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모음
2/25/2024 | (사순절 두번째 주일)
십자가와 동행하는 사람들 '말씀으로 이기신 시험 2' Overcoming the trials with the word of God 2
누가복음 4:5-8
사순절 두번째 주일입니다. 지난주에 이어서 '말씀으로 이기신 시험'으로 설교를 전하겠습니다. 사순절기 가운데 시험을 이기신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에도 능력이 되기를 바랍니다.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신 예수께서는 40일 동안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는데, 첫번째 시험은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지에 대한 선택의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에게 빵을 돌이 되게 하라는 시험은 자신의 능력으로 돈이나 나의 능력을 과시하려는 욕망에 대한 문제입니다. 이 끊임없는 유혹은 믿음의 성도들도 받을 수 있고, 시험을 이기기 위해서는 매일 먹는 일용할 양식을 볼때마다 보이지 않는 식탁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기억하며 살아가자고 권면했습니다. 예수께서 마귀를 물러가게 할 권세를 주셨으니 오늘날 다가오는 빵인가? 말씀인가?라는 유혹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인생의 최우선적 가치로 여기며 살아보자고 했습니다.
마귀는 광야에서 시험을 이기신 예수를 높은 곳으로 데려갑니다. 순식간에 세상의 모든 나라들을 보여 주며, 자신이 세상의 모든 영광을 처리할 수 있음으로 현혹하더니 자신에게 경배하면 모든 나라를 다스릴 권세와 영화를 주겠다는 제안을 합니다.
‘바실레이라 투 데우’라는 헬라어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와 다스림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지금까지 한순간도 통치하지 않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죄로 인한 세상은 폭력적이고 혼돈의 세상이 되었습니다. 힘과 권력을 갖는 자가 살아남게 되는 시스템의 지배 아래 세상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귀의 이 유혹에 다 넘어 갔습니다. 세상의 명예와 권력은 매우 현실적이고 아주 매력적이기 때문입니다.
현대사회만이 아니라 창세기를 보면 도시문명을 이룩하기 위한 사람들이 하나님처럼 되려고 바벨탑을 쌓아 올립니다. 바벨은 고대 근동에 있던 다른 많은 도시와 마찬가지로, 성벽으로 둘러싸인 큰 신전으로 신들의 왕국에 도달하기 위해 설계된 계단식 탑이었습니다. 하나님처럼 되려고 쌓아 올린 바벨의 도시가 보기에는 거대해 보였지만 높이 계신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마치 땅에 사는 개미들이 쌓아 올린 흙으로 올린 집에 불과했지요. 창세기의 기자의 말씀이 참 재미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 오셨다. 라고 표현합니다.
창세기 11장 5절을 보시겠습니다. “주께서 땅 위로 내려오셔서, 사람들이 건설한 도시와 쌓아 올린 망대를 바라보셨다.”(개역개정)
힘을 지닌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리를 찬탈하기 위해 바벨의 신전을 높이 쌓아 올렸지만 하나님은 더 높은 곳에서 너희가 지은 탑을 한번 보자꾸나 하고 내려 오신 것입니다. 하늘 높이 이륙한 비행기 위에서 한번쯤 우리가 사는 도시를 내려다 본적이 있으실 겁니다. 높은 하늘에서 내려다 보면 높은 건물도 점 하나에 불과합니다. 작은 물체는 보이지도 않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관점에서 세상의 권력은 길지 않습니다. 자신의 힘을 절대화 하려고 했던 제국의 역사들을 보면 모두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권세와 영화는 아침 이슬처럼 사라지는 춘몽 (春夢)에 불과합니다.
공중권세를 잡은 마귀의 유혹은 어둠의 세력에 해당하는 일부 권세를 지니고 있기는 합니다.
고린도 후서 4장 4절을 보면,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권세를 마귀에게 허락해 주시지는 않았습니다. 마귀가 모든 나라들을 다스리는 권세와 영화가 자기의 권세 아래 있어서 얼마든지 줄 수 있다고 하는 말은 명백한 거짓말입니다. 영원한 권세와 나라는 오직 하나님께만 속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만이 영원히 설 것이라" 하나님의 약속대로 메시아의 오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뤄졌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는데 그 능력의 절정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지금도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경제, 사회, 무역, 국가 간의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하면서 살아갑니다. 보이지 않는 전쟁과 보이는 전쟁들은 인간의 죄성을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전쟁은 불신과 분열을 야기시키며, 힘이 없는 이들은 상처와 좌절, 슬픔과 고통을 경험하며 세상의 권력이 사람들의 우상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마귀는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높은 곳으로 올려 놓고 땅의 것을 내려다 보며 세상의 권세와 영화를 줄 것이라 유혹합니다. 이 마귀의 소리는 땅의 것에 마음을 두는 모든 이들의 마음을 흔들리게 할 것입니다. 사순절기 40일 동안 시험 받으시며 이기신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참된 지식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창조적인 권력이 파괴하는 권력을 이깁니다.
8 예수께서 마귀에게 말씀하셨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를 ‘주 너의 하나님을 경배하고, 오직 그분만을 섬기라.’ 하였다.”
하나님 나라의 질서와 제국의 질서는 지향하는 방향이 다릅니다. 힘이란 것은 그 자체가 지닌 억압과 파괴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파괴하는 권력과 창조적인 권력이 양립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 유혹을 위로부터 내려오는 능력으로 이겨 내셨습니다. 창조적인 권력이 파괴하는 권력을 이깁니다. 어떤이들은 세상을 살아가며 경험하지만, 어떤 이들은 경험을 하지 못해서 감동을 느끼지 못하는데요. 창조적인 힘은 사람을 변화시키어 관계를 새롭게 합니다.
형들에 의해서 노예로 팔려간 요셉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창조적 권력을 경험했습니다. 실제 그의 삶을 보면 보디발의 집에 들어가 성실하게 일을 하다가 여주인의 모함으로 누명까지 씌어져 깊은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당시 감옥은 지하 깊은 곳이라 햋빛도 들어오지 않는 어둡고 차가운 감옥에서 지내야 했을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요셉에게는 희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를 정확한 타이밍에 더 큰 지위에 올려 당대 최고의 나라의 권세의 자리에 앉게 하셨습니다. 이때 요셉은 자신이 지닌 권력으로 복수하기에 더 없이 좋은 위치였습니다. 때마침 기근으로 인해 자신을 팔았던 형들까지 제 발로 요셉을 찾아옵니다. 그런데 요셉은 그 힘을 사용해 복수가 아니라 화해를 선택합니다. 요셉을 죽이려고 했던 형들의 파괴하는 권력은 요셉이 발휘한 창조적인 권력 앞에서 무너지는 순간입니다.
지난 미국의 역사만 보아도 피한방울 섞일 수 없었던 백인과 흑인의 관계는 창조적 권력을 사용한 정치가들로 인해 흑인들은 존재적 가치를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미국 사회속에서 흑인들은 비인격적이고 부당한 대우와 불합리한 폭력을 겪어야 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기록된 성경 위에 세워진 미국사회속에서 흑인들은 원수의 범주 안에도 없는 천한 노예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창조적인 권력은 예수를 통해서 은혜 아래 세상을 새롭게 하셨습니다. 지금은 존재 자체로 인정받는 세상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문제는 세상의 정사와 권세를 잡는 악한 자들도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파괴적인 힘에 눈을 뜨는 연령층이 과거에 비해 낮아졌다는 것입니다. 파괴적인 돈의 힘에 눈을 뜬 어린이들의 범죄가 늘어나고, 학교 폭력과 따돌림의 현상들, 교칙의 질서와 가르침에 도전하며 자신들의 권리만을 주장하는 현상들은 힘이 지닌 위험성들입니다.
물론 사람들은 관계속에서 자신의 힘을 행사하기도 하고 힘에 의해 영향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문제는 이 힘을 다른 이들의 삶을 착취하는데 사용하느냐? 다른 이들을 이끌어 주고 섬기는데 사용하느냐입니다. 진리의 힘을 잃어버린 채 세상의 힘만을 추구하다 보면 우리는 죽은 물고기처럼 세상의 흐름에 떠내려가게 될 것입니다. 힘이 지닌 이러한 위험성을 이길수 있는 방법은 인간 안에 선하게 조절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창조적인 권력은 돈으로 살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총이 부어지게 될때에 가능한 것입니다. 구원해 주신 사랑의 힘으로 세상의 풍속을 쫓는 파괴적인 권력을 이겨 나가시기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이 늘 우리 곁에 계시다는 약속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집트의 제국 문화 아래 종으로 살던 백성들의 작은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고 조상들에게 하셨던 약속을 기억하셨습니다. 출애굽기 2장 2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음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셨다.” 이집트의 수많은 신들은 하층 계층의 사람들은 접근하기 힘든 신들이었던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고통스럽고 아파하는 신음소리에 응답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고통 당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찾아가셔서 백성들의 아픔과 고통에 깊이 공감하시고 구체적으로 행동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곁에 함께 계시며 자기 백성을 삼기 위한 하나님의 ‘자기계시’입니다. 약속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자기계시에 눈을 떠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곁에 계심을 믿음으로 받아 들여야 합니다.
