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모음
11/21/2021 | 추수감사절 메시지
하나님을 잊고 사는 사람들 Those Who Are Forgetting God
시편 50:22-23
세월이 어찌나 빨리 가는지 어느덧 추수감사절을 맞이했습니다. 팬데믹 시대에 맞는 추수감사절, 좀 특별한 의미가 느껴지지 않습니까? 감사의 이유도 더 많을 것 같고요. 그런데, 우리가 살다 보면 감사할 때보다는 불평할 때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멕시코의 어느 마을에 온천과 냉천이 옆에서 가지런히 솟아나는 신기한 곳이 있다고 합니다. 한쪽에서는 부글부글 끊는 온천이 땅에서 솟아오르고, 바로 그 옆에는 얼음 물과 같이 차가운 냉천이 솟아오른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동네 여자들이 빨랫감 가지고 와서 온천에서 빨래를 삶고, 냉천에서 헹군다고 합니다. 그 모습을 본 한 외국 관광객이 안내자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이곳 부인들은 찬물과 더운 물을 마음대로 쓸 수 있으니 참 좋겠습니다. 이곳 사람들에게는 감사하는 마음이 많겠군요?” 그랬더니 멕시코 안내원의 “천만에요. 불평이 더 많답니다. 비누가 나오지 않는다고 불평한답니다.”
감사에 대한 이야기 하나 더 할까요? 일곱 살 난 아이를 데리고 이웃집에 놀러간 어떤 엄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 집의 아줌마가 이 아이에게 사과를 하나 주었는데 아이는 감사하다는 인사도 없이 얼른 받았습니다. “얘야!” 엄마가 이 아이를 불렀습니다. “어른이 사과를 주면 뭐라고 말해야 되지?” 아이는 잠깐 생각하더니 “아줌마, 사과 깎아 주세요”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감사를 모르는 이 아이처럼, 오늘 우리도 다른 사람의 호의에 대하여 감사를 모르고 살고 있지 않는지, 우리 자신들을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시편 50편은 아삽(Asaph)이라는 사람이 쓴 시편입니다. 아삽이 쓴 시편은 모두 열 두 편입니다. 시편의 많은 부분을 다윗이 썼는데요. 성서학자들은 다윗이 쓴 시편은 모두 일흔 세 편이라고 합니다. 아삽이 쓴 시편들은 모두 상당한 문제 의식을 가지고 쓴 시편들입니다. 예를 들면 시편 73편은 “왜 악한 사람이 떵떵거리며 부자로 사는가?” 이런 문제를 가지고 쓴 시편입니다. 시편 77편은 “아직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가?” 이런 문제를 다룬 시편입니다. 시편 79편은 “어떻게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힐 수 있는가?” 이런 문제를 다룬 시편입니다. 아삽은 레위지파 사람으로, 성가대 대장으로 일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제금(提金) 연주에 일가견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역대상 16:4-5). 제금은 오늘날 심벌즈(cymbals)’입니다. 그리고 아삽은 ‘선견자(the seer, 역대하 29:30)’라고 불릴 만큼 영적인 통찰력과 지식을 가진 사람으로 다윗이 옆에 두고 썼던 그 시대의 인재였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하나님을 잊은 너희여(You who forget God)”라는 말이 나옵니다. 도대체 그 시대가 가지고 있는 문제들이 무엇이길래 아삽은 이런 시편을 쓰게 되었을까요? 아삽은 그 시대의 예배에 대하여 고민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삽의 눈에 비친 예배는 형식화된 예배였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예배자들의 마음에 감사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삽은 예배의 핵심을 하나님께 대한 감사라고 보았습니다. 감사 없이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감사가 없는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아삽은 습관적으로 반복되는 예배, 습관적으로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에 대한 문제점을 가지고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고 했습니다.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신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아삽이 말하는 올바른 행위는 감사입니다.
아삽은 형식적인 예배에 대해 무서운 경고를 합니다. “지금 이 문제를 고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너희를 찢으실 것이다”라고 경고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행위는 감사의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감사의 마음을 잃어버리면 형식적인 예배가 되고 맙니다. 어떤 경우에는 마음 속에 분노를 가지고 교회 일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분노를 가지고 교회 일을 하는 것보다는 교회 일을 잠시 쉬는 것이 좋을지도 모릅니다. 분노를 가지고 직분을 감당하기 보다는 그 직분에서 잠시 물러나 있는 것이 좋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행위는 감사의 마음으로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감사의 마음 없이 하나님을 예배하게 되면 결국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땅으로 여러분을 인도하시고 그 땅을 여러분에게 주실 것이오. 그 땅에는 여러분이 짓지 않은 크고 훌륭한 성들이 있소. 또 여러분이 채워 놓지 않은 훌륭한 물건들로 가득 찬 집들이 있고, 여러분이 파지 않은 우물들이 있으며, 여러분이 심지 않은 포도밭과 올리브 나무들이 있소. 여러분은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먹을 것이오. 그 때에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했던 여러분을 인도해 내신 분이 하나님임을 잊지 않도록 조심하시오. 하나님 존경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시오(When you eat and are full, then take care lest you forget the LORD, who brought you out of the land of Egypt, out of the house of slavery).” (신명기 6:10-13)
여러분, 성경에 왜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지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왜 하나님은 약속의 땅에 그들이 짓지도 않은 성을 주시고, 온갖 값진 물건들도 가득 찬 집을 주시고, 그들이 파지도 않은 우물들을 준비해주셨을까요? 우리는 이 말씀을 읽을 때 ‘그들이 하나님을 잊지 않게 하려고(lest you forget the Lord)’라는 말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 말씀을 반대로 읽어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갔는데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온갖 고생을 하면서 성을 건축했고, 집을 짓고, 고생고생해서 우물을 파서 물을 얻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들은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 내가 노력해서 얻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기 힘으로 무엇을 성취하고, 자기 힘으로 무엇을 얻었을 때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의 힘과 능력에 도취한 사람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을 잊어버립니다. 바빌로니아의 왕 느부갓네살(Nebukadnessar)의 불행을 기억하시지요? 느부갓네살 왕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와서 유다 왕국을 포위하고 무너뜨린 장본인입니다. 예루살렘 성을 18개월 간 포위했다고 합니다. 느부갓네살은 유다 왕국을 정복했을 뿐만 아니라 이집트를 공격하여 영토를 늘리고, 시리아, 모압, 암몬 등을 공격하여 영토를 늘리고, 포로들을 시켜 대대적으로 토목 공사를 했던, 막강한 힘을 가진 왕이었습니다. 이 느부갓네살이 어느 날, 왕궁의 옥상에 올라가 바빌론 시내를 보면서 자신이 이룬 업적에 감탄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위대한 바빌로니아 제국! 내가 내 힘과 권력으로 이 모든 것을 세우지 않았는가? 내 영광을 위해 세운 것이 아닌가(By my own mighty power, I have built this beautiful city as my royal residence to display my majestic splendor)?” (다니엘 4:30) 이렇게 자만했던 느부갓네살은 어느 날 왕위에서 쫓겨나고, 정신병에 걸려 비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감사는 자신의 힘과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는 사람의 입에서 나옵니다. 이런 말씀들을 그냥 흘려듣지 말고 깊이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성공한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높은 지위에 있거나, 권력을 가진 사람들을 부러워합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그만큼 교만해질 수 있는 가능성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맞습니까? 우리 힘이 약하고, 되는 일이 없는 것도 괜찮아요. 자기 힘이 약할 때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게 되거든요?
