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1/2016 | 성령강림절 후 열두번째 주일

사울의 회심 The Conversion Of Saul

사도행전 9:4-16

지금까지 우리는 성령강림 후에 제자들의 삶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사도행전을 보면서 추적(追跡)해 보았습니다. 이런 일, 저런 일, 주목할만한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여러분에게 소개해 드리는 사울이라는 사람의 회심이야말로 그 많은 일들 중의 백미(白眉)가 아닌가 합니다.

우리 말의 ‘백미’라는 말을 아시지요? 이 말의 문자적인 의미는 ‘흰 눈썹’이라는 뜻인데, 이 말의 유래를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삼국지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적벽대전 후 형주, 양양, 남군 등 많은 땅을 얻은 유비(劉備)가 신하들을 모아 놓고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 대책을 물었다고 했답니다.  이때 유비를 두 번이나 구해 준 이적(伊籍)이라는 사람이 "새로 얻은 땅들을 오래 지키려면, 먼저 어진 선비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 라고 자기 생각을 말했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들은 유비는 이적에게 "그러면, 그 어진 선비가 누구요?" 라고 묻자, 이적이 "형양 땅에 뛰어난 다섯 형제가 있는데, 그 중에 가장 어진 사람은 양 눈썹 사이에 흰 털이 난 마량(馬良)이라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속히 그를 청하여 오심이 옳은 줄 압니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유비는 그 말을 듣고 즉시 양 눈썹 사이에 흰 털이 난 마량(馬良)을 청하여 오게 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백미(白眉)’라는 나왔다고 합니다.

저는 사울의 회심 사건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드라마틱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재미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고, 우리의 예상을 뒤엎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지루하지 않고, 어떤 일이 벌어질지 흥미진진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뜻을 이루는 일에 사람을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사사(士師)나 예언자들이 모두 그런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사람들을 보면 모두 평범하지 않습니다. 굳이 안 하겠다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억지로 그 일을 시킵니다. 모세 같은 사람은 자기는 그 일에 적합하지 않다고 몇 번이나 고사를 했지만,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게 출애굽이라는 큰 일을 맡겼습니다. 그 일에 전혀 적합하지 않을 것 같은 소시민적인 사람을 사사로 임명합니다. 기드온이 그렇습니다. 남쪽 왕국에서 농사짓고, 양을 치던 사람을 북왕국으로 가서 예언활동을 하라고 합니다. 정의의 예언자라는 별명이 붙은 아모스가 그렇습니다. 

사울이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하나님의 일에 적합한 사람이었습니까? 전혀 아닙니다. 잘 찾아 보면 하나님의 일에 어울릴만한 사람들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전혀 예상 밖으로 사울이라는 사람을 지명하십니다. 보세요. 사울은 철저한 율법주의자로, 바리새파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율법의 한 조항도 소홀하게 여기지 않고 철저하게 지키겠다는 생각으로 출발했지만,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다 보니까 겉과 속이 다른 위선에 빠졌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들은 율법을 철저하게 지킨다는 교만에 빠졌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정죄했습니다. 사울이 그렇게 고백합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에 너무나 열심이었으므로..... 율법을 지키고 따르는 데 있어서는 그 어느 누구도 나에게서 헛점을 찾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빌립보서 3:6)

이뿐만이 아닙니다. 사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습니다. 스데반이 순교할 때 사울은 그 현장에 있었습니다. 돌로 스데반을 치는 사람들의 옷을 지키는 사람으로 그 현장에 있었습니다. 사울은 그 현장을 목격하면서 스데반이 그렇게 죽는 것은 마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누가는 사울의 과거의 행적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사울은 교회를 없애 버리려고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남자든 여자든 닥치는 대로 끌어 내어 감옥에 넣었습니다. 사울은 예수의 제자들을 모두 죽이겠다는 생각으로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마스커스의 여러 회당에 보내는 편지를 써 달라고 했습니다. 남자든 여자든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이 있으면, 닥치는 대로 붙잡아서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습니다.” (사도행전 8:3-9:2)

개역성경에는 사울이 교회를 잔멸(殘滅)하려고 했다고 나와 있습니다 (사도행전 8:3) ‘잔멸’이라는 말은 ‘쇠잔하여 기운이 없어짐’이라는 뜻입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는 “Saul was going everywhere to destroy the church”라고 나와 있습니다. 희랍어 원문에 나오는 ‘엘뤼마이네토’라는 말은 멧돼지가 농작물 밭에 들어가서 온통 휘저어서 밭을 못쓰게 만들어 놓는다는 뜻으로 사용하는 말입니다. 사울이 멧돼지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기독교의 뿌리를 뽑아버리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다른 착하고 좋은 사람도 많은데, 하필이면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을 사용하신다는 것이 이해가 되십니까?

