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2019 | 대강절 둘째 주일 메시지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XIII) To Live As A Christian

마태복음 5:9, 로마서 12:17-21

‘Advent Candle (대강절 촛불)’이란 말이 있습니다. 크리스마스까지 4주 동안 대강절이 계속되는데, 매주마다 촛불을 켭니다. 첫 주에는 보라색 촛불을 켜는데, 이 촛불은 희망을 상징하는 촛불입니다. 둘째 주에도 보라색 촛불을 켜는데, 이 촛불은 평화를 상징라는 촛불입니다.  셋째 주에는 핑크색 촛불을 켭니다. 이 촛불은 기쁨을 상징합니다. 넷째 주에는 다시 보라색 촛불을 켭니다. 이 촛불은 사랑을 상징하는 촛불입니다. 그리고 넷째 주에는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흰색 촛불을 같이 켭니다.

이번 리뉴에서 많이 부른 찬양 중에 ‘시간을 뚫고’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김강현이란 분이 가사와 곡을 쓴 찬양입니다. 찬양 가사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당신은 시간을 뚫고 이 땅 가운데 오셨네
우리 없는 하늘 원치 않아 우리 삶에 오셨네
자신의 편안 버리고 우리게 평안 주셨네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우리 삶에 오셨네
(합창) 하나님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네
꿈 없는 우리에게 그 나라 보여 주시네
연약한 자들의 친구가 되어 주시고
힘 없는 우리의 인생을 위로 하시네

요한복음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참 빛이신 그분이 세상에 들어와서 모든 사람을 비췄습니다 (The one who is the true light, who gives light to everyone, was coming into the world).” (요한복음 1:9) 이 참 빛이 세상이 비치기까지 인류에게 희망이 없었습니다. 참 평화가 없었고, 기쁨이 없었습니다. 참 빛이 세상에 비침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인류는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김강현의 시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시간을 뚫고’ 이 땅에 들어 오심으로 말미암아 꿈이 없는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1885년 4월 5일, 언더우드 (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와 아펜젤러 (Henry Gerhard Appenzeller, 1858-1902) 두 선교사가 조선에 들어왔습니다. 언더우드는 뉴저지에 있는 뉴 브런스윅 신학대학을 갓 졸업한 26살의 청년이었고, 아펜젤러 역시 뉴저지에 있는 Drew 신학대학을 졸업한 27살의 청년이었습니다. 이 두 선교사들이 우리 나라에 복음을 전해 준 덕분에 우리나라의 운명이 바뀌고, 저와 여러분의 운명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 때 아펜젤러가 조선을 위해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부활절 날에 이곳에 도착하였습니다. 오늘 죽음의 철장을 산산이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주께서 이 나라 백성들을 얽어 맨 결박을 끊으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빛과 자유를 허락해 주옵소서 (We came here on Easter. May He who on that day burst asunder the bars of death break the bands that, bind this people, and bring them to the light and liberty of God’s children)!”

오늘은 대강절 둘째 주일입니다. ‘시간을 뚫고’ 세상에 참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평화가 무엇인지 알려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처음부터 ‘평화의 왕’이었습니다.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들을 주실 것이다. 그의 어깨 위에 왕권이 주어질 것이다. 그의 이름은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원히 살아 계신 아버지, 평화의 왕이시다 (And His name will be called Wonderful Counselor, Mighty God, Eternal Father, Prince of Peace).” (이사야 9:6)

예수님은 모든 면에서 뛰어나신 분이지만, 특히 ‘평화’에 대하여는 누구하고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탁월하신 (preeminent) 분입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전문가입니다. 이 말이 ‘Prince of Peace (평화의 왕)’이라는 말의 뜻입니다.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이유와 목적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 (Glory to God in highest heaven, and peace on earth to those with whom God is pleased).” (누가복음 2:14) 하나님은 그가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를 선물하셨습니다. 궁금한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사람들이 과연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들’을 기뻐하셨습니다. 마태는 그냥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하지 않고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복이 있는 이유는 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5:3).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들’을 기뻐하십니다. 여러분, 누가 겸손한 사람입니까? 성경은 겸손 사람의 예로 ‘목자들 (shepherds)’을 들고 있습니다. 성경에 이집트 사람들은 목자들과 함께 있는 것을 싫어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창세기 46:34). 아마도 목자들의 몸에서 동물 냄새가 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목자들을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본래 유목민이었습니다. 하지만, 가나안 땅에 정착하면서 농경문화에 적응하게 되고, 그 때부터 목자는 천대 받는 직업이 되었습니다. 원래 겸손을 말하는 ‘humble’이라는 말이 라틴어 ‘humilis’라는 말에서 왔는데 이 말은 ‘lowly’라는 뜻입니다. 자기를 낮추는 것이 겸손이라는 뜻입니다.