한국으로 귀국한 정은혜 자매가 이런 기도를 페이스북에 올렸더라고요. 이 기도에 이런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A Prayer By An American Confederate Soldier Seriously Disabled In The Civil War(남북 전쟁에서 심하게 부상을 입은 한 남부 군인의 기도)’ “나는 하나님께 나를 강하게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원하는 모든 걸 이룰 수 있도록, 하지만 하나님은 나를 약하게 만들었다. 겸손해지는 법을 배울 수 있도록 / 나는 하나님께 건강을 부탁했다. 더 큰일을 할 수 있도록, 하지만 하나님은 나에게 허약함을 주셨다. 더 의미있는 일을 할 수 있도록 / 나는 부자가 되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행복해질 수 있도록, 하지만 나는 가난을 선물 받았다.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도록 / 나는 재능을 달라고 부탁했다. 사람들의 찬사를 받을 수 있도록, 하지만 나는 열등감을 선물 받았다. 하나님의 필요성을 느낄 수 있도록 / 나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부탁했다.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하지만 하나님은 나에게 생명을 선물해주었다.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 나는 내가 부탁한 것을 하나도 받지 못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나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선물로 주셨다. 나는 그럴 자격이 없는 사람인데도 하나님은 내 무언(無言)의 기도를 다 들어주셨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축복받은 사람이다(I got nothing that I asked for-- but everything I had hoped for. Almost despite myself, my unspoken prayers were answered. I am, among all men, most richly blessed).”
마지막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또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한번 보세요. “이사야가 너희와 같은 위선자들에 대하여 한 말이 맞다. ‘이 백성들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마음은 내게서 멀구나. 헛되이 내게 예배를 드리고, 사람의 훈계를 교리인 양 가르친다(These people honor me with their lips, but their hearts are far from me. Their worship is a farce, for they teach man-made ideas as commands from God).’ 너희는 하나님의 계명은 무시하고 사람의 전통만 지키는구나.” (마가복음 7:6-8) 인간이 만든 생각(man-made ide-as), 아이디어, 지혜, 교훈 이런 것들을 마치 하나님의 것인 것처럼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아주 조심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이런 일을 합니까? 거짓 예언자들이 그런 일을 합니다. 하나님이 그런 말씀을 주시지 않았는데도 마치 하나님께 받은 말씀인 것처럼 자기들의 말을 가지고 사람들을 속이는 것입니다(에스겔 13:1-8). 율법주의자들이 그런 일을 합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세밀하게 지키려고 매뉴얼을 만듭니다. 세부 규정과 규칙을 만듭니다. 그리고 이 규정을 어기는 것은 곧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이 그런 일을 했습니다. 또 인본주의자들(humanists)이 그런 일을 합니다. 이 사람들은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 없이도 얼마든지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화면을 한번 보세요. “One of satan’s greatest lies is that if we apply enough human effort, wisdom and experience, we can take enough control of our lives to avoid pain, uncertainty, and disappointment(사탄의 가장 큰 거짓말 중의 하나는 만일 인간의 노력과 지혜와 경험을 충분히 적용한다면 고통과 불확실성과 실망 등을 피하기 위하여 우리의 삶을 충분히 조절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아삽은 감사가 없는 예배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감사가 있는 예배를 하나님께서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마다 감사의 마음으로 드리도록 하십시오. 예수님도 감사의 예배를 높이 평가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누가복음 17장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열 사람의 환자에게 “제사장에게 가서 너의 몸을 보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열 사람은 가는 도중에 몸이 깨끗하게 치유된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중의 한 사람은 자기 병이 나은 것을 보고 예수님께 돌아와서 감사를 드렸습니다. 하필이면 그 사람이 이방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하게 되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사람이 없단 말이냐?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 (누가복음 17:17-19)
우리가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합니까? 자기 몸이 나은 것을 보고 감사를 드리기 위해서 예수님께 왔는데, 예수님은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믿음을 구성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감사라는 것입니다. 감사가 없는 믿음은 허울 좋은 믿음입니다. 감사가 없는 믿음은 껍데기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좋다는 말은 그 사람의 믿음생활에 감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크리스천의 삶에 있어서 감사의 대상은 당연히 하나님이십니다. 교회 목사님에게도 감사하고, 간사님들에게도 감사하고, 친구들에게도 감사하고, 또 부모님에게 감사하고, 또 학교에서는 교수님들에게 감사해야 하지만, 우리가 감사해야 할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환경에 어떻게 변해도, 우리가 어떤 고난의 상황에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구약 하박국에 유명한 감사의 말씀이 있잖아요?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하박국 3:17-18) “I will rejoice because of the Lord.” “I will rejoice in the God of my salvation.” 이 고백이 우리 크리스천의 감사입니다.
바울이 아테네에 가서 아테네의 철학자들에게 하나님을 소개했던 말을 아시지요? “여러분이 하나님을 더듬어 찾기만 하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과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안에서 살고 있고 하나님 안에서 움직이며 존재하고 있습니다(For in him we live and move and exist).” (사도행전 17:28) 맞습니까? 이 말씀이 너무 감사하고 은혜가 되지 않습니까? 우리는 지금 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팬데믹 시대를 지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11/14/2021 | 시편 119편(I)
복 있는 사람이 걷는 길 The Way of A Blessed Person
시편 119:1-16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밤이 길고 기온이 선선하여 책 읽기에 좋다는 뜻일 것입니다. 이런 때에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까이하는 시간들을 가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저는 앞으로 몇 주에 걸쳐 시편의 백미(白眉)라고 하는 시편 119편을 가지고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시편 119편은 여러가지 면에서 독특한 시편입니다. 우선 길이가 매우 깁니다. 무려 176절까지 있습니다. 그리고 거의 매 절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말이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만큼 우리의 일상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시편 119편은 정교하게 의도적으로 쓰여진 시편입니다. 히브리어에는 22개의 자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시편 119편은 모두 22개의 연(聯, stanza)로 되어 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각 연이 히브리어 22개의 자음 순서대로 구성되어 있고, 각 연의 8개 절들이 같은 히브리어 자음으로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설명이 잘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한번 화면을 보세요. 시편 119편은 이런 식으로 매우 정교하게 의도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서론이 너무 길면 오히려 이 시편에 대한 호기심이 떨어질 수가 있으니까요. 바로 말씀으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시편 119편의 저자는 “어떤 사람이 행복한 사람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 답을 하는 식으로 써내려 갑니다. 여러분들은 행복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행복의 조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조건들이 채워지면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행복의 조건은 경제적인 것입니다. 며칠 전에 한 유튜브 채널에서 베트남에서 호화스러운 생활을 하려면 돈이 얼마나 있으면 되느냐고 사람들을 인터뷰했습니다. 이 질문을 받은 한 여성이 “저는 한 번도 그렇게 살아보지 않아서 얼마가 돈이 드는지 모르겠어요” 라고 대답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인터뷰하는 사람이 한 달에 얼마나 버느냐고 물었더니 150만원 정도 번다고 했습니다. 그만한 돈이면 웬만큼 살지 않으냐고 물었더니, 그 돈으로 부모님을 모셔야 하고, 형제들도 돌봐야 하기 때문에 빠듯하다고 대답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 사람들이 행복의 조건으로 가족을 꼽고 있습니다. 가족들이 서로 사랑하고 위해주면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대답이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요. 성경은 행복을 조건으로 보지 않고 관계(relationship)로 봅니다. 이런 말씀을 그냥 흘려듣지 마시고요. 행복에 대한 성경적인 가치관을 여러분의 가치관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 모두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보세요, 오늘 말씀에 “흠잡을 데 없는 올바른 길로 가는 사람이 행복하다(1절)”고 합니다. “여호와의 법을 따라 걷는 사람이 행복하다(1절)”고 합니다. “여호와의 법규를 지키는 사람이 행복하다(2절)”고 합니다. “마음을 다해 여호와를 찾는 사람이 행복하다(2절)”고 합니다. 어떻습니까? 행복할 수 있는 조건을 모두 만족해야 행복하게 된다면, 과연 그 조건을 모두 만족시켜서 행복하게 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하지만, 행복을 조건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관계적인 것으로 보는 성경적인 관점을 받아들이면, 누구나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성경 말씀이 모두 이런 식이거든요?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달란트의 비유’도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가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이 될 수 없고, 우리 모두가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이 될 수 없잖아요?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그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지 않고 투자해서 한 달란트를 남겼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 사람도 틀림없이 착하고 신실한 종이라고 주인에게 칭찬을 들었을 것입니다. 맞습니까? 