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020 | 새해에는 이렇게 믿자 1

새로운 피조물 A New Creation

고린도후서 5:14-18

거룩한 산의 기슭에 여러 인디언 부족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 세력이 그리 강성하지 못한 한 인디언 부족이 있었습니다. 그 부족의 추장은 나이가 많아서 곧 자신의 뒤를 이을 후계자를 결정해야 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세 아들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세 아들에게 똑 같은 명령을 내렸습니다. “너희는 모두 저 거룩한 산에 올라가서 뭔가 우리 부족을 이끄는 데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가져오도록 해라. 가장 훌륭한 선물을 가져 오는 자가 나의 후계자가 될 것이다.” 며칠 뒤 큰 아들이 가장 먼저 돌아왔습니다. 큰 아들이 가져 온 것은 날카로운 화살촉과 창촉을 만들 수 있는 부싯돌 덩어리였습니다. “아버님, 이제 적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산에서 부싯돌을 잔뜩 찾아냈습니다.”

두 번째로 돌아 온 둘째 아들은 땔감이 많은 숲을 봐 두었다고 의기양양하게 말했습니다. “아버님, 이제 우리는 추위를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모닥불을 지피고, 음식을 만들고도 남을 만큼 땔감이 충분한 곳을 보아 두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돌아온 막내 아들은 빈 손이었습니다. “아버님, 저는 아버님께 보여 드릴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산 정상에서 멀리 새로운 땅을 보았습니다. 그 땅에는 숲과 초원, 산과 계곡, 물고기와 동물로 가득했습니다. 그 땅은 먼 곳에 있지만, 언젠가 저는 저희 부족을 이끌고 그 땅으로 갈 것입니다.”

세 아들의 말을 모두 듣고 난 추장은 막내 아들을 후계자로 삼겠노라고 선포했습니다. “너는 나와 우리 부족에게 가장 값진 선물을 주었다. 너에게는 미래를 내다 보는 비전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비전을 이루고자 하는 꿈이 있구나!”
자신의 삶에 대한 비전과 그 비전을 이루고자 하는 열정은 그 사람의 삶을 아름답게 만드는 요소입니다. 비전과 열정은 삶을 아름답고 감동적인 것으로 만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을 한 단계 더 높은 곳으로 승화 시키는 요소입니다. 새해를 맞는 우리에게 도전을 주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새해가 되면 누구나 새로워지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성경에도 새로워지고자 하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니고데모라는 사람은 그 사회에서 매우 유명한 지도자였고, 산헤드린의 회원이었고, 존경 받는 랍비였습니다. 이 니고데모에게 새로워지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이 눈을 피해 ‘한밤중에 (at night)’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또 예수님을 우물 가에서 만났던 한 사마리아의 여자도 새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의 소원이 있었습니다. 이 여자는 예수님께 자신의 목마름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저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주셔서 제가 다시는 목이 마르지 않고 물을 길으러 여기에 오지 않게 해 주십시오.” (요한복음 4:15) 또 삭개오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사람도 새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는 소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키가 작았던 그는 예수님을 보기 위해서 뽕나무 위로 올라 갔고, 결국 예수님을 만나 “오늘 이 집에 구원을 받았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두 번째 그의 편지에서 ‘새로운 사람’이 되는 문제에 대하여 이렇게 썼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창조입니다 (Therefore, if anyone is in Christ, he is a new creation).” (고린도후서 5:17) 그가 말하는 ‘새로운 창조’는 ‘새로운 피조물 (new creature)’ ‘새로운 사람 (new person)’으로 번역할 수 있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 어디에 ‘방점 (the operative word)’을 찍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당연히 그리스도 안에 (in Christ)라는 말에 방점을 찍어야 합니다. 맞습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밖에서 (outside Christ)’는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없고,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습니다. ‘핵인싸’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사이더 중의 인사이더로서 성격이 활발하고 모임에 무리 없이 녹아 드는 사람을 ‘핵인싸’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녹아 든 ‘핵인싸’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핵인싸’가 되어야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볼까요? 그리스도 안에 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united with Christ)’ 라는 뜻입니다. 토마스 머튼 (Thomas Merton, 1915-1968, 프랑스)이라는 유명한 명상가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과 영적인 연합을 이루는 것은 크리스천에게는 일상적인 일이며 동시에 의무이다 (It is in the ordinary labors and duties of life that the Christian can and should develop his spiritual union with God).”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와 연합하는 일은 크리스천이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고 의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크리스천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일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My old self has been crucified with Christ. It is no longer I who live, but Christ lives in me).” (갈라디아서 2:20) 이 말씀에서 ‘나’는 ‘옛날의 나 (old self)’입니다. 그런데, 세상적인 관점과 세상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았던 ‘과거의 나’는 죽었기 때문에 이제 예전에 추구했던 것들은 나에게 큰 의미가 없습니다. 막연하게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 같다는 감정이나 느낌을 가지고 말하지 마십시오. 구체적으로 이런 변화가 내 속에서 일어날 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런 사람을 ‘새로운 사람’이라고 합니다.

둘째로, ‘그리스도 안에’ 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나눈다 (partake)”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제자들에게도 기도할 때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6:33). 그가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기도 속에도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기도가 나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Our Father who art in heaven, hallowed be thy name, thy Kingdom come, thy will be done in earth, as it is in heaven).” (마태복음 6:9-10)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나눈다고 하는 것은 그가 가졌던 꿈을 나의 꿈으로 삼고, 그가 가졌던 기도를 나의 기도로 삼고, 그 꿈을 나의 삶에서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사람을,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한번 보십시오. “나는 나에게 오는 사람을 결코 쫓아 내지 않을 것이다 (요한복음 6:37)”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어느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제외된 사람이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누구도 형식적으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그 말씀이 복음서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어떤 문둥병 환자 (a man with leprosy)가 예수님께 와서 무릎을 꿇고 간청했습니다. ‘선생님께서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불쌍히 보셨습니다. 그래서 손을 내밀어 그를 만지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원하니, 깨끗해져라!’ 그러자 바로 문둥병이 떠나고 그가 나았습니다.” (마가복음 1:40-42)

며칠 전에 프랜시스 교황이 환영하는 사람들을 만나다가 어떤 사람이 교황의 손을 꽉 잡고 놓아주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자 교황이 화를 내면서 그 사람의 손을 뿌리친 영상이 화제가 되었습니다. 나중에 교황이 공식적으로 사과를 했습니다. 나도 인간이기에 자주 이런 잘못된 면을 보일 때가 있다고, 이것은 명백하게 잘못한 일이었다고 사과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 말씀을 보십시오. “Moved with compassion, Jesus reached out and touched him (그 사람에게 동정심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는 손을 내밀어 그 사람을 만지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을 나눈다는 것은 우리도 이렇게 다른 사람에 대한 ‘compassion’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마지 못해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성경이 말하는 ‘새로운 사람’입니다.

