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모음
11/12/2023 | 성령강림후 제 24주
예수가 우리를 사랑하는 것처럼 Just like Jesus loves us
사도행전 26:23-32
I like Jesus, but I don't like his Church.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도의 성자 간디도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나는 예수를 사랑한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싫어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를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 간디가 오랜 전에 교회의 타락을 예언이라도 한 것일까요? 아니면 당시 지난 역사를 돌아보며 대영제국의 가혹한 식민지 정치를 비꼬며 한 말이었을까요? 간디의 자서전 ‘나의 진리실험 이야기’를 보면, 그는 비폭력 저항운동을 통해 인도사회를 변화시켰던 힘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하루 매분마다 신을 깨닫기 위해 동지들이 일어나기 전에 새벽 4시에 잠을 깨워 일을 시작했고, 때로는 기름이 떨어진 작은 등잔을 옆으로 밀어두고 달빛에 의지해 편지를 썼는다. 나는 절대 진리인 하나님의 희미한 빛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모든 것은 다 참이 아니라는 확신이 날마다 자랐다.“ 라고 고백합니다. 신학적으로 상대적 진리냐? 절대적 진리냐? 의견이 갈리겠지만 본질은 진리의 힘은 삶의 변화에 있다는 것입니다.
(1) 진리는 변화의 원동력입니다.
하나님은 역사속에서 완전하지 않아도 교회를 통해서 일해 오셨습니다. 세상의 지배 통치 구조 안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 포기하지 않는 사랑으로 인해 섬기고 나누며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도록 인도하셨습니다. 그 증거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문제가 있다면 신학적 지식을 알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살려는 의지가 없는 것입니다. 진리의 지식이 머리에서 가슴까지 내려오지 않는 것이 문제이고, 삶의 자리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 사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예수님과 교회는 실제적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제자의 길을 포기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사랑해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일어난 일 때문에 십자가를 지신 그날이 “Good Friday”가 된 것입니다. 교회와 예수 그리스도는 이 끊을 수 없는 영원한 사랑으로 맺어진 친밀한 관계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반석위에 세워진 교회는 서로의 이익과 욕심을 챙기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사랑과 관심으로 든든히 서가는 것 입니다.
1세기 유대인들의 착각은 예수가 자신들의 전통을 위협하는 인물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바울을 이단의 두목이라고 말했겠지요. 그들은 예수께서 자신들의 전통을 폐지하러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으로 얻는 구원은 반드시 실패할 수 밖에 없기에 모든 인류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뚜렷한 경계선이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서 무너졌습니다. 감춰져 있던 하나님 나라가 바울에게 드러난 것입니다. 전에는 바울에게 한민족의 하나님이셨는데 이제는 모든 민족을 자신의 백성으로 부르고 계신 예수의 십자가가 나의 자랑이라 고백한 것입니다. 바울은 구약성서를 깊이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한 구속사의 시간표를 정확히 알고 있었는데 그에게 있어 이 변화의 사건이 다메섹에서의 회심입니다.
그런 바울을 보는 베스도 총독은 너가 미쳤구나 여겼습니다. 예수로 인해 미쳤다는 것입니다. 비단 바울 뿐이겠습니까? 모든 인간은 세상에서 무엇가에 빠져 살아갑니다. 구원을 이루려는 또 다른 삶의 방법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바울을 부르십니다. 그가 들은 주님의 음성은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라는 소리였습니다. 삶의 자리에서 우리를 부르시는 이 음성을 듣지 못하면 우리는 십자가의 진리는 부인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이용하는 자리에만 있을지 모릅니다. 여전히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삶을 살면서도 하나님의 영광만 구하고 있는 것이죠. 우리의 영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찬양하도록 주의 말씀을 충분히 묵상하며 채우시기 바랍니다. 이기심의 본성보다 말씀에 순종하는 회복의 상태로 이르게 되도록 그리스도의 완전한 법을 즐거워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예수께서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자유케하셨습니다.
(2) 십자가로 인해 인간의 이해가 달라졌습니다.
바울은 스스로를 바라 보는 인간의 이해가 달라졌습니다. 인간의 마음 안에 창조주 하나님을 외면하고 관계하지 않으려는 죄의 본성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바울은 이를 영적으로 죽은자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영이 죽으면 육체가 영을 지배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영적으로 죽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 거룩한 산제물이 되셨음을 깨닫고 죄의 종노릇 하던 죄의 뿌리에 눈을 뜬 것입니다
그러니 기독교의 진리는 예수가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건에 두지 않으면 무너지고 맙니다. 이 일어난 사건 앞에서 성도는 겸손해 져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모든 스펙을 포기하면서까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존귀하게 여긴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너희가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성숙해지려면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겸손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깊이 경험해야 합니다. 부모의 손을 잡고 걷는 아이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인생의 깊은 골짜기를 통과해 보고, 내 삶에 높이 쌓여진 산적한 문제 앞에서 번지점프를 하듯 구원의 줄에 매달려 뛰어 내려 보기도 해야 합니다. 경험해 보아야 구원의 줄이 끊어지지 않는 안전한 줄임을 알게 됩니다. 이 사랑의 줄을 붙잡고 살아갈 때에 우리의 경험과 힘으로 할 수 없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미웠던 사람을 사랑하는 일, 박해하는 이를 위해 기도하고 축복하는 일, 남에게 대접하는 일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주님의 십자가 사랑에 이끌린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삶은 억지로 되지 않습니다. 부요한 환경에 있으면 부요해서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고 부족한 환경에 있으면 부족해서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사랑에 붙들리면 그 사랑에 이끌려 가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6장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 반복되는 바울의 간증입니다. 9장에서는 다메섹에서 바울의 회심 사건을 다뤘고 22장에서는 유대인들에게 죽을 만큼 맞고 난 후에 영내로 들어가며 천부장에게 연설할 기회를 얻은 후 바울은 이 회심을 간증했습니다. 오늘 본문도 아그립바 왕 앞에서 하는 바울의 반복되는 회심 간증입니다. 그의 간증을 보면 먼저 유대교인으로 살 때를 회상합니다. 철저히 유대교 바리새인으로 살면서 하나님을 열심으로 섬겼고 나사렛 예수를 대적하여 복음을 핍박하던 자였다고 지난날 자신의 실수를 고백합니다. 자신은 아무런 죄의식 없이 성도를 죽이는 일에 어김없이 앞장 섰고, 모든 회당을 돌아다니면서 그리스도인들에게 테러를 가했다는 것입니다. 성도를 죽이는 일에 어김없이 찬성 투표를 했으며, 격분하여 외국의 성까지 찾아 다니면서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들였기에 나에게 죄목이 있다면 이러한 것들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박해하러 가는 중에 “정오가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췄습니다.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바울은 이 간증을 한 후에 자신이 결박된 것 외에는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들이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로마 총독과 아그립바 왕은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 부활하셨다고 전하니 베스도는 바울을 향해서 너가 미쳤다고 외쳤고, 아그립바 왕은 나는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서로 다른 두 고백은 십자가 전의 우리의 모습과 이후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3) 나와 같은 사람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26:28 그러자 아그립바 왕이 바울에게 말했다. “그대는 이렇게 짧은 시간 동안에 나를 설득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29 바울이 대답했다. “짧은 시간이든 긴 시간이든, 저는 왕 뿐만 아니라 오늘 제 말을 듣고 있는 모든 분들이, 쇠사슬에 묶인 처지인 것만 제외하고는 저와 같은 사람이 되기를 하나님께 빕니다.”