성경은 내가 어떤 사람이든, 내가 다섯 달란트를 받았건, 두 달란트를 받았건, 한 달란트를 받았건 상관없이 모두가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길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행복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이 보여주는 행복한 삶의 비결은 하나님의 관계, 즉 말씀의 법을 존중하고 그 법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찾는다는 말은 전심(全心)으로, ‘with all your hearts’로 하나님을 찾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하기 싫은 공부를 억지로 할 때는 전심으로 공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때는 공부에 성과도 없습니다. 하지만, 스스로 원해서 공부할 때, 자발적으로 공부할 때는 전심으로 공부하게 됩니다. 그 때 실력이 붙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 원해서,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찾을 때 우리는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이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돈독해지고 성숙해집니다. 이런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시편 119편의 저자가 누구인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 저자는 청년들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이렇게 질문합니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길을 깨끗하게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8절) 청년들이 잘못된 가치관에 물들지 않고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성장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가장 큰 투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오랫동안 청년 목회를 하면서 가졌던 생각도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청년들이 너무 물질적인 가치관에 물들어 가고 있습니다. 물론 청년들만 그런 것은 아니지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풍조가 그렇습니다. 믿음, 사랑, 정의, 의로움, 희생, 헌신, 섬김, 기도, 이런 것들에 대한 가치가 퇴색되고, 오직 물질적인 것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시편 110:3 말씀을 좋아합니다. 청년들도 이 말씀을 좋아합니다.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그런데,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는 잘 모릅니다. Amplified Bible은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Your people will offer themselves willingly [to participate in Your battle] in the day of Your power; In the splendor of holiness, from the womb of the dawn, Your young men are to You as the dew.” 하나님의 전쟁에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God’s people)이 기쁨으로 그 전쟁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그 ‘God’s people’ 중에 ‘하나님의 청년들이(God’s young men)’ 많이 참여합니다. 이 청년들이 누구입니까? 하나님께 새벽 이슬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순결하고 깨끗한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의 가치관에 물들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이 말을 뒤집어서 말하면, 세상의 가치관에 물든 청년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동원될 수 없는, 아무 쓸모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8-9절 말씀을 읽어 보십시오.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길을 깨끗하게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How can a young person stay pure)?” 이 시편의 저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By obeying your word)”라고 대답합니다.
고난 중에 있던 욥이 이렇게 당당하게 선언하는 장면이 생각납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But he knows where I am going. And when he tests me, I will come out as pure as gold).” (욥기 23:10) 내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또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길을 하나님께서 모두 알고 계시니까 이 고난이 끝나게 되면 나는 틀림없이 하나님 앞에 ‘pure gold(정금)’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선언입니다. 나중에 하나님께서 욥의 이런 자신감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그 때 가서야 욥은 “저는 알지도 못하면서 말하였고, 깨닫지 못하는 일들을 아는 체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지금껏 했던 제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합니다(욥기 42:3, 6)” 하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게 됩니다.
여러분, 욥이 그렇게 자신감에 차 있었던 것을 보면 욥이 올바로 살아왔던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욥의 주장이 어디가 잘못되었습니까?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pure gold’처럼 나타나는 것은 우리가 잘 살아왔기 때문이 아닙니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착하고 선한 사람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욥은 이점을 착각하고 자기의 의로움을 주장했던 것입니다.
다시 시편 119편 말씀으로 돌아가서 저자가 했던 질문을 다시 들어보십시오.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길을 깨끗하게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살면 깨끗하게 유지할 수 있습니다.” 나의 의(義)가 나를 깨끗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고,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선하고, 더 착해서 내가 깨끗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깨끗하게 만들어줍니다.
그러므로, 깨끗한 삶의 비결은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가치관으로 삼는 것입니다. 11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죄를 짓지 않으려고 주의 말씀을 내 마음 속에 두었습니다(I have hidden your word in my heart, that I might not sin against you).” ‘hidden’이라는 말이 눈에 들어옵니다. ‘감추다’라는 뜻이잖아요?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 속에 감춰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습니다. 내 마음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보물처럼 감춰 있습니다. 이 말은 단순히 수사학적인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가치관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는 뜻입니다.
‘죄를 짓지 않으려고’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일을 하지 않으려고’라는 뜻입니다. ‘유혹’을 영어로 ‘temptation’이라고 합니다. ‘tempt’라는 동사에서 온 말입니다. 낚시 바늘에 미끼를 꿰어서 물고기를 유혹합니다. 요즘에는 가짜 미끼를 많이 씁니다. 번쩍번쩍 빛이 나기도 하고, 가짜 미끼가 움직이기까지 합니다. 물고기들이 좋은 먹잇감으로 알고 덥석 물어버립니다. 틀림없이 그 일은 도덕적으로 옳지 않은 일입니다. 틀림없이 그렇게 결정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번 한번은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유혹에 넘어갑니다. 유혹은 달콤합니다. 그래서 한번이 두 번이 되고, 두 번에 세 번이 되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일을 계속하게 되고, 결국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게 됩니다.
유혹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가치관으로 삼는 것입니다. 요셉이 유혹을 받았을 때 그 집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오직 요셉과 요셉을 유혹하는 주인의 아내만 있었습니다. 주인의 아내가 계획적으로 벌인 일이었습니다. 정말 청년 요셉이 유혹에 넘어가기 쉬운 상황이었습니다. 그 때 요셉을 지켜 준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How could I do such a wicked thing? It would be a great sin against God(제가 어떻게 그런 악한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 큰 죄를 짓는 일입니다).” (창세기 39:9) 요셉의 이런 믿음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틀림없이 요셉은 아버지 야곱에게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배웠을 것입니다. 요셉은 형들이 질투할 만큼 아버지 야곱의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야곱이 아들들을 차별했다는 식으로 이 말씀을 읽어서는 안 됩니다. 아버지 야곱은 요셉을 옆에 두고 가르쳤을 것입니다. 이것이 아들들에 대한 차별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요셉아, 이것 하나만은 꼭 지켜라. 너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눈 밖에 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요셉에 대한 야곱의 교육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미래를 위한 값진 투자였습니다. 이 사건이 시발점이 되어 요셉은 감옥에 갇히게 되고, 그 때부터 요셉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지 않습니까?
둘째로, 나의 삶을 깨끗하게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은 하나님의 말씀을 중단하지 않고 계속 배우는 것입니다(12절).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것인지 확인해야 합니다(13절).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해서 배워야하는 이유는 내가 받아들인 가치관을 계속해서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소중함을 확인해야 하는 이유는 그래야 하나님의 말씀을 기뻐하며 따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나는 주의 법규에 따르는 것을 기뻐합니다. 재산을 많이 가지는 것보다 더 좋아합니다(I have rejoiced in your laws as much as in riches).” (14절)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런 고백의 말씀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가치관으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청년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가장 귀한 자산입니다. 자신을 깨끗하게 유지하는 청년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전투에 참가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지금까지 청년들을 양육하는 사명을 감당해 왔습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 사명을 감당해 나가야 합니다. 세상의 가치관에 물들지 않은 깨끗한 청년들을 양육하는 것이 우리 교회가 계속해서 해야 하는 일입니다. 이 일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확장하는 값진 투자입니다.