헨리 듀넌트 (Jean Henry Dunant, 1828-1910)라는 스위스 사람이 있었습니다. 프랑스 말 로는 앙리 뒤낭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유명한 은행장이었습니다. 그는 전쟁의 영웅 나폴레옹을 꼭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가 나폴레옹을 만나고 싶어하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나폴레옹이라는 사람을 개인적으로 만나고 싶다는 야망 때문이었고, 또 하나는 스위스의 은행장으로서 프랑스와 경제협력의 기회를 가졌으면 하는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드디어 그는 스위스의 경제 사절단의 일원이 되어서 파리로 가서 나폴레옹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그가 파리에 도착했을 때는 공교롭게도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나폴레옹은 전쟁터로 떠난 후였습니다. 듀넌트는 실망하지 않고 전쟁터를 찾아가서라도 나폴레옹을 만나겠다는 생각으로 전쟁터로 갔습니다. 거기서 그는 난생 처음으로 피투성이가 되어 뒹굴고 있는 수많은 시체들을 바라보면서 전쟁의 참혹함과 허무성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전쟁은 끝이 났지만 그는 거기에 남아서 의사를 도와 부상병들을 처리하고 시체들을 치우는 일을 했습니다. 비록 나폴레옹을 만나 개인적인 야망을 채우려던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그에게 새로운 꿈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평화에 대한 꿈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전쟁은 없어야 한다. 그리고 전쟁에서 부상당한 사람들을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다.” 점차 이 꿈이 그의 마음을 지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몇몇 친구들과 함께 자기의 꿈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 시작된 것이 ‘적십자 (The Red Cross)’입니다. 이 꿈 덕분에 그는 1901년에 프랑스의 Frédéric Passy와 함께 첫 번째 노벨 평화상을 공동 수상했습니다. 여러분, 바로 이런 것이 예수님의 삶을 나누고 실천하는 일이 아닌가요? 이것이 세상에 화목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일이 아닌가요? 여러분, 이 말씀을 들으면서 이미 그런 생각을 하셨을 것입니다. 예전에 가졌던 꿈을 내려 놓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꿈을 꾸고, 그 꿈을 이루어 나가는 사람이 성경이 말하는 ‘새로운 사람’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 안에’ 라는 말은 우리 안에 내주(內住)해 계시는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는 뜻입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Since we are living by the Spirit, let us follow the Spirit’s leading in every part of our lives (우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삶의 모든 부분에서 성령의 인도를 따라서 살아야 합니다).” (갈라디아 5:25)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자기 뜻, 자기 생각을 따르지 않고 성령의 인도를 따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달라집니다. 예전에는 ‘a worldly point of view (세상적인 관점)’을 가지고 살았지만, 이제는 ‘God’s point of view (하나님의 관점)’ 혹은 ‘a spiritual point of view (영적인 관점)’을 갖게 됩니다. 자신의 이기적인 꿈을 좇던 사람이 모든 사람의 유익을 위한 꿈을 꾸게 됩니다. 사람이 관점이 달라지면, 자연히 추구(追求)하는 것도 달라집니다. 이런 사람이 성경이 말하는 ‘새로운 사람’입니다.

2020년 새해를 살아가면서, 무엇보다 먼저 ‘새로운 사람’이 되고 싶은 소원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새로워지고 싶은 소원이 없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새해에는 ‘그리스도 안에’ 라는 말을 여러분의 삶에서 잘 깨닫고 실천하는 한 해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이미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된 사람입니다.


12/31/2019 | 송구영신예배 메시지

새 술은 새 부대에 New Wine Is Stored In New Wineskins

마태복음 9:9-17

오늘 송구영신 예배 나오신 교우 여러분들께 감사 드립니다. 디 엘 무디 (D. L. Moody, 1837-1899, 미국)가 한번은 교회에 비판적이고 교회에 잘 나오지 않는 사람의 집을 찾아 갔다고 합니다. 때는 겨울이었는데, 응접실에는 난로가 활활 타고 있었습니다. 무디는 난로를 열고 타고 있는 나무 장작을 밖으로 꺼내 놓았답니다. 주인이 놀라면서 왜 이러시느냐고 물었답니다. 무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참을 기다렸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얼마 되지 않아 장작의 불이 꺼졌습니다. 무디가 입을 열었습니다. “보십시오, 이렇게 잘 타던 장작불이 밖으로 꺼내 놓았더니 얼마 되지 않아 불이 꺼지고 말았습니다. 크리스천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모여서 예배 드리고, 찬송 부르고, 기도할 때 우리는 서로 격려를 받으면서 믿음이 자라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And let us not neglect our meeting together, as some people do, but encourage one another, especially now that the day of his return is drawing near.” (히브리서 10:25) 주님이 오실 날이 더욱 가까워 온 지금 서로 격려하면서 열심히 모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새해에는 더욱 열심히 모이기를 힘쓰는 여러분들이 되시고, 우리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마태라는 사람을 제자로 부르시는 말씀입니다. 그 때 마태는 세관에 앉아 사무를 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따라 오라고, 너를 나의 제자로 삼겠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 말을 들은 마태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So Matthew got up and followed him”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왜 그러느냐고 이유를 묻거나, 지체하지 않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 때부터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과 응답 사이에 다른 아무 것도 개입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부르심과 응답 사이에 뭔가 자꾸 집어 넣습니다. 생각을 더 해 보겠다고 하고, 생각할 시간을 필요하다고 하고, 누구하고 의논을 해 봐야 되겠다고 하고, 요즘에는 기도를 해 보겠다고 말하면서 결국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절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태를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면서 3년을 보냈습니다. 3년을 보내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직접 옆에서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제자들은 하나씩 크리스천은 어떻게 사는지 예수님으로부터 배웠습니다. 그런데, 그런 예수님과 제자들을 옆에서 지켜 보는 사람들은 그들을 정상적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질문을 합니다. “왜 당신들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합니까?” 이 말씀에 나오는 ‘세리와 죄인’은 ‘tax collectors and sinners’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tax collectors and sinners’는 다른 말로 번역하면 ‘scum’입니다. ‘인간 쓰레기’라고 할까요? 우리 말에 ‘인간말짜’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 쓸모 없는 사람들 일컫는 말입니다. 영어의 ‘scum’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왜 예수님과 제자들은 이런 ‘쓰레기 같은 사람들’과 어울리고 함께 식사를 하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건강한 사람은 의사가 필요 없으나, 환자들은 의사가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나는 희생 제물보다 자비를 원한다’라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태복음 9:12-13) 이 말씀을 잘 보십시오. 사람들은 예배에 관심이 있지만, 하나님은 예배보다 ‘긍휼’과 ‘자비 (mercy)’에 관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비가 없는 예배를 받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는 ‘죄인들과 세리들’을 ‘인간말짜’로 보는 마음을 가지고 어떻게 예배를 드릴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지만, 병든 사람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고, 나는 죄인들을 부르러 왔다고, 죄인들을 받아 주고, 그들의 삶을 바꿔주고, 그들도 천국의 시민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 기대와 희망을 주기 위해서 왔다고 하셨습니다.

