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9/2020 | In Times Of Trouble 1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는 하나님 God Is Our Fortress

시편 46

사순절을 은혜롭게 보낸 중에 이 사달이 났습니다. 생각해 보면 그래도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이런 중에도 사순절 새벽기도를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덧 다음 주일이 종려주일이고, 그 다음 주일은 부활주일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국민들에게 전하는 메시지에서 부활절 때까지 지금 상황이 종료될 것이라고, 그 때까지 지금 상황이 계속되면 끔찍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지금 그의 말을 믿는 사람이 없습니다. 리더는 위기의 때에 국민들에게 희망을 줘야 합니다. 하지만, 그 희망에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제가 보기에 미국은 ‘COVID-19’ 사태가 아직  최고 (apex)에 도달하지 않았습니다. 최고에 도달하고 커브가 꺾이려면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좀 더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목회자로서 평소에도 미래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그리고, 이 변화가 목회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 하는 관심 때문입니다. AI가 미래의 삶을 바꾸는 중심에 있습니다. 10년, 20년 후의 인류의 삶이 어떻게 변화하게 될 지 알 수 없지만, 지금하고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인류의 삶은 진화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COVID-19’ 사태가 터졌습니다. 제 눈에는 이 ‘COVID-19’이 장차 변하게 될 인류의 삶을 실험하고 있는 것 같이 보입니다. 이번 ‘COVID-19’ 사태가 진정이 되고 나면 우리의 삶은 많이 달라질 것입니다. 우선 trans¬portation이 엄청 달라질 것입니다. 비행기를 타고, 자동차를 타고 해외에 나가나 장거리 여행을 하거나 출장을 가는 사람들이 급격하게 줄어들 것입니다. 직접 현지에 가지 않고 원격으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지금 시험하고 있지 않습니까? 또 하나, face to face로 이야기 하거나 상담하는 일이 훨씬 줄어들고 온라인 화상으로 대신하게 될 것입니다. 이번 ‘COVID-19’ 사건으로 교수들은 온라인 수업을 시험하고 있습니다. “어, 온 라인 수업이 괜찮은데?” 하게 되면 많은 수업들이 온라인으로 대체될 가능성이 많아 보입니다. 사실 의과대학의 수업들은 일찍부터 온라인 수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가는 것을 사람들은 꺼리게 될 것입니다. ‘COVID-19’ 사태가 진정이 되어도 말입니다. 수 백 명씩 모이는 세미나, 극장, 오페라, 연극 같은 공연장, 서로 따닥따닥 붙어 앉는 경기장, 레스토랑, 마켓, 카페 같은 곳들이 타격을 입게 될 것입니다. 벌써 오페라는 관객 없는 공연을 하고 있고, UFC (종합격투기)도 관객 없는 경기를 했습니다. 사람이 많이 가는 것 대신 delivery system이 지금보다 훨씬 발전하게 될 것입니다. 아마존이나 Whole Food같은 곳이 일찍부터 독자적인 delivery system을 발전시킨 것은 선견지명이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외신들이 한국에 대하여 신기하게 보는 것 중에 한국은 사재기가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한국에 사재기가 없는 것은 delivery system이 잘 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이 분석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잘 모르실 지 모르지만 이곳 보스턴에도 작은 delivery system을 갖춘 회사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물건 몇 개라도 free로 배달해 줍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교회는 어떻게 될까요? 벌써 언론에서는 모여서 예배 드리는 것에 대한 무용론을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교회에 대한 것은 섣불리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과연 교회에 와서 드리는 예배를 온라인 예배가 대신할 수 있느냐?” 하는 근본적인 질문이 제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21세기에도 문명의 이기를 거부하고 예전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미쉬들 (Amish)’입니다. 그들은 자동차를 타지 않습니다. 마차를 타거나 자전거를 타거나 아니면 걷습니다. 지금도 그런 방식으로 삽니다. 교회에 예배 드리러 갈 때 그들은 마차를 타거나 걸어서 갑니다. 누가 그들에게 그런 식으로 사는 것이 불편하지 않으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조금 힘들어도 누구의 도움을 받지 않고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예배입니다.” 저는 그들의 대답을 들으면서 많은 도전을 받았습니다. “지금의 예배를 온라인 예배가 대신 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 계속 제 안에 남아 있습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우리교회의 온라인 찬양, 온라인 예배, 온라인 새벽기도, 온라인 성경공부가 상당히 호응을 받고 있습니다. 당장에 호응이 있다고 해서 온라인으로 드리는 예배가 교회에서 모여 함께 찬송 부르고, 기도하고, 설교 말씀 듣고, 성도의 교제를 대신 할 수 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말씀 드린 것은 지금의 현상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시대의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할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대처해 나가야 합니다. 저는 이번에 갑작스럽게 이런 일을 당하면서 우리교회가 그동안 해 온 media ministry가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릅니다. 덕분에 우리교회는 당황하지 않고 잘 대처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읽은 시편 46편은 고라 자손이 쓴 시편입니다. 고라 자손이 누구인지에 대하여는 말씀 드리지 않겠습니다. 궁금하신 분들은 한번 성경에서 찾아 보시거나 구글에서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시편은 그 주제가 “God is our refuge and strength, always ready to help in times of trouble (우리의 피난처이시고 힘이 되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어려울 때 항상 도우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도와 주실 준비가 되어 있으신 이유는 분명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백성 (The People of God)’이라는 말이 많이 나오지만, 신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두 말에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 때는 그룹 혹은 공동체의 의미가 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때는 개인의 의미가 강합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은 백성이라는 공동체와 언약을 맺으셨지만, 신약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은 각 개인과 인격적인 언약을 맺으십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내가 너희와 맺는 ‘새 언약 (the new covenant)’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라 자손이 시편 46편을 쓴 이유는, 어려운 일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시를 써서 돕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경제적인 문제나, 인간관계에서나, 적들로부터 추격을 받고 도망을 다니거나, 빚쟁이들에게 독촉을 받거나, 불안에 싸여 있거나...... 고라의 자손은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위로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지금 미국에서는 ‘COVID-19’으로 가장 취약하게 위험에 노출된 사람들이 의료진들이라고 합니다. 미국이 이런 사태에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합니다. ‘방호복’이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합니다. 한국을 보세요. 의사나 간호사들이, 또는 방역하는 사람들이 모두 우주인들이 입는 것 같은 ‘방호복’을 입고 있지 않습니까? ‘방호복’을 입으면 무겁고 거추장스럽기는 하지만 바이러스의 공격으로부터 생명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한국의 의료진 중에 이런 사태로 죽은 사람이 있나요? 아마 거의 없는 것으로 압니다. 미국은 의료진들이 지금 위험에 많이 노출되어 있습니다. 마스크 한장으로 버티는 것입니다. 시편 46편을 쓴 사미스트는 ‘in times of trouble’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의 피난처가 되시고, 힘이 되시고, 도움이 되신다는 시를 썼습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가 ‘in times of trouble’ 속에 있을 때 피난처가 되시고, 힘이 되시고, 도움이 되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교회에도 의료진들이 많습니다.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이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지켜 주셨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앞으로, ‘COVID-19’보다 더 심한 재난이 우리 앞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문제는 정말 우리가 ‘in times of trouble’ 속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도와 주시는 것을 실제적으로 (practically) 느끼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가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 있습니까? 안타까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 주신다는 것을 실제적으로 알지 못합니다. 그냥 “God is our refuge and strength, always ready to help in times of trouble” 이런 말씀을 읽으면서 마음에 위로를 받는 정도로 그치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이것은 진정한 믿음이 아닙니다. 이것은 본회퍼가 말하는 ‘값싼 은혜 (cheap grace)’ ‘값싼 위로 (cheap consolation)’입니다.

