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4/2016 | 부활절 다섯째 주일

주님의 부탁 The Lord's Request to Serve

요한복음 21:15-25

오늘 말씀에서 베드로와 예수님, 두 사람이 어색한 조우(遭遇)를 합니다. 조우라는 말은 ‘우연한 만남’이라는 뜻입니다. 베드로 편에서 보면 주님과의 만남이 우연한 만남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예수님 편에서 보면 베드로와의 만남은 결코 우연한 만남이라고는 할 수 없는, 계획된 만남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했을 때, 베드로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주님은 “네가 나를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할 것이다 (마태복음 26:3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장담 했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재판을 받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베드로는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안식일이 지난 후에 베드로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다는 여자들의 이야기였습니다. 베드로는 제일 먼저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스위스 화가 유진 버난드 (Eugène Burnand)가 그린 그림이 유명합니다. 그는 여자들의 말을 듣고 무덤으로 달려가는 두 제자의 얼굴을 그렸습니다. 그림 제목이 좀 깁니다. ‘The Disciples Peter and John Running to the Sepulchre on the Morning of the Resurrection (부활의 아침에 무덤으로 달려가는 제자 베드로와 요한)’입니다. 제임스 거니 (James Gurney)라는 사람이 이런 평을 썼습니다. “Burnand pointed out the complexity of emotions on each man. You can literally see their thoughts chasing across their faces—the anxiety and hope against hope on John’s face, and the hope against hope tempered with sorrow and regret on Peter’s face. In disbelieving shock, they run. Not knowing what they will find, they run. In hope against hope they run. They run (그는 두 사람의 감정의 복잡함을 그리려고 했다. 당신은 두 사람의 얼굴에 스쳐 지나가는 그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요한의 얼굴에서는 불안과 희망할 수 없는 희망을 볼 수 있을 것이고, 베드로의 얼굴에서는 슬픔과 후회로 뒤섞인 희망할 수 없는 희망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믿기지 않는 충격을 가지고 두 사람은 달렸다. 무덤에서 무엇을 발견하게 될지 모른 채 그들은 달렸다. 결코 희망할 수 없는 희망을 가지고 그들을 달리고 또 달렸다).”

여자들의 말대로 베드로와 요한은 빈 무덤을 보았습니다. 여자들의 말대로 제자들은 모두 갈릴리로 갔습니다. 거기서 주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여자들의 말을 듣고 갈릴리로 갔습니다. 고향에 돌아 온 베드로는 고기를 잡으러 배를 탔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고기를 잡으러 배를 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주님을 만났습니다. 같이 해변에서 아침을 먹으면서, 제자들은 자기들과 같이 식사하시는 이 분이 주님이라는 것을 확실히 믿게 되었습니다.

아침 식사를 마친 후에, 예수님은 베드로를 따로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두 사람의 어색한 만남이라고 한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 틈에 끼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예수님은 똑 바로 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모든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만나 처음 확인한 것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는 확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베드로’ 라고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또 ‘시몬’이라고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 (Simon son of John)’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요한은 베드로의 아버지 이름입니다. 여기서 아버지의 이름이 왜 나옵니까? 전 이렇게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인간성의 약함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 이라고요.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고 부르신 것은 예수님께서 베드로 의 연약함에 대하여 이해하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히브리서 4:15 말씀을 알고 계시지요?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시는 분 입니다. 그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결코 죄를 짓지는 않으셨습니다 (For we do not have a high priest who cannot sympathize with our weaknesses, but One who has been tempted in all things as [we are, yet] without sin).” 참 sympathy라는 말처럼 좋은 말이 어디 있습니까? ‘sym’이라는 접두사는 ‘함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pathy’는 ‘pathos (고통)’이라는 뜻입니다. 상대방과 함께 고통과 아픔을 느끼는 것입니다. 비슷한 뜻으로 ‘compassion’이라는 단어가 있지요? 이 단어도 ‘함께 고통을 느낀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인간성의 연약함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단순히 이해하신 것이 아니라, 베드로의 연약함을 자신의 연약함처럼 느끼신 것입니다.

주님은 그 때 베드로의 눈을 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난 너의 연약함을 잘 알고 있다. 네가 나를 모른다고 부인했던 일로 걱정하지 말아라.” 이 말씀처럼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말씀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정죄함이 없습니다 (There is therefore now no condemnation for those who are in Christ Jesus).” (로마서 8:1) 왜 그렇습니까? 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정죄함이 없습니까?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For the law of the Spirit of life in Christ Jesus has set you free from the law of sin and of death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랑의 법으로부터 자유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틀에 얽매이지 않고 번역해 본다면, 예수님께서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고 부르셨을 때,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이, 지금까지 베드로를 묶고 있던 죄의식을 깨뜨리고, 베드로에게 자유를 주었습니다.

아무도 베드로를 탓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가 연약하다고요? 그래서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 했다고요? 누가 베드로를 비난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세 번이 아니라 수 백 번도 더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았나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견디고 있는 것입니다. 동시에,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어떤 종류의 죄의식이 있나요? 이 guilty feeling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해결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무슨 내적 치유 세미나 이런데 좇아 다니는 사람들 있습니다. 제가 그런 세미나들을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런 세미나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함에 대하여 말하지 않고 무슨 technique 쪽으로 치우치는 것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저는 치유되지 않고 내 속에 남아 있는 죄의식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면서 많은 증상들을 유발하기 때문에 무서운 것입니다. 바로 그런 이유로 병원에서는 원목 (chaplain)을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심리치료요법들 (psychotherapies)이 속속 등장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도 이런 케이스가 있습니다. 마가복음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중풍병자를 치료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들아, 네 죄가 용서되었다 (My son, your sins are forgiven).” (마가복음 2:5, NASB) 예수님께서 그의 죄를 용서해 주셨을 때, 그의 병이 나았습니다.

사역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먼저 있어야 할 것은 ‘자유함’입니다. 죄로부터의 자유함, 물질로부터의 자유함, 명예와 권력에 대한 자유함, 그리고 관계로부터의 자유함이 없이는 올바른 사역자로 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의 심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은 시간이 흘러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아까 제임스 거니 (James Gurney)의 그림 해석을 들었잖아요? 요한과 베드로, 두 사람이 예수님의 무덤으로 달려가고 있지만, 두 사람의 얼굴이 다릅니다. 요한은 “무덤이 비었다니, 설마 그런 일이 있을라고? 그렇다면 여자들의 말이 사실이란 말인가?” 이런 얼굴이었습니다. 제임스 거니가 이렇게 표현 했잖아요? ‘the anxiety and hope against hope on John’s face’라고요. 그런데, 베드로의 얼굴은 또 달랐습니다. ‘the anxiety and hope against hope tempered with sorrow and regret on Peter’s face’라고요. 이런 베드로를 그냥 내버려뒀더라면, 그는 평생 슬픔과 후회 감정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게 심리학적 용어로 말하면 ‘guilty feeling’입니다.

