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모음
2/9/2020 | 청지기주일/임명예배
나의 사명 The Ministry Assigned Me By The Lord Jesus
사도행전 20:17-27
여러분, 먼저 이 지도를 한번 보십시오. 바울의 제 3차 선교여행의 루트를 그린 것입니다. ‘드로아 (Troas)’ ‘앗소 (Assos)’ ‘미둘레네 (Mitylene)’ ‘기오 (Chios)’ ‘사모 (Samos)’ ‘밀레도 (Miletus)’ ‘고스 (Cos)’ 바울의 3차 전도여행에 나오는 ‘에게 바다 (Aegean Sea)’ 연안에 있는 지명들입니다. 보기에는 이 섬들이 터키 연안에 가까이 있어서 모두 터키 영토인 것처럼 보이는 데, ‘고스’는 현재 그리스 영토입니다.
2015년 9월 2일, 한 장의 사진이 전 세계 사람들을 울렸습니다. 터키의 휴양지 ‘보드룸 (Bodrum)’ 해변에 빨간 셔츠를 입은 한 어린 아기가 엎드러진 채 죽어 있는 사진이었습니다. 이 아기의 이름은 ‘아일란 쿠루디 (Alan Kurdi)’라는 세 살배기 아이였습니다. 한 시리아 난민 가족이 시리아 북부에 있는 작은 도시 ‘코바니 (Kobane)’를 출발해서 육로로 터키로 들어 간 후 거쳐 고무 보트를 타고 그리스 영토인 ‘고스 (Cos)’로 가던 중에 거센 파도에 배가 뒤집히면서 참변을 당한 것입니다. 이 가족은 처음에 캐나다로 이민을 가려고 했지만 거절을 당한 후에 그리스로 건너가 유럽으로 망명을 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이 지명들을 소개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이 지명들이 2,000년 전에 사도 바울이 복음을 가지고 에게 바다를 건넜던 지도에 등장하는 이름들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곳 지명들이 뜻하지 않게 ‘시리아 난민’이라는 전쟁의 참상을 보여주는 지명들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뭔가 우리 마음을 때리고, 뭉클하게 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세상의 희망이라고 말하면서도 권력과 물질의 풍요로움과 평안 속에 안주하고 말았습니다. 그런 사이에 이곳은 모두 이슬람화 되고 말았습니다. 터키도 그렇고, 에게 바다의 섬과 도시들이 모두 이슬람화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과거와 현재에 대한 통렬한 반성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변화된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꿀 수 있지 않겠습니까? 지금 유럽의 몇몇 나라를 제외하고는 모두 시리아 난민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쿠루디 가족’이 무사히 ‘고스’ 섬에 도착하고, 그리스로 들어갔다고 해도 유럽의 국가들이 난민들을 거절하는 마당에 어떻게 되었을 지, 앞날을 보장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온 가족이 다 죽고, 혼자 살아남은 ‘쿠루디’의 아버지는 이제 나에게는 삶의 희망이 없다고 하면서 시리아의 자기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지금 미국을 비롯한 유럽의 나라들도 모두 자기 나라에 대한 걱정을 먼저하고 있습니다. 프랑스 등 일부 국가를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들이 난민들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나라들이 일찍 복음을 받아들인 나라들 아닙니까? 우리에게 이런 역사에 대한 이해와 반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아시아에 온 첫날부터 여러분과 함께 지내면서 어떻게 생활해 왔는지 여러분들은 잘 아실 겁니다. 나는 언제나 겸손히, 때로는 눈물을 흘리며 주님을 섬겼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주저하지 않고 전파하였습니다. 이제 나는 성령의 명령에 따라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그 곳에서 내게 무슨 일이 닥칠지 나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내가 아는 것은 어느 도시에 가든지 감옥과 환난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성령께서 내게 경고해 주셨다는 사실뿐입니다. 그러나 나는 내 목숨을 아깝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 곧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다 마칠 수만 있다면 말입니다. 내가 떠난 뒤에 어떤 사람들이 사나운 이리처럼 교회에 들어와서 양 떼를 해치려 할 것을 나는 압니다. 또한 여러분 가운데서도 진리를 왜곡되게 말하고, 제자들을 유혹하여 자기를 따르게 하는 사람들도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십시오. 내가 삼 년 동안을 밤낮으로, 때로는 눈물을 흘리며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쉬지 않고 교훈한 것을 기억하십시오. 이제 나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에 여러분을 맡깁니다. 그 말씀은 여러분을 능히 세울 수 있고 모든 거룩한 백성들과 함께 기업을 받을 수 있는 말씀입니다. 나는 그 누구의 금이나 은이나 옷을 탐낸 적이 없습니다. 나는 모든 일에서 여러분에게 모범을 보였습니다. 여러분은 저처럼 열심히 일해서 약한 사람을 도와야 합니다. 또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하신 주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18-35절)
우리는 이 바울의 고백을 들으면서 몇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그가 가지고 있었던 복음에 대한 열정을 배워야 합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쁜 소식입니다. 이 이야기 속에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들어 있습니다. 누군가 나에게 이 복음을 전해준 덕분에 내가 이 복음을 믿고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복음에 대한 열정을 갖는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이 복음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간절한 생각을 말합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주저하지 않고 전파하였습니다 (I never shrank back from telling you what you needed to hear, either publicly or in your homes).” (20절) “I didn't shrink from declaring all that God wants you to know.” (27절)
오늘 말씀에만 그렇게 나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복음을 전할 때마다 기도 중에 늘 여러분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전심으로 섬기는 하나님께서 나의 증인이 되십니다. 지금 나는 하나님의 뜻이라면 여러분에게 갈 수 있는 길이 열리기를 기도합니다. 내가 여러분을 간절히 보고 싶어하는 까닭은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을 나누어 주어 여러분을 강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로마서 1:9-11) 이 말씀 속에 복음을 로마에 사는 크리스천들과 함께 나누고 싶어하는 그의 간절함이 나와 있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에게 이 간절함이 없습니다. 복음을 다른 사람들과 같이 나누고 싶은 열정이 없다고요.
로마서 12:2에 유명한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는 이 세상을 본받지 말라 (Do not conform any longer to the pattern of this world, NIV).”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패턴은 어떤 것입니까? 다른 사람의 문제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개인주의적인 생각이 이 세상의 패턴 중의 하나입니다. 부부 간에도 서로 사생활을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들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삶에 끼어들 공간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세상의 패턴과 싸워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구원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다른 사람과 복음을 나눠야 합니다.
