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6/2017 | 마가복음 강해설교 57

일어나라! 가자! Up, Let’s Be Going!

마가복음 14:32-42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겟세마네’라는 올리브 산의 작은 동산에서 기도하셨다는 말씀과, 배신자 유다가 성전 경비원들을 데리고 예수님을 체포하러 오기 직전의 긴장된 장면으로 되어 있습니다. 지금 겟세마네에 가면 예수님께서 그 밑에서 기도하셨다는 오래 된 올리브 나무가 있습니다.

(그 나무를 한번 보실까요? 굉장하지요? 원래 올리브 나무가 이렇게 크게 자라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나무 아래에서 기도를 하셨다면 이 나무 수령이 적어도 2,000년이 훨씬 넘지 않았겠습니까? 그 밑에 이런 글이 적혀 있습니다. 위에는 마태복음 26:39이 새겨져 있고, 그 아래에는 이런 글이 새겨 있습니다. “오 예수님, 당신은 그 고뇌의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 신뢰의 말씀을 하셨고, 하나님 아버지께 복종하셨습니다. 사랑과 감사의 마음으로, 이 두려움과 고통의 시간에 이렇게 기도합니다. ‘아버지, 전 당신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을 신뢰합니다.’”)

맞습니다. 제자들을 데리고 올리브 산의 ‘겟세마네 동산 (the Garden of Gethsemane)’으로 가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기도하는 동안에 여기 앉아 있어라. 내 영혼이 심히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여기서 머무르면서 깨어 있어라.” (32-34절) 예수님은 자신의 심정을 솔직하게 제자들에게 모두 열어 보이셨습니다. 바로 이 점이 예수님의 위대한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심정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면서 내가 기도하는 동안 여기 머무르면서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 말씀이 “Stay here and keep watch with me”라고 나와 있습니다.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는 말은 “나와 함께 기도하자”라는 뜻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심정을 제자들과 공유하기를 원하셨고, 함께 기도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히브리서 4:15에 보면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신다 (sympathize)’라고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모든 문제들을 예수님께서도 함께 겪으신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우리는 주님께 기도하면서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마가복음 말씀은 이와 반대로 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자기가 지금 겪고 있는 괴로운 심정을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나와 함께 이 괴로운 심정을 같이 나누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전 이 말씀을 읽으면서, 정말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갖고 싶은 사람은 주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 마음을 같이 나누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땅에 엎드려서 할 수만 있다면 이 때가 지나가기를 기도하셨습니다. “아바,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습니다. 이 잔을 없애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36절) 이것이 예수님의 ‘겟세마네의 기도’입니다.

저는 오늘 설교를 통해서 이 예수님의 기도의 의미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의 기도’에서 제일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힘들고 괴로운 시간에 기도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도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사람이 힘든 일을 만나면 친구를 만나거나, 누구를 찾아가서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런데, 외출도 하지 않고 두문불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을 피하는 것입니다. 제일 안 좋은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음악도 듣고, 영화도 보고, 친구를 만나서 맛있는 것도 먹고, 차도 마시고, 수다도 떨고 하면서, 스스로 힘든 시간을 이겨 나가는 타입의 사람들은 괜찮은 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런 식으로 힘든 시간을 이기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자신의 심정을 모두 쏟아 놓는 방법을 선택하셨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의 답답한 마음을 털어 놓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의 문제의 해답을 가지고 계신다는 믿음으로 자신의 심정을 털어 놓으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 문제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에게 닥친 시험은 누구나 겪는 시험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한 분이셔서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능력 이상의 시험을 당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시험을 당할 때에 그 시험을 견디고 거기서 빠져 나올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십니다 (He will show you a way out so that you can endure).” (고린도전서 10:13)

“He will show you a way out!” 우리에게 피할 길을 보여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아셨고, 바울도 이 사실을 알았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을 피하고, 두문불출하고, 혼자 있어서 우리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문제가 해결 될 수 있는 길을 보여 주시는 하나님께 꿇어 엎드려 기도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입니다. 우리는 머리로는 이 사실을 이해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의지가 약해서 잠을 이기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마음은 원하지만 몸이 연약하구나 (For the spirit is willing, but the body is weak)!” (38절) 우리 몸의 discipline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전 육신이 연약해요!” “전 새벽형 인간이 아니예요!” 우리가 지금 이런 사치스러운 말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몸의 연약함을 이기고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와 함께 기도하자고 요청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믿음의 공동체가 있는 이유입니다. 혼자도 믿음생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동체에 속하지 않은 사람은 옆에 기도를 요청할 사람이 없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우리 믿음생활에 큰 손실을 가져 오는지 모릅니다. 반대로, 우리에게 기도를 요청할 공동체의 친구들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격려가 되는지 모릅니다.

기도를 요청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 사람이 나를 위해서 기도해 준다는, 그래서 마음에 위로가 된다는 이런 말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그의 기도가 나에게 미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읽다가 이런 구절을 본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 나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말씀을 전할 때,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복음의 비밀을 말할 수 있도록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에베소서 6:19) 누가, 누구에게 기도를 요청하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이 에베소교회 교인들에게 기도를 요청한 말씀입니다. 에베소교회가 어떤 교회입니까? 지금의 터키에 있는 도시입니다. 바울이 그곳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역사도 짧고, 아직 믿음이 약한 교회입니다. 이런 교인들이 기도나 제대로 할 줄 알까요? 그런 초보 크리스천들에게 바울 같은 믿음의 사람이 기도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내가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고 합니다. 어찌 하나님께서 이런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로마서는 바울이 로마에 있는 크리스천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로마교회는 바울이 세운 교회가 아닙니다. 누가 언제 교회를 세웠는지 알 수 없습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썼을 때, 바울은 아직 로마에 한번도 가 보지 않았던 때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편지에 썼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복음을 전할 때마다 기도 중에 늘 여러분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가 전심으로 섬기는 하나님께서 나의 증인이 되십니다. 지금 나는 하나님의 뜻이라면 여러분에게 갈 수 있는 길이 열리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9-10) 신실하신 하나님은 바울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바울이 로마에 갔을 때, 로마의 크리스천들이 마중 나와 그를 환영해 주었던 장면을 저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사도행전 28:15).

셋째로, 예수님의 겟세마네의 기도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 기도가 참된 기도란 어떤 기도인지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바,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없애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36절) 기도는 하나님과의 소통 (communication)입니다. ‘소통’이라는 말은,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입니다. 모든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소통입니다. 우리가 리더십에 대한 말을 많이 하는데, 좋은 리더십을 위한 qualification 중에 하나가 소통입니다. 그 리더가 팀원들과, 직원들과,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과 소통하는 능력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기도가 하나님과의 소통이라면,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런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Abba is an Aramaic term for father’ 또, Amplified Bible에 보면 이런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Abba is an Ara-maic word used by young children when addressing their fathers, but not used by Jews in prayer be-cause of the word’s implied familiarity. Jesus’ use of the word emphasized his Father-Son relationship with God.” ‘아바’라는 말이 하나님을 너무 가깝게 부르는 말이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이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말을 사용하셨습니다. 어쩌면 예수님이 ‘아바’라는 말을 사용한 최초의 유대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소통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최고로 친밀하게 부를 수 있는 용어를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도할 때 조심해야 할 것은, 상투적인 말, 형식적인 말, 아무 의미 없이 사용하는 말, 습관적인 말들을 가급적 많이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말들을 가지고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표현할 수 없고, 그렇게 되면 하나님과 소통하는 데 방해가 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기도는 내 생각, 나의 주장을 관철하는 것이 아닙니다. 동시에, 기도는 비록 내가 하나님의 뜻을 모두 이해할 수 없어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위에서 언급했던 올리브 나무 밑에 씌어진 글처럼 “아버지, 전 당신의 뜻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을 신뢰합니다." 이렇게 말입니다.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이 잔을 없애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 의 뜻대로 하십시오.” (36절) “Please take this cup of suffering away from me. Yet I want your will to be done, not mine.” ‘yet’ ‘but’ ‘however’ 등의 단어들은 앞의 말에 대한 반전(反轉)을 가져 오는 접속사들입니다. 이번에 헌법재판소의 판결문에서 4가지 탄핵 이유에 대한 설명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라고 말하면서 4가지 탄핵 이유 중에 3가지는 탄핵의 이유로 볼 수 없다는 판결문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에도 반전이 있습니다. 이 반전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의 기도를 배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기도에는 반전이 없습니다. “Please take this cup of suffering away from me” 우리의 기도는 항상 이렇게 끝이 납니다. ‘But’이라고 말하는 반전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의 기도에 이 ‘반전’이 있을 때, 우리의 기도는 참된 기도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기도에서 반전을 배워야 합니다.

