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2019 | 성령강림절

예언과 환상과 꿈 Prophecy, Vision And Dreams

사도행전 2:14-21

오늘은 ‘성령강림절’입니다. 영어로 하면, ‘Pentecost Sunday’ 혹은 ‘The Descent of the Holy Spirit Sunday’ ‘Whitsunday(s)’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가 고난을 당하고 삼 일째 되는 날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날 것이다.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민족에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받는 회개가 전파되어야 할 것이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낸다. 그러므로 너희는 높은 곳에서 오는 능력을 입을 때까지 이 성에 머물러라.” (누가복음 24:46-49)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루살렘에 있는 한 방에 머물러 있게 됩니다. 사람들은 이 방을 ‘마가의 다락방 (Mark’s Upper Room)’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 방이야 말로 기독교를 탄생하게 만든 가장 중요한 방이다”라고 말했는데,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예수님과 제자들이 나누었던 마지막 유월절 만찬이 ‘이 방’에서 있었고,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방을 씻어 주신 곳도 바로 ‘이 방’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두 번 제자들이 유대인들이 무서워 문을 잠그고 숨어 있던 곳에 나타나셨는데, 그곳도 ‘이 방’이었다고 합니다. 사도행전 12장에 보면, 헤롯을 비롯하여 유대 지도자들이 교회를 핍박하기 시작합니다. 요한의 형제였던 야고보가 순교합니다. 그들은 제자들 중에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베드로를 잡아 감옥에 가둡니다. 이 위기의 시간에 제자들을 비롯한 신자들은 ‘이 방’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사도행전 12:12).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 방 (사도행전 1:13)’에 모여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부터) 능력을 입을 때까지 머물러 있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120명 정도의 신자들이 ‘이 방’에 모여 있었다고 합니다. 그 때 그들은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썼다 (사도행전 1:14)”고 합니다. NASB에 이 말씀이 “These all with one mind were continually devoting themselves to prayer”라고 나와 있습니다. 여기서 그들이 가졌던 ‘한 마음 (one mind)’이 무슨 마음이었을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께서 내려 주시는 능력을 받고자 하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이 ‘능력’은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교회를 핍박하는 사람들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 ‘능력’도 아니었습니다.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그 때 제자들은 자기들이 구하는 능력 (power)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을까 혹은 모르고 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구하는 능력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보세요. 이 사람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한 마음으로 기도했다는 말씀이 사도행전 1:14에 나옵니다. 그 앞에 나오는 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다만 성령이 너희에게 오시면, 너희는 권능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그리고 땅 끝까지 가서 내 증인이 될 것이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것이 그들의 운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감동입니다.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기 위해 필요한 능력을 달라고 한 마음으로 기도했던 그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에 비추어 지금 우리의 기도생활을 반성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언제 우리가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기 위하여 하나님께 능력을 달라고 기도한 적이 있습니까? 언제 온 교회가 ‘한 마음’이 되어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능력’을 부어 달라고 기도한 적이 있습니까? 사업이 잘 되게 해 달라고, 자녀들이 잘 되게 해 달라고, 내 마음에 평안을 달라고, 온 식구들이 건강하게 해 달라고, 저 애가 나를 좋아하게 해 달라고, 오늘 시험 잘 보게 해 달라고, 오늘 인터뷰 잘 보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증인으로 사는 것이 저의 운명입니다. 제가 아무렇게나 살지 않고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라고 저를 부르셨습니다. 제가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 수 있도록 성령의 능력을 주세요”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기도가 바뀌느냐, 바뀌지 않느냐에 교회의 미래가 달려 있고, 세상의 운명이 달려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의 능력이 ‘그 방’에 모였던 각 사람에게 내렸습니다. 그 때 그 사람들이 ‘방언 (다른 언어)’을 했다고 합니다. ‘방언’은 이 사람들이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했다는 것을 보여 주는 현상이었습니다. 그 때 예루살렘에는 오순절 명절을 지키기 위해서 각국에서 온 유대인 순례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바대, 메대, 엘람, 메소포타미아, 유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 밤빌리아, 이집트, 리비아, 로마, 크레타, 아라비아에서 온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 사람들이 신자들이 방언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왔던 지역들을 표시한 지도를 보십시오. 이렇게 다양한 지역의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왔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지도는 장차 그리스도의 복음이 퍼져 나갈 것을 보여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의 귀에 신자들이 방언으로 말하는 소리가 각각 자기들이 사는 지역의 언어로 들렸습니다. 이 놀라운 현상을 본 사람들 중에는 “지금 이들이 새 술에 취해서 하는 짓거리야 (2:13, 현대어성경)!”하면서 조롱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은 베드로가 그 때 모였던 예루살렘의 순례자들에게 했던 해명 (설교)입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사랑하는 유대인 여러분들과 예루살렘 주민 여러분, 지금부터 하는 제 말을 잘 들어 주십시오. 그리고, 부디 이 일에 대한 오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베드로의 해명은 크게 두가지입니다. 첫째로, 이 사람들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처럼 술에 취한 사람들이 아니라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15절). 둘째로, 오늘 여러분이 보시는 이 현상은 일찍부터 성경에 기록되어 있었는데, 그 성경 말씀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구약성경 요엘 2:28-32 말씀을 사람들 앞에서 큰 소리로 읽었습니다. “마지막 날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사람에게 부어 주겠다. 너희의 아들과 딸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요,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꿀 것이다. 그 날에 내 남자 종들과 여자 종들에게 내 영을 부어 주겠다. 그러면 그들은 예언할 것이다.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이한 일을, 아래로 땅 위에서는 표적을 보여 줄 것이다. 피와 불과 짙은 연기가 일 것이다.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으로 변할 것이다. 이 일이 일어난 후에 크고 영광스러운 주님의 날이 올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여러분, 오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언자 요엘 (Joel)이 살던 시대를 알아야 합니다. 요엘은 기원전 835-796년 사이에 남왕국 유다에서 예언자로 활동했습니다. 그 때는 요아스 (Joash)라는 7살 밖에 안 되는 어린 왕이 왕으로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호야다 (Jehoiada)라는 훌륭한 제사장이 왕을 잘 도왔기 때문에 별 문제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여호야다가 죽은 후에 요아스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중단해 버립니다. 그리고, 우상숭배를 허용함으로써 나라는 패망의 길로 치닫게 됩니다 (역대하 24:18). 이 때, 하나님께서 부르신 선지자가 요엘입니다. 하나님은 요엘 선지자를 통하여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함으로써 다가오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라고 합니다.
 
