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023 | 기도 시리즈1

끈질긴 기도 A consistent pray

누가복음 18:1-8

2023년의 한해를 건너기 위한 열두개의 징검돌이 우리 앞에 놓여져 있습니다. 열두개의 징검돌을 밟으며 우리는 한해의 강을 건너가야 합니다. ‘열둘이라는 숫자는 성경에서 이스라엘의 12지파( 49:28) 엘렘의 12개의 샘물( 15:27) 대제사장 흉배에 붙인 12개의 보석( 28:21) 언약궤를 매고 요단강을 건너며 기념비로 세운 12개의 ( 4:8) 예수님의 열두제자( 10:2) 만물을 회복하기 위한 일년 열두달 새롭게 맺히는 새로운 열매( 22:2) 이외에도 열둘라는 숫자가 성경에서 자주 언급되는데, ‘열둘이라는 숫자는 하늘과 땅을 다스리는 완전한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합니다.

 

요한 계시록 22 1절로 2절을 보면, 1 천사는 내게 생명수가 흐르는 강을 보여 주었습니다. 수정같이 맑은 강은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흘러 나와 2 ‘ 성의 넓은 거리 한가운데로 흐르고 있었습니다. 양쪽에는 생명나무가 있어서 일년에 열두번, 달마다 새로운 열매를 맺고 있었습니다. 잎은 모든 사람들을 치료하는 사용되었습니다.’

 

케임브리지교회 모든 교우들에게 펼쳐질 2023 열두달이 불안과 두려움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보좌로부터 흐르는 생명수를 통해서 믿음의 기갈(飢渴) 해결받고, 기도의 호흡을 되살리게 되는 한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에는 많은 이들이 아픔과 슬픔, 정신적 우울함과 미래의 대한 불안함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하나님과 보좌로 흘러나오는 생명수가 그분의 통치아래 있기를 사모하는 성도들에게 새로운 열매를 맺게 해주실것이라 약속하십니다. 또한 생명나무에 있는 잎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치료하는 약재료로 사용될 것을 말씀합니다.

 

본문은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사용해서 하늘의 뜻을 사람들에게 자주 가르치셨습니다. 본문의 비유에 나타난 불의한 재판관은 인간의 본성으로 인해 악해진 시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불의한 재판관을 비유로 말씀하시며,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들을 무시하는 재판관이라고 소개합니다. 이는 고아와 과부, 소외된 자들의 억울함을 신원해 주시는 하나님의 성품과는 대조가 됩니다. 1차적으로는 당시 유대인을 군림하는 다신론적 신관을 가졌던 불의한 관리들을 지칭하신 것으로 보여지는데, AD 1세기는 인본주의, 혼합주의, 다신론이 성행했었습니다. 두번째 인물은 끈질기에 요청하는 과부입니다. 과부는 고대사회에서 보호 받을 수 없는 신분인데, 이 과부가 자신이 권리를 침해 당해서 보호해 달라고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한해를 살아가면서 기도하고 싶지 않을때도 있을 것입니다. 삶에서 힘든일을 만날때도 있겠지요. 그때마다 과부의 끈질긴 간정처럼 끈질긴 기도로 하나님을 찾는 한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유진피터슨은 메세지 성경에서 본문의 1절을 예수께서 그들에게 끈질기게 기도하고 절대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치려고 이야기를 들려주셨다라고 썼습니다.

 

본문을 묵상하며 불의한 시대에 맞서는 끈질긴 기도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불의한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게 살아가는 일은 힘겹고 어렵습니다. 손해를 보게 되는 일도 있을테고, 억울한 일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떠한 환경에도 희망을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본문의 예수님의 비유는 2천년 전의 말씀이지만 오늘날 이 시대를 꿰뚫은 깊은 통찰(洞察, Insight)을 담고 있습니다. 다신론 신관으로 로마의 힘을 의지하던 2천년 전이나 탈기독교, 탈교회의 오늘날 시대나 비슷합니다. 지난 2천년 동안 기독교가 서방국가를 중심으로 부흥의 시기였다면, 이제 기독교는 공적영역에서 밀려나 주변화되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믿음도 개인적 영역으로 제한되는 시대이며. 기독교의 본질인 믿음은 다윈주의 사회속에서 믿음의 배타성으로 인해 복음전파의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기독교 교육을 하는 것조차 공적영역에서는 어려운 형국이 되었습니다. 세상이 기독교를 평가하는 것이 다 옳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이제껏 기독교의 선교방식이나 전도의 태도가 부족했던 것은 인정해야 합니다.

 

누가는 19장에서도 기도자의 태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를 대조하고 있는데, 세리의 기도나 바라새인의 기도는 둘다 거룩한 기도처럼 보여집니다. 세리도 바리새인도 둘다 거룩함을 상징하는 성전에서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음의 중심을 보셨습니다. 세리는 기도하며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인식하는 반면에 바리새인의 관심은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행위에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이 분별해야 하는 것은 내가 추구하는 거룩함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거룩함이 겸손함으로 나타나고 있는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특별히 다원주의 시대속에서 복음을 접하지 못한 사람의 구원의 문제를 고민하는 성도들은 끈질긴 기도를 통해서 믿음의 태도를 점검해야 하는 것입니다.

 

1.     기도는 진실한 고백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우리의 감정에 정직하게 기도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마음 속에는 원한이 들끓고 있는데, 하나님 앞에서 그렇지 않은 척 행동하는 것은 부질 없는 일일 뿐 아니라 해로운 일입니다. 억울한 일로 인해 과부는 반복적으로 재판관을 찾아갔습니다. 과부에게 억울한 일인데, 오히려 포기하지 않고 기도할때 하나님께서 위로하고 격려하시는 분임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미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 분명하게 계시 되었는데, 왜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요?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실한 기도를 하면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게 됩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지속적으로 기도하다 보면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깊어집니다. 하나님 앞에서 속감정을 숨겨 보아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마음에 용암처럼 들끓고 있는 분노를 하나님 앞에 쏟아 놓는 것은 가장 확실한 치유이며 회복인 것입니다.  

 

개역개정 성경으로 보면 원한을 풀어 달라는 말이 4번이나 반복이 됩니다.

3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5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진실한 기도를 하다 보면, 원수를 향해 타오르던 불이 꺼져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과부의 끈질긴 기도를 통해서 그녀에게 있던 억울함을 하나님께서는 풀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은 정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거대한 계획 속에서 온 우주를 다스리시며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시니 자녀들의 억울한 기도를 들으시고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한해를 살면서 억울한 일을 겪게 될때에 자기 힘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기도하면 마음의 치유하심을 주실 것입니다.  

 

2.     기도는 무감각해진 우리의 마음을 깨웁니다.

 

기도는 누군가를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끈질긴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돌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자녀들의 기도에 마음을 바꾸시기도 합니다. 불임으로 애통하던 한나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사무엘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기도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의 영적인 감각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주시는 특별한 은혜가 있는데 하나님께서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신다는 것입니다. 불의한 재판관에게 끈질기게 간청하는 과부는 기도하며 낙심하지 않았다는데 초점이 있습니다.

 

오늘날 물질주의와 다원주의의 거센 파도는 우리의 믿음을 위협합니다. 물질은 믿음을 사용하는 것이지 의지할 대상이 아닙니다. 물질을 의지하게 되면 기도의 힘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교회는 돈이 많은 사람도, 사회적으로 지위가 있는 사람도, 세상에서 힘이 있는 사람도 기도하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곳이어야 합니다. 영적으로 잠들어 있는 사람이 깨어나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건강해 집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기도로 한해를 보내기를 원합니다.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의 밤낮 기도하는 제목들이 응답되는 한해가 되기를 원합니다. 밧모섬에서 요한이 바라본 새하늘과 새땅의 모습은 에덴동산의 회복이자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을 분명하게 보여 주었습니다.

 

인생을 자동차에 비유한다면 기도는 자동차 핸들를 잡는 것과 같습니다. 운전을 하는 사람이 핸들에서 손을 놓고 졸게 되면 사고가 납니다. 목적지를 향해 도착할때까지 핸들을 잡고, 이리 저리 조정하며 방향을 잡아 가는 것입니다. 푯대를 향한 믿음의 여정에서 두려운 일을 만나고, 생각지 못한 상황들을 만나게 된다해도 그때마다 기도의 핸들을 놓치 마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여정에 동행하시며 인도하시는 주님이 함께 계심을 보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길을 안전하게 인도하시는 주님께서 우리의 믿음의 여정에 함께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5 이 과부가 나를 귀찮게 하니 그의 간청을 들어 주어야겠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 와서 나를 괴롭힐 것이다.’” 6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불의한 재판관이 말한 것을 들으라. 7 하나님께서 밤낮 부르짖는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의 간청을 듣지 않으시고 오랫동안 미루시겠느냐?

