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모음
9/3/2023 | 성령강림후 제 14주
예수의 오래된 제자 The early disciple of Jesus
사도행전 21:15-26
가이사랴에서 며칠을 묵고 바울과 그 일행들은 예루살렘에 도착을 합니다.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까지의 거리는 대략 62마일(100km) 정도 됩니다. 당시에 62마일의 거리는 건강한 성인이 짐없이 걸어도 쉬운 길은 아닙니다. 사도행전 20:4에 의하면, 바울은 고린도를 떠날 때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까지 총 7명이 동행했습니다. 이후 마게도냐에서 누가가 합류했으니 8명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가이사랴 있던 제자들까지 합류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바울을 포함해서 십여명이 넘는 일행들이 모두 나손의 집으로 갑니다. 개역개정은 나손이 함께 동행한 것으로 번역했는데, 쉬운성경은 나손의 집으로 안내해 주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성서학자들은 당시 나손의 나이를 70세 정도였을 것이라 추정합니다. 그가 한평생 예수의 길을 따른 사람임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일찍부터 예수의 제자가 된 사람입니다. 성서학자들은 일찍부터 제자가 된 나손이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제자가 되었거나, 구브로(키프로스) 출신인 것으로 볼 때에 AD 33년경 스데반의 순교 이후에 헬라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키프로스, 안디옥, 페니키아 지역에 흩어져 복음을 전했을 때 (11:20) 그 무렵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고 보기도 합니다.
자신을 것을 손해보지 않는 범위 안에서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 자신의 자존심이 침해 받지 않는 범위를 정해 놓고 제자가 되려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제자는 예수님과 지속적인 관계를 통해 옛삶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시작한 사람입니다. 당시 예루살렘에는 사도 바울을 반박하기 위한 무리들이 도사리고도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러한 상황속에서 예루살렘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10여명이 넘는 바울과 일행들을 머물도록 한 것을 보면 바울의 사명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나손은 큰 집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제자는 배우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이사야 선지자의 글을 인용하시면서 “선지자의 글에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요 6:45)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사람은 예수께로 온다는 것입니다. 군중들은 듣기만 합니다. 그것은 일시적이고 자기중심적입니다. 그러나 제자는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듣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결단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의 것을 내어 드리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하나님께서 주신 인생의 목적과 계획을 깨닫고 평생을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을 따라가는 구도자입니다. 나손이 아마도 그런 사람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고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바울과 그 일행들을 맞이했을 것입니다. 섬기는 것은 세상의 처세술이 아닙니다. 주님은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 이것을 숨기시고 어린아이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나타내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은 믿음생활에 정성을 들이면 들일수록 하나님의 사랑이 깊어지게 됩니다. 그 사랑은 섬김을 통해서 드러나게 되지요. 이웃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과의 바른 관계가 되는 믿음입니다. 당시 유대적 경향은 헬라파 교인들의 접대를 꺼리는 분위기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손은 주위에 시선보다는 바울과 일행들에게 섬기는 일을 통해서 주님의 따뜻한 품을 제공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많은 사람들을 집에 초대해 본 경험이 있으실 것입니다. 누군가를 섬긴다는 것은 사랑과 헌신의 마음이 없이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나손은 예수의 오래된 제자로 자신의 소유를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한 것입니다.
이제 9월이면 많은 청년들이 배움의 길을 걷기 위해 보스턴으로 오게 됩니다. 설레이는 마음으로 이곳에 오겠지만 익숙했던 지역을 떠나서 새로운 땅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기 보다는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할 것입니다. 학업이라는 큰 산을 넘는 일도 생각해 보면 만만치가 않습니다.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의 문제도 만나게 되겠지요. 낯선 땅에서 새로움을 직면하는 일은 자신과의 싸움이기도 합니다. 케임브리지 한인교회가 이곳에 존재하는 이유 중에 한가지는 조국과 세계를 섬길 인재를 배출하는 일입니다. 이 일은 아주 오래 전부터 지속해 온 교회의 사명입니다. 우리교회는 그리스도의 제자를 만들어 내는 일에 오랜시간 집중해 왔습니다. 일년이라는 짧은 시간속에서도 교회와 목사님께서 걸어오신 길을 마음으로 느끼는 시간을 보냅니다. 누군가는 눈물의 기도로, 누군가는 기쁨과 성취로, 누군가는 묵묵히 주는 사랑으로 이땅에서 보내게 되는 여정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제껏 이 땅을 찾는 젊은이들에게 하나님의 품을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학업의 길에서 겪게 되는 두려움과 좌절감을 딪고 일어 날 수 있도록 섬기는 교회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깨닫게 되면 모든 소유가 주님으로 부터 온 것을 깨닫습니다. 섬김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에 빚지고 있음을 자각할때 비로소 시작이 됩니다. 섬김은 우리가 할수 있는 작은 일부터 시작할수 있습니다. 형제에게 주님의 마음으로 미소짓고, 외로운 이들의 친구가 되어주고,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도 섬김입니다. 섬김은 성도들이 행할 마땅한 본분인 것입니다.
18 다음날, 바울은 우리를 데리고 주의 동생 야고보를 만나러 갔다. 그 자리에는 예루살렘 교회의 장로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19 서로 문안인사가 끝나자, 바울은 자신의 전도 여행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방 사람들에게 이루신 크고 놀라운 많은 일들을 자세히 보고했다.
바울은 그동안의 전도 여행의 경과를 보고합니다. 2년여 동안의 에베소 지역에 두란노 서원을 세우고 제자 양육한 사역, 에베소 지역에 일어났던 엄청난 회개운동, 아데미 신상으로 인한 소동들,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역에서의 사역들, 드로아에서의 유두고 사건, 밀레도 항구에서의 장로들과 뜨거운 눈물의 시간들, 두로 지역에서 만났던 아가보의 예언과 만류하는 이들에게 전했던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 등을 보고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하신 일들을 보고한 것입니다.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구제헌금에 대한 이야기는 기록하지 않았지만 바울의 서신에 보면 바울의 보고 속에는 마게도냐 지역의 교회들로 부터 모금해온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 헌금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이방 사람들 가운데 일하신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었습니다.
20 이 말을 듣고서,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며 바울에게 말했다. “사랑하는 형제여, 당신도 아시다시피 수만 명의 유대인들이 믿게 되었는데, 그들 모두가 율법을 지키는 데에 열성적인 사람들입니다. 21 그런데 그들이 당신을 두고 하는 말을 우리가 듣기로는, 당신은 이방 사람들 가운데 섞여 살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아이들에게 할례를 주지 말 것이며, 우리 유대 사람의 관습도 따를 필요가 없다고 가르친다 합니다. 22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들 유대인 형제들은 당신이 여기 왔다는 것도 틀림없이 알게 될 것입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는 성령의 오심으로 세워진 교회입니다. 이후 사도 바울과 바나바를 전도자로 파송하고 이제 20여년의 세월 동안 예루살렘 교회에는 성도의 숫자도 많아졌습니다. 20절을 보면 “당신도 아시다시피 수만 명의 유대인들이 믿게 되었는데, 그들 모두가 율법을 지키는 데에 열성적인 사람들입니다.”라고 소개합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탄생한 교회에 성령의 열매보다 율법과 할례에 진심인 사람들이 수만명이 되어 있었습니다. 외적으로는 교회가 성장했지만 교회 내부적으로는 율법을 지키려는 열성적인 사람들이 모여 있다보니 교회의 사정은 신앙의 문제로 갈등이 생겼던 것입니다. 바울은 부지런히 달려와 예루살렘 교회에 선교보고를 하는데 교회 내부에는 바울이 모세의 율법을 어긴다고 비방하는 교우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율법을 배척하고 할례를 부정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바울은 할례를 받지 말고, 율법을 지키지 말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단지 이방인들에게까지도 할례나 율법의 준수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5장에 보면 20년 전에 유대로 부터 온 안디옥 교회의 사람들이 이방인에게도 율법준수와 할례를 받아야만 한다고 가르쳐서 당시에 바울과 그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결국 이 일로 예루살렘 총회가 열렸고, 이방인에게 할례를 강요하지 말라는 것은 예루살렘 총회에서 결정했던 사항이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의로워지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육신의 할례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를 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롬 2:25-29) 이러한 가르침에 대해서 일부 유대 기독교인들이 유대인의 풍속인 율법도 할례도 따르지 말라고 가르쳤다는 오해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는 율법과 할례로 인해 의견이 갈려져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이던 야고보는 사도 바울에게 방법 하나를 제시했습니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께 서원한 네 사람이 있는데 사도 바울이 자비를 들여 서원예식을 구약의 율법대로 시행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제안을 순순히 허락합니다. 바울은 오히려 교회의 하나됨을 위해서 기꺼이 자신의 생각과 의지를 굽힙니다. 바울은 이전에 율법에 갇혀 있었지만 이제는 복음의 능력을 깊이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율법 너머의 하나님 나라가 열려 있던 것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돌아 왔을때 자신을 비방하고 오해하는 것에 대해서 인간적으로 섭섭할 수도 있었지만 비난하는 이들에게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하나됨을 위해서 야고보의 제안에 자신을 기꺼이 양보합니다. 복음은 진리 안에서 자유한 것입니다. 복음의 본질이 훼손되는 것이 아니라면 사소한 것에 집착하며 논쟁하기 보다 양보하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모습이 믿는 성도들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바울은 선택의 문제에 대해서 명확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어느 누구의 편도 들지를 않았습니다. 사도바울은 누구의 편을 들기 전에 먼저 자기자신을 내려놓고 주께서 먼저 사랑하신 사랑으로 사도들의 충고를 들었고, 믿음의 형제들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자존심을 내려놓는 온유함과 자유함이 있었습니다.
