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1/2019 |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I) To Live As A Christian

요한복음 15:5-8

지난 주는 비교적 선선한 날씨여서 가을이 성큼 다가온 느낌이 듭니다. 보헤미언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 (Rainer Maria Rilke, 1875-1926)의 ‘가을날’이란 시가 생각납니다.

주여, 때가 왔습니다. 지난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 위에 얹으시고
들녘엔 바람을 풀어 놓아 주소서.

마지막 과일들이 무르익도록 명해 주소서,
이틀만 더 남국의 날을 베푸시어
과일들의 완성을 재촉하시고, 진한 포도주에는
마지막 단맛이 스미게 하소서.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더 이상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혼자인 사람은 그렇게 오래 남아
깨어서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이며
낙엽이 흩날리는 날에는 가로수들 사이로
이리저리 불안스레 헤맬 것입니다.

이해하기에 난해(難解)한 시가 아니어서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릴케의 이 시를 좋아합니다. 한국의 김재혁 시인이 이 시에 대하여 이런 평을 했습니다. “시인은 여름의 완성에 이어 가을을 ‘진한 포도주의 단 맛’으로 완성해 주시기를 하나님께 기도한다. 여름의 완성은 ‘이틀만 더 남국의 날을 베푸시어’라는 표현 속에 들어 있다. 동유럽과 북유럽의 기후에 익숙한 시인에게 남프랑스 같은 남국의 햇살은 그 의미가 각별하다. 하루만 그 햇살 속에 있어 보아도 시인이 왜 ‘이틀만 더 남국의 날’을 원하는지 알 수 있다. 시인은 언어의 포도원을 가꾸는 주인이다. 시인은 외적으로는 가을의 풍요로움을 말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스스로에게 시인으로서의 사명을 다독거리는 중이다. 남국의 햇살을 받아 자신의 언어가 무르익기를 바라는 것이다.”

오늘 읽은 요한복음 15장 말씀에 사람들은 ‘포도나무의 비유’라는 제목을 붙입니다. ‘비유(比喩)’라는 말은 그리스 말로 ‘파라볼레 (parabole)’라는 말입니다. ‘나란히 놓는다’는 뜻입니다. 자동차를 파킹할 때 ‘패러렐 파킹 (parallel parking)’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도로 턱과 ‘나란히’ 차를 파킹하는 것입니다. 운전 경험이 많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정말 어려운 고난도의 기술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마태가 그의 복음서에 “예수님께서 이 모든 것들을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해 주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Jesus did not say anything to them without using a parable, 마태복음 13:34)”라고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은 ‘비유’의 천재였습니다. 이해하기 힘든 영적인 진리를 일상생활 속에서 쉽게 경험할 수 있는 일들과 ‘나란히’ 놓음으로써 누구든지 쉽게 이해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요? 많은 열매를 맺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들이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여기서 두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어떻게 하면 열매를 맺을 수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크리스천으로서 열매를 맺는다는 말을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말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는 원리를 말씀하심으로써, 우리가 어떻게 하면 열매를 맺을 수 있는지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천으로서 열매를 맺는다는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포도나무가 어떻게 열매를 맺는지 그 원리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는 원리는 어렵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몇가지로 정리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첫째로, 정원사의 ‘돌봄 (care)’이 있어야 합니다. 정원사가 돌보지 않고 그냥 내버려둬도 열매를 맺을 수 있지만, 열매가 작고, 맛이 없고, 볼품이 없습니다. 정원사가 거름을 주고, 정원사가 부지런히 불필요한 가지를 잘라줘야 합니다.

요즘 메모리얼 드라이브를 운전하면 얼마나 경치가 좋은 지 모릅니다. 다운타운 쪽으로 드라이브 하면 찰스 강 폭이 넓어지면서 요트들이 떠 있는 것이 환상적입니다.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이 있을까요? 그리고 반대로, 메모리얼 드라이브에서 하바드 쪽으로 드라이브를 하면 양쪽의 아름드리 가로수들이 서로 맞닿아서 아치 모양을 만드는 멋진 풍경이 나옵니다. 그런 풍경이 더 길게 계속되지 않는 것이 아쉬울 정도입니다. 어떻게 이런 멋진 풍경을 만들 수 있을까요? 저절로 나무들이 자라다 보니까 그렇게 되었을까요? 아닙니다. 전문가들이 꾸준하게 불필요한 가지는 잘라주고 필요한 가지만 남겨 두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충분한 수분과 영양분을 공급 받아야 합니다. 포도나무 가지들이 뿌리로부터 ‘수액 (sap)’을 공급 받아야 합니다. 물론 충분한 햇빛도 있어야 합니다. 이런 조건들이 갖추어 질 때 탐스러운 열매가 열립니다. 이런 조건이 갖추어 져도 금방 열매가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성급한 마음을 갖지 말고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릴케도 그런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마지막 과일들이 무르익도록 명해주소서. 이틀만 더 남국의 날을 베푸시어 과일들의 완성을 재촉하시고, 진한 포도주에는 마지막 단맛이 스미게 하소서.” 릴케가 그렇게까지 깊이 생각하고 한 말인지는 모르지만, 과일을 무르익도록 명령하는 분이 계십니다. 이 말은 나무 스스로의 힘으로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열매를 맺게 하시는 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정원사의 ‘돌봄’이 있어야 하고,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여러 조건들이 충족(充足)되어야 그 때 비로소 열매가 열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크리스천들은 어떻게 해야 열매를 맺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는 원리와 우리가 열매를 맺는 원리를 나란히 놓고 우리 스스로 그 원리를 생각하고, 발견하도록 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나오지 않지만,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비유 말씀을 하신 후에는 거의 예외 없이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Anyone with ears to hear should listen and understand, 마태복음 13: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포도나무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그냥 내버려 두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포도나무처럼 우리도 ‘돌봄’을 받아야 합니다. 전문가의 손으로 포도나무의 불필요한 가지들을 잘라주듯이, 우리의 삶에 불필요한 것들을 모두 제거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빌립보서 3장에 나오는 바울의 고백을 좋아합니다. “그 때는 이 모든 것이 내게 너무나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그 모든 것이 아무 쓸모 없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나는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모든 것이 쓰레기처럼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을 이제 압니다. 이로써 나는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습니다.” (3:7-8)

미국이 자랑하는 사상가 중에 에머슨 (Ralph Waldo Emerson, 1803-1882, 미국, 보스턴)이 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추구했던 사상은 ‘초월주의 (transcendentalism)’라는 한마디로 말 할 수 있습니다. ‘초월주의’는 1830년대부터 1840년대에 본격화된 산업혁명과 근대국가로 발돋움하는 미국의 전환기에 나온 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연과 인간 (nature and humanity) 속에 하나님의 신성 (divinity)이 드러나 있음으로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에머슨은 친구 데이비드 소로우 (Henry David Thoreau, 1817-1862, 미국)에게 콩코드 (Concord)에 있는 ‘월든 폰드 (Walden Pond)’에 작은 오두막을 짓고 거기서 2년 동안 살면서 ‘삶의 단순성과 독립성, 자기 반성 (a life of simplicity, independence, and self-reflection)’을 실험하도록 했습니다. 소로우가 2년에 걸쳐 자연 속에서 얻은 경험들은 ‘월든 (Walden)’이라는 책으로 나와서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습니다.

