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모음
7/23/2023 | 성령강림후 제 8주
예수의 세례 The Baptism of Jesus
사도행전 18: 24-28
비혼시대, 혼밥(혼자 밥먹기), 혼여행(혼자 여행하기) 등의 신조어가 오늘날 시대를 말해줍니다. 상대방을 맞추면서 살아가는 것이 불편하니 자신의 삶을 홀로 책임지며 살아가는 싱글라이프에 젊은이들의 공감이 더 커져가는 것 같습니다. 과거에 우리는 부대끼며 그 안에서 서로를 배우고 성숙해 졌다면 오늘날의 시대는 모두가 혼자를 적응하는 시대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동굴 증후군’은 비대면 시대를 살아가면서 사회적 고립에 익숙해진 사람들을 말합니다. 사람들을 만나지 않으면서 안정감을 느끼다 보니 다시 사람들을 만나려고 할때에 불편하고 불안한 마음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적 생각들은 세례의 의미도 희석시킵니다. 세례는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에 비유할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될때 우리는 사랑을 확인하고 약속하고 싶어 합니다. 세례를 통해 우리는 주님과 바른 관계를 맺게 됩니다. 세례는 회개의 표시이며 지속적으로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로 들어가는 입구와 같습니다. 매년 세례를 받는 이들에게 기독교 교리를 믿느냐고 문답을 하는 것도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의 세례가 무엇인지 자세히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례에는 요한의 세례와 성령의 세례가 있습니다. 19장에서 바울이 3차 전도 여행을 시작하며 에베소로 갔을때에 그 곳에서 몆 명의 제자들을 만났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했도다" 그러자 바울은 그러면 "너희가 어떤 세례를 받았느냐?"고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자신들이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고 대답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너희 선생 요한이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고 가르쳤는데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다." 그들은 바울의 설명을 듣고 즉시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세례를 주고 안수를 했습니다. 그때에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였으며, 그들은 방언과 예언을 했습니다. 이후 바울은 2년 동안 두란노 서원에서 말씀강론을 하게 됩니다. 물세례가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차원이라면 성령의 세례는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는 복음의 확신을 주는 것입니다. 복음의 확신이 들때에 우리는 증거자로 살게 됩니다.
많은 성도들은 성령세례라고 하면, 현상적인 측면을 떠올립니다. 현상적인 것은 성령의 얼굴이지요. 성령충만한 기도를 할때에 방언과 예언 등을 경험합니다. 간절한 믿음으로 기도할때 주의 권능과 힘이 임하게 됩니다. 간절한 믿음이 없이는 이러한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은 마치 풍선 안에 바람을 부는 것처럼 양적인 차원이 아닙니다. ‘주객이 전도되었다’는 말을 아시지요? 본질적인 부분이 비본질이 되고 비본질적인 부분이 본질로 둔갑될 때 하는 말입니다. 오늘날 성령충만을 말할때 흔히 일어나는 오해들입니다.
우리는 성령세례를 받으면 모든 걱정과 근심이 사라지고, 슬픔이 변하고 기쁨이 충만한 현상이라고 믿습니다. 죄의 모든 유혹으로 부터 완전히 해방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령세례를 받고도 내 뜻대로만 살아간다면 우리의 삶을 통해서 성령의 얼굴은 일그러집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성령의 본질을 깊이 알아가야 하지요. 성령은 사람의 종교적 감정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 훈련을 통해서 신앙의 깊은 단계로 들어가 주의 말씀이 전생애를 인도하도록 맡겨야 합니다. 성령의 본질 안으로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 여전히 성령님과 비대면으로만 만나고 나눔이 없다면 성령의 충만함에 흠뻑 젖어 보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열매는 우리가 공동체속에서 믿음의 뿌리를 깊이 내리도록 돕습니다. 이 자리에도 인생의 기로에 선 분들이 계시다면, 성령님의 부드러운 초대에 응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령님께서 여러분의 전생애를 인도해 가실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하나님 나라’를 주제로 한편의 드라마입니다. 18장 24절부터는 3차 전도여행의 시작인데, 누가는 2차와 3차 전도여행 사이에 아볼로라는 사람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여러분은 좋아하는 드라마를 볼때에 새로운 인물이 등장을 하면 어떻습니까? 어떤 인물일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누가는 바울의 2차전도여행을 기록한 후에 3차 전도여행을 시작하기 전에 아볼로라는 사람은 등장시킵니다. 그리고 아볼로의 정보를 줍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어려서 부터 헬레니즘 문화에 익숙한 학문적 도시에서 자란 사람입니다. 또한 학식이 풍부하고 성경에 능통한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성경은 구약성경을 많이 알았다는 뜻입니다. 그는 열심히 전도하고 예수에 대해서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에 대해서만 알고 있었다고 소개합니다. 아볼로가 예수님에 관한 지식이 아직은 불완전했다는 사실을 유추해 보게 됩니다.
1세기 고린도 교회 안에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가 있었습니다. 당시 초대교회의 베드로나 바울과 대등한 위치에 아볼로가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아볼로는 당시 고린도 교회에 영향력이 있던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당시에 교회 안에 세례로 인해서 파가 갈라졌는지, 인물의 영향력에 의해서 나뉘었는지 알 수 없지만 교회 안에 여러파가 있었습니다. 1세기 초기 기독교를 연구하는 성서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위가 확고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해석합니다. 바울의 복음적 견해는 보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교우들에게 자신은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다고 했습니다(고전 3:6) 그러나 여전히 나는 바울의 사람이다. 나는 아볼로의 사람이다 하는 사람은 육의 사람이라고 편지합니다.(고전 3:4) 오직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한분 하나님이시라는 것이죠.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한몸됨’ 대해서 언급을 하는 것입니다.
아볼로는 당시 학식에 있어서 능통하고 성경을 많이 알았지만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가 유일한 구원의 길임을 몰랐던 것이지요. 오늘날처럼 인터넷이 없었기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점차적으로 전파되기는 했지만 듣지 못한 지역도 있고, 시기적으로 유대교에서 개종한 유대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동시에 토라와 할례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때였습니다. 예를 들면, 한국은 예부터 조상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문화가 뿌리 깊이 있기 때문에 초기 선교사들은 제사 문화를 우상숭배로 규정했어야 했습니다. 한편에서는 한국의 풍습을 일방적으로 폐지하고 바꾸는 것에 대해서 한국 교인들이 스스로 결정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신중론을 제시하기도 했지요. 이처럼 초기 유대 기독교인들은 모세의 전통을 완전히 버리기가 쉽지 않았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아볼로가 요한의 세례에 대해서만 알고 있었다고 기록한 것은 예수를 가르치면서도 예수의 부활, 그리고 40일 동안의 현현, 이어서 승천에 이르는 일련의 사건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구약성경에서도 예수님을 보는 눈이 열려져야 합니다.
한밤중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보면,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파 사람이자 산헤드린 공회 의원이었습니다. 오늘날로 보면 대법관이지요.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예수님께 찾아 온 것을 보면 신경 쓸 일도 있고, 주변에 눈치 볼일도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니고데모 마음 안에 진리의 대한 갈망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한 사람들도 산헤드린 공회 의원들이었습니다. 종교적인 열심만 가지면 큰 폐해를 낳게 되는 것이지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사람들도 예수를 알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제가 선물 받은 책중에 미치 글레이저 (Mitch Glazer)박사가 쓴 ‘이사야 53장 해설서’ 라는 책이 있습니다.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회심한 랍비가 쓴 책입니다. 1894년 헝가리계 랍비였던 레오폴드 콘(Leopld Cohn 1862-1937)이 미국에 와서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영접하게 된 후 유대인들에 대해 목자의 심정을 갖고 복음을 전하는 선교회를 만들게 됩니다. 이후에 미치 글레이저 박사가 이 선교회를 이어서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어느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후 어머니에게 이사야 53장을 읽어드렸답니다. 유대교인이었던 어머니는 나한테 신약 성경은 읽지 말라고 했는데, 글레이저 박사는 이사야서를 읽어드리겠다고 말씀드리고 다시 이사야 53장을 읽어드렸습니다. 어머니는 화를 내며 신약성경을 읽지 말라고 하는데 왜 자꾸 신약성경을 읽느냐고 했답니다. 글레이저 박사는 제가 방금 읽은 것은 이사야 53장에 기록된 것이라고 어머니께 말했다고 합니다.”
