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모음
1/21/2024 | (주현 후 제3주)
우리가 사랑하는 공동체 시리즈 3 섬김의 공동체 The community that serves
마가복음 10:35-45
우리가 사랑하는 공동체 세번째는 섬김의 공동체입니다. 섬김이라는 헬라어는 ‘디아코니아: Diakonia’입니다. 디아: Dia는 ‘~통하여’란 뜻이고, 코니아: konia는 ‘먼지’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두개의 단어를 합성해 보면 ‘먼지를 통하여’라는 뜻이 됩니다. 섬김이라는 것은 Diakonia라는 어원에서 볼 수 있듯이 자신을 그리스도 앞에서 먼지처럼 낮추는 사람으로 볼 수 있습니다. Diakonia어원에서 디아코노스: διάκονος 라는 ‘집사’라는 단어가 파생되었는데, 집사는 섬기는 직무, 섬기는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대속물로 죽으심으로 세상의 불의와 폭력, 인간의 자기중심적 욕망을 해체하시고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하셨습니다.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교실 칠판 위에 ‘공부해서 남주자’라는 학급 교훈이 걸려 있었습니다. 열심히 공부를 하되 나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삶을 살라는 뜻에서 걸어 두셨을 것입니다. 공부해서 남주는 것이 어떤 삶일까요? 잘 배워서 잘 쓰임 받고 잘 벌어서 잘 베풀고 나누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 자신들의 소원을 아룁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로마제국을 무너뜨리고 유대왕국의 새지도자로 앉으실 것이라 생각했고, 주께서 유대인의 왕이 되시면 자신들을 좌우편에 앉게 해달라고 청탁을 합니다. 세상은 더 많은 물질, 권력과 힘을 소유할수록 더 편리하고 섬김을 받을 수 있는 시스템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소유의 끝이 나에게서 멈춘다면 그 길의 끝에는 허무함과 공허함만이 남게 됩니다.
주님은 자신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드러내고 있는데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들을 위해 자기의 목숨을 내어 주려고 오셨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너희도 으뜸이 되기를 원하면 모든 이들을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섬김의 방향이 되시는 주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주님을 닮아가는 성도는 하나님 나라를 널리 퍼트리는 사람들입니다. 아이가 어릴 때에는 부모의 전적인 섬김을 받으며 성장하다가 때가 되면 본인도 다른 사람을 돕고 섬기는 책임 있는 사람으로 성숙해져 가는 것처럼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직분의 무게가 더해 질수록 그리스도인로서의 책임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때를 향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장면입니다. 예루살렘에 가시며 제자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33절 34절입니다. 33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도착하면, 인자는 배신을 당하여 대제사장들과 율법 교사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그들은 인자를 죽이기로 결정한 후 이방인들에게 넘길 것이다. 34 그러면 이방인들은 인자를 조롱하고, 침 뱉고, 채찍으로 때린 뒤, 마침내 죽일 것이다. 그러나 인자는 사흘 만에 무덤에서 다시 살아날 것이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이 죽게 될 것을 자세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로마제국이 상징하는 불의와 폭력의 해체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섬김으로 통치하는 나라입니다.
첫째, 서번트 리더십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따르며 서로 높은 자리에 오르기 위해 경쟁하고 자리 다툼을 하기도 했습니다. 다른 열명의 제자들이 야고보와 요한의 청탁에 분노한 것을 보면 다른 제자들도 야고보나 요한과 같은 생각이었음을 추측 할 수 있습니다. 교만과 이기심은 공동체를 형성하는데 걸림돌이 됩니다. 섬김의 공동체는 하나님의 뜻을 기억하고 섬김이라는 마음의 바탕에서 진리를 지켜 나가게 됩니다. 그러나 내가 주인되어 나의 이익을 드러내기 위한 섬김이라면 하나님의 뜻은 희석되어 갈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권위가 사라진 섬김은 절대적 진리가 사라지고 탈기독교(post-christian))로 전락하게 합니다.
예수께서는 야고보와 요한에게 “너희가 지금 내게 요청하는 것이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나 알고 하는 말이냐? 너희는 내가 마셔야 할 쓴 잔을 마실 수 있느냐? 내가 받아야 할 고난의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물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셨고, 실패하셨으며, 옥에 갇히셨고 배신당하셨습니다. 오늘날 시대정신은 교회 안에도 절대적 기준을 인정하지 않는 상대주의, 모든 권위를 해체해 버리자는 해체주의, 돈을 가장 믿을 만한 힘으로 여기는 물질만능주의,자신들의 틀을 가지고 그 틀에 갇혀 살아가는 율법주의 신앙이 침투해 있습니다. 이는 주께서 가신 길과 다릅니다. 하나님의 뜻은 죽음 가운데서 부활로 나타나셨고,핍박속에서 진리를 수호함으로 하나님 나라가 임한 것입니다.
세상은 2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죄의 대가를 치르기 보다 회피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자기 목숨을 모든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시며, 삶의 길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걸어야 할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바꿔 놓으셨습니다. 주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제자들에게 몸소 설명해 주신 것입니다.
문제는 인간 안에 섬길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세족식은 단순히 발을 씻겨주는 차원을 넘어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제자들의 죄를 씻기신 것입니다. 죄의 문제는 예수님을 통하여서만 해결 받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자신의 발은 절대로 씻을 수 없다고 거절하자 예수께서는 내가 너의 발을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주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어떤 선생도 제자들의 발까지 씻기는 경우는 없었지만 예수님의 씻김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자신의 연약함과 죄로 인한 수치를 다 씻겨 주셨던 세족식의 일들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교회된 우리는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 십자가의 사랑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주님과의 관계가 세워지고 난 후에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영성이 바로 서번트 리더십입니다. 이 힘은 주의 말씀을 실천하는 순종에서 나오게 됩니다. 우리는 주께서 마음 안에 계시는지 끊임없이 살펴야 합니다.
둘째, 십자가의 사랑에 섬김이 담겨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에서의 경험이 왜 중요합니까? 세상과 다른 원리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개인의 만족함을 넘어서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로 서로 사랑하라는 주의 명령에 순종하는 공동체입니다.
요한 힌리히 비헤른(1808-1881)이라는 사람은 독일 섬김 운동의 선구자입니다. 그는 1820년경 독일에서 산업혁명으로 인해서 사회안에 심각한 문제들을 직면하게 될 때 방치된 아이들을 사랑으로 돌보는 공동체를 세우고, 국가 기관과 연결해서 새로 생겨지는 감옥안에 형제들을 섬김 교육을 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가운데 루터가 종교개혁의 기치를 들고 중세 카톨릭에 95개조 반박문을 내세울 때 비헤른은 “사랑은 교회에 있어 신앙에 속합니다” 라고 연설문을 남겼습니다. 이로 인해 독일에 디아코니아 운동의 거대한 불쏘시개가 되었고, 독일의 디아코니아 운동은 당시 화석화 된 교회에 환멸을 느끼고 떠났던 평신도들이 돌아오게 하였습니다. 물론 섬김 사역을 하는 비헤른에게 비복음적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로마서 8:17 ) 그는 비난과 핍박속에서도 당시 이성적 자유주의에 물든 시민들이 반교회적으로 변해 있다고 보고, 예수의 삶을 구현하기 위해서 산업도시를 방문하여 선교회를 구체화 시키는데 공헌을 합니다. 그는 위대한 신학자를 길러 내기 보다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하는 섬기는 자들을 배출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사랑으로 세상을 지배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고 고백하면서 지체들을 미워하거나 정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유업을 얻고 십자가의 피로 씻김 받는 하늘의 상속자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김을 더욱더 실천하며 예수의 삶이 더욱 뿌리 내리도록 해야 합니다.