그 약속의 첫번째 계명은 나 외에 다른 신 즉 다른 신을 마음에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왕이신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과 사랑의 계약을 맺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지파 공동체는 당시 고대 중동 지역의 제국주의 공동체와는 다른 세상의 대안 공동체였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은 농경사회속에서 고아와 과부, 나그네에게 떨어지는 이삭 등은 줍지 말라는 규례나 자기 밭이 아니어도 포도와 이삭을 먹을 것을 허용하도록 정하셨고, 땅의 모든 소유권이 하나님께서 있음을 알도록 하셨습니다. 이 약속을 받아들임으로 다른 나라들과 구별된 존재가 되도록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사회가 왕을 요구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졌을 때에도, 다른 나라의 왕들이 되어지는 과정과 다르게 하나님께서는 기름 부으심으로 왕을 세우셨습니다. 이후 왕정시대에는 선지자들과 예언자들을 보내셔서 다른 나라 왕과 같이 되어지는 것에 동의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 왕조의 영원함과 메시야 오심은 다윗이 의롭거나 완전해서가 아닙니다. 다윗도 연약한 인간에 불과하지만 그에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말할 수 없는 큰 죄를 범죄했을 때에 죄를 은폐하려고 했지만 나단 선지자의 말씀을 듣고 애통하며 회개합니다. 죄에 대한 값으로 왕국은 분열되고, 예루살렘의 성전이 파괴되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죄를 회복 시키시며, 약속하신 다윗의 자손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게 하심으로 인류에게 새로운 소망을 주셨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하나님과의 약속을 기억하며 하나님께서 우리 곁에 계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와 가정에서 학교와 일터의 현장에 우리 곁에 계시는 하나님은 세상속에서 다른 존재를 살아가게 하십니다. 온세상 죄를 지고 가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었습니다. 온 마음을 다해 낯선 땅에서 수도 없이 무너졌을 영혼들의 마음을 기억하며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손과 발이 되어 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온전한 복음으로 세상속에서 하나님의 명예를 지켜 나가기를 원하십니다. 사순절기를 통해 주님을 향하는 노래가 더 깊어지고, 하나님이 선택하신 거룩한 사람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도 원수들의 한복판에서 그의 사역을 감당해 나가셨습니다. 자신을 조롱하고, 핍박하는 세상에서 십자가를 지셨고, 예수를 사랑했던 모든 제자들이 다 떠나가고 홀로 남으셨습니다. 그럼에도 예수께서는 하나님과의 원수 된 이들에게 화평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세상의 한복판에서 살아가며 세상의 유혹이 있으나 믿음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마땅합니다. 세상의 유혹을 이길 수 있는 힘은 예수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셋째,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예배하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는 성령의 충만함으로 오히려 유혹의 자리로 나가셨습니다. 유혹의 자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사단은 매력적인 환상으로 예수를 세상의 명예와 영화의 자리로 끌어 당겼지만 예수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오직 그분만을 섬기라는 말씀으로 대응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예배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실때에 이집트에서 구원받아 나온 하나님의 백성들 안에 옛습관들이 있었기에 새로운 백성으로 삼으시기 위해서 광야로 인도하셨습니다. 광야는 이집트의 화려함이나 세상의 권세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 보아야 하는 장소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준비해 나온 자신들의 양식이 다 떨어지고 하나님이 주시는 하늘의 만나와 메추라기를 40년 동안이나 먹어야 했으며, 광야에서 터져 나오는 샘물을 마셨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삼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선택되고 하나님과 계약 공동체로 언약을 맺기까지는 그들이 어떤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선악과를 취한 것은 교만의 죄였습니다. 모세는 신명기에서 네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를 섬기라고 마지막 유언을 남겼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가나안에 들어갔지만 가나안의 풍요의 신들에게 눈이 멀어 우상을 섬기게 됩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이방신을 선택한 결과 역사속에서 또 다시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 갑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눈이 멀고 귀가 들리지 않아서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말씀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지금도 세상이 말하는 돈과 권력과 명예가 더 힘이 된다고 말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시험을 이길 능력이 우리 안에 없습니다. 시험을 이기신 예수께 보호를 요청해야 합니다. 죄악의 권세를 이기신 십자가의 능력이 우리를 보호해 주시고, 우리의 죄를 덮어 주십니다. 죄가 없는 예수께서 하늘의 능력을 포기하고 죄의 대가를 치르기 위해 고통속에서 밤을 새며 기도하셨습니다. 이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변화를 일으켜 하나님을 예배하고 전심으로 섬기도록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을 잊고 세상 공중권세 잡은 자가 다스리는 권세와 영화에 현혹이 될 때에 그 힘은 가정이나 신앙공동체 안에서도 파괴적인 권력으로 사용되어 집니다. 로마시대는 군사적인 힘을 통한 평화의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제국의 힘의 의해서 황금기를 맞이했지만 다른 소수민족들에게는 절망적이었습니다. AD 70년 디도스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었고, 유대 소수민족은 나라를 잃어 버리고 세계로 흩어져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평화는 은혜를 선물 받는 사람에게 일어나는 다스림인데, 예수께서 이루신 하나님의 평화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로마 제국에 의해 무너진 성전을 예배하는 이들의 마음 안에 다시 세우셨습니다. 예수께서 주시는 새로운 나라의 질서 안에서 역사하는 힘입니다.
세상의 어떤 권력으로도 하나님과 평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이룬 정책적 평화는 기울어진 방편일 뿐입니다. 오직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를 ‘주 너의 하나님을 경배하고, 오직 그 분만을 섬기라.’ 고 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붙들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공생애 가운데 자신의 능력으로 병든 자들을 치유하고, 소외되고 연약한 이들의 친구가 되어 주시며 예배하셨습니다. 스스로 갚을 수 없는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빚을 탕감 해 주시는 은혜는 우리가 경험한 십자가 사랑입니다.
십자가는 현대사회의 힘의 논리를 부정하며, 세상 권세와 영화의 유혹의 자리에 대항하게 합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속에서 내가 만들어 낸 우상으로 스타가 되고자 한다면 '스스로 타락하는 자리'에 서게 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예배하시기 바랍니다. 그분만을 섬기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서 있는 삶의 자리는 나의 힘이 아니라 주님의 힘으로 타인을 섬기는 자리입니다. 예배하는 성도들이 주께 힘을 얻는 놀라운 비결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입니다. 여러분의 삶으로 '말씀으로 이기신 주님의 능력'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2/18/2024 | (사순절 첫번째 주일)
십자가와 동행하는 사람들 '말씀으로 이기신 시험 1' Overcoming the trials with the word of God 1
누가복음 4:1-4
사순절기가 시작되고 첫번째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사순절기에 예수님을 닮아가는 연습의 시간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에서 다 언급하고 있는 구절입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사순절기가 시작하는 시기에 이 본문을 예배 때 낭독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육체적 유혹을 말씀으로 이기는 과정을 본보기로 삼기 위해서였습니다. 40일 동안 순례길을 걷기로 결단한 교우들에게 말씀이 채워지리라 믿습니다.
예수께서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 성령으로 충만해 졌고,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셨습니다. 거기에서 40일 동안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도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마귀의 시험을 받아야 했습니다. 왜 마귀와 영적전쟁을 해야 했을까요? 예수께서 시험을 받는 것은 기독교 신앙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성경은 마귀의 존재를 어떻게 말씀하고 있으며, 예수께서 시험 받아야 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첫째, 구원받은 성도들도 마귀의 유혹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유혹을 받게 되는 곳이 많이 있습니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자기를 사랑하고, 하나님 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고, 즉 사랑이라는 단어 앞에 죄의 뿌리의 대상들이 우리의 눈과 귀를 현혹하는 것들이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어느 시대나 인간을 유혹하는 일들이 있었겠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유혹의 근원을 인정하지 않는 시대입니다. 현대사회는 보이지 않는 영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이나 과학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은 천사나 마귀의 실존을 부인하고, 과학적으로 증명되고 믿을 수 있는 성경을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천사나 마귀는 비물질적 존재입니다. 마귀의 기원을 창세기 3장에서 볼 수 있는데, 하나님 지으신 모든 것들이 심히 좋았던 동산에 뱀의 형태를 한 마귀가 하와로 하여금 범죄하도록 유혹합니다. 마귀는 처음부터 살인한자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오늘 본문에도 예수께서 성령에 충만한 상태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우리는 성경이 언급하는 마귀의 활동을 말씀 그대로 받아 들여야 합니다. 현대사회에서 발생하는 분쟁의 요인들을 보면 과거에 비해서 그 형태와 원인도 더 다양해 졌습니다. 기업과 노동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임금으로 인한 분쟁, 환경보호와 개발 간의 충돌로 인한 분쟁, 민족적 차별로 인한 폭력과 혐오 발언으로 인한 분쟁 등 정치 사회 문화속에서 분쟁의 요인들은 더 많아졌습니다. 인간의 이기주의나 자기 중심적 생각도 해결할수 없는 여러 갈등적 요인이 됩니다. 오히려 마귀는 우리의 연약함을 이용해서 유혹에 빠지게 하기도 하고, 한쪽으로 편향된 정보들로 인해 인간의 배려와 조화, 균형 잡힌 생각을 이기적이고 독선적으로 형성시켜 갑니다. 진리는 내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 안에 거하는 것인데, 진리까지도 내 소유라고 생각하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열매를 맺기 보다 다른 이들을 정죄하고 혐오하는 자리에 서게 되는 신앙의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이처럼 현대사회에 마귀의 활동이 줄었다고 볼 수 없습니다.