 

오스왈트 챔버스(Oswald Chambers, 1874-1917) 주님은 나의 최고봉에서 기도의 반복은 하나님과 흥정을 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기쁨에 고집이라는 표현을 했습니다. 기도를 반복하다 보면 믿음의 근육이 붙습니다. 기도는 당장의 일시적 문제를 해결하는 아니라 시대의 불확실성을 받아 들이는 훈련입니다. 사람들은 당장의 명확한 해답을 듣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과학적인 결과들로 자신의 인생을 보장받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기도를 반복하다 보면, 하나님의 애끓는 마음을 깨닫게 됩니다. 생명의 말씀과 다시 연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무관심하신 것이 아니라 죄로 인해 무감각한 마음에 회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창세기 32 24-25 보면 야곱은 홀로 천사와 씨름을 합니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뼈를 치매 야곱의 환도 뼈가 사람과 씨름할 때에 위골되었더라"

 

야곱은 끈질긴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할아버지 아브라함도 소돔성의 심판을 위해 찾아온 천사에게 끈질긴 간청을 했지요. 아브라함은 소돔성 멸망 직전에 영혼의 구원을 위해 끈질기게 기도하였습니다. 소돔성 심판을 들은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서서’ 중보기도를 하였습니다( 18:22). 아브라함은 6번이나 거듭 요청하며, 의인 10명만 있다면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지 않으시겠다는 응답을 받았습니다. 롯이 구원받은 것도 아브라함의 끈기 있는 기도의 열매였습니다( 19:29) 야곱은 끈질긴 기도를 통해 자기중심적 죄를 끊어내고 하나님의 얼굴을 경험했습니다

 

야곱은 벧엘에서 홀로 남아 씨름하며 지난 세월들을 회상하며 했을 것입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형의 발꿈치를 붙들고 출생했습니다. 배고픈 형에게 팥죽 그릇으로 형의 장자권을 쟁취했고, 눈이 안보이는 아버지를 속이기 위해 염소 새끼의 가죽으로 에서인 척을 했으며,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을 가서도 깨닫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안에서 살았지요. 20 동안 고향을 떠나서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의 자기중심적인 기질을 훈련 받으며 살았습니다. 그가 이제 고향 땅에 돌아오는데 에서가 400인들을 거느리고 만나러 온다는 소식에 자신의 인간적인 수단을 총동원해서 떼로 나누고 떼를 치면 떼는 피하려고 했습니다. 여전히 자기중심적 기질이 드러납니다. 자신의 안위만을 위해 가족마저 먼저 보내고 이제 야곱 홀로 남아 있었습니다. 이때 야곱은 천사와 씨름하며 그가 의지하던 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쳐내시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환도뼈가 부서지는 고통속에서 천사와 씨름했던 곳을 야곱은 그곳의 이름을 ‘브니엘’ ‘하나님의 얼굴’이라 하였습니다. 그가 밤새워 씨름한 그분은 하나님이었습니다. 야곱은 그곳에서 새로운 이름 이스라엘을 얻게 됩니다.

 

케임브리지 교회가 오랜시간 기도하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일들을 감당할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함께 했던 많은 사람들이 떠나고 이곳에 함께 있지 않는다고 해도 함께 드린 기도는 여전히 교회에 남아 있습니다. 지속적인 기도가 교회를 유지하고 세워가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얼굴 보는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시간이 흐르고 사람은 지나가도,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드린 기도는 반드시 응답받게 됩니다.

 

교회를 위해 기도하며, 개인의 인생의 미래를 설계하며,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새로운 시대가 다가 올수록 성령님을 믿고 그분의 능력을 구해야 합니다. 현재에 기도의 답을 얻지 못할 때에도 그분께 맡기며 쉬지 않고 기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끈질긴 기도는 기도할 힘이 나지 않을때, 기도대로 살지 못할때에도 기도하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부족한 모습을 붙들고 날마다 씨름하는 것입니다.

 

외국에 와서 살면서 저에게는 통장잔고나 좋은 집이 저를 만족시켜 준것이 아니라 작은 방안의 기도의 자리가 저를 변화시켜주고 만족시켜주었습니다. 삶의 도제목을 안고 작은방 한켠 에서 기도하던 시간들은 시간이 흘러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골방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온전히 하나님만 생각했었기 때문입니다. 간절한 기도의 시간은 하나님 앞에서 기도의 응답의 여부와 관계없이 가장 겸손 밖에 없던 시간이었기 때문입니다.하나님은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눈은 우리가 생각하는 작은 , 보잘것 없는일이라도 그분에게는 크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지극히 작은 자가 하나님과 함께 사도들 보다 큰일을 행하게 하는 힘입니다. 세상 보다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기도의 기둥은 믿음 겸손입니다.

 

기도는 ‘믿음’ 위에 세워집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도하는 일 지치고 기도할 이유를 찾지 못합니다. 믿음이 있어야 믿음의 경주를 할수 있습니다. 믿음은 자기를 찾는 이들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과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 11:6) 믿음이 사라지면 상황을 극복할 있는 하나님의 능력도 위로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믿음은 경기를 보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경험입니다. 직접 경기를 뛰는 선수들에게는 안에 땀과 눈물이 있습니다. 때로는 경기 안에서 실수를 하기도 하고, 부상을 당할 위험한 순간에 놓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직접 경기를 뛰면서 얻게 되는 경험들 속에서 믿음의 흔적들이 남는 것입니다.

 

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 속히 그의 백성들에게 정의를 베푸실 것이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 이 세상에서 이 믿음을 발견할 수 있겠느냐?

 

예수님은 차례나 제자들에게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되어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9:22). 본문에도 그러나 인자가 , 세상에서 믿음을 발견할 있겠느냐? 말씀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 풍조에 휩쓸려 믿음의 길을 포기하게 되리라는 예측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430년간 종살이를 통해 희망을 잃어버린 순간에도 하나님의 전적인 손으로 애굽에서 구원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은 바벨론 포로시기에서도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셨습니다.

 

보스턴 지역에 하나님은 케임브리지 교회를 세우시고, 시대적 사명을 감당하도록 우리를 부르십니다. 시대적 도전 앞에서 기도하는 백성들을 세심하게 돌보시며 길을 내시며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믿고 겸손함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기도를 그분의 큰 계획 안에서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어떤 기도는 간구한 그대로 응답해 주시고, 어떤 기도는 간구한 것을 거절하심으로 응답하십니다. 우리의 눈에 거절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큰 계획 안에서는 그것도 응답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원하는 시간에, 우리가 원하는 방식대로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큰 계획 안에 있으면 거절된 기도일지라도 축복이 됩니다. 겸손한 기도는 기도의 과정을 통해 우리의 마음이 정화되고 주님을 닮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자가 올때라는 기도의 안경을 쓰시기 바랍니다. 안경은 인지하지 못할때에도 쓰고 있으면 안경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게 됩니다. 믿음과 겸손의 안경을 쓰고 살아가면, 낙심되고 두려운 상황속에서 약속하신 성령님이 도와주십니다. 성령님은 믿음과 겸손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의 기도를 도우십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다시 오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약속의 안경을 끼면, 성령께서는 두려움을 이기게 해주십니다. 성령의 감동과 감화는 예수께서 승천하실때 믿는 성도들에게 주신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끝나지 않는 전염병과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전쟁들, 지지과 기근, 예측할수 없는 기후의 변화들, 총성없는 아우성 소리가 가득 넘쳐나는 세상에 살아가지만, 우리가 직면하게 되는 현실적인 문제들 속에서 응답하시는 하나님께 쉬지말고 기도하는 한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교회가 여러분의 삶의 길에 기도와 말씀의 등불을 켜고 함께 걷겠습니다. 믿음의 여정을 함께하는 자리에서 한해도 진실함과 성실함으로 하나님께 쓰임받는 귀한 성도들 되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찬송가 369장 가사를 함께 읽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1죄짐 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걱정 근심 무거운 짐 우리 주께 맡기세

  주께 고함 없는고로 복을 얻지 못하네 사람들이 어찌하여 아뢸 줄을 모를까

 

2시험 걱정 모든 괴롬 없는 사람이 누군가 부질없이 낙심말고 기도드려 아뢰세

  이런 진실하신 친구 찾아볼 수 있을까 우리 약함 아시오니 어찌 아니 아뢸까

 

3근심 걱정 무거운 짐 아니진 자 누군가 피난처는 우리 예수 주께 기도 드리세

  세상 친구 멸시하고 너를 조롱하여도 예수 품에 안기어서 참된 위로 받겠네

 

 


1/1/2023 | 새해 예배 메시지

우리는 예수를 그렇게 배우지 않았습니다 That Isn’t What You Learned about Christ

에베소서 4:17, 20-24

2023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누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1월을 영어로 ‘재뉴어리(January)’라고 하는데요. 이 말이 ‘야누스(Janus)’라는 로마의 신의 이름에서 왔다고 합니다. ‘야누스’ 신은 처음과 끝, 시작과 변화의 신으로,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뒤를 돌아보는 얼굴을 하고 있고, 다른 하나는 앞을 바라보는 얼굴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새해를 맞이하는 우리의 심정을 잘 나타내는 말이 아닌가 합니다. 