아그립바 왕은 인생의 최고의 자리에서 세상 권세를 다 누리고 있는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앞에서 바울은 자신이 결박된 이것만을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이 자기와 같이 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날의 재판 심리는 아그립바 왕에게 큰 감명을 준 것으로 보입니다. 역사가는 훗날 AD70년 유대 전쟁이 발발했을 때 아그립바가 그리스도교에 매우 호의적인 태도를 취했다고 합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때는 2년 동안 결박된 죄수복을 입고 있는 초라한 바울이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이었습니다. 그가 전했던 말들이 아그립바 왕에게 인상 깊이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몇해전 한 사진 작가분과 교제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분은 선천적으로 태어날 때부터 일부 색을 구별하지 못하는 제약이 있었습니다. 색약임에도 불구하고 그분 안에 주님을 향한 믿음은 그의 발걸음을 하나님을 드러내는 ‘축복의 통로’로 쓰임 받고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사진을 찍는 작가이기에 토론토의 랜드마크를 사진에 담아내 실 줄 알았는데 그분의 카메라 초점은 화려한 건물이나 지역의 랜드마크가 아니라 거리의 작은 삶을 사진으로 담아내고 있었습니다. 그분의 손에 들린 카메라는 이땅 구석구석 하나님과 함께 살아내는 사람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랑으로 애쓰고 힘쓰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된 사람들과 풍경을 담아내고 있었습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누리고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의 마음의 중심이 어디에 머물러 있느냐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며칠 동안 함께 대화하면서 작가님의 내면의 따뜻함은 시간이 흘러도 제게 깊은 인상으로 남아 있습니다. 무엇보다 강한 힘은 화려한 것을 바라보고 동경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살아냄의 겸손함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우들에게 이렇게 편지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여러분과 같이 되었으니, 여러분도 나와 같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내게 해를 입힌 일은 없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내가 여러분에게 처음으로 복음을 전하게 된 것은, 내 육체가 병든 것이 그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내 몸에는 여러분에게 시험이 될 만한 것이 있는데도, 여러분은 나를 멸시하지도 않고, 외면하지도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그 감격이 지금은 어디에 있습니까?”
바울이 전도여행 중에 갈라디아 지역에 도착했을 때 바울은 고생한 흔적으로 가득했고 마음은 지쳐 있었습니다. 성서기자들은 바울이 당시 풍토병에 걸렸거나 유대인들의 핍박 때문에 몸이 성하지 않았을 거라 추측합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지역인 비시디아 안디옥에 도착해서 예수의 복음을 전하자 그들 마음 안에 하나님을 향한 실제적 역사가 일어나고 갈라디아 지역 사람들은 바울을 천사나 되는 것처럼 대해 주었다고 말합니다.
복음은 완벽한 환경과 조건에서 증거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약해져 있을 때 복음은 더 강하게 역사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완벽해서가 아니라 연약하고 경건치 않을 때에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롬 5:6)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세상의 있는 부정적인 일들을 다 맛보셨습니다. 외로움과 수치,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배신감과 상실감, 그렇게 무력하게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말 구유에서 태어나고 청년의 나이에 십자가에 처형 당하신 삶을 보면 그 사랑으로 인해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약함을 숨겨야 하는 문화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적당히 오픈하고 적당히 나누고 숨기는 것에 익숙해져 갑니다. 그런데 복음의 능력은 우리가 약함을 드러낼 때에 역사합니다. 우리가 강하면 예수님이 필요 없지요. 바울은 이 복음의 비밀을 깨달았기에 자신의 약함을 자랑했고,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아그립바 왕 앞에서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한 것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쓴 이유는 그 감격 지금 어디에 있느냐고 편지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함께 기뻐했었는데 또 다시 율법주의로 돌아가려고 한다는 소식이 들렸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주님의 십자가 사랑이 식어질 때에 껍데기에 집착합니다. 형식과 틀 안에서 위안을 얻으려고 합니다.
바울이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다고 한 것은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야 하고, 학문에 능통하고, 종교적으로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삶을 불꽃처럼 태워 산제물이 되셨다는 것을 기억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새마음을 얻게 됩니다. 인간의 이해가 달라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이해가 달라집니다. 모인 사람들 중에 마음의 문이 열려 있는 사람들에게 바울의 간증은 큰 감동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곳에 앉아 있던 아그립바 왕도 바울의 무죄를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무죄를 확인했으니 바울을 풀어 주어야 하나 그가 로마에 상소를 했기에 바울은 로마에 갈수 밖에 없었습니다. 로마로 보내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이후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로마 군인들의 보호를 받으며 로마로 호송되게 됩니다. 바울이 만약 이때 석방되었다면 집요한 유대인들의 암살 음모에 의해 살해되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다음주에 설교하게 될 사도행전 27장은 바울이 로마로 가는 항해여정을 상세히 기록해 놓은 장입니다. 설교의 본문도 오묘한 섭리 안에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1620년 9월 6일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신앙의 자유를 찾아 떠나온 청교도인들을 통해 이 땅에 복음이 들어 오게 된 것과 이미 1500년전 하나님의 섭리로 압송되어 가던 바울의 항해가 오버랩됩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인생은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로마 병사의 호위를 받으며 가이사로 가는 것보다 안전한 길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는 억울함도 불행함도 없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하나님의 주신 기회입니다. 한해도 은혜 가운데 지켜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추수감사주일을 준비합시다. 성도는 세상속에서 이미 빛입니다. 소금 같은 존재가 된 것입니다. 연약한 존재에게 부어 주시는 끊임없는 사랑 때문에 주의 빛을 비추는 것이고, 소금이 되어 부패한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바울이 죄수의 몸으로 로마로 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모든 상황속에서 가장 안전한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시며 한주도 ‘모든 사람이 나와 같이 되기를 원했던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11/5/2023 | (성령강림후 제 23주)
바울의 꺾이지 않는 믿음 Paul’s Unbreakable Faith
사도행전 25:13-22
이제 몇 주만 더 하면 사도행전 강해가 마치게 됩니다. 반복되는 재판 과정속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교훈을 찾는 것은 땅속에 숨겨진 보물을 캐내야 하는 것 같습니다. 24장에서 바울은 총독 벨릭스 앞에서 재판을 받은 후 미결수 상태로 감옥에서 2년이라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바울은 유대교와 치열하게 싸우고 옥에 갇히면서도 방향을 잃지 않고 오래시간 참고 인내했습니다. 이 힘이 어디에서 부터 나오는 것일까요?
바울의 꺾이지 않는 믿음은 유대교 지도자들로 부터 내쳐질수록 주의 십자가로 끌어 안으시는 예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사명의 길에서 주의 빛 줄기는 지난날 바울의 과오를 덮는 한없는 용서와 은혜였습니다. 그러니 성도들의 삶의 지표는 사람들의 평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경험하고 있느냐입니다. 사람은 연약해서 편안하기만 하면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고난 속에서도 성령에 매여 인도함 받으면 모든 상황속에서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됩니다. 인생의 길이 조금 느린듯 해도 바른 방향으로만 지속하면 영광의 날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사도행전 28장 마지막 구절은 바울이 로마의 셋집에서 만2년 동안 자신을 찾아오는 이들에게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들을 전파하며 힘껏 가르쳤다라고 전합니다. 사도행전의 결말은 로마 재판 결과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지만 바울이 자유롭게 전도했다는 사실을 간단하게 전합니다. 그렇게 사도행전의 기록은 끝이 났지만 사도행전의 역사는 계속 이어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역사의 연장선 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시대는 진리의 존재를 거부합니다. 직장이나 대학 캠퍼스 현장, 공공연한 자리에서 기독교 진리를 드러내면 불편해 하고, 피해보는 일들도 많이 일어납니다. 만약에 바울이 현대사회에 다시 온다면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까요? 경기의 승패를 떠나 선수들이 지녀 할 마음은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믿음의 경주자들에게도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은 예수의 부활을 믿는 것입니다.