지금 교황이 266대 프랜시스 교황입니다. 아르헨티나 출신입니다. 그의 언행이 이전의 교황과 많이 달랐기 때문에 이 분이 교황이 되면서 많은 화제를 몰고 왔습니다. 그가 사제들을 모아 놓고 이렇게 설교했다고 합니다. "당신들은 양의 냄새가 나는 목자가 되어야 합니다 (Be shepherds with the smell of sheep).” 몸에서 양의 냄새가 나야 그 사람이 참 목자이고, 몸에서 양의 냄새가 나야 비로소 겸손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싫어하십니다. 야고보서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God opposes the proud but favors the humble (하나님은 마음이 교만한 사람을 물리치시고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야고보서 4:6) 하나님께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겸손한 사람들에게 ‘평화’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히브리 말로 ‘샬롬 (shalom)’입니다. 여러분, ‘샬롬’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아무 것도 결핍된 것이 없고, 빠진 것이 없는, 온전한 상태를 말합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다윗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렇게 고백했을 때, 그리고 “주께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시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이렇게 고백했을 때, 다윗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샬롬’이 들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평화의 창조자이십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평화가 없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For everyone has sinned; we all fall short of God's glorious standard. Yet God, with undeserved kindness, declares that we are righteous. He did this through Christ Jesus when he freed us from the penalty for our sins (모든 사람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기준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말도 안 되는 친절을 베푸셔서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받아야 할 죄의 형벌로부터 우리를 벗어나게 해 주신 것입니다).” (로마서 3:23-24) 요한은 이 사실을 그의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이것이 진실한 사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This is real love - not that we loved God, but that he loved us and sent his Son as a sacrifice to take away our sins).” (요한일서 4:10-11)

이 말씀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단순히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마태복음 본문 말씀은,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 (마태복음 5:9)”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이 New International Vers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Blessed are the peacemakers, for they will be called sons of God (평화를 창조하는 사람들은 복이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시간을 뚫고’ 이 역사 속에 들어 오셔서 친히 우리를 위하여 화목 제물이 되어 주심으로, 우리는 평화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 사실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평화의 촛불을 켰습니다. 이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평화의 창조자들 (peacemakers)’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창조해야 하는 ‘평화’는 단순한 ‘peace’가 아니라 ‘샬롬 (Shalom)’입니다. 아무 것도 결핍된 것이 없는 온전한 ‘하나님의 샬롬’입니다. 그러므로, 평화의 창조자들은 꾸준하게, 포기하지 말고, 지치지 말고, ‘하나님의 샬롬’을 창조하는 일에 참여해야 합니다. 이것이 이 시대를 크리스천으로 사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악으로 악을 갚으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선으로 악을 이긴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선을 행함으로 악을 행하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만들어야 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야 합니다. 이것이 ‘평화의 창조자 (peacemaker)’로 사는 사람의 삶의 방식입니다. 끝으로, 성 프랜시스의 ‘평화의 기도’를 같이 읽겠습니다.

평화의 기도 (Prayers for Peace)- 성 프랜시스 (St. Francis, 1182-1226, 이탈리아)

주여, 나를 주님의 평화의 도구가 되게 하소서. Lord, make me an instrument of Thy peace;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심게 하시고, Where there is hatred, let me sow love;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심게 하시고, Where there is injury, pardon;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심게 하시고, Where there is error, truth;
의심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시고, Where there is doubt, faith;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심게 하시고, Where there is despair, hope;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을 심게 하시고, Where there is darkness, light;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and Where there is sadness, joy.
오 주님, 위로 받기 보다는 위로하게 하시고, O, Divine Master, Grant that I may not so much seek to be consoled, as to console;
이해 받기 보다는 이해하게 하시고, To be understood as to understand;
사랑 받기 보다는 사랑하게 하소서. To be loved as to love;
왜냐하면, 줌으로써 받기 때문입니다. For it is in giving that we receive;
용서하는 것이 용서를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It is in pardoning that we are pardoned;
자신에 대하여 죽는 것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And it is in dying to ourselves that we are born to eternal life. Amen.


12/1/2019 | 대강절 첫째 주일

(1부) 원하고, 바라고, 기도합니다 (Wanting, Hoping And Praying) / (2부) 기다리는 사람들 (People Who Are Waiting)

(1부) 출애굽기 19:5-6 / (2부) 말라기 3:1-5


11/24/2019 | 추수감사절 메시지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XII) To Live As A Christian

데살로니카전서 5:16-24

‘플리머쓰 락 (Plymouth Rock)’이란 말을 들어 보셨지요?  ‘플리머쓰’는 보스턴에서 동남쪽으로 약 60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타운입니다. 차로 가면 50분 정도 가야 합니다. 1620년에 102명의 청교도들을 태운 ‘메이 플라워 (Mayflower)’ 호가 도착한 곳을 기념하기 위하여 커다란 돌에 ‘1620’이라고 새겨 놓았습니다. 이 돌을 ‘플리머쓰 락’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타운이 잘 형성되어 있고,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지만, 지금으로부터 400년 전에는 허허 벌판이었습니다. 이곳 신대륙에서 자유롭게 하나님을 믿는 신앙생활을 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플리머쓰’에 도착한 이들을 반겨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 해 겨울을 보내면서 추위에 굶주린 청교도들이 절반이 죽었다고 합니다.

