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9/2016 | 야외예배

나의 도움은 어디서 오는가? Where Does My Help Come From?

시편 121편

우리가 가진 성경에 모두 150편의 시편이 있습니다. 오늘 읽은 시편 121편은 시편 23편과 함께 가장 사랑 받는 시편이 아닌가 합니다.

각 시편 마다 그 시편을 사용하는 용도가 있습니다. 오늘 읽은 시편은 ‘a song for pilgrims as-cending to Jerusalem’이라는 타이틀이 붙어 있습니다. 순례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가면서 불렀던 노래입니다. 여러분 아시지요? 이스라엘에는 모든 유대인들은 적어도 1년에 3번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 가서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율법의 규정이 있었습니다.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명절 때가 되면 직접 기른 양을 어깨에 짊어지고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가면서 이 시편 121편을 노래로 불렀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 율법의 규정을 지키신 것을 보면, 예수님도 성전에 가시면서 이 노래를 불렀을 것입니다. 어떤 때 옆에 순례자들이 없을 때는 혼자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어떤 때는 수많은 순례자들이 함께 걷기도 하면서 이 노래를 불렀을 것입니다. 가면서 노래를 부르면 심심하지도 않고, 피곤 하지도 않고, 즐겁게 순례의 길을 갈 수 있기 때문에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노래를 부름으로써 자기들이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는 목적을 더 분명히 할 수가 있었습니다.

오늘 시편 말씀에서 가장 우리 마음에 들어오는 구절은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1절)?” 하는 구절입니다. 이 구절에 대한 대답으로 즉시 2절에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누구나 도움이 필요합니다. 도움이 필요할 때 누군가로부터 조금만 도움을 받으면 일이 잘 해결될 수 있습니다. 그 절박할 때 누군가로부터 도움이 되는 한마디만 들어도 그 사람의 인생의 길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 때 외롭고 힘들었을 때, 누군가 그 사람과 함께 있어준 사람이 있었더라면, 그 사람이 쉽게 일어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도움이 필요하고, 힘들 때 격려가 필요합니다.

문제는 그 도움을 누구에게, 누구의 도움을 받느냐 하는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 온 것이 1983년입니다.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두고 미국에 왔습니다. 지금은 어떤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 때는 해외로 나가는 사람들은 ‘소양교육’이라는 것을 받아야 했습니다. 저도 ‘소양교육’을 받았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소양교육’이라는 것이 모두 엉터리였습니다. 미국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미국 사람들이 얼마나 시민 교육이 잘 되었는가 하면 실수로 물건을 버스 정류장에 두고 왔더라도 몇 시간 후에 가보면 그대로 그 자리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더 우스운 것은, 미국에 도착해서 한 일주일쯤 지나면 누군가로부터 우편물이 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우편물을 뜯어보면 그 속에 돈이 들어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돈은 북한이 주는 공작금이기 때문에 절대로 손을 대면 큰 일 난다고 했습니다. 그 때 그 교육을 받을 때는 정말 그런 일이 있구나 하면서 가슴이 쾅쾅 뛰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미국에 도착해서 일주일이 지나도 나에게 그런 우편물이 오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았습니다.

누구에게 충고 한마디를 들어도 누구의 충고를 듣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정말 적절한 사람으로부터 적절한 충고 한마디를 들으면 우리의 인생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우리교회에 청년들이 많습니다. 모두 자기 앞에 놓인 일을 자기 혼자 해결해 나가야 합니다. 교수와의 문제가 생기고, 전공을 바꿔야 할 문제도 생기고, 정신적인 문제도 생기고, 경제적인 문제도 생깁니다. 물론 남녀 간의 문제가 생기기도 합니다. 이런 청년들의 문제를 혼자 해결하게 놔두지 말고 좀 옆에서 도와 주자라는 생각이 들어서 우리교회가 가지고 있는 좋은 자원들 (resources)을 활용해서 이 도움이 필요한 청년들을 도와주는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모두 준비가 되었습니다. 9월부터는 이 시스템을 여러분들이 이용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누구의 도움을 받아야 할까요? 지난 주에 재미있는 동영상 하나를 봤습니다. 성경해석에 대한 동영상이었습니다. 재미있어서 제 페이스북에 올려 놓았는데, 좋아요 누른 사람은 10개 밖에 안 됩니다. 물론 읽고 ‘좋아요’ 안 누른 사람들이 많을 테니까 10명이 봤다고는 말할 수 없지요. 여담이지만, 최정모 결혼한다는 소식을 제 페이스북에 올렸습니다. ‘좋아요’ 누른 사람이 몇 명인지 아세요? 300명 가까이 됩니다. 페이스북에서 연락이 왔어요. 올리신 기사에 광고 효과를 톡톡히 보셨다고 축하한다고요.

제가 올린 동영상 안 보신 분은 꼭 보세요. 그리고 ‘좋아요’를 누르세요. 제가 그 동영상에 제 나름대로 성경해석학에 대한 글도 짧게 올렸습니다. 꼭 한번 읽어 보세요. 그 동영상을 보면, 창세기 말씀이 고대 근동에 흩어져 있는 천지창조에 대한 이야기들과 같은 것 같지만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 시대에 사람들은 해와 달을 중요하게 여겨서 숭배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의 천지창조 이야기를 기록한 사람은 인간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해와 달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할 필요성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해와 달을 만드신 것이 첫째 날이 아니라 넷째 날이라는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해와 달이 인간의 삶에 가장 중요한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성경의 저자는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해와 달을 첫째 날이 아니라 넷째 날로 끌어내렸다는 것입니다.