여러분은 새해를 어떻게 살고 싶으신가요? 제가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는 지금 우리가 맞이하고 있는 이 때가 과거 어느 때보다 더 특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의 ‘시대적인 사명’을 반복해서 말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냥 “열심히 믿음생활 해야지!” “열심히 은혜를 사모하고 기도해야지!” 이런 결심만 가지고는 부족한, 절박한 시점에 우리가 서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로마서 12:1)”고 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분별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시대적인 요청 속에 지금 우리가 서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 지금까지의 믿음생활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에베소서 본문 말씀에 “믿지 않는 사람들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처럼 살지 마십시오(Live no longer as the Gentiles do, for they are hopelessly confused, 17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현대어 성경에 이 말씀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이제 나는 주님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더 이상 구원받지 못할 자들이 사는 방식대로 살지 마십시오. 그들은 분별력을 잃어버리고 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그들은 마음을 닫고 깜깜한 어둠에 갇혀 지냅니다.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닫아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에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길을 깨닫지 못합니다.”

이 말씀에서 주목해서 봐야 할 말씀은 “분별력을 잃어버리고 혼란에 빠져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혼란에 빠지는 이유는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그른지 ‘기준(standard)’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진리에 대한 객관적인 ‘기준’이 없는 시대입니다. 모두 각자가 믿는 대로 사는, 진리에 대한 주관적인 기준을 가지고 사는 시대입니다. 여러분, ‘정경(正經)’이란 말을 아시는가요? 많은 성경 문서들 중에서 구약 39권과 신약 27권을 골라서 ‘정경’으로 정했습니다. ‘정경’을 영어로 ‘Canon’이라고 하는데요. 이 말에 ‘principle’ ‘rule’ ‘law’ ‘norm’ ‘measure’ ‘standard’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교회는 ‘정경’을 결정할 때 66권의 성경이 충분한 삶의 ‘기준’이 된다고 믿었습니다. 우리가 혼란에 빠지는 이유는 성경을 ‘기준’으로 삼고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디모데후서 3:16 말씀을 아시지요? “모든 성경 말씀은 하나님께서 감동을 주셔서 기록되었기 때문에 진리를 가르쳐 주며, 삶 가운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게 해 줍니다. 또한 그 잘못을 바르게 잡아 주고 의롭게 사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제자 디모데에게 썼을 때 디모데는 한창 때의 청년이었습니다. 청년의 때는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는 때입니다. 좋은 쪽으로 가능성이 열려 있기도 하지만 나쁜 쪽으로 가능성도 열려 있습니다. 청년의 시기를 보내고 있던 디모데에게 인생의 올바른 길을 가르쳐 줄 ‘멘토(mentor)’가 필요한 시기였습니다. 그 때 바울이 이런 편지를 보냅니다. “Run from anything that stimulates youthful lusts. Instead, pursue righteous living, faithfulness, love, and peace. Enjoy the companionship of those who call on the Lord with pure hearts(청년 시기의 욕망을 자극하는 어떤 것도 피해야 합니다. 그대신 의로운 삶과 믿음, 사랑, 그리고 평화를 추구하십시오.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을 부르는 사람들과 우정을 나누십시오).” (디모데후서 2:22) 저는 우리 교회의 청년들이 이런 식으로 청년의 시기를 보냈으면 좋겠습니다.

둘째로, 우리가 주목해서 봐야 할 말씀은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닫고 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지난 날 우리들의 삶의 모습을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마음을 닫으면 그 사람이 하는 말이 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열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립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하면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고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희생을 감수하는 것이 아니라 더 좋은, 최상의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원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이것이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다(We are created according to God’ image)”는 창세기 1:26-27 말씀의 뜻입니다. 그런데 죄가 우리 속에 들어오면서부터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막고, 마음을 닫고, 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은 인간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일입니다. 다윗이 지은 시편 23:1 말씀이 바로 이런 삶에 대한 고백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The LORD is my shepherd, I shall not be in want).” 하나님을 나의 목자로 삼고 목자의 인도를 받으며, 목자의 뜻에 순종하며 사는 삶이 우리 모두가 살아야 하는 삶의 모습이며, 이런 삶에는 참 만족이 주어진다는 고백입니다.

바울은 지난 날의 우리의 삶을 ‘Your former way of life which is corrupted by lust and deception(정욕과 속임수로 타락한 이전의 삶의 방식)’이라고 한마디로 정리합니다. 한국 사람들은 ‘정욕(lust)’이라는 말을 나쁜 의미로 생각합니다. ‘정욕(情欲)’에 빠져 있는 사람은 형편없는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나는 ‘정욕’에 빠져 살지는 않았으니까 그래도 괜찮게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정욕’이라는 말은 자기 마음에 이끌리는 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욕이나 식욕, 욕심을 잘 조절해야 하는데, 조절하지 못하고 본능 대로 행동하는 것을 ‘lust(정욕)’이라고 합니다. 2,000년 전에 바울이 비판했던 에베소 교회 교인들의 삶은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삶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지금까지 ‘정욕’에 이끌려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내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결심과 마음의 결단이 있었습니까?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렇게 살면 안 되기 때문에 포기한 것들이 있었습니까? 희생한 것들이 있었습니까?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내 생각을 바꾸고 내 계획을 바꾼 것들이 있었습니까? 아니잖아요? 내가 원하는 대로, 내 생각 대로 살아가면서 주일이 되면 피곤한 얼굴로, 습관적인 태도를 가지고 예배를 드리지 않았습니까? 

새해에는 우리의 삶의 방식이 바뀌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 23-24절을 보세요. “Let the Spirit renew your thoughts and attitudes. Put on your new nature created to be like God—truly righteous and holy(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과 태도를 바꾸시도록 허락하십시오. 하나님을 닮도록 새롭게 창조된 본성을 옷 입으십시오).” 그동안 우리가 가지고 있던 마음과 태도를 바꾸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을 닮도록 새로운 본성을 가져야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 말씀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결심만 가지고는 결코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를 새로운 사람으로 만드는 주체(主體, subject)가 누구인지 보십시오. ‘성령(the Spirit)’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과 태도를 새롭게 만드는 주체입니다. 그러므로, “Let the Spirit renew your thoughts and attitudes(성령께서 당신의 마음과 태도를 새롭게 하시도록 허락하라)”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이 보여주는 ‘새로운 삶의 길’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이 주어지지 않는 이유는 새로워지는 길을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훌륭한 제자의 삶을 가르쳐 준 Oswald Chambers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The moral miracle of redemption is that God can put a new nature into me through which I can live a totally new life(구원의 도덕적인 기적은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나에게 새로운 본성을 넣어 주실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말씀에 동의하십니까? 

그러면, 왜 우리는 그동안 살아왔던 삶의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분별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여러분은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Don't copy the behavior and customs of this world, but let God transform you into a new person by changing the way you think. Then you will learn to know God's will for you, which is good and pleasing and perfect).” (로마서 12:2) 크리스천의 삶의 최종 목표는 하나님 뜻을 분별하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분별하기 위해서 우리는 생각하는 방식을 바꿔야 합니다. 이 사람이 성경이 말하는 ‘새 사람’입니다. 어떻게 ‘새 사람’이 될 수 있는지 성경 말씀을 보십시오. “Let God transform you into a new person(하나님께서 당신을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시키시도록 허락하라).” 우리는 새 사람이 되기 위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부지런히 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영영 주어지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저의 설교를 들으신 분들은 모두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저의 설교의 키워드는 ‘교회의 시대적인 사명’입니다. 이 말은 교회가 시대의 요청에 응답하는 책임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지난 3년 동안 경험했던 팬데믹은 알게 모르게 많은 분야에서 우 리의 의식구조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팬데믹이 아니었으면 도저히 바뀔 것 같지 않는 것들 이 바뀐 것입니다. 이제 세계는 팬데믹 이전의 세계와 팬데믹 이후의 세계로 바뀔 것이라고 예측했던 전문가들의 예측이 하나, 둘 맞아 떨어지고 있습니다. 유발 하라리(Yuval Harari) 의 말을 들어 볼까요? “We can choose what the world looks like when the pandemic is over(우리는 펜데믹이 끝났을 때 세계가 어떤 모습일지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의 말은 지 금 우리가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하는 시점에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선택이 미래를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이런 전문가들의 예측에 대비하고 있습니다. 기업이나 회사들, 마켓들이 얼마나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는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요지부동입니다. 바뀐 것이 없습니다. 온라인 예배가 활성화되고, 교회 안에서 마스크를 쓰고, 예배 후에 있는 친교시간이 간소하게 된 것 외에 본질적으로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세상은 변화를 수용하고 있는데, 교회는 변화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바빌로니아를 시켜 유다 왕국을 침략하여 망하게 하고, 유다 백성들이 70년 동안 바빌로니아에 포로생활을 하게 한 후에, 자기 백성들을 새롭게 창조하여 고국으로 돌려보내려는 하나님의 뜻을 읽지 못했던 당시의 유다 백성들이 예언자 예레미야를 핍박하고, 감옥에 가두고, 조국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바빌로니아에 저항했던 역사와 흡사합니다. 하나님은 지금 판을 새로 짜고 계십니다. 그런데, 교회들은 이런 하나님의 의도를 읽지 못하고 팬데믹 이전의 교회를 그리워하며 그 때로 돌아가려 하고 있습니다. 