놀랍게도 이들 청교도들에 의해서 ‘추수 감사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감사의 본질(本質)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감사는 모든 것이 풍족한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열악한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 ‘아굴 (Agur)’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저에게 두 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하나는, 제가 거짓말 하지 않고 살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저에게 꼭 필요한 양식만 공급해 주십시오. 너무 가난하면 남의 것을 훔쳐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울까 염려가 됩니다. 너무 풍족하여 배가 부르면 하나님을 모른다고 부인할까 걱정입니다 (Give me neither poverty nor riches! Give me just enough to satisfy my needs. For if I grow rich, I may deny you and say, “Who is the Lord?” And if I am too poor, I may steal and thus insult God’s holy name).” (잠언 30:7-9) 그는 인간의 본능 속에 들어 있는 ‘교만 (pride)’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실패한 사람이 불쌍한 것이 아니고, 가난한 사람이 불쌍한 것이 아닙니다. 성공한 사람이 위험합니다. 부족한 것이 없는 사람들이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실패한 사람들이나 가난한 사람들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와 도움을 필요로 하지만, 부족한 것이 없는 사람들은 더 이상 하나님을 찾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추수감사 예배를 드리면서 생각나는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시편 136편 말씀입니다. 이 시편은 26절까지 있는데요. 이 시편 전체가 하나님께 대한 감사로 되어 있습니다. 이 시편은 예배 시간에 사용하기 위해 만든 시편 같습니다. 인도자가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그는 우리에게 이런 일을 하셨습니다” 그러면 예배자들이 한 목소리로 “그분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이렇게 감사의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한번 그 시편대로 감사의 고백을 해 볼까요? “모든 신 위에 뛰어나신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2절) “홀로 위대한 일들을 행하시는 그분께 감사하십시오.” (4절) “강한 손과 펴신 팔로 이스라엘을 이끄신 그분께 감사하십시오.” (12절) “자기 백성을 인도하여 광야를 지나가게 하신 그분께 감사하십시오.” (16절) “우리가 비천한 가운데 있을 때에 우리를 기억하셨던 그분께 감사하십시오.” (23절) “모든 피조물에게 음식을 주시는 그분께 감사하십시오.” (25절)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26절)

하나님은 누구입니까? 홀로 그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위대한 일을 행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입니까? 자기 백성을 인도하여 광야를 지나가게 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입니까?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 우리를 생각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입니까?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에게 먹을 것을 공급해 주시는 분입니다. 이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합당한 응답 (response)은 “그의 진실하신 사랑은 영원합니다 (His faithful love endures forever)”라는 고백입니다. ‘faithful love’라는 말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진실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형식적이거나 거짓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이 세월이 가도 변함이 없이 한결같다는 것입니다.

오늘 데살로니카전서 5장 본문 말씀은 “항상 즐거워하십시오. 쉬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라는 말씀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데살로니카전서는 신약성경 중에서 제일 먼저 기록된 성경이라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신학자들마다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그 시기를 A.D. 50년 경으로 보고 있습니다. 바울이 제 2차 선교여행을 하던 중에 고린도에서 이 편지를 쓴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편지의 특징은 다른 성경과 비교해 볼 때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Christ’s return)’에 대한 말씀이 많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데살로니카전서는 기록된 때가 예수님께서 죽으신 지 불과 17년 밖에 지나지 않은 때였습니다. 17년이면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911 테러 사건이 2001년에 일어났거든요? 지금으로부터 18년 전에 일어났습니다. 그리 오래 되지 않았습니다. 전 지금도 그 날 아침 일이 생생하게 생각납니다. 아침에 집에 있는데, 어떤 교인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 얼른 TV 좀 보세요!” 그래서 “무슨 일인데요?” 하고 TV를 켰습니다. 비행기 한 대가 뉴욕을 빌딩 사이를 비행하더니 그대로 빌딩으로 돌진하는 하는 것입니다. 그 장면을 그대로 목격했습니다. 그 빌딩이 ‘쌍둥이 빌딩 (The Twin Towers)’이었습니다. 지금 그 자리에 다시 World Trade Center 건물이 섰다고 하는데, 전 보지는 못했습니다. 18년 전에 일어난 이 사건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데살로니카전서도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때가 아직 생생하게 기억날 때 기록된, 신약성경 27권 중에서 제일 먼저 기록된 바울의 편지입니다. 제가 이 말을 강조하는 것은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때 예수님의 기억이 머리 속에 생생했기 때문에 이 편지를 쓸 때만 해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곧 있을 것으로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곧 오겠다고 약속을 했거든요 (사도행전 1:11)? 그러니까 바울이 “항상 기뻐하십시오. 쉬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렇게 쓴 것은 주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기대감이 충만한 상황에서 쓴 것입니다. 신학자들은 이것을 ‘종말의 시간 (the eschatological time)’ 혹은 ‘종말의 상황 (the eschatological context)’이라고 합니다.