동상이몽(同床異夢)이란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같은 침상에서 서로 다른 꿈을 꾼다’ 라는 뜻입니다. 같은 상황에서 같은 걸 보면서도 서로 달리 생각하는 것이 인간의 연약함입니다. 그래서 섬김의 본이 되신 주님만이 섬김의 방향입니다. 방향이 같으면 속도는 달라도 하나의 모습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결혼은 관계속에서 배우자의 시선을 통해서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자신의 모습을 보고 다듬어져 가는 과정입니다. 주안에 있는 성도는 서로가 사랑하는 방법을 배워가게 되고, 서로의 모난 부분이 다듬어져 가는 과정 안에서 화해하는 방법을 배우고, 자신 위주로 살던 삶에서 서로의 삶을 이해해 가며 온전한 모습이 되어 갑니다.
42 예수께서 그들을 불러 놓고 말씀하셨다. “너희도 알다시피, 세상의 왕이나 위정자들은 백성들 위에 군림하면서 권력을 휘두른다.43 그러나 너희는 결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큰 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먼저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44 또, 너희 중에 으뜸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먼저 모든 이들의 종이 되어야 한다.
언제나 십자가 사랑의 섬김에는 주님이 거하십니다. 바울은 복음을 접하고 율법의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것에서 복음으로 인한 획기적인 경험을 했습니다. 주님은 새로운 차원에서 섬김을 완성하셨으며 성령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새로운 차원의 하나님 나라를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이후 제자들은 세상의 인본주의 가치와 원리와는 상반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며 십자가를 통과하는 부활의 삶을 살아낸 것입니다
셋째, 섬김은 지속적인 사명입니다.
현대인들은 협착하고 좁은 길보다 넓은 문 넓은 길을 더 선호합니다. 많고 크면 뜻을 펼치기가 좋고, 부와 명예와 권세를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좁은 문은 단회적인 선택이지만, 좁은 길은 지속적인 결단으로 걷는 길입니다. 그 길은 금욕주의, 고행, 율법주의, 종교적 형식과 틀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좁은 길을 가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세상의 가치와 다르게 살아가는 길이며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회개함을 통하여 합당한 삶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내가 주인 되어 살아가는 넓은 길에 비하여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자신의 배만 채우는 삶의 끝은 멸망이라고 합니다. 그 끝이 허무함이고 멸망이라고 한다면 삶의 방향을 바꿔야 합니다. 섬기는 삶에는 언제나 기적이 일어납니다. 예수께서는 날이 저물 때에 어린아이의 나눔으로 2만여명을 먹이는 엄청난 기적을 보이셨습니다.
주안에서 행하는 섬김은 섬길수록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으로 씻김 받는 일들이 계속적으로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는 살아가는 길에서 접촉되는 죄를 지속적으로 정화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서로 사랑하라,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다고 하신 말씀을 깊이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가룟 유다의 마음 안에는 이미 마귀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요 13:2) 제자들이 지속적으로 서로 사랑하는 뜻을 깨달았다면 가룟 유다의 선택도 달라지지 않았을까요? 2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세상은 달라진 게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달라진 것은 예수께서 자기 목숨을 모든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진리를 만난 사람은 주인을 잃어버린 시대속에서 인생의 본래의 집을 향하여 나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섬김이 외적인 행동의 표현이라면 성도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의해서 날마다 내적으로 거룩해져 갑니다.
너희는 내가 마셔야 할 쓴 잔을 마실 수 있느냐? 내가 받아야 할 고난의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우리는 누구나 크고 작은 가시를 품고 살아갑니다. 나도 제자모르게 내가 품고 있는 가시가 나를 아프게 하지요. 그러나 이 가시를 통하여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붙들고 계신 지를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 아픈 가시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상처가 변해 상처입은 치유자가 되어지고, 심령의 애통함이 변하여 위로자가 됩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 받는 이들의 삶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게 될 것입니다. 공동체의 평화를 위해 실천하는 이들을 통해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심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조개속의 진주는 외부에서 오는 자극 물질이나 기생 생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집니다. 외부의 자극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진주가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가치 있는 보석이 되고, 거센 폭풍과 비바람을 맞으며 자란 나무가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좋은 악기가 되듯 눈물과 아픔을 끌어 안은 인생이 하나님을 만나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 있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섬김은 이처럼 작은 가시를 품고 있는 부족한 우리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이고 소명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세상에 들어왔음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도 힘차게 다가 오고 있고 성도는 그 나라를 향해서 가는 중입니다. 세상의 욕망과 질서, 힘에 의한 통치는 하나님의 나라에 의해서 언젠가 완전히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고, 마지막까지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섬김의 본이 되어 주셨습니다. 자녀의 영을 받은 사람은 인생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아무리 훌륭하게 일을 처리한다고 해서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그리스도로 인해 뗄 수 없는 관계속에서 자녀됨의 상속자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섬김은 단순히 봉사 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삶의 고백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 안의 쓴 뿌리를 뽑아내고 하나님의 거룩한 공동체가 되어 진정한 섬김의 직분을 감당해야 합니다. 모두가 함께 서로의 것을 나누며 한 형제, 한 가족이 되는 진심을 느끼고 모두가 차별없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진정한 섬김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 앞에 값비싼 향유를 붓고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렸습니다. 그 가치를 따진다고 하면 삼백 데나리온이 지금으로는 3만불이 넘는 가치일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과 함께 하는 기쁨에 더 큰 가치를 둔 사랑과 겸손, 섬김의 모습으로 향유 옥합을 깨트려 예수님 앞에 진정한 예배의 기쁨을 올려 드렸습니다. 성도들의 삶은 맡겨 주신 삶의 자리에서 기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섬기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하나님의 자녀로 명예 지켜가는 것입니다.
1/14/2024 | (주현 후 제 2주)
우리가 사랑하는 공동체 시리즈 2 "기도 공동체" The pray community
디모데 전서 2:1-7
우리가 사랑하는 공동체 시리즈 두번째는 기도입니다. 디모데 전서는 영적 멘토인 바울이 제자 디모데에게 보내는 목회서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목회를 마치며 자신의 뒤를 잇는 디모데에게 당시 에베소 교회 안에 침투해 있던 거짓 교사들과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예배는 어떻게 드려야 하는지, 교회 안에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를 알려 주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먼저 당부하는 것이 기도였습니다. 기도의 자리는 깊어질수록 겸손하게 되고 고요함의 자리로 안내합니다. 지금처럼 소통이 빠른 세상에서 기도의 자리는 하나님을 만나는 고요함을 가져다줍니다.
바울은 목회의 영역에서 직분자를 세우는데 있어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하며 믿음을 지켜 나가는데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이 기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기도가 살아 있는 교회는 말씀의 능력이 있게 됩니다. 신학교 다닐 때 학교 근처에 기도를 참 많이 하는 교회가 있었습니다. 청년들이 기도하다가 영적인 생명이 들어가니까 성경을 한번도 읽어 본적이 없는 학생들도 하나님을 알아가기 위해 성경을 묵상하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장하는 그 교회를 탐방했습니다. 사람이 하는 일이라면 글로 증명해낼 수 있겠지만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이 은혜 주셔야 하고 힘 주셔야 합니다. 우리 각사람이 말씀과 기도로 우리의 삶에 임할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어야 합니다. 서로에게 권면하고 전해야 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아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기도해야 합니다.
