에 나오는 ‘요셉’이라는 사람에 대하여 들어 보셨습니까? 영어로 ‘조셉 (Joseph)’이라고 하는데, 이 이름에 “May God add or increase (하나님께서 더해 주시기를)”라는 뜻이 있습니다. 아들 이름을 ‘요셉’ (Joseph)’이라고 지은 사람들은 아마도 자기 아들이 성경에 나오는 ‘요셉’ 같은 사람이 되라고, 하나님께서 이 아이를 축복하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렇게 이름을 지었을 것입니다.

구약성경 창세기 (Genesis)에 ‘요셉’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창세기 30장부터 50장까지, 무려 21장이 한 사람 ‘요셉’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 사람에 대해 기록한 분량이 많다고 해서 꼭 그 사람이 중요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요셉’의 경우는 그에 대한 기록의 분량도 많고, 또 그만큼 중요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요셉’은 성장기를 매우 불행하게 보냈습니다. 위로 형이 열 명이 있었습니다. 아버지 야곱에게 라헬 (Rachel)과 그 언니 레아 (Leah)라는 두 아내가 있었습니다. 언니 레아는 남편 야곱 (Jacob)이 라헬을 더 사랑하는 것을 알고 아기라도 많이 낳아서 남편의 사랑을 받으려고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레아는 열 명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아이를 낳지 못한 라헬이 가만 있을 리가 없습니다. “저도 자식을 낳게 해 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죽어 버릴 거예요 (창세기 30:1)” 하면서 남편을 졸랐습니다. 그러다가 어찌어찌 해서 라헬이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요셉’입니다. 야곱은 ‘요셉’을 끔찍하게 사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요셉’은 형들의 미움을 사게 되고, 급기야 이집트로 팔려가게 되었습니다. 그 때 ‘요셉’은 은 20세겔 (shekels) (8 ounces에 해당, 140불 정도)에 팔렸다고 합니다 (창세기 37:28).

그 때 ‘요셉’의 나이가 열 일곱 살이었습니다. 열 일곱 살이면 지금으로 말하면 고등학생 정도 되었을 나이입니다. 아직도 부모의 사랑과 도움이 필요한 때인데, ‘요셉’은 이집트로 팔려 간 것입니다. ‘요셉 사건’으로 야곱의 집안은 풍비박산(風飛雹散)이 났습니다. 아버지 야곱은 ‘요셉’이 죽은 줄 알고 날마다 슬픔에 잠겨 살았습니다. 형들은 형들 대로 그런 아버지를 보면서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요셉의 어머니 라헬 역시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 죽었으니, 얼마나 상심이 컸겠습니까?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의 구원의 이야기는 이제부터 ‘요셉’에게 맞춰진다는 것입니다. 궁금한 것은 어린 ‘요셉’이 이집트에서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노예로 팔려 왔으니 남들처럼 교육을 받을 기회가 전혀 없었습니다. 문화가 다르고, 말이 다른 이집트에서 ‘요셉’이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나중에 나오는 사실이지만 이스라엘 사람들과 이집트 사람들은 말이 통하지 않아 손짓 발짓을 하거나, 아니면 통역(通譯, interpreter)을 세워야 의사 소통이 되었습니다 (창세기 42:23). 그런데, 이상하게도 성경에는 노예로 팔려 온 ‘요셉’의 고생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그 때 ‘요셉’의 고생에 대하여 할 말이 많을 것 같은데, 성경에는 ‘요셉’의 고생에 대한 말씀이 나오지 않습니다.

대신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의 주인은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으로 그가 모든 일에 형통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His master saw that the LORD was with Joseph, and the Lord gave him success in everything he did).” (창세기 39:2-3) ‘his master (그의 주인)’는 ‘보디발 (Potiphar)’이라는 이집트 사람을 말합니다. 보디발은 ‘an Egyptian officer, the captain of the guard for Pharaoh (이집트의 관리, 이집트 왕 바로의 경호실장)’이었다고 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보디발이라는 사람이 괜히 바로의 경호실장이 아니구나! 보디발에게 사람 보는 눈이 있구나!” 또 하나는 “도대체 ‘요셉’의 이야기는 앞으로 어떻게 전개되고 어떻게 끝이 날 것인가?” 하는 기대감입니다.