이사야 53장은 메시아가 오기 700년 전에 기록된 성경인데 여러분은 묵상하게 될때 누가 생각이 나십니까?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 53:1-6)
사도행전 8장에 보면 에티오피아 내시가 성경을 읽으며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린 후에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빌립은 그가 이사야서 말씀을 읽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묻는 것을 시작으로 성경을 풀어줌으로써 예수의 세례를 받게 됩니다. 모세율법에 따라 할례를 받는 사람만이 선택받은 백성이라면 내시는 부적합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누가는 내시와 같은 자들에게도 닫혀 있었던 하나님의 나라가 모든 사람, 모든 나라에게 열려진 것을 빌립과 에티오피아 내시의 만남을 통해서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의 세례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스스로 변화 시킬 수 없는 연약한 자에게도 하나님 나라의 주권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매일 매일 예수님 안에서 생겨나는 믿음의 의를 통한 거룩성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은 모든 일이 잘될꺼라는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의 변화가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믿음의 대상이 달라지면 우리의 기도가 달라집니다. 나에게 필요한 말씀의 구절만 적용하며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에는 믿음의 지체들과 분쟁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여러 문제들로 분쟁할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기에 약한 자들과 형제들을 배려하라는 해결책을 제시했습니다. 왜냐하면 분쟁은 서로가 높아지려는 마음을 갖고 있을 때 발생합니다. 성육신(Incarnation)의 교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모든 영광을 비우시고 십자가에서 수치와 죽음을 당하신 것입니다. ‘믿음의 하향성’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를 포기하고 인간의 몸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나를 증명하는 방법을 배워나가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지구상의 수십억명중에 한 사람이 아니라 단 하나밖에 없는 존재로 여겨 주십니다. 그래서 한번 구원한 존귀한 자녀는 하나님의 손으로 보호하시고 지켜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은혜는 맛을 보면 볼수록 삶속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바울시대나 오늘날이나 하나님의 기준으로 보면 의인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었다는 교리는 신론과 기독론과 삼위일체론의 핵심인데 우리는 논리적으로 성육신의 교리를 다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무조건 믿으라고만 해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수천년 동안 기독교 교리를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예수의 길을 따라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논리적으로 오류가 있었다면 이미 기독교 교리는 무너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깨달음으로 믿어진 것입니다. 이것의 기독교의 신비입니다. 믿을 수 없는 것이 믿어지기 때문에 성령의 역사임이 확실합니다.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은 증거자들로 살았습니다. 우리는 믿음을 통해서 성경의 66권을 관통하는 주제가 ‘하나님 나라’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인간의 마음은 높은 곳으로 향하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이 성육신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게 합니다. 여러분의 믿음은 낮은 자리를 향해 있나요? 아니면 높은 자리를 향해 나아가고 있나요? 믿음의 결과는 오직 하나님께 속한 영역일뿐입니다.
아볼로는 이 온전한 복음을 듣고 성령의 감동이 임하니까 자신이 전했던 이들에게 다시 온전한 복음을 전하고 싶어졌습니다. 아볼로는 고린도 교회로 복음을 전하러 갑니다. 이것이 전도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서, 믿음의 공동체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보여주고 계십니다. 전도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27 그런 뒤, 아볼로가 아가야 지방으로 가고 싶어 하자, 신도들은 그를 격려해 주었다. 그러면서 그에게 편지를 써 주어, 아가야 지방의 제자들로 하여금 그를 따뜻하게 영접해 주도록 했다. 그리하여 아가야에 도착한 아볼로는 하나님의 은혜로 믿게 된 뭇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28 그것은, 아볼로가 회중 앞에서 유대인들의 말을 조리 있게 열정적으로 논박하는 가운데, 성경 말씀을 인용하여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힘 있게 증거했기 때문이다.
27절에는 그리스도를 만난 성도들의 믿음의 태도가 보여집니다. 예수의 세례를 먼저 받은 평신도 브리스길라 부부는 어떻게 보면 목회자인 아볼로의 증거를 듣자 그의 부족함을 알아차렸지만 핀잔을 주기 보다는 오히려 친절하게 온전한 복음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또한 아볼로도 그 가르침을 겸손하게 배우며,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 없는 무능함을 깨닫게 됩니다. 전에는 자신을 증명해는 삶을 살았다면 이제는 예수님을 증명해 내기 위해서 아가야 지방으로 갑니다. 기독교 변증은 내 마음을 전하는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는 삶입니다. 전에는 가르침을 통해서는 자신을 드러내는 마음이 있었다면 이제는 예수만을 높이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심는이가 위대하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물을 주는 이가 위대하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심는 일이 힘드냐, 물을 주는 일이 힘드냐 불평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는 일은 자기의 주관대로 개인적인 성향대로 누가 위대한가를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는 심는이도 필요하고 물을 주는이도 필요합니다. 수많은 교회의 일꾼들이 그렇게 걸어왔습니다. 자라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배제 했을때 우리의 모든 행위는 도토리 키재기에 불과합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내가 가진 것을 기준 삼게 될때가 많습니다. 그것이 소유이든, 지식이든, 믿음 생활에 있어서든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면 우리 안에 교만은 자취를 감추고,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리 앞에서 우리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느끼게 될때에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고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집니다. 우리 모두는 복음의 증인입니다. 심는 일도 물을 주는 일도 즐거운 일입니다. 즐겁게 성실하게 지속하다 보면 아름다운 공동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라가게 하십니다. 삶이 분주하고 마음이 불편하면 심는일도 물을 주는 일도 쉽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복음의 증거자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몇년전 제가 살고 있던 도시에 전기와 물이 끊겨서 모든 것이 멈춘 것 같은 때가 있었습니다. 자고 있는 두 아이를 안고 16층까지 계단으로 올라가야 했습니다. 처음 3층까지는 아빠의 사랑으로 가능했는데 층이 오를수록 땀도 나고 아이들을 깨워서 걸으라고 할까, 쉬다 갈까, 수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의 따뜻한 팔이 저를 감싸고 곤히 잠든 아이들을 보니 저에게 기대고 의지하는 작은 아이들의 존재가 감사하고 뭉클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앞으로 아이들이 세상에서 수많은 일을 만나겠지만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랑하는 자녀들을 안고 묵직한 한발을 떼며 계단을 올라가는데 먼저 걷고 있는 걸음이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힘이 될수만 있다면 더 잘 걸어내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 사랑에 집중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에 집중하며 16층까지 천천히 찬양을 부르며 걸어 올라갔습니다. 그냥 올라가도 숨이 차는데 두 아이를 안고 올라가니 점점 속도가 느려졌겠지요. 그러나 내가 안고 있는 두 아이의 무게가 짐이 아니라 사랑임을 느끼며 계단을 올라갔습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이 그런 걸음 아니겠습니다. 무거워도 힘들어도 한걸음 한걸음 내딛으며 하나님 안에 머물러 사는 삶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때에도, 어느 곳에서도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작은일이든 큰일이든 일상속에서 복음의 확신으로 담대함으로 살아가십시요. 그리고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연합하여 선을 이룰수 있는 귀한 과정에 동참하시기 바랍니다. 개인의 성숙, 공동체의 성숙, 가정의 성숙의 과정 가운데에 우리가 꿈꾸는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과 교회에서 그 하나님 나라를 아름답게 살아내는 귀한 성도님들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7/16/2023 | 성령강림후 제 7주
아름다운 사람은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Beautiful People Don’t Just Happen
사도행전 18:18-23
그리스도인의 삶은 기독교라는 큰 이야기 안에 자신을 위치시키는 법을 배우는 여정입니다. 성경을 믿고 날마다 묵상하는 일은 숨을 쉬듯이 지속하는 것입니다. 정말 말씀을 믿고 살아 간다면 변화되지 않는 것이 오히려 기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인격과 성품을 변화시키십니다. 왜 말씀의 인도함을 받아야 하는가? 인간의 욕망은 죽을 때까지 사라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정욕은 그대로 내버려 두면 점점 더 욕망의 손과 발이 향하는 곳으로 끌려가게 됩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지켜가기 위해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이가 어릴 때 자전거 타는 법을 알려 주었습니다. 아빠를 믿고 계속 페달을 밟다 보면 균형을 잡게 되고 잡았던 손을 놓아도 혼자서 자전거를 타게 됩니다. 아이는 아빠가 잡아 주고 있다는 믿음을 갖고서 두려움을 이겨낸 것이죠. 주님이 우리의 삶을 붙들어 주고 계십니다. 성화의 삶은 믿음에 의한 하나님의 선물이기는 하지만 믿음생활은 자전거를 타는 것과 같아서 페달을 밟는 수고를 지속하지 않으면 거룩한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힘을 잃어 버리게 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의 주위에서 일하고 계심을 믿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일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의 2차 전도여행의 마무리 단계에 있는데, 짧은 본문 안에 작별이라는 단어가 2번이나 사용되고 있습니다. 한 평생 길 위에서 작별과 떠남의 여정을 살았던 바울의 걸음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만남과 작별 그리고 떠나는 발걸음 안에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는 삶을 살았습니다.
