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8/2019 | 사순절 새벽기도 38

Extravagant Love

마가복음 14: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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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7/2019 | 사순절 새벽기도 37

가장 큰 계명

마가복음 12:2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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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6/2019 | 사순절 새벽기도 36

모둥이돌이신 예수님

마가복음 1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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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5/2019 | 사순절 새벽기도 35

성전예배의 종말

마가복음 11: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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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4/2019 | 종려주일 메시지

우리 때문에 We Are The Reason

이사야 53:1-6

지지난 주 성가대에서 헌금송으로 부른 노래 제목을 기억하시나요?  제목이 ‘우리 때문에 (We Are The Reason)’이었습니다. 제가 언젠가 설교 시간에 이 노래 가사를 소개한 적이 있었습니다. 가사 내용이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는데 아주 좋은 가사입니다.

We were the reason that He gave His life (그가 그의 생명을 주신 것은 우리 때문이었습니다)
We were the reason that He suffered and died (우리 때문에 그는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셨습니다)
To a world that was lost, He gave all He could give (잃어버린 세상을 위해 그가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주었습니다.
To show us the reason to live (우리에게 살 이유를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I've finally found the reason for living (나는 드디어 삶의 이유를 발견했습니다)
It's in giving every part of my heart to Him (그것은 나의 마음을 전부 그분께 드리는 것입니다)
In all that I do, every word that I say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과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말로)
I'll be giving my all just for Him, for Him (나의 전부를 그분께 드릴 것입니다)

Don't you know that you are the reason (당신은 아시나요? 당신 때문이라는 것을)
That He came oh He came to save us (He gave his life)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을)
When He gave His life for us, He suffered and died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고통을 받으셨고, 죽으셨습니다.)

For a world that was lost He gave (잃어버린 세상을 위해)
Everything that He had He gave (그는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To show us the reason to live (우리에게 삶의 이유를 알려 주시려고)

어떻습니까? 정말 고난주간에 부르기 적합한 찬양 아닙니까? 주님은 나를 구원하시려고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주셨다고 합니다. ‘그가 줄 수 있는 모든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은 그의 목숨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사람이 목숨을 드린다고 할 때는 명분이 있어야 합니다. 뭔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요한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16)”고 했습니다. 하나님 사랑하신 세상은 아름다운 세상이 아니었습니다. ‘죄가 관영한 세상’이었습니다. ‘관영하다’는 말은 ‘널리 퍼지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이 창세기 6:5에 나오는 말씀인데, ‘the extent of human wickedness on the earth’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 아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유명한 로마서 5:8에는 “우리가 여전히 죄인이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왜? 왜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습니까? 왜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의 생명을 주셨습니까?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증명하시려고 ‘to prove His love for us’ or ‘to show His great love for us’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해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그렇게 해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위에서 소개한 찬양 가사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When He gave His life for us, He suffered and died (그가 우리에게 그의 생명을 주실 때 그는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셨습니다)” ‘To show us the reason to live (우리에게 왜 살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려 주시려고)’

어저께 새벽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길에 ‘여리고 (Jericho)’를 지나가시다가 ‘맹인 거지 바디매오 (a blind beggar named Bartimaeus)’라는 사람을 고쳐 준 말씀을 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디매오에게 물어 봅니다. “나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바디매오가 대답합니다. “선생님, 보기를 원합니다.” 몇 마디 안 되는 짧은 대화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바디매오의 말 속에서 정말 낫기를 원하는 간절한 믿음을 보았습니다. 바디매오의 말 속에서 “이 분이 나를 다시 보게 할 수 있다”라는 강렬한 믿음을 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디매오에게 말씀하십니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 (Go, for your faith has healed you).” 여기까지는 복음서에서 읽었던 다른 이야기와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바디매오 이야기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 즉시, 그는 보게 되었고, 예수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Instantly the man could see, and he followed Jesus down the road).” (마가복음 10:52) 그 뒤에 바디매오의 삶이 어떻게 되었는지 오픈 엔딩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바디매오의 이야기는 뭔가 여운이 있습니다. 바디매오의 이야기가 주는 감동이 있습니다.

여러분, 도대체 이 감동의 정체가 무엇일까요? 한 동안 제가 일본의 여류 작가 미우라 아야꼬에게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미우라 아야꼬는 진실한 크리스천입니다. 그의 정신 세계가 크리스천적인 가치관으로 잘 set up이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제가 미우라 아야꼬를 좋아하게 된 이유입니다. 그녀에게는 크리스천의 삶은 이래야 한다는 말을 쉽게, 평범한 말로 풀어내는 탁월한 재주가 있습니다. 그녀가 쓴 이야기 중에 (너무 오래 되어서 이름도 잘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일본 제일의 스시맨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일본 제일의 스시맨이 된 이 사람은, 다른 아이들처럼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진학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가정 사정이 넉넉하지 않았던 그의 부모님이 난색을 표하는 것입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말고 기술을 배우면 어떻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기술보다는 고등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고 싶어서 부모를 졸랐습니다. 그러다가 정말 우연한 기회에 자기가 이 집에 양자로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의 부모는 친부모가 아닌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았을 때, 제일 먼저 이 사람에게 드는 생각은 “참 미안하게 되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 뒤 이 사람은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스시 만드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스시 만드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는지 마침내 일본 제일의 스시맨이 되었습니다. 미우라 아야꼬가 이 사람에 대하여 이렇게 마무리를 합니다. “이 사람이 만든 스시를 먹으면 뭔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을 느끼게 된다. 아마도 그 감동은 인간이 마땅히 가야 하는 길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닐까 한다.”

