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모음
10/8/2023 | 성령강림후 제 19주, 창립 45주년 기념주일
우리가 교회입니다 We are the church
사도행전 23:12-24
오늘은 우리교회 창립 45주년 기념 주일입니다. 시작의 걸음은 제각기 다르지만 지금까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앞으로도 우리교회와 우리의 가정과 모든 교우들의 삶의 걸음마다 넘쳐나기를 소망합니다. 창립기념 주일설교를 준비하며 본문말씀을 따로 선정할까 고민도 하였는데 사도행전에서 이어지는 말씀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인간이 태어나서 마흔 다섯살쯤 되면 살아 온 삶을 통해 누군가에게 들려 줄 이야기가 만들어 집니다. 감동으로 가슴 뭉클했던 이야기들, 수많은 의심과 망설임 속에서도 하나님께 매달렸던 이야기들, 때로는 갈등과 아픔의 시간들을 마주하면서도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며 걸어왔던 이야기들, 초신자의 마음으로 살아가다가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나 삶의 많은 것들이 변화되어지고 마음이 뜨거워져서 복음을 전했던 시간들, 주저 앉고 싶었던 신앙의 길에서 포기하지 않고 버텼던 이야기들, 광야의 자리에서도 십자가로 나아가도록 인도하셨던 그 눈물의 예배의 현장이 바로 이 자리에 쌓여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도행전의 교회의 탄생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피보다 진한 예수님의 이야기를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유대인들의 소동이후에 하루 하루 단위로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로 인해 정말 긴 하루를 보내야 했습니다. ‘이튿날 아침에’라는 것은 그 전날 산헤드린 의회에서 바리새파와 사두개파의 논쟁으로 인하여 바울을 제거하려는 계획이 무산이 되었고, 주께서 주시는 음성을 듣고 난 아침입니다. 주님은 “바울아 힘내라. 내가 너와 함께 하고 있다. 예루살렘에서 네가 증언한 것처럼 로마에서도 증언하게 될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밤이 지나고 아침이 왔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바울에게 펼쳐진 일들은 자신을 죽이려는 극단적 유대인들이 한명이 아니라 40명이 당을 지어 바울을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그를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겠다고 맹세합니다. 바울을 죽이기 위한 40명의 비밀 결사대가 조직이 된 것입니다. 모의에 참여한 40명의 사람들은 바울을 영내에서 끌어내어 좀 더 공격이 쉬운 상태로 몰아넣기 위한 방법을 모색했습니다.
살면서 마음을 어렵게 하는 한사람만 있어도 마음 깊이 근심하게 되고 절망하게 되는데 40명이 바울을 죽이기 위해 모의에 참여했으니 감히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당시에 유대인보다 하나님을 열심히 믿는 사람들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제어하지 못하는 열심은 결국 자신들만 선하고 의롭다는 위험한 함정에 빠지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 마음을 알지 못한 유대인들은 율법의 틀만 지키려는 잘못된 열심만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방법은 성육신의 영성으로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증거해야 합니다. 입술의 고백만이 아니라 실제적 삶을 통하여 전해야 합니다. 마음은 주님께로 늘 향해 있다고 하지만 눈 앞에 이익과 내 마음의 평안만 바라보며 살아간다면 우리는 세상과 다른 하나님의 나라를 구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겉으로는 드러나지는 않지만 살인적인 경쟁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교회가 답을 말해 주어야 합니다.
미국의 기독교 복음주의 운동가이자 수많은 책을 통해 기독교 문화에 크게 이바지한 프랜시스 쉐퍼 Francis A. Schaeffer:1912-1984)라는 분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는 참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들 프랭크 쉐퍼(Frank Schaeffer, 1952 ~ 현재)는 ‘크레이즈 포 갓’이라는 책에서 명문대학 출신들을 선호하던 자신의 부모의 태도를 냉소적으로 묘사합니다. 아버지 프랜시스 쉐퍼와 그의 어머니는 세명의 사위 모두를 최고의 명문 출신들로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최고’를 말하는 부모의 모습이 아들에게는 그리 감동적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결국 쉐퍼의 아들은 부모님의 그런 모순을 조용히 지켜보며 기독교 신앙을 떠났습니다. 이 이야기는 오늘날 교회의 이야기입니다.
오늘날 교회로 부르심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성품과 마음은 닮아가지만 예수님께서 가신 성육신의 길은 피하고 싶어 합니다. 평범한 삶 보다는 기적 같은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싶어 하지요. 바울의 이야기는 기적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를 인생의 구주로 삼고 하나님 나라를 향해가는 소망과 영광의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누구보다 전심전력하며 율법의 교훈을 지키며 살아온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는 남들보다 뛰어난 최고의 학문을 배웠고, 그의 열심을 따라갈 자가 없었습니다. 그런 바울이 주님을 만난 후에는 ‘나는 날마다 죽노라’ 라고 고백하면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뤄간다고 했습니다. 바울에게 구원은 인생을 편하게 살기 위한 초대장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자신을 내어 주신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입니다. 만일 우리의 삶 속에 믿음의 내용이 턱없이 부족하다면 세상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전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일상의 시간에 가장 많은 생각하고 바라보고 즐겨 하는 일들이 바로 우리의 삶을 말해줍니다.
우리의 교회가 전심전력하며 써 나가야 할 이야기는 서로가 서로를 대접하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들에게 친구처럼 다가가는 이야기, 새로운 지역에 와서 재정적 어려움과 능력의 한계를 절감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경험시키는 이야기, 함께 지어져 가는 이야기 입니다. 화려하지 않아도 우리의 중심이 주님을 향한 교회가 되어 질 때에 우리는 마음의 벽과 기준을 낮추는 비결을 깨닫게 되고 주안에서 안식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 매일의 과정에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는 인간의 가치를 깨닫게 되고,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삶은 어두운 여행이 아니라 은혜를 발견하는 여행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는 교회 밖으로 나가는 순간에도 지속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한없이 작아 지셨는데 우리의 믿음의 태도는 하나님은 작게 만들어 놓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능력만 크게 부풀려 놓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인식하십시오. 죄는 아주 작고 은밀한 것입니다. 작은 죄가 온 마음에 퍼져 나가게 됩니다. 작은 죄를 소홀히 하고 방치하다 보면 문제가 엄청나게 커지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1986년 1월 28일 오전 11시 38분 전 세계인들은 미국의 케네디 우주센터에서 우주 왕복선의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로켓이 점화되고 우주선이 하늘로 날아 올라갑니다. 그런데 전세계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73초만에 공중에서 폭발을 하게 됩니다. 이 사고로 7명의 비행사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물론 이 장면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가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이후 폭발의 원인을 조사했는데 첼린저 호에 들어가는 작은 오링의 불량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추운 날씨에 고무링이 탄력성의 기능을 잃어버렸고, 우주선 공중폭발이라는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우리는 내 삶에서 ‘이것쯤이야’하며 죄의 모양을 더 키워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을 정말로 사랑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마음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십시오. 마음안에 어려움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면 우리는 십자가의 능력을 깨닫게 됩니다.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려야 합니다.
본문에는 바울의 조카가 등장합니다. 바울의 조카는 성경 어디에도 알려지지 않는 인물입니다.
한 신약학자는 이 조카가 바울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누이의 아들이라고 추정합니다.