요즘에 ‘소향’이라는 한국 가수의 노래를 많이 듣습니다. 특히 ‘소향’이 부른 노래들에 대한 외국 vocal coaches (노래 코치들)의 분석을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소향’이 휘트니 휴스턴 (Whitney Elizabeth Houston, 1963-2012)이 부른 ‘I Have Nothing (나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을 불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전문 보컬 코치들에게 소향의 ‘I Have Nothing’을 분석해 달라고 요청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보컬 코치들은 이 노래는 휘트니 휴스턴 말고는 부를 사람이 없는 노래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 노래가 어렵기도 하지만 휘트니 휴스턴 보다 더 잘 부를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노래를 터키의 ‘엠레 (Yücelen)’라는 보컬 코치가 분석을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와, 처음 시작이 잔잔하게 나가는 것이 매우 좋습니다. 완벽한 두성 (head voice)입니다. 마치 이제 곧 일어날 엄청난 일을 예고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직 결정적인 파트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과연 소향이 그 부분을 휘트니 휴스턴 보다 더 잘 부를 수 있을까요?”

정말 그렇습니다. ‘요셉’이 이집트의 실력자 보디발의 집에 팔려 온 것은 앞으로 일어날 엄청난 일들의 서곡에 지나지 않습니다. 보디발은 사람 보는 눈이 있었습니다. 최근에 자기 집에 팔려 온 히브리 노예 소년 ‘요셉’이라는 사람을 눈 여겨 보았습니다. “야, 요 녀석, 보통 녀석이 아니구나!” 보디발은 ‘요셉’에게 이 일 저 일을 시켜 봅니다. 집안 일도 시켜 보고, 농사 일도 시켜 보고, 가축을 돌보는 일도 시켜 봅니다. 그런데, ‘요셉’에게 시킨 일마다 다 잘 되는 것입니다. 보디발은 “히브리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들었는데, 요 녀석에게 그가 믿는 하나님이 함께 하는 것이 분명하구나!” 이렇게 생각한 보디발은 ‘요셉’에게 그의 집안 일을 모두 맡겨버립니다. 오늘 읽은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리하여 보디발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요셉’에게 맡겼습니다. 보디발은 자기가 먹는 음식 말고는 ‘요셉’이 하는 일에 참견하지 않았습니다.” (6절) 여러분, 도대체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히브리 노예 소년 ‘요셉’에게 그 엄청난 재산, 그의 집안 일을 완전히 맡겨 버리고 일체 참견하지 않는다니, 이게 말이 됩니까? 그 때 ‘요셉’의 나이가 겨우 스무 살 안팎이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잘 보십시오. 지금 성경은 ‘요셉’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엄청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요셉’ 이야기는 ‘요셉’이 이집트에 팔려 옴으로써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이 말은 뒤집어 말하면, ‘요셉’에게 이집트로 팔려 오는 불행한 일이 없었더라면 성경에 나오는 ‘요셉’ 이야기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는 편안한 삶을 좋아합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합니까?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비록 그것이 편안한 삶이라고 할지라도) 이야기를 드라마로 만든다면, 누가 그런 드라마를 보겠습니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이야기에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그루브 (groove)’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말로 번역하면 ‘홈’ 혹은 ‘골’이라는 뜻입니다. “그 음악에 그루브가 있다, 없다”이런 말들을 하거든요? 아무리 박자와 리듬을 잘 맞춰서 정확하게 연주해도 박자와 리듬에 변화를 주는 그루브가 없으면 재미 없고 지루한 음악이 되고 맙니다. 골프 클럽에도 ‘groove’가 있거든요? 골프 클럽 헤드에 길게 옆으로 패인 홈들이 있는데, 이 홈들을 ‘groove’라고 합니다. ‘groove’ 덕분에 공을 때리는 순간 마찰력이 생겨 그린 위에 멋지게 공을 세우거나 백스핀을 넣어서 공을 딸려오게 만드는 묘기를 연출할 수 있습니다.

‘요셉’의 삶은 ‘groove’가 많은 삶입니다. 고난과 우여곡절이 많은 삶입니다. 여기 저기 패인 ‘홈’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요셉’의 삶 속에 개입해 들어오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습니다 (The Lord was with Joseph)”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니까 ‘요셉’의 삶 속에 난 그 수많은 ‘grooves’는 오히려 ‘요셉’의 삶을 드라마틱하게 하기 위해 꼭 필요한 긍정적인 요소가 되었습니다.

이제 여러분의 이야기를 해 볼까요? 보스턴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여러분의 앞날에 어떤 일들이 있을지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힘든 일들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은 여러분이 보스턴에 왔기 때문에 생기는 일들입니다. 보스턴에 오지 않았더라면 생기지 않았을 일들입니다. 하지만, ‘요셉’의 삶이 그렇듯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이야기를 쓰시는데 ‘groove’가 꼭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겪게 되는 ‘groove’ 속에 여러분의 삶을 드라마틱하게, 그분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가시려는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이 들어 있다는 말입니다.