생각해 보면 예수님의 말씀이 다 맞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이 ‘바리새파’ 사람들에게는 이상하게 보였을까요? 아니, 단순히 이상하게만 보인 것이 아니라 분노하게 만들었을까요? 바리새파 사람들이 율법이 가르치는 교리에만 충실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지금까지 ‘죄인들과 세리들’에 대한 생각을 아무 비판 없이, 아무 반성 없이 계속해서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질문이 나옵니다. “왜 당신들은 금식을 하지 않습니까?” 이 질문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질문은 좀 의외의 질문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면 몰라도 어떻게 예수님과 한 배를 타고 있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이런 질문을 했는지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언행은 심지어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도 이해가 안 되는 것이었다” 이런 생각 말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율법 교육을 제대로 받고, 경건한 생활을 한다는 사람들은 모두 일주일에 한 두 번씩 자주 금식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종교적인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예수님과 제자들은 금식도 하지 않는, 막 돼먹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언행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까지 분노하면서 “우리도 금식하고, 바리새파 사람들도 자주 금식을 하는데, 왜 선생님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질문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결혼식에 참석한 사람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데, 같이 기뻐하는 것이 맞지 않느냐? 신랑의 기쁨을 같이 나누지 않고 지금 금식 중이라고 하면서 슬퍼한다면 신랑에 대한 예의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러나 곧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텐데, 그 때 금식하면 좋지 않겠느냐?” (15절)

생각해 보면, 예수님의 말씀이 모두 맞습니다. 그런데, 왜 금식을 하지 않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이 사람들에게 이상하게 보였을까요? 그들은 전통에 얽매여 있었고, 습관적인 믿음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말은 이 사람들은 자기들이 믿고 있는 교리나 지금까지 행해 왔던 전통에 대하여 한번도 질문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한 번도 ‘왜’라는 의문을 품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냥 지금까지 해 왔던 것이니까 습관적인 금식을 반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습관적으로 반복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특히 오래 교회생활을 한 사람들이 한번도 ‘왜’라고 묻지 않고 습관적으로 반복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런 믿음생활은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를 살리는 살아 있는 믿음을 갖게 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만일 그렇게 하면, 낡은 부대가 터져 포도주가 쏟아지고, 가죽 부대도 못 쓰게 될 것이다. 새 포도주는 새 가죽 부대에 넣어야 한다 (17절)”고 하셨습니다. “New wine is stored in new wineskins”이라고 하셨습니다. ‘new wine’은 ‘new wineskin’에 넣어야 하는 이유는, ‘new wine’이 팽창하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old wineskin’은 딱딱하게 굳어서 신축성이 없습니다. 속에서 ‘new wine’이 팽창하면 압력을 견디지 못해서 그만 터져 버립니다.

‘new wine’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말씀과 교훈, 복음에는 팽창하는 힘이 있습니다. 바울이 복음의 능력에 대해서 잘 말했습니다.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 복음이 유대인으로부터 시작해서 이방인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믿는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16) 이 말씀에 나오는 ‘능력’이라는 말이 그리스 말로 ‘두나미스 (δύναμις)’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 ‘두나미스’라는 말에서 영어의 ‘다이너마이트 (dynamite)’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아버지가 우물을 파는 것을 옆에서 구경했습니다. 한참 우물을 파 내려가다가 커다란 바위를 만났습니다. 아버지 혼자 힘으로 제거할 수 없어서 기술자를 불러서 바위를 제거했습니다. 그 기술자는 바위에 구멍을 몇 개 파고 그 속에 ‘다이너마이트’를 집어 넣고 단단히 덮은 후에 폭발을 시켰습니다. ‘꿍’하는 소리가 나면서 속에 있던 단단한 바위가 갈라지고 물이 터져 나왔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교훈에는 ‘다이너마이트’과 같은 폭발력이 있습니다. 마치 ‘new wine’ 팽창력이 있는 것처럼 이요.  ‘old wineskin’이 ‘new wineskin’의 팽창력을 감당할 수 없어서 터져 버리는 것처럼, 예수님의 말씀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팽창력을 감당하지 못하면 터져 버리고 맙니다. 성경에 나오는 바리새파 사람들, 율법학자들, 사두개인들, 제사장들, 모두 ‘old wineskin’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감당할 수 있는 ‘new wineskins’가 아니었습니다.

‘새 술 (new wine)’은 ‘새 부대 (new wineskin)’에 넣어야 합니다. 문제는 저와 여러분이 ‘새부대 (new wineskin)’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정말 무서울 정도로 변하고 있습니다. 조금만 우리가 방심하면 뒤처지고 맙니다. 부지런히 우리가 가진 정보들을 update하고 새로운 지식을 배우지 않으면 시대에 뒤떨어지고 마는 것처럼, 우리 신앙의 영역에서도 우리는 새로워져야 합니다. 우리 안에 복음과 시대의 변화를 함께 담을 수 있는 ‘new wineskins’가 되지 않으면 우리는 새 시대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는 많은 시대적인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인류가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이슈들이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조건적으로 교회의 전통과 성경에 대한 교리적인 해석에만 매달릴 수 없는 시대적인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 대답을 누가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아무도, 어떤 권위 있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 사람 혼자 대답을 제공할 수 없습니다. 혹시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모든 사람이 그 의견에 동조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가 고민해야 합니다. 그리고 함께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고 함께 풀어가야 합니다. 그만큼 사람들의 생각이 다양 해졌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무엇보다 나 자신이 크리스천으로서 내 속에 복음과 시대의 변화를 같이 담을 수 있는 ‘새 부대 (new wineskin)’가 되기를 기도하십시오. 변화되기를 거부하고, 전통과 관습 속에 머물러 있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낡은 가죽 부대 (old wineskin)’가 되어서 복음을 땅에 쏟아버리는 불행한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이 시간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 드립니다. 우리가 다른 시대에 태어나지 않고 이 시대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것을 감사 드립니다. 계속해서 복음에 충실한 크리스천으로 살게 하시옵소서. 하지만, 전통과 습관적인 믿음에 매달리는 사람들이 되지 않게 하시고, 복음과 이 시대를 함께 담는 새 부대들이 되게 하옵소서. 2020년 새해는 능동적인 믿음으로 우리 앞에 놓인 과제들을 넉넉히 헤쳐 나가는 하나님의 백성들로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12/29/2019 | 송년예배 메시지