렌스키라는 신약학자는 바울의 집안이 대대로 바리새파였으므로, 누이가 당시 바리새인 남편을 만나서 결혼하고 먼저 예루살렘으로 가서 살았을 것이라 추정합니다. 이후 바울이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할 때 누이의 집에서 기거했을 것이라는 것이죠. 어쨋튼 바울의 조카가 결정적인 순간에 예루살렘에서 바울의 암살계획을 듣게 되고, 바울을 찾아가서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라면 어떻게 바울을 죽이려는 계획을 그것도 바울의 조카가 들을 수 있었겠습니까? 또한 어떻게 당시에 권력자였던 로마의 천부장이 이름없는 청년의 말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바울을 보호하고 나섰겠습니까? 하나님은 이름없는 사람을 통해서도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도구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인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일들을 진행하고 계십니다. 하나님 보실 때 작은 일은 없습니다. 이것이 교회와 세상이 다른점입니다. 우리의 교회가 이제껏 해왔던 일들을 앞으로 40년이 지난 후에도 지속하고 있다면 시간이 지나고 나면 분명 하나님께서 놀라운 일을 행하셨다고 고백할 것입니다.
“주님은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게 될것이라” 하셨습니다. 주님의 시간에 주님의 뜻이 이뤄짐을 기다리며 지속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지금 내게 이 일을 맡기셨다 생각하시며 주어진 일을 감당해 보시기 바랍니다.
23절 24절은 하나님께서 바울을 어떻게 보호하시는지를 보게 됩니다. 천부장은 제 삼시 곧 우리 시간을 밤 9시인데도 바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가이사랴로 갈 준비를 시켰습니다. 그는 조용히 백부장 둘을 불러서 40명의 암살단 보다 무려 10배 이상의 군인으로 바울을 보호합니다. 보병이 200명, 마병이 70명, 창군이 200명이었습니다. 천부장 수하에 천명의 군사가 있었으니까 470명의 군사는 자신의 수하에 절반이 되는 엄청난 숫자였습니다.
여러분,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로 가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바울은 일찍부터 로마에 가기를 소망했었습니다.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기 위한 바울의 로마행이 드디어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죽음의 위협속에서도 놀라운 방법으로 그의 일이 진행되게 하십니다. 우리가 볼 때에는 극한 환란 같아 보이지만 바울은 가장 안전한 하나님의 보호속에서 로마에 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외적인 상황이 좋아 보이고 즐겁게 사는 것만이 하나님 나라라 착각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단순히 교회에 나오는 것만이 아닙니다. 편안한 삶만 추구하는 것도 아닙니다. 주어진 환경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깊이 알아가는 과정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자신의 백성들을 부르셔서 기도와 찬양, 구제와 용서 화해의 도구를 통해서 지금도 이루어 가십니다. 이것을 빼고 교회는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이 교회를 핍박하던 시대에도 하나님의 나라는 건재했고, 교회가 세상속에서 힘을 잃어버린 것 같은 시대에도 믿음의 모험에 동참하는 사람들로 인해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퍼내고 또 퍼내도 마르지 않는 샘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것이고, 고난 가운데서도 이기게 해 주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우리의 경험으로 제한한다면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나라의 이야기는 멈추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한방울의 은혜만 마음에 담겨져도 삶속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창립 45주년을 맞이하여 고백만이 아니라 선한 삶으로 세상을 깨우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이 땅의 교회입니다. 우리는 세상속에서 주의 부름 받은 성도입니다. 이 고백이 우리 모두에게 진심으로 전해지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의 삶의 자리가 예배가 되고 가정이 교회가 되는 놀라운 축복과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10/1/2023 | 성령강림후 제 18주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I have always lived before God with a clear conscience!
사도행전 23:1, 6-11
오늘은 세계성찬 주일로 전 세계 모든 기독교인들이 주안에서 한 형제, 자매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성찬의 빵은 인류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님의 몸을 의미하지요. 포도주는 인류를 위하여 흘리신 예수님의 피를 의미합니다. 오늘 성찬의 식탁에 참여하는 교우들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며 무엇보다 주님의 마음에 연합이 되어지길 바랍니다. 서로가 자기의 의로움만 주장하는 세상속으로 예수께서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상 한복판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성찬식이며 세례식, 주일예배와 성경공부, 기도회 등 고유한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며 우리는 어떤 열매들을 맺어가야 할까요? 믿음은 우리에게 실제적인 변화를 끊임없이 요구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이 로마 시민권자임을 알고 나서 천부장은 다음날 결박을 풀고, 산헤드린 공회로 바울을 데리고 갑니다. 바울은 공회원들 앞에 섰습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유대인들의 최고 의결기관으로 의장인 대제사장을 중심으로 구성원은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 장로 등 의장을 포함하여 총 71명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신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마음에 담을 준비가 안된 사람들입니다.
1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가로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날까지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갈릴레이 갈릴레오(Galileo Galilei, 1564~ 1642)는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이 돌고 있다는 천동설이 아니라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돌고 있다는 지동설을 주장했다가 이 일로 당시 종교재판에 회부되었다고 합니다. 갈릴레이는 고문과 화형의 위협 속에서 자신의 주장을 철회 했지만, 재판장을 나오면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속삭였다고 하는 이야기가 알려져 있습니다. 바울은 공회원들 앞에서 창조와 구속의 거대한 이야기 속에서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을 깨닫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이 믿음의 발견은 피조물인 인간 외에 다른 피조물에게서는 경험되지 않습니다. 다른 피조물들은 세상 너머의 창조자가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있어서 양심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구속의 사건을 통해서 믿음이 선물로 주어집니다. 발견하려고 말씀을 해석하고 묵상하다 보면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믿음이 선물처럼 주어집니다.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시니까 믿어지게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은 날마다 우리의 양심을 깨웁니다. 그래서 구원 받은 성도는 언제 어디서나 양심을 따라 살아가게 됩니다. 사람이 보든 안보든, 상황이 좋은 안좋든 하나님을 내 옆에 모시고 정직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양심’이라는 헬라어는 ‘쉬네이데시스’(συνείδησις)입니다. ‘쉰’(συν)이라는 함께’라는 뜻과 ‘알다’라는 ‘에이데시스’(εἰδησις)가 합쳐진 합성어입니다.
바울의 고백속에는 그가 얼마나 하나님과 친밀하고도 개인적인 인격적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소망을 경험하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 율법에 매여 있지 않고 자신과 함께 살아 계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는 공회원들 앞에 죄수의 옷을 입고 서 있었지만 양심에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고 담대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세례를 받고 거룩한 직분을 받았어도 양심이 죽어 있다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산헤드린 공회원들도 사실 모두가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외형만 그럴듯하게 갖추었다고 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기에 긍휼의 눈으로 회원들을 바라 보았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스스로 가난하게 되심으로 인류를 부요케 하셨습니다. 그의 살은 십자가에서 찢겼고, 십자가에서 모든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성찬은 이것을 기억하며 동참하는 예식입니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인들은 매주마다 성만찬에 참여했습니다. 주님과의 연합은 두려운 현실속에서 그들의 믿음을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유대교의 말할 수 없는 핍박과 공격에서도 복음은 예루살렘 반경을 넘어 유대와 사마리아로 확장되는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믿음은 지속적으로 의지하는 과정입니다. 지속적으로 믿을때 우리의 영혼이 살아납니다.