오늘 시편 121편 말씀을 보세요.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고대 사람들은 우람한 산을 보면 숭배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인간의 자연스러운 마음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 산에 가 보면 예외 없이 신들을 예배하는 제단들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순례의 길을 오면서도 많은 산들을 보았을 것입니다. 이 산을 보면서 이들은 이 시편 121을 노래로 불렀습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하고요. 예루살렘에 오면 시온산이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시온산은 예루살렘 성전의 시온 문 (Zion Gate) 밖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은 시온산 기슭에 있다고 봐야 합니다. 순례자들은 예루살렘에 도착해서도 시온산을 보면서 이 노래를 불렀을 것입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하고요.

시편 121편은 누가 썼는지 저자의 이름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익명의 작가가 이 시편을 썼습니다. 그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없지만, 이 사람은 하나님께 대한 대단한 신앙심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하나님께 대한 바른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 이유는, 이 사람은 도움이 어디서 오는지, 그 도움의 출처를 올바로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산에 유혹을 받았습니다. 산에다 제단을 세웠습니다. 그리고는, 도움은 산에서 온다고 생각했습니다. 심지어 예루살렘에 도착해서도 도움은 시온산에서 온다고 그 산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편 121편을 쓴 익명의 저자는 분명히 고백합니다.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 옵니다.” (2절)

여러분, 이 고백의 중요성을 알 수 있겠습니까?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 온다고요. 여호와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불렀던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인데,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입니다. 저는 이 고백이 참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나님, 이 고백이 중요한 이유는 그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을 창조하신 분입니다. 우리는 그 창조주 하나님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도움이 필요할 때는 다른 것을 볼 필요가 없습니다.

이 사실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아는 것은 생명의 신비라고 해야 할 정도로 경이로운 것입니다. 연어는 자기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기는 연어가 알을 낳을 때는 강물로 올라온다고 알고 있는데, 정확하게 말하면 자기가 태어난 강으로 올라옵니다. 어미가 그 강에 올라가서 알을 낳고, 그 알이 부화해서 새끼가 됩니다. 새끼 연어는 바다로 돌아가서 몸집이 커집니다. 그 연어는 다시 알을 낳기 위해서 자기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 옵니다. 거기서 알을 낳고 일생을 마칩니다. 생명의 신비입니다.

예전에 어떤 기사를 읽었는데, 코끼리로 그런 본능이 있다고 합니다. 어떤 코끼리가 갑자기 호텔로 들어왔답니다. 그 호텔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봤더니, 이 코끼리가 죽을 때가 되어서 자기가 태어난 곳을 가고 있었는데, 그 길에 호텔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이 코끼리가 호텔로 들어간 것이라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어쩐지 그 기사를 읽고 나서 마음이 짠 하더라고요. 코끼리가 죽을 때가 되면 자기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갑니다. 생명의 신비입니다.

제가 오늘 말씀드리고 싶은 요점이 그것입니다. 우리도 도움이 필요할 때는 우리의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고요. 산을 바라 볼 이유가 없습니다. 주변 사람들을 돌아 볼 이유가 없습니다.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나의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2절)

시편 121편을 쓰신 분의 하나님께 대한 고백을 계속해서 들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내가 발을 헛딛지 않도록 잡아 주십니다.” “나를 지키시는 하나님은 졸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오른 편에서 내가 쉴 그늘이 되십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지키심으로 낮의 해도 나를 해치지 못하고, 밤의 달도 나를 해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켜 주십니다.”

여러분, 성경에 나와 있는 이 말씀들을 모두 인정하십니까? 정말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그런 분이 되십니까? 여러분은 정말 그런 하나님을 매일의 삶 속에서 경험하고 있습니까? 제가 단언하건대 아닐 것입니다. 성경에는 그렇게 나와 있지만, 그런 하나님을 느끼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다시 2절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이렇게 고백하는 사람, 도움이 필요할 때 다른 곳을 바라보지 않고, 나의 생명의 창조자이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사람, 이런 사람이라야 하나님을 매일의 삶 속에서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다른 말로 하면, 도움이 필요할 때 하나님이 아닌 다른 곳을 바라보고, 다른 곳에서 도움을 구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매일의 삶 속에서 나를 지켜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우리 다 함께 1절과 2절 말씀을 읽으면서 오늘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5/22/2016 | 성령강림절 후 둘째 주일

진리, 죄로부터 탈출

요한복음 8:32


5/15/2016 | 성령강림주일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 The Church in the Power of the Holy Spirit

사도행전 2:14-21

흔히들 성령강림절을 교회의 기원(起源)이라고 말합니다. 성령 강림절을 오순절 (Pentecost)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penta’라는 말이 ‘5’이라는 뜻이잖아요? 헬라어 ‘pentekoste’는 ‘fiftieth (day)’라는 뜻입니다. 라틴어로 ‘pentecoste’ 역시 ‘50번째’라는 뜻입니다. 유대교 율법에 의하면 이 때가 ‘추수 감사절 (the feast of harvest)’입니다. 이 때는 보리를 거두어 드리는 절기입니다. 동시에 이 날은 유월절 둘째 날부터 계산해서 50번 째 되는 날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부터 계산해서 50번째 되는 날입니다. 크리스천들은 이 날을 성령강림절이라고 합니다. ‘Pente-cost Sunday’라고 하기도 하지만, ‘Whitsunday [hwit-suhn-dey]’라고 합니다.