18 ○ 이런 일이 있은 뒤, 바울은 얼마 동안 더 고린도에 머물러 있다가, 마침내 신도들과 작별인사를 하고 배편으로 수리아를 향해 떠났다. 그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바울과 동행했다. 그리고 항해를 하기 전에 바울은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다. 그것은 예전에 하나님께 서원했던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울은 1년 6개월 머물면서 함께 했던 교우들과 작별하고 떠납니다. 다른 지역에서는 극심한 박해나 소동을 피워서 어쩔 수 없는 작별이었지만 고린도에서의 작별은 다릅니다. 고린도 지역에 교회를 세우고 난 뒤에 아쉬운 작별이었습니다. 긴 선교 여행 중에 찾아온 여유와 평온을 뒤로하고 떠나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인간적인 감정과 서운함은 뒤로합니다. 하나님 뜻 안에서 영원한 이별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헤어짐의 현재가 아니라 다시 만남의 미래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면 매일의 삶과 작별하고 새 옷을 입게 됩니다”
매일 매일 새로운 옷을 입는다고 해서 완전해 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존재 자체가 변화된 것이지 새옷을 입는 행위는 결과일 뿐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완전한 인격, 온전한 지성을 갖추는 일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존재의 변화를 통해서 매일 새롭게 입혀 주시는 옷을 경험할 뿐입니다.
바울은 고린도를 떠나 항해를 하기 전에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습니다. 서원을 하는 것이죠. 나실인의 서원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에 감사하기 위해서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바울은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도 이 땅에서 하늘 나그네로 사는 것에 믿음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당시 그리스도교가 종교로 인정받지도 못하던 시대에 유대인들과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바울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1세기 기독교의 상황은 그리스도교 종교가 정식으로 출발하지도 않은 상태입니다. 유대인들이 법정에 가서 바울을 고소를 하는 것도 다 이런 상황이었음을 대변해 줍니다. 18절에 ‘이런 일이 있은 뒤’ 라는 말은 당시 로마제국 내에서는 로마제국이 허용한 종교만 전할 수가 있었는데, 유대인들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유대교가 아니라고 강조하며 바울의 말이 사회를 어지럽히고 있다는 식으로 고소했던 사건을 말합니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한지 몇개월 후에 아가야 지역에 갈리오라는 신임총독이 부임하게 됩니다. “갈리오가 아가야 총독 되었을 때에 유대인이 일제히 일어나 바울을 대적하여 법정으로 데리고 가서” (12절) 일반적으로 이렇게 총독이 교체되어 부임하면 민심을 얻기 위해 처음에는 민원을 많이 들어줍니다. 유대인들이 그것을 노리고 신임 아가야 총독 갈리오에게 바울을 고소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이 자기들의 율법을 어겼다고 하면 로마 총독에게 통하지 않을 것 같아서 로마제국의 국법을 어겼다고 고발합니다. 그러나 당시 아가야 지역 로마 총독이던 갈리오의 법정에서 바울은 죄가 없다고 판결을 내렸습니다. 바울이 전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불법이 아니니 복음을 계속 전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나중에 이 갈리오의 무죄 판례는 바울이3차 전도여행 중에 로마로 향하는 길을 열게 하는 놀라운 준비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가야 총독으로 갈리오를 준비해 두신 것은 우연한 사건인 것 같지만, 하나님의 뜻이 로마에까지 전파되도록 하려는 예비하심이었습니다.
2차 대전 때 빅터 프랭클(Viktor Frankl: 1905-1997)이라는 심리학자이면서 의사였던 그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옥중생활을 하면서 수험번호 외에 자신을 증명해 주는 것은 없었습니다. 첫날 앞서 죽었던 포로가 입었던 옷을 받았는데 그 옷 주머니에서 나온 히브리어 성경 구절이 적힌 종이 조각이 나왔습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전심으로 사랑하라.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해 영혼을 사랑하라’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빅터 프랭클은 죽어야만 나갈 수 있는 고통의 현장에서 말씀을 통해서 마음의 새 옷을 입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그를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도록 하는 삶의 의미가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가 위기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진짜 위기는 하나님 나라를 향한 갈망을 잃어 버리는 것입니다. 일제 식민주의 시대에 나라를 뺏앗겼을 때에도 군사독재 박해 속에서도 교회는 더 강하게 자리 잡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참 신비합니다. 바울은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면서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고 고백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리스도라는 말에 너무 친숙해 있어서 깊이 생각하지 않고 지낼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했던 제자들은 자신의 것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즉 "하나님 나라"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합당한 자로 살아낸 것입니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멀리서 바라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손에 들린 쟁기를 들고 밭을 일궈야 하는 일입니다. 어쩌면 고난이 예견된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말씀하셨습니다.(막8:34) 때때로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평안한 길을 뒤로하고 혼자 걸어야 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모세도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며 하나님 앞에 홀로 설 때가 있었습니다.
출 34:3 “아무도 너와 함께 오르지 말며 온 산에 아무도 나타나지 못하게 하고 양과 소도 산 앞에서 먹지 못하게 하라”
우리 모두는 각자의 자리에서 주님과 동행하며 홀로 지어야 할 몫이 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대신해 줄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홀로 있는 시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마다 주어진 그 몫을 주님과 함께 감당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친밀함으로 동행해 주십니다. 바울이 에베소 지역에 잠시 머물고 사람들과 작별하며 의미심장한 말씀을 건넵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다면, 내가 반드시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사역을 하기 싫어서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자신을 환영하는 지역에서 더 오래동안 머물며 있기를 바랄 것입니다. 바울에게는 내가 하고 싶다고 해서 내가 다 할 수 없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2차 전도여행을 마무리하면서 하나님의 뜻이라면 내가 반드시 돌아 올 것이라 말했던 것입니다.
실제로 바울의 3차 전도여행때에 3년 동안 에베소 지역에 머물며 사역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은 지금 주어진 단순한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주님의 돌보심과 은총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은 내면의 나침반이 있어서 내가 머물고 싶은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향하신 방향으로 걷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은 사람들의 환영을 받기도 하지만 배척을 당하기도 합니다. 바울에게는 오직 하나님의 나라의 뜻을 이루는 것이 존재 이유이자 기쁨이었습니다. 그는 인생의 환란을 당하게 될 때에는 찬양하고 기도했으며 속히 지나가기를 기다렸습니다. 자신을 환영하는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뜻이 있다면 돌아올 것이라 말하고 가던 길을 갈수 있었습니다. 가끔은 신앙의 길에서 그 목표가 사라진 것처럼 보일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희미해 보이고 하나님은 멀리 계신 것 같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도들 마음의 양심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십니다.
상대주의가 가득한 세상에서 우리는 자기의 지식이나 경험을 절대화하며 살아갑니다. 자신의 감정을 믿다가 우울감에 깊이 빠지고 절망의 깊은 골짜기로 들어가게 됩니다. 세상은 저마다 자기의 상처를 싸매기에 급급한 시대입니다. 모두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바쁩니다. 그러나 나의 스토리를 써내려 가는 삶이 아니라 십자가 복음의 스토리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십시요. 아름다운 사람은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살아가면서 실패도 해보고 낮은 자리에서 가난한 자의 마음도 느껴보고 처절하게 몸부림치며 하나님을 찾아보고 십자가의 복음이 내 삶의 전부라고 고백도 해보아야 합니다. 그러한 과정들을 통하여 삶에서 십자가를 붙드는 성숙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너무도 바빠졌습니다. 먹고 사는 것도 어느 정도는 편안해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자녀를 양육하는 것도 최고가 되고 싶어합니다. 모든 것이 풍성한 때를 지나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편안함이 하나님을 찾지 못하는 이유들이 되어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 나오실 때에는 빈손으로 나아오십시오. 삶의 문제, 한숨, 풀리지 않는 어려움, 소유해야 하는 높은 목표, 불안한 삶의 이유들을 다 내려놓고 십자가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나의 것을 온전히 내려놓지 않고는 바쁜 세상에서 십자가는 보이지 않습니다. 저녁에 기도하러 이 자리에 나오면 작은 불빛이 비춰주고 있는 본당의 십자가가 보입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위로이지요. 이 십자가로 많은 말을 하고 싶던 마음을 멈추게 됩니다. 십자가 앞에서 살아내고자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십자가가 우리의 삶의 소유가 되는 은혜를 경험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2천년전 예수님은 고난을 한몸에 지니고 비틀거리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예수를 죽이려 할 때 고난의 종으로 인류 역사에 희생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오늘날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 해도 십자가에 또 다시 달리셔야만 인간을 구원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했습니다. 예수가 구원자 되심을 증거하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은 강박적 불안을 조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평안과 기쁨이 내면에 솟아나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고 예배를 드려도 자꾸 불안하다면 충분한 시간을 들여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신뢰해 보십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을 더 깊이 갈망해 보시기 바랍니다. 인간은 욕망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이라는 세상속에서 건져 내시고 출애굽 공동체를 인도해 가셨습니다. 그들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움직일 때에만 행군을 했습니다. 그리고 성막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출애굽 당시처럼 우리를 인도해 주십니다. 주어진 하루 하루를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살아가기로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성도는 예수님께 모든 것을 건 사람들입니다. 어떤 선택을 하기 전에 잠잠히 기도하고 걷다 보면 가장 아름다운 삶을 하나님은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눈이 부시게’라는 드라마가 많은 이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었다고 합니다. 평범한 일상을 소중하게 느낄 수 있게 해준 드라마라고 하는데요. 드라마에 이런 대사가 있습니다.