에머슨의 사상에서뿐만 아니라 크리스천의 삶에 있어서도 ‘삶의 단순성 (a life of simplicity)’이라는 말은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이와 반대되는 개념은 ‘삶의 복잡성 (a life of com-plexity)’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필요 없는 것들을 다 제거하고, 정말 필요한 것들만 소유하게 되면 삶이 단순해 집니다. 삶이 단순해 지면, 집중력이 생깁니다. 그만큼 생산성이 높아집니다. 한두가지 꼭 필요한 일에 삶의 에너지를 집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르다 (Martha)에게 주신 말씀도 ‘삶의 단순성’의 중요성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르다야! 너는 너무 많은 일 때문에 걱정하며 안절부절 하는구나. 정말 필요한 일은 오직 한 가지뿐이다 (Martha, you are worried and upset about many things, but only one thing is needed).” (누가복음 10:41-42) 열매 맺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포도나무의 불필요한 것들을 잘라주듯이, 우리의 삶이 보다 단순해 져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참 포도나무 되시는 예수님과 깊이 교제해야 합니다. 포도나무가 햇빛을 받고, 뿌리에서 양분을 빨라 올리듯이, 우리는 예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어야 합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 가운데 살아 계시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여러분의 삶이 사랑 안에서 강해지고, 또 깊게 뿌리내려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크신 사랑을 깨닫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분의 사랑이 얼마나 한없고 넓으며, 얼마나 깊고도 높은지 진정으로 깨닫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Then Christ will make his home in your hearts as you trust in him. Your roots will grow down into God's love and keep you strong. And may you have the power to understand, as all God's people should, how wide, how long, how high, and how deep his love is).” (에베소서 3:17-18)

예수님은 열매 맺는 삶의 비결을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보십시오. “사람이 내 안에 있고 내가 그 안에 있으면, 그는 열매를 많이 맺는다. 그러나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으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이루어질 것이다 (Those who remain in me, and I in them, will produce much fruit. For apart from me you can do nothing.....But if you remain in me and my words remain in you, you may ask for anything you want, and it will be granted).” (5, 7절)

열매 맺는 삶은 우리에게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열매 맺는 삶이 옵션 (option)인 줄 아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옵션이 아니라 반드시 열매를 맺어야 하는 필수 사항 (requirement)입니다. 공부할 때 옵션 과목이 있습니다. 이런 과목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됩니다. 하지만, 졸업을 하기 위해서 필수과목들은 반드시 해야 합니다.

크리스천으로서 열매를 맺는 것은 필수 사항입니다. 보세요.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어 내 제자인 것을 나타내면 이것으로 내 아버지께서는 영광을 받으신다 (When you produce much fruit, you are my true disciples. This brings great glory to my Father).” (8절) 열매를 맺어도 많이 맺어야 합니다. 제자로서 열매를 맺는 것은 반드시 해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르신 것은 세상에 나가서 좋은 열매를 많이 맺으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열매’는 ‘선한 일’ ‘착한 일’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참된 제자 (true or genuine disciples)’가 되기 원하는 사람은 이 말씀을 심각하게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 제가 어떤 열매를 맺어야 합니까? 나의 전문 영역에서, 나의 일터에서, 직장에서, 비즈니스 현장에서, 학교에서, 친구들 사이에서, 어떤 열매를 맺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까?” 이렇게 묻고 기도하십시오. 제발 열매 맺지 못하는 크리스천으로 평생을 살지 않기를 바랍니다. 지금 새벽 기도에서 누가복음 말씀을 읽고 있는데, 2:52 말씀이 감동적입니다. “Jesus grew in wisdom and in stature and in favor with God and all the people.” 열매 맺는 크리스천은 교회뿐만 아니라 세상에서도 사람들에게 칭찬을 듣습니다.


8/4/2019 | 성령강림절 후 여덟째 주일

네가 로마에서 나를 증거해야 하리라 You Must Testify About Me In Rome

사도행전 26:24-32

기독교 역사에서 볼 때 가장 뛰어난 ‘변증론자’는 ‘저스틴 (Justin Martyr, AD 100-165)’이라고 말합니다. 젊었을 때 ‘저스틴’은 플라톤 (Plato, BC 427-347)의 철학에 깊이 매료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저스틴’은 에베소 근처에 있는 해변에서 한 유대인 노인을 만나게 됩니다. 이 노인은 ‘저스틴’이 대답할 수 없는 많은 질문을 했고, ‘저스틴’은 이 질문에 나름대로 대답을 했습니다. ‘저스틴’의 말을 들은 이 노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보기에 그대는 행함과 사랑이 없는 말쟁이에 지나지 않는 것 같소. 그대는 선의 실천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영리한 논쟁가, 교묘한 궤변론자가 되려는 것 같소. 성경에 나오는 히브리 예언자들을 연구해 보시오. 하지만,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지혜와 계시를 주시기 전에는 이것들을 깨달을 수 없을 터이니 그대 앞에 광명의 문들이 열리게 해 달라고 기도 하시오.” 저스틴의 눈에 이 노인이야 말로 참된 철학을 아는 것 같이 보였습니다. 그날 이후 ‘저스틴’은 구약 성경을 읽기 시작했고,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을 성취한 구원자시요, 진리라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는 시편 22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발견한 최초의 인물이었고, 이사야 52장과 53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발견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플라톤의 철학에 깊이 빠져 있었지만, 그의 철학적인 지식은 나중에 복음을 변증하는데 요긴하게 사용되었습니다. 그는 당시의 크리스천들이 비난과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확신하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 “저런 크리스천들이 죄악과 쾌락 속에 빠져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라고 확신하면서, 기독교는 플라톤의 철학을 넘어섰다고 확신했다고 합니다.