성령강림절을 시작으로 해서 이 땅에 교회가 생겼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교회와 성령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단순히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한 주일에 한 번씩 모여 예배 드리고 흩어지는 모임이 아니라, 성령께서 일하시고, 성령께서 이끄시는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9:31에 초대교회의 모습을 가장 감동적으로 기록한 말씀이 나옵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에 있는 교회들이 평화를 되찾았으며, 터전을 든든하게 잡았습니다. 교회는 주님을 두려워하며 성령의 위로를 받아 믿는 사람들의 수가 점점 늘어났습니다.” NIV 성경에 이 말씀이 “It was strengthened; and encouraged by the Holy Spirit”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교회는 성령께서 세우시고, 성령께서 위로하시는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교회들이 이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교회를 보는 관점은 아주 단순하고 아주 세상적인 것입니다. 그 교회가 큰 교회냐, 작은 교회냐 하는 관점을 가지고 봅니다. 그 교회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냐 하는 것으로 교회를 판단합니다. 정작 그 교회가 성령께서 일하시는 교회인지, 그 교회가 성령의 인도를 받는 교회인지, 그 교회가 본래의 목적에 충실한 교회인지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한국에 웬만한 교회에 다 영어 예배가 있습니다. 영어 예배가 교회에 왜 필요한가 하고 물으면 교인들이 원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회에 영어 열풍이 불어서 아이들을 어렸을 때부터 영어 교육을 시킵니다. 영어 예배에 나가면 한마디라도 영어를 더 배울 수 있지 않겠느냐 하고 말합니다. 어쩌면 당연한 것 같은 이런 말들이 교회의 본질을 흐리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는 교인들의 필요를 충족 시키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 시키는 곳입니다. 바로 이것이 교회가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공동체가 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혀처럼 생긴 불꽃이 사람들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그 불꽃은 여러 갈래로 갈라져 그 곳에 모인 한 사람 한 사람 위에 머물렀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은 다 성령으로 충만해졌습니다. 그리고는 성령께서 말하게 하시는 대로 자기들의 언어와 다른 외국어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도행전 2:3-4) 마침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서 세계 각국에서 모여 온 경건한 유대인들은 사도들이 하는 말을 ‘난 곳 방언(in their own native language)’으로 들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멀리서는 로마에서, 아라비아에서, 애굽에서, 메소포타미아에서, 바대에서, 메대에서, 엘람에서, 주로는 지금의 터키 땅에 해당하는 소아시아 지방에서 온 유대인 순례자들이었습니다. 사도들은 그 지방 말을 배운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우리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The Holy Spirit gave them this ability to speak other languages(사도행전 2:4, NLT).”

사도들의 입에서 나오는 ‘난 곳 방언’을 들은 순례자들은 놀라 이게 어찌된 영문인지 어리둥절 했습니다. “Amazed and perplexed, they asked one another, ‘What does this mean?’” (사도행전 2:12) 사람들 중에는 지금 이 사람들이 새 술에 취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 앞에 베드로가 담대하게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유대 사람들, 그리고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주민 여러분, 이 일을 여러분께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내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지금은 아침 9시밖에 되지 않았으니, 이 사람들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처럼 술에 취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일어난 일은 바로 요엘 예언자가 예언했던 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 날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사람에게 부어 주겠다. 너희의 아들과 딸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요,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꿀 것이다. 그 날에 내 남자 종들과 여자 종들에게 까지 내 영을 부어 주겠다. 그러면 그들은 예언할 것이다.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이한 일을, 아래로 땅 위에서는 표적을 보여 줄 것이다. 피와 불과 짙은 연기가 일 것이다.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으로 변할 것이다. 이 일이 일어난 후에 크고 영광스런 주님의 날이 올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사도행전 2:14-21)

베드로의 설교는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지금 여러분들이 보는 현상은 이상한 현상이 아니라 일찍이 하나님께서 이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대로 된 것이라는 것, 둘째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일에 동원이 될 것이라는 것, 셋째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 이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선지자 요엘(Joel)이 살았던 시대는 학자마다 다른 견해가 있습니다만, 일반적으로 기원전 8-9세기 경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 때는 요아스 (Jehoash)라는 왕이 유다 왕국을 다스리고 있던 때였습니다. 그는 7살 때 왕이 되어 처음에는 비교적 정치를 잘 했지만, 나중에는 우상숭배에 빠진 왕이었습니다. 요아스 왕이 죽고 얼마 되지 않아 나라가 바빌로니아에게 멸망합니다. 그 때가 BC 586년입니다. 이 때 하나님은 요엘 선지자를 통해서 짧게는 포로시대의 의미를 알려 주셨고, 길게는 앞으로 있을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을 부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요엘 2:28). 이 말씀은 포로시대에 들어가서 에스겔을 통해서 다시 한번 주어집니다.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새 영을 넣어 주겠다.” (에스겔 11:19) 이렇게 하나님께서 그의 영을 모든 사람들에게 부어주시는 이유는 사람들이 예언하도록, 사람들이 환상으로 보도록, 사람들이 꿈을 꾸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언, 환상, 꿈이라는 단어를 주의해서 보아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예언, 환상, 꿈은 모두 하나님께서 그의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수단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을 주실 때는 예언이고, 뭔가를 보여 주실 때는 환상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꿈을 통해서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오늘 말씀을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합니다. 예언이라는 말은 그 뒤에 나오는 “내 영을 부어 주겠다. 그러면 그들은 예언할 것이다”는 말씀과 연결됩니다. 환상이라는 말은 그 뒤에 나오는 “내가 표적을 보여 줄 것이다”라는 말씀과 연결되고, 꿈이라는 말은 그 위에 나오는 “크고 영광스러운 주님의 날이 올 것이다”라는 말씀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그의 영을 부어 주시는 이유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지도자들이 타락해서 우상숭배에 빠지면 백성 전체가 우상숭배에 빠졌습니다. 우상숭배에 빠지면 하나님과 소통이 되지 않으므로 하나님의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이 이러다가 멸망했고, 남왕국 유다도 그러다가 멸망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하나님께서 그런 식으로 지도자들을 통해서 자기의 뜻을 말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영을 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성경 말씀을 잘 보십시오. “너희의 아들과 딸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요,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꿀 것이다. 그 날에 내 남자 종들과 여자 종들에게 까지 내 영을 부어 주겠다.” (사도행전 2:17-18) 아들과 딸들, 젊은이와 늙은이들, 남종과 여종,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부어 주시는 성령을 받습니다.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누구를 통해서가 아니라, 각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야 하는 시대입니다. 어떤 특정한 사람들에게 의존했던 과거의 시대가 아니라, 우리 각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 하나님 나라의 미래를 보아야 하는 때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하는 책임이 우리 각자에게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하나님의 영을 부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우리 가운데 예언을 하는 사람도 있어야 하고, 환상을 보는 사람도 있어야 하고, 꿈을 꾸는 사람도 있어야 합니다. 너희 아들과 딸들, 너희의 젊은이들, 너희의 늙은이들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들입니다. 주일학교 아이들, 청년들, 그리고 장년들, 모두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누구도 제외 되는 사람이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뜻을 아는 일에 동원이 됩니다. 누구도 제외되지 않고 모두가 하나님께서 부어 주시는 영을 받아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민감하게 응답하고, 그 시대를 책임 있게 살아야 사람들로 부름을 받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이렇게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에 민감하게 응답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참 적습니다.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은 가지고 있지만, 우리의 관심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잘 먹고 잘 사는데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관심이 영적인데 있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것에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 그리스도의 복음을 확장하는 일, 나에게 대한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에 대하여 심각하게 생각하고 고민하는 사람들을 찾아 보기가 어렵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믿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들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수단이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살아가는데 필요하니까 교회도 나오고, 필요하니까 기도도 하고, 성경도 보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까지 이기적으로 믿고 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믿음생활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구원을 얻은 후에는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믿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Seek first his kingdom and his righteousness)”고 하시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내 삶의 목적으로 삼아야 합니다. 2002년에 릭 워렌(Rick Warren)이 쓴 ‘목적이 이끄는 삶 (The Purpose Driven Life)’이 나왔을 때 대단했습니다. 교회마다 이 책을 가지고 설교를 하고, 세미나를 열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한 때의 유행처럼 지나가 버렸습니다.

