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2016 | 창립 38주년 메시지

우리교회의 시대적 사명 The Mission of Our Church in This Generation

마태복음 16:13-19

오늘은 우리교회 창립 38주년이 되는 주일입니다. 1978년에 하바드 스퀘어에서 시작된 우리교회가 어언 40년의 역사를 갖게 되었습니다. 저는 1986년에 이 교회에 교육 목사로 있었고, 1988년에 담임 목사가 되었습니다. 처음에 교회를 시작하셨던 분들도 이 교회가 이토록 오랫동안 존재할 줄은 몰랐을 것입니다. 40여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이 교회를 거쳐갔습니다. 지금 제 머리 속에 그 분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갑니다.

미국에 있는 한인교회로서 40여년의 역사를 가진 교회들이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우리교회의 지나 온 역사를 자랑하는 것보다 앞으로 이 교회가 어떻게 시대적인 사명을 감당해야 하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네 행위를 안다. 너는 살아 있다는 이름은 있으나, 사실은 죽은 것이나 다름 없다,” (요한계시록 3:1) “You have a reputation for being alive, but you are dead.” (New Living Translation) 소아시아 (지금의 터키 지역)에 사데 (Sardis)라는 교회가 있었습니다. 이 교회는 꽤 명성이 높았던 것 같습니다. 무엇 때문에 명성이 있었는지는 잘 알 수 없지만, 교회 건물이 좋아서 명성이 높은 교회가 있습니다. 또 교인들의 숫자가 많아서 명성이 높은 교회가 있습니다. 또 그 교회에 높은 학력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서 명성이 높은 교회도 있습니다. 사데교회가 그렇게 명성이 높은 교회였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눈으로 보면 이 교회는 죽은 교회였습니다. 주님이 그 교회를 죽은 교회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 교회가 교회로서의 사명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존재 이유를 상실한 교회도 매주 예배를 드리고, activities가 일주일 내내 열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눈으로 보면 죽은 교회입니다.

감리교회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는 감리교회의 미래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감리교인들이 유럽이나 미국에서 없어질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내가 정말 두려워하는 것은 감리교인들이 능력을 상실한 종교의 형태를 가진 죽은 종파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의심의 여지 없이, 이들이 교리와 성령과 훈련을 게을리 한다면 그렇게 되고 말 것입니다 (I am not afraid that the people called Methodists should ever cease to exist either in Europe or America. But I am afraid lest they should only exist as a dead sect. having the form of religion without the power. And this undoubtedly will be the case unless they hold fast both the doctrine, spirit, and discipline with which they first set out).” 웨슬리는 믿음 생활은 항상 ‘교리 (doctrine)’ ‘성령 (spirit)’ ‘훈련 (discipline)’ 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웨슬리는 또 이런 말도 했습니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감리교인들이 그들을 정말 위대한 사람들로 만들어 줄 열정과 능력과 흥분, 초월적인 요소들을 잃어버리고 살면서도 거기에 만족하는 것이다 (My fear is that our people will become content to live without the fire, the power, the excitement, the supernatural element that makes us great).” 오늘 저에게도 웨슬리가 가지고 있던 두려움이 있습니다. 우리교회가 지금의 상태에서 만족해 버리는 교회가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입니다. 지금의 작은 성취에 만족하는 교회가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입니다. 눈에 보이는 성과에 만족해 버리고, 정작 우리가 가져야 할 것들을 잃어버리는, 그래서 주님이 죽은 교회라고 평가하시는 교회가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입니다. 요한 웨슬리는 우리가 가져야 할 것으로, the fire, the power, the excitement, the supernatural element를 들었습니다. 마지막의 ‘the supernatural element (초월적인 요소)’는 눈에 보이지 않은 가치들을 말합니다. 기도, 사랑, 은혜 이런 것들이 the supernatural element입니다.

웨슬리의 말이 창립 38주년을 맞이하는 우리에게 어떤 영감(靈感, inspiration)을 준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교회의 정체성이 도전을 받고 있는 시대입니다. “교회가 무엇이냐?” 하는 근본적인 질문 (foundational question)에 대답을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입니다. 저는 교회가 이 질문에 대답을 하기 위해서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교회의 정체성이 흔들릴 때마다, 우리 크리스천의 정체성이 흔들릴 때마다 우리 스스로에게 이 질문을 하면서 답을 찾아야 합니다.

오늘 마태복음 본문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예수님께서 왜 이 질문을 제자들에게 하셨다고 생각합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정체성,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발견하는데 있어서 이 질문보다 더 중요한 질문이 없습니다. 이 질문에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16절) 베드로의 대답에 예수님은 아주 만족하셨습니다.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복이 있다. 누가 이것을 네게 알려 준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알려 주신 것이다. 너는 베드로다. 내가 이 돌 위에 내 교회를 지을 것이니, 지옥의 문이 이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17-18절)

여러분, 예수님과 제자들이 이런 말을 주고 받은 곳이 어디였습니까? 가이사랴 빌립보 (Caesarea Philippi)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계시던 갈릴리에서 가이사랴 빌립보까지는 약 25마일 정도 (약 40km) 떨어져 있습니다. 걸어서 10시간은 가야 하는 거리입니다. 한번 지도를 보시지요. 가이사랴 빌립보는 갈릴리 호수 북쪽 헐몬산 기슭에 있는 마을입니다. 헐몬산은 해발 2,814m (9,232 ft.)로 여기서부터 물이 흘러 갈릴리 호수로 들어갑니다. 헐몬산 기슭에 있는 가이사랴 빌립보 역시 해발 350m (1,150 ft.)로 상당히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헐몬산을 ‘Mountain of the Chief (가장 높으신 분의 산)’ 라고 부르면서 성스러운 산으로 여겼습니다. 헐몬산 기슭에 위치한 가이사랴 빌립보는 헤롯 빌립 (Herod Philip II, BC 27-AD 34)이 통치하고 있던 곳이었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는 거대한 돌 (rock)로 유명했습니다. 높이가 30.5m (100ft.), 넓이가 152m (500ft.)가 되는 거대한 돌입니다. 헤롯 대왕은 이 거대한 바위 위에 가이사 (로마의 황제)를 신격화 하기 위해 흰 대리석 신전 (shrine)을 세웠습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 (Josephus, A.D. 37-100)의 책에도 그 신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당시에 가이사 신전은 유명했습니다. 헤롯 빌립은 이곳 이름을 가이사와 자기 이름을 따서 가이사랴 빌립보라고 명명했습니다.

그 외에도 가이사랴 빌립보에는 판 (Pan)이라는 신을 섬기는 동굴이 있었습니다. Pan은 얼굴의 절반은 사람이고, 나머지 절반은 염소 얼굴을 가진 신입니다. 예전부터 가이사랴 빌립보는 Pan의 이름을 따서 파니아스 (Panias)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그러다가 후에 가이사와 빌립의 이름을 따서 가이사랴 빌립보라고 불리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가이사야 빌립보는 고대 종교의 숨결이 살아 있는 곳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가이사랴 빌립보로 제자들을 데리고 10시간이나 걸어 오셨습니다. 단지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라는 질문 하나를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 예수님께서 하신 이 질문이 정말 중요한 질문인가보다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은 교회에 대한 정체성이 흔들리고, 크리스천에 대한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는 때입니다. 교회는 예수님께 대한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세워진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Christian이란 말은 앞의 ‘Christ’라는 말과 그 뒤에 ‘-ian’이라는 접미사가 붙은 말입니다. ‘-ian’이라는 접미사는 ‘그것에 붙어 있는 (adhering to, or belonging to)’이라는 뜻을 가진 접미사입니다. 제가 크리스천이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 보았더니 이 말에 세 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a person who believes in Jesus Christ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 ‘a person who exemplifies in his or her life the teachings of Christ (그의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증명하는 사람)’ ‘a person who possesses Christian virtues (크리스천의 덕목들을 소유한 사람)’ 이 세 가지 의미는 일반 사전에 나와 있는 Christian이라는 말의 정의입니다.