유익한 후회 Godly Sorrow

고린도후서 7:8-11

2019년을 시작한 지 바로 엊그제 같은데, 벌써 2019년 마지막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크리스마스 날 뉴스 중에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러시아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안구(眼球)’가 없이 태어난 희귀한 질병을 아기가 크리스마스 날에 새로운 가족에게 입양되었다는 기사가 올라왔습니다. 생후 8개월 된 이 ‘사샤’라는 아기는 ‘안구’가 없다는 것 빼고는 다른 아기들처럼 건강하고 잘 웃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샤’의 부모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는 집이어서 ‘사샤’의 치료비를 댈 수가 없고, 또 키울 형편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번 크리스마스에 이 아이를 키우겠다는 따뜻한 가족이 나타난 것입니다. 신문에서는 이것을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고 했습니다. 마음이 따뜻해 지는 기사입니다.

이런 따뜻한 소식이 있는가 하면, 최근 한국에서 일어난 ‘닭강정 사건’은 모두의 마음을 우울하게 합니다. 어느 아파트에 혼자 있는 어머니에게 ‘닭강정’ 30 박스가 배달되었습니다. 깜짝 놀란 어머니는 우리 집에서 이렇게 많은 ‘닭강정’을 주문한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주문서에는 그 어머니의 아들이 배달 시킨 것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몰랐지만, 어머니는 이렇게 우리 집으로 배달이 되었고, 또 ‘닭강정’ 가게에서 손해를 볼 수도 없으니 30박스 돈을 모두 내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다 먹을 수가 없으니 3박스만 주고 모두 가져가라고 했습니다. 그 어머니가 이런 결정을 한 것은 그 아들이 친구들 사이에서 왕따를 당하고 있었는데, 이번에도 친구들이 장난을 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닭강정’을 받지 않으면 자기 아들이 또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닭강정’ 가계 주인은 그 어머니가 시키지도 않은 ‘닭강정’ 값을 내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하고 카드 회사에 연락해서 지불을 막았습니다. 그리고 인터넷에 광고를 올려서 “이미 식어버린 ‘닭강정’이지만 필요한 분은 와서 가져 가라”고 광고를 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남의 집에 시키지도 않은 ‘닭강정’을 배달하게 한 사람들을 처벌해 달라고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경찰에서 조사해 본 결과, 이 일이 ‘대출 사기단’의 소행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돈이 필요했던 그 어머니의 아들이 은행에서 대출을 받으려고 했지만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급기야 인터넷 광고를 통해 ‘대출 사기단’과 접속하게 되고, 이 사람들을 만나 문서를 위조하고, 대출을 받는 연습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은행에 가서는 겁이 나고 이런 일을 해서는 안 될 것 같아서 그 아들은 뒷문으로 도망을 쳤습니다. 밖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대출 사기단’ 사람들은 화가 나서 아들 이름으로 ‘닭강정’ 30박스를 배달 시킨 것입니다. 좀 무섭기도 하고, 마음이 우울해지는 기사입니다. 신고를 하지 않았더라면 ‘닭강정’이 아니라 충분히 더 큰 보복이나 협박을 받을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세상은 이렇게 점점 험해 지고 있습니다. 인정은 메말라 가고, 기쁘고 행복한 일보다는 어둡고 우울한 일들이 더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이런 일들이 날마다 일어나고 있지만, 우리는 이런 일들에 관심을 보일 마음의 여유조차 없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만큼 살기가 힘들고 벅찹니다. 공부하는 학생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변을 돌아 볼 마음의 여유가 없이 한 해를 훌쩍 보내고, 오늘 올해 마지막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윌리엄 버클리 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크리스천은 일생에 세 번 회개하는 마음이 있다. 그리스도에게 회개하는 마음, 교회에게 회개하는 마음, 그리고, 세상에 회개하는 마음이다.” 그리스도에게 회개하는 마음이란, 예수님을 잘못 알고, 잘못 믿은 것을 뒤늦게 깨닫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은 생각과 결단 없이 자기는 예수를 믿고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며칠 전에 우연히 김형석 교수님의 신앙강연 동영상을 봤습니다. 올해 연세가 만으로 100세입니다. 그 동영상에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간단하지만 분명하게 말씀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교리적으로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예수님을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리적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언제든지 상황이 불리할 때는 믿음을 버리거나 예수님을 배반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가지고 있었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꿈을 함께 꾸고, 예수님께서 옳게 여기신 가치들을 자기의 가치관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을 버리지 않고 예수님을 배반하는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뒤에 서서 예수님께서 가시는 방향으로 함께 걷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사람들이 “진작 예수님을 그렇게 믿을 걸!” 하고 후회하면서 회개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교회에 대해 회개하는 마음을 갖는다고 했는데, 이것은 ‘성도의 교제’에 올바로 참여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와 회개를 말합니다. 예수님이 가진 꿈을 나의 꿈으로 삼고, 예수님이 옳게 여기시는 가치들을 나의 가치관으로 받아들인 사람들과 교제를 통해서 격려를 받고 위로를 받으면서 같이 크리스천으로 성장해 나가는 것이 ‘성도의 교제’인데, 내가 그 교제를 나누지 못한 것에 대해 회개의 마음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이 말에 일리가 있습니다. 평소에 ‘성도의 교제’를 소홀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아마도 이런 후회하는 때가 올 것입니다.

셋째로, 세상에 대해 회개하는 마음을 갖는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세상에 대한 나의 책임을 올바로 감당하지 못한 것에 대해 회개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마태복음 5:13)”라고 말씀하셨지만, 우리는 소금으로서의 직분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마태복음 5:14)”라고 말씀하셨지만, 우리는 세상의 빛으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뒤늦게 이 사실을 깨닫고 세상에 대하여 회개하는 마음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0:45 말씀을 잘 아시지요? 예수님은 자신이 이 세상에 온 목적을 ‘사람들로부터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섬기는 것 (not to be served, bur to serve others)’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섬김’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것이었습니다. ‘많은 사람을 위해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내 주는 것 (to give his life as a ransom for many) (마가복음 10:45)’이었습니다. 누구를 특정(特定)하지 않고 그냥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for many)’라고 하셨습니다. 누구를 특정하지 않은, 불특정 다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 주신 것입니다.

