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모음
5/5/2024 | (부활절 여섯번째 주일)
건강한 교회 시리즈 12 사랑의 공동체 Community of Love
요한복음 15:9-12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 (Bertrand Russell 1872-1970)은 1901년 어느날 밖에서 자전거를 타다가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아내에게 상황을 말한 뒤 이혼하고 싶다고 전하고, 이후 그의 인생에서 평생 네번이나 결혼을 하게 됩니다. 철학자 러셀은 충분한 사유를 통해서 사랑의 본질은 감정이라고 말했습니다. 좋은 느낌이 사라지면 사랑도 떠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러셀의 사랑은 여전히 현대인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나 내가 갖고 싶은 것, 우리는 소유하고 싶은 것에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또한 사랑은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힘이 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사랑이 변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좋은 감정이 영원히 지속될 수 없습니다. 사랑의 감정이 사라지게 되면 위선이 되기도 합니다. 이것이 감정적 사랑의 한계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감정적 사랑과는 다릅니다. 오래 참고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사랑입니다.
첫째,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인식하시기 바랍니다.
9 내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셨듯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 사랑 안에서 살아가도록 하여라.
9절은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셨듯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와 아들과 제자들의 관계를 통하여 서로 사랑해야 하는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사랑을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사랑을 깊이 인식만 하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랑을 깊이 인식했으면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사랑 안에서 살아가라는 것은 예수께서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듯이 예수의 계명을 지키라는 뜻입니다.
기독교인들에게 잘 알려진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처럼 사랑하사 외아들을 주셨으니'라는 구절속에는 우리가 이해 할 수 없는 크신 사랑이 담겨져 있습니다. 바로 영원한 생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은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니라 모든 세상 모든 민족이 대상이 된 것입니다. 이 사랑 안에 거하고 믿음으로 따르는 것은 우리에게 영생에 이르게 하는 길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누리는 만큼 행동해 나가면 됩니다. 서로를 따뜻한 시선으로 대해 주고 합리적인 판단과 생각을 넘어서서 말씀을 통해 주어진 생명을 경험하며 상대방의 마음을 먼저 살피고, 서로를 인정해 주는 믿음의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랑으로 성취가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법과 질서는 사랑으로 유지됩니다. 성경에 따르면 사랑이 하나님에게서 나온다고 표현됩니다(요한 1서 4:7). 이 사랑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주도권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내 사랑 안에서 살아가라'고 하시는 말씀에 하나님의 변함없는 포용성이 느껴집니다.
오늘 본문은 제자들에게 하는 주님의 고별설교입니다. 주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을 종이라 부르지 않고 친구라고 불러 주시고, 내가 너희를 선택해서 세웠다고 말씀하시는데 이 구절에서 제자들을 향한 주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13절로 15절을 한번 보시겠습니다.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14 내가 너희에게 명한 내 계명을 너희가 지키면, 너희는 내 친구다. 15 이제부터 나는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겠다. 주인이 종들에게는 비밀을 털어놓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내가 너희를 ‘친구’라고 부르는 것은,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모든 것을 너희에게 다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친구는 오래 사귀어 정을 나누는 사람을 뜻합니다. 주님이 제자들을 친구로 부르시는 것은 서로가 깊이 교제하며 마음을 온전히 열어주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다 드러내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정의하는 친구의 개념을 보면
첫째로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생명까지 아낌없이 줄수 있는 친구가 한명만 있어도 행복한 사람일텐데 자기 생명을 내어주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친구가 되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너희가 내가 명하는 대로 하면 곧 나의 친구라' 예수님의 친구는 예수님을 닮아가는 사람입니다. 순종이 사귐에 있어서 필수적입니다. 예수의 이름을 부르지만 그의 계명을 소홀이 여기면 예수의 친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번째로 친구는 세상에서 경험할 수 없는 특권을 얻는 것입니다. 종은 명령을 받는 관계이지만 친구는 비밀을 나누는 관계입니다. 종은 주인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고 시키는 일만 하는 반면에 친구는 주님의 뜻과 계획을 알게 됩니다.
사랑의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친구가 되어 한 몸을 이뤄가게 됩니다.
둘째, 하나님 사랑의 절정은 기쁨입니다.
15:11 내가 너희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게 하여,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부버 (Martin Buber, 1878 ~ 1965)는 '나와 너'라는 책에서 말의 위기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세가지 인간관계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그것과 그것의 관계를 말합니다. 마치 물건처럼 이용하다가 가치가 없으면 버리는 관계입니다. 일시적이고 기계적인 만남입니다. 둘째는 나와 그것의 관계입니다. 상대방이 나를 물건처럼 이용해도 나는 상대방을 끝까지 인격적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이런 관계는 시간이 흐르면 지쳐 버립니다. 신앙생활도 이러한 방법으로는 지속되지 않게 됩니다. 셋째는 나와 너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가 인격적 관계인데 주님과의 연합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요한은 요한복음을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한 1:4)고 밝히고 있습니다. 주님과의 깊은 사귐을 통해 얻는 기쁨은 무엇을 가졌느냐 안가졌느냐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관계속에서 얻게 되는 기쁨입니다. 기쁨은 하나님 나라의 특성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를 믿는 자에게 하나님 나라의 기쁨이 샘솟는 것입니다. 세상은 많이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뭔가 허전하고 부족해 합니다. 욕망으로 채울수 없는 영혼이 사람에게는 있습니다. 참된 만남속에는 만족함이 있고 기쁨이 생겨납니다.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큰 기쁨을 누리는 것이 먼저입니다. 내면에 기쁨이 채워져야 인간 관계에서도 기쁨을 나눌 수 있게 됩니다.
성경에 항상 기뻐하라는 구절이 있는데 '항상'이란 말은 어렵게 느껴집니다. 우리는 살면서 기쁘지 않는 상황도 만나게 되기도 하고 기쁨이 사라지기도 합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것은 고난중에도 주를 바라보며 기뻐하고, 슬픔 가운데서도 찬송하며 기뻐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충만함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우러나는 기쁨입니다. 예수님과 연결된 삶의 목적이 이 기쁨을 가리킵니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 사랑으로 우리는 나를 둘러싼 일들과 환경을 온전히 대할수 있게 됩니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co-worker)입니다.
15:12 내 계명은 이것이다.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서로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동역자는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에 동참하며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개념은 행동으로 실제가 되어야 합니다.
공동체 안의 분쟁과 시기는 인간의 연약함을 드러냅니다. 우리가 완전한 사랑을 말할 수도 없고 실천할 수도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쉬지 않고 일하시는 분이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이 새 계명을 허락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확실한 테두리가 있어 보입니다. 서로 사랑하지 않고는 같은 길을 걸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해도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서로가 함께하는 것이 어려워 집니다. 아무리 좋은 뜻이라도 같은 방향을 바라보지 않고, 다른 일을 계획하며 나아가면 과정속에서 문제는 계속 발생하게 됩니다.
성경은 '서로간의 사랑'과 '모든이에 대한 사랑'을 둘 다 언급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3장 1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또 우리가 여러분을 사랑하듯, 주님께서 여러분 서로 간에 나누는 사랑과 더 나아가 모든 사람들에게 베푸는 여러분의 사랑을 넘치도록 풍성하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쉬운말 성경)
하나님의 동역자는 그릇을 넓혀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끊임없는 사랑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이웃을 보게 되고, 이웃의 범위가 확대되어 갑니다. 믿음을 통해서 믿음의 일을 하게 되고, 믿음의 눈이 뜨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율법 선생에게 받은 질문 중에 한가지는 "율법 중에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두 가지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라는 책에서 '한계없이 넘쳐 흐르는 사랑의 삶'이란 표현을 사용합니다. 성도는 이웃의 개념을 확장해야합니다. 교회 안 뿐만이 아니라 세상과 일터에도 우리의 이웃이 있습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기 원하고 선을 행하려고 애를 쓰기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로마서 12장에서 할수만 있으면, '여러분의 힘이 되는 일이라면 모든 사람들과 화목하게 지내십시오.'라고 권면합니다.
요한복음 15장 16절 17절을 하나님의 동역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16 명심하여라.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 그 이유는, 너희로 하여금 세상에 나가 열매를 맺게 하고, 그 열매가 항상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너희가 내 이름으로 내 아버지께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다 주실 것이다.