“내 삶은 때론 불행했고 때론 행복했습니다. 삶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지만 그럼에도 살아서 좋았습니다. 새벽에 쨍한 차가운 공기. 꽃이 피기 전 부는 달큰한 바람. 해 질 무렵 우러나는 노을의 냄새. 어느 하루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지금 삶이 힘든 당신.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당신은 이 모든 걸 매일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대단하지 않은 하루가 지나고 또 별거 아닌 하루가 온다 해도 인생은 살 가치가 있습니다.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엄마였고, 누이였고, 딸이었고, 그리고 나 였을 그대들에게…”
여러분, 지금의 시간이 그 어느때 보다 눈이 부시게 밝은 날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함께 걷는 우리의 이 길을 통해 서로의 빛이 되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말씀 안에서 살아내는 것. 삶으로 함께 한다는 것을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믿음의 여정 안에서 하나님께 속한 삶을 산다는 것이 그저 감사한 오늘입니다. 한주도 우리를 부르시는 그곳으로 우리의 마음이 향하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7/9/2023 | 성령강림후 제 6주
꼭 한번은 걸어야 할 길 A path you must take…at least once
사도행전 18:1-11
2000년 일본 혼다사에서는 인간처럼 걷는 로봇을 만들기 위해 약 2000억원을 투입해서 인간형 로봇인 ‘아시모‘를 만들었습니다. 세계 최초의 두발로 걷는 로봇이었습니다. 그런데 움직임이 인간에 비하면 부자연스러웠습니다. 이후 2017년도에 보스턴 다이내믹스에서 ‘아틀라스’라는 이족보행 로봇을 만들었는데, 두발로 걷는 움직임이 세계에서 가장 자연스럽게 구현한 평을 받고 있습니다. 2023년 개발된 ‘아틀라스’를 영상으로 보니까 그 움직임이 정말 인간과 흡사해 보입니다. 인간안에 있는 하나님의 창조성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의 일생은 참 신비롭습니다. 인생을 걸어가며 그리스도의 인격과 신성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인생의 길을 잘 걷도록 놀라운 능력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동안에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나사렛에서 부터 갈릴리 바다 부근 팔레스타인 지역을 수차례 오고 가시며 보여 주셨고, 마지막 여정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이었는데 그 길은 생명의 길, 치유의 길, 낮아지심의 길이었습니다.
바울이 전도여행을 하며 걸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거리는 약 11만 마일입니다. 당시 교통수단도 없던 때였는데 바울을 이토록 걷게 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보이지 않는 힘이 어디서 부터 왔을까요? 그리스도에게서 희망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 희망을 따라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전하며 주어진 길을 걸었습니다. 우리가 걷고 있는 믿음의 길을 생각해 보시며 오늘 말씀을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의 2차 전도여행의 경로들을 보면 그 안에 신약성경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가 걸은 길은 우리로 하여금 훨씬 더 근원적인 세계를 향해 자유롭게 나가도록 도와줍니다. 마가 다락방에 사람들은 한곳에 모였었지만 성령강림 이후에 성령의 역사는 점차적으로 넓게 넓게 퍼져 나갔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는 말씀 그대로 퍼져 나갔습니다.
오늘 본문 1절은 “1 그 후에, 바울은 아테네를 떠나 고린도로 갔다.”라고 말씀합니다.
고린도라는 지역은 당시 상업과 무역의 요충지로 물질적으로는 번영 했지만 도덕적 타락이 심각하여 음란한 도시로 유명하였습니다. 실제로 이곳에 있던 아프로디테 신전에는 천여명의 여사제들이 있었고 종교적으로 매춘을 조장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당시에 ‘고린도인이 되다’라는 헬라어 ‘코린티아조마이 (κορίντιαζομαι)라는 동사는 ‘성적으로 부도덕하게 되다’라는 의미를 가질 정도였으며, ‘코린티아스테스 ‘(κορίντιαςτες)는 ‘매춘부와 어울리는 사람’을 의미했습니다.
‘그 후에’라는 단어 안에는 바울이 걸어온 길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 길은 걸어야 할 길 그리고 걸어 온 길입니다. 고린도 지역에 오기 전까지 바울의 길을 역으로 따라 가보면 빌립보에서 복음을 증거하다가 많은 매질을 당하고 깊은 옥에 갇혔었습니다. 한밤 중에 기도하는데 옥문이 열렸고, 간수의 가정을 구원하여 주시는 복음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 후에’ 바울과 실라는 지친 몸을 이끌고 100마일이 넘은 지역인 암비볼리, 아볼로니가를 지나서 데살로니가 지역에 도착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그곳에서 몇 주간에 걸쳐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전했는데 지역의 유대인들이 불량배들을 동원해서 소동을 피웠습니다. 바울이 잠시 머물던 야손의 집까지 침입하여 소란을 피웠습니다. 결국 바울 일행은 그들을 피해서 한밤 중에 베뢰아로 피신하게 됩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마음이 너그러워 믿는 사람이 많아지는가 했는데, 데살로니가 지역에 있던 불량배들이 다시 와서 무리를 선동하여 소동을 벌였습니다. 결국 실라와 디모데는 베뢰아에 머물고 바울만 배를 타고 4일 거리인 아테네로 홀로 가게 됩니다.
아테네는 헬라 철학의 본상지로 모든 신들의 이름이 새겨진 제단이 가득했던 지역입니다. 우상이 가득했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무지한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에게는 어려서 부터 헬라 철학으로 정통한 유명한 학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말리엘이라는 당대 최고였던 학자의 제자로 훈련도 받았었습니다. 그런 바울이 학문과 지성인들의 고장 아테네에 도착해서 보니 옛날에 꾸웠던 꿈이 마음 깊은 곳에서 다시 올라 왔을까요? 자신이 이제껏 배웠던 헬라 철학으로 복음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면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수 있을 꺼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테네에서는 교회가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복음의 열매도 몇사람 외에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바울보고 말쟁이라고 조롱을 하였습니다.(17:18) 철학적 논쟁만 하다가 복음사역에 있어서는 철저하게 실패하고 맙니다. 바울이 십자가 신학을 철학적 논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 묻은 사랑으로 전했더라면 어땠을까요? 바울이 아테네에서는 세례를 주거나 예배를 드렸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이성과 쾌락을 중시하던 철학에 빠져 있었던 이들은 바울이 전한 진리를 받아 들이지 않았고 배척했음을 볼수 있습니다. 아테네는 신들의 고향이라 알려져 있어서 그곳 사람들이 종교성이 있었지만 그리스도의 복음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후에’ 아테네에서 고린도까지 발걸음을 옮기게 됩니다. 그 거리는 대략 50마일 정도였습니다. 자신이 꿈꿨던 철학의 도시에서 복음 사역이 실패하고 난 후 바울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좁고 협착한 땅을 밟으며 고린도까지 오는 그 걸음이 무겁지 않않겠습니까? 홀로 쓸쓸하게 고린도로 들어가는 바울이 연상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살아계신 하나님은 그에게 놀라운 만남을 준비해 놓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귀한 만남이 성사(成事)됩니다.
당시 고린도에 들어 갔을때 바울의 마음이 잘 표현되어 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3절인데요. “3 내가 여러분에게 가서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 나는 실로 연약하고 두려웠으며 몹시 떨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지역에 들어갔을때 느꼈던 마음의 상태입니다. 바울은 아테네에서 강팍한 마음 밭의 사람들과 논쟁하다가 지쳤습니다. 지성에 갇힌 이들과 논쟁하며 두려웠습니다. 이미 알고 계셨던 하나님은 선물을 준비해 두셨는데 바로 아굴라과 브리스길라 부부입니다.
2 거기서 본도 출신의 ‘아굴라’라는 유대인을 알게 되었다. 로마 황제 글라우디오가 유대인들에게 로마를 떠나라는 추방령을 내리자, 그는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얼마 전 이탈리아를 떠나 그곳 고린도에 와 있던 참이었다.
