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3/2020 | In Times Of Trouble 23

지금은 하나님을 찾을 때 Now Is The Time To Find The Lord

이사야 55:6-11

오늘 읽은 이사야 55장은 ‘제 2이사야’ 끝에 속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 속에 희망과 위로와 치유의 말씀이 들어 있기 때문에 오늘 우리는 더욱 이 말씀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읽는 사람들은 대부분 6절에 나오는 “너희는 찾을만한 때에 여호와를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 여호와를 불러라” 이 말씀에 주목할 것입니다. 물론 가장 눈에 띄는 말씀인 것은 맞지만, 왜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는지 우리는 그 이유를 찾아야 합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바빌로니아에서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시고자 하는 메시지는 “나는 먼저 너희와 관계를 회복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모든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졌기 때문에 생긴 일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문제가 다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오늘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의 삶 속에 일어나고 있는 많은 문제들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졌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이 많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을까요? 첫째는 회개(悔改)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회개’에 대하여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회개’를 ‘후회’나 ‘뉘우침’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맞습니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먼저 회개의 과정과 결단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번 이 말씀을 보세요.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회개하고 여러분은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며,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될 것입니다.” (사도행전 2:37-38) 유대 명절인 오순절 날에 성령 충만한 베드로와 제자들이 밖에 나가서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악한 사람들의 손을 빌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님을 하나님께서는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사도행전 2:23, 36) 마음에 찔림을 받은 사람들이 사도들에게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묻습니다. 이 때 베드로는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회개 없이 예수님을 믿는 일이 생겼습니다. 본회퍼 (Dietrich Bonhoeffer, 1906-1945)는 이런 현상을 매우 위험하게 보았습니다. 결국 이런 현상은 하나님의 은혜를 ‘값싼 은혜 (cheap grace)’로 만들 것이라고, 그렇게 되면 교회의 미래가 매우 위험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값싼 은혜는 우리 교회의 치명적인 적입니다. 오늘 우리의 싸움은 값비싼 은혜를 얻기 위한 싸움입니다. 값싼 은혜는 회개 없이도 죄를 용서하는 설교요, 공동체 훈련도 없이 베푸는 세례요, 죄의 고백도 없이 참여하는 성만찬이요, 인격적인 참회 없는 면죄의 확인입니다. 순종 없는 은혜, 십자가 없는 은혜, 살아 계시고 인간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은혜, 이것이 값싼 은혜입니다.”

어떤 사람이 ‘회개’에 대하여 이렇게 잘 정리를 했습니다. “Repentance means ‘change of mind.’ Yet the full meaning is somewhat more. In the New Testament, the word metanoia is often translated as ‘repentance’. But this kind of repentance is not about regret or guilt or shame; it implies making a decision to turn around, to face a new direc-tion (회개는 마음을 바꾸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약성경에서 사용하고 있는 ‘메타노이아’는 ‘회개’라는 말로 번역되고 있습니다만, 이 말은 단순히 ‘후회’ ‘죄의식’ ‘수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메타노이아’라는 말 속에 포함되어 있는 뜻은 ‘돌아서기로’ ‘새로운 방향을 향하도록’ 결단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회개’에 대해 잘 나와 있습니다. “Let the wicked change their ways and banish the very thought of doing wrong. Let them turn to the Lord that he may have mercy on them. Yes, turn to our God.” (7절) 이 말씀에 ‘change their ways’ ‘banish the very thought of doing wrong’ ‘turn to the Lord’이런 말들이 나옵니다. 이 말들이 정확하게 회개라는 말 속에 들어 있는 뜻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의 믿음생활에서 ‘회개’의 과정을 무시하거나 간과하게 되었을까요? 여기에는 아마도 교인이 되는 과정을 쉽게 만들어서 큰 교회를 만들겠다는 인간적인 야망과 경쟁심이 크게 작용을 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하게 알 수 있지 않습니까? 큰 교회를 만들겠다는 인간적인 야망, 그리고 경쟁심, 이런 것들이 교회를 파괴하는 죄악들입니다. 아니, 지금도 이런 야망을 가진 교회들이 있더라고요. 그들은 그렇게 말합니다. “교회를 크게 잘 지어 놓으면 교인들이 모인다”고요. 아닙니다. 이런 생각은 올바른 생각이 아니고요. 지금은 목사들이나 평신도들이나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닙니다.

지난 주에 ‘한국기독청년협의회’에서 한국교회에 드리는 호소문 (성명서)을 발표했습니다. 청년들은 “우리는 존망(存亡)의 기로에 서 있다. 이대로 교회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외면 받으며 사그라질 것인지, 아니면 우리의 잘못을 인정하고 새롭게 시작할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전광훈과 극우 기독교 세력을 만들어낸 묵은 땅을 갈아엎고, 개 교회 중심주의, 중년·남성·목사 중심의 의사결정 구조를 개혁해야 한다”고 호소했습니다. 한국에서는 이미 많은 청년들이 교회를 떠났습니다. 이제 보다보다 못한 청년들이 한국교회를 향해 안타까운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먼저 와서 길을 닦고 그가 닦아 놓은 길로 예수님께서 천국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잘 준비된 마음의 밭에다 예수님께서 복음의 씨앗을 뿌린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의 시작입니다 (마태복음 3:15). 우리는 예수님을 믿기 전에 과거의 잘못된 삶을 과감하게 정리하는 결단이 있어야 했습니다. 이 결단 없이 믿음생활을 시작한 결과가 어떻게 나왔습니까? 교회는 나오지만 그 사람의 생각과 삶은 조금도 바뀌지 않은 결과로 나왔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이 없는 크리스천들이 나왔습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회개하고 삶의 방향을 지금과 다른 새로운 방향으로 설정해야 합니다.