1 그러므로 이제 나는 그대에게 당부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모든 사람을 위해 간구와 기도와 중보기도와 감사를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바울은 무엇보다 먼저 기도하라고 합니다. 목회의 인생을 돌아보며 아들처럼 여겼던 디도데에게 기도의 우선성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무슨 일을 하든지 주님을 의식하며 살았습니다. 눈을 떠서 잠들 때까지 바울에게 기도는 우선적 삶이었습니다. 사명의 길을 가며 기도의 영적습관은 매순간 주님께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습관은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은 아닙니다. 현대인들은 일상 생활이 분주합니다. 날마다 긴장하며 살아야 하고 치열한 경쟁의 삶으로 부터 벗어나기 위해 물질적인 것을 추구하는데 에너지를 소진하다 보니까 하나님을 향한 갈망의 힘은 거의 남지 않게 됩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데 늘 지쳐있고 헌신을 요구하는 자리에서는 벗어나 있습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속에서 기도는 특별한 가치 보다는 평범한 것인데 기도의 가치가 사라지는 시대인듯 싶습니다. 신앙생활에서 기도는 건강한 신앙을 유지시켜 주는 필수 요소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기도로 하루를 시작해 보시고 일과를 마치고 잠들기 전에 감사의 기도로 하루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기도의 씨름은 내 힘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읽으시며 그 말씀을 기도의 언어로 담아 보시기 바랍니다. 기도의 훈련이 우리의 시간을 거룩하게 하고 우리의 눈과 마음을 유혹하게 하는 세상속에서 거룩한 시선과 거룩한 마음을 품게 해줍니다. 기도는 분주하게 하는 환경들로 부터 마음을 가라 앉히고 홀로 있는 공간이 외로움이 아니라 하나님과 더욱 친밀해지는 시간이 됩니다. 영혼이 순수해 지고 정화되는 길은 기도 외에는 없습니다.
관심이 있고 편안한 사람에게는 더 가까이 가고 싶고 친밀해지고 싶어합니다. 기도가 살아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친밀해 집니다. 기도하고 싶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의 제목을 발견하고 싶어 지니까 기도의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어느덧 이민생활도 안정이 되고, 신앙 생활도 오래 하다 보니까 기도의 필요성이 줄어 들어 계시지는 않습니까? 기도의 기쁨은 사라지고 의무적이고 형식적인 차원에만 머물러 있지는 않으신가요? 기도는 호흡입니다. 누군가가 나를 대신해서 숨을 쉬어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힘든 환경에 처한 이들에게나 인생의 주체성이 약한 사람이기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이 바쁠수록 기도해야 하고, 평범한 일상에서 기도생활이 유지되어야 합니다. 지금의 우리의 삶에 기도의 삶이 살아있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무엇보다 모든 사람을 위해 간구와 기도와 중보기도와 감사를 하나님께 드리라고 권면합니다. 이후 4가지의 기도를 소개하는데, 모든 사람을 위해 중보자의 마음으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기도는 간청에서 부터 시작이 됩니다. 간구의 기도를 통하여 기도의 반경이 넓어지고 삶이 영적으로 깊어지게 됩니다. 기도의 반경이 넓어지다 보면 다른 이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하게 됩니다. 말씀을 붙들고 지속적으로 기도할 때에 말씀이 삶을 형성해 나가는 것입니다. 시대의 언어로 번역된 메시지 성경의 집필자 유진 피터슨은 ‘말씀을 먹으라, Eat this book’이라는 그의 책에서 그가 키우던 개가 홀로 뼈다귀를 뜯으며 기쁨을 만끽하는 이미지속에서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는 영적인 힘을 느꼈습니다. 기도의 즐거움은 우리를 말씀의 세계로 이르도록 인도합니다.
왜 바울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했을까요? 디모데가 목회하던 당시 에베소 교회에는 다양한 신분의 사람들과 사회적 지위가 다른 여러 인종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차별없이 기도하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기도하는 교회는 서로가 어울려 사는 법을 배우고 실천하게 됩니다. 힘이 존재하는 세상속에서 하나님의 질서 안에서 서로가 섬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서로를 평가하는 시선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연약한 마음이 앞서지 않도록 입술의 말은 줄이고 기도의 자리에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는 디모데에게만 보낸 편지는 아닙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디모데 전서의 마지막 구절인 6장 21절은 “이것을 좇는 사람들이 있어 믿음에서 벗어 났느니라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 너희라는 ‘휘몬’이라는 단어는 영어로 you인데, 주어가 복수로 사용되면 you도 복수로 사용되게 됩니다. 이 글을 읽는 모든 이들에게 운명을 달리 하라고 쓰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믿음의 경주에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 하나님과 더욱 깊은 삶을 위해 에베소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2 왕들과 높은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도 그처럼 기도하십시오. 그래야 사회 질서가 안정되고 평화로운 가운데, 우리가 경건하고 거룩한 신앙생활을 잘 영위해 나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3 이 같은 기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일이며, 또 기쁘게 받으실 만한 일입니다.
바울은 왕들과 높은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하라고 합니다. 지도자는 타인에 대한 부정적 감정도 기도로 풀어내야 합니다. 이 기도의 핵심은 중보자의 모델이 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아는데 있습니다. 기도는 나만을 위한 간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처음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간구하는 기도를 통해서라도 하나님을 경험해야 합니다. 신앙이 깊어질수록 나만을 위한 기도에서 기도의 반경이 넓어지게 됩니다. 중보(Intercession)란 ‘사이, 간격’이란 뜻이며 이쪽과 저쪽을 연결시켜 주는 기도입니다. 세상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연결하는 중보자는 예수 외에는 없습니다. Inter 는 between을 의미하고 Cession은 ‘간다’라는 의미를 가진 라틴어 cedere(체데레)에서 파생한 말입니다. 즉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갈라진 틈에 거하시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생명이 끝나는 순간까지 하나님과 모든 사람들 사이에 중보자가 되셨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때로는 아픈 마음과 상처의 마음의 틈에 다른것을 채우지 마시고 오직 기도로 그 틈을 채워보시기 바랍니다.
조선후기 우리나라는 암흑기였습니다. 국민과 국가의 이익보다 높은 자리에 있는 이들이 자기 이익만을 챙기는 정치로 인해 조선에 멸망의 그림자가 드리워졌습니다. 조선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위정자들과 임금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당시 흑암의 통치가 미치는 조선땅은 암울했지만 선교사들은 낯선 땅에 많은 복음의 열매를 맺게 해달라고 나라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한국은 이제 어느 나라를 가도 교회부터 세우는 민족이 되었습니다. 기도의 힘인 것입니다. 현대사회에 여전히 일어나는 전쟁의 문제들도 지도자의 바른 판단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게 합니다. 전쟁으로 인한 폐해는 오랜 시간에 걸친 갈등, 국가 지도자들의 민족적 이기주의가 만들어 내는 결과들입니다. 바울이 국가의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한 이유는 사회 질서의 안정과 평화롭게 살기 위함이고, 거룩한 신앙생활을 영위해 나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일이며, 기쁘게 받으실 만한 일인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은 세계 선교를 책임지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2024년에 세계 4차 로잔대회가 서울에서 개최가 됩니다. 1970년대, 빌리 그래함은 정치적, 경제적, 지성적, 그리고 종교적 격변이 일어나고 있는 세상 속에서 기독교 선교의 의미를 다시금 정립하는 국제 대회의 필요성을 느꼈고, 1974년 7월 150개국, 2,400명이 넘는 참가자들이 스위스 로잔에 모여 세계복음화를 위한 국제대회를 개최했습니다. 1974년에 시작된 로잔운동은 1989년 필리핀 마닐라에서 제 2차 대회가 개최되었습니다. 그 당시 수많은 평신도 리더와 여성들의 참여가 있었습니다. 이후 2010년 남아프리카 케이프타운에서 3차 대회가 열렸습니다. 사도행전에 빌립집사가 에티오피아 내시에게 세례를 준 기록이 있는데 당시 1세기에 아프리카에 전파된 기독교는 21세기 아프리카 지역이 비서구권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높은 복음화율을 보여줍니다. 케이프타운 로잔대회에는 수많은 청년리더들을 국제 리더들과 연결해 주면서 그들의 지도력의 발전을 촉구했습니다. 그리고 2024년 세계 선교의 영향력을 보여 주듯 서울에서 열리는 4차 로잔대회의 소식은 세계선교 역사에 초석으로 삼으시고 지금까지 놀라운 국가로 사용하셨음을 볼 수 있는 사례입니다.