아굴라의 고향은 본도 (Puntus)입니다. 본도는 비두니아 지역의 북동쪽에 있는 도시로 아굴라가 본토 유대인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학자들은 오순절 성령강림을 목격한 유대인들이 본도에 가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고, 이때 아굴라가 복음을 들었을 가능성이 있을거라 추측합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 부부는 제국의 수도인 로마로 이주하여 그곳에 정착했습니다.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보면 아굴라는 로마에서 상당히 큰 사업가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는 천막을 만드는 사업을 했는데 제국의 수도 로마에 천막제조업자로 잘 정착했던 아굴라가 로마를 떠나야만 했습니다. 당시 로마에는 대략 2만명 가량의 유대인이 거주하고 있었고, 유대교인들은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는 일을 일삼게 됩니다. 지역에서 발생하는 폭동들이 사회적 문제가 되니까 로마 황제였던 글라우디오가 로마 시민권이 없는 사람들은 모두 로마에서 나가라는 추방령을 내렸습니다. 이로 인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내외도 고린도 지역으로 오게 된 것입니다. 정치적으로 보면 로마 황제의 추방령이지만 하나님의 계획으로 보면 바울에게 좋은 선물을 주시기 위한 위대한 섭리였습니다.
황제의 추방령으로 인해 고린도 지역에 바울 보다 먼저 이주하게 된 것입니다. ‘그 후에’ 바울은 먼저 온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의 사업장에서 천막 노동자로 일하게 됩니다. 그들을 찾아 간 것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취직한 곳에서 일을 하다가 바울은 어떻게 예수를 만나게 되었는지 간증을 나누지 않았겠습니까? 바울의 이야기는 복음의 이야기였습니다. 바울의 이야기를 듣던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그의 이야기 속에서 자신들이 걸어온 길을 비춰 보았을 것이고, 내외의 마음이 풍요로워졌을 것입니다. 훗날 바울은 이들 부부를 ‘동역자’라고 부릅니다. 그들이 자기를 위해 생명의 위험도 무릅썼다고 말합니다. 이들 부부는 바울이 에베소로 갈때에 함께 갑니다. 3차 전도여행중에 로마에 보내는 편지에 보면 ,
“3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4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숨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롬 16:3-4) 사역의 결실이 사람이라면 사람은 지나가도 함께했던 사랑은 남는 것입니다. 바울은 믿음의 길에서 예기치 않게 찾아 온 부부를 통해서 새힘을 얻었고, 만남은 그에게 행복한 선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때마다 꼭 필요한 사람을 곁에 두심을 알아야 합니다.
고도원의 아침 편지의 글을 소개합니다. “성실(誠實)에는 마침표가 없다. 나이도, 황혼기도 없다. 매사 성실히 임하되 즐길 줄도 아는 사람, 자기 일에 몰두하되 옆과 뒤도 돌아볼 줄 아는 사람, 그가 곧 이 시대 최고의 멋쟁이이며, 자신에게도 남에게도 소중한 사람이다.”
사도 바울은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집에 머물러 살면서 힘을 내어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핍박은 그곳에서도 있었습니다. 본문에도 보면 유대인들은 바울에게 심하게 대들면서 욕설을 퍼부었고, 심지어 예수를 모독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항의의 표시로 자기 옷의 먼지를 털면서 “여러분들이 심판을 받아 멸망을 당할지라도 그것은 당신들의 책임이지, 나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떠나고자 합니다. 바울은 당시 유대인들의 박해로 인해 매우 큰 곤경에 처하였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고린도를 떠나서 이방인에게 복음 증거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들 내외는 박해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바울 옆에서 도와 주었습니다.
사람이 감정이 상하면 아무리 선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감정에 휘둘려 처리할 수도 있습니다. 부정적인 감정은 ‘힘들다, 더 이상 소망이 없다’라는 생각을 부추깁니다. 받은 은혜가 줄어들게 되니 은근히 하나님을 원망하게 하고 믿음 생활해도 의미가 없다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나 감정은 끝이 아닙니다. 그 길 위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면 생각이 바뀝니다. 믿음의 길에서 좋은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십시요. 믿음의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주위에 예수 그리스도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많이 두셨습니다.
이 도시에는 나의 백성이 될 사람이 많다고 말씀하십니다.
9 어느 날 밤,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나타나 말씀하셨다.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너는 침묵하지 말고, 계속해서 말하여라.10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아무도 너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이 도시에는 나의 백성 될 사람이 많다.”11 그래서 바울은 일 년 육 개월 동안 고린도에 머물면서,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쳤다.
바울은 고린도에 머물러 있던 ‘어느 날’ 밤에 신비로운 환상을 봅니다.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너는 침묵하지 말고, 계속해서 말하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아무도 너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이 도시에는 나의 백성 될 사람이 많다.”
여러분 보스턴은 많은 이들이 찾아오는 도시입니다. 보스턴 지역에도 주님은 ‘나의 백성이 될 사람이 많다’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사람이 들어야 할 참된 진리는 복음 외에는 없습니다. 우리는 두려워 하지 말고 침묵하지 말고 ‘이 성에 내 백성이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이 말씀을 다시 붙들었습니다. 겉으로 볼때는 보이지 않아도 사실 모든 사람은 복음을 필요로 합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고린도 성안에 구원 할 영혼들이 많다는 것을 보게 하셨습니다. ‘이후에’ 바울은 고린도에서 일년 육개월 동안 머물렀다고 진술합니다. 이때 고린도 교회가 세워지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곳에도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사람들, 삶의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들, 사랑할 이유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땅끝에 머물고 있는 사람에게는 복음을 지닌 사람만이 갈수 있는 것입니다. 언제나 땅끝은 주님의 교회가 세워지는 곳입니다. 그곳에는 치유가 있고 새로운 삶이 시작됩니다. 당장 어떻게 걸어야 할지 모르는 분들은 먼저 기도하며 한곳에 머무르십시요. 여러분의 교회가 기도의 등불을 켜고 준비된 동역자로 서 있습니다. 우리는 몸의 지체들입니다. 스스로 홀로 설수 없는 교회들이 함께 모여 있으면, 가야할 방향이 보이고 함께 걷는 이들을 만나게 됩니다.
복음을 증거하는 길에 왜 고난을 만나게 될까 질문하게 될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걷는 길에는 꼭 평탄한 길만 있지는 않습니다. 우리 앞에 놓인 길은 가고 싶은 길이 아니라 걸어가야 할 길이기 때문입니다. 걷다 보면 믿음의 근육이 붙고 가야할길에 대한 분명한 목적을 찾게 될것입니다. 하나님이 준비해 놓으신 만남은 서로의 믿음의 이야기가 만나게 되는 놀라운 복음의 현장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에 직접적으로 간섭하지 않은 것 같아도 신실하신 하나님을 끝까지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꼭 한 번은 걸어야 할 길입니다. 성령님은 우리 보다 앞서 가시며 놀라운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설교를 마치며 이사야 43장 말씀이 생각나서 함께 읽고 마치겠습니다. “1 그러나 이제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주께서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주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속량하였으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나의 것이다. 2 네가 물 가운데로 건너갈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하고, 네가 강을 건널때에도 물이 너를 침몰시키지 못할 것이다. 네가 불 속에 걸어가도, 그을리지 않을 것이며, 불꽃이 너를 태우지 못할 것이다.”
때로 두려운 길 일지라도 우리가 꼭 한번은 걸어야 할 소망을 향한 길이며, 때로는 외로운 길입니다. 그러나 그 길을 함께 걷기를 소망합니다.
7/2/2023 | 성령강림후 제 5주
예수의 영에 이끌리는 사람 A person led by the Spirit of Jesus
사도행전 16:16-25, 요한복음 3:17
사람들은 자신의 미래에 대해 관심이 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사람들도 이기적인 방법으로 미래를 알아내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자기들의 운명을 스스로 통제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이교도의 마술사들을 보면 자연현상이나 사람의 꿈을 통해서도 미래를 예측하려고 시도했습니다. 오늘날도 비슷합니다. 선거철만 되면 정치 후보들 가운데는 무속인들을 찾아가 제물을 차려 놓고 정성을 다해 치성(致誠)을 드립니다. 대한민국에 무속인의 수가 최소 100만명에 이르는 것을 보면 점을 통해 미래를 알고 싶은 인간의 욕망이 잠재되어 있는 것이겠죠. 공허함과 미래의 대한 불확실함이 커져갈수록 사람들은 자신의 미래에 관심이 더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한입니다.
하나님이 생명의 창조자이시고, 시작과 끝의 주관자가 되십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세상 민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2천년 전에 때가 되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통해 세상의 마지막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복음이 온 세상에 선포되어질 때에 그 끝이 온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4장 14절을 보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성경은 매우 정확하게 말하고 있지요. 사람들이 믿지 않아도 하나님의 주권은 땅끝까지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 되리라는 사실입니다.