11/7/2021 |
계절이 주는 축복(IV) Season’s Blessing Of God
요한계시록 22:1-7
오늘은 ‘계절이 주는 축복’ 시리즈 설교 네 번째 마지막 시간입니다. 지금 찰스 강변이 한창 아름다운 때입니다. 한번 시간을 내서 강변을 걸어보면서 계절이 주는 하나님의 축복을 느껴 보시지요. 찰스 강에 놓인 다리가 여러 개 있습니다. 이 다리들은 케임브리지와 보스턴을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합니다. Longfellow Bridge가 있고요. Harvard Bridge가 있고요. Boston University Bridge가 있고요. River Street Bridge가 있고요. John W. Weeks Footbridge가 있고요. Anderson Memorial Bridge가 있습니다. 이 사진을 한번 보십시오. 무슨 다리인 것 같습니까? 케임브리지에서 올스턴으로 넘어가는 Anderson Memorial Bridge입니다.
얼마 전에 이 다리를 걷다가 이 다리 끝에 붙어 있는 동판(plaque)에 성경 말씀이 새겨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요한계시록 22:2에 나오는 말씀이었습니다. “On either side of the river, was there the tree of life, which bare twelve manner of fruits, and yielded her fruit every month: and the leaves of the tree were for the healing of the nations(강 양쪽에는 열 두 종류의 열매를 맺는 생명나무가 있었다. 이 나무들은 매달 열매를 맺었다. 그 나무의 잎은 모든 민족들을 치유하는 데 사용되었다).” 누가, 왜 이런 성경 말씀을 붙여 놓았는지 미스터리입니다. 다리를 건너는 사람들이 찰스강의 아름다움을 보면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말씀을 생각하라고 그 동판을 붙여 놓았을까요? 아니면, 이 다리가 이 강을 건너는 사람들을 유익하게 하고, 치유하는 강이 되기를 소망하는 마음으로 그런 동판을 붙여 놓았을까요? 저는 그 동판을 보면서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전통적으로 요한계시록은 서기 91-96년경에 예수님의 제자 요한이 기록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 때는 로마의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신격화(神格化) 작업이 진행되고 있던 때였습니다. 그 때 예수님의 제자 요한이 밧모섬(The Island of Patmos)으로 유배되었다고 합니다. 초대교회 교부들이 이런 증언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는 교회의 지도자 요한을 내버려 두면 신격화 작업에 지장이 있을 것으로 보고 밧모섬에 유배를 시킨 것입니다. 밧모섬에 채석장이 있었는데, 그곳에 유배온 죄수들에게 돌을 캐는 작업을 시켰다고 합니다. 그리고 밧모섬은 한번 유배 온 사람은 절대로 나갈 수 없는 곳으로 유명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이 없으신 하나님께 이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서기 96년에 도미티아누스가 암살되면서 로마의 정치적인 환경이 급변(急變)하게 됩니다. 그리고 요한은 사면(赦免)을 받아 밧모섬을 나오게 됩니다. 그 때 요한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기록한 두루마리를 가지고 나와 아시아에 있는 7교회에게 돌려가며 읽게 합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약성경의 마지막 책 요한계시록(Revelation)입니다.
요한은 이렇게 그가 계시록을 기록하게 된 이유를 말합니다. “나는 고난과 왕국과 부르심에 대한 참음과 인내 속에 있는 여러분의 동역자요, 형제인 요한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했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간증을 했다는 이유로 밧모섬에 유배되었습니다. 유배 중에 주께서 네가 본 것을 기록하여,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돌려 읽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1:9, 11)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일하다가 내일을 알 수 없는 섬에 유배되었지만, 그의 글 어디에서도 억울한 마음이나 원망하는 마음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대신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당당함과 여전히 사명감에 불타고 있는 그의 음성을 생생하게 들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크리스천의 삶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세상을 이렇게 당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가 쓴 요한계시록은 모두 22장까지 있는데요. 이 속에 그 시대를 살았던 크리스천들의 고난과 핍박받는 삶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모든 악한 세력을 물리치는 말씀이 나오고, 하나님께서 친히 통치하시는 ‘새 하늘(a new heaven)과 새 땅(a new earth)’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며,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주실 것이다. 이제는 죽음도, 슬픔도, 울음도, 아픔도 없으며, 모든 옛것들이 다 사라질 것이다.” (요한계시록 21:3-4) 그리고, 22장 마지막 장에는 끝까지 믿음을 지킨 사람들을 위해 예비되어 있는 ‘거룩한 성(the holy city)’ ‘새 예루살렘(the new Jerusalem)’의 모습이 아름답게 그려져 있습니다. “그 천사는 또 내게 생명수가 흐르는 강을 보여주었습니다. 수정같이 맑은 그 강은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와 그 성의 넓은 거리 한가운데로 흐르고 있었습니다. 강 양쪽에는 생명나무가 있어서 일 년에 열 두 번, 달마다 새로운 열매를 맺고 있었습니다. 또 그 잎은 모든 사람들을 치료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요한계시록 22:1-2)
요한계시록에는 한번 읽어서는 알 수 없는 많은 상징과 암호, 숫자, 그리고 메타포들이 등장합니다. 요한계시록을 해석하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고난과 핍박 속에 살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쓴 편지이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불온문서(不穩文書)로 낙인이 찍혀 압수될 수도 있기 때문에, 교회를 핍박하는 세력들을 상징적으로 기록했습니다.
여러분, ‘생명수 강’과 ‘생명나무 열매’ 그리고 ‘생명나무 잎’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강력한 메타포들입니다. 이 메타포들이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메시지가 무엇일까요? 첫째로, 이 메타포들은 에덴 동산 동쪽에 있는 ‘생명나무(창세기 3:22-24)’를 생각하게 합니다. 아시지요? 하나님은 뱀의 유혹을 받아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 먹고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가 생명나무 열매를 따먹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천사들을 시켜 지키고, 번쩍이는 ‘화염검(a flaming sword)’으로 길을 지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하나님을 피해 숨은 아담과 하와가 생명나무 열매를 따먹고 영원히 사는 길을 막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생명수 강가에 자라고 있는 생명나무는 어떻습니까? 강가에 지천(地天)으로 무성하게 자라고 있습니다. 이 생명나무들은 매달 다른 풍성한 열매들을 맺습니다. 누구나 따 먹을 수 있습니다. 지키는 천사들도 없고, 번쩍이는 ‘화염검’도 없습니다. 왜 이런 놀라운 광경이 펼쳐지고 있을까요?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에 더 이상 생명나무 열매를 따 먹지 못하도록 길을 막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16 말씀을 아시지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대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히브리서에는 이 말씀이 “By his death, Jesus opened a new and life-giving way through the curtain into the Most Holy Place(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은 커튼을 지나 지성소에 이르는 새로운 생명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히브리서 10:20)”라고 나와 있습니다. 비유적인 의미에서 예수님은 번쩍이는 화염검을 그의 죽으심으로 통과하여 생명나무 열매를 따먹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포세이돈 어드벤처(The Poseidon Adventure, 1972)’라는 감동적인 영화가 있습니다. 12월 31일, 뉴욕을 출발해서 아테네로 가던 ‘포세이돈’은 항해 도중에 해일을 만나 전복됩니다. 전날 밤에 시작되어 새해 새벽까지 계속되던 파티 중에 사고를 당한 승객들은 두 그룹으로 나뉘어집니다. 구조대가 올 때까지 기다리자는 그룹과, 가만히 있지 말고 배 위쪽으로 올라가자는 그룹으로 나뉘어집니다. 구조대를 기다리지만 말고 배 위쪽으로 올라가자는 그룹의 리더는 스캇(Scott)이라는 목사였습니다. 진 핵크만(Gene Hackman)이 목사 역을 합니다.