4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얻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5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또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의 중재자도 한 분이신데, 그분은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십니다. 6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온 인류를 위해 자기 자신을 대속의 제물로 내어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적절한 때에 자신의 약속을 이루신 증거입니다. 7 나는 이러한 증거를 널리 전하도록 전도자와 사도로 임명을 받아, 이방인들에게 참된 믿음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한 점 거짓 없는 진실입니다.
기도하는 가장 궁극적인 이유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얻고 진리를 깨닫기 위함입니다. 선택받은 성도들은 기도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간극이 있는데 성경은 이를 죄라고 합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재자가 필요한데,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는 오직 한분입니다. 하나님도 한분이시고 중재자 예수도 한분이신데 주님께서 온 인류를 위해 자기 자신을 대속의 제물로 내어 주셨습니다. 세상은 그 길이 왜 예수여만 하는지 질문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의 기도를 생각해 보세요.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밤새도록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피하고 싶은 십자가 쓴잔을 두려워 떨며 하나님께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너무도 두려웠고 피하고 싶었던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우리를 향한 사랑으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달리신 십자가를 생각하면 그저 눈물만 납니다. 아무리 그 길을 따른다고 하지만 기도 없이는 흉내 조차 낼 수 없는 그 길을 주님께서 걸어 가셨습니다. 이것은 기도를 통해서 믿어지는 것입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 26절 에서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8:26 ○ 성령께서도 우리의 연약함을 적극 도와 주십니다. 사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할지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절실함으로 우리를 위해 아주 적절하게 기도해 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복음 증거자와 사도로 세움을 받은 것이 참말이요 거짓말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사도임을 강조해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당시의 거짓 교사들이나 그들의 영향을 받은 자들로 인해 사도성이 의심을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말씀들을 보면서 사도 바울의 아픔을 함께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직분자로 전도자로 교회의 위해 살아가는 길은 때로는 눈물로 걸어야 하는 길입니다. 눈물이 앞을 가릴 때마다 이 길을 먼저 걸어가신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누구보다도 충실하게 사명을 감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의심을 받고 있는 아픔 가운데 디모데에게 보낸 목회서신은 우리 모두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새해에는 직분자들이 세워지게 될텐데, 믿음으로 결단한 분들은 주님께서 주시는 직분 앞에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의 질문에 “네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라고 순종하시며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디모데 서신을 많이 묵상하시며 교회를 위해 목회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프고 고통받는 지체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기도 밖에 없다면 그 기도의 자리에 먼저 서는 직분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사랑하는 마음을 허락 하실것입니다. 귀한 직분을 받기 전에 기도하며 믿음의 직분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전에 하던대로 하루에 세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자기 하나님 앞에서 감사를 드리더라’ (단6:10)
새호흡으로 주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다니엘은 하루 세번의 기도로 한결같은 기도의 무릎을 꿇었습니다. 우리는 순종하는 자로 겸손한 자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기도의 무릎으로 우리의 자녀가 하나님을 알아가고 우리의 공동체가 서로 사랑하는 걸음을 걷게 될 것입니다. 진정한 메시야임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사람들로부터 온갖 의심과 수모를 받으셨던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의 긴 호흡으로 믿는 자들의 길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모습이 부족할지라도 주께서 보이신 생명의 길을 향하여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이 땅에서 가장 연약한 성도의 기도라도 그가 영적으로 살며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다면 그의 기도가 사탄에게는 강력한 응징이 된다. 어둠의 세력은 기도에 의해 무력해진다.” 라고 말했습니다. 성숙한 성도는 공동체를 불평으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강한자와 약한자를 구분하여 차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교회와 공동체를 위해 기도의 자리가 깊어지면 연약함도 사랑하게 됩니다. 기도의 자리는 하나님과 더욱 친밀해지는 자리입니다.
성령님이 함께 하시는 기도를 통해 우리는 진정한 마음의 감사와 쉼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앞에서도 사랑으로 십자가를 참아내셨습니다. 생애의 전부가 기도하는 길이셨습니다. 말씀위에 진실한 기도를 더하는 목회, 말씀과 기도로 깊어지는 공동체, 다시 오실 그날에 밝히 드러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일상의 골방에서 열방을 품고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는 교우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1/7/2024 | (주현 후 제 1주, 신년주일)
우리가 사랑하는 공동체 시리즈 1 '말씀 공동체' The bible community
요한복음 17:14-20
얼마전 보스턴에 한국 영화 서울의 봄이 개봉을 해서 많은 분들이 관람을 하고 오셨을 것입니다. 영화속에 전두광이라는 인물이 ‘이 정도 각오도 안했습니까? 실패하면 반역, 성공하면 혁명이다.라는 대사가 나옵니다. 사람들은 `개혁’이라는 단어를 좋아합니다. 지난 역사를 돌아 보면 개혁을 한 이들은 또 다시 개혁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개혁 속에서 국민을 이해하지 않고 특정한 인물이나 집단의 이익만을 추구할 때에 개혁은 역사속에서 악순환을 되풀이 하게 됩니다. 건강한 역사관이 중요하듯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양심이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 정치는 특정한 세력의 호응을 얻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바른 신학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틀을 견지(堅持)해야 합니다. 인간 안에는 하나님을 닮은 흔적이 지문처럼 남아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성도들의 양심을 두드립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참된 진리로 인도해 나가시는 것입니다.
현대사회에 엄청난 혁명을 일으킨 Chat GPT는 우리가 배운 성경의 지식을 뛰어 넘을 수도 있고 말씀에 대한 정보를 빠르게 제공해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공지능은 데이터에 기반한 정보 제공일 뿐 영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삶의 실제의 믿음을 갖지는 못합니다.
2024년 1월은 우리에게 다시 오지 않는 시간입니다. 새해에 저는 건강한 교회를 이루기 위해서 ‘우리가 사랑하는 공동체 시리즈’로 설교를 준비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의 공동체가 함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러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으로 격려하며 연합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가정에서 예배가 회복되고 주일학교에서 장년부에 이르기까지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더욱 가까이 살아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공동체 시리즈 첫번째는 말씀 공동체입니다. 새해에는 성경 말씀을 정해 놓고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마음의 결단이 필요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삶에 가장 강력한 힘이 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일이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2024년 새해에는 하나님의 복된 말씀을 삶의 언어로 삶의 자리에 담아내 보는 훈련을 해보시기를 바랍니다. 부모가 먼저 기도의 무릎으로 살아내야 하고,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기쁨으로 가득해야 합니다. 말씀으로 살아내는 기쁨을 맛보아 아시는 교우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이 기도 안에 담긴 주의 교훈을 살펴 보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이 심겨질 때 마음의 상태가 드러나게 됩니다.
14 나는 그들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주었는데, 세상은 그들을 미워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내가 세상에 속하여 있지 않은 것처럼, 그들 역시 세상에 속하여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인간의 본성과 부딪힙니다. 예수는 독선적이거나 이기적인 복음을 선포하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는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따라야 한다고 전파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의 질서와 세상의 질서가 서로 충돌하면서 사람들은 돌이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순순히 따르지 않고 예수를 미워하였습니다. 인간의 본성과 하나님의 나라의 질서가 부딪힌 것입니다.