저는 감리교회에서 영향력 있는 목사님의 설교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교회도 크고 교인수도 많습니다. 그 목사님은 감리교 안에서 설교를 잘하시는 목사님으로 인정을 받고 있는 분입니다. 저는 그분의 설교를 들으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교회에 재미 있는 프로그램을 많이 만들어서 교회에 나오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목사님의 설교에서 시대적인 전환기에 대한 문제 의식이나 위기 의식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교회에 대한 인식을 바꾸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팬데믹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일방적인 메시지를 선포하던 시대를 끝내고, 이제는 개인 개인의 크리스천들이 세상을 향해서 메시지를 선포해야 하는 시대를 열고 계십니다. 보세요. “여러분 자신이들이 모든 사람들이 읽고 있는 우리의 편지입니다. 여러분은 우리의 사역의 결과로 나타난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편지입니다.......우리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서 이러한 확신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3:2-4) 2,000년 전에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게 썼던 이 편지 구절이 오늘 우리 마음에 확 다가오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시대는 개인이 중요한 시대입니다. 여러분의 몸에서 예수님의 냄새가 나야 합니다. “아, 이 사람의 몸에서 예수님의 냄새가 나는구나!”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이제는 자기가 나가는 교회의 규모와 크기를 자랑하던 시대는 지났습니다. 이제는 교회가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교회라는 것을 새롭게 인식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새 시대는 크리스천 개인들이 얼마나 진실한 크리스천의 삶을 사느냐 하는 것을 키워드로 삼아야 하는 시대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 (요한복음 4:23-24) 예수님은 당시의 성전 예배를 통해서는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이 아니라 어디서든지 하나님을 예배하는 때가 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요한복음 4:21). 우리는 이 예수님의 말씀의 뜻을 잘 몰랐습니다. 

그러면, 이제 기존의 교회는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교회는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기르는 일을 해야 합니다. 길러서 세상으로 내보내야 합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일터에서, 강의실에서, 실험실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로 훌륭하게 살아가도록 양육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인 결정을 해야 할 때 크리스천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들로,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먼저 배려하고 섬기는 사람으로, 자신이 희생해야 할 자리에서 망서리지 않는 사람으로, 책임져야 할 자리에서 도망가지 않는 사람으로 양육하는 일을 교회가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대한 새로운 판을 짜고 계십니다. 지금까지 교회가 주어진 사명과 역할을 올바로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위기(危機, crisis)의 때입니다. 위기는 곧 기회이기도 합니다. ‘교회의 시대적인 사명’을 목사가 인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온 교인들이 이 인식을 함께 공유해야 합니다. 무늬만 크리스천인 사람들이 모여 예배하던 때는 지났습니다. 우리는 지금 절박한 시점에 서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께서 하고 계시는 일을 올바로 분별하고 응답하지 않으면 우리는 철저하게 버림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교회의 시대적인 사명’을 주장하는 이유입니다.

 

12/31/2022 |

하늘의 예배 The Heaven’s Worship

요한 계시록 5: 1-10

2022년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며 함께 나누고 싶은 말씀은 ‘하늘의 예배’입니다. 이땅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만큼 복된 일이 없습니다.

새해 첫시간를 맞이하며 예배를 향한 ‘창조적 갈망’이 더 깊어 지기를 바랍니다. 존 웨슬리는 1755년 언약예배(Wesley Covenant Service)를 시작하여 1778년에 이르러 모든 교우들과 함께 새해 첫주일과 새해를 맞이하는 밤에 지금처럼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과의 약속을 갱신하기 위한 시간을 갖었습니다.

그 언약기도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저는 더 이상 제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일에 저를 붙들어 매시고,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들에게 저를 붙이소서. 저를 행하게 하시고, 저에게 고난을 주소서. 저를 주님께서 고용하소서. 주님의 처분에 맡깁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를 높이시고 혹은 저를 낮추소서.저를 채우기도 하시고, 비우기도 하소서. 저에게 모든 것을 주기도 하시며, 또한 제게서 모든 것을 가져 가기도 하소서. 제 모든 것을 주님의 기쁨을 위해 쓰시도록 기꺼이 그리고 마음 다해 드립니다. 오, 영광스럽고 복되신 하나님, 성부, 성자, 성령이시여, 저는 주님의 것이요, 주님은 저의 것입니다. 그렇게 되게 하소서. 제가 이 땅에서 맺은

이 언약을 하늘에서도 확증하여 주소서. 아멘” 이 기도문을 드리며 감리교도들의 믿음은 증진시키기 위한 예배를 드렸습니다. 요한 계시록에는 언약을 두루마리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 계시록 22장 7절에는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

요한계시록 21:5에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귀로 듣기만 하지 말고 ‘기록하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에 계시된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해 믿음의 길을 걷는 이들은 어느 시대속에서나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는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새해는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최고의 열매를 맺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요한 계시록의 핵심은

‘세상과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계시’입니다. 당시는 거대한 로마제국이라는 박해의 풍랑 속에서 표류하는 상태였습니다. 내부적으로는 이단의 거짓 가르침과 영적 타락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었지요.

로마의 법 앞에서 말씀이 전혀 힘을 쓰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고, 박해 상황속에서 복음은 아주 초라하게 보였습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밧모섬에 유배 되었습닌다. 그런 상황속에서 하나님은 요한에게 환상을 보여 주십니다. 사도 요한의 눈에 보여주시는 것은 ‘하늘의 예배’였습니다.

5:1 나는 보좌에 앉으신 분의 오른손에 두루마리 하나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두루마리는 안팎으로 글이 씌어 있었고, 일곱 개의 도장이 찍혀 봉해져 있었습니다.  2 힘 있는 한 천사가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누가 이 봉인을 떼고 두루마리를 펼 수 있겠는가?  3 그러나 하늘에도, 땅에도, 지하에도 그 두루마리를 펴서 읽을 만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4 나는 그 두루마리를 펴 읽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고 울고 말았습니다.  5 그러자 장로 가운데 한 사람이 내게 말하였습니다.

“울지 마시오! 유다 지파의 사자가 승리하였습니다. 그분은 다윗의 뿌리입니다. 그분께서 일곱 군데 봉인을 떼고 두루마리를 펴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권능의 상징인 보좌에 앉으시고 오른손에 두루마리를 들고 계시는데, 그 두루마리가 일곱 인(Seal)으로 봉해져 있습니다. 일곱 인으로 봉하였다는 것은, 그 안에 ‘완전한 내용’이 담겨져 있는데,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두루마리 안팎으로 글이 기록되어 있었는데, 하늘에도 땅에도 지하에도 두루마리를 펴서 읽을 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고 사도요한이 애통하며 울기 시작합니다.

예배자들은 현실적인 삶에 부딪히고, 시대마다 절망의 현실을 만날때에 최대한 울어야 합니다. 요한도 아무런 위로를 얻을수 없는것처럼 크게 울고 말았습니다. 요한의 마음에 로마의 핍박과 고통 가운데 하나님의 구원의 메세지를 기다리던 성도들이 스쳐 지나갔을까요?

요한은 성도들이 실망할 모습에 깊이 낙담합니다. 주제할 수 없는 슬픔에 크게 울었습니다. 울음 가운데 그의 결연한 의지를 볼 수 있습니다. 사도요한이 울고 있을때 하늘의 장로 중 한사람이 ‘울지마시오’라고 말씀합니다. 이유는 유다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기에 그가 봉인된 일곱인을 풀어 계시할 것이니 ‘울지말라’는 것입니다.  

나인성 과부가 독자를 잃고, 슬퍼하고 있을때 그녀를 찾아가 ‘울지 말라’ 말씀하신 분이 계셨습니다. 이스라엘 문화속에서 과부였던 여인이 그녀의 독자까지 잃었으니 얼마나 큰 슬픔입니까? 이 일로 많은 무리가 그녀를 위해 독자의 죽음의 행렬에 동참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비통함에 젖어 무덤을 향해 가고 있는 죽은 자의 행렬을 향해서 예수께서 다가옵니다. 주님은 죽음의 행렬을 마주하며 독자의 관에 손을 대시고 장례의 행렬을 멈추게 하셨습니다.

모든 인류는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의 행렬에 서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인류의 죽음의 행렬을 멈춘 분이 계십니다. 죽은 자를 향해 외치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우리에게도 일어나라 하십니다. ‘일어나라’ 하시니 죽었던 청년이  ‘깨어났습니다.’

새해를 시작하는 케임브리지 교우 여러분 예배 가운데 주님의 음성을 다 들으시며, 생명의 행렬을 이뤄가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3자리 중요한 진리를 살펴보겠습니다.

  1. 예배의 아름다움과 거룩함을 다시 찾으십시요.

우리는 예배의 본질을 갈망해야 합니다.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의 통치를 갈망하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예배의 행위는 아름다움과 연결되는데, 인간은 아름다움을 찾는 것이 영적인 본능입니다. 예배의 아름다움은 추상적인 말이 아닙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 영성이 깊어 질수록 하나님은 ‘하늘의 아름다움’을 밝히 보여줄 것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 드리게 될때에 세상속에서 주의 뜻대로 살아가도록 영적인 삶을 채워가실 것입니다.