마귀의 특성은 죄를 일으키고 다른 사람들이 죄를 짓도록 유혹합니다. 성경에 마귀는 뱀(창 3:1,14) 바알세불(마 10:25), 세상의 임금(요 12:31) 공중의 권세 잡은 자(엡 2:2), 악한 자(마 13:19) 등으로 불리웁니다.
오늘 본문에도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를 40일 동안 계속해서 시험을 합니다. 예수께서 받으신 시험을 3가지로 알고 있지만 40일동안 시험을 받으셨다면, 아마도 여러 종류의 시험들을 더 많이 받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보여 주는 3가지 시험은 우리가 겪게 될 시험을 대표로 하는 상징적인 것들이 됩니다. 금식을 하고 계신 예수님에게 돌을 빵으로 만들어 먹으라고 유혹했습니다. 이는 우리의 삶에서도 보고 느낄수 있는 시험입니다. 인생은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예수께서도 받으신 시험의 종류였습니다.
그리고 만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땅에 엎드려 경배하라고 유혹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우리의 살아가는 현실에서도 이러한 유혹은 늘 있습니다. 더 잘 믿으면 더 외로워지는 세상입니다. 말씀이 주는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리면 믿음도 우리의 삶을 더 곤고하게 합니다.
만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여기에서 뛰어 내려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 그의 사자들로 하여금 너를 받아들이게 하라고 유혹했습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을 말씀으로 대응하셨지만 우리들은 현실의 압박과 환경에서 늘 인간적인 방법으로 대응하거나 세상속에서 타협하고 숨어버립니다. 인간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린 마음 안에는 늘 불안과 공허함이 찾아 옵니다.
마귀의 공격은 예수의 사역 전체를 통해 계속됐습니다. 그렇다면 교회시대나 새언약 시대나 우리는 여전히 세상 임금이라 불리는 마귀의 활동을 인정해야 합니다. 믿는 우리도 날마다 깨어 있지 않으면 예수를 닮아가는 자리가 아니라 시험하는 자리에 서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성령으로 충만했다면 마귀가 접근하지 못하는게 상식적으로 맞지 않습니까? 그런데 성령충만한 예수를 유혹하는 마귀는 오늘날 성령으로 충만한 성도들도 유혹의 대상으로 삼을 것입니다. 시각적으로 확실하게 구분되지 않지만 보이지 않는 영역이기에 성령의 충만한 순간에도 우리는 유혹 받을 수 있음을 인지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시험을 이겨 나가는 것이 믿음생활에 찾아온 시험을 이겨 나가는데 좋은 본보기가 될 것입니다. 사단의 시험은 우리가 늘 마주하는 가까운 관계들 안에도 있습니다. 이러한 시험을 이겨 낼 수 있는 것은 말씀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사순절 영적 절기를 보내며 홀로 있는 예배의 자리가 익숙하신 분들이라고 해도 여러분의 성경책을 펼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따라 영적 여정을 걸어가십시오.
둘째, 예수께서는 마귀를 물러가게 할 권세를 주셨습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 깊이 유지하며 자신의 믿음을 깊이 살펴 보는 것입니다. 마귀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사역을 파괴하고 대적합니다.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께 범죄하도록 시험했었고, 예수님도 시험하여 메시아 사역을 실패하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시험을 받으신 것은 시험 받게 되는 이들을 돕기 위함입니다. (히 2:18)
성도들은 믿음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바울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마귀로 하여금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지 못하도록 기회를 제공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안에 죄를 지속하고 있는 영역이 있다면, 그곳이 마귀의 공격을 받을 수 있는 치명적인 영역이 될 것입니다. 내게 실망을 주는 환경이 때때로 나를 어렵게 만들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주어진 환경을 이길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죄가 없으신 분이 세상에 오셔서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아버지께로 부터 오신 예수를 악한자가 만지지도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요한 1서 5:18) 죄에 대한 책임은 잘못된 것을 지속하려는 우리의 선택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육체적 삶과 성령의 삶에 대해서 구체적인 증거들로 로마서 6장과 갈라디아서 5장을 통해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거듭난 성도들에게 주님은 죄를 지배할 수 있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보내시며 귀신을 제어하는 능력과 권세를 주셨고, 바울도 전도사역 중에 점을 치던 귀신들린 여종을 만나 그에게서 나오라고 하는 영적 권세를 사용했습니다.
예수의 시험은 깨어진 세상을 회복하기 위한 예언의 완성이며, 메시아로서 그리스도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마귀의 유혹을 단호히 거부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심으로 사망의 세력은 패배하고, 마귀의 권세를 물리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광야에서 사단의 유혹을 이기시고 시험을 받으신 이가 능히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는 사함을 받았고, 죄가 더 이상 다스릴 수 없도록 밝히 드러내셨습니다. 이제 성도들은 마귀를 두려워 할 필요없이 하나님께로 부터 다시 태어난 자녀임을 확신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마귀의 유혹이 올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예수께서 40일 동안 마귀에게 시험을 받을 때마다 말씀으로 이기셨음을 기억하시며 영적 훈련을 하시기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유혹과 시험 앞에서 영적인 전쟁이 일어나는 것 조차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영적인 일들로 사람들을 두렵게 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고, 성경의 진리를 알아가는 일에 초점을 맞추고 믿음의 확신 가운데 거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악의 문제나 마귀와 싸우는 일에 지나치게 호기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일에 더 매진해야 합니다. 선하신 형상을 따라 세상속에서 희망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죄의 지배 안에 있도록 마귀가 유혹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복음의 능력이 있음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권세를 사용해야 합니다. 2천년 전 누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에게서 현실이 되었다는 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믿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 인생을 맡기며 복음이 없는 자에게는 복음을, 복음이 있는 자에게는 사명을 주어 사도행전의 후속편을 써 나가라는 것입니다.
셋째, 빵인가? 말씀인가?
우리가 잘 아는 3번의 시험의 과정 중 첫번째는 빵인가? 말씀인가?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지에 대한 선택 앞에서 시험을 받으시는 장면입니다. 빵으로만 살 수 없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채워야 할 무엇이 더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시대는 너나 할 것 없이 자신이 갖고 있는 능력을 과시하는 시대를 살아갑니다. 자신의 능력에 따라 좋은 학교에 들어가기도 하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기도 합니다. 사단의 전략이 예리한 것은 하나님의 아들에게 빵을 돌이 되게 하라는 시험은 자신의 능력을 과시해 보라고 들려지기도 합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고 싶은 유혹이 생겼을 것입니다.
게다가 40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으니 주변에 돌들이 빵으로 보일 만한 상황이었습니다. 여러분이라면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우리는 마음이 있는 것을 선택 할 것입니다. 물론 빵으로만 살수 없다는 것은 물질을 완전히 부정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을 사는 동안 물질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물질이 목적이 된다면 자본주의 시대에 빵은 다른 사람의 목숨을 빼앗거나 자신의 목숨을 포기할 정도로 불의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축복의 통로가 되기를 원하셨기에 물질을 비유로 자신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설명해 주십니다.
예수께서는 사역속에서 언제나 세상의 것을 비유로 하나님 나라를 보여 주셨습니다.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에게 이 빵은 내 몸이니 너희가 먹을 때 마다 나를 기념하여라 하셨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기 위해서 주님은 빵을 비유로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가 세상에 임할 것임을 설명하신 것입니다.