지금 우리가 꼭 그런 상황 속에 있거든요? 다음 주가 ‘대강절 (Advent)’의 시작입니다. ‘대강절’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2,000년 전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축하하고, 이제 다시 심판의 주님으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기대와 설레임의 시간입니다. 이 시간이 바로 ‘종말의 시간’이거든요? 이 시간에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 세 가지가 있는데, 그것이 ‘기쁨’과 ‘기도’와 ‘감사’입니다. 바울은 이 세 가지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습니다. 이 세 가지를 우리의 삶에서 지키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고, 이 세 가지를 지키지 못하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일에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는데, 항상 어느 상황에서나 기뻐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쉬지 않고 기도를 계속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잘 보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in Christ Jesus)’라는 말이 있습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는 ‘who belong to Christ Jesus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이란 표현이 나옵니다. 저는 이 말이 기쁨과 기도와 감사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키워드라고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이 늘 잊지 않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어떤 일을 해 주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까 우리가 같이 한 목소리로 “그의 진실하신 사랑은 영원합니다 (His faithful love endures forever)”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진실하고 영원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해 주신 일들을 생각하면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항상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항상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But God showed his great love for us by sending Christ to die for us while we were still sinners).” (로마서 5:8)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쏟아 부어졌다 (God has poured out his love into our hearts in Christ Jesus, 로마서 5:5)”라고 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런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사랑을 마치 하늘에서 소나기가 퍼붓듯이, 우리 마음에 그렇게 쏟아 부어졌습니다.

요즘에 제가 조명섭이라는 한국의 트롯트 가수에게 푹 빠졌습니다. 조명섭은 21살된 청년입니다. 그런데, 이 청년이 현인, 박인수 같은 옛날 가수들의 노래를 잘 부릅니다. 조명섭은 어린 시절 불행한 삶을 살았습니다. 가정 형편 때문인지 3살부터 9살까지 외할머니 손에서 자랐습니다. 노래를 좋아했지만 가정 형편이 어려워 계속할 수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다리에 장애가 있습니다. 우울증을 앓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경연대회에서 일등을 하면서 그의 생에 큰 변화가 찾아 왔습니다. 인터뷰에서 그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저의 인생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빵점도 안 되는 인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이런 상을 받으면서 주변 사람들이 자기를 인정해 주는 것 같아서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를 기다리는 ‘종말의 시간’을 살아가는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을 우리에게 소나기처럼 쏟아 부어 주실 정도로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찮은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입니다. 슬픈 일이 있다고요?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요? 아무도 나를 사랑해 주지 않아서 외롭고 슬프다고요?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존귀한 사람들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 것이 항상 우리의 삶을 기쁘게 살아갈 수 있는 이유입니다.

감사할 일이 없다고요?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Don't worry about anything; instead, pray about everything. Tell God what you need, and thank him for all he has done).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평강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립보서 4:6-7) 여기서 ‘감사함으로’라는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해 주신 일들을 감사하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 크리스천들이 모든 환경에서, 모든 상황에서 감사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이유입니다.

아까 위에서 읽었던 시편 136편 16절 말씀을 읽으면서 마음이 찡하더라고요. “자기 백성을 인도하여 광야를 지나가게 하신 그분께 감사하십시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을 하면서 얼마나 불평과 원망이 많았습니까?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살 수 없는 환경 속에서 40년을 살았으니까 그럴 만도 합니다. “Give thanks to him who led his people through the wilderness. His faithful love endures forever.” (New Living Translation) 이 말씀을 잘 보십시오. 광야생활이 지치고, 고단하고, 아프고, 배고프고, 고통스러운, 내일을 보장할 수 없는, 하루 하루가 버거운 날이었지만, 나중에 알고 봤더니 그 때도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 때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생활을 통하여 배운 것이 많았습니다. 이런 것들은 광야생활이 아니면 얻을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산교육을 광야에서 경험했습니다.

감사절은 오늘 하루로 지나가지만, ‘종말의 시간’을 살아가는 우리는 계속해서 기쁨과 기도와 감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아이로닉하게도 지금 세대는 기쁨과 기도와 감사를 잃어버린 세대입니다. 밤이 깊으면 별이 더 빛난다고 했습니다. ‘종말의 시간’을 살아가는 우리는 어느 상황에서도 기쁨과 기도와 감사의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실천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11/17/2019 |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XI) To Live As A Christian

고린도후서 5:14-21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한마디로 제일 잘 표현한 말씀이 마가복음 10:45 말씀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 말씀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목적 (the purpose of life)’이 잘 나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후에 우리에게 여러가지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 중의 하나가 ‘삶의 목적’이라는 말이 아닌가 합니다. 그 전에는 이런 말이 있는지 조차도 잘 몰랐습니다. 우리는 왜 사는지,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묻지 않았습니다. 그냥 태어났으니까 사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내 삶에 목적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마가복음 10:45 말씀이 중요한 이유는, 이 말씀 속에 나와 있는 그리스도의 삶의 목적이 곧 나의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목적이 그런 것처럼, 우리의 삶의 목적도 섬기는 것입니다.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것 (not to be served, but to serve)’이 우리의 삶의 목적입니다.