우리는 낯선 것을 어려워 하고 두려워합니다. 내가 경험한 것만 안전하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때로는 조용한 기도, 부르짖는 기도, 그저 눈만 감고 있어도 기도하는 자리에 있는 것 만으로도 하나님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기도를 다 듣고 계십니다. 우리의 서로 다른 방식, 서로 다양한 모습을 인정할 때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더 깊은 영성의 세계를 알아가게 됩니다. 어릴 적 모태에서 부터 신앙을 배우고 교회에서 자란 사람들은 ‘모태 신앙인’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자란 사람들 중에 뜨겁지 않아서 ‘못해 신앙인’이라고 하는 말도 있었습니다. 뜨겁지 않다고 해서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슬비에 옷 젖듯 우리의 믿음을 자라게도 하시고, 뜨거운 경험을 통해 회심 시키기도 하십니다. 혹은 말씀을 연구하다가 만나기도 하고, 지체들의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크신 하나님의 일하심은 우리가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합니다. 개인의 성향과 기질에 따라서 만나는 방법이 다양한 것입니다.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는 분이 있다면 모든 만남 중에 놓쳐서는 안될 만남이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계획하심 안에서 하나님은 믿지 않는 그 자리, 뜨겁지 않은 그 자리를 자라게 하시고 만나게 하실 것입니다.
산헤드린은 크게는 바리새파와 사두개파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연합이 얼마나 허약한지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대목이 6절 7절입니다.
“6 바울이 그 중 일부는 사두개인이요 다른 일부는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7 그 말을 한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누어지니”
바울이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소망을 전하니까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사이에 큰 논쟁이 벌어집니다. 바리새인은 분리주의자인데 반해 종교적인 사람들이었고, 사두개인은 세속적인 사람들로 부활도, 천사도, 영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죽은 자의 소망을 전하는 바울의 말로 인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눠집니다. 이는 서로가 신학적 논쟁에 휩싸이게 된 것입니다. 서로가 옳다고 주장하는 일로 인해 매우 심각하게 분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새부대에 담으려면 우리는 변화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을 닮아가는 변화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향한 구원계획을 철회하지 않으시고 예수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밭에 감추인 보물이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절박한 이들은 쟁기를 손에 들고 밭에 감추인 하나님의 나라를 찾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찾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가까이 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믿음을 얻게 되고, 사랑함으로 사랑을 배우게 됩니다. 성경은 역설적인 표현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한가지가 돈에 대한 역설입니다.
잠언 11장 24-25절을 보면 “24.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25.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잠언 11:24-25)
구제를 한다는 것은 주머니의 돈을 사용하는 것인데 더욱 부하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복을 흘려 보내면 오히려 복은 들어 오게 되는 것이 성경의 법칙입니다. 이러한 역설이 현실일 수 있는 이유는 주님의 말씀이며, 주님께서 먼저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진정한 복은 나누고 섬기고 베푸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계성만찬 주일에 장학헌금을 통해 실제적으로 주님의 사랑을 나누자고 했습니다. 공부를 한다는 것은 지식을 쌓아가는 일이기는 하지만 신앙과 하나가 되어지지 않으면 안됩니다. 믿음은 지식을 참되게 사용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이 일에 우리가 동참함으로 어려운 가운데 공부하는 이들이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 가난한 자들이 부요케 되기를 원하며,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이 하나님을 경험하는 복을 얻게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 먼저 주신 은혜를 되새기며 베품의 즐거움에 참여 해 보시기 바랍니다. 작은 것이라고 심고 참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11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바울에게 그날 밤은 위기의 밤이고, 고난의 밤이었습니다. 고난 받으신 주님은 그날 밤에 바울을 찾아 오셨습니다. 바울 곁에 늘 가까이 계셨던 주님은 그날 밤에 ‘담대하라 네가 나의 일을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고 적극적으로 위로하십니다. 신앙생활을 하며 고난의 밤일수록 주님의 음성은 또렷이 들리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 주님으로 변화된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서로가 주님을 만난 경험들, 서로가 변화된 삶의 모습을 보고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변해야 합니다. 내가 먼저 변화되지 않고는 하나님을 증언하는 일에 도구로 쓰임 받을 수 없습니다. 무딘 쟁기로 밭을 갈아야 하니 힘만 들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누구에게나 말할 수 없는 슬픔의 밤은 찾아 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낙심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여러분을 찾아 오실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걸어가신 길만 보고 따라가면 됩니다.
1996년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양심 냉장고’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한적이 있었습니다. 1990년대에 한국은 정지선을 아는 사람도 거의 없었고 지키는 사람도 거의 희박했습니다. 그 프로그램은 정말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프로그램을 진행한 개그맨 이경규씨는 지금도 잊지 못했던 촬영 기억을 언급했습니다. 그날은 새벽 4시까지 양심 운전자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결국 포기하려던 순간 한 차량이 나타나 정지선을 지켰는데 이경규씨는 PD가 방송을 위해 사람을 보냈구나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그날 새벽 4시에 정지선을 지킨 운전자는 장애인이었습니다. 옆 자리에 있던 아내도 장애인이었는데 “왜 정지선을 지키냐고 하니까 지켜야 하는거 아니에요” 라고 대답했습니다. 다음날 신문에도 기사가 크게 났었다고 회상합니다. 실제 해당 방송은 도덕 교과서에도 실렸습니다. 이경규씨는 지금도 정지선을 지키는 사람들을 보면 눈물이 핑 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방송을 통해 사람들의 운전 양심을 높였다고 회상합니다. 그 당시 그 프로그램은 위기 상황이었고 다른 방송사에 시청률이 나오지 않아 변화가 없이는 일어서기가 어려운 때였다고 합니다. 야심한 밤에 도로에 잠복하여 안전선과 속도를 지키는 사람을 찾는 방송 프로가 모두의 우려를 뛰어넘어 우리 사회의 공중도덕과 질서를 깨치는 계기가 되었고 양심을 지키는 사람들의 삶을 느끼는 따뜻한 위로가 되어 주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아무도 보지 않는 곳, 일상의 자리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선한 양심을 지니십시오. 누군가 여러분을 헐뜯고, 고난이 온다고 해도 진리의 편에 서서 흔들리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억압받는 일은 하늘의 상급이 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만, 힘들고 어려울 때는 주님이 우리를 위해 찢기신 살과 피를 묵상하며 주님의 피가 여러분의 삶에서 흘러 나오게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선한 양심을 지니고 그 길을 끝까지 걸어야 합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찐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벧전 3:17) 주님께서 여러분의 굳건한 마음에 믿음의 용기를 주실 것입니다.
9/24/2023 | 성령강림후 제 17주
목적은 하나입니다! The purpose is one!
사도행전 22:22-30
바울이 자신의 간증에서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셨다는 말을 이어가는 순간, 유대인들은 바울의 말을 끊어 버렸습니다. 바울의 연설이 특별히 자극할 만한 내용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미친듯이 고함을 질러 대면서, 옷을 벗어 던지고 흙을 움켜 쥐고서 공중에 던졌습니다. 바울의 이야기가 본격적인 내용으로 들어가야 할 순간이었는데, 개역개정은 ‘이 말하는 것까지 듣다가’, 쉬운말 성경은 ‘바울의 말을 여기까지 듣고는’이라고 기록합니다. 이후 일제히 소리를 질러 대며 바울을 살려 두지 말고 죽어야 마땅 하다고 소리칩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이방인은 더러운 짐승에 불과했습니다. 경건을 독점하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이방인은 벌레만도 못한 존재였습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이 들을때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셨다는 바울의 말은 너무도 불쾌했던 것입니다. 그의 말을 끊고 종교적 경건을 빙자하여 바울을 살려 두어서는 안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통째로 외우고 지켰던 사람들입니다. 유대인들의 율법을 보면 613개로 분류됩니다. 248개의 계명은 “~하라”이고, "하지 말라"의 계명이 365개입니다. 그들은 율법만 잘 지키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만 지키면 되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형식은 있는데 율법을 완성하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은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관계 안에서도 그러하지요. 서로를 향한 마음과 사랑이 없이 원칙만 세워놓고 판단하고 정죄한다면 그 관계는 늘 엄격하고 불편할 것입니다. 22절에 하반절을 보면 유대인들의 종교적 행위는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살려 두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사람이 죽어야 마땅하다고 하는 완고한 마음에 어떻게 거하실 수가 있겠습니까? 그들은 종교적 행위만 있었지 하나님의 본심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은 허상뿐인 하나님이었습니다. 반면에 기독교의 복음은 죽어가는 마땅한 죄인까지 되살려 새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이것이 유대교와 기독교의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기독교 믿음은 실제적 관계입니다. 주님을 만난 사람은 겸손함이 내 안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인간이 스스로 주님을 따른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닫지만 다시 일으켜 주시는 십자가 아래에서 영원한 생명이 경험되는데, 주안에서 새롭게 하시는 복음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원인과 결과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창조에 인간의 어떤 행위도 담겨져 있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없음에서 있음이 된 것입니다. 이렇듯 구원은 완전히 새롭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죄를 따르는 옛질서를 붕괴시키고, 흠이 없는 완전한 사람으로 새롭게 창조하심으로써 다시는 사망의 세력이 왕노릇 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우리의 겉모양이 아니라 마음 중심을 달라지게 합니다.