현대인의 성경으로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이 빵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해 주는 내 살이다.”(요 6:51)
예수님은 구약이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마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는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라고 쓰여 있다.' (마 4:4)
요즘은 여가를 위해 인생을 즐기고 멋지게 살기 위해 무엇이 필요하고 좋은 지 너무 많은 정보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맛집을 찾아가기 위해 몇시간을 달려가는 열정이 있지만 예배의 사모함은 줄었습니다. 익숙한 현장에서의 은혜는 이제 시시해 져서 더 크고 더 환상적인 은혜를 기대하기만 합니다. 경건의 모양은 그럴듯하게 가지고 있지만 일상의 헌신과 사랑 앞에서는 언제나 소극적입니다.
우리는 마음에 존재하는 우상을 제거하기 위해서 우리의 마음에 창조주에 대한 열망이 있는지 항상 확인해야 합니다. 맘몬의 우상에 지배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우리의 마음을 살피며 십자가를 통해서 내 삶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 앞에서 보이지 않는 식탁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기념해야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원 받은 후에 광야에서 먹기 시작한 것이 바로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였습니다. 어느 민족 어느 시대에서나 하나님 말씀 대신에 각자의 삶속에 더 가치 있어 보이는 것을 갖기 위한 욕구로 인해 허기진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입으로 들어오는 것으로 채우고 또 채워도 만족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입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채워진 말씀이 성도들의 삶에 나눔과 사귐으로 나오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인생의 목적을 빵으로 둘 것인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할 것인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매일 유혹의 목소리를 매일 듣게 됩니다. 그 목소리가 너무 크게 들리면 예수님의 말씀은 유혹의 소리에 묻히게 될 것입니다. 현재의 삶이 광야의 시기를 걷고 있다면 시험을 이기신 예수의 믿음을 검증할 수 있는 기회인 셈입니다.
이러한 시대에 빵으로만 살수 없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담아야 합니다. 사순절기에 십자가 앞에서 끝없는 우리의 욕망을 깨닫고, 삶의 신비에 눈을 뜨는 기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순절기를 보내며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우리의 삶에 오늘의 양식이 되기를 바랍니다.
2/11/2024 | (주현 후 마지막 주)
우리가 사랑하는 공동체 시리즈 6 '소망 공동체 II' The community of Hope II
골로새서 1:15-23
지난 주일은 주변 지역에 전기가 나가는 관계로 마이크 없이 설교를 하니까 평소에 쓰지 않던 근육들까지 동원해 소리를 내었던 것 같습니다. 한말씀도 놓치지 않으려 집중하고, 불필요한 소음을 줄이기 위해서 함께 배려하는 교우들의 모습속에서 힘을 얻는 시간이었습니다. 모든 빛과 소리가 꺼져 있는 공간에서 평소에 당연했던 모든 조건들이 당연한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는 주일이었습니다. 세상의 소망이 사라져 갈때 서로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소망이 되어 주는 성도들의 되시기를 바랍니다.
지난주에 이어 소망 공동체 두번째는 ‘복음의 소망에서 떠나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당시 골로새 교회는 세워진 지 5년도 안된 신생교회였습니다. 교회는 복음의 기초위에서 든든히 세워져 가는데 복음을 흔드는 이단 사상이 침투해서 기독론을 흔들었습니다. 바울은 이단들과 일일이 논쟁하기 보다는 참된 진리이신 그리스도에 관해 바른 이해를 교훈하기 위해 골로새서를 쓴 것입니다. 당시 골로새 교회 안에는 엄격한 율법주의, 천사를 특별한 위치에 놓는 불분명한 신비주의 사상들, 금욕주의 등으로 그리스도만으로 부족하고 다른 것이 더 있어야 한다는 이단들의 침투로 성도들을 유혹했습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세상을 살아가는데 그리스도의 소망만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경제적 형편과 진로에 대한 두려움, 이민 땅에서 겪게 되는 현실의 문제는 복음의 소망만으로는 세상을 살아가기 쉽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일상의 삶에서 상실과 좌절감이 밀려 오기도 하고, 두려움과 절망이 우리의 마음을 덮을 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불확실한 세상에서 우리가 믿어야 할 복음의 소망이 무엇일까요? 지난주일에 베드로 전한 ‘산소망’과 바울이 말하는 ‘복음의 소망’은 원어가 같은 단어입니다. 이 소망은 하나님의 온전함을 나타내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창조의 권세를 지닌 분이라고 말씀합니다.
1:15 ○ 그 아들 그리스도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분이십니다. 16 만물이 그분 안에서 그분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습니다. 곧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땅에 있는 것들이나, 눈에 보이는 것들이나 보이지 않는 것들이나, 보좌들이나 주권들이나 권력들이나 권세들이나, 온 우주의 모든 것들이 그 아들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그 아들을 위해서 창조되었습니다.
첨단 과학과 물리학이 발달한 시대에 만물이 그리스도로 인해 창조했다는 말을 단순히 교리적인 것으로만 받아들이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이 말씀을 교리적으로만 이해한다면 창조의 권세를 실감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사건 안으로 들어가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세계와 보이는 세계가 있습니다. 창조라는 것은 존재의 시작인데, 보이지 않는 것을 가시적인 세상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모든 상품에 제조자가 있듯이 인류의 시작은 우연히 발생한 것이 아니라 창조주가 만들었음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태초의 시작을 우연으로 믿을 것인지? 만물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온 우주의 모든 것들이 그 아들로 말미암아 아들을 위해서 창조되었다는 것을 믿을 것인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이신 하나님을 나타내신 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인간을 연결해 주기 위해 중보자로 오셨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을 연결해 주는 교량 역할을 하는 것이지요. 설교를 준비하며 세계에서 가장 긴 다리를 검색해 보니까 1위부터 3위까지 중국에 있었는데요. 그 중에 두번째로 긴 다리가 텐진 대교인데요. 사진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다리의 길이가 113.7km입니다. 하나님은 시공간을 초월하시는 분이시기에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비가시적인 세계를 첨단 기술로 연결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건널 수 있는 거리도 아니고 이를 수도 없습니다. 오직 죄가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오셨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오늘날 첨단 과학이 하나님의 창조를 다 설명해 낼 수는 없겠지만, 미래 과학이 발달 할수록, 과학은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인도하게 될 것이고 창조의 능력을 더 유사하게 모방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옷자락을 만진 여인이 12년 된 혈루병에서 치유되었듯 우리는 믿음을 통해서 주님의 옷자락을 만질 때 하나님의 창조능력을 조금이나마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보이지 않는 것을 가시적으로 만드는 능력입니다. AI 시스템을 개발하여 뇌속에 주입되는 생각만으로 로봇을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보이지 않는 생각을 로봇의 움직임으로 보이도록 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매주일 예배 드리면서도 하나님을 향한 생각을 갖지 않는다면 말씀이 삶의 자리를 변화시키는 일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수천년 전 창조주 하나님을 깨달은 다윗의 고백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1 오 주여, 주께서 나를 살피시고 나를 아셨나이다. 2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서는 것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이해하시오며 3 나의 행로와 나의 눕는 것을 둘러싸시므로 나의 모든 길을 익히 아시오니 4 보소서, 오 주여, 내 혀의 말 중에 주께서 알지 못하는 것이 하나도 없나이다.”(시편 139편)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아시고, 우리가 앉고 일어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는 것은 특별한 관계로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첫 사람 아담에게 모든 피조물에 이름을 붙이게 하셨지요. 하나님의 창조적 지혜를 볼 수 있습니다. 세상 어떤 피조물이 자신의 이름을 붙일수 있나요? 이름을 붙이는 피조물은 인간 외에는 없습니다. 인간은 우주의 행성들과, 별자리에 이름을 붙였고, 세계의 모든 나라마다 국가 이름이 있습니다. 여행을 해보면 도시마다 다 이름들이 있습니다. 구석구석 사람들이 붙인 이름들을 볼때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창조의 지혜를 깨닫게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본래의 창조를 회복하는 것을 구원의 개념으로 생각해 보면, 구원은 망가지고 뒤틀린 존재의 치유이며 회복입니다. 죄의 종노릇 하던 생각과 마음이 하나님 나라의 통치 안으로 다시 들어오는 것입니다. 웨슬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재창조 , 새로운 창조의 에너지를 통해서 타락한 본성이 회복이 된다고 했습니다. 존재의 변화는 성령체험으로 인한 통치자의 변화입니다. 전에는 육신이 이끄는 삶을 살았다면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영이 이끄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이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말씀의 토대 위에 우리의 이야기를 써 나가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주님의 창조성과 거룩성이 균형을 이뤄야 합니다.