주님과 베드로가 주고 받은 대화를 한번 들어 보세요.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Yes, Lord, you know I love you).” “그렇다면 됐다. 내 양을 먹여라 (Then feed my lambs)!” 그 뒤에 조금씩 뉘앙스가 다르게 “내 양을 돌보아라 (Then take care of my sheep)” “Then feed my sheep” 이렇게도 나와 있지만 이 말의 의미는 다르지 않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거의 같은 질문을 세 번 반복해서 하셨는데, 세 번째 물으셨을 때는 베드로가 거의 울상이 되어서 예수님께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17절) NLT 성경에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Peter was hurt that Jesus asked the question a third time. He said, ‘Lord, you know everything. You know that I love you.’ Jesus said, ‘Then feed my sheep.’” 이 모든 과정은 베드로를 치유하시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이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내 양을 돌보라고 부탁하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 하셨던 일을, 이제 제자 베드로 에게 부탁하신 것입니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읽으면서도 이 말씀이 베드로에게 주신 말씀이라고 생각하지, 나에게 주신 말씀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베드로만 주님의 용서를 받고, 베드로만 주님이 받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주님이 용서해 주셨고, 우리도 주님이 받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도 “내 어린 양을 먹이고, 내 양을 돌보고, 내 양을 먹이라”는 주님의 부탁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탁은 섬김의 삶에 대한 부탁입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섬기러 오신 것처럼, 나의 제자들인 너희는 내 양을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내 양 (my lamb, my sheep)’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주목해서 봐야 합니다.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섬겨야 하는 양은 우리 (fence) 안에 얌전하게 들어 있는 착한 양들이 아니라, 방황하는 양들입니다. 교회에 나와도 친구가 없고, 대화 상대가 없고, 외로운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이런 사람들이 ‘나의 양’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이런 사람들을 돌보고 섬기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생각하고 많이 달라요. 우리는 우리 속에 들어 있는 착한 양들에게 가고 싶은데, 주님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먹인다’는 뜻을 가진 ‘feed’라는 단어가 엄마가 아기에게 음식을 먹여주는 뜻이 있잖아요? 저는 교회 식사 시간에 엄마들이 숟가락에 밥을 떠서 아이들을 따라 다니면서 먹여 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왜 그렇게 하나요? 그렇게라도 먹어야 아이들이 자라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너희 주변에 있는 나의 어린양들 (my lambs)을 그런 마음으로 먹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부탁을 베드로에게만 하신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우리들에게 하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교우 여러분들께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조금 조심스럽긴 합니다만, 베드로의 경우처럼, 우리가 회복되는 것이 먼저입니다. 주님과의 관계가 건강하게 형성되는 것이 사역보다 먼저입니다. 내 양을 섬기라는 주님의 부탁보다 먼저 있어야 할 것이 주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먼저입니다. 하지만, 제가 이렇게 말씀 드리는 것이 조심스럽다고 하는 이유는 평생 주님과의 관계 회복하는데 시간을 다 쓰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그리스도와의 관계 형성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섬기는 일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주님이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고 다짐을 받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사랑의 관계가 형성되지 않으면 섬기는 사역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디모데후서 3:17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자로 준비하게 되고, 모든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게 됩니다 (God uses it to prepare and equip his people to do every good work).”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우리는 평생 하나님의 일에 준비되지 않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평소에 성경을 부지런히 읽고, 기도하십시오. 주님과의 관계를 올바로 형성 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일에 준비된 사람들이 되십시오.


4/17/2016 | 부활절 넷째 주일

세 번째 The Third Time

요한복음 21:1-14

오늘로 부활절 넷째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아니, 오늘 말씀 중에 어느 말씀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까? 사람마다 다를 수는 있지만, 저에게는 맨 마지막 절에 나오는 “이것은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나신 후, 그의 제자들에게 세 번째 나타나신 것이었습니다 (14절)” 이 말씀이었습니다. 요한이 그의 복음서를 쓰면서 굳이 ‘세 번째’라는 것을 강조한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요한이 카운트한 세 번이라는 것은 어떤 일들을 말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카운트를 해 봤습니다. 제일 먼저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은 제자들이 모두 모여 있을 때입니다.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고 있었을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Peace be with you (너희에게 평강이 있기를)” 하고 인사하셨습니다.

그 때 제자 중에 도마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8일 후에 다시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이 때는 도마도 있었습니다. 저는 그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첫 번째 나타나셨을 때, 도마가 없었으면 그만이지, 도마가 그 때 없었다고 다시 나타나셨다는 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도마 한 사람 때문에?”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들의 생각입니다. 구약 이사야 말씀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다르다.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다 (My thoughts are nothing like your thoughts, and my ways are far beyond anything you could imagine. For just as the heavens are higher than the earth, so my ways are higher than your ways and my thoughts higher than your thoughts).” (이사야 55:8-9)

우리는 다수의 논리에 길들여져 있습니다. 그것이 민주주의라고 생각합니다. 다수가 원하면 소수의 의견은 묵살됩니다. 열 한 제자가 있었을 때, 도마 한 사람이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그러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한 사람 때문에 다시 나타나셔서 부활을 확신 시켜 주셨습니다. 그 때 도마가 예수님께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이라고 외친 것은 정말 감동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이 두 번째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가 오늘 읽은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런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이 일이 일어난 후, 예수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제자들에게 다시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1절) 시몬 베드로를 위시해서 7명의 제자들이 디베랴 호수 부근에 모여 있었습니다. 그 때가 밤이었던 모양입니다. 우리하고 문화가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우리도 밤에 낚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갈릴리 호수는 밤에 고기를 잡는 모양입니다. 베드로가 “난 물고기나 잡아야 하겠소” 하고 말하자 나머지 제자들도 우리도 함께 가겠다고 배에 올라탔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제자들에게 깊게 드리워진 절망의 그림자를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정확하게 3년 전에 예수님은 갈릴리의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마태복음 4:19) 나의 제자가 되면 너희들의 삶을 바꾸어 놓겠다는 말씀입니다. 고기를 잡아서 먹고 사는 어부들을 사람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사람들로 바꾸어 놓겠다는 말씀입니다. 나의 제자가 되면 너희들은 새로운 생의 목적을 갖게 되고, 지금과 전혀 다른 생의 미션 (사명)을 갖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지금 제자들은 모두 고향에 내려와 있습니다. 공관복음서에는 예수님의 빈 무덤을 본 여자들이 제자들에게 와서 갈릴리로 가라는 천사의 메시지를 전달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요한복음에는 그런 말씀이 나오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두 번씩이나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부활하신 것을 증명해 주셨지만, 제자들은 모두 자기 고향에 내려와 예전처럼 고기를 잡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 설교했던 히브리서 13:13 말씀이 다시 생각납니다. 제자들이 있어야 할 곳은 ‘outside the camp (성문 밖)’인데, 십자가가 서 있는 골고다, 눈물과 아픔과 슬픔과 절망의 현장, 그곳이 제자들이 있어야 할 곳인데, 지금 제자들은 모두 ‘inside the camp (성문 안)’로, 자기 고향으로 내려와 있습니다. 지난 3년 간 예수님을 따라 다녔던 일들은 추억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예수님께서 죽으신 마당에 제자들의 꿈도, 희망도 모두 내려 놓아야 했습니다. 고향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했던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분이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아라고 기대했었습니다 (We had hoped he was the Messiah who had come to save Israel).” (누가복음 24:21) 제자들이 모두 그랬습니다. 예수님에게 모든 희망을 걸었었습니다. 예수님에게 그들의 꿈도, 그들의 미래도 모두 걸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죽었습니다. 이제 제자들의 꿈도, 희망도 모두 접어야 했고, 제자들은 지금 고향에 내려와 예전처럼 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세 번째 (the third time)’ 나타나셔서 제자들의 앞을 가로 막은 것입니다. “무슨 소리냐? 왜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느냐?” 하시면서 제자들의 앞을 막아 서신 것입니다.