우리 가운데 예언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 가운데 환상을 보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 가운데 꿈을 꾸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언을 하도록, 환상을 보도록, 꿈을 꾸도록, 우리에게 그의 영을 부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언하고, 환상을 보고, 꿈을 꾸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이 있어서 그 말씀을 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환상, 하나님께서 보연 주신 비전(vision)을 말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사람이 없습니다.

오늘 성령강림절을 맞이해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드리고자 하는 마지막 말씀은, 우리에게 경각심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도 알고 있다시피 벌써 잠에서 깨어날 때가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었을 때보다 더 가까워졌습니다. 밤이 거의 다 지나 낮이 가까웠습니다. 그러므로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로마서 13:11-12) 오늘 말씀에도 때에 대한 경각심이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 날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사람에게 부어 주겠다.’” (사도행전 2:17) “In the last days, God says, ‘I will pour out my Spirit upon all people.’” (NLT)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어 주시는 때는 ‘마지막 때’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때가 ‘마지막 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볼 때 지금은 어느 때입니까? 여러분이 읽고 있는 책의 제목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이런 제목의 책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이 책이 모두 네 챕터 (chapter)로 되어 있다면,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의 마지막 챕터를 읽고 있는 것입니다. 이 챕터를 다 읽으면 역사의 끝이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음 세대에게 배턴을 넘겨 줘야 한다는 의미에서 볼 때는 우리는 400m 계주의 3번 주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의 큰 그림에서 볼 때는 4번 주자들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4번 주자들입니다. 우리 중의 누구도 제외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이 4번 주자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부어 주시는 성령을 충만하게 받아야 합니다. 우리 아들과 딸들, 청년들과 장년들, 노년들, 남종과 여종들, 누구나 하나님께서 부어 주시는 성령을 충만하게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역사의 마지막 챕터를 책임 있게 살아야 합니다.


5/8/2016 | 졸업 예배 / 어버이 주일

끝까지 지켜야 할 것 두 가지 Two Things That You Should Never Forsake

잠언 3:1-10

오늘은 어버이 주일과 졸업 예배를 같이 드리는 주일입니다. 유명한 한 시 중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樹欲靜而風不止 子欲養而親不待(수욕정이풍부지 자욕양이친부대)” 풀이하면, “나무는 잠잠이 있으려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이 봉양하려고 하나 어버이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라는 뜻입니다. 한대(漢代)의 학자였던 한영(韓嬰)이라는 사람이 한시외전 (韓詩外傳)이라는 시경 (詩經) 해설서를 썼는데, 그 책에 나오는 한 구절입니다. 혹시 여러분, 송강 정철이 쓴 훈민가 (訓民歌)를 알고 계십니까? “어버이 사라신 제 셤길일란 다하여라. 디나간 후면 애닮다 어이하리. 평생에 고쳐 못할 일이 이 뿐인가 하노라.” 부모에게 자식의 도리를 잘 하지 못한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시들입니다.

성경에도 부모에 대한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십계명 중 다섯 번째 계명이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입니다. 에베소서 6:2-3에는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라고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 중에 이 계명을 잘 지키면 이런 저런 축복을 받으리라고 나와 있는 첫 계명이 바로 부모님을 공경하라는 계명입니다. 오늘 어버이 주일을 맞이해서 부모님 생각 많이 하십시오. 그리고 멀리 떨어져 있지만, 전화도 한 통 넣고, 편지도 한 통 쓰십시오. 이미 부모님이 돌아가신 분들이라도 오늘을 있게 하신 그분들의 수고와 사랑을, 그리고 그분들의 기도를 기억하십시오.