끝으로, 한가지 말씀 드릴 것이 있습니다. 제자들은 “나와 함께 깨어서 기도하자”는 주님의 말씀대로 기도하지 않고 모두 잠을 잤습니다. 우리는 이런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참 한심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지상에서 마지막 밤을 기도하면서 보내셨고, 내가 지금 마음이 너무 힘드니, 나와 함께 깨어서 기도하자는 주님의 요청을 들어드리지 못하고 잠을 잤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아시나요? 그 날 밤 예수님은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받아 들이셔야 했습니다. 그 힘든 시간을 누구의 도움도 없이 예수님은 홀로 감당해야 했습니다. 우리의 주님이 되기 위해서요.

예수님은 피곤하여 잠을 자고 있는 제자들에게 “일어나라! 가자! 나를 넘겨 줄 사람이 오고 있다 (42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구원의 드라마는 우리들의 연약함, 우리들의 불순종과 관계 없이 다음 단계로 넘어가 버립니다. 저는 “일어나라! 가자!”는 말씀을 읽으면서, 뭔가 알 수 없는 아쉬움이 남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아쉬움의 정체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 지상에서의 주님의 마지막 요청을 들어 드리지 못했던 아쉬움이 아닐까요? 그것은 주님과 함께 그 밤에 깨어서 기도하지 못했던 아쉬움이 아닐까요?

5년 후, 10년 후에 우리는 지난 날들을 돌아 보면서 이런 아쉬움을 갖게 될지 모릅니다. “내가 왜 그 때 기도하지 않았지? 그 때가 내 인생의 가장 critical time이었는데, 왜 나는 그 때 기도하지 않았지?” 이런 아쉬움 마음을 갖게 될지 모릅니다. “일어나라! 가자!” 이런 주님의 음성이 있기 전에 주님의 요청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여러분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을 위한 최선의 길입니다.


3/19/2017 | 마가복음 강해설교 56

최후의 만찬 The Last Supper

마가복음 14:22-31

오늘 말씀은 유월절 만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유월절 만찬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드신 마지막 만찬이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천재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 (Leonardo da Vinci, 1452-1519)는 오늘 말씀에서 영감을 얻어 (다빈치는 요한복음 13:22-30을 소재로 하여 이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최후의 만찬 (The Last Supper)’이라는 불후의 명작을 남깁니다. 이 그림은 가로 910cm, 세로 420cm의 매우 큰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다빈치의 후원자였던 루도비코 마리아 스포르차 (Ludovico Maria Sforza)의 요청으로 밀라노에 있는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Santa Maria delle Grazie) 성당의 옛 수도원 식당의 벽면에 꽉 차게 그린 그림입니다. 유월절 식사 중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배반할 것이다”라고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주님,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설마 저는 아니지요?” 하면서 말을 주고 받고 있는 장면을 포착해서 그린 것입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좌우의 제자들이 식사하다 말고 예수님의 말씀에 깜짝 놀라는 표정들이, 아주 역동적으로 표현되었습니다. 다빈치는 이 그림을 1495년에 그리기 시작해서 1498년에 완성 했습니다. 르네상스의 전성기 때입니다.

유대인들의 유월절 만찬은 철저하게 매뉴얼에 따라서 진행이 됩니다. 먼저 촛불을 켜고, 포도주 잔을 돌립니다. 식사 사이 사이에 세 차례 더 포도주 잔을 돌립니다. 먹는 음식으로는 희망의 상징인 파슬리 (parsley)를 쓰라림과 눈물의 상징인 소금물에 찍어서 먹고, ‘마로르’라는 쓴나물을 ‘하로셋 (haroseth)’라고 하는 달콤한 소스에 찍어 먹습니다. ‘쓴나물’은 과거 그들의 조상들이 이집트에서 고통 받았던 것을 잊지 않고 기억한다는 의미가 있고, 쓴나물을 달콤한 하로셋에 찍어 먹는 것은, 자유의 달콤함을 알고,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마짜’라는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빵과 ‘구운 양고기’를 먹습니다.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틀에 바르고, 고기는 구워서 식구들이 나누어 먹습니다. 남기지 않고 다 먹어야 합니다. 재미 있는 것은, 식사 중에 제일 어린 자녀에게 네 개의 질문을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질문1) “왜 오늘밤은 누룩이 들어 있지 않은 빵을 먹어야 하나요?” (질문2) “다른 날은 맛있는 나물들을 먹는데, 왜 오늘 밤은 쓴 나물을 먹나요?” (질문3) “다른 날은 음식을 어디다 찍어 먹지 않는데, 왜 오늘 밤은 두 번, 쓴나물은 하로셋에, 파슬리는 소금물에, 찍어 먹어야 하나요?” (질문4) “다른 날은 간단하게 먹는데, 왜 오늘 밤은 특별한 잔치를 하나요?” 매년 똑 같은 질문을 하게 되어 있고, 매뉴얼에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나와 있습니다. 질문과 대답의 요점은, 과거의 고통을 잊지 않아야 한다는 것, 또 오늘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에 감사하면서 능동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월절 만찬은 ‘할렐’ (시편 115-118편)과 ‘대할렐’ (시편 136편)을 노래함으로써 끝이 납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은 찬송을 부른 뒤, 올리브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26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 때 불렀던 찬송이 바로 ‘할렐’과 ‘대할렐’이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다시 다빈치가 그린 ‘최후의 만찬’ 그림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이 그림을 보면서 다빈치가 가지고 있는 뛰어난 예술가의 영감 (inspiration)에 감탄했습니다. 다빈치가 이 그림 제목을 ‘최후의 만찬’이라고 했을 때, 그 의미가 무엇이었을까요? 적어도 두 가지 의미가 있지 않은가 생각 해 보았습니다. 하나는, 이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드신 식사가 세상에서 드신 마지막 식사였기 때문에 그런 제목을 붙였을 것입니다. 또 하나는, 다빈치는 이 그림을 통해서 유대교의 전통으로서 지켜 왔던 유월절 만찬이 이제 끝이 났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기 때문에 마지막 만찬이라는 제목을 붙였을 것입니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은 유월절 식사를 간절하게 원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음식을 먹기를 간절히 원했다.” (누가복음 22:15) 예수님은 베드로와 요한에게 “가서 우리가 먹을 수 있도록 유월절을 준비하여라 (누가복음 22:8)” 하고 부탁하셨습니다. 주님이 유월절 음식 먹기를 간절히 원하셨던 것은, 그 식사가 세상에서 드시는 마지막 식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식사를 통해서 뭔가 말씀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기 때문 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마가복음에서도 알 수 있지만, 유월절 음식이 제대로 준비된 것 같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구운 양고기를 준비한 것 같지 않습니다. 쓴나물도 준비한 것 같지 않고요.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마짜’를 준비해야 하는데, ‘마짜’를 준비한 것 같지 않고 보통 먹는 빵을 준비한 것 같습니다. 포도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포도주는 제대로 준비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을 연구하는 학자들 간에 예수님께서 그 때 하신 식사가 정말 유월절 만찬이 맞느냐 하는 논쟁이 있을 정도입니다.