승객들은 살기 위한 모험을 시작합니다. 배가 뒤집혀 위 아래가 바뀌다 보니 올라가는 길을 찾는 일이 보통 어렵지 않습니다. 겨우 겨우 가다 보니 터진 파이프에서 뜨거운 수증기가 새어 나오는 바람에 더 이상 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누군가가 수증기가 나오는 밸브를 잠가야 하는데, 그것은 목숨을 희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스캇 목사가 그 일을 자처합니다. 그는 뜨거운 수증기를 온 몸에 맞으면서 가까스로 밸브를 잠그는데 성공하지만, 자신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밑으로 추락하여 죽고 맙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일행에게는 계속 올라갈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결국 끝까지 배 위로 올라갔던 사람들은 구조대원들과 교신(交信)하게 되고, 목숨을 건지게 됩니다. 제가 신학교 2학년 때 이 영화를 보았는데요. 스캇 목사의 희생적인 모습에서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저는 그 영화를 보면서 그 영화가 종교적인 메시지가 강한 영화라고 생각했습니다. 스캇 목사의 희생에서 예수님의 희생이 오버랩 되어 저에게는 매우 감동적인 이야기로 다가왔습니다.
둘째로, 생명수 강 양쪽에 자라는 생명나무와 그 열매, 그리고 모든 민족을 치유하는 생명나무 잎을 보면서 우리는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우리의 삶을 반성하게 됩니다. 우리가 눈을 감고 사니까 그렇지 우리 주변에는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로 넘쳐납니다. 올해 리뉴 주제가 ‘팬데믹 시대를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이 주제를 결정한 제 마음 속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힘든 시간을 잘 이겨 나가야 하겠다는 생각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주변 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그들의 힘든 삶을 치유하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실제적인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내 가정이, 내 가족들이 안전한 것으로 감사하는 것으로 그친다면 굳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들먹일 필요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믿은 덕분에 영원한 생명을 약속 받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들을 때 영원한 생명을 미래에 받는 것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지금 여기서도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사는 기쁨을 조금씩 누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이 어떤 것인지 조금씩 배우고, 알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약속 받은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그럴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실을 바울은 로마서 말씀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은혜의 자리로 우리를 데리고 왔습니다(Because of our faith, Christ has brought us into this place of undeserved privilege where we now stand).” (로마서 5:2) 주님은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마태복음 10:8)”고 하셨습니다. 부지런히 기회 있을 때마다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길을 알려야 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미션입니다.
생명나무의 잎이 모든 민족들을 치유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나의 삶을 반성해 보십시오. 나의 삶을 반성하는 일이 결코 흔한 일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의 거울에다가 나의 삶을 비쳐볼 때 나의 삶을 반성해 볼 수 있습니다. 지금 내가 다른 사람의 아픔을 치유하기는커녕 다른 사람에게 아픔을 주는 일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생명수 강가에 자라고 있는 생명나무 열매처럼, 그리고 많은 사람을 치유하는 생명나무의 잎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의 생명을 살리고 치유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영국의 사상가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1561-1626)은 그의 책 ‘학문의 진보(The Advancement of Learning, 1605)’에서 “이 세상에는 거미와 같은 사람이 있고, 개미와 같은 사람이 있고, 꿀벌과 같은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거미는 다른 곤충들이 잘 다니는 길목에 거미줄을 쳐 놓고 숨어있다가 먹이가 걸려들면 잽싸게 나가서 거미줄로 칭칭 감아 생명을 빼앗아 먹이로 삼습니다. 베이컨은 이런 형의 사람을 ‘이기적인 인간’이라고 하면서 이런 사람은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개미는 어떻습니까? 부지런히 열심히 일합니다. 개미들이 파 놓은 땅굴을 보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먹을 양식을 차곡차곡 쌓아 놓습니다. 그러나 개미들은 양식을 쌓아 놓기만 하고 그것을 나누지는 않습니다. 베이컨은 이런 형의 사람을 ‘개인주의 인간’이라고 하면서 이런 사람은 세상에 있으나마나 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꿀벌은 어떻습니까? 꿀벌도 개미처럼 부지런히, 쉬지 않고 꽃을 찾아다니면서 꿀을 땁니다. 그런데 꿀만 따는 것이 아니라 그 꽃으로 하여금 열매를 맺게 합니다. 그리고, 꿀을 모아 사람들과 나눕니다. 베이컨은 이런 형의 인간을 ‘이타적인 인간’이라고 하면서 세상에 꼭 필요한 인간이라고 했습니다.
가을이 깊어 가고 있습니다. 더 늦기 전에 아름답게 물든 단풍들을 보면서 계절이 주는 축복을 즐겨보십시오. 한번 시간을 내서 찰스 강변을 걸어보고, 제가 말씀드린 앤더슨 다리를 건너보시지요. 다리를 건너서 동판에 새겨 놓은 성경 말씀을 읽어 보세요. 다시 다리 위에서 아름다운 찰스 강을 즐겨보십시오. 그리고, 우리에게 약속되어 있는 ‘새 예루살렘성’ 중앙을 가로 지르는 ‘생명수 강’을 머리에 그려 보십시오. 그리고 달마다 열매를 맺어 사람의 생명을 살리고, 그 잎으로 모든 사람을 치유하는 ‘생명나무’ 열매와 잎을 머리에 그려 보십시오. 한 번뿐인 우리의 삶, 잘 살아야 합니다. 선하게 살아야 합니다. 착하게 살아야 합니다. 가치 있게 살아야 합니다. 열심히 일해서 아낌없이 나누어 주는, 세상에 꼭 필요한 꿀벌 같은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에 있으나마나 한, 세상에 피해를 안 주는 삶으로 만족하면 안 됩니다. 세상에 유익을 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10/31/2021 |
계절이 주는 축복(III) Season’s Blessing Of God
마태복음 7:15-20
오늘은 ‘계절이 주는 축복’ 시리즈 설교 세 번째 시간입니다. 케임브리지에서 차를 타고 약 30분 정도 가면 ‘콩코드(Concord)’라는 동네를 만나게 됩니다. 조용하고 자연이 아름다운 동네입니다. Ralph Waldo Emerson(1803-1882, 사상가), Henry David Tho-reau(1817-1862, 사상가), Margaret Fuller(1810-1850, 저널리스트, 여성 운동가), Amos Bronson Alcott(1799-1888, 교육자), 그리고 그의 딸 Louisa May Alcott(1832-1888, 소설가)등이 ‘초월주의(Transcendentalism)’라는 19세기 미국 철학을 만들어낸 동네입니다. 그 때 초월주의 사상가들이 만들었던 잡지 이름이 ‘다이얼(The Dial)’이었습니다. 자연에 우리의 삶의 주파수를 맞춘다는 의미에서 그런 이름을 붙인 것 같습니다.