17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계명은 이것이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여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인식하며 사랑의 삶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우리힘으로 사랑하는 것이 가능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위대하게 느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내 가족만 사랑하여도 충분할 것 같은데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신 계명이 우리의 삶에 어떻게 이해 되어지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이해되어지지 않는 한없는 사랑을 우리가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인으로 살아가며 많이 사랑하는 것 처럼 많이 헌신하는것 처럼 보여질뿐 어쩌면 가장 가까운 이웃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는 연약함 안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켜 행하는 것이 믿는 성도들의 정체성이 되어야 합니다. 지쳐있을 때에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쉬어 버리면 안됩니다. 지쳐있는 몸과 마음일지라도 하나님을 떠나 있으면 안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서는 작은 일도 감당 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사랑하는 일은 비판과 정죄의 마음에서부터 돌아서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이해해야 합니다. 배를 타고 가다가 폭풍을 만났던 제자들은 위험한 순간에서 자신들의 믿음의 상태가 보였습니다.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으면 불안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 안에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바라 보아야 합니다. 세상에 속해 있으나 세상과 동화되지 않고 예수의 가르침을 전하는 이들이 예수의 공동체입니다. 형제 사랑은 먼저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밑바탕인 동시에 세상을 향해서 믿음의 친구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이웃이라는 개념의 한계선을 넘어서 주님은 친구가 되어 주시지만, 자신은 항상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백성을 만들어 가셨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끊임없이 경계선들을 뛰어 넘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이렇게 해서 점점 많은 사람들이 공동체의 형제 관계속으로 이끌려 졌고, 끊임없이 새로운 이웃관계들이 형성되었습니다. 한주도 하나님의 동역자들로 살아가시길 축복합니다.
4/28/2024 | (부활절 다섯번째 주일)
건강한 교회 시리즈 11 새로운 의식 New paradigm
마태복음 9:14-17
금식은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의 신앙훈련 가운데 하나입니다. 유대인들은 1년에 한번 대속죄일에 참회를 위해 금식을 합니다. 그들에게 금식은 종교적 규례와 전통으로 확고한 신앙의 행위였기에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두차례 월요일과 목요일날 금식날로 정해 놓고 지켰습니다. 무슬림들도 라마단 기간에 금식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도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40일 동안 금식을 하시며 사단의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이 금식의 전통을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하여 새롭게 이어가고 있습니다. 존 웨슬리는 “육체를 주님 아래 계속 놓기 위해, 그리고 금식이 가져다 주는 주님과의 친밀함을 유지하기 위해” 금식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실천하였습니다.
본문을 보면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의 제자들이 금식을 하지 않는 일로 예수께 질문을 합니다. “왜 선생님의 제자들은 우리들이나 바리새파 사람들처럼 금식을 하지 않는 것입니까?”
배경을 보면 마태가 세리들과 죄인들을 자신의 집에 초대해서 예수님과 식사를 하던 중이었습니다. 마태는 반민족주의자로 동족들에게 경멸과 미움을 받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 마태는 제자 삼아 주신 예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세리의 직업을 내려놓고 예수의 제자가 됩니다. 마태는 잔치를 열어서 동료 세리들과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습니다. 마태는 동료 세리들에게도 주님을 소개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미움과 비난을 받고 살았던 세리 마태가 해결되지 못한 삶의 문제를 이겨 내도록 하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던 것입니다. 잔치가 벌어진 마태의 집 밖에서는 바리새인들의 비난의 소리가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경건한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기에 금식하는 날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예수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마9:12-13)
예수께서는 죄많고 실수 많은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마태는 세리 마태에서 위대한 사도로 인생이 변화된 것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스승인 세례 요한의 생애를 통해 그들의 신앙 정체성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은 기득권층에 속하기를 거부하고 광야에서 메시야의 오실 길을 예비하기 위해 외치는 자로 살았습니다. 그의 외침을 듣고 따랐던 제자들은 당연히 수도원적 삶을 살았겠지요. 게다가 스승인 요한이 '나보다 뒤에 오시는 분이지만, 나는 그분의 신발 끈조차 풀어 드릴 자격이 없는 사람이오.' 라고 했으니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의 제자들 사이에 미묘한 경쟁심리도 있을 것이고, 예수의 제자들이 못마땅 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제 예수께서 요한의 제자들에게 하신 3가지 비유를 통해서 복음을 바르게 이해하고 그리스도인으로 합당한 삶이 무엇인지 살펴 보고자 합니다.
첫째는 결혼식 신랑의 비유입니다.
9:15 예수께서 되물으셨다. “결혼식에 온 신랑의 친구들이 신랑과 함께 있으면서 어찌 슬퍼할 수 있겠소? 하지만 이제 곧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인데, 그때가 되면 그들도 금식할 것이오.
복음은 기쁜 소식입니다. 금식과 결혼식은 그 의미가 대조적입니다. 결혼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슬픔의 표현이 어울리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오신 것은 궁극적으로 기쁨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마태의 삶에 찾아오신 주님은 이전의 동족들에게 받던 설움과 상처를 씻겨 주시고 인생의 스승이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 하실때 마태의 마음에 예수님과의 실제적 교제가 시작된 것입니다. 예배는 이 기쁨을 경험하는 혼인식 잔치와 같습니다. 예수께서 요한의 제자들에게 한 이 비유는 금식의 때가 아직 아님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금식을 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예수님께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기쁨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기쁨은 환경에 따라 변하고 금방 사라지는 일시적 기쁨이지만 주님이 주시는 기쁨은 하늘의 기쁨이요, 영원한 기쁨입니다. 예배는 이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은혜가 사라지고 종교적 행위와 지식만 앞설 때 예배의 자리에 계시는 주님은 보이지 않을 것이고, 종교적 전통과 규례가 주님 보다 앞서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곧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인데, 그때가 되면 그들도 금식할 것이오.
주님은 예수의 제자들이 앞으로 금식할 때가 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슬픔을 당하게 될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복음서에는 주님을 잃고 큰 충격에 빠진 제자들의 모습이 나옵니다. 정신없이 도망갔고, 좌절감에 사로 잡혀서 두려워 했습니다. 이때 제자들은 죽은 예수만 생각했습니다. 그랬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확인한 순간 슬픔이 기쁨으로 변했습니다.
실제로 초대교회 디다케 사도집의 교훈을 보면 주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금식의 의미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유대 전통인 월요일과 목요일이 아니라 수요일과 금요일에 금식을 하는 새로운 전통이 세워졌다고 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떠날 것을 말씀하셨던 이 비유의 말씀을 근거로 금식을 시행하게 됩니다. 금식의 동기가 달라진 것입니다. 주님은 요한의 제자들에게 자신을 빗대어 지금은 주님과 함께 있기 때문에 금식하거나 슬퍼하는 것이 어울리지 않지만 신랑을 빼앗길 날에 금식하며 애통하라는 것입니다.
둘째 비유는 낡은 옷과 새 천 조각의 비유입니다.
16 낡은 옷에다 새 천조각을 대고 깁는 사람이 어디 있겠소? 그렇게 하면, 새 천조각이 낡은 옷을 당겨서, 그 옷은 더욱 심하게 찢어지게 될 것이오.
지금이야 옷의 질이 많이 좋아졌지만 당시만 해도 옷이 헤어지는 일이 빈번했습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옷감은 베였는데 헤어진 베옷을 새 베옷감으로 꼬매게 되면 헤어진 베옷이 당겨져서 옷이 더 망가졌습니다.
이 비유는 형식적인 금식을 부정하신 것입니다. 형식적인 금식은 헛옷에 새천 조각을 붙이는 것에 불과합니다. 새옷이 될 수가 없습니다. 주님은 바리새인들의 종교적 위선에 대한 경계하실때에도 유대인들의 금식 전통을 완전히 뒤집는 말씀을 하십니다.
“16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예수님의 이 비유는 기존의 모든 질서와 규범의 토대가 무너짐을 의미합니다. 예수는 단순히 새천 조각을 꼬매는 정도의 수준이 아니라 새옷을 입으라고 하십니다. 성도의 삶은 이전에 입던 옷을 완전히 벗고 새 옷을 입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옷을 꿰매 주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새옷을 주시기 위해 오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분을 만난 이들의 삶에는 완전한 변화가 찾아 옵니다.