본회퍼 목사는 테켈 형무소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시를 썼습니다. “나는 사람들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어왔다. 나는 불행한 나날을 보낼 때에도 마치 승리에 익숙한 사람처럼 침착하고 웃음을 잃지 않으며 당당했다고. 정말 나는 그들이 말하는 바로 그 사람인가? 새장속의 새처럼 불안해 하고, 그리움에 지쳐서 병들고, 목을 졸린 것처럼 숨을 쉬려 발버둥 치고…사소한 모욕에 분노를 떨고… 오늘은 이런 사람이고 내일은 저런 사람인가? 아니면 내 안에 그 두 사람이 동시에 존재하는가? 오 하나님, 내가 누구이든 당신은 나를 아십니다 당신이 아시듯,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이 시는 히틀러에 저항하며 옥중에서 자신을 깊이 바라보며 고백한 시입니다. 주님 앞에 서게 되면 ‘내가 누구인지’를 통찰하게 됩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깨닫게 되니까 마음 중심의 변화가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율법적 차원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차원에서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산다.’고 말했습니다. 삶의 목적이 달라진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을 문자로 읽는 것과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문자를 뛰어 넘어 주께서 실제적으로 함께하시는 믿음의 관계인 것입니다. 베드로가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었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린 후 찢어지게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베드로는 그물에 가득 찬 고기를 보며 욕망으로 가득 찬 자신의 옛모습을 자각했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자신의 실존적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의인되게 하려고 자신이 십자가에서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 주님의 사랑은 어떤 죄인이라도 세상에서 쓸모 있는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아무리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선한 삶을 살았어도 인간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갈 수 없습니다.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롬 3:10) 거룩하신 하나님이 보실 때 모든 인간은 죄인입니다. 그래서 죄가 없으신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죄값을 치르신 것입니다. 기독교는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은혜를 받은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반응하며 세상을 치유하는 사명자로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은 지금 어느 자리에 있습니까? 주님의 말씀을 듣다가 멈춰 버리지는 않았습니까? 듣기도 전에 귀를 막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성도는 매사에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끝까지 경주하는 사람이 참 신앙인입니다. 그날에 잘했다 칭찬 받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조금 믿어 보다가 하나님이 없는 것 같다고 여긴다면 어리석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진 바라고 고백합니다. 주님과의 사귐인 것입니다. 평생 말씀을 묵상한다고 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다 알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다 아는 것처럼 여긴다면 하나님과의 사귐이 필요가 없어집니다. 지속적인 관계가 끊어지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고발할 조건을 찾기 위해서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데리고 옵니다. "여인을 돌로 쳐라"라고 하면 로마의 법을 정면적으로 어긴 것이 되기 때문에 고소거리가 되고, “돌로 치지 말라”하면 모세의 법을 어기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마음과 인간에 대한 이해가 있었기에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고 하십니다. 이후 예수를 고발하던 모든 사람들이 양심에 찔려서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들의 양심이 스스로를 책망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현대인에게 결정적인 죄는 자기 자신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자기 눈에 들보가 있는 줄 모르고 남의 눈에 작은 티를 탓하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누군가를 돌로 치라고 외치는 세상입니다. 정치 사회의 현상만 봐도 이러한 일들은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교회 안이라고 이런 일이 없겠습니까?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내 모습을 제대로 통찰하지 않으면 우리는 살면서 얼마나 많은 죄를 짓고 있는지 깨닫지 못합니다. 자신을 깊이 성찰하지 않고 경건의 모양만 따르게 되면 예수를 고발하려고 찾아 온 유대 지도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는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이미 살인하였으니라,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경건의 모양은 하고 있는데 형제를 미워하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거하실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나누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스스로를 죄인으로 여기며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여인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의인의 권리를 포기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요 8:10,11)
예수께서는 돌로 치러 온 사람들에게 자신을 성찰하며 돌이킬 기회를 주셨습니다. 또한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에게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고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놀라운 은총입니다. 예수님께 용서 받은 여인은 매순간 선택과 곤경의 자리에서 예수님을 생각할 것입니다. 믿음을 실제적으로 경험하기 위해서는 돌에 맞게 된 여인의 마음을 깊이 이해해 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여인의 죄를 자신의 생명과 교환해 주셨습니다.
24 그러자 천부장은 바울을 병영 안으로 빨리 데리고 들어가라고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그리고 그를 채찍으로 심문하여, 사람들이 왜 이렇게 소동을 벌이는지 그 이유를 밝혀내라고 지시했다.
당시 유대인의 일상 언어는 히브리 언어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간증을 전통 유대인들이 하는 히브리 말로 전했습니다. 당연히 로마의 천부장은 알아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말을 듣던 유대인들이 다시 난폭한 군중들로 변하니까 바울에게 어떤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던 것입니다. 천부장은 죄를 정하지도 않고 채찍부터 들도록 명령을 합니다. 천부장은 바울을 병영 안으로 끌어들였고 바울을 채찍질을 해서라도 자백을 받아내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로마 시민권자인 나를 재판도 하지 않고 채찍질을 할 수 있느냐고 말했고, 바울 곁에 서 있는 백부장은 얼른 가서 천부장에게 보고합니다.
26 이 말을 듣고, 백부장이 얼른 천부장에게 달려가서 보고했다. “천부장님,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 사람이 로마 시민이랍니다.” 27 그러자 천부장이 놀라워하며 바울에게 와서 물었다. “그대가 정말 로마 시민이오?” 바울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28 천부장이 말했다. “나도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데, 돈이 꽤 많이 들었소.” 바울이 대답했다. “저는 태어날 때부터 로마 시민입니다.”
바울은 전도여행 중에 빌립보에서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로마 시민권자임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의식 안에 주님을 전하는 일로 온통 가득 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의식을 지배한 것은 오직 그리스도였습니다. 바울이 전도여행 중에 자신의 시민권을 잊고 전도를 했는지 일부러 드러내지 않았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고백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로마 시민권이 바울의 삶의 목적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바울은 사역을 마칠때 쯤이니 노년의 나이었을 것이고, 채찍에 맞는다면 생명을 잃게 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에게 이 순간은 절체절명의 순간이었습니다.