이 글을 한번 보시겠습니까? "I went to the woods because I wished to live deliberately, to front only the essential facts of life, and see if I could not learn what it had to teach, and not, when I came to die, discover that I had not lived. I did not wish to live what was not life(내가 숲속으로 들어간 것은 인생을 의도적으로 살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인생의 본질적인 것들을 직면해 보고, 숲이 가르치는 것을 내가 배울 수 없는지 알아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내가 죽음을 맞이했을 때 내가 헛된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고 싶지 않았다. 나는 진정한 삶이 아닌 것을 살고 싶지 않았다)." 이 글은 헨리 소로우가 친구 에머슨의 권유로 콩코드에 있는 ‘월든 폰드(Walden Pond)’에서 2년 2개월 동안 자연 속에서 살면서 그가 왜 숲에서 살기로 작정했는지 그 동기를 쓴 글입니다. 그는 숲의 단순한(simple) 삶에서 느끼고, 체험하고 발견한 것들을 ‘월든(Walden)’이라는 그의 일기책에 기록했습니다.
소로우는 ‘월든의 숲(woods)’에서 인생의 에센스를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숲으로 들어갔습니다. 우리는 소로우처럼 숲으로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지금 계절이 주는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보스턴은 한국처럼 사계절이 있어서 참 좋습니다. 보스턴에서는 사계절이 주는 축복을 모두 느낄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이 사계절의 의미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봄은 생명과 희망(hope)의 계절이고, 여름은 모든 것이 성장하는 기쁨(joy)의 계절이고, 가을은 열매를 맺는 아름다움(beauty)의 계절이고, 겨울은 내일을 위한 안식과 반성(reflection)의 계절이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열매’는 우리 삶에 메시지를 전달하는 강력한 ‘메타포(은유, metaphor)’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속에 열매에 대한 말씀이 많은 것도 이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 것이다. 좋은 나무는 모두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16-17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저희 아버님은 생전에 한자(漢字)를 많이 쓰셨습니다. 글씨 대회에 나가서 입상도 많이 하셨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글씨를 쓰시더니 연세가 들어가시면서 언제부터 글씨를 쓰시지 않았습니다. 제가 서울에 갔을 때 왜 글씨를 쓰시지 않느냐고 여쭸더니 글씨를 쓰려면 여러가지 준비할 것이 많은데 그런 일들이 힘이 들고 귀찮아진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아버님이 쓰신 글씨들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중에 ‘진광불휘(眞光不輝)’라는 글이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 글이 좋아 보인다고 말씀드렸더니, 그 말의 뜻을 잘 설명해 주셨습니다. ‘진광불휘’라는 말은 “참된 빛은 번쩍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 빛이 참된 빛이라면 구태여 사람들의 눈에 띄려고 번쩍일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참된 빛이 아닌 가짜 빛은 사람들의 띄어야 하고 사람들의 눈을 속여야 하니까 요란하게 번쩍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거짓 예언자들이 많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거짓 예언자들의 특징은 좋은 말, 듣기 좋은 말로 자기들의 말을 그럴듯하게 포장을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말이 진실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의 눈을 속이려면 포장을 해야 합니다. “그들은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다가온다. 그러나 그 속은 굶주린 늑대이다.” (15절) 거짓 예언자들 속에는 굶주린 늑대가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숨겨야 하니까 양의 옷을 입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감쪽같이 속아넘어갑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떻게 하면 거짓 예언자를 분별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이렇게 알려주셨습니다. “그들의 열매를 보면 그들을 알 수 있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You can identify them by their fruit, that is, by the way they act. A good tree produces good fruit, and a bad tree produces bad fruit).” (16-17절) 이 얼마나 지혜로운 말씀입니까?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가시나무는 가시나무의 열매를 맺습니다. 포도나무는 포도나무의 열매를 맺습니다. 열매는 그 나무가 만들어내는 프로덕트(생산물, product)입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말만 들어서는 분별할 수 없습니다. ‘감언이설(甘言利說)’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귀에 솔깃한 달콤한 말이나 이로운 조건을 내세워 다른 사람을 꾀는 말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면 말만 듣지 말고 그 사람의 행동을 보라는 것입니다. 행동은 그 사람이 맺는 열매입니다. 열매가 좋으면 그 사람은 좋은 사람입니다. 열매가 나쁘면 그 사람은 나쁜 사람입니다. 열매는 나쁘지만 그 사람은 좋은 사람일 경우가 없다는 것입니다. 열매는 그 사람이 만드는 프로덕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여러분의 삶에 적용을 해보십시오. 열매가 그 사람이 생산하는 프로덕트라면, 좋은 프로덕트를 생산하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좋은 프로덕트를 만들기 위해서 많은 노력해야 하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이 문제에 접근합니다. 그런데, 이런 식의 접근으로는 절대로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너무나 쉽고 간단합니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습니다.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좋은 나무가 되어야 합니다. 좋은 나무만 되면 우리는 자연히 좋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맞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은 나무가 될 수 있겠습니까? “나는 참 포도나무이다(요한복음 15:1)”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을 배워야 합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Take my yoke upon you. Let me teach you, because I am humble and gentle at heart, 마태복음 11:29)”고 말씀하신 예수님을 배워야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나의 마음은 온유하고 겸손하니까 나에게 와서 배우라고 하면 될 것 같은데, 예수님은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멍에(yoke)’가 무엇인지 아시지요? 사진을 한번 보세요. 이것이 ‘멍에’입니다. 소 같은 동물의 목에 걸어 고정시키고 끈을 달아서 마차를 끌고, 밭을 갈게 합니다. 멍에에 대한 사전의 정의를 보면 ‘a wooden crosspiece that is fastened over the necks of two animals and attached to the plow or cart that they are to pull(두 마리의 동물의 목에 걸고 잡아당길 쟁기나 수레에 부착된 나무 가로대)’라고 나와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보았던 멍에는 모두 소 한 마리의 목에 건 멍에였습니다. 그런데, 원래 멍에는 두 마리의 목에 건다고 합니다.
멍에가 무엇인지 잘 이해를 하면 왜 예수님께서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는지, 예수님의 말씀을 잘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머리로, 지식으로 배우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공부하듯이 하면서 예수님을 배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배운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맞습니까? 정말 예수님을 공부하듯이 배울 수 있다면 머리가 좋은 사람들이 제일 예수님을 잘 배울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거든요?
그러면 예수님을 배운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예수님을 배운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메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멍에를 메고 나를 배우라(Let me teach you. Take my yoke upon you”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멍에를 예수님과 같이 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멍에를 내가 같이 지는 것입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일까요? 저는 이 말씀이 예수님의 삶과 인격을 배우라는 말씀이라고 이해했습니다. 내가 가고 싶은 대로 예수님을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가시는 곳으로 내가 함께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걸으시는 방향으로 나도 함께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과 생각에 나의 삶의 다이얼을 맞추는 것입니다.
예전에 많이 불렀던 ‘마라나타(Maranatha)’의 ‘I Love You Lord(주님 사랑합니다, https://youtu.be/8hyBJwTKmQ8)’ 가사가 생각납니다. “I Love You, Lord / And I lift my voice / To worship You/ Oh, my soul, rejoice! / Take joy my King / In what You hear / May it be a sweet, sweet sound / In Your ear(주님 사랑해요. 주님을 경배하기 위해 제 목소리를 높입니다. 오, 내 영혼아, 기뻐하라. 나의 왕이신 주님, 주님이 들으시는 소리를 기뻐하세요. 그 소리가 주님의 귀에 달콤한 소리가 되기를 바래요).” 참 가사가 좋지요? 전 혼자 있는 조용한 시간에 이 노래를 부르곤 합니다. 그 때마다 마음이 깨끗하게 정화(淨化)되는 것을 느낍니다. 이 노래의 가사가 전달하는 메시지가 무엇인가요? 주님과 보조(步調)를 맞추는 삶을 살아서 주님의 기쁨이 되는 삶을 살라는 메시지 아닙니까?