이어령씨가 쓴 '젊음의 탄생'의 책에 보면 젊음은 물음표와 느낌표 사이에서 매일 죽고 매일 태어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고갱이라는 화가가 3가지 질문을 그림을 통해 던졌답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그는 서구 문명의 깊은 회의를 느끼고 절망 끝에 삶의 해답을 얻기 위해 남태평양 타히티 섬으로 갑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답을 찾지 못하게 됩니다. 그가 깨달은 것은 질병과 가난 뿐 낙원은 아무데도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파리로 돌아오지만 이미 그를 받아 주지를 않습니다. 가족도 그를 외면하고 그의 그림도 팔리지 않습니다. 다시 타히티 섬으로 돌아온 그는 죽음을 결심하고 유서로 남기려고 했던 그림이 바로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그림이라고 합니다. 고갱은 삶의 물음표를 그림을 통해서 확인하려고 했지만 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도 수많은 질문들을 품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불확실한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길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 주님은 죽음 권세보다 강한 사랑으로 우리를 자녀 삼아 주셨습니다. 그 사랑의 힘이 죽음을 이겼습니다. 주님과 함께 있다면 불확실한 바다라고 해도 믿음으로 뛰어들 때 삶의 물음표가 느낌표가 될 것입니다.
셋째는 낡은 가죽 부대와 새포도주의 비유입니다.
17 또 낡은 가죽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는 사람이 어디 있겠소? 그렇게 하면, 그 낡은 가죽 부대가 터져서 포도주가 쏟아지게 되고, 그 부대도 버리게 되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하오. 그래야 둘 다 보존될 수 있소.”
낡은 가죽 부대는 우리의 고정관념입니다. 고정된 관념이 있으면 생각이 유연하지 않고 경직되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생각을 유연하게 해 주시고, 종교적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주님께로 부터 받는 사랑의 힘으로 높은 차원의 삶을 살게 해주십니다. 주님은 낡은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새포도주는 발효가 되면서 팽창하게 되는데 이를 낡은 부대에 담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터져 버리게 됩니다. 낡은 사고 방식으로 새로운 일을 행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성도는 새 포도주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산 믿음의 성도들은 살아 있기에 세속적 물결에 대항하여 싸우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입혀 주신 옷을 더럽히지 않도록 회개하여 예수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주신 생명이 있기에 죄와 대항하는 것입니다.
어느 단체나 리더가 바뀌면 변화를 향한 기대와 우려가 동시에 존재합니다. 그러나 새부대 새 포도주는 일시적인 변화가 아닌 지속적인 변화의 결단이 필요한 것이며 우리 안에 쌓아 두고 있던 개인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 예수님을 따라갈 때에 진정한 변화를 만나게 됩니다. 주님을 믿을 때 누구에게나 새로운 시대가 열려집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배우고, 예수님처럼 생각하는 것이 새로운 의식입니다. 절망적인 사회속에서 그분은 우리의 희망이 되십니다. 슬픔 가운데 주님은 영원한 기쁨이 되어 주십니다.
미국의 조지 바나 연구소에서 “하나님께 한 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고 반드시 대답해 주신다면, 당신은 어떤 질문을 하나님께 하겠습니까?”라는 주제로 사람들에게 설문조사를 했는데 그 결과, 가장 많은 응답자들이 “세상에는 왜 아픔과 고난이 있습니까?” 이 질문을 하나님께 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고난은 모든 사람들이 겪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무지개를 보려면 먼저 소낙비가 내려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에 꽃이 피고 열매 맺는 아름다움이 오기 전에 반드시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주가 걸으신 길을 따라가다 보면 손해를 보는 것 같기도 합니다. 적당한 무게를 안고 살아갈 때 보다 잘 믿으려 할때, 잘 살아내려 할때 더 어렵습니다. 우리가 보는 꽃들은 아름다운 모습이지만 땅에 떨어진 풀씨중에서도 일부만이 살아 남아 싹을 틔운다고 합니다. 아름다운 꽃이 피어나기 까지의 과정을 알고 우리가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아니지만 추운 겨울을 이겨낸 꽃의 아름다움을 누리는 것은 우리의 몫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도 그러할 것입니다. 모든 순간이 열매를 맺기 위한 생명의 과정이 됩니다. 어떤 슬픔도 아픔도 주님을 사랑하는 기쁨을 빼앗아 가지 못합니다. 인도하심 속에서 누리는 이 기쁨이 현재의 어려움을 이기는 희망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께서는 율법의 정신을 새롭게 완성하셨고, 옛 시스템을 완전히 폐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하신 비유는 생존 경쟁이 치열한 사회속에서 우리의 생각과 의식에 대해서 새로운 도전을 합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언제나 믿음을 통하여 깨닫게 됩니다. 주님은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오셨고, 단순히 죄인들과 세리들을 제자로 삼았다기 보다는 인간의 죄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성도들에게는 이제 슬픔도 기쁨의 씨앗이 되는 것입니다.
오랜시간 금식의 전통이 참회가 목적이었다면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됨을 확인하는 시간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의 시선에는 기독교가 종교적 의식이라 보일테지만 복음 안에 있는 성도에게는 단순한 종교생활이 아니라 삶 그 자체인 것입니다. 기독교는 행위를 통한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오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기에 주님이 원하시는 합당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아볼로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는 성경에 능통한 사람임에도 요한의 세례를 알 따름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부활의 도를 가르치지만 요한의 세례만 알고 따랐습니다. 아볼로는 요한의 제자들을 통해서 가르침을 받은 사람입니다. (행 18:24-19:3)
어쩌면 오늘 본문의 요한의 제자들도 예수의 가르침을 듣고는 있지만 여전히 요한에게 배운 가르침만을 이방 세계에까지 전파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낡은 옷과 가죽 부대에 머물고 만 것입니다.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바울은 에베소에서 12명의 요한의 제자들을 만나게 됩니다. 바울은 너희가 믿을때에 성령을 받았느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습니다. 이후 바울에게 예수의 가르침과 안수를 통해서 확실한 믿음과 성령의 확신을 경험하게 됩니다. 복음을 깨닫게 해 주시는 분은 성령님이시고 우리를 거듭나게 해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새 부대에 새포도주를 담는 것입니다. 우리는 새 시대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예수 안에서 새로운 변화는 언제나 우리에게 먼저 질문이 닿아야 합니다. 참된 제자는 새로운 변화에 적응하고 수용하며 함께 성장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 교제 가운데 그리스도가 동행하고 계십니다.
4/21/2024 | (부활절 네번째 주일)
건강한 교회 시리즈 10 부활의 공동체 4 Community of Resurrection 4
오늘날 우리는 과거에 비해 편리한 시대를 살아갑니다. 그러다보니 이로 인해 신앙 생활을 이해하는것도 쉽고 편해졌습니다. 교회가 핍박받던 시대의 영성은 오래된 낡은 영성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부활의 믿음은 죽음의 문제를 통찰하며 우리의 영혼을 보는 것이 토대가 되는데 누릴 것이 더 많아지는 시대에 부활을 살아내는 영성이 약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인류는 거대한 서사속에서 매일 죽고 매일 태어남이 반복되는 삶속에서 진화되어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부활의 사건은 진화론적 관점으로 풀어 갈 수가 없습니다. 역사는 인간이 평화를 이루려는 노력과 투쟁 사이에서 수많은 실패를 반복해 왔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시작과 끝이 되셔서 사람들이 해결할 수 없는 구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 주셨다고 선언합니다. 성경은 믿음의 대상을 바로 알고 그분을 닮아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을 입는 것이고 부활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바울은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성도들에게 부활의 희망을 약속합니다.
첫째, 부활을 살아가는 것은 유업을 받기 위한 과정입니다.
인간은 물질세계에 영향을 받고 제한된 공간과 시간속에서 살아갑니다. 새몸을 입기 위해서는 먼저 죽어지는 것이 선행되어집니다. 죄에 대한 죽어짐이 없으면 부활을 살아간다는 것이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죽음은 인간이 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망권세를 이기신 주님은 부활의 열매를 상속해 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이 경험은 우리 안에 죄가 죽어짐을 통해서 깨닫게 됩니다. 자아의 죽어짐은 부활의 능력을 맛보게 합니다. 성도들에게 구원 이후의 삶은 이 과정을 지속적으로 통과함을 의미합니다. 성도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대속의 은혜를 얼마나 깨닫는지에 따라서 십자가의 참된 의미가 더 깊어지게 됩니다. 성령님께서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우리에게 확증시켜 주십니다. 바울은 몸은 살과 피로 이뤄진 것으로 제한적이고 유한하고, 썩어질 몸이지만 본문을 통하여 부활의 몸을 입는 그 비밀을 말씀해 줍니다.
그 비밀의 첫번째는 우리가 죽지 않고, 다 변화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두번째는 마지막 날, 재림의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질 때, 눈 깜박 할 사이에 갑자기 그렇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들은 시간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과정입니다. 유업을 얻기 위한 '과정'이라 표현한 것은 사망 권세가 예수님의 재림때에 완전히 꺽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성도들은 끝이라 여겨지는 절망속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닫힌 문 앞에서 새로운 문이 열리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이 필요한 순간에 그분의 영원한 사랑을 경험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50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50 형제들이여, 내가 분명히 말합니다. 살과 피로 이루어진 몸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없고, 썩어질 몸으로는 썩지 않을 것을 상속받을 수 없습니다.