사명은 담대하고 강하면서도 때로는 겸손과 온유함을 잃지 않도록 해줍니다. 때때로 신앙생활속에서 의견이 불일치 될때가 있지요. 분쟁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어떤 사람들의 편이기 전에 주님의 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까지 오르시고 십자가의 피 흘리시기까지 죄인을 사랑하셔서 고통을 참으신 것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 안에 있을 때 교회가 하나가 됨을 알았습니다. 바울은 복음의 원리를 붙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끄시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의 오해를 불식시키고 복음을 받아 들이도록 할수 있다면 이 정도는 양보할 수 있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주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라는 마음으로 문제를 바라보고 결정을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구원받은 은혜가 넘치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 삶의 우선순위를 하나님께 두십시요. 바울처럼 옳은 방향으로 가면서 서로가 하나가 되는 비결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사랑해 주신 복음 외에는 없습니다. 하나님께 열심을 내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지 않습니까? 우리는 가장 좋은 길, 옳다고 믿는 길을 찾아서 보스턴에 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곳까지 인도해 주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을 향해서 자신에게로 오라고 초대하십니다. 예수가 달리신 십자가를 직면하는 것이 이 경험의 토대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인생살이에서 가장 억울하고 고통스러운 사건입니다. 당시에 모든 이들은 십자가 처형을 피하고 싶고, 어리석은 죽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복음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생명을 얻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여러분들의 삶에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시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께서 이곳까지 인도해 주셨음을 깨닫는 교우들에게 하나님이 함께 주실 것입니다.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참된 쉼을 얻는다는 뜻이 무엇인지 공동체를 통해서 경험하시를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이 배움의 가치를 제자됨에 두었습니다. 교회안의 여러 은혜의 모임을 통하여 여러분의 삶이 풍성해 지도록 믿음의 기초를 쌓으시기 바랍니다. 세상보다 크신 주님께서 여러분의 수고를 아시고 갚아 주실 것입니다.
믿음의 근원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 중심에 두면 하나님의 나라가 삶에서 자라납니다. 사도 바울이 걷고 있는 길에서 우리는 나손을 통해서 바울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봅니다. 오해를 넘어 주의 사랑을 전해지는 곳에는 예수님의 빛이 밝히 비춰집니다. 취약한 이들에게 내 소유를 내어 주는 믿음의 모험에 참여해 보십시요. 주님께서 동행해 주십니다. 한주도 여러분이 걷는 그 길에 주님의 은총이 넘치기를 소망합니다.
8/27/2023 | 성령강림후 제 13주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 God’s Will and God’s Guidance
사도행전 21:1-14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선택과 결정을 내려 할 자리에 서게 되는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라면 선택의 순간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지 고민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네이게이션 안내에 비유하기도 하는데요. 하나님은 잘못된 길로 가도 언제든 안내해 주실꺼라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인생길을 가면서 업데이트가 되어 있지 않은 네비게이션을 따라가는 것은 마치 어제의 은혜로 살아가려는 안일한 생각입니다. 매일의 은혜가 없다면 낭떠러지로 인도하는 과거의 네비게이션을 따라가는 것과 같습니다.
‘앞으로 목회현장은 우리 때 보다 더 어려울꺼야’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지나온 목회를 돌아보시며 해주시는 짧은 말씀 안에 이제는 설교자의 삶이 중요한 시대라는 뜻이 담겨져 있음을 깨닫습니다. 복음의 도구로 쓰임 받는 일은 두렵고 떨리는 일입니다. 복음의 전달자는 떨림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게 되지요.
지난 수요일 새벽기도 설교를 준비하는데 애통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창세기 4장 말씀을 묵상하며 믿음의 증인이 어떤 사람일까? 곰곰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 대하여 차별을 두신 이유가 명확하게 언급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납득할 만한 아무런 이유도 없이 하나님께서는 어느 한쪽을 선택하십니다. 아벨의 제사는 받아들이고 가인의 제사는 거부하신 것입니다. 이후 가인은 동생 아벨을 살해합니다. 하나님은 동생을 살해한 가인에게 너는 유리하고 방황하는 자가 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를 드렸지만 아벨은 형장의 이슬처럼 사라지는 삶이었습니다. 아벨의 삶이 참 덧없이 보였습니다. 가인은 하나님께 분노합니다. 동생을 미워하여 죽이고 난 후에도 하나님께 자신의 의로움만 호소합니다. 공평하지 않는 세상을 하나님의 탓으로 여기는 것만 같았습니다.
가인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자기의에 갇히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단절되고 영적인 생명을 잃어 버리게 됩니다. 말씀을 묵상하며 성경의 기자가 초점을 두는 것이 아벨과 가인의 제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신 더 나은 제사는 제물의 문제가 아니라 드리는 사람의 마음의 상태입니다. 성경의 기자는 믿음의 근원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11: 4)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더 나은 제사는 자신이 충분히 의롭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것은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라고 말합니다. 영적 예배를 드리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가인의 입장에서 보면 아벨의 제사만 받는 하나님이 공평해 보이지 않습니다. 공평하지 않은 일들이 세상에 참 많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정말 공평하지 않으신 분일까요? 우리가 생각하는 공평의 기준을 내려놓고 그리스도의 은혜가 흘러가는 대로 맡겨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아는 이들을 통해서 공평한 세상을 만들어 가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미 알려져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기에 인도함을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알지만 경제적 이익을 우선으로 살아가고, 세상의 즐거움과 사회속에서 성공과 명예, 자기의 유익만을 위해 지향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1장부터는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바울과 그의 일행이 예루살렘으로 부지런히 돌아갑니다. 그 길은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길이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예루살렘에 가면 고난을 당하게 될 것을 알았습니다. 희생과 고난도 통과해야 할 문으로 여겼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오해가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은 어려움도 없고 평탄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예수의 영에 매여 인도함을 받았지만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복음 전파하는데 장애가 되어 회복시켜 달라고 간청했지만 주님은 너의 약함이 나의 자랑이라, 오히려 너의 실패가 나의 간증이니 너의 모습 그대로 사용하시겠다고 바울의 기도를 거절하십니다.