자기가 크리스천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 세 가지 의미에 동의하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은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크리스천은 자신의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함으로 증명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크리스천은 크리스천으로서 중요한 가치들을 소유하고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에 맞게 살았더라면 오늘날 왜 크리스천의 정체성에 혼란을 겪겠습니까? 우리가 이 이름에 맞게 살았더라면 왜 오늘날 교회의 정체성이 흔들린다고 걱정하는 말들을 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고백을 만족하게 받아들이신 이유는, 그 고백의 내용이 옳기 때문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것은 베드로가 한 고백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베드로의 입을 통해서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 17절에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교회는 이 고백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대한 신앙고백이 흔들리면 교회의 정체성도 같이 흔들릴 수 밖에 없습니다. “너는 베드로다. 내가 이 돌 위에 내 교회를 지을 것이니, 지옥의 문이 이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마태복음 16:18) “You are Peter (which means `rock'), and upon this rock I will build my church, and all the powers of hell will not conquer it (New Living Translation).” Peter는 베드로의 영문 표기입니다. 베드로는 페트로스 (Πέτρος)라는 희랍어를 우리 말로 발음한 것입니다. 아람어로는 게바 (כיפא, kēfā)입니다. 모두 ‘바위 (rock)’라는 뜻이 있습니다. 반석 위에 집을 건축해야 하는 것처럼, 예수님은 베드로의 고백을 반석 삼아 그 위에 교회를 짓겠다고 하셨습니다. Pan보다 더 위대하시고, 가이사보다 더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의 교회를, 베드로 너의 신앙고백 위에 세우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교회는 지옥의 권세가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창립 38주년을 맞이 하는 우리교회의 사명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람은 어릴수록 가르치기가 쉽습니다. 그리고 교육의 효과도 있습니다. 그래서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교육이 중요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저는 우리교회가 젊은 교회라는 사실에 늘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청년들은 유치원이나 초등학교만은 못하지만, 가르치기에 아직 늦지 않는 나이입니다. 어떻게 보면 사람을 가르칠 수 있는 거의 마지막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을 가르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신앙의 기초를 잘 다져서 내 보내야 합니다. 저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청년들을 우리교회에 맡기신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점령하고 있을 때, 사람들이 안창호 선생에게 와서 물었습니다. “선생님, 이런 때에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이 질문에 안창호 선생은 사람을 가르치는 일이 제일 중요하다고 대답했습니다. 사람들은 그 말에 실망했습니다. 모두 힘을 합쳐서 일본에 대항해서 독립을 해야 한다는 말을 기대했던 사람들은 안창호 선생에게 실망하고 돌아섰다고 합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안창호 선생의 말이 맞았습니다. 조금 늦더라도 젊은 사람들을 바로 가르쳐야 민족에게 희망이 있습니다.

저는 우리교회의 시대적인 사명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청년들에게 예수님께 대한 신앙고백을 바로 가르쳐야 합니다. 지금 이 고백이 흔들리기 때문에 교회의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유대 민족은 오랫동안 그리스도 (메시아)를 기다려 왔습니다.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는 민족의 희망이었고, 기대였습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오시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들은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 중의 한 사람이 당신은 우리가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메시아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그의 고백을 우리의 고백으로 받아 들이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의미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2016년 교회 창립 38주년을 맞이해서, 우리교회의 시대적인 사명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하는 이 중요한 때에,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우리의 신앙고백으로 받아 들이는 의미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의 희망이시라는 것 아닙니까? 다시 예수님께로 돌아가야만 이 시대가 희망이 있다는 것 아닙니까? 때마침 올해 ReNEW주제가 ‘예수, 이 시대의 희망 (Jesus, The Hope of This Generation)’입니다. 저는 올해 ReNEW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다시 예수님 안에서 인생의 희망을 발견했으면 좋겠습니다. 모두가 절망을 말하는 이 시대에, 예수님 안에서 희망을 발견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크리스천이라는 이름만 가지고 있는 명목상의 크리스천들 (nominal Christians)에게 예수님의 ‘주 되심 (Lordship)’을 가르치고, 실천하게 하는 일, 단순히 교회를 드나드는 churchgoer들을 예수님께 신앙을 고백하며 사는 사람들로 양육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중요한 일을 우리교회가 해야 합니다. ‘Churchgoers May Live Longer’라는 제목의 글이 있어서 ‘이게 무슨 소리야?’ 하면서 읽어 봤더니,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안 다니는 사람들보다 더 오래 산다는 별 가치 없는 리서치 결과였습니다. 오늘 이 기념 예배가 우리교회의 사명을 새롭게 깨닫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교회가 앞으로 오는 시대에도 교회의 존재 이유가 분명한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 2년 후에, 우리교회가 창립 40주년 기념예배를 드릴 때, 우리교회가 어떤 모습으로 성장하고 있을지 기대가 됩니다.


10/2/2016 | 세계 성만찬 주일 메시지

우리는 하나 We Are One in God’s Spirit.

요한복음 17:6-26

오늘은 이미 말씀 드린 대로 ‘세계 성만찬 주일’입니다. 영어로는, ‘World Communion Sunday’라고 합니다. 전 세계의 교회들이 같은 날 주님의 만찬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이 ‘커뮤니온 (communion)’이라는 단어가 ‘주님의 만찬’을 뜻하는 고유 명사로 사용하지만, 일반적으로는 ‘a group of persons having a common religious faith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그룹)’이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전 세계의 교회들이 같은 날 성만찬 예식을 함으로써 우리는 인종, 역사, 전통, 국가, 언어, 문화를 초월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우리교회는 매년 빠지지 않고 ‘세계 성만찬 주일’을 지켜 왔습니다. 우리 교회도 세계 교회의 일원으로서 주님의 교회들이 나가는 방향을 바라보고, 같은 목적을 추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교회는 매주 ‘사도신경 (Apostle’s Creed)’을 암송합니다. 이 것 역시 우리교회가 사도들의 전통과 역사를 계속하는 교회임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여행 중에 잘 알지 못하는 교회를 방문 했을지라도 그 교회가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교회라면, 안심하고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오늘 ‘세계 성만찬 주일’을 맞이해서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은 말씀은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성서 신학자들은 이 기도를 ‘예수님의 대제사장으로서의 기도 (The High Priestly Prayer of Jesus)’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으로서 인류의 구원을 위해 간구하신 기도라는 것입니다. 상당히 긴 기도입니다. 그런데, 이 기도가 다른 어떤 사람의 기도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드린 기도라는 점에서, 우리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저는 오늘 세계 성만찬 주일을 맞이해서 예수님의 이 기도 속에 우리 교회가 들어야 하는 메시지가 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넓은 의미에서 제자들을 말함) 볼 때 “이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들이다” 이런 시각으로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께서 그 사람들이 하나가 되도록 기도하셨다는 것입니다.

8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저는 아버지께서 제게 주신 말씀을 이 사람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들은 그 말씀을 받았고, 제가 아버지로부터 온 것을 진정으로 알았고,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신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나오는 말씀 이지만,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제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았으므로, 세상은 그들을 미워하였습니다.” (14절)

 

여러분, 이 말씀의 의미를 알고 계시는 가요?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것은 우리 크리스천의 정체성(正體性, identity)과 관련된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디 가서 여러분을 증명하려면 ID를 보여줘야 합니다. 미국에서는 Driver’s License가 ID를 대신하지요? 마찬가지로 우리가 크리스천인지, 아닌지를 증명하는 ID는 성경입니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성경을 배우고, 받아 들이고, 배운 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ID입니다. 