“내 삶 속에,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이 들어 있다고요?” 하고 놀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For I know the plans I have for you. They are plans for good and not for disaster, to give you a hopeful future (너희를 위한 나의 계획을 알고 있다. 그 계획은 재앙이 아닌 희망이 넘치는 미래를 주는 좋은 계획이다).” (예레미야 29:11) 이 말씀에 나오는 ‘너희’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백성들 (the people of God)’입니다. 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구입니까? 바울은 로마서 8:28에서 이 사람들은 ‘those who love God and are called according to his purpose for them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그들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합니까?”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의 삶 속에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이 들어 있습니다. 여러분을 보스턴으로, 여기까지 인도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앞으로 여러분이 보스턴 생활에서 겪게 될 수많은 ‘grooves’는 여러분의 삶의 이야기를 드라마틱 하게 만들어 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일들이 될 것입니다.

‘요셉’의 이야기는 해피 엔딩으로 끝이 납니다. ‘요셉’은 이집트의 총리가 됩니다. ‘요셉’은 7년 기근 (famine)으로 고통을 받던 식량 문제를 지혜롭게 해결합니다. 모든 나라들이 양식을 구하려는 사람들이 이집트로 돈을 싸 들고 몰려 옵니다. ‘요셉’ 덕분에 엄청난 부가 이집트에 쌓이게 되었습니다. 이 돈을 관리하는 사람이 ‘요셉’이었습니다. ‘요셉’의 손을 거쳐 막대한 돈이 들어오고 양식이 나갔습니다.

‘요셉’ 이야기를 하면서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제가 읽은 책 중에 찰스 스윈돌 (Charles R. Swindoll) 목사님이 쓴 ‘Joseph: A Man of Integrity and Forgiveness (순전한 믿음으로 꿈을 이룬 사람, 1998)’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감동을 받았던 책입니다. 스윈돌 목사님이 그 책 거의 끝부분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요셉은 끝까지 요셉답게 살아야 했다. 그는 끝까지 그가 믿었던 하나님을 대면하면서 살았다. 식량을 분배하는 일은 공정하고 질서 있게 이루어졌다. 모든 돈은 합법적인 구좌에 입금 되었다. 아무런 뇌물도, 상납금도 없었다. 그는 해외에 비밀 구좌를 만들어 돈을 빼돌리는 일을 하지 않았다. 그에게 은밀한 비자금이 없었다. ‘요셉’은 순전한 인격으로 맡은 일을 수행하였고, 이집트 사람, 가나안 사람, 히브리 사람, 기타 다른 민족들의 생존을 보장하였다. 그가 수년 전에 보디발의 집에서 일을 했을 때도, 그는 지금과 같은 성실함을 보여 주었다. 20년이 지난 지금, 그의 신분과 역할은 크게 바뀌었지만, 그의 성품은 전혀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p. 243)

왜 우리에게 ‘요셉’ 같은 인물이 없습니까? 안타깝습니다. 그가 받은 학위를 발판으로 출세하고 성공한 사람들은 많은데, 왜 ‘요셉’ 같은 큰 인물은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요셉’과 같은 인물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제는 우리 조국을 위해서 ‘요셉’ 같은 인물이 나타날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은 여러분을 이곳 보스턴으로 오게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겪게 될 ‘groove’를 탓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그 ‘grooves’은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을 갖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grooves’를 주목하지 말고, 여러분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9/8/2019 |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II) If God Is For Me

출애굽기 14:5-14

보스턴에 학업을 위해서, 혹은 직장 때문에 처음 오신 분들,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환영하는 이유는 여러분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도시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이곳에는 세계 최고 수준의 학교들이 있고, 병원들이 있습니다. 보스턴의 사계절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그 중에 가을은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시간이 있을 때 찰스 강변을 한번 걸어 보십시오. 메모리얼 드라이브에서 보스턴 다운 타운을 바라보며 한번 걸어 보십시오. 세상에 이런 아름다운 곳이 있을까요?

저는 주일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이런 제목으로 시리즈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이 두 번째 설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뭔가 엄청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어렵고 힘든 일을 만나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뭔가 쉽게 일이 풀릴 것 같은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오늘 읽은 출애굽기 말씀 속에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할 두 가지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우리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직면했을 때 “가만히 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13-14절 말씀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두려워 하지 마시오! 그저 가만히 있기만 하시오. 여호와께서 여러분을 위해 싸워 주실 것이오 (Do not be afraid. The LORD will fight for you; you need only to be still (New Living Translation).”