사이먼 앤 가펑클 (Simon & Garfunkel)은 1960-70년 대에 가장 인기 있는 남성 듀엣이었습니다. 제가 대학교 다닐 때였습니다. 저는 이런 가수들이 부르는 노래들을 들으면서 대학시절을 보냈습니다. 물론 사이먼 앤 가펑클 말고도 좋아하는 가수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저는 존 바에즈 (John Baez)나 쥬디 콜린스 (Judy Collins) 노래도 좋아했습니다. 사이먼 앤 카펑클은 수많은 히트곡을 냈는데요. ‘Sound of Silence (1964)’ ‘Scarborough Fare (1966)’ ‘Mrs. Robinson (1968)’ ‘El Condor Pasa (1970)’ ‘The Boxer (1970)’ 이 많은 히트곡 중에도 가장 히트한 곡은 1970년에 나온 ‘Bridge Over Troubled Water (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어)’라는 노래입니다. 곡도 좋지만, 가사가 매우 시적이고 의미가 있습니다. “When you're weary, feeling small, When tears are in your eyes, I'll dry them all I'm on your side, oh, when times get rough And friends just can't be found Like a bridge over troubled water I will lay me down (당신이 지쳤을 때, 당신이 작고 초라하다고 느낄 때, 당신의 눈물을 닦아 주고, 당신의 편에 서 드리겠습니다. 당신이 힘들고 어려울 때, 옆에 친구가 없을 때, 험한 물결 위의 다리처럼 나를 놓아 드리겠습니다).” 가만히 그 노래의 가사를 음미해 보면, 바로 이것이 우리 크리스천들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을 섬긴 예수님의 모습이고, 이것이 우리가 실천해야 할 삶의 모습입니다. 세상에 대하여 회개하는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우리가 그렇게 살지 못한 것을 회개하는 것입니다.

오늘 2019년 마지막 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누구나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뭔가 아쉬운 마음이 한 구석에 있지 않습니까? 이 아쉬움의 정체가 무엇일까요? 바로 그리스도를 위해 회개하는 마음, 교회에 대하여 회개하는 마음, 세상에 대하여 회개하는 마음이 아닐까요? 예수님을 올바로 따르지 못했다는 아쉬움, 그리고 교회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아쉬움, 그리고 세상에서 크리스천으로 올바로 살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아닐까요?

오늘 읽은 고린도후서 7장 말씀은 아주 특별한 말씀입니다. 고린도 교회에 무슨 큰 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그 문제를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이 소식을 듣고 고린도 교회를 몹시 책망합니다. 뒤로 미루거나 주저하지 말고 단호하게 이 일에 대처하라고 강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이렇게 편지를 쓴 바울의 마음도 편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들이 나의 편지를 읽고 마음에 상처를 받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이었습니다. 편지를 보낸 것을 후회하는 마음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는 슬픔은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므로 후회할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슬픔은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Godly sorrow brings repentance that leads to salvation and leaves no regret, but worldly sorrow brings death).” (고린도후서 7:10)

바울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See what this godly sorrow has produced in you: what earnestness, what eagerness to clear yourselves, what indignation, what alarm, what longing, what concern, what readiness to see justice done. At every point you have proved yourselves to be innocent in this matter.” (고린도후서 7:11) 여기서 ‘godly sorrow’라는 말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한 데서 오는 슬픔을 말합니다. 반대로 ‘worldly sorrow’라는 것도 있습니다. ‘세상적인 슬픔’입니다. 세상적인 가치관에 물들어 있는 사람들은 항상 ‘세상적인 슬픔’에 빠져 삽니다. 그것을 소유하지 못하고 성취하지 못한 데서 오는 슬픔입니다. 이런 슬픔은 죽음을 가져 온다고 합니다. 믿음생활에 아무 유익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godly sorrow’는 그 사람을 회개하도록 한다고 합니다. 그 사람을 정직하게 만들고, 열심을 내게 만들고, 불의한 일을 보고 분개하게 하고, 경각심을 갖게 하고, 간절하게 사모하도록 하고, 관심을 갖게 하고, 정의감을 갖게 하고, 순결하게 만든다고 합니다.

제가 이 말씀을 소개하는 이유는, 2019년 마지막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 마음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후회스러운 마음이 우리를 회개 시키는 데까지 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후회스러운 마음이 ‘godly sorrow’가 되어서 우리를 회개하게 하는 것입니다. ‘회개(悔改)’는 그리스어로 ‘메타노이아 (metanoia)’라고 합니다. ‘메타노이아’는 단순히 뉘우치거나, 후회하거나, 죄의식을 갖는 것이 아니라 ‘changing one’s way of life (삶의 방식을 바꾸기로 함)’ ‘making a decision to turn around, to face a new direction (돌아서기로 결심하거나, 새로운 방향을 마주 보기로 결심함)’입니다.

내가 왜 그리스도를 제대로 믿지 못했을까요? 내가 왜 교회생활을 제대로 못했을까요? 내가 왜 섬기는 삶을 제대로 살지 못했을까요? 아쉬운 마음을 가지세요. 후회하는 마음을 가지세요. 그러나, 여기서 멈추지 말고 지금 나의 삶을 회개하세요. “2020년 새해에는 나의 삶의 방향을 바꾸겠습니다!” “2020년 새해에는 지금까지 살아왔던 데서 돌아서서 새로운 방향을 마주 보고 살겠습니다!” 이렇게 여러분의 결심을 하나님께 올려 드리십시오.


12/22/2019 | 성탄주일 메시지 II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XV) To Live As A Christian

요한복음 3:16-18

세계 각국의 성탄절 인사가 재미 있습니다.  미국 "Merry Christmas (메리 크리스마스)!"
일본 "メリ クリスマス (메리 크리스마스)!" 중국 "圣诞快乐 (셩딴 콰일러)!"
프랑스 "Joyeux Noël (조이유 노엘)!" 스페인 "¡Feliz Navidad (펠리쓰 나비대드)!"
브라질 "Feliz Natal (펠리쓰 나딸)!" 독일 "Fröhliche Weihnachten (프뢸리헤 바이나흐텐)!"
이탈리아 "Buon Natale (부온 나탈레)!" 그리스 "Καλά Χριστούγενα (칼라 크리스토게나)!"
한국 "즐거운 성탄절 되세요!" 북한 "기쁜 성탄절 되시라요!"