사울의 회심은 다마스커스 (Damascus)로 가는 중에 일어났습니다. 다마스커스는 이스라엘 북쪽 시리아 영토에 있습니다. 다마스커스에 예수 믿는 유대인들이 많이 숨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끌고 오기 위하여 대제사장의 편지를 손에 들고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혼자가 아니라 같이 여러 사람을 데리고 가고 있었습니다. 다마스커스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하늘로부터 밝은 빛이 사울을 비췄습니다. 그 빛이 하도 강렬하여 사울은 땅에 엎드렸습니다. 그 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는 소리가 뚜렷이 들렸습니다. 사울은 “그렇게 말씀하시는 주님은 누구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거라. 네가 해야 할 일을 일러 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라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신기한 것은, 사울과 함께 길을 가던 사람들은 무슨 소리가 나는 것 같긴 한데, 아무 것도 보이지 않으므로 깜짝 놀라 말도 못하고 가만히 서 있었다는 것입니다.

한참 만에 땅에서 일어난 사울은 눈을 떴으나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울과 함께 있던 사람들이 그의 손을 잡고 다마스커스로 데려 갔습니다. 사울은 삼 일 동안, 앞을 보지 못했으며,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에 기록된 사울의 회심 장면입니다. 저에게도 이 말씀은 모두 설명되지 않는 말씀으로 남아 있습니다.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영적인 체험에 대한 말씀인데, 어떻게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저에게 궁금한 것 한가지는, 바울이 어디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리고 복음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배웠을까 하는 것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없습니다. 신약성경에 바울이 교회나 개인에게 쓴 편지가 13권이나 들어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편지가 아니라, 교회가 그 편지 속에 든 내용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알고 나면 더욱 궁금증이 커집니다. 초대교회에서도 이 문제가 이슈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제자도 아니고, 제자들과 교제를 나누었던 것도 아닌데, 교회를 핍박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넘겼던 사람이 어디서 예수 그리스도에 지식을 얻었을까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사울의 말을 직접 한번 들어 보시겠습니까? “형제들이여, 내가 여러분에게 전한 복음은 사람들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바랍니다. 그것은 내가 사람에게서 얻은 것도 아니고, 사람에게서 배운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내가 어떻게 살아 왔는가를 들었을 것입니다. 나는 유대교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몹시 박해했을 뿐 아니라, 아예 없애 버리려고 까지 계획했습니다. 나는 나와 나이가 비슷한 다른 유대인들보다 더 열심히 유대교를 믿었습니다. 또한 그 누구보다도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는 데 열심이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께서는 나를 따로 세우셔서 은혜로 나를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복음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내게 보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을 때에 나는 어떤 혈육을 통해서도 가르침이나 도움을 받지 않았습니다.” (갈라디아서 1:11-16) 그의 말 중에 “그리스도께서 내게 보여 주셨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내게 보이셨다”는 말은 다마스커스로 가는 중에 강렬한 빛 속에서 만났던 예수님을 만난 그의 경험을 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사울이라는 사람을 이렇게 회심을 시키셨을까?” “사울이라는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다마스커스에 살고 있던 진실한 주님의 제자 아나니아 (Ananias)라는 사람을 통하여 이렇게 알려지고 있습니다. 아나니아도 처음에는 사울이라는 사람에 대하여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말씀이 오늘 읽은 13-14절에 나와 있습니다. “주님, 제가 많은 사람들에게서 그 사람에 관한 소문을 들었는데, 그가 예루살렘에 있는 주님의 성도들에게 많은 해를 입혔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대제사장들에게서 주님의 이름을 믿는 모든 사람들을 잡아갈 수 있는 권한을 받아 가지고 이 곳에 왔다고 합니다.” 아나니아의 말에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거라. 그는 이방 사람들과 여러 왕들과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나의 이름을 전하도록 선택된 나의 도구이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해 얼마나 많은 고난을 당해야 할지를 내가 그에게 보여 주겠다.” (15-16절)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Saul is my chosen instrument to take my message to the Gentiles and to kings, as well as to the people of Israel. And I will show him how much he must suffer for my name's sake." 이 말씀에서 ‘instrument’라는 말이 눈에 들어옵니다. 이 말은 도구(道具)라는 뜻으로 번역할 수 있지만, 동시에 ‘악기’라는 뜻도 있습니다. ‘도구’라는 것이 무슨 일을 할 때 필요한 연장을 말 하잖아요? 도구는 스스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자의 손에 들려서 일을 합니다. ‘악기’도 그렇습니다. ‘악기’ 스스로 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연주자의 손에 들려야 합니다. 이방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사울이라는 사람을 손에 들고 쓰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울이 자기 의지를 내려 놓고, 완전히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그럴 사람으로 사울이라는 사람을 지명하신 것입니다.