이 말씀을 배경으로 만든 영화가 유명한 ‘십계 (The Ten Commandments, 1956)’입니다. 찰튼 헤스튼 (Charlton Heston)이 모세 역으로 나온 명화(名畵)입니다. 찰튼 헤스튼은 영화 ‘벤허 (Ben-Hur, 1959)에도 주인공으로 나옵니다.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배우입니다.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앞에 홍해 바다가 가로막혀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뒤에서는 이집트의 왕 바로 (Pharaoh)의 특별 전차 (the best chariots) 600대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추격해 왔습니다. 각 전차에는 전쟁 경험이 많은 장교들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60만이었다고 합니다. 여자와 어린 아이들을 합하면 200만명 정도 되었을 것으로 보지만, 모두 전쟁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었고, 비무장(非武裝)이었습니다. 손에 싸울 무기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앞으로도 갈 수 없고, 뒤로도 갈 수 없는 절대절명의 위기에 빠졌습니다.

아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쩌다가 이런 막다른 길로 쫓기게 되었습니까? 그 때 백성들을 인도한 사람은 모세였습니다. 모세의 나이는 80세였습니다. 모세가 누구입니까? 나면서부터 이집트의 궁전에서 공주의 아들로 자랐습니다. 모세에 대한 성경의 기록을 보면 모세는 “이집트 사람들의 모든 지혜를 배워 말이나 행동에서 뛰어난 능력을 드러냈다 (Moses was taught all the wisdom of the Egyptians, and he was powerful in both speech and action, 사도행전 7:22)”고 했습니다. 그가 배운 이집트의 학문 중에 분명히 전쟁에 필요한 ‘전술학 (Tactics)’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집트의 왕자가 이런 것을 배우지 않았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출애굽에 대한 성경 말씀을 읽다 보면 이상한 구절을 만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뒤로 돌아서 비하히롯 앞에서 진을 치라고 말하여라. 그 곳은 믹돌과 홍해 사이이며, 바알스본 맞은편의 바닷가이다 (Order the Israelites to turn back and camp by Pi-hahiroth between Migdol and the sea. Camp there along the shore, across from Baal-zephon).” (출애굽기 14:2)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모세는 똑똑한 사람입니다. 전술학적으로, 바다를 앞에 놓고 캠프를 치는 법은 없습니다. 적이 기습해 올 경우 피할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도저히 전술적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말씀이었지만,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 결과, 이런 절망적인 상황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때 절망적인 상황을 맞이했던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들의 절망 속에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가 들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겪는 고난과 절망 속에 우리가 당장에 알 수 없는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가 들어 있다는 것이 크리스천의 생각입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여러가지 곤란한 상황을 맞이하게 됩니다. 어려운 일이지만 내가 노력하면 해결될 수 있는 문제들도 많이 있습니다. 학생들이 치르는 시험 (test)이 그런 것입니다. 열심히 공부하면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절망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민족이 그런 절망적인 상황을 맞게 되었습니다. 이 상황은 작전을 세운다고 해서 해결되는 상황이 아닙니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싸운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훈련도 안 된 사람들이, 손에 무기도 없이, 바로의 전차 부대를 어떻게 당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두려워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 (You need only to be still). 그리고 내가 어떻게 너희를 구원하는지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Be still"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 뭔가 하려고 하지 않고 조용히 있으라는 것입니다. “Be still!”이라는 말은 네가 뭘 어떻게 해 보겠다는 생각을 멈추고 가만히 하나님만 바라 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즐겨 부르는 찬양 중에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오직 주만이 나의 반석, 나의 구원 이시니, 오직 주만이 나의 산성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 (My soul desires only God. My salvation comes from him. Only the LORD is my rock and my salvation. Only LORD is my fortress, so I will not shake)” 이런 찬양이 있잖아요? 시편 62:1-2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의 모든 노력을 중단하고 하나님만 바라보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잠깐 보류하고 다음 말씀을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대신 싸워 주시는 것을 보라고 합니다. 세상에, 하나님이 대신 싸워주시는 싸움이 어디 있습니까? 성경에 유명한 다윗과 골리앗 간의 싸움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때 다윗은 어린 나이였습니다. 이스라엘에는 전쟁이 나면 성인들은 모두 전쟁에 나가야 한다는 법이 있는데, 성인의 기준이 20세입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전쟁을 할 때 형들은 모두 전쟁이 나갔지만, 다윗은 나이가 어려서 전쟁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골리앗을 상대로 싸웠을 때 20살이 안 되었을 때였습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구약시험에 골리앗이 들고 있었던 창 날 (iron spearhead)의 무게가 얼마냐 하는 문제가 나왔습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 아무도 모를 것입니다. 600세겔, 6.8kg입니다. 골리앗이 입었던 갑옷의 무게는 5,000세겔, 57kg입니다. 이런 골리앗을 상대로 소년 다윗이 싸웠습니다. 아무 무장도 없이, 그가 가진 것이라곤 주머니 속에 넣은 조약돌 5개가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골리앗 앞에 선 다윗은 전혀 기죽지 않았습니다. 그 때 다윗이 했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The LORD rescues his people, but not with sword and spear. This is the LORD's battle, and he will give you to us (주께서 칼이나 창을 가지고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지 않는다. 이 싸움은 주님의 싸움이다! 그가 너를 우리에게 넘겨 주실 것이다)” (사무엘상 17:47)