다시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그림을 보실까요? 식탁 어디에도 구운 양고기가 없습니다. 그리고, 식탁에 군데 군데 놓여 있는 빵도 누룩 없는 ‘마짜’가 아닙니다.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빵은 납작 하게 만들어야 하거든요? 그리고, 다빈치가 그린 그림에는 양고기 대신 뜻밖에도 생선이 놓여 있습니다. ‘구운 양고기’ 대신 다빈치는 그림의 한 중앙에 이 세상의 죄를 짊어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그렸습니다. 원근법을 사용하여 예수님에게 시선이 집중되도록 했습니다. 다빈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래 전부터 가져왔던 유월절 만찬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 한 것입니다. 그런 의에서 그날 예수님과 제자들이 드신 만찬은 유대교의 유월절 만찬의 마지막임을 알리는 것과 동시에 예수님과 함께 먹는 새로운 만찬의 시작을 알린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과 함께 먹었던 그 날 저녁 유월절 만찬은 여러가지 면에서 색다른 것 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빵을 떼 주시면서 “받아라. 이것은 나의 몸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월절 만찬에서 먹는 빵은 누룩 없는 ‘마짜”입니다. 이것은 고생했던 과거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의미에서 먹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먹는 빵의 의미는 전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빵을 나누어 주시면서 “이것은 나의 몸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몸을 먹는다는 것은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빵을 나누어 먹은 사람들과도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빵의 의미를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또 우리가 나누어 먹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빵은 하나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의 빵을 나누어 먹음으로써 우리는 한 몸이 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0:16-17)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And when we break the bread, we are sharing in the body of Christ. And though we are many, we all eat from one loaf of bread, showing that we are one body.”

유월절 만찬에 모두 4번의 포도주가 나옵니다. 여기서 포도주는 단순히 축배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것을 축하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과 나누었던 마지막 식사 자리에서 포도주의 의미가 달라졌습니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을 위해 쏟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다.” (24절) 이제 포도주는 하나님과 그의 자녀들 사이에 맺는 ‘새로운 언약 (The New Covenant)’의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포도주 잔의 의미를 해석했습니다. “This cup is the new cove-nant between God and his people-- an agreement confirmed with my blood. It is poured out as a sac-rifice for many (이 잔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 사이에 맺은 새언약이다. 나의 피로 합의를 확인한다).” (고린도전서 11:25) 그리고, 주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사람은 생의 미션 (mission)을 갖게 된다고 했습니다. 마가는 그의 복음서에 이 말씀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만, 누가복음을 보면, 주님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Do this in remem¬brance of me)’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이 ‘기념하라’는 말씀을 단순히 반복하라, 되풀이하라는 의미로 해석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말을 들어 보세요. “For every time you eat this bread and drink this cup, you are announcing the Lord's death until he comes again (이 빵을 먹을 때마다, 그리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우리는 주님의 죽으심을 그가 다시 오실 때까지 선포해야 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1:26)

모든 주님의 제자들에게 주어진 미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 위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계속해서,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세상에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를 기념하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그의 죽으심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It is poured out as a sacrifice for many (많은 사람을 위한 희생제물로 피를 쏟아 부은 것이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많은 사람’이라는 말 속에 저의 여러분도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죽음에 ‘빚 (debt)’을 진 사람들입니다. 이 빚은 우리가 평생 갚아도 다 갚을 수 없는 빚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를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세상에 전해야 합니다. 이것이 크리스천의 삶입니다. 크리스천의 삶은 어렵거나 복잡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크리스천으로 사는 것인지 깊이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의 메시지를 세상에 드러내면 됩니다. 우리가 어떤 직업을 가지고, 어떤 일을 하면서 사느냐 하는 것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미션은 한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관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식사를 마친 예수님과 제자들은 같이 찬양을 하면서 올리브 산으로 갔습니다. 그 때 예수님과 제자들이 불렀던 찬양이 무슨 찬양인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이 식사 후에 부르는 찬양이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시편 136편을 노래로 불렀을 것입니다. “여호와께 감사하십시오. 주는 선하시고, 그분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모든 신 위에 뛰어나신 하나님께 감사 하십시오. 그분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모든 주들의 주께 감사하십시오. 그분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홀로 위대한 기적들을 행하시는 그분께 감사하십시오. 그분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1-4절) 이 시편이 26절까지 있는데요. 매 절마다 “His faithful love endures forever”라는 가사가 후렴처럼 반복됩니다. 제자들은 눈치를 못 챘을 수도 있습니다만, 이 날 저녁 식사가 세상에서 드신 마지막 식사인 것을 아셨던 주님은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하다”는 말씀이 특별한 의미로 다가 왔을 것입니다. 그럴 때 가슴이 울컥한다고 하잖아요? 아마 주님도 이 찬양을 부르면서 가슴이 울컥했을 것입니다.

올리브 산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늘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나를 모른다고 세 번 말할 것이다.” (30절) 참 신기하게도 닭은 새벽에, 매일 일정한 시각에 두 번 ‘꼬끼요' 하고 웁니다. 시계가 없던 때에도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자리에서 일어나 하루 일과를 시작했습니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이 말은 ‘짧은 시간 안에’ 이런 뜻입니다. 닭이 한 번 울고, 약간의 짬 (interval)을 두고 또 한번 웁니다. 그 interval이 길지 않습니다. 기껏 길어야 한 시간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은, 이 짧은 시간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에 베드로가 펄쩍 뜁니다. “주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주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31절) 옆에 있던 다른 제자들도 다 같은 말을 했습니다.