성탄절이 되면 성탄 찬송을 많이 부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성탄 찬송가 중에 최고는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찬송가는 Joseph Franz Mohr (모어, 1792-1848, 오스트리아)가 시를 쓰고, Franz Xaver Gruber (그루버, 1787-1863, 오스트리아)가 곡을 붙였습니다. ‘모어’는 그 교회의 주임 신부로 섬기고 있었고, 학교 음악 교사였던 ‘그루버’는 그 교회 성가대 지휘자 겸 오르간 반주자로 있었습니다. 때는 1818년 크리스마스 전 날 저녁이었습니다. 주임 신부 ‘모어’는 다급한 마음으로 3km 떨어진 곳에 있는 성가대 지휘자 ‘그루버’의 집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모어’의 손에는 그가 2년 전에 써 놓은 시 한 편이 쥐어 있었습니다. 크리스마스 이브 미사가 불과 몇 시간 정도 밖에 남지 않았는데, ‘모어’ 신부는 미사에 쓸 음악이 필요했습니다. 공교롭게도 교회의 오르간이 고장 나는 바람에 다른 음악을 전혀 사용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다급한 ‘모어’는 이 찬양시에 곡을 붙여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 ‘그루버’의 집으로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어’의 시를 읽고 영감을 얻은 ‘그루버’는 기타 반주에 맞춰 부를 수 있도록 간단한 멜로디와 합창으로 곡을 만들었습니다. 그가 만든 악보에는 6절까지로 되어 있습니다. 이 날 저녁에 테너 ‘모어’와 베이스 ‘그루버’가 이중창으로 이 노래를 부르고 성가대가 후렴 부분을 불렀다고 합니다. ‘모어’가 기타 반주를 했다고 합니다. 바로 이 노래가 전 세계 사람들이 사랑하는 ‘고요한 밤 거룩한 밤’입니다. 이 노래가 1858년에 영어로 번역이 되었고, 현재는 140여 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이 되어 불리고 있습니다. 이 노래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게 된 이유는, 수 십년 간 계속된 ‘나폴레옹 전쟁 (1803-1815)’으로 마음이 황폐해 진 사람들이 평화와 안정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시기에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노래가 바로 ‘고요한 밤 거룩한 밤’입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이 찬송을 국보급으로 여기고 크리스마스 이브 전에는 이 곡을 대중 앞에서 연주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상업적으로 이 곡을 이용하는 것도 엄격하게 금하고 있다고 합니다. 2011년에 유네스코 (UNESCO)에서는 이 노래를 ‘인류의 유산 (world heritage)’으로 지정함으로써 더욱 가치를 인정 받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그렇듯이 인간의 위기는 하나님의 기회가 되는 것 같습니다. “Man’s extremity is God’s opportunity”라고 하지 않습니까? 예배 시간에 사용할 음악은 필요한데, 교회 오르간은 고장이 나서 쓸 수 없게 되고, 예배 때까지 시간은 별로 남아 있지 않고, 이런 상황 속에서 불후의 명곡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시간이 많았더라면 영영 이 노래가 나오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위기와 절망적인 상황이 하나님께서 일하시게 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통해서 오늘 우리가 처한 어려운 상황들을 성찰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대강절 촛불 (Advent Candle)’ 네 개를 모두 켰습니다. 오늘 켠 촛불이 사랑의 촛불입니다. 보라색 촛불입니다. 그리고, 한가운데 흰색 ‘그리스도의 촛불’을 켰습니다. ‘시간을 뚫고’ 이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사랑’이 무엇인지 알려 주시기까지,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우리가 그 ‘사랑’에 감격하는 이유는, 그 사랑이 우리의 구원과 밀접하게 관계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요? 저는 이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네 가지로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위대한 희생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읽은 요한복음 3:16 말씀을 어떤 사람들은 성경 66권을 요약한 말씀이라고 말하고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을 복음 중의 복음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이 그렇게 유명한 이유는 이 말씀이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잘 보여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For God so loved the world that he gave his one and only Son, NIV)”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어렸을 때부터 암송하면서도 오랫동안 ‘독생자’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몰랐습니다. 차라리 ‘독자(獨子)’ 혹은 ‘외아들’이라고 했으면 이해하기 쉬웠을 텐데, 왜 ‘독생자’라고 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100세가 되어서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의 이름이 ‘이삭’입니다. 성경에는 ‘이삭’이 아브라함의 ‘독자 (창세기 22:2, 12, 16, only son)’라고 나와 있습니다. ‘독생자’라는 말은 영어로 ‘only begotten son’이라고 되어 있는데, 하나님이 (낳은) 아들은 오직 하나 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하나 밖에 없는 귀한 아들을 우리를 위해 세상에 보내셨고, 그 아들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희생하신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성경은 그 이유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만일 우리가 이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고 실천하려고 한다면 우리가 가진 것 중에 가장 소중한 것을 포기하거나, 내려 놓거나, 희생해야 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사랑은 죄인들을 사랑하신 사랑이었습니다. 지난 주 예배 시간에 불렀던 찬송가 304장 가사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하네.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 위에 (The love of God is greater far than tongue or pen can ever tell; It goes beyond the highest star, And reaches to the lowest hell).” 이 찬송시를 쓴 Frederick M. Lehman (1868-1953, 독일)이라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이 미치는 범위가 별보다도 높은 곳에서부터 저 땅 속 깊은 지옥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넓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런 사랑이라면, 우리가 어떤 비참한 상황과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 놓여 있다고 해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에 비하면 오늘 우리의 사랑은 얼마나 이기적이고 얼마나 천박한 것입니까? 우리는 나에게 잘 해 주는 사람만 사랑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우리와 수준이 같은 사람만 사랑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사랑을 해도 이기적이고 계산적인 사랑을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죄인들을 사랑해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죄인들을 사랑하셔서 자기 ‘외아들 (only son)’을 세상에 보내셨고, 그 아들을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 (sacrifice for reconciliation)’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바울은 그의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And all of this is a gift from God, who brought us back to himself through Christ. And God has given us this task of reconciling people to him.” (고린도후서 5:18) 여러분, 이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 (New creation in Christ)’이 된 사람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런 사람들에게 주어진 임무 (task)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 임무는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해 시켜야 하는 ‘그리스도의 대사 (Christ’s ambassadors)’로서의 임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5:20)