당시 로마의 채찍은 여섯개의 가죽끈으로 되어 있었는데, 끈 하나마다 납덩이가 달려 있어서 채찍에 맞다가 죽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이 채찍으로 맞을 경우 바울은 버텨내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바울을 보호하시기 위해서 성령을 통해서 생각나고 가르쳐 주셨을 것입니다. 글라우디오 황제때에 로마 시민들은 재판도 하지 않는 상태에 매질을 하지 못하는 법이 있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서 바울은 하나님의 보호하심 가운데 안전하게 로마까지 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주관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 행정구역이던 다소에서 바울이 태어나게 된 것도 하나님의 섭리였으며, 다메섹 도상에서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신 것도, 한평생을 살다가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게 되는 결정적인 순간에 로마의 시민권이 복음을 증거하기 위한 소중한 도구로 사용되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셨습니다. 외국에서 살아가는 이민자들에게는 영주권. 시민권이 주는 힘과 안정감이 있습니다. 그러니 천부장은 큰 돈을 주고서라도 로마 시민권을 획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해결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지 못하면 소유와 결핍을 끊임없이 채워가며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할 것입니다. 천부장이 획득한 로마 시민권은 로마 황제의 사람일 뿐이지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시민은 될 수 없었습니다. 기독교인은 세상속에서 살아 가지만 실제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 안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분명하게 믿을 때 우리의 모든 소유는 사람을 해치는 일에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데 쓰이는 복음의 도구가 됩니다. 이것이 천국 시민권으로 살아가는 하나님 자녀들의 권세입니다.
여러분은 삶의 자리에서 무엇을 구하며 살아가고 계십니까? 삶의 목적은 우리의 삶의 방향을 결정하게 됩니다. 지금 우리가 소유한 것들이 백년 후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께 삶을 드릴 때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세상속으로 뚫고 들어온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하늘과 땅을 지으신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실제로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최후 승리가 우리의 마음을 평안하게 해줍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기만 하면 시민권을 그 자리에서 발급한다고 증거합니다(요 1:12) 성경은 천국 시민된 성도를 가리켜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증거합니다(살전 2:9)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 할 것임을 증거합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천국 시민 된 성도를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마 28:19.20) 성령께서는 우리를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해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로 사는 인생은 매일 매일 가르침 받고 배워가는 삶입니다. 나를 증명하며 사는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것은 세상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고 삶의 주관자가 하나님 되어 주시기에 그 안에서 진정한 평안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때 우리의 옛 자아가 십자가 앞에서 무너짐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의 목적은 하나이며 분명하고 선명합니다. 목적을 알고 걷는 길은 흔들릴수는 있어도 쓰러지지 않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일에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붙들어 주심을 믿고 주님의 손에 내 삶을 맡기며 살아갈 때 하나님의 나라는 삶속에서 더 깊어져 갈 것입니다. 한주도 삶의 이유가 되시고, 삶의 목적이 되시는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9/17/2023 | (성령강림후 제 16주)
바울의 간증 Paul's Testimony
사도행전 21:27-40
사도행전은 AD 30-63년 사이의 기록입니다. 복음이 확산되는 과정에서 누가는 주요 사건들을 시간 순서에 따라 기록하지만 어떤 사건들은 사도행전에서 과감히 생략합니다. 예를 들어 3년여 기간의 아라비아에서 체류한 시간들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루 동안 일어난 일임에도 21장에서 체포되는 과정부터 유대 군중들을 향한 바울의 간증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무려 43절에 걸쳐 기록했습니다. 바울의 1차 선교여행이 시작된 13장에서 28장까지가 대략 17년간인데 이를 날수로 따지면 대략 6,205일입니다. 그런데 13장부터 28장까지가 총 569절입니다. 따라서 43절에 해당하는 분량은 대략 7.5%가 됩니다. 수치적으로 볼때 누가는 바울의 간증을 평균치의 몇백배 이상 자세히 기록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원대한 구원계획에 있어서 바울이 받는 소명과 그가 그리스도인이 된 사건에 대한 43절의 기록은 바울의 위대한 간증이기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실제적 경험의 종교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몇년 전에 받은 은혜의 기억으로만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몇달전에 몇년전에 먹는 밥심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성도들은 오늘의 양식을 통해서 주시는 힘으로 살아갑니다. 믿음은 새부대에 매일의 말씀을 담는 것이지요. 어느날 수없이 읽던 구절이 내 마음에 다가오고 마음이 뜨거워 집니다.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말씀을 통해서 느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열어 주시니 반짝이는 별빛처럼 마음 속에 쏟아져 내려 오는 것입니다. 날마다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께서 인생을 주관하시도록 내어 맡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그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내 자녀가 진짜 부모가 맞는지 매일 묻는 것과 같습니다. 얼마나 마음 아픈 일입니까? 거짓이 없는 하나님 사랑을 경험할때 인생에는 간증이 시작이 됩니다.
바울은 사람을 보는 관점이 달라졌습니다. 1절에 자신을 죽이려고 한 이들에게 바울은 ‘형제 여러분’이라고 말합니다. 이 단어는 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순교하기전에 자신을 심문하는 최후 진술의 자리에서 유대인들에게 사용했던 호칭입니다. 영어성경은 brothers and fathers라고 번역했고, 유대인들을 향한 존경의 의미가 담겨져 있는 단어입니다.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유대인들의 행동에 비하면 참 온유한 언어입니다. 헬라어로 아델포스(αδελφός) ‘형제’는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연합된 형제인데, 바울은 핍박하는 너희들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기 위해서 기꺼이 고난을 받고 배척당하면서도 ‘사랑하는 내 형제요’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다 보면 의심하는 사람도 만나게 되고, 아직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 들이지 못하는 사람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형제임을 기억하시고 주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영혼을 놓고 기도하면 하나님의 때에 주님의 빛과 음성이 보이고 들리는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성령님께서 역사해 주십니다.
윤복희씨가 부른 ‘여러분’이라는 노래를 아실겁니다. 이 노래를 작사, 작곡한 윤항기 목사는 1978년 폐결핵 말기 판정으로 6개월 선고를 받았는데, 동생 윤복희가 이혼의 아픔을 겪고 힘들어 할때 절망속에서 희망을 놓지 말자는 취지로 동생을 위로하기 위한 노래를 만듭니다. 한 방송에 나온 윤복희씨의 인터뷰를 들었는데요. 노래 가사의 위로, 등불, 벗, 형제, 노래, 기쁨이 되어 주겠다는 고백은 주님이 우리에게 그런 존재임을 약속하는 내용들이라고 했습니다. 많은 대중들에게 이 노래가 위로가 되는 이유는 주님의 사랑이 담겨져 있는 신앙의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어두운 밤 험한 길 걸을때 내가 너의 등불이 되리. 허전하고 쓸쓸할 때 내가 너의 벗 되리라. 네가 만약 외로울때면 내가 친구가 될께, 네가 만약 기쁠때면 내가 웃음이 되리.” 그리스도안에서 한 형제가 되는 기쁨이 이런것 아니겠습니까?
주안에서 우리는 형제를 품어 안으라고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번 학기 금찬을 시작하고 많은 청년들에게 도전이 되는 메세지와 이야기들을 들었습니다. 간사님들의 모습을 통해 은혜를 받고 함께 예배하고 찬양하는 지체들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하심과 기대하는 마음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복음은 형제를 바라보는 시선을 달라지게 합니다. 바울과 스데반에게서 영혼을 바라보는 애통함이 묻어납니다. 복음을 향한 열린마음을 갖으십시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는 바울에게서 자유함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는 죄수의 몸으로 체포되었고, 몸은 상처로 가득했는데 그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의심과 두려움이 아니라 복음 안에서 자유와 담대함입니다. 바울에게 복음은 살아가야 할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를 경험했기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 됨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실제적으로 경험하게 될 때에 더 큰 세계가 열려집니다. 하나님의 뜻을 지속적으로 알아가려고 노력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주시고, 뜻을 깨닫게 될 수록 삶이 더욱 풍성해집니다.