둘째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방법은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Seek the Lord while you can find him. Call on him now while he is near (하나님을 찾을만한 때애 그에게 찾으라. 하나님께서 너희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6절) 지금은 하나님을 만나기 좋은 때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가까이 계시는 때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역사적인 맥락’에 따라 읽어보면,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빌로니아에서 포로 생활 중입니다. 대규모 건설사업에 동원되어 일하고 있습니다. 피곤하고 내일을 전혀 기약할 수 없는 절망적인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John Flavel이란 사람이 그렇게 말했잖아요? “인간의 절망은 하나님의 기회이다 (Man’s extremity is God’s opportunity)”라고요. 어떤 성경은 “하나님을 만날만한 때에 그를 부르라”는 말씀을 “하나님께서 너희를 만나러 오셨을 때에 너희도 그를 만나러 나오라”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만나러 오신 것입니다. 절망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위대한 ‘사미스트’였습니다. 성경에 다윗이 쓴 시편이 무려 63개나 들어 있습니다. 그가 겪었던 수많은 역경과 고난이 그를 위대한 ‘사미스트’로 만들었습니다. 이 말을 거꾸로 말하면 만약 다윗의 생애 속에 고난이 없었고 편안한 삶이 계속되었더라면 아마도 그는 평범한 사람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지난 주에 우연히 재미 있는 신문 기사를 보았습니다. 한국에서 음악가 베토벤의 생애를 소재로 해서 뮤지컬을 만들었는데, 상당히 반응이 좋아 해외로까지 수출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베토벤 (Ludwig van Beethoven, 1770-1827)은 ‘악성(樂聖)’이라고 불릴만큼 위대한 작곡가입니다. 그가 작곡가로서 이름을 날린 것은 1796년 유럽 순회 공연을 다닐 때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음악가로서 명성을 얻자마자 그에게 큰 시련이 닥쳐왔는데,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음악가에게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것은 치명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한 베토벤은 신경이 예민해졌고, 좌절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삶에 대한 의욕을 잃어버리고 유서를 씁니다. 그의 나이 서른 한 살 때였습니다.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로 알려진 이 유서는, 베토벤이 자기 동생들에게 쓴 편지인데, 당시 그가 겪었던 좌절과 공포가 고스란히 이 유서 속에 드러나 있습니다. 다행히 그는 자살을 실행에 옮기 못하게 되었고, 유서는 그가 죽은 후에 발견되었습니다. 이후 베토벤은 시련과 싸우며 음악 활동을 계속합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 교향곡 3번 ‘영웅 (1803)’. 교향곡 5번 ‘운명 (1807-1808)’, 교향곡 9번 ‘합창 (1822-1824)’ 등 그가 남긴 불후의 명곡들은 모두 유서 작성 후에 작곡한 곡들입니다.

뮤지컬 ‘루드윅 (Ludwig)’은 베토벤이 유서를 작성한 날, 그 무엇이 그를 다시 삶의 길로 이끌었는지 그 날 밤에 있었던 일을 상상력으로 채워 넣었습니다. 베토벤이 죽음을 생각하고 있던 그 날 밤, 마리라는 여자가 한 소년을 데리고 그의 방문을 두드립니다. 이 아이의 이름은 발터인데, 그녀의 스승의 아들이었습니다. 마리는 베토벤에게 이 아이를 제자로 받아 달라고 부탁합니다. 아버지가 갑자기 죽는 바람에 고아가 된 발터는 영국으로 보내질 위기에 처했다는 것입니다. 마리는 자신가 발터의 보호자가 될 테니, 제발 이 아이가 빈에 남게 해달라는 탄원서를 냈는데, 법원에서는 발터가 베토벤의 제자로 들어가야 한다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조건을 내걸었다는 것입니다. 마리의 이야기를 들은 베토벤은 사연은 딱하지만 죽음을 생각하고 있던 그로서는 제자를 받아 줄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마리의 부탁을 거절합니다. 그러나 마리의 등장으로 인해 베토벤은 자실 시도에 실패하게 되지만 자신이 계속 살아야 할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결국 베토벤은 자기에게 주어진 시련을 이기면서 불후의 명곡들을 작곡했다는 것입니다. 작가들의 상상력이 참 대단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작가의 상상력에서 나온 것이니까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자살을 생각하고 유서까지 쓴 사람이 생각을 바꾸잖아요? 그리고 자기의 불행을 이겨내잖아요? 불행을 딛고 불후의 명곡을 쏟아내잖아요? 베토벤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그는 다시 불행을 딛고 하나님이 주신 영감으로 다시 일어섭니다. 여러분, 지금 화면에서 청력을 상실한 베토벤이 어떻게 해서라고 소리를 듣고 싶은 안타까움에서 그가 사용했던 보청기(補聽器)들입니다. 처음에 왼쪽 귀에서 시작된 난청 증상이 오른쪽 귀에도 생겼고, 48세 때에는 아무 것도 들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베토벤에게 있어서도 인간의 절망적인 상황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분명히 여러분의 생애 속에서도 여러분이 경험하는 ‘extremity (극단적인 절망)’가 틀림없이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여기에 단 한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로 설정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로 설정하기 위해서는 ‘회개’의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과거 여러분의 삶과 단절(斷絶)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들이 여러분의 삶에서 지켜져야 합니다. 여러분의 삶의 방향이 지금까지 향했던 것과는 다른 ‘새로운 삶의 방향 (a new direction of life)’으로 설정되어야 합니다. 고난 중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은 어렵고 힘든 상황 중에 있는 우리들에게 가까이 다가와 계십니다. 지금은 하나님을 만날 만한 때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 시기에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면,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설정할 수 있다면, 지금의 상황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큰 기회가 되고 선물이 될 것입니다. 

 