(1) 부활신앙은 복음의 핵심입니다.
25장 1절은 우리에게 벨릭스 총독 이후에 신임총독 베스도로 교체 되었음을 알게 해줍니다. 베스도 신임총독은 바울 사건의 진상을 모르기 때문에 바울을 심문하기 위해 또 다시 청문회를 개최합니다. 이러한 과정이 바울에게는 피로가 쌓이는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총 4번의 재판을 받았습니다. 이미 살펴 본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의 재판 (행 22:30-23:10), 로마의 11대 총독 벨릭스 앞에서의 재판(행 24:23), 로마 12대 총독이 된 베스도 앞에서의 재판(행25:1-12) 마지막 네번째 재판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행 26:1-32) 의 재판입니다. 이러한 재판의 과정들을 보면 일정한 패턴입니다. 복음을 증거하는 바울과 이를 죽이려는 유대인들의 거짓과 음해입니다. 그 재판의 중심에 바울의 부활사상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아시다시피 유대인이었습니다. 바울은 율법에 완전한 순종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이 유대교 지도자들의 자부심에 흠집을 내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평생 율법을 지켜며 무겁고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살았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바울을 변화시키는 복음이었습니다. 바울은 저항할 수 없는 은혜와 사랑에 사로 잡혀 이끌려 가는 것입니다.
가이사랴에 수감된 2년의 시간은 꽤 긴 시간입니다. 25장 2절을 보면 산헤드린의 유대 지도자들은 2년 후 베스도 총독이 부임하자 바울을 또 다시 고소하였습니다. 2년이라는 시간은 아무리 맺힌 게 많아도 풀어졌을 법한 기간인데 유대교 지도자들은 여전히 한 사람을 향한 마음이 변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강팍해져서 복음이 들어갈 틈이 없으며, 생명이 되시는 주님께 돌이킬 마음이 없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이라면 2년이라는 시간동안 하나님을 경외하며 예배를 집례하고 인도했을텐데, 사람을 죽이려는 마음이 여전한 것은 그들 마음 중심에 종교심이 만들어낸 폭력과 미움만 가득할 뿐이고, 불타는 욕망에 조종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을 고소한 유대 지도자들은 마음과 뜻과 생명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예배를 인도한 것이 아니라 형식과 껍데기 뿐인 예배를 드렸을 것입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신임총독에게 바울을 예루살렘 당국으로 옮기를 청합니다. 이 계획이 실행이 되면 가는 길에 또 다시 바울을 암살하기로 결의합니다. 2년 전에는 40여명의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매복했었는데 이제는 산헤드린 지도자들이 동일한 방법으로 악한일을 꾸미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을 이러한 방법으로 죽이려고 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로마법으로는 여러 죄목을 제시했지만 “확실한 증거를 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7절)
부임 이후 첫 재판과정인 바울 사건은 신임 총독 베스도에게도 신경 쓰였을 것입니다. 유대 지역에 부임했으니 2년 동안 미결된 바울 사건을 처리는 해야 했는데, 고소한 증거 내용으로는 바울에게서 어떠한 죄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죽음의 위협을 강하게 느꼈을까요? 바울은 자신을 로마의 황제 가이사 법정에 서게 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로마 시민권자가 황제에게 호소하는 권리는 시민들이 누려왔던 로마시대의 권리입니다. 그런데 로마에 상소하려면 바울의 분명한 죄목이 있어야 했는데 베스도 총독은 이 사건으로 난감해합니다. 때마침 당시 유대의 왕이었던 아그립바가 베스도의 부임을 축하하기 위해서 이 지역을 방문합니다. 아그립바는 아그립바 2세로 헤롯대왕의 증손자이며, 사도 야고보를 처형한 헤롯왕의 아들이기도 합니다. 아그립바는 당시 유대지역의 정통혈족으로 왕가 집안인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2개의 통치구조로 되어 있었는데, 로마 황제의 명령을 받아 식민지 유대 지역에 파견된 총독과 유대 지역을 다스리던 헤롯왕가입니다. 예수가 십자가를 질 때에는 5대 총독인 빌라도가 이 지역을 다스렸고, 바울의 재판은 벨릭스, 베스도 총독 임기 가운데 일어난 일입니다.
신임 총독 베스도에게2년 동안 해결이 안된 바울의 송사 사건을 듣게 된 아그립바 왕은 산헤드린 유대 지도자들에게 반감을 사고 있는 바울을 직접 만나서 그의 간증을 듣기를 원했습니다. 바울은 계속되는 재판 과정에서 자신이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죽은 자의 부활 개념은 낯선 것이 아니었음에도 실질적인 권력을 쥐고 있었던 예루살렘 최고 지도자들은 예수의 부활이 자신들의 신학적 오류를 드러내는 것이었고, 예수의 부활을 인정한다면 자신들이 기다리던 메시야를 죽음으로 내몰게 된 것이 되기 때문에 사두개인들은 부활 자체를 부인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기득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현세주의자들로 부과 권력을 유지하며 살았습니다.
2천년전 유대 지도자들과 로마총독의 모습에서 인간의 본성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오늘날 세상과 같아지는 교회안에는 물질주의, 분파주의, 명예욕, 자기자랑, 비난하는 문화들이 넘쳐납니다. 세상을 닮아가는 교회는 언젠가 그 빛을 잃어 버리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건강한 교회는 오직 말씀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때에 감동을 주는 미담을 넘어서 복음의 진리가 드러나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한다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성도로 구별되어 살아야 하는 것에 망설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 삶이 편하고자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무겁고, 희생해야 하더라도 기꺼이 감당할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 노력하지 않고 얻어지는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믿음생활에서도 나의 헌신과 시간, 그리고 나의 마음과 정성을 드릴때 누리게 하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내 것만 다 챙기고 돌보면서 주의 일을 하겠습니까? 주의 교회는 어려움과 인내의 시간을 통과해 더욱 빛을 발하게 되고, 보이지 않고 남들이 하지 않는 일을 헌신하고 순종할 때에 비로소 보여지는 것들이 있게 됩니다.
(2) 모든 인간에게는 올라가야 할 최후의 법정이 있습니다.
천국에 가면 세가지 면에서 놀란다고 합니다. 전혀 올 것 같지 않는 사람이 와 있는 사실에 놀라고, 천국에 반드시 와야 할 사람이 오지 않아서 놀라며, 마지막으로는 자신이 천국에 와 있음에 놀랄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따르는 성도들에게는 최후의 법정이 심판날이 아니라 잘했다 칭찬받는 날입니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 5:22-24)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 3: 17-18)
인간은 순간의 이익이 아니라 영원한 삶을 위해 살아가도록 지음받는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전도서 3:11) 그래서 인생의 시작과 마지막을 발견한 성도들은 현재의 삶으로 믿음을 증명해 내게 됩니다.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이 말씀이 믿음생활 가운데 어느날 깨달아 진다면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의 길 위에 들어서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택하는 모든 일은 최후의 법정에서 확증받게 됩니다. 바울에게는 이 감격이 있었습니다. 믿지 않는 이들에게 부활사상은 어리석고 허무맹랑한 이야기라 여겨집니다. 2천년전에도 그랬습니다. 바울이 2차 전도여행 중에 학문의 도시 아덴에서 복음을 전할 때 당시 지성인이라 자부하던 아덴의 철학자들은 부활사상을 듣고 조롱합니다.
