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2017 | 새해는 이렇게 산다 3

우리는 예수를 그렇게 배우지 않았다. It Is Not What We Learned About Jesus.

에베소서 4:17-24

오늘은 “새해에는 이렇게 산다” 설교 시리즈 세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에서 제일 눈에 들어 오는 말씀은 20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리스도에 관해 그렇게 배우지 않았습니다 (It is not what you learned about Christ Jesus).”

예수님에 관해 배운 것 하고 행동하는 것 하고 다르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배웠으면 당연히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행동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믿지 않는 사람들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보면 그들이 크리스천이라는 사실을 의심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생각’과 ‘행동’은 그 사람이 맺는 열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 것이다.” (마태복음 7:20)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Yes, just as you can identify a tree by its fruit, so you can identify people by their actions.” “맞습니다. 그 나무가 맺는 열매를 보고 그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알 수 있는 것처럼, 사람도 그들의 행동을 보고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 이런 뜻이지요?

열심히 성경공부합니다. 성경공부를 통해서 예수님이 누구인지 배웁니다. 그런데, 왜 배운 대로 ‘생각하고’ 배운 대로 ‘행동하지’ 않습니까? 왜 예수님에 관한 지식이 삶을 통해서 드러나지 않습니까? 왜 ‘아는 것’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습니까?

오늘 말씀은 지금으로부터 약 2,000년 전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마치 오늘날 우리들에게 하는 말씀으로 들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말씀과 행동이 다른 이 심각한 문제가 어제 오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2,000년 전에도 있었던 문제가 지금도 똑 같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가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보 겉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Be who God wants you to be, not what others want to see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이 되어라. 결코 사람들이 보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되지 마라).” 이 문제는, 오늘 우리가 제기하고 있는 문제의 또 다른 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을 ‘위선자 (hypocrites)’라고 하셨습니다. 속 마음은 그렇지 않으면서도 겉으로는 그런 척하는 것입니다. 원래 ‘히포크리트’라는 말이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배우’라는 말에서 왔다고 합니다. 참 재미 있습니다. 드라마에 출연했던 배우나 탤런트들이 드라마를 찍는 중에 사랑에 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드라마와 현실을 착각하는 것입니다. “야, 저 사람 멋지다!” “와, 저렇게 마음이 예쁘구나!” 이렇게 드라마 상의 인물과 실제 인물을 착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봤더니 드라마에 나왔던 사람과는 전혀 다른 사람인 것을 알고 상대방에게 실망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바로 이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 앞에서 이런 ‘바리새파’ 사람들을 위선자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에 이런 말씀이 나오잖아요? “바리새파 사람들은 가서,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지 모의를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2:14) “바리새파 사람들이 거기를 떠나 헤롯 당 사람들과 함께 예수님을 죽일 계획을 세웠습니다.” (마가복음 3:6)

처음에 제기했던 문제는 예수님에 대해서 알기는 많이 아는데 그 사람이 맺는 열매가 형편 없다는 문제였고, 나중에 제기한 문제는 그 사람이 맺는 열매가 굉장한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봤더니 전혀 그렇지 않아서 실망했다는 것입니다.

처음에 제기했던 문제나, 나중에 제기했던 문제가 문제의 본질은 같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에 관해 배운 대로 살지 않는 것입니다. 배운 살지 않으면서 교회 생활을 계속하다가 보면 위선자들이 되고 맙니다.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다음 문제로 넘어가기 전에, 오늘 에베소서 본문 말씀이 지적하고 있는 몇 가지 문제를 짚고 넘어가려고 합니다. 17절에 “믿지 않는 사람들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처럼 살지 마십시오”라고 합니다. 크리스천과 넌크리스천은 그 ‘생각’과 ‘행동’이 분명하게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크리스천들에게는 ‘하나님의 생명 (the life God gives)’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18절). 다른 성경에는 ‘the life of God (NIV)’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말씀을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영접하는 그 시간부터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 ‘하나님이 주시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 말씀을 복잡하게 설명할 수도 있지만, 그냥 간단하고 분명하게 성경에 나와 있는 대로 말씀을 읽고 받아 들이면 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But to all who believed him and accepted him, he gave the right to become children of God)” (요한복음 1:12)

크리스천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요한복음에 나온 말씀을 그대로 인용한다면, 크리스천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구입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겠습니까? 우리 믿음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이 이것입니다. 다른 것들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 핵심을 붙잡지 않고 다른 중요하지 않는 것들을 붙잡고 있습니까?

영어 단어에 ‘religious’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말로 번역한다면 ‘종교적’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핵심을 붙잡지 않고 다른 것들을 붙잡으면 ‘종교적인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좋은 의미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겉모습이나 형식을 좇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They will act religious, but they will reject the power that could make them godly (그들은 종교적으로 행동하지만 그들을 경건하게 만들어 주는 능력을 거절하는 사람들입니다).” (디모데후서 3:5)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해야 하겠습니까?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생각하고, 그 말씀을 실천하면서 내 속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을 성장시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마음을 계속해서 새롭게 ‘renew’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말씀에 “Throw off your old sinful nature and your former way of life (22절)”이라고 나와 있네요. 또, “Put on your new nature, created to be like God (24절)”이라고 나와 있네요. 그리고, “Let the Spirit renew your thoughts and attitudes (23절)”라고 나와 있네요.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종교적인 사람’이 되는 함정에 빠지지 않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하면 ‘위선자들’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하면 예수님에 대하여 배운 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까? 간단합니다. “이제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이제 나는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다” “이제 나는 하나님의 생명을 사는 사람이다” 이 사실을 분명하게 깨달으면 됩니다.

좀 우스운 이야기입니다만, 목사의 아이들이라도 애들과 놀다가 싸울 수도 있는데, 교회의 어른들이 “넌 목사의 아들이, 그러면 되니?” “넌 목사의 딸이 그러면 되니?” 하고 야단을 칩니다. 어린 나이에 그런 말들을 들으면 마음에 상처를 입습니다. 제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교회 전도사님 딸이 저와 같은 반이었습니다. 이 아이 집 가출했습니다. 가출해서 어떻게 되었는지 행방을 알 수가 없습니다. 이번 Re-NEW에서, 주일학교를 인도하는 전도사님이 “너희들 중에 아빠가 목사인 아이들 있으면 나와라’ 그랬답니다. 그랬더니 몇 몇 아이들이 나왔답니다. 전도사님이 아이들을 붙잡고 “나도 목사 아들이야!” 하면서 같이 펑펑 울었답니다. 한 목사님이 우연히 아이들 ReNEW에 갔다가 이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그 목사님 아들이 달려 와서 자기가 상처 받은 이야기를 하면서 막 울더랍니다. 난감해진 목사님이 이 아이를 강사실에 데리고 와서 컵라면을 하나 먹이면서 “봐라, 네가 목사의 아들이니까 이런 방에도 들어 올 수 있고, 컵라면도 먹을 수 있는 거야!” 그랬더니, 이 아이의 얼굴이 금방 밝아졌습니다.