17 진실로 그리스도께서는 만물 이전에 존재하시고, 만물은 그분 안에서 존재를 유지합니다. 18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몸인 교회의 머리가 되십니다. 그분은 근원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맨 먼저 다시 살아나신 분이십니다. 그것은, 그분께서 친히 만물 가운데 최고의 주권을 갖기 위해서였습니다. 19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모든 온전함이 그 아들 안에 머무르게 하시기를 기뻐하시고,
믿음의 창조성과 믿음의 거룩성의 균형은 신앙의 매우 중요한 영역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만물보다 먼저 계셔서 만물을 운행하시는 분이십니다. 뉴턴이 만유인력을 발견하기 전부터 지구가 태양 사이의 궤도를 벗어나지 않도록 붙들고 계셨으며, 태양과 달 사이의 인력을 만들어 내시고, 우주가 질서 정연하게 운행되게 하셨습니다. 여전히 보이지 않고 발견되지 않는 우주의 미지의 영역도 첨단 과학으로 발견하게 될수록 영적인 세계는 더 깊어져 갈 것입니다.
창조적 명령을 소유 지향적인 명령으로만 여긴다면 다른 만물들은 인간의 의해 파괴되고 소멸될 것입니다. 주님은 교회의 머리가 되셔서 성도들의 생각을 움직이고 명령하십니다. 주님 안에는 하나님의 모든 온전한 것들이 가득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이 변화되면 말씀에 바르게 반응할 수 있게 됩니다.
소비주의 사회에서 우리를 유혹하는 소리들이 귓가에 얼마나 많이 들려 옵니까? 미디어를 통한 광고들은 가까이에서 우리의 눈을 유혹합니다. 소비적 삶의 패턴, 거짓 신화, 인간의 상품화는 인간의 존엄성을 상실해 갑니다. 상품화된 대학교는 지식과 졸업장을 파는 기관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고, 상품화된 병원은 인간의 몸의 가치 보다는 의료기술을 통한 수익사업으로 전락할 것입니다. 첨단 과학도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 담기지 않을 때 인간의 끝없는 욕망을 채우는 무서운 도구가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성화는 생각의 변화가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최고의 주권을 갖으신 주님께서 영적인 세계만이 아니라 마음속 거짓된 생각들을 거룩한 생각으로 충만하게 채워 주십니다. 서로에게 깊은 마음을 주지 못하는 불신과 의심의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샘솟게 합니다. 그리스도의 온전함으로 번역된 ‘플레로마’는 마치 물이 흘러 넘치듯이 부족함이 없는 상태를 가르킵니다. 일상의 삶에서도 주님의 기쁨이 풍성하게 채워지기를 바랍니다.
바울 서신에 언급되는 소망이라는 단어 헬라어 ‘엘피다’는 영어로는 hope로 번역이 되지만 원어의 본 뜻은 ‘깊은 확신’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깊이 확신’하는 것입니다. 지난주 베드로는 불과 같은 시험으로 근심하지만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깊은 확신’(산 소망)을 지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골로새 성도들에게 믿음 안에 거하고 믿음의 터 위에서 굳게 서서 복음의 ‘깊은 확신’(소망)에서 떠나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물론 일상속에서 아무런 걱정이 없이 살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속에서 주의 거룩함으로 문화를 변혁시키도록 부르십니다. 그리스도의 거룩성은 인격과 성품에 거룩한 혁명을 일으켜서 우리가 소비 문화의 형상대로 지음 받지 않았음을 깨닫게 하십니다. 소망의 약속을 믿는 성도들은 삶의 자리에서 세상의 문화에 사로 잡히지 않도록 선한 싸움을 해 나가며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담긴 창조적 권세와 거룩함을 ‘깊이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주어진 일들을 해 나가다 보면, 성육하신 주님의 신비는 우리의 교만과 허영심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인정하도록 해 줍니다. 자기를 내세우기 보다 남을 존중하는 태도는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주님께 삶의 주권을 드리는 것입니다. 최고의 통치자이신 주께서는 우리를 얼마나 소중하고 존귀한 존재인지 깨닫게 하시고 아름다운 삶으로 빚어 가실 것입니다.
셋째, 우리는 부르심의 소망을 받은 자들입니다.
20 그 아들을 통하여 만물과 기꺼이 화해하셨습니다. 곧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온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그 아들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해함으로써 참 평화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21 ○ 이전에 여러분은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었고, 악한 행동을 일삼아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었습니다. 22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육신의 죽음을 통해 여러분과 화해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거룩하고 흠이 없고 책망 받을 일이 없는 사람으로 자신 앞에 온전히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23 그러므로 여러분은 믿음 안에 거하고 또 믿음의 터 위에 굳게 서서, 여러분이 들은 복음의 소망에서 떠나가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만물과 화해하며 사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생태계의 파괴, 기후의 변화는 이미 산업혁명 이후에 예견된 일입니다. 환경파괴는 인류가 직면한 긴박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모든 창조물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숨결을 기억하고 하나님과 화해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화해는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이루신 뜻을 믿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인도네시아 발리에 가면 1년중 1월 1일에 모든 기관들과 가게들의 문을 닫고, 하루 동안 모든 활동을 멈춘다고 합니다. 인간이 만든 모든 인공물들의 빛을 끄고, 지구에 사는 모든 생명이 평안하기를 기도하는 의식이라고 합니다. 지구에게 휴식을 주는 종교적 의식인데요. 인도 발리 주민들 마음 안에 지구는 모든 생명을 품고 있는 그들의 어머니라는 생각이 있다고 합니다. 지구에서 태어나고 지구의 사랑 속에서 살아간다는 그들의 종교적 신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온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그 아들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셨으니 구원 받은 백성들이 살아가는 삶은 생태계의 위기속에서 청지기적 사명을 감당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만물을 지배하려는 소유 의식이 아니라 존재 중심으로 생태계 환경을 개선하고, 창조적 질서를 보존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번주 수요일부터 40일 사순절기가 시작이 되는데요. 40일 동안 우리가 주님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마음으로 집에서 사용하는 가전제품이나 난방에 지출되는 에너지 사용을 절약해 보시고, 일회용품 사용도 절제하며, 음식 쓰레기도 최대한 줄여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새로운 시각이 열릴 것입니다. 주님과의 뜻 깊은 교제를 위해서 밤 늦게 하던 습관도 바꿔 보시고 하루의 시작을 새벽 기도와 말씀묵상으로 실천해 보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담이 있게 되었다고 전제합니다. 예수께서 하나님과 화해하는 길을 열어 놓으셨는데 불순종하던 육신의 삶을 씻기시고 아들의 죽음을 통해 우리를 끈질기게 사랑해 주셨습니다. 바울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라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8장 35절) 세상이 무(無)에서 유(有)가 되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점점 더 거룩해 지고 흠이 없어지고 책망 받을 일이 없는 사람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3개의 형용사는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선 성도들이 세상 끝날까지 끊임없이 견지해야 할 책임 있는 신앙의 자세입니다.
현대인들은 행복하기 위해 지금을 준비한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그 무엇도 우리에게 영원한 만족과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내가 가지고 누리고 있는 현재의 삶을 행복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기도 하겠지요. 그러나 성도들이 품어야 할 소망은 그리스도 안에만 있는 흔들리지 않고 변하지 않는 복음의 소망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르심의 소망입니다. 믿음의 여정을 걸으며 고난의 시간을 만나지 않고 눈물의 시간을 만나지 않는 것을 구하며 기도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들을 마주하고 문제와 부대껴 살아내 보아야 불투명한 길에서 하나님의 소망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가 그의 집이라” (히브리서 3장6절)
우리가 사랑하는 소망 공동체는 내 안에 성령님이 내주하시는 집이 되도록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의 일상이 주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도록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눈앞에 놓인 목표를 향해 걷는 삶에서 영원한 나라,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는 삶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믿음 안에 거하고 또 믿음의 터 위에 굳게 서서, 복음의 소망에서 떠나가지 않는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는 한없는 은총을 부어 주실 것입니다.
2/4/2024 | (주현 후 제5주)
우리가 사랑하는 공동체 시리즈 5 '소망 공동체 I' The community of Hope
베드로전서 1:3-9
2024년 첫번째 장의 달력을 넘겼습니다. 처음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설레임을 주지만 설레는 마음에만 멈추어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한날의 은혜와 한날의 감격과 한날의 수고도 하나님 안에서 담아 내어 보시고, 현실의 삶에 충실하다 보니 처음의 결심이 흐릿해 졌다면, 시작되는 2월에는 다시 힘을 내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일에 마음을 써 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공동체 시리즈 다섯번째는 소망 공동체입니다.
‘안데스 설원의 생존자들’이라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한편을 보았습니다. 1972년 10월 13일 우루과이 비행기 한대가 안데스 산맥에 추락하게 됩니다. 당시 40여명을 태운 비행기는 뒷부분이 잘려 나가고 그 안에 있던 동료 럭비 선수들 가운데 생존한 이들이 생존할 수 없는 설원에서 소망을 지닌 채 버티며 71일만에 구조되는 생존자들의 사투를 다룬 영화입니다.