지난 3년 동안 제자들은 주님과 같이 자고, 주님과 같이 먹고, 주님이 일하시는 동안 늘 옆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주님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먹었습니다. 주님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시면서, 빵을 떼 주시고, 포도주 잔을 돌리셨습니다. 이런 제자들이 주님을 배반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베드로가 내가 그럴 리가 없다 고 하면서 펄쩍 뛰었던 것이 당연한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모든 것은 사실이 되었습니다. 주님이 하신 말씀대로, 한 제자는 예수님을 팔아 넘겼고, 다른 제자들은 모두 도망 갔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크리스천의 담대한 삶의 비결은 무엇일까요? 어떻게 하면 담대하게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십자가의 도를 선포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난 죽어도 주님을 배반하는 일은 없을거야!”  이렇게 큰 소리친다고 담대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너 자신을 알라!”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먼저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 번을 싸워도 다 이길 수 있다는 명언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가장 나약할 때는 자신의 나약함, 자신의 부족함, 자신의 죄 성을 모르고 큰 소리 칠 때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가장 강할 때는 자신의 나약함과 죄성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은혜를 구할 때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기에, 고린도 교회에 쓴 편지 속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은 나에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해진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 위에 머물러 있도록 하기 위해서 나의 약한 것들을 더욱 기쁘게 자랑합니다.” (고린도후서 12:9) 이 말씀이 사순절에 드리는 우리교회의 신앙고백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3/12/2017 | 마가복음 강해설교 55

하나님의 드라마 The Unfolding Drama of God

마가복음 14:12-21

보스턴 신학교에서 구약학 교수로 있었던 버나드 앤더슨 (Bernhard W. Anderson, 1916-2007)이 1953년에 작지만 매우 의미 있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 제목이 ‘The Unfolding Drama of The Bible’입니다. 우리 말로 번역하면 ‘펼쳐지는 성경의 드라마’ 이렇게 번역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성경 66권을 6개의 막 (scene)으로 설정했습니다. 1막 ‘A Way into the Future (미래로 가는 길)’ 2막 ‘The Discipline of Disaster (재난을 통한 훈련)’ 3막 ‘The New Exodus (새로운 출애굽)’ 4막 ‘The People of the Torah (토라의 사람들)’ 5막 ‘Victory through Defeat (패배를 통한 승리)’ 6막 ‘The Church in the World (세상 속의 교회)’ 이 책은 전문가들을 위한 책이 아니라, 일반인들이 성경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쓴 책입니다. 저는 신학교 영어 시간에 이 책을 처음 읽으면서, 성경에 대한 기본적인 구조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앤더슨의 드라마에 의하면 오늘 읽은 말씀은 제 5막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5막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다루는 장인데, 지금부터 예수님의 생애는 드라마틱하게 전개가 됩니다. 하나님의 드라마가 클라이맥스를 향해 나가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무교절 첫 번째 날, 즉 유월절 양을 잡는 날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이런 말씀을 시작됩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탈출했던 역사적인 날을 기념하는 축제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최고의 축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월절 (Passover)’이라는 말은 ‘넘어간다’는 뜻인데, 이 말 자체가 이스라엘의 역사를 설명해 준다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문 틀에 어린양의 피를 바른 집은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게 되고, 그렇지 않은 집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짐승이나 사람이나 처음 난 것들은 모두 죽는 무서운 심판이었습니다. 결국 이 심판을 견디지 못해서 이집트의 바로 (Pharaoh)는 모세에게 네 백성을 데리고 우리나라를 떠나라고 합니다. 그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급히 이집트를 떠나면서 누룩 (leaven)을 넣지 않은 밀가루 반죽으로 만든 빵을 만들어 가지고 나왔습니다. ‘무교절’은 그 때를 기념하는 축제입니다. ‘무교’는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이라는 뜻입니다. ‘유월절’은 양을 잡고 만찬을 먹는 하루 축제이지만, 그 다음 날부터 일주일은 ‘무교절’로 지킵니다. 사람들은 ‘유월절’과 ‘무교절’을 혼동합니다. 오늘에도 두 절기를 혼동해서 ‘유월절’을 ‘무교절’이 시작되는 날로 기록했습니다.

‘유월절’이 되면 수많은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입니다. 그들은 양을 잡아 문틀에 피를 바르고, 고기는 저녁 식사 때 가족들이 나누어 먹습니다. 이것이 유월절 만찬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유월절 음식을 어디에 가서 준비할까요?” 하고 질문합니다. 이 때 예수님은 제자 두 사람을 예루살렘 성으로 들여 보내시면서 “성으로 들어 가면 물 항아리 (a jar of water)를 들고 오는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를 따라가거라. 그가 들어가는 집의 주인에게 ‘우리 선생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방이 어디냐고 물으십니다’ 라고 말씀 드려라. 그러면 집주인이 너희에게 준비해 놓은 커다란 다락방을 보여 줄 것이다. 그 곳에서 음식을 준비하여라.” (13-15절)

이 말씀도 예사로운 말씀은 아니지만, 더 놀라운 것은 두 제자가 성으로 들어갔을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물항아리를 메고 오는 사람을 만났고, 그를 따라 갔을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토씨 하나 안 틀리고 그대로 일어난 것입니다. 마가는 그의 복음서에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또 한번 기록했습니다. 마가복음 11장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예루살렘으로 들어 오시기 직전에 올리브 산 기슭에 있는 벳바게 (Bethphage)와 베다니 (Bethany) 마을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 두 제자를 마을로 들여 보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을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탄 적이 없는 나귀 새끼 한 마리가 매여 있을 것이다. 그것을 풀어서 끌고 오너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러십니까?’라고 물으면, 이렇게 말하여라. ‘우리 주님이 필요하시답니다. 곧 이리로 돌려 보내실 것입니다.’” (마가복음 11:2-3) 그래서 두 제자가 마을로 들어갔는데, 정말 어느 집의 문에 묶여 있는 나귀 새끼를 발견하였습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나귀를 풀어서 끌고 오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집 사람이 “나귀를 풀다니, 무슨 짓을 하는 것입니까?” 하고 묻는 것입니다. 놀란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알려 주신 대로 그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두 말하지 않고 나귀 새끼를 데리고 가라고 허락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마가가 기록한 두 이야기가 보여 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설교자인 저의 눈에는 뭔가 이 이야기 속에 특별한 하나님의 메시지가 들어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그것은 “지금 예수님에게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하나도 우연히 일어나는 일들이 아니다.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고, 유월절 만찬을 드시고, 제자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고, 예수님께서 체포되시고,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는 이 일들은 모두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이 모든 일들은 우연히 일어나는 일들이 아니라,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이런 강력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집 문에 매여 있는 나귀 새끼를 발견해서 끌고 온 일, 예루살렘 성 안에서 물동이를 메고 오는 사람을 만난 일, 그리고, 유월절 만찬 장소를 구한 일들은 그냥 신기하고, 재미 있는 에피소드가 아니라, 앞으로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들, 그리고 예수님의 신변에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을 하나도 놓치지 말고 주의 깊게 관찰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어떻게 일하시는 지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이 메시지는 사순절을 보내고 있는 우리들에게 더욱 중요한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사순절은 기도하고, 회개하면서 우리의 생각을 예수님께 집중하는 40일 동안의 기간입니다. 지금 새벽 기도에서는 사순절을 위해 특별히 선택한 복음서의 말씀들을 읽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시는 말씀, 또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발상의 전환을 요구하신 말씀,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려 주신 소문이 멀리 시리아에까지 전해졌다고 하는 말씀,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잃어버린 사람들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한 말씀도 우리의 구원과 관계되지 않은 말씀이 없습니다.