“이 싸움은 주님의 싸움이다!” 이 말씀이 개역성경에는 “전쟁은 여호와께 속했다”라고 나와있습니다. 도대체 이런 말씀이 어디 있습니까? 싸움에 나갔으면 내가 싸우는 것이지, 하나님의 싸움이라니, 내 대신 하나님께서 싸워 주신다는, 이런 말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이런 법이 있습니다. 절대절명의 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가만히 하나님만 바라 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홍해 바다가 갈라져 마른 땅이 되었습니다. 거인 골리앗이 다윗이 던진 조약돌을 맞고 맥 없이 쓰러지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Man’s extremity is God’s opportunity (인간의 극한 상황 (절망)은 하나님의 기회이다).” 기록에 의하면, 이 말을 처음 한 사람은 존 플레이벌 (John Flavel, 1628-1691)이라는 영국의 청교도 목사님이라고 합니다. 1992년에 우리 교회가 현재의 교회 건물과 목사관을 구입하고 이사했습니다. 저는 이 교회 건물을 구입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어 하나님만 바라 볼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신 해서 일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체험했습니다. 그 때는 지금과 교회 형편이 아주 많이 달랐습니다. 교인 수도 적었지만, 교회 일년 예산이 만 불이 조금 넘는 정도였습니다. 처음에는 그 정도도 안 되었습니다. 그 때 우리 교회는 하바드 스퀘어에 있는 UCC 교회 건물을 빌려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현재의 건물을 구입하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 때 이 교회는 ‘Pilgrim Congregational Church (필그림회중교회)’라는 미국 교회가 소유하고 있었는데, 교회 문을 닫게 된 것입니다. 그 때는 다른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교회의 미래를 위해서 이 교회 건물이 필요하다는 한가지 생각뿐이었습니다. 그 때 토요일 새벽 기도를 마치고 이곳 필그림 교회의 문고리를 잡고 “하나님, 우리에게 이 교회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는 열쇠를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했던 생각이 납니다. 그 때 ‘문고리 기도’라는 제목으로 주일에 설교했던 기억도 납니다. 이런 과정의 일부가 ‘교회 창립 40주년 기념 앨범’에 실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기도에 응답하셔서 드디어 우리 교회에게 교회 건물을 구입하도록 한다는 결정이 났습니다. 협상 결과, 교회 건물과 목사관을 30만 불에 구입하게 되었는데, 그 당시에 그만한 돈이 없었습니다. 은행에서는 교회를 담보로 돈을 빌려주지 않았습니다. 급기야 건물 구입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교회를 나가는 불행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교회는 최악의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그 때가 저의 목회 중에 가장 힘든 때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흥분되고, 뭔가 알 수 없는 기대감에 차 있었던 때이기도 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 외에, 달리 제가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외국인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너희 한국인 교회가 필그림 교회 건물을 구입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어려움은 없느냐? 내가 도와 줄 일이 없겠느냐?” 이런 전화였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시드니 닐 (Sydney Neal), 우리교회가 소속해 있던 UCC 교단 Massachusetts Conference의 재정부장 (treasurer)이었습니다. 전 지금도 그 사람이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이었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의 도움으로 Cambridge Savings Bank에서 필요한 돈을 대출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 이 아름다운 예배당은 그 때 그렇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구입했습니다. 함께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던 그 때의 교인들은 정말 은혜로 충만했습니다. “아, 우리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고, 희망이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이런 식으로 우리를 도우시는구나!” 하는 것을 실감(實感)했습니다.