토론토 큰빛교회를 섬기시며 20여년간 북한을 오가며 북한 주민들을 돕는 사역을 하셨던 임현수 목사님이 계십니다. 2015년 1월 평소와 같이 북한을 방문했는데, 그는 최고존엄 모독죄라는 죄목으로 사형을 언도 받고 북한에 억류되셨다가 2년 7개월 9일 동안의 종신 노동역을 하며 독방 생활을 하다가 풀려났습니다. 수감된 첫날밤 두렵기도 하고 억울해서 잠이 오질 않는데, 하나님은 예수님의 재판 과정을 묵상하게 하시며 예수님처럼 억울한 재판을 받은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깨닫게 하시니 성령님께서 억울한 마음을 풀어 주시는데 ‘하늘의 평안함’이 임하더랍니다. 그리고 첫날밤 하나님께서 꿈을 통해서 풀려지게 될 것을 보여 주시더랍니다. 끝이 없는 노동 종신형이 시작된 둘째날 아침에 하나님의 음성이 마음속에 들려지는데 디바인 스케쥴이라 말씀 하시더랍니다. ‘이제 네게 거룩한 시간이 시작되었다’는 마음을 주셨답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2년 7개월 9일 동안 캐나다에 있는 여러 교회들을 한 마음으로 기도하게 하셨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요셉처럼 북한감옥으로 부터 구출해 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치의 오차도 없이 그분의 일을 해나가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기도하며 기다린 성도들 곁으로 돌아오신 목사님을 뵌 그날의 마음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고생하신 흔적이 그분의 모습에서 보였습니다. 그러나 다시 단위에 서신 목사님의 모습을 보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두려움도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동행하심 앞에서는 이길수 없다는 것을 느낄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배는 사람을 만족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예배적 표현에 초점을 맞추면 아름다워 보여도 그 예배는 결국엔 능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하나님을 향한 예배, 영적인 갈망을 추구해야 합니다. 보스턴에는 분야별로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이 많이 옵니다. 이들이 하나님께 초점을 두도록 깨워야 합니다. 군대에서 총기를 0점 조준하듯이, 창조성을 주시는 분께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우리가 표현하는 창조적 행위와 능력은 껍데기일뿐이며 철저하게 기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 일은 우리의 능력과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름다움하면 우리는 외적인 아름다움, 보여지는 풍성함을 생각하는데, 내면의 아름다움을 회복하는데 마음을 쏟아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이를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시간에 맞춰 기도했습니다. 오전 9시 오후 12시 오후 3시에 기도를 했습니다. 이것을 divine office라 불렀습니다. 거룩한 기도, 거룩한 일은 예수께서 오시고,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는 시간입니다. 거룩한 예배를 드리며 새해에 모든 성도들이 영적으로 가장 좋은 시기를 누리길 원합니다.

찬송가 143장에 보면 ‘웬말인가 날위하여 주 돌아 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몸 밖에 드릴것 없어 이몸 바칩니다.’ 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죄로 부터 스스로 구할 능력이 없음을 깊이 깨닫게 되면 /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인생이 벌레와 다른 것 없음을 보게 되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넌 벌레가 아니란다. 존귀한 나의 자녀야. 사랑하는 아들이고 딸이야’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감리교 예배학자 돈 셀리어스는 그의 책 ‘거룩한 예배’에서 예배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자기주심’이기에, 인간이 자기만을 드러내려는 정서는 하나님의 마음과 동떨어져 진다고 지적합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어야 하고, 지음 받은 피조물이라는 것을 새롭게 발견하는 것이며, 거룩성을 채워가는 신적 예술이라고 표현합니다.

2.어린양 되시는 예수가 일곱인으로 봉인된 두루마리를 펴셨습니다.

5 그러자 장로 가운데 한 사람이 내게 말하였습니다. “울지 마시오! 유다 지파의 사자가 승리하였습니다. 그분은 다윗의 뿌리입니다. 그분께서 일곱 군데 봉인을 떼고 두루마리를 펴실 것입니다. 6.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이스라엘의 백성들은 제사를 드릴때 ‘어린 양’을 제물로 바침으로써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특히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이라는 표현은 유월절 의식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당시에 양을 잡아 양의 피를 대문 기둥에 발랐더니 언약의 피로 인해 죽음의 천사가 유대인의 집을 지나치고, 그 흔적이 없는 이집트인들 집만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유월절 ‘어린 양’의 피는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예배’의 광경을 왜 보게 하셨을까요? 하늘의 영광을 본 자라야 이땅의 수고와 슬픔을 이겨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어린 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경험하게 될 때 세상의 실패와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하늘의 예배’의 주인은 오직 ‘어린 양’ 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사도요한 당시에는 도미티안 황제가 자신을 신격화하며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였습니다. 황제의 보좌는 통치, 권위, 심판의 자리였습니다. 그러니 ‘하늘의 예배‘는 그리스도의 통치와 권위 마지막날 심판과 교회의 영광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늘의 예배’는 하나님의 보좌에 ‘죽임당한 어린 양’이 서 있는 것을 보는 것이죠. 주님은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뤄지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지상에서 드려야 할 예배의 본질입니다. 예배는 하늘과 땅을 잇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는데 그리스도를 향한 관심이 시들어져 간다면 예배의 본질이 사라져 가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예수를 하늘 높이 올리셔서 하늘의 보좌에 그리스도를 앉히셨습니다. 그러니 사도요한이 환상을 보고 구원의 계시가 풀려진 초대 교회의 성도들에게는 로마 황제 도미티안을 ‘주’ 라고 부르라는 명령을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본문에 보면 어린양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완전한 권세와 능력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어린양’으로 오셔서 구원의 사역을 이루시고, 정한 날에 ‘사자’와 같은 권세와 권능으로 오십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일곱 영은 성령님을 의미합니다. 성령님은 성도들이 이땅에서 예수님을 증거하며 예수님과 일체된 사역을 하도록 도우십니다. 현실의 두려움을 이기고, 현실의 문제를 뛰어넘게 도와주십니다.

루터가 로마 가톨릭과의 오랜 싸움으로 고통과 실의에 빠져 몸져 누워 있던 어느 날, 루터의 아내 카타리나가 검은 상복을 입고 남편의 방으로 들어 왔습니다. 루터가 깜짝 놀라서 “아니, 누가 죽었소?”하고 묻자 카타리나는 “하나님이 돌아가셨어요”라고 슬피 울며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다음과 같이 나무랐습니다. “하나님이 돌아가시다니,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영원무궁토록 돌아가시지 않소.” 그러자 카타리나는 이렇게 맞받아치며 말했습니다.“그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당신의 오늘 이 모습은 무엇입니까? 마치 하나님이 돌아가신 것같이 맥이 빠져 누워 있지 않습니까?” 이 말에 루터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리고 즉시 ‘내 주는 강한 성이요’ 찬송시를 써 내려갔다고 합니다.

한해의 마지막 예배에 우리가 버려야 할 마음은 무엇이며, 잃어버린 마음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에게 믿음의 대로, 은혜의 대로, 시온의 대로를 걷게 하실 것입니다.

이사야는 어린양을 잠잠히 털 깍는 자 앞에서 하나님의 종으로 묘사하지만 요한 계시록에서 어린양은 더이상 종으로 불려지는 것이 아니라 하늘 보좌의 권위를 이어받는 분으로 묘사합니다. ‘어린 양’은 이제 힘없고 약한분이 아닙니다. ‘어린 양’ 되시는 예수의 피만이 모든 백성과 모든 나라를 살리는 유일한 길임을 잊어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하나님의 참된 백성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3. 기도와 찬양은 예배의 향기입니다

8. 그 두루마리를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9.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10.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세상은 지금도 전쟁과 공포, 전염병, 분쟁과 다툼, 불의와 부정 가운데 신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 성도들은 그들의 신음소리를 들을줄 알아야 합니다. 현실을 마주하며 세상 속에서 살아가지만 세상이 아파하는 소리를 듣는 것이 허락하실 새하늘과 새땅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로마제국으로 부터 억압당하고 어찌할바를 몰라 당황해 하는 성도들에게 사도요한이 바라본 ‘하늘의 예배’는 용기와 위로였습니다. 어려움이 없던 시대는 인류 역사속에서 없었습니다. 시대마다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는 우상들과 핍박은 늘 존재했지요. 그러나 끈질긴 기도는 노년의 때에도 청년의 마음을 유지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여전히 하나님 나라 안에 하나님의 역사 안에 있습니다. 하늘의 백성들은 예배의 영성이 흐트러지지 않게 늘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눈을 열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있음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새해에는 주어진 예배를 통해서 예배의 주인 되시는 그리스도를 더욱 닮아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매일마다 구원의 말씀이 계시되어야 합니다. 광야에서도 절망의 긴 터널일지라도 주님은 우리를 최후승리의 나라로 인도하십니다. 깊은 구렁에서도 저와 여러분을 구원해 주십니다. 영국 속담에 “사랑하면 천 개의 눈이 생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천 개의 눈이 있으면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다른 이들이 할 수 없는 것들이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있다면, 기도의 향기입니다. 기도는 잠자는 예배를 깨어나게 합니다. 금대접 위에 담긴 성도들의 기도의 향기 외엔 처해진 시대를 이길 방법이 없습니다. 본질을 강화하기 위해서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존 웨슬리는 기도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이사야는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은 찬송하게 하시려고 인간을 지었다고 말씀합니다. 유진피터슨은 ‘이 책을 먹으라’라는 그의 책에서 거룩한 공동체는 개인의 체험을 성경의 권위 아래 두어야 한다. 성경을 다시 중심부로 이끌어와 그리스도인의 삶을 깊이 있게 세워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목회자에게 가장 큰 복은 설교를 준비하며 성경의 말씀을 매순간 묵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은 날마다 저의 부족함을 비추는 일이며,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설수 없음을 인정해야만 하는 시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새해에도 케임브리지 교회가 44년동안 걸어 온 것처럼 말씀과 기도, 새노래 위에서 든든히 서가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12/25/2022 | 성탄예배 메시지2