오해하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배운다는 것은 예수님에 대하여 공부하고, 예수님에 대한 교양과 지식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많은 교회들이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교회마다 성경공부를 그렇게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교회마다 제자 훈련이 유행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제자 훈련이 예수님의 제자를 만드는 훈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성경공부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제자 훈련이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에 대한 지식만 가지고는 삶이 변화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배운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삶과 예수님의 인격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하는 것과 생각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말하는 것을 보면 예수님이 생각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생각하는 것을 보면 예수님이 생각나고, 그 사람이 행동하는 것을 보면 예수님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헨리 나우엔(Henri Nouwen, 1932-1996)이 1977년에 출판한 ‘The Living Reminder(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라는 책의 내용이 바로 그런 내용입니다. 사도 바울도 그의 편지에 똑 같은 말을 기록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편지(a letter from Christ, 고린도후서 3:3)’라고 했습니다. 또, 우리는 ‘예수님의 대사(Christ’s ambassadors, 고린도후서 5:20)’라고 했습니다.
뉴햄프셔에 가면 청교도 작가 나다니엘 호돈(Nathaniel Hawthorne, 1804-1864)의 생가(生家)가 있습니다. ‘주홍 글씨’가 호돈의 대표작이지만, 그가 쓴 ‘큰 바위 얼굴(The Great Stone Face, 1850)’이라는 단편 소설이 있습니다. 주인공은 어니스트라는 소년입니다. 이 소년이 살고 있는 작은 마을에 ‘큰 바위’에 얽인 전설이 있었습니다. 그 바위는 멀리서 보면 인자한 사람의 얼굴로 보입니다. 이 소년은 어머니로부터 언젠가는 큰 바위 얼굴과 같은 인물이 이 마을에서 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랍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이 소년은 어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이 마을에서 큰 바위 얼굴과 같은 인물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 마을 출신 중에 정계에 진출한 사람도 있었고, 돈을 많이 모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두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실망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마을 출신인 한 시인이 마을을 찾아옵니다. 그 때 어니스트는 마을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어니스트의 얼굴은 석양 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습니다. 이런 어니스트를 본 시인이 이렇게 외칩니다. “여러분, 보세요. 이 분이야 말로 큰 바위 얼굴과 닮은 분 아닙니까?”
초등학교 때 읽었던 이 이야기의 감동이 어른이 된 지금도 생생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 이야기 속에 뭔가 우리 마음을 울리는 메시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니스트가 이렇게 훌륭한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날마다 큰 바위 얼굴을 바라보면서 이 마을에서 훌륭한 인물이 나오기를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흘러 어니스트는 자기도 모른 사이에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사람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날마다 성경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읽고, 그 말씀 속에 나타난 예수님의 인격과 만나고, 예수님의 삶을 본받는다면, 우리가 어떤 사람으로 변화되겠습니까?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와서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좋은 열매를 맺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예수님께 가서 배우면 좋은 나무가 됩니다. 그러면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열매는 우리가 생산해 내는 프로덕트입니다. 프로덕트에 마음을 쓰지 말고 먼저 좋은 나무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10/24/2021 |
계절이 주는 축복(II) Season’s Blessing Of God
예레미야 17:5-10
지난 주일에 ‘계절이 주는 축복’ 설교에서 가을은 결실의 계절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탐스러운 과일들을 보면서 “나는 한 해 동안 어떤 열매를 맺었는가?” 하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반성(反省)하는 것이 계절이 주는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구약성경 예레미야 17:5-10 말씀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사람을 의지하며 육체를 자기 힘으로 삼고 여호와께 마음을 돌린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다” 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체계적으로 읽지 않기 때문에 왜 이런 말씀이 나오는지, 또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성경을 단편적으로 읽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16대 요시야 왕 때부터 유다 왕국이 멸망할 때까지 예언자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가 예언자로 살았던 시기는 기원전 627년부터 586년까지 41년 간입니다. 조국 유다 왕국이 기울어가던 때였습니다. 그 때의 국제 정세는 강대국이었던 앗시리아 제국의 힘이 약화되고, 신흥 제국 바빌로니아의 힘이 날로 강해지던 때였습니다. 바빌로니아는 계속 유다 왕국을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유다 왕국은 앗시리아에게 도움을 청하면서 나라를 지키려고 외교전을 펴고 있었습니다.
유다 왕국의 이런 모습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유다 왕국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예언자들의 소리를 들으면서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로 하여금 이렇게 자기 백성들의 죄악을 기록하게 했습니다. “유다 백성의 죄는 쇠로 만든 연필로 적혀 있다. 그들의 죄가 그들의 마음 판에 뾰족한 쇠 끝으로 새겨져 있고, 그들의 제단 모퉁이에도 새겨져 있다.” (예레미야 17:1) 이 말씀을 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은 예레미야 1:10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내가 너를 세워 네가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려고 한다(I appoint you over nations to uproot and tear down, to destroy and overthrow, to build and to plant).” 하나님은 자기 백성 유다 왕국을 무너뜨리고 다시 세우려는 계획을 가지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 때 하나님의 마음은 마치 죄로 물든 온 세상을 홍수로 심판하고 의인 노아의 후손들을 데리고 새로운 자기 백성들을 만드시려고 했던 때와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런 배경 속에서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 두 종류의 인간들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사람을 의지하는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입니다. 지금도 이 세상에는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소수의 사람들과 자신의 힘을 믿고 사람을 의지하는 다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둘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별로 큰 차이점이 없는 것 같지요? 하지만, 결과는 아주 다르거든요? 마치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들과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의 차이점과 같습니다. 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결과는 엄청나게 다르거든요? 넓은 문으로 들어간 다수의 사람들은 모두 멸망합니다. 하지만,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소수의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지난 주 설교에서도 열매라는 메타포(metaphor, 은유)가 등장했습니다. 오늘 말씀에도 메타포가 등장합니다. 하나는, 사막에서 자라고 있는 볼품없는 떨기나무가 보여주는 메타포입니다. 저는 예루살렘과 터키 성지 순례를 하면서 광야에서 자라는 떨기나무들을 많이 봤습니다. 화면을 보십시오, 이런 나무들이 히브리 말로 ‘세네(seneh)’라는 ‘떨기나무’입니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봤던 불타는 떨기나무가 바로 이런 나무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 떨기나무는 히브리 말로 ‘아르아르(ar‘ar)’라는 나무인데 ‘소돔의 사과(Apple of Sodom)’라고 불리는 나무입니다. 소돔이 멸망할 때 함께 저주를 받은 나무라는 의미에서 이런 이름이 붙은 것 같습니다. 화면을 한번 보세요. 이 나무가 예레미야 17장에 나오는 ‘소돔의 사과’입니다.
‘소돔의 사과’는 제법 크고 먹음직스러운 열매를 맺습니다. 그런데, 이 열매는 안이 텅 비어 있고 솜처럼 하얀 실 같은 것들이 엉켜 있어 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가지를 자르면 우유처럼 희고 끈적끈적한 액체가 흘러나오는데, 독(毒)이 들어 있습니다. 전쟁할 때 화살촉에 이 액체를 바르거나 적(敵)의 우물에 이 액체를 탄다고 합니다. 마치 옻나무처럼, 예민한 사람은 이 나무 옆에만 가도 이 나무의 독성(毒性)에 영향을 받는다고 합니다.