웨슬리는 1730년 11월 15일 옥스포드 대학에서 첫번째 설교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에 대해서 설교를 했습니다. 인간 존재를 세가지로 ‘형상화’ 하였는데 ‘자연적 형상, 정치적 형상, 도덕적 형상’으로 나누어 설명했습니다. 피조물인 인간은 타고난 자질로 하나님과의 의식적인 관계성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이성과 의지, 자유로 옷 입혀져 있다는 것이 자연적 형상입니다. 인간의 이성은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속성이기에 지각함으로 하나님을 인식하게 됩니다. 하나님과 교제를 하도록 지어진 인간은 영이신 하나님을 우리의 이성을 통해 헤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의지가 타락으로 인해 부패하게 되었고, 의지의 타락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손상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타락한 의지는 죄의 힘에 포로가 되어 자기요구, 자기중심적 인간의 본성을 따라 살아가도록 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타락한 의지와 선을 택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충돌하게 되는 것입니다.
두번째 정치적 형상은 하나님이 인간을 통하여 창조물들을 다스리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창조물 사이의 소통의 역할을 하도록 청지기적 사명을 부여 받는 피조물로 지음 받았다는 것이지요. 창조된 세상을 새롭게 하는 우주적 드라마는 정치적 소명 가운데 창조주께 통치를 받는 관계성에 서 시작하게 됩니다. 인간에게는 다른 피조물을 충만하게 하는 특별한 책임이 주어져 있습니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중요한 하나님의 형상은 도덕적 형상입니다. 도덕적 형상은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거룩하심을 반영하고 있는데 웨슬리는 인간이 죄로 인해 거룩성을 완전히 상실한 것으로 봅니다. 1738년 5월 24일 저녁 웨슬리 목사가 체험했던 마음이 뜨거워지는 체험은 그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은혜에 마음을 열게 된 사건입니다. 웨슬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의 용서가 전달되고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될수 있음을 경험했습니다. 웨슬리에게 하나님의 형상은 추상적인 것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실천적 영역으로 나타났고, 웨슬리는 은혜의 삶을 영적 호흡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로 삼아 주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함으로써 하나님의 계획에 동참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받아들여진 것이 구원이라고 한다면 더 중요한 것은 구원 이후의 삶인 것입니다. 성도는 세상의 질서와 가치에 저항하며 때로는 미움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세상이 미워하는 것은 우리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 질서를 향한 적개심일 뿐입니다. 그러니 예수께서는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세상을 이기신 주께서 우리 안에 하늘의 평안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은 지금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언약의 핵심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세상에는 언약을 깨닫고 살아가는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살아 있는 믿음은 하나님의 용서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언약의 할례를 받는 것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고 세상이 우리를 유혹해도 하나님께 뜻을 정하고 예수로 사는 인생은 도리어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어 나가게 됩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세상을 떠나서 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여 있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세상으로 부터 불러낸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아래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를 교회라고 말합니다. 건강한 공동체는 이 은혜를 누리며 세상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
본회퍼 목사는 성도란 그리스도를 통해 다른 이들을 보는 사람들이라고 말했습니다. 나와 너 사이에 내가 구원을 받은 것처럼 타인도 그리스도를 통해서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름대로의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합니다. 이런 사람이고 저런 사람이라는 기준으로 규명해 버립니다. 그런데 건강한 성도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타인의 모습을 인식해야 합니다. 나의 기준과 시선 보다도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일상속에서 세상과 이웃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떠나서 교회만을 위한 길을 걷는다면 교회는 희망이 되는 빛을 상실해 버리게 될 것입니다. 빛을 잃어버린 교회는 세상에 소망이 될 수 없습니다. 새해에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신 예수의 말씀을 깊이 고민해 보시기 바랍니다.
두번째, 말씀은 우리를 악한 세력으로 부터 지켜 줍니다.
15 내가 지금 아버지께 기도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곧 그들을 세상 밖으로 데려가 달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악한 세력으로부터 지켜 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주기도문 통해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라고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악에서 보존하기 위한 유일한 방편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가 드린 기도의 목적은 십자가 사건을 앞두고 제자들을 악으로 부터 지켜 달라고 하는 기도였습니다. 악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신 것은 예수가 떠난 후 다가 올 유혹과 핍박의 상황을 염두 해 두고 하신 기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의 밑바탕에는 자기희생과 헌신, 예수께서 지신 십자가가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 공동체의 독특성입니다. 하나님을 미워하는 세상을 떠나서 믿는 우리끼리 잘 살면 더 속편하겠지만 성도는 세상을 모른 체하고 살아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온 세상을 위한, 온전한 복음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악을 이기고 승리하셨습니다.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악에서 보호해 주십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없이 세상속에 거하면 우리는 세상의 물결따라 속절없이 끌려 다니게 됩니다.
하나님은 출애굽 공동체를 구출하셔서 광야길을 걷게 하셨는데 출애굽 이후에 애굽에서 살던 옛삶을 씻어내야 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이 구원이라면 세상속에서 살아가는 성도는 구원 이후의 삶을 살아가며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배우고 하나님의 이끄시는 대로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배워가는 일입니다. 이 마음이 있는지 없는 지의 차이는 믿음생활에 있어서 엄청난 결과를 초래합니다.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로마서 8:24-28)
하나님의 말씀이 삶의 실제가 되는 감격과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에는 많은 부서가 있습니다. 이는 케임브리지 한인교회 안에 있는 작은 교회들입니다. 우리는 누구도 소외되지 않도록 살피고 사랑의 마음으로 품어야 합니다. 허락하신 공동체를 위하여 기도하면서 서로 다른 우리가 함께 연합을 하고 각자의 믿음의 분량은 다르지만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함께 걷는 것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경험하고 삶을 공유하며 머뭇거리지 않도록 바른 선택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시대는 기독교가 가진,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한 진리가 공격 받고 있기에 절대적인 것을 용납하지 않고(범신론 신앙) 세상은 다 섞어 버리려고 합니다.(혼합주의 신앙) 게다가 인간의 무지와 죄성, 교만과 욕심은 영적 분별력을 흐릿하게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령 충만한 삶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의 믿음은 살아 있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본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서 살아 있는 믿음을 지니게 된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주와 함께 지속적으로 걷기를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유혹하고 핍박하는 악에 집중하지 말고, 말씀의 렌즈를 통해 회복시켜 주시는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세상에서 교회가 할 일이 여전히 많이 남아 있습니다. 주님은 복음 전파의 사명이 있기에 제자들이 악한 자의 공격과 시험으로 부터 보호되기를 기도하신 것입니다. 한해 동안도 주어진 예배를 드리며 주님의 마음에 몰입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할수록 부활하신 예수의 능력을 힘입게 하실 것입니다.
셋째는 말씀으로 예수를 믿게 하라는 것입니다.
19 내가 그들을 위하여 나 자신을 거룩하게 하는 것은, 그들 역시 진리 안에서 거룩하게 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20 그리고 나의 기도는 오직 제자들만을 위한 기도가 아닙니다. 그들이 전하는 말을 통하여, 나를 믿게 될 모든 사람들을 위한 기도이기도 합니다.