큰 꿈을 가지고 보스턴을 찾아 온 여러분, 여러분의 앞날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여러분 앞에 어떤 일이 있을지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겪는 어려움 중에 하나님이 목적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홍해 바다 앞에 캠프를 치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자신들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절망적인 일을 겪게 하시고, 그들을 도우시는 하나님을 체험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겪는 고난이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로마서 8:28)’의 삶 속에 일어나는 일들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이 맞는 어떤 고난과 절망 속에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가 들어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나에게 주어진 일이 힘에 겨울 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 오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The LORD will fight for me; I need only to be still (주님이 나를 위해 싸워 주신다. 이 싸움은 내가 싸울 싸움이 아니라 주님의 싸움이다. 나는 가만히 하나님만 바라보면 된다).” “인간의 절망은 하나님께서 일하실 기회이다!”


9/1/2019 |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I) If God Is For Me

시편 46:1-7

오늘 아직 Boston의 Commonwealth Avenue나 Allston의 Harvard Avenue에 나가 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사 나가고 들어오는 차들로 붐빌 것입니다. 매년 이 때가 그렇습니다. 오늘은 9월 1일이니까 딱 이사 나가고 들어오는 날이네요. 여기 저기 이삿짐을 실은 유 홀 (U haul) 차들이 돌아다닙니다. 운전자들이 운전이 서툴고, 또 길을 잘 모르니까 차가 많이 막힐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1986년에 보스턴에 공부하러 왔습니다. 지금으로부터 33년 전의 일입니다. 저는 그 전에 LA에서 2년 반 정도 살았습니다. 클레아몬트 신학교 (School of Theology at Claremont)에서 공부하다가 보스턴 신학학교로 transfer해서 왔습니다. 클레아몬트에서 아직 석사 과정을 다 마치지 않았지만, 바로 박사과정으로 받아 주고, 학점도 인정해 주겠다는 말을 듣고 보스턴 신학교로 온 것입니다. 그 때가 8월 중순이 조금 넘은 때였습니다. 제 시계를 보니 아직 낮인데, 보스턴은 벌써 해가 넘어가는 늦은 오후였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았더니 제 시계가 LA 시간으로 맞춰져 있었습니다. 그 때 제 마음이 얼마나 불안했던지 모릅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보스턴 사람들은 날이 추운지 벌써 코트를 입고 있었습니다. 그 때가 보스턴 시간으로 오후 6시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우선 내가 공부할 학교가 어떻게 생겼는지 학교부터 가봤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보스턴대학 정문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더니,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보스턴 대학은 정문이 없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습니다. 학교 캠퍼스도 딱히 캠퍼스라고 할 게 없고 길 가에 있는 우중충한 건물들이 학교 건물이고 강의실들이었습니다. “야, 보스턴대학은 정문도 없는 학교로 구나. 클레아몬트 신학교는 정문도 있고, 캠퍼스도 아름다운데, 아무래도 학교를 잘못 온 것 같다. 그냥 클레아몬트에 있을 걸!”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의 보스턴 생활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한국에서 온 유학생들이나 타주에서 온 학생들은 33년 전에 제가 생각했던 같이 벌써 보스턴에 잘못 왔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몇 년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예배를 마치면 제 사무실에서 그 날 새로 교회에 오신 분들을 환영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교회를 소개해 드리고, 새로 오신 분들과 기념 사진도 찍습니다. 그 방에서 저와 함께 교회 새로 오신 분들을 영접하는 일을 맡은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어떤 분이 그 집사님에게 보스턴 생활에 대하여 여러가지 궁금한 것들을 물었습니다. 한달에 아파트 렌트비는 얼마나 되고, 생활비는 얼마나 드는지, 궁금한 것들을 물었습니다. 저는 그 때 그 집사님이 하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아이고, 어쩌다가 보스턴으로 오셨어요? 보스턴은 렌트비가 비싸고, 물가는 아마 미국에서 제일 비쌀 겁니다. 또 겨울에는 눈이 많이 오고 굉장히 춥습니다. 잘못 오셨어요.”

오늘 보스턴에 새로 오신 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은 보스턴에 정말 잘 오셨습니다. 누가 보스턴에 대하여 나쁘게 말하는 사람 있으면 그 사람 말 듣지 마십시오. 비록 학교  정문이 없을 수도 있지만, 세계 최고 수준의 학교들입니다. 그리고, 렌트비가 좀 비싸고, 물가가 싸지는 않지만, 살아보면 다 살아집니다. 보스턴이 처음에는 정이 안 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정이 드는 도시가 보스턴입니다. 제가 캘리포니아에 있을 때 뷰엔나 팍 (Buena Park)에도 잠깐 살았고, 대부분은 클레아몬트 (Claremont)에서 살았습니다. 모두 아름답고 살기 좋은 곳이지만, 지금은 보스턴이 훨씬 좋습니다. 보스턴 사람들을 ‘보스토니안 (Bostonian)’이라고 부르는데, 여러분도 곧 보스턴을 사랑하는 ‘보스토니안들’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모두 꿈을 가지고 보스턴에 왔습니다. 공부를 하기 위해 보스턴에 왔든지, 또 새로운 직장을 찾아 보스턴에 왔든지 모두 꿈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지 마음이 불안합니다. 새로운 곳에 대한 기대감이 있지만, 마음 한 구석에 불안감이 있습니다. 과연 내가 보스턴에서 잘 지낼 수 있을까? 경제적인 어려움은 없을까? 보스턴 사람들은 다 똑똑하다는데 당해낼 수 있을까? 지도 교수는 좋은 분을 만날 수 있을까? 이곳의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 이런 것들이 나를 불안하게 합니다.