유월절 만찬 중에 예수님께서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진정으로 말한다. 나와 함께 음식을 먹고 있는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배반할 것이다.” (18절) “One of you eating with me here will betray me." 순간 정적이 흘렀습니다. 제자들은 한 사람씩 “설마 전 아니지요?” 하고 말했습니다. “Greatly distressed, each one asked in turn, ‘Am I the one?’” (19절) NASB에는 “They began to be grieved”라고 나와 있습니다. 근심했다, 슬퍼했다, 힘들어했다, 이런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좀 더 확실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열 둘 중 한 사람이며,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사람이다. 인자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죽지만, 인자를 넘겨 주는 사람에게는 화가 있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20-21절)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 이 부분을 더 자세하게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의 갑작스러운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으나, 예수님께서 누구를 두고 말씀하시는 것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제자 요한이 예수님 옆으로 가까이 다가가 물었습니다. ‘주님, 그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이 빵을 접시에 찍어 주는 자가 나를 배반할 자이다’ 하시면서 빵 조각을 집어서 접시에 찍어 가룟 유다에게 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하려는 일을 빨리 하여라!’ 거기 앉은 사람 중에는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무슨 뜻으로 이 말씀을 하셨는지 이해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유다는 돈을 관리하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명절에 필요한 물건을 사라고 말씀하시는 줄로 알았거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엇을 주라고 말씀하시는 줄로 제자들은 생각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빵을 받고, 곧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 때는 밤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3:21-30)

예수님은 제자 유다가 나를 배반할 것이라고 꼭 집어서 말씀하셨지만, 제자들 중 아무도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할 것이라고 눈치를 챈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을 요한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유다의 배반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지금 한국은 헌법재판소에서 대통령의 탄핵을 인용했습니다. 지금까지 “과연 대통령이 탄핵이 될 것이냐? 아니면 기각될 것이냐?” 하는 것이 사람들의 초미의 관심사였습니다. 여기서도 그랬습니다만, 아마 한국에서는 사람들이 모이면 탄핵 이야기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탄핵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60일 안에 대통령을 선출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헌법에 대통령이 탄핵될 경우 그렇게 하도록 나와 있는 것입니다. 이제 사람들의 관심은 급격하게 “누가 다음 번 대통령이 될 것인가?” 하는 것으로 쏠리게 되었습니다.

성경 이야기도 그렇거든요?  예수님의 제자 중 한 사람이 예수님을 배반합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배반자는 내부에 있었습니다. 유다 이야기를 좀 더 한다면, 유다는 열 두 제자 중 돈을 관리했습니다. 예수님에게 유다는 열 둘 중 한 사람 이상의 의미가 있는 제자였을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돈을 관리했는지는 모르지만, 돈을 관리하는 책임을 맡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신임이 없이는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유다가 돈은 좋아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2:6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유다는 돈주머니를 관리하는 사람이었는데, 종종 돈주머니에서 돈을 제 마음대로 꺼내 쓰곤 하였습니다.” 오직 요한만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가 다른 복음서에는 나오지 않고, 요한복음에만 이 말씀이 나옵니다.

결국 유다는 자기가 좋아했던 돈의 유혹을 못이겨서 예수님을 팔아 넘기게 됩니다. 마가복음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유다에게 돈을 주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래서 유다는 예수님을 넘겨 줄 좋은 기회를 엿보기 시작했습니다.” (마가복음 14:11) 돈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돈을 지나치게 좋아하면 그것이 돈에 대한 욕심이 되고, 탐욕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돈이 그 사람에게 우상이 됩니다. 돈이 우상이 된 사람은 결국 돈 때문에 망하게 됩니다. 이것이 타락의 공식입니다. 돈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든지 그것이 그 사람이게 우상이 되면, 그것 때문에 그 사람의 인생은 망하게 됩니다. 성경에 나와 있잖아요? “탐심은 우상 숭배입니다.” (골로새서 3:5)

가룟 유다의 배반은 대단히 실망스러운 일이지만, 가룟 유다의 배반 때문에 예수님은 체포되어 넘겨집니다. 제자 중 아무도 이 일을 제대로 눈치 챈 사람이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확실하게 유다를 지명해서 말씀하셨는데도, “설마 그런 일이 있으려고?” 하면서 대책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날 밤에 체포되고, 이 후에 일들은 빠르게 진행됩니다. 바보 같은 제자들을 원망스럽게 생각하는 분이 계시나요? 그렇지 않고 반대로. 제자들이 똑똑했다고 생각해 보세요. 제자들은 유다가 그런 일을 못하도록 집 안 어딘가에 감금했을 것이고, 예수님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을 시켰을 것입니다. 만일 그랬더라면 어떻게, 어떤 식으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게 될까요?

유다의 배반이 있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야기는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로,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로 급격하게 옮겨 갑니다. 마치 탄핵을 말하던 사람들의 관심이 이제는 대통령 선거로 옮겨 진 것처럼, 가룟 유다의 배신이 있은 후에, 무대의 스포트 라이트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비추게 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드라마가 정말 멋지게 전개 되지 않나요?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배반을 이용하셔서 오히려 구원의 클라이맥스라고 할 수 있는 십자가로 무대를 옮겨 놓으십니다. 어떤 때, 하나님께서 인간의 도움을 필요로 하시는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은 매정하다 싶을 정도로 인간의 도움을 물리치십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나와 함께 깨어서 기도하자고 하시는 예수님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한심하게도 잠을 잡니다. 하지만, 그 시간 만큼은 오직 예수님 혼자, 누구의 도움도 없이 그 힘든 밤을 보내셔야 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지금 사순절은 이스라엘의 40년 간의 광야생활이 연상이 될 만큼 긴 시간입니다. 결코 40일은 짧지 않아요. 40일을 보내는 동안 눈이 오기도 하고, 갑자기 추워 지기도 합니다. 예보가 자꾸 바뀌고 있습니다만, 바람 불고 눈이 많이 온다는 예보도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 마음과 생각을 예수님의 십자가에 집중해야 하는 때입니다. 기도하면서 예수님을 잃어 버리고 다른 것들로 우리 마음을 채우고 살았던 시간들을 회개하는 때입니다. 그래서 사순절은 예수님에게 생각을 집중하는 축복의 기간입니다. 40일 간의 여정 속에 춥고, 바람 불고, 눈이 오고 하는 일들이 있지만, 이런 것들을 우리는 즐겁게 이겨 나가야 합니다.


3/5/2017 | 사순절 새벽 기도를 드리는 마음 2

거룩한 삶이 주는 유익 The Benefits of Living a Holy Life

디모데전서 4:4-6

지난 주 설교에 이어 오늘은 ‘거룩한 삶이 주는 유익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영적 각성이 필요합니다. 영적으로 잠들어 있던 상태에서 깨어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잠들어 있다는 말은 그 사람이 영적인 문제에 관심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그 사람이 ‘영적인 문제 (spiritual matters)’가 아니라 ‘다른 문제 (physical matters)’에 몰두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의 머리에 돈, 물질, 세상 살아가는 문제들이 꽉 차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네 가지 마음 밭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밟고 다니는 길 (footpath)과 같은 마음 밭, 돌로 뒤덮인 (rocky places) 마음 밭, 가시 덤불 (thorns)과 같은 마음 밭, 좋은 땅 (good soil)과 같은 마음 밭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중에 가시 덤불과 같은 마음 밭을 가진 사람은 세상 염려와 재물의 유혹을 받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적으로 잠들어 있는 사람은 이 중에 가시 덤불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거나 (마태복음 13:22), 사람들이 많이 다녀서 다져진 길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영적으로 깨어나는 것은 이런 우리의 마음 밭을 갈아 엎어서 좋은 땅을 만드는 것입니다 (호세아 10:12). 그동안 무디어졌던 우리의 마음이 다시 하나님의 말씀에 예민하게 반응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다시 영적인 문제가 우리들의 관심사가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사실을 다시 깨닫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까맣게 잊어 버리고 살아왔던 시간들을 회개하며,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인격을 가진 분입니다. 우리와 같은 personality가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상대방을 존중해 주면 상대방도 나를 존중해 줍니다. 우리에게 인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이 나를 무시하면 썩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은 나에게 인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서로의 인격을 존중해 주는 것이 좋은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이 사실이 야고보서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여러분을 가까이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삶 가운데 죄를 깨끗이 씻으십시오. 여러분은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좇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정결한 마음을 품기 바랍니다.” (야고보서 4:8)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Come close to God, and God will come close to you. Wash your hands, you sinners; purify your hearts, for your loyalty is divided between God and the world.”