공교롭게도 제자들은 그 밤에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공교로운 것이 아니라, 오늘 제자들의 이야기를 읽어보면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정확하게 3년 전에 있었던 일이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연히 같은 일이 반복 되었을까요? 아니면? 뭔가 우리가 알 수 없는, 힘이 개입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뭔가 하나님께서 이런 일을 뒤에서 연출하고 계신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보세요. “친구들, 한 마리도 못 잡았느냐?” (5절) 뭐가 이런 말이 있습니까? 우리가 고기 잡는 사람들에게 묻는다면 그렇게 묻습니까? 아니잖아요? “고기 많이 잡으셨습니까?” 이렇게 물어야 정상 아닙니까? NIV 성경에는 이 말이 “Children, you do not have any fish, do you (얘들아, 한 마리도 못 잡았지? 맞지)?"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제자들이 고기를 한 마리도 못 잡은 것을 알고 확인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백 투 더 퓨우쳐(Back to the Future)’라는, 마이클 J. 폭스(Michael J. Fox)가 주연한 영화가 있었습니다. 타임 머신을 이용해서 미래로 가는 내용을 재미 있게 그린 영화입니다. 스포츠카를 개조해서 타임 머신을 만듭니다. 타임 머신을 타고 과거로도 돌아가고, 몇 십년 후 미래를 여행한다는 모험적인 내용의 영화입니다. 이 영화가 처음 상영된 것이 1985년입니다. 그때 제작비가 19 million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210 million을 벌었다고 합니다.

지금 제자들에게 3년 전의 일들이 똑 같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호수 가에 서 계시는 분이 예수님인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고기 없어요. 밤 새 잡았는데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이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져봐요.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겁니다.” 신기하게도 제자들은 3년 전처럼 호수 가에 서 계시는 분이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고기가 너무 많이 잡혀서 그물을 배 안으로 끌어 올릴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 때, 그물을 끌어 올리던 요한이 “주님이시다!” 하고 소리쳤습니다. 이 말을 들은 베드로가 옷을 입은 채로 물 속에 첨벙 뛰어들어 호수 가에 서 계시는 분에게도 헤엄쳐 갔습니다.

바로 이 말씀 때문에 사람들은 베드로를 성급한 성격을 가졌다고 평가합니다. 뭐,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좀 다른 각도에서 보면, 베드로가 성급했기때문에 물에 뛰어든 것이 아니라 “주님이시다’라는 말을 듣는 순간 뭔가 베드로에게 놀라운 사건이 일어난 것은 아닐까요? 말하자면, 눈이 확 떠지는 생의 경험 (eye-opening experience) 같은 것 말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아시지요? 금으로 만든 왕관의 금의 순도를 알아내라는 왕의 명령을 받은 아르키메데스 (Archimedes, B. C. 287-212년)가 금의 순도를 어떻게 측정할 수 있을까 하고 궁리하다가 우연히 목욕탕에서 그 방법을 알아냈다고 합니다. 아르키메데스가 ‘유레카(Eureka)! 유레카(Eureka)!’ 하면서 옷을 벗을 채로 목욕탕을 뛰쳐나왔다는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유레카’라는 말은 “I have found it (나는 발견했습니다)” 이라는 뜻입니다. 베드로가 물에 뛰어들었다는 것은, 지금 베드로에게 이런 엄청난 “eye-opening experience”가 생긴 것을 말합니다. 실제로 이 일이 있은 후에 베드로는 더 이상 방황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가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지, 자기에게 주어진 생의 미션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발견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는 예루살렘의 교회를 굳게 지켰습니다. 그리고, 바울을 비롯해서 이방 세계에 세워진 교회들이 가진 문제들을 해결해 주는 Headquarter의 역할을 감당합니다.

해변에 숯불이 피워져 있었습니다. 불 위에 생선이 놓여 있었고, 빵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방금 잡은 생선을 가져 오라고 하셨습니다. 큰 고기를 세어 보니 모두 153마리였습니다. 이 153에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숫자에 특별한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기발한 해석들을 많이 내 놓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 당시에 사람들이 알고 있었던 고기의 종류가 모두 153종류 였다고 주장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1에서부터 17까지를 모두 더하면 153이라는 숫자가 나온다고 합니다. 17은 10+7인데, 10은 이방인들에게 완전을 의미하는 수이고, 7은 유대인들에게 완전한 수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모두 그물에 잡힌 것입니다. 그물은 교회라고 하네요. 재미있는 설명이지만, 저는 이 숫자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자들에게 그날 새벽의 경험은 특별한 것이었습니다. 큰 고기가 이렇게 많이 잡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밤 새 한 마리도 못 잡았는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졌는데, 이렇게 고기가 많이 잡힌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단순히 ‘고기가 많이 잡혔다더라’ 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으로 잡은 고기를 셀 정도로 제자들에게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훗날 누가 “에이, 그런 일이 어디 있어요? 누가 꾸며낸 이야기 아닙니까?” 이렇게 말하면, 그 때 그 자리에서 이 일을 경험했던 제자들은 “무슨 소리야? 우리가 집적 잡힌 고기를 세어봤다니까?” 이렇게 확신을 가지고 말할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아침을 먹으면서 제자들 중에 아무도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묻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자기들과 함께 아침 식사를 하는 그 분은 예수님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더 이상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은 믿을 수 없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세 번째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는 요한의 증언(證言)에는 이런 의미가 있었던 것입니다.

수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이 말씀은 드려야 하겠습니다. 유대인들에게 3은 완전을 의미하는 수입니다. 위에서 말한 7도 완전 수입니다. 예수님께서 세 번째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은 이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세 번째 나타나신 이 일로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이 이번이 세 번째 나타나신 것이라고 기록했을 때, 아무 의미 없이 그렇게 기록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을 믿지 않는 제자들에게 몇 번이고 그들이 믿을 때까지 증거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인내심이 제자들을 부활의 증인(證人)들로 만드셨습니다. 자기들의 꿈과 희망을 접고 고향에 내려 온 제자들의 앞길을 막아 서신 주님께서 그들을 다시 'outside the camp'로 돌려 보내셨습니다. 여러분, 아시지요? 증인이라는 말 속에 ‘순교’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증인’이라는 말과 ‘순교’라는 말이 어원이 같습니다. 부활의 증인들이 된 예수님의 제자들은 순교할 각오로 세상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베드로에게 ‘eye-opening experience’가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여러분들에게도 그런 경험이 주어지기를 소원합니다. 금의 순도를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한 사람도 목욕탕을 뛰쳐나가면서 “유레카!”라고 소리쳤는데,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구원의 진리를 깨달은 우리들이 얼마나 큰 확신을 가지고 복음의 증인들로 살아야 하겠습니까?