성도는 썩어질 것들에 종속되어 삶을 살다가 구원을 경험하고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세상에서 우리가 먹고 입고 머무르는 것의 유업이 아니라 종말론적 의미로 사용된 구절입니다. 바울은 그의 화려한 경력들인 명예, 학벌, 사회적 지위, 종교적 열심과 자기의 의로움들을 배설물 처럼 여겼습니다. 그것들은 보기에는 분명 화려해보이고 가치 있어 보이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상속 받을수 없는 것이라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능력을 경험한 바울은 이처럼 몸의 부활을 의심하는 이들에게 강직하고도 분명한 믿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우리의 시간속에 찾아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의 시간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수평적으로 흘러가는 시간(크로노스)과 수직적 시간(카이로스)의 교차점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있음을 인지하는 것입니다. 2천년 전에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심을 깨닫는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은혜에 빚진 마음을 지니게 됩니다. 이 겸손의 마음은 성도들의 삶에 피어나는 아름다운 꽃입니다. 예수께서 죽기까지 자기를 낮추시고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이 길을 증명하셨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죄를 스스로 죽일 수 없음을 깨닫고 애통함을 느끼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의 믿음이 십자가의 부활 신앙에 깊이 뿌리 내려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우리를 도우시며 확신을 주십니다.
바울은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에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에 있느냐? 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구원을 독침인 죄와 죄의 권세인 율법에서 해방되어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 말씀합니다. 좌절과 허무함에 갇힐때마다 이 말씀이 귓가에 들리도록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좌절을 두려워 하고 고통이 보이던 시선의 끝에서 주님의 부활이 주시는 희망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극복하지 못하는 문제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죽음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살아가며 고민하고 염려하는 문제를 극복하는 길이 되어 주십니다. 우리가 주의할 것은 성령으로 시작해서 육체로 마치지 않도록 하는 일입니다. 바울은 예수의 부활을 믿었던 성도들이 다시 할례와 율법을 받는다면 육체의 것을 따르는 삶이라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3장 3절 4절입니다. '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4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믿음 자체에 능력이 있기에 우리는 그리스도께 마음을 지속적으로 두어야 합니다.
둘째, 마지막 나팔은 주의 재림의 때를 알리는 신호입니다.
51 보십시오, 내가 여러분에게 한 가지 비밀을 말씀드릴 테니 잘 들으십시오. 그것은, 우리가 죽지 않고, 다 변화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52 마지막 날, 재림의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질 때, 눈 깜박 할 사이에 갑자기 그렇게 될 것입니다.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면, 죽은 사람들은 썩지 않을 몸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또한 모두 변화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재림의 때를 기다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말은 천국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발을 굳게 딛고 지금 이곳에서부터 책임을 지닌 성도로 살아가는 일입니다. 교회사를 보면 주님의 재림의 때를 놓고 천년왕국에 대해서 여러 입장이 있는데, 요한 계시록 20장 2절 3절의 말씀의 근거한 해석입니다.
"2그 천사는 그 붉은 용, 곧 마귀요 사탄인 그 옛 뱀을 붙잡아 쇠사슬로 결박한 후에, 3 그를 무저갱에 던져넣고는, 그 뚜껑 위에 봉인을 하여 천 년 동안 단단히 가두어 두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천 년이 다 차기까지, 그 붉은 용이 다시는 세상 모든 나라들을 미혹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정해진 천 년의 기간이 다 차면, 그 붉은 용은 반드시 잠시 동안 풀려나게 될 것입니다."
첫째로, 무천년으로 보는 해석입니다. 천년왕국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문자적 천년이 아닌 상징적인 숫자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2천년 전에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인해 이미 교회시대가 시작이 되었기에 미래의 천년왕국은 없다는 주장입니다. 교회시대가 정확히 얼마나 지속될 지 모르지만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신자와 불신자가 모두 부활하게 될것이라는 입장입니다. 이때에 몸이 부활하여 영혼과 결합하여 천국의 즐거움에 참예하게 되고, 불신자들은 최후의 심판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무천년설은 세상에는 여전히 선과 악이 있지만 믿는 자들의 천년왕국이 현재 마음 안에 일어나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천년이라는 표현은 상징적인 표현일 뿐이기에 무천년설를 주장하는 학자들은 모든 민족들 가운데 세워진 지상의 교회들은 사단이 구약시대에 가지고 있던 미혹케 하는 어둠의 권세가 이미 깨어지고 세워졌다고 여깁니다.
둘째로, 후천년으로 보는 해석은 post라는 '~후에'라는 접두사를 앞에 붙여서 그리스도가 천년왕국 이후에 재림한다는 해석입니다. 이 입장은 복음의 확장과 교회의 성장이 앞으로 점점 증가될 것이며, 갈수록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고, 기독교는 사회에 점점 큰 영향을 주어 하나님의 기준에 합한 사회가 되어가면서 점차적으로 평화의 천년왕국 시대가 이땅에 도래할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하나님 나라의 점진적 성장에 대해 말씀하는 예수님의 겨자씨 비유에 주목을 합니다. 그런데 이 해석이 지난 2천년 동안 그리스도인들이 증가한 사례들이 있기는 했지만 세계전쟁을 2차례 겪고 난 이후에 세상이 좋아지는 것이 어렵고 여전히 사회속에는 부정과 부패, 불신과 분열, 물질주의로 인한 수많은 돈으로 인한 범죄들, 성적 타락, 여전히 일어나는 전쟁 등은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악을 극복함에 있어서 후천년설 해석이 주목 받지 못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세번째, 전천년으로 보는 해석은 pre라는 '~전에' 라는 의미로 그리스도께서 천년왕국 전에 재림하실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초대교회 이후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입장입니다. 이 해석은 교회시대의 마지막 때의 대환난과 고난의 때까지 계속될 것이고, 재림의 때에 새로워진 새하늘과 새땅을 볼 것이라고 믿는 견해입니다. 지나온 역사속에서 교회가 핍박을 받고 이땅에서 성도들이 고난을 받고, 세상에 악이 성행할 때에 전천년설이 성행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특히 19세기 20세기에 영국과 미국에서 크게 성행했습니다. 전천년설은 세대주의적 전천년설로 나뉘는데 대환난 이전에 신자들을 데려가기 위해 도적같이 주님이 한번 더 재림하시고 신자들을 데려가기 위해 다시 재림하신다는 해석입니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던 해석입니다.
그런데 천년왕국설은 기독교 교리의 일부분입니다. 그리스도가 언제 임하는가? 어떻게 임하는가? 종말에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고난을 해석하기 전에 종말론 교리가 주는 교훈은 죽음이 끝이 아니고 영원한 나라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이 교리는 이 땅에서 세상의 부귀영화를 누리려는 마음의 본성을 이길수 있는 힘이 되며, 성도로 살아가는 것은 복된 일임을 알게 해줍니다. 무엇보다 종말론의 교리는 무엇이 옳고 틀리다는 것을 말하기 전에 다른 교리들에 비해 복잡하고 다 이해하는 것에 한계가 있음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오늘날은 초대교회의 시대처럼 성도들이 핍박받는 일도 없고, 믿음생활을 한다고 순교의 위협을 받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과 동화되어 살아가는 시대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종말론의 교리가 특별하게 다가오거나 신앙생활에 있어서 긴급한 일도 아닌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나팔은 주의 재림의 때를 알리는 신호이며 성도들로 하여금 최후 승리한다는 믿음을 갖도록 해줍니다. 우리는 성경 안에서 시간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예언적인 말씀은 다른 교리들에 비해 폭넓게 받아 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천년왕국의 해석이 공통적으로 교훈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신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살아가게 되면 절망의 순간에도 일어날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성도에게는 승리가 이미 약속되었고, 주님을 따라가며 승리를 보게 될 것입니다.
셋째, 마지막은 부활의 몸을 입는 것입니다.
53 썩어질 몸은 영원히 썩지 않을 몸을 입어야 하고, 죽어질 몸은 영원히 죽지 않을 몸을 입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54 썩어질 이 몸이 썩지 않을 몸을 입고, 죽어질 이 몸이 죽지 않을 몸을 입을 그때에, 비로소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보라, 죽음을 삼키고 승리를 얻었도다.” 55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에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에 있느냐?” 56 죽음의 독침은 죄요, 죄의 권세는 율법입니다. 57 그러나 여러분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그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십니다.