야고보서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거울에 비유했습니다 (야고보서 1:23-25). 하나님의 말씀을 거울에 비유한 것은 참 탁월한 비유 아닙니까? 거울을 보면서 얼굴을 고치는 것처럼, 크리스천들은 말씀의 거울을 보면서 자기 자신을 고칩니다. 특별히 새벽 기도회에 나와서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의 거울을 보면서 자기 자신의 잘못된 모습을 고친다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사도 바울 역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올바른 사람으로 성장한다는 말씀의 가치를 믿었습니다. 디모데후서 3:14-17에 나오는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그대는 지금까지 배워 온 가르침을 계속 좇아가십시오. 이 가르침들이 진실이라는 것은 그대 스스로 알 것입니다. 그대는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는데, 이 성경은 그대를 지혜롭게 하여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을 통해 구원을 얻게 하였습니다. 모든 성경 말씀은 하나님께서 감동을 주셔서 기록되었기 때문에 진리를 가르쳐 주며, 삶 가운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게 해 줍니다. 또한 그 잘못을 바르게 잡아 주고 의롭게 사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자로 준비하게 되고, 모든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게 됩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But you must remain faithful to the things you have been taught. You know they are true, for you know you can trust those who taught you. You have been taught the holy Scriptures from childhood, and they have given you the wisdom to receive the salvation that comes by trusting in Christ Jesus. All Scripture is inspired by God and is useful to teach us what is true and to make us realize what is wrong in our lives. It corrects us when we are wrong and teaches us to do what is right. God uses it to prepare and equip his people to do every good work.” 이 말씀 속에 사람을 사람답게 교육하는 일에 뭐 하나라도 빠진 것이 있습니까? 빠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가치는 세상에서 가르치는 가치와 충돌합니다. 서로 추구하는 가치가 다르기 때문에 성경을 믿는 크리스천들은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제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았으므로, 세상은 그들을 미워하였습니다.” (14절) ‘속한다’는 말은 ‘belong to something’ 무엇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무엇과 한 몸처럼 섞여서 구별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크리스천이 성경을 모르면 자기도 모르게 세상에 속하고 맙니다. 크리스천이 성경의 가치를 알고 있으면서도 실천하지 않으면, 세상에 속하고 맙니다. 

성경은 크리스천들이 가지고 다녀야 할 ID입니다. 이 사람이 성경의 가치를 인정하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이면 더 이상 확인할 필요 없습니다. 이 사람은 크리스천 맞습니다. 백인을 만나고, 흑인을 만나고, 아프리카 사람을 만나면, 할 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서로 크리스천이라는 ID를 확인하면, 그 때부터 우리는 한 형제가 되고 한 자매가 됩니다. 서로 인종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문화와 역사가 다르지만, 우리는 크리스천으로서 한 방향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삶의 목적이 같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같은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세계 성만찬 주일은 이 사실을 서로 확인하는 주일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이제 저는 아버지께서 제게 주신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이 사람들을 지켜 주셔서 우리가 하나인 것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9, 11절) 저는 예수님의 이 기도를 읽고 묵상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도를 하다 보면, 특히 어디서 대표 기도를 하다 보면, 앞에서 한 기도를 다시 반복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원고 없이 기도하다 보니까 그런 일이 생긴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꼭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닙니다. 앞에서 기도한 것이 좀 미진하다고 생각할 때 다시 한번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에서도 그런 것이 보입니다. 분명히 9-11에 보면 하나가 되게 해 달라는 기도가 나오는데, 다시 21-23에 같은 내용의 기도가 나옵니다. 저는 그 이유가 우리 크리스천이 하나가 된다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두 번이나 반복해서 같은 기도를 하실 정도로 크리스천이 하나가 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 자기를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다른 사람과 비교할 때 옳다고 생각합니다. 크리스천들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다른 사람과 믿는 교리 (doctrine)가 조금 다르다고 해서 서로 갈라섭니다. 한국에서는 장로교회가 교리 때문에 많은 교파가 생겼습니다. 대한 예수교 장로회 통합 측이 있습니다. 대한 예수교 장로회 합동 측이 있습니다. 이름이 거의 같아서 잘 모르는 사람들은 어디가 다른지 구별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가 되기를 간절하게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를 한번 들어 보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믿는 사람들이 다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21절) “우리가 하나인 것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해 아버지께서 제게 주신 영광을 이 사람들에게 주었습니다.” (22절) “제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십니다. 부디 그들로 온전히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23절) 여러분, 어떤 이유에서든지 분열하는 것은 예수님의 이 기도를 무효(無效)로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의 교만과 이기심과 시기심이 예수님의 기도를 무효로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가 되는 것은 그냥 별 이유 없이 한 데 뭉치자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됨의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가 되면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21절). 또,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자기가 가지고 있던 영광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22절).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가 됨으로써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23절). 

정말 우리 크리스천들이 하나가 되는 데에는 이렇게 엄청난 의미가 있습니다. 청년부는 팀 안에서, 임원들 간에, 남선교회와 여선교회, 청장년부, 코아부 안에서, 또 교회 임원들 간에, 내가 하나됨을 막고 있지 않는지 나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그리고, 평화를 위해서 일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팔복 중에 이런 복이 있는 것 아세요?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   )이라고 불릴 것이다.” (마태복음 5:9) 괄호 속에 들어가는 말은 ‘아들’입니다. 바울은 왜 우리가 하나가 되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성령 안에서 평안의 매는 끈으로 한 몸이 되었습니다. 하나가 되도록 힘쓰고, 여러분 가운데 늘 평화가 깃들도록 노력하십시오. 여러분은 한 몸입니다. 여러분은 같은 성령을 받았고, 한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도 한 분이시며, 믿음도 하나고, 세례도 하나입니다.” (에베소서 4:3-5)

One Body, One Spirit, One Hope, One Lord, One Faith, One Baptism, One God (하나의 몸, 한 분 성령, 한 소망, 한 분 주님, 하나의 믿음, 하나의 세례, 그리고 한 분 하나님)입니다. 성경에 “우리가 사탄의 계획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후서 2:11)”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악한 영의 세력은 어떻게 하든지 우리를 분열 시키려고 합니다. 이 모든 악한 영의 계획을 아시는 우리 주님은 우리가 하나 되기를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어찌 우리만 위해서 이겠습니까? 주님은 온 세계의 교회들이 하나가 되기를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주님의 만찬에 참여하시기를 바랍니다. 