저스틴의 기독교 변증은 그의 저서 ‘The First Apology of Justin Martyr (순교자 저스틴의 첫 번째 변증)’ ‘The Second Apology of Justin Martyr (순교자 저스틴의 두 번째 변증)’이라는 두 권의 책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는 로마의 황제들을 대상으로 기독교를 변호했습니다. 그는 안토니누스 피우스 (Antoninus Pius, AD 86-161) 황제 때 로마에 학교를 세우고 제자들에게 기독교 변증론을 가르쳤고, 기독교를 공격하는 사상가들과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Marcus Aurelius, AD 121-180)’ 황제 때 다른 신들에게 숭배하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참형을 당하게 됩니다. 이것이 그를 ‘순교자 저스틴’이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사람들은 ‘저스틴’을 1세기의 기독교 변증론자라고 말하는데, ‘저스틴’ 이전에 살았던 사도 바울 역시 탁월한 기독교 변증론자였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붙여 줄 수 있는 가장 적합한 말은 ‘복음의 변증론자 (an apologist for the gospel)’라는 말입니다. 그는 아테네에서 철학자들과 기독교의 진리에 대하여 토론했고 (사도행전 17:22-31), 부활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부활에 대하여 설명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전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줄 수 없다.” 저는 이 말이 바울에게 꼭 맞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 변증론자들은 성경의 진리를 반대하는 사상이나 다른 이단 사상이 교회로 침투해 들어오는 것을 막아야 하기 때문에, 기독교의 진리를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상대방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기독교를 변호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 바울만큼 기독교의 교리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는 유대교에 정통했고, 그 시대의 철학에도 정통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그리스도 예수를 주님으로 믿었으니, 그분 안에서 계속 살아가십시오. 그분 안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그 위에 여러분의 삶을 계획하시길 바랍니다. 가르침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늘 감사한 생활을 하십시오. 헛된 말과 거짓 철학에 속아 잘못된 길로 가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그것들은 모두 사람의 생각에서 비롯되었으며 아무 가치도 없습니다. 결코 그리스도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므로 멀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모든 성품은 이 땅에 계신 그리스도께 완전히 나타난 바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진정으로 완전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분은 모든 지배자와 권세자들의 머리가 되시는 분입니다.” (골로새서 2:6-10) “And now, just as you accepted Christ Jesus as your Lord, you must continue to follow him. Let your roots grow down into him, and let your lives be built on him. Then your faith will grow strong in the truth you were taught, and you will overflow with thankfulness. Don't let anyone capture you with empty philosophies and high-sounding nonsense that come from human thinking and from the spiritual powers of this world, rather than from Christ. For in Christ lives all the fullness of God in a human body. So you also are complete through your union with Christ, who is the head over every ruler and authority.” (Colossians 2:6-10, New Living Translation) 당시에 교회로 침투해 들어오는 스토익 철학 사상 (Stoic philosophy)이나 ‘영지주의 (Gnosticism)’로부터 기독교의 진리를 변호하는, 이 보다 더 완벽한 변증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바울의 탁월한 변증, 하나 더 볼까요?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여러분은 이 세상의 헛된 규칙들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왜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처럼 행동하십니까? 왜 아직도 ‘이것을 붙잡으면 안 된다’, ‘저것은 맛보면 안 된다’, ‘만지지 마라’ 하는 등의 규칙에 얽매여 있는 것입니까? 이런 규칙들은 먹으면 없어지고, 쓰면 사라지고 마는 세상 것들에 대한 인간적인 규칙이요, 가르침일 뿐입니다. 그것을 따르는 사람들이 훌륭해 보일지 모르나, 그것은 다 사람들이 만든 종교적 관습들입니다. 거짓된 겸손으로 자기 몸을 괴롭히기만 할 뿐, 마음속에 파고드는 악한 욕망과 죄를 이겨 내게 할 수는 없습니다.” (골로새서 2:20-23) “You have died with Christ, and he has set you free from the spiritual powers of this world. So why do you keep on following the rules of the world, such as, ‘Don't handle! Don't taste! Don't touch!’? Such rules are mere human teachings about things that dete-riorate as we use them. These rules may seem wise because they require strong devotion, pious self-denial, and severe bodily discipline. But they provide no help in conquering a person's evil desires.” (Colossians 2:20-23, New Living Translation)

“변증론자로서 바울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무엇보다 바울은 체험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어느 자리에서나 자신의 체험을 기꺼이 사람들과 나누었습니다. “나는 유대교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몹시 박해했을 뿐 아니라, 아예 없애 버리려고 했습니다. 나는 나와 나이가 비슷한 다른 유대인들보다 더 열심히 유대교를 믿었고, 그 누구보다도 조상들의 전통을 열심히 지켰습니다.” (갈라디아서 1:13-14) “저는 어느 누구보다도 인간적인 조건을 더욱 많이 갖춘 사람입니다. 나는 태어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나는 베냐민 지파의 자손이며, 히브리인 중에서도 히브리인이며, 율법을 엄격하게 지키는 바리새인입니다. 율법을 지키고 따르는 데 있어서는 그 어느 누구도 허점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나는 완벽한 삶을 살았습니다.” (빌립보서 3:4-6) “나는 대제사장들에게서 권한을 위임 받아 다마스커스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 곳을 향해 가다가 정오쯤 되어 하늘에서 밝은 빛이 저와 제 일행을 둘러 비추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때에 저는 히브리 말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사도행전 26:12-14) 바울이 아그립바 왕 (King Agrippa) 앞에서 했던 변명에 나오는 말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께서는 나를 따로 세우셔서 은혜로 나를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복음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내게 보이셨습니다.” (갈라디아서 1:15-16) 바울에게 있어서 체험은 그를 어떤 고난의 환경 속에서도 굳건하게 지켜주는 버팀목이었습니다.

둘째로, 바울은 매우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이 말은 그의 말에 사람을 설득하는 힘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바울의 변증을 들었던 총독 베스도 (Governor Festus)는 바울이 매우 유식한 사람인 것을 알고 “바울, 그대는 미쳤구나. 그대의 많은 학식이 그대를 미치게 했구나 (Paul, you are insane. Too much study has made you crazy) (사도행전 26:24)!”라고 큰 소리를 질렀다고 합니다. 그리고, 같은 자리에서 바울의 변명을 들었던 아그립바 왕은 “그대는 이 짧은 시간에 나를 설득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Do you think you can persuade me to become a Christian so quickly)?” (사도행전 26:28) 하고 말했다고 합니다. 저는 베스도 총독과 아그립바 왕 앞에서 변증하는 바울의 모습을 그려 보았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흥분하지 않은 차분한 목소리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얼굴은 확신에 찬 얼굴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듣는 사람들은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그의 말에 설득되고 있었을 것입니다.

셋째로, 바울은 변증론자로서 자신의 삶을 사랑했습니다. “나는 예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 곧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다 마칠 수만 있다면, 나의 목숨을 조금도 아깝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But my life is worth nothing to me unless I use it for fin-ishing the work assigned me by the Lord Jesus--the work of telling others the Good News about the wonderful grace of God).” (사도행전 20:24)