셋째로, 하나님의 사랑은 ‘먼저 (first)’ 베푸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들을 이 악한 세상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 줌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고 있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참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참사랑’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우리의 죄를 벌하는 대신 하나님의 사랑하는 외아들을 우리를 위해 희생제물로 내주신 데서 드러났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사랑의 극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가 어떻게 서로 사랑하기를 마다하겠습니까?” (요한일서 4:9-11, 현대어 성경) 또 19절에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그 사랑을 배우게 된 것입니다 (We love each other because he first loved us).” 이 말씀의 뜻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을 보고 배우기 전에는 우리를 서로 사랑할 줄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참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비로소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에게 잊혀 지지 않는 고마운 분이 한 분 있습니다. 그분의 이름은 유분자 씨입니다. 저희 가정이 미국으로 이민 올 때 많은 도움을 주신 분입니다. 그 때 그분은 재미간호사협회 회장으로 있었는데, 한국을 방문 중이었습니다. 미국에 가서 공부를 더 하고 싶다는 말을 듣고 저를 미국으로 초청해 주셨습니다. 미국에 정착하는 과정에서도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제가 참 감사하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그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 말이 지금도 잊혀 지지 않습니다. “김 목사님, 저에게 감사할 필요 없습니다. 저도 처음에 미국 왔을 때 다른 분의 도움을 많이 받았거든요. 저에게 감사하지 마시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도와 주세요.”

사랑은 배우는 것입니다. 배우지 않으면 사랑을 베풀 줄 모릅니다. 하나님은 항상 먼저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사랑의 ‘주도권 (initiative)’을 하나님께서 쥐고 계십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배워서 실천해야 합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길은 상대방이 나를 사랑하기 전에 내가 먼저 사랑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먼저 나를 용서하기 전에 먼저 내가 용서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먼저 나에게 말을 걸기 전에 내가 먼저 말을 거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손을 내 밀기 전에 내가 먼저 손을 내 미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힘과 용기를 줍니다. 영어 단어에 ‘empower’라는 말이 있습니다. ‘힘을 준다’는 뜻입니다. “How great is the love the Father has lavished on us, that we should be called children of God! And that is what we are! But the people who belong to this world don't recognize that we are God's children because they don't know him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불리게 되었으니 우리에게 쏟아 부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가!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모릅니다).” (요한일서 3:1) 사도 바울은 “For Christ's love compels us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强勸)합니다., 고린도후서 5:14)”라는 말도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우리로 하여금 그 일을 하도록 드라이브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단순히 위대한 사랑이라고 찬양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로 합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진실한 사람이 되게 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empower’하고, 우리를 ‘compel’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은 쉽게 좌절하지 않습니다. 쉽게 포기 하지 않고, 쉽게 절망하지 않습니다. “How great is the love the Father has lavished on us (보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가)!” 이 말씀을 생각하고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고 용기를 얻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합니까? 그 사랑이 저와 여러분을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였습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empowering’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12/15/2019 | 대강절 셋째 주일/성탄주일 (I)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XIV) To Live As A Christian

누가복음 2:8-12

오늘은 ‘Advent Candle (대강절 촛불)’ 세 개를 켰습니다. 오늘 켠 촛불이 기쁨의 촛불, 핑크 색깔 촛불입니다. 핑크 색과 우리 마음의 기쁨이 잘 연결되는 것 같지 않습니까? ‘시간을 뚫고’ 이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기쁨’이 무엇인지 알려 주시기까지, 우리는 인생의 참 ‘기쁨’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에게 ‘기쁨’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리포트 점수가 잘 나왔다든지, 학위를 받게 되었다든지, 좋은 직장에 취직이 되었다든지, 좋은 사람을 만나 장래를 약속하게 되었다든지, 이런 ‘기쁨’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기쁨’이 모두 일시적인 (temporary)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시간이 흐르면 그 기쁨이 사라집니다. 그 기쁨이 오랫동안 지속되었으면 좋겠는데, 그리 오래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기쁨’은 어떤 기쁨일까요? 그보다 먼저, ‘Seven Signs in the Gospel of John (요한복음에 나타난 7개의 사인)’이란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매우 신학적인 용어이긴 합니다만, 이제 이런 말이 매우 보편적인 말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상식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구글에서 찾아보면 금방 요한복음에 나오는 7개의 사인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기적을 보면서 이것은 단순히 기적이 아니라 그 기적을 일으키신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인이라고 보았습니다. 요한은 의도적으로 그의 복음서 안에 대표적인 사인 7개를 배치했습니다. 제일 먼저 배치한 것이 요한복음 2장에 나오는 ‘가나의 결혼 잔치’에서 보여 주신 사인입니다. 그 때는 결혼 잔치가 거의 끝날 무렵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손님들이 많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시대 사람들은, 결혼 잔치를 하루에 치르는 것이 아니라 7일, 10일, 20일, 어떤 때는 한 달 동안 결혼 잔치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 때 사람들의 결혼식은 단순히 당사자들만의 축제가 아니라 온 동네의 축제였습니다. 그 때는 가난했고, 먹을 것도 부족했고, 별로 기쁜 일이 없었습니다. 그나마 결혼식이 일생에 가장 기쁜 일이었습니다. 아마도 이 기쁨을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은 마음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잔치를 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오래 전에 제가 교회 청년들을 데리고 우즈베키스탄에 단기선교를 간 적이 있었습니다.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은 낯선 손님에게 잘해 줍니다. 친절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먹을 것도 주고, 잠도 재워줍니다. 우즈베키스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을 포함해서 중동지역의 나라들이나 중앙아시아 나라들이 다 손님들에게 친절합니다. 그런데, 그곳 사람들의 집을 방문해 보면 특징이 있습니다. 집에 비해 마당이 매우 크고 넓습니다. 그 이유가 궁금해서 물어 보았더니, 결혼식을 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결혼식에 손님들을 많이 초대해야 하는데, 마당이 작으면 손님들이 많이 들어 올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이 사람들에게 결혼이라는 것이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지 깨달았습니다. 