9/6/2020 | In Times Of Trouble 22

나는 너희 하나님이다 I Am Your God

이사야 41:8-13

혹시 여러분, 이 책을 읽어 보셨습니까? 고든 피 (Gordon D. Fee)와 더글라스 스튜어트 (Douglas Stuart)가 쓴 책인데요.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라는 책입니다. 이 책의 영어 제목은 “How To Read The Bible For All Its Worth”입니다. 성경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손실하지 않고 성경을 온전히 읽는 법이라고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고든 피는 캐나다에 있는 리전트 신학교에서 신약학 교수로 있는 분입니다. 고든 콘웰 신학교에서도 교수로 있었습니다. 더글라스 스튜어트는 고든 콘웰 신학교에서 구약학을 가르치는 교수로 있습니다. 이 책은 전문가들을 위한 책이 아니라 평신도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쓴 책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으면서 “이 말씀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지?” 이런 질문을 합니다. 이 책의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을 읽고 그 말씀이 나에게 주는 의미를 찾는 사람들은 먼저 저자가 이 구절에서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자기 멋대로 성경을 읽고 의미를 찾으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성경을 읽을 때는 반드시 문맥을 따라 읽어야 한다고 합니다. 문맥에는 두 가지 문맥이 있는데, 하나는 문학적인 문맥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적인 문맥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어느 한 구절만 읽어서는 안 되고 앞뒤 문장을 잘 살펴서 읽어야 한다고 하는데, 이 말은 문학적인 문맥을 따져서 읽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역사적인 문맥에 따라 읽어야 하는 성경도 있습니다. 이 성경이 언제 기록되었는지, 이 성경을 누가 기록했는지, 그 때 당시의 사회는 어떤 사회였고, 사람들의 삶은 어떠했는지 살펴서 읽어야 성경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이사야 41장 본문 말씀은 역사적인 맥락을 알고 읽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사야서를 이사야 한 사람이 기록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지금 그렇게 주장하는 전문가들은 별로 없습니다. 보통은 이사야서를 1-39장, 40-55장, 56-66장, 이렇게 3등분합니다. 1-39장은 ‘제 1 이사야’라고 합니다. 유다 왕국이 멸망할 때까지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40-55장은 ‘제 2 이사야’라고 하는데요. 바빌로니아에서 포로생활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와 구원의 대한 소망의 말씀들이 들어 있습니다. 56-66장은 ‘제 3 이사야’라고 합니다. 바빌로니아 (페르시아)에서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국으로 돌아와 공평하고 정의로운 신앙공동체를 형성할 것이라는 꿈과 비전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제 2이사야’에 속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포로생활 중에 고난 받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나의 종’ ‘내가 선택한 야곱’ ‘나의 친구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합니다 (1절). 하나님께서 지금 포로생활 중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렇게 부르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불행을 해석하는 방법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욥기의 내용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욥이 불행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 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인간의 불행에 대한 이런 해석을 정면으로 거부하셨습니다. “이 사람이나 그의 부모가 죄를 지어 이렇게 된 것이 아니다. 이 사람이 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한 것은 하나님의 일을 그 사람의 생애를 통해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요한복음 9:3) 이렇게 예수님은 인간의 불행에 대해 전혀 다른 해석을 내놓으셨습니다.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잡혀와서 온갖 고생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은 ‘나의 종’ ‘내가 선택한 야곱’ ‘나의 친구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부르신 이유는 너희가 이런 불행을 당했다고 해서 나의 사랑에서 끊어졌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지금 조국을 잃고 이렇게 타국에 와서 떠돌고 있다고 해서 너희에 대한 나의 관심이 끊어졌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의 삶은 예측할 수 없습니다. 지금 같은 때는 더욱 더 그렇습니다. ‘The Age Of Uncertainty (불확실성의 시대)’라는 말을 들어 보셨지요? 1963년에 하바드 대학의 경제학 교수였던 갤브레이스 (John Kenneth Galbraith)가 1977년에 쓴 책의 제목인데, 그 말이 지금도 유효합니다. 오히려 지금은 경제 분야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가 불확실합니다. 우리의 삶도 불확실합니다. 불확실하니까 염려가 되고, 걱정이 되고, 불안합니다.

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위로의 말, 격려의 말, 용기를 주는 말, 희망을 주는 말 아닙니까? 하지만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그런 말들이 실제로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 말들이 그 사람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말들인 것을 부인할 수 없지만, 크리스천들이라면 당연히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입니까? ‘Omnipotent God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Omniscient God (무엇이든지 다 아시는 하나님)’ ‘Omnipresent God (어디든지 계시는 하나님)’입니다. 어렵고 힘든 때에 우리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데리고 왔으며, 세상의 가장 먼 곳으로부터 너를 불러냈다. 그리고 내가 너에게 말하였다. 너는 나의 종이니, 내가 너를 선택하였고, 버리지 않았다고 하였다.” (9절) 이스라엘은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 변방(邊方)입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강대국의 영향권에 들어 있는 변방 중에서도 변방인 작은 나라입니다. 국제 질서가 바뀌는 대로 이집트의 영향권에 있다가, 앗시리아의 영향권에 있다가, 바빌로니아의 영향권에 있다가, 페르시아의 영향권에 있다가, 신약시대에는 로마의 영향권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약소 국가를 자기 백성으로 선택하셨습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선택에 대한 말씀들이 많이 나옵니다. 특히 사람을 부르시고 선택하신다는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구약 성경에는 예언자들을 선택하신 말씀들이 많이 나오고, 신약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선택하신 말씀들이 나옵니다. 바울이 쓴 서신서에는 동역자로 선택받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가 볼 때는 “그 사람은 정말 아닌 것 같다. 잘못 선택한 것 같다” 이런 생각이 드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가룟 유다, 데마같은 사람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팔아 넘긴 사람이고, 데마는 사도 바울의 동역자였다가 중간에 믿음의 길에서 돌아선 사람입니다. 성경에 “데마는 세상을 사랑하여 데살로니카로 갔다 (디모데후서 4:10)”고 했습니다. 아니, 유다나 데마를 선택하는 과정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신 것 아닌가요? 예수님께서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 (요한복음 15:16)”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 예수님을 배반하고, 믿음의 길에서 돌아서는 사람들이 나오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뜻은 근시안적으로 보면 전혀 보이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bird’s-eye view’로 봐야 합니다. 우리 말로 ‘조감도(鳥瞰圖)’라고 합니다. ‘aerial view’라고도 하고 ‘helicopter view’라고도 합니다. 이와 반대되는 관점 (view)을 ‘worm’s-eye view’라고 합니다. ‘벌레의 눈의 관점’이라는 뜻입니다. 벌레는 땅에 기어 다니기 때문에 ‘벌레의 눈’으로 보면 전체를 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bird’s-eye view’로 전체를 봐야 보일 때가 많습니다. ‘bird’s-eye view’로 보면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 전체를 볼 수 있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는 오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로마서 11:29, 개역성경) 무슨 말씀인지 이해하시겠습니까? 이 말씀이 Contemporary English Version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God doesn't take back the gifts he has given or disown the people he has chosen.” 또 GOD'S WORD Translation에는 “God never changes his mind when he gives gifts or when he calls someone”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했을 때 거기에 하나님의 부르심과 선택하심이 있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부르심과 선택하심은 어떤 경우에도 취소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the people of God)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 사실이 시편 46편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하나님이 그 성중에 거하시매 그 성이 요동치 아니할 것이라.” (1-3, 5절) 땅이 변하고, 산이 흔들리고, 바닷물이 뛰놀고, 산이 요동한다는 말은 우리의 삶이 그만큼 흔들리고 불안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묘사하는 수사법 (figure of speech)입니다. 이런 불안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내 삶 속에 계시면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의 하나님이니, 겁을 내지 말아라. 내가 너를 강하게 하겠다. 내가 너를 도와주고, 내 승리의 오른팔로 너를 붙들어 주겠다.” (10절) 어렵고 힘든 일을 만난 사람들에게 하지 않아야 하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괜찮아, 잘 될거야.” “걱정하지 마. 너만 그런 것이 아니야. 다들 그래.” “힘들지? 얼마나 힘들겠어.” “툴툴 털고 일어나야지.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야?” “시간이 지나면 금방 괜찮아질 거야.” 이런 말을 많이 하잖아요? 그런데 이런 말이 어려움 당한 사람에게 전혀 도움이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성경에도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두려워하지 마.” “내가 붙들어 줄께.” “내가 함께 있어 줄께.” “내가 도와줄께.” 어려움 당한 사람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이런 말들이 성경에도 나와 있습니다.