공황 장애를 앓고 있던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 청년은 미래와 성공에 대한 강박관념도 있었고 주위의 평가에 대한 불안함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야할 길에 대해서 항상 불안해 하고 자신의 삶에 진정한 쉼을 차단하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교제와 관계의 문도 닫고 자신의 삶만 붙들고 살아가던 그 청년과 어떻게 동행할 수 있을까 고민했지만 답은 하나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계속하여 예배의 자리, 기도의 자리로 초대하였습니다. 긴 시간 동안 벗어내지 못한 불안과 염려의 시간을 걷던 그 청년은 어느날 예배안에서 뜨겁게 사모하는 친구들을 만나 지금껏 감추어 두었던 마음의 짐을 털어내고 한국으로 돌아가던 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나니 이제서야 세상속에서 끼고 있던 인공호흡기를 떼고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라는 고백이었습니다. 그 청년에게 삶의 악한 세력은 인생의 목표와 목적을 자신이 이루어야 할 것이라고 여겼던 마음이었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상처와 문제를 뛰어넘지 못하고 그 안에 머물러 갇혀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안에서 자신을 찾는 순간 그렇게 두려워했던 사람들과 세상속으로 당당하게 들어갈 힘을 발견하게 된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고난의 풀무불속에서도 지켜 주실 것입니다. 고난과 핍박이 강하면 강할수록 더 맑고 순수한 믿음으로 만들어 가시며 우리의 영혼을 윤택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의 증인입니다. 케임브리지 한인교회는 세상속에서 빛이 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가 마음을 모아 하나님의 몸 된 교회를 세상의 질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질서 안에서 세워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게 될 이들이 있습니다. 광야의 시기를 걸으며 어려움을 겪고 이들이 정금 같은 믿음을 소유할 수 있도록 서로를 격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붙드는 제자로 서있으십시오. 기독교인은 성경책에 기록된 대로 세상속으로 들어가 실천하는 사람들입니다. 새해에는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시고 성경을 묵상하는 시간을 늘려 보시기 바랍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헌신도 해 보시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힘써서 성경을 공부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1:14)라는 말씀처럼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신 주님과 말씀의 기쁨을 함께 누리고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는 삶, 기도로 악한 세력을 이겨내는 삶, 말씀안에서 진정한 회개와 회복을 누리는 가정과 공동체의 모습을 찾아가야 합니다. 결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자신과 동일한 길을 걸어야 하는 우리들을 긍휼히 여겨 주실 것입니다. 지금도 계속해서 믿는 사람들, 계속해서 하나가 되어지는 사람들, 적극적으로 세상을 품기 위해 애쓰고 고민하며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는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크신 은혜를 부어 주실 것입니다. 2024년 우리 모두는 나를 위한 더 많은 소유에서 안전을 느끼는 삶을 멈추고 하나님의 말씀에 인도함 받는 삶에 도전해 보시며 주님과 하나되는 기쁨을 누리는 한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2/31/2023 | (성탄 후 제 1주, 송년주일)
마리아의 찬가 II The Magnificat: Mary’s Song of Praise II
누가복음 1:50-55
한해도 살아보지 않았던 낯선 세상을 마주하며 믿음으로 잘 살아내셨습니다. 2023년은 ‘기도시리즈’를 시작으로 성령강림절기를 기점으로 사도행전을 묵상하며 설교를 전했습니다. 대림절기를 시작하면서는 예수님을 기다린 여인들 시리즈로 시작하여 한해 마지막 주일설교를 ‘마리아의 찬가’로 마칠수 있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저에게도 지난 한해를 회고해 보면 케임브리지 한인교회가 걸어온 비전과 사명을 이어받기 위해서 씨름했던 시간들입니다.
영성학자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 1951 ~ 1968)의 ‘사랑과 삶(Love and Living)’ 이라는 저서를 보면 예수의 탄생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만일에 우리가 하나님께서 베들레헴 아기 속에 자신을 계시하신 것을 받아들이면, 이것이 우리 인생에 중대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도 깨달아야 한다. 소란하고 혼란스러운 세상의 ‘여관’에서 방이 없는 분을 받아 들인다는 뜻이다. 만일 우리가 그 아기를 우리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오만한 권력의 세상 속에서 그분과 함께 성장해야 하며, 그분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십자가를 향해 걸어간 그 길을 함께 여행하면서 세상의 권력에 맞서서 저항해야 하는 우리의 의무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십자가는 세상의 권력을 부정하는 것이다.” 주님은 어두운 세상에 씨앗이 되어 오셨습니다. 한 알의 씨앗이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으나,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라는 말씀처럼 예수님은 밀알이 되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한해도 섬김의 자리에서 수고한 모든 교우들에게 하나님이 채우시는 은혜가 넘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십자가의 원리 안에서만 자라갑니다. 어둠속에서 한줄기의 빛이 길을 밝혀 주고 따뜻한 말 한마디가 누군가의 굳어진 마음을 녹여 주지요.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도 저절로 되어 지는 것이 아닙니다. 2천년 전에 하나님 나라의 씨앗으로 오신 말씀이 우리의 마음밭에 심겨져야 합니다. 씨앗은 심겨지고 죽어져야 씨앗이 발아 되어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지난 주 마라아의 찬가 1악장은 아브라함때 부터 계획된 언약이 성취되고 있음을 노래합니다. 오늘 마리아의 찬가 2악장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에 하실 일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메시아가 열어 줄 새로운 나라를 기대하는 노래입니다.
마리아의 찬가에는 악에 대한 승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찬양은 자유로운 영이면서 동시에 질서의 영이신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승리하신 주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확인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우리는 한해동안 교회력에 맞춰 매주일 예배를 드렸습니다. 교회력은 지난 2천년 교회 역사 가운데 개인의 신비와 영성보다 하나님의 주권이 더 우월함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을 대적해서 이길 절대자는 세상에 없었습니다. 절대자라는 수식어는 오직 하나님께만 사용할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헤롯왕의 죽음의 위협속에서도 안전하게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오히려 혼돈과 어둠이 드리운 시대 한복판에 태어나셨다는 것이 우리의 삶에도 희망이 됩니다. 우리는 이민자로 살아가며 낯선 세계속에서 약자로 서 있습니다. 나라를 떠나 살면서 겪는 고통과 설움은 약자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영적인 눈을 뜨는 경험이 되었고, 하나님의 일을 보게 하시고, 다른 사람의 필요를 보게 해 주셨습니다.
여러분의 영혼을 깨끗하게 해주었던 찬송은 무엇입니까?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둔 길에서 마음을 위로해 주던 찬양은 무엇이었습니까? 마리아의 찬가에는 세상을 뚫고 들어오셔서 위 아래가 바뀌는 하나님 나라가 나옵니다. 마리아의 찬가는 갈곳이 없는 이들의 고향땅이 되어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악에 대한 승리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는 마음이 교만한 자들, 힘없는 사람을 짓밟는 자들을 산산히 흩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이 어려워 질수록 누구나 더 움켜지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인간의 뒤틀려진 마음으로 인해 세상은 전쟁과 폭력이 끊이질 않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죄라고 하는데요. 저절로 성숙해 지면 얼마나 좋을까요? 빚진 자의 마음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지 않으면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알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마음은 영혼을 향한 감각이 무뎌지고 하나님의 자비의 마음으로 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 안에 지나친 탐욕의 마음 위에는 악이 자랄 것이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할때 사랑의 마음 위에는 거짓이 없는 선한 열매가 맺어지게 될 것입니다.
한 사회학자가 현대사회를 평평한 운동장이 아니라 기울어진 운동장에 비유하는 것을 책에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차별로 인해 극복할 수 없는 불공정한 사회를 표현한 말입니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경기하면 낮은 쪽에 있는 사람들이 아무리 열심히 해도 이길수 있는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깝습니다. 정점에 우뚝 선 사람들과 깊은 골까기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엄연히 구조적인 힘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상의 가치를 거리낌 없이 흡수하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누리면 누릴수록,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삶의 가치를 내 안에서 찾게 됩니다. 그러니 불평등한 사회속에서 하나님의 가치로 살아가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자신이 신이 되고자 수많은 우상을 만들어 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비천함 속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했습니다. 믿음으로 희망찬 나라를 보았습니다. 마리아는 하나님 나라를 꿈꾸는 여인이었습니다. 우리도 성육신적 삶을 배움으로 하나님의 통치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씨앗이 열매가 되기 위해서는 헌신을 필요로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섬김과 사랑의 토대위에서 자라납니다. 돈이 신이 되어진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자비는 주를 경외하는 모든이들을 위로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고아같이 우리를 버려 두지 않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 희망의 노래를 부르며 새해를 맞이하기를 바랍니다.