9/25/2016 | 힘과 용기를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 3

나의 힘이 되시는 하나님 Lord, You Are My Strength

시편 59:16-17

오늘로 하나님의 말씀 시리즈를 마치려고 합니다. 첫 번 설교에서는 ‘두려움을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설교했고, 두 번째 설교에서는 ‘앞 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설교했고, 오늘은 ‘힘과 용기를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설교하려고 합니다. 9월 달에는 새로 보스턴에 오는 친구들이 많습니다. 새로운 도시 생활에 적응하랴, 새 학교에 적응하랴 마음이 분주하고, 마음이 불안한 친구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용기를 주고 싶었습니다. 몇 주 전에 청년부 임원/팀장 리더 수련회를 했는데, 공교롭게도 몸이 안 좋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저는 이런 일이 새로 시작하는 학기, 새로 시작하는 보스턴 생활, 새로 시작하는 직장생활에서 오는 부담감와 무관(無關)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지요?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말과 다릅니다. 사람의 말은 힘든 사람에게 어느 정도 위로를 줄 수 있습니다. 힘이 들 때 옆에서 친구가 그래요. “너무 걱정하지마. 다 잘 될 거야!” 이런 친구가 옆에 있다는 것은 참 감사하고 행복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친구가 친구에게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말입니다. 더 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병원에 문병갈 때 암담할 때가 많습니다. 병이 상당히 심각한데 “염려하지 마세요. 꼭 나을 거예요” 이렇게 말하는 것이 정말 최선인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저도 정말 그런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다행인 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있잖아요? 무슨 말로 위로를 해야 할지 모를 때,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성경 말씀을 펴서 어디 어디를 읽겠습니다” 하면서 성경 말씀을 읽고, 기도해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능력(能力)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영화 ‘인천 상륙작전’에서 맥아더 장둔 역을 맡은 Liam Neeson이 상륙하기 전에 등대에서 빛이 비치기만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특공대가 들어가서 기뢰 (naval mines)를 제거하고 아군에게 상륙해도 좋다는 등대 빛을 비추게 되어 있었습니다. 초조하게 기다리던 맥아더에게 마침내 등대 불빛이 어두운 바다를 환하게 비칩니다. 그 때 맥아더가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이르시기를 ‘빛이 있으라’” “God said ‘Let there be light.’” (창세기 1:3) 제가 보기에 이 장면이 전체 영화 중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창조의 능력이 있습니다. 없는 것을 있게 하고,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능력이 있습니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 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와 똑 같은 몸을 입고 태어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1:14). 이것을 신학 용어로 ‘incarnation’이라고 합니다. 한 아버지가 자기 아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왔습니다. 이 아이는 아주 상태가 좋지 않았습니다. 멀쩡하다가 가끔 심한 경련을 일으키면서 쓰러집니다. 언제, 어디서 그런 일이 있을지 몰라서 아버지는 안절부절합니다. 아버지 말에 의하면 이 아이가 듣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는데, 어떤 때는 물에도 쓰러지고, 불에도 쓰러진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예수님께 간절하게 매달립니다. “하실 수 있으면 이 아이를 불쌍히 여기시고 도와 주십시오.” 그 때 예수님이 그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What do you mean, `If I can'? Anything is possible if a person believes." (‘내가 할 수 있으면?’ 이 말이 무슨 말이냐? 믿는 사람에게는 무슨 일이든지 가능하다).” 그 때 이 아버지가 이렇게 말합니다. “I do believe, but help me overcome my unbelief (예, 제가 믿습니다. 제가 불신앙을 이길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오)!" (마가복음 9:22-24) 마가는 그의 복음서에 이 장면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When Jesus saw that the crowd of onlookers was growing, he rebuked the evil① spirit. He said "Listen, you spirit that makes this boy unable to hear and speak, I command you to come out of this child and never enter him again!" (마가복음 9:25) /①Greek unclean

이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읽은 시편 59편 말씀을 보세요. 이 시편도 역시 다윗이 썼습니다. 이 시편 첫 머리에 ‘사울이 군인들을 보내어 다윗을 죽이려고 그 집을 지킬 때’ 라고 나와 있습니다. 사울은 군인들을 보내서 다윗을 가택연금을 시키고, 기회를 봐서 다윗을 죽이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집 안에 갇혀 있는 다윗이 얼마나 무섭고 떨렸겠습니까? 우리가 살다가 보면 이런 일도 당하게 됩니다. 정말 우리는 우리 앞을 단 몇 시간도 내다 볼 수가 없습니다. 똑똑한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 드렸잖아요? ‘Helicopter View’ 혹은 ‘Bird’s Eye View’를 가지고 다음 세대 사람들에게 충고한 사람이 있었다고요. 그 사람이 솔로몬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쓴 전도서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제 때에 아름답게 지으셨고, 사람의 마음에 영원의 감각을 주셨지만,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행하실 일은 다 깨달을 수가 없다 (but people cannot see the whole scope of God’s work from beginning to end).” (전도서 3:11)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은 그가 하시는 일을 우리가 다 모르게 해 놓으셨습니다. 다 모르기 때문에 순간순간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모르기 때문에 순간순간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다윗의 시편으로 돌아가 볼까요? 지금 밖에서는 사울이 보낸 군인들이 집을 에워싸고 있습니다. 기회를 엿보다가 언제 군인들이 들이닥쳐 다윗의 생명을 빼앗을지 알 수 없습니다. 정말 끔찍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 집안에 있는 다윗은 그 시간에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놀랍게도 그는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할 것입니다. 아침에 내가 주의 사랑을 노래할 것입니다. 주는 나의 성벽이시며 어려울 때에 찾아갈 나의 피난처이십니다. 오 나의 힘이신 하나님, 내가 주를 찬양합니다. 오 하나님, 주는 나의 성벽이시며, 나를 사랑하는 하나님이십니다.” 집 안에 있는 다윗은 불안에 떠는 대신 나의 힘이 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었습니다. 아침에 주의 사랑을 노래한다고 하지요?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밤에 주님의 사랑을 노래해도 되잖아요? 그런데 왜 굳이 아침에 주의 사랑을 노래한다고 했을까요? 무섭던 밤이 지났잖아요? 지난 밤을 무사히 보내고 새 날을 맞이 했잖아요? 무섭던 밤이 지나고, 또 새날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다윗은 눈을 뜨면서 찬양하고 있습니다. 밖에는 사울이 보낸 군인들이 에워싸고 있지만, 다윗은 사울의 군인들보다 더 강하고 튼튼한 하나님의 성벽이 나를 보호하고 있다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For you have been my refuge, a place of safety when I am in distress (주님은 나의 피난처입니다. 내가 불안할 때 안전하게 피할 수 있는 피난처입니다).” (17절)

이제 오늘 제가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을 말씀 드릴 시간이 되었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그 하나님을 우리가 경험하고 느끼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가 불안하고 무서울 때, 어떻게 “하나님께서 여기 나와 함께 계시는구나” 하고 하나님의 임재(臨在, God’s presence)를 느낄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4:17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주님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셨습니다.” “But the Lord stood at my side and gave me strength.” (NIV) “But the Lord stood with me, and strengthened me.” (NASB) 누가 누구에게 한 말입니까? 사도 바울이 그 제자 디모데에게 한 말입니다. 아무도 내 곁에 없을 때, 외롭고 힘들 때, 무섭고 떨릴 때, 주님이 나와 함께 계셨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힘을 주셨습니다. 정말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임재하심 속에 살 수 있다면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하는 법을 모르고 있다고요.

잘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어떤 때 기도하게 되고, 우리가 어떤 때 하나님을 찾게 되는지 생각해 보세요. 내가 성공했을 때인가요? 아니면, 내가 실패했을 때인가요? 내가 희망에 부풀어 있을 때인가요? 아니면 내가 절망에 빠져 있을 때인가요? 내가 건강할 때인가요? 아니면 내가 병들었을 때인가요? 내가 계획한대로 잘 나가고 있을 때인가요? 아니면 내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고 물거품이 되었을 때인가요? 내가 강할 때인가요? 아니면 내가 약할 때인가요? 내 옆에 친구들이 많이 있을 때인가요? 아니면 내 옆에 아무도 없을 때, 혼자 버려져 있을 때인가요?