이것으로 충분합니까? 계속해서 우리에게 질문이 생깁니다. 다른 사람도 많은데, 왜 하필 교회를 핍박했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체포해서 감옥에 보냈던 사울이라는 사람입니까? 이 문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主權)에 달린 문제입니다. 하지만, 좀 설명을 해 본다면, 이 문제를 우리의 입장에서 보지 말고, 사울의 입장에서 봐 보십시오. 사울은 자기의 과거를 누구보다도 잘 압니다. 자기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그 자신이 잘 압니다. 그는 이 모든 것이 ‘undeserved God’s favor’라는 사실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겸손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일에 부름 받은 것을 감사했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자신의 사명을 귀하게 여겼습니다. 이것이 그가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하지 않습니다 (I do not nullify the grace of God., 갈라디아서 2:21, NASB)”라고 고백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이제 우리 이야기를 좀 해 볼까요? 우선 여러분에게 묻고 싶은 것은, 여러분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고 싶으십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고 싶습니까? 이 질문에 정직하게 대답해 보십시오. 사울의 회심 이야기는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려고 했던 사람을 하나님의 원하시는 삶을 살게 하신 이야기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삶은 필연적으로 이기적인 삶을 살게 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삶은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싸우고, 경쟁하고, 갈등을 일으키는 삶을 살게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은 나의 것을 내려 놓는 희생의 삶을 살게 합니다. 다른 사람과 화평한 삶을 살게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하고, 구원 하는 삶을 살게 합니다.

우리는 사울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습니다. 사울 덕분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더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사울 덕분에 우리도 하나님께 필요한 도구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가 그런 삶을 살았기에 삶에 대한 더 넓은 지평 (horizon)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하, 내가 추구하고, 내가 아는 삶이 전부가 아니구나! 이렇게 사는 삶도 있구나! 이렇게 나만 아는 삶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구원에 참여하는 삶도 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아는 것으로 끝나지 말고, 우리도 도구적인 삶을 선택하고 그렇게 살기를 결단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먼저, 지금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진지하게 성찰하는 일부터 시작하십시오.

 


7/24/2016 | 성령강림절 후 열한번째 주일

스데반: 최초의 순교자 Stephen: The First Martyr

사도행전 7:54-60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했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고, (사도행전 16:7 에는 ‘예수님의 영’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 (the mind of Jesus)’ (고린도전서 2:16) 혹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는 ‘하나님의 영’이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고 약속하셨고, 마침내 ‘하나님의 영’이 제자들에게 내렸습니다. 자기들에게 임한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된 제자들은 밖에 나가서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할 때부터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적들이 나타났습니다. 복음을 듣는 사람들에게 그 복음이 자기들이 사용하는 언어 (native language)로 들리는 이상한 일도 있었습니다. 사도들의 설교의 중심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었습니다. 이 설교를 듣고 3,000명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자기들의 소유를 팔아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날마다 함께 모여 같이 식사를 하고,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사도들에게 말씀을 배웠습니다.

이 사람들은 자기들끼리만 모이고,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과는 전혀 소통하지 않는,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주는 이상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 사람들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들었습니다 (사도행전 2:47). 처음 예수를 믿었던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만든 공동체는 이런 아름다운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나면서부터 한번도 걷지 못했던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걷는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이 사건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 때,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 사건이 터집니다. 이 부부는 성령을 속인 죄를 범했고, 이 부부는 같은 날 죽었습니다. 이 부부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존경과 두려운 마음을 심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모임 가운데 함께 하고 계신다는 경각심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믿는 사람들의 모임 (공동체)는 날이 갈수록 수가 불어났습니다. 심지어는 유대인 제사장들 중에도 이 모임에 참석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6:7). 이 사람들은 단순한 ‘무리 (multitude)가 아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주 (the Lord)’로 고백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상황이 어떻게 변하든지 예수를 믿을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세상의 ‘빛과 소금 (마태복음 6:13-14)’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세상을 책임질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공동체 안에 불만이 생겼습니다. 음식을 나누어 주는 일에 소외되는 사람들이 생긴 것입니다. 사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과 기도하는 일에 집중해야 하기 위하여 ‘성령이 충만한 사람’ 일곱 사람을 선발하여, 구제 사업을 전담하게 합니다. 생각해 보면, 공동체 안에 계속해서 사람들이 불어난 것도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이었고, 공동체 안에 불만이 생겨서 ‘성령이 충만한 사람’을 선발한 것도 하나님께서 뜻하신 일이었습니다.