놀라운 것은, 요엘에게 주신 말씀 속에 장차 ‘마지막 때’에 있을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구원 받을 수 있는 길이 숨겨 있다는 것입니다. 요엘서는 3장 밖에 되지 않는 매우 짧은 성경입니다. 하지만, 이 성경 속에 마지막 때에 대한 놀라운 비밀이 숨겨 있는 것입니다. 미가서도 그렇습니다. 미가서도 7장 밖에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미가서에 메시아 탄생에 대한 매우 중요한 정보가 숨겨 있습니다. 스가랴서도 14장 밖에 되지 않는 비교적 짧은 성경이지만, 이 속에 메시아에 대한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베드로가 지금 예루살렘의 주민들과 각국에서 온 순례자들을 향하여 선포하고 있는 말씀이 바로 요엘서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이 보고 있는 이 현상을 이상하게 보지 마십시오. 요엘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마지막 때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사람에게 부어 주겠다. 너희의 아들과 딸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요,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꿀 것이다. 그 날에 내 남자 종들과 여자 종들에게까지 내 영을 부어 주겠다. 그러면 그들은 예언할 것이다.” (16-18절)
 
지금이 ‘마지막 때 (in the last days)’입니다. 성경은 ‘마지막 때’를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 가신 (승천) 때부터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의 시간으로 규정합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지금 우리는 ‘마지막 때’를 살고 있습니다. 성경에 ‘마지막 때’에 대한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만, 제가 오늘 여러분에게 소개할 말씀은 디모데후서 3:2-5에 있는 말씀입니다. “그 때에는 (마지막 때에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과 돈만 사랑하며, 뽐내고 교만하며, 다른 사람들을 헐뜯고,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감사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이 되려고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도 없고 용서도 없으며, 나쁜 말을 일삼으며, 절제하지도 못하고 잔인하며, 선한 것을 싫어할 것입니다. 가까운 친구를 배반하고 성급하게 행동하며, 교만하고 쾌락을 즐기며,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체하나 실제로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 베드로후서 3:3에는 마지막 날에 ‘scoffers (조롱하는 사람들)’이 나타나 “뭐라고? 복음을 들어야 구원 받는다고?” “뭐?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고? 웃기는 소리하지 마!” 이렇게 성경의 메시지를 조롱할 것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런 말씀들을 읽을 때,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큰 일 났다는 불안한 생각이 듭니까? 아니, 우리도 알게 모르게 이런 주장에 물들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여러분,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그리고 많은 거짓 예언자들이 일어나, 많은 사람들을 속일 것이다. 또한 불법이 더욱 많아져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이 식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마태복음 24:11-13) 이 말씀이 우리에게 암시해 주는 것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이 싸늘하게 식어가는 그 때에도 ‘끝까지 견디는 사람들 (those who endures to the end)’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누구일까요?
 
저는 이 사람들이 바로 요엘 선지자가 예언했던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에 성령을 부어 주신 사람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예언을 하고, 환상을 보고, 꿈을 꾸는 사람들, 더 나아가 이들이 선포하는 복음을 듣고 믿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불행한 것은 우리 시대에 예언하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환상을 보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꿈을 꾸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모두가 현실에 얽매여 있습니다. 모두가 믿음으로 살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 삽니다. 한 사람의 영혼을 귀하게 여기시고 찾으시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관심을 가진 사람들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사이비 예언을 하고, 사이비 환상을 보고, 사이비 꿈을 꾸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건전한 예언을 하고, 환상을 보고, 꿈을 꾸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성령을 부어줄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하지만, 부어줄 사람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식어가는 이 시대에, ‘끝까지 견디는 사람들’이 필요하고,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예언을 하고, 환상을 보고, 꿈을 꿀 사람들이 필요한데, 이런 사람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분, 이 시간 조용히 눈을 감고 생각해 보십시오. 모두들 자기 일에 마음을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꿈을 꾸는 사람이 없습니다. 모두 자기 살기에 바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환상을 보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 저에게 약속하신 성령을 부어 주십시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예언하게 하시고, 환상을 보게 하시고, 꿈을 꾸는 사람이 되게 해 주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의 때가 오기 전에 한 사람이라도 더 복음을 듣게 하시고,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 붙잡힌 사람이 되게 해 주십시오.” 이 기도가 여러분의 기도가 되고, 우리 교회의 기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6/2/2019 | 부활절 일곱째 주일

의심하지 말고 믿어라 Stop Doubting And Believe

요한복음 20:19-29

여러분은 이런 생각을 해 보셨습니까?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행적을 기록한 역사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은 주로 바울이라는 사람의 행적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바울은 원래 독실한 유대교 신자였습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자기 또래들 가운데 자기보다 더 열심이 유대교를 믿은 사람은 없었다고 합니다. 왜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복음을 전파하는 도구로 사용하셨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유대교에 열심이었던 한 사람을 선택해서 그의 열심의 방향을 복음을 전파하는 데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이 사람은 복음을 전파하는 일 외에는 다른 아무 것도 몰랐던 사람입니다. 이 지도를 한번 보세요. 이 지도가 바울이 복음을 전파했던 지역을 표시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해서 멀리 일루리곤 (Illyricum)까지 광활한 지역입니다. 이 말씀이 로마서 15:19, 23-24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나는 예루살렘에서부터 일루리곤에 이르기까지 모든 지역을 다니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충만하게 전파했습니다..... 이제는 이 지역에서 더 이상 내가 일할 만한 곳이 없고 (There is no more place for me to work in these regions), 또 여러 해 전부터 여러분에게 가기를 원했으므로, 스페인으로 가는 길에 여러분을 방문하여 잠시, 여러분과 함께 지내면서 기쁨을 나누다가, 여러분의 도움을 받아 스페인으로 가기를 소원합니다.”
 