“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32.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행 17:31,32a)
베스도로부터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대해 전해들은 아그립바 왕은 바울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오히려 네가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한다고 호통을 쳤습니다.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기회는 누구에게나 있지만 모두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대인들은 죽음의 상태가 끝이라고 여기며 살아갑니다. 욜로(YOLO:you only live once)라는 신조어는 한번 뿐인 세상에서 욕망에 충실하여 현실을 즐기며 살자고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그런데 C.S.루이스는 “피조물이 태어날 때부터 느끼는 욕구가 있다면 그 욕구를 채워 줄 것 또한 있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만약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것들로 채워지지 않는 욕구가 내 안에 있다면 그건 내가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에 맞게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19-20)
주님은 지금도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단하면 거룩한 삶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이것이 기독교와 다른 종교가 뛰어 넘을 수 없는 간격입니다.
(3) 부활신앙은 믿음의 참된 묘미(妙味)입니다.
영국에서 사랑의 아버지로 불리는 조지뮬러는 3천명 이상의 고아를 돌보고 하나님께 기도 응답을 5만번이상 받는 삶을 살았습니다. 물러는 죽기 직전에 “주님이 아무 때라도 오실 것이라고 기대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의 대답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이 주제에 대해 대단히 다양한 견해가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나 자신의 깨달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 질문은 나에게는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거의 오십 년간 주의 깊고 성실하게 성경을 연구한 결과, 나의 마음은 오래 전에 정해졌으며 일말의 의심도 없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 1-5절에서 볼수 있는 것처럼 성경은 먼저 배도한 일이 있고,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까지는 주 예수님이 오시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하게 단언합니다. 또한 하나님 말씀의 다른 많은 부분 역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특정한 사건들이 성취되어야 한다고 명확하게 가르칩니다. 올바른 마음을 가진다면 우리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그의 아들이 하늘로 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리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주님을 통해서 삶의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유대교 안에 머물던 바울의 신앙이 온 인류의 구원자가 되심을 깨닫고 나니까 세상과 이웃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고 시야가 넓어진 것입니다. 세월이 지나면 몸은 쇠잔해지는 것이 삶의 이치이지만 하나님 말씀이 속사람 안에 심겨지면 새마음을 주시고 실제적으로 주님의 다스림을 받게 됩니다. 우리의 속사람 안에 맺어지는 성령의 열매가 그 증거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파송되는 제자들에게 사람을 살리는 은사를 주셨습니다. 복음은 상처받은 자들을 회복 시키고, 억눌린 자들에게 참자유를 주십니다.
바울에게 복음은 율법으로 부터 얽매이지 않고 로마 총독의 재판장 앞에서도 꺾이지 않는 믿음이 었습니다. 그 복음은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어 온 세상으로 확장 되었습니다. 그 동안 바울의 전도여행을 함께 나누면서 우리는 보았고 들었고 느꼈습니다. 우리의 열심만으로 세상을 바꿀수는 없겠지만 믿음의 눈으로 기도하며 말씀이 삶이 되는 기쁨을 누리실 때에 바울이 전도 여행에서 만났던 모든 순간들을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믿음으로 걷게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10/29/2023 | 성령강림후 제 22주
영적 예배자 True Worshiper
로마서 12:1-3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습니다. 인간의 시간이 가지는 의미는 시간을 신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것을 아는 지혜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위해 준비하는 시간입니다. 인간이 삶의 목적을 잃어버린 까닭은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하고 놓쳐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3:11) 하심으로 모든 시간은 하나님의 때 안에 있음을 밝히신 것입니다.
허랑방탕한 인간의 시간에서 영원한 하나님의 시간으로 옮겨 가는 것이 구원입니다. 선교와 전도는 하나님의 부르심이고 초대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자 하는 마음에 반응하는 것이 구원받은 자들이 드리는 예배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하나님 나라는 영적 예배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1. 영적 예배는 거룩한 산 제물이 되는 예배입니다.
바울은 성령 안에서 예배자의 삶을 권합니다. 은사들을 통해 교회의 모든 섬김이 가능해집니다. 로마서 1-8장까지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을 받아 구원을 받은 이신칭의를 말씀합니다. 9장에서 11장까지는 동족 이스라엘의 구원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유대인의 과거 현재 미래의 문제를 논하며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거부하고 떠나려 해도 남은 자들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이스라엘을 통해 이방인까지 구원받는 영광의 말씀입니다. 유대인의 구원과 이방인의 구원의 은총을 찬양합니다.
1-11장까지 율법으로 죄가 드러난 것입니다. 죄가 율법으로 드러날 때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인간에게는 해결방법이 없다는 결론입니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롬5:5) 하는 말씀은 아들을 보내 구원을 이루신 십자가의 절대적 사랑 이야기입니다.
12장에서부터는 믿는 자들이 따라야 할 현실의 문제를 다룹니다. 그 첫 번째가 예배의 중요성입니다.“그러므로 형제들아”부름으로 주 안에서 우리가 하나 됨을 인정하였습니다. 우리는‘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였습니다. 십자가 없이는 한 순간도 견딜 수 없는 신앙 고백의 자리입니다. 사도 바울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크기 때문에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권한다 말씀합니다. 권한다는 메시지는 가벼운 부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전 생애를 걸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성령님의 인도함을 따라 살 것을 권한 것입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명하였습니다. 우리의 몸은 단순한 육체가 아니라 한 인생의 영혼 정신 삶의 경험을 담은 인격체라는 뜻입니다. 성도의 삶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생이어야 합니다. ‘산 제물’은 쪼개서 드린 죽은 제물로 드린 구약의 제사와 구별된 제사입니다. 산 제물로 드림은 성도의 살아있는 삶 전체를 제물로 드림입니다. 살아있는 나의 인생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거룩하게 구별된 영적예배인 것 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이 후 산 제물이 된 성도의 삶은 영적 예배 자리입니다. 영적 예배란 합리적 예배란 뜻입니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빌2:17) 한 사도 바울 삶은 자신의 전 인생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산 제물의 삶이었습니다. 구약의 제물은 짐승을 잡아 쪼개서 드리는 예배였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 우리의 예배는 전인적 삶과 인격을 드리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살아가는 삶의 자리에서 세상과 구별된 인생을 추구하는 자들입니다. 예배는 일상에서 삶을 성공시키는 자리입니다. 성도들의 충성 자리는 예배 자리입니다. 어제의 나보다 오늘 더 충실히 살아가고 있는가 돌아보는 영적 예배자로 살아가길 소망합니다.
2. 영적 예배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드리는 예배입니다.
영적 예배자들을 향하여 바울은 말씀합니다. 첫째‘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명하였습니다. 이 세대는 세상 가치와 세상 풍조를 따르는 삶입니다. 그러니 세상을 본받지 말라고 명령함은 성도들의 삶의 목표가 세상을 따라가지 말고 신앙의 본질 안에서 바른 복음을 따라 살라는 명령입니다. 둘째는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하십니다. 마음을 새롭게 함은 구원을 선물로 받은 은혜입니다. 변화를 받으라 하는 것은 변하지 않는 본질인 하나님의 형상을 유지하여 지키라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라는 것입니다.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부족하고 죄인 된 우리를 받아주신 것 입니다. 하나님은 구원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와 함께하시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지속적인 신앙 훈련을 통하여 바른 복음을 지켜야합니다.