바울이 경험한 것은 무엇입니까? 수천년 동안 이방인들에게는 구원이 없다고 믿고 살았는데 그들도 복음을 믿고 성령을 받게 되니까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에게 나타난 복음의 역사를 보았습니다. 바울은 당시 이방인들이 성경에 대해서 잘 모르니까 이방인들 위한 서신서들을 전도여행 중에 썼습니다. 반면에 하나님께 선택받은 민족이라 여겼던 유대인들은 예수로 인해서 거듭나지 않으면 죄의 자손이라고 말하는 바울의 복음이 유대인들의 감정을 거슬리게 했던 것입니다.
이제 예루살렘으로 가면, 그곳에서 체포되고, 감금되며, 다양한 재판을 받고,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로 보내질 상황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바울은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과 ‘눈물 어린 작별’을 해야 했습니다. 이후 바울은 배를 타고 다소간 남쪽인 고스(Cos) 섬으로 가서, 하루 후에 로도(Rhodes)라는 이름을 가진 섬의 항구에 도착하였습니다. 이 시점까지 그들은 소아시아의 남서쪽 끝을 돌아서 남쪽 해안을 따라 바다라(Patara)까지 동쪽으로 항해하였습니다. 이 지점에서 바울은 두로까지 가기 위한 또 다른 배로 갈아 탔습니다. 약 400마일(644km)의 여행을 위해, 직접 가로질러 항해할 무역선을 선택했습니다. 당시 두로는 페니키아 지역으로 해양 산업이 크게 발달하였고, 조선업으로 유명하여 큰 선박들이 많았습니다. 바울은 무역선을 타고 와서 두로에서 짐을 풀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 전파를 위해서 역사 속에서 페니키아 지역의 해상 무역과 교통을 정비케 하셨던 것입니다. 그 배는 구브로 끼고 직진하여 화물을 내리게 될 두로에 도착하였습니다. 두로에서 7일을 머물게 됩니다. 학자들은 바울인 탄 배가 곡물이나 과일 같은 짐들을 내리는 큰 배였을꺼라 추정합니다. 바울은 닷새동안 무역선을 타고 와서 도착한 뒤에 사도행전 15장 3절에 보면 2차 전도여행시에 페니키아(베니게)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만났던 제자들을 다시 찾아가 교제하였습니다. 피곤했을텐데 복음을 전하기 위한 열심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두로에서 만난 제자들은 자신들이 성령의 지시를 받았다면서,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간곡하게 만류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바울과 두로에 살던 제자들이 깨달은 성령의 뜻이 서로 상반되는 것일까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뜻을 해석하는 것이 달랐던 것입니다. 믿음의 길에서 어디에 무게를 놓는가에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알아도 해석하는 방향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바울은 두로에서 7일 동안 성령에 뜻에 매여 가는 이유를 설명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향한 발걸음을 내딪습니다. 바울은 두로를 떠나 돌레마이에 이르러 이곳에서도 형제들에게 안부하고 하루를 그들과 있다가 다음날 가이사랴에 이르게 됩니다. 그곳에서 일곱 집사 중에 한 사람인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르게 됩니다.
이후 10절부터 누가는 아가보의 이야기를 자세히 기록했습니다. 아가보는 바울의 허리띠로 자기의 손발을 묶고 성령께서 이 허리띠의 주인을 예루살렘에서 이렇게 묶어 이방인들의 손에 넘겨 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11절) 바울 일행 앞에서 예언을 한 것입니다. 여기서 띠는 짧은 가죽 허리띠가 아니라 당시 허리띠로 사용되던 긴 천 조각이었습니다. 아가보 선지자는 무당이 살풀이라도 하듯이 생생하게 몸으로 표현하면서 예언의 내용을 보여 줍니다. 바울과 함께했던 일행들은 아가보의 예언을 구체적으로 보게 되니까 하나님의 뜻을 더 분명하게 깨닫고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더 강권적으로 권유합니다. ‘권하다’라고 하는 ‘파레칼루멘’은 몇번이고 거듭하여 만류한다는 뜻입니다.
바울의 일행은 밀레도에서 바울이 말한 예루살렘에서 당할 결박과 환난을 이야기하였을 때 (20:23), 이 말을 막연하게만 생각하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가보의 예언을 통해 구체적으로 듣고 보게 되니까 유대인들에 의해 결박되어 로마인들에게 넘겨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예루살렘행을 더 막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의 가족이 하나님의 뜻으로 선교지에 들어 가야만 하는데 그 지역에 지진으로 피해가 있다면 선뜻 가라고 하겠습니까? 계속되는 여진이 그 지역에 예상 된다고 하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만류하지 않겠습니까? 바울의 일행의 마음은 이해가 되지만 좋은 길만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는 상반되는 길로 갈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이 고난이 없는 길이라고 여긴다면 하나님의 뜻은 온전히 분별되지 않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다면 어려움이 없는 길만 찾으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바울은 성령님께서 말씀하시는 뜻에 순종하고자 했습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받을 소망에 비교 할 수 없기에 이방땅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땅끝까지 가고자 한 것입니다. 바울의 신학은 1세기 동안 충분하게 자리잡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후대에 와서 그의 사역과 바울의 신학이 우리들에게는 온전한 복음으로 평가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 안에 구원 사역과 연결된 예언적 말씀들은 대부분이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났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지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철저하게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것은 대부분 자신의 일이나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 비해서 보잘 것 없는지를 인식하게 될 때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바울은 어린 나귀 같이 자신을 위해 십자가의 길을 걸었던 주님을 생각하며 그 부르심 따라 걸었습니다. 누가는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바로 직전에 품었을 만한 바울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왜들 이렇게 울면서 남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겁니까? 이후 바울의 일행들은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하고 그쳤노라”(14절)
바울은 아가보의 예언 내용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가는 성마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성도들이 하는 예언을 들어 왔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서 결박 당하고 이방인의 손에 넘겨지는 것은 고난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일임을 확신한 것입니다. 예언은 하나님의 좋은 은사이지만 교회를 또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걷는 이들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더 깊은 기도하는 자리에서 애통하는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현실을 넘어 뜻을 이루는 삶도, 맡겨진 사명을 감당하는 일들도 그리스도의 사랑과 사명감으로 묵묵히 걷게 될때에 주님께서 인도해 주십니다.
이제 바울은 결국 결박 당한 채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에 가게 됩니다. 바울이 로마의 황제 앞에 서는 것은 죄수의 신분이어야만 가능했습니다. 바울이 입게 될 옷은 죄수의 옷이 아니라 바울을 보호하시는 은혜의 옷이었습니다. 우리 중에 고난을 환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 길로 인도함 받는 것에 주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의 즐거움과 사람의 말을 앞세우는 자리에 하나님의 은혜는 사라집니다. 우리는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 같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의 생명이 내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깨지기 쉬운 질그릇과 같으나 예수의 생명이 내 안에 있고 기대가 없는 어린 나귀와 같으나 예수의 생명이 내 안에 있기에 다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눈물과 쓰러짐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을 바라보게 되고, 눈물의 자리를 통하여 외로움과 씨름했던 시간들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않았습니까? 가난의 자리를 통하여 이 세상의 전부를 통해서 ‘주(主)되심’을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우리의 가정과 교회를 통하여 주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소망합니다. 어떤 길을 가야할지 판단하기 힘들다면 성령님께 어떤 길이라도 순종하겠다는 마음으로 기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인도자가 되어 주십니다. 이번주 제 마음에 은혜를 주었던 찬양을 여러분에게 소개합니다. 1절만 함께 들어보고 싶습니다.