사도행전에는 바울 외에 베드로라든지, 바나바, 아볼로 같은 사도들의 행적이 조금 나와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궁금한 것은, 같은 시기에 나머지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들도 어디선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도마 (Thomas) 같은 사도는 인도로 가서 복음을 전파했다고 합니다. 현재 인도에 도마가 세운 교회들이 있습니다. 도마가 모두 8개의 교회를 세웠다고 합니다. 그 때가 A.D. 52년이었습니다. 바울이 한창 지중해 연안을 무대로 열심히 복음을 전파하던 때와 일치합니다. 잠깐 도마교회 슬라이드를 몇 장 보여 드리겠습니다. 현재 인도에 기독교 인구가 약 3% 정도 되고, 힌두교 신자들이 약 83% 정도 됩니다. 의외로 불교는 1%, 이슬람교는 11%에 그치고 있습니다.
 
자, 그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읽은 요한복음 20장 말씀으로 돌아가겠습니다. 19절에 ‘같은 날 (On the evening of that first day of the week)’은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문이 돌고 있던 그 날 저녁을 말합니다. 새벽 어두컴컴한 때부터 시작해서 저녁까지 ‘그 날’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 날’ 저녁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두려워서 문을 꼭 걸어 잠그고 숨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면서 나타나셨습니다. 아무도 문을 열어 준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걸어 잠근 문을 열고 들어오셨는지 아무 설명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불안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평안을 전해 주셨습니다.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 같지 않다 (요한복음 14:27)”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불안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평안 (샬롬)을 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기만 하고, 이 말씀을 읽기만 해도 마음이 평안해집니다. 우리 속에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산다는 것 자체가 우리를 불안하게 합니다. “나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것이 최선의 삶인지, 최선이 아니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런 것들이 우리를 불안하게 합니다. 그 외에도 내 삶에 필요한 것들이 제재로공급되지 않을 때 우리는 불안합니다. 이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평안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어느 집에 들어갈 때 먼저 그 집에 평안을 빌어줘라 (When you go into a house, say, ‘Peace be with you (마태복음 10:12)’”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만날 때마다 서로서로 하나님의 평안을 빌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기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를 본 제자들은 모두 기뻐했습니다. “아, 이 분이 우리 주님 맞구나.” “정말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살아나셨어!” “정말 이 분이 하나님의 아들 맞구나!” “주님이 살아나셨으니 우리가 무서워할 필요가 없구나!” 제자들은 모두 이런 생각들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디두모 (Didymus)라는 별명을 가진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도마에게 “우리는 주님을 보았다”고 했지만, 도마는 자기는 그 사실을 믿을 수 없다고 합니다. 25절에 그 말씀이 나와 있습니다. “내가 직접 예수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분의 못박힌 곳에 찔러 보고, 내 손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 보기 전에는 믿을 수 없다.” 바로 이 말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의심장이 도마”라고 부릅니다. 어떤 사람은 도마를 ‘회의론자 (skepticist)’라고 하기도 합니다. 회의론자는 자신의 이성(reason)을 인식과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이성으로 설명되지 않고 납득되지 않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회의론자’라고 합니다. 도마가 그런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도마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일주일 후에 다시 제자들이 있는 곳에 오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왜 다시 오셨다고 생각합니까? 도마의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어 주시기 위해서, 그래서 도마를 부활의 증인으로 삼기 위하여 다시 도마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도마는 매우 용감한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겁을 먹고 있을 때도 도마는 “우리는 주님과 함께 살고 주님과 함께 죽어야 합니다 (Let us go too, and die with Jesus., 요한복음 11:16)”라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도마는 궁금한 것은 참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알지 않느냐? 그러니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 중에 아무도 묻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오직 도마 한 사람만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를 모르는데 저희가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 이렇게 물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바로 그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아무도 없다.” (요한복음 14:6) 우리는 모두 도마에게 빚을 지고 있습니다. 만약 그 때 도마가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나라로 가는 길에 대하여 이처럼 분명한 말씀을 들을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도마에게 주님이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이 사실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께서 이런 도마를 인정하셨다는 것입니다. “네 손가락을 여기에 찔러 보아라.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믿지 않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어라.” (27절) 이 말씀이 NIV 성경에는 “Stop doubting and believe!”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이 말씀이 NKJV에는 “Do not be unbelieving, but believing”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unbelieving’과 ‘believing’이라는 말은 시각적으로 아주 작은 차이입니다. 앞에 ‘un’이 붙으면 믿지 않는 것이고, ‘un’이 떨어지면 믿는 것입니다.
 