지난 몇세기를 보게 되면 세계부흥의 역사는 성령의 체험과 회개운동으로 일어났습니다. 17세기에 영국,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에서 간헐적으로 일어났던 부흥운동이 1735년 웨일즈에서 성령의 세례를 받는 하웰 해리스(Howell Harris,1714-1773)와 다니엘 로랜드(Daniel Rowland, 1713-1790)에 의해 일어납니다. 이 운동은 미국의 뉴잉글랜드를 중심으로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 조지 휫필드 (George Whitefield, 1714 ∼1770) 의해서1차 대각성 운동이 강하게 일어났습니다. 당시는 성령의 충만이 한꺼번에 쏟아졌던 시대입니다. 술집이 문을 닫고, 구원받은 성도들을 교회로 모으셨습니다. 19세기에 접어들면서 부흥의 운동은 2차 대각성운동을 통해서 퍼지게 됩니다. D.L 무디 목사(Dwight Lyman Moody, 1837 ~ 1899)를 통해서 수많은 젊은이들을 깊은 잠에서 깨웠습니다. 그는 시카고에 무디 신학교를 세워 복음사역을 위한 평신도를 훈련시키고, 자신의 고향인 메사추세츠 주의 노스필드에서 선교대회를 개최했습니다. 대규모 선교운동을 통해서는 학생자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이 설립되었습니다. 그 당시 수많은 학생들에게 선교적 도전을 주어 당시 은둔의 나라였던 조선에도 아펜젤러 (Appenzeller, 1858~ 1902), 언더우드 Underwood, 1859 ~ 1916), 스크랜튼 (Mary Fletcher Benton Scranton, 1832~ 1909), 게일(James Scarth Gale, 1863∼1937) 등의 선교사가 오게 됩니다. 20세기에 접어 들면서 1903년 원산 대부흥 운동과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 1906년 아주사 오순절 부흥운동, 1908년 만주 중국 부흥운동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이 모든 부흥 운동은 하나님의 주권으로 이뤄진 선물이지만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고 회개하는 곳에서 임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세속화는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완벽한 환경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러한 환경에서는 믿음대로 살아가는 일은 어리석고 미련해 보입니다. 방주를 만들던 노아를 주목하지 않을 뿐 더러 조롱하고 비웃었던 사람들을 보면 인간의 타락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에도 사람들은 예수를 외면하고 알아 차리지 못했습니다. 경제만을 기반으로 쌓아 올리는 사회적 악이 사소한 것이라 느끼십니까? 어린 아이들이 자라면서 짓게 되는 죄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만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좋지 않은 소식과 뉴스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죄로 인해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아가는 욕망의 결과들 아닙니까? 세속화된 세상속에서 우리의 교회와 성도들이 영향력을 발휘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의 영에 이끌리십시요
다메섹에서의 회심 이후 바울은 약 3년간 아라비아 광야에서 하나님과 깊은 독대를 합니다. 사막에 있는 시간은 홀로 있어도 외롭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를 잊지 않았을테니까요. 신앙생활에 있어서 영적인 빈곤은 더 심각한 문제입니다. 바울은 혈육과 의논하지도 않고 예수를 이방에 전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을 묵상하러 광야로 들어간 것입니다. 예수의 영이 그 발걸음을 멈추니 그제서야 보이는 것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일상의 차원에만 몰두하게 되면 노아의 시대처럼 방주에 들어가는 순간까지도 먹고 마시면서 마지막 때의 사명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물질주의적으로 돌아가는 체제속에서 심적 공허함이 시대를 절망케 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광야를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광야를 만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믿는 우리에게 광야는 하나님을 마주 할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지금도 마지막을 향해 진행되고 있습니다. 교회로 부름받은 사람들은 시대를 분별하고 시대적 사명을 이루어 가는 사람들입니다. 세속적 사회속에서 성도들은 거룩한 일에 참여해야 합니다. 세상속의 빛과 소금으로 살기위해 행동하는 신앙, 공감하는 신앙이 성도들의 삶을 아름답게 해 줍니다. 주어진 삶이 미완성이기에 현재의 삶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현재라는 기회를 예수의 영에 이끌려 열심히 살아내는 것뿐입니다. 인생의 길에서 내가 세웠던 계획이 차질이 생기고 인생의 문이 닫히게 되면 두렵기도 하고 불안해 지지만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사람들은 인생의 계획이 막힐 때마다 그 뒤에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바울은 안디옥에서 시작한 1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2차 전도여행은 1차 전도 여행 때에 심었던 복음의 씨앗이 어떻게 성장하고 있는지 돌아보기 위해서 떠나게 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가는 곳마다 아시아 지역의 전도의 문이 막히는 것입니다.
여기저기 전도의 문이 막히자 바울은 소아시아 지역의 북쪽 지역인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16:7) 바울은 소아시아 지역으로 가려고 애를 쓰는데 기도를 하던 중에 환상을 봅니다. 16:9절을 보면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하나님은 강권적으로 인생의 계획을 바꾸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때를 인간이 거스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때를 알고 계셨습니다. 요한복음 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십자가를 지는 것은 모든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열심이며 예수님이 알고 계셨던 때였습니다.
이 시대는 농경사회였던 과거에 비해서 인생의 길이 다양해 졌습니다. 이로 인해 인생의 길이 열린 길 같을 때에는 즐겁게 걷다 가도, 막힌 길 앞에서는 울기도 하고 불안해 하기도 합니다. 인생의 길 위에서 낙심이 찾아 올때 영혼을 일으키는 비결을 알고 계십니까? 예수의 영에 이끌리는 믿음을 통해 인생의 남은 이야기를 써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 지라” 말씀합니다. 예수의 영이 바울과 실라가 소아시아로 가는 것을 막고 유럽으로 발길을 돌리게 했습니다. 이제 그들은 새로운 땅으로 믿음의 발걸음을 딛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것이지요. 성령에 이끌려 빌립보 지역으로 가는 배를 타고 넘어갑니다. 그리고 도착해서 그들은 기도할 장소를 찾아 갑니다. 첫번째 만난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루디아라는 여인이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자 경건한 여인 루디아는 마음을 열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게 됩니다. 이후 온 집안 사람들이 다 세례를 받게 됩니다. 이를 통해서 이방인을 위한 빌립보 교회가 시작이 된 것입니다.
두번째로 기도하러 간 곳에서 만난 여인은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이었습니다. 이 여종은 주인들에게 점을 쳐서 자기 주인들에게 많은 돈을 벌어 주고 있었습니다. 귀신들린 여종의 인생이 참 비참해 보입니다. 온전한 정신으로 살수 없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런 인생입니까? 주인들에게 돈을 벌어 주기 위해서 점을 치는 인생이 참 고단했을 것입니다. 점을 치는 여인의 운명은 참 씁쓸한 여운마저 가져다 줍니다. 그래서 일까요? 예수님은 억눌린자, 갇힌자들을 안타깝게 여기시며 그들을 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친구가 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보게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귀신이 들린 여종은 바울을 보자 오히려 전도를 합니다. “이분들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들로, 여러분들에게 구원의 길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바울이 이 일로 여러 날 괴로워합니다.
행 16:18 “이같이 여러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와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바울도 여인의 삶을 보며 괴로워 했을까요? 돈에 사로잡힌 주인들이 여종을 욕망의 도구로 쓰고 있음에 괴로웠을까요?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바울은 여종 안에서 있는 귀신을 예수이름으로 나오라고 명령하니 즉시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후 여종의 반응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주인들은 자신들이 벌던 수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알게 됩니다. 자기 이익의 수단이 사라지자 그들은 자기들의 분노를 공적인 문제로 포장해 버립니다. 보십시요. 유대인들이 들어와 로마 시민들의 풍속을 전함으로 도시를 소란하게 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거늘”(16:21)
이 일로 인해 바울과 실라는 재판도 받지 않은 상태로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당시 매질은 맨살이 떨어져 나가는 매우 고통스러운 형벌입니다. 명령을 받은 간수들은 그들을 깊숙한 감방에 집어넣고 발목을 차꼬로 채워 단단히 묶었습니다. (24절) 바울과 실라의 상황이 얼마나 어려운 상황이었는지 추정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러 가는 길에 한 사람을 만나서는 복음을 전하고 유럽 지역에 첫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고, 귀신들린 여종을 만나서는 복음을 전했지만 매질을 당하고 옥에 갇히게 되는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바울은 옥중에 매임을 당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알았습니다. 자신의 몸은 매질을 당해 고통스럽고 몸은 옥에 갇혀 있지만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기도하며 찬양합니다. 바울을 묵상하는데 일제시대의 신사참배를 반대하며 옥에 갇혔던 주기철 목사님이 생각이 났습니다. 주목사님이 못이 무수히 박힌 길 위를 걸어가는데 영화속에서 성도들이 울음을 터뜨리며 불렀던 찬양이 기억났습니다. “1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지켰네 이 신앙 생각 할때에 기쁨이 충만하도다 성도의 신앙따라서 죽도록 충성 하겠네 2옥중에 매인 성도나 양심은 자유얻었네 우리도 고난 받으면 죽어도 영광 되도다 성도의 신앙 따라서 죽도록 충성 하겠네”
바울과 실라는 자신의 고통만 해결 받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매질의 고통이 그들의 복음을 증거하기 위한 마음까지 묶을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깊은 옥고를 치르고 있는 바울과 실라가 한밤중에 부른 찬양과 기도를 그곳에 있던 죄수들이 다 듣고 기도할 때에 지진이 나고 옥터가 흔들렸습니다. 그들을 채웠던 수갑과 차꼬가 저절로 풀렸습니다. 이 일로 두려움에 떨던 간수는 죄수들이 탈출한 줄 알고 자살을 시도하려 했습니다. 간수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자에게 내릴 벌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간수의 행동을 만류합니다. 간수는 그들이 무서워 떨면서 사도들의 발 아래 엎드려 물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행16:30) 물어보자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간수에게 감옥은 온 집안이 예수를 영접하고 세례를 받는 현장이 되었습니다.