그런데, 막상 많은 사람들이 마가복음 10:45 말씀을 읽으면서도 섬기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모릅니다. 막연하게 다른 사람을 대할 때 겸손하게, 공손하게 대하는 것이 그 사람을 섬기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습니까? 하지만, 마가복음 10:45 말씀을 잘 읽어 보면, 섬기는 것은 겸손한 말이나 태도, 예의 바른 행동, 이런 것과 직접적인 관계는 없습니다. ‘섬긴다’는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뒤에 나오는 ‘대속물 (ransom)’이라는 말을 알아야 합니다. 

‘ransom’이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 봤더니, 이 말은 ‘rescue’ 혹은 ‘redemption (구원)’이라는 말과 관계된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대속물 (ransom)’이 되셨기 때문에 그 은혜로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우리 말에 ‘속량(贖良)’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전에 우리 나라에도 ‘종(從)’이나 ‘노비(奴婢)’가 있었습니다. ‘속량’은 종의 몸 값을 지불하고 그 사람을 선량한 시민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속전(贖錢)’이라는 말도 같은 뜻입니다. 몸 값으로 지불하는 돈을 말합니다. 몸 값을 지불하면 그 사람은 그 때부터 자유인이 됩니다. ‘대속물 (代贖物)’은 몸 값으로 지불하는 물건’이라는 뜻입니다.

기독교가 우리 나라에 들어왔을 때, 처음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여러가지 감동적인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집에 종을 두고 있는 어느 양반 집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 집 주인이 교회를 갔다 오더니, 그 집 종을 불렀습니다. “자네 내 방으로 들어오게!” 주인이 점잖고 진진한 얼굴로 말했습니다. 그 종은 영문도 모르고 주인을 따라 들어갔습니다. 방 안에는 화로(火爐)가 놓여 있었습니다. “그리 않게.” 그 종은 평상시와 다른 주인의 목소리에 당황하면서 자리에 앉았습니다. “자네 이게 뭔지 아나? 자네 노비 문서네.” 주인은 이렇게 말하면서 그 노비 문서를 화로에 넣어버렸습니다. “이제 노비 문서를 태워버렸으니 자넨 이제부터 종이 아니네.” 우리 한국교회에서 처음 예수를 믿은 사람들에게 이런 놀라운 일들이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속전’이 되시고 ‘대속물’이 되셨습니다. 그 덕분에 우리가 죄로부터 벗어나 자유인들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양반 집 주인을 위해 ‘대속물’이 되셨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그 주인은 자기 집에 있던 종의 노비 문서를 태워 버리고 그 종에게 자유를 줌으로써 그 종에게 ‘대속물’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마가복음 10:45 말씀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섬김의 삶의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섬김’이란 말이 더 이상 ‘수사학적인 (rhetoric)’ 말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섬김’이란 말을 별 뜻 없이 가볍게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이 사람들 앞에 나가서 “전 이제부터 여러분을 섬기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전 그 말을 들으면서 “섬기고 싶으면 조용히 섬기면 되지 그렇게 요란하게 선언할 필요가 있을까?”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섬김의 삶은 사람들 앞에서 선언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여러분은 이제 여러분 자신을 죄에 대해서는 죽은 사람으로, 하나님께 대해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아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십시오. 다시는 죄의 욕심을 따라 살지 않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삶을 불의를 행하는 도구로 죄에게 내어 주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여러분의 삶을 의를 행하는 도구로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로마서 6:11-13)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Now you should consider yourselves to be dead to the power of sin and alive to God through Christ Jesus. Do not let sin control the way you live; do not give in to sinful desires. Do not let any part of your life become an instrument of evil to serve sin. Instead, give yourselves completely to God, for you were dead, but now you have new life in Christ Jesus. So use your whole life as an instrument to do what is right for the glory of God.”