둘째로, 그는 그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모든 희생을 감수했다는 것입니다. 그가 이렇게말합니다. “But my life is worth nothing to me unless I use it for finishing the work assigned me by the Lord Jesus-the work of telling others the Good News about the wonderful grace of God.” (24절) 내가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반드시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그 사명을 위해서 그의 목숨도 아깝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까? 2,000년 전에 갈릴리의 어부들은 ‘나를 따르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는 말씀을 따르기 위하여 배와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배와 그물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전부였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찬송 중에 94장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I'd Rather Have Jesus)’라는 찬송이 있습니다. 이 찬송은 Rhea. F. Miller (1894-1966, 미국) 라는 사람이 가사를 썼고, George Beverly Shea (1909-2013, 미국) 라는 사람이 작곡을 하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 찬송가에 얽힌 이야기가 있습니다. ‘죠지 베버리 쉐아’는 경제 사정이 좋지 않아 학교를 쉬고 뉴욕에 있는 보험회사를 다니고 있었습니다. 이 때 죠지는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되었는데, 그 중에 NBC 방송국 프로그램 편성 부장을 알게 되었습니다. 죠지는 그 사람에게 자기가 노래에 소질이 있다고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아마도 그 프로그램 담당자도 죠지의 굵직한 베이스 목소리가 호소력이 있고 매력이 있다는 것을 알았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NBC 스튜디오에서 1,500명의 방청객과 전국의 청취자들에게 ‘가라 모세 (Go Down Moses)’를 부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청취자들은 굵직하고 호소력 있는 죠지의 목소리에 열광했습니다. 방송국 편성부장은 이 프로그램에 정기 출연을 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죠지에게 돈과 명예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찾아 온 것입니다.
그러나 죠지는 즉각 대답하지 않고 생각을 좀 해 보고 연락을 주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그의 마음은 술렁이기 시작했고, 희망에 부풀어 잠을 못 이룰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마음 속에 있는 뭔가가 그로 하여금 쉽게 결정하지 못하도록 말리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 때 그의 어머니가 아들이 고민하는 것을 보고 시 한 편을 주면서 이 시를 읽으면 마음이 편안해 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주일 아침에, 죠지는 그날 교회에서 부를 찬송을 연습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마음 속을 떠나지 않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금이나 은보다 차라리 주 예수를 선택하고 싶다”는 어머니가 준 시에서 읽은 구절이었습니다. 그 순간 죠지는 자기도 모르게 피아노를 치면서 즉흥적으로 그 시에 곡을 붙여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의 노래를 듣고 있던 어머니가 달려와 아들을 껴안으면서 “엄마는 이 노래 너무 좋구나! 오늘 예배 시간에 이 노래를 불러 줄 수 있겠니?” 하고 부탁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 찬송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NBC 방송극의 요청을 거부한 죠지는 그 후 빌리 그레이엄 크루세이드 (Billy Graham Crusade)의 요청을 받고 독창자로 세계를 돌면서 찬양을 했습니다. 그가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찬양을 할 때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의 뜨거운 박수갈채도 예수님과 바꿀 수 없습니다.”
셋째로, 그가 남긴 마지막 메시지가 무엇이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는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앞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하신 주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5절)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You should remember the words of the Lord Jesus:‘It is more blessed to give than to receive.’” 바울은 크리스천의 삶을 그 한마디로 요약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내 것을 주는 것입니다.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복음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열정이 있어야 하고, 내게 맡기신 책임과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나의 소중한 것들을 내려 놓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1961년 1월 20일, John F Kennedy가 취임 연설에서 했던 말이 생각납니다. “My fellow Americans, ask not what your country can do for you – ask what you can do for your country (나라가 여러분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느냐고 묻지 말고, 여러분이 나라를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물어 주십시오).” 우리는 교회를 향하여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교회가 나를 위해서 무엇을 해 줄 수 있느냐고 묻지 말고, 내가 교회를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오늘은 청지기 주일입니다. 여러분, 화면을 한번 봐 주십시오. ‘청지기 (Stewardship)’라는 말은 이제 잘 안 쓰는 말이 되었습니다만, 교회에서는 여전이 이 말을 사용합니다. ‘청지기직 (Stewardship)’이라는 말은 우리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입니다.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은 네 가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Give (주다)’ ‘Serve (섬기다)’ ‘Attend (출석하다. 참여하다)’ ‘Grow (성장하다)’ 이 네 가지가 각각 떨어진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내가 가진 것을 줌으로써 우리는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있습니다. 내가 가진 재능과 자원 (resource)를 다른 사람을 위해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섬김입니다. 그리고 은혜 받을 수 있는 모든 자리에 열심이 출석하고, 참여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더욱 성숙하고 신실한 크리스천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이런 크리스천이라야 자신의 재능을 다른 사람을 위해 사용할 수 있고, 섬길 수 있습니다.