유대인들은 편협한 확신과 종교적 열심으로 십자가의 도를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 아래서 태어난 인간의 마음에는 선천적으로 죄가 내재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무슨 일을 해도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고 판단하고 평가할 수 있는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바울에게 예수의 경험은 자신의 이성과 종교적 열심이 진리의 원천이라고 믿는 확신이 산산조각 나는 경험이었습니다. 종교적 열심으로 살면서 빛을 받아야 할 존재임을 망각한 채 살았던 바울에게 참빛이 되시는 예수의 음성이 들려오자 자신 안에 빛이 있는 것처럼 여기며 예수를 거부하던 어리석음을 본 것입니다. 오늘날 물질주의는 우리에게 빛으로 다가옵니다. 물질주의를 절대적 가치로 삼는 현대사회는 과다한 자원의 개발로 인해 지구가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물질주의로 인한 과도한 소비주의는 육체적 정신적 질병을 초래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 안에 물질주의의 그림자가 드리워졌습니다. 저마다 물질만을 빛으로 여기고 참 빛이신 진리를 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동물과는 다르게 예수를 아는 빛을 알도록 남겨 두셨습니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에 대한 인식을 진리로 받아들이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거룩한 삶은 예수의 빛을 받아들인 결과입니다. 만약 인간의 양심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할 가능성이 없다면 피조물인 인간과 동물은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에게 있음을 말씀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있습니다. 그 권세는 사람을 살리는 능력이고, 공동체를 하나되게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하는 힘입니다.
바울은 성경을 보는 관점이 달라졌습니다. 유대인들은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 확신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다른 이들을 판단하려고 했지 바울의 고백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 주셨지만 그들의 믿음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 있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를 깨닫는 것은 역사적으로 예수를 연구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는 역사를 초월하시는 분이십니다. 성경을 연구해도 이 신앙적 체험이 없이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를 통찰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있는 인격으로 시공간을 초월하여 믿는 자에게 새로운 영감을 주십니다. 바울에게 성경은 이전에 읽던 관점과 완전히 달려져 새로운 해석의 관점을 열어 준 것입니다. 학문적으로 만들어진 예수가 고난과 핍박을 감수하고 순교하도록 동기를 부여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의 뜻과 반대로 행하던 바울이 자신의 생명조차 아까워하지 않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경험하고 구약성경을 바라보는 관점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예수 안에서 새언약이 발견되고, 옛언약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바울은 새 성전에서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은 동물이 아니고 사람이라고 언급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 12:1) 바울은 이사야 66장 20절을 새언약의 계시로 받았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께서 새로운 종류의 제물을 요구하시는 것이 나타나는데,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자손이 예물을 깨끗한 그릇에 담아 여호와의 집에 드림 같이 그들이 너희 모든 형제를 뭇 나라에서 나의 성산 예루살렘으로 말과 수레와 교자와 노새와 낙타에 태워다가 여호와께 예물로 드릴 것이요” 바울은 이사야서를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진 것입니다.
구약시대에 희생제물로 바쳐진 양이나 소는 제단에 바쳐진 순간 이미 다른 존재로 변하게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의 경험은 바울에게 생애 전 존재의 변화요, 세상과 성경을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였습니다. 스데반 집사도 예수를 믿고 이사야 66장 1절 말씀을 인용하면서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관점이 달라졌음을 보게 됩니다. “47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48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가 말한 바 49 주께서 이르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행7:47-49) 예수님을 경험하고 난 스데반의 마음에도 주님이 계셨습니다. 성령께서 스데반 집사의 마음의 성전에 거하시며 복음을 증거하게 하셨고, 바울도 성령께서 함께하시는 인격적 간증이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주님께서 여러분 마음의 성전에 계시면 간증이 시작됩니다. 아나니아와 같은 믿음의 성도들을 만나게 되고, 예수께서 함께하는 간증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회복의 간증들이 넘쳐나는 것은 주님을 통해 성경과 세상을 보는 눈이 열려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마음 없이도 성경을 연구하고 묵상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오랜 시간 연구하다 보면 성경적 지식이 쌓여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언제나 3인칭 시점일 것입니다. 오늘날 뿐만 아니라 바울의 시대에도 지성이 없어서 문제가 일어난 게 아닙니다. 지성은 차고 넘칩니다. 문제는 근본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간증은 언제나 1인칭이 되어야 합니다. 내 삶에 함께하고 계시는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받아들임으로 인해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먼저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선택 받았다는 확신속에서 다른 계시의 말씀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받아들이는데 그들의 확신은 걸림돌만 된 것입니다. 사람이 변화되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래서 분명한 경험적 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가 지닌 세계관을 완전히 뒤집어 놓으십니다. 인간의 교만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녹아져야 비로소 땅을 보며 살던 우리의 시선이 하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마음의 탐욕, 불의, 합당치 못한 것들을 깨닫게 하시고, 예수께서 보여주신 구원의 감격을 더 깊이 경험하게 하십니다. 이 신앙적 경험이 2천년 기독교 역사를 지탱해 온 힘이지요. 그래서 기독교는 경험의 종교인 것입니다. 바울의 간증이라고 생각하며 다시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난 선량한 유대인입니다. 여기 예루살렘에서 교육 받았고, 랍비 가말리엘의 엄격한 지도 아래 우리 종교의 전통을 철저히 배웠습니다. 그리고 지금 여러분처럼 나도 항상 열정적으로 하나님 편에 있었습니다. 나도 이 예수의 도와 관련된 사람은 누구나 맹렬히 공격해서, 하나님을 위해 죽일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남자든 여자든 가리지 않고 가는 곳마다 그들을 잡아 들여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대제사장이나 최고의회의 누구에게나 물어보면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들 모두가 나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나는, 예수를 따르는 이들을 추적하고 체포하려고 우리 형제들이 있는 다메섹으로 떠났습니다. 나는 예루살렘으로 데려와서 형을 받게 하는 권한이 부여된 공문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정오쯤 다메섹 외곽에 이르렀을때, 하늘에서 눈부신 빛이 강하게 비쳤습니다. 나는 바닥에 쓰러졌고 시야가 흐려졌습니다. 그때, 한 음성이 들렸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해치려고 하느냐? 나는 주님 누구십니까?하고 물었습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하고 그분이 말씀하셨습니다. 동료들은 그 빛은 보았으나 그 대화는 듣지 못했습니다. 이후에 주님께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더니, 다메섹으로 들어가면, 앞으로 네가 해야 할 일을 말해 줄 사람이 거기에 있다고 말해 주셨습니다. 내가 처음 계획한 것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그 성에 들어간 것입니다. 