이 말씀을 읽으면서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리빙스턴 (David Livingstone, 1813-1873, 영국)입니다.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People talk of the sacrifice I have made in spending so much of my life in Africa. It is emphatically no sacrifice. Say rather it is a privilege (사람들은 내가 아프리카에서 그토록 많은 시간을 보낸 것에 대하여 희생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단호하게 말하지만 이것은 희생이 아닙니다. 특권이라고 말해 주십시오).” 저는 사도 바울 역시 복음의 변증론자로 살았던 자신의 삶에 대하여 리빙스턴과 똑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사도 바울은 1세기의 변증론자였고, 순교자 ‘저스틴’은 2세기의 변증론자였습니다. 우리 시대에도 변증론자들이 있을까요? 예, 많이 있습니다. ‘사이몬 그린리프 (Simon Greenleaf, 1783-1853, 미국)’는 탁월한 그 시대의 기독교 변증론자였습니다. ‘The Testimony of the Evangelists, 1842-1853)’라는 3권의 책을 남겼습니다. ‘C. S. 루이스 (Lewis, 1898-1963, 영국)’ 같은 사람은 보다 최근에 살았던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The Mere Christianity (단순한 기독교), 1952)’라는 책을 남겼습니다. 무신론자였다가 크리스천이 된 배경을 살려 무신론자들에게 기독교는 어떤 종교인지 설명하는 명저(名著)입니다. ‘나니아 연대기 (The Chronicles of Narnia, 1955-1956에 출판된 7개의 시리즈 소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The Screwtape Letters, 1942)’도 기독교를 변증하는 그의 탁월한 책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역시 기독교 변증론자로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잘못된 사상으로부터, 기독교 이단들로부터, 신은 없다고 하면서 기독교의 진리를 조롱하는 무신론자들의 공격으로부터 기독교의 진리를 변증하는 변증론자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2세기에 ‘저스틴’과 동시대에 살았던 ‘켈수스 (Celsus)’라는 그리스 철학자는 기독교를 공격했던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를 부정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했습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부활했다고 하지만, 누가 살아난 것을 보았는가? 미친 여자와 넋이 나간 사람들뿐이었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 ‘켈수스’와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사람들의 주장으로부터 기독교의 진리를 변호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것이 이 시대에 우리가 크리스천으로 부름을 받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성경에 대하여 모르고, 기독교의 진리를 모른다면 우리는 기독교를 변호할 수 없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7/28/2019 | 성령강림절 후 일곱째 주일

하나님의 전략적인 도시 고린도 God’s Strategic City, Corinth

사도행전 18:1-11

바울에게 있어서 ‘아테네 (Athens)’ 선교는 아쉬움이 남는 선교였습니다. ‘아테네’는 여러분이 알다시피 소크라테스 (Socrates, BC 470-399), 플라톤 (Plato, BC 424-348),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eles, BC 384-322) 같은 철학자를 배출한 곳입니다. 이런 역사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는 ‘아테네’에 바울이 도착한 것은 서기 50년 경으로 2차 전도여행 때였습니다. 먼저 바울은 ‘아테네’ 시내를 한바퀴 돌아 봅니다. 여기 저기 대리석으로 조각한 신상들이 있고, 그 밑에는 신들의 이름들이 새겨 있습니다. 맨 마지막에 본 신상 밑에는 ‘Unknown God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신)’이라고 새겨 있었습니다. 그리고 시내 한 중심에 있는 ‘아레오바고 (Areopagus)’ 광장에는 당시에 유행하던 ‘스토익 철학자들 (the Stoic philosophers)’과 ‘에피큐리안들 (the Epicureans)’이 토론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의 눈에 비친 ‘아테네’ 사람들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아테네 사람은 새로운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말하거나 듣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 같이 보인다.” (사도행전 17:21)
 
여러분 같으면, 이런 ‘아테네’의 분위기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어떻게 전할 수 있겠습니까? 바울은 이 ‘아테네’의 분위기에 맞게 매우 ‘intellec¬tual preaching (지적인 설교)’을 했습니다. 철학자들을 의식했는지 바울의 아테네 설교에는 ‘예수’ 혹은 ‘그리스도’라는 말이 한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다른 도시에서 했던 것과는 상당히 다른 스타일의 설교를 했습니다. 바울의 ‘아테네’ 선교가 실패라고 볼 수는 없지만, 결과적으로 바울에게는 아쉬움이 남는 선교였습니다.
이렇게 ‘아테네’ 선교를 마치고 다음 선교지로 간 곳이 ‘고린도 (Corinth)’였습니다. ‘고린도’는 ‘아가야 (Achaia)’ 지방의 대표적인 도시로, 교통의 요충지였고, 그 일대에서 가장 번창했던 상업도시였습니다. ‘아테네’와는 약 80-90km 정도 떨어진 곳입니다. ‘고린도’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아프로디테 (Aphrodite, 비너스) 신전’이었습니다. 신상의 높이가 600ft였다고 하니까 그 규모를 알 수 있습니다. 신전에 1,000명의 신녀(神女)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고린도’에 두개의 극장이 있었는데, 그중 한 곳은 18,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규모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고린도’는 다민족 (multiethnic)이 모여 사는 도시였습니다. 문화적으로는, 그리스 문화와 로마 문화가 공존하는 도시였습니다.
 
 ‘고린도’ 선교를 하면서 바울이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성경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가서 하나님의 비밀을 전하였을 때, 웅변술이나 탁월한 지혜를 가지고 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는 동안에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굳게 결심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2:1-2)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When I first came to you, dear brothers and sisters, I didn't use lofty words and impressive wisdom to tell you God's secret plan. For I decided that while I was with you I would forget everything except Jesus Christ, the one who was crucified.” 제가 보기에 이 말씀은 ‘고린도’에서는 ‘아테네’에서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선언으로 보입니다.
 
어느 선교지나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선교지는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아, 고린도가 하나님의 선교에 있어서 이렇게 중요한 도시였구나!”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 중에 특히 눈에 들어오는 말씀은 9-10절 말씀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조용히 있지 말고 계속해서 말하여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내 백성이 이 도시에 많다 (Many people in this city belong to me). 그러므로 아무도 너를 공격하거나 해치지 못할 것이다.” 이 도시에 내가 구원하기로 작정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도시에 복음을 들어야 할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전략(戰略, strategy)’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형용사는 ‘strategic (전략적인)’이란 말입니다. ‘전략적’이라는 말은 꼭 필요하고, 매우 지혜로운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라이프 스팬 (life span)에 대하여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시간을 사용하는데 있어서 매우 ‘전략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 (My time has not yet come, 요한복음 2:4, 7:6, 7:8, 13:1, 13:3)”라는 말씀이 여러 차례 나옵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할 때는 인내하면서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아니라고 생각될 때는 성급하게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을 ‘전략적’으로 사용하셨습니다.
 
우리 인생은 길이가 한정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전략적’으로 시간을 사용해야 합니다. 시간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 세상에 나가서 말하고 행동하는 것도 ‘전략적’이어야 합니다.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이 마치 늑대 무리 속으로 양을 보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여라 (Therefore, be as shrewd as snakes and as innocent as doves).” (마태복음 10:16) 지혜로울 때가서는 매우 지혜로워야지 절대로 무모한 생각이나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크리스천은 순결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남을 해치거나 악한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이 도시에서 네가 많은 고난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계속해서 복음을 전파하고 중단하지 마라. 이 도시에 나의 백성들이 많이 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음으로 아무도 너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은 그 어디에서도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궁금한 것은 바울이 ‘고린도’가 하나님의 전략적인 도시라는 사실을 알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알았습니다. 우리는 그 증거를 바울이 ‘고린도’에 1년 6개월 동안 머물렀다는 11절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한 도시에 오랫동안 머문 적이 없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이렇게 오래 머문 것은 ‘고린도’ 생활이 좋았거나 ‘고린도’가 매력적인 도시였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어저께 토요일 새벽 기도 마치고, 어느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분은 전에 우리교회에 잠깐 나오셨는데, 결혼하고는 미국인 남편과 함께 미국교회에 나간다고 들었습니다. 그분이 하는 말이 그동안 남편과 함께 중국 상해 (Shanghai)에 가서 일 년 동안 대학에서 가르쳤는데, 상해 생활이 너무 좋아서 앞으로 삼 년을 더 있기로 계약을 했다고 합니다. ‘고린도’ 역시 바울에게는 힘든 도시였습니다. 오늘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고린도’에서도 유대인들이 바울을 못살게 굴었다는 말씀이 6-7절에 나옵니다. 또 재판장으로 끌고 갔다는 말씀도 나옵니다 (12절). 견디다 못한 바울이 ‘고린도’를 떠날 생각을 하고 있던 때에 (6절), 이 도시에 나의 백성들이 많다고 하시면서 하나님께서 그를 붙잡으신 것입니다.
 