영국의 시인 루드야드 키플링(Rudyard Kipling, 1865-1936)이 「오 나의 어머니(O Mother of Mine)」라는 시를 썼습니다. “내가 높은 산에 목이 매달린다고 해도 나는 압니다. 누구의 사랑이 나에게 흘러올지를. 오 나의 어머니! 내가 깊은 바다에 빠진다고 해도 나는 압니다. 누구의 눈물이 나에게 흘러올지를. 오 나의 어머니! 내 영혼과 몸이 저주를 받는다고 해도 나는 압니다. 누구의 기도가 나를 구원할지를, 오 나의 어머니!”

그렇습니다. 어머니의 사랑과, 눈물과 기도 덕분으로 오늘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키플링은 그의 시에 “Dedication to The Light That Failed (꺼진 불에게 바치는 시)”라는 부제(副題)를 붙였습니다. 어머니라는 존재가 그런 존재 아닙니까? 자신의 것을 모두 자식에게 내어 주고 자신은 아무 것도 남지 않은 꺼진 불과 같은 존재 아닙니까? 키플링은 그런 이 땅의 어머니들에게 한편의 시를 바쳐서 위로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부모의 소원은 한 가지입니다. 자식이 잘 되는 것입니다. 자식이 건강하게, 아무 탈 없이, 공부 잘 하고, 잘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이런 부모님의 소박한 소원을 한 차원 높여서 어떻게 사는 것이 정말 잘 사는 것인지 진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예전의 사람들은 잘 되는 것을 ‘입신양명(立身揚名)’한다고 했습니다. 효경(孝經)에 나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런 고전에 나오는 말들을 가볍게 생각하지 말고 그리스도 안에서 입신양명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진지하게 생각해야 봐야 합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오늘 읽은 잠언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잠언은 Proverbs입니다. 흔히 쓰는 말로는 속담이나 격언 혹은 금언입니다. 성경의 잠언 속에는 일상생활 속에서 얻은 지혜로운 말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생활에 교훈이 되는 말씀들입니다.

오늘 말씀은 “내 아들아(My son)” 하면서, 마치 자기 아들에게 들려 주는 교훈의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잠언을 쓴 솔로몬은 아주 지혜가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인근 각처에서, 심지어 다른 나라에서까지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사람들이 몰려 왔습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큰 지혜와 슬기로운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헤아릴 수 없는 넓은 마음을 주셨습니다. 솔로몬의 지혜는 동방의 그 어떤 사람의 지혜보다 컸으며, 이집트의 모든 백성의 지혜를 합한 것보다도 더 컸습니다. 솔로몬은 이 땅의 어느 누구보다도 지혜로웠습니다. 예스라 사람 에단보다도, 마홀의 아들 헤만과 갈골과 다르다보다도, 더 지혜로웠습니다. 솔로몬의 명성은 모든 나라에 널리 퍼졌습니다. 솔로몬 왕은 평생 동안, 지혜로운 가르침을 삼천 가지나 말했으며, 천 다섯 편이나 되는 노래를 지었습니다. 그는 레바논의 백향목으로부터 돌담에서 자라는 우슬초에 이르기까지 온갖 식물과 짐승과 새와 기어 다니는 것과 물고기에 대해서도 가르칠 수 있었습니다. 모든 민족들이 솔로몬 왕의 지혜를 들으려고 몰려왔습니다. 그들은 솔로몬의 지혜를 듣도록 세상의 모든 왕들이 보낸 사람들이었습니다 (열왕기상 4:29-34).”

이런 솔로몬이었지만 말년에는 본이 되는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지나친 명예심으로 대대적인 토목 공사를 일으켜서 백성들의 삶을 힘들게 했습니다. 이방 나라의 여자들과 정략적인 결혼을 했습니다. 우상숭배에 물들었습니다. 하나님을 멀리했습니다. 부귀영화에 탐닉했습니다. 이렇게 인생을 살았던 솔로몬은 하나님 없이 살았던 자신의 삶이 모두 헛되다는 것을 깨닫고 전도서를 썼습니다. 그리고, 솔로몬이 잠언 역시 그가 말년에 크게 깨달음을 얻고 쓴 것이 많습니다.

오늘 읽은 잠언 3장의 말씀도 그렇습니다.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다음 세대에게 크게 두 가지를 부탁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성실입니다. 개역 성경에는 진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NIV 성경에는 faithfulness라고 나와 있습니다. 아무도 “왜 우리는 성실하게 살아야 합니까?” 하고 묻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다 착하게, 정직하게, 성실하게 살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살다가 보면 그게 마음처럼 잘 되지 않습니다.