꼭 기억해 주십시오. 하나님의 도움이 우리 삶에 실제적인 것이 되려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인격적인 관계가 설정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무엇이 인격적인 관계 설정인지 잘 모릅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베풀지 않았습니까?” “내가 분명하게 그들에게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모른다. 악한 일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썩 물러나라.’” (마태복음 7:22-23) 이 사람들은 주님의 일을 하면서도 그들의 삶이 하나도 바뀌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이 사람들을 ‘악한 일을 하는 사람들 (evildoers, NIV)’이라고, 나는 너희를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겉으로는 주님의 일을 하는 것처럼 하면서 뒤에서는 악한 일을 하는, 지금 우리가 이런 식으로 믿음생활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이런 식으로 믿음생활 하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는 생기기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in times of trouble’ 속에서 실제적인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 성 안에 계시므로, 그 성이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새벽부터 그 성을 도우실 것입니다 (God dwells in that city; it cannot be destroyed. From the very break of day, God will protect it).” (5절) “아, 하나님께서 내 안에 계시는구나! 하나님께서 나를 새벽부터 밤까지 지키시는구나. 나를 보호하시는구나!” 이것이 우리의 느낌이 아니라 실제적인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내 주변의 땅이 흔들리고, 산들이 바닷속으로 무너져 내리고, 파도가 치고, 사나운 바다에 산들이 흔들려도, 하나님이 나의 피난처가 되시는구나.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구나!” 이것이 우리의 막연한 기분이나 느낌이라면, 이것은 ‘값싼 위로’ ‘값싼 은혜’입니다. 제발 그렇게 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피난처가 되신다는 것이 나의 고백이 되고 나의 간증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는 일 때문에 고난을 받지만, 이에 대해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내가 지금까지 믿어 온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주님은 내게 맡기신 것을 세상 끝날까지 안전하게 지키실 것이라고 확실히 믿기 때문입니다.” (디모데후서 1:12) “That is why I am suffering here in prison. But I am not ashamed of it, for I know the one in whom I trust, and I am sure that he is able to guard what I have entrusted to him until the day of his return.” 이 말씀을 잘 보십시오. 내가 주님을 아는 일과 주님이 나를 지켜 주시는 일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차근차근 하나님과의 관계를 형성해 나가면 됩니다. 하나님을 아는 일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면 됩니다. 배운 대로 말씀을 실천하고, 우리의 삶을 바꾸어 나가면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의 믿음이 관념적인 믿음이 아니라 실제적인 믿음이 됩니다. 우리가 ‘in times of trouble’에 있을 때 나의 피난처가 되시고, 힘이 되시는 실제적인 믿음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우리가 맞고 있는 ‘COVID-19’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것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었고, 기도하게 되었고, 그동안의 우리의 믿음을 반성하게 되었고, 실제적인 믿음을 구하게 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로마서 8:28)

 


3/28/2020 | 사순절 새벽기도 28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 어려운 이유

요한복음 8:48-59

오늘 말씀은 유대인들과 예수님 간에 계속되는 논쟁입니다. 여러분도 아마 그런 생각들을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과 유대인들 간의 관점이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말씀하고 계시고, 유대인들은 세상적인 (인간적)인 관점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에 속한 일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시고, 유대인들은 세상에 속한 일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은 성경적인 관점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세상적인 관점은 인간적인 관점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두 관점에 대하여 좀 더 얘기를 한다면, 세상적인 관점은 사건이나 사물의 surface, fact, physical한 것들을 본다고 할 수 있고, 하나님의 관점 (성경적인 관점)은 사건과 사물의 inside, meaning, spiritual한 것들 것 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여러 차례 관점에 대하여 말씀을 드린 바 있습니다. 두 관점 중에 우리가 어느 것을 택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세상적인 관점은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관점인데, 문제는 이 관점만 가지고는 이해되지 않은 일이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내가 세상에 온 것은 양들로 하여금 더욱 풍성한 생명을 얻게 하려고 왔다.” (요한복음 10:10)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을 때 예수님은 ‘영적인 생명’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이런 말씀은 세상적인 관점을 가지고는 해석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거듭남 (born again)’에 대하여 말씀하셨을 때 니고데모라는 사람은 “제가 이미 이렇게 성인이 되었는데,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의 태 안에 다시 들어가 두 번씩이나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요한복음 3:4)?” 이렇게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You are a respected Jewish teacher, and yet you don't understand these things (너는 세상에서 존경 받는 선생인데 이런 일들을 이해하지 못하느냐)?” 예수님는 거듭남에 대하여 말씀하셨을 때 하나님의 관점을 가지고 말씀하셨고, 니고데모는 세상적인 관점 (인간적인 관점) 밖에 모르는 상태였기 때문에 그런 질문을 했던 것입니다.