제가 대학시절에 캠블 몰간 (G. Campbell Morgan, 1863-1945, 영국) 쓴 빌레몬서를 읽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이렇게 다루시는 구나” 하고 큰 감동을 느낀 적이 있습니다. 바울이 오네시모 (Onesimus)라는 사람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이 전에는 그대에게 아무 쓸모 없는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그대나 나에게 큰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Formerly he was useless to you, but now he has become useful both to you and to me).” (빌레몬서 1:11) 이 말씀에도 ‘useless’라는 말과 ‘useful’이라는 말이 서로 대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쓸모 없는 사람과 하나님의 일에 쓸모 있는 사람이 시각적으로 보아도 아주 작은 차이입니다. 뒤에 ‘~less’라는 붙으면 쓸모 없는 사람이 되고, ‘~ful’이라는 말이 붙으면 쓸모 있는 사람이 됩니다. 희랍어 성경에도 쓸모 없는 이란 말은 ‘acrestos’라고 나와 있고, 쓸모 있는 이란 말은 ‘eucrestos’라고 나와 있습니다. 앞에 ‘a~’가 붙느냐 ‘eu~’가 붙느냐에 따라서 쓸모 없는 사람이 되기도 하고 쓸모 있는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제가 이런 말을 길게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쓸모 있는 사람과 쓸모 없는 사람 사이에 큰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앞이나 뒤에 무엇이 붙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의 사역에 유익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하나님의 일에 큰 해를 끼치는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도마를 ‘의심장이’라고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도마를 ‘회의론자 (skepticist)’라고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예수님은 도마에게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시고, 거기에 네 손가락을 넣어 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도마라는 사람의 성격을 누구보다도 잘 아셨습니다. 도마가 지금은 “난 믿을 수 없어!” 이렇게 말하지만, 한번만 확인되면 금방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아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를 확인한 도마는 그 자리에서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My Lord and my God)!”이라고 고백합니다. 도마에게서 ‘un~’자가 떨어져 나가고, ‘~less’라는 글자가 떨어져 나가고, 하나님의 일에 유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실제로 도마의 삶이 그렇지 않습니까? “나는 부활을 믿지 못하겠다”고 주장하는 도마를, 만일 주님이 그런 도마를 그냥 내버려 두셨더라면 하나님의 일에 아무 쓸모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주님은 도마를 만나 그가 의심하는 것을 풀어 주셨습니다. 손바닥에 남아 있는 못 자국도 만져 보게 하시고, 허리에 남아 있는 상처 자국도 만져보게 하셨습니다. 도마에게 남아 있는 의심의 꼬리를 떼 주셨습니다. ‘~less’가 떨어지고, 그 자리에 ‘~full’이 붙었습니다. ‘a~’가 떨어지고 그 자리에 ‘eu~’가 붙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쓸모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A.D. 52년에 도마는 아무도 가 본적이 없는 인도에 갔고, 그 때 도마가 뿌린 복음의 씨앗이 힌두교가 82%인 척박한 땅에서 열매를 맺고 자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도마에게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 믿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29절)”고 말씀하셨습니다. “You believe because you have seen me. Blessed are those who believe without seeing me.” 이 말씀은 도마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사실은 우리에게 하신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는 도마처럼 직접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를 확인할 수 없지만, 그 대신 더 큰 축복의 길이 열려 있습니다. 그것은 보지 않고 믿는 것입니다. 보지 않고 믿는다는 것은 사도들이 경험했던 부활에 대한 말씀을 믿고 자신의 신앙고백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믿음으로 증거를 얻었다 (히브리서 11:1-2)”고 했습니다. 믿음의 선배들은 믿음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증거를 얻었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보지 않고도 자신에게 붙어 있는 의심과 불신의 꼬리를 떼어내는 사람에게 더 큰 하나님의 축복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안셀름 (St. Anselm, 1033-1109)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나는 이해하기 위하여 믿습니다 (I believe so that I may understand)”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이 말은 얼핏 들으면 말이 안 되는 것 같습니다. “나는 이해하기 때문에 믿습니다 (I understand so that I may believe)” 꼭 이렇게 말해야 맞을 것 같습니다. 논리적인 진리나, 실험적인 진리, 과학적인 진리는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진리는 믿음이 우선입니다. 믿으면 신기하게도 모든 것이 이해됩니다. 예수님의 부활도 믿음으로 이해되는 진리입니다. 

5/26/2019 | 야외예배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This Is My Father's World

시편 8편

오늘은 전체적으로 햇볕이 나고, 낮 최고 기온이 84도나 된다고 합니다. 좀 더운 날씨이긴 합니다만, 이렇게 비가 오지 않고 춥지 않은 날도 드물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 “여호와 우리 주여, 주님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린 장언한지요?” 그랬습니다, 똑 같은 말씀이 마지막 절에도 나옵니다. “O LORD, our Lord, your majestic name fills the earth! Your glory is higher than the heavens.” 직역하면, “오 주님 주님의 위엄 있는 이름이 온 세상에 가득합니다. 주님의 영광은 하늘보다 높습니다” 이렇게 되겠네요. 예전 개역성경에는 이 말씀이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아까 우리가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이 찬송을 불렀습니다. 야외예배 때 부르기에는 이보다 더 좋은 찬송이 없는 것 같습니다. 어저께 우연히 이 찬송을 듣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이 찬송의 3절 가사가 의외의 가사인 것입니다. 이 찬송은 Maltbie Davenport Babcock (1858-1901, 미국)이라는 분이 찬송시를 썼습니다. 이 사람은 뉴욕 Lockport의 목사였습니다. 이 목사님에 대한 기사를 찾아 봤더니, 아주 탁월한 설교자였다고 합니다. 그의 설교는 교회 내의 모든 계층의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고 합니다.  Babcock 목사님은 하이킹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특히 Lockport 근처의 깎아 지른 듯한 절벽들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절벽 위에 올라가서 보면 놀라운 전경이 펼쳐지는데, 숲도 보이고, 농장들도 보이고 과수원도 보이고, 저 멀리 호수도 보였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이 놀라운 광경을 본 사람들은 누구나 시적 영감에 사로잡히게 된다고 말한다고 합니다. Babcock 목사님은 자주 집을 나서면서 아내에게 “나는 나의 아버지의 세상을 보러 간다”고 말하곤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 찬양시의 제목이 “This Is My Father’s World (이것이 나의 아버지께서 지으신 세상입니다)”입니다.

This is my father's world.
이것이 내 아버지의 세상,
Oh, let me never forget
나는 결코 잊지 않겠네
That though the wrong seems oft so strong.
종종 악이 너무나 강하게 보일지라도
God is the ruler yet
하나님이 지금도 통치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This is my father's world; Why should my heart be sad?
이곳이 내 아버지의 세상인데, 왜 내가 슬퍼해야 할까?
The Lord is king, let the heavens ring; God reigns, let the earth be glad
주께서 왕으로 다스리시니, 하늘은 기뻐하고,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니 땅은 즐거워하라.

Babcock 목사님에게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든 것입니다. “세상은 이렇게 아름다운데, 왜 인간들이 사는 세상에는 이렇게 악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을까?” Babcock 목사님은 이런 결론을 얻었습니다. “비록 인간들이 사는 세상이 악이 만연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지금도 이 세상을 자기 뜻대로 통치하고 계신다.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The battle is not done yet). 그러니 나는 걱정할 필요가 없고 슬퍼할 필요가 없다.”