참 고마운 친구 나의 예수님 / 나는 깨지기 쉬운 질그릇과 같으나
때론 낙심해도 포기치 않음은 / 예수의 생명이 내 안에 있기에
내 삶의 동행자 나의 예수님 / 나는 기대가 없는 어린 나귀 같으나
늘 쓰러지나 다시 일어남도 / 예수의 생명이 내 안에 있기에
나의 약함은 나의 자랑이요 / 나의 실패는 나의 간증이요
나의 아픔은 나의 영광이니 / 그 부르심 따라 내가 걸어갑니다
나 가난함은 나의 상급이요 / 나 미련함은 나의 자랑이요
나 쓰러짐이 나의 고백이니 / 그 부르심 따라 내가 걸어갑니다
그 부르심 따라 그 부르심 따라 / 그 부르심 따라 그 부르심 따라
한주도 허락해 주신 그 부르심 따라 믿음의 여정 걸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8/20/2023 | 성령강림후 제 12주
바울의 고별설교 2 Paul's Last Sermon 2
사도행전 20:24, 32-38
바울의 고별설교 가운데 내 목숨보다 귀하다고 고백했던 ‘은혜와 사랑의 복음’이 어떤 것이었을까?라는 생각이 한주 동안 제 마음에 머물렀습니다. ‘은혜와 사랑’에 대해서 많은 설교도 했었고,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바울이 죽음의 고난 속으로 들어가며 담아 내고자 했던 그 깊은 고백을 함께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24절에 보면 ‘은혜와 사랑의 복음을 전하는 이 일을 완수 할 수 있다면 내 목숨이 아깝지 않습니다.’(24절) ‘이제 나는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로운 말씀에 여러분을 온전히 맡깁니다.’(32절) 바울 인생의 주체가 자기 자신이 아니라 무언가에 이끌려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바울에게 ‘은혜와 사랑의 길’은 자신의 생명 보다 더 귀한 어떠한 힘에 의해서 인도되고 있습니다. 그 원동력이 현대교회에는 사라진 것일까요?
32절을 개역개정으로 보면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라고 번역 합니다. 바울은 은혜의 말씀께 부탁을 한다고 표현했습니다. 말씀에 인격성을 부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에 하나님의 인격이 담겨져 있다는 것은 우리가 설교를 듣거나 말씀을 묵상할 때에 말씀의 큰 가치를 자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학자 칼바르트 (K. Barth : 1886-1968)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켜 ‘선포된 말씀, 기록된 말씀, 계시된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선포된 말씀은 매주일 설교를 통해 우리에게 들려지는 말씀이고, 기록된 말씀은 우리가 묵상하는 성경을 가르키며, 계시된 말씀은 말씀이 되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예배에 나와서 말씀을 들어야 할 이유는 말씀이 우리의 영혼을 맑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시대는 뿌리를 잃어버린 시대입니다. 젊은 세대는 권위와 전통의 뿌리를 거부합니다. 수세기 동안 내려온 전통을 받아 들이기 보다는 스스로 미래를 선택합니다. 이러한 시대에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에게 권면한 말씀은 우리에게 참된 교훈이 됩니다.
바울은 말씀을 존경하는 사람으로 의인화 하듯 문학적으로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은혜의 말씀이 마음 안에 담겨 질수록 한개인의 인격은 아름답게 빚어지게 됩니다. 마치 향수를 뿌린 사람이 옆을 지나가기만 해도 그 향을 맡게 되듯이. 바울에게는 죽음의 향기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의 향기가 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마음 안에 가득 찬 것들이 나오게 됩니다. 예수로 가득 찬 바울에게서 흘러 나온 것이 바로 ‘은혜와 사랑의 복음’이었습니다. 우리가 관계에 목말라 하거나 관계를 떠나 홀로 있는 것은 거절에 대한 두려움일 수도 있고 진짜 사랑에 대한 목마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이 사랑하셨던 것처럼 누군가를 진짜 사랑한다면 그 사람은 교회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이 우리 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옵니다. 인간은 은혜가 없으면 철저하게 실패를 경험하게 됩니다. 경쟁사회속에서 뒤쳐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원래 율법적인 사람이었는데 율법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기를 원하지만 오히려 마음 안에 죄가 가득하다고 곤고하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격적으로 대하라는 것이지요. 바울이 말씀 안에서 인격적 관계 안으로 초대되어 보니 ‘은혜와 사랑의 복음’을 전하는 사명자가 된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가 뛰어난 성과를 이루고 높을 성적을 받게 해주는 기쁜 소식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안으로의 부르심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길은 속상한 일, 참기 힘든 사람을 만날때에도 그래서 마음이 어렵다가도 주께서 오래 참아 주신 일들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안에 들어오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맡길 때에 신앙이 바로 세워 질 것이고, 거룩하게 구별된 사람들이 상속 받는 유산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인간의 감정은 세상에서 경험한 것들로 오염되고 왜곡되어 있습니다. 믿음도 학습된 생각 경험에 의존되어 있기 때문에 도덕적 교만에 갇히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과 분리된 칸에서 방황하게 됩니다. 성경을 묵상해도 말씀의 거울 앞에 자신의 연약함이 보이지 않으니까 말씀을 알아도 거룩한 종교성만 유지하게 되는 형식만 남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핍박하고 조롱하는 이들에게 결국 십자가에서 찌르는 창과 못을 다시 빼서 사랑으로 그 피를 손수 닦아 주시며 자신을 찌르냐고 얼마나 힘들었니? 하시고 용서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심방을 가면 은혜와 사랑으로 정성을 다해 대접해 주시곤 합니다. 이 큰 사랑을 받아도 될까하는 마음이 들지만 사랑과 은혜를 경험하게 되면 하늘가족 안에서 하나됨을 경험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많은 말을 건네지 않아도 하늘 가족으로의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이지요. 서로를 이해하는 다른 조건들이 없어도 하나님 안에서 한 가족이 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가 사라지면, 입술의 말은 한없이 가벼워 지고, 작은 시련과 핍박에도 믿음이 요동치듯 흔들립니다. 마음이 상하게 되면 우리의 마음은 가야할 길 조차 찾지 못하고 방황하게 됩니다. 자녀를 낳고 실제적으로 키우다 보면 비로소 부모의 은혜를 느끼는 때를 경험합니다. 삶을 통해서 부모의 헌신을 실제로 경험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을 닮아 갈수록 우리는 교만하고 독선적인 자기중심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겸손의 길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 리더십들에게 사명을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25-31절에서 (1) 자신을 먼저 살피기 전에 양떼를 살피라는 것입니다. (2) 예수의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라고 합니다. (3) 교회 내에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눈물과 겸손으로 세워졌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세울때에 3년을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였습니다. 그런 바울이 이제 자신이 떠난 후에 교회 공동체를 공격하는 자들이 들어 올 텐데, 그들을 흉악한 이리떼에 비유합니다. 이리떼는 흉악하고 잔인합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은 선한 목자 되시는 예수와 대조되는데, 양떼를 늑탈하고 어그러진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리디머 교회를 개척한 팀 켈러 목사는 ‘하나님의 은혜는 남들보다 윤리적으로 더 나은 삶을 사는 이들이 아니라 제대로 살지 못하는 현실을 인정하고 구세주가 절실하게 필요함을 깨닫는 이들에게 임한다’라고 했습니다. 1989년 뉴욕의 리디머 교회를 설립한 팀켈러 목사(1950-2023)가 하나님 품으로 가기 전에 몇주 전에 녹화한 영상 메시지를 교회 리더십들에게 공유를 했는데요. 그는 3가지 메세지를 남겼습니다. 첫째는, 사명자는 칼날 위에 서라는 것입니다. 세상속에 참여하되 동화되면 안되고 구별되어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소비만 하지 말고 투자하라는 것입니다. 뉴욕에 와서 이력서도 넣고, 행복한 교회 경험도 하고 싶고, 좋은 음식점도 가고 싶겠지만 예수님께서 말씀 하신 ‘내 교회를 세우겠다’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이 일에 시간과 돈과 인생을 투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팀 켈러는 자신과 교회의 성공을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의 이름처럼 십자가에 매달려 피를 흘림으로 죄의 값을 치른 예수님을 전하며 살라는 것이지요. 마지막으로 남긴 세번째 조언은 자신의 이름을 위한 명성과 자격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역의 성공과 명성을 그리스도인들이 정체성으로 삼을 경우에 이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완전히 실패한 것처럼 느껴질 것이기 때문이라고 조언했습니다.