성경에 또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You are a dangerous trap to me. You are seeing things merely from a human point of view, not from God's.” (마태복음 16:23)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는 여전히 모든 일들을 인간적인 관점에서만 보고 있었습니다. 지금 예수님께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하나님께서 개입하신 일들인데, 이런 일들을 ‘인간적인 관점’만 가지고 있었던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지 않도록 막는 일이었습니다.

누가 요셉에 대하여 이런 글을 썼더라고요. “But Joseph did not see his life from a human point of view.” 잘 썼습니다. 요셉의 삶에 어느 날 닥쳐 온 고난의 문제, 이 문제를 어떻게 해석할 수 있습니까? 인간적인 관점으로 해석하면 형들이 원망스럽습니다. 언젠가는 내가 당한만큼 갚아 주겠다는 생각 외에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요셉의 삶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미스터리 같은 일들이 술술 풀립니다. 요셉이 자기 형들에게 이렇게 말한 것을 기억하세요? “형님들은 나를 해치려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형님들의 악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가 형님들과 형님들의 아이들을 돌봐 드리겠습니다.” (창세기 5:20-21) 요셉이 이런 말을 했을 때 이미 요셉은 하나님의 관점으로 자신의 삶을 해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관점만 가지고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다. 그러므로, 인간의 삶을 해석하는 관점이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관점이 있다. 이 관점을 알아야 우리의 삶과 관계된 많은 일들을 이해할 수 있다. 이 관점이 바로 하나님의 관점 (성경적인 관점)이다.”

유대인들은 인간적인 관점을 가지고 계속 질문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대답하시는 것을 전혀 알아 듣지 못합니다. 별 큰 의미 없이 진행된 유대인들과 예수님 간의 논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우리는 몇 가지 흥미로운 사실들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로,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게 되자 예수님을 가리켜 사마리아 사람이고 귀신 들린 사람이라고 몰아 세웠습니다 (48절). 우리는 이들의 주장을 통하여 그 당시 사마리아 사람들과 유대인들 간의 적대감정이 얼마나 지독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유다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서로 상종하는 일이 없었던 것이다 (For Jews have no dealings with Samaritans).” (요한복음 4:9) 이 말씀을 아시지요?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사람들의 땅으로 들어가셔서 한 여자를 우물 가에서 만난 이야기 속에 나오는 말입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과 사마리아 사람들은 서로에게 적대감정이 있었고, 차별의식이 있었지만 예수님께는 그런 것들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말씀을 배우면서 예수님의 생각 속에 들어 있었던 그런 것들 것 배워야 합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다음 세대로 자라는 사람들은 ‘global thinking’을 해야 한다고요. 다음 세대 사람들은 ‘local thinking’만 고집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전 세계가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야단났습니다. 가장 야단난 나라가 미국입니다. 그동안 미국은 항상 세계에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도와주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손을 벌이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특히 우리 한국에 도움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한국의 국(國格)격이 높아졌습니다. 하루 아침에 우리나라의 위상이 높아졌습니다. 발전된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 나라, 발전된 의료 시스템이 있는 나라, 성숙한 시민 의식, 그리고 자유로운 언론이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하루 아침에 107개 국가에서 한국의 ‘진단 키트’를 달라고 손을 벌리고 있다는 뉴스가 나왔습니다. 이것은 보수언론에서도 보도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그 나라 대통령이, 총리가 직접 우리나라 대통령에게 전화를 해서 도와 달라고, 정보를 공유해 달라고, 한국을 모델로 삼고 싶다고 야단들이라고 합니다. 우리 대통령이 그랬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정보를 공유하겠습니다.” 이것이 ‘global thinking’입니다. ‘global thinking’을 할 줄 아는 사람이 ‘global leadership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이미 예수님에게서 이 ‘global thinking’을 발견합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나는 나의 아버지의 영광을 구한다고, 나 자신의 영광을 구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나의 아버지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49-50절). 이 말씀 역시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우리 자신들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머리로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것이 우리들의 삶의 방식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보라, 나의 종, 내가 택한 자, 그는 내가 사랑하는 자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부어 주리니 그가 나라들을 심판하리라. 그는 다투지도 않고 잘난 체하지도 않으며 길거리에서 그의 소리를 들을 자가 없으리라. 그는 약한 자를 짓누르지 않으며 가장 작은 자의 희망도 억누르지 않으리라. 그는 마지막 싸움을 승리로 이끌리니, 그의 이름이 온 세계의 희망이 되리라.” (마태복음 12:18-21) 이 말씀은 이사야 42:1-4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예수님께 배운 대로 실천해 나가면, 처음에는 잘 안 되고 어색하겠지만, 계속해서 이 방식을 지켜 나가면, 마침내 이것이 우리의 삶의 방식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결과는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높여 주신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께서 높여 주십니다. 내가 내 자신을 높이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여 주십니다. 이것이 크리스천이 세상을 사는 방식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의 말을 지키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51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 이 말씀은 뭐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16) 이 말씀을 이상하게 듣는 사람은 없습니다. 요한복음 3:16에는 ‘저를 믿는 자마다 (everyone who believes in him)’ 영생을 얻는다고 나와 있고, 오늘 말씀에는 ‘누구든지 나의 말을 지키는 사람은 (anyone who obeys my teaching)’ 영생을 얻는다고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이해하는 데 성경을 찾아 보고, 비교해 보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성경에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과 예수님의 말씀을 지킨다는 말이 동격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실천하는 과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넷째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주목해서 보아야 합니다.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은 내 날을 볼 것을 생각하며 기뻐하였다. 그는 그 날을 보았고 기뻐하였다.” (56절) 유대인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아직 오십 세도 안 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단 말이오?”