테레사 수녀는 허리 굽히고 섬기는 사람에게는 위를 쳐다 볼 시간이 없다고 했습니다. 탈무드에는 ‘누워 있는 자는 넘어질 염려가 없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도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한해의 끝자락에서 마리아의 찬가를 천천히 충분하게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마음의 울림이 되기까지 지속적으로 되새겨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겸손한 마음에 넘쳐납니다. 마리아는 이 하나님의 성품을 정확히 깨닫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권세 있는 자들이나 왕들이라도 불의를 행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치 않으면 얼마든지 끌어 내리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십자가의 고통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수께서 힘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죽음 앞에서 두렵고 무서웠지만 하나님의 뜻을 알기에 그 사명을 확인하고 십자가의 죽음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복음서에는 귀신들린 사람이 예수를 가리켜 가장 높으신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막 5:7) 영혼을 소멸시키는 것에 중독되어 속절없이 끌려가던 사람도 주님을 만나면 높으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천사도 마리아에게 이르기를 예수는 가장 높으신 분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며 가장 높으신 분의 능력이 그녀를 감싸 줄 것이라고 했습니다. (눅 1:32,35) 사가랴는 자기 아들 요한이 가장 높으신 분의 예언자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눅 1:76) 누가복음은 예수가 세상 나라의 권세와 영광을 거절한 이야기로 시작하며(눅 4:6) 십자가에서 세상의 임금들은 쫓겨났습니다. 예수께서 악의 세력을 이기고 영원한 생명의 길을 내신 것입니다. 공생애 동안 예수의 삶은 언제나 통제가 아니라 감화였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통해서 성도들을 훈련시켜 나가십니다.
새해에 우리는 경제적인 힘, 지식의 힘, 인격적인 힘이 주어질 때에 바르게 사용할 힘을 길러야 합니다. 세상은 더 높은 지위와 권세를 위해 몸부림치며 바라는 소원들이 다 충족되면 만족하고 또 다른 목표를 향해 달려갑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어떻게 하면 주님의 길을 신실하게 따를 수 있을까? 질문하며 영향력을 행사해 나가는 것입니다. 주께서 허락해 주신 권력을 소멸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보다 선한일에 사용하는 힘을 기르기 위해 주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라는 생각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초대한 식탁의 자리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남과의 비교속에서 오는 불행을 떨쳐 낸다면 살아가는 삶이 한결 가벼워지라 생각이 됩니다.
1:53 그분은 굶주린 자들을 기름진 것으로 배불리 먹여 주시고, 부요한 자를 빈손으로 돌려 보내셨도다.
이스라엘 사회에는 약자들을 위한 보호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씀이 자주 언급됩니다. 성경이 말하는 고아와 과부는 누구입니까? 당시 고대 근동사회에서는 부양의 책임이 아버지나 아들들에게 있었습니다. 따라서 남편이나 아버지가 없을 경우에 경제적으로 궁핍할 수 밖에 없었고, 사회적으로도 소외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 고아 과부를 돌보는 것을 하나님 뜻이라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이방민족 신들과의 차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돕고 베푸는 것에 있어서 자선행위 차원에 머무르면 안됩니다. 이기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해 치장하는 도구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겉으로 선한행위일지라도 그 동기가 자기 욕심을 채우고, 자기자랑과 정치적 목적으로 하는 일이라면 그것은 예수님의 마음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숨길 수 없지요. 그러니 하나님은 주린 자를 배불리 먹이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주린 자란 육체적인 배고픔만이 아니라 심령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비우고 주리는 자들에게 부족함 없이 가득 채워 배부르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야곱은 평생을 움켜지는 삶을 살면서 형의 장자권도 쟁취하고 형을 피해서 외삼촌이 있는 이방땅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성공하고 난 후에 많은 식솔(食率)들을 거느리고 고국으로 돌아올 때 브니엘에서 하나님과 씨름을 하게 됩니다. 야곱은 하나님과의 씨름에서 환도뼈가 부러지는 경험을 합니다. 평생 저는 다리로 살아야 했지만 야곱은 이후 과거의 이기적인 성품과 인격이 변화되어 야곱이 아니라 민족의 조상인 이스라엘로 살게 됩니다. 환도뼈가 어긋나는 상처는 하나님을 새롭게 경험한 사건이며 평생 치열하게 생존하기 위해서 살아왔던 삶을 청산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한 새출발이었습니다. 우리는 성도로 살아가며 우리 안에 소유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얼마나 귀한 보배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세상을 살 용기가 없고 내가 믿고 있는 힘의 원천이 무너질까봐 두려운 것이 아니라 평생을 살아도 예수의 흔적이 없는 것을 두려워 해야 합니다.
마리아의 찬가는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성으로 마무리 하고 있습니다.
1:54 그분의 자기 종 이스라엘을 도우셔서, 자비를 베푸시겠다는 약속을 잊지 않으셨도다.
1:55 우리 조상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약속하신 대로, 그분의 자비는 그분의 백성들 위에 영원토록 있으리라.”
인간은 누군가에게 나의 것을 내어줄 수 있는 존재도 안되고 베풀 수 있는 능력도 부족합니다. 돈이 힘이 되는 시대에 움켜쥔 손을 펼치면 잃어 버린다는 생각이 엄습합니다. 그러나 움켜쥔 손을 펼치고 나눌 때에 빈손이 아니라 하나님은 놀랍도록 채우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퍼내고 또 퍼내도 마르지 않는 바닷물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베풀고 흘려 보내면 또 채우시고, 공급하셔서 복의 통로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베푸는 것도 섬기는 것도 내가 지닌 컵의 크기만큼 퍼내는 것입니다. 새해에는 더 큰 그릇으로 살아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만난 삭개오는 그동안 무시 당하지 않게 악착같이 모았던 돈을 토색한 것에 대해서 4배나 갚겠다고 결단합니다. 주님은 지금도 영혼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삭개오를 찾아 가셨던 주님께서는 이 자리에도 찾아 오십니다.
예수의 생명을 품고 살아가는 자리에서 주께서 이미 이루신 약속을 신뢰하십시오. 주께서 가까이 오심은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깊이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우리 인생의 그릇에 담는 것은 소유가 아니라 존재의 변화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그 믿음이 마음에 이르러 찬양으로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비천한 말구유에 나신 예수님께서 지금 여러분의 지친 마음에도 이미 거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초대를 받고 초대하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예수의 길을 예비했던 세례요한처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그분의 하신 일을 증거하시기 바랍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있다.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고 그 길을 곧게 하여라. 모든 골짜기는 메워지고 모든 산과 언덕은 평평해지고 곱은 것은 곧아지고 험한 길을 평탄해져야 할 것이니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을 볼 것이다”(눅 3:4-6)
12/24/2023 | (대림절 네번째 주일, 성탄전일)
기다림 시리즈 4 마리아의 찬가 I The Magnificat: Mary’s Song of Praise
누가복음 1:38-42, 46-49
대림절기 4주 동안 기다림의 여인들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라합과 수가성의 여인, 룻에 이어 오늘 성탄 예배를 드리며 마지막으로 살펴 볼 여인은 마리아입니다. 누가복음 1장 46절로 56절까지의 표제어가 ‘마리아의 찬가’입니다. 누가복음 1, 2장 안에는 3개의 찬가가 나오는데 축복의 노래로 불리는 사가랴의 찬가(1:67-79), 아기 예수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시므온의 찬가(2:29-31), 오늘 본문인 마리아의 찬가입니다.