하지만, 새로운 곳에 온 사람들에게만 불안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이 불안을 경험합니다. 산다는 것 자체가 불안의 연속입니다. 시편 사미스트 (psalmist)는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42:5, 11, 43:5)”하고 자신의 불안한 마음을 드러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도 자기 제자들에게 불안한 마음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는 근심과 번민에 싸인 얼굴로 세 제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것 같구나. 여기 머물러 있으라. 여기서 나와 함께 깨어 있어라.’” (마태복음 26:37-38) 무엇이 우리를 불안하게 할까요?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원인이 무엇일까요?

폴 틸리히 (Paul Tillich, 1886-1965, 독일)라는 신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삶의 대부분을 미국에서 보냈습니다. 독일에서 신학공부를 하고 교수가 되었지만 나치 정권에 의해 교수직을 박탈 당했습니다. 다행이 미국 뉴욕에 있는 유니온 신학교 (Union Theological Seminary)로부터 교수직을 제의 받고 미국으로 건너왔습니다. 그 후 하바드 신학교와 시카고 신학교에서 강의했습니다. 하바드 신학교 도서관에 가면 폴 틸리히의 사진이 크게 걸려 있는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만큼 폴 틸리히는 영향력이 있는 신학자입니다. 저는 이런 신학자들의 영향을 받으면서 신학 공부를 했습니다. 제가 이렇게 길게 폴 틸리히라는 신학자를 소개하는 이유는 그가 인간의 불안에 대하여 매우 의미 있는 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The basic anxiety, the anxiety of a finite being about the threat of non-being, cannot be eliminated. It belongs to existence itself.” “기본적인 불안 즉 비 존재의 위협으로부터 오는 제한된 존재로서 느끼는 불안은 제거될 수 없다. 이런 불안은 존재 자체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non-being (비 존재)’이라는 것은 존재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죽음은 비존재의 위협입니다. 죽으면 존재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방황하거나 실패로 말미암아 좌절하고 절망하고 삶이 망가지는 것도 비존재의 위협입니다. 그렇게 망가진 나는 원래 되려고 했던 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보스턴에 꿈을 가지고 찾아 왔지만, 뭔가 설명할 수 없는 마음 한 구석에 있는 불안의 이유는 틸리히가 말하는 ‘비 존재의 위협’ 아닐까요? “내가 실패해서 내 인생이 여기서 천 길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것은 아닐까? 이 낯선 곳에서 내가 가졌던 꿈이 산산조각이 나지는 않을까?” 이것이 틸리히가 말하는 ‘비 존재의 위협 (the threat of non-being)’입니다.

틸리히는 이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서 용기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The courage to be is rooted in the God who appears when God has disappeared in the anxiety of doubt.” “존재에의 용기는 의심의 불안 속에서 하나님이 사라졌을 때 나타나는 하나님께 뿌리를 두고 있다.” 마치 아버지를 떠났던 둘째 아들이 낯선 땅에서 실패하여 철저하게 곤두박질 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아버지의 아들로 돌아가야 되겠다는 용기를 낸 것은 틸리히의 말에 의하면 ‘존재에의 용기 (the courage to be)’입니다. ‘존재에의 용기’는 하나님께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실패와 좌절을 딛고 일어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시편 42편을 쓴 사미스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Why am I discouraged? Why is my heart so sad? I will put my hope in God!” (5절, New Living Translation) “Why am I so sad? Why am I so troubled? I will put my hope in God.” (Good News Translation) 이 말씀과 오늘 본문 말씀 시편 46편은 같은 저자가 쓴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땅이 흔들려도, 산들이 바닷속으로 무너져 내려도 바닷물이 넘실거리고, 파도가 치고, 사나운 바다에 산들이 흔들려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하나님이 그 성 안에 계시므로, 그 성이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새벽부터 그 성을 지키실 것입니다 (God dwells in that city; it cannot be destroyed. From the very break of day, God will protect it).”