흥미로운 사실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나이를 50세 조금 안되게 보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실제 그 때 나이는 32살이나 33살쯤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나이를 거의 20살이나 많게 보았습니다. 성경에 이런 장면이 있습니다. 요셉의 주선으로 바로 (이집트의 왕)와 야곱 (요셉의 아버지)이 처음 만나는 장면입니다. 요셉은 다 계획이 있었습니다. 바로가 야곱을 보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올해 연세가 얼마나 되시오?” 야곱이 말합니다. “예, 제 나이가 130살입니다. 그동안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창세기 47:9) 바로는 야곱을 폭싹 늙은, 얼굴에 주름이 패인, 측은한 노인으로 보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얼굴도 그렇지 않았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얼굴을 매우 멋지고, 젠틀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화가들도 예수님의 얼굴을 그렇게 그립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실제 얼굴은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실제 나이보다 20살이나 더 들어 보이게 보았으니까요.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그는 여호와 앞에서 부드러운 새싹처럼, 메마른 땅에서 자라는 나무 줄기처럼 자라났다. 그에게는 아름다움도 없었고, 우리의 눈길을 끌 만한 위엄도 없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미움과 멸시를 받았으며, 아픔과 고통을 많이 겪었다. 사람들은 그를 바라보려 하지도 않았다. 그는 미움을 받았고, 우리 가운데 아무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사야 53:2-3) 우리는 이 말씀에 나오는 이 사람이 예수님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에게 아름다움이 없었고, 어떤 위엄도 찾아 볼 수 없었고, 사람들에게 미움과 멸시를 받았고, 아픔과 고통을 많이 겪었고, 아무도 그를 쳐다보려고 하지 않았고, 아무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 사람을 무시했습니다.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였습니다.

“당신이 아브라함보다 위대합니까? 당신이 아브라함을 보았습니까? 당신이 아브라함보다 나이가 많습니까?” 이런 말도 안 되는 질문을 쏟아 놓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에도 나는 존재한다.” (58절) “Before Abraham was even born, I AM!①" / ①Or before Abraham was even born, I have always been alive 예수님께서 그 자신을 ‘스스로 있는 자’ ‘I AM’이시라고,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에게는 언제부터 있었는지 시제(時制)를 붙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좀 어색하지만,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에도 나는 존재한다” 이렇게 해석한 것입니다. 우리 말로도 굉장히 어색합니다. 그래서 영어로 이런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Before Abraham was even born, I have always been alive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에도 나는 있었다).”

이 말도 안 되는 유대인들과 예수님과의 논쟁을 보면서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유대인들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 우리들의 문제라고요. 하나님의 말씀이 이해하기 어렵고 믿기 어려운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가 성경의 관점 (하나님의 관점)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진 관점만 가지고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성경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내가 몰랐던 또 하나의 관점이 있었구나!”하는 ‘Paradigm Shift’가 필요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예배를 드릴 때마다, 설교 말씀을 듣고, 성경공부를 할 때마다, 먼저 나의 모든 생각, 나의 주장을 내려 놓는 겸손함을 훈련해야 합니다. 이 훈련을 꾸준하게 해 나가면 차차 우리는 성경의 관점을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 관점을 가지고 세상과 나의 삶을 보면 그 전에 미처 몰랐던 새로운 세계가 열립니다.


3/27/2020 | 사순절 새벽기도 27

하나님께 속한 사람

요한복음 8:33-47

설교자들이 설교를 한 후에 후회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 그 때 이 말을 꼭 했어야 했는데......” 이런 후회가 드는 때가 있습니다. 어저께 새벽에 설교를 마친 후에 저에게 그런 후회가 들었습니다. 데이빗 리빙스턴이 그런 말을 했잖아요? 내가 묶고 있는 모든 ‘끈 (ties)’을 끊어 달라고요. 내 마음이 주님의 마음에 묶여 있는 끈을 제외하고 모든 끈을 끊어 달라고요. 또 사도 바울은 자기가 그동안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들을 모두 버렸다고요. 바울은 그 것들에게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기 위해서 그것들을 ‘garbage (쓰레기)’ 처럼 버렸다고요. 예전 개역성경에는 ‘분토(糞土, dung)’처럼 버렸다고 했습니다. 우리가화장실에서 용무를 보고 나면 물을 내립니다. 그러면 ‘쏴’하는 소리와 함께 내려가 버립니다. 그것을 보고 미련을 갖는 사람은 없습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이 그것입니다. “나도 리빙스턴처럼 나를 얽어 매고 있는 ‘끈들’을 모두 끊어버려야지! 나도 바울처럼 이것들을 쓰레기처럼 버려야지!” 설마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없겠지요? 그런 결심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절대로 안 됩니다. 못 끊습니다. 못 버립니다. 이 끈을 끊고, 쓰레기처럼 버릴 수 있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확실하게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strong commitment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That is why I am suffering here in prison. But I am not ashamed of it, for I know the one in whom I trust, and I am sure that he is able to guard what I have entrusted to him until the day of his return.” (디모데후서 1:12) 중요한 것은 바울이 그가 믿는 분, 예수 그리스도를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맡긴 것을 확실하게 지켜 주실 것을 믿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가 맡긴 것이 무엇입니까? 그를 믿으면서 그에게 걸고 있는 기대와 희망입니다.

리빙스턴도 똑 같은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 어디든지 저를 보내십시오, 주님 어떤 짐이라도 저에게 지우십시오. 괜찮습니다. 저를 얽어 매고 있는 모든 줄들을 끊어 주십시오. 제 heart와 주님의 heart에 매여 있는 끈만 남겨 놓으시고요.” 리빙스턴도 그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를 확실하게 알고 있었기에 이런 고백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제발 여러분들을 자유롭지 못하게 묶고 있는 끈들을 끊으려고 시도하지 마십시오. 반드시 실패합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확실하게 알기 전에는요. 이 말을 꼭 하고 싶었습니다.

자, 이제 오늘 말씀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녀들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종이 되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당신은 우리가 자유롭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까?” (33절) 예수님께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을 듣고 유대인들이 이렇게 질문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죄를 짓는 사람마다 죄의 종이 되는 것이다. 종은 영원히 가족이 될 수 없지 않겠느냐? 그러나 아들은 영원히 가족이 되는 것이다.” (34-35절)

성경에 보면 ‘죄의 종’이란 말이 많이 나옵니다. ‘죄의 종’이란 말은 죄가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따라서 하지 않으면 되지 않느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죄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죄는 마약과 같아서 한번 맛을 보면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 들게 됩니다. 그래서 ‘죄의 종’이라고, ‘a slave of sin’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드라마 같은 데서 많이 보지 않았습니까? 처음엔 호기심에 한번 해 봤습니다. 그런데 두 번, 세 번 하다가 거기에 중독되고 맙니다.