맞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약해 지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지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성경 말씀들이 이 메시지를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 하나님의 메시지를 듣지 못합니다. 왜요? 그 때 성경을 읽지 않으니까요. 조금만이라도 정신을 차려서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언제, 어느 때에 하나님께서 나를 찾으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한 사람만 예를 들어 볼까요? 하나님께서 모세를 처음으로 부르신 것은 그의 나이가 80세가 다 된 어느 날이었습니다. 모세는 젊었을 때 애국심으로 충만했습니다. 여차여차해서 이집트의 공주의 아들로 성장한 모세는 자기가 이집트 사람이 아니라 히브리 사람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에 대한 identity를 찾게 된 것입니다. 그런 이야기가 성경에는 자세하게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대신 ‘십계 (The Ten Command-ments)’ 같은 영화를 보면 흥미진진하게 잘 나와 있습니다. 궁금한 것은 그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그가 그렇게 히브리 민족을 위해서 일하려고 했을 때는 부르시지 않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버리신 것 같았습니다. 결국 모세는 미디안 (Median)이라는 시나이 반도 남쪽으로 피신을 하잖아요? 그 때 모세의 나이가 40이었습니다. 거기서도 하나님은 모세를 찾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다가 또 40년이 흘러갑니다. 이제 모세에게 젊었을 때의 힘도, 의욕도, 꿈도 다 사라졌을 때입니다. 자신의 인생이 그렇게 끝나는 것에 절망하고 있을 때입니다. 이제는 나이가 많아져서 무엇을 하려고 해도 할 수 없는 때였습니다. 하나님은 그 때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때를 위해서 40년을 기다리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사실입니다. 신약성경 고린도후서 12장에 보면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 나옵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 몸을 찌르는 가시 (a thorn in his flesh)’가 있어서, 그 가시를 빼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기도에 응답이 없습니다. 열심히 기도해도 응답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주어진 하나님의 응답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온전해 진다.” 이 말씀이 NIV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My grace is sufficient for you, for my power is made perfect in weakness." 자기는 지금 이 가시 때문에 힘들과 아파 죽겠는데, 하나님은 지금 너는 나의 은혜를 충분히 받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능력은 너의 약함을 통해서 완전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너무 귀해서 오늘 주보 겉장에 실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바울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 위에 머물러 있도록 하기 위해서 나의 약한 것들을 더욱 기쁘게 자랑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약할 때나 모욕을 받을 때나, 궁핍하게 될 때나 핍박을 받을 때나, 어려움이 있을 때에, 그리스도를 위해 기뻐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약할 그 때에 강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12:9-10)

사람들은 누구나 다 강해지려고 합니다. 그러나, 자기의 힘으로 강해진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지 않아요. 자기가 가진 것이 많아서, 자기가 아는 것이 많아서, 자기가 소유한 것이 많고, 자기 힘이 강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반대로, 약한 사람,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 부족한 것이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합니다. 여러분, 잘 들으세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약함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약함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약한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납니다.

어제 토요일 새벽 기도 때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 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 시키러 왔노라 (누가복음 5:31-32)” 이 말씀을 읽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자기가 충분히 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왜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합니까? 자기가 약하다고 고백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크리스천 리더십에 대한 책을 많이 쓰는 Max Lucado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God never said that the journey would be easy, but he did say that the arrival would be worthwhile (하나님은 한번도 우리의 삶의 여정이 쉬울 것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그대신 하나님은 우리의 종착점이 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여러분의 가정에, 직장에, 여러분의 자녀들을 키우는 일이, 또 여러분이 공부하는 일이 쉽지 않은가요? 하나님께서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그런 일을 겪으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크리스천의 삶입니다. 우리의 삶의 여정이 어렵고 힘들지만,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이고, 하나님의 자녀들의 운명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도착한 우리 ‘종착점 (the arrival)’ 매우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자신이 약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지금 나의 삶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나요? 지금 생활에 힘들고 지쳐 있나요? 한번 오늘 주의 말씀을 읽으면서 여러분의 시각을 바꿔 보세요. 지금이야 말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지금이야말로 하나님의 능력이 나의 약함을 통해서 드러날 때입니다. 앞의 화면 보면서 우리 같은 목소리로 이 말씀을 읽겠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온전해 진다.” “My grace is sufficient for you, for my power is made perfect in weakness."  신약성경 고린도후서 12:9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9/18/2016 | 앞 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2

그가 네 길을 인도하신다. He Will Direct Your Paths.

잠언 3:1-6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인간의 불안을 ‘실존적 불안 (existential anxiety)"이라고 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인간은 자기에게 주어지는 자유와 책임 때문에 불안하다는 것입니다. 그 불안은 이런 것입니다. “지금 나는 잘 살고 있는 것인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대로 살아가면 후회 없는 인생을 살 수 있는 것인가?” “지금 나의 결정은 최선의 결정인가?” “나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이 나에게 있는가?” 어떻게 보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불안은 이율배반적인 것입니다. 내가 내 마음대로 내 인생의 문제를 결정할 수 있는 자유가 있는 것 같은데, 오히려 그 자유가 나를 불안하게 하는 것입니다. 결정의 결과에 대해서 내가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철학자들의 주장에 동감(同感) 하시나요?

지금은 거의 모든 차에 내비게이션이 있어서 모르는 길을 가도 불안하지 않습니다. 미국은 물론이고, 캐나다까지 모두 카버하기 때문에, 모르는 곳을 갈 때도 불안하지 않습니다. 집으로 돌아올 때는 더 안심이 됩니다. ‘Go Home’ 버튼만 누르면 집으로 가는 길을 모두 알려 줍니다. 중간에 길을 잘못 들어도 걱정할 것 없습니다. 내비게이션이 길을 수정해 줍니다. 내비게이션도 지금은 많이 성능이 좋아졌는데, 예전에는 에러가 많았습니다. 이에 따른 에피소드도 많았습니다. 한번은 뉴욕에 있는 작은 TV 방송국을 찾아 가는데, 처음 가는 길이라 조금 불안했습니다. 전 그 때 긴 다리를 건너고 있었습니다. 내비게이션으로 보면 거의 목적지에 다 온 것 같은데, 방송국 같은 건물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직 다리 위였으니까요. “어? 뭔가 이상한데?” 했는데, 목적지에 나 왔다는 “You have reached your destination” 하는 거예요. 그 때 얼마나 황당했는지 모릅니다. 미국에 오래 살았는데도 보스턴에 오래 살다 보니까 뉴욕에 간다고 긴장되는 울렁증이 있는데, 그 때 제가 다리 위에서 얼마나 당황했겠습니까?

또, 이 지역에 사시는 목사님 한 분은 밤 중에 내비게이션만 믿고 길을 나섰는데, 사방이 깜깜한 데다 눈이 많이 온 때였습니다. 어쩔 수 없이 내비게이션이 가라는 대로 가고 있었는데, 점점 인가가 없는 산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급기야 눈으로 꽉 막힌 막다른 길을 만나게 되어서 그 밤중에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많이 되었는데, 일찍 떠나신 목사님이 오지 않아서 모두들 걱정하고 있었는데, 그 목사님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그 쪽 지리를 잘 아는 목사님이 잘 못 갔으니까 다시 돌아오라고 해도 차가 눈 속에 빠져서 꼼짝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여러 사람들이 가서 눈 속에 빠진 차를 꺼냈습니다. 그렇게 해서 간신히 목적지에 올 수가 있었습니다.