마음이 깨끗하지 않은 사람들, 손이 깨끗하지 않은 사람들은 먼저 마음을 깨끗하게 씻고, 손을 깨끗하게 씻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고,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나님께서도 그 사람을 가까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사랑하는 ‘double-minded’ 사람들은 회개하고 온전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가야 하나님도 그런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 오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읽은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은 모두 좋은 것이라고 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 속에 하나님의 선한 목적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창조하실 때 나쁜 목적을 가지고 창조한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 그 세상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마지막 날에,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성경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Then God saw everything that He had made, and indeed it was very good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서는 손수 지으신 모든 것을 보셨습니다. 그것들은 정말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창세기 1:31)

그런데, 이렇게 선한 목적을 가지고 창조된 것들이 타락했습니다. 물론 사람도 타락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한 목적을 가지고 창조하신 것들이 그 선한 모습을 잃어버렸습니다. 어떻게 그 잃어버린 선한 목적을 회복할 수 있습니까? 오늘 말씀에 보니까 아주 간단하게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모든 것이 거룩하게 됩니다.” (5절) 이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거룩 (holiness)’에 대한 개념입니다. ‘거룩’이 무엇입니까?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라는 찬송이 있습니다. 영어로는 ‘silent night, holy night’라고 합니다. 그 밤은 거룩한 밤입니다. 그 밤은 보통 때와는 구별된 특별한 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탄생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bible’이라고 하는데, ‘bible’은 책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그 책은 ‘거룩한 책’ ‘holy bible’입니다. 왜냐하면, 그 책에 기록된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다른 책들과는 구별된 책입니다.

사람은 어떻습니까? 우리도 다른 사람들과는 구별된 거룩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성도’라는 말이 있습니다. ‘거룩한 사람들 (holy people)’이라는 뜻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 말을 너무 쉽게 사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사람이 ‘성도’입니까? 하나님을 믿는 구별된 사람들이 ‘성도’입니다. 단순히 교회에 출석한다고 해서 그 사람을 ‘성도’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이어야 ‘성도’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이어야 ‘성도’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어야 ‘성도’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왜 거룩한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성경에 분명하게 나와 있습니다. “여러분을 부르신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모든 행동에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 (베드로전서 1:15) “But now you must be holy in everything you do, just as God who chose you is holy.” 이 말씀은 레위기 11:45 말씀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이집트에서 인도해 낸 여호와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여라 (For I, the LORD, am the one who brought you up from the land of Egypt, that I might be your God. Therefore, you must be holy because I am holy).” 내가 너희를 이집트에서 불러낸 특별한 존재인 것처럼, 너희도 나에게 특별한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요즘에 ‘코드 (cord)’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저 사람하고 나하고 코드가 맞는다고 합니다. 혹은 저 사람하고 나하고 코드가 맞지 않는다고 합니다. 서로 코드가 맞는 사람끼리는 재미있고, 같이 있기가 편합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위에서 야고보서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 가야 하나님도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 오신다고요.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인데, 우리는 거룩한 삶을 살지 않습니다. 그러면, 서로 코드가 안 맞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룩’의 개념은 우리가 하나님께 ‘acceptable’한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 5절에 그렇게 나와 있지요? “For we know it is made acceptable① by the word of God and prayer.” / ①Or made holy 거룩하게 된다는 말은 하나님께 ‘acceptable (받으실 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거룩한 삶이 주는 유익’인데요. 왜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그 이유가 있더라고요. 이 말은 반대로, 우리의 삶이 거룩하지 않으면 이런 것들을 모두 잃어버리게 된다는 뜻입니다. 첫째로, 우리가 거룩해야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the intimate relationship with God)를 형성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더 말씀 드리지 않겠습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방법은 “Wash your hands and purify your hearts”입니다. 사순절은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회개하는 특별한 시간입니다. 깨끗한 손과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다가가면 하나님께서도 그 사람에게 다가 오십니다.

둘째로, 우리가 거룩해야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는 사람들이 됩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사람들을 부르시고, 사용하십니다. 디모데후서 2:20-22 말씀을 보세요. “큰 집에는 금그릇과 은그릇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무그릇과 흙으로 빚은 그릇 또한 있습니다. 그 그릇 가운데 특별히 귀하게 쓰이는 그릇도 있지만 평범하게 쓰이는 그릇도 있을 것입니다. 만약 누구든지 악을 멀리하고 자신을 깨끗하게 하면, 주님이 쓰기에 귀하고 거룩한 그릇이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언제나 좋은 일에 쓰일 수 있는 준비된 사람입니다. 젊은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죄들을 멀리하십시오. 깨끗한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들과 함께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며, 믿음과 사랑과 평안을 추구하기 바랍니다.” 너무나 귀한 말씀이어서 New Living Translation으로 읽어 보려고 합니다. “In a wealthy home some utensils are made of gold and silver, and some are made of wood and clay. The expensive utensils are used for special occasions, and the cheap ones are for everyday use. If you keep yourself pure, you will be a special utensil for honorable use. Your life will be clean, and you will be ready for the Master to use you for every good work. Run from anything that stimulates youthful lusts. Instead, pursue righteous living, faithfulness, love, and peace. Enjoy the companionship of those who call on the Lord with pure hearts.”

그의 삶에 ‘거룩함’이 없는 사람은 준비되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일에 쓰임을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 중에 누구라도 그럴 것입니다. 깨끗하게 닦여 있는 그릇이 아니면 당장에 사용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거룩함’을 추구해야 합니다. 바울은 제자 디모데에게 특별한 주문을 했습니다. “Enjoy the companionship with those who call on the Lord with pure hearts”라고 했습니다. 정말 중요한 말씀입니다.

셋째로, ‘거룩함’을 가진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습니다. ‘influence’라는 말이 우리 시대에는 참 중요한 말인 것 같습니다. 과거와는 달리 이제는 말로 예수 믿으라고 전도하던 때가 지난 것 같습니다. 물론 지금도 여전히 말로 전도해야 할 필요성이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크리스천으로서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력’를 갖는 것이 더 중요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이런 점을 가볍게 보고 간과했던 것을 반성해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성경에는 이미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이런 ‘영향력’을 끼쳐야 한다는 말씀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보세요.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들에게 비춰라. 그래서 사람들이 너희의 선한 행동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 (마태복음 5:16) 또 하나 봐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베드로전서 2:9인데요. 이 말씀을 New Living Translation으로 읽어 보겠습니다. “But you are not like that, for you are a chosen people. You are royal priests, a holy nation, God's very own possession. As a result, you can show others the goodness of God, for he called you out of the darkness into his wonderful light (그러나, 여러분은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택함을 받은 사람들이고, 귀한 제사장들이며, 그분이 다스리는 거룩한 나라이고, 하나님의 소유가 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다른 사람들에게 여러분을 어둠 속에서 불러내어 그의 놀라운 빛의 세계로 부르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여줘야 합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에 어떻게 하면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느냐 하는 질문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에 이미 대답이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이 모든 것이 다 거룩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고,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거룩하게 되는 통로 (channel)입니다. 누구도 이 통로를 통하지 않고는 거룩해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acceptable’한 사람이 되려면 반드시 ‘말씀과 기도’의 통로를 통과해야 합니다.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신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꼭 거룩해 지는 다른 길이 있을 것 같지요? 다른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우리의 삶은 거룩해 지고, 하나님께 ‘acceptable’한 삶이 됩니다. 사도행전 4:12 말씀이 생각납니다. “예수님 외에는, 다른 어떤 사람을 통해서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원 받을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아주 강력한 말씀이지요?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가 거룩해 지는 길을 정해 주셨습니다. 그 길은 ‘말씀과 기도”를 통하는 길입니다. 하나님은 다른 길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을 향한 저의 간절한 기대가 있습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거룩함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acceptable’한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의 일에 귀하게 사용하는 사람들이 여러분 가운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저의 자만(自慢)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이 사람들 가운데 그런 사람들이 나오지 않는다면 어디서 나오겠느냐?” 이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저의 잘못된 생각인가요?