2/2/2020 | 새해에는 이렇게 믿자 5
하나님의 은혜 2 Desiring God's Grace
시편 42:1-5
오늘은 ‘하나님의 은혜’ 두 번째 설교입니다. 지난 설교에서 왜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지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설교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비결에 대하여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길에 대하여 성경이 어떤 길을 제시하고 있는 지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누구이시며, 어떤 분이신가?” 라는 질문은 매우 중요합니다. 크리스천의 삶의 ‘foundational question (근본적인 질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너를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May the LORD bless you and protect you. May the LORD smile on you and be gracious to you. May the LORD show you his favor and give you his peace).” (민수기 6:24-26)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혹은 ‘여호와는 얼굴을 너를 향하여 드사’ 이런 말은 하나님과의 원만한 관계를 표현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너희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렇게 축복하라고 하시면서 주신 말씀입니다. 이것이 빈 말이 아니라, 너희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같이 축복하면 내가 그들을 축복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굉장한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축복의 말이 실제로 effective하게 working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사의 처방대로 약을 먹었더니, 그 약이 효과가 있어서 병세가 금방 좋아집니다. 이럴 때 “It works!” “It is working for me!” 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축복의 말씀이 실제로 우리의 삶 속에서 효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이 집에 평화가 있기를!'하고 빌어주어라. 만일 그 집 사람이 네가 빌어주는 평화를 받을 만한 사람이면 그 평화가 그에게 내릴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 (누가복음 10:5-6)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을 때 예수님은 틀림 없이 민수기 6:24-26 말씀을 생각하고 계셨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상대방에게 이런 인사를 한다면 그 인사가 그 사람에게 효과가 있을까요? 성경은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제가 이스라엘에 가 보았더니, 유대인들이 길 가는 모르는 사람에게도 지나가면서 “Shalom!” 이렇게 인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shalom’이라는 말이 히브리말로 ‘평화’라는 뜻입니다. 그 인사에 얼마나 진심이 담겼는지 모르지만 좀 형식적이라는 인상을 받기는 했습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서로 만나 인사할 때 “안녕하세요?” 이렇게 인사하는데 이 ‘안녕(安寧)’이라는 말이 참 좋은 말입니다. 평안하고 건강하다는 뜻인데요. 이런 뜻이 정확하게 히브리말 ‘shalom’ 이라는 말 속에 들어 있습니다. 헤어질 때 “안녕히 가세요!” 이렇게 인사합니다. 내내 평안하고 건강하시라는 참 좋은 인사입니다. 우리의 진심을 담아 이런 인사를 주고 받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서로 헤어질 때 영어로 “Goodbye!”라고 인사하는데요. 이 말도 참 좋은 말입니다. “May God be with you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를)!” 이런 뜻이잖아요? 우리의 진심을 담아 이런 인사를 한다면 최고의 인사가 될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조건 모든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격을 가지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와 인격적인 관계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첫째로, 하나님과 좋은 관계 속에 있어야 합니다. 그 말씀이 민수기 6장에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너를 향하여 비추사’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너를 향하여 드사’ “May the LORD smile on you and be gracious to you!”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얼굴을 돌리신다는 말씀도 성경에 있을까요? 우리가 보기 싫은 사람이 있으면 얼굴을 돌리잖아요? 있습니다. “내 죄에서 주의 얼굴을 돌리시고 나의 모든 죄를 씻어 주소서 (Hide your face from my sins Remove the stain of my guilt).” (시편 51:9) 다윗이 죄를 범하고 나서 하나님께 회개하면서 했던 말입니다. 또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서 얼굴을 돌리시고, 그들을 내버려 두셔서, 하늘의 별들을 섬기게 하셨습니다 (Then God turned away from them and abandoned them to serve the stars of heaven as their gods).” (사도행전 7:42) 또 욥기에도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How many wrongs and sins have I committed? Show me my offense and my sin. Why do you hide your face and consider me your enemy?” (욥기 13:24) 욥이 이렇게 자기의 정당함을 주장하다가 나중에 가서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회개합니다. 내가 받는 고난 속에 내가 이해할 수 없고 깨달을 수 없는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고 회개한 것입니다. 이것이 욥기를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 말씀이 오늘 읽은 시편 42편 말씀입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헤매이듯이 오 하나님이시여, 내 영혼이 주를 찾아 헤매입니다. 내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애타게 그리워합니다. 언제 내가 하나님을 만나러 갈 수 있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좋아하는 유명한 말씀입니다. 오늘 읽은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 말씀이 “As the deer longs for streams of water, so I long for you, O God. I thirst for God, the living God. When can I go and stand before him?”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long’이라는 단어는 “몹시 그리워하다” 혹은 ‘몹시 원하다”라는 뜻입니다. 다른 영어 성경에서는 ‘long’ 대신 ‘pant’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숨이 차서 입을 벌리고 헐떡이다’라는 뜻입니다.
이 시편 42편은 ‘고라 (Korah)’의 자손 중에 한 사람이 쓴 것입니다. ‘고라’에 대한 이야기가 구약성경 민수기에 나옵니다. ‘고라’는 모세나 아론과 같은 레위 지파 사람이었습니다. 같은 레위 지파 사람인데도 하나님께서 모세나 아론만 지도자로 사용하시는 것에 불만을 가졌습니다. 이런 ‘고라’에게 하나님은 무서운 벌을 내리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후손들에게는 벌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민수기 26:11).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남은 ‘고라’의 후손들은 시를 쓰는 시인이 되고,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들이 됩니다.
‘고라’의 후손 중의 한 사람이 쓴 시편 42편은 그런 의미에서 특별한 시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편의 저자는 무슨 일인지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나를 조롱합니다. ‘너의 하나님이 어디 있지?’ 지난 일들을 생각하면 할수록 내 가슴이 찢어집니다. 나는 사람들을 이끌고, 하나님의 성전을 향해 들어가곤 했습니다. 기뻐 소리를 지르고 감사의 찬송을 부르며, 그 행복한 사람들과 어울리곤 했습니다.” (3-4절) 지금 이 사람은 너무 너무 성전에서 드리는 예배가 그립습니다. “내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애타게 그리워합니다. 언제 내가 하나님을 만나러 갈 수 있겠습니까?” (2절)
오늘 여러분은 그가 쓴 이 시편 말씀을 읽으면서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지금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있다면 이 시편 저자가 가지고 있는 ‘간절함’ ‘사모함’이 없는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카운트 한다면 약 3,500년 전에 살았던 이 시편의 저자는 지금 우리와 비교해 보면 비교할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부족한 것, 불편한 것투성이입니다. 지금 우리는 그에 비하면 모든 것이 너무 풍족합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하나님을 만나고 싶은 ‘간절함’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에게는 그가 가지고 있는 ‘간절함’이 없습니다.
이 시편 저자는 그의 마음 속에 가지고 있는 ‘간절함’을 목마른 사슴에 비유했습니다. “As the deer pants for streams of water, so my soul pants for you, O God. My soul thirsts for God, for the living God. When can I go and meet with God?” (1-2절) 사슴이 목이 말라 입을 벌리고 헐떡거립니다. 목이 타 들어갑니다. 이 사슴에게는 어디서 시원한 물줄기를 발견하는 것이 소원입니다. 끝내 이 물줄기를 찾지 못하면 이 사슴은 죽고 말 것입니다. 지금 이 시편 저자에게 목마른 사슴이 보이는 증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그의 영혼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해 목이 타 들어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주일에 보통 때보다 좀 일찍 일어나서 교회에 가서 예배에 참석하면 됩니다. 목마른 사람이 어디서나 물을 마실 수 있듯이, 언제나 마음만 먹으면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목이 말라 입이 타 들어가는 사람에게 누가 물 한 컵을 준다면 그 사람은 마지막 한방울의 물까지 다 마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목이 마른 사람이 예배에 참석한다면 예배순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한방울의 은혜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예배에 집중할 것입니다. 예배자에게는 시편 42편의 저자가 말하고 있는 ‘간절함’과 ‘목마름’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길은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하게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했던 사람들을 보면 모두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하게 사모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나에게는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나는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모든 것이 쓰레기처럼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을 이제 압니다. 이로써 나는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습니다.” (빌립보서 3:8) 이 말씀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한 사람의 ‘간절함’을 읽을 수 있지 않습니까?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Let them praise the Lord for his unfailing love and for the wonderful things he has done for them. For he satisfies the thirsty and fills the hungry with good things).” (시편 107:8-9)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이 ‘간절함’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길입니다.