불행한 것은 우리가 지금 걷고 있는 인생의 길이 목적지를 향해 잘 가고 있는지, 잘못 가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헬리콥터 뷰 (Helicopter View)’라는 말이 있습니다. 헬리콥터를 타고 높이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다 보면 한 눈에 다 보입니다. ‘헬리콥터 뷰’와 비슷한 말로 ‘버즈 아이 뷰 (Bird’s Eye View)’라는 말이 있습니다. 역시 새는 높이 날아 올라갈 수가 있으니까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보면 아래서 움직이는 것들이 모두 보입니다. 이런 생각 들지 않습니까? “지금 내가 살아가는 것을 누가 좀 높은 곳에서 봐줬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이요.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읽은 잠언 말씀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잠언’이라는 말은 한자인데, ‘잠(箴)’ 자는 ‘바늘’ ‘꽂다’라는 뜻입니다. ‘언(言)’ 자는 ‘말씀’이라는 뜻이니까, ‘콕 집어서 해 주는 말’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말로 ‘훈계(訓戒)’ ‘교훈(敎訓)’이라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Proverbs’라고 하는데요. ‘속담’ ‘격언’이라는 뜻입니다. 속담은 오래 전부터 전해 오는 짧은 말인데, 누가 말했는지 잘 모르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 속에 인생을 사는 지혜와 교훈이 들어 있습니다.

성경에 ‘잠언’이라는 책이 있는데, 그 책 속에 수많은 잠언이 들어 있습니다. 그 많은 잠언들을 주로 솔로몬이라는 이스라엘의 왕이 남긴 것입니다. 오늘 읽은 잠언 3장에 나오는 잠언들도 솔로몬 왕이 남긴 것들입니다. 솔로몬은 이스라엘의 3대 왕이었는데요. 여러가지 점에서 전무후무한 왕 이었습니다. 우선 그가 모르는 것이 없었습니다. 성경에 열왕기상, 하 두 책은 역대 이스라엘의 왕들에 대한 역사가(歷史家)들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그 책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큰 지혜와 슬기로운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헤아릴 수 없는 넓은 마음을 주셨습니다. 솔로몬의 지혜는 동방의 그 어떤 사람의 지혜보다 컸으며, 이집트의 모든 백성의 지혜를 합한 것보다도 더 컸습니다. 솔로몬은 이 땅의 어느 누구보다도 지혜로워 솔로몬의 명성은 모든 나라에 널리 퍼졌습니다. 솔로몬 왕은 평생 동안, 지혜로운 가르침을 삼천 가지나 말했으며, 천 다섯 편이나 되는 노래를 지었습니다. 그는 레바논의 백향목으로부터 돌담에서 자라는 우슬초에 이르기까지 온갖 식물과 짐승과 새와 기어 다니는 것과 물고기에 대해서도 가르칠 수 있었습니다. 모든 민족들이 솔로몬 왕의 지혜를 들으려고 몰려왔습니다.” (열왕기상 4:29-34)

솔로몬은 이렇게 많은 지혜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그가 하고 싶었던 모든 것을 원없이 해 봤던 사람으로도 유명합니다. 사치와 향락에도 빠져 봤고, 온갖 부귀영화도 누려 봤습니다. 날마다 귀족들을 궁으로 불러 화려한 파티도 열어봤습니다. 그가 원하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권력도 손에 쥐었습니다. 이런 솔로몬이 ‘고백록’처럼 자신의 인생에 대한 기록을 남긴 것이 성경 ‘전도서’입니다. 그가 남긴 잠언도 그의 인생 후기에 남긴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젊었을 때 무슨 잠언이 나오겠어요? 인생을 살만큼 살고, 온갖 경험을 다 해보고, 인생에 대해 ‘Helicopter View’를 갖게 되고, ‘Bird’s Eye View’를 갖게 된 사람이 잠언을 남기지 않았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그가 남긴 잠언들을 단순히 속담처럼 유익한 말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가 그 속에 들어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솔로몬의 ‘잠언’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먼저 우리가 주목해서 봐야 하는 것은 그가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하나님의 말씀과의 관계에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크리스천들은 이런 말씀을 들어도 별로 놀라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논하는 관점(觀點)이 비단 ‘잠언’의 말씀 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보세요. “내 가르침을 잊지 말고, 내 명령들을 네 마음에 소중히 간직하여라. 그렇게 하면, 너는 오래 살고, 성공하게 될 것이다.” (잠언 3:1-2) 이 말씀과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5장에서 하신 말씀을 한번 비교해 보세요.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으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이루어질 것이다.” (7절)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하게 마음에 간직하고, 그 말씀을 자신의 삶 속에서 실천하며 사는 사람은 성공적인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Store my commands in your heart. If you do this, your life will be satisfying.” (New Living Translation) NIV 성경에는 “They will bring you prosperity” 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they’는 마음 속에 간직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마음 속에 store되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성공과 번영을 가져 온다는 것입니다. 제가 오후에 ‘안녕하세요’에서도 말씀 드리겠습니다만, 사람을 사람답게 키워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지금 한국에서는 ‘금수저’ ‘흙수저’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금수저’는 태어날 때부터 부모 잘 만나서 좋은 환경 물려 받는 사람이고, ‘흙수저’는 그렇지 않은 사람을 말합니다. “나는 흙수저 물고 태어났으니까.....” 하는 패배주의가 청년들 사이에 퍼져 있습니다. 우리 크리스천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와서는 안 됩니다.

둘째로, “너는 성실과 사랑을 절대 버리지 말고, 그것을 네 목에 걸고, 네 마음 판에 잘 새겨라.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칭찬을 받을 것이다.” (3-4절) 저는 이 말씀 읽으면서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기록한 성경 말씀이 생각이 났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습니다.” (누가복음 2:52) 문제는 솔로몬이 말하는 ‘성실’과 ‘사랑’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는 이것을 ‘loyalty and kindness’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NIV 성경에는 이 말이 ‘love and faithfulness’라고 나와 있습니다. NASB에는 ‘kindness and truth’라고 나와있고요. 하나 더, NKJV에는 ‘mercy and truth’라고 나와 있습니다. 왜 이렇게 조금씩 다른 다양한 번역을 했을까요? 구약성경이 원래 히브리말로 씌어졌습니다. 신약성경은 코이네 그릭 (Koine Greek), 고대 그리스 말로 기록 되었습니다. 지금은 그 언어가 사멸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사용된 ‘성실과 사랑’이라는 말은 히브리말로 ‘헤세드’라는 말을 번역한 것입니다. 다양한 번역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헤세드’라는 말에는 아주 풍부한 뜻이 들어 있습니다. 아마도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하나님의 속성을 가장 잘 나타내는 말이 있다면 바로 이 ‘헤세드’라는 말일 것입니다.

좀 설명이 길어졌습니다만, 지금 솔로몬이 말하고 있는 것은 ‘헤세드’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네 인생은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favor를 받는 축복된 인생이 된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성공과 실패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느냐, ‘흙수저’를 물고 태어났느냐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이 하나님의 ‘헤세드’를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이 ‘헤세드’를 알기를 원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경험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솔로몬이 ‘Bird’s Eye view’를 가지고 충고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 말씀이 5절과 6절에 나와 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절대로 네 자신을 의지하지 마라. 너는 네 모든 길에서 그분을 인정하여라. 그리하면, 그분이 너의 길을 형통하게 만들어 주실 것이다.” 솔로몬은 많은 지혜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이런 사람은 자기가 똑똑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은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을 의지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똑똑하고,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안다고 생각하니까 자연히 자기 자신을 의지하게 됩니다. 솔로몬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 결과 그는 많은 실수를 하게 되고, 많은 시행착오를 겪게 됩니다. 쓸데 없는 건축과 토목 공사를 하게 되고, 공사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백성들에게 많은 세금을 거두게 됩니다. 이 모두가 자기 자신을 믿은 결과였습니다.