교회도 세상과 다르지 않다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는 성공과 실패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나누는 것입니다. 진짜 사랑을 하면 가정이 변하고, 교회가 변합니다. 세상만큼 성과를 내야하고 세상보다 더 그럴듯 하게 만들어 가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니까 교회가 세상의 방법으로 사람을 대하고 경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세상과 다릅니다. 우리의 생각으로 세워가려는 순간 하나님의 일하심이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의 참된 리더들이라면 교회를 세우는데 나의 생각과 유익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지나가는 한마디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마음으로 이야기 해야 합니다. 자신의 태도에 있어서는 엄격하게 점검하고, 다른 이에게 향하는 마음은 관대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옳다는 전제하에 타자를 바라 보는데 이러한 관점은 은혜의 인격성을 파괴하는 뿌리가 되지요.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내가 본을 보인 것처럼,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라는 것을 깨닫고 연약한 지체를 섬기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에게 하는 은혜의 말 한마디가 힘을 주고, 용기를 주고 삶을 변화시킵니다. 작은 것에서 부터 받는 하나님의 은혜를 흘려 보내는 삶이 복인 것입니다.
믿음의 선한싸움을 싸우시기 바랍니다. 복음은 주님의 거룩함을 세상속에서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푯대를 향하여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사명자에게 꺾이지 않는 마음은 예수님의 겸손을 겸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여길때 하나님이 누구인지 경험하게 됩니다. 믿음을 현실로 받아 들이는 것은 어쩌면 믿음의 경주자가 되어 부상을 당할 위험한 순간에 놓이기도 하고, 고난과 핍박으로 인해 마음의 상처가 남기도 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흔적이 사명자의 영성을 더 깊어지게 합니다.
이제 바울은 내 얼굴을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설교합니다.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예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인생이 끝나는 죽음은 언젠가 모든 사람이 홀로 통과해야 할 관문입니다. 죽음과 헤어짐의 두려움이 바울이라고 두렵지 않았겠습니까? 우리에게 죽음의 두려움을 이길 믿음이 있을까요? 죽음 앞에서 우리는 어떤 열심과 어떤 사명을 기억할 수 있을까요?
믿음은 그리스도께 운명을 맡기는 것입니다. 죽음의 문을 통과 할 때에는 사랑하는 가족도 대신 할 수 없고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오직 인간의 죄로 인해서 죽음의 자리까지 내려가신 예수님만이 죽음의 순간에도 우리와 함께 할 수 있습니다. 땅에서 하늘에 속한 사람들은 주님과 함께 하고 있다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음의 풍랑, 경제적 풍랑, 인생의 문제의 풍랑이 몰려올때에 주님이 함께 계심을 알고, 잠잠히 기다리다 보면 어느새 풍랑은 멈추게 됩니다.
바울은 마지막 설교를 마친 후에 무릎을 꿇고 모든 사람과 함께 기도합니다. 이 구절만으로도 간절함이
느껴집니다.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 다 울며 목을 안고 입을 맞춥니다. 항구에서의 뜨거운 눈물 이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내가 사랑했던 사람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도 울고 에베소 장로들도 울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의 달려갈 길을 가면서 힘들고 어려울 때에는 편하고 쉬운 길을 선택하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때가 있지요? 그러나 주님이 보이신 길은 좁은 길이고 생명의 길입니다.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함께 기도하는 그 장면이 너무 진하게 그려집니다. 바울은 가야할 길이었기에 함께 했던 장로들을 뒤로하고 밀레도 항구로 갑니다. 다시 오지 못할 그 길이지만 그의 영혼은 성령에 이끌려 기쁨으로 나아갑니다. 의지를 사로잡은 성령의 힘이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땅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을 잃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뜨거운 역사는 바울과 에베소 장로들에게만 있을까요? 아닙니다.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바울이 설교를 마친 후에 모두가 무릎을 꿇고 기도한 것처럼 우리의 교회가 사랑으로 함께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생각하시며 여러분의 삶에서 만나게 되는 복음과 은혜, 사랑과 눈물의 현장을 품어 보시기 바랍니다. 이 길은 우리가 계속 가야 할 길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항해하며 바라 본 그 바다는 주가 주신 은혜와 사랑의 강물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탄 배는 방향 없이 떠다니는 배가 아니라, 항구이신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키를 잡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돛에 바람을 불게하여 인도하시는 성령님과 함께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항해였을 것입니다. 한주도 인생의 바다속에서 주와 동행하시며 승리하는 교우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8/13/2023 | 성령강림후 제 11주
바울의 고별 설교1 Paul's Last Sermon 1
사도행전 20:17-24
유명한 배우 톰 행크스를 아시지요? 지난 5월 하버드 대학교 졸업식에 연설자로 선정되어 왔는데요. 하버드 총장 로렌스 바카우는 톰행크스가 타고난 공감능력과 깊은 이해심을 보여준 인물이기에 선정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연설을 시작하며 자신을 "하버드 졸업생, 교수진 또는 저명한 동문들과 관련이 있기 위해 일한 적도 없고, 수업에 시간을 보낸 적도 없고, 도서관에 한 번도 들어가지 않은 채로, 나는 그런 일을 한 사람으로 연기하며 잘 살고 있다”고 소개하며 웃음을 자아냅니다. 그는 새로운 사명감으로 사회속에서 새출발하는데 있어서 진실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이 시대는 진실이 점점 더 위협받고 있고 앞으로 참여하게 될 사회의 전투는 끝이 없는 싸움이라고 강조하며 졸업생들에게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삶의 모든 날들에 있기를 축복하며 연설을 마쳤습니다.
톰 행크스의 연설은 성경에서 말하는 인생의 원리입니다. 성경에서 우리는 세상이 잃어버린 지혜를 발견하게 됩니다. 현대사회는 19세기에 비해 ‘생산성’이 천배 이상 높아졌다고 합니다. 과거와는 달리 개인이 직접 휴대전화로 컨텐츠들을 송출합니다. 개인이 기자(記者)도 되고 사장(社長)이 되기도 합니다. 개인방송으로도 세상과 소통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정보의 홍수시대에 ‘앎의 대한 욕구’는 채우기가 매우 쉬워 졌지만 ‘진실한 사람들의 삶’은 갈수록 상실 되어가는 것만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성경의 가치를 ‘앎에서 삶으로’, 삶속에서 ‘주의 말씀의 가르침’을 더 깊이 알아가는 것입니다. 세상과 믿음 사이에서 무엇을 위하여 살아가는지, 어떤 목표를 향해 가야 하는지 바울의 삶에서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사명자에게는 믿음의 의지가 필요합니다.
사명(使命)의 사전적인 의미는 맡겨진 의무입니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순종하며 나아가는것이 사명입니다. 그래서 사명자는 언제든 갈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믿음은 운명을 미리 예측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가고 구원을 믿음으로 갈망하며 입술로 고백하면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참된 믿음을 가진 자에게 성령을 주시는데 성령의 열매를 통해서 우리안에 성령님을 확신할수 있게 됩니다. 오늘날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용하는데만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혼인 잔치에 모였던 많은 사람들 중에서 심부름 하는 하인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특별한 일을 보았습니다. 말씀에 순종했을 때에 물이 변해서 포도주로 된 사건을 유일하게 본 사람들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삶에는 한층 더 깊어지는 힘이 있습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화된 것은 밋밋한 인생이 말씀대로 순종할때 포도주로 변하는 향기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 안에 교만은 십자가에 부딪일때에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산산조각이 납니다. 하나님의 확증된 사랑이 부어질때에 사명자에게는 필요한 것만 남게 되는 것이지요. 이 세상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거룩의 과정을 이뤄갈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일이 왜 힘든 것일까요? 타락한 자유의지를 지녔기 때문입니다. 봄이 와야 얼음이 녹게 되듯이 진심으로 믿고 죄를 회개할때 은혜로 구원이 오는 것입니다. 예수 옆에 달린 강도는 십자가에서 그를 믿고 진실로 고백하여 죽음 직전에 십자가 사랑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의롭다는 위장된 주인으로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인간의 아무리 선한행위도 하나님의 거룩함에 비할수 없는 것입니다. 인생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인생의 주도권을 맡길 수 있게 되시길 바랍니다.