끝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시편 67편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May God be merciful and bless us. May his face smile with favor on us. (Selah) May your ways be known throughout the earth, your saving power among people everywhere.” (1-2절) 이 시편의 저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이 시편에 흐르고 있는 생각이 참 훌륭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셀라 (Selah)’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가장 합리적인 설명은 일종의 음악 기호라는 것입니다. 음악 기호는 찬양이나 연주를 하는 사람들과 서로 약속을 하는 것입니다. ‘셀라’는 ‘여기서 잠깐 쉬라’는 ‘interlude’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 시편을 이렇게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우리를 축복해 주십시오. 주의 미소 짓는 얼굴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잠깐 쉽니다) 하나님,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이 주님의 길을 알게 해 주십시오. 그들도 주님의 구원의 능력을 찬양하는 사람들이 되게 해 주십시오.”
이 시편 저자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기 위해 기도합니다. 그리고 잠깐 쉬고 그 은혜를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되기를 위해 기도합니다. 보세요. Interlude 다음에, 기도의 내용이 달라졌습니다. 자기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를 구하는 이기적인 생각에서 벗어나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나눌 수 있기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찬양하는 사람들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1/26/2020 | 새해에는 이렇게 믿자 4
하나님의 은혜 Desiring God's Grace
시편 127:1-2
오늘 설교 제목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정했습니다. 2020년은 교우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사모하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하는 기대와 소원이 제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찬양 중에 ‘하나님의 은혜’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조은아 씨가 가사를 썼고, 신상우 씨가 곡을 붙인 찬양입니다.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나를 보내신 이도 하나님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나의 달려갈 길 다 가도록 나의 마지막 호흡 다하도록/나로 그 십자가 품게 하시니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한량 없는 은혜 갚을 길 없는 은혜 내 삶을 에워싸는 하나님 은혜/나 주저함 없이 이 땅을 밟음도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 은혜”
우연히 신상우 씨의 간증 동영상을 보았습니다. 부모님을 따라 갔던 캐나다 이민 생활에서 처음에는 살기 위해 정신 없이 일하다가, 여기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좌절감 때문에 많은 방황을 했더라구요. 하지만 캐나다 이민 시절에 그는 많은 크리스천 음악가를 만나게 됩니다. 고형원을 만났고, 최덕신을 만났고, 조은아를 만났고, 송정미를 만납니다. 그리고, 최덕신을 통해서 송명희 시를 알게 됩니다.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이 모든 일들을 생각하면서 문득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어느 날 조은아에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가사를 하나 써 달라고 부탁합니다. 조은아는 그 다음 날로 가사를 써 왔습니다. 하얀 종이에 위에서부터 아래로 만년필로 가사를 써 왔다고 합니다. 신상우는 이 가사를 들고 펑펑 울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가사에 곡을 붙인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30분도 안 되어 곡을 붙였다고 합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서 신상우의 곡 중에는 조은아가 쓴 가사들이 많이 있습니다. 캐나다를 방문했던 박종호가 “이 곡 좋다”고 하면서 빼앗다시피 해서 이 곡을 가지고 귀국합니다. 그 후 신상우가 한국에 돌아왔을 때는 박종호가 부른 ‘하나님의 은혜’가 제법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었다고 합니다. 한국으로 돌아온 신상우는 소프라노 김영미 씨의 반주를 맡아 많은 공연을 함께 합니다. 김영미 씨가 부른 대표 곡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기 까지가 제가 들은 간증입니다. 그 밑에 붙은 댓글을 보다가 그가 2017년 50살의 나이에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를 섬세하고 맑은 영혼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신상우는 CCM 곡들만 아니라 '베토벤 바이러스' '주몽' '대조영' '제빵왕 김탁구' 등 대중음악과 OST에도 천재적인 소질을 보였는데, 그만 간암으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는 기사를 읽고 참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오늘 읽은 시편 127편은 솔로몬이 쓴 시편입니다. 이 시편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순례자들 위해 쓰여진 시편입니다. 순례자들이 일주일, 열흘 혹은 보름을 걸어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갑니다. 순례자들은 길을 가면서 이 시편을 노래로 불렀습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이 말씀에서 주목해서 봐야 할 말씀은 ‘여호와께서......하지 않으면 (unless the Lord builds a house, Unless the Lord protects a city)’이란 말입니다. 집을 짓는 일도 그렇고, 성을 지키는 일도 그렇고, 비즈니스를 하는 것도 그렇고, 공부를 하는 것도 그렇고, 가정 생활도 그렇고, 자녀를 기르는 것도 다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면 인간의 모든 노력이 ‘헛되다 (in vain)’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도서 1:2에 나오는 말씀을 잘 알고 있습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Vanity of vanities, Vanity of vanities, all is vanity! What profit has a man from all his labor in which he toils under the sun)?” (NKJV) “Meaningless! Meaningless! Utterly meaningless! Everything is meaningless.” (New Living Translation, New International Version) 어떤 사람은 솔로몬이 말년에 염세주의 (厭世主義, pessimism)에 빠졌다고 합니다. 솔로몬이 인생을 비관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 없이 살았던 삶에 대한 반성의 말씀입니다. 솔로몬은 말년에 잠깐 세상적인 기쁨과 즐거움에 빠져서 하나님을 잊고 살았습니다. 이런 삶에 대한 반성의 결과로 남긴 책이 전도서 (Ecclesiastes)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았던 삶이 헛되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먹고, 하고 싶은 것을 다 해도 하나님이 없는 삶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바꾸어 말하면, 우리의 삶은 창조주 하나님과 연결되고, 창조주 하나님과 관계가 될 때, 비로소 의미 있는 삶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면 정말 모든 것이 헛되고,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까? ‘만리장성 (萬里長城, The Great Wall)’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만리장성’은 기원전 222년, 진나라의 진시황 때부터 시작해서 명나라 때 와서 완성된 무려 1800년 동안, 20개 왕조에 걸쳐 완성되었습니다. 길이가 무려 8,500km이고요. 1987년에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고 합니다. 우주선에서도 식별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만든 건축물이라고 합니다. ‘만리장성’을 건축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었고 희생되었습니다. ‘만리장성’에 동원된 사람들 때문에 중국의 인구가 ‘만리장성’을 따라 분산될 정도였다고 합니다. 만리장성을 쌓은 목적은 북방 민족 (흉노족)의 침입을 막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성을 지키는 문지기들이 뇌물을 받고 성문을 열어주는 바람에, 막상 외적의 침입을 막는 데는 무용지물이었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헛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언제 ‘만리장성’을 보게 되면, 사진만 찍지 말고요. 그 무거운 돌을 거기까지 운반해 왔을 엄청난 인간의 노역(勞役)을 상상해 보십시오. 돌이 굴러 떨어지면서 사고로 깔려 죽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부상 당한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언젠가 ‘만리장성’을 걸으면서 수 많은 사람들의 고통과 원망의 소리를 꼭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무려 1,800년에 걸쳐 이룩한 엄청난 프로젝트의 결과 치고는 너무 허무하지 않습니까?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않으시면, 경비병들이 잠을 자지 않고 성을 지켜도 모두 헛된 일이 되고 만다는 성경 말씀이 맞지 않습니까?