어저께 봤던 말씀 카드 다시 한번 볼까요? 요한복음 8:31-32입니다. “If you abide in My word, you are My disciples indeed. And you shall know the truth, and the truth shall make you free.” (NKJV) 예수님께서 “종은 영원히 가족이 될 수 없고, 아들은 영원히 가족이 된다”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말하는 ‘아들’이 누구입니까? 자유함을 누리는 사람이잖아요? 종에게는 자유가 없습니다. ‘아들에게만’ 자유가 있는데, 이 아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켜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진리를 깨우친 사람이 아들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을 잘 보면, 단순히 이 말씀은 제가가 되는 길, 진리를 아는 길, 자유함을 누리는 길에 대한 말씀 뿐만 아니라 죄를 짓지 않는 길, 죄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도 이 말씀 속에 들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아버지는 아브라함입니다 (Our father is Abraham)!”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정말 아브라함의 자녀들이라면, 아브라함이 행했던 일을 너희도 행했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지금 하나님께 들은 것을 너희에게 말하는 나를 죽이려 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이와 같은 일을 결코 행하지 않았다.” (39-40절)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을 자랑했습니다. 유대인들이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느껴지지 않습니까? 교만하고 거만한 그들의 목소리가 말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다 할 시간이 없습니다. 아무튼 부자도 죽고 나사로도 죽었습니다. 부자는 죽어서 지옥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거지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부자에게는 자기가 지옥에 떨어졌다는 것보다 자기 집 대문 앞에서 먹을 것을 얻어 먹던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있는 것이 더 충격적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품 (Abraham’s bosom)’은 유대인들이 죽으면 가장 안기기를 원하는 곳입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혈연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들인 것을 자랑했지만, 예수님은 그런 것을 중요하게 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정말 아브라함의 자녀들이라면, 아브라함이 행했던 일을 너희도 행했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지금 하나님께 들은 것을 너희에게 말하는 나를 죽이려 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이와 같은 일을 결코 행하지 않았다.” (39-40절) 아브라함이 어떤 일을 했습니까? 하나님을 진실하게 믿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습니까?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더니 하나님께서 그것을 의로 여기셨다 (Abram believed the LORD, and the LORD counted him as righteous because of his faith, 창세기 15:6)”고 했잖아요? 예수님의 말씀은 아브라함의 예를 잘 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하나님을 잘 믿었는데, 아브라함이라면 하나님께 들은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사람을 죽이려고 했겠느냐? 그러니 지금 너희들이 나를 죽이려고 하는 것은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도 아니고, 또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마귀에게 속하여 너희 아버지 마귀가 시키는 대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는 법이다. 이는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은 너희가 하나님께 속해 있지 않기 때문이다.” (47절) “Anyone who belongs to God listens gladly to the words of God. But you don't listen because you don't belong to God.”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 자기가 속한 사람의 말을 듣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능입니다.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가 하는 말은 다 싫어합니다. 맞는 말 같습니다. 우리 믿음생활도 그런 것 같습니다. 저는 목사와 평신도를 구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저는 목사라고 해서 무슨 특권이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똑 목사의 특권을 주장할 마음도 없습니다. 그런데, 목사에게 주어진 일 중의 하나가 설교입니다. 주일마다 설교를 해야 합니다. 우리교회 같은 경우에는 새벽기도에서도 매일 설교를 해야 하고, 금요일에도 설교를 해야 하고, 그 밖에 성경공부가 많습니다. 교재를 만들어서 제공해야 하고, 간사 성경공부가 있습니다. 가족모임 성경공부 교재도 만들어야 하고, 인도자 강습도 해야 합니다. 이렇게 제가 교우들 앞에서 설교하고 말씀을 가르쳐야 하는데, 저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어떻겠습니까? 저의 말을 듣기 싫지 않겠습니까? 반대로 저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제가 하는 말도 좋아합니다. 제 설교를 들으면서 은혜를 받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나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다. 내가 하는 말은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라 모두 하나님 아버지께 들은 것이다 (38절). 그런데,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않는 것은 너희가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너희가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이었다면 내 말을 들었을 것이다 (47절).”

오늘 이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 마음을 돌아봤으면 좋겠습니다. 나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좋아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기를 기뻐하는지, 아니면 교회는 나오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싶은 마음은 없는지 우리 자신들을 반성해 봐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심각하게 들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나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것은 내가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지금 내가 그런 경우가 될 수 있습니다. 이해가 갑니다. 우리가 누구의 말을 듣는다는 것이, 비록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일지라도 누구의 말을 듣는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인 줄 압니다. 또 우리가 누구에게 속한다는 것도 쉬지 않은 일인 줄 압니다. 누구에게 속한다는 것은 그의 것이 되는 것이잖습니까? 그게 쉽지 않은 일인 줄 압니다.

하지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믿음생활은 우리의 의지를 꺾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지금 나의 의지를 꺾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께 속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결단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성경에 재미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무엘은 어렸을 때부터 엘리라는 그 당시의 제사장 밑에 들어가서 훈련을 받았습니다. 어린 사무엘이 자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사무엘에게 그런 일이 처음으로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줄 모르고 엘리 제사장이 자기를 부르는 소리인 줄 엘리에게 가서 “선생님, 저를 부르셨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아니, 난 너를 부른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똑 같은 일이 세번이나 반복되고 나서야 엘리는 비로소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신 것을 알았습니다. 엘리가 사무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사무엘아, 다시 한번 그런 음성이 들이거든, ‘주님, 말씀하십시오. 주님의 종이 듣습니다 (Speak Lord, your servant is listening)’ 이렇게 말씀을 드려랴.’” (사무엘상 3:9) 엘리의 말대로 또 한번 하나님의 소리가 있었을까요? 예, 다시 한번 사무엘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있었습니다. 어린 사무엘은 엘리 제사장이 가르쳐 준 대로 말했습니다. 사무엘은 이런 식으로 엘리 제사장 밑에서 훈련을 받았습니다.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읽을 때마다 우리도 그렇게 순종의 훈련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 말씀하십시오. 이 종이 듣습니다!” 때가 더 늦기 전에 말입니다.