누가는 공동체가 선발한 일곱 사람 중에서도 스데반이라는 사람에게 주목합니다. 스데반은 은혜와 능력이 충만하여 기적과 표적을 많이 행했다고 합니다 (사도행전 6:8).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Stephen, a man full of God's grace and power, performed amazing miracles and signs among the people”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누가가 기록한 스데반은 ‘a man full of God’s grace and power’입니다. 은혜는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호의 (favor)’입니다. 왜 그런지 모릅니다. 설명이 안 됩니다. 왜 이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그런 호의를 베풀어 주시는지,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면 벌써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닙니다. 은혜는 설명할 수 없고, 감당할 수 없는 ‘undeserved God’s favor’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한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 말씀이 에베소서 1:12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첫 소망을 가진 우리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찬양을 받기 원하십니다 (God's purpose was that we Jews who were the first to trust in Christ would bring praise and glory to God).” 사람들이 볼 때,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지?” “아니, 이 사람 내가 잘 아는 사람인데? 학교 때는 공부도 나보다 못하고 그랬던 사람인데? 이 사람이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지?” 이렇게 이유를 찾고 찾다가 마지막에는 “이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야! 그렇지 않고 달리 설명할 수 없어!”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우리를 불러 크리스천이 되게 하신 하나님의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D. L. Moody (1837-1899)는 이곳 매사추세츠 Northfiled에서 태어났습니다. 여기서 났지만, 막상 무디는 영국으로 건너가서 부흥 운동을 했고, 영국에서 성공을 거둔 무디는 귀국해서는 시카고에서 부흥운동을 주도했습니다. 시카고에 가면 무디교회 (Moody Church)가 있습니다. 지금도 그 규모가 어마어마합니다. 시카고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목사들을 위한 모임을 준비했습니다. 당연히 누가 설교를 할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무디가 설교하는 것이 좋겠다고들 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의 한 사람이 반대했습니다. “왜 우리는 꼭 무디에게 설교를 시켜야 합니까? 그의 설교를 들어 보세요. 그가 쓰는 단어는 저속 하기 짝이 없습니다. 문장도 틀리기 일쑤입니다. 그는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설교자로 초청해야 합니까?” 그러자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답니다. “우리도 압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을 쓰시는데 어떻게 합니까?” 제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스데반이 그랬고, 무디가 ‘a man full of God’s grace’였습니다. 하나님은 이 사람들을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 교훈을 주십니다. 크리스천은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누가는 계속해서 스데반에 대하여 이렇게 씁니다. “스데반이 말하는 지혜나 성령을 당해 낼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사도행전 6:10) “스데반의 얼굴은 마치 천사의 얼굴과 같았습니다.” (사도행전 6:15)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At this point everyone in the high council stared at Stephen, because his face became as bright as an angel's.” 여기서 ‘at this point’라는 말은 스데반을 고소하는 사람들이 거짓 증인들을 세워서 말도 안 되는 말로 스데반을 고소했을 때를 말합니다. 그 때 공회원들이 스데반의 얼굴을 쳐다봤더니, 그 얼굴이 천사처럼 빛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이 스데반에게 묻습니다. “너에 대한 이 모든 말이 사실이냐?” (사도행전 7:1) 그 때 스데반이 자기를 이렇게 변호합니다. 그 변호하는 말이 사도행전 7장 전체에 걸쳐 나와 있습니다. 스데반은 이 말이 사실이냐, 아니냐 하고 묻는 대제사장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아브라함부터 시작해서 이스라엘 역사 전체를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 민족의 역사 가운데 어떻게 나타났는지, 왜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지 못하고, 성령을 거스르고, 선지자들을 박해하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는지, 준엄하게 책망합니다 (사도행전 7:52-53).