우리의 삶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인간의 노력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은혜 (grace)’라는 말은 ‘unmerited favor (그럴 만한 공을 세운 것이 없는 데도 불구하고 주어진 호의)’ ‘undeserved favor (그럴 만한 자격이 없는 데도 불구하고 주어진 호의)’라는 뜻입니다. 저는 많은 청년들에게서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 “목사님, 제가 보스턴으로 유학 오게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제가 그럴 만한 자격이 없었거든요. 제가 이런 좋은 학교에서 공부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목사님, 전 정말 학위를 못 받는 줄 알았습니다. 제가 쓴 논문도 잘 되지 않았고, 너무 문제가 많았거든요. 정말 하나님의 은혜로 졸업했습니다.”
저 자신도 유학생활을 했습니다만, 유학생활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기 딱 좋은 생활입니다. 나보다 더 똑똑하고, 나보다 더 훌륭한 사람들과 경쟁을 하면서, 좌절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실패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몰래 혼자 울어보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 연약함과 아픔을 겪으면서 졸업을 하고 여기까지 왔거든요. 난 단순히 운이 좋았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운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그 찬양 가사에 나오지 않습니까?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고요.
성경에 그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내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않아서 나는 다른 사도들보다 더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일 마저도 내가 한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한 것이었습니다.” (고전 15:10) 이 말씀이 Contemporary English Vers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But God treated me with undeserved grace! He made me what I am, and his grace wasn't wasted. I worked much harder than any of the other apostles, although it was really God's grace at work and not me.”
존 파이퍼 (John Piper) 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The essence of the Christian life is learning to fight for joy in a way that does not replace grace. We can fight to walk in the paths where he has promised his blessings (크리스천의 삶의 진수는 하나님의 은혜를 다른 것으로 대체하지 않는 방식 안에서 기쁨을 위해 싸우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축복을 약속하신 길로 걷기 위해 싸워야 한다).” 간단히 말하면, 크리스천의 삶에는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가치가 있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절대로 이 ‘하나님의 은혜’를 다른 것으로 replace (대체)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설 자리가 없습니다. 특히 미국같은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는 자기가 일한만큼 대가를 받는다는 원리가 작용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너도 나도 다투어서 ‘스펙 (specification)’을 쌓으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남보다 더 자격을 갖추고, 남이 하지 않은 경험을 쌓게 되면 그만큼 대우를 더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이 세상 속에 작용하고 있는 원리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그렇지 않거든요? 그럴 만한 일을 한 것이 없고, 그럴 만한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를 다른 것으로 대체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크리스천 중에도 ‘하나님의 은혜’를 가볍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사람들입니다. 주일날 예배 드린다고 교회에 가서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그 시간에 밀린 과제를 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은 절대로 그것을 다른 것으로 대체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이런 사람은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절대로 교만해지지 않습니다.
제가 우연히 시편 말씀을 읽다가 시편 65:11 말씀을 보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 말씀이 너무 좋고 은혜가 되어서 제 책상 위의 컴퓨터 바탕화면에 이 말씀을 써 놓았습니다. 컴퓨터를 켜면 항상 이 말씀이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그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 궁금하시지요? “주의 은택으로 한 해를 관 씌우시니, 주의 길에는 기름 방울이 떨어지며” (개역개정) “주께서 그 선하심으로 한 해에 면류관을 씌우시니, 주의 길에 기름이 뚝뚝 떨어집니다.” (우리 말 성경) “You crown the year with Your goodness; Your ways overflow with plenty.” (Holman Christian Standard Bible) 올해 2020년을 하나님께서 그의 선하심으로 관을 씌우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길에 복이 차고 넘치게 하셨습니다. 주님의 길에 기름이 뚝뚝 떨어집니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합니까? 우리는 나의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기름이 뚝뚝 떨어지는 주님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좀 힘들더라도, 약간의 희생이 있더라도 주님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신상우 씨가 그랬습니다. 캐나다로 이민 간 그에게 아무 것도 되는 일이 없었다고요. 그래서 그는 좌절했고 방황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때도 하나님은 그를 위해서 일하고 계셨습니다. 작사자, 작곡자들을 한 사람, 한 사람 그의 옆으로 모이게 하셨습니다. 고형원, 최덕신, 조은아, 박종호, 송명희, 송정미, 소프라노 김영미까지 그와 교제를 나누게 하셨습니다. 이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그 당시 한국의 CCM을 대표하는 뮤지션들입니다. 그는 잘 몰랐지만, 그가 좌절하고 방황했던 시간에도 하나님은 일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곡이 그렇게 이 세상이 나오지 않았습니까?