사도행전 20장은 3차 전도여행의 경로를 모두 담고 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머물 수 없게 되자 2차 전도여행에서 개척한 마게도냐 지역의 교회를 순회하기로 결정합니다.(1-3절) 누가는 구체적인 도시 이름을 사도행전에서 거론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바울이 그만큼 분주하게 예루살렘으로 가야하는 일정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를 떠나서 2차 전도 여행 중에 세웠던 마게도냐의 지역인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를 포함하는 넓은 지역의 공동체를 방문하여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굳게 설수 있도록 권면하는데 시간을 보냈습니다.
누가는 “그 지방으로 다녀가며 여러 말로 제자들에게 권하고 헬라야 이르러”라는 말씀으로 마게도냐에서의 3차 전도 여행의 사역을 짧게 요약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항구 도시인 겐그리아에서 배를 타고 예루살렘을 거쳐 안디옥으로 가려던 2차 전도여행과 비슷한 일정을 계획했지만 유대인들이 자객을 보내서 바울을 해하려고 공모하고 있었습니다. 고고학자이며 신학자인 윌리엄 램지(William M. Ramsay :1851-1939)의 주석을 보면, 당시 바울을 반대하는 유대인들이 절기를 맞아 수리아로 가는 배를 많이 이용하게 되었는데 바울이 이 배를 타게 탈 때에 바다에 던져 버리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그를 해치려는 음모는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지역에서 자신의 계획을 수정하여 다시 육로를 통해 마게도냐 지역으로 돌아서 예루살렘으로 가게 됩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수정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바울은 드로아에서 7일간의 사역을 마치고 드로아에서 앗소까지 육로를 택하게 됩니다. 디모데와 일행들은 배를 타고 가지만 바울은 홀로 25마일 정도를 걸어서 밀레도에 도착합니다. 바울은 무슨 생각을 하며 걸었을까요? (13절) 바울은 이제 3차 전도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인 밀레도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는 3년 동안 사역했던 에베소 장로들을 밀레도로 오라고 청했고 마지막 설교를 합니다. 바울의 설교가 대부분 이방인과 유대인들을 향한 설교였다면 밀레도에서의 설교는 서로 함께 주의 길을 걷는 사명자들에게 하는 설교입니다.
사명자에게는 믿음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바울의 설교에서 사명자의 간절한 겸손과 눈물의 길을 볼 수 있습니다. (19절)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 바울은 많이 울었던 것 같아요. 사명자들에게 눈물이 언제 납니까?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간절할때 눈물이 납니다. 성령께서 울게 하시니 울고, 부족한 죄인을 살려 주신 은혜가 감사해서 울지 않습니까? 눈물은 주님과 우리의 마음을 이어줍니다. 사명자는 아픔과 상처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눈물로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몇주전 예배 마지막 찬양 찬송가 272장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찬양을 부르는데 찬양의 가사에 우리의 삶이 있더라구요. 부르는 내내 눈물이 흘렀습니다.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 예수께로 나갑니다. 낭패와 실망 당한 뒤에, 교만한 맘을 내버리고, 죽음의 길을 벗어나서 예수께로 나갑니다. 슬프던 마음 위로 받고, 이생의 풍파 잔잔하며 빈궁한 삶이 부해지고 예수의 크신 사랑받아 하늘의 기쁨 맛보려고 주께로 갑니다. 슬픈자를 위로하게 하시고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주시고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는 그 구원의 기쁨이 우리의 삶에 찾아와야 합니다.
바울은 겸손으로 주님을 섬겼다고 말씀합니다. 교회는 주님의 겸손으로 세워집니다.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의 보혈만큼 뜨거운 섬김은 없습니다. 사명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함으로 섬기는 사람입니다. 평생을 쓰임 받았던 테레사 수녀는 자신을 몽당연필이라 여겼습니다. 그녀의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은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셨습니다. 아무리 불완전한 도구일지라도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면 하나님은 창조의 손으로 아름다운 삶을 만들어 가십니다.
우리는 닳고 싶지 않아합니다. 섬김에 있어서 더욱 그러합니다.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많이 쓰인다고 해서 몽당 연필이 색을 내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진한 색을 내게 됩니다. 아무리 비싸고 좋은 만년필이라 해도 사람의 손에 들려지지 않으면 가장 초라한 도구가 되어질 뿐입니다. 때론 약하고 보잘 것 없어도 하나님의 손에 들려 쓰임 받게 되면 그것이 가장 완벽한 하나님의 도구가 됩니다.
바울은 자신이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각성마다 그에게 결박과 환란이 기다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23절) 바울은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의 간계로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았습니다. 사명자의 길은 매순간 중단될 위기가 찾아옵니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의 의지를 성령에 매여 걷도록 역사하십니다. 여러분의 의지는 성령에 매여 있습니까? 도대체 성령에 매여 가고자 한 바울의 사명감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은 세상에 온 이유를 잃어버린 양들을 구하기 위해서 왔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의 제자로 살아가는 것은 예수님의 뜻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릴레이 경주는 일정 구간을 나누어 달리는 경기입니다. 먼저 뛴 사람은 배턴을 넘겨주고 같은 마음으로 다음 주자가 달려가는 길을 뜨겁게 응원합니다. 자신의 속도가 아무리 빨라도 전 주자가 전달하는 배턴을 꼭 받아서 뛰어야 합니다. 혼자 뛸수가 없는 경기이지요. 우리는 모두가 함께 뛰는 러닝 메이트입니다. 이제 가을과 겨울이 오면 여름의 뜨거움도 그 자리를 내어 줄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이치입니다. 주님의 사명은 그날에 약속의 소망으로 하나님의 영광으로 밝히 드러날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이루신 예수를 그리스도로 만나고 나니까 눈이 열려집니다. 예수가 오셔서 역사의 중심, 인생의 중심에 있음을 깨닫는 눈이 열려진 것입니다. 구원에 응답하며 살아가는 꿈이 생긴 것입니다. 세상은 내가 누구인지를 증명할때에 그 가치가 올라가지만 바울은 세상에서 주어지는 영광은 순식간에 빛을 잃는 것들이며 그의 표현을 빌리면 배설물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예수를 믿는 자들을 ‘박해하는 자’로 살던 그가 사명에 눈을 뜬 것입니다.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진 것입니다. 이제 나는 거역할 수 없는 성령의 강한 힘에 이끌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데 거기서 무슨 험한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지 나는 잘 모릅니다.
23 다만 한 가지 내가 아는 것은, 내가 가는 도시마다 투옥과 고난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성령께서 내게 알려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24 그러나 주 예수께서 내게 맡기신 이 일, 즉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복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이 일을 완수할 수만 있다면, 나는 내 목숨이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거룩한 삶에 초대되는 것 보다 아름다운 일이 또 있을까요?
사랑하는 우리 자녀들에게 그리스도의 계절이 찾아오고, 매일 함께 일하는 직장 동료들에게 복음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모든 세대가 그리스도의 꿈을 꾸는 일에 참여하는 일 처럼 아름다운 일은 없습니다. 주님이 곁에 찾아 오셨음에도 저 멀리에서 지켜 보려고 했던 마음을 내려 놓고 결단합시다. 예수께 받은 사명은 고난에 매이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 매인 바 되어 보호하시는 은혜에 이끌려 가는 일입니다. 바울이 십자가 외에 아무것도 알지 않겠다고 하는 의지 가운데 생명의 빛이 그의 영혼을 강하게 비추고 있었던 것입니다.성령께서는 바울을 성령으로 인쳐 주시고 고난을 이길 수 있는 참된 기쁨과 능력을 허락하신 것이지요.
스코틀랜드인으로 1924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자, 중국 선교사로 사역했던 에릭 리델(Eric Liddell 1902-1945)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달렸던 사람입니다. 에릭 리델(Eric Liddell)은 많은 영국인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1924년 제8회 파리 올림픽에 출전하지만, 그는 자신의 주 종목인 100미터 경기 예선전이 주일로 확정되자 과감히 경기 불참을 선언했습니다. 주일은 주님을 위한 날이라는 확고한 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그의 결정은 달리는 목적이 자신의 우승과 야망이 아닌, 분명한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에릭의 불참 소식이 영국 전역에 전해지자, 국민들은 그를 두고, ‘편협하고 옹졸한 신앙인’, ‘조국의 명예를 버린 자’, ‘광신주의자’라며 일제히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왕세자까지 나서 리델을 설득하려 했지만 그는 “주님의 법 안에서, 주일은 하나님의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신념을 지켰습니다. 갖은 비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리델은 기적적으로 400m 경기에 참가할 기회를 얻게 됐고, 금메달을 따고 세계신기록을 세웠습니다.