우리는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Don’t be afraid, for I am with you. Don’t be discouraged, for I am your God. I will strengthen you and help you. I will hold you up with my victorious right hand.” (10절)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왜 우리는 무서워하지 말라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까? 왜 우리는 용기를 내라는 말을 들어야 합니까? 왜 우리가 너를 붙들어 주겠다는 말을 들어야 합니까?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입니까? 11절 말씀과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와 다투는 사람들, 너에게 대적하는 사람들, 너와 싸우는 사람들을 아무 것도 아닌 사람들로 만들어 버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는 큰 일이지만, 하나님께서 일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으십니다 (With God nothing is impossible).” (창세기 18:14, 마태복음 19:26, 마가복음 9:23, 누가복음 1:37)

‘바라바 (Barabbas)’라는 1962년에 나온 옛날 영화를 보았습니다. 바라바는 예수님 대신 목숨을 구한 흉악한 강도입니다. 앤소니 퀸 (Anthony Quinn)이 바라바 역으로 나옵니다. 이 영화가 주는 메시지는 예수님 대신 살아난 바라바의 삶 속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그 사람을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강도질을 하다가 붙잡힌 바라바는 절대로 살아나올 수 없다는 시실리 섬의 유황 광산으로 가게 됩니다. 하지만, 바라바는 거기서 살아남습니다. 그리고 유황 광산에서 만난 사하크 (Sahak)라는 사람과 함께 로마로 돌아와서 검투사가 됩니다. 그런데, 이 사하크라는 사람이 진실한 크리스천입니다. 그는 검투사들에게 예수님에 대하여 말하고 자기가 믿는 하나님에 대하여 말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감히 상상도 못할 만큼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당신들이 믿는 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 주변이 있으시지요. 마치 몸 안에서 숨을 쉬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법은 단 하나, 사랑입니다.” 

사하크가 담담하게 자기의 믿음을 말하는 이 장면이 저에게는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그의 말처럼 하나님은 인간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시고, 우리 몸 안에서 숨을 쉬는 것처럼 항상 우리 주변에 계시지만 (사도행전 17:24-28) 오늘 우리는 이 하나님을 못 느끼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나는 너의 하나님이다. 두려워하지 마라. 나의 오른 손으로 너를 붙잡고 있다 (I am your God. Don’t be afraid, I am with you. II will hold you up with my victorious right hand)”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붙들고 계시는 이유는 하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선택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어렵고 힘든 시간을 보내는 우리를 그분의 ‘victorious right hand’으로 붙잡고 계십니다. 이 말씀을 믿는 사람이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세상을 이깁니다.


8/30/2020 | In Times Of Trouble 21

하나님이 나의 편이 되시면 If The Lord Is For Me

시편 118:1-14

오늘 우리가 부른 찬송가 401장 ‘주의 곁에 있을 때’ 이 찬송가는 프랭크 데이비스 (Frank M. Davis, 1839-1896, 미국)라는 사람이 작사와 작곡을 한 찬송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분이 목사라는 것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 목사님이 남긴 이 찬송가는 가사도 훌륭하고 곡도 잘 써져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특히 지금같이 힘든 시간을 보낼 때 많은 위로를 주는 찬송입니다. 가사를 한번 보실까요? (1절) Savior, lead me, lest I stray, Gently lead me all the way; I am safe when by Thy side, I would in Thy love abide. Lead me, lead me, Savior, lead me, lest I stray; Gently down the stream of time, Lead me, Savior, all the way (주여, 제가 길을 잃지 않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저는 주님 곁에 있을 때 안전합니다. 저는 주님의 사랑 속에 살고 싶습니다. 주님, 제가 길을 잃지 않도록 인도해 주십시오. 세월이 흘러가는 대로 제가 가는 모든 길을 인도해 주십시오). (2절) Thou the refuge of my soul, When life's stormy billows roll, I am safe when Thou art nigh, All my hopes on Thee rely. Lead me, lead me, Savior, lead me, lest I stray; Gently down the stream of time, Lead me, Savior, all the way (주님은 저의 영혼의 피난처입니다. 삶의 폭풍이 일어날 때도 주님 곁에 있으면 안전합니다. 저의 모든 희망은 주님께 있습니다). (3절) Savior, lead me, then at last, When the storm of life is past, To the land of endless day, Where all tears are wiped away. Lead me, lead me, Savior, lead me, lest I stray; Gently down the stream of time, Lead me, Savior, all the way. Amen (주님, 마침내 삶의 폭풍이 지나가고 낮이 계속되는 땅으로, 눈물이 없는 곳으로 인도해 주십시오).