목사의 아들이 갖는 베네핏은 별 것 아닐 수 있습니다. 아이들 수준에서는 컵라면 하나 먹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 아무 베네핏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어른들에게 야단 맞고 상처만 입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갖는 베네핏이 얼마나 큰 지 생각해 보십시오. 너무 엄청 나서 일일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갖는 권세가 있다고 했습니다. 이 ‘권세’라는 말이 ‘privilege’이 잖아요? 하나님의 자녀로서 ‘특별하게 누리는 권리’입니다. 그 중의 하나가 우리에게 ‘하나님의 생명’이 주신 것입니다. 인간을 ‘mortal man’이라고 하잖아요?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을 가진 존재라는 뜻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하나님의 생명’이 주어졌습니다. 이 보다 더 큰 특권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방탕한 생활에 빠져 살아야 합니까 (19절)? 욕망에 빠져 타락한 삶을 살아야 합니까 (22절)? 예전에 살던 모습 그대로 살아야 합니까 (22절)? 아니면, 그 생각과 행동이 달라져야 합니까 (17절)? 우리는 예수님을 그렇게 배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 교우들에게 “여러분은 생각과 행동 (thoughts and attitudes)을 새롭게 하라는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새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모습처럼 선하고 거룩하게 살아가십시오 (23-24절)” 라고 권면했습니다.

헨리 나누엔 (Henri Nouwen, 1932- 1996)이 1977년에 『The Living Reminder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는 이 책에 ‘Service and Prayer in Memory of Jesus Christ (예수 그리스도를 기념하여 출판한 봉사와 기도)’ 라는 부제 (subtitle)를 붙였습니다. 이 책은 사역자들을 염두에 두고 쓴 책입니다. 모든 사역자들은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그 책의 내용을 소개한다면, 첫째로, 사역자들은 ‘Healing Reminder’가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육체적인 질병들도 고쳐 주시고, 마음의 상처들도 고쳐 주셨습니다. 2,000년 전 예수님 시대나 지금이나 우리 주변에는 상처 받은 사람들로 넘쳐 납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들의 상처를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상처 받고, 소외된 사람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삭개오에게는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9:9). 십 팔 년 동안 허리를 펴지 못하고 살아왔던 한 불행한 여자를 향하여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3:16).

이렇게, 모든 사역자들은 그런 예수님의 ‘Healing Reminder’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일을 한답시고, 교회 일을 한답시고,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사역자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상처를 싸매 주고, 낫게 해 주는 ‘Healing Reminder’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사역자들은 ‘Sustaining Reminder’가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 같이 사람들을 세워주고, 사람들을 붙들어 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 머리 속에 금방 떠오르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나는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해 왔다 (But I have prayed for you, Simon, that your faith may not fail).” (누가복음 22:32)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이렇게 연약한 사람들을 붙들어 주고, 그를 세워주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사역자들은 ‘Guiding Reminder’가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하나님께 인도하는 일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에게 천국의 복음을 말씀해 주시고, 천국에 대하여 이야기해 주심으로, 천국의 소망을 갖게 하셨습니다. 우리 주변에 우리가 그 길을 인도해 줘야 할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생의 목적을 세우지 못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고, 생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또 생의 소망이 끊어진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그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Guiding Reminder’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배운 사람들은 모두 ‘The Living Reminder of Jesus’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헨리 나우엔의 말은 단순히 사역자들을 위한 말이 아니라, 사실은 모든 크리스천들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우리가 과연 이렇게 ‘living reminder’로,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들로 살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은혜가 있으면, 그런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성경에 그런 말씀이 있잖아요? “인간적으로 말한다면 불가능하지만,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Humanly speaking, it is impossible. But with God everything is possible)." (마태복음 19:26) 이 모든 일의 첫 걸음은, 내가 왜 크리스천이 되었는지, 크리스천의 삶의 의미를 진지하게 성찰하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1/8/2017 | 새해는 이렇게 산다 2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인 것을 증명하라 Prove Yourselves to be Christ’s True Disciples.

요한복음 15:1-8

지금으로부터 10여년 전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 비행기 안에서 그 긴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하다가 책을 한권 가져갔었습니다. 찰스 스탠리 (Charles Stanley) 목사가 쓴 “성령 충만 그 아름다운 삶 (The Won-derful Spirit Filled Life)”이라는 책이었습니다. 찰스 스탠리 목사는 애틀랜타에 있는 제일침례교회의 목사로 오랫동안 재직했습니다. 간결하면서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능력이 탁월한 설교자입니다. 미국 전역에 방송되는 텔레비전과 라디오 프로그램 “인 터치 (In Touch)”에 출연하는 방송 설교자이기도 합니다.

이 책을 한번 읽기 시작했다가 비행기 안에서 그 책을 모두 읽었습니다. 한번 읽기 시작해서 마지막 페이지를 읽을 때까지 그 책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The Wonderful Spirit Filled Life (성령 충만 그 아름다운 삶)”은 요한복음 15장 말씀을 기초로 해서 크리스천의 성령 충만한 삶에 대하여 설명한 책인데, 그 책의 내용이 아주 설득력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 도서부에도 이 책이 있을 것으로 봅니다만, 기회가 있으면 꼭 한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조금 복잡하다 싶은 말씀은, 그 말씀을 읽고 나서 몇 가지로 요점을 정리해 보면 큰 도움이 됩니다. 오늘 요한복음 본문(本文, text)도 그렇습니다. 별로 어려운 말은 없는 것 같지만, 이런 말씀은 요점을 정리해 보면 본문 말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은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열매를 조금 맺는 것이 아니라, 많이 맺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You bear much fruit and prove to be my disciples (8절, 열매를 많이 맺어서 나의 제자인 것을 증명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관심은 자연히 어떻게 하면 열매를 많이 맺느냐 하는 질문으로 연결됩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말씀은 우리 크리스천의 삶의 가장 중요한 핵심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크리스천의 삶에는 말로 잘 설명할 수 없는 신비스러운 점들이 있습니다. 크리스천의 삶에 세상 사람들이 알 수 없는 능력이 있습니다. 어떻게 그 능력을 소유할 수 있는지 이것도 참 신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행하게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열매 맺는 삶의 원리(原理, principle)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꼭 지켜야 하는 원칙이라고 할까요? 크리스천의 삶은 각자가 알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원리가 있고 원칙이 있습니다. 이 원리를 따르지 않으면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없습니다. 언젠가 제가 골프 코치의 말을 인용한 적이 있습니다. 감리교 안의 같은 뉴잉글랜드지방에 속한 목사님이신데요. 프로 골퍼들을 코치하는 분입니다. 그분이 그래요. 많은 사람들이 골프를 조금해 보다가 “나는 운동 신경이 둔해서 골프를 잘 못 친다고 하면서 포기해 버리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골프는 운동 신경으로 하는 스포츠가 아닙니다. 공을 치는 폼 (form)을 잘 배워서 그대로만 치면 그 쪽으로 공이 가게 되어 있는 운동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열매 맺는 삶의 원리는, 먼저 쓸모 없는 가지들을 쳐 내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1-3절까지 나와 있습니다. 정원사들은 잘 압니다. 이 나무가 열매를 많이 맺으려면 어떤 가지를 쳐 줘야 하는지 잘 압니다. 이것을 전문 용어로 ‘전지(剪枝)’ 혹은 ‘가지치기’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prune’이라고 합니다. 가지치기를 귀찮아 하거나, 게을러서 가지치기를 하지 않으면 결과적으로 자잘한 열매를 많이 맺게 됩니다. 이런 열매들은 상품 가치가 없습니다.