4/10/2016 | 부활절 셋째 주일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On the Road to Emmaus

누가복음 24:13-27

오늘 읽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이 말씀은, 존 뉴톤 (John Newton, 1725-1807, 영국) 목사님이 “성경 한 장 한 장 다 찢어 없애 버린다고 해도 이 말씀만 있으면 상관이 없다”라고 말했던, 바로 그 말씀입니다. 존 뉴톤 목사님은 찬송 ‘어메이징 그레이스 (Amazing Grace, 1779)’ 가사를 쓰신 분으로 유명합니다. 그 자신이 인생의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 갔을 때 그를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한 찬송 가사입니다. 아마도 이 찬송은 세상 마지막 날까지 사람들의 입에서 불려질 찬송이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2002년에 노예제도를 반대했던 영국의 하원의원 윌리엄 윌버포스 (William Wilberforce, 1759-1833, 영국)의 일생을 영화로 만든 ‘어메이징 그레이스’가 나왔습니다.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던 윌버포스는 21세의 나이에 하원의원에 당선됩니다. 그는 1787년에 노예무역폐지 법안을 영국 의회에 제출합니다. 숱한 반대와 모함을 당하다가 마침내 1833년에 이 법안이 영국 상원의원을 통과합니다. 무려 46년만에 노예제도 폐지 법안이 통과된 것입니다. ‘어메이징 그레이스’는 이런 윌버포스의 집념이 감동적으로 그린 영화입니다. 그 영화에서 존 뉴톤 목사는 윌버포스의 멘토 역할로 나옵니다.

이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엠마오는 예루살렘에서 11km 떨어진 마을입니다. 걸어서 3시간 거리에 있는 비교적 가까운 마을입니다. 두 사람이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날은 이미 저물어 가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의 이름은 글로바 (Cleopas)라는 사람이었습니다. 나머지 한 사람의 이름은 끝내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이 두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엠마오로 걸어가면서 최근에 예루살렘에서 벌어진 일들을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그렇게 많이 흐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다는 것을 발견한 바로 그 날 저녁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그날 새벽에 무덤에 갔던 여자들이 빈 무덤을 보았다는 소식까지 듣고, 지금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짐작컨대, 이 두 사람의 고향이 엠마오가 아닌가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두 사람이 엠마오로 갈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이 예루살렘을 떠난 것으로 보아 이미 예수님를 따르던 제자들이 흩어지고 있었지 않았는가 합니다. 물론 예수님의 12제자는 그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는 제 머리 속은 아주 착잡했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 자기 고향으로 가고 있는 두 사람을 보면서 여러가지 생각과 성경 말씀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이 두 제자는 왜 예루살렘을 떠나고 있는가?” 예수님이 죽었으니까? 아니면, 예수님이 죽은 마당에 딱히 예루살렘에 머물 이유가 없어서? 아니면,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다가는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니까? 이런 이유들도 저에게는 그렇게 중요하게 들리지 않았습니다.

이번 사순절에 히브리서를 강해했습니다. 저에게는 히브리서를 한 절 한 절 꼼꼼하게 읽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히브리서 강해를 들으면서 지루하게 생각했던 사람들에게는 조금 죄송합니다만, 저에게는 아주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유대교의 제사 제도와 비교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새로운 구원의 길에 대하여 설명했습니다. 그 말씀을 읽어 가면서 새롭게 발견한 것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가 저에게 가장 감동적인 말씀이 무엇이었느냐고 묻는다면, 저는 서슴지 않고 히브리서 13:13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성문 밖에 계신 주님께 나아가서 그 분이 당하신 수치를 함께 겪읍시다.” 이 말씀이 개역성경에는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NIV 성경에는 “Let us, then, go to him outside the camp, bearing the disgrace he bore”라고 나와 있습니다.

‘outside the camp’라는 말은 예루살렘의 성 밖을 말합니다. ‘inside the camp’는 예루살렘 성 안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성 밖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outside the camp’는 바로 예수님께서 고난과 수치를 당하신 그 자리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도 그 자리로 가서 예수님께서 짊어지신 수치를 함께 당하자고 합니다. 이 말씀을 조금 확장해서 적용한다면, 우리 크리스천의 삶의 현장은 ‘inside the camp’가 아니라, ‘outside the camp’라는 것입니다. ‘inside the camp’가 성공과 야망과 출세와 인기를 추구하는 곳이라면, ‘outside the camp’는 고난과 희생과 수치를 당하는 자리입니다. 성경 어디를 읽어 봐도 히브리서 저자가 말하고 있는 이런 말씀을 찾을 수 없습니다. 크리스천의 삶의 본질을 꿰뚫는 감동적인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예수님의 제자들은 ‘inside the camp’가 아니라 ‘outside the camp’로 가서 예수님처럼 고난과 수치와 모욕을 받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히브리서 저자의 주장입니다.