스데반의 변호를 듣고 마음이 찔린 사람들은 스데반을 향하여 이를 갈았습니다. 사람들은 귀를 막고 큰소리를 지르며, 모두가 스데반에게 달려들었습니다. 분노한 사람들은 스데반을 성 밖으로 끌고 나가서 그에게 돌을 던졌습니다. 스데반은 성난 사람들의 손에 돌을 맞아 죽었습니다. 크리스천 중에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으면서 세 마디를 남겼습니다. “보십시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오른편에 ‘인자’가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56절) “주 예수님, 내 영혼을 받아 주십시오.” (59절) “주님, 이 죄를 이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60절) 여러분, 그 때 스데반의 나이가 얼마나 되었을까요? 한 30대 중반쯤이나 40대 초반 정도 되지 않았을까요? 한참 일할 때에 그는 죽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아쉽습니다. 더 살아서 많은 일을 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생명을 내시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아무 것도 아쉬울 것이 없습니다. 스데반은 일찍 죽었지만, 그의 사명을 잘 감당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실 때 “다 이루었다 (요한복음 19:3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보내신 목적을 충실하게 감당했습니다. 스데반도 그렇습니다. 일찍 죽어서 아쉬운 마음이 들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스데반은 자기의 사명을 100% 감당한 것입니다.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 스데반이 했던 세 마디 말을 들으면서 여러분 마음에 무슨 생각이 드시나요? 그의 말 속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까? 어쩌면 그렇게 그의 삶에서, 그의 죽음에서조차 예수님의 모습이 생생하게 보일 수 있습니까? 저는 이것이 진정한 크리스천의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크리스천이라면, 사람들이 그를 통해서 예수님을 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2:16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 (a Christ-like fragrance)’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우리에게서 예수님 같은 향기를 맡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똑 같은 의미로, 바울은 고린도후서 3:3에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편지 (a letter from Christ)’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서 마치 예수님께서 보내신 편지를 읽는 것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하트마 간디 (Mahatma Gandhi, 1869-1948)의 말이 생각납니다. 간디는 영국에서 유학생활을 했고,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 운동은 예수님의 산상설교에서 영감을 얻은 것입니다. 힌두교 교인이었던 간디는 한 때 기독교에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는 힌두교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그 때 간디가 했던 말이 있습니다. “I like your Christ, I do not like your Christians. Your Christians are so unlike your Christ (나는 당신들의 그리스도를 좋아하지만, 당신들 크리스천들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당신들 크리스천들은 당신들이 믿은 그리스도와 너무나 다릅니다).” 또 이런 말도 했습니다. “If all Christians acted like Christ, the whole world would be Christian (만약 크리스천들이 그리스도와 같이 행동했다면, 전 세계가 크리스천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와 교류했던 스탠리 존스 (Stanley Johnes, 1884-1972)라는 영국의 감리교 선교사가 있습니다. 스탠리가 간디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기독교가 일반 대중에게 다가가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그랬더니 간디가 “당신들이 예수님 같은 삶을 살면 됩니다” 이렇게 간단하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 말을 흘려 듣지 마십시오. 사람들이 우리의 말과 행동 속에서 예수님을 발견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우리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보내신 편지를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살아야 합니다. 여기에 교회의 미래가 달려 있습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그들이 믿는 예수님처럼 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을 하나의 교양으로만 알았고, 머리로만 받아들였지 가슴으로 받아 들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처럼 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정신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말과 행동이 예수님과 달랐습니다. 그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오늘 우리는 똑똑하게 보고 있습니다.

오래 전에 본 ‘사막의 라이온 (Lion of The Dessert, 1981)’의 한 장면이 생각납니다. 안소니 퀸(Anthony Quinn)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인데, 리비아를 침공한 이탈리아와 대항해 싸우는 베두인들의 이야기입니다. 신출귀몰하게 이탈리아 군을 괴멸 시킨 주인공 오마르 무크타르(Omar Mukhtar)는 결국 잡혀서 교수형을 당합니다. 죽기 전에 이렇게 말합니다. "그 누구도 우리를 지배할 수 없소. 절대 항복하지 않을 것이오. 승리가 아니면 죽음이요. 다음 세대, 또 그 다음 세대가 투쟁할 것이요." 그의 고개가 푹 떨어지면서 쓰고 있던 안경이 툭하고 떨어집니다. 그걸로 영화는 끝입니다. 그런데 그 광경을 끝까지 지켜 보고 있던 ‘알리’라는 한 꼬마가 땅에 떨어진 오마르의 안경을 손에 집어 듭니다. 그 장면을 보는 사람들의 온 몸에 전율(戰慄)이 일어납니다.