예배는 일상으로 파송된 선교 자리이고 전도 자리입니다. 바울은“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롬15:16) 고 말씀하십니다. 구원받은 성도의 학교 생활은 예배 자리여야 하고 직장생활 가정생활 모두가 예배자리이고 전도와 선교자리입니다. 신약시대 교회는 매주일 드리는 파송 예배를 통해 예수그리스도로 시작하는 영적 예배자의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성도들의 삶의 현장이 교회입니다. 성도는 교회입니다. 성도는 형식적으로 교회에 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예배하는 교회가 되어야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안에 있다면 삶의 자리에서 분명하게 은사가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부르심의 자리를 잘 알아차려야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리에 설 수 있도록 주님께서 부어주신 능력과 자질을 은사로 발견해야 합니다. 모든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 가운데 이루어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몸인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머리와 몸은 하나이기에 따로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 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막16:20) 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전도할 때 주님께서 그들과 함께 일하고 계셨다는 것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주님은 돕는 자가 아니라 제자들의 주가 되셔서 함께 일하셨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유기체입니다. 교회는 생명이 오고 가는 사랑의 관계로 돌봄이어야 합니다. 많이 섬기는 사람이 행복한 곳이 교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성령과 함께하는 사람은 성령으로 사는 지혜를 가지고 영적 예배자로 성장합니다.
3. 영적 예배자는 예수 안에서 믿음의 분량대로 충성해야 합니다.
바울은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이 닦아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전3:10-11) 고백합니다. 성도의 삶의 터는 예수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힘으로 사는 자와 자신의 힘으로 사는 자의 차이입니다. 예수님은 반석위에 짓는 집과 모래위에 짓는 집으로 인생의 기초가 다름에서 출발하는 것이라 이미 알려주셨던 것입니다.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라고 명하심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열어주시는 내 인생 길의 행복을 따라 살아가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온 인류는 스스로 존재하려고 하는 교만에 속았습니다. 인류는 은혜로 살려고 하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살려고 합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22:6)와 같이 하나님께 속하도록 만들어 놓은 길을 배워 걷는 순종의 사람이 되길 소망합니다.‘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는 명령을 알아차리는 것이 영분별입니다.
믿음의 분량은 자신의 의의 자리가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믿는 성도의 모임입니다. 사도 바울은‘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습니다. 머리이신 예수께 붙은 지체는 그 가치가 존귀합니다. 몸은 하나입니다. 사도바울은 교회에 대하여“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고전12:12) 하였습니다.
교회시대인 오늘날에도 우리 주님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 은사를 쏟아 부으십니다. 성경은“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밝힙니다. 예수님은 교회 안에서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성도들의 생활을 이끄시며 양육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교회는 성령의 은사들을 통해 사랑을 나타냅니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습니다. 악을 미워하고 선을 이룹니다. 선에 속한 사랑의 결과가 교회에 나타납니다. 형제를 사랑하여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먼저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예수님을 섬기는 나라입니다. 마지막이 가까울 때에 교회 성도들은 영광의 주로 즐거워합니다. 환란 중에 참으며 기도에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십시오.
이 모든 말씀은 이웃 사랑이 이루어지는 영적 예배입니다. 성령 안에서 드리는 일상의 예배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영적예배자로 서길 축원합니다.
10/22/2023 | 성령강림후 제 21주
모든 사람은 구원의 기회를 갖습니다 Everyone Has a Chance for Salvation
사도행전 24:1-9, 24-27
작가이며 철학가인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1906-1975)는 뉴욕 특파원 자격으로 유대인 학살의 주범인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1906-1962)의 재판을 취재했고, 재판을 참관한 후에 한편의 기사를 썼습니다. 수백만명의 사람을 잔인하게 학살한 인간의 폭력과 잔인함으로 꼽는 사건이지만 한나 아렌트는 그의 모습에서 ‘악의 특별함’이 아닌 ‘악의 평범성’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가 평범한 인간이라서 그가 지은 죄가 더욱 끔찍하게 느껴졌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악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본성입니다. 겉으로 분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때로는 악이 세련돼 보이기도 하고 고상해 보이는 가면을 쓰고 있기도 합니다. 이것이 인류가 직면한 보편적인 ‘악의 평범성’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뛰어난 변호사 ‘더둘로’가 나옵니다. 그는 로마의 법과 유대의 법에 능통한 사람입니다. 더둘로는 Tertullus라는 헬라식 이름을 가진 것으로 보아 유대문화를 잘 이해하는 헬라계 유대인이었을 것이라 추정합니다. 본문은 닷새 후에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변호사를 선임해서 가이사랴로 옵니다. 이유는 로마총독 벨릭스 앞에서 바울을 고소하여 재판을 유리하게 이끌어 가기 위함이었습니다. 닷새동안 치밀한 준비과정에서 적임자로 ‘더둘로’라는 변호사를 선임하였을 것입니다. 바울을 죽이기 위한 ‘악의 치밀함과 집요함’을 볼 수 있습니다. 40여명의 암살단을 조직해서 은밀히 살해하려고도 했는데 실패로 돌아가니까 로마법 전문가를 동원해서 가이사랴까지 찾아 온 것입니다. 더둘로는 본 재판이 불리하게 진행되지 않도록 사건을 파악했을 것이고 법정에서 바울에게 최고의 형량이 내려지도록 고소장을 만들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사회는 무법천지 세상입니다. 그래서 법이 필요는 하지만 법대로 하자고 외치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악을 선으로 가장하고, 생명을 죽음의 방법으로 가리웁니다. 거짓으로 진실을 덮어 버리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유대교에 있는 600개가 넘는 율법을 두가지 강령으로 축약해 버리셨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법’입니다. 종교가 율법을 지키는가 지키지 않는가를 주목했다면, 하나님은 율법으로 인해 소외된 자들의 마음을 헤아리시며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하늘 아래 누구도 ‘양심의 법정’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죄가 없으신 예수께서 스스로 피고인이 되어 인류의 죄를 대신해서 사형선고를 받으셨기에 우리의 양심이 치유가 되고, 옛사람이 변화가 되어 새사람이 된 것입니다.
만일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십자가에서 죄를 용서해 주신 주님이 필요가 없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의 거울 앞에 서게 되면 보이지 않던 죄가 보이게 되구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연약인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성령의 안경을 끼고 보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세상 모든 사람들은 피고인일 뿐입니다. 죄가 없으신 주님만이 더럽혀진 영혼을 회복시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자 이제 더둘로의 송사내용을 보시기 바랍니다.
“2…존경하는 벨릭스 각하, 우리 유대인들은 각하 덕분에 오랜 동안 평화로운 세월을 누려 왔습니다. 각하의 선견지명 덕분에, 이 나라의 많은 것들이 크게 개선되었습니다. 3 우리는 모든 면에서 탁월하신 총독 각하께 대해 항상 깊이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4 이제 각하를 오래 괴롭히지 않고자, 이 사람에 대한 고소의 줄거리만을 간략하게 말씀드리고자 하오니, 잠시 제 말을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로마법과 유대법에 능통한 당대 뛰어난 더둘로는 바울을 고소해서 재판에 승소하기 위하여 총독 벨릭스를 칭송하는 말로 시작합니다. 당시 벨릭스는 역사가 타기투스에 의하면 “그는 포악하고 음흉하며 노예의 마음을 가지고 왕의 권세를 누린 자였다”고 합니다. 2년후에 벨릭스가 총독의 자리에서 물러날 때 사람들은 환호하였다고 합니다. 6년의 재임기간에도 사람들의 원성을 많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더둘로는 벨릭스의 명예심을 자극하여 재판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끌어 나가려고 좋은말로 아첨하기 시작합니다.
이후 더둘로는 3가지 죄목으로 바울을 고소합니다. 첫째는 바울이 말썽쟁이 같은 존재라는 것이고, 개역개정은 ‘전염병 같은 존재’라고 번역했습니다. 두번째는 나사렛 도당의 두목이며, 이단의 괴수라는 것입니다. 이후 세번째 죄로 바울이 유대인 성전을 더럽혔다고하는 죄목도 슬쩍 끼어 넣었습니다.