나무는 쓸모 없는 가지를 쳐 주면 되는데,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규칙적으로 읽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는 정원사이시다. 내 안에서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마다 아버지께서 잘라 내시고, 열매 맺는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려고 깨끗하게 다듬으신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해 준 말 때문에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Already you are clean because of the word that I have spoken to you).” (1-3절) 참 감동적인 말씀 아닙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회 있는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어떤 말씀들은 길 가에 떨어지기도 하고, 가시덤불에 떨어지기도 하고, 어떤 말씀들은 돌짝 밭에 떨어지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말씀들은 제자들의 마음 밭에 떨어졌습니다. 제자들은 잘 몰랐을 수도 있었지만, 그 때마다 제자들의 삶 속에서 불필요한 것들을 제거하는 작업이 소리 없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말에 ‘백약이무효’라는 말이 있습니다. 불필요한 가지를 제거하지 않으면 백약이 무효입니다. 절대로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규칙적으로 읽고, 그 말씀을 공부하고, 그 말씀을 묵상하면서 전지 작업(剪枝作業)을 해야 합니다. “주의 말씀이 나의 입에 얼마나 단지요. 나의 입에 꿀보다 더 답니다. 나는 주의 말씀으로부터 깨달음을 얻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모든 악한 길을 미워합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불이며, 내 길의 빛입니다.” (시편 119:103-105) 지금 내가 가고 있는 길이 악한 길인지, 잘못된 길인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lamp’와 같습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 길을 비쳐 보면서 내가 가는 길을 수정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나에게 ‘깨달음 (understand-ing)’을 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사람은 이해력이 있고, 통찰력이 있기 때문에 늘 현명한 판단을 합니다.

열매를 맺는 두 번째 원리는,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견고하게 붙어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오늘 본문 말씀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내 안에 있어라. 그러면 나도 너희 안에 있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가지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않으면, 스스로는 열매를 맺을 수 없다.” (4절) 또, 5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사람이 내 안에 있고 내가 그 안에 있으면, 그는 열매를 많이 맺는다. 그러나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I am the vine; you are the branches. Whoever abides in me and I in him, he bears much fruit, for apart from me you can do nothing).”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의 삶의 비결을 제자들에게 그대로 말씀해 주셨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내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시는 내 아버지께서 하시는 말씀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행하는 일들을 보고 나를 믿으라.” (요한복음 14:10-11) 예수님의 능력의 비결은 “I abide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abides in me”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능력의 비결을 그대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Whoever abides in me and I in him, he bears much fruit (누구든지 내 안에 거하고, 내가 그 사람 안에 거하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크리스천의 삶의 비결은 내가 열매를 생산하는 (produce)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 저절로 열매를 맺는 (bear) 것입니다. ‘produce’라는 말은 ‘생산한다’ ‘만들어 낸다’는 그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서 시간과 노력과 돈을 들여야 합니다. 하지만, ‘bear’는 ‘to produce by natural growth’입니다. 자연적인 성장에 의하여 맺히는 것입니다. 나무가 꽃을 피울 때, 나무가 열매를 맺을 때 ‘bear’라는 단어를 씁니다. 꽃을 피우기 위해 나무가 애쓰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나무가 열매를 맺으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건강하게, 정상적으로 잘 성장하면 꽃을 피게 되고,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런 경우 ‘produce’라는 말을 쓰지 않고, ‘bear’라는 단어를 씁니다. 예수님은 ‘produce’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bear’라는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중국 선교의 문을 연 허드슨 테일러 (Hudson Taylor, 1832-1905, 영국)를 아시지요? 허드슨 테일러는 ‘Inland mission (내륙선교, 內陸宣敎)’라는 새로운 선교 방식을 만들어 낸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그 때까지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선교지에 가면 주로 도시 중심의 선교를 했습니다. 그러나, 허드슨 테일러는 도시가 아니라 내륙으로 들어가서 그들과 똑 같은 머리를 하고, 옷을 입고, 젓가락을 사용하여 음식을 먹으면서, 현지인들과 같은 생활을 했습니다. 그가 말년에 선교사들의 부축을 받으면서 한 지방에 이르렀을 때, 성문 위에 금빛으로 ‘내륙은인(內陸恩人)’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깃발이 그를 환영했다고 합니다.

이런 허드슨 테일러였지만, 한 때 그는 중국 선교의 성과가 없다고 크게 낙담한 적이 있었습니다. 몸에 병까지 얻은 그는 두문불출했습니다. 그 때, 존 매카시 (John McCarthy)라는 선교사가 허드슨 테일러에게 편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그 편지에 이렇게 써 있었습니다. “포도나무의 가지가 어떻게 열매를 맺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햇빛과 공기를 얻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한 결과도 아니고, 생명의 기운을 얻으려고 노력한 결과도 아닙니다. 단순히 포도나무 본체에 순종해서 본체와 온전히 하나가 하나가 된 결과입니다. 그렇다면, 허드슨 씨, 그리스도인이 열매를 맺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대가 없이 주어지는 열매를 노력과 투쟁을 통해서 얻으려고 하면 되겠습니까? 우리의 생각과 감정을 온전히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 시켜야 합니다. 주께 모든 것을 내려 놓고 항복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이 자연스럽게 몸에 배서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는 크리스천들은 엄마 품에 안겨 있는 아기처럼 편안함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존 매카시가 보낸 이 한 장의 편지는 주님께서 허드슨 테일러에게 보낸 편지였습니다. 이 편지를 읽고 허드슨 테일러는 선교의 성과를 내려는 욕심을 내려 놓고, 주님과의 교제에 더욱 치중했다고 합니다.