오늘 설교 본문 말씀은 시편 118편입니다. 이 시편은 고난과 역경을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시편의 저자가 누군지 알아야 그 시편을 올바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가 쓰는 한 절 한 절, 단어 하나 하나에 그가 처했던 상황과 그의 인생, 그의 삶이 그대로 녹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시편 118편은 저자가 누군지 알 수 없어서 그냥 ‘사미스트 (psalmist)’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사미스트는 이렇게 그의 시편을 시작합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이제 이스라엘은 말하기를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할지로다 (1-2절).... 이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말하기를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할지로다 (4절).” New Living Translation에 왜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지 그 이유가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For he is good and his faithful love endures forever (그는 선하시고 그의 신실하신 사랑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는 말은 하나님을 가장 짧은 말로, 가장 적절하고, 정확하게 표현한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와서 “선하신 선생님” 하고 불렀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왜 나를 선하신 선생이라고 부르느냐? 선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밖에 없다.” (마가복음 10:18, 누가복음 18:19) 심지어 예수님도 자기를 선하다고 부르는 것을 금하시고 오직 한 분 하나님만 선하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모든 일들이 선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도 선합니다 (창세기 1:18). 지금의 일그러진 세상을 창조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시키는 것이 우리 크리스천들의 사명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가지고 계시는 생각도 선한 것입니다. 예레미야서에 이런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다.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다.” (29:11) 요한복음 3:16에도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이 선한 것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도 ‘선하고’ ‘좋은 것’입니다. 맞습니까? 그러므로, 나 자신에게 실망했을 때, 나의 자존감이 무너졌을 때, 나의 삶의 이유와 목적을 잃어버렸을 때,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아니다. 내 생명을 지으신 하나님은 나의 삶에 대해 좋은 목적을 가지고 계신다.” 그리고 힘들고 어려울 때 성경을 펴서 읽으세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alive)’, ‘운동력 (active)’이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히브리서 4:12)? 성경을 읽으면 힘든 시간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땅에 떨어진 나의 자존감도 살아납니다. 그래서 어렵고 힘들 때 기도하고, 성경을 읽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하다고 하나님을 찬양한 이 사미스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신다.” (5-7절)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In my distress I prayed to the Lord)” 이 말씀을 보면서 깨닫는 것이 있습니까? 고통, 염려, 근심, 환난, 역경, 고난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연약한 인간은 이런 것들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크리스천은 이런 때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우리를 그런 문제들로부터 벗어나게 하십니다. 그 말씀이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 이 말씀의 뜻입니다.

사미스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내 편이시다. 하나님은 내 편이 되어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신다. 나는 더 이상 아무 것도, 그 누구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6-7절) 제가 오늘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은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내 편’이라는 말씀을 생각할 때 제일 먼저 생각나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시편 144:15)” 하는 말씀과, “주님은 나의 분깃, 내가 주님의 말씀을 지키겠습니다 (시편 119:57)” 라는 말씀입니다. NIV 성경에 이 말씀이 “You are my portion, O LORD; I have promised to obey your words.”라고 나와 있습니다. ‘분깃’이라는 말은 원래 유산을 나눌 때 자기에게 돌아오는 ‘몫’을 말합니다. 시편 119편을 쓴 사미스트는 자기에게 돌아올 ‘몫’이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몫’을 ‘portion’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시편 144편을 쓴 다윗은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사람, 백성은 복이 있다고 했고요. 세상에는 아버지가 남긴 유산을 서로 차지하려고 싸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 시편의 사미스트들은 그런 유산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하나님이 나의 ‘분깃’이라고 선언합니다. 하나님 한 분만 있으면 나에게는 아무 부족함이 없다는 선언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한번 이렇게 큰 소리로 선언할 수 있을까요?

다음으로 생각해야 할 말씀은 “하나님께서 내 편이 되셔서 하나님은 나를 돕는 자 중에 계신다 (The LORD is for me among those who help me)”는 말씀입니다. 나를 돕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님이 계시는데, 하나님은 내 편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궁핍하고 어려울 때 내가 가진 ‘resource (지원)’가 얼마나 되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이 ‘resource’중에 내가 가진 지식이나 경력, 내가 가진 인맥(人脈)이 있고, 내가 가진 물질도 있고, 나의 gift (타고난 재능)나 talent (재주)도 있습니다. 여러분도 한가할 때 내가 가진 resource가 얼마나 되나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이런 것들이 내가 궁핍하고 어려울 때 나를 도울 수 있는 것들입니다. 오늘 시편 118편을 쓴 사미스트도 어렵고 힘들 때, 나를 도울 수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가, 자기가 가진 ‘resource’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는 제일 먼저 하나님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사미스트의 이런 점이 이 시편을 탁월한 시편으로 만들고, 이 시편을 읽는 사람들에게 영감 (inspiration)을 주고 있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나으며,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고관들을 신뢰하는 것보다 낫도다 (It is better to take refuge in the LORD Than to trust in man. It is better to take refuge in the LORD Than to trust in princes).” (8절) 말씀이 재미있지 않습니까? 이 사미스트의 resource 중에 princes (고관)도 있었나 봅니다. 하지만, 이 사미스트는 고관을 찾지 않고 제일 먼저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은혜가 되지 않습니까? 우리가 시편을 읽고 은혜를 받는 이유는 그 말씀 속에서 정상적인 크리스천의 모습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생각해야 할 말씀은 이 사미스트가 어떤 이유로 하나님을 내 편이라고 고백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이 사미스트에게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확신했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고 대뜸 하나님은 나의 편이라고 말했다면 어떻게 그의 말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 이유를 저는 5절 말씀에서 찾았습니다.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 “아,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에 응답하시는구나!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는구나!” 이런 경험과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나의 편이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이렇게 크리스천은 기도를 통해서 믿음의 확신을 얻습니다. 크리스천의 삶에서 기도가 중요한 이유입니다.

마지막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여기 두 말씀을 한번 비교해 보십시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 (시편 118:6-7)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분이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습니까?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겠습니까? 우리를 의롭다고 하신 분은 하나님이신데 누가 우리를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 (로마서 8:31-34) 두 말씀이 똑 같습니다. 로마서에 있는 말씀은 시편 118편의 ‘바울 버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전도자로서 많은 고난을 이겨낼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시편 118편 말씀에 있었습니다.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 (Martin Luther)는 시편 118편을 매우 사랑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시편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나의 시편입니다. 나는 모든 성경을 사랑하지만, 이 시편은 특별하게 내 마음에 들어와 있는 시편입니다. 황제도, 군왕들도, 지혜자도, 모사도, 성자들도 나를 구원하지 못했지만, 이 시편은 나를 억누르는 많은 위험으로부터 나를 건져 주었습니다 (This is my psalm, my chosen psalm. I love them all; I love all holy Scripture, which is my consolation and my life. But this psalm is nearest my heart, and I have a peculiar right to call it mine. It has saved me from many a pressing danger, from which nor emperor, nor kings, nor sages, nor saints, could have saved me. It is my friend; dearer to me than all the honors and power of the earth).”

이제는 우리가 이 시편을 읽고 어렵고 힘든 시간을 이겨내야 할 때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이 시편을 읽고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 나의 편이 되시는 하나님, 그리고 나의 삶에 대하여 선한 목적과 계획을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할 때입니다. 