이것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아마도 하나님은 여러분들에게도 똑 같은 방식으로 일하실 것입니다. 힘든 시간도 있고, 우리 뜻대로 안 되는 일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 때 여러분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My grace is sufficient for you) (고린도후서 12:9)”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놓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1/19/2020 | 새해에는 이렇게 믿자 3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Walking With God
창세기 6:5-10
새해 들어 세 번째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첫 주에는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설교를 했고, 지난 주에는 ‘크리스천 아이덴티티’에 대한 설교를 했습니다. 오늘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에 대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담임 목사로서 한 해 동안 여러분들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으면 하는 기대와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동행(同行)’은 같이 길을 간다는 뜻입니다. 단순히 같이 갈 뿐만 아니라 같은 방향으로 길을 가는 것입니다. ‘산티아고 (Santiago)’를 갔다 온 선배 목사님의 말을 들어 보았습니다. ‘산티아고’는 스페인 북부 서쪽 끝에 있는 도시입니다. 9세기에 그곳에서 예수님의 제자 야고보의 유골(遺骨)이 발견되면서부터 그곳을 순례하는 사람들이 생겼다고 합니다. 총 4개의 ‘산티아고로 가는 길 (Camino de Santiago)’이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프랑스 길’은 길이가 800km 정도 된다고 합니다. 이 길을 모델로 해서 제주도에 ‘올레길’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해마다 10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이 길을 걷는다고 합니다. 바쁜 일상생활을 살던 사람들이 조용히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기 위해서 이 길을 걷는 것입니다. 그 선배 이야기를 들어 보니까 그 길이 무척 아름다워서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길 가는 중에 세계 각국에서 온 사람들을 만나는 즐거움도 상당하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모두 같은 목적지로 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말이 많이 필요 없고, 눈 빛 하나만으로도 의사 소통이 된다고 합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두 사람이 뜻이 같지 않은데 어찌 둘이 같이 갈 수 있겠는가 (Can two people walk together without agreeing on the direction)?” (아모스 3:3) 간단한 말씀이지만, ‘동행의 삶’이 어떤 것인지 많은 영감을 주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좀 더 구체적으로 ‘동행하는 삶’에 대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째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언제나 해피 엔딩으로 끝이 납니다. 비록 삶의 과정에서는 어렵고 힘든 일들이 있을 지 몰라도, 그 결과는 언제나 해피 엔딩입니다.
구약 성경에 요셉 (Joseph)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요셉의 삶은 한마디로 ‘형통한 삶 (successful life)’이었습니다.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The LORD was with Joseph, so he succeeded in everything he did)” (창세기 39:2) 심지어 요셉은 감옥에 갇혀 있을 때도 형통했습니다. “요셉은 감옥에서 갇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요셉과 함께 계셨으며, 요셉에게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그래서 요셉을 간수장의 마음에 들게 하셨습니다. 간수장은 요셉에게 감옥에 있는 모든 죄수를 맡겼습니다. 요셉은 감옥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을 맡았습니다. 간수장은 요셉이 하는 일에 조금도 간섭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요셉이 무슨 일을 하든 성공하게 만드셨습니다.” (창세기 39: 20-23) 성경을 생각하면서 읽는 사람이라면 이 말씀을 그냥 읽지 않을 것입니다. ‘successful life (성공적인 삶)’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이 같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이 ‘성공적인 삶’의 이유가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이 성공적인 삶에 필수적인 조건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왜 요셉과 함께 하셨는지 그 이유가 궁금하지 않습니까? 그 때 요셉은 어린 나이였습니다. 18살, 혹은 19살 정도되지 않았을까요? 요셉이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이집트로 팔려 온 이유는 아주 간단했습니다. 요셉이 아버지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 야곱은 막내 아들 요셉을 늘 끼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 말씀의 행간(行間)을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요셉을 끼고 살면서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요? 혹시 이런 얘기를 하지 않았을까요? “얘야, 하나님의 눈 밖에 나면 안 된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해!” 아버지 야곱이 이런 말을 해 주지 않았을까요? 야곱 자신이 형을 속이고 하나님의 눈 밖에 나는 바람에 힘든 고난의 시간들을 보내야 했거든요. 저는 이것이 요셉이 형통한 삶을 살게 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 야곱의 교육 덕분에 요셉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라보고 계시는데 내가 어찌 그런 죄를 (하나님의 눈 밖에 나는 일을) 지을 수 있겠습니까?” (창세기 39:9) 간단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눈 밖에 나는 일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고, 그 결과는 언제나 해피 엔딩입니다.
둘째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사람을 겸손하게 만듭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말씀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겸손’은 크리스천의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미덕(美德)입니다. 야고보서 말씀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을 물리치시고, 겸손한 사람을 가까이 하신다.” (4:6) 그러면, 어떤 사람이 겸손한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눈 밖에 나지 않게 살겠다는 사람이 겸손한 사람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되고, 내가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먼저 생각하게 되고,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노아 이야기를 좀 해 볼까요? “하지만 노아는 여호와의 마음에 들었습니다. 노아의 자손은 이러합니다. 노아는 그가 살던 시대에 의롭고 흠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과 함께 살았습니다 (But Noah found favor in the eyes of the LORD. This is the account of Noah. Noah was a righteous man, blameless among the people of his time, and he walked with God).” (창세기 6:8-9) NLT 성경에 보면 노아는 ‘the only blameless person living on earth at the time (그 때 살았던 흠이 없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드리는 질문입니다. “노아가 이렇게 의롭고, 흠이 없고, 하나님과 동행했던 사람이었는데, 그래서 뭐가 어떻게 되었다는 것입니까?” 우리가 주목해서 봐야 할 것은 노아가 모든 사람이 비웃는데도 불구하고 ‘방주(方舟, an ark)’를 만들었다는 사실입니다. 마음이 교만한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겸손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했던 노아는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께서 지시한대로 ‘방주’를 만든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셋째로, 하나님과 동행하면 삶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아모스 말씀이 그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Can two people walk together without agreeing on the direction?” (아모스 3:3) 이 말씀은 삶의 목적과 방향에 대한 말씀입니다. 두 사람이 목적지가 같지 않으면 헤어져야 합니다. 목적지가 같아야 끝까지 같은 방향으로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끝까지 하나님과 같은 방향을 바라 보면서 살 수 있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삶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Life is not a speed but a direction)!” 수영이라는 한국 작가가 이런 제목의 책을 썼습니다. 또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Emanuel Pastreich)라는 사람도 같은 제목의 책을 썼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속도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속도가 빨라도 삶의 방향이 잘못 되었으면 삶 전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수영이라는 작가가 쓴 책에 나오는 말입니다. “삶의 방향이 분명하다면 온 삶이 다 분명해진다. 하지만, 삶의 방향이 분명하지 않다면 삶은 늘 문제투성이가 되고 만다. 목표와 방향이 분명하다면 힘들 때 잠시 멈춰 쉬었다 가도 좋은 것이 인생이다.”