에베소서 6장에 보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디에서든지 사람들을 대할 때, 누구를 대하든지 성실하게 주님을 대하듯이 하라고 합니다. 눈가림으로 대하지 말고 성실하게 대하라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 나가서 그런 태도로 사람들을 대한다면 어디서든지 인정을 받을 것입니다. 영어로 편지를 쓸 때는 꼭 끝에 “Sincerely yours”라고 쓰고 그 밑에 자기 이름을 쓰고 싸인을 합니다. “sincere”라는 말이 라틴어 “sincerus”에서 온 말인데, 원래 이 말은 “양초를 먹이지 않았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이탈리아에는 대리석이 많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좋은 대리석이라도 흠집이 있으면 제 값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대리석을 파는 사람들이 흠집을 감추기 위해서 양초를 먹여 진짜인 것처럼 속여 팔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대리석은 양초를 먹이지 않은 순수한 대리석입니다” 라고 말할 때 sincerus라는 말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이 세상에 나가서 양초를 먹이지 않는 성실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둘째는, 사랑입니다. 개역 성경에는 “인자”라고 나와 있습니다. 영어 성경에는 “love”라고도 나와 있고, “mercy”라고도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요한은 “사랑하는 친구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처럼 우리를 사랑해 주셨으니 우리 역시 서로를 사랑해야만 합니다 (요한일서 4:11)”라고 말했습니다. 사랑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저 사람에 대한 따뜻한 마음을 갖는 것이 사랑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사람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자꾸 사라져 가는 시대입니다. 오늘 졸업하는 여러분, 잘 알아 두세요. 사람에 대한 사랑과 관심, 이것을 잃어 버리면 여러분은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있으나마나 한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무슨 법을 하나 만들어도 항상 그 밑바닥에 사람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깔려 있어야 합니다. 무엇을 하나 바꾸어도 그 밑바탕에는 사람에 대한 따뜻한 사랑과 관심이 깔려 있어야 합니다. 특히 약한 사람, 불편한 사람,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무력(無力)한 사람들 편에 서는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성경 속에 많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 중에 사무엘상 21장에 나오는 제사장 아히멜렉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히멜렉에 대한 이야기는 감동적이다 못해 충격적입니다. 아히멜렉은 다윗과 동시대 사람입니다. 다윗은 사울의 추격을 받고 도망 중이었습니다. 상황이 어찌나 급했던지 수행하는 부하들도 없었고, 손에 무기도 없었습니다. 게다가 아무 것도 먹지 못해서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이런 다윗이 한 밤중에 아히멜렉를 찾아 갑니다. 다윗을 알아 본 아히멜렉은 깜짝 놀라면서 “아니, 이 밤중에 웬 일입니까?” 하고 묻습니다. 다윗은 왕의 특명이 있어서 이렇게 부하도 없이 급히 길을 떠나게 되었다고 둘러댑니다. 그러면서 뭐라도 먹을 것이 있으면 좀 달라고 합니다. 그 때 당황한 아히멜렉이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제 손에 장군에게 줄 떡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전에서 물려낸 거룩한 떡은 있습니다” 하면서 거룩한 떡을 다윗에게 내 줍니다. 이 일이 나중에 사울에게 알려져서 아히멜렉은 죽습니다. 거룩한 떡은 제사장 외에는 먹을 수 없는 떡입니다. 다윗은 그 떡을 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아히멜렉은 그 떡을 다윗에게 줘서 먹게 했습니다. 그런 결정을 하기까지 아히멜렉은 수 만가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결론에 도달합니다.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이 사람은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이 분명하다. 지금 이 사람이 위급한 상황에 처해 있다. 내가 떡을 주지 않으면 이 사람은 죽을 수도 있다.” 이렇게 생각한 아히멜렉은 다윗에게 거룩한 떡을 내 줍니다. 이렇게 해서 다윗은 떡을 먹고 기운을 차립니다. 다윗이 떠날 때 아히멜렉은 자기가 보관하고 있던 칼 한 자루를 줍니다. 그 칼은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빼앗은 칼이었습니다. 다윗은 아히멜렉 덕분에 목숨을 구했지만, 아히멜렉은 이 일 때문에 사울의 손에 죽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아히멜렉의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히멜렉 이야기를 하시면서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다 (마가복음 2:27)”고 하셨습니다. 사람에 대한 사랑과 애정은 율법의 어떤 규정보다도 위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잘 알았던 아히멜렉 덕분에 다윗은 목숨을 구할 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평생 아히멜렉과 같은 마음을 품고 사십시오. 오늘 성경 말씀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인자와 진리로 네게서 떠나지 않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 판에 새기라.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 NLT 성경에 이 말씀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Tie them around your neck as a reminder. Write them deep within your heart. Then you will find favor with both God and people, and you will earn a good reputation.”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성경에도 입신양명에 대한 말씀이 있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단순히 출세해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입신양명이 아니라, 성실과 사랑을 가지고 삶으로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높여 주시는 입신양명입니다.

Erwin Lutzer란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Those who have failed miserably are often the first to see God’s formula for success (처참하게 실패를 경험한 사람은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성공에 대한 공식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자기의 formula를 가지고는 실패 했잖아요? 이제는 눈을 하나님의 formula로 돌릴 필요가 있습니다. 성공에 대한 하나님의 formula는 전혀 다릅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과 경쟁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을 딛고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거짓말을 해서라도, 부정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자기 목적을 성취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인자와 진리를, love와 faithfulness를 목에 매고 잊어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을 마음에 깊이 새기는 것입니다. 어떤 환경에서나 사람에 대한 배려와 따뜻한 마음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짓말 하거나, 사람을 속이지 않고, 눈가림으로 하지 않습니다. 생각과 말과 행동이 진실합니다. 이렇게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공에 대한 하나님의 formula입니다.

마지막으로 솔로몬은 모든 일에 있어서 먼저 하나님을 인정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새로운 교훈이 아니라, 하나님의 formula를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에 눈을 팔지 말하는 것입니다. 그 뒤에 나오는 말씀을 보십시오.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He shall direct your ways., NLT).” “And he will make your paths straight.” (NIV) 우리가 우리 자신의 formula를 따라 가지 않고, 하나님의 formula를 따라서 살면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의 길을 지도하신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가는 길을 순탄하게 하신다고 합니다.

제가 “졸업 (graduation)”이라는 말을 Webster 사전에서 찾아 봤더니 “to pass from one stage of experience to a usually higher one” 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보다 높은 단계로 가기 위해 한 계단을 올라 선 것입니다. 이제 성실과 사랑을 reminder로 목에 걸고, 가슴에 깊이 새기고, 세상으로 나가십시오. 여러분 때문에 세상이 더 밝아지고, 아름다워지는 삶을 사십시오.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베드로전서 3:14 말씀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But even if you should suffer for what is right, you are blessed. Do not fear what they fear; do not be frightened (때로는 옳은 일을 함으로 고난을 받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순간에 여러분에게 복을 주실 것입니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겁내지 마십시오).”


5/1/2016 | 부활절 여섯째 주일

너는 나를 따르라! You Follow Me!

요한복음 21:18-25

사람이 자신의 삶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냥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으니까 그냥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훨씬 많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에 대하여 무슨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소수의 사람들은 자신의 삶 속에 거룩한 신의 섭리 (divine providence)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나의 삶은 그냥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라, 내가 모두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나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고 믿습니다.