8/23/2020 | In Times Of Trouble 20

나의 힘이 되시는 하나님 God Is My Strength

시편 42:1-8

오늘은 ‘In Times Of Trouble 20’ 시간으로 ‘나의 힘이 되시는 하나님 (God is my strength)’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읽은 시편 말씀은 ‘고라의 자손’이 쓴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이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고라 (Korah)’는 모세와 아론의 리더십에 반감을 품고 구데타를 일으켰던 사람입니다. ‘모세’와 ‘아론’과 ‘고라’는 다 같은 ‘레위 지파’ 사람들이었습니다. ‘레위 지파’ 사람들은 평생 하나님을 섬기는 지파로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지파입니다. 이 지파에서 제사장이 나오고, 예배를 돕는 성가대와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다른 지파 사람들은 아무리 노래를 잘하고 연주를 잘 해도 성전에서는 연주할 수 없습니다. 그외에 성전을 관리하는 사람들도 레위 지파 사람들이고, 성전을 지키는 사람들도 모두 레위 지파 사람들입니다.

모세와 아론의 리더십에 불만을 갖는다는 것은 곧 그들을 그 자리에 임명하신 하나님께 불만을 갖는 것과 동일시되는 일입니다.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는 독특한 관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고라’와 ‘고라’에게 동조했던 250명을 모두 심판하셨습니다. 이 250명은 모두 백성들의 지도자들이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민수기 16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말에 “3족(三族)을 멸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나라에 역심(逆心)을 품으면 그 사람의 친가, 처가, 외가를 역적으로 몰아 처벌한다는 뜻입니다. ‘고라’의 자식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놀랍게도 성경에는 “그러나, 고라의 자손들은 죽지 않았습니다 (However, the sons of Korah did not die that day, 민수기 26:11)”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 죽지 않고 살아남은 ‘고라의 자손들’은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살아남은 ‘고라의 자손들’ 중에 시편 42편과 같은 훌륭한 시편을 쓴 사람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시편 42편의 주제는 “하나님께서 나의 힘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시편에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 내가 주를 사랑합니다 (시편 18:1)!”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 속히 나를 도우소서 (시편 22:19)!” 이렇게 하나님을 찾는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어떻습니까? “아, 정말 하나님을 이렇게 알아야 하는데, 하나님을 이렇게 찾아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들이 믿은 하나님이나, 오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나 동일한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절박하게 하나님을 찾았는데, 오늘 우리는 그렇지 않을까요? 우리에게는 하나님 말고도 믿는 것들이 너무 많아서 그렇습니다. 우리 지식을 믿고, 우리 지위를 믿고, 우리 가진 것을 믿고, 우리 힘을 믿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찾는 마음이 절박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 같은 사람도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하나님 외에 믿는 것이 많았습니다. 그의 출신 배경이 다른 사람보다 좋았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많이 배웠습니다. 히브리어, 아람어, 그리스어, 로마 말까지 외국어를 자유롭게 구사했습니다. 그를 가르친 스승은 이스라엘에서 알아주는 덕망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하루 아침에 이렇게 선언합니다.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나는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모든 것이 쓰레기처럼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을 이제 압니다. 이로써 나는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습니다 (Yes, everything else is worthless when compared with the infinite value of knowing Christ Jesus my Lord. For his sake I have discarded everything else, counting it all as garbage, so that I could gain Christ).” (빌립보서 3:8) 여러분, 이 말씀을 잘 보세요. 기독교의 진리는 버림으로써 더 가치 있는 것을 얻는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버림으로써 부활하셨고, 갈릴리의 어부들은 배와 그물을 버림으로써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고, 사도 바울은 그가 소중하게 여기던 것을 버림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확실한 것은, 우리도 우리가 믿는 것을 내려 놓기 전에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시편 42편을 쓴 ‘고라의 자손’이 누군지 더 이상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그는 갈급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1-2절) 그가 이렇게 하나님을 찾았던 것은 지금 그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도 역시 이렇게 절박하게 하나님을 찾는 믿음을 가질 때까지 자신의 소중한 것을 내려 놓는 결단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 시인은 지금 큰 고난을 겪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Why am I discouraged? Why is my heart so sad?)?” (6, 11절)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많이 자라면 어떤 환경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끄덕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마태복음 26:38)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심지어 예수님도 불안하고 괴로울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믿음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믿음이 있는 사람은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로 갑니다. 하지만, 믿음이 없는 사람은 그 불안한 마음을 계속 자기 속에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강조하는 이유는 지금 여러분에게 염려가 있고, 걱정이 있고, 미래에 대하여 불안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연약한 존재입니다. 연약한 존재인 인간이 걱정하고 염려하고 불안해하는 것 하나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여러분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가느냐, 가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These things dominate the thoughts of unbelievers, but your heavenly Father already knows all your needs).” (마태복음 6:30-32) 나중에 제자 베드로가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베드로전서 5:7)” 이렇게 성도들에게 권면한 것은 그 때 산 위에서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배운 것입니다. 맞습니까?