본문에서 '입는다'는 말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입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는 것이며 거룩한 성품을 지니는 것입니다. 옛옷을 벗고 새옷을 입는 것입니다. 새옷을 매일 입는 사람은 삶이 달라집니다. 새옷에는 얼룩이 더 진해 보이는 것처럼 날마다 거룩한 자녀임을 확인하며 부활의 옷을 매일 입는 것입니다. 만약 천국가는 목적을 이뤘으니 이제는 내 욕망만 채우기 위해서 믿음으로 기도한다면 다른 종교나 주술적 신앙과 다른게 무엇이겠습니까? 이제 우리는 율법적 태도로 정죄하고 평가하던 삶에서 삶에 대한 회개를 통해 변화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은혜를 나눌때 하나님이 일하기 시작합니다. 부활의 능력은 우리의 능력과 관계없이 복음을 진실로 믿고 부활의 옷을 입는 모습 가운데 나타납니다. 구원할 능력이 우리에게 없음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부활을 통해서 삶의 참된 의미를 몸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극단적 종말론주의자들과 현실주의자들 사이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을 믿고 영성이 깊어지는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만일 인간의 삶이 짧은 한순간에 불과하다면, 모든 만물이 없어지는 것이 인류의 종말이라면, 우리의 삶에 있는 진정한 의미는 점차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는 창조한 하나님의 시간 안에서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속에서 인간이 할 수 없었던 세상의 희망이 되어 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시고 보내주신 성령의 임재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완전한 옷을 입을때까지 말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성도는 구원 이후의 걷는 길도 중요합니다.
마지막 날, 재림의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질 때, 눈 깜박 할 사이에 성도는 완전한 새 옷을 입게 될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닫혀져 있던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그리스도 안에서 누구나 알수 있도록 열어 놓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창세기로 시작하여 요한계시록으로 마치는 성경을 통해서 알파와 오메가 되시는 하나님의 시간을 알고 지금 이곳에 계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 하나님도 이웃도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면 이제는 나의 사랑하는 형제들이 보이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십자가의 삶을 살아가시길 소망합니다. 또한 청년의 때에 너희 창조주를 기억하는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사는 훈련, 내 삶에 수없이 만나게 될 불안과 염려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깊어지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곤고한 날에 창조주를 잊고 살면 우리는 세상의 근심과 괴로움, 슬픔과 분노 등 부정적 감정의 희생물이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부활의 소망이 있습니다. 축이 있는 배는 흔들릴 수는 있어도 축에서 멀리 벗어나지는 않습니다. 믿음으로 알고 듣고 고백하여지는 것은 너무도 신실한데 삶의 실제에는 하나님이 없는 일상을 살아가는것이 아닌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며 부활 신앙의 승리로 살아가야 합니다.
사랑이 빠진 열심, 은혜 없는 섬김, 희생하지 않으려 하는 우리에게 주어진 현재의 시간은 굳게 서서 흔들리지 않고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가 되어 살아가야 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삶의 제사로 우리의 삶을 온전히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을 마치며 현재의 삶을 끌고 가는 힘이 우리 안에 없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그 힘이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안에 거하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성경은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의 마지막 구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58 나의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그러므로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십시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주 안에서 행하시는 여러분의 모든 수고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부활의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의 삶은 지금 이 자리에서 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사람 앞에 서기 위함이 아닌 오직 주님 앞에 부활을 믿는 성도들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을 믿으면 하루 하루의 삶의 목적과 방향은 자연스럽게 변하게 되어있습니다. 시대는 변해도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을 붙들어 부활의 소망을 삶으로 지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4/14/2024 | (부활절 세번째 주일)
건강한 교회 시리즈 9 부활의 공동체 3 Community of Resurrection 3
고린도 전서 15:35-49
부활절 세번째 주일입니다. 보스턴에도 봄이 찾아오는 것 같습니다. 땅속 깊이 심겨져 있던 씨가 겨울을 이겨내고 꽃을 피우듯 교우들의 삶에 하나님의 생기가 충만해 지기를 소망합니다.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견뎌야 할 때가 옵니다. 견디는 것은 살아있는 생명이 지닌 강인함입니다. 땅속 깊이 심겨진 씨가 겨울을 견디고 다시 소생하듯이 인생의 모호한 시간을 지나는 이들과 꿈을 위해 현재의 시간을 준비하는 이들에게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단비가 우리 안에 있는 불안과 두려움을 씻어내기를 소망합니다. 몇천년전 고대 이집트 시대에 있었던 씨가 발견되어 싹을 띄우는데 성공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수천년 동안 생명을 품고 있던 씨앗의 강인함이 느껴집니다. 수천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딱딱한 껍질 안에 있던 생명이 충분한 환경조건을 만나니까 발아(germination)가 되어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부활의 몸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사실 부활을 살아내는 것은 현재의 삶과는 무관한 것이라 여겨지기도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안에 부활의 몸에 대해서 회의적인 사람들이 어떻게 가능하냐고, 만일 가능하다면 어떤 몸으로 부활하냐고 질문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35 ○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죽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어떤 몸을 갖고 다시 온다는 거야?”
오늘 본문은 부활의 몸에 대해서 묻는 회의론자들을 향한 바울의 설명이며, 부활의 몸에 대해 성경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말씀입니다.
첫째, 성경은 인간의 몸을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사람의 몸은 아무리 잘 관리해도 시간이 지나면 약해지고 노화가 됩니다. 인간의 몸이라는 것은 관리하고 노력해서 노화를 늦출 수 있을지 몰라도 근원적으로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간 안에서 우리 몸에 일어나는 변화를 하나님의 시간 안에서 잘 받아들인다면 약해진 몸도 영광스런 일부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야할 목적지를 어디에 두고 있느냐가 중요할 것입니다. 우리는 나이가 들어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가고 있는 단단한 걸음이 되어야 합니다.
중세시대 신학자들은 부활에 대해 육체적인 측면과 영적인 측면 간의 균형을 찾는 데 관심을 가졌습니다. 한 부류의 신학자들은 사도신경에 기록된 대로 부활이 신체의 실제 부활을 의미한다고 믿었고, 다른 신학자들은 영적인 부활을 강조하여, 부활은 영혼의 삶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며 몸의 부활보다는 영혼의 부활에 더 많은 중점을 두었습니다. 유대 랍비들 같은 경우에는 인간이 죽음에 처할 때에 영은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육은 땅의 먼지로 돌아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헬라 철학의 이분법적 사고 개념은 영과 육을 대립적인 존재로 보았습니다.
바울은 부활의 몸을 씨앗이 땅 속에 심겨지는 하나의 그림과 죽은 몸이 무덤 속에 장사되는 하나의 그림을 오버랩시키며 설명합니다. 36절로 38절입니다. 36 어리석은 사람이여, 이게 얼마나 어리석은 질문인 줄 아십니까? 그대가 땅에 씨앗을 뿌릴 때, 그 씨앗이 죽지 않으면 싹이 돋아나지 않습니다. 37 그대가 씨앗을 뿌릴 때는 장차 이루어질 몸을 심는 것이 아니라, 단지 씨앗을 심는 것뿐입니다. 밀이라든가 다른 여러 종류의 곡식 씨앗이 있지 않습니까? 38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대로 그 씨앗에 합당한 몸을 주십니다. 그래서 각각 씨앗의 종류에 따라 각기 다른 고유한 몸을 받게 됩니다.
땅속에 심긴 씨가 새로운 형태로 변화되어 껍질을 찢고 새로운 생명을 밀어내듯이 썩을 몸이 썩지 아니할 새로운 몸을 입는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 비유는 영혼은 선하고 육은 무조건 악하다는 헬라 철학자들의 사상과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구분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인간의 몸을 하나님의 창조물이며 새 창조의 대상으로 인식하였습니다. 땅속에 심겨진 각각의 씨앗이 하나님의 주권적 디자인으로 인해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되어 생명이 나타나는 것처럼 부활의 몸도 각기 다른 고유한 몸을 받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39 육체라고 해서 모든 육체가 다 같은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게는 사람의 육체가 있고, 동물들도 저마다 다른 육체가 있으며, 새들과 물고기들도 저마다 다른 육체를 지니고 있습니다.