저는 우연히 에베소서 1:11-12 말씀을 읽고 깜짝 놀랐습니다. 거기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모든 것을 그의 뜻대로 이루시는 하나님께서는 오래 전에 이미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예정해 놓으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첫 소망을 가진 우리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찬양을 받기 원하십니다.” 이 말씀이 Eugene Peterson이 번역한 The Message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It's in Christ that we find out who we are and what we are living for. Long before we first heard of Christ and got our hopes up, he had his eye on us, had designs on us for glorious living, part of the overall purpose he is working out in everything and everyone.” 번역하면 이런 말씀이지요? “우리가 누구인지, 또 우리가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지 그리스도 안에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하여 듣고 희망을 갖기 훨씬 전부터 그리스도는 눈은 우리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 안에서, 모든 사람을 위해 일하시는 큰 목적의 한 부분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영광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한 설계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서만 우리의 삶의 목적과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생명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런 전제(前提) 밑에서만 올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하십니다. “네가 젊었을 때는 네 혼자 힘으로 옷도 입고 네가 원하는 곳으로 갔지만, 나이가 들게 되면 네가 팔을 벌리겠고 다른 사람이 네게 옷을 입힐 것이며, 다른 사람이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너를 데려갈 것이다.” (18절) “When you were young, you dressed yourself and went wherever you wanted to go.” 네가 젊었을 때는 스스로 옷을 입을 수 있어서 어디든지 원하는 곳을 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뭐가 잘못된 것 같습니다. 어릴 때는 스스로 옷을 입지 못해요. 엄마가, 아빠가 옷을 입혀 줍니다. 그 때는 엄마, 아빠 말을 들어야 하고, 또 밖에 나갈 때도 혼자 아무 곳이나 갈 수 없습니다. 꼭 엄마 아빠 손을 잡고 따라서 가야 합니다. 가끔 길을 가다 보면 미국 유치원 아이들이 20-30명 선생님을 따라 어디를 가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재미 있는 것은 아이들 손을 줄로 묶어 놨습니다. 아이들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손을 묶어 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옷을 혼자서 입을 수 있는 나이가 되면, 밖에도 혼자 나갈 수 있습니다. 꼭 엄마, 아빠를 따라가지 않아도 혼자서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것은 정반대의 말씀입니다. “(비유적인 의미에서) 네가 젊었을 때는 혼자서 옷을 입고 네가 원하는 곳으로 갔지만, 이제 나이가 들게 되면, 네 혼자 옷을 입을 수 없다. 다른 사람들이 너에게 옷을 입힐 것이다. 너는 네 마음대로 아무 곳이나 갈 수 없다. 다른 사람들이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너를 데려 갈 것이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다행히 성경에 이 말씀의 뜻이 잘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베드로가 어떤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지 보여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19절) 간단히 말하면, “지금까지 너는 네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부터 너는 네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없고, 내가 원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이런 뜻입니다. 사실 예수님도 보면 30살까지는 어떤 삶을 살았는지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제가 보기에 다른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아버지 요셉이 목수였기 때문에, 아버지 따라서 목수 일을 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나사렛에서 6km 떨어진 곳에 세포리스 (Sepphoris)라는 큰 도시가 있었습니다. 세포리스의 별명이 ‘갈릴리의 보석’이었습니다. 그곳에 큰 공사들이 많았습니다. 아마도 요셉과 예수님은 그곳에 가서도 일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30살이 되면서 예수님은 그런 생활을 접습니다. 세례를 받으시면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공적인 삶 (public life)을 살기 시작합니다.

예언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까지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는, 평범한 삶을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후에는 지금까지와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삶을 삽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렇습니다. 제자로 부르심을 받기 전에는 모두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부르심을 받은 후에는 예수님을 따라 전혀 다른 삶을 살기 시작합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오늘 우리의 삶에 적용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보면 지금 공부하는 청년들은 본격적으로 세상에 나가서 크리스천의 삶을 살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공부를 마치고, 결혼을 하고, 직장을 얻고, 사회인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크리스천의 삶을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꼭 이렇게만 생각할 수 없는 것이,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 현재의 삶에 대한 의미가 약화됩니다. 그러므로, 지금 현재의 삶을 준비의 삶이라고만 이해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서 크리스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요한복음을 쓴 요한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은 베드로가 어떤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지를 보여 주는 말씀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씀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납니다. 그 죽음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의 죽음은 자신을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완성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시면서 “다 이루었다 (It is finished., 요한복음 19:3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은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위해 화목 제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요한일서 4:10)”라고 했습니다. 제물은 죽어야 하는 것이잖아요? 예수님은 죽으심으로 완전한 화목제물 (an atoning sacrifice, NIV)이 되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단순히 숨이 끊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완성하는 시간이라고 봐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때까지 최선을 다해서 우리의 사명을 완수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다소 엉뚱한 질문을 합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21절) 자기를 따라오고 있는 예수님의 제자 요한에 대한 질문입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묻는 것을 보면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것을 이해한 것 같습니다. “그래요? 이제 제가 제 마음대로 살 수 없다는 말씀이시지요? 제가 그렇게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이게 된다는 말씀이시지요? 그러면, 저기 따라오고 있는 요한은 어떻게 됩니까?” 이렇게 예수님께 물은 것입니다. 베드로의 질문에 예수님은 “요한이 어떻게 되든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처음에 말씀 드린 것처럼, 우리 각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독특한 (unique)’ 삶의 계획이 있습니다. 모두 같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가 같지 않고 다른 것처럼,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목적도 각각 다릅니다. 저는 목사로 하나님께서 부르셨습니다. 저는 정말 어쩌다가 목사가 되었는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제가 목사로 부름을 받기에는 너무나 부족하고 모자라는 것이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 저에게는 부담입니다. 영어에 ‘undeserved’라는 단어가 있는데, 저에게 꼭 맞는 단어입니다. 자격이 없다는 뜻이 잖아요? 설교자로서 어쩔 수 없이 나도 하지 못하는 일을 설교라는 이름으로 교인들에게 말해야 하는 때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면서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는 때가 있습니다. 저에게는 참 힘든 일입니다. 이번에 KMC 연회에 가서도 어떻게 목사들이 저런 말을 할 수 있고, 저런 행동을 할 수 있는지 충격적인 일들이 많았습니다. 협박, 회유, 거짓말, 말 뒤집기, 목사들의 세계에 이런 일들이 난무(亂舞)합니다. 어느 목사가 그런 말을 하데요. 정치(政治)는 다 그런 것이라고요. 그러나, 저는 생각이 좀 달라요. 교회 정치는 달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치라는 말로 목사들의 그런 말도 안 되는 모습들을 정당화 할 수는 없습니다.