요한복음 2장을 읽어보면, 결혼 잔치 끝 무렵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도착합니다. 어머니 마리아는 미리 가서 잔치를 도와주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마침 그 때 포도주가 떨어져서 주인이 당황하고 있었습니다. 잔치를 위해서 포도주를 충분하게 준비하지 못한 것은 주인에게 큰 수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곤란한 자리에서 항아리 여섯 개에 물을 가득 채우게 하시고, 이 항아리들을 잔치를 주관하는 사람에게 갖다 주라고 합니다. 잔치를 주관하는 사람은 영문도 모르고 항아리에 든 포도주 맛을 본 후에 감탄하면서 주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처음에 좋은 포도주를 내다가 나중에 잔치를 마칠 무렵에는 질이 떨어지는 포도주를 내는 데, 당신은 어떻게 이런 좋은 포도주를 지금까지 남겨 놓았습니까?” (요한복음 2:10) 

물이 최 고급 포도주가 된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물이 포도주로 변하다니요? 물과 포도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물은 평범하고 흔한 것입니다.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포도주는 귀한 것입니다. 포도주를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이 들어가야 합니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첫 번째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셨으며, 거기서 그의 영광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자 그의 제자들이 그를 믿게 되었습니다 (This miraculous sign at Cana in Galilee was the first time Je-sus revealed his glory (as the Son of God). And his disciples believed in him).” (요한복음 2:11) 요한은 그의 복음서 마지막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Jesus did many other miraculous signs in the presence of his disciples, which are not recorded in this book. But these (signs) are written that you may believe that Jesus is the Christ, the Son of God, and that by believing you may have life in his name. (John 20:31, New English Translation)

요한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우리의 삶에 들어 오실 때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것과 같은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맞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생에 들어 오시면, 평범한 삶이 비범한 삶으로 바뀌고, 재미 없는 삶이 재미 있는 삶으로 바뀌고,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고, 염려와 근심이 웃음으로 바뀝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니, 주 하나님의 영이 나에게 임하셨다.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나를 보내어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주님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언하고, 모든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게 하셨다. 시온에서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재 대신에 화관을 씌워 주시며, 슬픔 대신에 기쁨의 기름을 발라 주시며, 괴로운 마음 대신에 찬송이 마음에 가득 차게 하셨다 (To all who mourn in Israel, he will give a crown of beauty for ashes, a joyous blessing instead of mourning, festive praise instead of despair).” (이사야 61:1-3)

이사야 61장 말씀은,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메시아로서의 자기 사역을 온 세상에 선언하신 말씀 아닙니까? 예수님은 자기 고향 나사렛의 회당에 가셔서 이사야 61장 말씀을 읽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4:17-19) 놀랍게도 예수님께서 하실 사역 중에 우리의 삶에 기쁨을 회복 시켜 주신다는 말씀이 들어 있습니다.

오늘 읽은 누가복음 본문 말씀도 똑 같은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두려워 마라. 보아라. 모든 백성을 위한 큰 기쁨의 소식을 가지고 왔다. 오늘 다윗의 마을에 너희를 위하여 구세주께서 태어나셨다. 그는 곧 그리스도 주님이시다 (Don't be afraid! I bring you good news that will bring great joy to all people. The Savior-yes, the Messiah, the Lord-has been born today in Bethlehem, the city of David!).” (누가복음 2:10-11) 이 말씀의 방점이 어디에 찍혀 있는지 아십니까? ‘great joy to all people (모든 사람들에게 기쁨)’에 찍혀 있습니다. 그래서 ‘기쁜 소식 (Good News)’입니다. 이 기쁨의 좋은 소식은 어느 특정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구원이 어느 특정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듯이, ‘기쁨의 좋은 소식’도 어느 특정한 사람들이 아닌,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천사가 전하여 준 ‘기쁨의 좋은 소식’은 우리를 위하여 ‘구세주 (the Savior)’가 탄생하셨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 소식은 하나님께서 오래 전부터 약속하신 것입니다. “오늘 다윗의 마을에 너희를 위해 주세주가 태어나셨다”는 말씀이 이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구세주’가 탄생하신 것은 우리 모두에게 ‘구세주’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깨어진 관계 속에서 계속 살 수 없기 때문에 ‘구세주’가 필요합니다. 이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You have made us for yourself, O Lord, and our heart is restless until it finds its rest in you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위해 창조하셨기에 당신 안에서 안식을 얻기까지 우리 마음에 평화가 없습니다).” 성 어거스틴 (St. Augustine, 354-430)의 '고백록' 1권 1장에 나오는 말입니다. 내 안에 안식이 없는 이유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비로소 내 안에 안식 (rest)이 주어집니다. 이 고백은 어거스틴 한 사람의 고백이 아니라 모든 사람, 우리 모두의 고백입니다.

이제 하나님을 등지고 사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을 즐거워 하면서 살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트 교리 문답 (Westminster Catechism) 1번 질문이 생각납니다. “사람의 첫째 목적은 무엇입니까 (What is the primary purpose of man)?”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영원히 하나님을 즐거워 하는 것입니다 (It is to glorify God and enjoy Him forever).”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시간을 뚫고’ 이 세상에 들어오심으로 가능하게 된 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기쁨의 근원’이 되십니다. 사도 바울은 ‘기쁨의 근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 안에서 (in Christ)’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다시 말하지만 기뻐하십시오 (Rejoice in the Lord always. I will say it again: Rejoice!).” (빌립보서 4:4) 

하지만, 우리 삶에는 기쁨의 시간보다 슬픔과 절망과 염려와 근심의 시간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까? ‘주 안에서 (in Christ)’ 우리는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회복된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삶이 ‘주 안에서’ 사는 삶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진 사람들은 하나님을 피해 숨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기쁨이 없습니다. 삶이 불안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For since our friendship with God was restored by the death of his Son while we were still his enemies (우리가 여전히 하나님과 원수로 살고 있을 때,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로마서 5:10)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하나님과 화목하게 살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것! 바로 이것이 ‘기쁜 소식’이고 복음의 핵심입니다. ‘주 안에’ 있는 사람은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염려와 근심을 이길 수 있는 더 큰 기쁨과 평화가 그들에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I have told you these things so that you will be filled with my joy. Yes, your joy will overflow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말한 것은 나의 기쁨이 너희에게 충만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너희가 내 말 대로 한다면 틀림 없이 기쁨이 흘러 넘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요한복음 15:11)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my joy’는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면 나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내 안에’ 있는 사람은 기쁨이 넘쳐 흐르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문제는, 주님의 이 약속의 말씀을 어떻게 실천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냥 무조건 기쁨의 삶을 살라고 하지 않습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합니다. ‘주 안에서’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하게 믿는 믿음을 가지고 살라는 말입니다. 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하게 믿을 수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더 늦기 전에 우리는 이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심각하게 듣고, 배우고, 실천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 안에서’ 살아가는 삶의 방식입니다. 

엊그제 새벽기도에서 마태복음 11:19절 말씀을 읽고 큰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But wisdom is shown to be right by its results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는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지혜라도 그 지혜를 들은 사람들의 삶이 변화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기쁨의 좋은 소식’을 들은 우리가 기쁨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우리가 들은 ‘기쁨의 좋은 소식’이 진실하다는 것을 세상에 증명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