씨가 종류대로 알맞는 형체로 디자인이 되어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설계하신 몸의 신비입니다. 자연속에 동물과 새들, 물고기들, 작은 개미 한마리도 하나님의 창조의 몸을 지녔습니다. 우리는 자연속에서 이 하나님의 신비를 느끼고 하나님의 창조적 숨결을 깨닫게 될때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더 깊은 관계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육체는 단백질로 구성된 몸을 의미합니다. 이 몸은 사람이든 동물이든 새나 물고기든 피조물들의 몸은 죽고 썩을 몸이며, 유한한 몸이지만 각기 다른 몸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몸에 대한 부정적 의미와 긍정적 의미의 구절들이 모두 있습니다. "죄 많은 육신에 따라 사는 사람은 오직 육신의 일만을 생각하지만, 성령에 따라 사는 사람은 성령의 일을 생각합니다."(롬 8:5) 라는 구절은 몸을 부정한 의미로 사용합니다. 그런데 몸 자체는 중립적인 것입니다. 몸 자체가 악하고 부정하다면 우리가 살면서 몸으로 섬기고 사랑하고 예배하는 모든 행위를 악하다고 규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의 몸은 하나님의 말씀을 담아내는 그릇입니다. 우리의 섬김과 헌신이 그릇에 잘 담겨질 때에 본질이 드러나고, 주의 사랑을 나타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인간을 구성하는 몸과 영혼을 이분법적으로 나누고 있지 않습니다. 몸은 전인격인 통합을 지칭하기에 사실 몸과 영을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관념적으로 구분을 해서 설명하고 이해할 뿐입니다.
성경이 전하는 몸에 대한 또 다른 구절을 보겠습니다. 바울은 몸을 하나님의 성전이라 설명합니다. 고린도전서 6장 19절입니다. " 여러분의 몸은 성령의 집입니다. 즉, 여러분 안에는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성령이 상주하고 계시는 바 곧 성령의 집인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몸의 약함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자신의 약한 몸으로 인해서 복음을 전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갈라디아서 4장 13절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내가 처음으로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게 된 것은 내 육체의 병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형제들이여, 내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모쪼록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며 받으실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로마서 12:1) 오늘 본문인 고전 15장 43절입니다. "비록 비천한 몸으로 묻히지만, 장차 영광 가운데 다시 살아납니다. 연약한 몸으로 묻히지만, 강건한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고전 15:43)
그러므로 성도는 주안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닮아가는 연습을 하며 하나님의 형상을 몸을 통하여 드러내야 합니다. 죄의 욕망을 따라 살아가면 우리의 몸은 불의의 도구가 되고, 성령을 거슬러 살아가게 됩니다. 인간의 기원을 보면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넣어 인간은 살아있는 존재 즉 몸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여자를 지으실 때는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 갈비뼈 하나를 뽑으시고 그 자리에 몸을 채워주셨습니다. (창 2:21절) 오늘 본문도 이 몸의 고유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도 몸을 지니고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제 40절을 보시겠습니다. 성경은 하늘에 속한 몸, 땅에 속한 몸을 말하고 있는데 그 영광이 각각 다르다고 합니다. 40 또 하늘에 속한 몸도 있고, 땅에 속한 몸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늘에 속한 몸의 영광이 다르고, 땅에 속한 몸의 영광이 서로 다릅니다. 41 태양에는 태양의 영광이 있고, 달과 별에도 각기 다른 영광이 있습니다. 그리고 별들 하나 하나에도 저마다 다른 영광이 있습니다.
하늘에 속한 몸은 하나님이 디자인 하신 해와 달과 별을 가르킵니다. 하늘에 속한 창조물 가운데 보여지는 하나님의 영광이 있음을 뜻합니다. 땅에 속한 몸은 땅에 존재하는 피조물들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주권적 디자인에 의해서 창조되었고 각각의 형체들 안에 하나님의 신비를 담아서 디지인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육신은 현재는 불완전한 몸이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과 성령의 충만한 삶을 위하여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래서 소망의 삶은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과 뜻대로 살아가며 하나님이 이루어가시는 삶을 만나는 특별한 여정입니다.
둘째, 부활의 소망은 우리에게 변화된 삶을 요구합니다.
42 ○ 죽은 사람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비록 썩어질 몸이 묻히지만, 장차 썩지 않는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43 비록 비천한 몸으로 묻히지만, 장차 영광 가운데 다시 살아납니다. 연약한 몸으로 묻히지만, 강건한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44 자연적인 육체의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자연의 몸이 있으면, 영적인 몸도 있습니다.
부활의 몸은 지금의 육체가 지니는 영광과 다른 영광을 지니게 될 것임을 말해 줍니다. 썩어질 몸이 썩지 않는 몸으로, 비천한 몸과 연약한 몸이 영적인 강건한 몸으로 다시 살게 됩니다. 이 소망이 우리를 풍성한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의 약한 몸을 고쳐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했지만 오히려 연약한 몸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가 강하고 모든 것이 준비되었을 때 하나님을 만나기도 하지만 우리가 약할 때 우리가 무너져 있는 그 자리에서도 하나님은 우리를 간절히 만나 주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세상에서 만나는 상실의 감정들과 거절의 순간들, 이루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는 불안과 두려움은 부활의 소망을 만날때 영원한 상실이 아닌 우리 안에 하나님이 이루어 가실 소망의 자리를 채우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 쉽게 믿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을 때 그들은 영을 본 줄 알고 두려워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찾아 가셔서 당신의 몸을 보여주시며 만져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먹을 것이 있느냐고 질문하시고 생선 한토막을 잡수셨습니다. (누가복음 24:36~39)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자신이 단순한 영이 아님을 제자들에게 증명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의 죽음으로 인해 두려움에 사로 잡혀 다락방 문을 겹겹이 걸어 잠그고 있었는데 예수가 들어 가셔서 위로와 평안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의심하는 제자에게는 자신의 십자가의 흔적을 만져 보라고 하시며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의 몸은 이전의 육체의 속성을 지니고 계셨지만 지금의 몸과는 다른 몸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20:19~21) 사실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의 몸에 대해서 완전히 이해하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부활하신 주님께서 몸에 십자가의 흔적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는 말씀이 우리에게 위로를 줍니다.
우리가 이땅에서 믿음으로 당하는 고통과 수고를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시고, 그 삶이 헛된 것이 아니라 그날에는 옳은 삶이라는 것을 입증해 주고 계십니다. 분명 풀과 꽃이 다 마르고 육체의 몸도 썩어질 것이나 우리가 살아가며 실천한 모든 삶이 기억되고 남는다면, 믿음의 헌신들,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일들이 결코 헛된 일이 아닙니다. 모든 일들이 그대로 남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부활의 때에는 더 이상 사망도 없고 애통함이 없는 성도가 누리게 될 것이라 기록합니다. 하늘의 영광이 우리의 몸에 새겨질 것입니다. 계시록 21장 4절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몸소 닦아 주실 것이니, 이제 더 이상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우는 것도 아픈 것도 절대로 없을 것이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은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와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육신의 몸으로 믿음의 일들을 많이 심어야 될 것입니다. 믿음의 법칙은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것입니다. 적당히 심는 이들은 적당히 거두겠지만 육신의 한계를 넘어 믿음으로 살며 씨를 뿌리는 성도들은 기쁨으로 열매를 거두는 날이 있게 됩니다. 이제 45절로 4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45 성경에 기록된 대로, “첫 사람 아담은 살아 있는 존재가 되었다.” 라고 했지만, 마지막 아담인 그리스도는 생명을 주시는 영이 되셨습니다. 46 그러나 영적인 것이 먼저 온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것이 먼저 왔고, 그 후에 영적인 것이 옵니다.
하나님의 창조한 모든 것들은 본래의 것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창조 질서에 따라 파종기와 추수기가 있듯이 부활의 추수때가 있음을 나타냅니다. 바울은 그런 의미에서 먼저는 자연적인 것이 먼저 왔고, 육 있는 자로 살아가다가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입게 될 하나님의 형상은 영적인 몸 ,부활의 몸을 입게 될 것임을 암시합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간과하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타락하기 전의 상태를 알지 못하고 태어나서 병들고,죄짓고,죽고,썩는 것을 운명으로 안고 태어난 것으로만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 운명의 전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본래 계획데로 살아가지 못하게 죄의 도구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영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을 만남으로 몸이 반응하도록 인도하십니다.
셋째, 육의 몸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의 몸을 입게 됩니다.