여러분, 지금 이 시인이 말하고 있는 것을 보십시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나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리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나는 여전히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I will put my hope in God! I will praise him again).” (5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염려와 근심과 걱정과 불안, 이런 것들이 불신자들의 마음을 지배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 시인의 마음 속에도 불안이 있습니다. 낙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이 시인의 마음을 지배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가 이런 상황에서도 그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인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지, 염려와 걱정과 불안이 몰려올 때 어떻게 이겨야 하는지 오늘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 나를 휩쓸었나이다.” (7절) 이 말씀이 New Living Translation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I hear the tumult of the raging seas as your waves and surging tides sweep over me.” 직역하면, “나는 성난 바다가 요동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주님의 파도입니다. 그리고 나를 휩쓸어가는 물결이 몰려오는 소리를 듣습니다. 주님의 물결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고 깜짝 놀랐습니다. 금방이라도 나를 뒤덮고, 금방이라도 나를 휩쓸어갈 파도와 물결이 이제는 주님이 보내신 파도와 물결이 되었습니다. 참 대단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게 되었습니까? 이 모든 일들은 그가 하나님께 소망을 둠으로써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더니, 상황이 나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상황을 지배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Here on earth you will have many trials and sorrows. But take heart, because I have overcome the world).” (요한복음 16:33) 크리스천이 환난을 이길 수 있는 비결은 내가 세상을 이겼다고 말씀하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에게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 시인이 자기 마음 속에 있는 낙심과 불안을 이겨냈습니까? “나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리라. 내가 여전히 하나님을 찬양하리라 (I will put my hope in God. I will praise him again, 5절)”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 말씀에서부터 세상을 이기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여러분, “Here I stand, May God help me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도와주십시오)” 이 말을 한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 (Martin Luther, 1483-1546, 독일)입니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 (Martin Luther King, Jr. 1929-1968, 미국)도 그렇습니다만, 마틴 루터는 처음부터 종교개혁을 일으키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상황을 통해서 그가 필요한 일꾼들을 불러내십니다. 루터 시대에도 오늘날처럼 대학가에 토론 문화가 있었습니다. 무슨 문제가 있을 때는 학교 게시판에 대자보를 붙였습니다. 마틴 루터도 자기가 교수로 있던 ‘비텐베르크’ 대학의 채플 게시판에 대자보를 붙였습니다. 그 대자보 속에 그 당시 카톨릭 교회의 오류를 지적하는 95개 조항이 들어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조용히 묻힐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교황이 문제를 삼았기 때문에 오히려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1521년 자기 소신을 굽히지 않던 루터는 ‘보름스 의회 (Reichstag zu Worms)’에 소환을 받습니다. 루터에게는 생명을 보장할 수 없는 소환이었습니다. 그 때 루터는 황제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Unless I am convinced by the testimony of the Scriptures or by clear reason (for I do not trust either in the pope or in councils alone, since it is well known that they have often erred and contradicted themselves), I am bound by the Scriptures I have quoted and my conscience is captive to the Word of God. I cannot and will not recant anything, since it is neither safe nor right to go against conscience. Here I stand, I can do no other. May God help me. Amen (성서의 증거와 명백한 이성에 비추어 나의 유죄가 증명되지 않는 이상 나는 교황들과 공의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겠습니다. 사실 이 둘은 오류를 범하여 왔고 또 서로 엇갈린 주장을 펴왔습니다.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철회할 수 없고 또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에 반해서 행동하는 것은 안전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현명한 일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도와주소서. 아멘).”

루터는 그의 절대절명의 순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습니다. 만약 그 때 루터가 자기가 처한 상황을 보았더라면 그는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자기 주장을 철회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랬더라면 종교개혁은 물 건너갔을 것이고,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많이 후퇴했을 것입니다. 시편 42편을 쓴 시인도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습니다. “내 마음이 불안하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그 때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으로 기도하러 가시는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시면서 “내 원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그 순간부터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사납게 요동치는 파도 소리는 주님이 보내신 파도 소리가 되고, 금방이라도 나를 삼킬 것 같은 물결도 주님이 보내신 물결이 됩니다.

마음 속에 있는 낙심과 불안을 토로했던 이 시인은 이렇게 시편을 끝냅니다. “But each day the LORD pours his unfailing love upon me, and through each night I sing his songs, praying to God who gives me life (하지만, 낮에는 주님이 그의 변함없는 사랑을 나에게 부어 주시고, 밤에는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8절) 그렇게 불안한 마음을 토로하던 이 시인이 낮에도 두렵지 않고 밤에도 두렵지 않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소망을 둔 사람은 세상을 이깁니다.


8/16/2020 | In Times Of Trouble 19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 The Place Where We Now Stand

로마서 5:1-9

오늘은 ‘In Times Of Trouble 19’ 시간으로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 (The Place Where We Now Stand)’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또 믿음으로 우리는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은혜의 자리에 들어와 있습니다 (Because of our faith, Christ has brought us into this place of undeserved privilege where we now stand)”라고 말합니다. ‘this place of undeserved privilege (감당할 수 없는 특별한 자리)’라는 말씀이 눈에 들어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열쇠가 되는 말씀은 ‘because of our faith (우리의 믿음으로 말미암아)’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특별한 자리에 서 있는 것은 우리의 믿음 때문에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제일 중요한 단어 하나를 고른다면 ‘믿음 (faith)’라는 말이 아닐까요? 복음서에 ‘믿음’에 대한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중풍병으로 고통받는 자기 종의 병을 고쳐 달라는 백부장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라. 네가 믿은 대로 네게 이루어질 것이다 (Go back home. Because you believed, it has happened).” (마태복음 8:13) 12년 동안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자에게는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안심하여라,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마태복음 9:22) 왜 기도해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느냐고 묻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믿음이 적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에게 진정으로 말한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으면, 이 산을 향하여 ‘여기서 저기로 움직여라’ 말할 것이다. 그러면 산이 움직일 것이다. 너희가 못할 일이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마태복음 17:20) 이 말씀 카드들을 한번 보십시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하시는 일들을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alive (살아 있고)’ and ‘active (활동적인)’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omnipotent God), 전지하신 하나님 (omniscient God), 우리가 어느 곳에 있든지 함께 계시는 하나님 (omnipresent God), 그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는 삶을 어찌 평범한 삶이라고 하겠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범하는 오류는 ‘믿음’이라는 말을 교리적으로 (doctrinally) 이해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말을 들어도 별로 감동이 없습니다. 척 프리만 (Rev. Chuck Freeman)이라는 분이 ‘HUFFPOST’에 이런 글을 올렸습니다. “‘Noun faith’ is a form of mind control. It produces consumers. However, ‘Verb faith’ paints a starkly contrasting portrait. ‘Verb faith’ produces active, engaged citizens who express a here-and-now earthly heaven (‘명사로서의 믿음’은 일종의 마인드 컨트롤과 같아서 아무 것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하지만 ‘동사로서의 믿음’은 이와 대조적으로 활동적인 시민을 만들어 낸다. 이들은 지금 여기에서의 천국이 어떤 것인지 자신들의 삶으로 표현한다).”