‘소돔의 사과’같은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하여 이런 사람은 사람을 의지하는 사람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크게 깨달았습니다. 사람을 의지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게 됩니다. 오늘 말씀 그대로입니다. “Cursed is the one who trusts in man, who depends on flesh for his strength and whose heart turns away from the LORD(사람을 의지하고 사람을 자기 힘으로 삼고 사는 사람들, 그리고 그의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선 사람들은 저주를 받을 것이다).” (5절) “그들은 사막의 키 작은 나무 같아서 좋은 일이 찾아와도 보지 못한다. 그들은 아무도 살지 않는 소금 땅, 황무지에서 살게 될 것이다.” (6절)
끔찍하지 않습니까? “좋은 일이 찾아와도 보지 못한다”는 말은 그런 사람들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 사람들은 아무도 살지 않는 소금 땅에서 황폐한 살기 때문에, 주변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열매를 맺지 못하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 베푸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독성이 있어서 오히려 주변 사람들의 생명을 위협하고 빼앗는 삶을 살게 됩니다.
오늘 말씀에는 또 하나의 메타포가 나옵니다. 6절에 나오는 ‘물가에 심은 나무(a tree planted by the water)’라는 메타포입니다. 이 나무는 뿌리를 물(stream)에 대고 있습니다. 그러니, 비가 오지 않아 가물어도 걱정이 없습니다. 뜨거운 햇빛 속에서도 아무 걱정이 없습니다. 잎이 마르는 일이 없고 늘 잎이 푸르고 무성합니다. 뿌리가 물에 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나무는 항상 열매를 맺습니다(It never fails to bear fruit).
이런 사람은 ‘여호와를 믿고 여호와만을 의지하는 사람(the man who trusts in the LORD, whose confidence is in him, 7절)’이라고 했습니다. ‘trust’ ‘confidence’라는 말이 눈에 들어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 안에서 확신을 갖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시편118:8-9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나으며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고관들을 신뢰하는 것보다 낫도다.” 하나님께 피한다는 말은 하나님 안에 ‘피난처(refuge)’를 둔다는 뜻입니다. 내 삶이 위기에 빠졌을 때, 내 삶이 위험에 빠졌을 때, 내 삶이 불안할 때, 내 삶이 흔들릴 때 하나님께 달려가 도움을 요청합니다. 예레미야는 이런 사람은 ‘물가에 심은 나무’와 같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요즘 가끔 제 아내와 함께 찰스 강변을 산책합니다. 며칠 전에 하바드 쪽으로 강변을 걷다가 유난히 반듯하고 예쁘게 자란 나무들을 보았습니다. “어떻게 저렇게 나무들이 예쁘게, 균형 있게 자랐을까?” 하면서 얘기를 주고받았습니다. 얘기의 결론은 찰스강이 가까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었습니다. 물이 모자라고, 성장 조건이 좋지 않으면 그렇게 반듯하고 균형 있게 자랄 수가 있겠습니까? 한국에 경기도 양평에 가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은행나무가 한 그루 있다고 하는데요. 이 나무는 높이 50미터, 굵기 14미터나 된다고 합니다. 굉장하지요? 그런데, 매년 이 나무에서 120말(약 2,160리터)의 열매를 거둔다고 합니다. 이 은행나무가 그처럼 많은 열매를 맺는 이유는 나무에서 뻗어 나간 뿌리가 근처 시냇가에서 수분을 충분히 섭취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오늘 말씀이 유다의 죄를 지적하는 말씀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히브리 말로 죄를 ‘하마르티아(hamartia)’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이 ‘하마르타노(hamartano)’라는 말에서 나왔다고 하는데요. 이 말은 본래 활을 쏘는 사람들이 화살이 과녁을 빗나간 것을 말할 때 쓰는 말이라고 합니다. 굉장히 의미 심장한 말입니다. 죄는 과녁을 맞히지 못하고 빗나간 것입니다. 마땅히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 모든 소망을 두어야 하는데, 하나님 대신 사람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왜 국가적인 위기를 맞이해서 하나님을 찾지 않고 앗시리아를 찾습니까? 왜 앗시리아가 우리를 도와서 위기를 벗어나게 해 줄 것이라고 믿습니까? 이것이 과녁이 빗나간 삶이고,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죄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떨기나무 같은 삶, ‘소돔의 사과’같은 삶을 살 것이냐? 아니면, 물가에 심은 나무와 같은 삶을 살 것이냐? 얼핏 보기에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안에 하얀 실 같은 것이 얽혀 있어서 먹을 수 없는 열매를 맺는 삶을 살 것이냐? 아니면 풍성한 열매를 맺어서 주변 사람들에게 베풀고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삶을 살 것이냐?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앗시리아를 피난처로 삼을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을 것이냐?” 결정해야 합니다. “앗시리아를 의지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면 좋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는 안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앗시리아(사람의 힘)를 의지하는 사람은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게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든지, 아니면 앗시리아를 의지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돈)을 동시에 섬길 수 없기 때문에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이런 설교를 할 때 늘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기로 결정하면 무슨 일이든지 어려움 없이 잘 되는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물가에 심은 나무’라는 메타포가 주는 메시지를 생각해 보세요. 물가에 심은 나무도 비가 오지 않으면 가뭄을 겪습니다. 물가에 심은 나무도 한 낮의 뜨거운 햇볕 때문에 고통을 당합니다.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 고난을 당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도 많은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하지만, ‘물가에 심은 나무’는 그 뿌리를 물에 대고 있기 때문에 뜨거운 햇볕도 견딜 수 있고, 가물어도 견딜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들이 그렇거든요? 뿌리를 물에 대고 있는 나무처럼,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들은 넘어지지 않습니다. 무너지지 않습니다. 끝까지 견딥니다. 견고합니다.
누가 사람을 신뢰하고 사람을 자기 힘으로 삼고 사는 사람입니까? 누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누가 하나님 안에서 확신을 가지고 사는 사람입니까? 우리는 누가 그런 사람인지 알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아십니다. “그 어느 것보다도 비뚤어진 것은 사람의 마음이다. 사람의 마음은 심히 악하기 때문에 아무도 그 속을 알 수 없다. 그러나 나 여호와는 사람의 속을 살필 수 있고, 사람의 마음을 시험해 볼 수 있다.” (9-10절) “The heart is deceitful above all things” 라고 합니다. ‘deceitful’이라는 말은 ‘남을 속이는’ ‘사기를 치는’ 이런 뜻입니다. 우리 마음은 남을 잘 속이고, 사기를 잘 친다는 말입니다. 우리 마음이 얼마나 하는 척을 잘합니까? 그래서 잠깐 사람들의 눈을 속일 수 있습니다. 아니면 영원히 사람들의 눈을 속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속을 살필 수 있기 때문입니다. “I the LORD search the heart and examine the mind”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가을이 주는 계절의 축복은 우리 자신들의 삶을 돌아보고 어떻게 살아야 올바로 사는 것인지 자신의 삶을 반성하는 것입니다. 설교의 왕자라고 불리는 찰스 스펄전(Charles Spurgeon, 1834-1892, 영국)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The seasons change and you change, but the Lord abides evermore the same, and the streams of His love are as deep, as broad and as full as ever(계절은 변하고 당신도 변하지만 주님은 영원히 동일하시며 그분의 사랑은 그 어느 때보다 깊고 넓고 풍부합니다).” 기가 막힌 명언 아닙니까? “계절도 변하고 당신도 변하지만.....” 제가 이 교회에 처음 왔을 때가 34살 때였습니다. 저도 많이 변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의 사랑은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이 계절에 변함없는 주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는 것, 이 또한 계절이 주는 축복이 아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