“Abide in me, and I in you. As the branch cannot bear fruit by itself, unless it abides in the vine, nei-ther can you, unless you abide in me. I am the vine; you are the branches. Whoever abides in me and I in him, he bears much fruit, for apart from me you can do nothing. If anyone does not abide in me he is thrown away like a [broken off] branch and withers away.” (English Standard Version) 이 말씀 속에 크리스천의 삶의 모든 비밀과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주님은 이 말씀을 통해 열매 맺는 삶의 원리를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이 말씀에 순종해서 이 원칙대로 하면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가지는 자기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포도나무에 온전하게 붙어 있는 가지가 열매를 맺습니다. 예수님은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원리를 “Abide in me and I abide in you”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가 너희 안에 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abide’라는 말 속에 여러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remain (머무르다)’ ‘stay’ ‘dwell (살다)’ ‘reside (거주하다)’ 또 ‘to accept’ “submit to (......에 복종하다)’ ‘suffer (감수하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 안에 abide한다는 것은 내가 주님의 뜻을 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주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럴 때 나는 주님 안에 ‘abide’할 수 있고, 주님은 내 안에 ‘abide’ 할 수 있습니다. 주님과 내가 함께 사는 데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아무 불협화음(不協和音)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크리스천의 삶의 원리는, 간단합니다. 주님께 온전히 붙어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 붙어 있다’는 말은 주님과 온전한 교제를 이루는 삶을 말합니다. 주님과 내가 완전히 하나로 연합된 삶을 말합니다. 나에게 붙어 있지 않는 사람은 시들어 버린 가지와 같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크리스천이 맺는 열매는 그 사람이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라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길은 우리의 열매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주님은 “You bear much fruit and prove to be my disciples (열매를 많이 맺어서 나의 제자임을 증명하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의 삶에 열매가 있습니까? 그 열매로 내가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증명할 열매가 있습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한 두개 열매가 아니라, “You bear much fruit (많은 열매를 맺으라)”고 하셨습니다. 많은 열매를 맺어서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셨습니다.

크리스천의 삶은 결과적으로 열매를 맺는 삶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열매 맺는 삶의 원리를 분명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 원리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따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 원리와 반대로 살았습니다. 애쓰고, 힘쓰고, 열심히 하면 뭔가 열매를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가르쳐 주신 원리가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따르는 원리였습니다. 두 원리의 차이는 율법주의와 복음주의의 차이이기도 합니다. 율법주의의 핵심은 열심히 일해서 성과를 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주의의 핵심은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용서입니다.

2017년 한 해가 벌써 밝았습니다. 올 한 해는 그동안 우리가 잘못 알고 있었던 세상적인 원리를 버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열매 맺는 원리를 따라 사는 한 해가 되기를 원합니다.


1/1/2017 | 새해는 이렇게 산다 1

보는 대로 살지 않고, 믿음으로 산다 We Live By Faith, Not By Sight.

고린도후서 5:1-10

2017년 새해가 되었습니다. 새해를 맞아 교우 여러분은 어떤 생각으로 한 해를 시작하기를 원하십니까? 중국의 어떤 왕은 세수 대야에 ‘일신일신우일신(日新日新又日新)’이라는 글을 새겨 놓고, 세수할 때마다 오늘도 새로워 지자고 마음을 다잡았다고 합니다.

담임 목사로서 새해를 맞는 교우 여러분들에게 권면하고 싶은 것은, 새해에는 늘 하던 대로가 아니라, 믿음생활의 핵심을 붙잡는 믿음생활을 했으면 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려도 형식적으로 드리지 말고 진심으로 예배를 드리고, 찬송 하나를 불러도 습관적으로 부르지 말고 가사의 뜻을 생각하면서 찬송을 부르고, 성경 말씀을 읽어도 생각 없이 읽지 말고, 말씀의 의미를 생각하고, 그 말씀을 실천에 옮기는 삶을 살아가고, 기도를 해도 형식적인 말을 늘어 놓지 말고, 기도의 말 하나 하나에 우리의 진심을 담아서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그런 믿음생활을 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존 번연 (John Buyan, 1628-1688)이 쓴 ‘천로역정(天路歷程, The Pilgrim’s Progress)’ 이라는 소설을 읽어 보셨습니까? 지금으로부터 300여전 전에 나온 책이니까 지금 우리 시대와는 전혀 다른 청교도 혁명이라는 시대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는 책입니다. 이 책이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힌 책이라고 하니까 그만큼 크리스천의 삶에 끼친 영향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영국에서 청교도 혁명의 주체 세력이었던 올리버 크롬웰 (Oliver Cromwell, 1599-1658)이 밀려나면서 청교도들에게 설교가 금지되었습니다. 하지만, 열렬한 청교도 신자였던 존 번연은, 계속해서 설교하다가 체포되어 12년을 감옥에서 보내게 됩니다. 존 번연은 감옥생활 중에도 성경 말씀을 깊이 연구하던 중에 ‘천로 역정’이라는 불후의 명작을 남기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책의 내용을 조금 소개 드린다면,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한 책을 읽고 있다가 “아, 난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하면서 크게 절망합니다. 자기가 살고 있는 도시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크리스천’은 가족에게 이 사실을 알립니다. 하지만, 가족들은 아무도 그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가족들에게 실망한 ‘크리스천’은 등에 무거운 짐을 진 채 홀로 벌판을 거닐면서, 어제 읽고 있던 책을 계속 읽습니다. 그의 얼굴은 어제보다 더 큰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고, 어찌할 바를 몰라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었습니다. 그 때 맞은 편에서 어떤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전도자’였습니다. ‘전도자’가 말을 겁니다. “제가 보기에 당신은 매우 슬픈 얼굴을 하고 있는데,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크리스천’이 대답합니다. "저는 장차 무서운 심판이 있게 되리라는 사실을 이 책을 읽고 알았습니다. 이 책에 씌어 있는 대로 어서 피해야 합니다. 그런데 제 등에 매달려 있는 이 무거운 짐때문에 걱정입니다. 전 이 짐을 없애 버렸으면 좋겠습니다.” 이 말에 '전도자'가 이렇게 묻습니다. "그러면 왜 이곳에서 이렇게 머뭇거리고 있습니까?" "그건 어느 방향으로 가야 멸망을 피할 수 있는지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전도자'가 멀리 보이는 넓은 벌판을 가리키며 말합니다. "저 쪽에 있는 좁은 문이 보입니까?" "어디요? 아니, 보이지 않는데요?" "그럼 저 찬란한 빛은 보이십니까?" '크리스천’이 대답합니다. "예, 보입니다. 아주 밝은 빛이 보입니다." '전도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 빛이 보이는 쪽으로 계속 걸어가세요. 그 빛에 가까이 가면 작은 문이 보일 것입니다. 그 문을 두드리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알려 줄 것입니다."