예루살렘을 떠나 자기들의 고향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모습을 보면서, 히브리서 말씀이 자꾸 생각났습니다. 제 눈에 보이는 두 사람은 지금 ‘outside the camp’를 떠나 ‘inside the camp’로 가고 있습니다. 어쩌면 당연하게 보이는 두 제자의 모습이 저에게는 뭔가 잘못된 것이 보였습니다. 헨리크 샌케비치 (Henryk Sienkiewicz, 1846-1916, 폴란드)가 ‘쿼바디스 (Quovadis)’ 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이 책은 1951년에 영화로 만들어졌는데, 다시 2001년에 폴란드의 영화 감독 에르지 카발레로비치가 이 영화를 ‘쿼바디스 도미네 (Quo Vadis Domine)’라는 이름으로 리메이크합니다. 이 영화의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네로 시대에 박해를 피해서 로마를 떠나 지중해로 가는 베드로가 십자가를 지고 로마로 가는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입니다. 그 때 당황한 베드로가 묻습니다.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그 때 예수님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네가 내 양을 버리고 온 로마로 가서 다시 십자가에 못박히려고 한다.” 이 말에 충격을 받은 베드로는 다시 가던 길을 돌이켜 로마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는 로마에서 순교합니다. 성경에는 없는, 외경(外經, Apocrypha) ‘베드로행전’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두 제자는 최근에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가지고 토론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다가 오셔서 함께 걸으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눈이 가리워져서 예수님인지 알지 보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묻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서로 주고 받고 있습니까?” 그 순간 두 사람의 얼굴에 슬픈 기색이 돌았습니다 (17절). 두 사람이 오히려 예수님께 반문합니다. “보아하니 예루살렘에서 오는 것 같은데, 최근에 예루살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십니까?” (18절) 예수님은 그 일을 전혀 모르는 것처럼 “대체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하고 다시 묻습니다. 두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나사렛 예수에 관한 일인데, 그분은 하나님과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능력이 있는 예언자였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메시아라고 기대했었습니다. 지금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삼 일째입니다.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오늘 아침 일찍 무덤에 갔었는데, 예수님의 시신을 보지 못했고,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고 말하는 천사를 보았다고 합니다. 우리와 함께 있던 제자들이 무덤으로 갔었는데, 그 여자들이 말한 대로 무덤은 비어 있었고, 예수님은 볼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예수님은 “참 답답하십니다. 어찌 두 분은 예언자들의 글을 믿지 않으십니까? 예언자들의 글에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그의 영광에 들어가야 한다고 나와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말하면서 예수님은 모세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예언자들의 글과 메시아에 대한 성경 말씀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Then Jesus took them through the writings of Moses and all the prophets, explaining from all the Scriptures the things concerning himself.” 예수님은 두 사람에게 성경 전체에 나와 있는 메시아에 대한 글들을 설명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두 사람에게 메시아가 고난을 받는다는 것, 그리고 죽는다는 것, 그렇지만, 메시아는 죽지 않고 부활한다는 것을 일일이 말씀을 찾아서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나중에 이 두 사람이 서로 이렇게 말합니다. “오다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말씀해 주실 때에 마음이 불타는 것 같지 않았습니까 (Didn't our hearts burn within us as he talked with us on the road and explained the Scriptures to us)?” (32절) 이 두 제자는 이렇게 말하면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가서 제자들에게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말합니다. 두 사람은 자기들이 경험했던 일들을 모두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오늘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설교자인 저에게 주시는 가장 강력한 메시지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두 사람의 삶의 방향을 다시 바꾸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고향 엠마오로 가던 두 사람이 다시 방향을 바꾸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And within the hour they were on their way back to Jerusalem.” (33절) 한 시간이 못되어 그들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있었다고 썼습니다. 참 재치 있는 표현입니다. 저녁 식사 후였으니까 이미 날이 저물었는데, 제자들은 그 밤으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 우리의 삶의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내 생각대로 살던 삶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삶으로, 넓은 길에서 좁은 길로, 이기적인 삶에서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삶으로, 예전의 생활 (the old life)에서 새로운 삶 (the new life)으로, 삶의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의 말대로 하면, ‘inside the camp’에서 ‘outside the camp’로 삶의 방향이 바뀐 것입니다. 자신의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의 기회가 없이, 그냥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대로 ‘inside the camp’에서 살려고 했던 사람들이 예수님 때문에 ‘outside the camp’로 삶의 방향을 바꾼 것입니다. ‘outside the camp’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서 있는 곳입니다. 거기는 편안한 곳이 아니라 고난이 기다리는 곳입니다. 거기는 성공이 보장된 곳이 아니라, 수치와 모욕이 있는 곳입니다. 거기는 영광을 받는 자리가 아니라 자기를 희생하는 십자가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안에서 바뀌어진 이 새로운 삶의 방향이 아직 우리 안에서 자리를 잡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언제라도 ‘inside the camp’로 돌아가려고 하는 경향이 우리 속에 있습니다. 고향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죽었습니다. 자기들이 예수님께 두고 있던 희망이 꺾였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예루살렘이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는 이 생활을 접고 내가 살던 고향으로 돌아가자는 생각이 듭니다. 위험한 곳을 피해서 안전한 곳으로, 의지할 곳 없는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고향의 품으로 돌아가자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나름대로 ‘inside the camp’로 돌아가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이 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들의 앞을 가로 막은 것입니다. “아니, 너희들이 있어야 할 곳은 엠마오가 아니라, 너희가 떠나 온 예루살렘 영문 밖, ‘outside the camp’, 골고다 언덕,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힌 곳, 내가 고난과 수치를 당한 곳, 바로 그 자리가 너희가 있어야 할 곳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두 제자의 삶의 방향을 다시 돌려 놓으셨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습니까? 그들이 예수님에 대한 말씀을 읽었을 때,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짐으로써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아하,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게 되어 있구나! 그리스도가 부활하게 되어 있구나! 무덤이 비었다는 여자들의 말이 사실이었구나!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은 엠마오가 아니라 예루살렘 영문 밖 ‘outside the camp’로구나!”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Anyone who wants to be my disciple must follow me, because my servants must be where I am., 요한복음 12:2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계시는 곳에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inside the camp’에 계시지 않고, ‘outside the camp’에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 속에는 끊임없이 ‘inside the camp’로 들어가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의 꿈과 성공과 출세를 보장해 주는 자리, 그 자리가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자리가 아니라 예루살렘 영문 밖, ‘outside the camp’에 계시면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자. 나와 함께 십자가를 지고, 나와 함께 수치를 당하자!” 이렇게 우리를 부르십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우리가 이 말씀에 응답할 때, 우리는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삶에 소망이 생기고, 우리 교회에게 소망이 생깁니다.


4/3/2016 | 부활절 둘째 주일

성령을 받아라. Receive the Holy Spirit.

요한복음 20:19-23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궁금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은 지금 어디서 무슨 일을 하고 있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매우 궁금합니다. 성경 곳곳에 흩어져 있는 말씀들을 하나씩 읽어 보면서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재구성을 해 보려고 합니다.

마태복음 28장에 그 당시 상황을 엿볼 수 있는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지키던 경비병들은 대제사장들에게 무덤에서 일어난 일들을 그대로 보고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긴급하게 회의를 합니다. 그리고 경비병들에게 돈을 주면서 소문을 퍼뜨리라고 합니다. “밤에 예수의 제자들이 와서, 우리가 잠든 사이에 그 시체를 훔쳐 갔다”는 소문을 내라고 합니다. 순전히 조작된 소문입니다. 경비병들은 돈을 받고 시키는 대로 소문을 냅니다. 마태는 이 사실을 그의 복음서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래서 이런 소문이 유대인들 사이에 널리 퍼지게 되었고, 오늘날까지 많은 유대인들은 그렇게들 알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8:15)

그러면, 그 시각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오늘 읽은 요한복음 20장에 그 시각에 있었던 제자들의 행방을 엿볼 수 있는 말씀이 나와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같은 날 저녁에'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NKJV에는 이 말씀이 ‘The same day at evening, being the first day of the week (한 주의 첫 날인 그날 저녁)’라고 나와 있습니다. NLT 성경에는 ‘That Sunday evening’이라고 나와 있고, ‘In the evening of that day, the first day of the week (한 주일의 첫 날 저녁)’라는 footnote가 달려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같은 날 저녁을 말합니다. 시간이 제법 지났을 것 같은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지 삼일 째 되는 날 저녁입니다. 그날 저녁 제자들은 예루살렘의 한 집에 함께 모여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유대인 지도자들이 두려워서 문을 꼭 걸어 잠그고 있었습니다. 지금 밖에서는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의 시체를 훔쳐갔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언제 유대인 지도자들이 보낸 군인들이 들이닥칠지 알 수 없는 긴박한 때였습니다. 제자들은 극도의 두려움과 공포에 떨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요한은 그 때의 상황을 생생하게 그의 복음서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한 곳에 모여 있습니다. 제자들은 문을 꼭 잠그고 숨어 있습니다. 그런데, 정황상,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에 갔던 여자들이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다는 것, 그리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천사의 말을 들었다는 것, 그리고, 여자들의 말이 자기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소식을 이미 들은 후였습니다 (요한복음 20:2). 제자들은 그 여자들의 말을 가볍게 여겼습니다.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 말을 허튼 소리로 듣고 여자들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But the story sounded like nonsense to the men, so they didn't believe it).” (누가복음 24:11) 그리고, 베드로 같은 제자는 여자들이 말한 대로 무덤이 비어있다는 것을 확인한 후였습니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 “그러나 그는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요한복음 20:9)”라고 기록했습니다.