어떤 사람이 몸이 이상해서 병원에 갔더니 암이라는 진단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길어야 여섯 달 밖에 살지 못한다는 절망적인 말을 들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이 사람은 처음에는 무척 놀랍고 당황스러웠지만 침착하게 자신의 죽음을 받아 들였습니다. 그리고 자기 삶을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만나고 싶은 사람들을 만나고, 만나서 해결해야 할 문제를 해결하고, 자기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사람들을 찾아가서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리고, 재산을 정리해서 모두 자선 기관에 기부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여섯 달이 지났는데도 몸에 별 다른 증상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상하다 싶어서 다른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해 보았더니, 암이 아니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주변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죽을 줄 알고 재산을 다 기부해 버렸는데, 그 돈 아까워서 어떻게 하느냐고 주변 사람들이 모두 한마디씩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 사람은 주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저는 지난 6개월 동안 시한부 인생으로 살았던 때처럼 인생을 진지하고 보람 있게 산 적이 없었습니다.” 6개월 시한부 인생을 살게 된다는 의사의 진단이 이 사람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삶의 내용이 바뀌고, 삶의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왜 우리가 건강할 때는 이런 생각을 못할까요? 건강할 때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마지막으로 함께 나누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왜 사람들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어렵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이런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삶의 가치들을 인정하지 않고,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다른 어떤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궁금합니다.
또 하나 이유는 바쁘다는 것입니다. 바빠 죽겠는데 한가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그런 것을 생각할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영성학자 유진 피터슨(Eugene Peterson)이 ‘The Contemplative Pastor: Returning to the Art of Spiritual Direction (묵상하는 목회자)’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들이 바쁘다는 것은 헌신의 증상이 아니라 배신의 증상이다 (The word busy is the symptom not of commitment but of betrayal).” 바쁜 목사들은 하나님의 일에 집중할 수 없고, 말씀을 묵상할 수 없고, 기도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그가 이런 말을 합니다. “I can be active and pray; I can work and pray; but I cannot be busy and pray. I cannot be inwardly rushed, distracted, or dispersed. In order to pray I have to be paying more attention to God than to what people are saying to me (나는 활동적이면서 기도할 수 있다. 나는 일하면서 기도할 수 있다. 하지만, 바쁘면서 기도할 수는 없다. 나의 내면이 쫓기고, 산만하고, 분산되어 있을 수는 없다.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에게 집중하는 것보다 훨씬 더 집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위의 말씀들은 유진 피터슨이 목사들에 대하여 말한 것이지만, 사실은 모든 크리스천들에게 한 말입니다. 바빠서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 시간을 낼 수 없다는 것은 헌신의 증상이 아니라 크리스천으로서 살기를 포기하는 하나님께 대한 배신의 증상입니다. 맞습니까? 새해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핑계대지 말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유명한 설교자 중에 마틴 로이드 존스 (Martyn Lloyd-Jones, 1899-1981)가 있습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설교자라고 칭송을 받는 캠벨 모르간 (George Campbell Morgan, 1863-1945)의 뒤를 이어 웨스트민스터교회 (Westminster Chapel)에서 30년을 목회하신 분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설교 중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라는 제목의 설교가 있습니다. 그 설교의 본문 말씀이 시편 73:27-28입니다. “Those who desert him will perish, for you de-stroy those who abandon you. But as for me, how good it is to be near God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망할 것입니다. 주를 떠난 사람들을 주께서 멸망 시키실 것입니다. 하지만 나에게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정말 행복한 일입니다)!” 이 말씀이 여러분의 고백이 되시기 바랍니다.
1/12/2020 | 새해에는 이렇게 믿자 2
크리스천 아이덴티티 The Christian Identity
베드로전서 2:9-10
2020년 새해 두 번째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여전히 우리 마음 속에는 기대하고 설레는 마음과 아직 한번도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두려움이 공존(共存)하고 있습니다. 저는 앞으로 몇 주 동안 “새해에는 이렇게 믿자”라는 시리즈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지난 주, 새해 첫 주에는 ‘새로운 피조물’에 대한 설교를 했습니다. 오늘은 ‘크리스천 아이덴티티’에 대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사도 베드로가 신앙의 박해를 피해 지중해 연안으로 피신해 사는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그 시기는 일반적으로 A.D. 63-64년경, 네로 (Nero) 황제 때라고 보고 있습니다. 로마에 화재가 난 것은 A.D. 64년 일이지요? 네로는 화재의 책임을 크리스천들에게 돌렸습니다. 하지만, 학자들에 따라서는 베드로전서를 쓴 연대를 20-30년 더 늦게, 기독교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있었던 도미티안 (Domitian, A.D. 92-96) 황제 때나, 트라얀 (Trajan, A.D. 98-117) 황제 때로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민족이며 왕의 제사장입니다. 또 거룩한 나라이며, 하나님께서 홀로 다스리는 나라의 백성입니다.” (9절) 크리스천들에게 아주 익숙한 말씀입니다. 개역성경에 나오는 구절이 더 익숙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But you are not like that, for you are a chosen people. You are royal priests, a holy nation, God's very own possession).....” ‘but you are not like that (그러나 여러분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구절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 말씀 전에 믿음을 잘 지키지 않고, 그리스도를 배반하고, 크리스천으로서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사는 사람들에 대한 말씀이 있었음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 말씀을 좋아하면서도 이 말씀의 의미를 잘 모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이 나오게 된 배경을 잘 모릅니다. 몇 가지 이 말씀에 대한 중요한 사실들을 짚어 보려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이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하나님의 백성들의 정체성 (identity)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베드로전서 2장에 처음으로 기록된 말씀이 아닙니다. 이미 구약 출애굽기 19:4-6에 이 말씀이 나와 있습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이 말씀의 방점은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이 말씀에 있습니다. 모세가 자기 백성들에게 이 말씀을 전했을 때는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주시기 바로 직전이었습니다.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주신 ‘하나님의 법’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함무라비 법전 (Code of Hammurabi)’이 있습니다. ‘함무라비’는 제 6대 바빌로니아 제국의 왕입니다. ‘함무라비 법전’이 만들어 진 것이 B.C. 1754년입니다. 우리나라 역사로 하면 고조선 때입니다. 높이 2.25m의 돌 비석에 ‘쐐기문자 (cuneiform)’로 쓰여 있고, 그 내용은 주로 ‘계약 (contracts)’에 대한 것이라고 합니다. ‘함무라비 법전’과 비교하면, ‘십계명’은 제정 연대가 그보다 2-300년 앞서 있을 뿐만 아니라 내용으로 보더라도 훨씬 발전된 내용들이 들어 있습니다. ‘십계명’ 자체만 보면 간단한 법처럼 보이지만, 여기서 파생된 시행 규칙까지 더하면 실로 엄청나게 발전된 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온 세상에서 자기들만 유일하게 하나님의 법, 율법을 가진 민족이라는 자만심에 빠져 살았습니다. 하지만, 법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 자체로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바로 그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법을 줄 터인데, 이 법을 잘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잘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는 일과 하나님의 백성들의 정체성과는 아무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바로 출애굽기에 나오는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면서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나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실천하면서 살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들이 되고, 귀한 제사장의 직분을 가진 사람들이 되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사람들이 되고, 하나님께서 소유하신 사람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은 우리가 이런 사람들이 되는 데에 조건이 붙어 있다는 사실을 쉽게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 조건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비즈니스 현장에서, 연구실에서, 실험실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어렵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손해를 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시지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면 거짓말 해서는 안 되고, 남을 속여서도 안 되고, 정직해야 합니다. 그렇게 살면 결국 손해를 본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손해 본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너무 인생을 짧게 보는 사람입니다. 크리스천들은 인생을 길게 보는 사람들 아닌가요? 우리의 삶이 지금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삶으로 연결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아닌가요? 이런 사람들은 절대로 작은 유익을 얻기 위해서 양심을 팔 수 없고, 작은 이익을 얻기 위해서 정직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지금의 삶이 영원한 삶을 준비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많은 것을 손해 본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보상 (rewards)’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는 그가 계시다는 것과 그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진정으로 믿어야 합니다 (And it is impossible to please God without faith. Anyone who wants to come to him must believe that God exists and that he rewards those who sincerely seek him).” (히브리서 11:6)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 하나님의 뜻대로 실천하면서 사는 사람은 당장에는 손해를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손해는 하나님께서 갚아 주시는 ‘보상 (rewards)’에 비하면 정말 아무 것도 아닙니다.