47 첫 사람 아담은 땅에서 났으므로 흙에 속한 사람이지만, 둘째사람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오셨습니다. 48 따라서 흙에 속한 사람들은 흙으로 지어진 첫 사람 아담과 같고, 하늘에 속한 사람들은 하늘에서 오신 둘째 사람 그리스도와 같습니다. 49 그리하여 지금 우리가 흙에 속한 첫 사람 아담의 형상을 입은 것과 같이, 또한 장차 우리는 하늘에 속한 둘째 사람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을 것입니다.(쉬운말 성경)
49절의 형상은 인간 창조의 모델이라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이미지가 아니라 '아담의 형상'을 가르킵니다. 우리는 아들이 아버지를 닮는 질서 속에서 인간의 몸의 형태를 지니고 살아갑니다. 이 형상은 바울이 이제껏 말한 몸이라는 형태입니다. 아담의 형상과 그리스도의 형상이 대조되는 것은 지금 이 순간 우리의 몸과 마음을 청결하게 함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할 이유가 됩니다.
내 마음과 눈의 시선이 주님께 있지 않은데 어떻게 나의 믿음 생활이 온전히 서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 안에 가득해 지면 두려움이 줄고, 관계는 꽃을 피우고, 사랑은 더 커져 갈 것입니다. 애쓰고 노력해도 안되는 용서와 사랑이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아갈 때에 우리의 마음이 정결해지고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의 청결한 자는 거짓이 없이 진실함으로 형제를 사랑하며 세상과 구별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에게 하나님을 보게 되는 복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고린도 교회의 일부가 죽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어떤 몸을 갖고 다시 온다는 거야 라는 질문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신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리고 이 부활의 소망을 믿으며 살아갑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는 주님의 몸과 같이 부활의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억지로 믿으려고도 하지 마시고 억지로 부정하려고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회의론자와 같은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여전히 말씀을 믿지 못하는 이들과 삶의 위기속에서 힘겨워 하는 이들에게 주님의 마음으로 어떻게 다가아야 할것인가를 치열하게 고민하며 그 길을 만들어 가는데 마음과 시간을 쏟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영광이라고 하면 세상의 권력, 명예, 손에 쥐게 되어 내가 높아지는 것들만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땅에서 존경과 영광만을 누리고 사셨습니까? 가장 화려한 곳으로 찾아 오셨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의 자리로 찾아가셨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며 섬김의 본이 되어 주셨습니다. 좋은 집에서 복음 전하지 않으셨고 예수님께서 걸어 가시는 모든 땅이 복음의 땅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부활의 의미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고통 없는 강인함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주님의 죽으심 없이 부활도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루신 영광의 일들을 믿는다면 부활의 일들을 다 알수 없어도 하나님을 보게 되고 인식하게 됩니다. 몸의 부활은 우리의 삶의 방식을 변화시키며 삶의 태도를 분명하게 해주는 능력입니다. 성도는 현실에만 안주해서 적당히 믿고 적당히 거두는 삶이 아닙니다.
성경속에 인물들만 보아도 모든 인간은 흙으로 돌아가는 인생에서 예수님의 형체를 입게 되어짐으로 흙의 비참함을 벗게 됩니다. 부활의 믿음은 삶의 현실속에서 몸과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몸이 홀연히 변화하여 거룩한 부활의 몸을 입게 될 것이라 말씀합니다. (고전 15:51) 이제 몸의 부활을 믿는 성도들에게는 소멸되어가는 몸도 아름다운 과정일뿐입니다. 성도는 사망 권세를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약속받았습니다. 모든 교우들이 하나님을 향한 소망이 현재의 삶의 기쁨이 되어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살아계신 주님이 삶속에서 강력하게 인식 되어지기를 축원합니다.
4/7/2024 | 부활절 두번째 주일
건강한 교회 시리즈 8 '부활의 공동체 2' Community of Resurrection 2
고린도 전서 15:20-28
"아버지와 단둘이 살고 있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풋볼을 무척 좋아해서 중학교, 고등학교 모두 풋볼 팀에 들어갔는데 늘 후보 선수였기 때문에 한번도 경기에 참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소년의 팀이 경기가 있는 날이면 소년의 아버지는 어김없이 경기장의 관중석에서 소리를 지르며 응원을 했습니다. 아들이 대학에서도 풋볼팀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을 아버지는 앞으로 4년 동안의 대학 풋볼 경기 입장권을 한꺼번에 샀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여전히 단 한번도 주전으로 나가지 못했고, 아버지는 관중석에 앉아 있었습니다. 졸업을 얼마 앞둔 어느날 그 아들은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가 속해 있던 팀이 경기에서 지고 있었는데, 늘 후보 자리를 묵묵히 지키던 그가 감독에게 제발 한번만 출전 시켜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래서 경기에 출전하게 되었는데, 기적처럼 팀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경기가 끝난 후 그가 울먹이며 감독에게 말했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시각 장애인이셨습니다. 아버지는 이제껏 모든 경기를 보러 오셨지만 내가 뛰지 못한 것을 모르셨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처음으로 제가 경기하는 모습을 하늘에서 보실 수 있었을 겁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누리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런데 인간은 죽음 앞에 무력한 존재이지요. 죽음은 참으로 강력한 것입니다. 바울은 부활의 능력을 말하며 죽음을 빼놓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힘이 죽음을 삼켜 버릴 정도로 강력하기에 부활의 빛은 죽음까지도 소멸시킵니다.
바울은 12절로 19절에서 가정문을 사용하여 부정을 다시 강하게 부정하는 방법으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에 대해서 진리를 입증하고 있습니다. 한번 보시겠습니다. "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전했는데도, 어찌하여 여러분 가운데 더러는 죽은 사람의 부활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13 죽은 사람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다시 살리심을 받지 못한 채 아직도 죽은 상태로 계셔야 할 것입니다. 14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리심을 받지 못한 채 아직도 죽은 자들 가운데 그대로 계신다면, 우리가 전한 것은 아무 쓸모없는 헛된 것이며, 여러분의 믿음 또한 헛됩니다. 15 더 나아가, 우리 모두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못하셨는데도, 우리가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해왔기 때문입니다. 16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다시 살리심을 받지 못하고 아직 죽은 상태로 계셔야 합니다.
17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리심을 받지 못하셨다면, 여러분의 믿음도 몽땅 헛된 것이고, 여러분은 여전히 죄 가운데에 있게 됩니다. 18 그렇게 되면, 이미 세상을 떠난 그리스도인들도 다 멸망해 버렸을 것입니다. 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바라는 우리의 소망이 단지 이 세상의 삶만을 위한 것이라면, 우리는 다른 모든 세상 사람들보다 가장 불쌍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자신들이 걷는 길이 진리라 여기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성경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길과 진리임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 근거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추상적인 차원에서 믿는다면 우리의 믿음은 절대로 실제적일 수가 없습니다. 바울은 '그러나'라는 접속사를 사용하여 12절로 19절의 말씀을 부정하며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시작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분명히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고, 그리하여 모든 죽은 사람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 선언합니다.
첫째, 모든 죽은 사람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요?
‘첫 열매’라고 번역한 헬라어 ‘아파르케’(ἀπαρχὴ)는 시간적으로 '창조'라는 뜻의 아르케(ἀρχή)라는 단어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즉 '첫 열매'라는 것은 '새창조 사건'입니다. 죄와 사망으로부터 완전히 새롭게 재창조가 되었음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첫번째 열매는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서 일어날 대표적 의미를 갖고,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까지도 죽음 이후 몸의 부활에 대한 약속입니다. 예를 들어 농부가 봄에 씨를 심어서 가을에 첫열매를 얻게 되었다면 이후에 우리는 그 나무에서 열매가 지속적으로 열릴 것을 알게 됩니다.
21 죽음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들어왔듯이, 이제 죽은 자의 부활도 다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들어옵니다. 22 곧 한 사람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이제 다른 한 사람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경험하는 고통과 절망이 하나님께로 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바울은 부활의 능력을 말하며 고통과 고난을 빼놓지 않습니다. 부활의 능력은 절망 속에서도 하나님의 창조의 숨결을 느끼며 주어진 때를 살아가게 합니다. 세상이 인간의 죄로 인해 깨어져 있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새로운 피조물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첫열매가 되신 주님의 행렬에 동참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현실속에도 잘됨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의 고통의 시간, 원하지 않는 때를 맞이할 때도 있는데 하나님은 인생의 어두운 날도 회피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받아 들이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나사로가 많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께서 베다니에 도착하셨을때 나사로는 이미 죽어서 장례를 치른 뒤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르다는 부활 때에 오라비가 다시 살아날 것을 안다고 대답합니다. 언뜻 보면 그녀가 부활하게 될 것을 믿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라고 다시 말씀하십니다. 그녀는 주님은 세상에 오실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주님께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요11:25~26) 주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려 주셨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나사로는 다시 죽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사건은 앞으로 부활의 몸으로 변화될 믿음을 주시기 위한 사건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주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죽음의 권세까지 굴복하신 주님께서 마음의 주인으로 자리하고 계신가요? 기독교는 지적이거나 윤리적인 차원의 종교가 아닙니다. 부활하신 주님만이 인생의 길과 진리가 되고 생명이 되심을 정말로 믿는 것입니다. 인생의 분명한 답이 바로 부활의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어떤 종교도 부활을 말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내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가 인생의 답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보다 더 큰 은혜는 세상에 없습니다. 한치 앞을 알수 없는 인생길 주님께서는 우리의 빛이 되어 주십니다.