제자들은 여전히 불안했습니다. 극도의 공포가 그들을 엄습했습니다. 문을 꼭꼭 걸어 잠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누가 문을 열어 준 것도 아니고, 누가 들어온 인기척도 없었는데, 갑자기 예수님께서 두려움으로 떨고 있는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Peace be with you!” 하고 먼저 인사를 하셨습니다. 히브리 말로 ‘Shalom’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전도하러 내 보내시면서 부탁하셨던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이 집에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라고 말하여라.” (누가복음 10:5) 이 말씀 그대로, 예수님은 제자들을 찾아 오셔서 같은 메시지를 전하셨습니다. 생각해 보면, 바로 이것이 오늘날 교회가 세상에게 선포해야 할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참 안타깝습니다. 교회가 이 메시지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세상에게 줄 메시가 없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평안, 하나님의 ‘shalom’을 잃어 버렸기 때문에, 세상에게 줄 메시지를 상실하고 만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shalom’을 원합니다. 예전에 우리교회 한 벽에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준다.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라는 말씀이 쓰여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4:27 말씀이지요?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제게 말했습니다. 교회에 처음 나왔을 때 그 말씀이 퍽 인상 깊었다고요. 물론 그 때는 영어로 “Peace I leave with you, My peace I give to you; not as the world gives do I give to you”라고 KJV으로 적혀 있었습니다. 그만큼 사람들이 벽에 쓰여진 글자를 통해서도 마음에 위안을 받는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죠슈아 리브만 (Joshua Liebman)이라는 유대 랍비가 쓴 ‘마음의 평화(The Peace of Mind, 1946)’ 라는 책을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보스턴에 있는 Temple Israel에서 랍비로 있었습니다. 그가 쓴 이 책은 뉴욕 타임즈 베스트셀러 리스트에 무려 일년 동안이나 #1자리를 지켰던 책으로도 유명합니다. 이 책에 한 청년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청년은 바로 리브만 자신이었습니다. 그 청년의 이야기를 통해서 왜 자기가 이 책을 쓰게 되었는지 그 배경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청년은 자신의 미래에 대해 야심이 많았습니다. 이루고 싶은 것도 많았고 추구하고 싶은 것도 많았습니다. 건강, 사랑, 재물, 아름다움, 재능, 권력, 명예 이 모든 것을 얻는 것이 이 청년의 야심이었습니다. 한 현자가 이 청년에게 충고합니다. “여보게, 젊은이, 이 모든 것을 가진다고 해도 마음의 평화가 없이는 그대는 행복하지 않을 것이네.” 이 말에 충격을 받은 리브만은 “맞다. 우리 모두가 정말 원하는 것은 다른 어떤 것도 아닌, 마음의 평화이다. 내가 이것을 책으로 쓰리라” 이렇게 해서 1946년에 나온 책이 ‘마음의 평화 (The Peace of Mind)’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얻는 평안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잘 자라고, 공부도 잘하고, 사업도 문제 없이 순탄하게 잘 됩니다. 이렇게 아무 걱정이 없는 데서 오는 평안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평안은 그리 오래 가지 않습니다. 잠깐 동안의 평안입니다. ‘temporary peace’라고 할까요? 한 동안 별 일 없이 평안했는데 얼마 가지 않아서 걱정거리가 생깁니다. 이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평안은 이런 평안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 같지 않다”고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이 예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감동과 은혜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별 특별한 일은 아닙니다.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준다 (My peace I give to you)" 이 말씀을 읽는 순간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입니다. “아, 예수님께서 ‘나의 평안, my peace’라고 하셨으면 예수님은 자기가 가지고 있었던 그 평안을 지금 제자들에게 주시려고 하는구나!” 이런 생각을 할 때,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도 이런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마음 속에 평안을 주실 때, “아, 예수님도 지금 내가 느끼는 것과 똑 같은 평안을 느끼고 계셨구나!” 이런 생각을 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배가 됩니다.

오늘 성경을 꼼꼼하게 잘 읽어 보세요. 그렇게 두려움과 공포로 문을 걸어 잠그고 숨어 있던 제자들에게 어느 새 그 두려움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 나타나셨기 때문에요?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셨기 때문에 그랬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샬롬, 샬롬의 메시지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새 제자들의 두려움은 기쁨으로 변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전해 주신 하나님의 샬롬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As the Father has sent me, so I am sending you.”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I am sending you to the world”라고 말해야 합니다. 지금 예수님은 불안과 두려움과 걱정과 근심 속에 살고 있는 세상 사람들에게, 자기 제자들을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평화의 메시지를 듣고 지금 막 두려움을 물리친 제자들을 세상 사람들 속으로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인간에 대하여 잘 아십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연약함 (weakness)을 잘 아십니다. 우리가 얼마나 잘 넘어지는 사람들인지, 우리가 얼마나 실수투성이 사람들인지, 심지어 우리는 자기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할지도 모르는 연약한 사람들인 것을 잘 아십니다. 다시 제자들이 작은 일에도 실망하고, 절망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인 것을 잘 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을 밑바닥부터 변화된 새 사람이 되게 해서, 세상으로 내 보내려고 하십니다.

22절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성령을 받아라!” 제가 이미 여러 번 말씀 드렸습니다. 왜 성령을 받아야 하는지, 왜 우리가 성령에 대한 지식을 가져야 하는지, 그리고 성령을 받고 체험하는 일에 집중해야 하는지 이미 몇 차례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런 말씀을 알고 계십니까? “나는 물로 회개의 세례를 준다. 내 뒤에 오실 분은 나보다 능력이 더 많으신 분이다. 그 분은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I baptize with water those who repent of their sins and turn to God. But someone is coming soon who is greater than I am. He wi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and with fire).” (마태복음 3:11) 이 말씀 속에 물 세례란 말이 나오고, 성령 세례란 말이 나옵니다.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께 돌아가야 하겠다고 마음 먹은 사람들이 받는 세례가 물 세례입니다. 문제는 이렇게 마음을 고쳐 먹고, 물 세례를 받는다고 해서 이 사람이 새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잖아요? 새사람이 되는 일은 그렇게 간단하게 마음 먹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내 인생 속에 하나님의 개입이 없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이것이 성령 세례입니다. 똑 같은 뜻으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다시 태어나야 한다’라고 말한 것에 너무 놀라지 마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모든 사람도 이와 같다 (So it is with everyone born of the Spirit).”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일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가 크리스천이 아니라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면, 우리가 자기 일에 집중하고, 자기 일을 하면서 살아갈 사람들이라면 성령을 받지 않아도 됩니다. 아니, 성령을 받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살지 않겠습니다. 보다 가치 있고, 보람 있는 일을 하면서 살 것입니다. 나는 지금 나의 삶에 결코 만족하지 않습니다. 다 나은 삶을 찾고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보세요. “내가 너에게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말한 것에 놀라지 마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니고데모 (Nicodemus)라는 사람에게 한 말씀입니다. 이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아십니까? “There was a man of the Pharisees named Nicodemus, a member of the Jewish ruling council.” (요한복음 3:1) 또 니고데모에 대하여 이런 말도 나옵니다. “He was a respected Jewish teacher.” (요한복음 3:10) 바리새파 사람입니다. 유대 사회를 움직이는 70인 중 한 사람입니다. 존경 받는 랍비입니다. 그러니, 성경을 얼마나 잘 알겠습니까? 그러니, 얼마나 철저하게 경건생활을 잘 했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것들이 다 소용 없습니다. 그의 인간성이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니고데모는 그냥 그렇게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사는 삶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 온 것 아닙니까?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이대로 살고 싶으면 괜찮아요. 우리 청년들은 무난히 공부해서 학위 받고, 회사에 취직하든지, 학교에서 가르치든지 하면서 사는 것으로 만족하려면, 성령에 대하여 몰라도 상관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삶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라면, “아니, 그보다 더 가치 있는 삶이 분명히 있을 것 아닙니까?” 하고 질문을 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성령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거듭나야 합니다. 새로 태어나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사람이 하나님의 일에 눈을 뜨게 됩니다. 그래야 그 사람이 하나님의 일에 헌신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그 사람이 하나님께 쓰임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아라!” 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Nominal Christian이 있고, devout Christian이 있습니다. 전자는 이름만 가지고 있는 크리스천을 말합니다. 후자는 헌신적인 크리스천을 말합니다. 평생 nominal Christian으로 살아가려면 성령에 대하여 몰라도 됩니다. 그러나, devout Christian으로 살아가려면 반드시 성령에 대하여 알아야 합니다. 단순히 성령에 대한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을 받아야 하고, 성령을 체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인생 속에 개입해 들어오셔서 나를 새사람으로 바꾸어 놓으셔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숨을 내 쉬시면서 “성령을 받아라”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예전 크리스천들에게는 죄, 회개, 거듭남, 성령 세례, 성령 충만, 성령 체험, 이런 말들이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이런 말들이 크리스천들 사이에서, 교회에서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말 대신 세련된 다른 이슈들이 교인들의 관심을 끌었고, 목사들의 설교를 채웠습니다. “바로 이것이 크리스천의 삶의 능력을 약화 시킨 이유가 아닌가? 바로 이것이 교회의 정체성을 상실하게 만든 이유가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3/27/2016 | 부활 주일