나는 눈이 멀어 볼 수 없었기 때문에 동료들이 내 손을 잡고 데리고 들어가야 했습니다. 거기서 나는 아나니아를 만났습니다. 그는 율법을 잘 지키기로 소문난 사람입니다. 이것은 다메섹 유대인공동체가 다 동의하는 사실입니다. 그가 와서 내 어깨에 손을 얹고 눈을 들어 보시오하고 말했고, 내가 눈을 들었는데, 어느새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 볼 수 있었습니다. 다시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그가 말했습니다.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대를 택하셔서 그분의 활동계획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대는 의롭고 죄가 없으신 분을 실제로 뵈었고, 그분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제 그대는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그대가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는 핵심 증인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망설이지 말고, 일어나 세례를 받으십시오. 죄를 깨끗이 씻어내고, 하나님과 직접 사귀십시오. 정말로 아나니아가 말한 대로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뒤에 어느날 나는 성전에서 하나님의 임재에 잠겨 기도하다가 그분을 뵈었습니다. 하나님의 죄 없으신 분을 뵈고,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분은 이유를 묻지 말고 거거라. 내가 너를 이방인들에게 보내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감추고 싶었던 자신의 과거를 솔직하게 이야기합니다. 이방인의 사도로 전도여행을 다 마치고 노년에 쓴 디모데서를 보면 그는 “내가 죄인 중에 괴수니라’고백합니다. 자신을 구원해 주신 은혜를 지속적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의 지성을 압도하고 그리스도의 보혈로 날마다 덮어줍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하나님을 찾을때 비로소 말씀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성도들에게 놀라운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여러분에게도 이러한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준비해 두신 아나니아를 만났던 경험들 말입니다. 믿음생활 안에 있는 수많은 간증들은 실제로 가슴 떨리는 고백입니다. 구원의 은혜와 감격을 쉽게 생각하면 얕은 감격만 누리게 됩니다. 인간은 한시라도 주님의 은혜를 떠나면 서로를 비방하고 비판하며 평가하는 흉악한 죄인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버리는 것입니다. 겸손해 지는 길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 된 우리가 설수 있는 은혜의 감격을 실제적으로 깨닫는 것입니다. 자녀를 양육할 때에 실패하지 말라고 가르치시겠습니까? 아니면 실패했을때 어떻게 일어서야 하는지 그 지혜를 가르치시겠습니까? 지혜는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시며 자라가십시오. 존재의 변화없이 우리가 어떻게 증인으로 살아 갈 수 있겠습니까? 오늘 받은 은혜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매일 새로운 은혜를 경험하며 성장해 나가야 합니다. 성경은 지금이 은혜 받을 때이고 지금이 구원의 날이라는 것입니다.(고후 6:2) 변화된 성도들에게 은혜는 언제나 지금입니다. 바울의 간증을 통하여 우리도 예수님을 증거하는 삶의 새로운 눈이 떠지고 ,그 빛이 인도하시는대로 하나님께 은혜 받는 일, 사랑하는 일을 미루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믿음의 여행길에 만나게 되는 일들은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시는 특권입니다. 생명을 전하는 간증을 채워가는 삶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9/10/2023 | 성령강림후 제 15주
문들이 곧 닫히더라 The gates were closed soon
사도행전 21:27-40
예루살렘에서 바울이 박해를 받게 될 것은 20장부터 계속 예고했던 일입니다. 그러나 한주간 본문의 말씀을 묵상하며 실제적으로 바울에게 찾아온 죽음에 가까운 고난을 다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시간이었습니다. 바울의 전도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하나님께서 구원의 비밀을 드러내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또한 바울은 소망에 대한 이유를 항상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염려와 두려움이 찾아올 때 소망에 관한 이유가 분명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두려워 하지 말라는 것은 소망의 이유가 되시는 분께서 방패가 되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두려운 상황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예상치 못한 고난 가운데서도 소망의 이유는 성도들을 지켜주는 방패가 됩니다.
바울을 붙잡고 끌고 나간 후에 성전 문이 닫혀졌습니다. 개역개정은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라고 번역합니다. 굳게 닫혀진 문은 바울을 향한 유대인의 마음을 보여 줍니다. 성전 밖으로 끌려 간 바울을 죽이려고 사람들이 달려 들었고 죽을 만큼 맞게 된 상황입니다.
해마다 성경에서 가장 많이 읽혀지는 구절들을 조사해 보면 두려움을 극복하는 말씀들이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인간은 내일일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지의 내일에 짓눌려 오늘을 살아갑니다. 그러니 죄에 짓눌려 좌절하고, 불안에 짓눌려 떨고, 두려움에 짓눌려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의 고난을 묵상하며 주위를 둘러보니까 고난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참 많았습니다.
해마다 성경에서 가장 많이 읽혀지는 구절들을 조사해 보면 두려움을 극복하는 말씀들이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인간은 내일일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지의 내일에 짓눌려 오늘을 살아갑니다. 그러니 죄에 짓눌려, 불안에 짓눌려, 두려움에 짓눌려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의 고난을 묵상하며 주위를 둘러보니까 고난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참 많았습니다. 우리는 묵상하는 관점에 따라 세상이 그렇게 보여집니다. 내 몸이 아프면 비로소 아픈 사람들이 보여집니다. 바울의 눈에는 예수 믿는 이들을 박해하는 이들속에서 자신의 모습이 보였을 것입니다.
인생의 문이 닫힌 느낌이 들 때가 있지 않습니까? 관계속에서 굳게 닫혀진 마음의 문,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간 아픔과 슬픔, 이런 환경이 직면하게 되면 인생의 문이 닫혀져 있는 느낌이 듭니다. 바울에게 일어난 상황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를 보았습니다. 그 문은 바울을 향해 열려진 문입니다.
여러분이 현재 바라보는 세상은 어떤 세상입니까?
한주도 삶의 현장에서 믿음으로 살아내시느라 애쓰셨습니다. 경쟁사회에서 겸손하게 사는 것도 쉽지 않는 일입니다. 자기중심성에 이끌려 살아가는 사회속에서 예수님의 겸손함으로 다리 놓는 사명자로 살아가는 것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런데 이 시간 바울의 모습을 여러분의 삶에도 적용하며 따라와 보시기 바랍니다. 2천년 상황속으로 들어가 보실까요?
본문의 상황을 보면 바울은 유대인 출신 신자들의 오해를 해소시켜 주기 위해서 예루살렘 지도자들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1주일간 결례를 시행하고 있었습니다. 결례가 끝나갈 무렵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바울과 드로비모가 함께 있는 것을 봅니다. 그들은 바울이 예전에 에베소 사람인 드로비모와 같이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이번에도 바울이 으레 그를 성전으로 데리고 온 줄로 알았습니다. 이는 유대인들의 단지 추측이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서 성전 모독했다는 이유로 바울을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어떤 한 사람이 성전 밖에서 죽을 만큼 맞고 있다는 소리를 듣게 된 로마의 천부장이 수하의 백부장과 군인들을 인솔하여 달려와서는 때리는 것을 멈추었습니다. 그런 다음 바울에게 무슨 죄를 저질렀는지 묻습니다. 이미 현장은 소동으로 인해 바울의 소리가 들리지도 않았고 사태 파악이 안되니까 천부장은 바울을 체포하라고 명령합니다. 사실 천부장의 체포가 없었다면 아마도 바울은 그 현장에서 스데반처럼 순교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누구를 원망하거나 그 상황 앞에서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바라보는 시선은 두려운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견된 일이었기에 하나님이 일하고 계심을 믿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천부장에 의해서 체포되어 죽음을 모면하게 됩니다. 당시 바울의 생각을 분명하게 볼 수 있는 구절이 40절에 나타나는데요.