3/26/2020 | 사순절 새벽기도 26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

요한복음 8:21-32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아래에서 왔으나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너희에게 너희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너희가 만일 내가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너희는 참으로 너희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다.” (23-24절) “어디서 많이 들었던 말씀인데?” 이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예, 세례 요한이 했던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자꾸 예수님과 자기를 비교합니다. 요한의 제자들도 은근히 예수님의 제자들과 자기들을 비교합니다. 이런 때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위로부터 오신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 분이다. 땅으로부터 온 사람은 땅에 속하여, 땅의 일을 말한다. 그러나 하늘로부터 오신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 분이다. 그분은 그가 보고 들었던 것을 증언하신다.” (요한복음 3:31-32)

요한이 자기 자신에 대하여 했던 말들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풀 자격도 없다.” (요한복음 1:27)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그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줄 것이다.” (요한복음 1:33) “그는 신랑이고 나는 신랑의 친구이다.” (요한복음 3:29) “나는 메시아가 아닙니다.” (요한복음 1:20) “그분은 점점 더 위대해질 것이고, 나는 점점 더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게 될 것이다.” (요한복음 3:30) 이 말씀이 영어성경 번역들을 보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He must increase, but I must decrease.” “He must become more important, but I must become less important.” 사람이 어떻게 자기 자신에 대하여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요? 보통 람들은 조금이라도 자기가 유명해지려고 하고, 사람들이 자기를 알아 주기를 바랍니다. 저도 예외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저를 알아 주는 말을 하면 기분이 나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 이 사람은 서슴없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 그분은 점점 잘 되고, 나는 점점 안되고, 예수 그분은 점점 더 중요한 사람이 되고, 나는 점점 덜 중요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요한이 자신에 대하여 했던 말 중에 결정적인 것은 “위로부터 오신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 분이다. 땅으로부터 온 사람은 땅에 속하여, 땅의 일을 말한다. 그러나 하늘로부터 오신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 분이다. 그분은 그가 보고 들었던 것을 증언하신다.” (요한복음 3:31-32) 무슨 말인가요? “예수 그분은 하늘로부터 오신 분이고, 나는 땅에 속한 한 사람에 불과합니다” 이런 말이잖아요? 참 대단한 사람입니다. 자기를 이렇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참 대단한 겸손입니다. 그런데요. 참 이상합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이렇게 높이고 자기를 낮췄다고 해서 아무도 세례 요한을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것이 진리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너희 중에서 높아지려거든 종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너희 중에서 첫째가 되려거든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인자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인자는 자기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왔다.” (마가복음 10:43-45) “Whoever wants to be a leader among you must be your servant, and whoever wants to be first among you must be the slave of everyone else. For even the Son of Man came not to be served but to serve others and to give his life as a ransom for many." (New Living Translation)

우리가 이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자기를 낮추면, 자기를 낮추는 척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사람들을 섬기는 servant가 되고 slave가 되면, 그리고 그것이 그 사람의 사는 방식이 되면 이상하게도 (이상하다고 하는 것은 설명이 잘 안 되기 때문에) 그 사람이 높아집니다. 자기를 스스로 높이려고 애쓰지 않아도 자기를 낮추면 높아집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예수님도 자기를 낮추셨습니다. 사람들을 섬기셨습니다. 섬기는 척하신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자기 목숨을 바쳐서 섬기셨습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바울이 이 사실은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에 잘 써 놓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예수님을 최고로 높은 자리에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 되게 하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다!’ 하고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빌립보서 2:9-11)

예수님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아래에서 왔으나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너희에게 너희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너희가 만일 내가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너희 너희는 참으로 너희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다.” (23-24절) 이 말씀은 New Living translation이 정말 잘 번역했습니다. “You are from below; I am from above. You belong to this world; I do not. That is why I said that you will die in your sins; for unless you believe that I AM who I claim to be①, you will die in your sins." / ①Greek unless you believe that I am. See Exod 3.14 제가 질문을 하겠습니다. 대답을 해 보세요.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하늘에서 오신 분입니다. 하늘에 속한 분입니다. 예수님은 무슨 권위로 너희가 죄 가운데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면 우리는 죄 가운데서 죽는 것입니까? 왜 그렇습니까? 왜냐하면 그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은 곧 (       )이시기 때문입니다. 질문 계속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살 수 있습니까?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 곧 ‘I AM’이신 예수님을 믿으면 죄 때문에 죽지 않고 살 수 있습니다.

‘I AM’이신 그분, ‘스스로 있는 분’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의 가르침을 꼭 붙들고 있으면 진정 나의 제자이다. 그 때에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되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31-32절) “You are truly my disciples if you remain faithful to my teachings. And you will know the truth, and the truth will set you free.”

이 말씀을 생각하다 보면 이런 말씀이 생각납니다. “朝問道면 夕死라도 可矣니라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공자의 ‘논어’에 나오는 말입니다. 확실히 공자의 이 말은 멋진 말이지만, 실천은 약합니다. 아니 진리를 깨우쳤으면 이제 그 깨우진 진리를 가지고 살아서 많은 사람을 유익하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공동체를 위한 섬김과 개념은 들어 있지 않고, 개인의 깨우침에서 끝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에서 열까지 실천으로 연결되지 않는 말씀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 말씀을 실천할 때 진가가 드러납니다. 보세요. 오늘 말씀에도 “나를 보내신 분은 나와 함께 계신다. 나는 언제나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일만 하므로, 그분은 나를 혼자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 (And the one who sent me is with me--he has not deserted me. For I always do what pleases him (29절)” 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지 않으시고 늘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도 실천에 대한 말씀이 들어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면 좋겠지요? 나와 함께 해 달라고 기도만 하면 안 됩니다. 내 생각과 나의 삶이, 나의 행동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들을 실천해야 합니다.