주 안에서 굳게 서라. Stand Firm in The Lord.

고린도전서 15:55-58

여러분은 오늘 말씀 들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아가 8:6)”라는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죽음이 얼마나 강합니까? 죽음 앞에서 쓰러지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아무리 힘센 사람이라도 결국 죽음 앞에서 쓰러지고 맙니다. 그런데, 아가서를 쓴 솔로몬은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다 (For love is as strong as death)”라고 했습니다. 죽음이 강하긴 하지만, 사랑 역시 죽음처럼 강하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얼마나 강한지, 사랑의 불길은 바닷물로도 끌 수 없고, 강물로도 끌 수 없고, 남자가 자기 재산을 다 바쳐도 한 여자의 사랑을 얻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솔로몬의 사랑은 여기까지 였습니다. 바닷물로도 끌 수 없는 사랑의 열기(熱氣), 자기 재산을 다 바쳐도 얻을 수 없는 사랑, 그것이 솔로몬이 알고 있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고린도전서 말씀을 읽으면서, 죽음보다 강한 사랑이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바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 지, 그 사랑이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죽음을 이겼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세요.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죽음아! 너의 찌르는 것이 어디 있느냐?” (55절) 이게 무슨 말씀인가요? 죽음을 조롱하는 것입니다. “어디, 죽음아, 네가 그렇게 강하다지? 네 앞에 쓰러지 않는 사람이 없다지? 그래 네 무기가 있으면 한번 사용해 봐!” 이런 말씀 아닙니까? 세상에! 죽음을 놀리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을 조롱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이 말씀이 정말 무슨 말씀인지, 조금 더 자세하게 읽어 볼까요? “죽음이 찌르는 것은 죄이며, 죄의 힘은 율법입니다.” (56절) 정말 알쏭달쏭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For sin is the sting that results in death, and the law gives sin its power.” “죄란 죽음을 가져 오는 독침입니다. 죄라는 독침을 맞으면 다 죽습니다. 그런데, 죄가 그렇게 강한 힘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율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율법이 존재하는 한 죄는 계속해서 막강한 힘을 가질 것입니다. 독침을 가지고 사람을 쏠 것입니다. 그 독침을 맞으면 그 누구도 살 수가 없습니다.

계속해서 다음 말씀을 읽어 보십시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이건 또 무슨 말씀인가요? 여기에 두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율법]→[죄]→ [죽음]의 공식이 깨졌다는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여기까지만 해도 [율법]→[죄]→[죽음]의 공식이 성립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문제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부활하심으로 지금까지 누구도 피할 수 없었던 공식이 깨지고, 새로운 공식이 생겼습니다. [율법]→[죄]→[죽음]→[부활], 이런 공식입니다.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이라는 사실입니다 (로마서 10:4). 예수님을 율법의 ‘끝판 왕’ 혹은 ‘종결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고, 그 율법을 잘 지킴으로써 우리에게 주시려고 했던 모든 benefits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모두 주어지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된 마음으로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하게 지킨 것과 같은 의미를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처음부터 [율법]→[죄]→[죽음]의 공식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바로 이것이 바울이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로마서 8:1)”라고 말한 이유입니다.

다시 오늘 말씀으로 돌아가 생각해 보십시오.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죽음아! 너의 찌르는 것이 어디 있느냐?” (55절) 이렇게 죽음을 조롱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부활의 첫 열매 (The Firstfruits of Resurrection)’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고린도전서 15:23). 또 누가 죽음을 그렇게 조롱할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은 사람들 중에 처음으로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분이기 때문에 ‘부활의 첫 열매’입니다. 첫 열매가 열리면 계속해서 다음 열매가 열립니다. 씨앗을 심고, 물을 주고, 거름을 주고 해서 드디어 첫 열매가 어렵게 열렸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부터는 쉽게 계속해서 열매가 열립니다. 이 열매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입니다.

크리스천의 가장 큰 특징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누구에게 배웠습니까? 우리 주님, ‘부활의 첫 열매’이신 우리 주님께 배웠습니다. 우리 주님이 가르쳐 주셨습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원한 삶의 시작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죽음을 우습게 봅니다. 죽음을 조롱합니다.