비행기 사고의 현장에서 생존의 희망을 안고 있던 그들은 세찬 바람과 눈더미 속에서 불안과 공포속에서도 서로가 집으로 돌아갈 희망으로 그동안 좋았던 추억들, 구조되면 먹고 싶은 음식을 동료들과 나누며, 밤을 지새웁니다. 밤이 되면 온몸이 얼어 붙을 정도로 기온이 떨어지니까 비행기 안에 몸을 구겨 넣은 채 서로의 체온을 의지하며 버텨냅니다.
극한 위기의 상황 속에서 그들은 혼자가 아닌 함께 버텨냈습니다. 버텨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구조가 될 거라는 희망 때문이었습니다. 구조대를 기다리며 한주가 지날 때 쯤 산사태로 내려오는 눈덩이에 비행기가 매몰이 됩니다. 하루하루 지나 갈수록 식량도 떨어지고, 불안해 하며 생명의 끈을 놓는 동료들도 생겨났습니다. 실종된 지 58일째 생존자 동료들 가운데 한명이 자기가 죽으면 자신을 먹어서라도 꼭 살아남으라고 이야기하며 쪽지 한장을 남기고 눈을 감습니다. 그의 손에는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 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라는 요한복음 15장13절 말씀의 성경 구절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생존자들의 구조 후 인터뷰에서 두가지를 이야기합니다. 절대 불평,불만을 하지 않았다는 것과 산속에서 만난 신은 원망의 대상이 아닌 하루하루 살아갈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주신 분이라고 말입니다. 그들은 서로가 불평과 원망이 아닌 소망을 품은 공동체가 되어 버텨낸 것입니다.
오늘 이 베드로전서 편지의 배경도 일반적인 상황이라고 하기에는 극심한 고난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편지의 수신자들은 거처할 곳도 없이 떠돌아 다니던 나그네들이었습니다. 네로황제의 박해로 인해 표현할 수 없는 고난속에서도 베드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산 소망을 갖게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편지합니다. 어떻게 고난 가운데 찬양을 할 수 있습니까? 산소망을 지닌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8절을 보시겠습니다.
“8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한 번도 뵌 적이 없는데도 그분을 사랑하고, 지금 그분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닌데도 그분을 믿으면서,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2천년 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한번도 뵌 적이 없지만 그분을 믿고,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은 영광스러운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역설적인 기쁨이지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은 영혼의 구원을 받았다는 표지입니다.
첫째, 오직 믿음을 통해서 산소망을 지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예수를 살리셨다.”는 분명한 믿음이 우리 안에 생긴다면 세상에서 겪게 되는 고난을 이길 힘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로부터 우리는 새로운 생명과 새로운 소망을 받게 되지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믿기 싫어서가 아니라 이 사실을 인간의 논리와 이해로는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얻게 되는 부활의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며 믿을 것인지 포기할 것인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순수하고 바른 믿음은 신앙의 위기의식 가운데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주어진 환경이 어떠함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인생의 구주로 믿는 정시(正視: 바른 시선, 바른 시야, 바른 시각), 정좌(正坐: 바른 자세와 바른 태도),정심(正心:바른 마음과 바른 정신)을 지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부터 존재 이유를 찾은 사람은 현재의 삶을 헛되이 버리지 않습니다. 부르신 자리에 대한 거룩한 부담이 있기 때문입니다. 참된 소망은 믿음으로 일상의 삶에서 겪게 되는 모든 어려움 가운데서도 다시 일어서게 할 것이며, 헛된 욕망의 자리에서 돌아서게 할 것입니다. 믿음은 예수께서 이루신 영광된 미래를 바라보게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믿음은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낡아 없어지지 않는 영원한 유업을 물려받게 해주셨습니다. 그 유업은 여러분을 위해 지금 하늘나라에 고이 간직되어 있습니다.(4절)
오늘날 현대인들은 하나님을 기억할 시간 조차 없이 분주하게 살아갑니다. 세속적인 사상들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듭니다. 진리를 왜곡하고 어둠을 빛이라 유혹합니다. 삶의 많은 시간을 앞으로 누려야 할 기쁨을 찾기 위해 두리번 거립니다.
하늘에 쌓아 둔 소망이 보이지 않고 지금 내가 쌓아야 할 높은 산이 보입니다. 그러니 높은 산을 오르지 못하면 갖지 못할 것 같아서, 이루지 못할것 같아서 불안하고 갈급한 것이지요. 더 자극적인 것을 추구하고 더 강한 것에 지배당하면서 믿음의 정체성을 지키지 못하여 점점 믿음의 마음을 상실해갑니다. 그런데 산 소망을 지닌 성도는 삶의 자리에서 세속적인 사람들과 구별이 됩니다. 참된 믿음은 신앙심과 삶에 벌어진 틈을 살아가면서 좁혀 나가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산 소망은 단순히 긍정의 힘만이 아니라 소망의 근거가 되시는 예수께서 한결같은 사랑으로 십자가에서 이루신 약속의 언약을 믿는 것입니다.
둘째, 산소망은 이미 일어난 성취된 언약을 현재의 믿음으로 붙드는 것입니다.
1:5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때에 나타나도록 준비되어 있는 구원을 여러분들로 하여금 얻게 하시려고, 지금 여러분의 믿음을 통해 그분의 능력으로 여러분을 안전하게 보호해 주고 계십니다.
‘마지막때에’라고 번역된 ‘엔 카이로 에스카도’는 종말을 의미하는 ‘에스카토스: ἔσχατος’와 때를 의미하는 ‘카이로스: Καιρός’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카이로스는 인류 역사의 종말로 흘러가는 수평적(horizontal)시간의 개념이기 보다는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 때,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나타내는 수직적(vertical)시간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과의 전인격적인 만남이며, 욕망을 따라 살아가던 길에서 벗어나 주님을 통한 삶의 변화입니다. 절망적인 시간속에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기적의 시간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때 ,카이로스(Καιρός)의 시간이 많아질수록 소망을 향한 믿음은 더욱 더 깊어지게 됩니다.
마가복음 1장14-15절을 한번 보시겠습니다.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전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깨닫게 되는 시점이 바로 ‘카이로스 Καιρός: 때’ 입니다. 이 때는 새해 사람들이 결심하는 일시적인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구속의 사건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때’는 언제나 현재형입니다. 현재라는 삶 속에 영원한 생명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믿고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도로의 표지판은 목적지를 가기 위한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전도서 기자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고 말씀합니다.우리가 살아가기 위해 만나게 되는 관계, 직장, 학교, 문화, 더 많은 영역에서 하나님의 때를 만나야 합니다.세월이 흐르면 병들고 쇠약해져 가는 몸이지만 영광의 날에는 부활의 몸으로 변화될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의 모든 흔적은 영광의 흔적이 될 것입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 24, 25절에서 ‘그 소망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었으니,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리라’ 말씀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사회적인 신분과 업적을 이뤄도 영광의 즐거움을 누리는데, 영원한 소망을 기다리는 성도들이 누리게 될 그 영광은 얼마나 대단하겠습니까? 일시적인 즐거움과도 비교할 수 없을 것입니다.
6 그러므로 여러분이 지금 잠깐 동안 온갖 시련 가운데서 어쩔 수 없이 고통을 당할지라도, 진심으로 기뻐하십시오. 7 이런 시련은 여러분의 믿음이 얼마나 순결한 것인가를 입증하기 위한 시험에 불과한 것으로, 그런 시련을 통해 여러분의 믿음은 비록 불에 의해 정련되더라도 결국엔 사라지고 마는 금보다 더 귀한 것으로 판명되어,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여러분은 그분에게서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될 것입니다.
찬송가 488장 ‘이 몸의 소망 무언가’를 작사한 에드워드 모트는 1797년 런던의 작은 여관집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소망 없는 일상에서 삶의 좌절에 빠져 살아가다가 어느날 런던의 한 교회의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1834년 어느 날 에드워드 모트는 자신의 목공소가 있는 바위 위에 앉아서 ‘주님은 나의 반석, 나의 산성, 나를 구원할 자, 나의 하나님, 내가 의지할 바위, 나의 방패, 나의 구원의 뿔, 나의 높은 망대라’라는 시편 18편 2절이 떠올라 이 찬송의 후렴을 만들었습니다.‘굳건한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단숨에 이 찬송가의 1절을 썼고, 집에 돌아와 4절까지 완성했습니다. 그리고 성공한 사업가로 살아가다가 자신의 사업과 재산을 정리하고 침례교 목사가 되어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며 살았습니다. 에드워드 모트는 하나님 안에서 소망을 발견한 것입니다. 1874년 8월 4일 에드워드 모트는 “내가 이제까지 설교해 온 그 진리대로 살다가 갑니다.”하고 77세에 하나님의 품에 안겼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걸어가고 있는 인생의 여정의 소망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어렵고 낙심 된 시대를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소망을 품고 걸어가는 가슴 벅차고 감사한 자녀됨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세상에 믿던 모든 것 끊어질 그날 되어도 구주의 언약 믿사와 내 소망 더욱 크리라’ 이 가사는 영원한 소망을 붙드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셋째, 산 소망으로 사는 것은 생명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8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한 번도 뵌 적이 없는데도 그분을 사랑하고, 지금 그분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닌데도 그분을 믿으면서,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살아있는 생명에는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생명은 궁극적으로 완전하지 않습니다. 소망을 지닌 채 하루하루 살아가도 우리의 몸은 쇠약해 집니다.