예수의 영에 의해 인도함 받는 삶은 아름다운 축제인 것입니다.
우리는 현재의 삶을 대충 대충 살아 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의 영이 2023년 7월 2일 여러분을 다시 부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 우리의 운명을 건 사람들이 아닙니까? 세상속에서 살며 속하지 않으려면 보냄 받는 자라는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한 아들의 생명을 담보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찾아 오셨듯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은 기도를 듣는 하나님께서 쉬지 않고 들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 사랑에 날마다 응답하시며 보냄받는 자의 사명으로 살아 가시길 바랍니다.
예수의 영에 이끌리면 꽃을 피우는 삶도, 피었던 꽃이 떨어지는 삶도 아름다운 삶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주안에서 아름다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지켜 나가기 어려운 때일수록, 선한 마음이 꺾여질 때 일수록, 성령의 불꽃이 마음 안에서 가물가물 꺼져 갈 때 일수록 하나님의 사랑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미 죄를 속죄해 주신 예수의 십자가가 우리 앞에 있습니다. 그 십자가를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 앞에 서지 않는 것은 죄로부터 해방시킨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십자가를 바라 보시기 바랍니다. 이전의 십자가가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십자가를 바라 보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 살아납니다. 관계의 문제, 건강의 문제, 가족과 진로의 문제 자녀의 문제 인생의 모든 문제로부터 살아납니다. 요한복음 3:17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심판하려고 그 아들을 보내신 것이 아니라, 그 아들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려고 보내셨소”
그리스도와 동행하며 자기한계를 깨닫고 삶의 균형감각을 찾으십시요. 때로는 흔들릴 때도 있고, 낙심 될 때도 있겠지요. 그러나 잠시 걷던 길에서 멈추고 성령이 이끌어 주시는 힘을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향한 그리움이 우리를 이끌도록 맡겨 보십시요. 한주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욱 깊어지는 삶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6/25/2023 | 성령강림후 제 4주
성령의 3번째 사건, 고넬료 Cornelius, The third event of the Holy Spirit
사도행전 10:1-4, 9-17
냉전시대 세계사에서 러시아의 대표적인 문호 솔제니친은 인생의 목적은 번영이 아니라 영혼의 성숙함에 있다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그는 스탈린의 분별력을 의심하는 편지를 친구에게 썼다가 10년 동안 감옥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감옥소 생활을 쓴 글로 노벨상을 받고 결국 구소련에서는 추방을 당하게 됩니다. 20년동안 미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그는 한 인터뷰에서 미국이 기독교 국가인줄 알았는데 자기를 숭배하고 자기를 섬기는 나라라며 사회를 향해 쓴소리를 하기도 했습니다. 또 러시아 혁명으로 비극적인 피의 전쟁이 일어난 이유도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의 말씀을 잊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C.S Louise는 역사속에서 인간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게 되는 분기점이 ‘계몽주의 운동’이라고 설명합니다. 계몽주의 이전에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 했는데, 인간의 이성과 과학이 발달하면서 세상의 중심이 하나님에서 인간으로 바뀌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모든 것을 인간의 지성으로, 과학의 합리적인 방법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다 보니 더 이상 하나님이 필요 없는 세상이 시작된 것이라고 했지요. 어쩌면 우리도 오순절 이전의 제자들처럼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역사적으로 우리는 오순절 이후의 시대를 살아갑니다. 성령의 능력이 회복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갈망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십시요.
인간의 모든 행위는 자신만의 유익을 구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돈으로 자신의 유익을 구하려 합니다. 어떤 이들은 학문적 업적을 쌓아 올리며 자기의 명예를 이루려 합니다. 그런데 자기중심적 힘은 커질수록 다른 사람을 해치는 위험한 도구가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황제를 주인이라 부르던 로마 시대에는 그리스도인들이 극심한 탄압과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초대교회 성도들은 침착하고 품위 있는 행동, 고난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태도, 고문을 앞에 두고도 냉정을 잃지 않는 용기를 통해 불신자들에게도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들이 느꼈던 성도들의 좋은 인상은 삶의 경계선을 무너뜨렸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도 가까이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진정한 만남을 갈망하는 이들을 하나님은 찾아가십니다. 지금도 누가 진심으로 자신을 찾는지, 누가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지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2천년 전에도 알고 계셨고 지금도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갈망하기 위해서 성령충만의 갈증이 있어야 합니다. 목마를 자에게 생수가 필요하지요. 타는 목마름으로 예배하는 이들을 하나님은 지금도 찾고 계시지 않을까요? 누가 나를 필요로 하나 알고 계십니다. 요즘 기독교인들은 이기적이란 말을 듣지요. 기독교의 구원의 속성도 배타적이라고 말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예수님을 만난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10: 11-13절을 보면 11.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기독교의 구원은 의를 얼마나 실천했는지, 얼마나 교양이 있는지, 어느 나라 사람인지 하는 차별이 없는 진리입니다. 누구든지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죽은자’로부터 살리신 인류의 단 한분 예수 그리스도로 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진리의 힘을 믿는 이들은 성령을 의지하면서 전생애를 통해 복음을 전하는 책임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3대 변화 사건을 보면, 야외예배때 살펴 본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서의 성령강림사건입니다. 두번째는 지난주 다메섹 도상에서의 바울의 회심 사건입니다. 그리고 세번째는 고넬료의 이야기인데, 이는 예루살렘을 벗어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에게 전달되는 ‘최초의 성령세례 사건’입니다. 만일 이 세상이 전부라면 신앙생활에는 이해 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마음에 근심이 찾아올 때에 주안에서 기뻐하라, 평안하라고 하는 말씀이 이해가 될까요? 이웃에게 선을 행하고 베풀며 살아가라는 메세지가 부담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뒷모습으로도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하며 살아가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책임이 어렵게만 느껴질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보기에는 무명한자 같으나 성경은 유명한 자라고 하시고, 가난한 자 같지만 많은 사람을 부요케 하는 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향한 갈망은 내 능력과 힘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게 됩니다. 이 과정은 현실은 암담하고 모든 소망이 끊어진 환경에서도 말씀으로 잘 살아내기 위해 애쓰는 그 자리에 하나님은 기다려주시고 품에 안아 주시는 경험입니다.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 끊임없이 작동하는 나의 욕망이 십자가에 날마다 못박히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있는가? 질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령을 통해서 도저히 만날 수 없는 만남이 이뤄집니다.
성경은 2천년전 하나님을 경외하고 백성을 많이 구제하며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는 이방인이 성령세례를 받는 사건을 소개합니다. 성경을 묵상하는데 이방인 고넬료가 성령세례를 받기 전에 어떻게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할 수 있었을까요? 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착하게 살아간다고 다 성령세례를 받은 것도 아니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라고 성령세례를 받은 것도 아닙니다.
고넬료의 회심사건은 우리에게 구원의 확신을 얻기 위한 길이 있다는 것과 구원은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 안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 있어서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 갈망이 마음 안에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귀를 막고 하나님을 무시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서 멀어져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을 떠나서 살아가는 것은 고아처럼 살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서로를 낯선 사람인냥 바라봅니다. 경계심을 품고 사람을 대하게 됩니다. 경계심은 하나님의 사랑 조차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게 합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 경계선이 많을수록 생명력은 약화됩니다. 마음의 한자락도 지키는 것이 어려운 우리들이지만 하나님은 차별하지 않으시고 존귀한 자녀라 부르시고 계십니다. 이곳에 오신 여러분은 모두가 존귀한 자입니다. 그런데 당시에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편견으로 인해 이방인들을 벌레나 부정한 짐승처럼 불결하다고 여겼습니다. 당연히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장벽은 매우 높았습니다. 이 사실을 사도행전 11장 3절이 전해줍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주고 함께 유숙하며 음식을 먹었던 일에 대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교회에 보고를 하자, 유대인 신자들이 베드로를 비난합니다.