이 놀라운 일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날부터 우리 안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이 놀라운 삶의 변화가 우리 안에서 일어나고 있고, 진행되고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바울이 빌립보서 1:6에서 우리 안에서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the good work (선한 일)’가 진행되고 있다고 했는데, ‘the good work’라는 말이 ‘making us instruments of God’s righteousness (우리를 하나님의 의의 도구가 되게 하는 일)’라는 말과 같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는 우리 모두는 예외 없이 ‘instruments of evil to serve sin (죄를 섬기는 불의의 도구)’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속에서 우리를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도구가 되게 하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모든 변화가 가능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ransom (대속물)’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이 은혜로 지금 여러분과 제 안에 하나님의 의를 위해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제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고린도후서 5장 본문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메시지를 여러분과 같이 나누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는 사로 잡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우리를 사로 잡는다’는 말은 “우리 안에서 우리에게 그렇게 하라고 urge하는 것이 있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그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는 것이 오늘 본문 말씀 전체를 이해하는 키워드 (keyword)입니다. “왜 우리가 변화의 삶을 살아야 합니까?”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왜 우리가 전에 살던 대로 살면 안 되고 삶의 방식을 바꿔야 합니까?”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똑 같은 질문입니다. “왜 우리가 이제는 ‘instruments of God’s righteousness (하나님의 의의 도구)’로 살아야 합니까?” 이 질문에 대하여 바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 속에서 이제는 다르게 살아야 한다고, 이제는 네 삶의 방식을 바꿔야 한다고 우리를 urge하기 때문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속에서 여러분을 urge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느끼고 있습니까? 그 양반 집 주인은 그 날 교회에 갔다가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대속물’이 되셨다는 설교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은혜로 우리가 구원 받았다는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집에 돌아오면서 그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자기 속에서 urge하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종의 문서를 태워버리고, 자네는 이제 종이 아니라고, 종에게 자유를 주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내 속에서 우리를 urge하는 것을 느끼기 시작하면, 그 때부터 우리의 삶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변화의 삶’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이 ‘변화의 삶’의 핵심은 ‘관점’이 바뀌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관점(觀點)’은 사물을 보고, 해석하고, 이해하고, 판단하는 자기 나름의 ‘a point of view’를 말합니다. 이 관점이 바뀌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두 가지 관점을 제시합니다. 하나는, ‘a human point of view (인간적인 관점)’입니다. ‘인간 중심적인 생각’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기 전에 가지고 있었던 관점입니다. 또 하나는, ‘God’s point of view (하나님의 관점)’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을 가지고 사물을 보고, 이해하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이 관점을 ‘성경적인 관점 (a biblical point of view)’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때는 ‘the eyes of faith (믿음의 눈)’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성경은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책입니다. 모세가 가나안 땅을 정탐하기 위하여 각 지파에서 한 사람씩 12명의 정탐꾼을 선발합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을 보고 돌아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서로 다릅니다. 10명의 정탐꾼들은 ‘인간적인 관점’을 가지고 가나안 땅을 보았고, 그들은 그들이 눈으로 본 대로 보고했습니다. 그들이 보고는 모든 사람들을 낙담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두 사람의 정탐꾼들은 ‘믿음의 눈’으로 가나안 땅을 보고 돌아왔습니다. 두 사람의 보고는 모든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민수기 13-14장에 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관점’이 바뀐 사람을 ‘새로운 피조물 (a new creation)’이라고 했습니다.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관점이 바뀌어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게 맡겨 주신 중요한 사역은 청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 되도록 돕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청년들의 ‘관점’이 바뀌는 것입니다. 이 말은, 세상을 ‘인간적인 관점’에 보지 말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라는 말이 아닙니다. ‘인간적인 관점’이 틀렸다든지,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적인 관점’의 한계를 지적한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인간적인 관점’만 가지고는 보지 못하고, 놓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반대로, 우리의 삶에는 ‘하나님의 관점’을 가지고 봐야 비로소 보이고, 비로소 해석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바울이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도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아무 것도 아니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를 섬기기 위해서 오신 하나님의 ‘대속물’입니다 (16절).

저에게 청년들은 보석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제가 이 청년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이 청년들이 ‘새로운 피조물들’이 될 수 있도록, 작은 도움이라도 되어 주는 것입니다. 청년부의 간사들 역시 청년들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되라고 청년들 옆에 붙여 주신 사람들입니다. 이 교회의 장로, 권사, 집사로, 가족장으로 세움을 받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넓게 보면, 여러분을 이 믿음의 공동체로 부르신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 되는 일에 도움이 되라는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섬기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그렇게 하신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을 위해 ‘ransom’이 되어 주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화목의 직분 (task of reconciliation, 18절)’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직분을 수행하는 ‘그리스도의 대사들 (Christ’s ambassadors, 20절)’이라고 했습니다. 이 시간, 우리를 위해 ‘대속물’이 되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 속에서 urge하는 소리를 들어 보십시오.