이제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읽은 시편 8편 말씀의 은혜를 잠깐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이 시편 8편 속에도 뭔가 우리 심장을 뛰게 하는 것이 들어 있습니다. 이 시편은 다윗이 썼다고 합니다. 이 시편은 “지휘자를 따라 기쁜 곡조로 부른 노래”라고 나와 있고 “To be accompanied by a stringed instrument”라고 나와 있습니다. 다윗은 본래 수금 연주의 천재였습니다. 수금은 작은 사이즈의 하프(harp)와 같은 악기입니다. 사울에게 다윗을 처음 소개할 때 다윗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베들레헴의 이새에게 수금 을 연주하는 아들이 하나 있는데, 저는 그 사람이 수금을 연주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용감하고 싸움을 잘하며 말도 잘하고 잘 생겼습니다. 게다가 여호와께서 그 사람과 함께 하고 계십니다.” (사무엘상 16:18) 이렇게 해서 다윗이 사울에게 발탁되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합니다.

저는 오늘 이 다윗의 시편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크게 두 가지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가 참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우리의 주님이시여! 주님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장엄한지요 (1, 9절)?”라고 했습니다. 누가 꾸민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자연은 아름다울까 이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음악이나 그림 같은 예술품 속에 그 작가의 혼이 들어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들 속에 하나님의 신성 (神性) 들어 있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알고 “하나님께서 그 지으신 만물 속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드러나 있다 (로마서 1:20)”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 아름다운 날씨와 자연을 한번 둘러 보십시오. 모두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들입니다. 이것들이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모두가 있는 그대로 때가 되면 싹이 나고, 잎이 돋고, 때가 되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억지로 꾸미거나 아름답게 보이려고 하는 것도 아닌데,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습니다.

둘째로,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말씀은, 사람에 대한 것입니다. 이 말씀이 4-6절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는 사람을 돌보아 주시는지요? 주님께서는 사람을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지으시고, 그 머리에 영광과 존엄의 왕관을 씌우셨습니다. 주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을 사람이 다스리게 하시고, 모든 것들을 사람에게 맡기셨습니다.” 히브리 성경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Yet you made man a little lower than Elohim.” ‘Elohim (엘로힘)’이란 말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하나님을 직접 하나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엘로힘’ ‘엘샤다이 (전능하신 하나님)’ ‘아도나이 (주님)’ 같은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사람을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지으시고” 이 말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존재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제대로 읽은 사람은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창조주 하나님의 자리에 앉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리에 앉으려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깨뜨리는 이유이고, 이것이 우리의 삶을 아름답지 못하게 만드는 이유입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우리는 무심코 이렇게 말합니다. “내 인생은 내 것이야! 내가 결정하는 거야! 아무도 간섭할 수 없어!” “내 것 가지고 내 맘대로 하는데, 누가 뭐래?” 우리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한 우리는 아직도 우리의 위치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못한 존재로 만드셨다고 해서 우리의 존재가 열등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보세요. 다윗이 이 시편을 쓰면서 발견한 인간의 존재는 하나님께서 그 머리에 영광과 존엄의 왕관을 씌워 주신 존재입니다 (5절). 그리고,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피조물들을 다스릴 권한을 주셨습니다. “You gave them charge of everything you made (6절)”라고 했습니다. ‘챠지 (charge)’라는 말은 돌본다, 책임을 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지으신 이 세상을 계속해서 아름답게 돌보라는 책임을 맡겨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은 이렇게 아름다운데, 인간들이 사는 세상은 아름다움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인간이 자기 분수를 아는 겸손을 회복하는 것이 시급한 문제입니다. 얼마 전에 생명 복제에 대한 기사를 읽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잘 모르지만 복제산업이 꽤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은 주로 개에 대한 복제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국내보다는 해외로부터 많은 주문이 들어오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행한 것은 그렇게 복제해서 태어난 개들이 원래 개와 똑 같이 생기긴 했지만 어딘가 이상하다고 합니다. 행동이 좀 이상하고, 힘이 없고, 병에 잘 걸리고 일찍 죽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저는 그 기사를 읽으면서 “참 잘 되었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생명을 창조하는 일은 하나님의 영역인데, 과학의 힘으로 생명을 창조할 때 그 결말이 어떻게 될지 참 두렵습니다. 인간이 자기 본분인 겸손을 회복하고,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들을 돌보는 ‘charger (챠져)’로서의 역할을 회복할 때 인간이 사는 세상도 본래의 아름다운 모습을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5/19/2019 | 부활절 다섯째 주일

그러면, 내 양을 먹여라 Then Feed My Lambs

요한복음 21:12-19

오늘은 부활절 다섯 번째 주일 (The Fifth Sunday of Easter)입니다. 부활절은 지나간 이벤트가 아닙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은 살아 계셔서 제자들의 삶 속에 함께 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중에 이 말씀을 이해하는 분도 계시고, 이 말씀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려운 분도 계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 내가 가지 않으면 보혜사가 너희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다. 내가 가면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낼 것이다....... 진리의 성령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려 주심으로써 나를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 진리의 성령이신 보혜사께서 너희에게 오시면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 (요한복음 16:7, 14, 14:26) 부활하신 예수님은 지금 우리의 삶 속에 보혜사 성령님으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조금 어려운 말일지 모르겠습니다만, 성령은 우리의 삶 속에 역사하시는 예수님의 존재 양식 (mode)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성령님으로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오늘 말씀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의 일곱 제자들을 만나 주신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이 갈릴리 바다인 것으로 보아 일곱 제자는 어부 출신들이었을 것입니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 베드로, 도마, 나다나엘, 야고보, 요한, 그리고 다른 두 제자가 함께 있었다고 하면서 이름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굳이 짐작해 본다면,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두 제자 중 한 사람은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였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한 사람은 정말 누구인지 익명(匿名, anonymous)으로 남겨 놓아야 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이 제자들과 같이 식사를 하셨습니다. 누가가 기록한 복음서에 보면 제자들이 구운 생선 한 토막을 예수님께 드렸는데, 예수님은 제자들 앞에서 잡수셨다고 합니다 (누가복음 24:42-43). 제자들이 처음에 예수님을 보았을 때는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했지만,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식사를 하시는 것을 보면서 유령이라는 의심이 풀어졌다고 합니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 제자들이 예수님과 같이 식사하면서 그분이 주님이신 것이 확실했기 때문에 감히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묻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고 기록했습니다 (요한복음 21:12)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None of the disciples dared to ask him, ‘Who are you?’ They knew it was the Lord.”
 