내일부터 사순절 새벽 기도회가 시작됩니다. 40일 동안 (정확하게는 36일 동안) 집중적으로 ‘말씀’을 듣고, ‘기도’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거룩함을 얻는 통로를 40일 간 통과합니다. 이 통로를 통과하는 동안 우리의 손이 깨끗해지고, 우리 마음이 깨끗하게 되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롭게 설정될 것입니다. 이 40일 동안 우리의 삶은 거룩한 삶이 되어서 하나님께 ‘acceptable’한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40일 간의 ‘말씀’과 ‘기도’의 통로를 지나가면서 우리는 함께 ‘companionship’을 만들어 갈 것입니다. 담임 목사로서 이번 사순절에 이런 저런 생각도 있고, 계획도 있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 기도회를 기뻐하시고 받으시는 기도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번 사순절 기도회가 우리들 만의 잔치가 되고 말 것입니다. 사순절의 은혜가 우리 교회 위에, 그리고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 위에 충만하기를 빕니다.


2/26/2017 | 사순절 새벽 기도를 드리는 마음 1

영적인 훈련이 주는 유익 The Benefits of Practicing Spiritual Disciplines

고린도전서 9:23-27

여러분은 오늘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의 중간에서 조금 뒷 부분을 읽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이 전 세계에 전파되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시기에, 하나님께서 선택한 사람입니다. 바울은 복음 밖에 몰랐습니다. 그는 복음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내려 놓을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말씀이 오늘 본문 23절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나는 복음이 주는 복에 참여하기 위하여, 복음을 전하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하고 있습니다.” “I do all this for the sake of the gospel, that I may share in its blessings.” (New International Version)

많은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헌신하는 일, 십자가를 지는 일, 복음을 전파하는 일은 전적으로 자기를 희생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이 전혀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는 일은 전적으로 자기를 희생하는 일이라면, 우리 중에 누가 주님을 위해 헌신할 수 있겠습니까? 복음은 우리에게 인정사정 없는 희생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이 복음의 원리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어 버리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사람은 구원을 얻는 것이 복음의 원리입니다 (마가복음 8:35) 사도 바울은 이 복음의 원리를 잘 알았습니다. 그는 복음을 위해서 자신을 드리는 것을 희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복음이 주는 ‘축복 (blessings)’을 ‘share in (함께 나눈다)’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생각을 했기 때문에 그는 복음을 위해서 무슨 일이든지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한 주일 후면 사순절 새벽기도가 시작됩니다. 원래는 이번 주 수요일부터 시작해야 하지만, 우리교회에서는 다음 주 월요일부터 시작합니다. 이런 특별한 절기를 앞두고 있으면 설교자에게는 고민이 생깁니다. 교인들에게 어떤 도전적인 (challengeable) 설교를 해야 할까 하는 고민입니다. 지금 새벽기도에서 고린도전서 말씀을 읽고 있는데요. 그 말씀을 읽다가 “와우!” 하면서 제 눈이 확 떠졌던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씀이 오늘 읽은 25절 말씀입니다. “경기를 하려는 사람은 모든 면에서 자기 절제를 하는 법입니다. 그들은 썩어 없어질 면류관을 얻으려고 절제를 하지만, 우리는 썩지 않을 면류관을 얻으려고 그렇게 합니다.”


시합에 나가는 선수들이 얼마나 자기 관리를 잘하는지 아시지요? 평소에 근육을 키워서 힘을 길러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요. 체중 조절을 위해서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운동이 체중이 많이 나가는 것보다는 적게 나가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에, 먹고 싶은 것을 먹지 않고 참아 가면서 체중 조절을 하는 것입니다. 또 그래야 최상의 몸 컨디션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New Living Translation으로 한번 읽어 보세요. “All athletes are disciplined in their training. They do it to win a prize that will fade away, but we do it for an eternal prize.” 경기에 나가는 운동선수가 트레이닝을 열심해서 자신을 단련 시키는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 ‘우리 (we)’가 누구입니까? 사도 바울 자신을 포함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 헌신하는 모든 사역자들을 말합니다.

운동선수들은 상을 받기 위해서, 메달을 받기 위해서 그렇게 피나는 훈련을 합니다. 하지만, 그 상은 영원한 상이 아닙니다. ‘a prize that will fade away (없어질 상)’입니다. 며칠 전에 일본의 삿보로에서 동계 아시안 게임이 열렸었는데, 이제 막 끝이 났습니다. 우리나라 선수들이 좋은 성적을 냈다고 합니다. 쇼트트랙 선수들이 잘해서 금메달을 많이 땄고, 스피드 스케이팅에서는 이승훈이라는 선수가 금메달을 무려 4개를 따서 이 부문에서 한국 기록을 세웠다고 합니다. 지금까지는 한 대회에 나가서 3개 금메달을 딴 것이 기록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여자 피겨스케이팅에서 최다빈이라는 17살 먹은 고등학생이 한국선수 최초로 금메달을 땄다고 합니다. 금메달을 딴 선수들은 아시아에서 최고의 선수가 된 것인데, 선수 본인들에게는 얼마나 큰 영광이겠습니까? 하지만, 오늘 성경에 보니까 그 상은 영원한 상이 아니라 곧 ‘없어질 상’이라고 합니다. 

계속되는 성경 말씀을 보십시오. “but we do it for an eternal prize (하지만 우리는 영원한 상을 위해서 그렇게 합니다.” ‘그렇게 한다’는 말은 열심히 자신을 훈련한다는 말입니다. 우리 크리스천들도 운동선수들처럼 열심이 훈련하는데, 우리가 훈련하는 목적은 ‘없어질 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영원한 상 (an eternal prize)’을 얻기 위해서 훈련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바울은 왜 그렇게 훈련을 강조합니까? 그 이유가 27절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나는 내 몸을 쳐서 굴복시킵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복음을 전했으나, 정작 나 자신은 자격 미달이 될까 두렵습니다.” “I discipline my body like an athlete, training it to do what it should. Otherwise, I fear that after preaching to others I myself might be disqualified.” (NLT) “운동선수들이 몸을 단련 시키는 것처럼, 나도 내 몸을 훈련합니다. ‘to do what it should (내 몸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도록)’ 이런 뜻 아닙니까? NIV 성경에는 이 말씀이 “I beat my body and make it my slave”라고 나와 있습니다. “나는 내 몸을 쳐서 나의 노예로 만든다”는 뜻이 잖아요? 내 몸이 원하는 대로 내가 따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대로 내 몸이 나를 따르도록 훈련시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대단한 영성을 가진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대단한 영성을 가진 사람이라고 인정하니까 그가 쓴 편지들을 성경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으로 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그런 영성을 가지기까지 어떻게, 어떤 식으로 자신을 훈련 시켰는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바울에게 있어서 영성훈련은 자기 몸을 훈련 시키는 과정이었습니다. 자기 몸을 자기가 컨트롤 할 수 있도록 훈련 시키는 것입니다. 바울은 훈련의 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Otherwise, I fear that after preaching to oth-ers I myself might be disqualified.” “그렇지 않으면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설교한 후에 나 자신은 자격 미달이 될까 두렵습니다.”