바울을 고소한 내용을 보면 첫번째 두번째는 로마사회의 소요죄와 반란죄에 해당하는 범죄입니다. 만일 사실이 입증이 된다면 로마법에 저촉(抵觸: violate)한 것이기에 사형에 해당되었습니다. 얼핏 보면 고소문들이 종교적인 문제 같아 보이지만 더둘로는 로마의 반란죄와 소란죄로 바울을 고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1세기 로마 정부는 종교에 있어서는 모든 이에게 자유를 허락하였기에 유대인의 성전을 더럽혔다는 것은 로마법에 의하면 심각한 범죄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로마사회에 전염병 같은 존재라고 묘사한 것은 바울을 정치적 선동가로 몰고 가려는 의도가 보여집니다. 오늘날도 전염병이 얼마나 위협적입니까? 바울이 이런 존재라는 것은 로마 제국 시스템을 파괴할 수 있는 죄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명망있는 변호사 더둘로가 터무니 없는 거짓을 말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돈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 물질만능주의 사회에서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까지 생겼습니다. 물질이 하나님의 역할을 하는 물질만능주의 사회를 비꼬는 말이지요. 이렇다 보니 같은 죄를 지어도 사회적 계급에 따라서 다른 처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미국에서도 종종 발생하게 되는 불편한 진실입니다.
벨릭스 총독은 더둘로의 고소장을 듣고 바울 너가 어떤 말을 하나 보려고 무시하는 듯 머리로 표시하며 반론의 기회를 줍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고소한 죄들로 인해 원망하거나 비난하는 모습을 찾아 볼 수 없고, 사실만을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간 지 12일 밖에 안되었고 그 중 5일은 옥중에 있었습니다. 이 짧은 기간에 내가 어떻게 소요케 할 수 있었겠습니까? 가능성도 없는 일이며, 내가 사람을 선동하는 것을 본 목격자도 없다고 밝혔습니다. 두번째 이단의 괴수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나는 구약의 하나님을 믿고 있으며 부활의 소망까지 믿는다고 총독 앞에서 오히려 신앙고백을 합니다. 이는 로마 황제의 반역자로 몰릴 수도 있는 소지를 제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자신이 만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이때 총독은 복음의 도를 더 자세히 알고 싶어서 바울의 처결을 연기합니다.
14절로 16절은 바울이 전하는 신앙고백입니다.
“14 그러나 저는 각하 앞에서 이것만은 분명히 인정합니다. 저는 이 사람들이 이단이라고 부르는 ‘예수의 도’를 따르고 있습니다. 그 도에 따라, 저는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을 섬깁니다. 저는 유대의 율법과 예언서에 기록된 모든 것을 전부 믿습니다.15 이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저 역시 올바른 사람이나 불의한 자들이나 장차 부활하게 될 것을 믿습니다.16 이런 까닭에, 저는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 언제나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는 생활을 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바울의 신앙고백을 보면 올바른 사람이나 불의한 자들이나 장차 부활하게 될 것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25절에도 보면 “예수의 도를 말하면서 바울이 정의와 절제와 장차 올 심판에 대해 설교하자, 벨릭스는 두려워하면서 말했다. “자, 그만하면 되었소. 이제 가 보시오. 기회를 봐서, 당신을 다시 부르도록 하겠소”
바울의 강론을 듣고 뵐릭스는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그는 잔인함과 탐욕으로 불의한 사람이었고, 여러번 결혼하며 절제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바울의 강론을 들으며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경외하는 마음으로 변하게 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격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하며 삶으로 반응하게 됩니다. 죄는 숨기고 감춘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고백하여 하나님의 의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우리는 매주일 사도들의 신앙을 고백하며 전능하사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것을 다른 이가 아닌 ‘내가 믿는 것’이 실제적 믿음입니다. 또 한가지는 하나님께서 ‘상을 주시는 분’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니 믿음의 상을 따라 사는 사람에게는 부활이 복된 말씀이지만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사는 사람에게는 두려운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후 본서 어디에서도 벨릭스가 회개했다는 기록을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26절을 보면 바울이 가진 돈을 탐내어 자주 불렀다는 사실만을 전해줍니다. 벨릭스 총독은 뉘우칠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26 그러면서도 총독은 바울이 자신에게 뇌물 바치기를 은근히 바라면서, 그를 자주 불러내어 대화를 나누었다.
바울이 몇 해 동안 고국을 떠나 있다가, 민족을 위한 구호금과 하나님께 바칠 제물을 가지고 왔다고 했을때에 바울이 돈을 많이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까요? 그의 마음은 하나님의 의를 깨닫고 회개하는 커녕 탐욕의 미각만 자극됩니다. 벨릭스는 하나님께 회개하여 창조주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이 되어질 기회를 저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몸의 부활을 믿는 성도들입니다. 몸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육망의 허망함을 쫓는 것이 아니라 삶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영적 상태는 삶을 통해서만 드러나게 됩니다. 성경의 지식을 아무리 많이 알고 쌓고 있을지라도 삶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내 평생 사는 동안 주 찬양하리 여호와 하나님 내 주를 찬양하리 주님을 묵상함이 즐겁도다 내 영혼 주안에서 참 기쁘리” 이 곡은 Donya Brockway쓴 찬양인데 1948년 창설된 중앙대학교 최초의 기독 학생 동아리에 의해서 번역된 곡입니다. 75년 전에 하나님이 주신 마음에 순종했을 때 이 찬양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험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성도도 악을 행할 가능성이 있으나 선하신 뜻을 위하여 몸으로 날마다 실천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선한 것이 없습니다. 겸손도 내안에서 수없이 부서지고 무너져야 나오는 감정이구요. 온유함도 하나님 안에서 철저히 다스림 받아야 나올 수 있습니다. 수많은 아첨과 거짓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성도들에게 있는 선한 영향력은 우리가 모인 자리에 미움이 멈춰지며, 부패해져 가는 것이 멈추고 살아나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하나님도 사랑하고 돈도 사랑하지는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인간의 마음을 양쪽에 동일하게 다 줄 수 없다는 것이겠지요. 돈에 마음을 두기 시작하면, 돈의 종이 되고 탐욕의 종이 되어 버리지만 하나님을 인생의 주인 삼으면 한번 뿐인 인생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요셉은 형들에 의해서 노예로 끌려가고, 보디발의 아내의 거짓말로 감옥에도 갇혔었지만 성경은 요셉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기에 형통한 삶이라고 말합니다. 형통한 자에게 하나님은 이길 힘도 주시고, 견디고 버틸 힘도 주십니다.