“If you remain faithful to my teachings”이란 말이 무슨 뜻일까요? remain, abide, dwell이라는 말은 그곳에 주소를 두고 산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교훈에서 멀어지지 않고 머물러 사는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입니다. 대충대충 건성으로 교회에 나가는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가 아닙니다. 내가 크리스천의 정의를 사전에서 찾아보았더니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a person who exemplifies in his or her life the teachings of Christ’ 더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크리스천은 예수님의 교훈을 그의 삶으로 증명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제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그 다음 말씀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은 진리를 알게 됩니다. 진리라고 하니까 막연한 진리가 아닙니다. 불교에서는 깨우친다고 하지요? 크리스천의 삶은 몇 년이고 벽을 보고 앉아 있다가 어느 날 깨우치는 것이 아닙니다. 크리스천이 깨우치는 진리는 예수님의 말씀이 모두 진실하다, 예수님의 말씀이 모두 옳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렇게 썼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 지를 알게 된다고요. “모든 성경 말씀은 하나님께서 감동을 주셔서 기록되었기 때문에 진리를 가르쳐 주며, 삶 가운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게 해 줍니다. 또한 그 잘못을 바르게 잡아 주고 의롭게 사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 (디모데후서 3:16) “All Scripture is inspired by God and is useful to teach us what is true and to make us realize what is wrong in our lives. It corrects us when we are wrong and teaches us to do what is right.”

“내가 읽고 있는 말씀, 내가 들은 교훈이 모두 진실한 말씀이구나!” 이 사실을 우리는 실천을 통해서 알게 됩니다. 우리가 깨우치는 진리는 머리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행동으로 알게 됩니다. 그런 사람은 마음에 자유함을 얻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내가 지금 진실한 교훈을 따라 살고 있다고요. 내가 믿는 말씀들이 모두 맞는 말씀들이었다고요. 그럴 때 우리 마음 속에 담대한 마음이 주어집니다. 다른 아무 것도 부러울 것이 없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나는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모든 것이 쓰레기처럼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을 이제 압니다. 이로써 나는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습니다.” (빌립보서 3:8) “Yes, everything else is worthless when compared with the infinite value of knowing Christ Jesus my Lord. For his sake I have discarded everything else, counting it all as garbage, so that I could gain Christ.”

 이런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를 발견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이 자유한 사람입니다. 그동안 내가 붙들고 있던 모든 것들을 버렸으니까요. 이런 사람이 자유한 사람입니다. “朝問道면 夕死라도 可矣니라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이런 말씀과는 차원이 다른 자유함입니다.

끝으로, 제가 좋아하는 David Livingstone (1813-1873, 영국)이 남긴 말 하나를 소개하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God, send me anywhere, only go with me. Lay any burden on me, only sustain me. And sever any tie in my heart except the tie that binds my heart to Yours.” 이런 사람이 예수님의 교훈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고, 이런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이고, 이런 사람이 진리를 발견한 사람이고, 이런 사람이 모든 것에 자유한 사람입니다. 부담이 많이 가시지요? 우리는 지금 부담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너무 부담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3/25/2020 | 사순절 새벽기도 25

세상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

요한복음 8:12-20

오늘 말씀의 요절은 12절 말씀입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I am the light of the world)!” 그리고 나머지 말씀들은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당신이 세상이 빛이라고 하면 빛이 되는 것입니까? 그 증거가 어디 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가 이 세상의 빛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증명하셨는지 궁금하시지요?

예수님께서 이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William Holman Hunt (1827-1910, 영국)가 그린 ‘세상의 빛 (The Light of The World)’이라는 제목의 그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에 등불을 들고 어느 집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주변은 온통 어둡습니다. 어느 계절인지 모르겠지만 문 앞의 풀들이 마른 것으로 보아 늦가을 밤일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방은 어둡고 예수님 주변만 빛이 있습니다. 예수님 머리 뒤에 빛나는 물체는 보름달이 아니라 예수님에게서 나는 후광입니다. 그런데, 이 집의 문은 닫혀 있고, 문 앞에 마른풀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집에 사는 사람의 상태가 이렇게 황폐하고 말라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이 그림을 자세히 보면 문에 손잡이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문 밖에서 문을 두드리고 계시지만, 손잡이가 없어서 문을 열고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안에 있는 사람이 문을 열고 예수님을 들어오시게 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에 있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Look! I stand at the door and knock. If you hear my voice and open the door, I will come in, and we will share a meal together as friends.” (요한계시록 3:20)

문을 두드리는 예수님의 손을 보십시오. 저런 자세로는 문을 세게 ‘꽝꽝’ 두드릴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손가락으로 ‘똑똑’ 하고 두드립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얼굴은 그 안에서 나는 작은 인기척이라고 놓치지 않으려고 귀를 기울이고 있는 진지한 표정입니다.

이왕 홀만 훈트의 그림을 보았으니 하나 더 볼까요? 이 그림은 ‘The Shadow of Death (죽음의 그림자)’라는 그림인데요. 상당히 영감이 있는 그림입니다. 이 그림의 배경을 보면 장소는 작업실인 것 같습니다. 각종 공구들이 벽에 걸려 있고요. 바닥에는 대패밥이 어지럽게 널려 있습니다. 큰 톱도 보이고요. 때는 해가 저물어가는 늦은 오후인 것 같습니다. 석양빛이 예수님의 작업실을 비추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일을 하다가 잠깐 쉬면서 팔을 벌리고 기지개를 켜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의 뒤로 그림자가 진 것이 보입니다. 그 옆에 있는 여자는 누군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윌리엄 버클리 (William Barclay, 1907-1078, 영국) 목사님의 책에서 이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본 적이 있습니다. Barclay 목사님은 이 여자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라고 했습니다. 마리아가 우연히 예수님의 뒤에 생긴 그림자를 보면서 깜짝 놀라는 장면이라고 이 그림을 해석했습니다. 마리아가 놀라는 얼굴은 보이지 않습니다. 석양 빛을 받아 생긴 예수님의 그림자가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의 그림자 같이 보입니다. 마리아는 우연히 그의 작업실에서 아들의 죽음의 그림자를 본 것입니다. 참 화가의 영감 (inspiration)이 대단하지 않습니까? William Holman Hunt는 성화 (sacred paintings)를 주로 그렸습니다. 이 그림들 말고도 그가 남긴 좋은 그림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빛이라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좀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세상에 빛인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어둠 속에서 살지 않으며, 생명의 빛을 얻는는다고 했습니다 (12절). 어둠 속에 사는 사람은 윌리암 홀만 훈트의 그림에서 보았듯이 사방이 컴컴한 어둠 속에 갇혀 삽니다. 그 사람의 마음 상태가 황폐합니다. 그런데, 빛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생명의 빛을 얻는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물론 이 말씀에도 ‘생명’과 ‘빛’이 연결되어 있습니다만,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참 빛이 있었습니다. 그 빛은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췄습니다. 참 빛이 되신 말씀이 세상에 계셨습니다. 그분 안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그 생명은 세상 사람들을 비추는 빛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9-10, 4)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The one who is the true light, who gives light to everyone, was coming into the world..... He gave life to everything that was created, and his life brought light to everyone (참 빛이신 그 분이, 모든 사람에게 빛을 주시는 그분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의 생명은 모든 사람들에게 빛을 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잘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빛은 곧 생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빛’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나는 양들이 생명을 더욱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해 왔다 (I came that they might have life abundantly, 요한복음 10:10)”고 하신 말씀과도 일치합니다.