“당신은 할례 받지 않은 이방 사람들의 집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었다지요?” 하고 따졌다.(행11:3)
성령이 오셔서 하는 사역은 하나님을 갈망하는 자들을 찾아가 제자 삼는 일입니다. 그리스도를 알지 못해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세상속에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보지 못한 미전도 지역에도 있고, 무심히 지나치는 삶의 자리에서 만나는 사람들 중에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고넬료에게 성령께서 어떻게 임하는지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교회성장학이 관심을 끌던 시기에 많은 교회마다 부흥 프로그램을 소개하고 홍보했습니다. 많은 불신자들을 결신시키고 교회가 부흥했다고 하면 그 전도 프로그램을 많은 교회들이 배우고 와서 적용하기도 했습니다. 적용하는 목적이 대부분이 교회 성장이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 새로운 율법주의 요소들입니다. 교회는 성숙한 열매를 맺어가야 합니다. 교회가 세상의 가치와 경영 논리에 젖어 버리게 되면,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숫자로 여기게 될 것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인원수를 채우는데 목적을 두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열심은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성령께서 도우십니다. 영성학자 리처드 포스터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진정한 변화를 위한 노력보다는 얕은 만족과 인스턴트 훈련 프로그램으로 심리적 명분을 세우기에 그치고 있다”고 했습니다. 말씀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상실하지 마십시요. 기대감을 갖고 듣는 말씀이 여러분의 삶을 변화시켜 나갑니다.
고넬료는 가이사랴에 살고 있는 이방인으로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었습니다. ‘가이사랴’는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를 기념하여 지은 지명이며, 이곳에는 당시 로마 점령군의 본부가 있었습니다. 고넬료는 백명의 부하를 거느리는 로마 군대의 부사관이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을 지배하는 로마부대의 지휘관이고 지배계층임에도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많은 사람들을 구제하고 하나님께 기도생활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기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면 가난한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베푸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은 가난과 욕망의 한계를 뛰어 넘게 하시고, 어려움을 견디게 합니다. 인간의 성품을 넘어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기도를 하게 하시지요. 그래서 자신의 한계를 깨달은 사람은 외롭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보기 때문입니다. 성전에만 계시다고 생각하던 유대교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최초의 이방인에게 어떻게 임하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는 2개의 환상이 나옵니다. 첫번째 환상은 고넬료가 기도를 하는데 제 구시쯤이니 오후 3시이지요, 그가 하나님의 사자를 보게 됩니다. 기도하던 고넬료에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서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이 되었으니,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를 청하라고 말씀합니다. 욥바는 가이사랴에서 남쪽으로 약 48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 해변 도시입니다. 성령께서는 해안가 무두장이의 집에 베드로가 유숙하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에 고넬료가 집안의 하인 두명과 부하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 욥바로 보내게 됩니다.
두번째 환상은 베드로에게 임했습니다. 고넬료가 환상을 본 다음날, 고넬료가 보낸 세사람이 욥바에 가까이 이르렀을때 쯤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 있었는데 그 시간이 제 육시였습니다. 오늘날 시간으로 낮 12시 입니다. 배도 고프고 식사할 시간이지요.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전날 오후 3시쯤 출발해서 다음날 12시쯤 도착했으니 하룻길을 걸어서 온 것입니다. 이들이 도착할때 쯤 베드로가 기도 중에 환상을 보게 됩니다.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 오는데,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내려옵니다.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이 섞여 있었으며, 먹어도 되는 음식과 먹어서는 안되는 음식이 섞여 있었습니다.(레 11, 신 14:7-20) 이때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베드로에게 일어나 잡아먹으라”고 명령합니다. 베드로는 유대인의 관례에 근거하여 부정한 음식을 먹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구원의 믿음은 그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두번째 소리가 나는데 “어느 것이든, 더럽다고 하지 말아라. 모두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이다.” 이런 일이 환상 중에 세번이나 반복되더니 그릇이 하늘로 올라갑니다.
행 10:19, 20절을 보면 “19 때에 베드로는 방금 본 환상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는데, 성령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시몬아, 지금 세 사람이 너를 찾고 있는 중이다. 20 너는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지체 없이 그들을 만나, 의심하지 말고 그들과 함께 가거라. 그들은 내가 보낸 사람들이다.”
베드로는 환상을 보고 그가 알고 있던 것과 너무나 달랐기에 혼란 속에서 생각에 잠겼습니다. ‘이때 마침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시몬의 집에 도착 합니다(17절) 베드로는 자신을 찾아 온 사람들을 향하여 “내가 곧 너희가 찾는 사람인데 너희가 무슨 일로 왔느냐”라고 묻지만(21절) 베드로는 이미 성령의 지시를 받았기에, 자신을 찾아 온 이유를 물음으로써 확인하려 했던 것입니다. 이후에 베드로는 그들을 불러 들여 집에서 유숙하게합니다. 이튿날 베드로는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과 욥바에 있던 형제들과 함께 해안도로를 따라 북쪽을 향하여 고넬료를 보러 가이사랴로 갑니다(23절) 베드로의 동행자들은 베드로 자신과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 3명과 욥바의 형제들 6명 총 모두 10명이었습니다. 10명의 사람들이 욥바에서 가이사랴까지 이틀이 걸려 도착합니다(9절). 그곳에 도착하니 고넬료가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놓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24절)
고넬료는 베드로를 보자마자 로마군대 지휘관임에도 베드로 발 앞에 엎드려 절을 합니다. 그가 얼마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인지 알수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어찌할줄 몰라 나도 사람이라 하고 그를 일으킵니다. 고넬료는 이미 그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마음을 아셨습니다. 이제 베드로는 그의 집에 들어가 입을 열어 복음을 증거합니다. 그 자리에 있던 이방인이 모두 성령세례를 받게 됩니다.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 부어지는 성령으로 인해 놀라게 됩니다. 베드로의 고백이 35절에 나옵니다. 이 사건을 통해 “모든 나라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아주신다” (35절) 베드로의 설교를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죄사함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죄사함 없이는 하나님 앞에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세례를 받아야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으라고 합니다.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십니다. 이곳에 계신 분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에 이 자리에 나오신 줄 압니다. 사도행전의 곳곳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윤리적인 사람들, 즉 율법을 지키던 유대인들 조차 구원받기 위해서는 회개하고 믿어야 한다는 말씀이 언급됩니다. 오순절에 유대인들은 “경건한 사람”(2:5)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사도행전 2장에서 경건한 유대인들도 회개하고 죄 사함을 위하여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외침으로써 그의 설교를 끝맺었습니다(2:38)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구원자이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받아들여짐”은 단지 속되지 않거나 부정하지 않다는 것 이상을 의미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부르실때에는 옛사람을 십자가에서 죽이라고 요구하십니다. 이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으면 오순절 성령충만한 삶을 맞이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저절로 체험되어 지지 않는 것입니다. 목자없이 방황하며 죽어가는 백성들이 우리의 눈에도 들어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도 구원받기 위해 이 복음의 메시지를 들어야 했습니다. 베드로는 10장 43절에서 “내가 여기 있는 것은 너희가 복음을 듣고 그를 믿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용서함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고넬료의 기도와 그가 삶에서 진리를 더듬어 찾는 것을 받으셨고 하늘에 상달되게 하셨습니다. 고넬로는 인생의 궁극적인 답을 찾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방인들 중에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성도들은 모두가 복음의 빚진 자들입니다. 구원이 우리의 행위에서 나오지 않기 때문에 전해야 할 책임이 그리스도인에게 있는 것이지요. 우리를 만나 주신 주님은 그들도 사랑하시는 주님이시고, 모든 이들을 위한 그리스도이십니다. 믿음이 깊어지는 것은 예수님을 홀로 두지 않고 매일 십자가 은혜에 반응하는 것입니다.
10:4 고넬료는 두려움 속에서 천사를 바라보며 물었다. “주여, 무슨 일이십니까?” 천사가 말했다. “너의 기도와 가난한 이들을 향해 베푼 네 구제의 손길이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하나님께서 다 알고 계신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는 크고 놀랍습니다. 울려 퍼지는 천둥소리를 듣고 하늘의 수많은 별들을 보십시요. 주님의 힘이 우주를 가득 채웠습니다. 주가 지으신 세상을 바라 보십시요. 지저귀는 새들도 고요하게 흐르는 시냇물도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를 존귀한 자녀 삼으시려고 외아들을 아낌없이 세상에 보내주시고 십자가에 피흘려 모든 죄에서 구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갈망하는 존귀한 자녀는 환경에 매이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경험합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습니다. 비난하고 정죄하는 자리를 떠나십시오. 감정과 기분에 따라 사람의 말과 인정 받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겸손히 주님을 찬양하십시요. 성령의 사람에게는 수많은 사람들의 박수보다 한분의 평가와 인정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그분이 알아주지 않으시면 우리는 다시 또 목마르고 공허해 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을 ‘존귀하다’ ‘사랑한다‘ 하십니다. 한주도 허락하신 삶의 자리가 예수님이 거하시는 푸른 초장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