솔로몬이 하는 말입니다. “네 자신을 의지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훨씬 낫다!” 더 나가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일에 하나님을 인정하라!” 지금 우리는 정말 세상 어디서도 들을 수 없는 엄청난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 생각대로 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 인생에 대한 ‘Helicopter View’를 가진 솔로몬이 하는 말입니다. “아니, 네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신뢰하세요. 그게 백 번 낫습니다.” “Trust in the Lord with all your heart; do not depend on your own understanding”이라고 합니다.

솔로몬이 말한 다른 잠언들을 볼까요? “사람이 제비를 뽑지만, 그 결정은 여호와께서 하신다.” (잠언 16:33) 제비를 뽑는다니까 자기 손으로 뽑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뽑는 일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신다는 것입니다. 주사위 (dice)를 던집니다. 떼굴떼굴 구르다가 멈춥니다. 몇 번이 나왔는지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됩니다. “We may throw the dice, but the Lord determines how they fall.”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간단 하잖아요? 그 주사위가 어떻게 몇 번을 굴러서 어떻게 뒤집어질지 그것을 결정하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하잖아요?

요즘 성경 말씀을 읽는데, 자꾸 눈에 들어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은 말씀입니다. 낮에는 구름 기둥이 앞 길을 인도했고, 밤에는 불기둥이 인도했습니다. 광야에서는 방향을 알 수 없습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름 기둥과 불기둥을 의지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말씀이 출애굽기에도 나와 있고, 민수기에도 나와 있고, 신명기에도 나와 있습니다. 이 말씀이 주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방향을 결정하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방향을 결정했다는 것 아닙니까? 그들이 그렇게 해야 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그 곳이 ‘광야 (wilderness)’였기 때문입니다. 아마 광야가 아니었더라면 자기들이 방향을 결정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40년 동안 “너희들의 방향은 내가 결정한다.” 이 교훈을 주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지 몰라요. “지금은 광야가 아닙니다!” 맞습니다. 지금 우리는 광야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명의 이기가 이렇게 발달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인간이 축적한 정보의 양은 엄청나게 많고, 인간의 지식은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졌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지금 우리는 21세기의 광야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방향을 잡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 우리도 앞길이 전혀 볼 수가 없습니다. 지금 청년들의 미래가 보이지 않습니다.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대학을 졸업해도 취직 자리가 없습니다. 젊은이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무력감이 빠져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광야에서는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많이 배운 사람도, 기술이 있는 사람도, 날고 기는 사람도, 광야에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수 밖에, 다른 옵션이 없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광야를 걷고 있습니다. 광야를 걷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다른 옵션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다시 오늘 잠언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개역성경)


9/11/2016 | 두려움을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1

나의 힘이 되시는 하나님 God Is My Strength.

시편 18:1-6

구약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에 가장 사랑을 많이 받는 사람이 있다면, 다윗 (David)이 아닌가 합니다. 하나님은 유일하게 그를 가리켜 “그 사람은 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다. 그를 통해 나의 뜻을 이룰 것이다 (a man after my own heart. He will do everything I want him to do., 사도행전 13:22)”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 꼭 그렇게 한 사람을 지적해서 그 사람은 내 마음에 든다고 한 사람은 다윗이 유일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왕들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가들도 다윗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다윗은 언제나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옳은 일을 했습니다. 다윗은 헷 사람 우리아 (Uriah the Hittite)의 일 외에는 그의 평생에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적이 없었습니다.” (열왕기상 15:5)

재미 있는 것은, 이 다윗이 예수님과 많은 공통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선 고향이 베들레헴으로 같습니다. 그래서 흔히들 예수님은 다윗 가문의 후손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다윗은 사람에 대한 미움이 없습니다. 사람이 자기에게 잘 해 주는 사람에게 호감이 가고, 자기에게 잘 못해 주는 사람은 미워하기 마련인데, 다윗도 그렇고, 예수님도 그렇고 사람에 대한 미움이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33년을 사셨습니다. 다윗이 왕 위에 앉아 통일 이스라엘을 통치한 기간도 33년입니다 (왕상 2:11, 역대상 29:27). 예수님에게는 12명의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다윗에게도 30명의 충성스러운 부하들이 있었습니다. 그만큼 다윗의 생애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다윗을 그렇게 미워하고, 죽이려고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사울이라는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습니다. 사울은 언제부터인지 자기의 부하 다윗을 경계하기 시작합니다. 다윗의 인기가 높아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사울은 다윗이 자기의 왕위를 빼앗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싸이기 시작하면서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한번은 자기를 위해서 수금 (harp)을 연주하는 다윗을 향하여 창을 던졌습니다. 그 창이 다윗을 스치면서 벽에 박힙니다 (사무엘상 19:10). 다윗은 간신히 목숨을 구합니다. 그런가 하면, 사울은 그의 군대를 풀어서 다윗을 잡으려고 산을 겹겹이 포위하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다윗의 마음에는 사울을 미워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다윗은 사울에 대한 미움이 들 때마다 “저 사람은 하나님께서 기름을 부어 세우신 이스라엘의 왕이다 (사무엘상 24:6)” 이런 생각을 하면서 미움을 이겨냈습니다. 그런 생명의 위기 속에서 다윗이 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 기도를 꼼꼼하게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시편입니다. 구약의 시편들은 거의 다윗이 쓴 것들입니다. 그리고, 그 시편들은 다윗의 생애 중 가장 어렵고 힘들었던 시기에 쏟아져 나왔습니다.

여러분, 로마서 5:3-5에 이런 말씀이 있는 것을 아십니까? “우리는 환난을 당하더라도 즐거워합니다. 그것은 환난이 인내를 낳고, 또 인내는 연단된 인품을 낳고, 연단된 인품은 소망을 낳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 소망은 절대로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통해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 속에서 중요한 단어들을 뽑아 보세요. ‘problems and trials (환난)’이 ‘endurance (인내)’를 만들어냅니다. 그러면, ‘endurance’가 또 ‘strength of character (강인한 품성)’를 만들어냅니다. ‘strength of character’가 또 ‘hope of salvation (구원의 희망)’을 만들어냅니다. 이 희망을 가진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실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크리스천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것들이 무엇인지 듣고 있습니다. 크리스천의 삶에 있어서 환난은 결코 그 자체로 끝나지 않습니다. 환난을 통해서 인내를 배우고, 인내를 통해서 크리스천의 강인한 성품이 길러지고, 이런 성품을 가진 사람에게 구원의 희망이 주어집니다. 이런 시각으로 본다면, 환난은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구원의 희망을 주시기 위한 선물입니다. 환난이 없으면 구원의 희망도 없습니다.

오늘 저는 시편 18편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지금은 새 학기가 되어서 보스턴에 꿈을 안고 찾아 오는 학생들이 많습니다. 제가 1983년 12월에 캘리포니아 부엔나 팍 (Buena Park)에 제 아내와 함께 도착했습니다. 그 때 저는 정말 어리 버리 했습니다. 미국 생활에 조금 적응하면서 토플 시험을 준비해서 Claremont 신학교에 입학을 했습니다. 미국은 신학교가 대학원 과정입니다. 거기서 한 2년을 공부하고, 1986년에 보스턴 신학교로 transfer를 해서 왔습니다. Los Ange-les에서 대륙 횡단을 하여 보스턴으로 들어오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30년이 흘렀습니다. 지도를 보면서 90번 Mass Pike를 타고 들어왔습니다. 보스턴에 거의 다 들어 왔는데, 왜 그렇게 마음이 무거운지, 오른 쪽으로 맥도날드 사인이 크게 보였습니다. 그곳에 들어가서 별로 마시고 싶지도 않은 커피를 마시면서 불안한 마음을 달랬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아마도 보스턴에 새로 온 학생들에게 30년 전에 제가 가지고 있었던 그 불안한 마음이 아직 있을 것입니다. “과연 내가 이곳에서 survive할 수 있을 것인가?” “내가 학교 공부는 제대로 따라 갈 수 있을까?” “adviser 교수님은 어떤 분일까? 좋은 분일까?” “무사히 학위 과정을 마칠 수 있을까?” “보스턴의 겨울을 춥고 눈이 많이 온다는데, 잘 지낼 수 있을까?” “보스턴은 생활비도 많이 든다는데?” “여기 교회는 또 어떤 교회일까?” “여기서도 좋은 친구들을 만날 수 있을까?” 이런 불안감들이 여러분에게 있을 줄 압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이 오늘 읽은 시편 18편 말씀입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A psalm of David, the servant of the LORD. He sang this song to the LORD on the day the LORD rescued him from all his enemies and from Saul (주님의 종 다윗이 쓴 시편. 그는 주께서 그를 그의 적들과 사울로부터 구해 주셨을 때 이 노래를 주님께 불렀다).”