저는 ‘천로역정’ 이야기를 생각하면서, 어쩌면 그 책에 나오는 방황하는 ‘크리스천’의 모습이 오늘날 자기 정체성을 상실한 크리스천들의 모습과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찬란한 빛이 있는 쪽으로 계속 걸어가라!”는 ‘전도자’의 말은, 적어도 저에게는 이렇게 들립니다. “어디에 길이 있는지 혼란스런 때일수록 우리는 성경을 읽고, 성경이 가리키는 쪽으로 나가야 한다!” 적어도 저에게는 이런 말씀으로 들립니다. 성경은 어두운 시대를 밝혀 주는 등불입니다. 성경을 읽지 않으면 우리는 깜깜한 인생을 살 수 밖에 없고, 방황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읽은 말씀을 보십시오. “사실 우리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지, 보는 것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7절) NIV 성경에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We live by faith, not by sight.” 저는 이 말씀이 우리 크리스천들의 삶의 방식을 결정하는 중요한 말씀이며, 동시에 이 말씀은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 속에 들어 있는 특별함이 어떤 것인지 보여 준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 크리스천들이 세상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우리 스스로 크리스천의 삶에 대한 가치들을 포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크리스천은 눈에 보이는 대로 살지 않고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시대의 크리스천들이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 살고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크리스천의 삶의 가치를 포기하고 있다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저는 새해 첫 주일을 맞아 눈에 보는 대로 살지 않고 믿음으로 산다는 이 성경 말씀의 의미를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첫째로, 이 말씀이 의미하는 것은, 크리스천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의 중요성을 알고 그것들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그것들을 얻으려고 애썼던   물질적인 것들을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것들을 추구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소유하는 것을 성공적인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한국에서는 아직도 국정을 농단한 사람들에 대한 국정조사가 진행되고 있고, 특검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국정을 농단한 사람들이 왜 그런 일을 했는지, 이유를 알고 보면 결국 돈 때문이었습니다. 돈에 가치를 두고 있는 사람은 돈이 많이 소유할수록 행복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행복해지기 위하여 더 많은 돈을 소유하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사랑, 진실, 섬김, 헌신, 희생, 천국, 하나님, 이런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추구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믿음입니다. 눈으로 볼 수 없으니까, 또 귀로 들을 수 없고, 손으로 만져 볼 수 없으니까 이런 것들을 확신하기 위해서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의 존재를 확신하는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實像)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證據)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1:1). 이 말씀이 NIV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Now faith is being sure of what we hope for and certain of what we do not see.” 믿음은 우리가 희망하는 것들을 확신하는 것이고, 눈으로 볼 수 없지만 그것들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라는 뜻이지요?

문제는 우리가 이런 것들을 추구해서 정말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성경 말씀 9절을 보세요. “그러므로 우리가 몸을 입고 있든지, 몸을 벗어 버리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9절) 이 말씀이 NIV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So we make it our goal to please him, whether we are at home in the body or away from it.” 살든지, 죽든지, 우리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뜻 아닙니까? 오늘 말씀을 전체적으로 읽어 보면,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 사는 삶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추구하는 믿음으로 사는 삶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신앙의 사람들은 모두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이는 것처럼 살았습니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모두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 살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따라 살았습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 때는 이 모든 것이 내게 너무나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그 모든 것이 아무 쓸모 없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것들 뿐만 아니라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빌립보서 3:7-8)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 그가 추구했던 것들은 모두 눈에 보이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난 후에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소중한 것들이 발견했습니다.

둘째로,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 살지 않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식하는 삶을 산다는 뜻입니다. 오늘 말씀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합니다. 각 사람은 몸을 입고 사는 동안, 행한 선한 일이나 악한 일이나 자기가 행한 행위대로 거기에 알맞는 보응을 받게 될 것입니다.” (10절)

우리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면서 산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고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위선적(僞善的)인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위선자를 영어로 ‘hypocrites’라고 합니다. 이 말의 어원은 ‘stage actor (무대 위의 배우)’라는 뜻입니다. 자기는 각본에 나와 있는 대로 그렇게 착한 사람이 아니지만, 착한 사람처럼 연기를 해야 합니다. 자기는 슬프지 않지만 슬픈 사람처럼 눈물을 흘리는 연기를 해야 합니다.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는 사람은 이렇게 위선적인 사람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사람들의 의견을 구하기 보다는 성경에 나와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릅니다. 죄의 길을 따르지 않고 의의 길을 따릅니다. 다윗 같은 사람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끝까지 진실한 길을 걸을 수 있었고,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것처럼 두려워하며 그 앞에서 행동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그 어떤 대가도 기꺼이 지불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라고 확신하면 결코 멈추지 않습니다. 비록 그 길이 아무도 가지 않는 좁고 외로운 길이라고 할지라도 그 길을 기꺼이 선택합니다.

문제는, 저와 여러분이 눈으로 보는 대로 살지 않고 믿음으로 사는 삶의 방식을 선택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설교를 하는 제 마음 속에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9장에 나오는 ‘부자 청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청년의 나이에 어떻게 이렇게 돈을 많이 모를 수 있었는지 그 이유는 성경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다른 성경에 의하면, 이 청년은 그 나이에 이미 사회의 지도자였다고 합니다 (누가복음 18:18). 예수님은 이 청년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만일 네가 완전해지길 원한다면,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물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런 후에 와서 나를 따르라!” (마태복음 19:21) 하지만, 이 청년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청년이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의 방식은 눈에 보이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청년에게 제시했던 “나를 따르라!”는 삶의 방식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추구하는 새로운 방식이었습니다. 이 부자 청년은 예수님의 제안을 거부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 왔던 삶의 방식을 바꾸는 용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이야기는, 갈릴리 어부들의 이야기입니다. 이 어부들 역시 고기를 잡아서 생계를 이어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어부들 역시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느 날, 이 어부들에게 자신들의 삶의 방식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나를 따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마태복음 4:19) 이 말씀을 들은 어부들은 배와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선택하는 용기와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들의 이야기를 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결단을 미루어왔습니다. 여러 번 우리에게 삶의 방식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결단을 미룬 채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이젠 대답을 해야 합니다. 크리스천의 수는 많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동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없는 이 때에, 우리는 더 이상 대답을 미룰 수 없습니다. 결단을 하지 못하는 이유 중의 가장 큰 이유는 믿음으로 사는 삶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의 방식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정말 나는 이렇게 살아서 행복할까? 만족할까?” 하는 질문이 계속 생깁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제가 주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12:1에 있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구름 떼와 같이 수많은 증인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We are surrounded by such a great cloud of witnesses).” 이 ‘구름 떼’와 같은 사람들은 모두 눈에 보는 대로 살기를 거부하고 믿음으로 살기로 결단했던 사람들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나 혼자가 아닙니다. 구름같이 많은 증인들이 우리를 에워싸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12/31/2016 | 송구영신예배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 God's Plan For Us.