우리 교회 건물의 곳곳의 오래된 흔적들 을 보면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오래되서 낡고,부서진 흔적에서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몸이 생각이 납니다. 상처받고 찢기신 주님의 몸 말입니다. 세월이 흘러 고칠 곳은 여기저기 많아졌지만 그동안 복음을 전하는 일에 주님의 성전이 사용되어 믿음의 많은 열매를 맺게 하셨습니다. 교회의 건물 뿐이겠습니까? 말씀으로 살아 내기 위해 걸어가는 믿음의 여정,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영적 사춘기를 보내며 마음에 난 상처를 붙들고 씨름하고 있는 시간들, 섬김의 흔적들, 주님을 사랑하며 주님을 믿으면서 말로 다 표현 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흔적들이 성도들에게도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흔적들은 소망을 발견한 이들이 삶속에서 영광스런 몸으로 갈아입는 과정일 것입니다.
바울은 내가 약할수록 자신의 몸 가운데 주님의 능력이 더욱 머물게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교회는 어떤 소망을 품고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우리 교회는 세월이 흐를수록 섬김의 흔적이 더 많아 지기를 바랍니다. 이제 2월부터는 사순절 40일 전교인 새벽기도회가 시작이 됩니다. 매일 새벽기도를 드리다 보면 오늘의 양식에서 나온 본문도 반복되는 말씀들이 많고 새로울 것이 없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는 새날은 하루도 반복되는 날이 없습니다. 내 영적 성장이 멈추어 있지 않도록 매일을 하나님 앞에 구하시기 바랍니다. 내 마음이 매일 새로워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시간이 됩니다. 특별히 고난주간에 드리는 40일 새벽기도회는 수난의 길을 걸어가신 주님과 연합하는 시간입니다.
사순절 전교인 새벽기도회는 그동안 새벽기도회를 경험하지 않던 교우들도 도전하는 시간입니다. 우리가 함께 연합하여 하나님께서 회복시킬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40일 새벽기도회 동안 곳곳의 섬김의 자리를 찾아서 동참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공동체 안에서 뜻 깊은 시간이 될 것입니다. 성도들이 상속받게 될 유산은 세상의 기업과 본질적으로 다르며, 파괴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낡아 없어지지 않는 영원한 유업을 물려받도록 따로 떼어 놓으셨습니다. 2024년 우리가 사랑하는 공동체 는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더욱 친밀해 지며, 섬김과 기쁨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고, 소망이 되어 주시는 주님을 믿음으로 믿고 걸어가는 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9 그것은 진실로 여러분이 믿음의 목표인 영혼의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소망 공동체는 나의 작음을 알고 그분의 크심을 아는 믿음을 가진 공동체입니다. 오늘날 시대는 거룩한 메신저들을 필요로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삶의 자리에서 영적 제사장이 되어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소망 안에서 살아내는 자들을 통하여 일하십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에 완전한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의 완전함을 위해 삶을 드리는 믿음의 지체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영혼을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산 소망을 바라보며 하나님 나라를 삶으로 만나고 담아내는 삶으로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소망의 공동체는 우리 한사람 한사람의 믿음의 여정이 함께 모여 이루어 가게 됩니다. 그 귀한 역사에 함께 동참하시는 교우들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1/28/2024 | (주현 후 제4주, 당회주일)
우리가 사랑하는 공동체 시리즈 4 '기쁨 공동체' The Joy community
빌립보서 4:4-9
우리가 사랑하는 공동체 네번째는 기쁨 공동체입니다. 기쁨은 누구나 보편적으로 바라는 감정입니다. 사람들은 기쁨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기쁘다, 즐겁다’라는 한자가 쾌(快)입니다. 쾌락(快樂) 이라고 하면 기쁠 (쾌), 즐거울 (락)이니 풀어보면 ‘몹시 즐겁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쾌락 하면 기쁨의 근원 보다는 부정적인 느낌을 받게 되는데 육체적, 감각적인 쾌락만을 생각하기 때문 입니다. 쾌(快) 라는 것이 하나님이 정해 놓은 범위를 벗어나 욕망을 숭배한 결과가 본능적, 감각적, 말초적 쾌 (快) 로 전향이 되어 인간다움을 잃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바울이 철학자들의 도시 아덴에서 복음을 증거할 때에 에피쿠로스 학파와 논쟁을 했었습니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쾌락주의 철학자들입니다. 서양에서 쾌락주의 학파는 많은 추종자 들을 거느렸을 뿐 아니라 일종의 고통으로 부터 해방하는 사상이기도 했습니다. 쾌유(快癒) 주의자 들에 가깝습니다. 창시자 에피쿠로스(342-270 B.C)는 소아시아 사모스 섬에게 출생했는데 아덴으로 이주하여 시민권을 획득하고, 30대 중반의 나이에 에피쿠로스 아카데미를 세워 30여년간 제자들을 양성하며 그의 사상적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에피쿠로스는 쾌(快)라는 것을 행복한 삶을 형성하는 출발점이자 종착점으로 본 것입니다. 에피쿠로스가 전한 쾌락주의는 행복하고 평온한 삶을 이루기 위한 고통과 근심을 제거하는 정적인 쾌락(快樂)쪽에 가깝습니다. 우리나라도 조선시대 선비 문화 속에는 자연의 신비속에서 즐거움을 얻고, 선비들은 그 마음의 양심을 지키며 삶에서 얻을 수 있는 소박한 즐거움을 누렸습니다. 그래서 풍류 안에 담긴 삶의 가치를 찾은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강조하며 편지합니다. 항상이라는 말이 앞에 붙어 있는데, 모든 삶의 여정에 담긴 희노애락 속에서도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 쾌(快)의 근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기쁨의 본질은 주님께로 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첫번째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예배의 즐거움을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즐거움은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편 16편 11절을 보면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과의 깊은 관계속에서 기쁨의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관계가 친밀해지고 충분한 신뢰속에서 있다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영원한 고통이 끝나는 곳에서 진정한 기쁨이 시작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더라’라고 감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거대한 창조의 신비 앞에 서게 될 때에, 피조물 가운데 지문처럼 남겨놓는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래전 선물 받은 책 중에 배우 김혜자씨의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책에 소개된 글을 잠시 소개합니다. “만일 내가 비라면 물이 없는 곳으로 갈거야. 그곳 사람들에게 ‘내가 곧 갈께’하고 말할거야 그래서 그들이 내미는 그릇들을 물로 가득 채워 줄거야.” 인도 소녀 무시트라가 쓴 글입니다. 지구상의 60억 인구 중에서 12억 인구가 하루 1달러 미만의 수입으로 살아가고 있고, 그들 중 대부분은 가뭄과 전쟁과 빈곤의 희생자들입니다. 또한 1억5천명의 아이들이 거리에서 자고, 먹고, 일하고, 뛰어 다니고 꿈을 꿉니다. 만일 내가 비라면 나도 수미트라와 함께 물이 없는 곳으로 갈 겁니다. 만일 내가 옷이라면 세상의 헐벗은 아이들에게 먼저 갈 겁니다. 만일 내가 음식이라면 모든 배고픈 이들에게 맨 먼저 갈 겁니다. (굶주린 아이들을 위한 모금 연설에서)
하나님 안에서 기쁨이 무엇인지 찾아내신 분 같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자랑거리가 쌓이고 명예와 지위가 주는 기쁨을 맛보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인생의 참된 기쁨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품에 안아 주는 것, 하나님안에서 나의 정체성을 찾고 자부심을 느끼는 것,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웃들을 사랑하는 것, 하나님을 만나 전인격적인 변화가 내안에서 시작되는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내가 옷이라면 세상의 헐벗은 아이들에게 먼저 가고 싶은 것, 내가 음식이라면 배고픈 이들을 찾아가고, 내가 만난 하나님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 품어지는 것이 바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기쁨의 마음입니다
진정한 기쁨은 우리 안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기쁨은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주안에서 흘러 나오는 것임을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바른 생각속에서 기쁨이 솟아남을 느끼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어 주신 구원의 희망은 깨어진 세상을 향한 한줄기 빛이요, 생명의 물줄기입니다. 하나님의 성품 안에 참 기쁨이 있고, 성령의 열매에 희락이 있습니다.