둘째, '이것을 너희가 믿느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많이 하는 고백이 믿는다라는 것입니다. 매주일 사도신경을 고백하며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부활의 신비는 누군가가 전해 주니까 믿어 주는 것도 아니고 과학적으로 입증될 수 있어서 믿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묻고 계시는 주님의 질문에 정직하게 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시간 '너희가 이것을 믿느냐? 라고 다시 물으십니다.
이 사실을 잊고 산다면 우리는 살아가는 일에만 급급하게 될 것이고 나이가 들수록 인생의 허무함만 더해 갈 것입니다. 지나 온 인생을 보며 후회만 남는다면 한없이 절망하게 되고 속절없이 감정의 파도에 끌려 다니게 됩니다.
주님은 부활의 소망을 굳게 믿고 살아가라고 죽은 자들의 첫열매가 되셨습니다. 이것을 믿으면 마음에 참된 안식이 찾아 옵니다. 잠자고 있던 영혼이 깨어나고, 상처로 인해 단단해진 마음에 주님의 위로하심이 있습니다. 이 신비는 우리가 우리 힘으로 고통의 현실 속에서 부활의 능력을 끌어 당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소망하고 하나님께 올라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우리를 현실과 영적인 것 사이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새로운 삶으로 살아가도록 이끄십니다. 신앙생활의 문제는 진정으로 믿지 않는 데서 비롯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흙에 속한 자가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죽은 자의 부활이 있습니다. 우리는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이 가리키는 죽음의 현실을 정확하게 바라 보아야 합니다.
죽음은 우리가 접해 보지 않고 경험해 보지 않았다고 해서 다가 오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 가운데 본래적인 것이 아니었는데,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인간에게 찾아 왔습니다. 인류 역사속에서 이 죽음을 해결할 방법이 없기에 살아가면서 사망의 권세는 우리를 가장 두렵게 합니다. 죽음을 두려워 하는 이유는 대부분 애착하는 것으로 부터 분리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바울은 죽음 이후에 일어날 사건을 구체적으로 제시합니다23절부터 26절을 읽겠습니다.
23 하지만 죽은 자의 부활은 각각 순서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가장 먼저는, 모든 죽은 자들의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요, 그 다음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그분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24 그 후에 세상 종말이 임할 것인데, 그때에 그리스도께서는 지상의 모든 권력과 권세와 권능을 다 멸하신 후, 그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치실 것입니다. 25 그러면 하나님께서 모든 원수를 그리스도의 발아래 완전히 굴복시킬 때까지, 그리스도께서는 왕으로서 다스리셔야 합니다. 26 그리고 맨 마지막으로 굴복시킬 원수는 죽음입니다.
각각 순서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질서 있게 이 일이 진행될 것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께서 재림하실때에는 초림때 비천한 상황에서 태어나신 것과 달리 왕중의 왕으로 영광과 권위를 지니고 임하실 것입니다. 이때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이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후에는 이 세상의 완전한 종말이 온다는 의미입니다.(마 13:39, 계 14:15) 바울에 따르면 두가지 일이 일어나는데, 하나는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을 다 심판하시고 악의 세력이 파멸될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하나님의 나라를 드리는 것입니다.
성도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지만 그날에는 완전하신 하나님의 품으로 이동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 그래서 성도는 현실을 살아가지만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새로운 창조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 부활의 신비가 역사적 사실임을 전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역사적 부활은 믿지만 나의 부활을 믿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부활 이후의 말씀도 그대로 다 받아 들여야 합니다. 예수의 생애에서 실제로 부활이 일어났고, 성경은 우리도 그렇게 될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무리 착하게 산다고 해서 죽음을 극복할 수 없고, 오랜 시간 수행의 삶을 산다고 죽음을 이길 수도 없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믿으려 하고 이해하려고 하면 믿어지지 않고 이해되지도 않습니다. 거꾸로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이 길을 신뢰하며 배워 나가는 것입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그 길을 따르게 되면 하나님께서 성경의 말씀을 계시적으로 깨닫게 해 주십니다.
초대교부들은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에 있어서, 태양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는 것에 자주 비유했습니다. 우리의 눈으로 태양을 온전히 살필 수 없는 것처럼, 인간의 지성과 이성이 하나님의 신비를 다 감당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과 지성을 통해서 삶속에서 기독교 신앙의 숨겨진 깊이를 볼 수 있도록 열어 주시지만 온전히 다 알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닫혀진 우리의 영적 시각을 열어 주셔야 합니다. 굳게 닫힌 돌문이 열리고 주님께서 나오신 것처럼 말입니다. 말씀대로 살아나셨다는 것은 죽음의 의해 삼켜진 그리스도의 생명이 다시 역전되어 죽음을 삼킨 생명의 사건인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은 어떤 순종을 원하실까요?
27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발아래 굴복시켰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굴복시키신 모든 것에는 그 ‘모든 것’을 굴복시키신 하나님 자신은 포함되지 않은 것이 분명합니다.
28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그리스도께 굴복시킨 그때에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도 모든 것을 자기 발아래 굴복시키신 하나님께 굴복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정녕 ‘모든 것의 주님’이 되실 것입니다.
굴복이라는 단어가 반복적으로 나오는데 강압에 의한 복종이 아니라 자발적인 의미에서 순종입니다. 주님은 찬양 받으실 하나님께 자발적으로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새창조를 이루셨고,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하나님의 뜻으로 여기며 순종하셨습니다. 깨어진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뜻을 받아 들이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주안에서 버려진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고통 가운데 내버려 두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성도들은 고통중에도 십자가에서 보이신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선하신 하나님의 절대적 통치만 있게 될 그 나라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종말이라는 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주기도 합니다. 이제껏 살아온 삶으로 부터 단절시키는 것 같고, 사랑하는 이들에게서 잊혀지는 것 같고, 이제껏 쌓아 올리며 살았던 모든 것들이 무너지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서의 종말은 미래에 일어날 우리에게 펼쳐질 영광의 자리이며 아름다운 노래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인생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오늘 내게 주어지는 일들을 부정적으로 받아 들여서는 안됩니다. 비록 주어지는 환경속에서 고통과 고난이 있더라도 찬송의 노래를 부르며 부활의 몸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찬양은 사망을 이기고 부르는 노래이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몸은 날로 쇠잔해 지나 부활을 믿는 성도들의 몸은 날마다 새사람으로 살아납니다. 바울은 자신의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진다고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공동체 안에서 어떤이들은 새새명을 낳고 탄생의 기쁨을 누리기도 하고 동일한 시기에 누군가는 부모와의 헤어짐을 경험하며 아픔의 시간을 보내는 이들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품을 때도 있고, 내려 놓고 떠나 보내게 될 때도 있지만 모든 시간과 모든 날들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주님이 하신 일을 기뻐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의무적이거나 강압에 의한 복종이 아니라 자발적인 순종의 예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께 기도하는 것은 현실에서 넘치게 채워주실 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우리의 인생에 넘치도록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믿음은 정해진 기계적인 삶이 아니라 모든 환경속에서 우리를 설계하시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며 십자가에서 이루신 죽음을 우리도 삶으로 나타내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앞으로 우리에게 펼쳐질 인생이 이미 정해졌다는 숙명론자가 아니라 부활의 노래를 부르며 앞으로 하실 하나님께 매일 묻고, 삶속에서 펼쳐질 하나님의 은혜를 향한 갈망을 지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흔적을 지니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믿음생활 가운데 평탄한 길만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의 몸을 함께 지니게 될수록 주님의 사랑을 깊이 느끼며 부활의 신비를 경험해 갈 것입니다. 인생의 골짜기를 지날 때에는 하나님이 우리의 시작과 마지막을 운행하고 계시니 나를 향한 놀라운 계획으로 사려 깊게 인도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모든 성도들이 인생을 설계하신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책임있는 성도로 살아가시기를 부활하신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