11/10/2019 |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X) To Live As A Christian

누가복음 22:25-30

고난에 대한 메시지를 가장 많이 담고 있는 성경이 구약에서는 이사야서이고, 신약성경에서는 베드로전서입니다. 베드로전서는 서기 62-65년에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가 기록했습니다. 로마의 화재 사건이 서기 64년 7월 18일에 일어났습니다. 네로 (Nero, 37-68 A.D. 재위 기간 54-68년)는 화재의 책임을 로마에 살고 있던 크리스천들에게 돌렸고, 크리스천들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로마에 있는 크리스천뿐만 아니라 지중해 연안에 피신해서 살고 있던 크리스천들에게도 박해가 가해졌습니다. 베드로 역시 이 박해 기간에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베드로는 고난 받는 크리스천들에게 2통의 위로의 편지를 썼습니다. 이 편지가 베드로전서와 후서입니다. 그 편지 속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이것을 위해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위해 고난을 받으심으로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십시오 (For God called you to do good, even if it means suffering, just as Christ suffered for you. He is your example, and you must follow in his steps).” (베드로전서 2:21) 이 글 속에 두가지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선한 일을 하다 보면 고난은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이 받고 있는 박해 (고난) 속에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가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는 크리스천으로서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길과 같은 길을 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고난 받는 삶을 사셨으니 우리도 고난 받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편지 속에 있는 글을 읽으면서 우리는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크리스천의 삶에 대한 새로운 통찰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난 받는 삶에 참여하고 그 삶을 나누는 것입니다 (To live as a Christian means to participate and share in the suffering of Christ).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께서 사셨던 방식대로 사는 것입니다.

‘Paradigm Shift’라는 말이 있습니다. ‘paradigm’은 어떤 사람이 가지고 있는 ‘frame of reference’입니다. 크리스천은 어떤 사람들이냐 하는 문제에 대하여 각자가 과거의 경험이나 자기가 가지고 있는 정보를 가지고 만든 자신만의 ‘frame of reference’가 있습니다. 크리스천은 마음이 평안한 사람들이다, 크리스천은 다른 사람을 잘 도와주는 사람들이다, 기쁘게 사는 사람들이다 하는 자기 나름의 크리스천들에 대한 생각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성경에서 들은 말씀은,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입니다. 그렇습니까? “크리스천은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난에 참여하고 그 고난을 나누는 사람들이다” 여러분들 중에 이런 생각을 미처 해 보지 못한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paradigm shift’가 일어납니다. 마치 자동차가 하이웨이를 달리다가 gear를 shift하니까 속도가 빨라지면서 새로운 기분을 느끼게 되듯이 ‘paradigm’이 shift 되면 전혀 다른 시각으로 크리스천의 삶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고, 전에 보지 못했고, 생각하지 못했던 크리스천의 삶에 대한 새로운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저도 크리스천의 삶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Elisabeth Shep-ping (1880-1934, 독일)에 대한 영화를 통해서, 또 그녀에 대한 글들을 읽으면서 크리스천의 삶이 어떤 것인가 하는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그녀가 죽고, 그녀의 방에 붙어 있었다는 글 귀 ‘Not success, but service (성공이 아니라 섬김입니다)’하는 글 귀를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독일 선교부에 보내 주는 선교비를 모두 조선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가지고 있던 담요 한 장도 절반은 누구에게 줘 버리고, 그녀 자신은 영양 실조로 죽었다는 글을 읽을 때는 가슴이 먹먹해 집니다. 그리고, David Livingstone (1813-1873, 영국)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도 그런 감정을 또 느꼈습니다. 리빙스턴이 남긴 글 하나 소개할까요? “Oh, that I could dedicate my all to God. This is all the return I can make Him. God, send me anywhere, only go with me. Lay any burden on me, only sustain me. And sever any tie in my heart except the tie that binds my heart to Yours (오, 나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다니! 이것은 내가 하나님께로 부터 받은 모든 것을 돌려 드린 것 뿐입니다. 하나님, 저와 함께만 가신다면 저를 어디든지 보내십시오. 저를 붙잡아만 주신다면 어떤 짐이든지 저에게 지우십시오. 저의 마음이 당신과 묶여 있는 끈을 제외하고는 내 마음에 묶여 있는 모든 끈들을 끊어 주십시오).” 이런 글을 읽고 나면, 크리스천의 삶에 대한 새로운 인식, “아, 이것이 진정한 크리스천의 삶이로구나!” 하는 새로운 ‘paradigm’이 생깁니다.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살았던 고난의 삶에 참여하고, 그 고난의 삶을 나누는 것입니다.  ‘나눈다’는 말은 자신도 그렇게 산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고난 받는 삶을 살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제 머리 속에 두 개의 성경 말씀이 떠 오릅니다. 하나는, 히브리서 5:8-9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Even though Jesus was God's Son, he learned obedience from the things he suffered. In this way, God qualified him as a perfect High Priest, and he became the source of eternal salvation for all those who obey him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셨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고난을 통해서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이것을 통하여 하나님은 예수를 완전한 대제사장으로 인정하셨고, 그는 그에에 순종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거가 되셨습니다).” 무슨 말씀인가요? 예수님은 자신이 겪고 있는 고난 속에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가 들어 있다고 생각하고 다 받아들이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주님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어떻게 여러분의 삶에 적용하겠습니까? 교회생활을 좀 하고, 성경도 좀 알고, 기도도 좀 하는 사람들이 내가 받는 고난 속에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가 들어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 말이 맞으려면 조건이 있습니다. 그 조건은 그 사람이 진실한 크리스천으로 살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크리스천으로 살려고 하는 진지한 몸부림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지한 고민과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받는 고난이라면 그 속에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가 들어 있다고 감히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이런 고난이라면 그 고난은 단순히 고난으로 끝나지 않고 우리를 더욱 성숙한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 주고, 우리를 더욱 견고한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 줄 것입니다.