문제는 세상속에서 실패를 경험하고, 거짓을 경험할 때마다 우리가 누려야 하는 진짜 기쁨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 아버지를 신뢰하기 보다 스스로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 인생의 주인이 되려고 애쓰며 살아갑니다.
이 편지를 읽고 있는 빌립보 교회 교우들도 경제적인 문제로 인해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당시 교회를 대적하고 핍박하는 이들로 인해 두려운 상황이기도 했습니다. (빌 1:28) 교회 내부적으로는 유오디아와 순두게라는 믿음의 여인들이 교회안에서 크게 다투었습니다.(4:2)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교회 안에서 함께 일하던 여인들이었습니다. 주의 일에 열심을 내어도 다투고 갈등이 생기면 무엇을 해도 기쁨이 사라집니다. 그러니 우리는 주의 일을 할 때에 주안에서 함께 조화를 이루며 기쁨의 근원이 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바울은 이 두여인을 향해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말씀과 기도로 함께 섬기는 공동체는 하나님께로 부터 오는 기쁨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함께 누리는 기쁨은 주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을 때에 비로소 느껴지는 것입니다.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을 자주 떠올리시기 바랍니다. 고통 가운데 함께하시는 주님을 생각하시고, 홀로 있는 골방에서도 주안에 있는 즐거움을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일상의 삶에서 무엇으로 인해 기뻐하며 살고 있는지도 틈틈이 살펴 보아야 될 것입니다.
둘째, 기쁨은 상호 관계속에서 누리게 됩니다.
바울은 5절에서 자기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너그러움을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이라고 했습니다. 인류 역사속에서 분열과 전쟁, 배신으로 인한 상처는 대부분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너그러움을 잃어버린 결과입니다. 인자한 마음과 용서할 준비를 주안에서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교회가 세상의 희망이 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제시할 수 있는 좋은 삶이 무엇입니까? 바울은 천국으로 부터 흘러 나오는 삶의 방식을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이 찢기고 물과 피를 쏟기까지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이 사랑을 인식하게 될 때 기쁨이 생겨납니다. 매주일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드리고도 기쁨을 잃어 버린다면 우리는 편협하고 옹졸한 태도로 삶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예배하며 주께서 가까이 계심을 느껴보십시오.
몰트만은 96세에 자신이 남길 마지막 책에서 그동안 자신이 견지해 왔던 성도의 부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바꾸고, 죽음속에 있는 부활을 이야기하며 자신의 묘지석에 사망한 날짜를 쓰지 않기로 합니다. 그가 이러한 결정을 한 이유는 2016년 사망한 아내 엘리자베트 때문이었습니다. 아내의 죽음이 죽음과 부활에 대한 그의 신학적 성찰을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 감쳐져 있는 미래의 생명을 믿고, 사망의 날짜는 없다. 내게는 부활의 날짜가 있음을 말했습니다. 성도들은 슬픔으로 인생이 끝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소망이 오늘과 내일을 이끌어 나가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든 걱정하기 보다 하나님께 기도와 간구로, 불평하기 보다 주어진 일들에 감사하며, 기쁨의 길, 희망의 길을 지속적으로 걷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 많은 우리를 용납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죄보다 더 크시며, 실패와 배신, 연약함을 덮고도 남음이 있는 크신 사랑입니다. 그래서 무한하신 하나님이라는 고백 안에는 우리의 연약함을 덮어 주시는 하나님을 믿는다라는 고백입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을 내 기준과 내 편견의 그릇에 담으려고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희망의 신학은 세상속에 있는 기쁨을 담으려고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세상과 연결되어 질 때에 진정한 기쁨이 솟아나게 됩니다.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을 예배하는 순간 세상에서 느낄 수 없는 기쁨의 충만함을 얻게 됩니다. 다윗은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시 30:11) 헨리나우웬은 춤추시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고통을 직시한다고 했습니다. 시편 119편 92절을 보면 “주의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고난 중에 멸망하였으리이다” 고난은 우리를 절망으로 이끌고 가지만 그때마다 주의 말씀이 우리에게 즐거움이 되면 고난도 이길수 있게 됩니다.
고난 중에는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죽음을 인식하시고,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내어 주는 주님의 힘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우리에게 내어 주셨고, 아들은 자기 목숨을 모든 사람들의 대속물로 내어 주셨습니다. 이 사실을 믿는 자에게 성령께서는 새 힘을 허락하십니다.
셋째, 생각하는 것과 실천하는 것을 통해 기쁨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현대사회는 여러가지 일들로 인해서 근심과 두려움에 빠지는 일들이 많아졌습니다. 뉴스를 보면 우울함을 주는 소식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을 부정적인 일들에 노출시켜 버리면 마음이 흐려지고 기쁨을 빼앗겨 버립니다. 현대의학은 부정적인 생각을 계속하면 뇌와 마음의 건강을 위협한다는 통계를 제시해 줍니다. 몸에 난 상처라면 시간이 흐르면 치유가 되겠지만 생각이나 마음이 병이 나면 세상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반응하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이 내린 처방은 참된 것, 경건한 것, 옳은 것, 거룩한 것, 사랑스러운 것, 칭찬할 만한 것들을 마음 속에 깊이 생각하라고 명령법으로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 덕목들은 우리가 아름다운 삶을 형성시켜 나가는데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생각만 하지 말고 배우고 받고 듣고 본 것을 실천하라고 명령합니다. 생각하는 것이 묵상이라면 실천하는 것은 삶의 적용입니다.
이것이 뇌에 대한 수많은 연구 결과가 있기 전에 바울이 주는 치료 방법입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세운 과정을 보면 2차 전도여행 중에 환상 가운데 마게도냐 한사람이 나타나서 그를 불렀고, 성령의 인도함으로 건너가 처음 세운 교회입니다. 상상할 수 없었던 방법으로 성령님께 인도함 받고 세운 교회이니까 바울이 교회를 세우고 무엇을 전하고 교우들은 무엇을 배웠겠습니까? 성령이 하시는 일에 대한 성경공부를 했을 것입니다. 전도 여행중에 바울은 많은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더 큰 사랑으로 사명의 길을 걸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잠긴 바울은 빌립보 교우들을 충분히 사랑했을 것입니다. 그 마음을 빌립보서 서두에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내가 빌립보 교우들을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랑하는데 하나님이 내 증인이라고 고백합니다.(빌 1:8)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합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져야 합니다. 심장에서 피를 공급해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심장을 지녀야 그리스도의 피를 공급받게 되고, 서로가 한 피를 나눈 한 형제,자매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기쁨의 공동체는 실패를 두려워하기 보다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변하여 욕망과 혈기의 피가 그리스도의 피로 순환되어야 합니다. 몸 안에 그리스도의 피가 원활해 지는 것은 성령의 다스림 받는 것입니다.
갈등이 분쟁을 낳는 것이 아니라 갈등을 통한 성장을 경험하는 공동체입니다. 마음의 광야에 자리하고 있는 불안, 욕심, 미움, 편협함, 비난, 정죄, 교만의 뿌리를 뽑아내는 일이 우리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성령의 단비로 인해 진정한 기쁨이 임해야 굳은 마음이 부드러워 집니다.
누군가가 무디(D.L. Moody, 1837~ 1899)목사에게 물었습니다. "성경을 읽다가 잘 깨달아 지지 않고 하나님이 의심되면 어떻게 하지요?" 그때 무디는 다음과 같은 적절한 대답을 해주었습니다. "그럴 때에는 성경책을 놔두고 뛰쳐나가 전도하고 지나가는 손수레라도 밀어주십시오, 무슨 일이든지 찾아서 봉사하십시오, 그리고 돌아와서 성경을 읽으면 해석이 잘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배운 대로 실천할 때 성경말씀을 가장 잘 배울 수 있으며,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그로 인해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일상의 삶을 소중하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를 통해 숨이 막힐 듯 힘들었던 지체들에게 생명의 호흡을 불어 넣어주고, 혼자라고 생각했던 그 자리에 기도로 든든히 함께 해주며 진정한 하나님의 마음으로 서로를 기뻐하고 축복해 줄 수 있는 공동체로 성장해 나가야 합니다.
여러분 두 팔이 있는 것은 많이 안아주고 품어 주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케임브리지 한인교회가 두 팔 벌려 품어 안아 줄 수 있는 교회가 되기 원합니다. 진정한 기쁨은 세상의 어떤 기쁨으로도 채울 수 없는 기쁨이 우리 안에서 회복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진정한 기쁨은 우리가 누리고자 했던 목표와 목적을 바꾸어 줍니다. 우리의 기도의 자리를 통하여 섬김과 봉사의 자리를 통하여 항상 기쁘고 하나님의 사랑이 전해지는 진정한 기쁨의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