요한복음에도 그렇고, 누가복음에도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그 당시에 예수님의 부활을 영적인 부활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복음서 저자들은 그런 주장에 대하여 쐐기를 박았습니다. “무슨 소리입니까?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과 같이 식사를 하셨다니까요. 예수님이 영 (유령)이시라면 어떻게 우리와 같이 식사를 하실 수 있겠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식사를 하셨다는 성경 말씀이 별 것 아닌 사소한 말씀처럼 보이는데,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올바른 교리를 만드는 일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식사 후에 예수님은 베드로를 개인적으로 만나셨습니다. 여러분, 베드로가 누구입니까? 베드로의 본래 이름은 시몬 (Simon)이었습니다. 시몬은 동생 안드레를 통해 예수님을 알게 된 사람입니다. 안드레는 세례 요한의 제자였다 (요한복음 1:40)고 하지요? 예수님은 시몬을 처음 봤을 때 마치 그를 알고 있었던 것처럼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이제 너를 게바라고 부르겠다 (요한복음 1:42)”고 하셨습니다. ‘게바 (Cephas)’는 아람어로 반석 (rock)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어로는 ‘페트로스 (Πέτρος)’ 역시 반석 (rock)이라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피터 (Peter)’이고, 한국어로는 ‘베드로’입니다.
 
나중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마태복음 16:16)”이런 신앙고백을 했을 때 “너는 베드로다. 내가 이 돌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베드로의 존재감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열 두 제자 중에 확실히 베드로는 중요한 비중을 가진 인물이었던 것이 틀림 없습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베드로를 시험했습니다. 그만큼 베드로가 중요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바보가 아닙니다. 베드로 한 사람을 시험에 빠지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큰 차질을 가져 올 수 있다는 것을 사탄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탄은 베드로 곁을 떠나지 않고 베드로를 시험에 빠지도록 끊임없이 유혹했습니다.
 
여러분, 누가복음 22:31-32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시몬아, 시몬아! 사탄이 너를 마치 밀 까부르듯 하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나는 네가 믿음이 꺾이지 않도록 기도하였다. 네가 돌아온 후에 네 형제들을 굳게 하여라.”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Simon, Simon, Satan has asked to sift you like wheat. But I have pleaded in prayer for you, Simon, that your faith should not fail. So when you have repented and turned to me again, strengthen your brothers.”
 
베드로 (시몬) 한 사람을 놓고 엄청난 영적 싸움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사탄은 베드로를 자기 목적을 이루기 위해 도구로 사용하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계셨던 예수님은 베드로가 믿음을 져버리지 않도록 계속 베드로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사탄의 시험에 넘어갈 것을 알고 계셨던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베드로가 반드시 다시 회개하고 돌아온다는 사실도 알고 계셨습니다. 베드로 이 사람이 형제 자매를 ‘strengthen (강하게 세우는)’하는 사명을 감당할 것이라고 믿고 계셨습니다. 여러분, 과연 이 영적 싸움에서 누가 승리할까요? 사탄이 승리할까요? 예수님이 승리할까요?
 
예수님께서 예측하신 대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합니다. 한 심부름 하는 소녀가 (a servant girl) 베드로를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지요?” 이 말에 베드로는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하면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합니다. 또 한 소녀가 “이 사람은 분명히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던 사람이예요” 라고 베드로를 보고 말합니다. “나는 그 사람을 모른다니까요!”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공관에서 이리저리 자리를 피해 옮겨 다닙니다. 이번에는 또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분명히 너는 그 사람과 한 패야. 네 말씨를 보니 틀림 없어!” 그러나, 베드로는 “나는 맹세코 그 사람을 모릅니다!” 하면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합니다. 베드로를 끈질기게 따라다니면서 베드로를 무너뜨릴 기회를 엿보고 있던 사탄의 계획이 성공하는 순간입니다.
 
Eugène Burnard (1850-1921)라는 사람이 그린 이 그림을 한번 보십시오. 예수님의 무덤이 비었다는 말을 듣고, 무덤으로 달려가는 베드로와 요한의 표정을 그린 것입니다. 이 베드로를 예수님께서 다시 만난 것입니다. 다시 만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만나 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큰 소리 치면서 “저는 주님을 위해 제 목숨을 내놓겠습니다 (I am ready to die for you., 요한복음 13:38)” “주님과 함께 죽을지라도 결코 주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Even if everyone else deserts you, I will never desert you., 마태복음 26:33)!” 하고큰 소리쳤던 베드로입니다. 이 베드로가 예수님께 큰 실망을 안겨드렸습니다.
 