“God dwells in that city.” 이 말씀을 나에게 적용하면 “God dwells in me”라는 말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내 안에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안에 계시면 “It cannot be destroyed”라고 했습니다. 결코 내 삶은 망가지지 않습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내 안에 계시느냐 계시지 않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한 젊은 수도사가 나이 많은 스승을 찾아가서 물어보았습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찾을 수 있습니까? 많은 시간 명상도 하고, 고행도 하고, 수도도 하고, 기도도 했지만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 스승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바로 네 옆에 계시는구나!” “예?” 깜짝 놀란 젊은 수도사는 두리번두리번 주위를 살피다가 물었습니다. “제 눈에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젊은 수도사의 말에 스승은 뜬금없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네 술 취한 사람이 왜 자기 집을 못 찾고 헤매는 지 아는가? 왜 술 취한 사람이 사람을 똑바로 알아보지 못하고 비틀거리는지 아는가?” 젊은 수도사는 대답을 못했습니다. 스승이 다시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보려면 먼저 무엇이 너를 취하게 만들었는지 알아내어라. 취하지 않고 깨어 있어야 하나님을 볼 수 있느니라!”

선문답(禪問答) 같기도 하고, 우스운 말 같기도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취하다’는 말은 어디에 빠져 있다는 말입니다. 어디에 빠져 있다고 할 때 ‘-aholic’이라는 말을 붙입니다. ‘alcoholic’은 술에 빠져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workaholic’은 일에 빠져 일 밖에 모르는, 일에 중독된 사람을 말합니다. ‘shopaholic’은 물건을 마구 사 들이면서 돈을 낭비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공부에 빠진 사람은 뭐라고 하나요? ‘공부홀릭’이라고 하나요?

저는 우리교회가 여러분 모두에게 의미 있는 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 이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을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단순히 지식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유학생이나 여기 거주해서 사시는 분들이나,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는 ‘디아스포라 (diaspora)’입니다. 하나님을 찾을 수밖에 없는 환경 속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셨습니다. 저도 클레아몬트에서 유학생활을 할 때 주말이면 주로 밤 시간에 같이 공부하는 동료들과 함께 산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작은 폭포가 있어서 큰 소리로 기도해도 괜찮았습니다. 운전하고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찬송을 부르다 보면 어느 새 찬송이 변하여 기도가 되었습니다 “주님, 도와 주세요!”

공부요?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러나, 공부에 빠지지는 않아야 합니다. ‘공부홀릭’이 되면 하나님 잃어버립니다. 교회에 안 가고 그 시간에 공부하고, 예배 드리야 하는 시간에 페이퍼 쓰고 이러다가는 하나님을 잃어버립니다. 브로니 웨어 (Bronnie Ware)라는 연명 치료사가 ‘죽기 전에 하는 후회 5가지’라는 책을 냈습니다. 연명 치료사는 생을 얼마 남겨 놓지 않은 사람들을 돌보는 사람입니다. 그 5가지 중에 하나가 “그렇게 너무 열심히 살 필요는 없었다 (I wish I didn't work so hard)”는 것입니다. 그 때는 그게 전부인 줄 알고 그 일에 매달렸는데, 그러다가 더 중요한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여러분 중에 어떤 사람이 훗날 유학생활을 회상하면서 똑 같은 말을 하게 될지 모릅니다. “그렇게 죽자고 공부에 매달릴 필요 없었는데.....” 이 사람이 그렇게 살다가 더 중요한 하나님을 잃어버렸거든요. 제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 들을 줄로 믿습니다.

오늘 읽은 시편 46편 말씀을 여러분의 책상 머리에 써 붙여 두고 힘들 때마다 읽으세요. 이 말씀을 읽고 힘을 얻으세요. 원래 이 말씀은 ‘A song to be sung by soprano voices (소프라노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라고 되어 있습니다. 힘들 때마다, 외로울 때마다 여러분의 귓전에 청아하게 울려 퍼지는 노래 소리를 듣고 힘을 내세요.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 우리의 힘. 어려울 때마다 항상 도와 주시니, 땅이 마구 뒤흔들려도 하나도 무섭지 않아. 이 산 저 산이 바다 한가운데로 빠져 들어간다 해도 하나도 무섭지 않아. 바다에 마구 폭풍이 몰아치고 미친 듯이 날뛴다 해도, 그 물이 넘쳐 언덕들이 마구 요동을 친다고 해도, 하나님이 함께 계시니 하나도 무섭지 않아.” (셀라) (현대어 성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