이 시편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다윗이 놓여 있었던 상황을 한번 보시지요. “죽음의 줄이 나를 묶고, 멸망의 물살이 나를 덮쳤습니다. 무덤의 줄이 나를 묶고, 죽음의 덫이 나를 덮었습니다.” (4-5절) 이 구절 속에 나오는 단어들을 보세요. ‘죽음’ ‘멸망 (destruction)’ ‘무덤 (grave)’  ‘덫 (trap)’ 이런 극단적인 단어들이 연이어 등장하고 있습니다. 죽음과 멸망과 무덤들이 마치 살아 있는 것 처럼 나를 밧줄 (rope)로 꽁꽁 묶어서 꼼짝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내가 가는 길에는 ‘덫’이 놓여 있습니다. 한 발짝만 잘못 디디면 ‘덫’이 내 발목을 칠 것입니다.

이정재와 리암 니슨 (Liam John Neeson)이 출연한 인천 상륙 작전 영화를 보셨나요? 맥아더 장군은 성공 확률 1/5000이라는 인천 월미도로 상륙작전 (Operation Chromite)을 감행합니다. 그런데, 그곳을 이미 점령하고 있던 북한군은 연합군이 상륙할 것을 예상하고 그곳에 기뢰 (機雷, naval mine)를 설치해 놓았습니다. 멋 모르고 상륙 했다가는 연합군은 전멸하고 말 것입니다. 맥아더가 이 정보를 입수하고 특공대를 먼저 들여 보냅니다. 어디에다 기뢰를 설치해 놓았는지 지도를 찾아 오라고 특명을 내립니다. 그 지도를 손에 넣기 전에는 연합군은 상륙을 할 수가 없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기뢰가 촘촘히 깔려 있는 어두운 바다를, 어떻게 뚫고 상륙을 합니까? 특공대가 들어가서 기뢰가 모두 제거 되었다는 신호를 보내오기 전에는, 맥아더 장군이라도 꼼꼼할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은 기도의 능력을 믿습니까? 크리스천들은 이런 질문을 받을 때 당황합니다. 기도의 능력을 믿는다고 대답하면 “그러면 왜 기도하지 않습니까?” 하고 질문을 받을 것이 뻔하고, 그렇다고 기도의 능력을 믿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없어서 이런 질문을 받으면 당황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니, 그 시간에 뭔가 도움을 구하고 방법을 찾아 봐야지 기도만 한다고 무슨 뾰족한 수가 있느냐고 말합니다. 심지어는 크리스천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기도야말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소통(疏通)하는 것이기 때문에,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을 말씀 드릴 수가 있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할 수가 있습니다. 신약성경 빌립보서 4:6-7에 기도에 대한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이 말씀을 New Living Translation으로 한번 읽어 보시겠습니까? “Don't worry about anything; instead, pray about everything. Tell God what you need, and thank him for all he has done. Then you will experience God's peace, which exceeds anything we can understand. His peace will guard your hearts and minds as you live in Christ Jesus.”

저는 이 말씀이 기도의 응답에 대한 최선의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급하게 무슨 기도를 하면 “옛다 여기 있다” 하고 문제에 대한 대답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소통입니다. 그 소통의 창구를 통해서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모든 일들에 대하여 감사 드리고, 하나님께 필요한 것을 말씀 드리면, 이 세상 무엇하고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평화가 내 마음을 채웁니다. 그리고, 그 평화가 내 마음과 생각을 지켜 줍니다. 지금까지 나를 그렇게 꼼짝 못하게 얽어 매고 있던 불안한 마음이 어느 새 물러가고 그 자리에 하나님의 평화가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 평화는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다 믿음에서 오는 평화입니다. 나는 지금 혼자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나와 같이 계신다는 믿음에서 오는 평화입니다.

‘죽음’ ‘멸망 (destruction)’ ‘무덤 (grave)’ ‘덫 (trap)’에 걸려 꼼짝 할 수 없었던 다윗이, 그런 상황에서 무슨 일을, 어떻게 하는지 6절 말씀을 읽어 보십시오. “고통 중에 내가 여호와를 불렀고, 나의 하나님께 도와 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랬더니) 그가 내 목소리를 들으셨고, 울부짖는 내 외침이 그의 귀에 들렸습니다.” “But in my distress I cried out to the LORD; yes, I prayed to my God for help. He heard me from his sanctuary; my cry to him reached his ears.”

“내가 아무 것도 할 수 없구나!” 이란 절망감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부르짖는다’는 말은 ‘기도한다’는 말입니다. 기도는 어디서든지 할 수 있습니다. 손발이 다 묶여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삼엄한 감시 속에서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세상 그 누구도 기도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앞으로 여러분의 앞 길에 환난이 많을 것입니다. 절망할 일들이 많을 것입니다. 보스턴에 와 보면 나보다 똑똑한 사람들이 널려 있습니다. 나보다 더 실력 있고, 나보다 더 연주 잘 하는 사람들이 사방에 널려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빠질 수도 있고, 자기 자신에게 실망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때야말로 내가 하나님께 부르짖고 기도해야 하는 때인 것을 잊지 마십시오.

기도하면 하나님의 평화가 내 마음과 생각을 지켜 줍니다. 기도하면 불안한 마음이 물러가고, 그 자리에 하나님의 평화가 들어 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고백이니까 바울 version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을 다윗의 version으로 한번 들어 보실까요? “여호와는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의 구원자이십니다. 나의 하나님은 피할 바위이십니다. 주님은 나의 방패, 구원하시는 뿔, 나의 산성이십니다.” (2절) 하나님을 자기 인생의 ‘반석 (rock) ‘요새 (fortress)’ ‘구원자 (savior)’ ‘방패 (shield)' ‘뿔 (power)' ‘산성 (place of safety)’이라고 고백합니다. 기도하면, 이 하나님께서 나의 도움이 되시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인생의 축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제가 늘 하는 말이 있습니다. 보스턴에 공부하러 온 사람들은 학교에서 세계 최고의 학문을 배우고,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축복을 받으라고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이라야 하나님께서 쓰시는 도구 (instrument)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음생활을 하는 목적입니다. 학위를 받아도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자신의 성공을 위한 도구가 될 뿐입니다. 학위 받아서 잘 먹고 잘 살자는 것 밖에 다른 목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반석, 요새, 구원자, 방패, 뿔, 산성이라고요?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의 평화가 내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신다고요? 이 사실을 아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 때 비로소 하나님은 나의 반석이 되시고, 요새가 되시고, 나의 구원자가 되시고, 나의 힘이 되시고, 나의 산성이 되십니다. 오늘 말씀이 보스턴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큰 힘과 용기를 주는 말씀이 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