갈릴리 바닷가에서 베드로를 개인적으로 만나 주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Simon son of John, do you love me more than these)?” (15절) 예수님은 다른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베드로를 비난도, 정죄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베드로에게 예수님께 대한 사랑이 있는지 그것을 확인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몇 가지 확인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베드로를 그냥 베드로라고 부르거나 시몬이라고 부르지 않고, ‘요한의 아들 시몬 (Simon son of John)’이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시몬의 아버지 이름입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의 아버지 이름을 부른 것은 시몬의 인간적인 연약함을 깨우쳐 주려고 하신 것입니다. “베드로, 나는 너의 인간적인 연약함 (human weakness)을 잘 알고 있다. 너 또한 한 사람의 연약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위로가 되고 소망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강철이 강한 사람이 아닙니다. 결코 넘어지지 않고 실수 하지 않는 사람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넘어지고 또 넘어지면서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주님의 손을 붙잡는 사람을 원하십니다. 실수하고 또 실수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주님께 돌아와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고, 은혜를 구하는 사람을 원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이렇게 부르신 말씀 속에 들어 있는 뜻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베드로 속에 예수님께 대한 사랑이 있는지, 여전히 지금도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확인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 대한 사랑이 있는 이상 우리는 언제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깨어진 관계도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회복할 수 있습니다. 잃어버린 사명감도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다시 회복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사랑이 없으면 깨어진 관계를 회복할 수 없고, 사랑이 없으면 사명감을 회복할 수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6:14절에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영어 성경에는 “Do everything in love (NIV, NLT)” “Let all that you do be done in love (NASB, NKJV)” 라고 나와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모든 일을 사랑으로, 사랑이 동기 (motivation)가 되어서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차가운 의무감으로, 내가 맡은 일이니까 하는 마음으로 하고 있습니까? 주님께 대한 모든 일은 사랑으로 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사랑으로 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랑으로 하지 않으면 바리새인이 되어 다른 사람을 감시하고, 다른 사람을 헐뜯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잘못을 범합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은 항상 화가 난 얼굴로 돌아다닙니다. 사역도 그렇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도 사랑이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하는 봉사와 섬김과 헌신 속에 기쁨이 있고, 즐거움이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은 신속하게 사랑을 회복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내가 이렇게 힘이 드니까 다른 사람도 다 그럴 것이라고 판단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됩니다.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인지,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인지,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 나를 사랑하느냐고 확인하는 질문을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것을 염두에 두고 하신 질문처럼 보입니다. 베드로는 “예,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15, 16, 17절)” 하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내 양을 먹여라!” “내 양을 돌보아라!” “내 양을 먹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네가 돌이긴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여라” 주님의 말씀대로 베드로는 회개한 후에 형제를 굳게 세우고, 교회를 세우는 일에 크게 쓰임을 받았습니다. 누가 승리하였습니까? 베드로를 넘어뜨린 사탄이 승리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승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한번 하나님의 자녀로 삼은 사람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한번 넘어졌다고, 한번 실수했다고, 한번 관계가 깨졌다고 우리를 버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 주님께 대한 사랑이 남아 있는 이상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5/12/2019 | 부활절 넷째 주일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The Two Disciples On The Road To Emmaus

누가복음 24:13-27

오늘은 부활절 넷째 주일입니다. 영어로 하면, ‘Fourth Sunday of Easter’입니다. 부활절은 이미 끝난 행사가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와 함께, 우리 곁에 계십니다.

‘그 날 (that same day)’ 엠마오로 가는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날’은 예수님의 무덤이 비었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 그 날이었습니다. 시간이 며칠은 지난 것 같은데, 여자들이 예수님의 빈 무덤을 발견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그 날’은 매우 길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 날’ 두 사람이 ‘엠마오 (Emmaus)’로 가고 있었습니다. ‘엠마오’는 예루살렘에서 약 11km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마을입니다. 두 사람은 ‘엠마오’로 가고 있던 것으로 보아 두 사람은 ‘엠마오’ 출신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두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13절). 그리고,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글로바 (Cleopas)’라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지명(地名)과 이름이 나와 있는 것은 이 이야기의 사실성(事實性, historicity)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누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두 사람은 최근에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얘기하면서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는 오후 늦은 시간이었습니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던 석양(夕陽, sunset)이었습니다. 여러분, 이 그림들을 한번 보시겠습니까? 제일 유명한 그림은 로버트 췬트 (Robert Zünd, 1826-1909, 스위스)가 그린 ‘The Road to Emmaus (엠마오로 가는 길)’입니다. 세 사람이 길을 걷고 있는, 해가 저물어 가는, 그 때의 상황을 잘 묘사했습니다. 가운데 예수님께서 두 사람에게 뭔가를 손짓을 해 가면서 말씀하시고, 두 사람은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아니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의외라는 표정으로 말씀을 듣고 있는 장면입니다. 전체적인 그림의 분위기는 사방이 적막하면서도 어딘가 쓸쓸한 분위기입니다.

Robert Zünd는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삶의 희망이 끊어진 사람들의 심정을 이렇게 그림으로 그린 것입니다. 두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을 구원할 분이 바로 그분이라고 기대했습니다 (We had hoped he was the Messiah who had come to rescue Israel).” (21절) 이 말에서 그 두 사람의 절망을 느낄 수 있습니까? 이 두 사람은 예수님에게 모든 소망을 두었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이고, 그가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우리는 복음서에서도 똑 같은 제자들의 심정을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We have left all we had to follow you).” (누가복음 18:28) “Behold, we have left our own [homes,] and followed You." Homes를 버렸다고 하면 집이나 재산도 포함되지만, 사랑하는 식구들도 포함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그들의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예수님께 모든 희망을 두었고, 나중에 모든 것을 보상 받을 수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허무하게 죽었습니다. 그러니, 제자들이 가졌던 상실감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마가는 그 때 제자들의 상실감을 이렇게 그의 복음서에 기록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전하려고 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에 갔을 때) 제자들은 슬퍼하며 울고 있었습니다 (The disciples were grieving and weeping).” (마가복음 16:10)

누가는 예수님께서 두 사람에게 말을 걸었을 때, 두 사람은 두 사람은 슬픈 기색을 하고 멈춰 섰다고 했습니다 (They stopped short, sadness written across their faces., 17절). 이 말 속에 두 사람의 상실감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은 더 이상 예루살렘에 있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 마음에 와 닿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의 슬픔과 절망을 우리도 경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었던 사람이 나를 배신하고, 믿었던 것들이 틀어졌을 때, 내가 그토록 기대했던 것들이 모두 물거품이 되었을 때, 사랑하는 사람이 내 곁을 영영 떠났을 때, 우리도 상실감을 경험합니다. 내 인생이 모두 끝난 것 같은 절망감에 사로잡힙니다. 어떻게 슬픔과 절망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람은 세월이 약이라고 합니다. 그냥 살다 보면 다 잊혀진다고 합니다. 제가 경험해 보니까 세월이 약이라는 말이 맞습니다. 금방 죽을 것 같더니 시간이 좀 지나면 진정이 됩니다. 그런데, 세월이 약이긴 하지만, 또 다시 그런 슬픔의 순간, 절망의 순간이 찾아 옵니다.