라틴어로 힘누스(Hymnus)는 ‘기도의 노래’라는 뜻인데요, 찬가를 모아 놓은 책이 바로 성가집입니다. 위키백과 사전은 일반적으로 종교에서 부르는 노래의 종류 가운데 하나라고 찬가를 정의합니다. 대개 로마 카톨릭교회와 동방정교회에서는 찬미가(讚美歌)라고 표현하고, 개신교에서는 찬송가(讚頌歌)로도 말합니다.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며 발표하는 부서별 드리는 찬송도 찬가인 것입니다. 헬라어로 ‘메갈뤼네이: Μεγαλύνει’ 라는 단어는 ‘크다’ ‘위대하다’ 등의 뜻을 지닌 ‘메가스: μέγας’단어에서 유래된 동사입니다. 그래서 마리아의 노래를 라틴어로 마니피캇(Magnificat)이라고 부릅니다. 메시야를 기다린 마리아의 찬가에는 우리가 기뻐해야 할 이유와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찬양하는데 2주 동안 설교하려고 합니다. 이 시간에 우리 곁에 들려오는 찬가를 통해서 마리아의 간절한 마음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1)인류 구원을 이루는 약속된 말씀의 성취를 노래합니다.
누가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를 잇는 마지막 여인으로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라고 기록합니다. 천사가 마리아를 찾아가 ‘두려워 말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 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마리아는 기다리던 메시야가 자신의 몸을 빌려 나온다는 천사의 말에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고백합니다.(눅1:38) 마리아는 예수의 성육신을 그대로 받아 들였습니다. 마리아는 구약의 말씀을 믿고 이스라엘의 구원자이신 메시아를 기다린 여인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메시야를 수천년 동안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아브라함과 약속한 언약을 통해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족보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라고 시작합니다.
아브라함때 부터 계획한 언약이 마리아를 통해서 성취되고 있음을 보도하는 것입니다. 마리아도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람 중에 한 사람입니다. 그토록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하던 말씀의 성취를 실제적으로 누린 기쁨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마리아의 찬가’는 아기 예수의 기쁨을 표현하기 위해서 힘찬 팡파르 악기로 시작을 합니다. 이 구원의 기쁨은 세상이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부터 온 감사의 찬양이기 때문입니다. 설교문을 쓰며 바흐의 마리아의 찬가를 들으며 준비했는데 여러분도 이번 성탄절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마리아의 찬가는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헌신적이며 진지한 것입니다. 세상에서 누리는 기쁨이 아니라 아브라함부터 계획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기쁨인 것입니다.
과거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미제품을 좋아했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어려운 시절에 독일이나 미제 제품을 좋아하던 이유가 생산품질이 좋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Made in God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구세주이십니다. 그런데 그분이 우리처럼 인간의 모습 지니고 오셨습니다. 웃고 울고 외로움을 느끼는 분으로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해 주십니다. 주님은 궁극적인 인간의 허무함과 외로움을 해결하기 위해서 가장 낮고 낮은 자리로 오신 것입니다.
바울은 구원받기 전의 이방인의 모습을 5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 12절입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첫째는 그리스도 밖에 구원으로 부터 분리되어 있었고. 둘째는 언약백성이 아닌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요. 셋째는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의 언약에 들어오지 못한 외인이요. 넷째는 하나님의 언약이 주어지지 않았으니 세상에서는 소망이 없는 자요. 다섯째는 이 땅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과 관련이 없는 인생이라고 구체적으로 말씀합니다.
이 담을 허물기 위해 예수께서 성육신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구원받는 우리가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새로운 존재가 되어 새로운 삶으로 성도로 칭해 해주시니 주님을 기다리며 기뻐하는 일은 너무도 감사한 일입니다. 마리아의 찬가는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교회들에게 주시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누가복음에는 가난한 자나 이방인들을 찾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는데 마리아의 찬가는 그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찬양하는 노래인 것입니다.
예수가 이땅에 오시기 700여년전 이사야 선지자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 9:6)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은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 질것이요.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사 9:6,7)라고 예언했습니다. 미가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에서 가장 작은 마을 중의 하나이지만 너에게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나올 것이다. 그는 영원 전부터 있는 자이다.”(미가 5:2) 매우 세세하게 탄생을 예고합니다. 찾아보면 구약성경은 온통 예수를 이야기합니다. 마리아의 찬양은 한 사건으로 끝나 버린 것이 아니라 초기 기독교 공동체들은 이 구원을 노래했고 현재까지도 생생히 살아서 우리 곁에 들려오는 것입니다.
(2)마리아의 찬가는 말씀을 향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침에 눈을 뜰 때 떠오르는 생각이 어떤 것들입니까? 우리 안에 품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정직하게 대면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생각이 우리를 인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적인 삶은 말씀이 우리 마음을 장악하도록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반응할 때에 하늘의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마리아는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 고백했습니다. 20세기 영국의 의사 출신 복음주의 설교가 마틴 로이드 존스(David Martyn Lloyd-Jones, 1899-1981)는 두 차례의 세계 대전 이후 침체되어 있는 영국 그리스도인들이 너무 많아서 ‘영적침체’에 대한 설교를 했습니다. 그는 영적으로 침체하는 원인과 치료방법을 성경에서 파헤칩니다. 그리고 21편의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사라진 영국 성도들의 마음에 불신이 마음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상태라고 진단합니다.
남자를 알지 못하는 마리아가 결혼하기 전에 아이를 낳게 되리라는 천사의 말은 사람들의 오해를 받을 만한 일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유대법으로는 돌에 맞아 처형을 당할지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약속의 말씀을 순종함으로 반응한 마리아에게 두려움은 사라지고 기쁨이 임했습니다. 마리아는 이 기쁨을 전하기 위해서 나사렛이라는 동네에서 약 150km 떨어진 남쪽 헤브론 유다 지역까지 족히 4일 이상 걸려서 친족 엘리사벳을 찾아갔습니다. 서둘러 자신의 친족 엘리사벳에게 가서 천사의 소식을 전합니다. 자신의 경험과 감격을 나누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던 것입니다. 엘리사벳은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리라”라고 마리아에게 용기과 확신을 줍니다. 이때 엘레사벳은 세례요한을 임신한지 여섯달쯤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눅 1:36) 뱃속에 있던 세례 요한은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한 소식을 듣고 태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다고 기록합니다. 엘리사벳과 마리아의 만남이 얼마나 서로를 복되게 하는 만남입니까? 세례요한은 예수의 길을 예비하는 도구로 쓰임을 받습니다. 참된 삶은 무엇보다 만남이요. 그 만남은 전인격적인 삶의 변화의 사건을 가져다 줍니다.
비천한 여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한 순간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엄청난 전환점이 되었던 것입니다.
48 주께서 비천한 이 몸을 돌보셨음이라. 이제부터는 모든 세대가 나를 축복받은 자라 하리니, 49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그분께서 내게 큰일을 행하셨음이라
마리아의 찬가에는 분명한 자기고백과 전능하신 하나님이 자신에게 행하신 큰일을 찬양합니다. 마리아는 자신을 비천한 몸이라고 고백합니다. 복은 우리의 부요함과 가난함에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진실한 자기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셨다는 믿음이 생기는 것 자체가 복 있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하심에 부요함과 비천함은 아무런 기준이 되지 않습니다. 낮은 자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이에게 주시는 은혜의 복입니다.
세상에는 여전히 이 시간에도 하나님을 위하여 울며 씨를 뿌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복을 누리를 사람들입니다. 그곳에서 평범하지만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됩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렸고 약속이 온전히 성취될 것을 믿었던 여인입니다. 메시아가 오심을 기다리며 준비했던 마리아는 자신의 삶에서 준비한 옥합을 깨트렸고 순종함으로 복된 여인이 되었습니다.
마리아의 찬가를 통하여 세상이 전해주는 낙심과 불안의 메세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삶의 자리에서 수많은 낙심의 일들을 만나게 될 때마다 그분은 우리를 축복받는 자로 삼아 주셨고 우리를 통하여 큰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고백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도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들에게 ‘마리아의 찬가가 울려 퍼지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