완벽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 The Perfect Drama of God's Salvation

누가복음 2:1-12

마태복음 2장에 나오는 ‘동방박사 이야기’와 누가복음 2장에 나오는 ‘목자들의 이야기’를 가리켜 ‘The First Christmas Story(첫 번 크리스마스 이야기)’라고 합니다. 가장 오래되고, 믿을만한 크리스마스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누가는 시리아 ‘안디옥(Antioch)’에 살던 그리스 사람으로 역사가로서 소양(素養)을 갖춘 사람이었고, 직업은 의사였다고 합니다. 누가가 살던 안디옥에 크리스천 디아스포라 교회가 생겼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박해를 피해 지중해 연안으로 크리스천들이 피신함으로써 생긴 교회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안디옥 교회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이 들렸습니다. 안디옥 교회에 이방인들이 들어오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예루살렘 교회는 아직 이방인들에 대한 입장도 정해진 것이 없었고, 이방인 선교에 대한 준비도 되지 않은 때였습니다. 당황한 예루살렘 교회는 급히 ‘바나바(Barnabas)’라는 사람을 보내서 안디옥 교회의 실태를 조사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바나바’는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사도행전 11:24). 이 말은 바나바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뜻입니다. 안디옥 교회의 이방인 선교에 대한 긍정적인 보고서를 예루살렘 교회로 보낸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에 계속 머물면서 사울이라는 사람을 데려와 함께 일년 동안 교인들을 가르쳤습니다. 덕분에 안디옥 교회에서 이방인 선교가 더욱 활발하게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어쩌면 이 때 안디옥에 살던 누가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지지 않았을까요? 

누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는 그 때부터 예수님에 대한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 때 예수님에 대한 상당한 자료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누가는 그 때 이미 자기처럼 예수님에 대해 글을 쓰는 사람들이 여러 명이 있었다고 그의 복음서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데오빌로(most excellent Theophilus)’라는 최고위직 그리스 관리에게 헌정(獻呈, dedication)하는 형식으로 예수님의 일대기(一代記, biography)를 기록했습니다. 누가는 자기가 모은 자료들을 ‘순서대로(in consecutive order, 누가복음 1:3)’ 배열하여 읽는 사람이 예수님의 생애를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누가복음’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을 보십시오. 역사가 답게 누가는 예수님이 탄생하실 무렵의 세계 정세를 상세하게 기록합니다. “그 때에 아구스도 황제가 내린 칙령에 따라온 나라가 호적 등록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구레뇨가 시리아의 총독으로 있을 때 행한 첫 번째 호적 등록이었습니다.” 여러분, 성탄절 이야기는 누가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생생한 역사적인 사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 나오는 ‘아구스도 황제’는 세계사에 나오는 로마제국의 1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Augustus, B.C. 63-A.D. 14)입니다. 줄리어스 시저((Julius Caesar)의 양아들로 ‘안토니우스(Marcus Antonius)’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을 이기고 권력을 잡은 장악한 사람입니다. 황제가 되기 전 그의 이름은 ‘옥타비아누스(Octavianus)’였습니다. 로마의 원로원에서 그에게 ‘아우구스투스(The Exalted)’라는 이름을 줬다고 합니다. 그는 유능한 정치가였습니다. 그가 통치했던 시대를 ‘Pax Romana(로마의 평화)’라고 합니다. 

‘아구스투스’ 황제는 로마가 다스리는 지역을 몇개의 구역으로 나누어 인구조사를 하라는 칙령(Creed)을 내렸습니다. 그 때 ‘구레뇨(Quirinius)’라는 사람이 시리아의 총독으로 있었기 때문에 팔레스타인 지역은 구레뇨가 호적 등록을 관장하게 되었습니다. ‘아우구스투스’나 ‘구레뇨’는 모두 실존 인물들입니다. 통치자들은 자신의 권위를 드러내고 세금을 징수하기 위한 자료를 만들기 위해 인구 조사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B.C. 4년경의 역사적인 상황을 설명한 누가는, 이제 갈릴리의 나사렛에 살고 있던 마리아와 요셉, 두 사람에게 초점을 맞춥니다. 누가는 그때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요셉은 다윗 가문의 자손이었으므로 갈릴리 나사렛을 떠나 유대 지방에 있는 다윗의 마을로 갔습니다. 이 마을은 베들레헴이라고 불렸습니다(So Joseph also went up from the town of Nazareth in Galilee to Judea, to Bethlehem the town of David).” (4절, NIV) 이 말씀을 잘 보십시오. 누가는 나사렛에서 베들레헴으로 ‘올라갔다(went up)’고 기록했습니다. 베들레헴은 나사렛보다 지대가 높습니다. 고도 차이가 430m정도 나기 때문에 이런 표현을 쓴 것입니다.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는 약 90마일(145km)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요단강 줄기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예루살렘에서 다시 남서쪽으로 5마일 정도 가야 합니다. 약 일주일은 걸어야 갈 수 있는 거리입니다. 출산 날이 임박한 마리아에게 그 길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베들레헴’은 인구 수가 500명 밖에 안 되는 작은 마을입니다. 그런데 호적 등록일 마감 직전에 갑자기 사람들이 몰리는 바람에 여관에 빈 방이 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요셉과 마리아는 마구간에서 자야 했습니다. 바로 그 날 밤에 예수님이 태어나셨습니다. 아기를 누일 자리가 없어서 포대기에 싸서 ‘구유(manger)’에 뉘었습니다. 그 밤에 손님들이 찾아옵니다. 그들은 베들레헴 근처에서 한 밤중에 양을 치던 목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하늘로부터 천사들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두려워 마라. 모든 백성을 위한 큰 기쁨의 소식을 가지고 왔다. 오늘 다윗의 마을에 너희를 위하여 구세주께서 태어나셨다. 그는 곧 그리스도 주님이시다.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볼 것인데,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증거이다.” (누가복음 2:10-12) 목자들은 ‘다윗의 마을(the city of David)’이라는 말을 듣고 ‘베들레헴’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오늘 저녁에 태어난 아이를 찾다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발견했습니다. 모든 것이 천사가 말해 준 그대로인 것을 목격(目擊)한 목자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갔습니다.

버나드 앤더슨(Bernhard W. Anderson, 1916-2007)이라는 구약성서 학자가 있습니다. 구약학의 대가(大家)입니다. 프린스톤 신학교와 드류 신학교에서 가르쳤고, 보스턴 신학교에서도 가르쳤습니다. 대표작은 ‘Understanding The Old Testament(구약성서 이해)’라는 책입니다. 신학교에서 교과서로 사용하는 책입니다. 이분이 책을 많이 썼는데요. 주로 일반 신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책을 많이 썼습니다. 그런 점에서 많은 공헌을 한 분입니다. 이분이 쓴 책 중에 ‘The Unfolding Drama of the Bible(펼쳐지는 성경의 드라마, 1956)’이라는 작은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구약과 신약을 한편의 드라마로 구성하여 독자들이 구약과 신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쉽게 이해하도록 쓰여진 책입니다. 

요즘 K-팝, K-드라마가 인기입니다. 외국인들이 K-드라마에 열광합니다. 어떤 외국인들은 K-팝이나 K-드라마를 보다가 한국말을 익힐 정도입니다. 스탠퍼드대 대학에서 한국 문학과 영화, 대중문화를 가르치는 다프나 주르(Dafna Zur)라는 사람은 K-드라마의 인기 비결을 “예측성과 독창성 사이에서 균형을 잘 잡고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뻔한 이야기이지만 여기에 독창성이 가미된다는 것입니다. "뛰어난 영상미와 한국의 문화와 예절, 전통이 가미되고, 주인공들의 유모어와 한국식 반전(reversal)이 들어간다”고 평가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구원의 드라마는 어떨까요? 이 하나님의 드라마가 얼마나 완벽한 지 한번 보시겠습니까? 먼저 우리는 구약성경 미가 5:2에 나오는 메시아에 대한 예언 말씀을 확인해야 합니다. 미가(Micah)는 기원전 735-700년에 남왕국 유다에서 활동하던 예언자입니다. 이사야와 동시대 사람입니다. 미가가 예언한 메시아의 탄생에 대한 말씀 중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다.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But you, O Bethlehem Ephrathah, are only a small village among all the people of Judah. Yet a ruler of Israel will come from you, one whose origins are in the distant past).” (미가 5:2) 

마리아와 약혼한 요셉은 유다 지파의 다윗 가문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마리아는 나사렛에 살던 신실한 믿음을 가진 여자라는 것밖에 따로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고대 경전을 연구하는 한 학자는 마리아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리아는 성전, 제사장, 부자가 모인 종교적 중심지 예루살렘과 멀리 떨어진, 나사렛의 평범한 소작농의 딸이었을 것이다. 어려서부터 마리아는 어머니와 마을의 여자들과 함께 일을 하고, 옷감을 짜며 음식을 하고, 땔감을 모으고, 마을 우물에서 물을 긷고, 들판에서 일을 하면서 가족의 생계를 도왔을 것이다.” 