또 하나 떠오르는 말씀은 베드로전서 2:24-25 말씀입니다. “그는 몸소 우리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써, 우리가 더 이상 죄를 위해 살지 않고 의를 위해 살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상처를 입으심으로써, 우리가 낫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길 잃은 양처럼 잘못된 길로 갔지만, 이제는 영혼의 목자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베드로전서 2:24-25) “He personally carried our sins in his body on the cross so that we can be dead to sin and live for what is right. By his wounds you are healed. Once you were like sheep who wandered away. But now you have turned to your Shepherd of your souls.”

그리스도의 고난은 자신의 잘못 때문에 받은 고난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대신 받은 고난이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받아야 할 고난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문제, 다른 사람의 아픔, 다른 사람의 염려와 걱정, 다른 사람의 슬픔을 예수님께서 떠 맡으신 것입니다.

Joseph M. Scriven (1819-1886)이 쓴 ‘죄 짐 맡은 우리 구주’ 가사가 생각납니다. 이 찬송의 영어 제목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What a Friend We Have in Jesus (예수님이 우리의 친구라니)”입니다. 그 찬송 1절 가사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What a friend we have in Je-sus, All our sins and griefs to bear! What a privilege to carry Everything to God in prayer!” (우리의 죄와 슬픔을 대신 짊어지시는, 예수님이 우리의 친구라니! 기도를 통해서 모든 것을 하나님께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특권인가!)

우리가 어떻게 이런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고 그 고난을 우리의 삶에서 실천하면서 살 수 있겠습니까? 어렵다고 생각하면 대단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면 불가능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런 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생각에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것이 없다.” (마태복음 19:26) 그렇습니까? 자신도 연약한 몸이었지만 그 몸으로 조선의 여성들의 문제를 떠맡았던 Elisabeth Shepping (한국 이름: 서서평) 같은 사람이 있잖아요? 미개한 아프리카 사람들을 위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그 땅에서 살다가 그 땅에 죽은 리빙스턴 같은 사람이 있잖아요? 아니, 우리가 감이 접근할 수 없는 이런 사람들 외에도 이름 없이 조용히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고,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자기가 가진 것을 나누어 주고, 그들의 아픔과 걱정을 같이 해 주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있잖아요? 이런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고 그 고난을 나누는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내 안에 있는 ‘이기주의 (selfishness)’라는 적(敵, enemy)과 싸워야 합니다. ‘이기주의’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문제에 상관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나는 내 문제만 생각하면서 살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기주의’입니다. 여러분, 잘 알아 두세요. 크리스천의 삶 속에 ‘이기주의’는 설 곳이 없습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 ‘이기주의’가 설 곳을 내주면 안 됩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기 자신만 위하려고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마음과 평생 싸워야 합니다. “내가 왜?” 하는 이기적인 마음이 생길 때 “나는 크리스천이니까!” 하는 마음을 가지고 내 안에 있는 이기적인 적과 싸워야 합니다. 이 내 안에 있는 적을 무찌르지 않으면 천박한 크리스천이 되고 맙니다. “크리스천이 왜 저래?” 하는 비난을 받습니다. 내 안의 적을 무찌르지 않으면 향기가 나지 않는 크리스천이 되고,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상실한 크리스천이 되고 맙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골로새서 1:24에 있는 말씀입니다. “I am glad when I suffer for you in my body, for I am participating in the sufferings of Christ that continue for his body, the church (나는 여러분을 위해 내 몸에 고난 받는 것을 기뻐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그의 몸인 교회를 통해 계속되고 있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교회는 여러분 자신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고, 그 고난을 자신의 삶 속에서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You have stayed with me in my time of trial. And just as my Father has granted me a Kingdom, I now grant you the right to eat and drink at my table in my Kingdom.” (누가복음 22:28-29) “나의 아버지께서 왕국을 나에게 주신 것처럼, 다도 너희에게 나의 왕국의 식탁에서 먹고 마실 수 있는 권리를 준다. 너희는 내가 어려움을 겪을 때 (in my time of trial) 나와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나와 함께 있었다는 것은 내가 어려움을 겪을 때 그 어려움을 같이 나누었다는 뜻입니다. 어떤 번역 성경에는 ‘in my time of trial’이라는 말 대신 ‘in my time of temptations (내가 유혹 받는 시간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고, 그 고난을 나누는 삶은 장차 우리가 주님의 식탁에 앉을 권리를 갖느냐 갖지 못하느냐 하는 문제와 직결될 만큼 중요한 문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