제가 1979년에 결혼을 했습니다. 제 결혼식 주례를 서 주신 분이 제 모교인 감리교 신학대학의 학장이셨던 윤성범 목사님이십니다. 정확하게 결혼식 1주년이 되었을 때 그분이 돌아가셨습니다. 그 때 허전했던 마음은 무엇이라고 표현할 길이 없었습니다. 장례식이 학교 강당에서 있었습니다. 저도 물론 장례식에 참석했었습니다. 장례식이 진행되는데, 설교 전에, 다음 학장이 되신 변선환 목사님이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 말씀이 바로 오늘 읽은 고린도전서 15:51-58 말씀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보다 조금 더 긴 말씀입니다. 변선환 목사님이 특유의 목소리로 이 말씀을 또박또박 읽어가시는데, 전 그 때 그 말씀을 들으면서 숨이 막혀 죽는 줄 알았습니다. 전 성경 말씀이 그렇게 파워풀 (powerful)하다는 것을 그 때 경험을 했습니다. 물론 머리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powerful 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말씀의 강력한 능력을 체험한 것은 그 때 그 시간이었습니다.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죽음아! 너의 찌르는 것이 어디 있느냐?......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님의 일을 위해 자신을 드리십시오. 주님을 위해 일한 여러분의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는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성경 말씀이 끝이 나는데, ‘정말 죽음을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을 그 때 느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는 참으로 풍성합니다. 그러나, 그 은혜 중의 은혜는 죽음을 이기게 하시는 능력입니다. 저는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 3장에서 “이제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그 능력을 체험하며,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고, 그분과 같이 죽는 것입니다. 그분을 따를 수만 있다면, 나도 마지막 날 부활의 기쁨에 참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빌립보서 3:10-11)” 이렇게 말했을 때, 그가 그토록 체험하기를 원했던 ‘부활의 능력 (the mighty power that raised Jesus from the dead)’ 그리고 ‘부활의 기쁨’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볼까요?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죽음을 조롱할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설교 처음 시작하면서 죽음을 이기는 사람이 없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가, ‘부활의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를 따라 부활의 소망을 붙잡고 사는 우리가, 죽음을 이긴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것은 비유적으로 말하면, 그동안 누구도 풀 수 없었던 난제 (難題)를 푼 것과 같습니다. 수학이나 물리학에서 인류가 풀지 못한 난제가 많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1998년에 보스턴의 부호 랜던 클레이 (Landon D. Clay)가 기금을 내고, 하바드 대학교의 수학자 아더 재피 (Arthur Machael Jaffe)가 ‘Clay Mathematics Institute’를 열었습니다. 지금까지 인류가 풀지 못했던 7가지 난제가 있는데, 이 중 하나를 푸는 사람에게 100불 현상금을 걸었습니다. 그 연구소 본부가 피터보로 (Peterborough, NH 03458)에 있다고 하는데, 수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한번 방문해 보시지요. 한국에도 KAIST 안에 ‘수학난제연구센터’가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제가 7가지 난제들 제목들만 훝어 봤는데, 제가 감히 풀 수 있는 그런 문제들이 아니었습니다. 한번 이런 생각을 해 보세요. 누가 이 중 한 문제를 풀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이 사람은 틀림없이 굉장한 실력자일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고등학교 일반 수학 문제를 줘 보세요. 아마 쉽게 풀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에게 아주 어렵다는 문제도 그런 사람에게 주면 아마 쉽게 풀 것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그런 사람과 같습니다. 죽음을 조롱할 수 있는 사람은 그의 삶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도 별 것 아닙니다. 작은 문제에 불과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정말 심각한 문제라고 할지라도, 죽음을 이기는 사람에게는 아무 문제도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멋모르고 ‘부활신앙’을 말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진정한 의미에서 ‘부활신앙’을 알고 있다면, 정말 겁날 것 없을 것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이보다 더 큰 자산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 이유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일으킨 ‘부활의 능력’을 알고 싶다고 했던 것입니다.

크리스천의 삶에 대하여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본 회퍼 (Dietrich Bonhoeffer, 1906-1945, 독일)라는 이름을 들어 봤을 것입니다. 본회퍼는 그 시대가 낳은 대단한 신학자였습니다. 나치에 저항하다가 1943년에 체포되어 수감 생활을 하다가, 2차 대전이 끝나기 바로 직전에 사형을 당했습니다. 신학계로 보면 대단한 손실이었습니다. 그에 대한 구명 운동이 전개되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는 사형을 당하기 전 이런 유언을 남겼습니다. “This is the end–for me, the beginning of life (이것으로 끝입니다. 하지만 나에게는 새로운 삶의 시작입니다).” 그의 말 속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까? 예수님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었던 것처럼, 본회퍼에게도 죽음은 끝이 새로운 시작이었습니다. 누가 이런 사람을 감당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면 이 ‘부활신앙’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의외로, 성경에는 ‘부활신앙’에 대하여 아주 쉽게 나옵니다. 이런 면에서도 성경은 누구나 들을 수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복된 말씀입니다. 고린도전서 15:23 에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 ‘그리스도의 사람 (those who are Christ's)’,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 (all who belong to Christ)’,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는 사람 (all who cling to Christ)’이라고 합니다. 의외로 답은 간단합니다. 부활신앙은 그리스도에게 신실하게 속해 있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내 안에 있어라. 그러면 나도 너희 안에 있겠다 (요한복음 15:5)”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NIV 성경에 “If a man remains in me and I in him”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remain’이라는 말이 ‘머물러 있다’ ‘.......안에 거하다’ 이런 뜻 아닙니까? 무슨 굉장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꾸준하게, 성실하게 예수님 안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꾸준하게 예수님께 붙어 있는 것입니다. 꾸준하고 성실하게 예수님께 속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내 안에 들어오시는 삶의 비결입니다. 꾸준하고 성실하게 예수님께 붙어 있는 것, 이 이상 축복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한 개인의 얘기를 해서요. 그래도 이런 때에 한번이라도 칭찬을 해 주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벌써 10년 이상 되었을 것입니다. 꾸준하게 교회 꽃꽂이를 하시는 권사님이 있습니다. 그분이 누군지 모르는 분들이 많은 것입니다. 처음에 배수찬 권사님 내외가 우리교회에 나왔습니다. 어느 날, 부인 고은경 집사님이 교회 꽃꽂이를 자기가 해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이게 쉬운 것 같지만 힘든 일이거든요. 그래 제가 그랬어요. 한번 더 생각해 보라고요. 주님의 일은 한번 시작하면 끝까지 해야 하는데, 중간에 힘들다고 그만 둘 것이면 아예 시작 안 하는 것이 낫다고 말해줬습니다. 며칠 후에 고 집사님이 자기가 한번 해 보겠다고 했습니다. 그 때 이후에 지금까지 교회 꽃꽂이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지금 그 얘기를 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님의 일을 위해 자신을 드리십시오.” (57절) 이 말씀이 왜 나오게 되었는지 앞 뒤를 잘 살펴 보세요.

그리스도에게 속한 우리는 죽음을 이기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조롱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들입니다. 비유적인 의미에서, 우리는 인류의 난제를 풀어낸 탁월한 수학자와 같습니다. 죽음을 해결한 우리가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우리에게는 승리가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보다 먼저 승리를 쟁취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라서 우리도 승리를 쟁취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믿음 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Let nothing move you”라고 했네요. 오늘 우리에게 이 말씀이 새롭게 들립니다. 우리를 흔드는 것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너 교회에 나가니?” 우리는 이렇게 사람들이 우리를 바라보면서 신기한 듯이 묻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점점 우리의 기독교 신앙은 시대에 뒤떨어진 유물처럼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구원의 유일성과 절대성이 거센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크리스천의 입에서 조차 다원주의를 옹호하는 발언들이 나오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성경이 말합니다. “흔들리지 말고 지금 네가 믿고 있는 믿음 위에 굳게 서 있으라!”

오늘 말씀은 이런 말씀으로 끝이 납니다. “항상 주님의 일을 위해 자신을 드리십시오. 주님을 위해 일한 여러분의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는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58절) 이 말씀이 NIV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Always give yourselves fully to the work of the Lord, because you know that your labor in the Lord is not in vain.” (NIV) 저는 이 말씀이 ‘예수님께 속해 있다’, ‘예수님을 믿는다’, ‘예수님께 붙어 있다’는 말씀의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 속해 있고, 예수님께 붙어 있는 우리의 영성(靈性)은 그 뒤에 나오는 ‘the work of the Lord (주님의 일)’로 나타나야 합니다. 이렇게 나타나지 않는 영성은 증명되지 않은 영성입니다. 그런 영성은 얼마나 진실한 것인지 의문을 제기할 수 밖에 없는 영성입니다.

이제 저는 오늘 설교를 마치면서, 감히 이렇게 말씀 드립니다. “부활신앙이란 다른 것 아니다. 주님의 일에 우리 자신들을 온전히 헌신하는 믿음이다.” 누가 주님의 일에 온전히 (fully) 자신을 드릴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다고 믿는 사람 아닙니까?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약속되어 있다고 믿는 사람 아닙니까? 주 안에서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주의 일에 온전히 자신을 드리십시오. 여러분의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