이 영화 줄거리와 똑 같진 않습니다만,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는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 본 사울이라는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기독교의 역사는 이 사울이라는 청년에 의하며 대 반전(反轉)이 일어납니다. 스데반이 죽고, 교회에 대한 핍박이 시작됩니다. 크리스천들은 살기 위하여 뿔뿔이 흩어집니다. 이것으로 교회는 그 생명이 끊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꺼질 것 같았던 교회의 역사는 사울이라는 청년에 의하여 다시 이어집니다. 여러분, 이 장면이 드라마의 한 장면이라고 한다면, 스데반이 죽은 이 장면에 사울이라는 한 청년을 등장 시키는 데는 감독의 복선이 깔려 있습니다. 이 청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다만 돌로 스데반을 치는 사람들이 옷을 벗어 이 청년 앞에 놓아둡니다. 누가 보기에도 이 청년은 돌로 스데반을 치는 성난 사람들과 한 패로 보입니다. 누구도 그를 주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의 역사는 이 청년에 의하여 계속 이어집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이렇게 질문합니다. “당신은 크리스천으로서 올바로 살고 있는가?” 스데반은 크리스천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그의 온 몸을 바쳐 우리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여러분 중에 이 메시지를 듣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아직 우리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교회의 미래에 아직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중에 그런 사람들이 나오지 않는다면, 더 이상 소망이 없습니다. 스데반의 질문을 똑 바로 듣고 대답하십시오. “당신은 크리스천으로서 올바로 살고 있는가?”


7/17/2016 | 성령강림절 후 열번째 주일

나의 영적 수준은? What Is My Spiritual Level?

사도행전 13:14-23


7/10/2016 | 성령강림절 후 아홉번째 주일

순례의 자락에서 At the Foot of the Pilgrimage

욥기 42:1-6


7/3/2016 | 성령강림절 후 여덟번째 주일

확장되는 교회 The Expanding Church

사도행전 6:1-7

오늘 성경 말씀은 “날이 갈수록 제자들의 수는 늘어만 갔습니다 (1절)” 이런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3,000명에서 5,000명으로, 5,000명으로 신자의 수가 늘었습니다.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But many of the people who heard their message believed it, so the number of believers now totaled about 5,000 men, not counting women and children①. / ①Greek 5,000 adult males (사도행전 4:4)” “베드로와 요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그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신자의 수는 이제 5,000명이 되었습니다. 아이들이나 여자들은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it’라는 것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제자들은 어디서든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설교했고, 사람들은 그것을 믿었습니다. 이제 신자의 수는 5,000명이 아니라 그 이상이 되었습니다. 여자들과 아이들을 모두 합하면 20,000명 정도 되었겠죠? 이젠 신자의 수가 20,000명 이상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단순히 “많은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아무 의미 없는 ‘무리 (multitude)’가 아닙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주되심 (Jesus’ Lordship)’을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주되심’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내 삶의 주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삶의 주인인 것을 인정하는 것은 예수님을 내 삶의 ‘example (본)’로 삼고, 예수님처럼 사는 것입니다. 내 주변 환경이 어떻게 변하든지, 내가 예수님을 믿어서 어떤 불이익이 오든지 상관 없이,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충실하게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이 세상의 소금이다.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다시 짠맛을 가질 수 있겠느냐?....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있는 도시는 숨겨질 수 없다 (마태복음 5:13-16)”고 말씀하셨는데, 이 사람들이야말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세상의 소금으로 살 사람들이었고, 이 사람들이야말로 세상의 빛으로 살 사람들이었습니다. 혹시 한국 영화 ‘곡성(哭聲, wailing)’을 보셨나요? 전라남도 곡성(谷城)에서 일어난 끔찍한 살인 사건을 다룬 공포영화입니다. 관객수가 600만명을 돌파했다고 합니다. 제가 본 이 영화는 단순한 공포영화가 아니었습니다.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쓴 사람이나, 이 영화를 만든 제작자들이 무슨 생각을 하면서 이 영화를 만들었는지 알 수 없지만, 제가 본 이 영화는 기독교에 대한 강력한 메시지를 던져주는 영화였습니다. 이 영화에 일본 무당 (쿠니무라 준)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전국을 떠돌아 다니면서 큰 굿을 해 주고 돈을 버는 전국구 무당 일광 (황정민)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영계(靈界)를 움직이는 대단한 힘을 가진 무당들입니다. 그리고, 주인공 종구 (곽도원)가 등장합니다. 시골 경찰서의 겁 많고 무능한 경찰입니다. 하지만, 자기 딸이 이상한 증세를 보이고 미쳐가는 것을 보면서 이 사건에 끼어들기 시작합니다.