무슨 사연인지 모르지만 요셉과 마리아는 호적 등록 마감 시간에 쫓겼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해산할 날이 임박했음에도 불구하고 베들레헴으로 가야 했습니다. 왜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하필이면 그 때 칙령을 내렸을까요? 조금만 늦게 ‘칙령’을 내렸더라면 요셉은 만삭인 마리아를 데리고 베들레헴에 갈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만일 그랬더라면 마리아는 예수님을 베들레헴이 아니라 나사렛에서 낳았을 것입니다. 만에 하나 요셉이 만삭인 마리아를 데리고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 다행히 빈 방이 있었더라면 예수님을 말구유에 누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만일 요셉이 다윗의 가문에 속한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호적 등록을 위해 베들레헴이 아니라 다른 마을로 가야했을 것입니다. 만일 그랬더라면 베들레헴에서 메시아가 탄생한다는 미가의 예언은 공수표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정교하게 미가의 예언과 목자들이 들었던 천사의 말이 맞아 떨어집니다. 정말 이것이 우연히 일어난 일이었을까요? 

700년 전에 있었던 미가의 예언이 예수님의 탄생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미가의 예언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이사야의 예언도 이루어졌습니다. 보세요.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Therefore the Lord himself will give you a sign: The virgin will be with child and will give birth to a son, and will call him Immanuel).” (이사야 7:14) 사람들은 이 말씀을 읽으면서 ‘virgin(처녀)’라는 말에 주목합니다. 학자들 중에도 이건 말도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 ‘virgin’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알마(almah)’라는 말을 ‘젊은 여자(young wom-an)’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 역사를 보면 교회는 꾸준하게 ‘알마’라는 말을 ‘virgin’으로 번역했습니다. 그리스어로 번역할 때도 ‘처녀’라는 뜻을 가진 ‘파세노스(παρθένος)’라는 말로 번역했습니다. 여러분, 이사야의 예언 속에 나오는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라는 말은 ‘징조(sign)’입니다. 징조는 신기하고 놀라운 일, 말도 안 되는 일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보여주는 ‘징조’였습니다. 미가의 예언이 이루어진 사실에 대해서는 누가가 잘 기록했고, 이사야의 예언이 이루어진 사실에 대해서는 마태가 그의 복음서에 잘 기록했습니다(마태복음 1:23). 

여러분, 미가가 예언했고, 이사야가 예언했던 예언이 예수님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그대로 이루어졌다는 말씀에 세 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큰 그림으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메시아의 기원이 ‘in the distant past(아주 먼 과거)’ ‘from the days of eternity(영원의 날부터, NASB, ABPE, HCSB)’인 것처럼,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즉흥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아주 오래 전부터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서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를 사용하시고, 시리아 총독 ‘구레뇨’를 사용하셨습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 그들은 대단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었지만,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서는 하나님께서 필요할 때 잠깐 사용하신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둘째로, 우리는 이 사실을 통하여 우리의 구원에 대하여 흔들리지 않는 확신(確信)을 갖게 되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700년 전에 있었던 예언이 예수님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그 예언이 이루어진 과정을 꼼꼼하게 확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히브리서에 있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구원은 매우 위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살아간다면 그것은 책망을 받을 행동입니다. 구원에 대해서 처음 말씀하신 분이 바로 주님이시며, 또한 그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이것이 진실이라고 우리에게 증명해 주었습니다(So what makes us think we can escape if we ignore this great salvation that was first announced by the Lord Jesus himself and then delivered to us by those who heard him speak).” (히브리서 2:3) 

셋째로, 우리는 이 사실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이사야 49:16) “나는 너를 이름으로도 안다. 너는 나에게 은혜를 입었다(I know you by name, and I look favorably on you).” (출애굽기 33:12) “독수리가 날개로 새끼들을 실어 나르듯 내가 너희를 업어서 데리고 왔다.” (출애굽기 19:4) “우리는 하나님의 걸작품입니다(We are God’s masterpiece).” (에베소서 2:10) ‘masterpiece’는 대가들이 그의 혼을 불어넣어 만든 명작들을 말합니다. ‘에밀레종’에 얽힌 전설이 있습니다. 신라(新羅)의 경덕왕은 선대(先代) 왕을 기리는 ‘신종(神鐘)’을 만들라고 했습니다. 기술자들은 여러 번을 실패한 끝에 한 어머니가 시주한 아이를 쇳물에 녹여 마침내 천상(天上)의 소리를 내는 ‘신종’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죄로 물든 우리를 ‘다시 창조하기 위해(에베소서 210)’ 그 아들을 ‘화목제물’로 드리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위한 구원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놀라운 반전(反轉)이 있습니다. ‘화목제물’이 되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우리의 주님이 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완벽한 드라마’를 연출하셨습니다. 드라마의 주인공은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드라마는 탄탄한 스토리와 그 구성(plot)에 있어서 한치의 빈틈이 없습니다. 드라마의 ‘클라이맥스’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τετέλεσται, 요한복음 19:30)” 하고 외치실 때,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두폭으로 ‘찢어지는(마태복음 27:51, 마가복음 15:38, 누가복음 23:45)’ 장면입니다. 우리 앞에 막혀 있던 ‘새로운 생명의 길(a new and life-giving way, 히브리서 10:20)’이 열리는 순간이었습니다.

 

12/18/2022 | 대강절 넷째 주일 메시지

Love Came Down at Christmas

요한복음 3:14-18

오늘은 사랑의 촛불을 켰습니다. ‘사랑의 촛불을 켠다’는 것은 일종의 ‘은유적인 행위(metaphorical action)’입니다. 깜깜한 곳에 촛불을 켜면 주변이 밝아지듯이,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는 세상에 참 사랑이 무엇인지 보여 주는 놀라운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요한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신 일들을 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Christina Georgina Rossetti(1830-1894)라는 영국의 시인이 ‘Love Came Down at Christmas(사랑은 크리스마스에 내려왔네)’라는 시를 썼습니다. 이 시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크리스마스 캐럴로 부르고 있습니다.

Love came down at Christmas, 사랑은 크리스마스에 내려왔네
Love all lovely, Love divine; 모두가 사랑스러운 사랑, 신성한 사랑 
Love was born at Christmas; 사랑은 크리스마스에 태어났네
star and angels gave the sign. 별과 천사들이 그 표적을 보였네

Worship we the Godhead, 우리는 삼위(三位)의 하나님을 예배하네
Love incarnate, Love divine; 사람의 몸을 입은 사랑, 신성한 사랑
worship we our Jesus, 우리는 예수님을 예배하네 
but wherewith for sacred sign? 하지만 무엇으로 성스러운 표적을 (예배할까?)

Love shall be our token, 사랑은 우리의 징표이며
Love shall be yours and love be mine, 사랑은 당신의 것이며 나의 것
Love to God and to all men, 사랑을 하나님과 모든 사람들에게
Love for plea and gift and sign 간청과 선물과 표적을 위한 사랑을