‘어메이징 그레이스 (Amazing Grace)’로 유명한 존 뉴톤 (John Newton, 1725-1807, 영국) 목사님은 “성경의 모든 말씀이 없어져도 누가복음 24장만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만큼 누가복음 24장에 나오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이야기’가 존 뉴톤 목사님에게도 큰 위로가 되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이야기’가 오늘 우리에게도 위로의 말씀이 되고, 치유의 말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상실감과 절망감에 사로 잡힌 두 사람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길에 동행하신 것입니다. 비록 처음부터 알아 보지는 못했지만, 길을 가다가 만난 사람이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정말 이 말씀이 사실이라면,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의 슬픔과 절망의 자리에 함께 계십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놀랍게도 주님은 자기 제자들에게 이런 약속하셨습니다. “나는 너희를 고아처럼 버려 두지 않고 너희에게로 다시 올 것이다 (No, I will not abandon you as orphans- I will come to you).” (요한복음 14:18) 이 말씀대로 주님은 자기 제자들이 어려움을 당할 때, 힘들어 할 때, 슬픔과 절망의 시간에 찾아 오셨습니다.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도 유효 (effective) 할까요? 하고 말고요. 성경에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 것은 이 말씀이 우리를 위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는 것을 알고 계시지요? “Now these things happened as examples for us (이 같은 일들이 일어난 것은 (성경에 기록된 것은) 모두 우리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0:6)

둘째로, 크리스천의 삶에 있어서 교제의 삶이 얼마나 중요한 지 알게 됩니다. 여기서 ‘교제(交際, fellowship)’라는 말은 주님과의 교제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두 사람에게 말씀을 풀어 가르쳐 주셨습니다. 메시아에게 십자가의 죽음이 당연하다는 것, 메시아의 고난과 죽음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 속에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25-27절). 두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의 마음이 뜨겁지 않았습니까 (Didn't our hearts burn within us as he talked with us on the road and explained the Scriptures to us)?”

우리 마음에 불이 붙고, 우리 마음이 뜨거워지는 순간은 우리의 눈이 새롭게 떠지는 순간입니다. 지금까지 믿고 있던 Old Paradigm이 무너지고 New Paradigm이 주어졌을 때 우리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바울은 이 경험을 ‘enlightenment (깨달음)’라는 말로 설명했습니다. “I pray that the eyes of your heart may be enlightened (나는 여러분의 마음이 눈이 밝아지기를 위해 기도합니다).” (에베소서 1:18) 예수님께서 말씀을 풀어 주실 때 두 사람은 비로소 깨닫습니다. “아,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말이 이상한 말이 아니구나!” “예수님의 부활은 이미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었구나!” “우리가 길에서 만난 사람이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이었구나!” 말씀 안에서 교제하는 삶이 없으면 끊임없이 의심이 생깁니다. 하지만, 교제의 삶이 있으면 그 의심이 믿음으로 바뀝니다. 우리 믿음은 교제의 삶을 통해서 성장합니다. 그리고 견고해집니다.

셋째로,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 (personal encounter)을 가진 사람이 세상을 이깁니다.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너희가 고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담대하여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Here on earth you will have many trials and sorrows. But take heart, because I have overcome the world)!” (요한복음 16:33)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긴 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 질문에서 해답을 찾지 못하고 힘들어합니다. 아니,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과 내가 부활의 삶을 사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 어떻게 내가 용서 받는 것이 됩니까? 오늘 여러분 중에도 이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고린도전서 15장에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 (the firstfruits of resurrection)’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20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첫 열매’가 있으면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열매가 있을 것 아닙니까? 바울은 23절에서 ‘those who belong to Christ (NIV, NLT)’ ‘those who are Christ's (NKJV)’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영접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 부활의 나중 열매들이 되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죄를 용서 받고, 이 사람들이 예수님과 함께 세상을 이기는 사람들입니다.

이 두 사람을 보세요. 슬픔과 절망으로 고향으로 내려 가던 사람들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달려갑니다. 예루살렘에 아직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아직 불안과 공포 속에 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기울어져 가는 석양을 걷던 사람들이 동터 오는 새벽 길을 달려갑니다. 이 사람들이 세상을 이긴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신학적인 상상력이 탁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쓴 서신서 (epistles)에 그의 뛰어난 신학적인 상상력이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5:2-5이 그런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하며 즐거워합니다. 우리는 환난을 당하더라도 즐거워합니다. 그것은 환난이 인내를 낳고, 또 인내는 연단된 인품을 낳고, 연단된 인품은 소망을 낳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 소망은 절대로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습니다.” “We confidently and joy-fully look forward to sharing God's glory. We can rejoice, too, when we run into problems and trials, for we know that they help us develop endurance. And endurance develops strength of character, and character strengthens our confident hope of salvation. And this hope will not lead to disappointment. For we know how dearly God loves us, because he has given us the Holy Spirit to fill our hearts with his love.” (New Living Translation)

이것이 우리 크리스천들의 삶의 공식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사람의 슬픔과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 주신 주님은,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힘들어 하고, 슬퍼하고, 절망할 때, 그 자리에 우리와 같이 계시고,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그렇다면, 힘들고 어려울 때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슬프고 절망스러운 일을 당할 때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우리 곁에 계시는 주님을 신뢰하면 됩니다.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믿으면 됩니다. 곧 주님께서 나의 슬픔과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 주신다는 것을 믿으면 됩니다. 문제를 만나고 시련을 만날 때 절망하지 않으면 됩니다. “아, 하나님께서 이번에 이 문제를 통해서 나를 단련 시키시는구나. 이 시련의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은 나를 더 성숙한 크리스천으로 성장 시키시는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이것이 크리스천의 시각이고, 크리스천의 삶의 공식입니다. 이런 사람은 더 이상 저물어가는 석양 길을 걷지 않고 동터 오는 새벽길을 걷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