빌립보서 2:13 말씀을 보십시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히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성취하도록 소원과 능력을 주시며 당신 안에서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For God is working in you, giving you the desire and the power to do what pleases him).” (New Living Translation) 이 말씀이 개역성경에는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무슨 뜻인가요?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이룰 수 있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소원 (desire)과 능력 (power)’을 주심으로써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성취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바꿔서 말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라 내가 기뻐하시는 일을 이루려고 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돕지 않으십니다. 그 때는 우리 힘으로, 우리 노력으로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이루려고 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십니다. 그 일을 성취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소원’을 주시고, 우리에게 ‘힘’을 주십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 말씀을 잘 듣습니다. 여러분이 앞으로 장래 일을 계획할 때 그 일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되도록 하십시오. 그래야 하나님께서 도와 주십니다. 시편 127편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주님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집을 세우는 사람의 수고가 헛되며, 주님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된 일이다. 일찍 일어나고 늦게 눕는 것, 먹고 살려고 애써 수고하는 모든 일이 헛된 일이다.” (1-2절) 이것이 우리 힘으로 하는 일들의 한계입니다. 하나님께서 도와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소원’을 주시고 ‘능력’을 주셔야 합니다. 그렇다면, 내가 원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계획하십시오.
 
 ‘고린도’가 하나님의 전략적인 도시임을 알고 ‘고린도’ 사역에 전념했을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바울을 도와 주시는지 보십시오. 어떤 ‘소원’을 주셨는지, 어떤 ‘능력’을 주셨는지 보십시오. 바울은 고린도에서 뜻하지 않게 같은 직업을 가진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Priscilla and Aquila) 부부를 만납니다. 하나님께서 만나게 해 주신 것입니다. 이 부부는 바울에게 평생 동역자가 됩니다. 바울은 이 부부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내 목숨을 구해 준 사람들입니다 (They once risked their lives for me. I am thankful to them).” (로마서 16:4) 바울이 말하는 이 일이 어떤 일인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부부는 바울과 생명을 나누는 동역자가 됩니다.
 
그리고, 디모데와 실라가 고린도 사역에 가담합니다( 5절). 또 한 사람, 하나님께서 ‘아볼로 (Apollos)’라는 사람을 보내 주십니다. ‘아볼로’는 어느 날 갑자기 사도행전에 등장합니다. 그가 에베소를 거쳐 고린도에 왔습니다. 고린도에 왔다는 것은 ‘아볼로’ 역시 고린도 선교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아볼로’가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전략적인 도시 고린도 사역은 바울과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 디모데와 실라, 그리고, ‘아볼로’를 통해서 완성됩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씨앗을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나,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I planted the seed in your hearts, and Apollos watered it, but it was God who made it grow).” (고린도전서 3:6)
 
제가 보스턴에 온 것이 1986년이었습니다. 33년 간 이 교회를 섬겼습니다. 그 동안 줄 곧 제가 생각했던 것은 보스턴이 하나님의 전략적인 도시라는 것입니다. 보스턴은 1세기의 ‘고린도’와 많이 닮았습니다. ‘고린도’가 그랬던 것처럼, 보스턴에 많은 인종이 섞여 살고, 많은 문화가 혼합되어 있습니다. 보스턴은 미국 정신 (The Spirit of America)의 발상지이고, 학문의 도시입니다. 무엇보다 다음 세대의 주인공이 될 청년들이 보스턴에 모이고 있습니다.
 
이런 보스턴이 하나님께 전략적인 도시가 아니겠습니까? 이런 생각을 하면 할수록 우리 교회의 책임과 사명은 더 커집니다. 우리 교회가 단순히 존재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보스턴의 청년들을 책임진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했던 것처럼, 보스턴의 청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르치고 실천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큰 그림을 봐야 합니다. 큰 그림을 보지 못하면 그저 보스턴에서 공부하면서 가까운 한인교회에 나갔다는 생각 밖에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전략적인 도시 보스턴에 나를 보내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케임브리지 한인교회에서 나를 믿음으로 길러 주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큰 그림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계획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원 (desire)’과 ‘능력 (power)’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목사인 저 혼자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이런 생각을 공유해야 합니다.

7/21/2019 | 성령강림절 후 여섯째 주일

유럽 대륙으로 건너 간 복음 The Gospel Spread Across To The European Continent

사도행전 16:6-15

바울과 바나바는 제 1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2차 전도여행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예상치 않았던 ‘예루살렘 공의회’가 열리게 됩니다. 하나님은 친히 이방인 선교를 위해서 예루살렘 공의회를 준비하시고, 인도하셨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예루살렘 공의회’의 편지를 가지고 안디옥으로 돌아왔습니다. 제 2차 선교 여행을 준비하던 어느날, 바울과 바나바 사이에 큰 논쟁이 벌어집니다. 성경에는 “두 사람이 심히 다투어 두 사람이 갈라서게 되었다 (Their disagree¬ment was so sharp that they separated, 사도행전 15:39)”고 했습니다. 그 때부터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따로 전도여행을 합니다. 바울과 갈라선 바나바의 활약상은 아쉽게도 사도행전에 나오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바울에게 초점을 맞추고, 사도들의 행적을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부터 우리는 더욱 조심해서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바울과 실라는 시리아 (Syria)와 길리기아 (Cilicia)를 거쳐 아시아 (Asia)로 가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그 길이 막힌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성령께서 그 길을 막으셨기 때문에 (because the Holy Spirit had prevented them from preaching the word in the province of Asia at that time, 6절)’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아시아로 들어가지 못하고 ‘부르기아 (Phrygia)’와 ‘갈라디아 (Galatia)’를 거쳐 ‘무시아 (Mysia)’로 갔다가 북쪽 내륙 ‘비두니아 (Bithynia)’로 가려고 계획을 수정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성령께서 그 계획을 막으시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예수의 영이 그곳으로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but again the Spirit of Jesus did not allow them to go there, 7절)”고 했습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바울과 실라는 ‘무시아’의 항구도시 ‘드로아 (Troas)’에서 잠을 자게 됩니다.