종구는 자기 딸이 미쳐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그 마을의 신부를 찾아갑니다. 그러나, 이 신부는 영적인 세계에서 일어난 일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기 딸을 살려 보겠다고 절박한 심정으로 찾아간 사람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설교자인 제 눈에 비친 이 무능한 신부의 모습이야말로 오늘날 우리교회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미치고, 죽어가고, 끔찍한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처절한 삶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말을 지껄이고 있는 이 신부의 모습에 화가 치밉니다. 궂을 해서 영계를 주무르고, 죽은 사람을 좀비로 만들어서 부리는 무당들 앞에서, 그리고 그 마을 사람들을 지키려고 하는 로컬 귀신 무명 (천우희) 앞에서, 형식적이고 관료적인 이 신부의 한심한 모습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울화가 치밀게 합니다.

지금 교회의 모습이 이렇다는 말입니다. 지금의 한국교회의 모습이, 한국교회뿐만 아니라 2,000년의 역사를 가진 교회의 모습이 이렇게 한심하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교회에 대한 반성의 눈을 가지고 오늘 사도행전 말씀을 읽어 보십시오. 신자의 수가 5,000명이 넘었습니다. 아니, 성인 신자 수만 센다면 10,000명이 넘었을 지도 모릅니다. 오늘날 전체 기독교 신자의 수와 비교한다면, 비교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는 한 교회 신자의 수만 100,000명이 넘는 교회가 있지 않습니까?

“날이 갈수록 제자들의 수는 늘어만 갔습니다.” (1절)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이 사람들은 단순한 ‘무리’가 아니었습니다. 부활의 진리를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자신들이 왜 예수를 믿는지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세상을 책임질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오늘 말씀을 읽어보면 이 사람들 사이에 불평이 생겼습니다. 교회가 하는 구제 사업에서 왜 우리 측 사람들이 소외를 당하느냐 하는 불평이 생겼습니다. 유대인이라고 해서 모두 같은 유대인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오늘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이 있고,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은 아마도 오순절을 지키려고 예루살렘에 왔다가, 어찌어찌 하다가 예수를 믿게 되고, 신자들의 공동체에 머물게 된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이들이 자기들이 살던 곳으로 돌아가지 않고 예루살렘에 그대로 머물렀다고 가정한다면, 여기에 딸린 문제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을 텐데, 우리가 그런 걱정까지 하기에는 시간이 없습니다. 지금 중요한 문제는 교회가 하는 구제사업에서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과부들이 차별을 받고 있다는 불평이 생긴 것입니다.

신자들의 수는 늘어만 가고, 내부적으로 불평이 생겼습니다. 열 두 사도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지혜를 모았습니다. 그 말씀이 본문 2-4절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음식을 나누어 주는 일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을 소홀히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니, 형제 여러분, 여러분들 중에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다고 인정 받은 사람 일곱 명을 뽑으십시오. 그 사람들에게 이 일을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일과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온 힘을 기울이겠습니다.”

여기서 잠깐 더 앞으로 나가기 전에 몇 가지 문제를 정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첫째는, 계속해서 신자의 수가 늘어갔다는 말씀입니다. 불과 15-20여년 전만해도 ‘부흥’이라는 단어가 한국교회의 화두(話頭)였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는 한국교회가 계속해서 성장할 것이라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어떤 목사들은 공개적으로 몇 년 안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큰 부흥’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들이 말했던 ‘부흥’과는 정 반대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의 ‘부흥’을 말하는 사람들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 때 ‘부흥’을 말했던 사람들이 모두 똑 같은 생각으로 ‘부흥’을 말한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양적인 부흥을 말했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저는 사도행전에서 “계속해서 신자의 수가 늘어갔다”는 말씀을 읽으면서 이것은 하나님께서 개입하신 사건이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교회 성장에 대한 특별한 철학 없이, 많은 교인들이 모이는 대형 교회를 만들려고 했던 것이 그동안 우리가 보았던 ‘교회성장’이었다면, 사도행전에 나와 있는 교회 성장은 하나님께서 개입하신 사건이었습니다. 이것은 그 뒤에 이어지는 사도행전 말씀을 읽으면 알 수 있습니다. 곧 이어서 예루살렘 교회에 큰 박해가 일어납니다. 이 박해 때문에 교회는 풍비박산(風飛雹散)이 납니다.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서 피난을 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던 신자들은 어디를 가든지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버리지 않습니다. 바로 이것이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 (Diaspora Christians)’을 온 세상으로 보내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이었습니다.