둘째로, 우리는 이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믿는 빛의 자녀들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나가서 빛이신 예수님을 본받아 빛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 말씀은 “너희는 이 세상의 빛이라 (마태복음 5:14)”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과도 일치합니다. 빛은 곧 ‘생명의 빛’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너희가 이 세상의 빛이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생명을 얻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세상에 보여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너희는 이 세상에 빛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의 뜻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로 사는 것인지 모릅니다. 무엇이 올바로 사는 것인지 모르니까 공부를 남보다 많이 해도 그것이 성공의 도구가 되고, 남보다 더 좋은 스펙을 쌓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남보다 많은 것을 소유해도 무엇이 올바로 사는 것인지 모르니까 자기가 가진 resource를 어떻게 사용해야 할 줄을 모릅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시겠습니까? “‘나는 빛 가운데 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여전히 어두움 가운데 사는 사람입니다. 자기의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만이 빛 가운데 살고 있는 사람이며, 그런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잘못되게 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어두움 가운데 있는 사람이며, 어두움 속에 살면서 자신이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를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어두움이 그를 눈멀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자기가 빛 가운데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사신 것처럼 살아야만 합니다.” (요한일서 2:9-11, 6) "Those who say they live in the light should live their lives as Jesus did."

사도행전에 보면 처음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을 ‘크리스천’이라고 불렀다고 했는데, 저는 이 말 속에 좋은 의미가 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을 ‘크리스천’이라고 부른 것은 안디옥 (Antioch)에서 처음 있었던 일입니다 (사도행전 11:26). 시리아에 있는 도시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박해가 시작되니까 이들 피해서 피난 갔던 사람들이 안디옥으로, 또 소아시아로 (지금의 터키에 있는 도시들) 갔습니다. 이 사람들을 ‘디아스포라 (diaspora)’라고 부릅니다. 이 ‘디아스포라’들이 어떻게 살았을까요? 서로 함께 모여서 찬송하고 기도하고 예배 드리고, 또 서로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아 주고, 그렇게 살지 않았을까요? 그 때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는 바울과 바나바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이 안디옥 교회에서 일년동안 가르쳤습니다. 이렇게 훈련을 잘 받았으니까 안디옥 교회가 주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지 않았겠습니까?

‘크리스천 (Christians)’이라는 이름 속에 예수님의 인격과 사상과 교훈을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가끔 어떤 분들이, 또 목사님들 중에도 “초대교회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초대교회 사람들이 정말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살았거든요? 물건을 공동으로 사용하고, 필요에 따라 나누어 썼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있을 수 없는 경의로운 일입니다. 이런 기적 같은 일들이 초대교회에서 있었습니다. 이제 이 시대에 우리가 크리스천의 삶은 어떤 것인 것 세상에 보여줘야 합니다. 여러분이 크리스천의 삶이 어떤 것인지 보여 주면 교회의 미래는 밝다고 할 수 있겠지만, 보여 주지 못하면 교회의 미래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당신이 세상의 빛이라고 하는데, 그 증거가 뭡니까? 당신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 것입니까? 증거를 보여 주시오.” 어제 새벽기도 말씀에서도 그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라!” 이렇게 말씀하면 되는 것이냐고요. 예수님께서 정죄하지 않는다고 하지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까? 지금 똑 같은 질문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시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이것을 어떻게 사람들에게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You judge me by human standards, but I do not judge anyone (너희는 인간적인 기준을 가지고 나를 판단하지만, 나는 그런 식으로 누구도 판단하지 않는다).” (15절) 사람들이 ‘human standards’를 가지고 예수님을 판단합니다. 바울이 고린도후서 5:16에서 ‘human standards’에 대해서 말하잖아요? “나는 이제부터 그 어떤 사람도 세상의 관점으로 알지 않겠습니다. 전에는 내가 그리스도를 세상적인 관점으로 판단했으나,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 (I have stopped evaluating others from a human point of view. At one time I thought of Christ merely from a human point of view. How differently I know him now)!” 지금 사람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세상의 빛이라는 것을 증명하라고 요구할 때도 사람들은 당연히 ‘human standards’을 가지고 증명하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식으로 자신을 증명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적인 일은 ‘human standards’를 가지고 증명할 수 있지만,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본질 상 하나님과 같은 분이라는 것을 어떻게 ‘human standards’를 가지고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자신을 이렇게 증명했습니다. “너희 율법에 두 사람의 증인이 있으면 그것은 옳다고 되어 있다. 나에게 두 개의 증인이 있다. 하나는 나 자신이고, 다른 하나는 나를 보내신 나의 아버지이시다 (I am one witness, and my Father who sent me is the other).” (18절)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얼마나 화를 냈겠습니까? 오늘 읽은 성경 마지막 절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But he was not arrested, because his time had not yet come (아직 그의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은 체포되지 않았습니다).” (20절) 예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라도 예수님을 체포하고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지만, 상황을 통제하고 있는 분은 유대 지도자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든 상황을 지배하고 계신다는 것 아닙니까?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도, 그리고 우리의 삶도, 우리의 미래도 지배하고 통제하고 계시는 분은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오늘도 이 믿음을 가지고 마음에 큰 평안을 얻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