예레미야 29:10-14

구약 성경에 나오는 두 가지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하는 연대가 있습니다. 하나는, BC 722년이고요. 또 하나는 BC 586년입니다. 앞의 연도는 북왕국 이스라엘이 아시리아에게 멸망한 연대입니다. 뒤의 연대는, 남왕국 유다가 바빌로니아에게 멸망한 연대입니다. 유다 민족은 바빌로니아로 잡혀가서 70년 간 포로 생활을 합니다.  오늘 읽은 성경 말씀은 유다 민족이 멸망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그의 신실한 종 예레미야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잘 읽어보면, 비록 나라는 멸망하지만 앞으로 이런 일들이 있을 것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나와 있는 하나님의 약속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로, 70년이 지난 후에 유다 민족을 다시 고국으로 데리고 오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유다 민족의 역사에도 그렇지만, 우리의 삶에도 하나님이 정하신 때와 기간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70년의 포로 생활을 한 후에’라고 나와 있습니다. 성경에 그런 말씀들이 많이 있습니다. 야곱의 후손들은 이집트에서 430년 간 지내야 했습니다. 430년이 지나자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출애굽 시키셨습니다. 이렇게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민족은 광야에서 40년을 보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기간에는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가 들어 있습니다. 야곱의 후손들은 430년을 이집트에서 지내면서 기하급수적으로 수가 불어났습니다. 또 이스라엘 민족은 40년 간 광야생활을 하면서 “사람이 사는 것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교훈을 배웠습니다. 유다 민족은 70년 간 바빌로니아에서 지내면서 하나님의 율법의 소중함을 발견했습니다. 유다 민족에게 70년의 시간은 하나님의 법을 소홀하게 여겼다는 반성과 회개의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 속에 고난이 있습니다. 어렵고 힘든 시간들이 있습니다. 혼자 견디어 내기 어려운 시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면 이 고난의 시간들이 아름다운 것들로 변화하게 된다는 사실을 압니다. 이 사실을 솔로몬이 전도서 3:11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He has made everything beautiful in HIS time.)......”

지금 여러분의 삶을 한번 돌아 보십시오. 고난이 있습니까? 아픔이 있습니까? 힘든 일들이 있습니까?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고난의 시간을 주시는 목적과 의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이렇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자녀들에게 이렇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고난의 시간에도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습니다. 야고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고난 당하는 사람이 있다면 기도하십시오. 즐거운 사람이 있다면 찬송하십시오.” (야고보서 5:13) 또, 시편 119편에는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71절)”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My suffering was good for me, for it taught me to pay attention to your decrees.” (New Living Translation)

그러므로, 우리 크리스천들은 고난의 시간에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나에게 이 고난을 주신 목적과 의도가 무엇인지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고난의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에 더욱 집중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도록 해야 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어떤 것인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절대로 우리를 해치거나 망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가 잘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의 자녀들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은 희망을 주고, 빛나는 미래를 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 말씀이 오늘 읽은 11절 말씀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너희를 위한 나의 계획이 무엇인지 나는 알고 있다. 나의 계획은 너희를 해치는 것이 아니라, 번영과 희망과 미래를 주는 것이다.” 이 말씀은 요한복음 10:9-11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과도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나는 문이다. 나를 통해 들어가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 사람은 들어가기도 하고 나가기도 하며, 또 좋은 목초를 발견하기도 할 것이다. 도둑은 훔치고, 죽이고, 파괴하기 위한 목적으로 온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더욱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해 왔다. 나는 선한 목자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문제는, 우리가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지 않는다는 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과의 언약의 관계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는 어떤 경우에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자식이 미울 때고 있고, 싫을 때도 있지만, 그런 때에도 부모와 자식이라는 관계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그의 자녀들과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부정하지 않고,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해 나간다면, 우리는 하나님과의 언약의 관계 속에 있는 것입니다. 여전히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가 잘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빛나는 미래를 주는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에게 “너희가 내 이름을 부르고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의 기도를 들어 주겠다. 너희가 온전한 마음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날 것이다 (12-13절)”라고 약속하십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In those days when you pray, I will listen. If you look for me wholeheartedly, you will find me.” ‘in those days’라는 말은 너희가 나라를 잃어 버리고 바빌로니아에서 힘들게 살아갈 때라는 뜻입니다. ‘고난의 시간에’ ‘힘들고 외로운 시간에’ 이런 뜻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시간에 마음을 다해서 나를 찾으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만나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시지요? 우리 크리스천에게 고난의 시간은 단순히 힘든 시간이 아닙니다. 크리스천에게 고난의 시간은 하나님께 기도 응답을 듣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발견할 수 있는 축복의 시간입니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은 사랑하는 그의 자녀들에게 일부러라도 고난의 시간을 주십니다. 그래서 기도하게 하시고,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게 하십니다. 히브리서 12:5-7에 이런 말씀이 있는 것을 아시나요? “내 아들아, 주의 훈계를 가볍게 여기지 말고, 주님께서 너를 꾸짖으실 때, 낙심하지 마라.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자에게 벌을 주시고, 그의 아들로 받아들인 자들을 채찍질하신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받는 고난을 아버지의 훈계로 알고 견디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아버지가 자기 아들에게 벌 주듯이 여러분을 대하시는 것입니다. 아들을 훈계하지 않는 아버지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제 2016년이 지나고 2017년 새해가 밝아 왔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한 해가 주어졌습니다. 여러분은 새해를 어떻게 살고 싶습니까? 특별히 여러분은 크리스천으로서 하나님께서 주신 한 해를 어떤 마음으로, 어떤 자세로 살고 싶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인하는 한 해가 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까? 항상 내가 크리스천 맞는지 의심하는 믿음생활이 아니라, 나의 삶의 환경이 어떻게 변해도 흔들리지 않는 그런 믿음생활을 살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기세요. “너희를 위한 나의 계획이 무엇인지 나는 알고 있다. 나의 계획은 너희를 해치는 것이 아니라, 번영과 희망과 미래를 주는 것이다.”

다시 말씀 드립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아무에게나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자기 백성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나를 통해서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성경 말씀 읽어야 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의 삶을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내가 내 삶의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 삶의 주인인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산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14절 말씀에 “나 여호와의 말이다” 이런 말이 두 번이나 나옵니다. “Declares the Lord.” (NLT) “Says the Lord.” (NIV)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입으로 말씀하신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니까 아무도 이 말씀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차이나 음식점에 가서 음식을 다 먹고 나면 포춘 쿠키를 줍니다. 포츤 쿠키를 반으로 쪼개면 하얀 종이가 나옵니다. 그 종이에 온갖 좋은 말이 다 들어 있습니다. 포츤 쿠키에서 기분 나쁜 말이 나오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적힌 말은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말들입니다. 그렇게 되면 좋고, 안 돼도 누구 한 사람 시비 거는 사람이 없습니다.