저는 바디매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다시 한번 오래 전에 이 스시맨의 이야기에서 느꼈던 감동을 다시 느꼈습니다. 누가 이런 말을 썼습니다. “Once you have seen what God can do for you, It’s time to see what He can do through you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안 사람은, 이제 하나님께서 당신을 통하여 무엇을 하실 수 있는지를 볼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은 우리 주변에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와 주셨다고 말하는 사람들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납니다. 그러니, 그들의 이야기에 감동이 없습니다. 내 친부모도 아니고, 집안의 경제 사정도 좋지 않은데, 그것도 모르고 고등학교에 가겠다고 떼를 쓴 것이 너무 미안했다는 이야기로 대부분 사람들의 이야기가 끝이 납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서는 그 뒤에 이 사람이 일본 제일의 스시맨이 된 이야기를 들을 수가 없습니다.

바디매오의 이야기가 감동적인 것은, 그의 이야기 뒤에 이 사람이 일본 제일의 스시맨이 된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의 이야기는 비록 오픈 엔딩으로 끝이 나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통하여 많은 영광을 받으셨다는 이야기를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디매오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지 그 이야기를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셨습니까? 당신이 어려움에 빠져 있을 때 하나님께서 도와 주셨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It’s time to see what He can do through me.” 이제는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무슨 일을 하실 수 있는 그것을 보고 기대할 시간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서 지신 십자가를 묵상하면서도 같은 생각을 해야 합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무슨 일을 하실 지 지켜 볼 시간이다.” 십자가의 의미를 제대로 안 사람이라면, 이제부터 우리 각자가 일본 제일의 스시맨이 된 사람의 이야기를 써야 합니다. “그래요. 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이런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이런 일을 하셨습니다.” 지금은 이렇게 여러분의 이야기를 써야 할 시간입니다.

이사야는 유다 왕국에서 예언자로 활동했던 사람입니다.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이사야는 므낫세 (Manasseh, 687-643 B.C.)라는 왕이 통치할 때 순교했다고 합니다. 이사야서는 메시아에 대한 예언 말씀이 많이 나오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예수님의 시대와는 적어도 600-700년의 시대적인 간격이 있는데, 그 말씀 속에 예수님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나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말씀을 제대로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 말씀을 한번 보시겠습니까? “정말로 그는 우리의 질병을 짊어지고, 우리의 아픔을 대신 겪었다. 그가 상처 입은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짓밟힌 것은 우리의 죄 때문이다. 그가 맞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얻었고, 그가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다.” (이사야 53:4-5)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Yet it was our weaknesses he carried; it was our sorrows① that weighed him down. And we thought his troubles were a punishment from God, a punishment for his own sins! / ①Or Yet it was our sicknesses he carried; / it was our diseases But he was pierced for our rebellion, crushed for our sins. He was beaten so we could be whole. He was whipped so we could be healed.” 간단히 요점을 말한다면, 이 말씀에 ‘익명의 사람 (anonymous)’이 등장합니다. 신학자들은 이 사람에게 ‘A Suffering Servant (고난 받는 종)’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 사람이 무거운 짐을 등에 짊어지고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의 등에 짊어진 것은 ‘our weakness, our sorrows (우리의 연약함과 우리의 슬픔)’였습니다. 이 사람이 자기 짐이 아니라 우리의 약함과 우리의 슬픔을 대신 짊어지고 힘들어하고 있었고, 우리가 받아야 할 ‘벌 (punishment)’을 대신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고난의 세월을 보내면서 하나님께서 보내 주실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모든 악한 세력들을 정복하고 평화의 시대를 열어 줄 전사(戰士, warrior)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를 통해서 보여 주신 메시아의 모습은 그런 모습이 아니라 ‘고난 받는 종’의 모습이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십자가의 말씀을 읽는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이사야의 글에 나오는 ‘suffering servant’의 모습을 발견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말씀을 읽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아하, 그 고난 받는 종이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weakness (연약함)’, 우리의 ‘sorrows (슬픔)’을 대신 짊어지시고 죽으셨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연약함 속에서도, 어떤 슬픔과 아픔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In this world you will have trouble. But take heart! I have overcome the world (이 세상에서는 너희가 어려움을 겪게 되겠지만, 용기를 내라. 절망하지 마라. 일어나라. 너희들의 연약함과 너희들의 슬픔을 대신 짊어진 내가 세상을 이겼다)." (요한복음 16:33)

여러분, 주보 겉면을 한번 보십시오. 어두운 바탕에 이런 글이 써 있습니다. “I loved you at your darkest (나는 네가 가장 어둡고 절망하는 그 자리에서 너를 사랑한다).” (로마서 5:8) 로마서 5:8은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분이 이 말씀을 묵상하다가, 이런 생각을 한 것입니다. “내가 여전히 죄인으로 살고, 내 인생에 아무 희망이 없을 때,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셨구나. 예수님은 내 인생의 가장 어둡고 절망적인 자리에서 나를 만나주시고,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지금 혹시 여러분 중에도 “나는 희망이 없다. 나는 지금 어둡고 깜깜한 절망의 자리에 있다!” 이런 생각을 하는 분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바로 당신을 만나기 위해서, ‘at your darkest (당신의 가장 어두운 자리에서)’ 당신을 만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님이십니다.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만나 주십시오.” 이렇게 주님을 영접하는 기도를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