크리스천은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그 사람에게 두고 계시는 하나님의 유니크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그 목적에 따라 살면 됩니다. 나에게는 나에게 맞는 하나님의 유니크한 목적이 있습니다. 나는 그것을 찾아서 그렇게 살아가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그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다른 사람 상관하지 말고, 너는 나를 따르면 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아무도 가 본 적이 없는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아마도 베드로가 훗날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십시오 (He is your example, and you must follow in his steps., 베드로전서 2:21)” 이렇게 말한 것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그렇게 말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믿음 생활은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발자취 (Jesus’ steps)를 따라 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 생활은 예수님을 따라가는 생활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보다 먼저 그 길을 가셨고, 발자취를 남겨 놓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 발자국을 따라 가면 됩니다. 이것이 믿음 생활입니다. 예전에는 모르는 길 가기가 참 어려웠습니다. 그나마 지도가 잘 되어 있으니까 누가 옆에서 지도를 봐 주면 되지만, 저도 이것 가지고 많이 싸웠습니다. 갑자기 갈라진 길이 나오는데, 옆에서 빨리 말해주지 않습니다. 그러면 당황하게 되고, 소리를 지르게 됩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네비게이션이 있어서 정말 다행입니다. 출발 하기 전에 주소를 먼저 입력하면 모르는 길이라도 걱정이 없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갈 때는 ‘Go Home’ 버튼만 누르면 집에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가 있습니다. 비유적인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남겨 놓으신 발자취는 네비게이션과 같습니다. 그 발자국을 따라서 가면 힘들지 않습니다. 믿음 생활은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발자국을 따라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방향이 잘못되고, 목적지를 벗어나서 엉뚱한 곳에 도착합니다. 성경을 잘 배워야 합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가치들을 나의 가치로 삼아야 합니다. 성경이 옳다고 하는 것을 나도 옳다고 하면 되고, 성경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나도 아니라고 하면 됩니다. 예수님은 자기 제자 두 사람, 야고보와 요한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실 수 있느냐? 그리고 내가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마가복음 10:38) 이 말씀에 나오는 ‘잔 (cup)’과 ‘세례 (baptism)’는 모두 예수님께서 받으신 고난 (suffering)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셨으면 우리도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삶입니다. 이 길을 잘못 배우거나, 아니면, 이 길을 걷는 것을 거부하는 데서부터 지금의 문제들이 생겨났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만들어 놓은 세상에 죄와 악이 가득한 것을 보고 후회하셨다는 말씀이 성경에 나옵니다. 그래서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창세기 6:5-7). 이 세상을 홍수로 쓸어 버리고 의로운 한 사람, 노아와 다시 시작하고 싶어하셨습니다. 죄송합니다만, 지금의 어른들은 다음 세대 에게 좋은 믿음의 본을 남기지 못했습니다. 400m 릴레이에 비유하자면, 1번 주자는 그런대로 잘 뛰었습니다. 그런데, 2번 주자가 잘못 뛰었습니다. 여기에 목사들의 잘못이 큽니다. 소위 번영신학(繁榮神學)에 물이 들어 복음을 변질 시켰습니다. 목사들은 대형교회를 이루기에 여념이 없었고, 교인들에게 성공에 대한 야망을 심어 주었습니다. 그 여파를 지금 세대가 그대로 물려 받고 있습니다. 이제 3번 주자인 여러분에게 배턴이 주어졌습니다. 만약 3번 주자인 여러분이 잘못 달리면 차이는 점점 더 벌어지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 3번 주자인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잘 따라 달리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남기신 발자국을 잘 따라서 달리면 꺼졌던 희망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 주자에게 배턴을 넘겨 주면 됩니다.

어느 축구 해설자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한국 축구 선수들은 결정적인 장면에서 그만 ‘개 발’을 차고 만다는 것입니다. 한국 선수들은 그런답니다. “아니, 이 볼이 왜 내게로 오지? 큰 일 났네. 잘못 차면 비난을 받을 텐데?” 하면서 결정적인 찬스가 와도 “옛다 모르겠다. 다른 사람이 알아서 처리하겠지” 하면서 공을 ‘뻥’ 차버리고 만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반면에, 골을 잘 넣는 선수들은 그 찬스가 자기에게 오는 것을 행운으로 여긴다고 합니다. “이렇게 좋은 기회가 나에게 오다니? 이건 행운이야.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돼!” 이렇게 생각하고 공을 찬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지금의 청년들에게 3번 주자의 책임이 주어졌습니다. “큰 일 났네? 이 책임이 왜 나에게 왔지?”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교회에, 하나님의 나라에 희망의 불꽃을 살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여러분에게 왔다고 생각하십시오. 그런 생각을 가지고, 과거와는 달리 도전적이고, 창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여러분이 되십시오. 그러면, 희망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