하나님을 올바로 믿는 사람은 가만히 있지 않고, 뭔가를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살아 있고, 활동적인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비유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consumers (소비자)’가 아니라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과 의무를 잘 감당하는 건전한 ‘시민 (citizens)’으로 살아가는 사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렇게 살아간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줍니다. Chuck Freeman 목사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을 ‘those who express a here-and-now earthly heaven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표현하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지금 우리가 앉아 있는 자리를 보면, 지금 우리는 엄청난 특권의 자리에 앉아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바울은 ‘지금 우리가 앉아 있는 자리는 감당할 수 없는 특별한 자리 (this place of undeserved privilege where we now stand)’라고 했습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이 말씀을 적용해 보십시오. 지금 2020년 8월 16일 현장예배에, 혹은 온라인 예배에 참석한 여러분들이 앉아 있는 자리는 어떤 자리입니까? 몸은 교회에 나와 있지만 마음 속에는 온갖 걱정과 근심을 가지고 앉아 있는 자리입니까? 집에서 컴퓨터를 켜 놓고 영상으로 예배를 보고 있지만 마음은 딴 곳에 가 있는 자리에 앉아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지금 우리는 아주 특별한 ‘감당할 수 없는 특별한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믿고 받아들였더니, 그 은혜로 이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우리의 믿음 때문에 (Because of our faith)’ 이 자리에 앉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지금 성경이 말하고 있는 이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해서, 그 일의 대가로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은혜로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요즘에 ‘어마무시하다’는 말을 합니다. ‘어마어마하고 무시무시하다’는 신조어(新造語)입니다. 사전에 없는 말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런 자리에 앉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면 정말 ‘어마무시한’ 일입니다. 

바울은 오늘 말씀에서 이 일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이것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But God showed his great love for us by sending Christ to die for us while we were still sinners).” (8절) 이 말씀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어떤 자리에 앉아 있었고, 어떤 상태에 있었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죄인의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죄인’이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마음에 별 느낌이 없습니다. ‘죄인’이라는 말을 교리적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어도 그렇고, 교회에 가면 “우리는 죄인입니다” 이런 말을 하도 많이 들어서 그렇게 이해는 하고 있지만 내가 왜 ‘죄인’인지 가슴으로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죄인’의 삶이 얼마나 비참하고,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들어 보시겠습니까? 나라와 나라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고, 개인과 개인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는 이유는 서로 추구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서로 추구하는 ‘가치들 (values)’과 ‘목표 (goals)’가 달라서 서로 부딪게 되니까 전쟁이 일어나고 싸움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을 때 (while we were still his enemies, 로마서 5:10)’라고 합니다. 전에 우리는 하나님의 적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생각하는 것이 다르고, 원하는 것이 다르고, 추구하는 것이 달랐습니다. 우리가 전에는 ‘전능하신 하나님’과 원수였다고요. 그 때 우리는 몰랐지만, 우리는 ‘전능자’와 원수가 되어 ‘전능자’와 전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누가 ‘전능자’와 싸워 이길 수 있습니까? 에베소서 2:12 말씀이 그 때 우리들의 삶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 살았던 지난 날들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이스라엘 자손도 아니며 그의 백성에게 약속하신 복의 기업도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모르는 자들이지 않았습니까 (In those days you were living apart from Christ. You were excluded from citizenship among the people of Israel, and you did not know the covenant promises God had made to them. You lived in this world without God and without hope)?”

이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시고 받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우리를 위한 ‘대속물 (ransom)’로 지불하시고 우리를 아들로 받아 주셨습니다. 아무나 다 아들로 받아 주신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그를 믿는 사람은 (요한복음 3:16)’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통해 하신 일들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 주셨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팀 (God’s team)’으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미국 프로 야구 좋아하는 분들 많이 계시지요? 한국의 류현진이라는 투수가 캐나다 토론토의 ‘블루 제이스 (Tronto Blue Jays)’에서 선발 투수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작년 시즌에 LA 다저스 (Dodgers)에서 성적이 아주 좋았습니다. 지난 시즌을 끝으로 LA와 계약이 끝나게 되어 어느 팀으로 갈 것인지 말이 많았습니다. 류현진이 좋은 투수이긴 하지만 나이도 많고 부상도 많아서 선뜻 나서는 팀이 없는 상황에서 투수 진을 보강해야 할 필요성이 절박했던 캐나다의 ‘블루 제이스’와 4년간 8,000만 달러 (한화로 930억원)를 받기로 하고 계약했습니다. 연봉 순위가 전체 메이저 리그 선수들 중에서 41위라고 합니다. ‘블루 제이스’에서는 엄청난 투수가 오게 되었다고, 류현진에 대한 어마어마한 마켓팅을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개막전에서 류현진이 그리 좋은 피칭을 보여주지 못하고 그만 패전 투수가 되고 말았습니다. 스피드가 원하는 만큼 나오지 않아 안타를 많이 허용했습니다. 류현진으로서는 뭔가 자기의 진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부담이 많아서인지 두 번째 게임에 나가서도 패전 투수가 되었습니다. 다행하게도 세 번째 게임에서는 이기고, 네 번째 ‘마이애미’와의 게임에서 승리 투수는 못되었지만 한 점 밖에 내 주지 않을 정도로 잘 던졌습니다. 

제가 류현진이라는 아구선수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류현진은 자기를 데려간 ‘블루 제이스’에게 자기가 그만한 가치가 있는 투수라는 것을 증명해야 합니다. 이런 생각을 한번 해 보십시오. 하나님과 적으로 지내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팀’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도 우리의 존재 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 저를 뽑아 주신 것 감사합니다. 저를 잘 뽑으셨다는 것을 증명해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말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맞습니까? 그렇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죄송하지만 아직 복음의 핵심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분들입니다. 

보세요. 여러분,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슨 일을 해서 우리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으므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함께하는 평강을 누리고 있습니다.” (1절) 이 말씀은 우리가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팀’ 안에서 ‘as undeserved people (자격이 없는 사람들)’로 남아 있어야 합니다. 자기 존재 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류현진의 입장과는 다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계속해 나가면서, 우리가 서 있는 이 은혜의 자리에 서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올바른 믿음 생활입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감당할 수 없는 이 특별한 자리 (this place of undeserved privilege where we now stand)’라는 말씀을 다시 한번 잘 보십시오. 여기 ‘stand’라는 말은 단순히 ‘서다’라는 뜻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자리가 ‘확실하다’ ‘견고하다 (firm)’ ‘굳건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는 외부의 어떤 상황이나 압박이나 문제 때문에 흔들리는 자리가 아닙니다. 2-4절 말씀이 그 말씀 아닙니까?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하며 즐거워합니다. 우리는 환난을 당하더라도 즐거워합니다. 그것은 환난이 인내를 낳고, 또 인내는 연단된 인품을 낳고, 연단된 인품은 소망을 낳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맞습니까?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는 우리가 겪고 있는 상황 때문에 흔들리는 그런 자리가 아닙니다. 상황만 보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어느 자리에 서 있는지 우리의 좌표(座標)를 찾아보고 확인해야 할 때입니다.