여러분, 이런 성경 말씀을 읽어 보신 적이 있습니까? “거룩하고, 참되며,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분의 말씀이다. 그분께서 열면 닫을 자가 없고, 닫으면 열 자가 없다....내가 네 앞에 문을 열어 두었으니, 아무도 그 문을 닫지 못할 것이다 (This is the message from the one who is holy and true, the one who has the key of David. What he opens, no one can close; and what he closes, no one can open....I have opened a door for you that no one can close).” (요한계시록 3:7-8)

하나님께서 닫으신 문은 아무도 열 수가 없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그 문을 억지로 열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문을 열어 주신다는 것을 믿고 기다립니다. 성경에 ‘발람의 길 (the footsteps of Balaam, 베드로후서 2:15)’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나온 후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때 모압 (Moab)이라는 나라를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그 때 모압의 왕은 ‘발락 (Balak)’이라는 사람이었는데, 발락은 이스라엘 민족이 모압 땅으로 들어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겁이 났습니다. 그래서 ‘발람’이라는 신통한 능력을 가진 사람을 불러서 이스라엘 민족을 저주하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발람’에게 백지 수표를 주면서 돈은 얼마든지 줄 수 있으니 와서 이스라엘 민족을 저주하라고 합니다. 여차저차해서 결국 ‘발람’은 ‘발락’이 보낸 사람들을 따라갑니다. ‘발람’은 입으로는 “발락 왕이 은과 금으로 가득 차 있는 그의 집을 준다 해도, 나는 내 하나님이신 여호와께서 그 민족을 저주하지 말라고 하시는 명령을 어길 수 없습니다 (민수기 22:18)” 이렇게 말하면서도 그의 마음은 벌써 발락이 제시하는 돈의 유혹을 받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천사를 시켜 ‘발람’의 앞을 가로 막았습니다. 그 때 ‘발람’은 나귀를 타고 좁은 담장 길을 지나가고 있었는데, 나귀의 눈에 하나님의 천사가 칼을 들고 길을 가로 막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나귀가 천사의 칼을 피하려고 담장에 바싹 붙는 바람에 타고 있던 ‘발람’의 발에 상처가 났습니다. 화가 난 ‘발람’이 나귀를 때립니다. 나귀가 다시 길을 가는데, 아주 좁은 길이 나왔습니다. 이번에도 나귀의 눈에는 하나님의 천사가 앞을 가로 막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나귀는 피할 길이 없어 가다 말고 털썩 주저 앉았습니다. 화가 난 ‘발람’이 또 나귀를 때립니다. 그랬더니 나귀가 “내가 뭘 잘못했다고 나를 때립니까?” 하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화가 난 ‘발람’은 “네가 길을 제대로 가지 않으니까 때리는 것이 아니냐?” 나중에 하나님의 천사가 ‘발람’에게 말합니다. “네가 하는 일이 악하기에, 내가 너를 막으려고 온 것이다. 만약 나귀가 비켜서지 않았다면, 너는 벌써 내 칼에 죽었을 것이다.” (민수기 22:32-33)

이 이야기가 주는 메시지는, 하나님께서 ‘발람’이 가는 길을 기뻐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발람’은 나귀가 말을 하는 이 황당한 일을 겪으면서 ‘발람’은 하나님께서 내가 가는 길을 막으신다는 것을 알아야 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 속에 있는 포기할 수 없는 욕심 때문에 계속 그 길을 갑니다. 성경은 이것을 ‘발람의 길’이라고 합니다. 그 길이 파멸의 길인지 모르고 계속해서 그 길을 갑니다. 이 말씀 속에 ‘발람의 길’을 가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한 길을 막으시는 것은 다른 길을 열어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 속에서 한 문을 닫으시고 다른 문을 열어 주시는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이것은 제가 지금까지 성경을 읽으면서 얻는 확신입니다. 그리고, 저의 삶 속에서도 이 문을 닫으시고 다른 문을 열어 주시는 하나님을 발견했습니다.

아시아 선교의 문을 막으신 하나님은 유럽 선교의 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길이 막혀 오도가도 못하고 있는 바울에게 마케도니아 사람에 대한 환상을 보게 하셨습니다. 마케도니아 사람 하나가 나타나 “마케도니아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 주십시오 (9절)”라고 애원하는 환상을 본 것입니다. 이 환상을 본 바울은 이 환상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유럽 선교의 문을 열어 주시는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유럽 선교가 하나님의 뜻이라는 무슨 증거가 있습니까?” 저는 성경 속에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나와 있다고 생각합니다. 보세요. “바울이 그 환상을 본 뒤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마케도니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고 확신하고는 즉시 마케도니아 (Macedonia)로 떠날 준비를 했습니다. 우리는 배를 타고 드로아 (Troas)를 떠나 곧장 사모드라게 (Samothrace)로 갔다가 이튿날, 네압볼리 (Neapolis)로 갔습니다. 다시 네압볼리를 떠나서 로마의 식민지요, 마케도니아 지방의 중심 도시인 빌립보 (Philippi)로 갔습니다. 우리는 며칠 동안, 그 곳에서 머물렀습니다.” (10-12절) 그렇게 꽉 막혀 있던 길이 확 뚫리지 않습니까? 일사천리(一瀉千里)로 길이 열립니다. 또 하나의 증거는, 하나님께서 이미 빌립보 선교를 위해서 필요한 것들을 준비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선교 (The Mission of God)’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이레 (Yahweh-Yireh, 창세기 22:14)’이신 하나님은 때가 되어 아시아 선교를 막으시고 유럽 선교의 문을 여셨습니다.

지금까지 아시아에 머물던 복음이 마케도니아 지방의 중심 도시 ‘빌립보 (Philippi)’에 전해졌습니다. 몇 년 전 터키 성지순례를 하면서 ‘에게 바다 (Aegean Sea)’를 보았습니다. ‘에게 바다’는 해협(海峽, straits)이니까요. 멀리 마케도니아가 가물가물하게 보이는 좁은 바다입니다. 저희 성지 순례팀은 소형 배를 타고 ‘에게 바다’를 한바퀴 돌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느껴졌는지 모르지만, 그 때 제 마음은 형언할 수 없는 감동으로 터질 것만 같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2,000년 전에 바로 이 ‘에게 바다’를 건너서 마케도니아 빌립보로 건너갔겠구나 생각하니까 정말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여러분, 이 글을 한번 보십시오. “A Christian historian said that the ship that carried the Apostle Paul carried the history of the world in it. Arnold Toynbee said in his ‘A Study of History’ that, when a wooden boat carried the Apostle Paul from Troas of Asia Minor to Macedonia, it moved the center of the world from the birthplace of civilization to Mediterranean and to the European Continent (한 기독교 역사가는 사도 바울을 태웠던 그 배는 그 배 안에 세계 역사를 태우고 있었다고 했다. 아놀드 토인비는 ‘역사의 연구’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 작은 목선이 소아시아 드로아에서 사도 바울을 태웠을 때, 세계의 중심은 문명의 발상지로부터 지중해와 유럽 대륙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Our Daily Bread, 9/11/2011) 토인비의 말은, 복음이 유럽 대륙에 전해 짐으로 세계 역사가 바뀌었다는 것 아닙니까? 그 때까지 변방이었던 유럽 땅이 세계의 중심으로 바뀌게 되었다는 것 아닙니까? 선교 역사에서 뿐만 아니라 문명사적으로 볼 때, 빌립보 선교는 대단한 의미가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읽다 보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일정한 패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이 내가 원하는 뜻이라는 것을 알려 주시기 위해서 한 쪽 문을 닫으시고 다른 문을 열어 주십니다. 사도 바울이 마케도니아로 건너가는 배를 탔을 때, 모든 일이 순탄하게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습니다. 안식일에 유대인들이 모이는 기도처를 찾았을 때 그곳에 이미 ‘루디아 (Lydia)’라는 한 여자를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루디아가 바울의 말을 귀담아 들을 수 있도록 주님께서 그녀의 마음을 여셨습니다 (One of them was Lydia from Thyatira, a merchant of expensive purple cloth, who worshiped God. As she listened to us, the Lord opened her heart, and she accepted what Paul was saying).” (14절)