리델은 보이지 않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달렸던 사람이었습니다. 사명자는 ‘무엇을 위해 달리고 있는지’가 분명해야 합니다. 이 시대는 가상과 현실이 같아 보이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참된 사명과 위장된 사명이 모호하고, 참된 겸손과 위장된 겸손도 온전히 구별할 수 없는 시대입니다. 홍수가 나서 집에 엄청난 물이들이닥쳤는데 살기 위한 길을 위장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늘나라를 경험한 사람은 진실로 기뻐합니다.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은 모두가 기쁨으로 충만했습니다. 고난 속에서도 즐겁게 노래하고 찬송했습니다. 고난 속에도 하나님의 뜻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무거운 짐을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를 고난의 길로 부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눈물과 참된 겸손으로 맡겨주신 사명자로 부르실 뿐입니다. 성령은 그 길을 걷는 자를 보호해 주시고 위로해 주십니다. 생명의 영이 죽을 몸도 살리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한주도 호흡을 주시는 하나님의 생기 가운데 거하시기 바랍니다.
8/6/2023 | 성령강림후 제 10주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결코 하나님의 자리에 오를수 없습니다. The things made by human hands can never take the place of God
사도행전 19: 23-28,32-41
팀켈러 목사는 ‘내가 만든 신’이라는 그의 책에서 앤드류 카네기의 자서전 이야기를 실었습니다. 그는 33세의 나이에 세계 최고의 수익을 올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난 후에 자신을 성찰하며 “나에게 쓰는 글”을 작성했습니다. “인간에게는 우상이 있을 수 밖에 없는데, 부의 축척은 우상숭배 중에서도 최악에 속한다. 돈을 숭배하는 것보다 사람의 격을 떨어 뜨리는 우상은 없다. 그러므로 가장 고상한 성품을 길러 줄 삶을 신중히 선택하려면 나는 매사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지나치게 긴 세월을 사업 걱정에 매달려 최단기간에 돈을 더 벌 생각밖에 모른다면, 영영 회복될 가망 조차 없이 삶이 저급해 질수 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서른다섯에 사업에서 손을 뗄것이며, 앞으로 2년 동안도 오후 시간은 꼭 공부하고 체계적으로 책을 읽으며 보내고 싶다” 카네기는 젊은 나이에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된 후 이 엄청난 사실을 깨닫게 되지만 그의 자서전에 보면 깨닫고 난 후에도 여전히 사업에서 손을 떼지 못하고 우려 했던 대로 삶의 격을 떨어뜨리는 삶의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마음 안에 우상이 있음을 깨달아도 그 우상을 밀어내는 구원의 힘이 우리 안에 없습니다. 구원자 되시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구원이 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음의 죄성과 연약함을 온전히 바라보게 하시고 죄로 무뎌지는 마음을 날마다 회개하게 하십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보다 더 바르고 선하며 큰 사랑을 베푸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점잖고 고상하고 선한 사람도 마음안에 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안에서 내 마음 안에 선한 것이 없음을 마주할 때마다 하나님의 사랑을 구하고 거룩한 삶을 만나게 됩니다.
신상 앞에서 3천배를 하고, 평생을 수도사로 살며 마음 비워내도 또 생겨나는 것이 죄성입니다. 성경은 근본적으로 자신의 지식과 선행으로 구원을 얻지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특별히 모든 종교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범신론적 세계관은 매우 관용적이고 포용적으로 보여집니다. 그래서 유일신을 섬기는 기독교는 배타적인 것처럼 보여지는데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기독교가 종교 이상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오늘날 이 시대는 복음화율이 현격히 떨어지고 있어서 기독교인들이 사회속에서 차별을 받는 시대입니다. 상황은 달라도 박해받던 초대 교회 시기와 비슷한 상황일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 이유를 자신의 능력에 두지 않고, 구원을 주시는 능력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기독교 교리가 비관용적, 비포용적, 비평화적이라고 말하는 종교 다윈주의적 생각도 기독교 진리를 핍박하는 모순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어느 편에 설 것인가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에베소 지역에 살던 주술사들이 회개하고 모든 사람 앞에서 엄청난 양의 주술책들을 태워 버렸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데미 여신을 통해 기념품 사업을 하며 살아오던 데메드리오에게 위기가 닥친 것입니다. 이 지역에 오는 많은 사람들에게 아데미 신으로 만든 기념품을 파는 데메드리오는 세공업자들의 조합장이었습니다. 그는 많은 직공들에게 적지 않은 돈벌이를 제공해 준 듯 보입니다. 당연히 영향력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데메드리오가 생계에 위협을 느끼자 모든 관계자들과 종사하던 사람들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전도를 그냥 방치하게 되면 아시아 지방까지 전세계 아데미 여신을 통해 하던 사업이 큰 타격을 받게 될 것이라고 조합원들에게 불안감을 조장시킵니다. 그의 속마음은 실제로 어땠을까요? 아데미 신전이 위엄이 떨어질 것을 염려한 것도 있겠지만 자신의 돈벌이에 대한 염려가 더 컸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인류역사 이래 돈은 모든 사람들의 관심사였습니다. 소유를 통해서 인생을 확인하는 삶에 있어서 돈의 힘은 대단합니다. 우리는 이 삶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은으로 아데미 신상을 만들어 팔며 돈을 버는 일과 아데미 신을 믿는 종교성까지 더해지니 데메드리오 외에 그 일을 하던 사람들의 마음에는 분노가 차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28 이 말을 듣고, 모인 사람들은 크게 화를 내면서 큰 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에베소 사람의 위대한 여신, 아데미 만세!”…32 에베소의 원형극장 안은 아수라장이었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중구난방으로 마구 떠들어 댔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왜 그 자리에 오게 되었는지 조차도 알지 못했다.’ 라고 기록합니다.
데메드리오의 말에 그 자리에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 알지도 못한 채 모인 사람들이 원형극장에서 아데미 만세라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물질은 사람들을 사로잡는 힘이 있습니다. 이유도 모른 채 광장에 모여서 온 힘을 다해서 외치는 것입니다. 우상이 점령한 마음에는 스스로 신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대중문화를 이끌어 가는 유명인들을 보면 끊임없는 자기 과시와 소유로 자신을 증명해 내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물질의 소유로 우리의 가치를 판단하지 않습니다.
흔히 갖게 되는 돈에 대한 첫번째 오해는 내가 번 것이니 내 소유라는 생각입니다. 사람들은 가난으로 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평생을 돈과 씨름하며 살아갑니다. 인생을 가난으로 부터 구원하기 위한 노력입니다. 그 이면에는 인생의 주인이 돈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성경은 “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출 20:3-5a)
말씀 안에 3가지 동사를 보면 만들지 말고, 절하지 말고, 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역으로 해석해 보면 돈을 섬기면 돈에게 절하게 되고 돈을 만드는 일을 위해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어떻게 ‘우상을 숭배하게 되는지를 점층적으로 전달해 줍니다. 이 유혹을 끊을 수 있는 힘이 우리 안에 없기 때문에 세상은 돈으로 인해 사건과 사고가 끊이지 않습니다. 성경은 돈이 절대적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돈 사이에서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돈은 임시적으로 우리에게 허락하는 도구일 뿐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돈을 소유한 사람은 없으며 죽을 때 돈을 가지고 가는 사람도 없습니다.(욥 1:21) 이 오해를 바로 잡게 되면 돈에 대한 시각과 돈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시각이 달라집니다.