오늘 여러분에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습니까? 이 말씀에 대하여 책임 지시는 분이 계십니다. “De-clares the Lord”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에 대하여 책임을 지신다는 것입니다. 2017년 한 해 동안,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게, 더욱 성숙하게 만들어 나가십시오. 하나님께서 내 삶의 주인이신 것을 믿으십시오.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말씀을 믿고 기도하십시오.

오늘 읽은 예레미야 29:11 말씀 같이 한번 읽어 볼까요? “너희를 위한 나의 계획이 무엇인지 나는 알고 있다. 나의 계획은 너희를 해치는 것이 아니라, 번영과 희망과 미래를 주는 것이다.”


12/25/2016 | 크리스마스 메시지 II

하나님의 때가 차매 When God's Proper Time Had Fully Come

갈라디아서 4:4-7

우리 찬송가에 성탄 찬송이 모두 25개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탁월한 성탄 찬송을 하나만 선택하라고 하면 무슨 찬송을 선택하시겠습니까? “그 어린 주 예수 (108, 114장), “그 맑고 환한 밤중에 (112장)” “기쁘다 구주 오셨네 (115장) “오 베들레헴 작은 골 (120장)” “참 반가운 성도여 (122장)” “저 들 밖에 한밤중에 (123장)” “천사들의 노래가 (125장)” “고요한 밤 거룩한 밤 (109장)” “오 거룩한 밤 (622장)” 이 중에서 하나만 선택한다는 것이 쉽지 않지요? 누가 저에게 묻는다면 저는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라고 말하겠습니다. 다른 찬송도 좋지만,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이 찬송은 가사도 그렇고, 곡조도 그렇고, 부르 때마다 뭔가 마음을 설레게 하는 특별한 것이 있습니다. 이 찬송은 세계 곳곳에서 300개 언어로 번역되어 불리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찬송가는 정말 우연하게 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화면을 한번 보실까요? 오스트리아의 작은 마을 오벤도르프 (Oberndorf)에 있는 성 니콜라스 (St. Nicholas) 교회입니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 최초로 불려진 교회입니다. 지금도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수많은 사람들이 이 교회를 찾는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이 교회를 “The Silent Night Chapel (고요한 밤 교회)”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조셉 모르 (Josef Mohr, 1792-1848)라는 이 교회를 섬기던 신부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이 교회의 성가대 반주자였던 그루버 (Franz Gruber, 1787-1863) 입니다. 모르 신부가 가사를 썼고, 그루버가 곡을 붙였습니다.

1818년 성탄절 전 날, 오스트리아 티롤 (Tyrol) 지방의 오벤도르프 마을에 폭설이 내렸습니다. 교회에서는 성탄절 이브 미사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폭설이 내린 것입니다. 설상가상으로 그 교회의 오르간이 고장이 나서 연주를 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오르간 연주자였던 그루버는 걱정이 태산이었습니다. 그루버의 걱정을 듣고 있던 모르 신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르간 걱정은 하지 마세요. 내가 크리스마스 노래 가사를 하나 써 놓은 것이 있는데, 당신이 이중창과 합창을 위한 곡으로 만들어 줬으면 좋겠습니다. 오르간을 쓸 수 없으니까 내가 기타 반주를 하겠습니다. 시간이 촉박하니, 단순한 멜로디로 곡을 만들면 좋겠습니다.” 그 때 모르 신부는 26세였고, 그루버는 31세였다고 합니다. 그루버는 모르 신부가 써준 가사를 들고 흰 눈이 덮인 들판을 걸어서 자기 집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하얀 눈으로 덮인 대지를 걷고 있던 그루버의 입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멜로디가 흘러나왔습니다. 그리고, 기다리던 크리스마스 자정 미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모르 신부의 기타 반주에 맞춰서 모르 신부가 테너 목소리로, 그루버가 베이스 목소리로 먼저 이중창으로 노래를 부르고, 이어서 교회 합창단과 함께 불렀다고 합니다. 갑작스럽게 만들어진 노래였지만, 참석한 교인들은 이 찬송을 들으면서 많은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탄 찬송은 이렇게 해서 세상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 이듬 해 봄이 되어서, 칼 마우라허(Carl Mauracher)라는 오르간 수리공이 교회를 찾아 왔습니다. 모르 신부는 오르간이 고장이 나서 어떻게 했느냐고 묻는 수리공에게, 그동안에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줬습니다. 그랬더니, 이 수리공이 그 노래 악보를 좀 보여 달라고 하면서 악보를 그려 가지고 돌아갔습니다. 이 수리공은 이 악보를 음악 가족인 스트라서 (Strasser) 가족에게 전해줬는데, 이 가족 합창단이 유럽을 돌아다니면서 이 노래를 불렀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이 노래가 오스트리아 티롤 지방의 민요로 알려졌었다고 합니다.

“Silent night holy night, All is calm, all is bright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사방은 고요하고, 모든 것은 밝게 빛나네)”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누가복음 2:9)” 이 성경 말씀이 생각나는 가사입니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James S. Steward (1896-1990)라고 하는 영국의 목사님이 “The Life and Teaching of Jesus Christ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교훈)”라는 책을 썼습니다. University of Edinburgh의 New College에서 신약성서 언어학 (New Testament Language)을 가르친 교수이며 목회자였습니다. 스튜어드 목사는 이 책에서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때에 대해서 4가지 중요한 사실을 주장을 했습니다.

첫째로, 그 때는 인류 역사상 가장 밝았던 때라고 합니다. 하늘의 빛이 어두운 세상을 비추었을 때, 동방의 박사들은 그 빛을 따라 먼 길을 떠났으며, 왕들은 깜짝 놀라 “나도 그에게 경배하겠노라” 하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고, 목자들은 천사들에게 들은 말을 확인하려고 목장을 떠났습니다. 하늘의 천군천사는 역사상 가장 밝은 때가 온 것을 알리며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에게 평화"라는찬송을 불렀고, 사람들의 마음은 마치 독수리가 날개를 치며 올라가듯이 하늘로 치솟아 올랐습니다. 이 모든 일들은 유대 땅 작은 마을 베들레헴의 구유에서 구세주가 탄생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들이었습니다.

일찍이 인류 역사에 이렇게 희망 차고 밝았던 때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아의 탄생은 인류에게 큰 희망을 안겨 주었습니다. 마태는 그의 복음서에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마태복음 4:16)”라고 썼습니다. 역사가들은 그의 탄생을 전후해서 B. C. 와 A. D. 로 역사를 나누었습니다. B. C. 는 ‘before Christ (그리스도 이전)’라는 뜻이고, A. D.는 ‘Anno Domini (Year of Our Lord, 우리 주님의 해)’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탄생 이전의 역사가 어둠과 절망과 하나님의 심판의 역사였다면, 예수님 탄생 이후의 역사는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였고, 용서와 화해의 역사였고, 구원의 역사였습니다.