21세기에 우리는 마른 뼈처럼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겉으로는 세련된 모습을 갖추고 있어도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삶은 마른 뼈와 같은 것입니다. 물이 없어 마시지 못하고 양식이 없어서 먹지 못하는 빈곤한 삶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부르면서 다른 것을 믿는 것은 죄를 미화(美化)시키는 것입니다. 더둘로의 고소와 그에 대한 바울의 변론을 들은 밸릭스 총독은 유대인과 바울의 대립이 단순히 그들의 종교적 견해 차이에서 비롯된 것일 뿐 바울에게 어떤 죄도 없다는 것을 알아 차렸습니다. 하지만 밸릭스는 바울을 즉각 석방하지 아니하고 천부장 루시아가 오면 판결하겠다는 핑계로 재관을 연기하였습니다.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함이었습니다. 더둘로나 벨릭스는 오늘날 세상의 유익만 쫓아가는 현실주의, 물질만능주의의 상징적인 인물입니다. 이후 바울은2년간 가이사랴에서 구금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2년의 구금생활이 바울에게는 10여년에 걸친 전도여행 가운데 지친 몸을 회복하시기 위한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미국 지역마다 교회가 세워진 것도 당시 바울이 가이사랴 감옥에서 로마에서의 전도계획을 세우며 충전하는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 아닐까요? 유럽지역에 복음이 전해졌기에 청교들에 의해서 이땅에도 복음이 들어오지 않았습니까? 그리스도인에게도 뜻하지 않는 환경과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상황속에서 우리가 주님의 사랑에 반응할 때 하나님 나라의 도구가 됩니다.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법’에 반응할 기회를 갖게 됩니다. 회개하는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마음이 하나님께로 기울어지게 되지요. 그러면 오늘날 모든 직업이 성직이 되고, 모든 시간은 거룩한 시간이 됩니다. 형통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에 바르게 반응하며,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을 받는 것입니다. 한주도 상황과 형편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교우들의 삶을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시기를 소망합니다.
10/15/2023 | 성령강림후 제 20주
당신은 어디에 소속되어 있나요? Where do you belong?
사도행전 23:23-35
지구 건너편 전쟁의 바람이 불고 있어서 무고한 생명이 희생되는 일은 이 시대의 큰 슬픔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인간의 생명의 가치가 부속품으로 전락하게 될 때에 인류는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무엇보다 오랜 세월 국가 간의 갈등과 분쟁은 부정적 감정들로 인해 인간의 영혼을 빈곤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팔레스타인 땅에 하나님의 평화가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바울 외에도 로마 총독과 천부장, 로마의 군사들이 등장합니다. 말씀을 묵상하며 로마사를 다시 펼쳐보며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로마제국이 세계를 제패한 기원전 29년은 로마사에 새로운 시기가 시작된 때입니다. 옥타비아누스 황제는 공공연히 독재를 행했고, 황제에게는 주인을 뜻하는 도미누스(dominus)라는 칭호가 성행했습니다. ‘위대한 자’에서 제국을 지배하는 ‘주’ 또는 주인’이라는 칭호로 격상됩니다. 신성로마제국이 된 것이지요. 그의 권력은 카이사르 조차 소유해 본 적이 없는 로마사에서 가장 부유하고 가장 막강한 군대의 지휘권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황제의 조각상이 세워지고, 그를 위한 각종 경기들이 열렸으며 법정에 계류중인 재판의 사면권과 각종 귀족들의 지위를 하사할 권한이 주어졌습니다. 또한 1세기 로마 제국에는 제국을 지탱하는 ‘후원자 제도’가 있었습니다. 이 제도는 상위 계층의 사람이 ‘후원자’가 되어 하위계층의 ‘피후원자’를 돌보는 것인데, 얼핏 보면 약자를 보호해 주는 것처럼 보여지지만 하층민은 후원자에게 충성을 바치는 제도였습니다. 이 제도가 로마제국을 떠받치는 핵심 구조였습니다. 피라미드의 계급의 질서에 가두어 로마 질서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지요. 로마제국의 질서안에서 사람들은 제국을 유지하기 위한 일종의 부속품인 것입니다. 제국주의가 최상의 가치로 숭배 받던 것이 로마의 힘이었다면 예수께서는 당신의 것을 내어 줌으로써 사람을 살리고,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셨습니다. 예수가 전한 하나님 나라는 이땅에 이상적인 나라를 세우자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어떤 제도나 정치도 참된 평화를 제공할 수 없기에 세상에 참된 평안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다는 것입니다.
23 ○ 천부장은 즉시 백부장 두 사람을 불러 명령했다. “너희는 오늘 밤 아홉 시에 가이사랴로 출발할 수 있도록 보병 200명과 마병 70명, 그리고 창을 쓰는 병사 200명을 대기시켜라. 24 또 바울을 벨릭스 총독에게 무사히 호송할 수 있도록 그를 태울 말도 준비하라.”
31 ○ 천부장에게서 명령을 받은 대로, 군인들은 그날 밤에 바울을 안디바드리까지 호송했다. 32 이튿날, 군인들은 바울을 호송하는 일을 마병들에게 맡기고 병영으로 되돌아갔다.
오늘 본문을 보면 바울이 470명의 군사들의 보호속에서 야간 행군으로 62km 떨어진 ‘안디바드리’까지 가게 됩니다. 32절에 보면 이튿날 도착했으니까 그날밤에 400명의 병사들이 62km를 걸어 간 것입니다. 70명의 마병과 400명의 보병이 바울을 밀집 대형의 중간에 두고 보호하며 걸었을 것입니다. 초기 로마군대의 보병은 여덟줄 내지 열두줄까지 밀집 대형을 이루고 진군하는 방식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병사 개개인은 긴 창을 들었고, 병사는 왼팔에 바짝 밀착시킨 방패와 투구, 몸통 갑옷과 온통 쇠로 된 정강이 받이로 자기 몸을 보호했습니다. 아마도 훈련된 병사들이 아니라면 하룻밤 만에 중무장 한 상태로 이 거리를 행군하는 것은 쉬운 일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말을 타지 않은 채 밤새도록 진군하는 일도 고된 일이었을 것입니다. 이튿날 ‘안디바드리’에 도착했을 때 400명의 보병들은 온 길로 다시 돌아갑니다. 이후 말을 탄 병사 70명과 계속해서 32km 떨어진 예루살렘의 북서쪽 해안도시인 가이사랴로 가게 됩니다.
이때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고소된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 법정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내면에는 두려움 보다는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로 가득했을 것입니다. 로마 군인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섭리를 알고 있었을테니까요. 그 밤에 들렸을 마병의 말발굽 소리는 구원역사를 이뤄 가시는 하나님의 심장소리처럼 들렸을 것이고, 무장한 병사들이 행군하며 나는 소리는 바울을 보호해 주시는 불말과 불병거처럼 느껴졌을 것입니다. 로마의 군대는 제국의 질서와 지휘체제 안에서 명령에 복종하는 길이지만 바울에게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로마에도 복음을 증거하시려는 주님과의 동행이었습니다.
바울을 데리고 가이사랴에 도착한 이들은 로마의 총독 벨릭스에게 그를 인계했습니다. 당시 52년에서 59년 사이에 유대지역 로마의 총독이었던 벨릭스는 노예의 혈통을 가진 사람으로 총독의 지위에 오르게 된 입지적인 인물입니다. 당시 태생이 비천했음에도 불구하고 총독 자리에까지 올랐다는 것은 신분상승을 위해 정치적 야망으로 살았던 인물이라는 말입니다. 실제로 벨릭스의 생애를 보면, 그는 공주의 신분이던 여인들과 3번이나 결혼을 했으며, 성공을 하기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던 야심찬 인물로 소개가 됩니다. 교활하고 속임수가 가득한 인물입니다. 당시 총독의 자리는 정치, 군사, 사법의 모든 통치권으로 관할하는 관직에 있는 사람으로 지역의 총독들을 황제가 직접 임명했으니 로마제국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그가 충성을 바친 대상이 누구였겠습니까?
오늘 본문에는 천부장의 이름도 언급됩니다. 글라우디오 루시아인데 앞의 글라우디오는 로마식 이름입니다. 그는 큰 돈을 주고 로마 시민권을 사고 나서, 본래 이름 루시아 앞에 로마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천부장이 총독에게 쓴 서면을 보면 그가 어떤 인물인지 알게 해줍니다.