여러분이 복음을 잘 이해하고 있는지 퀴즈 문제 하나 낼까요? 우리가 말하는 구원은 영혼의 구원입니까? 아니면, 몸의 구원입니까? 아니면 몸과 영혼의 구원입니까? 우리가 말하는 구원은 몸과 영혼의 ‘전인적인 구원 (holistic salvation)’입니다. 오늘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은, 금욕주의자들이 말하는 것과 전혀 다릅니다. 우리의 몸이 좋아하는 것을 끊고 영혼의 즐거움을 얻자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몸을 훈련해서 몸과 영혼의 전인적인 구원을 얻자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우리의 의지와 상관 없이 움직일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몸은 게으른 것을 좋아하고, 편하고 안락한 것을 좋아하고요. 먹는 것을 좋아하고요. 자극적인 것을 좋아합니다. 그렇잖아요? 시험 공부를 하다가 잠이 옵니다. 지금 자면 안 됩니다. 하지만, 내 의지와 상관 없이 잠이 옵니다. 내 몸이지만, 내 말을 듣지 않습니다. 영성 훈련은 우리의 몸을 훈련 시켜서 내 말을 듣게 하는 것입니다. 내 몸을 내가 원하는 대로 컨트롤 하는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설교한 후에 나 자신은 자격 미달이 될까 두렵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훌륭한 크리스천들이 이 말씀을 듣지 않기 때문에 disqualified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기 몸을 훈련 시켜서 자기에게 복종 시키는 훈련을 하지 않으면 우리 모두가 disquali¬fied될 수 있습니다. 성경도 많이 알아요. 인품도 좋아요. 교회에서 존경도 받아요. 친구들에게 인정을 받습니다. 하지만, 자기 몸을 훈련 시키는 일을 하지 않으면 disqualified 됩니다. 바울 같은 사람도 그렇게 될 것을 염려하고 있습니다. 그렇잖아요? 은혜로운 설교로 많은 사람을 감동 시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선교의 업적을 많이 남기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막상 자기 자신은 disqualified 된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이제 다음 주부터, 우리는 40일 동안의 새벽 기도에 들어갑니다. 벌써 20년 넘게 해 온 일입니다. 우리교회 사역 가운데 제일 크고 의미 있는 사역이라고 생각합니다. 40이라는 숫자는 성경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생활했습니다. 광야 (wilderness)는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살 수 없는 곳입니다. 제대로 된 풀한포기 자라지 못하고, 물이 없고, 먹을 것이 없고, 잘 곳이 없습니다. 돈이 있어도 소용이 없고, 지식이 있어도 쓸모가 없는 곳이 광야 입니다. 내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존재인 것을 알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는 곳이 광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광야에서 무려 40년을 지내면서, 사람이 사는 것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진리를 깨우쳤습니다. 하나님께서 앞서 가시면서 이스라엘 민족이 갈 길을 인도하시는 것을, 낮에는 구름 기둥을 보고 따라가면서, 밤에는 불 기둥을 보고 따라 가면서 확신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광야에서 금식 기도를 하셨습니다. 본격적으로 사역에 들어가시기 전에,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하면서 기도하셨습니다. 기도하시면서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의 방향에 대해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역의 내용에 대하여 하나님께 물었을 것입니다. 이 때, 사탄의 세가지 시험 (temptation)이 있었습니다. 만일 이 때 예수님께서 이 사탄의 유혹을 이기지 못 하셨더라면, 예수님의 사역의 방향과 내용이 바뀌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고, 안락하고 편한 길을 따라 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광야에서 드렸던 40일 간의 기도가 예수님의 사역의 방향을 결정했고, 사역의 내용을 결정했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40일 간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발견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40일 간의 기도야 말로 예수님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시간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그렇거든요? 우리 모두가 잘 살고 싶습니다. 잘 산다는 것은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산다는 것이 아니라, 정말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삶의 목적을 가지고, 가치 있게, 보람 있게, 아름답게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자기만 아는 이기적(利己的)인 인간이 아니라, 남에게 베풀 줄 알고, 자기 것을 나눌 줄 아는 삶을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보스턴이 낳은 미국 최고의 지성이라고 칭송을 받는 월터 왈도 에머슨 (Ralph Waldo Emerson, 1803-1882)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What is success? To leave the world a little better, whether by a healthy child, a garden patch or a redeemed social condi-tion; To know even one life has breathed easier because you have lived; This is to have succeeded.” “성공이란 무엇인가? 건강한 아이를 낳거나, 정원을 가꾸거나, 사회 환경을 개선하거나,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나은 세상으로 남겨 주고 떠나는 것이다. 자신이 한 때 이곳에 살았음으로 말미암아 단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더 행복해 지는 것, 이것이 성공이다.”

에머슨의 말이 감동적이긴 하지만, 크리스천으로 산다는 것은, 에머슨의 말을 뛰어 넘는 그 이상의 삶을 말합니다. 우리는 단순히 다른 사람을 감동 시키는 삶을 사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구원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은 기도하심으로써 자신의 삶의 목적을 바르게 설정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의 내용을 확정하셨습니다. 기도가 주는 유익함이란 이런 것입니다. 어쩌면 2017년 사순절에 여러분이 새벽마다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여러분의 인생을 바꾸어 놓는 기도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우리는 사순절 새벽에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것입니다. 새벽의 신선한 공기를 호흡하면서, 상쾌한 기분으로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것입니다. 바울은 제자 디모데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크리스천의 삶에 주는 유익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All Scripture is God-breathed and is useful to teach us what is true and to make us realize what is wrong in our lives. It corrects us when we are wrong and teaches us to do what is right. God uses it to prepare and equip his people to do every good work.”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숨을 불어 넣은 것입니다. 무엇이 진리인지 가르쳐 주고,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깨닫게 해 주는 데 유용합니다. 우리가 잘못했을 때는 우리를 바르게 잡아 주고,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 가르쳐줍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사용하셔서 그의 백성들이 선한 일을 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십니다.”

창세기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흙으로 만드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코에 하나님의 숨을 불어 넣었더니, 사람이 ‘living being (살아 있는 존재)’이 되었다고 합니다 (창세기 2:7). 그 하나님의 숨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 말씀 속에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사용하신다고 하잖아요?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셔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숨 (breath)’을 불어 넣으심으로, 우리를 ‘living being’으로 살게 하십니다.

40일 동안 매일 드리는 새벽기도의 자리가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모이는 자리가 광야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회개와 눈물의 자리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주님의 위로와 격려를 받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문제는, 내 몸이 새벽에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몸을 단련 시켜서 나에게 복종시켜야 합니다. 내 몸을 복종 시켜서 기도하는 자리에, 말씀 듣는 자리에 나오도록 해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4:8을 함께 읽고 오늘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육체의 훈련은 약간의 유익을 주지만, 경건의 훈련은 모든 일에 유익합니다. 경건은 이 세상에서의 축복뿐만 아니라, 앞으로 올 세상에서의 축복도 약속해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