소름 돋는 일이 있습니다. 바울이 루디아에게 물었을 것입니다. “자매님은 고향이 어디세요?” “예, 저는 두아디라 사람이예요.” “뭐라고요? 두아디라 출신이라고요?” 여러분, 두아디라가 어디 있는지 아세요? 소아시아에 있습니다. 바울이 들어가려고 했다가 들어가지 못한 곳에 있습니다. 뜻하지 않게 빌립보에서 두아디라 출신 루디아를 만난 것입니다. 모두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든든한 두아디라 출신 루디아를 만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이렇게 계속됩니다. 여차여차해서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시아 선교의 문을 닫으시고 유럽 선교의 문을 열어 주셨는데, 그리고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된 것 같았는데,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갇히다니 말이 됩니까? 바울과 실라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것 밖에 없는데, 감옥에 갇히다니, 이런 일이 여러분의 삶 속에서 일어났다면 어떻게 이 일을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빌립보 감옥의 이름 없는 간수 한 사람 때문이었습니다. 그 간수 한 사람을 구원하는 과정 속에서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 수감되고 고문을 받습니다. 바울과 실라를 집에 데리고 가서 “상처를 씻어 주었다 (16:33)”는 말씀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많은 고문을 당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순종하는 것이 곧 우리에게 고난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저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고난을 겪게 된다는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 말 속에 지금 우리 삶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고난과 절망과 아픔과 실패와 기타 여러가지 문제들을 해석하는 열쇠가 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시오. 그러면 당신과 온 집안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16:31) 간수와 그 집안이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런 성경 말씀이 이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고작 그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이런 일들이 있었단 말입니까?”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생각에는 이해가 안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한 사람의 생명이 천하보다 귀합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시려고 그의 외아들을 이 땅에 보내 주신 분입니다. 자기 아들의 생명을 지불하시고 우리를 사서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그런 분입니다. 그 하나님의 마음이 바울을 빌립보로 가는 목선을 타게 만들었고, 그 하나님의 마음이 있었기에 수많은 유럽 대륙의 사람들이 복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유럽은 유럽 문명을 일으키고, 세계사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7/14/2019 | 성령강림절 후 다섯째 주일

예루살렘 회의 The Council Of Jerusalem

사도행전 15:1-6

오늘 설교 제목을 ‘예루살렘 회의’라고 했습니다만, 영어로는 ‘Council’입니다. ‘협의회’ 혹은 ‘공의회’ 등으로 번역할 수 있는 말입니다. 설교 제목에는 생소한 ‘공의회’라는 말 대신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회의’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교회가 교리적으로나 선교적으로 어떤 중대한 문제에 직면했을 때 지도자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토론을 벌이고 입장을 결정하는 것을 ‘공회의’라고 합니다. 신학자들은 ‘예루살렘 공의회’가 열린 시기를 바울이 1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시리아 안디옥으로 돌아와 다시 2차 전도 여행을 준비하고 있을 때로 보고 있습니다. 그 때가 대략 AD 49-50년경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아르메니안 구역 (The Armenian Quarter)’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크리스천 지역 (The Christian Quarter)’, ‘유대인 구역 (The Jewish Quarter)’ ‘무슬림 구역 (The Muslim Quarter)’ 이렇게 네 구역으로 나뉘어 있거든요? 복음이 이방 세계에 전파된 후, 예루살렘 성지를 찾아 나선 첫 순례자들 중에 아르메니아인들이 있었습니다. 아르메니아 (Armenia)는 일찍이 기독교를 국교로 정하고 국가적 차원에서 예루살렘에 관심을 쏟아 부었습니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성지순례를 다녀오면 팔에 그 연도를 문신으로 새기고 평생 기념일로 삼을 정도로 열심이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자기 나라로 돌아가지 않고 유대 땅에 머물면서 수도원 공동체를 만든 것이, 오늘날 아르메니아인들이 예루살렘의 25%를 차지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이 아르메니아인들의 최대 성지로 여기는 곳이 있는데, 바로 아르메니안 구역에 있는 ‘성 야고보 교회’입니다. 이 자리가 바로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예루살렘 공의회’가 열렸던 곳이라고 합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하는 중요한 문제는, 왜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예루살렘 공의회’가 중요한가, ‘예루살렘 공의회’는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 공의회가 하나님의 선교의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비가 많이 내려 물줄기가 생겼습니다. 그 물줄기가 흘러가다가 장애물을 만납니다. 장애물을 만나면 물줄기의 방향이 이쪽으로 바뀔 수도 있고, 저쪽으로 바뀔 수도 있습니다. 그 물줄기의 방향을 결정한 곳이 ‘예루살렘 공의회’입니다. 그 때 ‘예루살렘 공의회’ 결정 덕분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예루살렘을 벗어나 유럽으로, 아시아로, 아프리카로, 북 아메리카로, 남 아메리카로 복음의 강물이 흐르게 된 것입니다.
 
‘예루살렘 공의회’를 이해하는데 핵심적인 문제를 세 가지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첫째로, ‘예루살렘 공의회’는 시리아에 있는 안디옥 교회의 문제를 다루는 회의였습니다. 이 말은 그 회의에서 다루었던 문제가 비단 안디옥 교회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모든 교회의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행전 11장에 키프로스와 구레네 사람들이 이방인들 (그리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사람들은 일찍이 해외에 나와서 살고 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입니다. ‘디이스포라’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은 ‘코스모폴리탄적인 마음 (cosmopolitan mind)’이라고 지난 설교에서 말씀 드렸습니다.
 
키프로스와 구레네 출신 유대인들은 복음은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져야 한다는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성경에 ‘주님의 손길’이 그들과 함께 하셨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님께로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주님의 손길 (the hand of the Lord)’이 그들과 함께 했다는 것은, 그리스 사람들이 교회로 들어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안디옥 교회의 소식을 듣고 예루살렘교회는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이 믿어왔던 유대교적 생각은 쉽게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교회는 안디옥교회의 실태를 조사하기 위하여 조사관을 파견합니다.
 