두번째 돈에 대한 오해는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타락으로 인해 나타난 생각은 돈이 큰 힘이 있다고 생각하여 하나님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는 오해입니다. 사람은 한치 앞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라고 말씀합니다. 인간은 돈으로 인한 근심과 걱정을 하면서 몸속에 작은 세포들이 안 좋은 세포로 변화는 것 조차 인식하지 못하며 살아갑니다. 무엇이든 내 마음대로 하고 싶다는 욕구가 생긴다면 그것은 자유가 아닙니다. 부모가 되어 보니 자녀에게 위험한 것은 사랑하기 때문에라도 금지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방종으로 가는 마음을 돌이켜 마음이 지향하는 방향이 어디인지를 끊임없이 바라보게 해 주십니다.
2천년 전에도 에베소 지역의 사람들은 매년 3–4월을 아데미의 달로 지정하여 각종 축제와 행사를 벌였고 은으로 만든 아데미 신상 모형을 집에 보관하면서 복을 빌었습니다. 아데미는 풍요의 여신으로 가슴에 풍요를 상징하는 24개의 유방을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 이 신상의 높이가 대략 130미터, 폭이 75미터나 되는 거대한 신전입니다. 당시 이 여신은 ‘위대한 어머니’(the Great Mother)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축복과 풍요를 주는 신이라 여겼으니, 은세공업자들은 아데미 여신의 형상을 만들어 부적이나 작은 신상으로 돈을 번 것입니다. 에베소 소동 사건은 에베소 원형 극장에 분노한 수만명의 사람들이 모여 아데미를 외친 것입니다. 사실 우리나라 70,80년대만 해도 한국교회에 나타난 현상은 예수 믿고 복 받는 것이었습니다. 복음 안에 돈이 우상이 되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으면 건강과 부를 얻고 출세하는 설교를 해야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았습니다. 믿음생활은 어느 편에 설것이가는 선택하는 것입니다. 세상과 다른 방법으로 살아가는 것이지요. 바울은 세상의 신을 모독하거나 훔친 일이 없습니다. 단지 아데미의 신성을 부인했을 뿐입니다. 37절을 보게 되면,
37 여러분들이 이리로 끌고 온 이 두 사람은, 아데미 여신의 신전에서 무엇을 훔친 것도 아니고, 또 아데미 여신을 모독한 일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도 존중하고 사랑으로 대해야 합니다. 적대감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는 것은 바른 복음이 아닙니다. 가끔 뉴스에 보면 열정주의 신자들이 불교의 불상들을 가서 파괴하고 예불을 드리는 절에서 찬송을 부르며 방해는 하는 일을 하나님을 섬기는 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타종교의 불상보다 더 큰 맘몬이라는 우상을 섬기는 세상의 방법과 다르게 사는 것입니다. 그렇치 않으면 선교하려는 것이 오히려 복음의 문을 막아 버리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복음을 아픈 마음으로 전하기 보다 우리 삶에 허락하신 GOOD NEWS 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져야 할 행복한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는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이 있고, 하나님을 만나면 믿음으로 순종하는 은혜의 여정을 만나게 되는것입니다
복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들을 만들어 냅니다.
세상이 감당치 못할 사람은 이슬람 열성주의자들처럼 세상과 충돌하고 세상위에서 군림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리차드 니버의 그리스도와 문화’Christ and Culture’을 보면 복음과 문화의 관계를 자세히 설명해 줍니다. 그 중에서도 그리스도를 통한 세상을 변화시키는 모델이 오늘날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문화를 변혁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성육신하신 예수님이 인간의 문화 속으로 들어오셔서 함께하고 계심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지역사회에 이루기 위해서 세상이 악하니까 그들의 문화와 충돌해서 대립하거나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를 변혁해 나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선교에 있어서 인간이 무슨 일을 하는가 보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용하고 계시는 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없이도 사역하실 수 있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기쁨을 주시며 그분의 일을 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이 일에 참여하고 있는 것 뿐입니다. 바울은 이 세대를 향해서 하나님의 선하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는 문화를 변화시키라는 사명을 강조합니다.(롬 12:1,2) 아무리 위대한 과학 기술도 절대적 가치의 자리에 오를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정해 놓은 원리와 법칙을 발견해 낼 뿐입니다.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져버리고 어떤 세상의 우상도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할수 없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는 하나님을 아는 인재들이 세워져야 합니다. 좋은 기독교 사상가의 책이 출판 되면 그 책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영향을 받게 됩니다. 이 뿐입니까? 정치, 문화, 사회, 경제, 의료 과학등 수많은 분야에 기독교 인재들을 길러내게 되면 세상을 변화시켜 나가게 될 것입니다. 자기 분야에서 영향력을 지닌 사람들이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로 키워져야 합니다.
기독교 세계관은 세상을 성경적 관점으로 보는 것입니다. 개인적 신앙의 바탕 위에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현대 문화 양상은 끊임없이 변화되고 있고 흘러가고 있어서 끝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대중들은 시대적 흐름에 따라 계속적으로 문화를 만들어 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날의 문화가 지니는 것들이 어떤 의미인지 구별해 낼 줄 알아야 합니다. 앤드류 월즈(Andrew Finlay Walls:1928~ 2021)라는 세계적인 선교 역사학자는 ‘어느 문화에도 속하지 않지만 철저하게 민족들에게 녹아 들어가시는 노예의 하나님이시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를, 그리스인들의 하나님 테오스, 독일인들의 하나님 갓트, 중국 사람들의 하나님 썅티, 일본인들의 하나님 가미, 이탈리아인들의 하나님 디오, 프랑스인들의 하나님 쥬(Dieu)라고 부르는 신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예수가 그리스도가 되심을 모든 민족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만들어 낸 신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오신 하나님을 전하고 그분이 우리와 함께하심으로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에베소 사람들은 두 시간 동안이나 그들의 풍요의 신 아데미를 불러대며 외쳤습니다. 자신들의 힘을 보여주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하늘의 보화를 버려두고 세상에 잃어버린 흩어진 양들을 찾으러 예수를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구원의 길을 가난한 사람에게도 부유한 사람에게도 열어 주셨습니다. 하늘의 평안은 참 빛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는 한 채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요 1:9)
37절로 4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데메드리오에 의해서 선동 당한 다음에 엄청난 힘을 보이는 듯 싶지만 아데미 신전에 모인 수만명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데메드리오의 고발은 무고가 되었으며, 바울은 직접 논쟁에 나서지 않은 채 모든 사람들은 해산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서기관을 사용하셔서 바울을 보호하십니다. 에베소에서 일어났던 소동이 잠잠해진것은 로마의 법과 질서를 지켰기 때문입니다. 교회와 성도들도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 안에서 바른 길을 걸어야합니다. 군중 심리에 끌려 마음과 생각을 빼앗기면 안됩니다. 진리의 말씀이 우리의 방향이 되어야합니다. 이러한 소동 앞에서도 분별하는 지혜와 믿음의 성숙이 논란과 혼란을 이겨낼수 있어야 합니다. 진리의 법을 따라서 복음을 전하던 바울은 로마법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도리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된 이들의 의무입니다. 빌라도 법정에서 바라바 대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함성도 데메드리오의 말에 분노하여 외치던 군중들의 외침도 오늘날 시대속에서 가려진 진리와 사랑안에서 몸부림 치는 우리들의 모습임을 보아야 합니다. 바울은 에베소를 떠나서 하나님의 길을 걷습니다.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결코 하나님의 자리에 오를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눈물과 사랑이 세상속에 속하여 갈길을 잃은 우리의 마음에 능력이 되어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사랑도 섬김도 영혼을 향한 마음도 철저히 내안에 있지 않습니다. 모든 능력은 주님께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상은 보이는 거대한 신전만이 아닙니다. 매일 머리속에 습관적으로 떠올리는 생각들, 나의 마음에 채워져있는것이 무엇입니까? 말씀을 알아도 하나님 말씀이 마음안에 머물지 않는다면 그 자리는 매일 다른 우상들로 채워질 것이고 그것을 위해 살아가게 되는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따라 매일 매일 걸으라고 하십니다. 그 매일의 은혜가 우리의 한주간의 삶에도 주님의 능력을 됨을 보게 하는 귀한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