26 “글라우디오 루시아가 총독 벨릭스 각하께 문안을 드립니다. 27 제가 보내는 이 사람은 유대인들에게 붙잡혀 살해당할 위험에 처했으나, 제가 군인들을 보내어 구출해 냈습니다. 그가 로마 시민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로마 사람인 것을 알고서 구했다는 것은 명백한 거짓말입니다. 21장을 보면 천부장은 유대인들이 죽이려는 바울이 이전에도 소요를 일으켜 자객 4천명을 거느리고 광야로 가던 애굽 사람인 줄 착각 했습니다.(21:38) 그래서 천부장은 쇠사슬로 바울을 결박해서 끌고 가서 채찍을 가하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유대인들의 소요를 그치게 하려고 했었습니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바울은 스스로 로마 사람임을 밝힘으로써 천부장에게 자신이 로마 시민권자임을 알게 했습니다. 따라서 천부장이 로마 사람인 줄 알고 구출해 내었다고 쓴 편지의 내용은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 자신의 흠은 은폐하고 로마인을 보호했다는 공로만을 인정받기 위한 거짓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편지의 두번째 내용을 보면,
28 “저는 유대인들이 왜 이 사람을 고발했는지, 그 이유를 알고자 그를 유대인의 공회로 데리고 갔습니다.”
이것도 거짓말입니다. 천부장이 바울을 결박한 것은 소란이 벌어진 연유를 알고자 함이 아니었습니다. 군중들의 소요로 인해서 자신에게 초래될 불이익을 염려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벨릭스 총독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마치 온 마음을 다 쏟아서 사태의 진실을 철저히 파악하려고 공정한 노력을 했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천부장은 로마제국에서 자신의 자리를 유지하고 스스로를 의인인 채 가장해서 출세하려는 욕망에 눈이 멀었던 사람입니다.
편지의 세번째 내용을 보면,
29 그 결과, 저는 그가 유대인들의 율법 문제로 고발을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를 감옥에 가두거나 혹은 사형을 시킬 만한 죄는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30 그런데도 그를 암살하려는 음모가 있다는 정보를 듣게 되어, 곧바로 그를 각하께로 보냅니다. 그리고 그를 고발한 자들에게도 앞으로는 그에 대한 사건을 각하 앞에 제소하도록 일러 두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율법 문제로 고발 당했지만 바울에게서 어떠한 죄도 발견할 수 없었다고 쓴 내용은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천부장은 자신의 판단에 따라 바울을 석방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은, 자신이 관할하는 지역에서 일어날 유대인들의 소요를 우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처리하기 어려운 문제를 로마 총독이 해결해 주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470명의 군인을 동원해서 가이사랴에 바울을 보낸 것입니다. 결국 천부장은 지극히 정치적인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것 또한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시기 위한 일로 사용하십니다. 이로 인해 바울을 죽음의 위협에서 보호하셨습니다. 또한 천부장이 쓴 29절의 상소문의 기록으로 인해 바울은 이후에 받게 될 벨릭스, 베스도, 아그립바 왕에 서게 되는 3차례의 재판에서 무죄를 증명할 수 있게 됩니다.
세상에는 우리가 해석할 수 없는 불공평한 일들이 자주 일어납니다. 때론 악인들이 잘 되는 것처럼 보여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나서 거짓과 헛된 욕망으로 쌓아올린 바벨탑은 반드시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날에 우리는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이루신 하나님의 나라만이 영원한 나라임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장차 올 하나님의 나라를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우주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만이 세상의 주인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아무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미결수 신분으로 가이사랴에 도착하게 하신 것은 인간의 판단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뜻대로 보호하시려는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세상의 역사를 주관하시고 계십니다. 이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 서면 인간의 일생은 들풀과도 같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구원을 노래하는 인생이 얼마나 존귀한 삶인가요? 우리는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마음에 다른 것들이 침투하지 못하게 막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순결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도덕적으로 흠이 있고, 부족해도 인생의 피난처가 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담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세상의 끝이 올때에는 사람들이 돈과 쾌락을 사랑하고 난폭하고 무정하고 절제하지 않을 거라고 말합니다. 마음안에 있는 인간의 죄성, 절제하지 못하는 자기욕망, 쉬고 있어도 알수 없는 불안감을 떨쳐 내지 못하는 우리를 위해 주님은 평안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주는 평안은 죽음의 세력, 어둠의 세력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최후 승리를 주신 것입니다.
1세기 로마가 제국의 힘을 의지했다면 예수는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가는 이들에게 십자가를 지시며 부활하셨습니다. 2천년 전에도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거부했지만 하나님은 예수를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이들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꿈을 펼치셨습니다. 꿈이 없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찾아가셔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을 주셨고, 힘없어 보이는 사람들을 통해서도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소개하셨고, 확장 시켜 나가셨습니다.
2천년이 지난 우리는 소비사회를 살아가며 여전히 선택의 문제 앞에서 생각이 충돌합니다. 소비사회속에서 마음의 전쟁은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물질을 숭배하는 순간 문질의 노예로 전락되어 인간의 삶은 하나의 상품으로 규정될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존재가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슬로우패션에 대해 들어 보셨습니까? 이 해시태그는 저가로 만들어 얼마 안 입고 버리는 “패스트 패션” 의류산업에 대항하여 나온 새로운 운동입니다. 패스트 패션에서는 옷이 점포에 들어오자마자 곧 유행이 지나가 버려 어떤 브랜드들은 매년 엄청난 양의 상품을 그대로 폐기합니다. 슬로우 패션 운동은 사람들이 천천히, 그리고 다른 방식으로 사는 것을 권합니다. 항상 최신 유행을 따라가려는 강박감에 이끌리는 대신, 몇 벌을 사더라도 오래 입을 수 있는 질 좋고 윤리적으로 근거가 있는 품목들을 사라고 권장합니다.” 신앙은 ‘패스트 패션’ 사고 방식이 아닙니다.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을 서서히 변화시키시고, 점진적으로 이루어 지는 놀라운 변화입니다. 믿음의 과정 속에서 우리는 이해 할 수 없는 고통과 아픔속에서도 주님의 약속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일하시도록 그분의 뜻을 지속하는 일이며,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그 앞에 서는 일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눈을 피해 살아 갈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2천년 동안 믿음의 선배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을 충만하게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을 경험하고 하나님 나라의 씨앗을 뿌린 결과 놀라운 결실을 삼아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가 사는 지구에는 아픔과 고통, 전쟁과 기근으로 인해서 하나님 나라가 있느냐고 질문하는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찌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찌니라”(갈6:9,10)라고 말씀하십니다. 선하신 하나님은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해서 참고 인내하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 마음을 깨닫고 사람을 살리는 일이 우리에게 맡겨 주신 사명입니다.
벨릭스 총독은 바울에게 어느 소속의 사람인지 묻습니다. 바울은 길리기아 출신이라고 대답하지만 그는 에베소 교우들에게 편지하기를 세상 풍조를 따르고, 육체의 욕심을 따르던 삶에서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행하도록 지음 받는 존재라고 편지합니다.
바울에게 그리스도인이 누구냐? 라고 묻는다면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골 3:12)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첫째는 하나님의 선택 받은 사람이고, 둘째는 거룩한 사람이며, 셋째는 사랑받은 사람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이 확신이 없으면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이 흔들리게 됩니다. 소속이 변했기 때문에 우리는 예배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것도 하나님의 자녀됨을 빼앗아 갈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우리를 먼저 선택하셨고 거룩한자로 사랑받은 자는 여겨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성품과 믿음의 옷을 입혀 주십니다. 우리는 순종하며 믿음의 길을 정진할 뿐입니다. 우리는 어디에 소속되어 있습니까? 한주도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주신 은혜가 삶을 감싸주시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