둘째로, 언어의 통일입니다. 세계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주전 330년에 페르시아 제국을 멸망시킨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는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습니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알렉산더는 더 이상 정복할 땅이 없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알렉산더는 그 이전의 어떤 정복자들과 달랐습니다. 알렉산더는 단순히 많은 나라들을 정복하는데 만족하지 않고, 사람들의 마음까지 정복하려고 했습니다. 그리스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넘쳤던 그는 그의 제국의 구석구석까지 그리스 문화를 전파하려고 했습니다. 그 결과, ‘코이네 (koine)’라는 그 당시 그리스 언어는 세계 어디서나 통용되는 언어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아시지요?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그들의 메시지를 모두 그리스어로 기록했습니다. 스페인이든지, 이집트이든지, 그리스어로 선포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성경이 이미 기원전 200년 경에 ‘코이네’ 그리스어로 번역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성경을 ‘70인력’ 혹은 “셉투아진트 (Septuagint)’라고 합니다. 예수님도 구약 성경을 읽을 때 ‘셉투아진트’로 읽었을 것입니다. 초대 기독교 신자들도 구약 성경을 ‘셉투아진트’로 읽었습니다. 신약이든, 구약이든 그리스어로 번역된 성경은 쉽게 그리스 문화권의 사람들에게 쉽게 전파되었습니다.

셋째로, ‘로마의 평화 (Pax Romans)’입니다. 알렉산더가 죽으면서 알렉산더 제국은 점차 힘을 잃게 되고, 그 틈을 타고 로마가 세력을 확장하더니, 마침내 거대한 제국을 건설합니다. 세계는 로마 제국의 영토로 속속 병합되어, 세계는 이제 알렉산더 제국에서 로마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나라와 나라 사이의 국경이 무의미하게 되고, 나라와 나라, 민족과 민족 간의 분열과 적대감이 사라지고, 세계 어디서나 로마의 깃발을 볼 수 있었습니다. 세계는 로마에 의해서 하나의 공동체가 된 것입니다.

로마제국 밑에서 세계는 평화를 누렸습니다. 사람들은 이 평화를 ‘로마의 평화 (Pax Romans)’라고 불렀습니다. 그것은 로마의 강력한 힘에 대항할 어떤 세력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로마의 권위에 도전하지 않는 이상, 로마는 점령 지역의 문화와 종교, 사회적인 관습을 인정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돌 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는 신중한 성격이었던 로마의 황제 어거스터스 (Augustus, B.C. 63-A.D. 14)는, 제국 영토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군사 도로를 뚫었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은 로마가 군사적인 목적으로 건설한 도로망을 말합니다. 제국 어디서든지 반란이 일어날 때는 신속하게 군대를 보내서 진압하기 위한 목적으로 도로를 건설한 것입니다. 하지만, 참 놀랍지 않습니까? ‘로마의 평화’ 시대에, 로마가 군사용으로 닦아 놓은 그 길로, 복음의 전도자들이 세계를 누비면서, 아무 제재도 받지 않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넷째로, 디아스포라 (diaspora) 유대인들입니다. 주전 722년에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게 멸망 했습니다. 그리고, 주전 586년에 남왕국 유다가 바빌로니아에게 멸망했습니다. 이 때부터 유대 민족의 디아스포라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나라를 잃어버리고 흩어져 세계를 떠돌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유대민족의 디아스포라 역사는 하나님께서 개입하신 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세계를 떠돌면서도 메시아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삶이 고단하면 고단할수록 더욱 더 메시아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 (그리스도)라는 기독교의 메시지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호기심과 관심의 대상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은 어디를 가든지 유대인 디아스포라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사도들이 어디를 가든지 먼저 유대교 회당을 찾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 사도행전 16장에 나오는 빌립보 선교 이야기를 아십니까? 유럽 선교의 문을 열었다고 평가 받는 역사적인 바울의 빌립보 선교는, 바울이 안식일에 강 가에 있는 유대교 회당을 찾아가서 말씀을 전하고, 거기서 루디아 (Lydia)라는 한 유대 여자를 만나면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리스의 도시였던 빌립보에 이미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사람들이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을 때, 세상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알렉산더 제국을 사용하시고, 로마 제국을 사용하시고, 유대인들의 슬픈 역사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사용하셔서 복음을 들을 준비를 갖추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이런 시각(視角)으로 오늘 갈라디아서 말씀을 읽어 보십시오. “But when [in God’s plan] the proper time had fully come, God sent His Son, born of a woman, born under the [regulations of the] Law, so that He might redeem and liberate those who were under the Law, that we [who believe in His Son] might be adopted as sons [as God’s children with all rights as fully grown members of a family]. And because you [really] are [His] sons, God has sent the Spirit of His Son into our hearts, crying out, [a] ‘Abba! Father!’ Therefore, you are no longer a slave (bond-servant), but a son; and if a son, then also an heir through [the gracious act of] God [through Christ].” [a] An Aramaic word used by small children when informally addressing their fathers. (Amplified Bible)

오늘 말씀의 요점은 간단하고 분명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위한 ‘proper time (적절한 때)’이 무르 익었을 때, 하나님의 아들이 태어나셨다는 것입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정확한 '타이밍'을 맞춰서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모든 여건을 무르익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에 ‘타이밍’이 있듯이,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에도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는 ‘타이밍’이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타이밍’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우리의 불행도, 때로는 우리의 절망도 사용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떤 환경에서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하나님의 아름다운 뜻을 이루어 나가신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28, 전도서 3:11).

둘째로, 누구든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양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with all rights as fully grown members of a family’라고 했습니다. 가족의 어엿한 멤버로서, 완전한 권리를 가진 양자가 된다는 뜻입니다. 오늘 7절에도 나와 있지만, 바울은 로마서 8:17에서 더욱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If we are children, then we are heirs--heirs of God and co-heirs with Christ.” “만일 우리가 자녀라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공동의 권리를 가진 하나님의 상속자들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우리는 하나님을 ‘Abba! Father’라고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God has sent the Spirit of His Son into our hearts.”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 속에 그의 아들의 영을 보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가 완전히 찼을 때, 그의 아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세계의 언어를 하나로 통일 시키시고, 구약과 신약 성경을 모두 희랍어로 번역하게 하시고, ‘Pax Romana (로마의 평화)’를 복음 전파의 기회로 이용하게 하시고, 전 세계로 뻗어 나가는 도로를 뚫어서 전도자들이 그 길을 가게 하시고, 또 유대인 디아스포라들이 가지고 있던 메시아에 대한 희망을 이용하셨습니다.

동일하신 하나님은 지금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때를 위해서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 눈에는 잘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은 정확하게 ‘타이밍’을 맞춰서 하나님의 심판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이 사실을 아는 우리는 어떻게 이 시대를 살아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이 일을 위해 여러분을 도구로 사용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