오늘 본문 말씀의 배경은 멀리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생활하던 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광야는 삶에 필요한 것들이 공급되지 않는 곳입니다. 마실 물이 없고, 먹을 것이 없습니다. 광야에서 자라는 식물은 키가 작고 가시가 난 엉겅퀴 같은 것들입니다. 낮과 밤의 기온차가 심합니다. 인간이 가진 기술과 지식과 경험이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되는 곳이 광야입니다. 광야에서 인간성의 바닥이 모두 드러났습니다. 백성들은 지도자였던 모세와 아론을 향해 불평과 원망을 쏟아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자기 백성을 광야로 데리고 오신 하나님께 대한 불평과 원망이었고, 그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낸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否定)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생활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감사의 마음을 꾸준히 유지하는 것입니다. 불평과 원망의 마음이 들 때, 우리는 신속하게 감사의 마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빌립보서 4:6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감사함으로(with thanksgiving)’라는 말은 지금까지 나를 인도하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마음을 의미합니다. 모든 것이 내가 생각하는 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감사에 대한 꺾이지 않는 마음을 유지한다는 것은 이 모든 일들 속에 하나님의 섭리와 목적과 계획이 들어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처한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 때에도 감사의 마음을 계속 유지하면 그 때 내 삶의 주인 되시고 인도자가 되시는 하나님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 빌립보서 4:6 말씀의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평하고 원망할 때 갑자기 어디서 ‘불뱀들(poisonous snakes)’이 나타났습니다. ‘불뱀들’은 불평하는 사람들을 사정없이 물었습니다. ‘불뱀’에 물린 사람들이 쓰러져 죽어갔습니다. 다급한 모세는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모세의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은 살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구리뱀을 만들어서 장대에 매달아라. 뱀에 물린 사람은 그것을 쳐다보면 살 것이다.” (민수기 21:9)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장대에 달린 구리뱀을 쳐다보는 사람들이 모두 치유된 것입니다. ‘구리뱀’에서 무슨 치유의 능력이 나온 것이 아니라, 구리뱀을 쳐다보는 사람은 산다는 말을 믿고 그대로 행했던 믿음이 이 사람들을 살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As Moses lifted up the bronze snake on a pole in the wilderness, so the Son of Man must be lifted up, so that everyone who believes in him will have eternal life.” (14절) ‘The Son of Man (인자)’는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높이 들린다(lifted up)’는 말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높이 들린다(lifted up on the Cross)’는 말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나를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복음(福音)’입니다. 이것이 ‘기쁜 소식(Good News)’, 그리스 말로 ‘유앙겔리온(εὐαγγέλιον)’입니다. 아주 쉬운 ‘구원의 길’이 믿기만 하면 모든 사람들에게 열린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어린 아이들도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믿으면 구원을 얻고, 연세가 많으신 분들도, 학자들도, 공부를 많이 하지 않은 사람들도,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권력이 있는 사람도, 없는 사람도, 누구나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저 분이 나를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 매달리셨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구원을 얻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요한은 계속해서 이렇게 그의 복음서에 기록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여 독생자를 주셨다. 이는 누구든지 그의 아들을 믿는 사람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다.” (16절) 이 말씀은 개역성경으로 읽어야 제 맛이 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사람들은 이 말씀을 복음 중의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요한복음 3:16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요? ‘세상’을 사랑하신 사랑입니다. 이 말씀에 나오는 ‘세상’은 ‘코스모스(κόσμος)’라는 말입니다. ‘우주(universe)’라는 뜻도 있고, ‘질서’라는 뜻도 있고, ‘the whole of creation(모든 피조물들)’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세상’이라는 말 속에 저와 여러분도 포함됩니다. 그렇다면 신약성경이 기록되었을 때 세상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Live clean, innocent lives as children of God, shining like bright lights in a world full of crooked and perverse people(구부러지고 삐뚤어진 사람들이 가득한 세상 속에서 빛들처럼 깨끗하고 순결하게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십시오).” (빌립보서 2:15) 2,000년 전에 이 말씀을 쓴 바울은 인간의 삶이 얼마나 타락했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세상’에는 죄인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들 속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만한 것들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죄에 물들지 않은 깨끗한 세상을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깨끗한 세상에 독생자를 보내 주신 것이 아니라 죄인들로 가득한 ‘세상’을 사랑하셔서 자기의 독생자를 보내 주신 것입니다. 바울이 사용한 ‘perverse people’은 단순히 ‘삐뚤어진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창조의 질서를 깨뜨리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그 사람들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는 사람들(로마서 1:26-27)’이라고 했습니다. 오죽하면 하나님께서 400년 동안 이런 사람들과 소통을 끊고 침묵하셨겠습니까? 누가 이 400년을 가리켜 ‘하나님께서 생각하고 또 생각하신 기간’이라고 했는데,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생각하고 또 생각하신’ 끝에 죄로 물든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기의 독생자를 보내 주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하지만, 즉흥적으로 이런 생각을 하신 것이 아니라 사실은 태초부터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스스로 자신들을 구원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 그리고 구원의 소망이 없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 세상에 죄에 물들지 않은 깨끗한 사람들만 살고 있었다면 독생자가 올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신 것들을 미워하면 안 되고, 피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고 하지 말라(사도행전 10:15)”는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것을 우리가 속되다고 피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서 믿음을 지킨다는 이유로 세상을 멀리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복음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세상 속으로 들어가라고 합니다. 사랑이 내려왔다고 하지 않습니까? 세상 속으로 들어가서 죄로 물든 이 세상에서 깨끗하고 순결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늘의 별처럼 빛을 비추라고 합니다.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드러내라(로마서 12:2)”고 합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의 작은 차이가 엄청난 결과의 차이를 가져옵니다. 가끔 기도할 때 ‘다음 세대’를 걱정하는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의 본심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다음 세대’ 걱정하기 전에 ‘지금 세대’인 여러분 자신들을 먼저 걱정하십시오. ‘지금 세대’가 잘하면 ‘다음 세대’는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믿음은 ‘지금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달되는(pass on)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메타버스(metaverse)’라는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가상(假想)을 의미하는 ‘메타(meta)’와 우주(universe)를 의미하는 ‘버스(verse)’의 합성어입니다. ‘확장 가상 세계’ 혹은 ‘가상 우주’라고 번역합니다. 현실 세계를 디지털 기반의 가상 세계로 확장해 가상 공간에서 모든 활동을 할 수 있게 만드는 시스템입니다. ‘메타버스’가 우리의 코 앞에 다가와 있습니다. 우리의 미래가 어떻게 변화될 지 도무지 가늠이 되지 않습니다. 좋은 쪽으로 발전되어 나갈 수도 있고, 우리가 기대한 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런 세상을 하나님은 지금도 사랑의 대상으로 삼으시고, 구원의 대상으로 삼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크리스마스에 사랑이 세상으로 내려왔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에게 세상을 피하지 말고 세상 속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만큼 세상에 대한 교회의 책임과 사명은 과거 어느 때보다 막중(莫重)해졌습니다. 지금의 목회 형식과 교회에 대한 고정 관념을 가지고는 변화된 세상을 책임질 수 없습니다. 세상을 향한 교회의 메시지가 중요한 시대입니다.

지난 ‘리뉴(ReNEW)’에 좋은 세미나가 많이 열렸습니다. 저는 김연준 목사님의 세미나에 들어갔습니다. 세미나의 내용은 새로운 시대에 크리스천들이 세상에 전할 메시지는 과거와 같은 일방적인 메시지의 선포가 아니라 메시지에 대한 ‘창의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그 세미나에서 제시한 것이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이었습니다. 새 시대의 크리스천들은 ‘스토리텔러들(storytellers)’이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이 내 삶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내가 복음의 능력으로 고난의 시간들을 어떻게 이겨냈는지, 각자의 ‘스토리’를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새로운 시대는 일방적인 교회의 메시지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크리스천들이 쓴 ‘스토리(삶의 메시지)’를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요한복음 3:16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아주 ‘구체적인 사랑(concrete love)’입니다. 하나님은 ‘His only begotten Son (독생자, NASB)’을 우리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그 아들을 ‘화목제물’로 삼아서 하나님과 우리와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에게 주어진 ‘신적인 특권들(divine privileges)’을 모두 포기하셨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humility of Jesus(예수님의 겸손)’ 혹은 ‘humiliation of Jesus(예수님의 굴욕)’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빌립보서 2:5-8). 크리스마스의 아름다운 이야기 배경에는 하나님의 아들의 ‘비하’와 ‘창피’와 ‘굴욕’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아야 우리의 구원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알게 됩니다. 

그런데, 세상은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했습니다. 이 사실을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 예수님이 태어나셨을 때 베들레헴에 방이 없었다는 말씀으로 표현했습니다(누가복음 2:7). 여관에 방이 없어 마구간에서 잠을 자게 된 마리아의 요셉은 그날 밤에 아기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말구유(manger)에 뉘었습니다. 똑 같은 사실을 요한은 “그분이 자기의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들은 그분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요한복음 1:11)”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탄생 이야기에 반전(反轉)이 있습니다. “오늘 다윗의 마을에 너희를 위하여 구세주께서 태어나셨다. 그는 곧 그리스도 주님이시다.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볼 것인데,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증거이다.” (누가복음 2:11-12)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는 그 아기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인 것을 보여 주는 ‘징조(sign)’였습니다. 이 ‘징조’를 보고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를 알아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베들레헴 근처에서 그 밤에 양을 치던 목자들이었습니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영접하는 사람,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그가 누구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누리게 된다.” (요한복음 1:12)

Christina Georgina Rossetti의 시 구절 중에 ‘사랑은 우리가 가진 징표(Love shall be our token)’라는 구절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던 우리가 예수님을 통하여 사랑의 ‘징표’를 갖게 되었습니다. ‘토큰(token)’이라는 말에 ‘징표’라는 뜻이 있지만, 우리 주머니 속에 있는 동전 같은 것들을 ‘토큰’이라고 합니다. 크리스마스에 사랑이 내려옴으로써 우리는 주머니 속에 ‘토큰들’을 갖게 되었습니다. Rossetti는 ‘Love for plea and gift and sign(간청과 선물과 사인을 위한 사랑)’ 이렇게 그의 시를 마칩니다. 우리 주변에 사랑을 호소하고 간청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들에게 사랑의 토큰을 나누어 줘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 우리가 사랑의 선물을 줘야 할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에게 사랑의 토큰들을 나누어 주십시오. 우리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사랑의 토큰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고, 예수님의 제자인 것을 드러내는 사인들입니다. 이 모든 일은 크리스마스에 사랑이 내려옴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