“저 사람들에게 제가 잠시 한마디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그렇게 하시오. 천부장이 허락하자, 바울은 층계 위에 서서 군중에게 조용히 해 달라고 손짓을 했다. 무리가 잠잠해지자, 바울은 히브리 말로 연설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그런데 바울은 유대인들을 전도하기 위해 죽도록 맞고도 설교를 합니다. 설교의 내용은 그가 예수님을 만난 간증입니다. 다메섹 도상으로 올라가기 전까지 바울은 예수를 믿는 자들을 핍박하는데 열심을 내던 사람이었는데 바울이 바라보는 세상의 인식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를 부르시는 주님의 은혜 가운데서 부르신 상급을 위하여 달려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의 생각 속에는 온통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한 사명감으로 가득차 있어 보입니다. 그는 주리고 목마르며 추위와 헐벗음을 당하며 견디는 것에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유대 동족을 누구보다 사랑했던 전도자였습니다. 로마서 9장 3절을 보면, “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그는 동족을 위해서라면 저주를 받아도 좋다고 고백합니다. 이는 종교적 열심이 아니라 예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었습니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생명을 다해 복음을 증거합니다. 도대체 바울 안에 있던 예수의 생명이 무엇이었을까요? 바울에게 생명은 예수께서 주신 생[生]을 살라는 명령[命] 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서 명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요 6:40)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세상의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분리된 상태를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불신하고 믿지 않는 것을 죄라고 말합니다. 죄의 대가를 치르시고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세상 끝날까지 너희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믿는 다는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지요. 죽고 사는 시간적 차원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믿음으로 지금 이곳에서 누려집니다. 바울은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해서 이제 자신의 자랑거리는 자랑할 것이 아님을 깨닫고 배설물처럼 여겼습니다. 바울의 신분과 정체성이 새롭게 된 것입니다.
도대체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얼마나 고귀했으면 지금으로 보면 바울의 출신은 대통령 집안의 출신 배경이었고, 유대교 3대 종파인 바리새파 사람이며, 학벌도 최고 자랑거리인데, 좋은 학벌과 집안 배경들 자신의 모든 자랑거리를 배설물처럼 여겨졌을까요? 예수를 아는 지식에 비하면 인생의 자랑거리가 아무것도 아님을 깨달은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에 구원 받는데 어떤 효력도 없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뜻을 보여주는 사람들의 모임이구요. 세상속에서 교회의 사명은 성도들의 컨디션에 따라 우리가 지닌 자랑거리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고난을 당하는 중에도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전하는 말씀이 궁금하지 않겠습니까? 생명을 다해서 전하는 마지막 외침의 그 말의 무게가 무겁게 느껴지지 않겠습니까?
1933년 1월 15일 독일의 한 교회 저녁예배에서 본훼퍼는 이렇게 설교합니다. “우리가 죄를 두려워한다는 말은 옳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두려워 하는 자는 이미 그 속에 빠져 든 것입니다. 두려움은 악의 그물입니다. 악은 처음에는 우리에게 두려움을 심어 혼란에 빠뜨리고, 그 다음에는 두려움에 복종하게 만듭니다. 두려움이 아니라 용기입니다. 두려워 떠는 마음으로 어떻게 원수를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의 죄 보다 크시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 안에서 강해지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죄는 쓰러져 버릴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두려움은 그 당시 독일 땅에도, 우리가 살아가는 각자의 삶에도 지금 예배 드리는 이곳에도 있습니다. 두려움이 지배하는 세상 한가운데서 주님은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바울이라는 사람이 땅끝까지 복음의 전도자가 된 것은 하나님이 그를 부르셨기 때문이고 하나님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버리지 않으신 것처럼 바울을 붙들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고난은 바울에게는 구원을 이루는 놀라운 능력이었습니다. 고난 가운데서도 일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알았던 것입니다.
반면에 유대인들은 성전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은 성전 안뜰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1.4m 높이의 돌로 된 벽을 만들어 쌓았습니다. 그곳에는 헬라어, 라틴어로 외국인은 성전과 둘러싼 울타리 안으로 들어 올 수 없다는 경고 문구를 붙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성전 체제에 갇혀 살던 이들로 인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희생 제물이 되셔서 누구나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도록 구원의 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로빈 마이어가 쓴 Saving Jesus from the church 라는 책이 있습니다. 예수를 교회에서 구출하라입니다. 마이어는 입술로만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하는 것을 이제는 멈추고 예수를 따라 살라는 것입니다. 삶이 없는 신앙인들에게 던지는 메시지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현장에는 고난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을 따라가는데 있어서 수고와 헌신은 필수적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입술로만 경배 하는 신앙은 복음을 교회의 틀 안에만 가두는 것이고 복음의 껍데기만 붙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능력은 아는 것을 넘어 행동하는 것에 있습니다. 인생의 마지막 날에 좀더 사랑하며 살걸 그랬나, 좀더 베풀며 살아야 했나 후회하는 삶이 되면 안됩니다. 인생의 종착지에서 후회가 없을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후회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삶은 끝까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는 자들을 고아처럼 버려 두지 않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바울은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다윗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와 항상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고난이 올 때에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배우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을 지키는 일에는 힘쓰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영은 그들의 화려한 성전에서 이미 떠났습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죄와 시기심, 미움과 정죄하는 마음을 이기신 예수님이 함께 하고 계심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제사장의 역할은 희생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을 스스로 제어할 능력이 없어서, 실수가 많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셨습니다. 주님은 세상의 아픔을 자신의 몸으로 받아 주셨습니다. 그분께서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평안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마음의 자리에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실제적인 사랑을 부어 주십니다. 사명은 울면서라도 복음의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유대 정결법으로 인해 부정한 자로 여겼던 이의 몸에 손을 대셨습니다. 그리고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아파하심으로 그 사람의 부정함을 자신의 몸으로 옮겨 오셨습니다. 그리고 살려 내셨습니다. 오늘날 세상은 복음을 증거하고 예수님의 마음을 살아갈수록 우리 앞에 문이 닫힌 것처럼 느껴지게 합니다. 성밖으로 내쳐진 듯 우리를 외롭고 고독하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두려워 하지 말라 하십니다.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계획을 믿는 것입니다. 복음의 역사는 고난 중에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주님은 지금도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 내는 일에 헌신하는 이들 가운데도 함께하실 것입니다.
바울은 옥중에서 빌립보 교우들에게 이렇게 편지합니다.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고백했습니다. 바울은 예수의 생명에 이끌려 지속적으로 깨달으려고 달려간다고 절절하게 고백합니다. 내가 이미 구원받았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에 계속하여 달려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믿음생활에 고난이 오고 삶이 힘들어 지면, 잘못 살고 있는 것이 아닌지 하나님의 뜻을 의심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의를 위하여 박해 받는 자는 복이 있다(마 5:10)하십니다. 진정한 제자는 고난 가운데서 넘어질 수 있고, 오해를 받고 핍박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사명은 다시 일어나 마땅히 가야 할 곳을 향해 길을 가는 것입니다. 믿음의 경주는 경쟁에서 이기고 빨리 달리는 경기가 아닙니다. 믿음은 누군가를 이기려는 자기욕심과 욕망의 도구도 아닙니다. 고난이 올 때에 옛사람의 옷을 벗어 버리고 지극히 크고 영광의 중한 영생을 얻게 되시기 바랍니다.
고난이라는 포장지를 벗겨내면 그 안에 장미빛 같이 붉게 물든 십자가와 푸른 하늘처럼 높고 위대한 하나님의 영광의 면류관이 있습니다.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눈물겨운 수고가 없다면 어떻게 영혼들이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깨닫을 수 있겠습니까? 바울도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을 만드는 일을 가르켜 해산의 수고라고 했습니다. 성전을 지켜야 하는 것이 참된 믿음이라고 말한 유대인들에 의해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께서는 저와 여러분의 구주가 되셨습니다. 이제 남겨진 과업은 저와 여러분이 이뤄야 할 사명입니다. 한주도 사명자들이 걷는 걸음 걸음마다 주의 은총이 넘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