우리는 이런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정말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는 한치의 오차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때 조사관으로 파견된 사람이 ‘바나바 (Barnabas)’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보세요. 바나바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 (Barnabas was a good man, full of the Holy Spirit and strong in faith. And many people were brought to the Lord).” (사도행전 11:24) 바나바가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라는 구절이 눈에 들어옵니다. 바나바는 하나님의 마음을 잘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바나바가 본 안디옥 교회 현상은 전혀 우려할 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안디옥 교회 현상을 심각하게 보고 있는 예루살렘 교회와 달리 바나바는 하나님의 은혜가 안디옥 교회에 내리고 있다고 보고서를 썼습니다. 만일 그 때 조사관으로 파견된 사람이 바나바가 아니었다면 그는 다른 식으로 안디옥 교회 현상을 봤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는 사이에, 안디옥 교회는 이방인 선교를 위해서 선교사를 파송 하기로 결정하고, 본격적으로 이방인 선교를 하겠다고 선언합니다. 선교사 파송된 사람은 그 교회 조사관으로 온 바나바와 바나바가 데려 온 사울이었습니다. 이 둘이 선교사로 나가 각 도시를 다니면서 복음을 전파한 것이 우리가 말하는 ‘바울의 제 1차 전도여행 (The First Missionary Journey of Paul)’입니다. 바나바의 고향인 키프로스 (Cyprus)를 거쳐서 터키 내륙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안디옥으로 돌아오는 전도여행이었습니다.
 
둘째로, ‘예루살렘 공의회’는 ‘율법주의’와 ‘복음주의’의 충돌로 말미암아 생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열린 회의입니다. “율법주의’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늘 명심해야 합니다. 바나바와 사울은 1차 전도여행에서 돌아와 전도여행에서 있었던 하나님의 은혜를 교회에서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바나바와 사울 두 사람은 ‘제 2차 전도여행’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중대한 문제가 터졌습니다. 유대에서 온 형제들 몇 사람이 “모세가 가르친 풍습대로 할례를 받지 않으면 여러분은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15:1)”라고 교인들을 가르친 것입니다. 이들과 바나바와 사울 사이에 격렬한 충돌과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Paul and Barna¬bas disagreed with them, arguing vehemently. Finally, the church decided to send Paul and Barnabas to Jerusalem, accompanied by some local believers, to talk to the apostles and elders about this question.” (15:2) 이렇게 안디옥 교회의 요청으로 ‘예루살렘 공의회’가 열린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스스로 ‘예루살렘 공의회’를 준비하시고, 결론에 이르기까지 회의를 직접 운영하신 것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여러분들 중 어떤 분들에게는 이런 말이 잘 이해가 안 되고 믿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조심해서 읽어보면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안디옥 교회에 이방인들 (그리스인들)이 들어 온 것은 어떻게 잘 마무리가 되었지만, 그동안 예루살렘 교회는 많은 고민을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 바리새인 출신 신자들 중에 “이방인이 교회로 들어 온 경우 그들도 할례를 받아야 하며,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합니다 (15:5)”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세 사람의 발언이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바나바와 사울, 그리고 야고보입니다. 베드로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이 시간을 위해서 베드로의 마음을 이미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이방인 고넬료 (Cornelius, who was a captain of the Italian Regiment)의 집을 방문한 베드로의 말이 압권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유대인이 이방 사람을 사귀거나 그의 집에 찾아가는 것은 유대 법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어떤 사람도 속되거나 부정하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나는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차별하지 않는 분이시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도행전 10:28, 34)
 
회의 석상에서 양측 주장이 팽팽하게 맞섭니다. 성경에는 ‘많은 토론 (a long discussion, 15:7)’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discussion’ ‘debate’ ‘dispute’이라는 단어들이 사용된 것을 보면 쉽게 결론이 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 때 베드로가 일어나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것과 똑같이 그들에게도 주셔서 그들을 인정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이방인들을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들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분은 어찌하여 우리 조상들이나 우리나 모두 질 수 없었던 짐을 이방인 신자들에게 지워서 하나님을 시험하려 하십니까? 우리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주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We believe that we are all saved the same way by the undeserved grace of the Lord Jesus).” (15:8-11)
 
베드로가 말을 마쳤을 때 회의장에 조용한 침묵이 흘렀습니다 (15:12). ‘조용하다’는 것은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이 베드로의 말을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어려운 말로 ‘암묵적 (暗默的)인 찬성’이라고 합니다. 말은 안 하지만, 찬성한다는 뜻입니다. 이어서 바나바와 사울이 전도여행 중에 하나님께서 이방인들 중에서 일하신 체험들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야고보가 정리를 합니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인데, 언제부터인지 예루살렘 교회에서 베드로, 요한과 함께 ‘기둥 같은 사람 (who were reputed to be pillars, 갈라디아서 2:9)’으로 인정 받고 있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이방인들 중에서 자기 백성을 삼으시려고 그들을 찾아오신 이야기를 베드로가 잘 말해 주었습니다. 베드로의 말은 성경에서도 증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내가 판단하기로는, 하나님께로 돌아온 이방 형제들을 더 이상 힘들게 하지 말고, 그들에게 편지를 써서, 우상에게 바친 더러운 음식을 먹지 말 것, 음란한 행동을 하지 말 것,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피를 먹지 말 것을 권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15:19-20)
 
AD 50년에 열렸던 ‘예루살렘 공의회’는 이렇게 막을 내렸습니다. 이 때 만약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결정하고 유대인의 풍습을 따라야 한다고 결정했더라면, 오늘 우리는 유대인들처럼, 유대인들이 먹는 음식을 먹으면서 살아야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었더라면 복음이 전 세계로 전파되는데 얼마나 거추장스러운 장애물이 되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친히 ‘예루살렘 공의회’의 물줄기를 그렇게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바꾸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 준비된 사람들을 사용하셨습니다. 베드로를 사용하셨고, 바나바와 사울을 사용하셨고, 야고보를 사용하셨습니다. 베드로는 그가 고백한 것처럼 로마 군인 고넬료의 집에 가는 일이 정말 하기 싫고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 경험이 하나님의 일에 사용될 줄 그 당시에는 몰랐고 당황했을 것입니다.
스티브 잡스 (Steve Jobs)가 스탠포드대학 졸업식 연설에서 했던 연설문이 생각납니다. 최고의 연설입니다. “Again, you can’t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you can only connect them looking backwards. So you have to trust that the dots will somehow connect in your future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 점들이 앞으로의 인생에서 어찌 연결될지 알 수 없습니다. 그것들은 나중에 뒤돌아 보고서야 비로소 그 연관성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런 작은 점들이 어떻게든지 미래에 연관이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잡스가 말하는 ‘점들 (dots)’은 우리가 매일 경험하고 있는 의미 없는 일들일 수도 있고, 하기 싫은 일들일 수도 있습니다. 절망과 실패의 경험들일 수도 있습니다. 이것들이 그 당시에는 아무 의미가 없어 보이고, 나의 미래를 위해서도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 보입니다. 그러나, 지내 놓고 보면 이 점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준비 시키시는 것도 이렇다고 생각합니다. 한 순간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믿음이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말고 최선을 다하십시오. 그리고,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지금의 이 점들이 서로 연결되어 하나님의 일에 반드시 사용된다는 믿음을 가지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