둘째로, 교회 내부에서 생긴 불평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아니, 회개하고,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모든 물건을 공동을 사용했고, 날마다 모여서 찬송하고 기도했던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인데, 무슨 불평이 생깁니까? 불평이 생길 수 있습니다. 보세요. 바울과 바나바는 모두 하나님께서 쓰신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 사이에 불평이 있고, 싸움이 있을 수 있습니까? 있습니다. 사도행전 15:39에 “바울과 바나바는 이 일 때문에 심하게 다투었습니다”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New Living Translation에 “Their disagreement was so sharp that they separated”라고 나와 있습니다. 두 사람이 갈라설 정도로 서로 생각이 달랐다는 것입니다. 문제가 없는 교회가 좋은 교회가 아니라, 문제를 잘 해결해 나가는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사도들은 이 문제를 가지고 지혜를 모았습니다. 사도들의 결론은 사람들을 뽑아서 일을 분담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문제를 뒤집어서 말하면, 교회 안에서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사람들과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사이에 문제가 터지지 않았더라면, 교회는 언제까지 원시적인 상태로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모든 일들을 사도들이 리더십을 가지고 해결해 나가는 시스템을 고수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터지는 바람에, 사도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사람을 뽑아 세우고, 이 사람들에게 양식을 나누어 주는 일을 맡긴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주의해서 봐야 하는 문제는 사도들이 세웠던 사람을 뽑아 세우는 기준입니다. 그 기준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다고 인정 받는 사람들’을 선발하는 것이었습니다. ‘those who are well respected and are full of the Spirit and wisdom (NLT)’입니다. NIV 성경에는 ‘those who are known to be full of the Spirit and wisdom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다고 알려진 사람들)’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겪고 있는 진통 가운데, 사람을 바르게 세우지 못해서 겪는 진통이 있습니다. 저도 이런 면에서 실수를 많이 했습니다. 또 지금도 실수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도들에게 알려 주신 기준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다고 알려진 사람들을 세우라”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중에 하나님께 자기 인생을 헌신하고 싶은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은 나의 재능을,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을 하나님께 드린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재능을 필요로 하신다고요? 하나님께서 나의 학문을 필요로 하신다고요? 하나님께서 나의 돈을 필요로 하신다고요? 하나님께서 나의 시간을 필요로 하신다고요? 어디 가서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이런 말은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도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는 그런 사람들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필요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한 번도 유능한 사람을 찾으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한 번도 돈 많은 사람을 찾으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입니다.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한 곳도 있습니다. ‘영 (spirit)’이라는 말이 잘 마음에 와 닿지 않습니다. 영은 볼 수도 없고, 어떻게 설명하기도 어렵기 때문입니다. ‘영’이라는 말과 가장 가까운 말은 ‘마음 (mind)’이라는 말입니다. 성경 말씀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We have the mind of Christ., 고린도전서 2:16)”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 경우 ‘마음’이라는 말은 ‘성령’이라는 말과 같은 뜻으로 사용되는 말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여러분이 알고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눈빛도 좀 이상하고, 하는 말도 좀 이상하고, 가까이 하기는 겁나는 사람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충만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시는 지 이해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교회가 사람이 필요할 때는 그런 사람을 찾아 세웠습니다. 그래서 세운 사람이 일곱 명인데, 그 일곱 명의 명단이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저는 그 명단을 보면서 궁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일곱 명 중에 왜 스데반에게만 ‘믿음이 좋고 성령이 충만한’이란 말이 붙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New Living Translation에는 ‘Stephen (a man full of faith and the Holy Spirit)’라고 나와 있습니다. 성경이 이렇게 기록한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교회가 필요로 하는 사람은 이런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필요로 하시는 사람이 이런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교회가 이런 사람을 길러야 합니다. 일할 사람이 없다고 아무나 세우지 말고, 이런 사람을 길러야 합니다. 교회가 이 기준을 지키지 않고 세상 기준에 맞는 사람들을 세운 열매들을 지금 거두어 들이고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 하나님께 쓰임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자기 자신이 이런 사람이 되기를 힘쓰세요.

주님의 교회가 확장되었습니다. 신자들의 수가 계속해서 늘어갔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사람이 많아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교회의 확장 속에 이들을 거룩한 목적에 사용하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가 들어 있었습니다. 교회가 사람들을 뽑아 세워서 일을 분담했습니다. 아무나 세우지 않았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사람들을 세웠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말씀은 계속 퍼져 나갔고, 제자의 수는 계속 늘었습니다 (7절). 이제, 하나님께서 이 교회를 통해서 하실 다음 일들이 기대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