또,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손해를 본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크리스천의 ‘정체성 (identity)’을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정체성’이라는 말이 영어로 ‘identity’라는 말이잖아요? 이 말에서 ‘신분증 (identification)’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미국에서 ‘신분증’은 ‘운전면허증’을 말합니다. ID 보여 달라고 하면 ‘운전면허증’을 보여 주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 손해 본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ID가 없는 크리스천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살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택한 사람들 (God’s chosen people)’이라는 ID가 생깁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볼 때 “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을 보니까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이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때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들 (royal priests)’이라는 ID가 생깁니다. ‘왕 같은 제사장들’이라는 말씀의 방점은 ‘제사장’이라는 말에 찍혀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 ‘왕 같은’이라는 말에 찍혀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제사장’이라는 말에 찍혀 있습니다. 제사장은 제사장인데 그 제사장의 직분이 너무 고귀하기 때문에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제사장 (priests)’이라는 말은 라틴어 ‘폰티펙스 (Pontifex)’라는 말에서 왔습니다. 영어로는 ‘브리지 빌더 (bridge builder)’라는 뜻입니다. 우리말로 ‘다리를 놓는 사람’이라는 뜻이지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우리의 삶이 선하게 살게 됩니다. 절대로 악하게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살면 삶이 아름다워집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호감 (favor)을 줍니다. 자연히 주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갖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사람들은 나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왕 같은 제사장들이 된다’는 성경 말씀의 뜻입니다.
그 다음, ‘거룩한 나라’라는 말이 나옵니다. ‘거룩한 나라’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를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다스리시는 ‘거룩한 나라 (a holy nation)’가 된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을 생각만이라도 해 보세요. 내가 나의 삶의 주인이 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나를 지배하고 통치하는 사람이 됩니다. 왜 우리가 이런 삶을 살 수 있는 길을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는지 그것이 안타깝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살면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가 됩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는 “You are God's very own possession”이라고 했습니다. NIV 성경에는 “You are a people belonging to God”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살면 ‘하나님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삶의 주인이 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은 내가 나의 삶의 주인이 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나라는 존재를 얼마나 믿을 수 있습니까? 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불안한 존재입니까? 그리고, 얼마나 실수투성이입니까? 나의 삶을 내가 알아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불안합니까? ‘결정장애’라는 것이 있습니다. 무슨 일을 쉽게 결정하지 못합니다. 어느 레스토랑을 갈지, 무엇을 먹어야 할지, 간단한 것도 쉽게 결정하지 못하는 증세를 ‘결정장애’라고 합니다. 간단한 일도 쉽게 결정하지 못하는 우리가 우리의 삶의 중요한 문제들을 우리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하여 내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끔찍한 일입니다. 다윗은 탁월한 ‘사미스트 (psalmist)’였습니다. 그는 그가 쓴 시편에서 내가 내 삶의 주인으로 살 때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의 목자가 되실 때 아무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시편 23:1).
베드로가 쓴 편지에 나오는 오늘 본문 말씀은 편안하게, 좋은 환경 속에서, 걱정 없이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준 것이 아닙니다. 매일 매일의 삶이 불안하고, 내일을 기약할 수 없고, 경제적으로 열악한 환경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준 말씀입니다. 그들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 손해를 감수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애썼습니다. 그들은 그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손해를 감수하고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들로, 왕 같은 제사장으로, 거룩한 나라로, 하나님의 소유된 사람들로 살려고 애썼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로마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정복했습니다.
2020년 새해를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하겠습니까? 특히 크리스천으로서 우리는 어떤 마음음을 가지고 한 해를 살아야 하겠습니까? 크리스천으로서 ‘정체성 (identity)’를 가지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비록 손해를 좀 보더라도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손해를 본다”는 말은 근거 없는 ‘신화(神話, myth)’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럴 것이라는 생각에 빠져 살고 있습니다. 성실하고 정직하게, 그 말은 근거 없는 ‘신화’에 불과하다는 것을 여러분의 삶을 통해서 보여 주십시오. 여러분 정체성을 통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한 해가 되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본회퍼 (Bonhoeffer, 1906-1945, 독일)가 쓴 ‘주님의 선하신 능력에 싸여 (Von guten Mächten)’ 이 노래를 같이 부르겠습니다. 이 시는 감옥에 갇혀 있던 본회퍼가 사랑하는 애인 마리아에게 보낸 편지 마지막에 들어 있던 시입니다. 아마도 이 편지가 그녀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였을 것입니다. 이 시에 Siegfried Fietz라는 사람이 곡을 붙였습니다. 한 해를 시작하는 우리에게 많은 용기와 위로와 격려를 주는 노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